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87)
블랙 라벨-86화(87/299)
블랙 라벨 86화
87. 신기루
“봐요, 다들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했죠?”
알렉산더가 재승의 어깨 위에 손을 얹어 보이며 건넨 말이었다.
이내 재승이 실감이 나질 않는다는 듯,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장내에 자리한 이들의 얼굴을 천천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다들 하나같이 환한 미소를 머금은 채, 박수를 보내는 데 여념이 없을 따름이었다.
이내 가장 선두에 서 있던 정장 차림의 노인이, 활짝 미소를 지어보이며 입을 뗐다.
“리, 만나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현재 알렉산더 킹의 경영을 도맡고 있는, ‘테오’라고 합니다.”
“아, 예. 반갑습니다.”
한없이 정중한 투로 답해 보인 재승이 곧장 그와 한차례 포옹을 나누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알렉산더 킹이, 나긋한 투로 몇 마디 말을 덧붙였다.
“테오는 정말 훌륭한 선장이에요. 숫자들이 그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죠. 그가 경영권을 도맡은 뒤로, 브랜드의 가치가 점점 격상하고 있는 중이거든요.”
테오가 눈을 한 번 찡긋거려 보이고는, “과찬입니다” 하고 답했다.
두 사람의 대화만 놓고 보더라도, 브랜드의 분위기를 얼추 짐작할 수 있을 듯했다.
이내 테오가 앞으로 몇 걸음을 나서서는, 재승에 대한 짤막한 소개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다들 아시다시피, 이번 S/S시즌 디자인을 총괄하게 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재승 리’ 디자이너입니다.”
말을 마친 테오가 재승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음, 호칭은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하고 물었다.
“그냥 편하게 리라고 불러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몇 번 끄덕여 보인 테오가,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리는 월 플라워라는 브랜드를 이끌어 나가고 있는, 유능한 디자이너입니다. 알렉산더와 같은 ‘*RA(The Real Artist)’ 크루 소속 디자이너이기도 하고요.”
곳곳에서 “오….” 하고 감탄하는 소리가 낮게 울려 퍼졌고, 덕분에 낯이 괜히 화끈거리는 듯했다.
다름 아니라, 크루 가입은 오롯이 제 실력만으로 이뤄낸 결과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탓이었다.
이는 한창 협회와 대립하던 때, 알렉산더가 자신을 완벽히 보호해 주고자 마련해 준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가입할 수 있었던 이유는 딱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크루 내에서 입지가 상당히 굳건한 알렉산더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크루의 핵심 가입 조건인 ‘파슨스 계파’라는 점이 충족되었기 때문이었다.
어찌 됐든, 자신의 실력만으로 일궈낸 결과가 아니었기에 마냥 떳떳할 수는 없던 것이다.
테오의 설명이 끝맺어지기 무섭게, 아뜰리에 직원들과의 본격적인 통성명이 시작되었다.
“미셸입니다. 현재 아뜰리에를 총책임지고 있죠. 편하게 ‘리’라고 불러도 되겠죠?”
“물론이죠. 반가워요, 미셸.”
자신을 미셸이라 소개한 중년 여성은, 26년에 달하는 경력을 지니고 있는 노련한 재단사였다.
테오의 설명에 의하면, 고난이도의 재봉은 대부분 미셸의 손을 거친다고 했다.
아뜰리에에 소속된 재단사들 중, 가장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이내 재승이 서른 명가량의 재단사 한 명, 한 명과 일일이 포옹을 나눠가며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인사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마지막 재단사와의 인사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이윽고.
“카일이라고 합니다. 만나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마지막 재단사는, 상당히 앳되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청년’이라기보다는, ‘소년’이라는 단어가 더 잘 어울릴 법 해 보이는 인상의 소유자였으니 말이다.
이내 재승이 그와 한차례 포옹을 나눈 뒤, 조심스레 물음을 건넸다.
“카일, 정말 반가워요. 실례지만 나이가 어떻게 되시죠?”
“올해로 열아홉 살입니다.”
이내 재승이 한차례 “오….” 하고 탄성을 내뱉어 보였다. 미국식 나이로 따져본다면, 자신과 동갑이었던 탓이었다.
자고로 어린 나이에 프리미엄 브랜드의 아뜰리에에 취직하기란, 정말 하늘의 별 따기와 같은 일이다.
카일 역시 인정받아 마땅한 재봉 실력과, 재능을 지니고 있으리란 게 재승의 짐작이었던 것이다.
