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Snake Finds the Wolf Who Played With the Snake RAW novel - Chapter 3
2. 얼마나 되는가
로렌의 찻집은 벨파슨 기차역 부근이었다. 허허벌판이던 땅에 철도가 깔린 것이 벌써 3년 전. 부우― 덜컥덜컥. 경적과 함께 요란한 소리가 들리면 로렌은 가게 문을 활짝 열고 손님을 맞이했다.
기차가 드나드는 오전엔 손님이 꽤 많았으나 막차가 끊긴 오후에는 한산했다. 그래서 오후에는 가게를 닫고 다른 아르바이트를 했다.
처음엔 아픈 에블린의 약값을 벌기 위해서였으나 그녀가 죽은 뒤로도 로렌은 버릇처럼 일에 몰두했다. 단정하게 머리를 틀어 올린 로렌은 찻집을 정리한 뒤 가게 팻말을 ‘닫힘’으로 바꾸었다.
출입문 잠금쇠를 걸어 잠그고 나서는데 옆집 구둣가게 아저씨가 알은체를 했다.
“오늘도 우편국에 가는 거야, 로렌?”
“응. 기차역에서 의뢰한 배달이 있어서.”
로렌이 중년 사내를 하대했으나 그것에 익숙한 빌은 굳이 따지지 않았다.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아무리 수인이라지만 너는 여자잖아. 그런 일은 그만두고 샬럿이랑 함께 자수를 배우지 그래?”
“난 자랑스러운 늑대다. 힘만큼은 자신 있어.”
정체를 쉬쉬하는 다른 수인과 달리 로렌은 언제나 자신이 늑대임을 떳떳하게 밝혔다. 더 나아가 신이었다고 우기는 것이 문제긴 했지만.
처음엔 로렌이 암컷 수인이라는 이유로 남자들이 추근댔었다. 발정기가 있는 수인은 방탕할 거라는 편견 때문이었다.
그때마다 로렌은 도스턴의 ‘본보기를 보여라’라는 가르침대로 남자들을 바닥에 패대기쳤다. 덕분에 이제는 누구도 로렌을 함부로 건들지 않았다.
“그럼 좋은 하루 되거라, 빌.”
로렌은 이웃의 행운을 진심으로 빌면서 씩씩하게 기차역으로 걸어갔다. 바로 코앞이라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기차역 앞 거리 풍경이 어제와 달랐다. 분주한 행인들 틈으로 여기저기 붙어 있는 낯익은 전단지.
[검은 뱀을 농락한 여인을 찾습니다.]오늘 아침 신문에서 보았던 그 광고였다.
낡은 헌팅캡을 쓴 소년들이 누런 종이에 인쇄한 전단지를 건물 벽과 기둥에 덕지덕지 붙이고 있었다.
신문 광고와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어설픈 몽타주가 추가된 것이었다. 행인 하나가 몽타주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검은 뱀을 농락했다는 건 무슨 뜻이지??”
“요 그림을 보아하니…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여자가 상단주를 협박한 모양이야.”
“그 무시무시한 상단주를?!”
“이 무서운 그림 좀 보라고. 여자가 상단주를 의자에 묶고 협박하잖아.”
“그럼 여자 주변에 반짝이는 건?”
“돈을 의미하는 거겠지. 겁나 돈 많은 여자였나 봐.”
하지만 행인들은 검은 뱀에게 걸린 이상 빈털터리가 될 거라면서 혀를 차며 걸음을 옮겼다.
“검은 뱀에게 걸린 이상 빈털터리가 될 거야.”
하얗게 질린 로렌은 그들이 남긴 말을 상기하면서 벽에 붙은 전단지를 떼어 가방 안에 쑤셔 넣기 시작했다. 기차역에 도착할 때쯤 로렌의 가방은 누런 종이 더미로 수북했다.
* * *
로렌은 굽이 낮은 부츠의 끈을 단단히 동여매고 지게를 멨다. 튼튼한 지게 위로 몸집의 두 배가 넘는 커다란 짐을 올렸으나 흔들리는 일은 없었다. 힘이 센 로렌에게 그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오늘도 잘 부탁하네, 로렌.”
역장은 로렌에게 은화 한 개를 내밀었다. 같은 짐을 나르고 은화 두 개를 받아 가는 마차꾼보다 로렌에게 의뢰하는 것이 그에게도 이득이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가방에 뭐가 많구먼.”
역장이 전단지가 가득한 로렌의 가방을 힐끔거렸다.
“아, 아무것도 아니다. 역장님, 이만 출발 하겠다.”
로렌은 아주 당연한 듯이 반말을 쓰면서 우편국으로 향했다.
역장이 처음부터 그 말투에 적응한 것은 아니었다. 귀족도 아닌 것이 어디서 그런 말투를 함부로 쓰냐며 길길이 날뛰었으나 반듯하게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나서는 그녀를 딱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로렌이 향한 우편국은 아주 멀지 않았다.
마차로 둘러 가면 30분이 걸렸으나 샛길로 부지런히 걸어가면 50분 안에 도착하는 장소였다. 로렌은 거리를 누비는 이 시간이 좋았다.
주간지를 파는 상인과 구두 닦는 아이, 시를 읊는 시인과 그 앞에 걸음을 멈춘 관객들, 서둘러 걸어가는 행인과 마차를 기다리는 짐꾼들.
많은 인파가 로렌을 스쳐 지나갔다. 수호신은 사라졌지만 왕국민은 여전히 활기찼다. 애초에 신이란 없었던 것처럼.
로렌은 그런 왕국민들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저들은 알까.’
책임감을 어깨에 이고 나라의 번영을 기원하던 수호신이, 지금은 무거운 지게를 이고서 그들 곁을 지나가고 있다는 걸.
그들에게 왕국을 지키는 늑대 신을 기억하냐고 묻고 싶으면서도 그저 이렇게 잊혔으면 했다. 저를 놓아 버린 이들이 밉기도 하였고 한없이 어여쁘기도 했다.
저울 반대편에 올라간 감정들이 위아래로 출렁였다. 멍한 초점은 군중들 사이로 흩어졌다가 익숙한 풍경을 마주하고 또렷해졌다.
중앙 우편국.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로렌은 대문에 달린 사자 얼굴 손잡이를 잡고서 쿵쿵 문을 두드렸다. 몇 초 뒤 입술을 빨갛게 칠한 젊은 여인이 나왔다. 우편국 직원, 샬럿이다.
“세상에, 로렌! 오늘도 여전히 무리했구나.”
샬럿은 염색한 금발을 매만지면서 로렌의 짐을 보고 경악했다.
“거기 자기들, 나 좀 도와줄래요?”
샬럿이 실내에 있던 남자 직원들을 부르자 로렌이 손사래를 쳤다.
“괜찮아, 샬럿. 내가 혼자 할 수 있다.”
“혼자는 무슨! 그래서 결혼은 어떻게 하려고 해? 가끔은 약한 척도 좀 하라고, 이 반듯하게 미친 여자야.”
어머, 벌써 나왔구나. 잘 부탁해, 자기들! 샬럿이 건물에서 나온 건장한 남자 직원들에게 윙크했다. 얼굴이 새빨개진 남자들은 소매를 걷더니 로렌의 짐을 내리기 시작했다.
“어라, 이거 무게가 꽤…….”
“윽, 그쪽 좀 잘 잡아 봐.”
무거운 짐들이 쿵 소리를 내면서 바닥으로 내려왔다. 그들이 한참을 낑낑대는 시간 동안 로렌은 짐을 이고 가만히 서 있어야 했다.
“이제 이런 일은 그만해, 로렌. 차라리 남자 하나 소개해 줄까? 살짝 미친 게 취향이라는 사내들도 있는데.”
“필요 없다.”
“무슨 소리! 수호신도 없는 각박한 세상에서 널 보호해 줄 수 있는 건 남자뿐이라고. 신이 있었을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쓸데없이 기도는 왜 그리 많이 했는지. 그럴 시간에 피부 관리나 할 걸 그랬다면서 샬럿은 잘 다듬은 손톱을 틱틱 튕겼다.
“기도를… 많이 했었어?”
“어릴 적에는 누구나 그렇잖아.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 달라고 엄청 빌었지. 로렌은 그런 적 없어?”
네가 신이라는 이상한 소리 말고 솔직하게 말해 봐. 샬럿이 뒷말을 덧붙이며 물었다.
“나, 나도, 그랬지.”
“어머, 무슨 소원 빌었는데?”
샬럿이 눈을 반짝거렸다. 저 오동나무 같은 여자가 어떤 염원을 안고 사는지 궁금했다.
“왕국에 비가 내리게 해 달라고… 기도했었어.”
“아우, 재미없어. 딱 저 같은 소원만 빌었네.”
샬럿은 지루한 표정을 지으면서 입술을 아래로 끌어 내렸다.
“그런 거 보면 늑대 신도 참 거지 같았어. 그렇게 기도했어도 너나 나나 비싼 물감 냄새나 비 냄새는 못 맡고 자랐으니까.”
그 말에 로렌의 얼굴이 단번에 어두워졌다. 샬럿은 왜 네가 슬퍼하냐면서 로렌의 팔뚝을 꾹 찔렀다.
“어머, 지금 늑대 신을 욕했다고 기분 나빠하는 거야? 꽤 신실했었나 보네. 농담이니 기분 풀어. 과거야 어쨌든 지금 잘 살면 됐지.”
“…그래.”
“그나저나 오늘은 없어? 수요일이잖아.”
샬럿이 로렌에게 손을 내밀었다.
로렌은 어두운 낯빛으로 멍하니 서 있었다. 샬럿이 로렌? 하고 부르면서 내민 손을 흔들었다. 그래도 반응이 없자 물건을 직접 꺼내려고 로렌의 두툼한 가방으로 손을 뻗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로렌이 두 팔로 가방을 막으면서 버벅거렸다.
“여, 여긴 아니고, 오늘은 이곳에 넣어 왔어.”
로렌은 가방을 뒤로 감춘 뒤 치마 주머니에서 작은 편지를 꺼냈다. 국왕, 막스웰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막스웰. 환생한 그는 똑같은 얼굴로 태어나 그때와 같은 이름을 쓰고 있었다. 왕국민들은 건국 왕이 다시 태어난 것 같다며 환호했지만 진짜 환생한 걸 아는 사람은 아마도 로렌뿐일 것이다. 맹약으로 묶인 사이는 죽더라도 영혼이 돌고 돌아 서로 다시 만나게 되니까.
다시 태어난 막스웰에겐 전생의 기억이 없을진 몰라도 여태껏 살아온 로렌이 그를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로렌은 도스턴에게 글을 배우자마자 막스웰에게 만나 달라는 편지를 매주 꾸준히 쓰고 있었다. 그가 보고 싶은 게 아니었다. 수호신의 맹약을 맺을 때 그에게 바쳤던 자신의 이름을 되찾기 위해서였다.
이제 자신은 수호신이 아니니 이름을 되돌려 받아야 했다. 그래야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었다. 이름을 받지 못한다면 다음 생애에도 막스웰과 묶이게 될 텐데 저를 죽이려 한 사내와 인연이 닿는 것은 사양이었다.
‘그리고 나를 죽이려 했던 이유도 묻고 싶어.’
쓸모없는 신이었기에 버림받았을 테지만 그에게 직접 듣고 싶었다. 로렌은 삐뚤빼뚤한 글씨가 쓰인 편지 봉투를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에휴, 정말 못살아. 샬럿이 한숨을 내쉬며 로렌이 쥐고 있던 편지를 가져갔다.
“항상 말하지만, 로렌. 왕에게 이 편지가 전달될 확률은 거의 없어. 알지?”
“응, 안다.”
로렌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국왕은 높으신 귀족 나리들조차 함부로 독대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들었다. 그런 자가 일개 평민의 편지를 읽고 저를 만나 줄 가능성은 거의 없겠지.
무모하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건 뭐든 시도해 보고 싶었다.
