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Snake Finds the Wolf Who Played With the Snake RAW novel - Chapter 4
3. 재회
안 그래도 손님이 많지 않은 찻집이 오늘따라 더 한산했다.
깨끗하게 씻은 찻잔을 선반에 말린 로렌이 물기 어린 손을 털면서 창밖을 빼꼼히 쳐다보았다. 저 멀리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얼굴에 하얀 분을 칠한 젊은 광대가 인형극을 준비하고 있었다.
은색 늑대 인형, 금발 왕 인형과 금발 공주 인형. 그것만 봐도 내용은 뻔했다. 드라고로스의 건국 신화를 풀어 내겠지.
‘나도 구경이나 가 볼까.’
저 연극을 보고 나면 기분이 울적해지긴 했지만 광대의 연기가 탁월했기에 제법 재밌게 관람할 수 있으리라.
로렌은 가게를 정리한 후 창고에 세워 두었던 지게를 어깨에 이고 밖으로 나섰다.
“로렌이다, 로렌!”
광대 앞에 옹기종기 앉아 있던 아이들이 로렌을 반겼다. 광대는 저 미친 여자가 이번에도 왔다면서 대놓고 구시렁거렸지만.
“이봐, 아가씨. 당신에겐 관람료를 받지 않을 테니 오늘은 제발 입 다물고 듣기만 하시오.”
광대가 눈썹을 긁으며 핀잔을 늘어놓았다. 로렌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반박했다.
“틀린 부분이 있으면 지적해 줘야 할 것 아닌가.”
“모르는 소리! 난 틀린 내용을 연극으로 만들지 않는다고, 에헴!”
“하지만 내가 그 은빛 늑대였으니 내가 상황을 더 잘 알지 않겠나.”
로렌이 또 자기가 신이라는 소리를 해 대자 광대가 피곤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자기 얼굴에 묻어 있던 분가루를 손가락으로 쓰윽 훑어서 로렌의 뺨에 그대로 묻혔다.
“광대는 나 말고 그쪽이 해야겠소.”
“난 광대가 될 생각은 없다.”
“농담도 구분 못 해?”
“아… 농담이었다면 미안하구나.”
내가 구분을 잘 못 한다고 인정하면서 로렌이 수줍게 뺨을 긁었다. 광대가 묻혔던 하얀 분가루가 손끝에 그대로 묻어났다.
“여튼 당신이 끼어들면 흐름이 끊기니까 제발 입 좀 다물어 주시오.”
광대는 주머니에서 구깃구깃한 지폐를 꺼내 로렌의 옆구리에 찔러 주었다. 이 중에서 유일하게 뇌물 받은 관람객이 된 로렌은 끄응, 소리를 내며 입술을 다물었다.
둥둥! 광대가 작은 북을 두드리면서 연극의 시작을 알렸다. 낡은 탁자 위로 세워 둔 인형극 무대에서는 여러 인형이 등장하고 퇴장했다.
인간을 사랑한 늑대가 신이 되어 그들의 왕국을 축복하고 왕은 아리따운 공주를 만나 백년해로한다는 뻔하디뻔한 내용. 그 뒤로는 늑대 신의 죽음이 동화처럼 펼쳐졌다.
“그때, 늑대 신께서 말씀하셨지. 내 죽음을 국민에게 알리지 말라! 용이 잠든 땅, 드라고로스는 나의 축복으로 번영할지니!”
광대가 눈을 부릅뜨면서 비장하게 소리쳤다.
와아! 아이들의 작은 손이 박수갈채를 쏟아 냈다.
“지혜로운 왕께선 사흘 밤낮을 슬퍼하셨어. 그러던 어느 날 이국땅의 하늘 신이 왕의 꿈에 나타나셨지.”
띠용! 광대가 무대 아래 숨겨 두었던 풍등을 들어 좌우로 천천히 흔들었다. 풍등 위에는 태양이 그려져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처음 보는 내용인지라 로렌도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막스웰이 국교를 바꿀 거라던 소리를 듣긴 했는데 그것이 이 내용이구나.
“하늘 신께선 메마른 땅을 위해 둑과 저수지를 만들라 왕께 명하셨지. 왕께선 그대로 행했고 드라고로스는 다시 풍요로워졌어.”
“진짜요? 둑이랑 저수지를 하늘 신께서 지으라 하셨다고요?”
“그렇다니까. 하늘 신 덕분에 드라고로스가 지금처럼 풍요로운 나라가 된 것이지. 그리고 그 하늘 신의 축복을 받은 이웃 나라 왕녀님께서 곧 우리 왕비님이 되어 주신다더라는 말씀!”
광대는 우스꽝스러운 모자를 벗어 마무리 인사를 하면서 연극을 마쳤다.
“이제 하늘 신이 우리를 지켜 주시나 봐!”
“하늘 신이 최고다!”
와아! 이야기에 푹 빠져 있던 아이들은 저마다 감동한 얼굴로 박수를 쳤다.
광대는 뿌듯한 얼굴로 무대를 정리했다. 접이식으로 된 소품을 정리하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쭈그려 앉아 기다란 나무 상자에 소품을 넣는데 로렌이 슬그머니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이보게, 할 말이 있다.”
“난 없소. 연극 끝났으니 저리 가, 훠이훠이.”
“하지만 틀린 내용이 많아.”
로렌이 끈질기게 말을 걸자 광대는 오리걸음을 하면서 등을 돌렸다.
“들어 보게. 늑대는 인간들을 사랑해서 왕국의 수호신이 된 게 아니야. 그리 거창하지 않았어. 그저 막스웰을 좋아해서 그를 따라 왕국으로 왔을 뿐이다.”
“예이, 예이. 알겠습니다.”
광대는 가벼운 말투로 응수하면서 오래된 테이블보를 탁탁 털었다. 먼지를 일으켜 저 여자를 쫓아내려 했지만 코를 가린 로렌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죽음도 그래. 너의 이야기와 달리 난 보잘것없이 버려졌었다. 내 쓸모가 다했으니 그랬겠지만.”
“하여간에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그러니까 자꾸 미친 여자 소리를 듣는 거요.”
“거짓말이 아니다. 정말 나는 왕에게…….”
“어디 가서 그런 얘기 하지 마시오. 왕실 모독으로 잡혀가오.”
영차. 광대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기다란 상자를 어깨에 멨다. 광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걸음을 내디뎠다.
“잠깐. 그럼 궁금한 것 하나만 묻자.”
로렌이 그런 광대를 따라가며 질문했다.
“에휴, 끈질기기는. 그래, 딱 하나만 물으시오. 대답할 테니.”
“네 연극에서처럼 말이다. 늑대 신이 죽은 후에 왕이… 정말로 사흘 밤낮을 슬퍼했을까?”
“그럼 좋아했겠소? 수호신이 죽었는데 좋아하면 그건 죽일 놈이지.”
“그런가.”
죽일 놈. 로렌은 그 단어를 중얼거렸다.
“이보시오, 입조심 좀 해. 내가 꼭 왕족을 모독한 것 같잖아!”
당황한 광대가 입술 앞에 손가락을 대고 다급하게 쉬쉬거렸다.
“한 가지만 더 묻고 싶어.”
“안 돼. 딱 하나만 대답해 준다고 했잖아.”
광대는 기다란 소품 함을 어깨에 메면서 걸음을 서둘렀다. 로렌이 광대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가 조금 전 받았던 1실론짜리 지폐를 그의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하여간에 끈질기기는. 광대는 걸음을 멈추고 로렌을 돌아보았다.
“뭐가 그리 궁금하오?”
“300년 전 건국 왕이 은빛 늑대를 수호신으로 삼는 장면에서 말이다. 왕이 늑대를 조금이라도… 사랑했을까?”
“아아, 그 장면.”
광대는 눈을 굴리면서 턱을 긁적거렸다.
“글쎄올시다. 그 장면을 연기할 땐 사랑이란 감정은 넣지 않아.”
“왜지?”
“나라면 사랑하는 상대가 우는 꼴은 못 볼 것 같거든.”
“아…….”
로렌의 눈동자가 파르르 흔들렸다. 빳빳하게 굳은 손끝이 차게 얼었다.
“하지만 늑대 신은 무려 300년간 눈물로 비를 내렸지 않소. 사랑하는 이에게 그런 걸 어찌 시켜?”
어휴, 몹쓸 짓이지, 몹쓸 짓이야. 광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다시 걸음을 돌렸다.
“그래. 그렇겠구나.”
몹쓸 짓이었구나.
로렌은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퇴장하는 광대의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 * *
‘오늘은 여기서 만나려나.’
벨파슨 기차역에 도착한 로렌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뻔질나게 가게 앞을 찾아오던 알렉이 오늘 하루 보이지 않는다고 이상하게 신경이 쓰인 탓이다.
열차 운행이 끝난 기차역은 한산했다. 가방을 잃어버렸다고 하소연 중인 신사, 누군가를 기다리다가 다시 터덜터덜 돌아가는 청년, 아주 느린 걸음으로 역사를 빠져나가는 노인과 철로를 점검 중인 역무원이 전부였다. 알렉만큼 덩치가 커다란 사내는 보이지 않았다.
‘내가 근데 왜 그놈을 찾고 있지?’
그 거만한 뱀 놈이 무어라고 이리 신경을 쓰는지. 로렌은 괘씸한 사내에 대한 생각을 탈탈 털어 내면서 매표소 쪽으로 걸어갔다.
마침 키 작은 역장이 잘 빗어 내린 콧수염을 만지며 운임표를 확인하고 있었다.
“잘 있었는가, 역장님.”
“로, 로, 로렌?!”
로렌이 알은체를 하자 역장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어디 안 좋은가? 로렌은 갸웃거리다가 뒤쪽에 산더미처럼 쌓인 짐 더미를 힐끔거렸다.
“오늘은 저걸 우편국에 갖다주면 되는 것이냐.”
“워워, 그거 아니야!”
역장은 화들짝 놀라며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럼 저거?”
로렌은 바로 옆에 있는 조금 더 작은 짐 더미를 가리켰다.
“그것도 아니야. 오늘부터 다른 걸 맡길 예정인데… 어디에 두었더라? 어어, 여기 있네.”
자, 받아. 역장은 고이 모셔 두었던 작은 자루를 들었다. 고작 작은 소포 몇 개만 든 자루는 로렌의 머리만큼이나 작았다.
