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89)
블랙 라벨-88화(89/299)
블랙 라벨 88화
89. 잊고 있던 이름
‘꽤 쌀쌀하네….’
집을 나선 재승이, 한차례 코트 깃을 꽉 여며보였다.
시간에 따라 영하와 영상을 오가는 날씨 탓에, 바람이 더욱 날카롭게 느껴졌던 탓이었다.
아파트 현관을 나선 뒤 쉼 없이 걸음을 옮기기를 장장 15분. 어느덧 맨해튼 5가에 들어선 재승이, 13Th 5Ave의 한 건물 앞에 멈춰 섰다.
딱 보기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외형을 하고 있는 이 건물이 바로, ‘파슨스 유니버시티 센터’ 건물이었다.
맨해튼의 비싼 땅값 때문일까? 파슨스의 건물들은 이처럼 시내 곳곳에 흩어져 있는 상태였다.
캠퍼스가 없는 게 단점일 수도 있겠지만, 일부 몇몇은 장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덕분에 맨해튼 시내 전체가, 캠퍼스처럼 느껴진다는 게 그 이유였다.
어쨌든, 오늘은 이곳 유니버시티 센터 건물에서 최종 면접을 치러야 하는 상황.
건물 안으로 들어선 뒤, 간단한 신원 확인 절차를 거치고 곧장 면접실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림과 동시에, 면접실이 자리한 3층의 내부 전경이 면밀히 드러났다.
천장과 바닥을 제외한 모든 벽면이 푸른색으로 칠해져 있는, 독특하고 감각적인 인테리어가 눈에 띄었다.
사전에 들은 바에 의하면 ‘*UC(*유니버시티 센터)’ 건물 내부는, 이처럼 한 가지 색으로 칠해져 있는 식이라고 했다.
굳이 예를 들어보자면, 2층은 붉은색, 3층은 푸른색, 4층은 노란색, 대충 이런 식이었다.
또 복도에 비치된 기다란 소파 위로, 오늘 면접을 치르게 될 신입생들이 잔뜩 앉아 있는 상태였다.
늦게 온 덕에 미처 자리를 잡지 못한 몇몇 신입생들은, 괜히 복도를 어슬렁거려가며 내부 시설을 둘러보는 데 여념이 없었고 말이다.
한데, 놀라운 점이 한 가지 있었다.
‘와, 정말 태반이 동양인이네….’
파슨스의 학생들 중 절반 이상이 동양인이라는 말을 들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 정도일 것이라곤 미처 예상치 못했던 바 였다. 분명 한국인 역시, 적지 않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몇몇 신입생들이 자신에게 눈길을 주긴 했으나, 다행히 자신을 알아보는 이는 없는 듯 보였다.
재승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서, 몇 걸음을 옮겨 보이던 찰나.
“반가워요, 혹시 오늘 면접 때문에 방문하신 건가요?”
엘리베이터 인근에서 대기하고 있던 정장 차림의 젊은 여성이, 한없이 친절한 투로 건네온 물음이었다.
이내 재승이 한차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답했다.
“네, 맞습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이재승입니다.”
“음, 잠시만요.”
잠시 차트를 훑어보던 여성이, 한차례 “와!” 하고 탄식을 내뱉어 보이고는 되물었다.
“맙소사! 리(Lee), 당신이 화제의 신입생이군요? 맞죠?”
“예? 화제의 신입생이요?”
“그래요. RA크루의 일원이자, 알렉산더 킹의….”
그녀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가려던 찰나, 재승이 황급히 검지를 제 입가에 가져다대 보이며 다급한 투로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맞는 것 같으니, 그만 말씀해 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주목받는 걸 즐기는 편은 아니라서요.”
주변을 살펴보니, 이미 몇몇 신입생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상태였다.
뭐랄까? 마치 다들 ‘네가 바로, 소문 속의 그 녀석이구나?’ 하고 묻는 것만 같은, 흉흉한 눈빛을 보내오고 있다고 해야 할까?
