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Snake Finds the Wolf Who Played With the Snake RAW novel - Chapter 5
4. 발정기
철로를 증설 중인 공사장.
우락부락한 인부들이 땀을 흘리며 커다란 장비를 들고 일에 전념하고 있었다.
“이쪽이야, 파울로! 여기도 망치질 좀 해!”
“알았어요. 곧 갈게요!”
파울로는 얼마 전 공사판에 뛰어든 셰퍼드 수인이었다. 개 중에서도 사냥에 탁월한 셰퍼드였으니 몸 쓰는 일은 자신 있었다.
용병 일을 하다가 공사장에 취직한 것은 단순히 돈 때문이었다. 검은 뱀 상단이 수인들을 좋은 조건에 채용한다는 소문은 들었으나 목숨 걸고 하는 일보다 페이가 좋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곳에서 웬 아리따운 여성을 만난 것은 보너스랄까.
파울로는 망치질하면서 옆을 힐끔거렸다. 긴 은발 머리를 위로 묶어 올린 여인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여인인데도 힘이 엄청 세네. 멋지다.’
지금 그 여인은 우락부락한 악어 수인을 그대로 바닥에 내리꽂고 있었다. 정말 대단한 여인이었다.
“저 여자는 가끔 공사장에 오나 봐요?”
파울로는 바로 옆 인부의 옆구리를 찔렀다. 샌드위치를 크게 베어 물던 인부가 고개를 저었다.
“미친 여자야. 관심도 두지 마.”
“미쳤다니요? 설마 아무나 저렇게 패대기치나요?”
“방금 건 몹쓸 악어 자식이 저 여자 엉덩이를 만져서 그런거고.”
인부는 물병의 물을 벌컥벌컥 마신 후 그녀가 미친 여자라고 불리는 이유를 말했다.
“저 여자가 늑대 수인인데, 자기가 이 왕국의 신이었다고 떠들고 다니거든. 그러니 미친 여자지.”
“죽은… 늑대 영물 말이에요?”
“그래. 수인과 영물은 하늘과 땅 차이인데도 저래. 말투도 노인네 같아서 황당하다니까.”
인부는 로렌의 말투를 흉내 내면서 낄낄 웃었다.
파울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진중하고 우아해 보이는 여인이 사실은 미친 여자라는 소문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단지 조금 특이한 여자라는 건 다음번에 알 수 있었다. 그날이 아마 17번 선로의 완성을 축하하며 축배를 드는 날이었을 것이다.
“절대 이곳에서 사고 나지 않게 해 달라고 신께 기도를 올리자고. 신께서도 분명 우리가 피땀 흘린 작품을 지켜봐 주실 거다!”
공사 반장이 나무 잔에 맥주를 채워 껄껄 웃을 때였다.
“그래, 내가 잘 지켜보마. 네게도 축복을 내리지.”
로렌이 반장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면서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아주 잠깐 정적이 맴돌았지만, 인부들은 그런 로렌의 반응을 익숙하게 받아들인 뒤 저들끼리 왁자지껄 떠들기 시작했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파울로는 인부들을 인자하게 바라보는 로렌과 맥주잔을 부딪치는 인부들을 번갈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로렌과 처음 대화를 나눈 것은 수도 외곽 선로 공사 현장에서였다.
한 달에 대여섯 번 공사장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로렌은 사내도 하기 어려운 일을 도맡아 하기로 유명했다.
“이걸 저쪽으로 옮기면 되느냐.”
작업복을 입은 로렌이 철근 더미를 번쩍 들어 올렸다. 힘이 장난 아니잖아? 파울로는 자기도 혼자 못 드는 자재를 가뿐히 옮기는 로렌을 보면서 입을 쩍 벌렸다.
“이봐, 파울로! 멍하니 있지 말고 비켜!”
그때 반대편에서 돌을 가득 실은 수레가 다가왔다. 아슬아슬 굴러가던 수레바퀴가 우지끈 부러지면서 수레가 중심을 잃고 돌을 쏟아 냈다.
“위험해!”
“어? 어!”
뒤늦게 정신을 차린 파울로는 머리 위로 쏟아지는 돌 더미를 그저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때 웬 철근 기둥이 훅 날아와 파울로의 바로 앞에 퍽 박혔다. 날아오던 돌 더미가 철근에 맞아 옆으로 튕겨 나갔고 파울로는 돌가루 정도만 뒤집어썼다.
‘대체 누가…….’
파울로는 철근이 날아온 방향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놀라진 않았느냐.”
로렌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면서 파울로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파울로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로렌의 뒤통수에서 흘러나오는 후광을 똑똑히 목격한 것이 바로 그날이었다.
그 후 파울로는 꾸준히 현장에서 몸을 굴렸다. 그러다 보면 한 번씩 로렌을 마주쳤고 꾸준히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하지만 요즘 문제가 하나 생겼다. 갑자기 현장에 상단주가 난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꼭 로렌 누님이 일하는 날에 말이지.’
덕분에 현장에서 배급되는 식사의 질이 좋아졌지만 파울로는 마음이 불편했다. 자신이 누님에게 말을 걸려고 하면 그놈의 상단주가 어찌나 매섭게 노려보던지 요즘은 누님 근처에도 가 보질 못했으니까.
‘둘이 무슨 관계일까.’
순진한 누님께서 여성 편력이 심하다는 상단주에게 홀라당 넘어간 건 아니겠지? 파울로는 배식받은 도시락을 먹으면서 로렌 쪽을 힐끔거렸다.
로렌은 상단주와 그의 보좌관이 있는 상석에 앉아서 식사하고 있었다.
높으신 분들과 식사한다고 해서 로렌을 부러워하는 인부는 없었다. 그만큼 검은 뱀의 상단주는 대하기 껄끄러운 존재였으니까.
까탈스럽다던 상단주는 보좌관의 도시락에 있던 고기를 집어 로렌의 도시락에 옮겨 담는 기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어어? 내 고기! 왜 자꾸 내 고기를 가져가는 거야, 알렉!”
“네가 맛있게 먹는 게 꼴 보기 싫어서 그렇다. 왜.”
상단주는 자신의 도시락에 있던 고기까지 모조리 로렌에게 몰아 주었다.
“안 돼― 난 단백질 위주의 식사를 해야 한다고.”
“벌크업도 정도껏 해야지. 너무 과하면 여자들도 싫어해, 사샤.”
대신 상단주는 도시락에 있던 채소를 보좌관에게 옮겨 주었다. 보좌관은 그것이 마음에 들었는지 바보처럼 헤실헤실 웃었다.
“그래? 지금 내가 좀 과한가?”
보좌관이 울룩불룩한 근육을 뽐내면서 상단주를 힐끔거렸다. 상단주는 한껏 찌푸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사내의 몸 따위 보고 싶지도 평가하고 싶지도 않은 내색이 역력했지만 충실한 보좌관을 위해 겨우 꾹꾹 참아 내는 것 같았다.
“많이 과하지.”
“그럼 오늘부터 며칠은 채소만 먹어야겠다.”
“알아서 해.”
상단주는 손을 내저으면서 로렌이 식사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로렌이 한 그릇을 뚝딱 비우자 오라버니라도 되는 것처럼 흐뭇한 미소를 살짝 비쳤다가 감추기도 했다.
* * *
이런 날들이 하루 이틀 반복됐다. 한 번 만난 여자는 두 번 만나지 않는다던 상단주는 소문과 다르게 로렌의 곁을 착실히 맴돌았다.
그러던 상단주가 어느 날부터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외곽 노선 공사가 거의 완성되는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어이, 늑대! 여기서 이것 좀 옮겨 놔. 다 옮기면 퇴근해도 좋아.”
