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82)
블랙 라벨-81화(82/299)
블랙 라벨 81화
82. 감당할 수 있겠어?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한참 동안 이어지던 침묵을 깬 것은, 다름 아닌 김근태 이사였다.
그는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잔뜩 찡그린 채, 또 입가에는 옅은 조소를 머금은 채,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제가 이 바닥에서 보낸 시간이 얼마나 될 것 같아요? 이재승 디자이너, 이제 열아홉 살이죠?”
“예, 그렇습니다.”
“제가 이 바닥에서 보낸 시간이, 이십 년이 훨씬 넘습니다. 그동안 이재승 디자이너 같은 친구들을 얼마나 많이 봤겠어요?”
잠시 숨을 걸러 보인 김근태 이사가, 이번에는 송 이사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나직이 덧붙여 말했다.
“별 같잖지도 않은 성공에 도취돼서, 판단력이 흐려질 대로 흐려진 친구들 말이에요.”
불과 몇 분 전과 달리, 스산하기 그지없는 어투였다. 뭐,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반응이기도 했다.
어루만져 잘 달래는 데 실패했으니, 이제 슬슬 ‘협박’을 시작하려는 듯 보였다.
“이해는 합니다. 정말 다 이해해요. 아직 잘 모르니까,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예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이재승 디자이너한테, 어떻게 성공을 보장해 준다는 말을 할 수 있었을 것 같아요?”
재승이 아무런 대답도 않고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자, 김근태 이사가 곧장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그게 다, 견고한 ‘네트워크(Network)’가 구비되어 있기 때문인 겁니다. 제가 스파 브랜드, ‘더블 에잇’ 디자인실에 있었다고 말씀드렸죠?”
재승이 한차례 “예, 그랬었죠” 하고 답해보이자, 김근태 이사가 한없이 의기양양한 투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잘 모르고 계시는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인데, 한형그룹 모회사(母會社)인 한형물산 패션 부문에서 런칭한 스파 브랜드가 ‘더블 에잇’이에요. 한형그룹이 얼마나 큰 회사인지는 아시죠?”
“예, 그런데요?”
“저뿐 아니라 협회 이사회분들 역시, 대기업 스파 브랜드 디자인실에 오래 몸담고 계시던 분들이에요. 자, 그럼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보죠.”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인 김근태 이사가,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린 채로 말을 이었다.
“협회 이사회의 손이 닿는 대기업 산하 스파 브랜드부터 시작해서, 이미 협회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 중인 디자이너 브랜드가 여럿 있다고도 말씀드렸죠? 여기에 협회와 십수 년에 걸쳐 관계를 다져온 패션 매거진, 언론사까지….”
손가락을 한 개씩 접어가며 자신의 세력을 열거해 가던 김근태 이사가, 재승을 쏘아보며 물음을 건넸다.
“전부 다 적으로 돌리고 나면, 어떨 것 같아요?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의 말이 끝맺어지기 무섭게, 다시금 정적이 내려앉았다.
고개를 살짝 돌려 곁눈질로 송 이사를 살펴보니, 못마땅하다는 듯 굳은 표정으로 김근태 이사를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한국 패션디자이너협회’라….
정말 역겹다.
가질 수 없다면 부숴 버리겠다는 심보인 걸까?
그는 지금 패션계의 백스테이지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진흙탕 싸움’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게 현실이다.
두각을 나타내는 젊은이가 등장하면, 기득권층은 그들의 젊음을 어떻게 이용해 먹을 수 있을지에 대해 가장 먼저 고민한다.
이미 업계에 뿌리를 내려 버린 이들과의 대립이다. 승산이 현저히 적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현실에 승복하는 게 옳은 선택일까?
아니, 절대 아니다. 협회의 꼭두각시가 되어 움직이게 된다면, 그 삶은 전생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전부 다 적으로 돌리고도, 감당할 수 있겠냐고?
“들어보니까, 확실히 힘들긴 하겠습니다. 이사님을 비롯한 협회분들께서 저와 월 플라워를 곤경에 처하게끔 만들 수 있는 방법이라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을 테니까요.”
이내 곁에 앉아 있던 송 이사가, 눈을 휘둥그레 떠 보이며 “야, 이재승!” 하고 낮은 목소리로 다그쳤다.
갑작스레 약한 모습을 보인 탓에,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반말을 뱉은 듯 보였다.
그때 김근태 이사가 만족스럽다는 듯 “하하핫-!” 하고 호탕한 웃음을 흘려 보인 뒤, 곧장 말을 이었다.
“생각이 조금 바뀌셨나 보군요? 이래서 대화가 필요한 법이죠. 그래요, 좋습니다. 그럼 다시….”
하지만, 자고로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아는 법.
“아뇨, 그런 뜻이 아니라….”
