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64)
블랙 라벨-63화(64/299)
블랙 라벨 63화
64. 떠나기 전에 (2)
2011년 8월 대입검정고시 시험장으로 채택된, 은평구의 모 중학교 정문 앞.
방금 막 시험을 마친 응시자들이, 썰물처럼 교문 밖으로 빠져나오고 있었다.
그런 응시자들의 연령층은 말 그대로 각양각색이랄 수 있었다. 재승 또래의 학생들부터 시작하여, 주부, 스님, 군인에 이르기까지….
이윽고.
“오래 기다렸지?”
막 정문 바깥으로 빠져나온 재승이, 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기다리고 있던 영국에게 건넨 말이었다.
“아냐. 나도 방금 막 왔어.”
“어쨌든, 기다려 줘서 고맙다.”
대입검정고시 시험 소식을 전해 들은 직원들이 시험장 앞에서 플랜카드를 들고 서 있겠다는 둥, 난리를 피워댔지만 극구 만류했다.
괜히 쓸쓸한 마음 반, 혹시나 싶은 마음 반으로, 영국에게 오늘이 시험일이라는 사실을 밝히자 한달음에 달려 와줬고 말이다.
“우리 사이에 이거 가지고 고맙긴, 뭘… 그리고 이럴 때 아니면 또 언제 얼굴 보겠냐?”
나직이 답해 보인 영국이, “네가 좀 바빠야 말이지.” 하고 덧붙여 말했다.
확실히 근래에는 만남이 뜸할 수밖에 없었다.
F/W쇼 이후로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니 말이다.
심지어는 쇼 당일조차도, 찾아온 이들이 워낙 많았던 터라 영국과는 불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는 게 전부였고.
시험이 끝난 날이기도 한 만큼, 또 모처럼의 만남인 만큼, 오늘은 오래간만에 느긋한 시간을 보낼 요량이었다.
이내 영국이 어깨 위에 팔을 둘러보이며, 나긋한 투로 재차 물음을 건네 왔다.
“그나저나 시험은 좀 어때? 잘 본 것 같아?”
“결과는 3주 뒤에 발표되는데, 가채점해 볼 수 있게끔 정답을 알려주더라고.”
“그래서? 가채점은 해봤어?”
“당연히 해봤지. 너 내 점수 들으면 깜짝 놀랄걸?”
“왜? 몇 점인데 그래?”
곧장 답하지 않고 뜸을 들여대기를 잠시.
“무려 평균 94점이시다.”
한껏 의기양양한 투로 답해 보인 재승이 제 손으로 ‘브이’(V) 모양을 만들어 보이자, 영국이 활짝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되물었다.
“와, 진짜? 그럼 합격이네?!”
“그렇지.”
“짜식, 축하한다!”
대입검정고시의 합격 커트라인(Cutline)은 평균 60점이다.
일곱 과목의 총점이 420점만 넘어도 합격인데, 합격 기준점수를 한참 넘긴 총점 662점을 기록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의심할 여지조차 없는 합격인 셈.
이내 영국이 제 가슴을 거세게 두드려 보이고는, 사뭇 경쾌한 투로 말했다.
“일단 밥부터 좀 먹으러 가자. 오늘은 형님이 쏜다!”
“진짜? 웬일로?”
평소 “당분간은 많이 버는 네가 사라. 나중에 성공하면 배로 갚으마”라는 말을 달고 사는 영국이, 먼저 나서 밥을 사겠다고 하니 의문이 들 수밖에 없던 것이다.
“그냥, 뭐 기쁜 날이기도 하고….”
“그래도 기다려 줬는데, 오늘은 내가 사는 게 맞지.”
“재승아.”
“응?”
“오늘은 그냥 내가 사면 안 될까?”
그렇게 말해 보이는 영국의 모습이, 평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평소와 달리, 묘한 이질감이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이내 영국이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덧붙여 말했다.
“오늘 아니면, 내가 밥 한 끼 사줄 수 있는 날이 또 언제 올지도 모르잖아. 그러니까 오늘은 내가 살게.”