늙은 인부가 무거운 철근을 턱짓했다. 로렌은 별다른 어려움도 없이 두 손으로 두꺼운 철근 더미를 들었다. 못해도 성인 남자 다섯 명의 무게였지만 로렌에게는 일도 아니었다.
‘비가 오겠네.’
손쉽게 오늘의 마지막 임무를 완수한 로렌은 우중충한 하늘을 보며 싱긋 웃었다. 누구는 날이 흐리다며 푸념을 늘어놓았지만, 로렌에게 비는 언제나 반가운 소식이었다.
로렌은 눈물이 어른대는 눈가를 닦았다. 슬퍼서 그런 게 아니라 비를 내리기 위해 울어야 했던 지난날 때문에 생긴 습관이었다.
로렌이 쭉 내민 손바닥 위로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누님! 로렌 누님!”
그때 파울로가 퇴근하던 로렌을 불렀다. 처진 눈꼬리와 올망졸망한 눈동자가 충성심 높은 강아지와 똑같았다.
“저, 저기, 로렌 누님! 우산 가져오셨나요?”
“난 우산을 원래 쓰지 않아. 비 맞는 걸 좋아한다.”
“하지만 누님, 그러다 감기 걸리는걸요.”
“네 몸부터 챙기도록 해. 지금도 얼굴이 발갛구나.”
“이건 감기 때문이 아니라… 더, 더워서 그래요.”
파울로는 로렌을 한 번 힐끔거리고는 수줍게 시선을 내렸다. 본격적으로 빗방울이 떨어지자 파울로는 우산을 펴서 로렌에게 씌워 주었다.
“요즘은 상단주님이 안 보이네요?”
“그런가.”
“다행이에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매일같이 오셨었잖아요. 그때마다 로렌 씨를 오라 가라 해서 괴롭혔고요.”
파울로가 은근하게 알렉을 깎아내리면서 입을 부루퉁 내밀었다.
“하여간에 개들은 맘에 안 들면 짖기 바빠요.”
그 순간 언젠가 알렉이 비아냥거렸던 말이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괴롭힌 건 아니었어.”
로렌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파울로의 말대로 알렉은 매일같이 로렌의 일터를 드나들었다. 찻집과 기차역, 공사장까지.
하지만 그와 마지막으로 밤을 보낸 이후, 로렌은 알렉을 며칠째 보지 못했다. 일족을 만나러 간다더니 그 후론 소식이 없었다.
‘그게 5일 전인가.’
일족이 왔다는 말에 싸늘하게 식었던 알렉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탈이라도 난 건 아니겠지? 못 본 기간이 길지도 않은데 괜스레 마음이 술렁거렸다.
‘아냐. 신경 쓰지 말자. 어차피 각인도 해제할 사이인데 무슨.’
로렌은 딱히 그를 기다리거나 신경 쓰는 게 아니라고 중얼거렸다. 그저 마음이 불안한 이유는 제게 덜컥 각인해 버린 순진한 사내가 불쌍해서이리라.
* * *
그 시각, 알렉은 빈 술병을 들고 호위도 없이 구석진 골목에 서 있었다. 그를 해하려던 무리가 발아래 쓰러져 있었다.
“그러게 왜 선량한 행인에게 시비를 걸어.”
그들은 수인 폭력배들이었다. 돈만 있으면 지저분한 짓은 가리지 않는 이들은 알렉의 터럭 하나 건들지 못하고 시체 신세가 되었다. 멍투성이 꼬마 하나가 구석에 쭈그려 앉아 이쪽을 기웃거렸다.
“아까부터 귀찮게.”
알렉은 폭력배들이 휘둘렀던 쇠붙이들을 꼬마 쪽으로 탁탁 차 버렸다. 그것들은 휘리릭 날아가 꼬마의 발 앞으로 정확히 떨어졌다. 꼬마는 쇠붙이를 황급히 주워 품에 안고서 알렉에게 꾸벅 인사를 한 뒤 사라졌다. 저걸 대장간에 판다면 며칠간 배곯을 일이 없으리라.
“이제야 좀 조용하네.”
혼자가 된 알렉은 잘빠진 구두로 널브러진 폭력배의 머리를 툭툭 건드렸다.
“너 같은 것들 때문에 열심히 사는 저런 애새끼까지도 천박하다며 차별을 받는 거야. 힘을 좀 타고났다고 이런 쓰레기 같은 짓이나 할래?”
알렉은 피범벅이 된 몸뚱이 위에 지폐 한 장을 휙 던졌다. 일종의 대가였다. 오랜만에 몸을 풀었더니 빌어먹을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개운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시발, 비까지 내리네.”
알렉은 어깨 위로 떨어진 빗방울을 짜증스럽게 털어 냈다.
그는 비가 싫었다. 우중충한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꼭 누군가의 눈물 같아서 매번 기분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마차를 타고 돌아갈까. 아니, 오늘은 어딘가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알렉은 가족을 만났던 일을 떠올렸다.
“난 너 같은 거 모른다.”
저를 낳은 어머니는 제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아버지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날개도 없는 반편이가 태어나 천박한 뱀처럼 배로 바닥을 기어 다니더니. 성체가 된 후로는 네놈과 똑같은 쇠붙이를 발명해 돈을 벌고 있더군.”
탐욕스럽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귓가에 어른거렸다. 아버지는 각인 해제를 돕는 대신 철도에 대한 권한을 일부 내놓으라고 요구했었다.
제기랄. 알렉은 무작정 걸었다. 점점 거세지는 빗줄기가 고급 양장 위를 흘러내리다가 옷감 안쪽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비를 머금은 몸은 무거워졌고 그만큼 느려졌던 걸음은 어느 순간 우뚝 멈추었다. 기차역 앞이었다.
기차가 끊긴 역사는 사람 하나 없이 고요했다. 알렉은 빗물에 차갑게 식은 표정으로 우두커니 기차역을 응시했다. 철도가 대륙을 누비는 모습을 일족에게 보이겠다고 다짐했던 것이 엊그제 같았다.
‘바닥을 기는 천박한 쇠붙이로 대륙을 장악하여 그놈들의 콧대를 눌러 주려고 했었지.’
대륙 노선과 이곳을 연결하는 공사만 끝난다면 완성이었다. 이것으로 오랜만에 재회한 일족의 코를 짓누르고 오지 않았나. 그놈들의 일그러진 얼굴이 어찌나 상쾌하던지.
‘그런데 왜 기분이 개같을까.’
원인 모를 불쾌감이 저릿했다. 아주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기분.
절절 끓어올랐던 분노와 복수심이 빗물에 젖어 차갑게 가라앉을 무렵, 익숙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상대를 파악하기도 전에 고개부터 돌아갔다. 그곳엔 저처럼 비를 맞으며 걸어가는 로렌이 보였다. 저와는 다른 점이 있다면 그녀의 얼굴엔 충만한 행복이 가득하다는 점이었다.
“뭐가 좋아서 실실 쪼개.”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자신은 로렌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미쳤군. 언제 여기까지 걸어왔지? 알렉은 술병을 쥔 손으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술을 마신 건가.”
로렌의 시선이 빈 술병에 닿았다.
“아, 목이 좀 말라서.”
알렉은 남은 술을 입에 털어 넣은 뒤 빈 술병을 아무렇게나 던졌다. 로렌은 재빨리 팔을 뻗어 떨어지는 술병을 잡았다.
“유리병은 던지면 안 돼. 깨지면 누군가가 다친다.”
로렌은 그가 피우지도 않은 궐련을 내던지던 모습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이 남자는 입에 물고 있던 것을 바닥으로 던지는 못된 습관이 있는 모양이다.
로렌은 술병을 길가에 조심히 내려 두었다. 이러면 병이 필요한 누군가가 주워 가겠지.