그제야 쏟아지고 있는 시선을 인식한 그녀가, 울상을 해 보이며 조심스레 말했다.
“아아, 정말 죄송해요. 곤란하게 만들려던 건 아니었어요….”
“괜찮아요.”
“우선 안내부터 도와드릴게요.”
이내 그녀의 설명이 유려하게 이어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최종면접은 봄 학기 개강 및 OT 일정에 앞서 교수진과 간단히 면담을 나눠볼 수 있는 기회라고 했다.
또 그녀는 최종면접 때, 좋은 인상을 심어둔다면 학교생활에 있어 여러모로 도움이 될 터이니 교수진의 질문에 최대한 성심성의껏 답하는 게 좋으리란 충고도 잊지 않았다.
그녀가 손에 쥔 차트에 시선을 고정해 둔 채 말을 이어가는 데 여념이 없던 찰나, 재승이 그런 그녀의 얼굴을 한 번 바라보았다.
테가 굵직하고, 알 부분이 상당히 커다란 뿔테안경을 끼고 있던 탓일까?
그녀는 꽤나 선해 보이는 동시에, 어딘가 맹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내 재승이 그녀의 가슴팍에 부착되어 있는 명찰을 한 번 힐끔 쳐다보았다.
‘레이첼?’
아무래도 원활한 면접 진행을 위해 투입된, 패션 관련 학부의 재학생인 듯 보였다.
그때, 설명을 마친 레이첼이 대기번호가 쓰여 있는 종이를 건네주며 말했다.
“리의 번호가 호명되면, 입장해 주세요. 다행히 앞쪽 순번이신지라, 넉넉잡고 30분 정도만 기다리시면 될 거예요.”
“네. 감사합니다.”
말을 마친 재승이 자리를 뜨려던 찰나, 레이첼이 돌연 기도하듯 양 손바닥을 맞대 보이며 말했다.
“저, 잠깐! 잠깐만요!”
“네?”
“실례가 안 된다면….”
조심스레 말끝을 흐려 보인 그녀가, 이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뒷말을 이었다.
“사인을 받을 수 있을까요?”
“사인이요?”
일전에 영국에게 사인을 해준 뒤로는 이번이 처음이니, 생에 두 번째 사인이랄 수 있었다.
비록 익숙하지 않은 일이라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려운 일은 또 아니다.
재승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얼마든지요” 하고 답해 보이자 그녀가 화색을 해보이며 조잘조잘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재학생들이, 리(Lee)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하고 있어요. 비록 몇몇은 반감을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요.”
방금 막 펜과 종이를 건네받은 재승이, 한차례 미간을 좁혀 보이며 되물었다.
“예? 반감이요?”
이내 그녀가 어깨를 한 번 들썩여 보이고는, 덤덤한 투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자고로 성공 뒤에 그림자처럼 뒤따르는 게 질투와 시기 아니겠어요? 막상 실제로 만나보면, 별 볼 일 없는 놈일 것이라고 떠드는 녀석들이 수두룩해요.”
재승이 고개를 몇 번 주억거려 보이자, 레이첼이 화사한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덧붙였다.
“어쨌든, 호감을 가지고 있는 재학생들이 훨씬 많아요. 리는 이미 뉴욕 패션계에서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디자이너니까, 업계 선배인 셈이잖아요? 더군다나 현 패션계의 ‘핫 루키’가 파슨스의 신입생으로 입학하게 된 이상, 올해 ‘대항전’ 우승은 파슨스의 것이 될 테고요.”
말을 마친 레이첼이, “어쩌다 보니 수년째 2등만 하고 있는 상황이라, 체면이 말이 아니거든요” 하고 덧붙였다.
대항전.
인근에 자리한 디자인 스쿨 ‘뉴욕 패션 기술대학교’(New York Fashion institute of Technology, FIT)와 매년 치르는, 승부를 일컫는 말인 듯했다.
쉽게 말하자면 한국의 연·고전(혹은 고·연전)과 비슷한 맥락이랄 수 있었다.