“좋아.”
샬럿은 고작해야 말단 시종 손에 소각될 편지를 주머니에 넣었다. 이번엔 우편국장 몰래 ‘중요 우편’ 도장도 찍어 줄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이번 편지는 서기관의 방에 곱게 버려질 수도 있을 것이다.
* * *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오는 길과 달랐다. 로렌은 중앙광장을 둘러 돌아가는 길을 좋아했다. 그러면 담장 위로 솟은 아름다운 왕궁을 구경할 수 있었다.
광장에는 커다란 분수대가 있었는데, 그 중앙에는 원래 늑대 동상이 있었지만 지금은 막스웰의 동상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로렌은 품삯으로 받은 은화로 작은 신발 한 켤레와 호밀빵을 산 뒤 분수대로 걸어갔다. 그 앞에는 소년 하나가 쭈그려 있었다. 구두닦이였던 소년은 하루 일당을 못 채워 맨발로 쫓겨나 며칠째 노숙 중이었다.
이 사정을 알게 된 것은 나흘 전. 평소처럼 광장을 둘러 가는데 그 소년이 버려진 작은 늑대 조각을 구석에 세워 두고 남몰래 기도를 올리더라. 불우한 사정을 설명하던 목소리는 너무도 간절했었다.
로렌은 아이 앞으로 다가가 새 신발과 빵이 든 봉지를 말없이 내려 두고 멀어졌다. 이것이 로렌이 건넬 수 있는 작은 최선이었다.
‘난 이제 신이 아니야.’
로렌은 한 번 더 제 처지를 곱씹었다. 인간과 같아졌으니 함부로 그들을 어리석고 불쌍한 존재로 판단하면 안 된다. 그것이야말로 오만이 아닐까.
“앞으로는 신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 되어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아 줬으면 좋겠어. 죽은 딸의 몫까지.”
에블린의 유언이 더는 타인의 생에 죄책감을 느끼지 말라는 듯 귓가에 맴돌았다.
그렇게 한참 광장을 빙빙 돌았다. 아이들이 까르르 웃는 소리가 곁을 스치는데 수군대는 목소리가 그 사이로 들렸다.
“이봐, 그 전단지 봤어?”
“저쪽에 붙어 있는 전단지?”
“응. 누가 그러는데 그 여자를 찾으면 상금이 어마어마할 거래.”
“그래? 몽타주는 못 알아보겠지만 반짝거리는 여자를 보면 곧장 제보해야겠어.”
전단지? 놀란 로렌은 곧장 고개를 돌렸다. 여기저기 붙어 있는 누런 종이가 보였다.
‘대체 몇 개를 붙인 거야!’
로렌은 은근슬쩍 주변의 눈치를 보며 그것들을 떼기 시작했다. 수거한 전단지로 가득한 가방은 이제 닫히지도 않았다.
그렇게 골목 구석에 붙은 마지막 전단지를 떼어 낼 때였다. 누군가가 로렌의 등 뒤로 다가와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지금 뭐 해, 레이디?”
“보는 대로 바쁘다.”
귀에 익은 목소리였음에도 로렌은 전단지를 떼는 데만 집중했다. 상대는 로렌의 어깨를 한 번 더 두드렸다.
“이봐, 그런 짓 하다가 상단에 걸리면 어쩌려고?”
“그러니 몰래 떼고 있지 않나.”
“말투 참 독특하네. 여튼 그건 그만하고 나랑 차 한잔 어때?”
“차 싫어한다.”
“음? 차를 파는 사람이?”
상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커피는.”
“커피도 싫어한다.”
“그럼 식사는?”
“식사도 싫어한다.”
“…그럼 잠깐 대화라도 하지.”
“대화도 싫어한다.”
로렌은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제안을 거절하며 전단지를 떼었다.
“그건 싫어도 해야 할 텐데?”
끊임없이 질척대는 놈은 불순한 목적을 가진 게 분명했다. 이런 상대를 만나거든 ‘본보기’를 보여 주라던 도스턴의 가르침에 따라, 로렌은 상대의 팔과 멱살을 잡고 망설임 없이 몸을 숙였다.
‘어?’
이상했다. 이 정도면 넘어가고도 남았을 텐데, 상대는 로렌의 힘을 버티고 있었다.
“힘자랑은 여전하군.”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익숙했다. 화들짝 놀란 로렌은 뒤늦게 상대를 확인했다.
‘그, 그놈이야.’
발정기에 만났던 검은 뱀, 그 사내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반질반질한 실크 정장이 짐승처럼 벌어진 그의 어깨와 두툼한 흉곽을 매섭게 조이면서 그를 지적인 사업가로 보이게 만들었다.
“안녕? 오랜만이네.”
그의 시선이 제 얼굴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당황한 로렌은 시선부터 피했다.
‘괜찮아. 기억을 지웠으니 날 알아보진 못할 거야.’
로렌은 괜찮다는 말을 주문처럼 되뇌면서 그의 멱살을 붙잡았던 손을 어색하게 떼어 냈다. 그리고 그에게서 한 걸음 멀어졌다. 방금 그와 닿았던 어깨와 등이 이유 없이 홧홧했다.
“전단지가 엄청 마음에 들었나 봐. 내가 큰돈을 들여 붙인 걸 죄다 떼고 있네.”
“그, 그게… 보기가 지저분하여.”
고개를 푹 숙인 로렌은 손으로 이마를 가려 얼굴을 감췄다. 샛길로 도망가고 싶은데 꿀단지를 끌어안은 곰 같은 사내가 멍한 얼굴로 도주로를 막고 있었다.
‘저 사람도 일행인가 봐. 어떡하면 좋지?’
로렌은 천천히 걸음을 물렸다. 등 뒤로 딱딱한 벽이 닿았다. 더는 도망갈 곳이 없었다.
“와. 많이도 모았네.”
검은 뱀의 시선이 가방에 닿았다. 로렌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어설프게 가방을 가렸다.
“내 이름은 알렉산더 젠카이저다. 알고 있지?”
“모른다.”
대충 대답한 로렌이 몸을 돌려 이곳을 빠져나가려 했다. 로렌이 발을 디디려 하자 늘씬한 정장 구두가 그 앞을 막았다.
“그럴 리가. 이 대륙에서 국왕 이름은 몰라도 내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거든.”
정장 구두가 로렌의 부츠 앞코를 박자에 맞춰 툭툭 쳐 댔다. 그 작은 진동이 발에 퍼질 때마다 다리를 타고 소름이 쭈뼛 돋았다. 도망칠 수 없어. 로렌의 직감이 소리치며 위험을 알렸다.
“사, 사람을 착각한 것 같아요.”
어색한 존댓말이 부자연스럽게 튀어 나갔다. 자신을 알렉산더라 소개한 검은 뱀은 푸하하 웃음을 터트리면서 손을 내밀었다.
“넌 오히려 존대가 어색하군. 그 애늙으니 같은 말투가 신기하게도 어울린단 말이지.”
“…….”
“편하게 알렉이라고 불러. 말도 편하게 하고. 특별히 너에게만 허락해 주지.”
“다, 당신을 모른다니까요.”
“처음엔 나도 그런가 싶었거든?”
알렉은 먼발치서 로렌을 확인했을 때를 떠올렸다. 이 여자에겐 찬란한 은발도 오색빛깔 눈동자도 없었다. 푸석한 잿빛 머리칼과 색소가 여린 눈동자는 제 기억과 완전히 달랐다.
그런데 전신의 세포가 그녀를 향해 감각을 세웠다. 억지로 시선을 돌리려 해도 그녀의 작은 손짓 따위가 계속해서 시야에 박혔다.
본능이 소리쳤다. 네가 각인한 반려가 저기 서 있다고.
“도저히 헷갈릴 수가 없더라. 너 맞아.”
알렉은 다시 한번 내민 손을 흔들었다.
“무슨 말인지 도저히…….”
로렌은 고개를 홱 돌려서 알렉의 손을 무시했다.
“모른 척은 그만하고 순순히 따라오지 그래? 우리 할 말이 많잖아, 로렌 루즈벡.”
알렉의 입에서 로렌의 이름이 정확하게 튀어나왔다. 퍼뜩 놀란 로렌은 주변을 황급히 살핀 후 작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어, 어떻게 내 이름을 안 것이냐!”
“웬 여자가 내가 붙인 전단지를 수거한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알았지. 내 정보력이 그 정도는 되거든.”
그뿐만 아니었다. 5년 전 루즈벡 가문의 양녀로 들어갔다는 사실부터 양어머니가 작년에 죽고 도스턴 교수가 유일하게 남은 가족이라는 것까지 알았으나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늑대 수인이라는 것과 반듯하게 미친 여자라는 별명까지도.
‘자신을 죽은 늑대 신이라 사칭한다고 했던가.’
설마 싶었던 알렉은 진지한 눈빛으로 로렌을 훑어보았다.
늑대 신을 직접 본 적은 없었으나 영물과 수인 정도는 충분히 구분할 수 있었다. 공통점이라곤 늑대란 것 말고는 없는 그저 평범한 수인. 딱딱하던 얼굴에서 코웃음이 흘러나왔다. 저런 여자가 수호신이었을 리 만무했다.
“비겁한 늑대로군. 내 처음을 농락하고 도망갈 거야?”
“내, 내가 언제 농락을……!”
로렌은 차마 그 사실을 부정하지 못하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렇게 안절부절못하는 사이, 달그락달그락 말발굽 소리와 함께 커다란 마차가 로렌의 바로 옆으로 섰다.
‘무슨 마차지?’
이렇게 크고 멋진 마차는 처음 보았다. 최고급 흑목으로 만든 마차는 섬세한 금세공과 장식이 달려 있어 화려했다. 윤기가 흐르는 검은 말 네 마리가 마차에 묶여 콧김을 푸르릉 뿜고 있었다.
알렉은 마차를 턱짓했다.
“타.”
“시, 싫다.”
“그러면 이 사람 많은 길바닥에서 지난 밤의 질척한 이야기를 계속하든지.”
“…어딜 가려는 것인데.”
“전단지에 써 놨잖아.”
알렉은 로렌의 가방으로 손을 뻗어 수북이 쌓인 종이 뭉치 하나를 집었다.
[좋은 말로 할 때 검은 뱀 상단 중앙 지점으로 오세요.]알렉은 그 문구를 손가락으로 조용히 가리켰다.
* * *
상단 중앙 지점의 가장 꼭대기 층.
‘궁전이 이보다 화려했던가.’
로렌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양탄자가 깔린 긴 복도를 따라 걸었다. 예술을 모르는 이도 한눈에 그 가치를 알아볼 만큼 아름다운 미술품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신기한 점은 늑대 신을 본뜬 조각상이 예술품 사이로 드문드문 보인다는 것이다. 버려진 걸 주워 모았는지 깨지거나 부서진 꼴은 영 볼품없었다.
‘왕궁에서 신이 죽었다고 선포한 뒤 나를 본뜬 석상은 모두 폐기되었는데…….’
보기와 다르게 독실한 신자였던 건가. 로렌은 시선을 들어 앞서가는 알렉을 힐끔거렸다. 늑대 신이 죽었다는 소식에 슬퍼했을 사내를 상상하니 저 뺀질대는 뒤통수가 조금은 딱해 보였다.
그렇게 도착한 알렉의 집무실 앞.
“자, 이쪽으로 오시죠, 레이디.”
사샤가 대리석 출입문을 열어 주며 허리를 꾸벅 숙였다. 문틈으로 보인 집무실은 깔끔하고 우아했다. 그날 밤, 추잡하고 끈질기게 교접했던 사내를 떠올리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었다.
앞서가던 알렉은 어느새 로렌의 뒤에 있었다. 삐딱하게 서서 집무실로 들어가라며 턱짓하는 자세를 보니 조금 전 느꼈던 가여움이 싹 사라졌다. 로렌은 저 건방진 사내에게서 시선을 뗀 뒤 사샤를 향해 미소 지었다.