“밤새 사내를 씹어 먹던 여인치고 고지식하군.”
“당신은 말투가 뾰족하구나. 우산은 없는 것이냐.”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가게 구석에 우산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선 정작 본인은 비를 맞고 다니다니.”
그 말에 로렌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피식 웃었다. 관심 없는 척하더니 가게를 구석구석 살핀 것이 의외로 관찰력이 좋은 사내였다.
“난 비를 좋아해. 그래서 비 맞는 것도 좋아한다.”
“이상한 취향이군. 난 기분이 개같아지던데.”
알렉은 벌레를 쫓아내듯이 머리 위로 손을 휘휘 저었다. 제 앞에선 좋다는 말을 아끼던 여자가 이딴 걸 좋아한다는 말은 무려 두 번씩이나 해서 기분이 더 착잡해졌다.
“그런데 너, 어디 다녀온 거야?”
로렌은 여기저기 검댕이 묻은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 오늘은 공사장에서 일하는 날이었나. 몸을 아끼는 법을 모르는지, 일부러 혹사하는 건지.
‘하여간에 볼 때마다 볼품없는 옷을 걸치고 있군.’
알렉은 그녀가 걸쳤던 낡은 드레스와 작업복 따위를 회상했다. 그러다 발정기 때 보았던 새하얀 슈미즈 차림이 난데없이 떠올랐다. 그 온전치 않은 과거의 기억 위로 지금의 로렌의 얼굴이 겹쳐졌다.
‘이 와중에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방금까지 저를 채우던 불쾌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한 가지 욕망이 들들 끓기 시작하자 알렉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미친놈. 차가운 빗줄기를 얼굴로 받아 내니 하반신에 오른 열기가 조금은 식어 내렸다.
머릿속이 분주한 알렉과 달리 로렌의 태도는 침착했다.
“일을 마치고 가는 중이었다.”
“아, 그 공사장.”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이제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은 다소 성의가 없었다.
알렉은 빗물에 젖은 얼굴을 쓸다가 갑자기 표정을 구겼다. 킁, 비 냄새 사이로 흘러드는 낯선 사내의 페로몬. 그것이 지금 로렌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것 봐라?”
자신에겐 그렇게나 벽을 세우던 여인이 다른 사내에겐 관대하였나. 알렉은 사냥개처럼 킁킁거리면서 상체를 숙였다. 지독하게 달콤한 로렌의 체취에 다른 사내의 페로몬이 묻어 있었다.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몰아쳤다.
“하하. 개새끼 냄새를 묻히고 다니네.”
수컷 개 냄새가 역겨웠다. 테리어? 아니 셰퍼드인가. 알렉은 로렌이 걸친 낡은 재킷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사내의 외투가 틀림없었다.
“아, 이 옷 때문일 거야. 비가 온다고 친구가 빌려주었다.”
“친구? 상대에게 발정 페로몬을 묻히는 개새끼도 친구로 삼나.”
발정 페로몬이라는 말에 로렌이 펄떡 뛰었다.
“그, 그럴 리가 없어.”
로렌은 재킷에 코를 대고 킁킁거렸다. 개 수인의 냄새가 야트막하게 났으나 발정 페로몬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힘을 잃고 수인이 되면서 이런 냄새에 둔감해진 탓이다.
유일하게 제대로 느끼는 것이라면 알렉의 페로몬이었다. 제게 각인한 사내라서인지 그와 함께 있으면 온통 그의 향기로 가득해지는 기분이었다.
그의 페로몬은 비 내리는 숲 냄새와 닮았다. 차가우면서도 묵직한 향을 맡다 보면 마음이 차분해졌고 몸 안쪽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바로 지금처럼.
로렌은 열이 오르는 걸 모른 척하고서 발개진 뺨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그때 알렉이 로렌이 걸치고 있던 재킷을 벗겨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그러고는 자신의 재킷을 벗어 로렌의 머리 위에 대충 던졌다. 커다란 재킷은 머리와 어깨를 덮은 뒤 허리께까지 내려왔다.
‘갑자기 기분 좋은 숲 내음이 나는데… 설마!’
재킷 다음으로 몸에 닿은 것은 그의 페로몬이었다. 알렉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로렌을 제 페로몬으로 적시고 있었다. 일명 페로몬 샤워. 상대의 머리에서 발끝까지 자신의 페로몬을 묻혀서 소유를 주장하는 행위였다.
“자, 잠깐!”
그의 페로몬은 떨어지는 빗줄기보다도 거셌다. 다리에 힘이 빠진 로렌은 몸을 비틀거렸다. 알렉이 로렌의 어깨를 받치며 지탱해 주었다.
“조금만 참아. 적어도 너한테 묻은 개새끼 냄새는 덮어야 할 거 아냐.”
“그만…해.”
로렌은 그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비에 젖은 셔츠 아래로 그의 차갑고 단단한 피부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석고상처럼 차가운 몸이었음에도 닿은 손바닥이 뜨거워서 로렌은 퍼뜩 손을 떼어 냈다. 이러다가 발정기처럼 열이라도 오르면 큰일이었다.
“그 정도만 하라니까.”
“앞으로는 함부로 저런 거 받아 주지 마.”
알렉은 바닥에 떨어진 재킷을 노려보면서 말을 이었다.
“사내들이 꼬리를 치면 정도껏 쳐 내라고.”
알렉은 로렌의 전신에 자신의 페로몬이 묻은 것을 확인한 후 페로몬을 거뒀다. 그리고 비에 젖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젖은 머리칼 아래로 반듯한 이마가 드러났다.
로렌은 그의 아름다운 이목구비를 홀린 듯 보다가 황금색 눈동자에 시선을 빼앗겼다. 길고 까만 속눈썹 아래로 드러난 동공은 평소와 달리 뱀처럼 길어져 있었다.
“몰랐어.”
로렌은 얼른 시선을 내렸다. 뱀들은 원래 저런가. 저 눈을 계속 바라보다가는 그대로 홀려 버릴 것 같았다.
“왜 몰라. 넌 늑대라며. 늑대들은 후각에 예민하잖아.”
“다른 냄새는 잘 맡는데 페로몬은 원래 잘 못 느낀다. 진한 페로몬을 맡아 본 건 당신의 페로몬을 맡았을 때가 처음이었어.”
“…내 페로몬?”
“그래. 당신 페로몬은 유독 진하게 느껴져.”
“그렇군.”
알렉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비를 맞아 바닥으로 처박혔던 기분이 조금은 나아진 모양이다.
“집으로 가는 거야?”
“그래. 당신도 어서 돌아가거라.”
로렌은 걸음을 돌렸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2층 창문부터 열어 둘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았다.
이 빗소리를 들으며 침대에 누워 있는다면 얼마나 뿌듯할까. 에블린의 초상화가 있는 2층 거실의 창도 열어 두어야지. 에블린도 빗소리를 참 좋아했으니.
이렇게 생각만 해도 마음이 포근해졌다. 그래서 작별 인사도 잊은 채로 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현관문 앞에 도착해서야…….
‘아차.’
알렉과 제대로 작별 인사를 하지 않았음을 떠올렸다.
그리고 느껴지는 인기척.
로렌은 뒤를 돌았다. 저 미련한 사내는 병아리처럼 제 뒤를 졸졸 따라오고 있었다.
‘왜 저렇게 불쌍한 꼴로 쫓아오는 거지? 내쫓지도 못하게.’
아주 커다란 상단의 상단주란 사람이 저렇게 나사가 빠져 있어서야. 본디 상인이라면 닳아빠진 존재가 아니던가.
“장사꾼과는 상종도 하지 마, 로렌! 그런 치들은 싹 다 입만 산 사기꾼이니까.”
