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71)
블랙 라벨-70화(71/299)
블랙 라벨 70화
71. 간만에 실력 발휘 좀 해볼까?
엘리베이터 안, 거울을 보며 다시금 제 얼굴을 살펴보고 있던 재승이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예? 제가 그런 말을 했다고요?”
“네. 음, 그러니까 정확히 뭐라고 하셨냐면….”
잠시 말끝을 흐려 보인 애슐린이, 이내 옅은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나직이 덧붙였다.
“제작에 사용되는 것과 같은 재질의 원단과, 부자재만 있다면, 어떤 제품이든 완벽히 카피(Copy)할 수 있다고 했었어요.”
“맙소사.”
“왜요? 혹시 술기운 탓에 꺼내게 된 거짓말이에요?”
“아뇨, 그건 아니지만….”
재승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가려던 찰나.
띠잉-!
어느새 연회실이 위치한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가, 한차례 경쾌한 알림음을 내보였다.
이내 재승이 고개를 한 번 내저어 보이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괜한 소리를 했네….’
같은 재질의 원단과, 부자재만 있다면 어떤 제품이든 완벽히 카피해낼 수 있다는 말.
절대 거짓은 아니다.
과장을 조금 섞어 말하자면, 눈을 감고 재봉을 하더라도 능히 해낼 자신이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술기운과 분위기 탓에, 괜히 부리게 된 객기임은 분명했다.
재승이 한창 상념에 젖어들어 있던 찰나, 뒤따라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선 애슐린이 낭랑한 목소리로 재차 말문을 열었다.
“재승, 겸손은 의무가 아니에요. 아니, 오히려 선택 같은 거겠죠.”
“음?”
“실력 있는 자의 오만함은 매력이라고 생각하는 주의거든요.”
“무슨 뜻이에요?”
재승의 물음에, 애슐린이 제 양 허리에 손을 짚어 보였다. 덕분에 이브닝드레스 차림을 한 그녀의 몸매가, 더욱 면밀히 드러나는 듯했다.
정적이 흐르기를 잠시.
이내 매혹적인 미소를 입가에 머금어 보인 그녀가,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재차 말을 이었다.
“당신은 당당한 모습이 더 매력적이더라고요.”
“그래요? 새겨들을게요.”
“일단 들어갈까요?”
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새 연회가 진행될 연회실 문 앞에 다다른 상태였다.
이내 애슐린이 재승의 팔 사이로, 제 팔을 팔짱 끼워 넣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윽고.
연회장 입구에 대기하고 있던 가드(Guard)가, 정중하기 그지없는 투로 물음을 건네 왔다.
“실례하겠습니다, 어떻게 오셨죠?”
“이재승이라고 합니다.”
“이쪽은 일행분이시고요?”
“네.”
“잠시만요.”
잠시 리스트를 훑어보던 가드가, 코를 한 번 찡긋거려 보이고는 되물었다.
“월 플라워의 오너 디자이너분이신가요?”
“네.”
흑인 가드의 입에서, ‘월 플라워’라는 단어가 흘러나오니 괜히 가슴이 두근거리는 듯했다.
이내 제 리스트에 알 수 없는 글귀를 써넣어 보인 가드가,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는 재차 말을 이었다.
“즐거운 시간 되시길.”
“감사합니다.”
입구를 지나 연회실 안에 발을 들이자, 그 규모 덕에 절로 입이 쩍 벌어졌다.
은은한 주황색 등이 널찍한 장내를 환히 비추고 있는 와중에, 벽면에 비치된 스피커에서 연신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정적인 분위기인 듯했다.
“후우-.”
한차례 길게 숨을 내쉬어 보인 재승이, 재차 장내의 전경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일정 간격으로 배치된 원형 테이블마다, 대여섯 명의 디자이너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있는 상태였다.
그들이 디자이너인지 어찌 아냐고?
아무리 말끔한 정장 차림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디자이너들은 티가 나게 마련이다.
안경 내지는 선글라스를 통해서. 아니면 팔찌나, 반지를 비롯한 기타 액세서리를 통해서.
또는 행커치프나 ‘*부토니에르(*Boutonnière: 양복류의 단추 구멍에 꽃아 넣는 장식용 꽃)’를 통해서 말이다.
설령 마냥 단아하고 수수한 차림을 하고 있는 이들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였다.
한 군데쯤은 포인트를 강하게 살려두었거나, 입고 있는 옷의 색감이나 재질을 상당히 뛰어나게 매치시켜 둔 상태였으니 말이다.
이내 애슐린이 재승의 옆구리를 가볍게 ‘콕’ 찔러 보이고는, 나직이 말했다.
“저쪽으로 가면 되는 거 맞죠?”
“아, 네.”
이내 재승이 배정받은 좌석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윽고.
“오셨어요? 애슐린도 같이 왔네요?”
원형 테이블에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아 있던 제랄딘이, 마냥 반갑다는 듯 인사를 건네 왔다. 서로 간단한 인사를 나누기를 잠시.
