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73)
블랙 라벨-72화(73/299)
블랙 라벨 72화
73. Photocopier
모든 준비를 마친 재승이, 벽면에 비치된 시계를 한 번 바라보았다.
‘흠, 몇 시간이나 걸리려나…?’
우선 만들어야 하는 가방의 종류는 ‘*토트백(*Tote Bag: 손에 들고 다닐 수 있는 여성용 핸드백)’이었다.
룩북에 수록된 사진을 보며 분석을 하던 과정에서도 느꼈다지만, 아예 도식으로 옮겨 그려놓고 보니 제작 난이도가 상당히 높은 축에 속하는 듯 보였다.
재승이 재봉틀 페달 위에 발을 살짝 얹어둔 채, 도식을 꼼꼼히 훑어보고 있던 찰나.
탁-.
알렉산더 킹이 작업대 한편에, 머그컵을 내려놓으며 입을 뗐다.
“리(Lee), 커피 좀 드세요.”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작업 중간중간마다 흡입할 카페인까지 장전되었으니, 그야말로 모든 준비가 끝난 것이다.
이내 재승이, 막 건네받은 커피 한 모금을 들이켜 보았다.
‘향이 꽤 좋네.’
재봉틀 페달 위에 슬쩍 제 발을 얹어보았다. 발끝에서 익숙한 감촉이 느껴지기 시작함과 동시에, 가슴이 세차게 두근대기 시작했다.
“음, 떨리네요.”
재승이 진심을 담아 건네보인 말에, 알렉산더 킹이 피식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되물었다.
“재봉 직전의 순간은 늘 떨리게 마련이죠. 음, 그런데 떨리는 기색보다는 기대감이 더욱 짙어 보이는데요?”
“네, 맞아요. 기대되네요.”
짤막하게 답해 보인 재승이, 한차례 “재봉은 죽어 있는 가죽에 숨을 불어넣는 숭고한 작업이니까요.” 하고 나긋한 투로 덧붙여 말했다.
그러고는 곧장 은은한 이채(異彩)를 띤 눈으로, 작업대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원단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형광등 불빛을 살짝 머금은 채, 은은한 광택을 과시하고 있는 고급 사피아노 원단을.
하지만, 아직까지는 그게 전부일 뿐이다.
제아무리 질이 좋아봐야, 지금은 해체되어 있는 한낱 가죽 쪼가리들일 뿐이다.
부자재들 역시 마찬가지다. 금장이건, 은장이건, 아직은 딱 그 정도의 가치를 벗어나지 못할 뿐이다.
필연적으로 자신의 손을 거쳐야만 한다. 메스가 아닌, 미싱을 이용하여 ‘집도’(執刀)의 시간을 거칠 것이다.
수술대가 아닌, 작업대 위에서 말이다. 제 손으로 직접 변화를 선사해 줄 것이며, 숨을 불어넣어 줄 것이다.
확신컨대 그 영향은 절대 작지 않을 것이다.
작업이 끝난 뒤에는, 금전적인 가치를 포함한 모든 것들이 사뭇 달라져 있을 테니 말이다.
재봉이 누군가의 망상 속에 존재하는, ‘연금술’과 비슷한 개념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할 수는 없다지만, 그것들을 조합하여 재탄생시킬 수 있으며, 또 가치마저 변환시킬 수 있으니까.
“후우….”
마지막으로, 심호흡 한 번.
그리고….
지이이이이이잉-.
재승이 재봉틀 페달을 살짝 즈려 밟기 무섭게, 재봉틀을 기점으로 뿜어져 나온 굉음이 아뜰리에 내부에 가득 메워 나가기 시작했다.
불과 수초나 지났을까? 재승의 입가 위로 만족스러움이 가득 서린 미소가 피어올랐다.
‘와, 힘이 엄청 좋은데…?’
단연 원단의 품질만 높은 게 아니라, 재봉틀 역시 명품 축에 속하는 듯 느껴졌다.
마치 성질이 드센 ‘명마(名馬)’의 고삐를 손에 쥐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착각이 일 정도였으니 말이다.
튼튼하기 그지없는 사피아노 가죽 위로, 재봉선이 끊임없이 박히기 시작했다.
투두두두두두-.
다른 이들에게는 어떨지 몰라도, 재승에게 이 정도 환경은 단연 ‘최고의 환경’이랄 수 있었다.
이보다 훨씬 열악한 환경에서도, 소위 말하는 미러급 이미테이션을 만들어내곤 했던 재승이었으니 말이다.
한차례 “좋아….” 하고 작게 되뇌어 보인 재승이, 한없이 진중한 표정을 한 채 재봉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비록 확신할 수는 없는 일이라지만, 왠지 좋은 예감이 들었다.
꽤 만족스러운 작업물을 완성시켜 낼 수 있을 것만 같다는, 좋은 예감이.
재승이 한창 작업에 열중하고 있던 찰나, 애슐린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저, 제랄딘. 혹시 백을 완성시키는 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있을까요?”
“글쎄요?”