2년 전이었나. 가짜 보석 반지를 속아 산 에블린이 분개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유품이 된 그 반지를 유골과 함께 바다에 뿌리려다가 에블린이 또 화를 낼까 봐서 조금 떨어진 장소에 던져두었었다.
지금 알렉은 그 가짜 보석 반지 같았다. 모두가 부러워하고 두려워하는 상단주의 껍질을 뒤집어써 버린 가짜 어른. 저 사내도 볼품없는 알맹이를 들켜 버려서 누군가의 화를 잔뜩 뒤집어쓰고 바다에 풍덩 버려진 걸까.
‘저렇게 순진해서야 어찌 장사를 한다고.’
닳고 닳은 사내 흉내를 내더니 이럴 땐 어린애가 따로 없었다. 처음 본 여인에게 덜컥 각인을 해 대더니 이제는 비에 쫄딱 젖어서 아무나 졸졸 따라다니는 꼴이란.
로렌은 그에게 가라고 소리치려다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도무지 줄지 않는 빗줄기를 보니 밤새 비가 내릴 모양새였다.
‘우산이라도 줘야겠어.’
로렌은 한숨을 내쉬며 가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 뒤를 따라 알렉 또한 실내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비 내리는 바깥보다 어둑한 실내가 더 싸늘했다. 로렌은 오싹한 한기에 어깨를 부르르 떨면서 뒤를 힐끔거렸다. 팔짱을 끼고 떡하니 서 있는 알렉이 보였다.
‘어라.’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위험하다’였다.
이상했다. 저 밖에서 비를 맞을 때만 해도 딱해 보이던 사내였는데 지금은 이 찻집을 한입에 삼켜 버리려고 온 구렁이처럼 위압감을 풍기고 있었다.
그는 찻집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똬리를 틀었다. 그가 풍기는 무거운 분위기가 주변을 육중하게 짓눌렀다.
본능적으로 털이 쭈뼛 섰다. 자신의 터를 저 뱀에게 빼앗길 것 같은 강박이 척추를 타고 올랐다. 이 공간뿐만 아니라 저 자신까지도.
‘어서 우산을 주고 내보내야겠어.’
로렌은 카운터 구석에 박아 둔 우산을 뒤적이다가 가장 기다란 우산을 짚었다. 이 정도면 저 커다란 사내에게 떨어지는 빗방울을 막아 줄 수 있겠지.
로렌이 숙였던 상체를 일으키려던 때였다. 머리가 핑 돌면서 다리에 힘이 빠졌다. 빈혈 따위가 아니었다. 로렌은 이 느낌을 잘 알고 있었다.
‘저놈이 페로몬을 그렇게 쏟아붓더니!’
뺨에 열이 올랐다. 증상이 더 심해지기 전에 저 사내를 내쫓아야 했다. 며칠 전에도 이곳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지지 않았나.
로렌은 두 다리에 힘을 주고 천천히 알렉에게 걸어갔다. 자신의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러웠을 텐데 알렉은 본인이 다가오긴커녕 그 자리를 보란 듯이 차지하고는 로렌이 직접 오기를 오만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자. 이걸 쓰고 돌아가거라.”
로렌이 우산을 내밀자 알렉이 그 우산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정확히는 하얗게 질린 작은 손을 보고 있었다. 그는 로렌이 내민 우산을 받아 들지 않고 근처 테이블에 엉덩이를 걸쳤다.
“추워.”
“…뭐?”
로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손가락이라도 떨고 있었다면 이해하겠으나 그는 젖은 옷을 입고도 전혀 추워 보이지 않았다. 젖은 옷감 위로 드러난 그의 강건한 신체는 날씨나 온도 따위에 흔들릴 만한 것이 아니었다.
“춥다고.”
알렉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서 한 번 더 추위를 호소했다. 자신이 이렇게까지 하는데 미동도 없는 여자라니. 다른 여자였다면 저를 곧장 침대에 눕힌 뒤 제 몸을 올라탔을 텐데 말이다. 몸을 데워 주겠다는 핑계를 대면서.
“아, 그렇구나. 비를 맞았으니 추울 수도 있겠구나.”
하지만 저 벽돌 같은 여자는 제 말을 못 믿겠다는 티를 팍팍 내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네가 추운 걸 나보고 어쩌라는 것이냐, 하는 생각이 어린 눈빛이 참으로 각박하달까. 그러면서 자신을 향해 우산을 한 번 더 내밀어 어서 쫓아내고 싶은 티를 팍팍 냈다.
‘하여간에 뜻대로 되는 게 없는 여자 같으니라고.’
자신의 페로몬만 유독 진하게 느껴진다면서 유혹할 때는 언제고 지금은 어째서 거리 두기가 바빠진 건지.
이따위 밀고 당기기에 흔들린 건 또 처음이네. 알렉은 흰자위를 크게 돌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쉬운 사람이 지고 들어가야지 어쩌겠는가.
“매정하게 굴지 말고 따끈한 차라도 한 잔 줘.”
“미안하지만 오늘 영업은 끝났다.”
로렌은 칼같이 거절하면서 알렉의 손에 우산을 억지로 쥐여 주었다.
하! 알렉은 코웃음을 치면서 우산과 로렌을 번갈아 보았다.
“언제는 신이라면서 도량 넓은 척을 하더니만 지금은 냉정한 장사꾼이 따로 없군.”
“자, 장사꾼? 내가 사기꾼 같다는 말이냐?”
로렌이 입을 크게 벌리면서 스스로를 가리켰다. 장사꾼 소리를 듣자마자 가짜 보석 반지 사건이 한 번 더 떠올랐다.
“너도 차를 파는 장사치면서 상인을 싸잡아 사기꾼 취급하는 거야? 비약이 너무 심한데. 아, 틀린 말은 아닌가.”
알렉이 턱을 긁으면서 키득거렸다.
“날 희롱해 놓고서 기억을 지우고 달아났었으니 사기꾼이 맞지. 각인까지 한 수컷의 순정을 짓밟았잖아.”
“그, 그건 이제 그만 말하거라. 이미 계산 끝난 일 아닌가!”
“계산? 아아, 그렇지. 34실론 9센트로 내 몸값을 후려친 걸 깜박할 뻔했군. 내 장사 인생에서 그대만큼 탁월한 장사꾼은 없었어.”
“……!”
알렉의 말에 로렌은 반박하려고 입을 벙긋댔지만 할 말은 없었다. 대체 언제까지 우려먹을 셈인지. 귀한 찻잎도 이 정도로 우려 마시면 쓴맛이 나는 법.
‘저 까만 머리통에 꿀밤 한 대만 콱 쥐어박았으면.’
로렌은 알렉의 정수리를 노려보며 주먹을 부들부들 떨다가 심호흡을 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울컥 솟은 감정 덕분에 욕망에 허덕이던 배 속이 조금은 가라앉은 기분이니까.
그사이 알렉은 테이블에서 엉덩이를 떼고 아예 의자를 끌어와 당당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뜨거운 커피와 과일차 한 잔이면 돼.”
“뭐?”
“아아, 과일차에 꿀 두 스푼 넣는 거 잊지 말고.”
“두 잔이나 마시겠다고?”
“비를 쫄딱 맞아서 춥다고 했잖아.”
알렉은 처음 했던 말을 반복하면서 셔츠 소매 단추를 풀었다. 그가 젖은 소매를 걷어 올리자 단단한 손목과 완벽하게 갈라진 전완근이 사내다운 매력을 뽐냈다.
하지만 로렌의 시선은 여전히 꿀밤을 박아 넣기 좋은 알렉의 얄미운 정수리에만 머물러 있었다.
‘그래. 저자는 뱀이니까 추위를 탈 수 있지.’
