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63)
블랙 라벨-62화(63/299)
블랙 라벨 62화
63. 떠나기 전에
연남동 외곽에 자리한 한적한 카페 안, 재승과 강형록 교수가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둔 채 앉아 있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재승의 ‘유학’에 관한 대화를 나누기 위해, 모처럼 만남을 갖게 된 것이다.
“그래, 준비는 잘되어가나?”
강형록 교수의 물음에, 재승이 한차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답했다.
“일단 PBT 토플은 합격점을 얻어냈습니다.”
“오, 가장 큰 문제가 해결됐군! 그간 정말 수고 많았네.”
“감사합니다. 그래도 아직 갈 길이 먼걸요.”
대부분의 해외 명문 스쿨들이 입학 조건으로 내걸고 있는 PBT토플 점수 제한은 550점이다. 만점이 650점이라는 사실을 감안해 보면, 절대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없는 시간을 쪼개가며, 또 밤잠을 줄여가며 공부한 덕에 얻어낼 수 있던 쾌거였다.
“그래도 이제 ‘대입검정고시’ 문제만 해결하고 나면, 입시를 위한 기본적인 자격 요건은 다 갖추게 되는 것 아닌가?”
“네, 그렇죠.”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으니, 너무 걱정은 말게.”
포트폴리오 제작, 지원서 및 에세이 작성, 구체적인 면접 준비에 이르기까지….
입시를 위해 준비해야 할 일이 잔뜩 쌓여 있지만, 지원 자격부터 갖추는 게 우선이다.
덕분에, 근래에는 대입검정고시 공부에만 주력하고 있는 중이었고 말이다.
이내 강형록 교수가 제 안경알을 슥슥 닦아대며, 재차 물음을 건넸다.
“어디 보자… 시험은 언제라고 했지?”
“다음 주 월요일입니다.”
“며칠 안 남았군. 자신은 있고?”
“그럼요. 열심히 준비했으니까요.”
짤막하기 그지없는 대답이었으나, 또렷한 확신이 담겨 있는 말이었다.
그런 재승의 태도가 꽤나 만족스러웠던 것일까?
한차례 “좋군….” 하고 나직이 말해 보인 강형록 교수가, 그제야 본론을 꺼내 들었다.
“그나저나 결국 ‘파슨스 디자인 스쿨’(Parsons The New School For Design)에 지원하기로 결정했다고 들었네. 이유가 궁금하군.”
“이유 말씀이십니까?”
“자네 정도 수준이면, 사실상 해외 명문 패션 스쿨들 중 원하는 곳을 골라서 갈 수 있는 상황이니까 말이야.”
꽤 낯간지러운 이야기라지만, 엄연한 사실이기도 했다.
재승과 경쟁하게 될 입시생들 중, 프로페셔널의 영역에 근접해 있는 입학생들이라면 수두룩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제 현역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는 입시생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설령 그런 입시생이 있다고 한들, 재승과 비견되는 커리어를 갖추고 있을 리는 만무했다.
재승이 제 손으로 직접 일궈낸 ‘월 플라워’라는 이름의 브랜드와, 그 브랜드의 가치를 현실적으로 짚어주는 매출, 또 빛이 난다 해도 과언이 아닐 화려한 커리어까지.
강형록 교수가 걱정하고 있는 문제는 딱 한 가지였다.
재승이 행여나 ‘파슨스 디자인 스쿨’이라는 이름이 풍기는 일련의 위압감 때문에, 별다른 이유 없이 덜컥 진학을 결정해 버린 것은 아닐까 우려하고 있던 것이다.
그때.
“딱히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닙니다만… 파슨스는 타 명문 디자인 스쿨들과 달리, 실용적인 디자인을 강조하는 곳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렇지. 꽤 잘 알고 있군.”
“그 점에 끌렸습니다. 그게 전부예요.”
‘실용적인 디자인’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지극히 간단하고 단순하다.
잘 팔리는 디자인.
파슨스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가르치는 내용이었다.
교수진의 교육관을 놓고 보더라도, 또 파슨스 디자인 스쿨이 그간 배출해 낸 디자이너들을 놓고 보더라도 그랬다.
재승이 ‘실용적인 디자인’이란 키워드에 강렬한 끌림을 느낀 이유는 자못 간단했다.
지난 생에서 재승이 카피해야 했던 의류들은, 모두 잘 팔리는 디자인이랄 수 있었다.
애초에 수요가 적은 비인기 상품은, 이미테이션으로 생산될 일이 없으니 말이다.
그렇게 수천 벌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프리미엄 의류를 카피하며, 자연스레 체득하게 된 감각이 두 가지 있다.
고급스러운 감성과, 대중성.