유학길에 오르게 되면, 지금보다 훨씬 더 보기 힘들어질 게 분명했다.
지금이야 어떻게든 시간을 내기만 하면 볼 수 있다지만, 그때부터는 그마저도 힘들어질 테니까.
더군다나 지금보다 바빠지면 바빠졌지, 한가해지지는 않을게 분명했다.
이따금씩 귀국을 한다고 하더라도, 이런저런 업무를 처리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게 될 게 눈에 훤했고 말이다.
곧 찾아올 이별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자신만의 이야기가 아닌 듯했다.
영국 역시, 곧 찾아올 이별에 대한 직감을 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래, 오늘만 날은 아니라지만. 또 오늘이 절대 마지막은 아니라지만….
그래도 오늘 하루는 네가 사라.
* * *
결국 두 사람이 향한 곳은, 시험장으로 채택된 학교 인근에 자리한 다소 허름한 외관의 중식당이었다.
상 위로, 이런저런 음식들이 한 상 푸짐하게 차려졌다.
노릇노릇하게 익은 탕수육 위로 끼얹어진, 새콤달콤한 향이 물씬 풍기는 끈적끈적한 소스. 마지막으로 허기를 자극하는 짜장면까지.
그야말로 진수성찬이랄 수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음식은 먹는 둥 마는 둥하며, 대화를 나누는 데 주력하고 있을 뿐이었다.
“뭐? 방송 출연 제의?”
오늘 아침에 받았던 문자메시지에 대해 말해주자, 영국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떠 보이며 되물었다.
“응. 그런 셈인데….”
“와, 씨… 개쩐다, 진짜.”
한차례 투박하기 그지없는 감탄사를 내뱉어 보인 영국이, 이내 “재승이 너, 이제 진짜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 같다….” 하고 덧붙여 말했다.
괜히 멋쩍은 마음에 고개를 내저어 보인 재승이, 조곤조곤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런 거 아냐. 대단한 프로그램도 아니고, 그냥 케이블 방송사의 오디션 프로그램이야. 패널로 섭외된 것도 아니고, 그냥 참가자로 출연할 생각 없냐고 하더라고.”
“오디션 프로그램?”
“응. 일종의 디자이너 오디션 프로그램인데, 너 혹시 미국의 ‘오디션 런웨이(Audition Runway)’라는 프로그램 알아?”
오디션 런웨이는, 미국의 케이블 방송국 ‘나이스’(Nice) 사에서 방영했던 리얼리티 쇼다.
빅토리아 스크릿의 간판 모델이랄 수 있는, 독일 태생의 슈퍼 모델인 ‘하이디 클롬(Heidi Klrom)’이 호스트를 맡았고, 그 밖의 심사 위원진 역시 가히 대단했었다.
“글쎄? 몇 번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영국이 기억을 복기하듯, 위쪽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던 찰나. 재승이 재차 말을 덧붙였다.
“어쨌든, 거절했어.”
“뭐? 대체 왜…?”
“흠, 이유야 많은데….”
잠시 말끝을 흐려 보였던 재승이, 이내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출연 제의를 거절한 이유?
정말 손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었다.
우선 자신이 알고 있는 미래대로 흘러간다면 한국판 ‘오디션 런웨이’는, 그야말로 쪽박 프로그램으로 전락하고 만다.
단연 시청률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애초에 오디션 프로그램이라는 프로그램의 포맷(Format)이 변하지 않는 한, 절대 출연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출연을 통해 누릴 수 있게 될 수혜 때문에, ‘매스미디어(Mass Media)’의 땔감으로 쓰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니 말이다.
제작진이 강제로 덧씌운 캐릭터성만 가지고 대중들의 평가를 받게 될 것이고, 스스로도 잘 모르는 ‘나’라는 사람에 대해 “이렇더라, 저렇더라.” 하고 떠드는 이들이 늘어날 것이다.
모든 역행과 고난의 끝에서, 간신히 얻게 된 두 번째 삶이 아니던가?
1초, 1초가 지극히 각별할 뿐이다.