“고맙구나. 아니, 고마워요.”
당연한 듯 반말이 튀어나와서 로렌은 말을 고쳤다.
“하하, 괜찮아요― 말씀 편히 하세요, 레이디.”
사샤는 불쾌해하기는커녕 ‘보기랑 다르게 연상이구나.’ 하고 상황을 쉽게 납득했다.
“그럼 편히 말하도록 하마.”
예의상 거절하는 것 따위 모르는 로렌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뒤따라오던 알렉은 사이좋게 대화 중인 둘을 번갈아 보더니 사샤가 열어 둔 문 안으로 자기가 먼저 쏙 들어갔다. 레이디 퍼스트 따윈 안중에도 없는 태도였다.
“원래― 저래요, 레이디.”
로렌의 키에 맞춰 허리를 굽힌 사샤가 작게 속삭였다. 귓속말치고는 말투가 느려서 로렌은 귀를 살짝 떼어 냈다. 낯선 이의 뜨거운 입김을 길게 느끼고 싶지 않았으니까.
“저놈 성질 더러워 보이죠? 그렇게 보이는 게 아니라 진짜 싹퉁머리가 없어요.”
“뭐?”
“자기가 제―일 잘났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잘나긴 했으니까, 뭐.”
레이디도 그렇게 생각하죠? 사샤가 팔꿈치로 로렌의 팔뚝을 툭툭 쳐 댔다. 인상을 쓴 로렌은 그가 닿았던 팔뚝을 쓸어내리며 사샤와 한 번 더 거리를 벌렸다. 하지만 눈치 없는 사샤는 다시 잽싸게 다가와 소곤거렸다.
“레이디야말로 알렉의 대―단함을 아실 테니까요.”
“내가 어떻게 저 사내의 대단함을 아는가.”
“얼라리?”
사샤가 커다란 몸을 들썩이며 놀랐다.
“아, 그, 별거 없었어요? 지난밤이 굉―장히 특별했을 것 같은데.”
“글쎄. 무엇이 특별해야 하지?”
“아, 아닙니다, 하하.”
예상치 못한 반응에 사샤가 당황했다. 로렌이란 여성에게 알렉은 매일 아침 먹는 호밀빵 같은 놈이었나 보다. 어떡하냐, 알렉. 너 생각보다 밤일이 별로였나 봐. 사샤가 알렉을 짠하게 응시했다.
그런 사샤의 속마음을 알 수 없었던 알렉은 윤이 반질반질한 소파에 털썩 앉았다.
“앉아.”
로렌에게 맞은편 소파를 가리킨 알렉은 협탁 위 가죽 케이스를 열었다. 그 안에는 고급 궐련이 나란하게 정렬되어 있었다. 그중 하나를 집어 드는 손길은 무의식에 가까울 정도로 자연스럽다.
“미안하다.”
소파에 앉은 로렌이 다짜고짜 사과부터 건넸다. 궐련을 물고 있던 알렉의 표정이 대번에 굳었다.
“…뭐?”
반듯하던 관자놀이가 꿈틀거리며 그 아래 푸른 핏줄이 도드라졌다. 금빛 안광이 번뜩였으나 로렌은 겁먹은 기색도 없었다.
다짜고짜 사과부터 하는 속내를 알 것 같아서 알렉은 목이 타기 시작했다. 재킷 안쪽에서 기름 라이터를 꺼내던 손이 머뭇거렸다. 황금빛 눈동자가 그녀에게 짧게 머물렀다가 천장으로 향했다.
젠장. 끝내 궐련에 불을 붙이지 못한 알렉은 한숨만 내쉬었다. 폭발하지 못한 분노가 시퍼런 얼음덩이가 되어 심장을 굴러다녔기에 알렉의 표정도 덩달아 싸늘하게 식어 갔다.
“어우, 갑자기 왜 이렇게 추워? 누가 창문 열어 놨나?”
사샤가 눈치 없이 추위를 호소하면서 로렌의 옆자리로 걸어왔다. 마차에서처럼 그녀와 나란히 앉으려고 무릎을 굽히는데.
“넌 아직도 여기 있었나.”
알렉이 입에 물고 있던 궐련을 느닷없이 사샤에게 내던졌다. 사샤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날아온 궐련을 잡아챘다.
“아니― 왜 또 성질이야.”
느릿한 말투와 달리 동작은 재빠른 사내였다. 그는 낚아챈 고급 궐련을 주머니에 슬쩍 챙기면서 능청을 떨었다.
“나가.”
“어어? 나도 이곳의 이인자로서 네 반려의 이야기를…….”
“사샤.”
알렉이 말꼬리를 잘랐다. 싸늘한 표정과 다르게 그를 부르는 목소리는 부드럽고 다정했다.
알렉의 날 선 반응에도 태연하던 사샤는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사색이 되었다.
“내가 버, 벌꿀 차 좀 타 와야겠네요.”
눈을 동그랗게 뜬 로렌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사샤를 올려다보았다. 갑자기 무슨 일일까. 반려라는 말은 또 뭐고. 하지만 그에 대한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명복을 빌어요, 레이디.”
사샤가 로렌에게 속삭인 뒤 부리나케 방을 나섰다.
이제 방 안에는 둘뿐이었다.
로렌은 닫힌 문을 가만히 응시했고 그 시간만큼 정적이 흘렀다. 로렌은 주먹을 꽉 쥐면서 무거운 입을 열었다. 용맹한 늑대라면 이런 문제 상황도 응당 피하지 않는 법이다.
“당신, 알렉산더라고 했던가.”
“알렉이라고 부르라니까.”
“그래, 알렉. 아까 했던 사과는 진심이다.”
그러자 알렉의 눈동자가 더 사나워졌다. 그의 한쪽 입꼬리가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파르르 경련했다.
알렉은 재력과 권력이 넘치는 사내였다. 뛰어난 외모는 또 어떻고. 다들 자신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싶어서 안달복달하거늘. 이 여자는 애초에 관심이라곤 하나도 없어 보였다. 그 점이 건방지기도, 신기하기도 하였다.
“아까부터 뭘 사과하는 건지 궁금하군.”
여유 있는 척해도 속이 타는 쪽은 알렉이었다. 모든 관계에서 상대를 끊어 내고 밀어내는 것은 언제나 그의 역할이었거늘. 난생처음 각인했던 상대가 먼저 저를 밀어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더 화가 나는 건 정작 자신은 각인 때문에 저 여자가 그저 어여뻐 보인다는 것이다.
속이 복잡한 알렉과 달리 로렌은 자신이 무얼 사과 중인지를 담담하게 고백했다.
“그날 있었던 일… 다.”
“다?”
하하! 알렉은 어처구니없어하며 상체를 로렌을 향해 기울였다.
“사과하고 그다음은.”
알렉의 샛노란 눈동자가 맹수처럼 로렌을 응시했다.
“그냥 없던 일처럼 지나가자고?”
그녀의 기다란 속눈썹과 그 아래로 드러난 신비로운 눈동자는 흐릿하게 남은 기억 속 모습과 똑같았다. 쓸모없는 사과만 반복 중인 저 요망한 입술과 은은하게 풍기는 특유의 향기까지도.
‘이런 상황에서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빌어먹을.’
알렉은 본능적으로 끓어오르기 시작한 욕망을 감추기 위해 긴 다리를 꼬았다. 소파 손잡이에 팔꿈치를 걸치고 턱을 괴면서 표정을 감추려 했으나 붉게 달아오른 그의 귀는 그의 희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집무실이 넓고 그녀와 가까이 있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저 늑대의 달콤한 체취에 취해서 자존심도 없이 실수를 저질렀을지도 모른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당장에 삼키고 싶은 저 붉은 입술은 변명을 늘어놓느라 바빴다.
“지난밤은 그, 어쩔 수 없었다. 발정기였어. 수인이라면 누구나 겪는 것이니 너도 잘 알 테지.”
“하아?”
알렉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질 낮은 바람둥이가 한 번 잔 여자와 헤어질 때 즐겨 하는 멘트가 지금 저 여자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 남녀의 가벼운 교합은 평범한 인간들 사이에서도 벌어지는 흔한 일이라 한다.”
로렌은 언젠가 샬럿에게 들었던 문란한 소문들을 떠올리면서 애써 태연한 척했다. 귀족 나리들도 애인이 여럿인 경우가 허다하고 평민들 사이에서는 가벼운 만남을 추구하는 게 유행이라고 했다. 그러니 아무 남자나 한번 만나 보라고 그리 성화이지 않았나.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로렌은 이번 일을 그리 여기기로 했다. 아주 사소하고 가벼운, 시작과 끝이 함께였던 만남으로.
하지만 상대가 나빴다.
“할 말은 다 했어?”
대륙의 자금을 쥐락펴락하는 사내의 심장은 로렌이 거부하기엔 너무나 거대했던 모양이다.
“내가 누군 줄 알고는 있나?”
“…검은 뱀.”
“그래, 내가 바로 검은 뱀 상단이야. 땅을 기면서 물자를 나르는 대륙 철도의 주인이지. 이런 내가 어떻게 나올 것 같아?”
“돈을, 원해?”
로렌은 가장 간단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세상의 모든 일은 저마다 일정한 가격이 있었다. 차 한 잔은 3실론, 지붕 수리는 50실론, 우편국 심부름 한 번에 은화 한 닢.
로렌의 작은 머리가 저 사내와 함께 보냈던 지난 밤의 가격을 측정하느라 바쁘게 돌아갔다.
“돈? 하하.”
감히 내 앞에서 돈을 언급하다니. 알렉은 코웃음을 쳤다.
“내가 원하는 만큼 줄 수 있다고 생각해?”
왕국의 재정보다 더 큰 돈을 굴리는 자가 바로 자신이었다. 그런 저와의 하룻밤을 돈으로 계산하겠다는 소리가 황당하지 않나.
그사이 로렌은 굳은 얼굴로 주머니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찰랑찰랑. 구리로 만든 가벼운 동전 소리가 울렸다.
설마? 알렉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그 잔돈푼 소리가 들릴 때마다 이상하게 불길한 예감이 들어 뒷골이 뻐근했다.
곧 주머니를 탈탈 털어 낸 로렌이 구깃구깃한 지폐와 동전을 테이블 위로 내려 두었다.
알렉은 그 조촐한 액수를 보면서 눈을 빠르게 깜박거렸다.
총 34실론하고도 9센트. 대여섯 번을 다시 세어도 결과는 같았다.
은화 한 개보다도 못한 금액은 지금 알렉이 다시 꺼내 입에 문 궐련을 50개로 나눈 조각의 가격에도 미치지 못했다.
“우선 내가 줄 수 있는 건 이 정도야.”
로렌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침을 꼴깍 삼켰다.
역시 너무 많은가? 그날 밤 나를 한계까지 몰아붙였던 걸 떠올리면 저 돈도 아까운데.
그래, 시세가 얼만지 모르겠지만 저건 너무 비싸다.
신중한 고민 끝에 내놓았던 지폐 한 장을 다시 거두려던 때였다. 자신의 작은 손짓 한 번에 커다란 사내의 얼굴이 곧 죽을 것처럼 파리해졌다.
왜 저렇게 불쌍한 얼굴을 하는 건지.
그 모습이 어쩐지 딱했다. 로렌은 미련이 철철 넘치는 손짓으로 지폐를 다시 내려 두었다. 지폐를 졸졸 따라다니던 사내의 시선엔 안도와 자괴감이 섞여 있었다.
“그, 그날 밤 당신의 노동 가치를 다른 일과 비교했을 때 이 정도면 꽤 좋은 가격 같아.”
“좋은… 가격?”
“그다지 힘든 일은 아니었던 것 같았으니까.”
노동의 가치. 그다지 힘들지 않은 일. 로렌이 별다른 생각 없이 뱉은 말은 알렉의 두꺼운 심장을 너무도 쉽게 뚫어 버렸다. 알렉의 입술이 기가 막힌다는 듯 벌어졌다. 그가 물고 있던 궐련이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혹시 모자란다고 생각하면 기차역 앞에 있는 ‘루즈벡 찻집’으로 오거라. 늑대의 명예를 걸고 어떻게든 보상하겠다.”
