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Snake Finds the Wolf Who Played With the Snake RAW novel - Chapter 45
38. * *
알렉은 빠른 걸음으로 나아갔다. 긴 다리가 큰 보폭으로 걸어가자 길을 안내하던 시종장이 오히려 뒤처졌다. 그렇다고 해서 속도를 더 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시종장은 뒤쪽에서 걸어오는 국왕과 속도를 맞춰야 했다.
“이봐, 빨리빨리 못 걸어?”
알렉이 성을 내면서 시종장을 닦달했다. 고위 귀족에 속했던 시종장은 알렉의 하대에 울컥 올라오는 화를 참아 냈다. 응접실에서 보지 않았나. 저자는 평범한 상단주가 아닌 영물이었으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감히 전하 앞에서 입을 함부로 놀리는군.’
시종장은 뒤따라 오는 왕의 눈치를 살폈다. 평소 같으면 상대를 꾸짖었을 왕은 묘한 얼굴로 생각에 빠져 있어서 알렉의 시건방진 언행을 신경 쓰지 못했다.
침입자를 견제하기 위해 복잡하게 설계된 지하 복도는 미로에 가까웠다.
시종장은 열쇠가 주렁주렁 달린 꾸러미를 들고 다니며 곳곳에 설치한 철창을 분주하게 열었다.
“누가 보면 악마라도 봉인해 둔 줄 알겠군.”
알렉의 비아냥에 대답한 것은 막스웰이었다.
“누군가 수호신을 함부로 해하면 안 되니 보안을 강화한 것이다.”
“참으로 듣기 좋은 변명이군요.”
알렉은 주머니에 손을 꽂으며 막스웰의 표정을 살폈다. 로렌을 내놓아야 할 막스웰의 표정이 지나치게 침착했다. 섬뜩한 예감이 들었다. 알렉은 걸음을 멈추고서 막스웰을 마주 보았다.
“우리 전하께선 무슨 꿍꿍이가 있으시길래 머리 돌아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날까요?”
“꿍꿍이라. 짐이 경처럼 마법이라도 부릴 것 같았나.”
“아무래도 마지막 협상에서 시간을 길게 끈 것이 걸려서요. 그사이 로렌에게 무슨 짓을 했어.”
알렉의 말투가 다시 불손해졌다. 왕을 지키던 근위대장은 벌벌 떨리는 손으로 수인용 마도구를 더듬었다. 용을 이딴 걸로 잡을 수 있던가. 이내 그의 손이 허리춤에 꽂은 피스톨로 움직였다. 막스웰은 근위대장에게 손을 들어 괜찮다는 수신호를 건넸다.
“짐은 협상 내내 경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만. 경이야말로 헛것을 본 건가.”
막스웰은 어깨를 으쓱거리곤 알렉의 어깨를 툭 치며 지나갔다.
알렉은 입술을 길게 늘이며 왕의 뒤를 따랐다.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알 수 없는 초조함이 목을 조였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지하 성전 앞. 어마어마한 두께의 강철 문 위로 화려한 늑대 음각이 새겨져 있다. 이걸 녹여서 철로를 만들면 못해도 100야드는 깔 수 있을 만한 양이었다.
‘이딴 장소에 로렌을 수백 년간 가둬 두었단 말인가.’
알렉은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려 막스웰을 응시했다. 막스웰은 숨 막힐 정도로 커다란 문을 사랑스럽다는 듯 응시하고 있었다.
“짐이 데려온 늑대이니까. 짐의 것이니 누가 함부로 보면 안 되지.”
“그리 소중하다면 소중하게 대하셨어야지.”
“소중하게 대했다. 누가 보는 게 아까워 나조차도 아껴 보았으며, 그저 가만히 있다가 상할 것이 두려워 그 쓸모를 다하게끔 임무도 주었지.”
“방치해 놓고 부려먹었다는 말을 참 아름답게 꾸며 대는군요.”
“짐의 실수가 있었다면 늑대가 이리도 긴 시간을 이곳에서 버틸 줄 몰랐다는 것이다.”
막스웰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알렉을 향해 빙긋 웃었다.
“혹 우리의 마지막 협상 내용이 무엇인지 기억하나, 알렉산더 경?”