“겨우 이만큼? 저기 쌓여 있는 짐들은 그럼 무엇이냐.”
“그건 네 몫이 아니라니까.”
“혹시… 나 대신 마차꾼을 쓸 생각인 건가.”
로렌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곧 해고당하려나. 벌이가 제법 좋은 일이었는데 아쉽게 됐다.
“그런 건 아니니 오해 마. 앞으로 네게는 딱 요만큼만 의뢰하려고, 크흠.”
“……?”
“망가지면 안 되는 아주아주 중요한 소포만 추린 거야. 큰 짐 사이에 두면 훼손될까 봐 네게 특별히! 맡기는 거다.”
역장은 품에서 은화 두 개를 꺼낸 뒤 로렌에게 내밀었다. 로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고작 이만큼을 운반하는데 이 돈을 다 준다고?”
“…그래. 그동안 내가 임금을 좀 짜게 준 것 같아서. 거, 미안했다.”
역장이 난데없는 사과를 하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부우우! 곧 커다란 경적과 함께 육중한 기차가 역에 도착했다.
거대한 쇳덩이가 속도를 줄일 때마다 철로에 튀는 불꽃이 유독 화려했다. 까맣고 윤이 반질반질한 차체는 성난 들소처럼 증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열차 머리에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Black Snake’라고 금칠된 금속판이 보였고 그 아래에는 곰 머리에 똬리를 튼 뱀 문양이 음각되어 있었다.
“저렇게 생긴 기차는 처음 보는구나. 막차는 이미 30분 전에 떠나지 않았나?”
“아아, 로렌은 저 기차 처음 보지? 저건 상단주님 전용이야.”
상단주님 전용? 로렌은 이해할 수 없었다. 저 커다란 기차가 어떻게 한 사람만을 위해 움직인단 말인가.
그사이 역장은 부지런히 모자를 고쳐 쓰고서 일등석 앞으로 달려갔다. 검은 코트 차림의 경호대와 왕실 근위병들이 서로를 견제하면서 에스코트를 준비하고 있었다.
‘왕실 근위병이 어째서 이곳에 있는 거지?’
그 해답은 기차 문이 치익 열리자마자 알 수 있었다. 시큰둥하던 로렌의 눈동자가 크게 벌어졌다.
“마… 막스웰?”
툭. 로렌은 들고 있던 작은 자루를 떨어뜨렸다. 귀한 물건만 넣은 것이니 망가지면 안 된다는 역장의 당부 따위는 떠오르지 않았다.
막스웰. 그리도 만나고 싶었던 막스웰이었다. 국왕 막스웰이 왕실 근위대의 경례를 받으며 열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그 뒤로 알렉과 공주가 서 있었으나 로렌의 시선은 오직 막스웰을 따라 박혔다.
막스웰.
막스웰이다.
막스웰, 그가 왔어.
예기치 못한 만남에 당혹감이 얼굴로 번졌다.
“아, 으.”
말이 되지 못한 소리가 꽉 막힌 목구멍에서 흘러나왔다.
‘내 이름을 돌려줘.’
‘나를 왜 죽인 것인가.’
‘나는 네게 그토록 쓸모없었던 것이냐.’
바닥에 가라앉았던 원망이 검고 진득한 기름이 되어 다리를 타고 올랐다. 아아, 오늘이 수요일이라 다행이었다. 줄곧 우편국에 부치던 편지를 직접 전달할 수 있겠구나.
품에서 편지를 꺼낸 로렌은 힘이 들어가지 않는 발을 억지로 끌어서 앞으로, 앞으로 이동했다.
편지를 거머쥔 손을 앞으로 내민 채 넋 나간 얼굴로 엉성하게 걷는 모습은 누가 보기에도 충분히 의심스러웠다.
왕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던 역장은 사색이 되어 로렌을 말렸다.
“이봐, 로렌. 지금 뭐 하려는 거야?!”
어라, 그냥 편지였네. 역장은 로렌이 들고 있는 게 권총 따위가 아니라 편지라는 걸 재차 확인했다. 그만큼 로렌의 얼굴엔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뒤엉켜 있었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근위병들이 하나둘 로렌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역장은 파드득 떨면서 손을 휘휘 저었다.
“고집부리지 말고 어서 저쪽으로 가, 로렌! 가라고!”
“비켜 줘, 역장님. 난 막스웰에게 가야 해.”
“쉿! 너 진짜 죽으려고 환장했어?”
애든 어른이든 반말을 찍찍 해 대더니! 이제는 국왕 전하의 존함을 함부로 입에 올리는 지경까지 온 걸 보면 반듯하게 미쳤다는 여자는 아예 돌아 버린 게 틀림없었다.
“난 멀쩡해, 역장님.”
“멀쩡은 무슨! 네 눈동자, 지금 회까닥 돌아 있다고!”
“잠깐 실례하마.”
로렌이 앞을 가로막은 역장을 한 손으로 쓰윽 밀어 버렸다. 어, 어? 작고 퉁퉁한 몸뚱이가 미는 대로 저항 없이 밀려났다.
“자, 잠깐, 로렌!”
간절한 목소리가 발목을 잡았으나 로렌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번엔 역장보다 덩치 좋은 사내가 로렌의 앞을 막았다. 왕실 근위병이었다.
“뒤로 물러서거라아으억?”
경고하던 근위병이 괴상한 소리를 내면서 곧장 옆으로 튕겨 나갔다.
바닥에 철퍼덕 넘어진 근위병이 “수인이 틀림없어. 수인의 기습이다!” 하고 외치자 왕을 에스코트하던 근위병들은 로렌을 둘러싸고 기다란 라이플을 겨눴다.
모두의 시선이 로렌에게 향했다. 막스웰 또한 마찬가지. 로렌은 걸음을 멈추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사람이 된 내 모습을 그대가 알아볼 수 있을까.’
열다섯 소녀의 모습으로 마주했던 건 막스웰의 전생에서였다. 이번 생에는 힘이 다 빠져 볼품없는 늑대의 모습으로 그를 만났었지만 내심 자신을 알아보지 않을까 기대가 되었다.
하지만 막스웰의 새파란 눈동자는 이방인의 등장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로렌에게 닿았던 권태로운 시선이 근위대장에게 향했다.
“근위대장은 짐이 직접 명령할 때까지 이 소란을 지켜볼 셈인가.”
“소, 송구합니다, 전하!”
고개를 조아린 근위대장이 아랫것들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그중 덩치 좋은 근위병이 빠르게 걸어 나와 허리춤에 걸려 있던 쇠 목줄을 로렌에게 던졌다.
벌어진 쇠고리가 입을 쩍 벌리고 날아오더니 가느다란 목에 철컹, 채워졌다. 수인을 진압할 때 사용하는 특별한 마도구였다.
난데없는 짐승 취급에 로렌은 당황했다. 양손으로 쇠 목줄을 잡아당겨 보았으나 쥐고 있던 편지만 구겨질 뿐, 마도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 이게 대체 뭐지?’
얼음물이 정수리로 쏟아진 것처럼 전신이 차게 굳었다. 정성 들여 쓴 편지가 보잘것없는 종이 쪼가리처럼 구겨졌듯이 로렌의 마음도 형편없이 갈라지고 쪼그라들었다.
그래서 누군가가 혀를 차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막스웰의 뒤를 따라 열차에서 내리던 알렉이 에스코트하던 공주의 손을 가볍게 털어 내고서 성큼성큼 로렌에게로 걸어갔다.
“이봐요, 알렉산더 경?”
공주는 버려진 손과 알렉을 번갈아 보면서 그를 불렀으나 그는 반응하지 않았다.
“이런 건 예의가 아니에요!”
저 잘난 상단주를 향해 일침을 놓았지만 역시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빠르게 걸어 나간 알렉은 로렌의 코앞까지 다가간 뒤 그녀를 알은체했다.
“여기까지 마중 나올 필요는 없다고 했잖아. 집에서 기다리라니까.”
부드럽게 올라간 입꼬리와 다르게 그의 황금색 눈동자엔 웃음기는 없었다. 막스웰에게 박혀 있던 눈동자가 파르르 떨면서 알렉을 담았다.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우선 이것부터.”
알렉은 쇠고리를 끊어 내려고 애쓰던 작은 손 위로 커다란 손을 포갠 뒤 그대로 힘을 주었다.
우드득. 끼잇― 절대로 끊어지지 않을 것 같던 쇠 목줄이 비명을 지르며 벌어지더니 끊어졌다.
“저, 저걸 어떻게 맨손으로!”
“알렉산더 경, 왕실의 물품을 망가뜨리지 마십시오!”
근위병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랐다. 근위대장이 알렉을 말렸으나 알렉은 들은 체도 안 했다.
쇠 목줄은 삽시간에 걸레짝이 됐다. 철커덕, 쿵. 알렉은 끊어 낸 쇳덩이를 바닥에 신경질적으로 던지며 막스웰을 응시했다.
“저를 마중 나온 여인 때문에 많이 당황하셨나 봅니다, 전하.”
사람을 짐승 취급까지 할 만큼 놀랐을 줄은 몰랐다면서 알렉은 조금 전의 상황을 은근히 비꼬았다.
“경을, 마중 나왔다?”
막스웰은 알렉의 삐딱한 태도에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를 향해 똑바로 걸어오던 저 여자의 형형한 눈빛이 지금도 생생하거늘. 무언가 미심쩍었다.
막스웰의 시선이 로렌에게서 떨어지지 않자 알렉의 턱선이 꿈틀거렸다.
“네. 얼마 전부터 만나게 된 여인인데 저와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려 하거든요. 그렇지, 로렌?”
알렉이 눈을 곱게 휘면서 로렌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당황한 로렌은 이도 저도 못 한 채 숨만 크게 들이쉬었다. 막스웰을 보느라 호흡을 잊어 텅 비었던 숨통이 그 특유의 시원한 그의 체취와 향수 냄새로 채워졌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산란하던 마음이 진정되면서 찬기가 가셨다.
로렌은 그 품을 슬쩍 더 파고들었다. 뱀 비늘처럼 매끈한 실크 정장이 오른뺨에 닿는 느낌이 안정적이라 마음이 놓였다. 동시에 공주의 따가운 시선이 반대편 뺨에 닿았지만 크게 신경 쓰진 않았다.