“그나저나 같은 자리네요?”
재승이 나직이 건넨 물음에, 제랄딘이 한차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답했다.
“그럼요. 손을 써뒀거든요.”
“예? 정말요?”
“네. 소개시켜 드릴 사람이 한 명 있거든요. 지금은 잠시 자리를 비웠는데….”
한창 유려하게 말을 이어나가던 제랄딘이, 한차례 “아!” 하고 말해보이고는 저 멀리 입구 쪽을 턱짓으로 가리키고 덧붙였다.
“마침 저기 오네요.”
이윽고.
“어…?”
재승이 두 눈을 게슴츠레 뜬 채, 입구 쪽에서 걸어 들어오고 있는 장발의 사내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평범한 키에, 깡마른 몸매를 한 장발의 사내가 제 바지 뒷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채 건들건들 걸어 들어오고 있는 중이었다.
이내 재승이 당황한 듯 횡설수설 말을 꺼냈다.
“잠깐, 잠깐만요. 제랄딘. 설마 저 사람, ‘알렉산더 킹’(Alexander King)이에요? 아마 아니겠죠?”
“맞아요.”
“맙소사….”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아 보인, 재승이 곧장 자리에서 기립했다.
이내 재승의 자리 인근에 다다른 알렉산더 킹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나직이 입을 뗐다.
“핫한 루키(Rookie)를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네요. 알렉산더 킹입니다.”
“바, 반갑습니다. 월 플라워의 이재승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환영해 주시니 감사하긴 합니다만, 일단 앉으시는 게 어떨까요?”
“아, 예!”
알렉산더 킹.
그는 중국계 혼혈인, 미국 태생의 디자이너이다.
18살 어린 나이에 파슨스 디자인 스쿨에 수석으로 입학한 것도 모자라, 2년 만에 돌연 중퇴를 선언하고, 현역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천재 중의 천재’였다.
유명 디자이너 ‘마크 에이(Mark- A)’와 미국 포그에서의 짧은 인턴십 기간을 마치고, 곧장 자신만의 여성복 브랜드를 런칭하여, 현재까지는 물론이고 재승이 회귀하기 직전의 미래에서까지도, 연신 승승장구 중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자신의 눈앞에 앉아 와인 잔에 담겨 있는 물을 마시고 있었다.
이토록 이질적인 느낌의 광경을 목도했던 적이 있던가?
이내 애슐린이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건네 왔다.
“재승, 참고로 알렉산더 킹도 게이(Gay)예요.”
“그렇군요.”
“재승이랑은 동문이 될 사이이기도 하네요. 그 역시 파슨스 디자인 스쿨 출신이니까요.”
고개를 작게 주억거려 보인 재승이, 이내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오신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습니다. 뭐라고 하면 좋을까요? 정말 실감이 안 나네요.”
이내 제랄딘이 어깨를 한 번 으쓱거려 보이고는, 나름 유창한 영어로 대신 답해주었다.
“사실 ‘킹’은, 원래 리에게 관심이 많았어요. 저한테 개인적으로 연락을 취해, 리와 관련된 이런저런 정보를 물어봤을 정도로요.”
제랄딘의 설명에, 알렉산더 킹이 한마디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모두 제랄딘의 칼럼 덕분이었죠. 한국에서 개최한 월 플라워의 2011 F/W 쇼와 관련된 정보들을, 모두 살펴봤어요. 정말 인상적이더군요. 음, 뭐랄까… 미니멀리즘(Minimalism)의 재해석이라고 하면 딱일 것 같군요.”
“과찬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쉬운 부분이 하나도 없던 것은 아닙니다. 미니멀리즘 자체의 본질을 벗어난 감도, 없잖아 있긴 했었거든요. 리의 경험량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일전에 파리 포그(Paris Pouge)의 공식사이트에서 확인했던, 리서치에 기재된 총평과 같은 내용의 말이었다.
이내 재승이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이고는, “시정할 수 있도록 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정중한 투로 말해 보였다.
윤기가 가득한 제 흑발을 한차례 뒤로 쓸어 넘겨 보인 알렉산더 킹이, 이내 나긋하기 그지없는 투로 재차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어리니까 괜찮아요.”
“네?”
“리가 지니고 있는 최고의 장점은, 아무래도 ‘나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말을 마친 알렉산더 킹이, 제 잔에 담긴 물을 들이켜 보이고는 재차 첨언했다.
“참고로 저는 그 나이 때 실무는 물론이고, 직접 브랜드를 경영할 능력이 없었어요. 그러니까, 리가 지니고 있는 재능은 정말 엄청난 축복이라고 봐요. 어떻게 다듬고 가꾸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겠죠.”
“아, 네. 감사합니다.”
감사하다고 말해 보이기야 했다지만, 사실 ‘어린 나이’로 인해 파생되는 칭찬은 늘 경계하려고 주의하는 재승이였다.
나이가 어린가?
절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많은 편이다.
살아온 세월만 놓고 보자면, 앞에 앉은 알렉산더 킹보다 훨씬 길 테니까.