그쪽 수인들은 체온 조절이 어렵다고 들었다. 로렌은 후들거렸던 다리를 추슬러 주방으로 들어갔다. 다행히도 저 얄미운 사내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로렌은 팔팔 끓인 물로 알렉의 커피와 과일차를 만들었다.
그리고 알렉의 테이블 위로 차 두 잔을 내려 두었다.
“빨리 마시고 가거라.”
알렉은 제 앞에 놓인 찻잔 두 개를 내려다보더니 과일차가 담긴 찻잔을 맞은편 자리로 밀었다.
“이건 네가 마셔.”
“난 필요 없다.”
로렌이 몸을 틀어 다시 주방으로 가려는 순간.
“혼자 마시기 쓸쓸한데.”
알렉이 그녀의 손목을 슬며시 잡으면서 씁쓸하게 웃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제 연기력이 부족한지 로렌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래. 가라, 가. 날 버렸던 일족을 만나고 와서 기분도 뭣 같은데 혼자가 낫지.”
알렉은 붙잡았던 로렌의 손목을 놓고 커피를 홀짝거렸다. 그런 알렉을 조용히 내려다본 로렌은 알렉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왜 안 가. 내가 불쌍해 보였어?”
알렉은 커피가 뜨겁지도 않은지 한 모금을 더 삼키면서 큭큭 웃었다.
“아니. 그냥 나와 비슷해 보여서.”
로렌은 뜨거운 과일차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말린 사과와 배를 넣어 노랗게 우러난 찻물이 달콤한 향을 풍겼지만 너무 뜨거워 당장 삼키긴 어려웠다.
“그럴 리가. 그대와 비슷하기엔 나는 가진 돈이 너무 많잖아.”
알렉은 농담을 던지면서 쓰게 웃었다. 솔직한 속내를 보이자 곁을 지켜 준 저 늑대나 사정이 비슷해 보였다는 말에 위로를 느낀 저 자신이나. 둘 다 참 이상했다.
‘비가 내려서 그런가.’
알렉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응시했다. 애초에 로렌을 뒤따라온 건 그녀가 흘린 페로몬 때문이었다. 저러다 길거리에서 나쁜 수컷을 만나기라도 한다면 큰일이 날 수 있었으니까. 혹시라도 위로가 필요한 상황이 온다면 저번처럼 그녀를 안으려던 새까만 속내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곳에서 떠나고 싶지 않은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었다.
‘위로가 필요한 건 나였던 건지도.’
로렌이 오븐을 데우며 불을 땐 덕분에 실내로 훈풍이 돌면서 창문에 김이 서렸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풍경이 점차 흐려지고 맞은편에 앉은 로렌의 얼굴이 좀 더 또렷하게 비쳤다.
알렉은 차가 식기를 기다리는 말간 얼굴을 감상했다. 창 너머로 들리던 빗소리가 점점 멀어졌고 따듯한 고요가 커피 향에 섞여 찬찬히 실내를 유영했다. 모든 감각이 시각으로 집중되었다. 흐릿한 창에 비친 로렌의 작은 표정 하나하나가 머릿속에 또렷이 각인되었다.
“비가 싫으냐.”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리자 살짝 흐려졌던 알렉의 초점이 또렷하게 돌아왔다. 난 비가 싫어. 꾹 닫혀 있던 입술이 낮은 목소리를 내뱉었다.
“살에 닿는 미적지근한 온도도 싫고, 땅이 질퍽해지는 것도 싫어. 습해지면 숨을 쉬는 것도 짜증 나고 쫄딱 맞으면 기분이 구질구질해지는데 저딴 비가 뭐 좋겠어.”
알렉은 찻잔 손잡이를 천천히 쓸었다. 평소라면 대충 대답하고 말 질문에 구구절절 설명하는 스스로가 신기하기까지 했다.
“그러는 넌. 비를 좋아한다 했었나.”
“그래. 비가 내리면 메마른 땅이 풍족해지지 않겠나. 그러면 왕국민들이 기뻐할 테지.”
“울어야 하잖아.”
“응?”
“네 주장대로 네가 진짜 신이었다면, 잠들어 있다가도 메마른 땅을 위해 깨어나 매번 울어야 했을 거 아냐. 그런데도 비가 좋아?”
알렉의 질문에 한참 과일차를 내려다보던 로렌이 시선을 들었다.
누군가가 수호신의 처지를 걱정해 준 건 처음이었다.
로렌은 그 질문에 곧장 대답할 수 없었다. 이상하게 심장이 먹먹했다.
“내가 오늘따라 쓸데없는 말이 많았군.”
알렉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닫아 두었던 창문들이 활짝 열렸고 젖은 흙냄새와 함께 시끄러운 빗소리가 실내로 들어왔다.
쏴아―
“좋아.”
빗소리에 섞인 로렌의 목소리는 크지도 작지도 않았다. 하지만 알렉이 듣기엔 충분했다. 그보다 훨씬 더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더라도 알렉은 자신이 각인한 반려의 목소리를 똑똑하게 들었을 것이다.
“그래도 좋아.”
로렌은 한 번 더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렉의 말대로 비를 위해 매번 눈물을 흘렸어야 했으나 자신의 눈물이 많은 이를 기쁘게 한다는 생각에 기꺼이 그 일을 해냈던 것 같다.
그래서 지상으로부터 빗소리가 들리면 마음이 편안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고.
로렌은 수줍게 찻잔을 들어 올렸다.
저 정신없는 여자가 찻물이 아직 뜨거운 걸 잊은 모양이군. 알렉이 손을 한 번 더 튕기자 찻잔이 반짝거리며 뜨거웠던 찻물이 마시기 좋은 온도로 식어 내렸다.
웬만해선 마법을 쓰지 않는 알렉이 유독 로렌 앞에서만 마법을 남발했다.
덕분에 로렌은 혀를 데지 않고 차를 마실 수 있었다.
그 후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서로 말을 섞지 않아도 편안한 침묵이 둘 사이를 맴돌았다.
댕― 벽에 걸려 있던 괘종시계가 저녁 일곱 시를 알린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아차, 오늘은 도스턴이 오기로 한 날이야.’
상념에서 깨어난 로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황급히 테이블을 정리하기 시작하자 알렉이 대놓고 아쉬운 얼굴을 했다.
“뭐야. 나 커피 다 안 마셨어.”
“곧 오라버니가 온다. 옷도 어느 정도 말랐을 테니 어서 가.”
“날 가족에게 들키면 안 된다, 이건가? 우리가 제법 위험한 관계였을 줄은 몰랐는데.”
“장난하지 말고 가. 도스턴 오라버니는 아주 엄하다.”
“아, 들키는 게 아니라 내가 혼날까 봐 걱정해 줬던 거야?”
그제야 알렉은 로렌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로렌에게 받았던 우산을 만지작대면서 입술을 길게 늘였다.
“그런데 어쩌나― 이미 늦은 것 같은데.”
“뭐?”
로렌이 동그랗게 뜬 눈을 깜박거렸다. 동시에 딸랑, 소리와 함께 가게 문이 열렸다.
서류 가방을 든 도스턴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시퍼렇게 날이 선 도스턴의 시선이 알렉에게 머물렀다가 로렌에게 향했다.
“로렌.”
자초지종을 말하라고 다그치는 목소리가 그녀의 이름을 담았다.
로렌은 어깨를 움츠리고서 도스턴 앞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다녀왔, 아니 다녀오셨어요, 오라버니.”
빳빳하게 굳은 혓바닥이 뜻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한쪽 발을 뒤로 무른 뒤 무릎을 굽히는 레이디의 인사라도 제대로 해야 하는데 긴장한 나머지 한쪽 다리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후들거렸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하지?’