“예?”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음흉한 표정을 지어보이고는 말을 이었다.
한 치의 굴곡조차 없는 목소리 안에, 노골적인 적의를 내비추고자 노력해 가며.
“그냥 힘든 싸움이 될 것 같다고 말씀드렸지, 질 것 같다고 말씀드렸던 적은 없습니다만?”
이내 김근태 이사가 돌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서는,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소리쳤다.
“이런, 멍청한-!”
부릅뜬 두 눈이, 살짝 충혈되어 있는 듯 보였다.
정말이지 추악하기 그지없는 몰골이다.
이내 그가 격양된 감정을 좀처럼 숨기지 못한 채, 세차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말귀를 영 못 알아듣는 것 같으니, 알아듣기 쉽게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죠. 이재승 디자이너를 괴롭힐 방법이라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온갖 구질구질한 방법에 대한 설명이 유려하게 이어졌다.
우선 ‘서울 패션위크’ 무대에 서는 것은, 꿈도 못 꾸게 될 것이라고 했다.
모델을 구하는 것조차 힘겨워질 거라고 했고. 더군다나 매 시즌마다 협회의 연줄이 닿는 여러 매거진에서, 악평이 줄줄이 쏟아질 것이라고 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출시하는 옷마다 일일이 특허권 침해 소송을 걸어주겠다며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매 시즌 출시하는 옷마다 일일이 특허를 출원하지 않는다면, 사무실보다 법원에 있는 시간이 훨씬 더 많아질 것이라는 부연 설명도 덧붙여 주었고 말이다.
그건 확실히 귀찮은 일이었다. 매년 수백 종에 이르는 옷을 출시하며 일일이 특허를 출원하는 것은, 비용·시간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렇게 한참 동안 유려하게 말을 쏟아내던 김근태 이사가, 파르르 떨리는 두 눈으로 재승을 쏘아보며 재차 덧붙였다.
“분명히 말해두겠는데, 애송이 브랜드 하나 만신창이로 만드는 건 일도 아니에요. 그리고 이건 권유가 아닙니다. 이재승 디자이너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하나뿐인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자, 마지막 기회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내 재승이 고개를 몇 번 주억거려 보이고는, 나지막이 답을 꺼내놓았다.
“자신 있으시면, 한 번 해보세요.”
“뭐?”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테니까요.”
서울 패션위크 무대에 설 수 없다면?
밀라노, 파리, 런던, 뉴욕 등의 세계 4대 패션위크를 노리면 그만이다. 협회의 공작으로 인해 국내 모델을 쓰는 게 어려워진다면?
해외 모델을 쓰면 그만일 것이다.
해외 모델 에이전시와 연줄이 닿지 않는 것도 아니니, 하등 문제 될 게 없었다.
또 국내 매거진에서 제아무리 악평을 쏟아내 봐야, 해외 매거진에서 호평을 받으면 거품처럼 사그라질 게 분명했다.
더군다나 이미 ‘파리 포그(Paris Pouge)’와도, 돈독한 관계를 형성해 둔 상태가 아니던가?
또 이미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국내 매거진들도 여럿 있지 않던가?
이 부분 역시,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듯싶었다.
정말 특허권 침해 소송을 남발해 댄다면, 꽤나 귀찮기야 하겠지만 제대로 된 법무법인을 끼고 맞대응하면 그만이었다.
디자인을 묶어서 특허를 출원할 수 있는, 해외 법안을 역이용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고 말이다.
정리해 보자면, 협회의 마수가 닿는 것은 어디까지나 국내뿐이란 것이다.
‘해외 진출’이 꿈만 같은 이야기라면 위협적이었을지 모르나, 월 플라워는 현재 해외 진출이 눈앞에 있는 상황이 아니던가?
조금은 같잖게 느껴질 따름이었다.
그래, 할 수 있다면 어디 한 번 열심히 해봐라. 대신 각오는 해야 할 거다.
지금의 폭언과 갖은 협박이, 훨씬 거센 폭풍이 되어 돌아올 테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잘못된 상대를 건드렸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할 수 있게 될 테니까.
짤막하게 답해 보인 재승이 자리에서 일어서서는, 송 이사를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그만 돌아가죠.”
이내 송 이사가 곧장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며, “그래, 가자. 오늘 일진 더럽네….” 하고 나직이 중얼댔다.
멍하니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던 김근태 이사가, 송 이사를 향해 손을 뻗어 보이며 말했다.
“잠깐! 소, 송 이사님이라고 하셨죠?”
“예. 왜요?”
“월 플라워의 경영권을 가지고 계시다고요?”
“예. 그런데요?”
송 이사가 낮은 목소리로 되묻자, 김근태 이사가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힘겹게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뜻을 함께해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때.
“아니, 돈이 그렇게 많습니까?”