파슨스와, FIT.
두 학교 모두 뉴욕 디자인 스쿨의 ‘양대산맥’이랄 수 있는, 명문이 아니던가?
그런 두 학교가 근처에 인접해 있으니, 자연스레 이런 문화가 생겨날 수밖에 없던 것이다.
우선 각 학교별로 5명의 디자이너를 선발하여, 도합 30벌의 옷을 제작하고 쇼를 올리게 된다.
쇼가 끝난 뒤 투표를 통해 학교 대항의 승·패를 공개하고, 그다음에는 우수한 디자인을 출품한 학생 개인에게 순위를 매기고 상금과 상품을 지급해주는 연례 특별행사랄 수 있었다.
참고로 이는 ‘알렉산더’뿐 아니라, 유명 디자이너 여럿이 거쳐간 행사이기도 했다.
덕분에 현재에 이르러서는, 업계 종사자들 역시 대거 참관하는 대규모 행사로 변모했다.
비록 학생들의 행사라지만, 스타로 거듭나게 될 디자이너들을 미리 만나보고 접촉해 볼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리라.
“음, 만약 기회만 주어진다면 꼭 참석하고 싶네요.”
슥슥슥-.
재승이 종이 위로 제 사인을 그려내기 시작하자, 레이첼이 곧장 입을 뗐다.
“아, 맞다. 제 이름은….”
“레이첼?”
이내 레이첼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떠 보이며 되물었다.
“어? 어떻게 아셨어요…?”
“명찰에 쓰여 있던데요?”
재승이 능청스레 되묻자, 레이첼이 얼굴을 살짝 붉혀 보이고는 나직이 답했다.
“그렇네요. 어, 어쨌든 잘 간직할게요.”
“별말씀을. 반가웠어요, 레이첼.”
짤막하게 답해 보인 재승이, 한차례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면접실 방향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내 점차 멀어지기 시작한 재승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레이첼이, 작은 소리로 작게 중얼댔다.
“음, 역시 현역은 느낌부터가 다르네….”
한편, 면접실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던 재승의 표정 역시 마냥 해맑기 그지없었다.
이런저런 일정 탓에 학교생활에 마냥 몰두할 수는 없겠지만, 꽤 즐겁고 유익한 시간이 될 것 같다는 예감 덕분이었다.
* * *
면접실 안의 공기는 더할 나위 없이 무거웠다.
기다란 협탁을 앞에 둔 채, 나란히 앉아 있는 네 명의 교수들. 그리고 협탁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는 재승까지.
도합 다섯 명의 사람들이 자리해 있는 상태였으나, 면접실 안은 마냥 고요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이윽고.
“재승, 반갑습니다.”
가장 먼저 입을 뗀 것은, 백발이 희끗한 노교수였다.
남자는 나이가 아닌 멋이 든다는 말이 있지 않던가? 노교수는 그 말의 표본인 듯 보이는 노인이었다.
노교수과 눈이 마주친 재승이, 최대한 당당한 투로 답했다.
“모두 만나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반면, 가슴은 거세게 두근거리는 중이었다. 현재 자신과 마주 앉아 있는 교수진 모두가, 상당한 이름값을 지니고 있는 이들이랄 수 있었다.
특히, 자신에게 방금 말을 건네 온 노교수는 현 패션계의 살아 있는 전설인 ‘에딘 토마스’가 아니던가?
파슨스의 교수직을 맡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으나, 이토록 쉽게 만나볼 수 있으리라곤 미처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이내 노교수가 재승을 바라보며, 느긋한 투로 말을 건넸다.
“제출하신 포트폴리오는, 정말 인상 깊게 봤습니다. 직접 운영 중인 브랜드를 포트폴리오로 제출한 건, 아마 리가 처음이 아닐까 싶군요.”
아예 처음은 아닐 것이다. 찾아본 바에 의하면, 이런저런 선례가 있긴 했었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월 플라워’와 비슷한 규모의 매출이 찍히는 브랜드가, 포트폴리오로 제출된 바는 전무했다.