그럼 이만. 로렌은 허리를 꾸벅 숙이고 인사를 한 뒤 총총 집무실을 나섰다. 설마 모자랄 리가 있겠냐 싶었던 그녀의 뒷모습은 너무도 당당했다.
굳어 버린 알렉은 퇴장하는 로렌을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벌어진 입에선 바람이 빠지는 소리만 연신 흘러나왔다.
조금 뒤 사샤가 다급하게 집무실로 돌아오면서 로렌이 퇴장한 복도를 가리켰다.
“저기― 괜찮아, 알렉? 그 여자, 집으로 돌아가던데.”
“…….”
“알렉?”
“…….”
“지금이라도 그 여자 붙잡을까?”
사샤의 물음에도 알렉은 혼백이 나간 것처럼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뭐야, 또 왜 저러는 건데. 사샤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바닥에 떨어진 궐련을 주워서 주머니에 슬쩍 넣었다. 돈이 있어도 못 구하는 고급 궐련이라 팔면 꽤 돈이 되었다. 그러다 테이블 위에 널브러진 잔돈이 시야에 들어왔다.
“얼라리, 저 푼돈은 뭐야?”
“하, 하하.”
침묵하던 알렉이 헛웃음을 뱉기 시작했다. 그는 실성한 사람처럼 어깨를 흔들며 웃더니 한참 뒤에 돈의 출처를 밝혔다.
“내 몸값.”
“뭐?”
“그 여자가 준 내 몸값이라고.”
알렉은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저 잔돈푼이? 뭐야, 손톱이라도 잘라다 팔았어?”
“…….”
“아, 아냐, 아냐. 대답하지 않아도 돼.”
사샤가 빠르게 질문을 취소했다. 마른세수한 뒤 밖으로 드러난 알렉의 얼굴이 너무도 싸늘해서 더는 말을 붙일 수 없었다.
* * *
찻집을 오픈하자마자 손님이 들이닥친 경우는 처음이었다.
로렌이 가게 팻말을 ‘열림’으로 바꾸자 저 멀리 서 있던 마차에서 커다란 사내 둘이 내리더니 성큼성큼 찻집 안으로 들어왔다.
알렉과 사샤였다.
대충 차려입은 사샤와 달리, 알렉은 어디 무도회 초대라도 받았는지 아침나절부터 근사한 스리피스 정장을 걸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레이디.”
싱글벙글한 사샤와 반대로 알렉의 안색은 좋지 못했다. 그는 밤새 잠 못 이룬 사람처럼 퀭한 눈을 한 채 테이블을 차지했다.
좁은 테이블과 의자는 몸 좋은 사내들이 안기엔 다소 불편했다. 알렉은 불편한 티를 팍팍 내면서 다리를 이리저리 옮겼고, 사샤도 최대한 어깨를 구기면서 홀쭉해지려고 노력했다.
“아침부터 무슨 일인가.”
로렌은 황급히 용건부터 물었다. 혹시라도 저 사내가 발정기에 대한 소문이라도 낸다면 굉장히 곤란했다.
“표정이 왜 그래? 돈 모자라면 찾아오라며.”
“아…….”
로렌은 대놓고 성가신 표정을 지었다.
알렉은 기가 막혔다. 자신의 5분을 사기 위하여 금화 뭉치를 들고 오는 이들이 수두룩한데, 이 여자는 고작 34실론을 지불하고서 적당한 값을 치렀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 얼마가 모자라는가.”
로렌은 앞치마 주머니를 뒤적여 구깃구깃한 지폐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다 해 봤자 50실론도 안 될 돈을 보자마자 머리가 지끈대는지 알렉은 관자놀이를 손으로 꾹꾹 눌렀다. 저 돈을 받으면 여기서 더 싸구려가 될 것 같았다.
“젠장. 됐어. 안 받아.”
알렉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럼 이제 돌아가는 건가.”
로렌은 반가운 기색을 굳이 숨기지 않고서 쥐고 있던 돈을 도로 주머니에 쏙 넣었다.
저 여자가?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대로 퇴장해 주기 싫었던 알렉은 가까이 있던 테이블이 아닌 가게 정중앙의 테이블로 성큼 걸어가 자리를 잡았다.
“저… 왜 도로 앉는 거지?”
“찻집에 차 마시러 왔으니까 앉았겠지, 다른 이유가 있겠어?”
그는 테이블 구석에 있던 메뉴판을 익숙하게 꺼내 살피기 시작했다. 사샤가 ‘우리 몸값 받으러 온 거 아냐, 알렉?’ 하고 눈치 없이 물었으나 알렉은 흔들리지 않았다.
“난 커피. 식사는 이 메뉴판에 있는 거 다 가져와.”
“저는 달콤한 벌꿀 차요, 레이디.”
“아… 커피 한 잔과 식사 메뉴 전부, 벌꿀 차 한 잔.”
얼떨결에 주문까지 받은 로렌은 성실하게 작은 종이에 메뉴를 받아 적은 뒤 주방으로 들어갔다.
준비 시간은 길지 않았다. 애초에 메뉴가 많지 않아 다행이었다.
로렌은 갓 구운 빵과 샌드위치, 잼, 버터 등을 종류별로 쟁반 위에 올리고 그들에게 서빙했다. 작고 동그란 테이블 위로 다닥다닥 붙어 있던 접시들이 아슬아슬하게 올라갔다.
알렉은 손때가 탔으나 깨끗하게 관리된 찻잔과 식기를 보면서 커피를 들이켰다. 그의 예민한 후각은 고소한 커피 향보다 로렌에게서 흘러나오는 체취를 더 달콤하게 여겼지만.
“제기랄.”
각인의 여파가 분명했다. 찻잔을 탁 내려놓은 알렉이 이마를 짚었다. 제 몸값을 단돈 34실론 9센트로 매긴 여자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왜 그래― 알렉? 커피 맛이 별로야?”
“너야말로 이 상황에서 차가 목구멍으로 넘어가?”
“응― 맛있어. 여기 벌꿀 차 잘하네.”
사샤가 그저 행복한 얼굴로 호로록 찻물을 들이켰다.
“이런 게 뭐가 잘 넘어간다고.”
괜스레 기분이 상한 알렉은 커피 잔을 쓰윽 밀어 버렸다.
두 사내의 대화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로렌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커피를 제법 잘 내린다고 자부했었는데 저 밉살맞은 뱀 놈의 입에는 맞지 않았던가. 내심 상처받은 로렌은 옆 테이블을 닦는 시늉을 하면서 계속 주의를 기울였다.
“이봐. 여기서는 몇 시까지 일해.”
알렉이 허공에다 행주질하는 로렌의 특이한 작태를 보면서 물었다. 어제는 미처 꺼내지 못했던 각인 이야기를 할 생각이었다.
로렌은 벽에 걸린 시계를 힐끔거린 뒤 “오후 두 시에.” 하고 대답하며 애먼 행주를 탁탁 털었다.
“그럼 끝나고 나 좀 봐.”
“안 된다. 오늘은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야 해.”
“아르바이트?”
알렉은 손끝으로 테이블을 툭툭 두드려 대답을 독촉했다. 그녀가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다는 건 보고받았으나 이곳으로 부리나케 달려오느라 정확한 내용까진 확인하지 못한 상태였다.
“오늘은 철도 공사장이다.”
“공사장? 미쳤어?!”
여인의 몸으로 험한 공사 일이라니. 알렉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아주 희박한 확률이지만 저 여인이 제 아이를 수태하였을지도 모르지 않나.
그렇게 펄쩍 뛰는 알렉과 달리 로렌의 태도는 침착했다.
“내게 잘 맞고 보람찬 일이야.”
“하! 그런 험한 일을 하다가 무슨 꼴을 당할 줄 알고.”
평범한 인간 남성도 버거워했으며 수인들조차 여기저기 다치기 일쑤인 게 공사판이다.
결정적으로 공사판은 사내가 득실대는 장소가 아닌가. 로렌이 사내들 한복판에 있는 꼴을 상상하자마자 알렉은 속이 끓는 분노를 느꼈다. 쓸데없는 감정이 몰아치는 것 또한 빌어먹을 각인 때문이겠지.
하지만 눈치 따윈 말아먹은 저 여자가 자신의 감정 상태를 알 리 없었다.
“난 자랑스러운 늑대다. 웬만한 사내만큼은 힘이 세지. 저번 주에는 반장이라는 놈에게 칭찬도 받았어.”
로렌은 뿌듯한 얼굴로 자신의 가슴팍을 탁탁 두드렸다.
“하지 마.”
“……?”
“그 일, 하지 말라고.”
“내가 일을 하는 게 당신과 무슨 상관인가.”
“무슨 상관? 하, 무슨 상관이냐고? 그걸 지금 나한테 물었어?”
기가 막혔던 알렉은 사샤를 힐끔거렸다. 저 여자가 하는 말을 들었냐는 의미의 제스처였지만 사샤 역시 알렉을 이해하지 못하는 반응이었다.
발끈하던 알렉 또한 뒤늦게 입을 다물었다.
‘그러게. 저 여자가 하는 일이 나와 무슨 상관이지?’
끝내 이유를 찾지 못한 알렉은 애꿎은 심호흡만 반복했다. 숨죽이고 상황을 지켜보던 사샤는 반쯤 비운 꿀차를 알렉에게 들이밀었다.
“혹시 어제 잠을 못 자서 당이 부족해, 알렉? 이거 마실래?”
“잠을 못 자긴 누가 못 잤다는 거야.”
“네가. 거의 꼴딱 새웠잖아.”
“안 새웠어. 푹 잤어. 그리고 그딴 꿀차 안 마셔.”
로렌 때문에 심란했다는 사실을 티 내고 싶지 않았던 알렉은 머그 컵 위로 끈적하게 남은 사샤의 입술 자국을 보면서 그의 호의를 단칼에 거절했다.
머뭇거리던 로렌은 다시 주방으로 돌아갔다.
알렉은 주문한 식사에 손도 대지 않았다. 밀어 두었던 찻잔을 도로 가져와 진한 커피만 연거푸 들이켜더니 자리를 정리했다.
알렉이 그러든 말든 접시를 착실하게 비운 사샤가 계산서를 확인하더니 크게 웃었다.
“이것 봐, 알렉.”
“왜.”
“우리가 먹은 게 딱 34실론 9센트잖아. 신―기한 우연이네.”
“…뭐?”
오만상을 쓴 알렉이 계산서를 확인했다.
34실론 9센트. 그가 빠른 셈으로 다시 계산했으나 오류는 없었다.
이런 게 내 몸값과 똑같을 리 없어.
알렉은 반사적으로 테이블을 확인했다. 빵 쪼가리 여섯 개와 차 두 잔을 담았던 빈 접시들이 저를 비웃는 것 같았다.
이딴 가격은 지불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되면 제 하룻밤의 가치가 딱 이만큼이었다고 인정하는 꼴이었다.
알렉은 계산도 하지 않고 찻집을 나서려고 했다. 그러자 로렌이 헐레벌떡 주방에서 뛰어나와 앞을 막았다.
“계산도 안 하고 어딜 가는 건가.”
“찻값이 더럽게 비싸서 말이야.”
“비싸다니?”
로렌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얼마 전, 차와 우산값을 후하게 지불 했던 남자가 지금은 그보다 적은 금액이 비싸다며 떼를 쓰고 있었다.
“빵 쪼가리 몇 개와 커피 몇 모금이 내가 지난밤 그쪽을 위해 헌신한 가격과 같더라고. 이게 바가지가 아니면 뭐야?”
“허, 헌신? 지금 무슨 말을……!”
얼굴이 새빨개진 로렌은 두 팔을 허우적거리며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손님이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안 그랬다면 허공에 대고 ‘내가 헌신했던 건 오직 왕국뿐’이라며 퇴역 군인 같은 변명을 지껄였을 것이다.