쿵. 쿵. 쿵.
빠르게 뛰는 그의 심장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국왕 앞에서 거짓말을 해서 불안한 건가.
‘화를 당하려면 어쩌려고 나섰던 건지.’
로렌은 고개를 들어 너른 품의 주인을 올려다보았다. 저 어리석은 뱀의 속을 알고 싶은데 반질반질한 얼굴 위로 읽을 수 있는 감정은 없었다.
그때 알렉이 손가락으로 로렌의 주름진 미간을 꾸욱 누르면서 고개를 숙여 귓가에 속삭였다.
“티 내지 말고 얼굴 펴. 도와주려는 거니까.”
알렉은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면서 로렌의 이마에 쪽 입을 맞췄다.
“……!”
로렌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의 입술이 닿은 이마를 문질렀다.
“하하, 귀엽기는. 내가 없어서 많이 외로웠어, 달링?”
“…달링?”
그건 개 이름 아닌가. 로렌은 옆집 빌 아저씨의 애완견 이름이 그와 비슷했던 것을 떠올렸다. 나는 달링이 아니라 로렌이라고 정정하려던 때.
“날 주려고 편지까지 썼구나, 달링.”
알렉은 로렌이 쥐고 있던 편지를 쓰윽 가져갔다.
“아, 안 돼, 그건…….”
막스웰의 것이라고 말하려던 찰나, 알렉은 편지를 품 안에 쏙 넣은 뒤 한 번 더 로렌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이 사내는 대체 왜 이러는 거지? 벙찐 로렌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간절하게 그려 왔던 막스웰과의 만남이건만 자꾸만 이 사내가 눈길을 사로잡아서 막스웰을 신경 쓸 틈이 나지 않았다.
“편지 고마워. 상단에 도착하면 읽어 보도록 하지.”
알렉은 로렌을 사랑스럽게 내려다본 뒤 막스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제 피앙세가 좀 피곤한 모양입니다, 전하. 서둘러 귀가해도 되겠습니까.”
어찌 보면 건방진 요구이기도 했다. 오늘의 만남은 막스웰이 철도 개선 문제를 핑계로 공주와 알렉의 교제를 주선하려는 자리였으니까.
“경의, 여인이라고?”
“그렇습니다.”
“소문과 다르게 취향이… 독특하군.”
저 볼품없고 초라한 여자가 검은 뱀의 연인이라니. 수많은 여인을 정복하고 나니 색다른 연애를 하고 싶었던 건가. 막스웰의 언짢은 시선이 로렌에게 닿았다.
“칭찬 감사합니다. 그 남다른 취향이 성공의 비결이거든요.”
알렉은 노련한 말발로 왕의 비틀린 말을 받아 내면서 바닥에 떨어진 쇠 목줄로 시선을 돌렸다.
“그 비결도 모르고 제 여인에게 저딴 걸 던진 근위병은 참 딱하지 않습니까. 이 바닥에선 제대로 된 안목이 없으면 빨리 뒈져 버리니 말입니다.”
어이쿠, 뱉고 보니 말이 좀 심했나. 알렉은 턱을 긁적이면서 덩치 큰 근위병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근위병은 ‘천박한 수인 주제에!’ 하고 입을 뻥긋거리며 자존심부터 챙겼으나 덜덜 떨리는 두 다리는 감추지 못했다. 하얗게 질린 낯빛 또한 형편없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왕은 “모자란 놈.” 하고 중얼댄 뒤 알렉을 향해 싱긋 웃었다.
“안타까운 사고였어. 경의 여인인 줄 알았더라면 근위대가 좀 더 조심했을 것이다.”
그 말을 하는 내내 막스웰의 시선은 로렌에게 닿아 있었다.
막스웰은 어깨에 걸친 늑대 가죽을 버릇처럼 쓰다듬으며 로렌을 샅샅이 뜯어보았다.
‘셈을 잘하기로 소문난 상단주가 공주 대신 저 여인을 택한 속내가 뭐지?’
꾸미지 않아도 반반한 얼굴은 매력적이었으나 그렇다고 공주보다 월등히 나아 보이지도 않았다.
‘주판알을 굴려 보면 내 누이를 택하는 게 이득인데도 말이야.’
낡은 부츠와 드레스, 촌스러운 스카프, 푸석한 머리칼, 다듬어지지 않은 말투와 동작. 그리고 조금은 특이한 눈동자…….
점수를 매기던 막스웰의 시선이 로렌의 눈으로 향했다. 색소가 옅은 연회색 눈동자가 자꾸만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둘의 눈빛이 마주친 순간.
“…….”
이상했다. 평온했던 심장 위로 깨끗하고도 뽀얀 살얼음이 퍼져 나갔다.
‘이 기분은 뭐지?’
낯익었다. 하지만 어디서 본 것인지는 당최 기억나지 않았다.
막스웰은 어깨에 걸친 늑대 가죽을 내려다보았다. 설마 착각이겠지. 막스웰은 말도 안 되는 가정을 뿌리쳤으나 로렌에게서 눈길을 돌리지 못했다. 사로잡혔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왕의 새파란 눈동자가 한 번을 눈꺼풀에 가려지지 않고 로렌을 따라다녔다.
막스웰과 시선을 마주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로렌은 혼란스러웠다. 알렉의 품에서 되찾았던 안정감은 사라지고 잠시 뒤로 젖혀 둔 분노와 설움, 애정과 연민, 기대와 실망 따위가 목구멍 밖으로 꺽꺽 튀어나왔다.
“…것이냐.”
작고 부정확한 말소리는 타인이 알아듣기 힘든 종류였다. 막스웰이 눈살을 찌푸리자 로렌은 한 번 더 같은 말을 반복했다.
“나, 나를 왜. 왜… 버린 것이냐.”
그를 만나게 되면 가장 먼저 내 이름을 돌려달라고 말하리라 다짐했거늘. 막상 튀어나온 말은 달랐다.
“나를 버린 이유를… 알려 다오.”
그제야 로렌은 깨달았다. 쓸모없어져 버려진 처지를 담담하게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아니었다는 것을. 그것은 지금까지도 메우지 못한 상처였다는 것을.
‘신이라 불리었던 내가 이리도 옹졸했었구나.’
뻔한 대답이 돌아올 걸 알았으나 무엇이라도 듣고 싶었다. 그래야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막스웰은 그 작은 목소리를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여전히 불편한 표정으로 로렌을 내려다볼 뿐이었으니.
이런. 알렉은 품고 있던 작은 몸이 파들파들 떨고 있는 것을 느끼곤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커다란 손으로 로렌의 두 눈을 가렸다.
“달링, 다른 사내를 그리도 열렬하게 쳐다보면 내가 좀 질투나.”
알렉은 정말 질투라도 하는 사내처럼 삐딱하게 웃었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그의 손이 닿자마자 복잡했던 감정이 스르르 풀려 나갔다. 익숙한 페로몬이 로렌을 위로하듯 안개비처럼 스며들자 로렌은 덜덜 떨리던 몸이 차츰 안정을 찾아 가는 걸 느꼈다. 탁했던 마음 또한 침전물이 되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숨, 제대로 쉬어 볼까.”
알렉의 말에 따라 로렌은 등 뒤에 닿는 단단한 몸에 기대어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가 풀어 낸 페로몬이 로렌의 폐부를 기분 좋게 채우고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바짝 긴장했던 어깨가 아래로 서서히 가라앉았다. 알렉은 그 모습을 칭찬하듯 로렌의 정수리에 쪽 입을 맞춘 뒤 막스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알렉의 키가 막스웰보다 조금 더 큰 탓인지 일국의 왕을 내려다보는 눈빛엔 묘한 무례함이 섞여 있었다.
“전하를 알현한 것이 처음이기에 저의 피앙세가 당황하였나 봅니다. 선처해 주시길.”
“아아.”
막스웰은 로렌의 눈을 가린 알렉의 손을 언짢게 응시하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짐은 이만 궁으로 돌아가지. 공주는 내가 에스코트할 테니 굳이 배웅하지 않아도 좋아.”
막스웰은 오른 손등을 반대편 손으로 스윽 문질렀다. 하얀 장갑으로 가려진 손등은 맹약의 인장이 있는 자리였다. 태어날 때부터 새겨져 있던 덕분에 건국 왕의 환생이라며 칭송을 받았던 바로 그 인장.
그것이 유독 간지러운 이유를 찾지 못하며 막스웰은 오른손을 툭툭 털어 냈다. 그리고 또 한 번 알렉을 유혹하는 데 실패한 여동생을 향해 그 손을 내밀었다.
공주는 막스웰의 손을 선뜻 잡지 않고 알렉에게 눈짓했다. 이제라도 그가 다시 제게 와 줄 것을 눈빛으로 요구했으나 알렉은 로렌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엘리아나.”
막스웰이 공주의 이름자를 힘주어 불렀다. 하지만 저 아둔한 공주는 다시 알렉을 쳐다볼 뿐이다. 미련한 것 같으니. 뿌득, 이를 간 막스웰은 공주의 손을 강제로 채어 잡았다.
“잠시만요, 전하. 저는 알렉산더 경에게…….”
“체통을 지켜라, 엘리아나.”
관심이 떠난 사내에게 질척대지 말라는 경고가 날카로웠다. 엘리아나 공주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오라버니가 내민 팔을 붙잡아야 했다.
막스웰은 하얗게 질린 공주를 에스코트하면서 우아하게 걸어 나아갔다. 그리고 알렉을 지나쳐 가려던 때.
“그러고 보니 곧 짐의 결혼 연회가 있겠군.”
막스웰은 알렉의 바로 옆에서 걸음을 멈추고 부드럽게 웃었다. 왕의 새파란 눈동자가 알렉을 위엄 있게 응시하다가 가늘어졌다. 감히 왕의 시선을 똑바로 받아치는 저 건방진 눈동자엔 끝을 알 수 없는 새까만 심연이 도사리고 있었다.
‘천박한 뱀 새끼가 기어오르기는.’
막스웰은 그 심연을 길게 마주하지 못하고 로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마저 하지 못한 말을 이었다.
“그날 저녁 연회에 파트너를 꼭 데려오게. 그땐 또 어떤 별종이 경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을지 궁금하니까.”