“카일, 정말 대단하시네요. 프리미엄 브랜드의 아뜰리에 입사 시험은 상당히 까다로운 걸로 알고 있는데….”
“아닙니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실력이 뒷받침해 주지 않는다면, 운도 작용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주의라서요. 언젠가 정말 유명한 마이스터가 되실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이내 카일이 수줍은 듯 얼굴을 붉혀가며 감사를 표해 보였다.
으레 건넨 말이 아니었기에, 진중한 투로 “진심이에요” 하고 덧붙여 말해보이기까지 했다.
그렇게 재단사들과의 인사가 일단락되자, 최고경영자 테오가 다시금 인자한 투로 말을 건네 왔다.
“어쨌든, 다들 리의 활약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알렉산더 킹이라는 브랜드가 여태껏 쌓아온 유산과, 리의 아이덴티티가 적절히 융화될 때 나타날 파급효과를 말입니다.”
이내 재승이 한차례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아파트를 나서기 전 거울을 보며 몇 번 연습했던 답을 꺼내놓았다.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여러분의 믿음과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할 겁니다. 정말 어떻게든요.”
구구절절 길게 말해봐야, 떨리는 기색을 숨기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최대한 짤막하게 답한 것이었다.
살면서 목도했던 기회들 중 가장 큼직한 기회 앞에 서 있는데, 어찌 떨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물론 마냥 떨리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꾸만 묘한 기대감이 일었으니 말이다.
그때 재승의 두 눈을 지그시 바라보던, 테오가 재승에게 손을 뻗어 보이며 말했다.
“듬직하군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발탁된 소감을 이야기하며, 떨지 않은 것은 리가 처음이거든요.”
“아뇨, 티 내지 않으려 애쓰고 있는 것뿐입니다.”
“하핫! 아무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항이 생기거든, 언제든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네, 저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당차게 답해 보인 재승이, 테오의 손을 꽉 맞잡아보였다.
모르긴 몰라도, 꽤 나쁘지 않은 첫 만남인 듯했다.
* * *
간단한 인사를 마친 뒤, 재승은 알렉산더와 함께 인근 호텔의 라운지 바로 향했다.
“리, 아파트는 마음에 들어요?”
알렉산더가 맥주잔을 집어 들며 건넨 물음에, 재승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답했다.
“그럼요, 평생 살고 싶은 곳이던데요?”
“다행이군요. 차는요?”
“키가 두 개나 있어서 놀랐어요.”
“마음에 들었다는 거죠?”
“그럼요. 당연하죠.”
“취향을 몰라서 고민했는데 다행이네요.”
짤막하게 답해 보인 그가,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말씀만하세요” 하고 재차 덧붙여 말했다.
이내 맥주 몇 병 치의 대화가 더 오갔다.
대부분이 이번 S/S시즌에 출시할 제품에 관한 대화였다. 재승이 내놓은 의견은 간단했다.
뉴욕 스트릿의 자유분방함과, 고급스러움을 동시에 추구하는 알렉산더 킹의 기본 프레임 위로 자신의 강점인 미니멀리즘을 녹여내고 싶다는 것.
딱 이 정도 수준의 대략적인 구상안만 말해줬을 뿐인데도, 알렉산더는 꽤 만족스러워하는 눈치였다.
또 재승의 향후 일정에 관한 대화도 오갔다.
“우선 파슨스 스쿨의 봄 학기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입학수속을 밟으며 이런저런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원활한 미국 생활을 위한 이런저런 준비뿐 아니라, 월 플라워의 새 시즌 준비까지 동시에 진행해야 한다.
디자인 팀 직원들의 도식을 검토하고, 수정, 보완하는 게 전부라지만 이 또한 꽤나 부담스러운 일정임이 분명했다.
이내 알렉산더가 고개를 몇 번 주억거려 보이고는, 이런저런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봄 학기가 시작되고 나면, 사 측에서 파슨스에 직접 공문을 넣어줄 겁니다. 그 부분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해결할 수 있을 거예요. 어쨌든, 본격적인 S/S 시즌 준비가 시작되고 나면 본사로 출근해 주셔야 하고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바 테이블 위에 놓인 빈 병의 개수가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오늘과 같은 여유로운 술자리가 드물기 때문일까? 알렉산더는 쉼 없이 맥주를 들이켜 댈 따름이었다.
두 사람 모두 슬슬 취기를 느끼기 시작하는 중이었다.
양 뺨이 붉어졌고, 또렷하던 눈이 점차 몽롱해져 가고 있었다.