“로렌에게 이름을 다시 돌려주는 것이었지요. 난 그 대가로 모든 걸 원상복구시키고. 그리고 이 이후엔 이 사건을 서로 잊기로 했지. 아예 없었던 것처럼.”
“그래. 맞아. 짐은 이름을 돌려줄 것이다.”
막스웰이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소름 돋는 말을 이었다.
“로렌이 살아 있다면.”
“너 이 새끼가! 무슨 짓을 했어. 무슨 짓을 한 거야!”
그의 말에 불안해진 알렉이 막스웰의 멱살을 잡았다.
한낱 상단주가 국왕을 모독하고 멱살을 잡다니! 놀란 근위대장과 근위병들이 알렉을 포위했다. 새카만 총구들이 알렉의 급소를 겨눴다.
“무례한 놈, 어서 전하를 놓아라!”
“하하, 쏠려면 총을 꺼내자마자 쐈어야지. 마법 쓸 시간도 주는 거야? 내가 왕이면 근위대 급여부터 삭감할 거다.”
알렉의 발밑으로 마법진이 생기더니 투명한 결계가 생겨났다. 근위병들이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넌 당장 문부터 열어.”
서슬 퍼런 눈빛이 시종장을 압박했다. 허옇게 질린 시종장은 문을 여는 데 집중했다.
“큿, 문이 빨리 열리든 늦게 열리든 안에 있는 사람이 살아나진 않을 텐데.”
쿨럭! 막스웰은 조여 오는 목을 붙잡으며 기침을 반복했다.
“로렌이 죽을 리 없어.”
“수백 년을 시달렸으니 충분히 지쳤을 거다. 그녀에겐 안식이 필요해.”
“하하, 안식? 그게 그렇게 좋으면 우리 국왕 전하부터 시켜드릴까?”
알렉은 눈을 희번덕 뜨면서 막스웰의 목을 더 힘껏 조였다. 한 번만 더 힘을 주면 이 목을 부러뜨릴 수도 있지만 그가 죽으면 로렌이 이름을 돌려받지 못하니 당장 죽일 수도 없는 노릇.
‘로렌은 입궁하기 전에 모든 정리를 마쳤다고 했던가.’
불현듯 불길한 사실이 떠올랐다. 도스턴에겐 편지를 부쳤다 하였고 샬럿에겐 물감을, 사샤에겐 꿀단지를 선물했다는 보고를 들었다. 그녀는 저에게만 아무것도 남겨 두지 않고 그리 왕궁으로 떠났었다.
알렉은 그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다시 돌아올 로렌이 자신의 가장 큰 선물이었으니. 로렌이 그 선물 자리를 남겨 두고 떠난 것이리라.
‘그러니까 그녀가 나를 이 세상에 두고 먼저 떠날 리 없어.’
저를 혼자 두지 않겠다고 했다. 분명 돌아온다고 했어.
거친 숨을 몰아쉬던 알렉의 안색이 과호흡으로 허옇게 질리기 시작했다. 알렉에게 멱살 잡힌 막스웰 또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의 숨이 각자 다르게 꼴딱꼴딱 넘어가던 때.
“됐습니다.”
시종장의 말과 함께 육중한 철문이 끼이 소리를 내며 느릿하게 열렸다. 열린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은은한 빛이 어두운 복도를 비췄다.
알렉은 잡고 있던 막스웰을 아무렇게나 던져 버리고서 철문을 더 활짝 열어젖혔다. 근위병과 시종장은 ‘국왕 전하, 괜찮으십니까!’ 하며 막스웰의 안위를 살피느라 정신없었다.
그사이 알렉은 성전 안으로 훌쩍 걸음을 옮겼다.
온통 대리석으로 덮인 호사스러운 공간. 그 한가운데에 놓인 단상 위에는 로렌이 죽음의 기색을 풍기며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실내에 퍼져 있는 지독한 피비린내.
“로렌!”
어라. 알렉은 그녀에게 가까이 가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그녀가 앉은 동그란 단상 위에는 고대의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이미 전개가 시작된 터라 다가가선 안 되었다.
‘저건 맹약을 파훼하는 진이잖아.’
마력이 아닌 영혼의 힘으로 운용하는 것. 굉장히 위험한 마법이었다.