어쩌면 디자인에 종사한 기간 역시, 그보다 훨씬 길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나이가 어리다는 장점은, 언제고 사라져 버릴 장점이기도 하다.
재승의 일행이 앉은 테이블에, 한차례 무거운 정적이 내리 앉던 찰나.
타악-!
스위치가 내려가는 소리와 함께, 장내의 모든 조명이 암전되었다.
황홀한 빛을 발하던 샹들리에도, 연회실 앞쪽에 비치된 낮은 연단 위의 조명들도 모두 꺼진 것이다.
이내 제랄딘이 나직이 말했다.
“슬슬 행사가 시작되려나 보네요.”
재승이 자세를 고쳐 앉아 보이던 찰나. 알렉산더 킹이, 은근한 기대감이 서린 투로 말을 건네왔다.
“그나저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네? 어떤…?”
“어떤 브랜드의, 어떤 제품이든 완벽히 카피해 낼 수 있다고 했다던데요?”
“아….”
어제 술자리에서 나누었던 그 대화가, 설마 알렉산더 킹에게까지 흘러들어갔을 줄이야.
지금 느껴지는 화끈거림으로 어림짐작컨대, 양 뺨이 가을철 홍시처럼 붉어졌을 게 분명했다.
이내 재승이 조심스레 답을 꺼내 들었다.
“네. 술기운 탓에 그런 말을 꺼내긴 했었죠.”
“그럼 설마 단순한 말실수였다는 건가요?”
사뭇 날카로운 투로 건넨 물음이었다.
더군다나 ‘만약 그런 거라면, 꽤 실망할 것 같은데….’라는 듯 보이는 눈빛은 덤이었고 말이다.
이내 재승이 한차례 숨을 길게 내쉬어 보이고는, 마냥 무덤덤한 투로 말을 이었다.
“아뇨, 공식적으로 이야기를 꺼낼 만한 사안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자신은 있습니다. 같은 재질의 원단과 부자재만 있다면, 어떤 제품이든 그대로 만들어낼 자신이 있어요.”
재승의 말이 끝맺어지기 무섭게, 곁에 앉아 두 사람의 대화를 경청하고 있던 제랄딘과 애슐린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내 고개를 몇 번 끄덕여 보인 알렉산더 킹이, 재차 말을 이었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 엄청난 재능이에요. 어느 뮤지션에게 주어진 ‘절대음감’이란 재능보다, 훨씬 더 높은 단계에 있는 재능일지도 모르죠.”
“흠, 글쎄요….”
의구심이 들었다. 정말 그렇게까지 엄청난 재능일까?
그럼 전생의 자신은, 그런 엄청난 재능을 품에 안은 채 동대문 인근 지하 작업실에 딸린 골방에서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던 것일까?
이내 알렉산더 킹이 손가락을 한 번 튕겨 보이고는, 재차 말을 이었다.
“만약 제대로 된 ‘안목’만 갖춰진다면, 존재하지 않는 아름다움을 만들어낼 수 있을 지도 모르죠. 그 어떤 난이도 높은 시도든, 좋은 것이라면 그대로 옮겨낼 수 있단 뜻이니까요.”
이내 재승이 한차례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답했다.
“설명을 듣고 나니, 꽤 쓸 만한 재능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아무래도 리의 재능이 사실인지, 확인해 보는 게 우선일 것 같아요.”
“확인이요?”
“네. 오늘 연회가 끝나고 나서 어때요? 만약 리의 말이 사실이라면, 제가 드릴 수 있는 선물 중 최고의 선물을 드릴게요.”
“선물이라 하심은…?”
“제 이름을 그대로 딴 브랜드, 알렉산더 킹의 S/S시즌 신상품 제작에 투입시켜 드릴게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reative director) 자격으로요.”
이내 재승이 놀란 듯 두 눈을 휘둥그레 떠보였다. 실력을 입증하기만 한다면, 정말 엄청나기 그지없는 커리어 한 줄을 추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건 일생일대의 기회나 마찬가지다.
적어도 그간 자신에게 찾아왔던 기회들 중에서는, 가장 큰 기회임이 분명했다.
가슴이 어찌나 세차게 뛰어대는 것인지, 제 심장 박동이 느껴지는 듯했다.
멍하니 알렉산더 킹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재승이, 이내 고개를 몇 번 내저어 보이는 것으로 정신을 다잡고는 되물었다.
“일단 좋습니다. 그럼 저는 어떤 제품을 카피하면 되는 거죠?”
“간단해요. 제가 지난 F/W 시즌에 발매했던, 알렉산더 킹의 백을 카피해 주시면 돼요. 아마 쉽지는 않을 겁니다. 저희 측에서도 꽤 파격적인 시도를 했던 제품이거든요.”
이내 재승이 득의에 가득 찬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성용 핸드백은, 재승의 전문 분야랄 수 있었으니까.
“좋습니다.”
간만에 실력 발휘 좀 해볼까?
단, 이번엔 합법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