막스웰이 알렉의 여성 편력을 대놓고 비꼬았다. 어쩌면 저 로렌이란 여인을 한번 건드려 보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눈이 가려진 채 서 있는 저 여인이 어딘가 꿈틀할까 싶어서.
하지만 꿈틀거린 건 노련하게 웃음을 지어내던 알렉이었다.
“별종, 이라 하셨습니까.”
“그래. 자네 또한 별종이 아니었던가. 별종 옆엔 별종이 어울리지.”
막스웰이 알렉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후 지나갔다. 왕이 지나가자마자 가짜 웃음마저 사라진 알렉의 얼굴은 한층 더 싸늘했다.
눈이 가려진 채 서 있던 로렌은 숨을 길게 내쉬며 막스웰의 퇴장을 아쉽게 받아들였다.
‘막스웰이 또 결혼하는구나.’
이번 생에서도 아주 아름다운 여인과 결혼을 하겠지. 300년 전처럼 환하게 웃으면서. 새카만 시야로 지난 생애에서의 결혼식이 떠올랐다.
평생 연구한 불꽃을 오늘에야 터트려야 한다며 제발 비를 그쳐 달라고 기도하던 불꽃쟁이의 목소리에 울음을 그쳐야 했던 밤.
종일 퍼붓던 비가 그치고 먹구름 사이로 별들이 고개를 내밀 때 펑, 펑, 축포가 쏘아지던 하늘. 젖은 흙내음 사이로 섞여 들던 탄약 향. 눈물로 번진 시야를 채우던 색색의 연화.
그 모든 장면이 어제처럼 생생했지만 신기하게도 그때의 감정만큼은 아득히 흐려져 있었다.
‘불꽃을 떠올릴 때면 항상 막스웰이 그리웠었는데…….’
참 이상하게도 이제는 이 커다란 손의 주인이 먼저 생각났다. 덜컥 제게 각인해 버렸다는 순진한 검은 뱀이.
덕분에 막스웰 앞에서 불안했던 마음도 빨리 안정을 되찾았다. 지금이라면 퇴장하는 그의 뒷모습을 덤덤히 지켜볼 수 있으리라.
로렌은 퇴장하는 막스웰의 뒷모습이 보고 싶었으나 알렉에게 손을 치워 달라고 말하진 못했다.
지금 그런 말을 한다면 알렉의 상처받은 얼굴을 볼 것 같았고, 그걸 감수하면서 봐야 할 만큼 막스웰의 뒷모습이 값질 것 같진 않았다.
* * *
고급 마차에 올라탄 로렌은 꼿꼿하게 앉아서 맞은편에 앉은 알렉을 힐끔거렸다. 알렉은 피곤한 듯 눈을 감고서 상체를 삐딱하게 기울이고 있었다.
풀어 헤친 셔츠 사이로 단단한 빗장뼈가 보였고 셔츠 깃 틈으로 비치는 뱀 문신은 그가 숨을 쉴 때마다 사납게 꿈틀거렸다.
‘마차 안이 덥네.’
로렌은 손부채질을 하면서 옆을 보았다. 로렌에겐 넓은 마차 공간이 덩치 커다란 사내에겐 모자랐는지, 그의 기다란 두 다리가 로렌의 옆자리에 떡 하니 올려져 있었다. 그것이 하필 출입문 쪽이라 마차에서 내리려면 그가 다리를 비켜 줘야 하는 상황이었다.
벨파슨 기차역에서 로렌의 집까지는 걸어서 고작 10분 거리였건만 마차는 20분이 지나도 멈추질 않고 주변을 뱅뱅 돌고 있었다.
알렉을 곁눈질하던 로렌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러고 보니 저 뱀 사내를 ‘너’, ‘당신’ 등으로만 불러 봤지 이름을 불러 본 적은 없었다. 막상 그를 부르자니 손바닥이 간질거렸다.
“편하게 알렉이라고 불러. 특별히 너에겐 허락해 주지.”
몸을 겹쳤던 밤 사내가 했던 이야기가 불현듯 떠올랐다. 로렌은 늑대답지 않게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그 이름을 말했다.
“아, 알렉.”
그 이름을 혀에 올리자마자 목 부근이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고작 이름 따위가 뭐라고 이리도 부끄러운지. 로렌은 손등으로 뺨을 눌렀다. 여기도 열이 오른 걸 보니 얼굴이 새빨간 것이 틀림없었다.
알렉이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속눈썹이 길어서일까. 그 아래로 보이는 눈동자가 유독 어두워 보였다.
알렉은 말없이 로렌을 응시했다. 왜 불렀냐고 물어보는 건가.
“그, 지금 우리 집 주변을 여덟 바퀴째 돌고 있다. 이제 그만 내려 줘.”
“…….”
“알렉?”
“듣기 좋네. 앞으로도 그렇게 불러.”
알렉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상체를 숙였다. 둘의 거리가 한 뼘 남짓 가까워졌고 로렌은 흡, 숨을 삼켰다. 무슨 일이지? 그의 청량한 페로몬이 유독 진하게 느껴졌다.
“그리웠던 이를 직접 만나 본 소감이 어때.”
알렉이 품에서 궐련 한 개비를 꺼내며 왕을 알현한 소감을 물었다. 가죽 장갑을 낀 기다란 손가락이 궐련을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는 궐련을 만지작댈 뿐 입에 물지는 않았다.
‘저자는 내가 왕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걸 어찌 알았을까.’
로렌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의문을 거뒀다. 누군가가 찻집에서 떠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검은 뱀 상단주는 세상의 모든 정보를 알고 있다나.
“생각보다 좋진 않았다.”
로렌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막스웰을 다시 마주했을 때 300년 전 느꼈던 설렘은 없었다. 굳이 감정의 방향을 따지자면 혼란에 가까웠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나쁘지도 않았어.”
하고픈 말을 제대로 못 했지만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버림받은 상처가 꽤 컸다는 것과 더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
‘막스웰을 봐도 심장이 애틋하게 두근거리지 않았어. 오히려 그런 감정은…….’
로렌이 눈동자만 들어 알렉을 힐끔거렸다. 뺨 주위가 화끈대는 걸 보니 아까보다 더 열이 오른 모양이다.
“너 혹시.”
알렉이 로렌을 향해 천천히 팔을 뻗었다. 그의 손길이 제 얼굴에 닿을 것 같아서 로렌은 수줍음을 감추며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똑똑.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뻗어 나온 그의 손은 로렌의 머리 뒤쪽 마부석 창문을 두 번 두드릴 뿐이었다. 로렌에겐 스치지도 않았다.
‘뭐지?’
로렌은 한쪽 눈을 살짝 떠 상황을 확인했다. 피식 웃고 있는 그와 눈이 마주친 것도 그때였다. 뭘 기대했었냐고 묻는 듯한 눈빛이 장난스러웠다.
‘내가 부끄러운 오해를 했구나.’
로렌은 고개를 푹 숙여 표정을 가렸다. 이 분위기가 조용히 지나가길 기다렸지만 시간을 오래 끌 순 없었다.
곧 마차가 로렌의 집 앞에서 멈추었다. 로렌은 마부가 문을 열어 주기 전에 먼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로렌이 마차에서 내리겠다는 티를 팍팍 냈으나 알렉은 여전히 반대편 의자에 올렸던 다리를 비켜 주지 않은 상태로 버티고 있었다.
‘심술맞은 뱀 같으니라고.’
로렌은 용맹한 늑대답게, 비켜 달라는 말 대신 그의 두 다리를 직접 들어 올려 옆으로 치워 버렸다. 사내의 다리가 보기보다 묵직했으나 철근도 번쩍 들어 옮기는 로렌에겐 일도 아니었다.
“순진한 사내 다리를 함부로 막 더듬네. 꽤나 음흉한 늑대님이시군.”
알렉이 큭큭 웃으면서 다리를 정리했다.
“더, 더듬다니! 그런 거 아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짧은 바지라도 챙겨 올 걸 그랬어. 그쪽이 만족스럽게 느끼시라고.”
알렉은 로렌을 살뜰하게 놀리면서 마차에서 먼저 내렸다. 그리고 로렌을 에스코트하고자 손을 내밀었으나 로렌은 그 손을 못 본 척 무시하며 씩씩하게 마차에서 내렸다.
긴장이 풀려서인지 아까부터 몸에 힘이 빠지고 다리가 자꾸만 후들댔으나 누군가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릴 정도로 나약하진 않았다.
로렌은 도스턴에게 배운 대로 레이디의 인사를 남긴 뒤 찻집으로 돌아왔다. 많은 일이 있었던 하루가 유독 길게 느껴져 피로했다.
‘감기에 걸린 건가.’
로렌은 주방으로 가서 물을 올렸다. 꿀에 절인 생강을 넣고 따끈한 차를 마실 계획이었다.
“난 커피가 좋은데.”
하지만 알렉이 찻집으로 따라 들어온 일은 계획에 없었던 일이다.
“어, 어째서 따라왔는가.”
화들짝 놀란 로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 각인 상대가 곧 곤란해질 것 같아서 따라왔다고 해 두지.”
알렉은 그렇게 말하며 주변을 살폈다. 혹시라도 다른 수컷이 제 암컷 근처를 얼씬거리는지 경계하는 눈빛이었다.
“곤란해지다니?”
로렌은 열이 나는 이마를 문지르다가 비틀거렸다. 어라, 몸이 왜 이러지? 전신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너 아까부터 발정기처럼 페로몬을 엄청 흘리고 있어. 알아?”
알렉이 목덜미를 문지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마차 안에서 진동하던 로렌의 페로몬이 밖으로 새어 나갈까 봐 그녀의 향기를 제 것으로 덮느라 애를 썼던 일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로렌이 마차에서 뛰쳐나가 애먼 수컷을 찾아 댈까 봐 다리로 마차 문을 막아 둔 것까지도.
“이대로 두면 더 심해질 거야. 그 첨탑에서처럼 온 동네에 네 냄새가 진동하겠지.”
알렉은 아무 의자나 끌어와 앉은 뒤 손가락을 마주쳐 딱 소리를 냈다. 곧 그의 손 주위에서 하얀 빛이 반짝이더니 가게 출입문이 덜컥 잠겼다.
“내가 봤을 땐 너, 발정기야.”
알렉은 자신의 페로몬을 뿜어 실내를 덮었다. 젠장. 로렌의 발정 페로몬을 감추려 할 때마다 자신이 곤란해지는 기분이었다.