이름을 건 맹약은 누구나 사용할 수 있었다. 간단한 거래에서부터 미래의 약속까지. 하지만 영물의 경우는 달랐다. 영물의 이름엔 영혼이 실려 있기에 그것이 갖는 무게만큼 맹약의 효력도 강력했다.
그런 영물의 맹약을 해지하려면 이름을 가져간 자가 도로 이름을 돌려주어야 했다. 다만 딱 한 가지 예외가 있었다.
‘맹약자의 피를 영혼의 무게만큼 마셨을 때.’
하지만 이것은 실행하기가 어려웠다. 맹약이 약해지지 않는 이상, 단 몇 방울의 혈액에도 영물이 명을 달리할 수 있기 때문. 조건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함부로 마법을 전개하면 그 대가로 영혼이 부서질 수도 있었다.
그 말은 곧 로렌이 막스웰의 피를 마시고 죽기 직전까지 몰렸다는 뜻이거나, 로렌의 영혼이 부서질 수 있는 위기라는 것이다.
“로렌?”
알렉의 부름에 로렌은 천천히 눈을 떴다. 차분한 로렌의 눈동자가 몇 초간 알렉을 담았다. ‘무사히 도착해서 다행이다. 나는 괜찮아.’ 꼭 이리 말하듯 눈을 천천히 깜박거렸다. 그리고 그 시선이 막스웰에게로 향했을 땐 뚜렷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
로렌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 칠갑이 된 얼굴과 옷이 섬뜩하기만 한데도 그녀가 풍기는 엄숙한 분위기는 설명할 수 없이 성스러웠다.
“나, 달을 쫓는 늑대가 약속의 자리에 거듭 서리니.”
로렌이 주문을 영창하기 시작했다. 피로 그린 마법진이 희게 빛나면서 주변의 시간이 멈췄다. 오로지 로렌과 막스웰의 시간만이 흐르고 있었다.
“지금 무얼 하는 거야!”
당황한 막스웰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근위병과 시종장은 마치 메두사와 눈을 마주친 것처럼 그대로 굳어 있었다.
“너, 거룩한 언약을 배위한 자가 거대한 혼원 앞에서 자각이 필요한바.”
그때 막스웰의 몸이 바람에 날리듯 로렌이 서 있는 단상 쪽으로 휘익 끌려갔다.
“이게 뭐야! 이봐, 근위대장, 짐을 당장 지켜라!”
위험을 감지한 막스웰이 소리쳤으나 시간이 멈춘 이들은 숨조차 쉬지 않았다. 알렉 한 명만 제외하고. 그 또한 멈춘 자들처럼 가만히 서 있었으나 막스웰은 똑똑히 보았다. 단상으로 끌려가는 저를 황금빛 눈동자가 빤히 따라 움직이는 것을.
막스웰이 사태를 파악하고자 했을 때 어느새 단상 위로 끌려온 자신은 로렌과 마주 보고 있었다. 막스웰은 저보다 머리 하나가 작은 여인을 보고서 몸을 빳빳하게 굳혔다.
‘이 늑대가 이렇게도 위압적인 존재였나? 아니, 그럴 리가 없어.’
마른침이 꼴깍 넘어갔다. 로렌은 제게만 꼬리를 흔들던 늑대였고 저의 말 한마디에 눈물을 글썽이던 소유물이었을 뿐. 그런데 지금의 그녀는 함부로 범접하지 못할 신성한 무언가로 보였다.
“나, 달을 쫓는 늑대가 영성의 힘을 되찾고자 하니.”
곧 마법진에서 빛무리가 쏟아졌다.
“나의 이름, 하티 흐로드비트니손을 걸고 광음과 일월의 인연으로 묶인 운명을 약속의 자리에서 파훼한다.”
로렌이 말을 마치자마자 빛무리는 새하얀 빛기둥으로 바뀌었다.
“큭! 안 돼. 이것만은 절대 안 돼!”
그 안쪽에서 막스웰의 비명이 들렸다. 수 초간 쏟아지던 빛은 점차 사그라들었다.
빛이 사라진 자리엔 기쁘게 웃음 짓는 로렌과 절망에 빠진 막스웰이 있었다. 막스웰은 손을 덜덜 떨었다. 손에는 태어날 때부터 박혀 있던 맹약의 인장이 깨끗하게 사라진 상태였다.
동시에 모든 이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로렌!”
