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Snake Finds the Wolf Who Played With the Snake RAW novel - Chapter 12
10. * *
찻집에 도착한 로렌은 어수선한 테이블을 정리했다. 손님들의 찻잔을 정리할 때마다 신관의 말이 머릿속에 어른거렸다.
“저희의 안식이 아니라 그분의 안식을 위해서요.”
누가 신관 아니랄까 봐. 제 몸부터 챙기지 못하고 남을 향해 기도하는 꼴이 참…….
‘어째서 화가 나는 걸까.’
로렌은 들고 있던 쟁반을 테이블에 내려 두고서 테이블 앞에 쭈그려 앉았다. 쟁반 위에 쌓여 있던 다 쓴 찻잔과 접시가 서로 부딪치며 차르르 소리를 냈다.
‘에블린, 요즘 내가 이상해.’
로렌은 죽은 양어머니를 떠올리면서 테이블에 매달렸던 팔을 내려 무릎을 끌어안았다.
‘막스웰에게서 이름을 되찾아 자유로워질 생각만 하고 살았는데… 지금은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이름 없는 감정들이 들쑥날쑥하여 혼란스러운 심장이 슬프게 두근거렸다. 앞이 막막했다. 한없이 보잘것없는 존재가 된 것 같아서 부끄럽기도 하였고 한심하기도 하였다. 길고 외로운 적막이 로렌의 어깨를 무겁게 누르던 때.
딸랑― 소리와 출입문이 열렸고 함께 등 뒤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넓은 구두 굽이 묵직하게 마룻바닥을 딛는 소리는 아는 이의 것이었기에 눈가가 시려졌다.
가장 먼저 닿은 것은 비 냄새가 섞인 시원한 향수 냄새였다. 그 뒤로 궐련 냄새가 밴 커다란 손이 로렌의 어깨에 닿았다.
“너 왜 그래. 어디 아파?”
알렉이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로렌은 그를 돌아보지 않고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그렇지 않으면 울컥 밀치는 감정을 목구멍 아래로 삼키기 어려웠다.
“…여기까지 무슨 일인가.”
“대답부터 해. 어디 아프냐고 물었어.”
알렉은 한쪽 무릎을 굽혀 로렌과 눈높이를 맞췄다. 고개 좀 들어 보라고 말했지만 로렌은 고집스럽게 얼굴을 보여 주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영업시간은 끝났어. 지금은 차를 내어 줄 수 없다.”
“젠장, 누가 차 마시려고 왔대?”
“그럼 여긴 왜 들어왔느냐.”
그제야 로렌이 고개를 들었다. 알렉은 그녀의 발개진 눈가를 보더니 입술을 씨근덕거렸다.
“시발, 울었네.”
얼마나 아픈 거야. 알렉은 아직 눈물이 넘치지 않은 눈가를 손가락으로 닦아 냈다.
“욕은 듣기 좋지 않아. 바른말을 써.”
“잔소리하는 걸 보니 죽을 정도로 심각한 건 아닌 것 같고. 아픈 곳이 정확히 어디야. 머리? 배? 아니면 다리?”
알렉은 쭈그려 앉은 로렌의 몸을 샅샅이 살폈다. 혹시 열이 나는 건가 싶어 손을 뻗다가 “만져도 돼?”하고 허락을 구했다. 다급하게 어깨를 짚을 땐 언제고 고작 이마를 만져도 되냐며 묻는 게 우스워서 로렌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열은, 그, 안 나는데.”
크흠. 알렉은 헛기침하면서 손을 이리저리 움직여 열을 재었다. 이마에 닿은 손이 떨리는 것 같았으나 아마도 착각이리라. 이 뻔뻔한 뱀이 손을 떨 이유가 뭐 있겠는가.
“열은 네가 나는 것 같구나.”
로렌이 힘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 말에 발갛던 알렉의 얼굴이 귀까지 붉어졌다. “제기랄.” 알렉은 작게 구시렁대면서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러면서도 그의 손은 로렌과 떨어지기 싫은 것처럼 아쉽게 멀어졌다.