“음,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들더군요. ‘굳이 대학 진학을 선택할 이유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 말입니다. 재승 군은 얼마 전 프리미엄 브랜드 알렉산더 킹의, 차기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발탁되었다고 들었습니다. 맞죠?”
“네. 그렇습니다.”
“사실상 이미 실력을 입증했다고 봐도 무방한 셈이죠. 제아무리 파슨스의 우등생이라고 한들, 졸업과 동시에 프리미엄 브랜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발탁되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까요.”
현재 세계적인 디자이너들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알렉산더만 놓고 보더라도 그랬다.
대학 생활 도중 이미 스포트라이트를 받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파슨스를 졸업한 뒤, 곳곳에서의 인턴십 생활을 거쳤고, 장장 수 년 만에 자신의 브랜드를 런칭한 셈이었으니 말이다.
이내 에딘 토마스가 착용하고 있던 무테안경을 벗어 들며, 재승을 지그시 바라보기 시작했다.
“궁금하군요. 어쩌면 대학 진학이라는 선택은, 재승 군에게 ‘독’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유는?”
“만약 한국 시장을 목표로 했더라면, 그랬을 겁니다. 그랬더라면 대학 진학을 결심하지 않고, 실무에만 매진했을 겁니다.”
정적이 흐르기를 잠시. “하지만” 하고 말해 보인 재승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제 목표는 세계 시장입니다. 현재 제가 이끌고 있는 브랜드 ‘월 플라워’를, 그 어떤 프리미엄 브랜드와 견주더라도 우위에 설 수밖에 없는 견고한 브랜드로 만들어 나갈 겁니다.”
말을 마친 재승이 에딘 토마스를 바라보며, “물론 베르몽도, 예외는 아니겠죠” 하고 덧붙여 말했다.
자신의 브랜드가 거론되었기 때문일까? 흥미롭다는 듯 피식 미소를 흘려 보인 에딘 토마스가, 재차 반문했다.
“연계된 산학협력기관, 여러 캠페인, 교육 커리큘럼, 또 명확한 교육관까지… 유학 생활은 확실히 도움이 될 겁니다. 하지만, 글쎄요? 재승 군의 경우에는 확신할 수 없을 것 같군요.”
“혹시 이유를 여쭤 봐도 괜찮을까요?”
“오너 디자이너부터 시작하여,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끝으로 파슨스의 재학생에 이르기까지… 쉽게 말하자면 1인 3역을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 한 개의 배역만으로 살아가는 것도 힘겨워하는데 말이죠.”
이내 재승이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이고는 답했다.
“해낼 수 있습니다. 앞으로의 생활을 통해, 입증해 보이도록 하겠습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었다.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개서 쓰면 된다.
그래도 부족하다면 연필의 힘을 빌리면 된다.
어떻게든 해낼 자신이 있었기에, 유학이란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설령 월 플라워의 주가가 떨어진다 하더라도, 어떻게든 극복해 낼 자신이 있었고 말이다.
“부디 그랬으면 좋겠군요. 참고로 이번처럼 편의를 봐드리는 건 기본적인 교육이 따르는 1학년까지만입니다.”
알렉산더 킹 본사에 출근하는 기간 동안, 출석 인정을 해주기로 한 건에 대한 설명인 듯했다.
이내 에딘 토마스의 설명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2학년, 3학년 때에도 어느 정도 고려를 해드릴 수는 있겠지만 졸업이 어려워질 수 있어요. 파슨스의 졸업장을 돈과 시간만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아주 큰 오산일 겁니다.”
“네, 새겨듣겠습니다.”
“그래요. 이만 나가 보셔도 좋습니다. 그럼 OT일에 다시 뵙도록 하죠.”
재승이 자리에서 일어서 출문 앞에 다다르던 찰나, 에딘 토마스가 재승을 다시금 불러 세웠다.