마법이 끝나자마자 알렉은 로렌에게 달려가 그녀를 품에 안았다. “괜찮아? 어디 다친 데 없어?” 그리 묻는 알렉이 오히려 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이 위험한 맹약 해제가 성공했다는 건 그녀가 막스웰의 피를 마시고 죽을 뻔했다는 방증이었다.
“어쩌려고 이런 도박을 한 거야!”
“도박이라니.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러다 잘못되면 어쩌려고 그랬어.”
알렉은 당장 로렌의 몸 상태부터 확인했다. 맹약이 해제된 후 그녀의 몸에 남아 있던 독성은 말끔히 사라진 모양이라 다행이지만……. 안심하던 알렉의 눈동자가 그녀의 사지를 압박한 구속구를 보고서 핏대를 세웠다.
“이 왕궁을 아예 무너뜨렸어야 했는데.”
알렉은 가만두지 않겠다고 중얼거리면서 쇠고랑을 하나씩 부숴 버렸다. 왕실의 재산을 함부로 훼손하지 말라고 근위병이 외쳤으나, 알렉의 신경은 오로지 로렌에게 꽂혀 있었다.
그녀의 목과 손목에 붉게 남은 쇠고랑 자국을 보니 심장이 찢어졌다. 대체 얼마나 힘들었을까. 가늠도 할 수 없는 고통이 제게도 느껴지는 것 같아 알렉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로렌의 뺨을 쓰다듬었다.
“젠장할, 아까는 정말 네가 죽을까 봐… 쫄려서 뒈지는 줄 알았네.”
커다란 쇠문을 열기 전엔 그녀의 시체를 마주하게 될까 걱정했고 살아 있는 그녀를 확인했을 때에는 제 앞에서 죽을까 걱정했었다.
“여긴 왕궁이다. 바른말을 써야 해.”
로렌은 눈물이 왈칵 솟아오르는 것을 참으며 알렉의 목을 끌어안고서 잔소리를 했다. 단단하고 커다란 몸은 비 맞은 짐승처럼 떨고 있었다.
“정말 네가 죽어 있을까 봐 걱정했어. 날 이 세계에 남겨 두고 그대가 떠난 줄 알고.”
“내가 왜 죽느냐. 당신과 약속하였잖아.”
“무슨 약속. 돌아오겠다는 흔해 빠진 약속?”
알렉은 로렌의 작은 몸에 매달린 채로 구시렁거렸다. 연극만 봐도 그랬다. 극 초반에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말한 인물은 반드시 시체가 되어 돌아오는 게 허다했다.
“그딴 약속 어기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 말도 있지만, 다음엔 제대로 듣겠다고 약속했지 않았나.”
“무슨? 아.”
알렉은 로렌을 붙잡기 위해 과거를 털어놓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다음엔 제대로 듣겠다. 귀를 쫑긋 세우고 당신의 발소리를 듣겠다. 꼭 당신을 기다리마.”
“이제 떠올린 모양이구나. 용은 기억력이 나쁜 줄 알았다.”
“어떻게 잊어, 그 말을.”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그 한 마디에 알렉은 수백 년간 가슴에 쌓아 두었던 부채감을 내려놓을 수 있었으니. 늑대에게 억울하리만큼 쏟아부었던 미움까지도.
“그래서 먼저 떠나지 않고 기다렸다.”
지친 삶을 끝내고 다음을 기약할 수도 있었다. 맹약 해제를 위하여 바닥없는 고통을 헤매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알렉을 홀로 두고 싶지 않았다.
“당신의 발소리가 들릴 때까지 이곳에서 용감하게 기다렸어. 내게 도착한 그대를 보니 안심이 되었다. 파훼 주문이 성공한 건 그대 덕분일지도 몰라.”
저를 기다렸다는 말에 알렉의 얼굴이 무너져 내렸다.
아무것도 없이 살벌한 왕궁에 맨몸으로 들어온 늑대였다. 가진 것 없이 지키고자 하는 것을 지키려면 얼마나 발버둥 쳤을까. 그런 와중에 저를 기다리다니. 언제 도착할지도 알려 주지 않고서 기다리기만을 바라던 이기적인 용을 한 번 더 믿어 주다니.
알렉의 목울대가 천천히 울렁거렸다. 얼음뿐인 벌판에서 작은 모닥불을 만난 것 같았다.