“욕은 쓰지 말라니까.”
로렌이 한 번 더 같은 말을 반복하며 몸에 힘을 주었다.
“그나저나 오랜만이구나. 여긴 무슨 일로 찾아온 건가.”
로렌은 테이블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혼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었으나 알렉은 굳이 로렌의 어깨를 붙들며 부축했다.
그러던 중, 흐읍― 숨 참는 소리가 들렸다. 로렌은 옆에 바짝 붙어 있던 알렉을 올려다보았다. 오랜만에 보아서 그런가. 원래도 큰 사내가 오늘따라 더 커 보여서 고개를 위로 꺾어야 했다.
알렉은 옆으로 고개를 돌린 채 숨을 참고 있었다. 로렌은 코를 킁킁거렸다. 나쁜 냄새가 나는 걸까. 하긴 배달 일을 하고 고아원까지 다녀왔으니 좋은 냄새가 날 리 없지.
‘어째서 이런 게 부끄럽다고 느껴지는 걸까.’
누더기를 걸치고 땀 냄새가 나도 상대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았던 로렌이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은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을 걸 그랬나 하는 후회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무슨 일로 찾아왔냐고 물었어.”
미리 연통이라도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는 생각을 하며 로렌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찾아온 거 아니야.”
알렉은 로렌과 바짝 붙어 있던 몸을 뒤로 물렸다. 이 이상 그녀의 페로몬에 취했다가는 사달이 날 수도 있었다. 벌써부터 정장 바지 안쪽이 빠듯하게 느껴졌다.
“여기까지 버젓이 들어와 놓고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
“진짜라니까? 우연히 근처를 지나가다가 네가 쓰러져있는 걸 본 거야.”
이 근처를 우연히라도 지나갈 일 없었던 알렉은 없던 사업 약속까지 들먹이면서 변명을 늘어놓았다. 각인 해제 후 매일같이 이 주변을 얼쩡거렸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랬구나. 오늘 도와준 건 고맙다. 난 이제 괜찮으니 이만 가거라.”
로렌은 어서 알렉을 내보내려 들었다. 초라한 꼴을 그에게 계속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맨입으로 내쫓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않나?”
“다음에 잊지 않고 차를 대접하겠다.”
“차보다는 다른 게 어때.”
알렉은 품에서 왕의 결혼 초대장을 꺼내 보여 주었다. 그걸 본 로렌의 눈동자가 살짝 떨리더니 곧 안정을 되찾았다.
“곧 국혼식 연회가 있어. 내 파트너가 되어 왕궁에 가 주었으면 하는데.”
그 말에 로렌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고민이 길어지는 만큼 침묵도 길어졌다. 예상과 다른 반응에 알렉은 살짝 미간을 좁혔다.
“너, 왕을 만나고 싶어 했잖아. 그래서 계속 편지를 쓰던 거 아니었어?”
알렉은 언젠가 보았던 로렌의 편지를 떠올렸다. 진심을 꾹꾹 담아 눌러쓴 비뚤배뚤한 글자가 빼곡하던 종이. 어차피 쓰레기통에 버려질 것을 정성껏 쓰느니 저에게 쓰는 게 낫지 않나 헛생각도 했었더랬다. 시선을 내린 로렌은 한참 생각에 잠겨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막스웰을 만나고 싶은 게 맞지만, 그의 결혼식은… 보고 싶지 않아.”
왕을 만날 일생일대의 기회. 하지만 로렌은 고개를 저었다. 막스웰을 만나려는 이유는 맹약을 끊어 내고 이름을 되찾기 위해서였다. 그걸 그의 결혼을 지켜보며 말할 자신이 없었다. 지금처럼 마음이 어지러울 때는 더더욱.
‘거기다 지난번 기차역에서처럼 막스웰에게 실수한다면 그때야말로 저자가 곤란해지겠지. 왕궁 연회는 아주 중요한 자리일 테니까.’
로렌은 개처럼 쇠 목줄을 차야 했던 막스웰과의 만남을 떠올렸다. 자신이 일으킨 사건으로 그는 분명 곤란했을 텐데… 그가 타박 한 번 하지 않은 것이 지금 와서 생각났다.