로렌은 도스턴의 눈치를 살폈다. 화가 난 갈색 눈동자가 제 몸을 위아래로 훑으며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큰일이었다. 알렉의 페로몬을 뒤집어쓴 것이 역시나 티가 났던 모양이다.
‘안 돼. 이대로라면 오라버니가 실망하고 말 거야.’
달달 떨리는 입술이 아무 말이라도 내뱉으려 했지만 새하얗게 바래 버린 머릿속은 그 어떤 변명도 만들어 내지 못했다.
“옷도 안 갈아입고 무얼 하고 있었어.”
도스턴은 로렌에게 질문하면서 노골적으로 알렉을 노려보았다.
그 시선을 피할 알렉이 아니었다. 저게 그 피 한 방울 안 섞였다던 오라비인가. 알렉은 능글맞게 웃으며 도스턴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미소 띤 얼굴과 달리 그의 황금색 눈동자는 건조했다.
둘 사이로 심상찮은 기류가 흘렀다.
상황을 진정시키기 위해 로렌이 알렉의 앞을 가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바, 방금 이곳에 도착해서 저 사내에게 우산을 빌려주던 참이었어요, 오라버니.”
로렌이 도스턴에게 두 손을 내밀었다. 도스턴은 익숙하게 외투를 벗어 가방과 함께 로렌에게 건네주었다.
“우산만 빌린 게 아닌 것 같은데.”
도스턴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빈 찻잔을 응시했다. 그리고 크게 숨을 들이켰다. 비 내음에 섞인 페로몬은 제 여동생의 것이 아니었다.
“우산을 빌린다는 분이 남의 여동생에게 페로몬을 잔뜩 묻혀 두셨군요.”
“초면이니 인사부터 하는 게 어떻습니까. 뭐, 그쪽은 날 알고 있겠지만.”
알렉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알렉산더 젠카이저요. 검은 뱀 상단의 상단주이지.”
존대와 반말이 섞인 말투가 묘했다. 도스턴은 그 손을 빤히 내려다보다가 떨떠름한 얼굴로 맞잡았다.
“그 유명한 분을 누추한 찻집에서 뵙는군요. 도스턴 루즈벡입니다.”
“그쪽도 제법 유명하던데.”
“…….”
“수인 최초로 발탁된 아카데미 교수라고 말입니다. 마법 전공이던가? 솜씨가 제법 좋던데요.”
“바쁘신 상단주께서 제 솜씨를 어디서 보셨을까요.”
“이미 아는 눈치인데 굳이 묻기는.”
알렉이 눈을 곱게 접으며 악수한 손을 흔들었다. 맞잡은 두 사내의 손등 위로 푸른 핏줄이 불뚝불뚝 튀어나왔다. 유치한 힘겨루기를 하면서도 둘은 가식적인 미소를 잊지 않았다.
로렌은 도스턴의 가방과 외투를 옷걸이에 정리한 뒤 후다닥 돌아왔다.
“그러다 다치겠습니다.”
로렌은 두 사내가 맞잡은 손을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빨래를 쥐어짜듯이 상대의 손을 쥐고 있으니 두 손 모두 벌겋게 물든 상태였다.
“이 오라비가 악수 따위에 다치겠느냐.”
도스턴은 알렉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로렌에게 대답했다. 알렉도 마찬가지였다.
“단순한 악수일 뿐인데 그대는 걱정이 많군.”
둘은 눈 한 번을 깜빡이지 않고 서로를 열렬히 응시하면서 손에 힘을 주고 있었다.
“두 분 다 그만하거라.”
로렌이 반존대를 쓰면서 터질 듯이 붉어진 두 사내의 손을 억지로 떼어 놓았다.
탁! 힘 좋은 여인의 손길에 따개비처럼 붙어 있던 두 사내의 손이 저만치 떨어져 나갔다. 둘은 쥐가 난 손을 쥐었다가 풀면서도 서로를 차갑게 응시하던 시선을 떼어 놓지 않았다.
“상단주께선 제 여동생과 어떤 관계이시길래 이곳까지 들어오셨습니까.”
도스턴의 질문에 알렉은 로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싱글벙글 웃는 얼굴이 어쩐지 불길해서 로렌은 알렉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알렉은 고분고분한 사내가 아니었다.
“이봐, 우리가 어떤 관계지?”
“과, 관계는 무슨!”
저 얄미운 작자 같으니라고. 알렉을 향해 이를 꽉 깨문 로렌은 재빨리 도스턴의 눈치를 살폈다.
“어이쿠, 무섭게도 으르렁거리시네. 잘못하면 또 잡아먹히겠어.”
알렉이 로렌의 뒤통수에다 대고 혼잣말을 해 댔지만 로렌은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하며 도스턴에게 변명을 했다.
“정말 우산을 빌리러 온 거라니까요, 오라버니.”
그러면서 알렉의 등을 출입문 쪽으로 힘껏 떠밀었다. 이 밉살스러운 사내를 진즉에 내쫓았어야 했다. 하지만 오늘따라 유독 알렉이 말을 듣지 않았다.
“왜 밀어.”
“우산을 받았으니 이제 좀 나가거라.”
“흐음, 싫은데.”
웬만한 사내는 단번에 휙 튕겨 나갔을 힘. 하지만 알렉은 뻔뻔하게 웃으며 로렌의 손길을 버텼다.
이 사내가 눈치도 없나! 로렌이 그의 옆구리를 몰래 쿡쿡 찌르며 눈치를 줬으나 그래도 요지부동. 그의 단단한 복사근에 부딪힌 로렌의 손가락만 아릴 뿐이었다.
티격태격하는 둘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도스턴은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쯧, 혀를 찼다.
“몇 번째입니까, 상단주.”
그렇게 질문하는 도스턴의 갈색 눈동자에는 혐오가 깃들어 있었다.
“지금 내게 무엇을 묻는 걸까요?”
알렉은 그 말뜻을 똑바로 알아들었으면서도 능청스럽게 고개를 기울였다.
“로렌 앞에서 곤란하셨다면 질문을 바꾸죠.”
도스턴은 안경을 추어올리면서 피곤한 표정을 지었다.
“언제까지 제 여동생을 만날 예정입니까.”
“언제까지?”
알렉이 눈썹을 들어 올리며 되물었다.
“당신이 여자를 시도 때도 없이 갈아 치운다는 건 왕국민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하하. 요즘 들어 이 얘기를 참 많이 듣게 되는군.”
얼마 전 국왕 또한 이 이야기를 했던 것 같은데. 저 여자와 얽힌 사내들은 어째서 하나같이 똑같은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걸까.
알렉은 로렌을 힐금거렸다. 그대도 참 피곤한 인생을 사는군. 그의 눈빛이 꼭 그리 말하는 것 같았다.
“날 언제까지 어떻게 만날지는 로렌이 알아서 선택할 문제 아니겠습니까.”
“아뇨. 로렌은 아직 아무것도 못 합니다.”
“성인인 여동생에 대한 평가가 박하군. 도스턴 교수야말로 피 한 방울 안 섞인 여동생을 언제까지 품 안에 가둘 예정입니까.”
도스턴의 단호한 말투에도 알렉은 상단주 특유의 여유를 부리며 대응했다.
“저와 로렌은 가족이니까요, 상단주.”
“그게 뭐. 가족이면 평생 서로를 구속할 핑계가 되나?”
“난잡한 바람둥이로부터 여동생을 지켜야 할 의무 정도는 있지요.”
“하하, 난잡? 뭐, 그건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보통 인기가 많았어야 말이지. 그런데 말입니다.”
알렉이 도스턴과 거리를 좁히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도스턴의 각 잡힌 넥타이를 만지작거리면서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쪽은 언제까지 보호라는 명목으로 혼기가 찬 누이동생을 독차지하려고 할까나.”