“사실 이곳에 갇혀 있을 때 당신이 나를 잊고 당신의 삶을 살았으면 했다. 그러면서도 당신이 와 주길 바랐나 보아. 당신이 당도했을 때, 당신을 기다리던 내 모습을 이번엔 보여 주고 싶었어.”
“그래, 잘했어. 스스로 이름을 찾다니. 정말이지 용맹한 늑대로군. 그대의 용맹함을 잊어버리고서 내가 감히 나서려 했어.”
알렉은 품 안에 쏙 들어오는 로렌의 작은 몸을 더 힘있게 끌어안았다.
“그런데 식사는 제대로 한 거야? 빌어먹을, 뼈밖에 안 남았잖아. 이놈의 왕궁은 고기 쪼가리도 안 줘?”
“먹었다. 다만 당신이 그리워 살이 빠졌나 보아. 그런데 당신 또한 그렇구나.”
로렌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알렉의 두 뺨을 감쌌다.
“여기, 분칠했느냐.”
로렌은 알렉의 눈 아래를 손가락으로 톡톡 문질렀다.
“티나?”
“늑대는 눈이 좋다.”
“좋은 협상을 위해선 안색이 좋아 보여야 하거든. 그대가 없으니 내 잘난 면상이 열흘 만에 시체 꼴이 되더군.”
“매번 고생만 시키는 것 같아 미안하구나.”
“그 대사, 주로 돈 못 버는 남편이 부인에게 쓰는 말인 거 알아?”
알렉은 우스갯소리를 하면서 로렌의 옆구리를 붙잡아 들어 올렸다. ‘젠장 살 빠진 거 맞잖아.’ 알렉은 과하게 가벼운 로렌의 무게에 마음 아파하며 어금니를 씹었다.
“자, 그럼 밖으로 나가야지.”
알렉은 로렌을 안고서 막스웰 앞으로 걸어갔다. 근위대장의 부축을 받고 있던 막스웰은 넋이 나간 얼굴로 둘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얼굴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황폐했다.
“어째서…….”
막스웰이 운을 띄웠다.
“어째서, 왜! 안식을 포기했지?”
막스웰이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피를 마시고도 죽지 않은 이유를 물었다.
“나의 소중한 이를 위해 버틴 것이다. 그저 버텼어. 그래야 내 소중한 이들과 함께 자유를 누리지 않겠나.”
“나는. 내가 너를, 너를 얼마나 귀히 여겼는지 아느냐!”
“알아 달라 하지 말아라. 진정 귀히 여겼다면 베푼 이보다 받은 이가 먼저 알았을 것이다.”
로렌은 알렉의 품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알렉은 아쉬워하면서 로렌을 바닥으로 내려 주었다. 근위병들의 총구가 로렌과 알렉을 겨누고 있었지만 무서울 건 없었다. 자신의 사랑스러운 늑대는 제 결계 안에 있었으니.
로렌은 막스웰의 코앞까지 다가가 그의 손등을 확인했다. 맹약의 인장이 사라진 걸 확인하자 안도감이 들어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보고 있느냐, 에블린. 내가 드디어 해내었어. 너의 유언대로 자유로이 살 수 있게 되었다.’
로렌은 입술을 꾹 늘이면서 목 뒤로 눈물을 삼켰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막스웰을 근엄하게 바라보았다.
“이제 내게 속박되지 마라, 막스웰. 너도 너의 인생을 살아가야지.”
“…속박?”
막스웰이 고통스럽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입술을 우물거렸다. 그러다가 로렌이 내민 손을 확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속박된 것이 아니다. 짐은 그대를, 그대를……!”
막스웰이 눈을 번뜩이면서 로렌을 놓아주지 않았다. 아, 진즉에 이리 안아 볼 것을. 처음부터 이 달콤함을 취해 볼 것을.
그런 막스웰의 행태를 지켜보던 알렉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불뚝 솟아올랐다.
“저 빌어먹을 새끼가!”
알렉이 망설임 없이 왕에게 주먹을 날리려던 때.
퍽! 엄청난 소리와 함께 막스웰의 몸이 또 한 번 바닥으로 내리꽂혔다. 그 로렌이, 수백 년간 막스웰만 태양처럼 바라보던 늑대가, 막스웰의 뺨을 후려친 것이다. 그것도 있는 힘껏 세게.