매 순간 전생에서는 좀처럼 느낄 수 없던 감정을 느낀다.
보지 못했던 것을 보며, 깨닫지 못했던 것을 깨달으며 살아가고 있다.
억만금을 줘도 살 수 없다는 젊음을, 청춘을 다시 누리게 된 것이다.
아무리 그 일부분일 뿐이라 하더라도, 땔감 삼아 써버리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그 시간에 가족들과 조금이라도 더 많은 대화를 나눌 것이다.
차라리 영국과 함께 10대 끝에서나 나눌 수 있을 만한 대화를 나눌 것이며, 더 큰 행복을 좇기 위한 고민을 할 것이고, 영감을 충전할 수 있을 만한 행동을 할 것이다.
누군가가 이런 신념과, 결정을 “배부른 소리”라는 말로 폄하한다 해도 마찬가지다.
원래 이런 사람인데 어쩌겠는가?
잠시 상념에 젖어들어 있던 재승이, 이내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입을 뗐다.
“출연하기엔, 시간이 너무 아까운 것 같더라고.”
“시간?”
“응. 유학 가기 전까지, 최대한 즐겁게 지내고 싶어.”
“그래… 너야 뭐, 항상 알아서 잘하니까.”
두 사람 사이로 정적이 흐르기를 잠시.
“그런데, 정확히 언제 출국하는 거야?”
“우선 9월에 원서 접수하고, 미리 미국으로 넘어가 있으려고.”
“뭐? 그럼 이제 한 달밖에 안 남은 거네.”
“그렇지, 뭐.”
거처 문제도 해결해야 했고, 본격적인 유학 생활에 앞서 일련의 적응기를 가지기 위함이었다.
영국이 녀석을 살펴보니, 애써 무덤덤한 척하고 있는 녀석의 얼굴 위로 아쉬움이 잔뜩 묻어나는 듯했다.
이별.
언제 들어도 가슴 한편이 저릿해지는 단어다.
처음 과거로 돌아왔던 때에는 그냥 옛정을 생각해서 살갑게 대해주던 게 전부였는데, 어느새 둘도 없는 각별한 친구가 되어버렸다.
정신연령은 30대에 정박해 있으니, 이 정도면 나이를 초월한 우정이라 하더라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애써 미소를 머금은 채, 덤덤한 투로 말했다.
“야! 내가 뭐, 평생 미국에 있을 것도 아니고… 왜 그렇게 울상을 하고 있어?”
“그냥, 아쉬우니까 그렇지.”
그러게, 사실 나도 조금은 아쉽다.
차마 꺼내지 못할 말을 속으로 곱씹고 있던 그때.
“너는 꼭 잘되라.”
영국이 녀석이 돌연 꺼낸 말에, 재승이 미간을 살짝 좁힌 채 되물었다.
“무슨 말이 그러냐? 너도 잘돼야지.”
“아니, 뭐….”
“그나저나 영국이 너는?”
“응?”
“음악 말이야. 요즘은 어때? 잘돼?”
재승이 재차 말문을 열었다. 영국이 근황에 대한 질문을 멈추지 않았던 터라, 연신 제 이야기만 늘어놓았던 게 마음에 걸렸던 탓에 건넨 질문이었다.
이내 괜히 물 몇 모금을 들이켜 보인 영국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항상 똑같지, 뭐….” 하고 답해 보였다.
“뭐야? 오늘은 너답지 않게.”
“뭐가?”
“아니, 평소 같았으면….”
말을 이어나가려던 재승이, 돌연 “아니다.” 하고 말해 보이고는 뒷말을 삼켜냈다.
오늘의 영국은, 확실히 뭔가 이상했다.
평소였더라면 자신이 질문을 건네기 이전에, 자진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을 것이다.
최근에 만든 곡의 샘플을 들려준다거나, 새롭게 배운 미디(Midi) 프로그램의 활용법에 대해 설명해 주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때.
“저, 재승아.”
“응?”
“나 사실….”
이윽고.
영국의 입에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이 흘러나왔다.
