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Snake Finds the Wolf Who Played With the Snake RAW novel - Chapter 15
8. 네가 믿어준다면
‘여긴 어디지?’
로렌은 새까만 공간 안에 서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간. 혹시 죽음 속에 들어온 건 아닐까. 로렌은 본능적인 공포와 안도를 동시에 느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죽는 순간 몸이 짓이겨지는 고통은 없었다는 것이다.
‘정말 끝이 났구나.’
로렌은 출구를 찾는다거나 낯선 공간을 탐색하지 않았다. 그저 그대로 무릎을 굽혀 쭈그려 앉았다.
“하지만 언젠가는요, 로렌 님에게도 분명 안식이 함께할 겁니다. 제가 쌓아 놓은 모래알 같은 염원이 분명 당신에게 닿을 테니까요.”
언젠가 신관이 제게 건넸던 말이 떠올랐다. 그대의 염원이 퍽 대단했던 모양이다. 덕분에 지금 자신은 평온한 안식을 찾을 수 있었으니까.
로렌은 평온한 얼굴로 스스로를 포옹하듯이 두 팔을 교차하여 어깨를 감쌌다.
“그간 고생했다.”
하고팠던 말을 또박또박 뱉으니 어쩐지 눈물이 핑 돌았다. 그것이 방울져 뺨을 타고 흘렀으나 굳이 닦아 내지 않았다. 이젠 보는 이를 의식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때 새빨간 구슬 하나가 번쩍 나타나더니 눈앞에 떠다녔다. 체리 사탕 같은 구슬은 은은하게 빛나며 허공을 유영했다.
‘저게 뭐지?’
입술을 살짝 벌린 로렌이 팔을 뻗어 구슬을 잡으려 했다. 구슬은 로렌의 손을 요리조리 피하더니 코앞까지 훅 날아와 로렌의 입술을 비집고 들어왔다.
“……!”
깜짝 놀란 로렌은 두 손으로 목을 붙잡았다. 구슬이 들어오자 입 안이 불타는 것처럼 뜨거웠다. 구슬을 혀로 밀어내려고 해 봤으나 그것은 밀려나지 않고 오히려 로렌의 목구멍 깊이 쑤욱 들어왔다.
커헉! 숨이 턱 막혔다. 전신이 빳빳하게 굳으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쥐가 나듯 신경이 타닥타닥 부딪쳤다. 고통스러웠다. 온몸의 피가 마르고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아파. 아프다. 아파.
“쿨럭!”
그리고 기침과 동시에 숨통이 트였다. 질끈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자 눈앞엔 전혀 다른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여긴…….’
어느 가정집의 낯선 천장. 나무판자를 덧대어 못질한 천장은 낡고 볼품없었으나 여기저기 손때가 묻어 있었다.
로렌은 천천히 침대에 누웠던 몸을 일으켰다. 침대 옆 낡은 의자에는 하늘색 벨벳 후드를 깊게 눌러 쓴 여인이 앉아 있었다. 후드 아래로 보이는 것은 얇은 턱과 붉은 입술뿐.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았으나 블랙커런트와 불가리안 장미 향이 섞인 고급스러운 향기로 그녀가 신분이 높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 허술한 가정집과는 철저하게 성질이 다른 여인이었다.
‘누구냐고 물어야 할까. 나를 왜 구했냐고 물어야 할까.’
로렌이 여인을 보며 잠시 입술을 달싹거렸다. 먼저 말을 한 것은 저 여인이었다.
“참 모자라고 불쌍한 아이였다. 여기서 더 불쌍해지면 내 면이 살지 않아서.”
“지금 무슨 말을…….”
쿨럭. 로렌은 아릿한 목을 쓸어내리며 기침했다.
“내 굳이 너를 번거롭게 살린 이유를 말해 주는 것이다.”
여인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의자 시트 위에 깔고 앉았던 레이스 손수건을 두 손가락으로 들어서 타닥타닥 타오르는 벽난로 안에 던져 버렸다. 낡은 의자에 앉아 있었던 것이 꽤나 불편했던 모양이다.
여인은 별다른 설명 없이 그대로 퇴장하려 했다. 침대에서 일어난 로렌은 그녀를 쫓으려다 털썩 주저앉았다. 아직 회복되지 못한 몸은 걷기도 힘들었다.
“당신은 누구인가.”
로렌은 주저앉은 채로 여인에게 질문했다. 꼿꼿하게 선 여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건방진 언행을 보니 끼리끼리 잘 만났군.’ 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신 들었으면 어서 모자란 놈에게 가 보거라. 그놈이 더 사고 치기 전에.”
“사고?”
“날 만난 건 비밀로 하도록 해.”
자기 할 말만 마친 여인이 손을 까딱대자 출입문이 저절로 열렸다. 여인은 아주 고고한 자세로 밖으로 사라졌다.
얼마나 기절했었는지 문틈으로 보인 밖은 컴컴했다. 곧 허름한 차림새의 부부가 ‘이제 들어가도 되겠지?’ 하면서 후다닥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겁에 질린 얼굴로 여인이 정말 사라졌는지 확인한 뒤 주저앉아 있던 로렌을 일으켜 주었다.
“괘, 괜찮으십니까?”
“당신들이 이 집 주인인가.”
로렌은 테이블 모서리를 짚고서 중심을 잡았다. 정체 모를 귀부인이 무슨 마법을 부린지 몰라도 만신창이였던 몸은 회복된 상태였다.
“네, 여긴 저희 집이지요.”
“신세를 졌다. 고마워.”
“저희가 딱히 한 일도 없는데요. 아가씨를 구한 건 방금 나갔던 그분이십니다.”
상류 쪽 둑이 터져 순식간에 강물이 불어나 강 주변 민가까지 물이 차오르던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나타난 귀부인이 마법을 부렸고 성난 강물이 점차 잔잔해지더니 물살에 휩쓸려 가던 로렌이 둥실 떠올랐다고 했다.
“저희는 아가씨께서 죽었다고 생각했어요. 얼굴도 시체처럼 창백했고, 분명 숨도… 쉬지 않으셨거든요.”
로렌을 건져 낸 귀부인은 그곳에서 가장 가까웠던 이 집으로 들어와 당당히 침대를 차지했다. 그리고 주인 부부를 집 밖으로 내쫓았다고 했다.
“갑자기 안쪽에서 밝은 빛이 막 쏟아지더니, 세상에! 꼭 마법 같았어요. 얼마나 대단한지 번개보다도 더 번쩍였다니까요? 그리고 아가씨께서 정신을 차린 겁니다. 저희는 밖에 있어서 제대로 보진 못했지만요.”
“그 귀부인이 누군지 아는가.”
로렌은 어쩐지 익숙했던 기운을 떠올리며 물었다.
“저희 같은 평민이 어찌 귀족 나리 얼굴을 구분하겠습니까.”
“그래. 대답해 주어 고맙네. 이 은혜는 언젠가 갚도록 하지.”
로렌은 부부에게 허리를 숙여 꾸벅 인사했다. 평민인 우리가 귀족 아가씨께 인사를 받다니! 당황한 부부는 자신들이 더 허리를 깊숙이 숙이면서 황송해했다. 그리고 부부가 천천히 자세를 바로 했을 때 눈앞엔 아무도 없었다. 서둘러 가정집을 나선 로렌은 저만치 달려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