“……!”
“오라비의 집착이 너무 끈적하잖아. 당신이 로렌을 보는 눈빛만 봐도 티가 나. 여동생을 향한 사랑이라기엔 그 형태가 좀…….”
말을 줄인 알렉은 고개를 떼어 낸 뒤 도스턴의 넥타이를 다시 능숙하게 매어 주었다. 다른 나라에서 유행 중인 새로운 매듭법. 알렉은 모양새가 달라진 넥타이를 탁탁 두드리더니 싱긋 웃었다.
“너무 비뚤어져서 말입니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도스턴이 이를 꽉 물면서 되물었다.
“비뚤어졌다고. 넥타이가.”
“…….”
“내가 그런 걸 잘합니다. 비틀린 길 위에 반듯한 철도를 놓고 아무도 닿지 않았던 곳을 새로운 풍경으로 만들어 내는 거.”
“상단주!”
“그렇게까지 날 간절히 불러도 사내는 취향이 아니니 사과하지. 그리고 동생을 너무 감싸 쥐진 마시길. 그러니까 더 궁금해지잖아.”
그럼 이만. 알렉은 로렌에게 받은 기다란 우산을 들고 찻집을 나섰다.
로렌은 초조하게 도스턴과 알렉을 번갈아 보았다. 부들부들 떠는 도스턴과 달리, 빗속으로 걸어 나가는 알렉은 비를 싫어하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때 도스턴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당장, …해.”
“지금 뭐라고 하셨나요, 오라버니?”
“당장 올라가서 그 저급한 페로몬을 싹 다 씻어 내라고!”
쾅! 도스턴이 벽을 내리치며 로렌을 꾸짖었다. 어깨를 움찔 떤 로렌은 ‘네, 오라버니.’ 하고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인 뒤 부리나케 위층으로 올라갔다.
* * *
비슷한 시각.
“우기도 아닌데 비가 꽤 많이 쏟아지는군.”
번쩍! 번개가 무표정한 막스웰의 얼굴을 비춘 뒤 커다란 천둥이 우르릉, 하늘을 울렸다.
막스웰은 까만 창밖을 응시하면서 와인을 들이켰다. 무릎에 내려 둔 늑대 가죽을 가만히 훑어 내리는 손길은 사뭇 부드러웠다.
“신성 제국 사절단과 함께 들어온 용족이 왕국에 머물러 있다고 합니다.”
시종장이 고개를 숙이면서 창문을 더 활짝 열어 두었다. 예전부터 막스웰은 비 오는 날을 참 좋아했다.
“지금 비가 오는 것도 그중 하나가 장난을 치는 걸지도 모르겠군. 동북쪽을 차지한 고귀한 몸들이 무슨 일로 이곳까지 왔을까.”
짐의 결혼 축하 따위는 핑계일 테고.
막스웰은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던 초상화를 힐끗거렸다. 그의 신부가 활짝 웃고 있는 그림이었으나 막스웰은 남을 보듯이 시큰둥했다.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철도 때문이라고 합니다. 현재 나라를 오가는 대륙 철도가 동북쪽에만 놓이지 않았더군요.”
“그래?”
“예. 그 때문에 돈의 흐름이 약해지면서 그 권세 또한 흔들리고 있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그럴 리가. 용족의 레어에는 수많은 보화가 넘쳐흐를 텐데.”
“금을 제외한 다른 보화의 가치가 현저히 떨어졌습니다. 검은 뱀 상단이 용족의 것은 취급 안 한 뒤로는 다른 상단 또한 비슷한 태도를 보인 지 오래라…….”
“하!”
막스웰은 큭큭 웃기 시작했다. 이 대륙을 수백 년 지배하며 누군가의 신으로 살아온 이들이 고작 뱀 새끼 하나에게 놀아날 줄 누가 알았을까.
“강력한 마법을 구사하는 자들이니 철도 따윈 만들어 내면 될 텐데. 굳이 상단의 손을 빌리다니 우습군.”
“마법으로 열차를 움직이는 건 손해가 막심하니까요. 엔진 설계도는 오직 상단주만이 알고 있다고 합니다.”
시종장은 다른 나라에서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 수많은 자객을 보냈으나 알렉의 터럭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그걸 최초로 발명한 놈도 못 찾는다지.”
그랬기에 열차를 통째로 훔치는 일도 벌어졌었으나 그런 사고가 발생하면 알렉은 해당 국가의 철로를 고민도 없이 끊어 버렸다고 한다. 하는 수 없이 각 국가는 막심한 손해를 피하고자 열차를 철저히 보호했다.
“다들 무료로 철로를 깔아 준다는 꾐에 넘어가 땅을 내어 준 걸 후회하고 있겠지. 투자할 기회를 철저하게 놓쳐 버린 거야.”
그 엄청난 철로를 단기간에 완성하리라고 어느 누가 예상했겠는가. 하나같이 젊은 사업가가 어마어마한 금액을 감당 못 해 스러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꿀꺽 삼키려 했겠지.
하지만 알렉은 그 모든 것을 해내었다.
“늑대 신이 죽자마자 이 왕국에 들어온 것도 철도를 깔기 위해서였어.”
막스웰은 쓸어내리던 늑대 가죽을 꽉 쥐면서 말을 이었다.
“철도를 깔 때 가장 성가신 것이 무엇인 줄 아느냐.”
“무엇입니까.”
“땅의 주인이다. 그 땅을 지키는 수호신이 거부한다면 철도를 함부로 놓을 수가 없거든.”
“하지만 이오타 왕국과 카르벨 왕국은 모두 수호신이 있으면서도 철도를 놓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놈이 간사한 혀를 놀려 영물들을 설득한 거야. 하지만 우리 왕국은 불가했지.”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짐이 못 만나게 했어.”
“…예?”
“그저 느낌이었다. 둘을 만나게 하면 왠지 빼앗길 것 같았달까.”
“무엇을 빼앗긴다고 말씀하시는 건지.”
“글쎄.”
막스웰은 꽉 쥐고 있던 은색 늑대 가죽을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빼앗기지 않았다면 지금은 소유 중이라 말할 수 있을까. 손등에 새겨진 맹약의 인장을 보면서 막스웰은 비틀린 웃음을 지어 냈다. 분명 제 손안에 있거늘 빼앗긴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며칠 전부터 이상한 꿈 때문에 잠을 설치던 막스웰은 지끈대는 머리를 꾹 눌렀다. 알렉의 애인이라던 잿빛 머리 여인이 오늘도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 * *
알렉이 떠난 후 도스턴은 모든 창문을 닫았다. 바닥을 때리던 빗소리가 잦아들자 이번엔 로렌이 씻는 물소리가 아래층까지 울렸다.
빌어먹을. 도스턴은 하는 수 없이 창문을 조금 열어 두었다.
그의 어머니, 에블린도 로렌처럼 비 오는 날을 좋아했었다. 생전에 우산 장사를 했던 경험 때문인지 비를 보면 하늘에서 돈이라도 떨어지는 것처럼 기뻐했더랬다.
어머니는 떠들썩한 술자리를 좋아했고, 꾸준한 일상보다 돌발적인 여행을 좋아했으며 계획적인 미래보다 충동적인 현재를 사랑했다.
그리고 도스턴은 어머니가 좋아하는 것을 모두 싫어했다. 죽은 동생의 이름을 가져간 저 버림받은 수호신까지도.
‘네가 어떻게 로렌이, 내 여동생이 될 수 있단 말이냐.’