그 모습을 빤히 내려다보던 알렉은 붕어처럼 뻥끗대는 탐스러운 입술을 몇 초간 응시하다가 쯧 혀를 찼다. 그는 속주머니에서 동전 몇 개를 꺼내 로렌의 손에 꼭 쥐여 주었다.
“계산은 이것으로 하지. 거스름돈은 필요 없고. 남은 돈으로는 맛있는 거 사 먹어?”
“얼마길래…….”
혹시 은화라도 준 건가.
로렌은 주먹을 펴려고 했으나 알렉이 자신의 손을 감싸 힘을 주는 바람에 확인할 수 없었다.
“일 마치면 저쪽에 세워 둔 상단 마차로 와. 중요한 말을 해야 하니까.”
알렉은 동전을 쥐고 있던 로렌의 주먹을 톡톡 두드린 후 가게를 나갔다.
로렌은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주먹 쥔 손을 펴 보았다.
합이 9센트인 동전 다섯 개.
돈은 한참 모자랐다.
* * *
오후가 되어 로렌은 찻집을 정리했다. 그리고 근처에 서 있던 고급 마차로 걸어가 창문을 똑똑 두드렸다.
“드디어 오셨군요, 레이디.”
마차에 타고 있던 사샤가 꽤나 오래 기다렸다는 듯 마차 문을 열어 주었다. 그의 맞은편에 앉은 알렉은 거만하게 다리를 꼬고 반대편 차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찻집을 마감할 때까지 기다린 것인가.”
지친 기색이 역력한 사샤를 향해 물었으나 대답은 알렉에게서 튀어나왔다.
“내가 종일 너만 기다릴 만큼 한가해 보여?”
자신의 1분 1초가 얼마나 비싼 줄 아느냐고 알렉이 빈정거렸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반대편 차창을 응시하고 있었다. 금빛 눈동자가 유리창에 비친 로렌을 슬쩍 확인하더니 다시 창 너머로 초점이 멀어졌다.
로렌은 그런 알렉의 옆통수를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마차를 오전 내내 움직이지도 않고 세워 뒀으니 충분히 한가한 것 같은데.
‘아니, 더는 묻지 않는 게 좋겠어. 원래 뱀이란 족속들은 예민하니까.’
9센트 사건도 통 크게 넘어가기로 한 로렌이었다. 마음 넓은 늑대가 한 수 접어 줘야지 저 얌체 같은 뱀에게 뭘 기대하겠나.
로렌은 한숨을 내쉬며 사샤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이렇게 앉아야 저 속 좁은 무전취식범과 대화할 수 있으리라.
알렉은 로렌이 사샤와 딱 붙어 앉은 걸 확인하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둘이 퍽 친해 보이는군.”
“그―래? 우리 좋은 친구가 될 것 같나 봐요, 레이디.”
눈치 없는 사샤가 악수를 요청하듯 손을 내밀었다. 로렌은 사샤의 손을 무시하고 형식적인 미소를 보여 준 뒤 웃음기를 지운 얼굴로 무전취식범을 응시했다.
“투정은 그만 부리고 용건부터 말해 다오.”
“참 나, 투정?”
알렉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천하의 알렉산더 젠카이저가 이런 망아지 취급을 받을 줄이야.
알렉이 팔을 올리고 있던 등받이를 꽉 쥐었다. 으드득, 나무 갈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란 사샤는 ‘두 분이 오―붓한 시간 보내세요.’라며 헐레벌떡 마부석으로 이동했다. 마차 문이 탁, 닫히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서서히 움직였다.
로렌은 핏줄이 불퉁 돋아난 알렉의 손등을 응시하면서 입을 열었다.
“애꿎은 의자는 왜 못살게 구느냐.”
“각인했어.”
알렉은 로렌의 잔소리를 흘려 넘기고 대뜸 본론부터 말했다. 로렌의 기다란 속눈썹이 빠르게 팔랑거렸다.
“지금 뭐라고…….”
“그날 너에게 각인했다고. 이 내가.”
젠장. 알렉은 머리를 쓸어 올리다가 다시 내려 흩트리는 손짓을 반복했다.
하얗게 질린 로렌은 눈동자를 데굴 굴렸다.
“어째서?! 어째서 내게 각인을 한 것이냐.”
각인은 반려를 만드는 행위였다. 아주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결정해야 하는데 고작 하룻밤에 각인했다고? 여자 손 한 번 못 잡아 본 숫총각 같은 행태에 로렌은 눈앞이 아찔했다.
“난들 알아? 나도 모르게… 그냥 그렇게 됐다고. 제기랄.”
알렉은 말을 돌리고 돌렸다. 너무 좋아서 정신을 놓고 있다가 정신을 차리니 당신의 배 속을 틀어막고 내 마력을 싸지르고 있었습니다, 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자 로렌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그렇구나. 네가 그리 순진한 사내인 줄은 몰랐는데. 내 탓이다.”
“순진… 뭐라고?”
난생처음 들어 보는 표현에 놀란 알렉이 미간을 좁혔다.
“한 번 밤을 보낸 여인을 반려로 삼아 버리지 않았느냐. 생긴 것과 다르게 그런 천진한 치였을 줄은 몰랐어.”
어떡하면 좋을까. 나이도 한참 어린 순진한 수컷을 농락해 버리다니. 나쁜 여자가 되어 버렸다는 죄책감이 로렌의 심장을 무겁게 짓눌렀다.
“내 생김새가 천진하지 못하다 이거야? 아니다. 됐다, 됐어.”
기가 차는군. 알렉은 상념에 잠긴 로렌을 향해 콧방귀를 뀌었다.
‘대체 저런 여자가 뭐 좋다고!’
알렉이 머리를 거칠게 흩트리면서 천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치켜 올라간 눈동자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쓰윽 내려와 로렌을 힐끔거렸다.
푸석한 잿빛 머리와 색소가 여린 눈동자는 분명 평범했다. 손동작 하나하나가 교태로운 무희처럼 움직임이 매력적인 것도 아니었고, 한 소절에 사람을 홀려 버리는 가수처럼 목소리가 특출나지도 않았다.
그런데 알렉은 흥분하고 있었다. 이 좁은 공간에 로렌과 단둘이 있는 것만으로도.
‘젠장, 자존심도 없냐.’
그녀가 숨을 뱉을 때마다 단내가 나서 죽을 것 같았고 그것에 환장할 것 같은 자신이 싫어졌다.
‘그래. 이게 다 빌어먹을 각인 때문이야.’
알렉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니 좁고 밀폐된 공간에서 그녀를 마주하는 게 이리도 힘이 든 것이지.
‘한시라도 바삐 각인을 해제해야겠어.’
그렇게 한 번 더 다짐하는데.
“각인을 풀거라.”
그가 결심했던 제안이 그녀의 입에서 먼저 튀어나왔다.
“…뭐?”
“그럼 처음 본 나를 반려로 맞이할 셈이었느냐.”
“그, 건 아니긴 한데.”
알렉은 잠시 시선을 돌렸다. 이 여자의 말대로였다. 그녀를 반려로 맞고자 각인한 것이 아니라 하룻밤 사고에 가까웠다.
누군가는 각인이 가능한 여인을 만난 것 자체가 행운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알렉은 애초에 사랑이나 반려 따위와는 거리가 먼 사내였다. 이 자리를 만든 이유도 이따위 각인을 어서 해제하기 위해서였거늘.
그런데 저 늑대의 입에서 각인을 풀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이유 없는 불쾌감이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의도하지 않은 침묵이 입 안을 씁쓸하게 맴돌았다.
“종족마다 각인을 해제하는 방법이 다르다고 알고 있어. 뱀 족은 어떻게 해제를 하지?”
늑대의 경우엔 상대가 죽어야만 각인이 해제됐다. 만약 뱀 또한 그렇다면 골치가 아파질 텐데. 로렌은 두 손을 모아 쥐고서 알렉의 대답을 기다렸다.
“우선 나는 뱀이 아니라…….”
알렉은 말을 고치려다가 큭큭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니, 뱀 새끼가 맞지. 땅을 기는 뱀 새끼지.”
달칵 소리와 함께 날씬한 뚜껑이 열렸고, 알렉은 나란히 세워진 고급 궐련 중 하나를 꺼내 입술에 물었다.
“내 종족은 각인을 풀 때 일족의 도움이 필요해.”
알렉은 기름 라이터로 궐련에 불을 붙이려다 로렌을 힐금거렸다. 시선의 의미를 알지 못한 로렌이 커다란 눈을 깜박거렸다.
젠장맞을. 그는 차마 궐련에 불을 붙이지 못하고 입에 물고 있던 궐련을 창밖으로 던져 버렸다.
로렌은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궐련을 쳐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그런 해제법은 처음 들어. 특이하구나.”
바닥에 떨어진 궐련은 지나가던 누군가가 호들갑을 떨면서 잽싸게 주워 갔다. 꽤 값진 물건 같은데 피우지도 않고 버리는 건 버릇인 모양이다.
“늑대보단 덜 특이하지. 우린 상대를 안 죽여도 된다고.”
“함부로 말하지 마. 늑대는 반려를 죽음으로 몰아넣지 않는다.”
로렌이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오, 화난 거야? 하여간에 개들은 맘에 안 들면 짖기 바빠요.”
알렉이 대놓고 비아냥거리다가 손을 움찔 떨었다. 저 여자가 저를 꾸짖듯이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게 아닌가.
‘감히 누구에게.’
알렉 또한 그녀를 따라 날을 세우려 했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각인의 여파인지 저 늑대가 찌푸린 표정조차도 사랑스러울 뿐이니.
‘제기랄. 단단히 미쳤어.’
이건 불치병보다도 지독한 병이었다. 알렉은 그녀를 담던 두 눈을 손으로 가려 버린 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마침 내 일족이 한 달 뒤 왕국으로 온다더군. 30일 후에 마차를 보낼 것이니 각인 해제는 그때 하도록 하지.”
알렉이 말을 마치자마자 타이밍 좋게 마차도 멈췄다. 마차 문이 달칵 열렸고 그 밖으로는 로렌이 출근해야 하는 일터가 보였다.
‘저 사내가 여길 어떻게 안 거지?’
로렌은 얼떨떨해하며 철도 공사장에 내렸다.
얄미운 사내에게 감사 인사라도 전하려던 찰나, 등 뒤로 마차 문이 탁 닫히는 소리와 함께 마차는 곧장 출발해 버렸다. 문이 닫히는 소리마저도 저 사내처럼 어찌나 밉살스러운지.
참 나. 로렌은 점차 멀어지는 마차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마부 옆에 앉은 사샤가 마차 안쪽 눈치를 슬쩍 보고는 로렌에게 커다란 손을 붕붕 흔들었다.
* * *
최근 로렌에게 한 가지 걱정이 생겼다. 자신의 일터에 자꾸 상단주가 난입하는 것이다.
‘한 달 뒤에 마차를 보낸다길래 그때나 보는 줄 알았더니.’
로렌은 가게 밖을 살폈다. 이 시간대면 마차에서 내린 알렉이 기차역으로 가기 전 꼭 찻집 앞을 지나쳤다. 저것 보라. 그 인간이 또 저기 있지 않은가.
“이런. 오늘도 한산하군. 하긴 커피 두어 잔과 빵 몇 쪼가리 가격이 사람 몸값만큼 나온 곳인데 장사가 잘될 리가.”
혼잣말이라기엔 조금 큰 목소리가 열어 둔 가게 문으로 또렷하게 들렸다.
“장사라면 내가 좀 알긴 하다만. 뭐, 공손하게 부탁한다면 교육을 베풀 만큼 내가 인자하기도 하고. 그렇지, 사샤?”
알렉이 사샤를 찾았으나 시선은 여전히 가게 안의 로렌에게 꽂혀 있었다.