이는 술자리가 점점 무르익어 가고 있는 중이라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때 “재미있는 이야기해 드릴까요?”라는 말로 말문을 연 알렉산더가, 이내 자신이 알고 있는 패션계의 비화를 잔뜩 털어놓기 시작했다.
유명 디자이너들의 은밀한 사생활부터 시작하여, 디자이너들 간의 배신, 성적 취향, 심지어는 업계 내에서도 소수만이 알고 있을 뿐인 이런저런 충격적인 비밀들에 이르기까지.
술기운 덕에 꼬부라진 혀로 애써 말을 이어나가던 알렉산더가, 몽롱하게 풀린 눈을 한 채 말했다.
“비밀은 지켜주셔야 해요. 리를 믿으니까 말해준 거예요.”
“그럼요, 고마워요.”
사뭇 명쾌한 투로 답해 보인 재승이, 한차례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신이 알고 있던 유명 디자이너들의 이면을 엿본 기분은, 그리 유쾌하지 않은 듯했다.
품고 있던 환상이 깨지기도 했고, 동경과 존경심이 가루가 되어 날리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때, 알렉산더가 꽤 진중한 투로 되물었다.
“리, 제가 느닷없이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은 이유가 뭘까요?”
“글쎄요?”
“리는 상처받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에요.”
상처? 재승이 의아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자, 알렉산더가 어깨를 한 번 들썩거려 보이고는 말을 이었다.
“리도 비슷하겠지만… 저는 12살 무렵부터 패션계에 대한 동경을 품고 있었어요. 여러 디자이너들을 존경했고, 또 사랑했죠. 심지어 몽정 대신, ‘마크 제이콥’이나 ‘칼 라커펠드’를 만나는 꿈을 꿀 지경이었다고요.”
“대단한 열정이었군요. 12살의 알렉산더는 잘 상상이 가질 않네요.”
어쨌든, 현재의 알렉산더는 본인이 앞서 열거한 모든 디자이너들과 친분이 두텁기로 유명하다.
그중에서도 특히 ‘마크 제이콥’과는, 더할 나위 없이 친한 사이로 알려져 있었다.
애초에 디자이너 알렉산더 킹의 첫 데뷔 무대가, 마크 제이콥의 브랜드에서였으니 말이다.
덕분에 덤덤한 투로 늘어놓는 과거사가, 더할 나위 없이 멋있어 보이기만 할 따름이었다.
어떻게 본다면 꿈을 이룬 이의, 회상이라고 볼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어쨌든 몇 걸음이나마 먼저 이곳에 발을 들여본 소감을 말해주자면, 모두 ‘신기루’였을 뿐이더군요.”
“신기루?”
“네. 리가 어떤 환상을 품었든, 그건 신기루일 뿐이에요. 여긴 그보다 훨씬 열악한 곳일 겁니다.”
말을 마친 알렉산더가 다시금 맥주 몇 모금을 벌컥벌컥 들이켠 뒤, 입가를 닦아 보이며 말했다.
“이곳 역시 타 비즈니스와 다를 바 없는, 숫자의 정글이에요. 이익이 따르지 않는 호의나, 이익이 따르지 않는 친분은 존재하지 않는 곳이죠.”
“그럼 알렉산더가 지난번에 베풀었던 호의는요?”
지난번, 알렉산더가 도움을 주었던 한국 패션디자이너협회 건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이내 알렉산더가 멋쩍은 듯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답했다.
“오직 이익만을 위한 선택은 아니었지만, 이 또한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해요.”
정적이 흐르기를 잠시, 알렉산더가 한차례 한숨을 쉬어 보이고는 말을 이었다.
“리를 ‘RA크루’에 가입시켰던 건 단순히 보호만을 위한 선택이 아니었어요. 리를 위하는 동시에, 제 브랜드를 위하는 선택이기도 했으니까요.”
“음, 무슨 뜻인지….”
“아무래도 크루의 이름을 빌린다면, 이번 S/S시즌의 실패 확률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을 테니까요.”
“아….”
세계적인 디자이너 크루, ‘RA’에 소속된 두 명의 디자이너가 합심하여 새 시즌을 준비한다?
매니아 층을 열광시키기에, 또 마케팅의 재료로 삼기에 일절 부족함이 없는 문구이다.
또 의도한 바까지는 아니겠지만, 사실상 프리미엄 브랜드 ‘알렉산더 킹’은 이미 상당한 이득을 본 상태라고 할 수 있었다.