막스웰은 신음조차 흘리지 못했다.
‘짐을 이리 함부로 대한다고? 로렌이? 은빛 늑대가?’
여전히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터져 버린 뺨이 빠르게 부어올랐고 돌아간 목은 제대로 가눠지지 않았다.
“전하!”
하얗게 질린 시종장이 거품을 물면서 바닥에 드러누운 막스웰을 살폈다.
“전하를 해하려 하다니! 당장 저 여자를 붙잡아!”
근위대장의 말에 근위병은 시선을 교환했다. 총도 칼도 마도구도 듣지 않을 텐데 어찌 붙잡을까. 용의 분노를 살 수도 없는 노릇. 그들은 여전히 총구만 겨눌 뿐 아무 조치도 할 수 없었다.
“감히, 짐을… 때렸…어?”
“목이 불편하다면 반대편 뺨도 쳐서 목을 똑바로 만들어 줄 수 있으니 말만 하거라.”
“짐을… 때렸… 맹약자인 나를? 짐만 바라보던 네가?”
“누가 맹약자인가. 그리고 지금 내가 힘이 빠진 것을 감사히 여기거라. 평상시였다면 목이 돌아가 죽었을 테니.”
로렌은 속이 시원하다는 얼굴로 손을 털었다.
아주 작은 미련조차 찾아볼 수 없는 로렌의 표정. 막스웰은 차가운 바닥에 처박혀 그런 로렌을 바라보았다. 처참한 꼴을 한 채 바닥에 처박힌 저와 달리, 그녀는 처음 설산에서 만났던 그 날처럼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다.
“안 돼. 믿을 수 없어. 어떻게 나와의 인연이 끊어질 수 있는가!”
막스웰이 눈을 부릅뜨고 제 손등을 다시 확인했다.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던 인장은 깔끔하게 사라졌다. 처음부터 아예 존재하지 않았었던 것처럼.
그때 막스웰의 뒤쪽에서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다가왔다.
“소란은 이 정도면 되었으니 이만 가는 게 어때.”
왕비였다. 그녀는 처참한 남편 꼴을 보고서 코웃음을 쳤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야. 나 대신 누군가 한 방을 날려 주고.”
왕비가 근위대장에게 턱짓하자 근위대장은 막스웰을 부축하여 지하를 빠져나갔다.
“오늘 일은 왕족의 품위와 드라고로스를 위하여 묻어 두도록 하지.”
왕비는 그렇게 말하곤 특별한 인사 없이 뒤를 돌았다. 로렌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퇴장하는 왕비를 붙잡았다.
“마음은 괜찮으냐.”
그 말에 잠시 멈칫한 왕비가 뒤를 돌았다. 이곳에 온 뒤로 제 마음을 걱정해 주는 이를 처음 만나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다가 저 여자가 감히 반말을 썼다는 걸 뒤늦게 알아챘다. 기가 막히네. 늑대 신인 척한다는 미친 여자를 지하에 가둬 놨다더니 진짜 정신이 나간 모양이다.
“감히 내게 근심이 있어 보인다는 말을 하는 것이니?”
저런 여자에게 막스웰도 공작 부인도 푹 빠져들다니. 하긴 왕에게도 말을 낮추는 여자가 제게 존대를 할 리가 없지. 왕이 허락한 말투이니 트집을 잡기도 애매하고.
“내가 때린 게 미안해서 그렇다. 막스웰은 네 반려이지 않나.”
그 말에 알렉이 로렌의 옆구리를 쿡 쑤시면서 작게 속삭였다.
“달링, 저건 내가 때린 거로 해야지. 혹시 벌을 받게 돼도 내가 받을 거라고.”
“나는 강하다. 어떤 형벌도 용감하게 견딜 수 있어.”
“하아, 정말.”
알렉이 이마를 쓸었다.
왕비는 둘의 다정한 모습을 바라보면서 쓰게 웃었다.
“안타깝게도 전하는 나의 반려가 아니라 과일이라서. 그래서 물러 터지든 썩어 문드러지든 나와는 상관이 없단다.”
왕비는 다시 걸음을 돌려 앞으로 서너 걸음 나아갔다. 그러다 고개를 돌려 마지막 말을 남겼다.
“그대들은 과일이 되지 말고 서로의 반려가 되도록 하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