로렌은 카운터를 짚으며 상체를 숙였다. 알렉의 페로몬이 느껴질 때마다 땀이 식어 한기가 드는 것처럼 피부가 떨렸다.
어지러웠고 목이 말랐다.
몸살에 걸린 듯 열이 올라 전신에 힘이 빠졌다.
동시에 시야가 기우뚱 기울었다.
중심을 잡으려 카운터를 붙잡았으나 그곳에 올려 둔 애먼 유리병 하나만 바닥으로 떨어졌다.
쨍그랑! 유리병이 먼저 바닥에 닿아 깨졌다. 곧 제 몸 또한 유리병처럼 떨어지나 싶었는데, 무언가가 몸을 지지해 주었다.
로렌은 천천히 눈꺼풀을 깜박거렸다. 저만치 앉아 있던 알렉은 보이지 않았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잖아.”
조금 전까지 찾던 인물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어느새 다가온 알렉이 자신의 몸을 가볍게 들어 올리고 있었다.
로렌은 힘없이 미소 지었다. 매사에 툭툭거리고 의자에 앉으면 삐딱하게 늘어지던 사내가 생각 외로 몸이 참 날래지 않나.
“주기가 이렇게 짧다는 말은… 없었다.”
“며칠 전 의원에게 주기가 불규칙할 거란 말은 나만 들은 거야?”
알렉은 바닥에 떨어진 유리 조각을 구두로 탁탁 치우면서 걸음을 옮겼다.
그가 의원을 언급하자 며칠 전 신문에서 보았던 이상한 기사가 떠올랐다. 그저 우연일 수도 있지만 한번 물어볼까.
로렌이 고개를 들어 알렉을 올려다보았다. 단단한 턱과 높다란 콧대, 긴 속눈썹 아래 드러난 황금빛 눈이 오늘따라 유독 아름다워 보여서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쪽인가.”
그는 뱀이 아니라 개처럼 냄새를 킁킁 맡았다. 그리고 로렌의 향이 가장 많이 느껴지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사이 로렌은 알렉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가 풍기는 페로몬을 한껏 들이마시면 지독하던 갈증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로렌의 방을 찾아낸 알렉은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공간을 둘러보았다.
“너를 닮은 방이군.”
거울 하나, 옷장 하나, 침대 하나. 딱 필요한 가구만 놓여 있는 방은 깔끔했다. 사용감 있는 가구들에는 로렌의 손때가 잔뜩 묻어 있었다.
“물건을 잘 버리는 성격이 아니군. 그래서 애초에 사지도 않는 건가.”
작은 침대에 판자를 붙여 길이를 늘인 것이나 지금 로렌이 쓰기엔 낮은 간이 의자를 보면 추론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여인의 공간이라면 하나 정도는 있을 액세서리나 귀여운 소품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드레스가 걸려 있지 않았더라면 깔끔한 사내의 방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꾸밈이 없었다.
“이건 누구의 글씨일까.”
알렉이 거울 앞에 붙은 작은 쪽지를 응시했다. 정갈한 글씨체는 로렌의 것이 아니었다.
“네 오라비는 여동생을 굉장히 순수하게 키우려고 했던 모양인데.”
알렉은 글씨의 주인을 추측하면서 안고 있던 로렌을 힐끔거렸다.
“그대는 사내를 잡아먹고 도망가는 발칙한 동생으로 자라 버렸군. 그 사내의 몸을 헐값에 매겨 버리는 아주 자랑스러운 동생으로 말이야.”
“그만, 해…….”
로렌이 알렉의 가슴팍을 탁 내리쳤다. 제법 매운 주먹이었으나 알렉은 아픈 기색 하나 보이지 않았다.
“왜. 내가 틀린 말을 했나.”
“빨리, 흣, 내려 줘.”
“조금 더 구경하고. 남의 방을 보면서 재밌다고 느낀 건 처음이라 신기해서 말이지.”
알렉은 볼 것 없는 방을 몇 번이고 꼼꼼하게 둘러보았다.
축 늘어진 로렌을 침대 위에 내려 둔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였다. 쉬라는 말과 함께 몸을 떼어 내려는데 로렌이 그의 목에 두 팔을 감고서 놓아주지 않았다.
“…이봐?”
알렉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이 여자는 이게 무슨 뜻인 줄이나 알고 이러는 걸까.
뒤늦게 자신의 행동을 깨달은 로렌이 변명을 뱉었다.
“파, 팔이 저절로 이렇게 되었다.”
로렌은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알렉을 놓아주지 않았다.
저절로? 한숨을 내쉰 알렉은 그대로 얼굴을 내려 할딱이는 로렌의 입술을 베어 물듯이 깨문 후 입술을 떼었다. 붉었던 입술이 그에게 물려 더 새빨개졌다.
“나도 저절로 깨물었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데?”
“흐윽.”
로렌은 너무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그의 목에 감아 두었던 팔에 힘을 주고 그의 상체를 끌어당겼다.
알렉이 순순히 끌려오자 로렌은 그의 입술에 무작정 제 입술을 갖다 댔다.
푸흡. 아이처럼 서툰 키스에 알렉은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얼굴을 붉힌 로렌이 작은 몸을 부들부들 떨자 알렉은 그녀의 머리와 몸을 부드럽게 지탱한 뒤 어른의 입맞춤을 알려 주었다.
곧 두툼한 혀가 치아를 벌리고 들어와 뒤로 숨어 버린 로렌의 혀를 툭툭 건드렸다. 그것은 부드럽게 로렌을 타이르면서 예민한 점막과 붉은 살점을 비비고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그의 숨과 타액이 로렌의 입술 사이로 넘어갔다. 수컷의 강력한 페로몬도 함께.
그러자 소극적이던 작은 입이 페로몬에 젖어 가며 알렉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가 미처 삼키지 못한 것들은 입가를 따라 도르르 흘러내렸다.
로렌은 알렉이 주는 것을 아기 새처럼 받아먹었다. 그의 굵은 혀가 입 안을 휘저을 때마다 허벅지가 파르르 경련했다.
하. 하으. 로렌이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할딱거렸다. 그걸 본 알렉이 쪽쪽 빨던 혀를 놓아주고 입술을 떨어뜨렸다. 허겁지겁 숨을 들이켠 로렌은 호흡을 되찾자마자 다시 알렉의 얼굴을 붙잡았다.
“더, 더…….”
“벌써 정신을 놓은 거야?”
알렉이 곤란하다는 듯 웃었다. 그는 로렌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춘 뒤 거리를 벌렸다.
“참 재밌어.”
알렉은 로렌의 젖은 눈가를 쓸어 올리며 그녀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이목구비가 화려한 미인도 아니고 색기를 풍겨 사내를 유혹할 만큼 성숙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이 여인에게만 이리도 마음이 동할까. 이 또한 각인 탓일까.
“너의 언행만 보면 그럴싸하게 영물 같아. 죽었다던 수호신이 사실은 살아 있는 것 같기도 하지. 하지만 알다시피 영물은 발정기를 맞지 않아.”
“흐으.”
“넌 대체 정체가 뭐야.”
알렉은 로렌의 흐려진 눈동자를 응시하면서 삐딱하게 웃었다. 사샤가 5년 전의 정보를 수집하려면 열흘을 더 기다려야 했으니 당장에 알 방도는 없어서 이렇게라도 묻고 싶었다.
“난, 흐읏, 용맹한 은빛 늑대다.”
“은빛이라. 그래. 그러고 보니 그날 밤은 분명 반짝였던 것 같은데.”
알렉은 은빛보다 잿빛에 가까운 로렌의 머리칼을 쥐었다. 가느다란 머리칼이 알렉의 손가락 사이를 사르르 훑으며 흩어졌다.
“모르겠군. 널 어떻게 해야 할지.”
로렌이 페로몬을 흘리는 걸 보고서 이곳까지 따라온 알렉이었다. 로렌의 상황에 따라 함께 밤을 보낼 각오로 온 것은 맞았으나 웬만하면 그녀와 관계를 맺는 것보다 페로몬을 흘려 진정시키는 방법을 택하고 싶었다.
어차피 각인을 해제할 사이였다. 이 이상 관계가 깊어져 그녀에게 끌려다니는 일도 사양이었고 누군가와 깊은 관계를 맺는 것도 질색이었다.
“젠장맞을, 내가 원래 오는 여자는 안 막는 성격인데 답지 않게 이런 고민을 하는군.”
잔뜩 부풀어 오른 욕망이 전신의 피를 뜨겁게 데웠지만 알렉은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하며 이마를 쓸었다.
하지만 그것은 길게 가지 못했다. 로렌이 손을 뻗어 알렉이 걷어 올린 소맷자락을 잡는 순간, 견고하게 쌓아 올렸던 인내 또한 소맷자락을 따라 힘없이 흔들렸다.
“힘들어. 도와…줘.”
“뭘 도와.”
“흐윽, 그러지 말고…….”
로렌은 그의 손을 끌어다 심장께에 올려 두었다. 빠르게 뛰는 작은 심장의 뜀박질이 손바닥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진짜 임신이라도 하고 싶어서 이래?”
각인을 해제하자며. 그날 밤은 서로 잊자고 먼저 말한 게 누구더라.
알렉은 로렌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뒷말을 덧붙였다. 그 말을 알아들었는지 몽롱하게 흐려진 연회색 눈동자에 눈물이 왈칵 고였다.
제기랄, 지금 억울한 게 누군데! 알렉은 저도 모르게 움찔 어깨를 떨면서 그녀를 품에 안았다.
“이번에는 도망가지 마. 혹시라도 마력을 받게 되면 내 기억을 지우려 하지도 말고. 약속할 수 있겠어?”
알렉의 물음에 로렌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아. 또 내 몸에 어설픈 값을 매기려 든다면 그땐 거래라는 게 무엇인지 똑똑하게 알려 줄 테니 각오하고.”
알렉은 로렌의 귓가에 쪽 입을 맞추면서 먹잇감을 노리는 포식자처럼 느릿하게 침대로 기어올랐다.
알렉의 무릎이 로렌의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힘주어 벌리지도 않았는데 하얀 다리가 양옆으로 스르륵 벌어졌다. 하? 알렉이 누워 있는 로렌의 표정을 살폈다. 기대에 찬 눈동자와 살짝 벌어진 입술은 음탕하기 짝이 없었다.