나직이 되물어 보인 제랄딘이, 알렉산더 킹을 지그시 바라보기 시작했다. 애슐린의 질문을, 그에게로 고스란히 넘긴 것이다.
이내 알렉산더 킹이 아뜰리에 한편에 비치되어 있던 의자 한 개를 꿰차고 앉으며, 나긋한 투로 제 생각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마 오늘 내로는 완성시킬 수 없을 거예요. 재승이 카피해야 하는 토트백은, 지난 F/W 상품들 중에서도 가장 제작 난이도가 높은 까다로운 제품이거든요.”
“아, 그렇군요….”
자신이 토트백의 ‘오리지널 샘플(Original Sample)’을 만들 때만 하더라도, 재봉에만 꼬박 이틀을 소요했었다. 정해진 격식이나 규격이 따로 없었기에, 그 정도에서 그쳤던 것이리라.
기존의 제품을 완벽히 카피해 내는 것이, 조금 더 까다로운 작업일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본판’을 곁에 놓고, 시시 때때로 비교해 가며 작업을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지 않은가?
한차례 제 손목시계를 내려다본 알렉산더 킹이, 덤덤한 투로 재차 말을 이었다.
“우선 오늘은 동이 틀 무렵까지만 지켜볼 계획이에요. 못해도 이틀은 더 지나야지, 완성된 토트백을 볼 수 있을 것 같네요.”
짤막하게 말해 보인 알렉산더 킹이, 아뜰리에 벽면 서재에 꽂혀 있던 잡지 책 한 권을 꺼내 들어서는 천천히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재승의 재봉 과정을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괜한 부담을 주는 행동이 될지도 모른다는 판단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 * *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작업을 시작한 지로부터 다섯 시간 남짓한 시간이 더 흘렀을 무렵.
연신 두 눈을 부릅뜬 채로 작업에 몰두하고 있던 재승이, 뻑뻑해진 제 눈을 손으로 벅벅 문질러 대기 시작했다.
이윽고.
작업을 시작한 이후로 단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던 재승이,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뗐다.
“끝났네요.”
작업대 위에는 완성된 토드백(Tote Bag)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 상태였다.
이내 멀찍이 떨어진 곳에 자리한 의자 위에 앉은 채, 마냥 느긋하게 잡지를 읽고 있던 알렉산더 킹이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예? 버, 벌써 완성시켰다고요…?”
“네. 한 번 확인해 보시겠어요?”
재승이 짤막하게 답해 보이기 무섭게, 알렉산더 킹이 읽고 있던 잡지책을 덮어 보이고는 제 손목시계를 한 번 힐끔 바라보았다.
‘버, 벌써 끝이라고? 작업을 시작한 지 다섯 시간 정도밖에 안 지난 것 같은데…?’
완성까지 최소 이삼 일은 소요되리라 짐작하고 있던 그였다. 어쩌면 그마저도 부족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고 말이다.
한데, 재승이 작업에 소요한 시간은 도합 다섯 시간.
모르긴 모르더라도, 이런저런 디테일한 부분들을 모두 신경 써서 가방을 제작해 내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임이 분명했다.
잠시나마 ‘혹시 포기한 건가…?’하는 의심을 품었던 그가, 금세 고개를 내저어 보였다.
마냥 뿌듯한 얼굴을 한 채 기지개를 켜대는 데 여념이 없는 ‘리(Lee)’의 모습을 보자니, 적어도 포기한 것은 절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탓이었다.
‘일단 확인을 해봐야겠지.’
어느새 작업대 앞에 다다른 알렉산더 킹이, 재승이 완성시킨 토트백을 집어 들며 한차례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나저나 정말 자신 있나 보군.’
자신이 토트백을 집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재승은 여전히 기지개를 켜대는 데 여념이 없었다.
알렉산더 킹은 그런 재승의 반응이, 제품의 질에 대한 자신이 있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반응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작업물이 만족스럽지 않았더라면, 혹은 정말 자그마한 아쉬움이나마 남아 있었더라면, 그는 자신의 표정을 비롯한 여러 반응들을 살피는 데에만 급급했을 테니 말이다.
이내 알렉산더 킹이 본격적으로 가방을 살펴보기 시작하려던 찰나.
재승이 나긋한 투로 입을 뗐다.
“이런, 애슐린은 곤히 잠들었군요.”
나직이 말해 보인 재승이, 소파 위에 쪼그려 앉은 채로 잠든 그녀의 무릎 위로 담요 한 장을 덮어주었다.
살짝 벌어진 그녀의 입술 틈새 사이로, 연신 ‘새근, 새근’하고 귀여운 숨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재승이 흐뭇한 미소를 머금은 채,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찰나.
알렉산더 킹이 돌연 “아.” 하고 탄성을 뱉어보이고는, 재차 말을 이었다.
“참고로 제랄딘은 두 시간 전쯤에 돌아갔어요. 그녀에게는 내일의 일과가 있으니까요.”
“이런, 가신 줄도 모르고 있었네요.”
짤막하게 답해 보인 재승이, 재차 물음을 건넸다.