자신의 옷은 일정 수준 이상의 고급스러움과, 대중성을 지니고 있다.
딱히 의도한 바가 아닐뿐더러, 의도한다고 해서 마음대로 얻어낼 수 있는 결과도 아니었다.
음지에서 인고의 시간을 견뎌냈기에 얻어낼 수 있던 감각이다.
자전거 타기와 마찬가지로, 잊으려야 절대 잊을 수 없는 감각.
그중에서도 대중성.
재승은 대중성을, 자신이 지니고 있는 장점들 중 단연 최고의 장점이라 치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수준으로는 안 된다.
‘월드 클래스’(World Class)라 인정받는 디자이너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하려면, 월 플라워를 세계 최고의 브랜드로 만들려면, 디자이너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영광과 영예를 누리려면, 소위 말하는 정점에 서려면.
아직 한없이 부족할 뿐이다.
강점은 더욱 날카롭고 예리하게 갈고닦을 시간이, 또 단점을 최소화시킬 시간이 필요하다.
파슨스 진학은, 자신의 강점을 최대한 부각시키기 위한 계산적인 선택이었던 것이다.
“그래. 확고한 뜻이 있는 선택인 것 같으니, 더는 간섭지 않겠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는….”
한차례 말끝을 흐려 보인 강형록 교수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다시금 말을 이었다.
“어쨌든, 정말 정신없겠어. 입시 관련 준비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경영권 인수·인계 문제에, 사무실 일도 한창 바쁠 테니 말이야.”
강형록 교수의 말대로, 이런저런 일들 때문에 한창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는 와중이었다. 해야 할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하루는 짧고, 몸은 한 개뿐이니 말이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일거리가 없는 것보다야, 훨씬 나으니까요.”
“하하, 그래? 다행이로군.”
정적이 흐르기를 잠시.
“그래서 요즘은 좀 어떤가? 달라진 게 있나?”
재승이 한차례 “네?” 하고 되묻자, 강형록 교수가 마냥 인자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질문이 너무 난해했나? 디자이너로서의 명성을 얻고 나니까, 달라진 게 있냐는 말이었네.”
“아….”
달라진 것?
달라진 것이라면, 손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쇼를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은 뒤, 분에 넘치는 관심을 받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우선 가장 마음에 드는 변화는, 이제 포털사이트에 ‘이재승’이라는 이름 석 자를 검색하면 자신의 사진이 가장 먼저 나오게 됐다는 것이리라.
매출 역시 큰 변화를 겪었다. 요즘은 통장잔액을 확인할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기 일쑤다. 늘 예상했던 액수보다 훨씬 큰 금액이 찍혀 있는 탓이었다.
그러고 보면 정말 많은 게 달라졌는데, 참 모순되게도 많은 게 그대로다.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하하, 그래?”
“네. 아직은요.”
길거리를 나돌아 다닌다고 해서, 알아보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다. 여전히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하고, 수많은 이들 틈에 섞여 살고 있다.
일상 역시 그대로다.
여전히 대부분의 시간을 사무실에서 보낸다. 하루 온종일 쏟아지는 업무를 처리하고, 남는 시간에는 새로운 옷을 디자인하는데 시간을 쏟는다.
늘 치열하게 고민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중이다.
덕분에 아티스트에게 있어, ‘창작의 고뇌’란 지병과도 같은 존재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건 차도가 없는 병이다.
내가 얼마나 많은 돈을 벌게 되건, 얼마나 큰 유명세를 얻게 되건, 평생을 앓고 살아야 하는 지병인 것이다.
정적이 흐르기를 잠시.
강형록 교수가 창 너머를 바라보며, 나긋한 투로 말했다.
“오늘 유독 날이 좋군.”
어느덧 오곡백과가 여물어 간다는, 8월에 접어들었다.
가을의 시작이라는 ‘입추’(立秋)를 한참 넘겼음에도, 날은 여전히 후덥지근할 따름이었다.
낮이면 뜨거운 햇볕을 잔뜩 머금은 아스팔트 위로 아지랑이가 꽃처럼 피었으며, 몇 걸음만 옮겨도 온몸이 끈적거리기 일쑤였으니 말이다.
그나마 이따금 내리는 늦여름 장맛비나, 서늘하기 그지없는 밤바람이 늦여름의 길목을 지나쳐 가고 있단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었을 뿐.
여름의 막바지에 다다른 지금. ‘끝’을 목전에 두게 된 것은, 단연 여름만이 아닌 듯했다.
재승의 한국 생활 역시, 서서히 막바지를 향해 내달려 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 * *
며칠이란 시간이 더 흘러, 어느덧 재승의 대입검정고시 시험 당일 아침이 밝았다.