“이런 걸 두고 진짜 늑대 영물이었을지 고민하다니.”
“흐으.”
“어떤 영물이 이렇게 천박하게 굴겠어. 응?”
알렉은 소매 단추를 풀고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접어 올렸다. 셔츠 위로 근육이 선명하게 갈라진 팔뚝이 드러났고 그 위로 불툭 튀어나온 핏줄은 강건해 보였다.
“하긴, 사내를 홀리는 것도 능력이라면 그 또한 영물이긴 하겠지. 안 그래?”
알렉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뜨거운 숨이 흘러나오는 그녀의 입술을 쪽쪽 빨았다. 그러면서 한 손으로 로렌이 목에 감아 둔 스카프 매듭을 능숙하게 풀었다.
“읍, 후으.”
“마차에서부터 이런 맛있는 냄새나 풍기고 말이야.”
알렉의 입술은 점점 아래로 내려가 스카프에 가려져 있던 가느다란 목선을 길게 핥았다.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는 목이 움찔거릴 때마다 알렉은 숨통을 콱 물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겨우 삼켰다.
곧 커다란 손이 로렌의 드레스 앞섶을 풀었다. 가슴을 조여 대던 옷감이 사라지자 하얀 살덩이가 봉긋하게 솟아올랐다.
알렉은 곧장 분홍빛 유실을 찾아 입에 물었다. 흥분해 발딱 서 버린 유두를 잘근거리자 로렌이 허벅지를 배배 꼬며 신음을 흘렸다.
“아응, 흣!”
그의 손이 젖가슴을 주무르고 선단을 자극할 때마다 기분 좋은 자극이 아랫배로 울려 퍼졌다. 그의 손이 그 쾌감의 줄기를 따라 하반신으로 내려갔다.
어느새 벗겨진 드레스가 침대 아래로 툭 털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얀 스타킹만 걸쳐진 몸은 조금 차가운 실내 공기에 바르르 떨렸다.
“추워?”
알렉이 고개를 기울이면서 로렌의 몸을 감상했다. 그의 오른손엔 벗겨진 속옷이 걸려 있었다. 얇은 천 조각은 로렌이 흘린 애액으로 푹 젖어 있었다.
“이렇게 젖은 걸 입어서 그렇지. 곧 따듯해질 거야.”
알렉의 입꼬리가 위로 들림과 동시에 단단한 손가락이 입구를 파고들었다.
“흐앗!”
“빌어먹을. 지난번에 내 걸 받아먹었는데도 이렇게 좁다니.”
천천히 침입한 손가락은 주름 하나하나를 매만지듯이 통로를 벌려 나갔다.
“으, 하으, 안쪽.”
“더 깊은 곳을 찔러 줘?”
“응응.”
로렌이 조르듯 허리를 비틀었다. 이런 요물이 있나. 알렉은 손가락 세 개를 쑤셔 박으며 로렌의 귀에 속삭였다.
“조금만 기다려. 네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손가락으로 안 닿으니까.”
그의 손가락이 로렌의 안을 쑤실 때마다 질 벽이 환호하며 손가락을 조여 댔다. 접합부로 질질 새어 나온 애액이 핏줄이 돋아난 알렉의 손목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깝네.”
아래에서 손을 뺀 알렉은 팔등에서 손목까지 흘러내린 애액을 핥아 올렸다. 로렌을 똑바로 응시하며 손가락까지 깨끗하게 빨아 올리는 모습은 도발적이었다.
로렌은 그런 알렉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나신인 저와 달리 그는 고작 셔츠 단추만 몇 개 풀었을 뿐인데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것처럼 상대를 흥분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어서…….”
로렌은 제 허리께에 무릎을 딛고 서 있던 알렉을 두 다리로 끌어안았다. 순간 알렉의 몸이 로렌의 위로 쏟아졌고 알렉은 두 팔로 아슬아슬 몸을 받쳤다.
“많이 급했어, 달링?”
알렉은 그리 말하면서 허리를 찬찬히 움직였다. 사내를 기다리며 벌렁거리던 구멍 앞으로 뭉뚝한 것이 닿았다. 하으, 그저 닿기만 했을 뿐인데 찌릿한 감각이 전신으로 퍼지며 머리가 번쩍였다.
로렌은 팔을 아래로 뻗어 알렉의 페니스를 확인했다. 한 손으로 다 쥐어지지 않는 거대한 육봉이 반려의 접촉을 반기며 꿈틀거렸다.
“하. 만져 주는 거야?”
알렉이 허리를 흔들자 그녀가 쥐고 있던 페니스가 자위하듯 앞뒤로 움직였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홧홧한 열기가 만족스러웠지만 로렌은 이것이 손바닥이 아니라 제 배 속을 긁어 주길 바랐다.
로렌은 허벅지를 오므려 다리 사이에 있던 그의 허리를 붙잡았다.
“이거 빨리…….”
“아아, 쑤셔 달라고 재촉하는 거였어?”
안 그래도 곧 한계였던 알렉은 곧장 로렌의 입구를 파고들었다. 검붉은 귀두가 여린 속살을 헤집으며 천천히 침입했다. 지난번보다는 수월했으나 제 물건을 끊을 듯 조이는 안쪽은 여전했다.
“이봐, 숨 쉬고 있는 거야?”
알렉은 이를 꽉 물면서 찡그린 로렌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입술 사이를 파고들어 치아를 벌렸다.
으읍, 하. 꽉 막혀 있던 로렌의 숨이 그제야 터져 나왔다. 동시에 아래쪽이 이완되면서 약간의 틈이 생겼다. 알렉은 그것을 놓치지 않고 단번에 성기를 박아 넣었다.
“아흑!”
로렌이 고개를 뒤로 꺾으며 다리를 부르르 떨었다. 몸이 반으로 꿰뚫리는 듯한 고통과 함께 그 통각만큼의 쾌락이 저를 찾아왔다.
그의 거대한 물건이 배 속을 완전히 관통했다. 내장이 위로 쏠려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하읍, 우으으.”
로렌은 불규칙하게 호흡하면서 아랫배를 매만졌다. 대체 어디까지 쑤셔 넣은 건지 납작한 뱃가죽 위로 그가 쑤셔 넣은 페니스의 형태가 불룩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내 걸 확인하고 있구나.”
알렉이 아랫배를 더듬는 로렌의 손 위로 제 손을 포갰다. 그러자 안 그래도 비좁았던 배 속이 눌리면서 알렉의 살덩이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흣, 아, 안 돼. 눌려서, 하으!”
“젠장, 힘 좀 빼. 이러다간 터지겠다고.”
알렉이 인상을 쓰면서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로렌을 내려다보는데 울먹이는 눈과 마주쳤다.
씩씩하던 여인의 얼굴은 쾌락에 무너져 있었다. 축 처진 눈썹과 눈물이 그득한 눈동자. 살짝 벌어져서 신음을 흘리는 촉촉한 입술.
알렉. 그 입술이 속삭이듯 제 이름을 천천히 내뱉었을 때 커다란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윽!”
알렉은 이를 꽉 씹으며 얼굴을 찌푸렸다. 하마터면 첫 경험 중인 숫총각처럼 한 번을 움직이지 않고 쌀 뻔하지 않았나.
“젠장.”
알렉은 곧장 로렌에게 입을 맞추면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으읍, 흐, 하읍! 로렌이 신음을 흘릴 때마다 그녀의 입 안을 휘젓던 알렉의 혀가 모든 소리를 삼켜 버렸다.
우읍. 숨이 막혔던 로렌은 알렉의 어깨를 두드렸다. 잠시 입술을 뗀 알렉은 달아오른 로렌의 얼굴을 감상했다.
“하아. 이 얼굴을 나만 보기 아까운데.”
안을 휘젓던 알렉의 물건이 쑤욱 빠져나갔다. 알렉은 로렌을 그대로 들어 올려 침대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거울 앞에 서서 로렌이 앞쪽을 바라볼 수 있도록 고쳐 안았다. 알렉의 두 팔에 걸쳐진 다리가 양쪽으로 쫙 벌어졌다.
로렌은 거울로 적나라하게 비치는 모습을 보고서 발을 버둥거렸다.
“시, 싫어. 흐으, 하지 마.”
“저거 보여? 날 기다리면서 질질 싸는 거.”
그의 말대로 흠뻑 젖은 음부가 사내를 기다리며 뻥끗거렸다. 그럴 때마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애액이 구멍에서 흘러나와 엉덩이 골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그 아래로 보이는 알렉의 검붉은 성기가 당장 구멍을 쑤시고 싶은 것처럼 꺼떡거렸다. 기둥을 타고 불툭 튀어나온 핏줄이 팽팽했다.
로렌은 눈을 질끈 감았다. 눈앞의 광경이 부끄러우면서도 외설스러운 장면에 자꾸만 몸이 달아올랐다.
“이건… 내가 아냐.”
“그러게. 우리 늑대님은 아주 정갈한 여인이 되려고 했는데 말이지.”
알렉의 시선이 거울에 붙어 있는 메모에 닿았다.
“스카프 두 번 감아 매듭짓기, 단추 점검, 부츠 매듭 점검, 깨끗한 앞치마.”
알렉은 메모를 읽어 내리면서 들고 있던 로렌의 몸을 내렸다. 그의 선단이 벌름거렸던 구멍을 가르고 단번에 안쪽까지 박혔다.
“흐읏!”
갑작스러운 삽입. 로렌이 눈을 번쩍 떴다. 거울로 비치는 모습은 자극을 넘어서 충격적이었다.
“어떡하나. 오늘은 메모와 다르게 이런 흐트러진 모습이네.”
알렉은 천천히 로렌의 몸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로렌은 속절없이 흔들리면서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싫어. 흐윽, 싫어어.”
로렌은 파르르 흔들리는 팔을 들어 제 다리를 벌리고 있던 알렉의 팔뚝을 탁탁 쳤다. 그 말과 다르게 그녀의 안쪽은 알렉의 것을 사정없이 조였다가 풀어지길 반복했다. 성기가 빠른 속도로 뿌리까지 박히는 장면이 거울에 비칠 때마다 왈칵 흘러나온 애액이 튀어 거울에 방울졌다.
“앙탈은.”
알렉은 혀로 아랫입술을 쓸면서 거울 속 광경을 감상했다. 제 침실에도 이런 거울을 하나 들여놓을까 생각하던 때.