로렌은 테이블을 닦던 행주를 홱 던지고서 입구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알렉을 향해 눈을 부릅뜬 뒤 열려 있던 가게 문을 쾅 닫았다.
“저러다 문도 부숴 먹겠네. 이곳 주인장 성질머리가 꼭 누굴 결박할 것처럼 모진가 보군.”
알렉이 쇼윈도 너머 로렌을 향해 생긋 웃으며 가게를 지나쳐 갔다. 행인들은 넋을 놓고 알렉의 미소를 응시했지만 로렌만이 살벌하게 눈을 치뜨고 멀어져 가는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알렉은 찻집뿐만 아니라 기차역에도 나타났다.
‘기차 운행도 끝난 시각인데 왜 하필 이 시간에 기차역에서 마주친 거지?’
로렌은 우편국으로 배달해야 할 짐들을 지게 위에 차곡차곡 쌓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장난기가 가득한 얼굴로 다가오는 걸 보니 또 약을 올릴 모양새다.
‘저놈은 무시하고 얼른 우편국으로 가야지.’
영차! 로렌은 지게를 어깨에 이고서 짐을 번쩍 들었다. 삐딱하게 웃고 있던 알렉은 로렌이 등에 멘 짐 더미를 보자마자 차갑게 얼굴을 굳혔다.
‘갑자기 왜 심각한 표정이람?’
하긴 내 알 바 아니지. 로렌이 먼저 그에게서 몸을 돌렸다. 우편국으로 배달을 가려는데.
“맙소사― 레이디이!”
사샤가 로렌을 알은척하며 다가왔다.
“그게 다 뭡니까? 그런 몸으로 무거운 짐을 들면 어떡해요!”
사샤는 ‘그런 몸’을 강조하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그사이 알렉은 그에게 허리를 굽실대던 역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짐부터 어서어서 내려놓으세요!”
사샤가 커다란 덩치로 안절부절못하며 로렌의 짐을 쳐다보았다.
“난 괜찮다. 원래 하던 일이야.”
“레이디가 아무리 수인이라 해도 지금 시기에 어마―어마한 짐을 책가방처럼 메는 건 무리라고요.”
지금 시기? 로렌은 고개를 갸웃대다가 한쪽 팔을 굽힌 채로 들어 올렸다.
“난 용맹한 늑대다. 힘이 아주 세지.”
팔에 힘을 주자 미세한 팔 근육이 볼록 튀어나왔지만 옷 위로는 티가 나지 않는 수준. 근육이 울룩불룩한 사샤가 그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닭가슴살을 많이 먹으면 곧 괜찮아질 거예요, 레이디.”
사샤는 근육이 잘 붙지 않는 몸을 불치병만큼이나 불쌍해하면서 잠깐 눈물을 글썽인 뒤 화제를 돌렸다.
“여튼 제일 큰 짐이라도 절 주세요. 그 몸으론 무립니다.”
“…걱정은 고맙구나. 하지만 이 정도는 나 혼자서도 충분히 가능해.”
로렌은 형식적인 미소로 호의를 거절했다. 이걸 모두 배달해야 은화 한 개를 받는데 나중에 품삯을 나눠 달라고 할까 봐 아주 조금 걱정이 되었다.
그사이 역장과 대화를 마친 알렉이 로렌을 향해 걸어왔다. 저놈도 똑같겠지. 로렌은 지게 끈을 꼭 쥔 뒤 방어 태세를 취했다. ‘치마 입은 여인이 그런 일은 왜 하냐’, ‘험한 일은 사내에게 맡기고 집에서 자수 연습이나 해라’와 같은 잔소리를 예상하면서.
하지만 알렉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그는 묘한 표정으로 로렌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본인이 들고 있던 종이봉투까지 지게 위에 추가했다. “내 것도 좀 부탁해.”라고 얄미운 말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게 무슨 짓이냐.”
로렌은 늑대답게 으르렁거렸다.
“왜. 봉투 하나 추가했다고 무거워서 못 걷겠나, 용맹한 늑대님?”
내가 도와줘?
알렉이 영업용 미소로 맞받아쳤다.
“그럴 리가!”
“그럼 잘됐네. 나도 네게 배달을 의뢰하지. 배달 한 번에 은화 한 개 맞나?”
알렉이 사샤에게 턱짓하자 사샤가 주머니에서 은화를 꺼내 로렌에게 건네주었다.
이 종이봉투 하나에 은화 한 개라고?
저 인간이 34실론 9센트가 바가지라며 빈정댔던 무전취식범이 맞을까. 로렌은 손에 쥔 은화와 알렉을 번갈아 보았다. 그 와중에도 솔직한 입술은 반사적으로 미소를 띠었다.
아차. 로렌은 빠르게 미소를 갈무리하면서 근엄한 얼굴로 은화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흠흠, 배달을 수락하지. 어디로 가면 되는 것이냐.”
“내 마차까지.”
“마차?”
마차를 얼마나 멀리 세워 놨기에. 로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사이 등으로 느껴지는 짐의 무게가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로렌은 힘찬 걸음걸이로 역사를 빠져나와 알렉의 마차를 찾기 시작했다. 어디 구석에 세워 놨겠지 싶어서 고개를 기웃대며 저 먼 곳까지 살폈으나 특별히 보이는 건 없었다.
그러다 코앞에서 크고 새카만 마차를 발견했다. 기차역 바로 앞에서 주인을 기다리는 마차는 알렉의 것이 맞았다.
“지금 혹시 나를 놀린 것이냐… 어, 어?”
그때 로렌이 이고 있던 짐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마법이었다. 마차가 교묘하게 세워져 있었기에 그것이 마차 짐칸에 차곡차곡 쌓여서 고정되는 모습을 행인들은 보지 못했다.
“타.”
달칵. 알렉이 마차 문을 열어 주었다.
“지금 무얼 하는 거지?”
“왜. 내가 그쪽을 납치라도 할까 봐?”
“네 종이봉투만 가져가고 내 짐은 다시 돌려줘.”
“나도 어차피 우편국으로 갈 거야. 태워 줄 테니까 그냥 타. 너와 할 얘기도 있으니까.”
“또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의원을 데리고 왔다.”
알렉은 마차 안쪽을 턱짓했다. 나이가 지긋한 의원이 눈을 가리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갑자기 의원은…….” 하고 로렌이 질문하려는데 알렉이 말허리를 끊고 대답했다.
“임신인지 아닌지는 정확히 확인해야 할 거 아냐.”
“……!”
임신이란 말에 당황한 로렌은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차가 구석진 곳에 있어 다행이었다.
굳이 임신 확인까지 해야 하는 건가, 하고 생각하는데 알렉이 그 마음을 읽은 것처럼 입을 열었다.
“각인까지 했으니 기우는 아니라고 봐. 몇 년 뒤 얼굴도 모르는 아이에게 사업체를 쪼개 줘야 할 일은 없었으면 해서. 확실히 할 건 확실히 해야지.”
알렉은 이유를 건조하게 나열하면서 사샤에게 눈짓을 했다. 벌꿀 과자를 와그작와그작 씹어 먹던 사샤는 로렌이 메고 있던 빈 지게를 대신 가져가 짐칸에 매달았다.
‘그래. 저 사내의 말이 틀린 건 아니야. 우선 마차에 타자.’
로렌은 알렉의 의견대로 진료를 받고자 마음먹었다. 그리고 마차 발판에 발을 올리는데 대기하고 있던 알렉이 자연스레 손을 내밀었다.
‘귀부인들을 에스코트하던 버릇이구나.’
바람둥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더니 몸에 밴 작은 습관들은 퍽 친절했다.
하지만 계단 몇 개를 오르는데 누군가의 손을 잡을 필요는 없었다. 로렌은 스스로 계단 위에 올라섰다. 알렉이 철저히 무시당한 손을 내려다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가 그러든 말든 마차 안을 살핀 로렌은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저 의원은 왜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이냐.”
“네 취향일 줄 알고 저렇게 준비했는데, 아니었어? 눈 가리는 거 좋아했었잖아.”
“취, 취향은 무슨!”
갑자기 무슨 말이래. 로렌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당황한 로렌이 몸을 파르르 떨다가 그만 기우뚱거렸고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 바로 옆에 있던 알렉의 어깨를 짚었다. 알렉이 휘청이는 로렌의 상체를 재빨리 붙든 것과 동시였다. 로렌은 알렉의 목에 매달려 반쯤 안긴 꼴이 되었다.
“좋다는 표현을 이렇게까지 열렬하게 할 필요는 없는데.”
알렉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놀려 댔으나 눈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젠장, 무슨 체취가 이렇게 좋아. 그녀와 닿자마자 배 속에서 열기가 화르르 타오르더니 목이 탔다. 잠재웠던 욕망이 당장 저 의원을 마차 밖으로 내쫓고 반려와 단둘이 남으라고 소리쳤다.
알렉은 턱을 꽉 물었다. 안 그러면 당장 눈앞에 보이는 새빨간 입술부터 물어뜯어 버릴 것 같았다.
‘이 모든 건 다 이 여자의 페로몬 탓이겠지.’
지금 쿵쿵 몸을 울리는 것 또한 저 늑대의 심장 소리라고 치부하면서 알렉은 치미는 욕정을 꾸욱 눌렀다. 이 망할 각인은 어서 해제하든지 해야지.
“…언제까지 붙어 있을 거야.”
“아, 어, 응. 떨어져야지. 그, 미안하구나.”
로렌 또한 그의 시원한 체취에 취해 있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사내의 품은 무슨 일이 있어도 무너지지 않겠다 싶을 만큼 단단하고 편안해서 넋을 놓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로렌은 재빨리 몸을 떼어 내려고 했다. 그런데 가느다란 상체를 품고 있던 팔이 풀어지지 않는다.
“저기, 당신이 날 놓아주어야 할 것 같은데.”
“…아.”
알렉은 힘을 푸는 걸 잊어버린 사람처럼 멍청한 감탄사를 흘리면서 팔을 스르륵 풀었다. 그리고 괜스레 손을 툭툭 털면서 화제를 돌렸다.
“몸이 가볍군. 일한다고 끼니도 못 때우는 건가? 몸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 같은데.”
“아니다. 예전에는 새벽이슬만 마셔도 배가 불렀는데 지금은 끼니를 아주 잘 챙겨 먹고 있어.”
“…새벽이슬?”
“그래. 아주 긴 시간 동안 이슬만 마시며 왕궁 지하에 잠들어 있었었지.”
로렌은 왕국을 수호하던 때를 떠올리면서 씁쓸하게 웃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샤가 어색하게 웃는 얼굴을 유지하면서 알렉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어떡해, 알렉. 역시 소문대로 미친 여자가 맞나 봐.”
* * *
알렉의 마차는 인적이 드문 길을 따라 빙 돌았다. 이런 길은 대부분 울퉁불퉁하기 마련인데 마차는 귀신같이 평평한 길만 골라 다녀서 크게 흔들릴 일이 없었다.
덕분에 청진기를 낀 의원도 지장 없이 진료할 수 있었다. 그는 로렌의 여기저기에 청진기를 대어 본 후 길게 숨을 내쉬었다.
“누군가가 각인한 흔적이 있습니다만 임신은 아닙니다.”
“다시 해.”
결과가 나오자마자 알렉이 명령했다.
“아니라는데 왜 그러는 것이냐.”
로렌의 물음에도 알렉은 의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명령을 반복했다.
“다시 하라고 했어.”
“히익, 예. 알겠습니다.”
의원은 주변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목에 걸어 둔 청진기를 다시 귀에 걸었다. 그렇게 진찰은 알렉의 고집대로 다섯 번이나 반복됐다.
의원이 ‘송구하나 정말 임신이 아닙니다.’ 하고 고하며 죽을죄를 진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나서야 이 지루한 진료가 끝날 수 있었다.
“첫 발정기 이후에는 주기가 불규칙할 수 있으니 꾸준히 상대의 페로몬을 맡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면 심신이 안정될 겁니다.”