이번 협회 사태로 인하여, ‘알렉산더 킹’이라는 브랜드 네임이 한국의 공중파 뉴스에 몇 번이고 보도되지 않았던가?
이런저런 패션 매거진에 보도된 것까지 따져본다면, 어줍지 않은 홍보보다는 훨씬 나은 선택이었음이 분명했다.
이내 알렉산더가 멋쩍은 듯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나긋한 투로 말을 이었다.
“물론 언제고 리를 RA크루의 새로운 멤버로 추천할 생각이긴 했어요. 다만, 몇 년 뒤… 그러니까, 리가 화려한 커리어를 잔뜩 쌓은 뒤의 일이었겠죠.”
“그렇군요.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해요. 패션계는 열 번의 성공을 취하는 것보다, 한 번의 실패를 하지 않는 게 더 중요한 곳이잖아요? 어쨌든, 덕분에 한 가지 배웠네요.”
고마운 마음에 심취하여, 이권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별다른 계산을 하지 못했다.
이는 명백한 실책이다. 한차례 입맛을 다셔 보인 재승이, 곧장 맥주 몇 모금을 들이켰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달달하게 느껴지던 맥주가, 돌연 쓰디 쓴 벌주처럼 느껴질 따름이었다.
이내 재승이 알렉산더 킹을 지그시 바라보기 시작했다.
냉정한 척 말해 보이기야 했다지만, 이런 설명을 친절하게 구구절절 늘어놓았다는 점만 놓고 보더라도 알렉산더는 그리 냉정하지 못한 사람임이 분명했다.
조금 더 엄밀히 말하자면, 생존을 위해 계산 능력을 발달시킨 부류인 듯 보인다고 해야 할까?
한차례 미소를 지어 보인 재승이, 이내 진심을 담아 답했다.
“고마워요. 그래도 알렉산더가 이번에 주신 도움에 대한 보답만큼은, 이익이 따르지 않는 호의로 갚을 겁니다.”
알렉산더가 놀란 듯 재승의 두 눈을 지그시 바라보던 찰나, 재승이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덧붙였다.
“친구니까요.”
한차례 한숨을 내쉬어 보인 알렉산더가, 진심 어린 투로 덧붙여 말했다.
“지난 수 년 동안, 몇 번이고 듣고 싶었던 말이에요. 몇 번 듣긴 했지만, 대부분 거짓이었죠.”
“그랬군요.”
“부디 그 말이 진심이길 바라요.”
말을 마친 알렉산더가, 이내 잔뜩 꼬부라진 혀로 힘겹게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사실 친구라는 관계를 표방한 비즈니스는 이제 신물이 나요. 솔직히 말하자면 역겹게 느껴질 지경이죠.”
“정말 힘들었겠군요.”
“리를 만나게 돼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적어도 아직까지는요. 어쨌든, 이곳에 영원한 친구는 없습니다. 영원한 적도 없고요. 그 누구도 믿어선 안 돼요.”
이내 재승이 알렉산더를 바라보며 물었다.
“알렉산더도요?”
정적이 흐르기를 잠시.
“네. 저도요.”
확신 어린 투로 답해 보인 그가, “졸리군요” 하고 말해 보인 뒤 바 테이블에 엎드렸다.
이내 재승이 잔에 남은 맥주를 들이켜며,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신기루.
알렉산더가 자신의 두 눈으로 본 패션계를 묘사한 말이다.
훗날 자신은 패션계를 어떤 말로 묘사하게 될까?
어쨌든, 본의 아니게 그의 마음속에 자리한 그늘을 엿본 셈이었다.
비록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그에게 큰 상처를 남긴 비화가 있음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또한 시간을 두고 틈틈이 알아가야겠다고 결심했다.
알렉산더가 바 테이블에 엎드린 채로 아예 잠들어 버린 뒤, 재승은 곧장 엘리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엘리사는 신호음이 몇 번 울리기도 전에 전화를 받아서는, 곧장 그의 수행비서를 보내주겠다고 답했다.
수행비서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던 사이, 재승이 돌연 “아, 맞다” 하고 작게 중얼댔다.
불현듯, 아뜰리에 복도 쓰레기통에서 주웠던 도식을 떠올린 것이다.
‘음? 카일?’
반듯하게 접어 넣어두었던 도식을 펼쳐 들기 무섭게, 한 귀퉁이에 적혀 있는 ‘카일’이란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아뜰리에에서 만났던, 어린 재단사의 이름이었다.
이내 재승이 무덤덤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도식을 살펴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