“음악 그만뒀다.”
“뭐?”
“잠깐 쉬는 거라고 해야 하나? 뭐, 어쨌든… 잠깐 쉬고 있어.”
“뭐? 갑자기 왜?”
대답할 말을 찾는 것처럼 잠시 잠자코 서 있던 영국이, 이내 애써 웃음을 지어 보이며 답했다.
“그냥.”
그냥.
해답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 일을 목전에 두었을 때, 저도 모르게 뱉어내게 되는 말이다.
말로 형언할 수 없을 것 같은, 진득한 찝찝함을 남기곤 하는 말.
멍하니 영국을 바라보고 섰던 재승이, 무어라 더 물음을 건네려던 찰나.
“재승아, 이 이야기는 오늘 말고 나중에. 나중에 다시 하자. 부탁할게.”
영국이 쐐기를 박아 넣었다.
* * *
초저녁 무렵, 영국과 헤어졌다.
영국이 녀석이 돌연 알바 시간이 다 되었다며, 급하게 자리를 끝맺어 버린 탓이었다.
근래 대화를 나누기는커녕, 연락조차 제대로 못 하고 있던 터라 알바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어쨌든 이 또한 평소였더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에도, 조금만 더 놀자며 떼를 써대던 녀석이었으니 말이다.
‘대체 무슨 일이지….’
이런저런 잡념이 파도처럼 밀려온 탓에, 곧장 집으로 가질 못하고 한참 동안 거리를 배회해야 했다.
그렇게 극성이던 녀석이, 돌연 음악을 그만두겠다고 결심하게 된 계기가 대체 뭘까?
스스로의 심경적인 변화 때문일까?
굳이 음악과의 접점을 만들어주려 노력했던 건, 괜한 짓이었던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변덕에 의한 결정은 아니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건 절대 아닐 것이다.
꿈을 포기했음을 밝히던 녀석의 미소 속에는, 여전히 들풀처럼 싱그러운 무언가가 담겨 있었으니까.
그럼 외부적 요인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까?
“후우-.”
월 플라워 인수·인계 문제 외에, 또 파슨스 디자인 스쿨 입시 준비 외에, 한국을 떠나기 전 해결해야 하는 숙제가 하나 더 늘어난 듯했다.
어쩌면 정에 의한 오지랖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확한 연유를 파악하지 않고 외면한 채 떠나 버린다면, 평생 가슴 한편에 찝찝함이 남을 것만 같았기에 어쩔 수 없었다.
우선 확인해 볼 것이다.
대체 무엇이 녀석의 꿈을 꺾은 것인지, 스스로 꺾은 것이라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확인하고, 그다음엔 해결해 줄 것이다.
해결해 줄 수 있는 일이라면, 정말 어떻게든.
곧 맞이하게 될 ‘짧은 이별’에 대한, 자그마한 선물 정도로 말이다.
우선 연신 옮겨대던 걸음을 잠시 멈춘 채,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혼자 아무리 고민해 봐야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정답을 알고 있을 만한 사람에게 물어보는 것이 나으리라 판단한 것이다.
우선 영국이 다니던 실용음악학원의 번호를 알아내서, 곧장 전화를 걸었다.
– 네, 아르테 실용음악학원입니다.
“다름 아니라, 손영국 학생 때문에 전화드렸습니다.”
– 아아, 네. 어쩐 일이세요?
“혹시 손영국 학생 지도해 주시는 담당 선생님과, 잠시 통화 좀 할 수 있을까요?”
마음 같아서는 영국의 부모님께 사정을 여쭙고 싶었지만, 당장 번호를 알아낼 길이 없었기에 채택한 방법이었다.
음악적인 부분에 있어서라면, 오히려 더 많은 교류를 나눴을지도 모르는 인물이기도 하고 말이다.
– 금방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잠시만요.
얼마 지나지 않아, 영국을 지도했던 담당 선생님을 통해 간단한 자초지종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 아, 손영국 학생 말씀이시죠? 참 안타깝게 됐어요….
돈.
결국, 또 돈이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