“잠깐, 재승 군. 월 플라워를 세계 최고 브랜드 반열에 올려두겠다고 했죠?”
“네.”
“근시일 내로, 본인이 그럴 가능성이 있는 재목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셨으면 좋겠군요.”
말을 마친 에딘 토마스가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재차 덧붙여 말했다.
“사실 저는 아티스트보단, 수완가에 더 가깝거든요.”
실력을 입증한다면, 합당한 기회를 줄 수 있다는 뜻을 넌지시 전하는 말이었다.
이내 그 말에 담긴 뜻을 이해한 재승이, 한차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짤막하게 답해 보였다.
“네, 감사합니다.”
어차피 말로는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수 없다. 모든 것은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지낸다면 말이다.
다시금 복도로 나서자 잔뜩 긴장한 표정을 한 채 앉아 있는, 미래의 동기들이 눈에 들어왔다.
재승은 그들을 뒤로한 채, 곧장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재승은 오늘 최종면접만큼이나 중요한 일과를 앞두고 있는 상태였다. 미셸에게 저녁 식사 초대를 받았다.
카일과 대화를 나눠볼 수 있게끔 해달라는 부탁을 수락해 준 것이다.
파슨스 UC건물을 나선 재승이, 다시금 힘차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그날 저녁, 재승은 맨해튼 외곽에 자리한 아파트에 발을 들였다.
다름 아닌, 미셸과 카일의 보금자리였는데 재승이 홀로 쓰고 있는 아파트와 비슷한 평수인 듯 보였다.
“들어와요.”
미셸이 살짝 열린 현관문 틈 사이로 얼굴을 빼꼼 내민 채 건넨 말이었다.
이내 재승이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이고는, 곧장 안으로 들어섰다.
특색이 있진 않았으나, 잘 정돈된 집이었다. 미셸의 깔끔하고 꼼꼼한 성품이, 여과 없이 엿보이는 듯했다.
“미셸, 초대해 주셔서 고마워요. 그나저나 카일은요?”
“방에 있어요.”
“아아, 그렇군요.”
“리, 우선 카일의 방에서 기다려 주시겠어요? 아직 식사 준비가 덜 끝나서요.”
말을 마친 미셸이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겸사겸사 대화도 나눠보시고요” 하고 덧붙여 말했다.
이내 재승이 곧장 카일의 방으로 향했다. 노크를 했는데도 반응이 없자, 미셸이 직접 조심스레 문을 열어주었다.
카일은 제 책상에 앉은 채, 이어폰을 꽂고 무언가를 그리는 데 여념이 없는 상태였다.
재승이 카일의 책상을 가볍게 ‘똑똑-.’ 두드려 보이자, 카일이 그제야 인기척을 느끼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맙소사, 리! 어쩐 일이에요…?”
“저녁식사 초대를 받았거든요.”
이내 재승이 카일의 침대 위에 걸터앉으며,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진 방이었다.
이윽고, 재승의 시선이 카일의 책장에 닿던 순간.
‘어라…?’
재승의 표정이 묘하게 돌변했다. 책장에 잔뜩 꽂혀 있는 매거진들 때문이었다.
각국의 패션 매거진이, 잘 정리된 채로 가득 꽂혀 있던 것이다.
심지어 그중에는, 한국의 패션 잡지들 역시 존재했다.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자신의 인터뷰가 수록되어 있는 발행호라는 것.
멍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던 재승이, 카일의 부름 덕에 다시금 정신을 다잡았다.
“리? 왜 그래요?”
멍하니 카일을 바라보던 재승이, 이내 미간을 팍 찡그린 채로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설마, 카일 앤드류?”
재승이 나직이 건넨 물음에, 카일이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이고는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어, 어떻게 알았어요?”
“예?”
“그건, 미셸을 만나기 전의 이름인데….”
패션 파워 블로거이자, 패스트패션 브랜드 타라(Tara)의 수석 디자이너 카일 앤드류.
전생의 기억 저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이름이, 문득 수면 위로 급부상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