“흐엉, 이건 싫다고.”
로렌이 엉엉 울기 시작했다. 당황한 알렉이 로렌의 얼굴을 살폈다. 이건 진짜 싫어하는 거잖아.
“이런. 제기랄.”
알렉은 다급하게 로렌을 고쳐 안고서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그는 로렌을 다시 소중하게 눕히고서 그녀를 다독였다.
“그, 미안해. 내가 좀 지나쳤어.”
“흐윽, 당신 싫다.”
“그래, 인정해. 내 실수야.”
“나쁘다. 흐윽.”
로렌은 한 번 더 그의 어깨를 세게 쳤다.
“정말 미안해. 마음 풀어.”
알렉은 이불을 끌어와 로렌을 덮어 주었다. 그의 물건은 여전히 성나 있었지만 지금은 이 여인을 달래는 게 우선이었다.
마치 행위의 종료를 알리는 듯한 분위기. 아쉬웠던 로렌은 꼬물꼬물 손을 뻗어 가라앉지 않은 알렉의 성기를 쥐었다. 응? 알렉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로렌은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뺨과 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사내 심장을 벌렁거리게 만드는 재주가 탁월하네.”
알렉은 삐딱하게 웃으며 곧장 로렌의 몸을 올라탔다.
뜨겁고 단단한 기둥이 허전해진 로렌의 배 속을 곧장 꿰뚫었다.
퍽, 퍽. 알렉이 거칠게 허리를 쳐 댈 때마다 작은 침대가 삐걱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그의 거센 움직임에 점점 위로 밀려난 로렌의 정수리로 침대 헤드가 닿았다.
그러자 알렉이 손을 뻗어 로렌의 머리를 감쌌다. 성급하던 움직임이 잦아들었고 알렉은 그대로 로렌을 휙 안아 자세를 바꿨다. 로렌은 알렉과 마주 보며 앉은 자세가 되었다.
“어, 어? 하앗!”
시야가 핑 돌아 어리둥절하던 로렌은 곧장 침입하는 살덩이를 받아들이며 고개를 꺾었다. 흥건한 애액 덕분에 고통스럽지는 않았으나 그의 것이 예민한 안쪽을 압박하며 길을 틀 때마다 짐승 같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알렉은 훤히 드러난 목덜미를 잘근잘근 씹으면서 가느다란 허리를 꽉 잡고서 위아래로 움직였다.
로렌의 몸이 알렉의 물건을 반쯤 뱉어 냈다가 다시 완전히 삼키길 반복했다. 애액이 흥건한 접합부엔 하얀 거품이 일었고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나는 찔꺽거리는 물소리가 분위기를 고양했다.
“흣, 가, 갈 것 같아.”
“가는 게 뭔지는 알고 하는 말이야?”
“잠깐, 흣, 이상해져!”
“다행이네. 그대가 이상해지라고 아까부터 처박는 중이었거든.”
알렉은 로렌의 동그란 어깨에 잇자국을 남기면서 싱긋 웃었다.
흐윽, 앗, 하으, 응, 우읏! 좆대가리가 자궁구를 콱콱 찍어 누를 때마다 참을 수 없는 신음이 터져 나왔다. 몸이 어디론가 뚝 떨어질 것 같아서 불안했다.
로렌은 알렉의 목을 꽉 끌어안으며 발가락을 오므렸다. 바들바들 떨리는 허벅지가 알렉의 단단한 허리를 조여 왔다.
알렉은 오롯이 제게 매달리는 로렌의 모습에 만족하며 들어 올렸던 로렌의 몸을 완전히 아래로 떨어뜨렸다. 애액이 흥건한 접합부로 고환이 닿았다. 그의 좆이 뿌리까지 쑤셔 박힌 것이다.
“흐아!”
로렌은 전신을 덜덜 떨면서 절정을 맞았다. 시야가 암전되었다가 돌아오길 반복하며 온몸의 세포가 불꽃처럼 헐떡거렸다. 동시에 경련하는 육벽이 빠르게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며 알렉의 것을 쥐어짜 냈다.
큭. 턱을 꽉 다문 알렉은 로렌의 몸을 안고서 그대로 로렌을 넘어뜨렸다. 로렌의 등이 시트에 닿자 알렉은 허리를 빠르게 쳐 대기 시작했다.
“학, 안 돼. 너무 느껴서, 하읏, 앙, 으아, 흣!”
이제 막 절정을 맞이한 몸은 몰아치는 감각을 감당하지 못해 덜덜 떨렸다.
알렉의 높다란 콧대를 따라 흐르던 땀방울이 로렌의 뺨 위로 툭 떨어졌다.
로렌은 눈을 가늘게 떴다. 하얗게 번쩍이는 시야로 정염 어린 알렉의 얼굴이 들어왔다. 오롯이 저만을 욕망하는 색정적인 눈동자를 보자마자 작은 몸뚱이는 차곡차곡 쌓인 쾌락을 분출하며 또 한 번의 절정을 맞았다.
“우으, 읏!”
뜨거운 애액이 터져 나오고 안쪽이 요동쳤다. 알렉은 로렌의 입술에 입을 맞춘 뒤 재빨리 좆을 빼냈다. 그리고 로렌을 내려다보며 수음을 시작했다. 커다란 손이 검붉은 좆을 서너 번 쓸어 올리자 귀두 위 갈라진 틈에서 비릿한 백탁액이 퓻퓻,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로렌의 배와 가슴 위로 불규칙하게 쏟아졌다. 몇 방울은 로렌의 입까지 튀었으나 사지를 축 늘인 로렌은 그걸 닦아 낼 새도 없이 눈을 느리게 깜박이고 있었다.
“벌써 자려는 건 아니지, 달링?”
알렉이 축 처진 몸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오므라든 다리를 다시 활짝 벌렸다. 그리고 천천히 셔츠를 벗었다. 벌어진 셔츠 사이로 근육이 완벽하게 잡힌 그의 상체가 드러났다.
“내 몸 좋아해? 눈빛이 뜨거운데.”
맨몸이 된 알렉이 로렌을 타고 올랐다. 뱀처럼 차가웠던 그의 피부는 어느새 로렌만큼이나 달아올라 있었다.
“조금만 더 힘내자고. 밤은 이제 시작이잖아.”
알렉은 로렌의 동그란 이마에 입을 맞추며 해사하게 웃었다. 로렌은 저항 없이 그 미소를 바라보았다.
오늘 밤은 저 근사한 사내가 줄 쾌락에 잠겨 눈을 감고 싶었다.
* * *
로렌은 눈을 번쩍 떴다.
‘지금 몇 시지?’
로렌은 아직 어둑한 창문을 응시하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찬 바람에 실린 새벽의 냄새가 커튼을 살랑거렸다.
‘내가 창문을 열어 놨었나?’
가을이라 새벽바람은 제법 추웠다. 그런데 찬기가 느껴지지 않았던 이유는 침대에서 뜨끈한 열이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로렌은 곧장 옆자리를 확인했다. 밤새 체온을 나눴던 사내는 없었다. 대신 그 자리에서 은은한 마력이 느껴졌다. 침대를 데워 준 것은 이 마법이었던 모양이다.
‘일정 시간 상태를 지속하는 마법은 마력 소모가 클 텐데.’
로렌은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두 다리에 힘을 주는 순간 어젯밤 사내가 남긴 흔적이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렸다.
“아흣, 알렉!”
그의 단단한 몸을 껴안고 내질렀던 목소리가 불현듯 떠올랐다. 로렌은 무릎을 모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지난밤의 난잡했던 행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내가 미쳤구나!’
로렌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사람들의 말처럼 정말 미친 여자가 된 게 틀림없었다.
“오늘은 내가 최대한 인내한다는 걸 다행으로 생각해.”
알렉이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면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의 말대로 그가 자중했기에 그나마 몸 상태가 좋았으리라.
‘그리고 그날 밤만큼은 아니지만 몸에서 마력이 느껴져.’
로렌은 아랫배를 천천히 쓰다듬다가 괜스레 민망한 생각이 들어 손을 떼었다.
그때 아래층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오라버니인가?’
긴장한 로렌은 팔에 코를 대고 킁킁대기 시작했다. 알렉의 페로몬이 묻어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역시나 온몸에 마킹이 진득하게 남아 있었다. 누구나 이 냄새를 맡으면 자신이 사내와 밤새 굴러다녔다는 걸 한눈에 알아챌 터였다.
‘못된 놈 같으니라고. 엄청나게 묻혀 놨구나!’
평소 같으면 곧장 아래층으로 내려가 도스턴에게 인사했겠지만 로렌은 먼저 씻는 걸 택했다. 이 꼴로 갔다가는 도스턴이 음란한 여인이 되었다며 경을 치리라.
로렌은 커다란 수건에 물을 묻혀 온몸을 벅벅 닦았다. 그가 집요하게 남긴 붉은 자국을 볼 때마다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으나 그걸 감상할 여유는 없었다.
세탁해 둔 드레스를 대충 챙겨 입은 로렌이 스카프로 목을 가렸다. 어제도 알렉이 목덜미에 새겨진 인장을 깨물어 댔으니 분명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을 것이다.
‘이 정도면 됐겠지.’
로렌은 전신 거울 앞에서 복장을 점검한 뒤 방을 나섰다. 평소 같으면 벽에 걸린 초상화에 인사를 건넸겠지만, 오늘은 양어머니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1층으로 내려가야 했다.
달칵, 치이―
마침 주방에서 꽤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오라버니. 지금 어서 식사를……!”
어라, 저자가 왜 여기 있는 거지? 로렌은 말을 잇지 못하고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주방에 있던 인물은 도스턴이 아니라 알렉이었다.
“듣기 좋은데? 앞으로 나를 오라버니라고 불러 주는 건가?”
바지만 대충 걸친 알렉이 간단한 오믈렛을 만들고 있었다. 그가 프라이팬을 흔들 때마다 등 근육이 움찔대면서 등판에 넓게 새겨진 뱀 문신이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알렉은 다 익은 오믈렛을 접시에 옮겨 담으며 씨익 웃었다.
“내가 어젯밤에 그대를 꽤 만족시켰나 보군. 굉장히 뿌듯해.”
“그, 그게 아니다! 진짜 오라버니인 줄 알고…….”