‘생각보다 속이 깊은 사내인가.’
로렌이 한참 고개를 들어 알렉을 응시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얼굴을 붉힌 알렉은 시선을 홱 피해 버렸다.
“거절해 놓고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 젠장.”
알렉은 품을 더듬어 궐련 케이스를 찾았다.
“나 같은 사내가 옆에 있는데 인간 왕의 결혼 따위가 눈에 들어오리라 생각하다니. 퍽 웃기는군. 결혼식에서 보라지. 왕보다 내 주변에 사람이 더 많을 테니.”
알렉은 입술을 벌려 궐련을 물었다. 로렌은 그의 입술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모양 좋은 입술이 두툼한 궐련을 물고 살짝 벌어진 모습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뭘 그렇게 봐.”
“아, 그것이…….”
“자꾸 내 입술 쳐다보면 오해한다, 달링?”
알렉은 한 손을 주머니에 꽂고서 라이터를 쥐었다. 하지만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금속 라이터가 그의 손아귀에서 천천히 굴러다녔다.
“불은 왜 안 붙이느냐.”
로렌은 궐련 끝을 응시하며 물었다. 그는 종종 이렇게 입에 물기만 하다가 궐련을 던져 버렸는데 그 이유가 궁금하던 참이다.
알렉은 입술로 궐련을 오물거리면서 로렌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네가 이 연기를 싫어할 것 같기도 하고 네 달콤한 체취를 실컷 만끽하고 싶기도 하고. 그렇게 마음속으로 중얼거린 말은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몸이나 잘 챙겨.”
알렉은 한숨을 푹 쉰 뒤 몸을 돌려 찻집을 나섰다.
그런데 등 뒤로 로렌이 따라 나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설마 날 배웅하는 건가? 내심 놀란 알렉은 눈을 빠르게 깜박이면서 입에 물고 있던 궐련을 툭 뱉으며 다시 뒤를 돌았다.
그런데 거기 서 있어야 할 로렌이 보이지 않았다. 로렌은 민첩하게 몸을 움직여 바닥에 떨어질 뻔한 궐련을 단숨에 낚아채고 있었다. 실로 늑대다운 몸놀림이었다.
하아? 알렉의 눈썹이 비틀렸다. 로렌은 민망한 듯 뺨을 긁적였다.
“그러니까… 이게 비싸다고 사샤가 그래서…….”
“…….”
“당신은 원래 입에 물던 걸 자주 버리지 않느냐.”
가게 앞에 이런 꽁초를 버리면 안 된다고 변명을 덧붙인 로렌은 알렉이 버린 궐련을 치마 주머니에 슬쩍 넣었다. 이 궐련 한 개비가 평범한 상단원의 한 달 월급만큼이라 들었으니 이를 팔면 고아원에 큰 보탬이 되리라.
그런 로렌의 속을 알 리 없는 알렉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로렌을 내려다보았다.
“지금 그거 주우러 날 따라 나온 거야? 배웅이 아니라?”
“그렇다.”
“하!”
알렉은 기막혀하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마차가 세워진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내가 아니라 이 궐련 때문이었군. 이깟 궐련이 뭐라고 그걸 따라나서.’
알렉은 구시렁대면서도 마음 같아선 그녀에게 케이스를 통째로 쥐여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게 그렇게 좋은가.’
알렉은 포켓에 넣어 둔 궐련 케이스를 만지작거렸다.
“이만 들어가 봐. 저녁 바람이 싸늘하니까.”
알렉은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로렌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맞인사를 한 로렌이 찻집 안으로 무사히 들어가는 것을 확인했다.
‘앞으로는 이걸 꼭 가지고 다녀야겠군.’
알렉은 궐련 케이스를 툭툭 두드린 뒤 주머니에서 손을 뺐다. 그리고 로렌을 만날 때마다 반드시 궐련을 입에 물고 헤어져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면 어떤 이유로든 그녀가 저를 배웅해 줄 것 같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