의원이 청진기를 정리하면서 덧붙였다.
상대라는 건 알렉을 말하는 건가. 로렌이 슬쩍 알렉을 쳐다봤으나 알렉은 고민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먼 곳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그리고 마차 안엔 잠시 침묵이 맴돌았다.
임신이 아니라서 실망이라도 한 걸까. 하지만 조금 전에는 분명 임신을 원치 않는 것 같았는데.
침묵은 길었다.
알렉은 진지한 표정으로 창밖만 바라보았다.
로렌은 손가락을 꼼질대면서 시간을 견디다가 품에서 편지지와 연필을 꺼냈다. 차라리 잘되었다. 어제 막스웰에게 보낼 편지를 완성하지 못했는데 지금 하면 되리라.
로렌은 남은 편지지를 빼곡하게 채워 내려갔다. 그녀의 애끓는 마음을 오롯이 담기엔 너무 작은 편지지를 가득 채웠을 무렵, 알렉이 상념에서 벗어났다. 그는 마차 벽을 두 번 탁탁 두드려 마차를 멈췄다.
나무 몇 그루와 무너져 가는 집 한 채가 있는 장소는 인적이 드물었다.
“내려라.”
“예, 나으리.”
여전히 눈을 가린 의원이 더듬더듬 마차에서 내렸다. 알렉의 딱딱한 시선이 의원을 끝까지 좇았다.
“오늘 있었던 일은 제대로 함구해야 할 것이다.”
“예, 암요!”
“네 목숨값을 아끼란 뜻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걱정 마십시오. 절대 입을 열지 않겠습니다.”
의원은 비장하게 입술을 다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 의원을 3초간 가만히 응시한 알렉이 마차 천장을 두드리자 덜커덕 소리와 함께 마차가 다시 출발했다.
의원은 두 다리를 달달 떨면서 마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안대를 풀지 않았다. 창밖을 내다보던 로렌은 점점 작아지는 의원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의원의 눈을 가린 진짜 이유가 무엇인가.”
“저놈이 네 얼굴을 보면 곤란하니까.”
“……?”
“내가 인기가 좀 많거든. 이 몸이 웬 여자에게 각인하고 임신 여부를 물었다는 소문이 퍼지면 이 대륙 전체가 난리가 날걸?”
널 죽이겠다는 여자가 나타날지도 모른다며 알렉이 어깨를 으쓱 올렸다.
“…아, 그래. 자신감이 상당해서 좋겠구나.”
“전혀 믿지 않는 표정이군.”
“아니다. 부모님께 사랑을 굉장히 많이 받고 자라면 저렇게 자라는 건가 생각 중이었다.”
“사랑?”
부모님 이야기가 나오자 알렉은 푸핫, 웃음을 터트렸다. 진짜 웃음이 아닌 설움과 분노가 섞인 어두운 조소였다.
“그걸 사랑이라고 할 수 있으면 이 세상은 지옥이었겠지.”
알렉의 황금빛 눈동자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진지한 건 잠시뿐이고 언제나 능글맞았던 사내였는데. 이런 모습은 꽤 낯설었다. 뱀처럼 길어진 동공이 창 너머 먼 곳을 향했다.
“너, 넌 내 아들이 아냐. 배로 땅을 기는 놈은 우리 일족의 수치야!”
“날개도 없는 데다 몸까지 약하다니. 그런 반편이는 당장 버리는 게 낫겠군.”
커다란 바위가 사막의 모래로 풍화됐을 만큼 긴 시간이 지났건만. 저를 학대하던 부모의 목소리는 깎이지 않는 바위가 되어 심장 한편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로렌이 알렉의 손을 잡아 준 것은.
창 너머 과거에 머물렀던 시선이 따듯한 온기가 전해지는 손등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뱀이라 그런가. 항상 네 손은 차구나.”
작은 손은 그 아래 포개어진 커다란 손을 모두 감싸진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손이 가진 온기와 말랑한 촉감은 얼음장처럼 굳었던 알렉의 손을 녹이기 충분했다.
“혹시 수상학이라는 걸 아느냐.”
로렌은 알렉의 손을 뒤집어 손바닥을 응시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알렉의 손금을 따라 천천히 이동했다.
“동쪽에서는 손금을 보고 운명을 읽는다고 해. 당신은 재운 선이 탁월해서 돈을 많이 벌겠구나.”
로렌의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닿은 곳이 찌릿하고 간지러워서 알렉의 손이 한 번씩 안으로 오므리며 움찔거렸다.
생명선, 건강선. 로렌이 조잘조잘 늘어놓는 설명을 들으며 알렉은 로렌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참 신기한 여자네.’
첫 만남에선 머리 위로 쏟아지던 찻물을 막아 주더니 지금은 절절 끓어오르는 분노를 뒤집어쓸까 봐 도와주는 건가.
저 말간 얼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선명했던 분노가 가라앉았다. 평정을 되찾은 심장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봐, 내 설명을 듣고 있는 건가?”
북 대륙으로 여자 꼬시러 간다던 웬 손님이 찻값 대신 가르쳐 준 것인데. 손금을 자세히 내려다보던 로렌이 고개를 들었다. 아, 이제 내가 아는 얼굴이다. 로렌은 다시 뺀질뺀질해진 알렉의 낯을 보며 함께 미소 지었다.
“당신은 좋은 손금을 가지고 있어. 특히 이 운명선이 또렷하지.”
“운명?”
“그래. 초년엔 고생 좀 하겠지만 부모의 도움 없이 스스로 삶을 개척해 나갈 팔자다.”
“…하하. 어디 점집이라도 차리면 돈 좀 벌겠어.”
스스로 개척한다니 꽤 그럴듯하네. 알렉은 작게 중얼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점집을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겠느냐?”
알렉이 대충 던진 칭찬에 로렌의 눈이 반짝거렸다. 또 돈 벌 궁리를 하는 건가. 먹고살기가 나빠 보이진 않던데 돈 벌려는 의지가 참으로 악착같았다.
여기서 수긍해 주면 저 여자가 당장 돗자리를 깔 것 같아서 알렉은 대답 대신 다른 걸 물었다.
“그런데 이 손금 보는 법, 남자가 알려 줬나?”
“어… 어떻게 알았지?”
저 사내야말로 점쟁이가 아닐까 싶어서 로렌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누구야.”
“모른다. 외국에서 온 사자 수인이었어.”
“다음번에 보게 되면 꼭 알려 줘.”
“……?”
“그 자식 덕분에 손금 봤으니 감사 인사라도 하고 싶어서.”
로렌의 손을 만지작대며 수상학을 운운한 사기꾼 새끼가 누구일지 궁금해졌던 알렉은 능글맞게 웃었다. 동시에 손바닥 위에 있던 로렌의 손을 덥석 쥐었다. 먹이를 낚아채듯 재빠른 동작에 로렌은 손을 피하지 못했다.
“그런데 말이야.”
곧 로렌의 손이 그의 입술 앞까지 끌려갔고 손등 위로 그의 입술이 닿았다. 그것은 몇 초간 진득하게 붙었다가 천천히 떨어졌고 알렉은 그대로 눈을 굴려 로렌을 응시했다.
“너, 배 속에 구멍이라도 난 건가?”
“그게 무슨 소리냐.”
눅진한 손등 키스 때문에 두 뺨을 발갛게 물들인 로렌은 알렉의 질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분명 그날 밤… 네 배가 부르도록 싸질렀는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서. 예상 밖이군.”
알렉은 다시 손등에 입을 맞춘 뒤 신경을 집중했다. 이렇게 살이 닿으면 상대의 마력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안에 가득 고여 있어야 할 마력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뭘 싸질, 싸질렀다는 건가!”
당황한 로렌이 말을 버벅거렸다.
“내가 쏟아 넣은 마력 말이야. 한 톨도 안 느껴지잖아.”
“마력을… 쏟아 넣었다고?”
“그래, 네 배 속에.”
참 이상하네. 알렉의 시선이 점점 내려가 가느다란 허리에 닿았다.
사내의 시선이 닿는 안쪽이 자꾸만 간지러워서 로렌은 허벅지에 힘을 꽉 주어야 했다. 그러면서 그날 밤의 기억을 더듬었다. 저 사내와 밤을 보낸 뒤 전신에 마력이 솟아났던 기억이 생생했다.
‘그게 저 사내의 마력이었구나. 난 영물이었을 때처럼 능력을 되찾은 줄 알았지.’
당황한 로렌이 입술을 꽉 깨물 때였다. 커다란 손이 불쑥 튀어나와 로렌의 턱을 부드럽게 쥐었다. 그에게 닿은 손과 얼굴에 열이 올랐다.
“너 마법 쓸 수 있지.”
날카로운 질문은 갑작스러웠다. 평소 장난기 어렸던 사내는 온데간데없고 노련한 사업가가 눈앞에 앉아 있었다.
그에게 턱을 잡혀 고개를 돌릴 수 없었던 로렌은 눈동자만 데굴 굴렸다. 윤이 반지르르한 마차 천장을 보면서 마땅한 대답을 찾았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정답이네.”
알렉이 눈을 곱게 접어 웃으며 엄지손가락으로 거짓을 뱉지 못하는 정직한 입술을 쓸었다.
“마법사라기엔 돈 버는 방식이 어설프고……. 어쩌다 마법 몇 개만 익힌 건가? 네 오라비에게 배웠어?”
“왜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이냐.”
“너잖아. 그날 밤, 내 기억 지운 거.”
맞지? 알렉은 이미 답을 다 아는 사람처럼 물었다.
고개를 피할 수 없었던 로렌은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지금 그의 황금빛 눈동자를 보게 되면 시치미를 떼는 것조차도 못 할 것이 뻔했다. 이미 벌게진 얼굴은 내가 범인이오! 하고 외치고 있었지만.
“순진하기는.”
살짝 떠봤을 뿐인데 이리도 정직하게 반응할 줄은 몰랐기에 웃음이 나왔다. 잡아떼더라도 어련히 눈치챘겠지만.
애초에 약물을 마시고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이 이상했었다. 그런데 그런 고위 마법을 구사한 게 저 늑대라니. 마법학 교수라던 그녀의 오라비조차 사용하기 어려운 마법을 그녀가 간단하게 구사할 리 없었다.
말이 안 된단 말이지. 알렉은 처벌을 기다리듯이 눈을 필사적으로 감은 로렌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 상황에서 갑자기 눈은 왜 감은 거야?’
혹시 저 여자가 이 몸이 입을 맞춰 주길 기다리는 건가. 각인의 여파인지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추론이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확 그냥 한입에 삼켜 버리면 타는 듯한 갈증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 충동이 일었다.
“꾸준히 상대의 페로몬을 맡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면 심신이 안정될 겁니다.”
의원이 남겼던 조언이 알렉의 등을 떠밀었다. 그래, 이 기회에 페로몬도 좀 쏟아 준다면 저 여자도 좋아하겠지.
알렉은 로렌과의 거리를 좁혔다. 로렌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기다란 손가락이 얽혔고 그의 뜨거운 숨이 복숭앗빛 뺨에 닿아 미끄러졌다.
‘뭔가 이상한데…….’
어? 로렌이 살짝 실눈을 떴다가 코앞까지 다가온 알렉의 얼굴을 보고 곧장 숨을 삼켰다.
둘의 시선이 짧은 거리에서 강하게 부딪쳤다. 로렌이 입술을 뻥끗거리다가 헙 다물길 반복했다. 입술을 움직일 때마다 그의 시선이 입술 안쪽을 휘젓는 것 같아서 퍽 민망했다.
“그래, 내가 기억을 지웠어. 미안하다.”
로렌은 이 어색한 순간을 넘기기 위해 진실을 실토했다. 그러면서도 저 남자가 과연 제 말을 믿어 줄지 모르는 노릇이었다.
흐음. 알렉이 삐딱하게 웃으며 로렌의 턱을 놔주었다.
“어떻게 한 거야.”
“무엇이 말이냐.”