로렌이 변명하려다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미 망상에 빠진 알렉은 ‘밤새 그대를 위해 봉사한 보람이 있어.’라며 히죽거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 오믈렛과 커피를 테이블에 세팅하는 솜씨는 대단했다.
“그럼 이 오라버니가 차린 아침 식사를 하시지요, 레이디.”
알렉은 의자를 꺼내 주면서 테이블을 턱짓했다.
로렌은 크게 숨을 들이켜면서 의자에 앉았다. 할 말은 많았지만 처음 받아 본 식사 대접이 나쁘진 않았다.
로렌은 목을 길게 빼고서 혹 오라버니가 오는지 잠시 살피다가 뒤늦게 그의 학회 출장 일정을 떠올리고서는 편히 식사에 임했다.
로렌이 나이프를 들고 오믈렛을 꾹 누르자 노르스름한 계란물이 배어 나오면서 먹음직스럽게 갈라졌다.
‘나보다 요리 솜씨가 좋잖아?’
로렌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알렉을 곁눈질했다. 돈밖에 모르던 저 뱀 같은 사내가 요리를 잘할 줄이야. 평소 생각했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면모였다.
오믈렛을 칼질 중인 알렉이 그 시선을 느끼고서 피식 웃었다.
“왜. 오라버니 요리 솜씨에 놀랐나?”
음. 괜찮네. 오믈렛을 한 입 베어 문 알렉이 자화자찬하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34실론 9센트짜리 빵 쪼가리보다 맛있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뒤끝이 참으로 길게 가는 사내였다.
“머, 먹을 만하구나.”
로렌은 흠흠 목을 가다듬으면서 얼른 시선을 돌렸다.
오믈렛을 오물대는 두툼한 입술을 볼 때마다 그것이 피부 위를 핥아 댈 때의 기분이 떠올라서 자꾸만 열이 올랐다.
“음? 페로몬이 진해졌네?”
커피 잔을 내려다보던 황금색 눈동자가 휘릭 올라와 로렌을 확인했다.
“왜. 내가 요리까지 잘하는 남자라 새삼 반했어?”
“…….”
“이렇게 되면 아침부터 씻은 이유가 꽤 궁금해지는데.”
알렉이 포크를 까딱거리면서 물기를 머금은 로렌의 머리칼을 가리켰다.
포크는 머리칼에서 로렌의 입술로 향하다가 가느다란 목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동시에 알렉의 목울대가 천천히 울렁거렸다. 이 빌어먹을 각인이 눈에 콩깍지라도 씌운 건가. 하여간에 어디 예쁘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내 페로몬을 죄다 닦아 낸 점은 괘씸하지만.’
뭐 그건 다시 묻혀 두면 될 일이었다. 알렉의 눈이 진한 커피보다도 어둡게 가라앉았다. 밤새 저 하얀 몸을 삼키며 날뛰었음에도 목이 말랐다. 포크를 내려 둔 알렉은 뜨거운 커피를 삼켜 목을 축였다.
“감기는 안 들었어? 창문을 열어 두었는데.”
“응……. 괜찮다. 침대가 따듯했어.”
마법을 걸어 주어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하는데 차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때 신으로 숭상받던 작자가 이리도 인색해서야. 로렌은 자책하면서 입술을 꽉 깨물었다.
“환기할 수밖에 없었어. 네 페로몬을 맡다 보면 침대에서 영영 못 나올 것 같았거든.”
깨물지 마. 알렉은 로렌이 깨문 입술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그 접촉에 화들짝 놀란 로렌이 그만 포크를 달그락 떨어뜨렸다.
“아.”
묘한 긴장감이 맴도는 테이블.
알렉은 자신이 사용하지 않았던 포크 하나를 로렌에게 내어 주고서 커피를 마셨다. 목이 타는 건 로렌도 마찬가지였다. 로렌은 알렉을 따라 커피에 입을 대다가 재빨리 입술을 떼었다.
“읏!”
평소 뜨거운 걸 잘 못 마시는데 방심한 나머지 혀를 데 버렸다. 로렌이 덴 혀를 살짝 내밀고서 눈물을 글썽거리자 알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방으로 갔다.
다시 돌아온 그의 손에는 작은 얼음이 들려 있었다.
“아, 해 봐.”
알렉이 로렌의 입술 사이로 얼음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다른 손으로는 로렌의 턱을 가볍게 쥐어 얼굴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고정했다.
로렌은 순순히 아, 소리를 내면서 입을 벌렸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알렉의 이목구비를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많이 아파?”
그러다 알렉과 눈이 짧게 마주쳤다.
“아, 아이(아, 아니).”
로렌은 몰래 엿보다 들킨 사람처럼 시선을 그의 목으로 빠르게 내렸다.
목 빗근이 반듯하게 솟아난 목에는 커다란 뱀의 대가리가 그려져 있었다. 보통 수인들은 자신의 정체를 밝히기 싫어하는데 뱀 수인이라던 이 사내는 어째서 이런 커다란 문신을 등과 목에 새겨 넣은 걸까.
로렌이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알렉은 로렌의 혀 위에 얼음을 지그시 문지르며 열을 식혀 주었다.
“매일 손님을 위해 차를 내리면서 정작 본인은 뜨거운 걸 못 마시나 보군. 입 다물지 말고. 아―”
알렉은 다시 닫히려는 로렌의 입술을 비집고 열어 얼음찜질을 계속했다.
얼음을 대고 있으니 따가웠던 부분이 조금은 나아졌다. 이 얼음을 어디서 구했냐고 묻고 싶었지만 입을 벌리고 있어 말을 하기 어려웠다.
“이에 괘아아(이제 괜찮아).”
로렌이 알렉을 올려다보며 부정확한 소리를 냈다. 알렉은 로렌의 빨간 혀를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삐딱하게 웃었다.
“괜찮기는. 다 까지겠는데.”
입 안에 잘 듣는 연고가 뭐더라. 알렉은 그리 말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당장 이 입술에 다른 걸 물려 보고 싶다는 충동이 들어서 하반신으로 또다시 피가 몰렸다.
바지 한가운데가 불룩 튀어나오자 그걸 본 로렌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우으 해하으 하으 거이야(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냐)!”
“건강한 사내라는 방증이지. 이런 걸 신경 쓸 정도면 상태가 괜찮나 본데?”
“으, 으아해(그, 그만해).”
“그럴 생각이야.”
얼음에서 손을 뗀 알렉이 허리를 굽혀 의자에 앉아 있는 로렌과 눈높이를 맞췄다. 그리고 입술이 다가온 것은 순식간이었다.
후우. 뜨거운 숨을 내뱉은 입술은 닿기 직전에 멈췄다. 허락을 구하는 찰나의 몸짓. 로렌의 입술이 반사적으로 벌어지자마자 뱀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달콤한 안쪽을 게걸스럽게 탐했다.
입맞춤은 길었다. 쌉쌀한 커피 향이 입 안을 맴돌았다. 평소 커피를 마시지 않던 로렌은 커피가 제법 달콤한 차라고 생각하며 그를 받아 냈다.
밀어붙이는 알렉의 무게 때문에 로렌의 고개가 점차 뒤로 넘어갔다.
‘숨이……!’
로렌이 들이켜는 숨마저도 알렉이 탐욕스럽게 삼키는 바람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알렉을 밀어내려고 손을 뻗자 그의 단단한 가슴 근육이 손바닥에 닿았다. 그의 몸은 조금도 밀리지 않았고 되레 로렌의 손길을 기꺼워하며 꿈틀거렸다.
알렉은 로렌의 손 위에 제 손을 포개어 제 몸을 훑어 내리도록 움직였다. 로렌은 어깨를 흠칫 떨었다. 손바닥으로 탄력적인 근육이 느껴질 때마다 다리가 배배 꼬였다.
그 틈을 타고 알렉의 페로몬이 흘러나와 로렌의 몸을 진득하게 타고 올랐다. 기껏 열심히 닦아 낸 보람이 없이 알렉의 향이 로렌의 피부 구석구석에 달라붙었다. 로렌의 몸은 제 암컷이라고 마킹 하는 수컷의 소유욕을 기껍게 받아들였다.
‘이대로라면 여기서 일을 치고 말 거야.’
신성한 일터에서 사내와 흘레붙을 순 없는 일. 로렌이 몸을 뒤로 내빼려는 순간.
똑똑.
누군가가 다급하게 잠겨 있는 찻집 문을 두드렸다. 알렉의 보좌관, 사샤였다.
“이봐, 알렉! 어서 나와 봐야 할 것 같은데.”
사샤의 말투가 평소와 달리 재빨랐다. 아쉽게 입술을 떼어 낸 알렉이 출입문을 향해 낮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방해하지 마.”
“나도 방해하긴 싫은데, 중요한 손님이 예상보다 일찍 도착했다고.”
그나저나 가게 앞에 웬 위협 페로몬을 이리도 많이 풀어 둔 거지? 이 앞을 수인이 지나갔다면 부리나케 도망갔겠네. 사샤가 손부채질로 지독한 페로몬을 흩트리면서 몸서리를 쳤다.
“그 손님이 대체 누군데.”
“네 일족 말이야, 알렉.”
우뚝. 로렌을 몰아붙이던 알렉이 움직임을 멈췄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운 후 출입문을 노려보았다.
누군가에겐 포근하게 느껴질 ‘일족’이란 단어가 알렉에겐 비수보다도 날카로웠다.
“윽, 너 째려보는 게 여기까지 느껴진다아―”
사샤가 볼멘소리를 하면서 얼른 나오라며 한 번 더 문을 두드렸다.
“제기랄.”
알렉은 타액으로 번들대는 로렌의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닦아 주면서 이를 꽉 물었다. 그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로렌을 내려다보다가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아쉽지만 이 오라버니는 이만 가 봐야겠어. 나중에 보도록 하지.”
알렉은 셔츠도 걸치지 않은 채로 찻집을 나섰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사샤가 로렌에게 손을 흔들었으나 그걸 언짢게 본 알렉이 출입문을 쾅 닫아 버리는 바람에 사샤는 로렌을 길게 보지도 못했다.
갑작스레 홀로 남겨진 로렌은 알렉이 차려 준 아침 식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창밖을 응시했다.
동트기 직전의 새벽은 유독 어두웠다. 알렉은 그 어둠 속으로 터벅터벅 걸어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