“제가 너무 늦었죠?”
전생에서 이미테이션을 만들던 때보다, 훨씬 더 큰 신경을 기울였던 재승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원작자’에게 심사를 받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니 말이다. 재승이 재차 주절주절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사소한 부분들을 조금 더 신경 쓰려고 노력하다 보니까 어쩔 수 없었어요. 원작자에게 형편없는 백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반면 알렉산더 킹은, 기가 찬다는 표정을 한 채 서 있을 뿐이었다.
‘뭐? 늦었다고…?’
재승의 작업 속도는 여타 프리미엄 브랜드 산하 아뜰리에에 소속된, ‘마이스터(Meister)’들의 작업 속도와 견주어도 일절 손색이 없었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조금 더 우위에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이내 알렉산더 킹이 헛웃음을 한 번 흘려 보이고는, 나직이 물음을 건넸다.
“아뇨, 괜찮습니다. 일단 한 번 살펴봐야겠네요. 리, 물이라도 한 잔 드릴까요? 아니면 커피?”
“아뇨. 괜찮아요.”
“그럼 잠시 앉아서 쉬고 계시겠어요?”
“네, 저는 신경 쓰지 말고 꼼꼼히 살펴보세요.”
재승이 소파 등받이에 몸을 편히 뉘인 채로, 두 눈을 지그시 감아 보이던 찰나.
알렉산더 킹이 다시금 작업대 위에 놓여 있는 토트백을 유심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우선 토트백의 전반적인 ‘실루엣(Silhouette)’과 ‘시접(Seam Width: 접혀서 속으로 들어간 옷 솔기 부분)’, 또 ‘마감 라인’을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핵심적이랄 수 있는 부분들.
얼마 지나지 않아 알렉산더 킹의 표정이, 더없이 심각해졌다.
‘허….’
적어도 실루엣과. 시접 처리, 또 마감만큼은 오리지널 제품과 하등 다를 바 없는 형태로 완벽히 재현해 낸 상태였다.
이번에는 조금 더 세부적인 부분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단순 눈대중만으로는 완벽히 흉내 내기 어려운 지퍼와, 단추의 부착 위치, 내부 안감 처리 등을 말이다.
‘완벽하잖아…?’
모두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자신의 아뜰리에에 소속된 마이스터들에게 보여준다고 해도, 이질감을 느끼지 못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이 한 가지 남아 있는 상태랄 수 있었다.
‘아직 스터드(Stud: 징)가 남아 있지….’
지난 F/W 시즌, 알렉산더 킹의 신상품들이 호평을 받은 이유는 간단했다.
다름 아닌, 위험을 감수했던 참신한 시도 덕분이었던 것이다.
가방 하단부에 탄피 모양의 스터드를, 일정한 간격에 맞춰 박아두었다. 문득 떠올린 발상이었을 뿐이나, 그 발상이 만들어낸 결과는 가히 엄청나다고 할 수 있을 지경이었다.
일부 평론가들로부터 제품의 포인트를 잘 살려낸 것은 물론이고,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를 새로이 확립했다는 극찬을 받아냈으니 말이다.
반면 재승은 수작업으로 공정(工程)을 거쳤다. 심지어 견본 삼아 비교할 본판도 없이, 룩북에 수록된 사진만을 토대로 하여 제작했다.
심지어 불과 다섯 시간 만에 뚝딱 제작해 냈다.
그러니 적어도 가방 하단에 부착된 스터드의 배열이나 간격만큼은, 절대 완벽할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윽고.
“맙소사….”
자로 잰 듯, 일정한 간격에 맞추어 완벽하게 배열되어 있는 스터드를 확인한 알렉산더 킹이 한차례 실소를 흘려보이고는 중얼댔다.
“The Photocopier….”
그 뜻인 즉….
“네? 복사기요?”
복사기.
이내 알렉산더 킹이, 허탈한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재차 말을 이었다.
“그래요. 리(Lee), 당신 말입니다.”
“아, 과찬입니다.”
“그나저나 부탁 하나만 드릴 수 있을까요?”
“네? 어떤…?”
“혹시 몇몇 브랜드의 이번 F/W시즌 상품들을 카피해 주실 수 있을까요?”
“동일한 소재의 원단과, 부자재만 구해주신다면 얼마든지 만들어드릴 수는 있습니다만….”
한차례 말끝을 흐려보였던 재승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려 보이며 되물었다.
“그런데 왜…?”
“지금의 당혹감을 저만 느껴보기엔 너무 아쉬워서요.”
말을 마친 알렉산더 킹이 재차 덧붙여 말했다.
“제 친구들에게도 이런 경험을 선사해 주고 싶거든요. 그리고 우리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능력도 자랑하고 싶고요.”
“아….”
재승이 감격 어린 표정을 한 채, 탄성을 뱉어보이던 찰나. 알렉산더 킹이 재승에게 손을 건네 악수를 청해 보이며, 재차 첨언했다.
“어쨌든… 리, 환영하고 축하드립니다. 알렉산더 킹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되신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