“…예?”
“이런 말 들어보신 적 있을 겁니다.”
짤막하게 말해 보인 송 이사가, 조소를 흘려보이고는 나직이 되물었다.
“바다는 메워도, 사람 욕심은 못 메운다는 말 들어보신 적 있죠? 과연 우리 이사님께서는, 바다보다도 넓은 제 욕심을 채워주실 자신이 있으신지?”
“저, 일단 앉아서 얘기를….”
이내 송 이사가 만류하듯 손바닥을 들어 올려 보이고는, 스산하기 그지없는 투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아니, 이 양반아. 돈도 많다면서요? 값지게 쓰면서, 즐기며 사는 게 낫지 않겠어요? 돈으로 똥도 닦고, 코도 풀고….”
“뭐야-?!”
“적당히 좀 합시다. 그렇게 살다가 정말 지옥 갑니다. 힘없는 젊은이들이 무슨 죄입니까? 꿈꾸는 것도 죄가 됩니까?”
말을 마친 송 이사가, 꾸벅 묵례를 해 보이고는 낮은 목소리로 “다소 늦은 감이 있긴 합니다만, 지금이라도 회개하시길….” 하고 말해 보였다.
그 순간.
부릅뜬 눈으로 두 사람을 노려보는 데 여념이 없던 김근태 이사가, 한없이 스산한 투로 말했다.
“두고 봅시다. 두 분 다, 땅을 치며 후회할 겁니다.”
이내 대기실 문 앞에 다다른 송 이사가, 재승의 어깨 위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그나저나 오늘 촬영은?”
“같이 못 한다고 말씀드려야죠.”
“그래. 얘기 잘 안 되면 감자탕이나 먹으러 가자.”
“감자탕 좋죠, 이사님이 사시는 거예요?”
출연자 대기실의 문이 닫히기 직전.
송 이사가 여전히 제자리에 앉은 채, 분기를 어쩌지 못하고 있는 김근태 이사를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하여튼, 보면 있는 놈들이 더하다니까….”
* * *
결국 교양 프로그램 녹화는 취소되었다.
단독이 아니면 촬영을 진행할 수 없다는 의사를 내비추자, 담당 PD가 난색을 표하고는 어렵사리 녹화 취소라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덕분에 송 이사와 감자탕을 먹으며, 모처럼 느긋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소주 몇 잔 덕에 뺨이 붉게 물든 송 이사가, 국자로 감자탕을 휘휘 저어대며 입을 뗐다.
“처음에는 그냥 적당히 미친놈인 줄 알았는데, 듣다 보니까 알겠더라고. 완전히 미친놈이었어.”
투덜대듯 말해 보인 송 이사가, 재차 소주를 한 잔 들이켜고는 오만상을 찌푸려 보이며 되물었다.
“어쨌든, 의외로 성깔 있더라? 정말 깜짝 놀랐어.”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요.”
“그나저나 어떨 것 같아? 진짜 치근덕댈까?”
“아마도 그렇겠죠? 뭐, 그래 봤자 별거 없을 거예요.”
송 이사가 얼굴을 살짝 갸웃거려 보이며 “응?” 하고 되묻자, 재승이 앞서 품었던 생각을 다시금 유려하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간단히 하자면, 협회의 손이 닿지 않는 해외 시장을 공략하면 그만이라는 내용이었다.
“어차피 협회의 마수가 닿는 곳이라고 해봐야, 국내 시장뿐이잖아요? 사실 그렇게 위협적이지도 않을 것 같고요.”
“그래. 에라, 모르겠다. 까짓거 뭐 있겠어?”
이내 재승이 송 이사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기 시작했다.
문득 걸쭉하기 그지없는 투로, 김근태 이사에게 일침을 가하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던 탓이었다.
이런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생에서도 함께하고 싶을 정도로 매료되었던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인 것이다.
“뭐야? 뭘 그렇게 뚫어지라 쳐다 봐? 정분나겠네.”
“아니에요.”
말을 마친 재승이 활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단연 송 이사뿐이 아니다.
주변을 지켜주는 이들이 수두룩하다.
그들을 위해서라도 현명하게 처신해야 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라도, 효율적인 승리를 쟁취해야 하는 것이다.
이내 재승이 제 스마트폰을 꺼내 들어서는, 연신 액정을 두드려 대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그런 재승을 지켜보던 송 이사가, 의아하다는 듯 물음을 건넸다.
“뭐야? 밥 먹다말고, 갑자기 누구랑 그렇게 연락을 해?”
“그냥….”
말끝을 살짝 흐려 보인 재승이, 이내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리며 답했다.
“가지고 있는 카드는 다 써보려고요.”
감당할 수 있겠냐고?
역으로 묻고 싶다.
감당할 수 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