“내게 마법을 걸 만한 존재는 흔치 않아. 그런데 어떻게 내 기억을 지웠지?”
그렇게 묻는 알렉의 표정은 진지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표정이 변하는 사내답지 않게 오늘따라 신중해 보였다.
“당신이 주입한 마력으로 마법을 썼으니 효과적이었나 보지.”
“기억을 지우는 건 고위 마법이야. 아무나 쓸 수 없어.”
“난 원래 할 수 있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영물이었던 로렌은 숨 쉬는 방법을 알듯이 마법도 타고났었다.
“하, 네가 무슨 신이라도 된다는 거야?”
그렇게 질문하는 알렉의 표정은 이유 없이 진지했다. 저를 버린 사람이라도 만난 것처럼 황금빛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예전엔 그랬으나 지금은 아니야.”
“꼭 왕국을 지키던 수호신이 자신이라는 듯 말하는군.”
요동치던 시선이 로렌이 치마 위에 올려 둔 봉투를 힐끔거렸다. 그녀가 조금 전 마차 안에서 비뚤배뚤한 글씨로 쓴 편지였다. 봉투 위 수신자란에는 ‘막스웰 국왕 전하 귀하’라고 적혀 있었다.
“국왕을 만나고 싶어 하는 이유도 본인이 늑대 신이라고 생각해서야?”
“믿지 않아도 상관없다.”
때마침 우편국에 도착한 마차가 움직임을 멈췄다. 로렌은 창밖을 확인한 뒤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사람들이 너보고 미쳤다고 하던데. 알고는 있어?”
“그래. 당신 또한 그리 생각해도 괜찮아.”
로렌은 알렉에게 고개를 까딱여 인사한 뒤 마차에서 내렸다. 마차가 멈추고 늦장을 부린 것도 아니었는데, 누군가가 짐칸에 실어 놓았던 배달물들을 모두 우편국 앞에 내려 둔 상태였다.
“어머머, 로렌! 지금 무슨 마차를 타고 온 거야아?”
그때 우편국 직원, 샬럿이 호들갑을 떨면서 달려 나왔다. 그녀는 눈을 반짝이면서 알렉의 마차를 요리조리 구경하기 시작했다.
“세상에, 검은 뱀 상단 마차잖아! 안에 있는 사람이 설마 상단주는 아니지?”
샬럿이 마차 창문 가까이 다가가 안쪽을 살피려는 순간, 마차가 빠르게 출발해 버렸다.
“꺅!”
놀란 샬럿이 몸을 뒤로 빼면서 팔을 허둥거렸다. 하마터면 마차에 치여 넘어질 뻔했다.
“도대체 어떤 싸가지 없는 놈이 탔길래 마차를 저딴 식으로 모는 거야?”
신이 보셨다면 천벌 받았을 거다, 나쁜 놈아! 가다가 바퀴나 빠져라!
로렌이 탔던 마차이니 설마 대단한 인물이 탔겠냐 싶어서 샬럿은 시원하게 저주를 퍼부었다.
로렌이 “난 저런 일을 가지고 천벌을 내리지 않아.”라고 말했지만 주변 사람들은 익숙하게 그 말을 무시할 뿐이었다.
* * *
그 무렵, 알렉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곧 마부석 창문이 열렸고 마부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사샤가 얇고 긴 창문으로 눈을 빼꼼 내밀었다.
“어떡하지, 알렉? 웬 여자가 저주를 퍼부었는데 바퀴 점검이라도 할까?”
“…….”
“아― 아니다. 우리 상단주님은 워낙 항마력이 높으셔서 여자들이 저주를 그―렇게 퍼부어도 끄떡없었지.”
하하! 사샤가 벌꿀 과자를 와드득 씹어 먹으면서 농담을 건넸지만, 알렉은 여전히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역시나 임신이 아니라는 말에 충격이 컸구먼. 사샤가 그 말을 중얼거리면서 알렉의 안색을 살폈다.
“괜찮아, 알렉?”
“내가 안 괜찮을 게 뭐가 있지?”
그제야 상념에서 벗어난 알렉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딱딱하게 대꾸했다.
저거 봐, 안 괜찮네. 사샤는 남은 벌꿀 과자를 씹어 삼키면서 눈썹을 늘어뜨렸다. 아닌 척하면서도 후계가 생길 거라고 잔뜩 기대했던 수컷은 실망스러운 결과에 저렇게 날을 세우고 있었다.
“극복할 수 있을 거야, 알렉. 실패해도 넌 충―분히 남자답다고.”
사샤가 뜬금없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평소라면 알렉이 짜증을 버럭 내었을 테지만 오늘따라 그의 반응이 싱거웠다. 그는 차창 너머 어딘가를 가만히 응시하면서 긴 다리를 반대로 꼬았다. 한참 후에 흘러나온 목소리는 건조했다.
“로렌 루즈벡에 대해 다시 조사해, 사샤.”
“응? 저번에 했잖아.”
“그런 정보 말고. 5년 전 왕국의 수호신이 죽었다던 그날을 중심으로.”
“로렌 양이 루즈벡 가문에 입양되었던 시기 같은데― 이유가 뭐야?”
“반듯하게 미쳤다는 여자가 사실은 미친 게 아닐 수도 있을 것 같아서.”
* * *
이른 아침.
로렌은 낡고 기다란 거울 앞에 서서 복장을 점검했다.
거울 위에 붙여 둔 작은 쪽지에는 ‘복숭아뼈까지 내려오는 원피스, 스카프 두 번 감아 매듭짓기, 단추 점검, 부츠 매듭 점검, 깨끗한 앞치마’라는 문장이 반듯한 글씨로 적혀 있었다. 양 오라버니, 도스턴이 5년 전 적어 둔 것이다.
‘이 정도면 괜찮아.’
로렌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방을 나섰다. 에블린의 초상화에 아침 인사를 건네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가게 오픈을 위해 1층으로 내려가는데.
“오늘은 제시간에 준비했군.”
가게 한복판에서 난데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오라, 버니?”
창가 테이블에 앉은 도스턴이 비스듬히 들어오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신문을 보고 있었다.
낡은 의자와 테이블, 반듯하게 앉은 도스턴까지도 적막감이 맴돌았으나 그가 넘기는 신문지만이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고요하고 반짝이는 햇살 사이로 신문지가 사락사락 소리를 냈다.
로렌은 후다닥 계단을 내려와 도스턴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다가갔다.
“뭘 그리 놀라.”
안경을 추어올린 도스턴은 로렌의 얼굴과 스카프를 두른 목을 확인하곤 다시 신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라버니는 아카데미 방학 기간에만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나.”
아니, 돌아오셨잖아요. 로렌은 재빨리 말투를 고치면서 도스턴의 눈치를 살폈다.
한쪽 어깨로 단정하게 늘어뜨린 갈색 머리, 지문 하나 묻지 않은 안경, 여관 주인에게 다림질을 맡겼을 칼주름 정장. 모든 것이 도스턴답게 반듯하고 깔끔했다.
“왜. 내가 돌아와서 보면 안 될 거라도 있느냐.”
“저, 전혀!”
말은 그렇게 하였으나 로렌의 심장은 빠르게 콩닥거렸다. 혹시라도 검은 뱀과의 소문이 오라버니 귀로 들어갔다면 어떡하지. 하나 남은 가족에게 꾸중을 듣는 건 언제나 마음 아픈 일이었다.
도스턴은 묘하게 동요하는 로렌의 눈동자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신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반나절 휴가가 생겨서 와 본 것이다. 곧 아카데미로 떠나야 하니 어서 식사를 준비해.”
도스턴이 신문지를 넘기면서 따듯한 홍차와 빵을 주문했다. 그러던 중 도스턴이 넘기는 신문의 기사 하나가 눈에 띄었다.
[의문의 변사체, 타살인가 자살인가.]로렌이 넘어가는 페이지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방금 기사에 적힌 변사체가 나이 든 의원이라고 쓰여 있지 않았나? 그것을 보자마자 어제 만났던 의원이 떠오르는 것은 기우일까.
“로렌.”
도스턴이 한 번 더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채근했다. 그제야 로렌은 신문에서 눈을 떼고 부지런히 주방으로 돌아갔다.
도스턴은 간단하게 아침을 해결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소라면 담백한 인사와 함께 가게를 떠났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정말 별일 없느냐.”
도스턴이 로렌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로렌은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네. 오라버니가 가르쳐 준 대로 열심히 행동하고 있어요.”
최대한 자연스럽게 대답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로렌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정말이에요.”
로렌은 손가락을 꼼지락대면서 도스턴을 힐끔 쳐다보았다. 도스턴은 작은 흔적이라도 찾는 것처럼 로렌의 뺨과 귀, 목 부근을 쳐다보았다.
곧 그의 손가락이 로렌의 스카프를 주욱 잡아당겨 아래로 내렸다. 목덜미가 차가운 공기에 훤히 드러나면서 맹약의 인장이 바깥으로 드러났다.
“오라버니?”
로렌이 몸을 움찔 떨면서 스카프를 더듬었다. 그날 밤 알렉이 남긴 잇자국이 아직도 인장 위에 남아 있을까 봐 조마조마했다. 다른 자국은 흐려진 지 오래였으나 그곳은 유독 세게 깨물었던 기억이 있었다.
도스턴은 고개를 살짝 숙여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로렌에게 묻었을 누군가의 냄새를 확인하는 것인지 로렌의 냄새를 맡는 것인지는 구분할 수 없었다.
“잠깐만요, 오라버니. 히익!”
로렌이 목을 움츠리면서 파르르 떨었다. 무언가 이질적이고 생경한 감각. 소름이 내달렸다.
이런 기분을 느낀 건 처음이 아니었다. 루즈벡 가문에 입양된 뒤로 도스턴이 한 번씩 낯선 사내로 느껴질 때가 있었다.
열다섯 소녀의 몸으로 처음 오라버니를 만났을 때.
열일곱의 몸을 낯선 사내가 더듬자 오라버니가 그놈을 흠씬 혼내 주고서 그런 변태들에게 본보기를 보여 주는 법을 가르쳐 줬을 때.
열여덟의 몸이 된 기념으로 어머니가 사 준 새 드레스를 입었을 때.
열아홉의 몸이 되었는데도 발정기가 찾아오지 않는다며 고민하는 어머니에게 오라버니가 버럭 화를 냈을 때.
어머니가 죽은 후 단둘이 남게 된 이 집에서 못 살겠다며 도스턴이 짐을 쌌을 때.
스무 살의 몸으로 처음 발정기가 찾아왔을 때.
그리고 바로 지금.
“간지러워요, 오라버니.”
로렌이 고개를 살짝 틀면서 곤란한 얼굴을 감췄다. 도스턴은 숙제를 확인한 선생님처럼 무표정하게 스카프에서 손을 떼었다.
“이 오라버니가 항상 무얼 강조했느냐, 로렌.”
“규칙, 적이고 정숙한 삶이요.”
“그래. 돌아가신 어머니께선 네가 자유롭게 살길 원했지만 이 세상은 여자가 그리 살게 두진 않는다는 걸 명심하거라.”
“네, 오라버니.”
“내가 허락하는 것은 네가 고집했던 막돼먹은 아르바이트까지라는 것도.”
“명심할게요.”
“사내란 폭력적이고 이기적이며 편협한 존재이니 항상 조심하고.”
“그런 오라버니도 같은 사내이지 않나요.”
빤한 잔소리에 로렌은 풋 웃음을 터트렸다. 도스턴은 재밌다고 웃는 로렌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나도 같은 사내지.”
사내. 도스턴이 그 단어를 되뇌면서 씁쓸하게 따라 웃었다. 그러면서 고요한 찻집을 한 번 쭉 둘러보았다. 그 시선이 다시 로렌에게 닿았을 때는 평소의 건조한 시선으로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내가 네 오라버니임을 잊지 말아라.”
도스턴은 로렌에게 하는 말인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말을 남긴 뒤 가게를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