아직 마냥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집 안은 마냥 시끌벅적하기 그지없었다.
딱히 재승의 시험 탓은 아니었고, 다들 저마다의 하루를 시작할 준비를 하는 데 여념이 없던 것이다.
“다녀오겠습니다-!”
허겁지겁 아침 식사를 해결한 동생 승희가 정신없이 집을 나서다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는, “오빠, 시험 잘 봐! 파이팅-!” 하고 응원의 말을 건네주었다.
“그래. 고맙다. 조심해서 다녀와.”
전생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철천지원수처럼 싸워댔었는데, 지금은 딱히 싸울 여지가 없다.
승희가 아무리 대들고, 약을 올려봐야, 마냥 귀여워 보이기만 할 따름이었던 탓이다.
재승이 다시금 가방을 챙기기 시작하려던 찰나.
막 출근 준비를 마치신 아버지께서, 나직이 물으셨다.
“오늘 시험이지?”
“네.”
“흠, 시험장은 어디냐?”
“은평구예요.”
“태워다주랴?”
“괜찮아요, 금방이에요.”
고개를 한 번 주억거려 보인 이강수가, 이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열심히 했으니, 좋은 결과 있을 거다.” 하고 덧붙여 말씀해 주셨다.
그마저도 낯 뜨거우셨던 것인지, 괜히 헛기침을 몇 번 해 보이시고는 곧장 현관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셨다.
그때.
“저, 아버지….”
“그래.”
“주중에 하루만 시간 내주시면 안 될까요?”
이내 아버지께서 미간을 살짝 좁힌 채, “시간은 왜?” 하고 되물으셨다. 꼭 바꿔야 할 미래가 있다.
어떻게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바꿔야 할 미래가.
“다름 아니라, 이참에 어머니랑 건강검진이라도 받아보시는 게 어떨까 해서요.”
“뭐? 건강검진?”
“네. 이제 두 분도 슬슬 건강 신경 쓰셔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요.”
당뇨병.
아직도, 그 이름만 들으면 치가 절로 떨리는 듯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와, 정정하시던 아버지의 건강을 앗아갔던 병이다.
또, 재승 본인의 시력을 서서히 앗아갔던 병이기도 했다.
현재가 달라지면, 미래도 달라진다. 지극히 단순한 법칙이라지만, 어째서인지 두 번째 삶이 주어지기 전까지는 좀처럼 깨닫지 못하던 사실이기도 했다.
미래를 바꿀 것이다.
이는 한국 생활을 마무리 짓기에 앞서, 꼭 해결하고자 했던 문제 중 하나였다.
이내 아버지께서 헛웃음을 흘려 보이시고는, 퉁명스러운 투로 답하셨다.
“뭐? 됐다, 이 녀석아. 헛돈 쓰는 거야, 헛돈. 이렇게 팔팔한데, 건강검진은 무슨….”
“그래도 한 번만 받아보시면 안 될까요?”
이강수가 재차 무어라 말을 건네려던 찰나, 어머니 김은형이 미간을 팍 좁힌 채 말했다.
“여보! 그냥 잠깐 시간 내서 다녀오면 되잖아요.”
“아니, 그게 한두 푼 드는 것도 아니고….”
“누가 당신보고 돈 내래요? 재승이 성의를 봐서라도 그냥 다녀와요. 어려운 것도 아닌데, 안 그래요?”
“것 참, 귀찮게시리….”
“가실 거죠?”
“그래, 간다! 가!”
두 분께서 투덕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던 재승이, 이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직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지만, 괜히 안심되었던 탓이었다.
비록 지금의 시도로 미래가 바뀌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계속해서 시도할 것이다.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전생을 답습(踏襲)하지 않을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삶이란 게 참으로 기구하기 짝이 없다.
누군가의 삶이 끝나는 순간, 누군가는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을 받으며 세상에 발을 들인다.
아버지의 운명이 바뀌었을지도 모르는, 지금 이 순간 역시 마찬가지.
TV 속 젊은 앵커의 가슴팍 아래로, 돌연 쏟아지기 시작한 늦장마 소식을 알리는 자막이 지나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지이이잉-.
주머니 속에 넣어두었던 스마트폰이, 한차례 진동했다. 이내 재승이 곧장 제 휴대폰을 꺼내 들어서는, 그 내용을 확인해 보기 시작했다.
“어…?”
– 문화를 창조하는 방송국, ‘Style TV’의 강형태 PD입니다. 이른 시간인지라 문자로 연락 올리는 점,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다름 아니라, 새로이 편성을 준비 중인 프로그램에 ‘월 플라워’의 이재승 디자이너를 초빙하고자….
놀랍게도, 방송국으로부터 도착한 문자였다. 그것도, 심지어 섭외 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