의자 위로 힘없이 쓰러진 도스턴은 죽은 여동생을 떠올렸다. 운 좋게 영물로 태어나 아주 작은 마을의 수호신이 된 아이. 하지만 여우 영물의 간을 먹으면 불로장생한다던 소문이 마을에 돌자마자 여동생은 욕심 많은 인간들의 손에 난도질당해 죽었다.
그때 생각했다. 어머니의 자유분방한 교육이 여동생을 망쳐 놓은 거라고. 그러니 바보처럼 인간을 졸졸 따라가 수호신 따위가 되었겠지.
충격받은 어머니는 그 작은 마을을 불태웠고 화마는 수많은 목숨을 앗아 갔다. 그리고 그에 대한 죗값인지 불치병을 얻었다.
그런 몸으로 정처 없이 떠돌다가 정착한 곳이 바로 드라고로스 왕국의 수도, 벨파슨이었다.
“아직도 그 마을을 불태우던 불길이 어미의 심장에 남아 있는 것 같아. 그런데 비가 내리면 뜨겁게 뒤틀리던 속이 좀 나아지는구나.”
뜬금없이 우산 장사를 시작한 이유도 비가 내리길 바라서였을 것이다. 물론 장사는 쫄딱 망했지만.
어머니는 망한 우산 가게를 찻집으로 고쳤다. 그 당시엔 기차역도 생기기 전이라 행인이 많지 않았고 가게엔 파리만 날렸다. 그래서 실력 있는 주술사를 구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빚을 갚겠다며 왕궁으로 뛰어갔다.
그다음 날 어머니가 들고나온 것은 돈주머니가 아니라 죽었어야 할 은빛 늑대였다. 열다섯 소녀의 모습을 하고서 수인이 되어 버린 비련의 수호신.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군.’
갑자기 뛰던 심장, 빨라지는 호흡, 좁아진 시야, 쭈뼛 서 버린 머리칼.
하지만 그 모든 이상 반응은 어머니가 그 늑대를 로렌이라고 부르면서 단번에 깨져 버렸다.
그 후 학업에 몰두한 도스턴이 단 1년 만에 교수로 발탁된 것도 죽은 여동생의 이름을 가져간 늑대 덕분이었을 것이다.
…버니. 오라버니.
“도스턴 오라버니!”
회상에 잠겨 있던 도스턴의 어깨를 누군가가 조심스레 건드렸다.
눈을 부릅뜬 도스턴이 뒤를 돌았다. 푹 젖은 머리칼을 늘어뜨린 로렌이 잠옷을 입은 채로 머뭇머뭇 서 있었다. 상단주의 페로몬을 닦아 내라는 자신의 지시에 따라 목욕을 마친 상태였다.
젖은 머리칼 때문에 군데군데 젖어 있는 잠옷 아래로 로렌의 뽀얀 살결이 은근히 비치었다.
“다 큰 여인이 사내 앞에 그런 모습으로……!”
제길. 도스턴이 이를 꽉 물면서 고개를 돌렸다. 분명 제 시야에 들어찬 것은 빗물이 맺힌 창문과 칠이 벗겨진 낡은 벽지 따위였으나 조금 전 로렌의 모습이 생생하게 어른거려서 당혹스러웠다.
“오늘은 여관 잡지 말고 집에서 쉬시라 말씀드렸는데 대답이 없으셔서요.”
“그게 무슨 뜻이야.”
이 집에서 단둘이 있자니. 도스턴은 귀를 의심하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로렌에게로 돌아가려던 눈동자를 겨우 붙잡아 끝이 닳아 버린 동그란 나무 테이블을 내려다보았다.
“밖에 비가 많이 와서요. 번거롭게 여관까지 가시는 것보다는 집이 편하실까 하여…….”
“하, 그럼 그렇지. 내가 무슨 기대를.”
잠깐, 기대? 내가 대체 뭘 생각하고 있는 건가. 도스턴은 안경을 벗으면서 목구멍으로 큭큭 웃었다.
“떠올려 보거라, 로렌. 이 오라비가 이곳에서 잔 적이 있느냐.”
다소 실망스러운 얼굴이 로렌에게로 향했다. 안경을 벗은 오라버니의 얼굴이 오늘따라 낯설어서 로렌은 저도 모르게 그녀를 직시하는 갈색 눈동자를 피하여 시선을 내렸다.
“아뇨.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는 한 번도…….”
로렌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막상 말하고 나니 오라버니가 자기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실감이 났달까.
오라버니는 손에 쥔 안경을 만지작대며 제자리에 앉아 심호흡을 반복하고 있었다.
‘혹시 아직도 내 몸에 알렉의 페로몬이 남아 있나?’
로렌은 자신이 팔을 올려 킁킁거렸다. 주인을 닮은 페로몬이 어찌나 끈적한지 아무리 문질러도 이 뱀 놈의 냄새가 잘 지워지질 않았다. 처음처럼 향이 진동하지는 않았으나 목욕 후 피어오르는 비누 냄새처럼 미약하게 피부에 남아 있었다.
“죄송해요. 페로몬을 씻어 낸다고 씻어 냈는데 잘…….”
“그러게. 아직도 불쾌한 냄새가 섞여 있어.”
첫 발정기 때에도 로렌이 묻히고 온 바로 그 냄새.
도스턴이 의자를 드르륵 밀면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로렌과 마주 서서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오라버니?”
로렌이 불렀으나 도스턴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도스턴의 시선은 로렌의 물기 어린 입술에 닿아 있었다. 그의 고개가 저를 향해 천천히 내려오자 로렌은 재빨리 걸음을 물렸다. 꼭 입을 맞추려는 것 같아서.
하. 코웃음을 친 도스턴이 이마를 붙잡고 웃기 시작했다.
“넌 정말이지.”
도스턴은 팔을 뻗어 저만치 물러난 로렌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옷을 당겨 로렌을 끌고 오더니 목덜미를 응시했다.
젖은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맹약의 인장과 그 위에 남겨진 미세한 잇자국.
서로 다른 두 사내가 누이동생의 가느다란 목덜미 위로 박아 넣은 정복욕이었다. 최대한 모른 체하려고 했지만 이렇게 마주할 때마다 참지 못할 불쾌감이 솟구쳤다.
“어째서 사내들은 네게 흔적을 남기지 못해 안달인 걸까.”
그렇게 말하는 도스턴의 눈빛이 번뜩였다. 시선이 닿은 목덜미가 따끔거릴 정도로.
“오라버니, 이건요, 그러니까…….”
로렌은 목덜미 위의 잇자국을 손으로 가리면서 알렉과의 관계를 둘러대고자 애썼다. 작은 말주머니를 뒤져 변명거리를 찾아보았으나 초라한 어휘력은 아무 말도 찾아내지 못한다.
침묵이 이어졌다. 하지만 도스턴은 로렌의 붉어진 귀와 방황하는 눈동자를 보자마자 그녀의 머릿속을 훤히 꿰뚫어 볼 수 있었다. 300년을 살았다지만 그저 잠들어 있던 짐승이나 다름없던 순수한 존재는 약지 못했다.
“무슨 기분이었을까, 그 작자는.”
“네?”
“좋았을까? 만족스러웠을까? 아니면 더 목말랐을까.”
도스턴은 그대로 페로몬을 내뿜기 시작했다.
다른 이의 페로몬에 둔감했던 로렌이 향이 짙다고 느낄 정도로 엄청난 양.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기에 로렌에게는 그것이 낯선 수컷의 페로몬과 다름없었다. 놀란 로렌은 팔다리를 허우적댔다. 그러면서도 도스턴을 감히 밀어내지 못했다.
“하지 마세요, 오라버니.”
그 한마디가 로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거부였다.
도스턴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하얗게 질려 가는 로렌을 내려다보며 이를 갈았다.
“어째서 너였을까. 왜 하필 네가 로렌이 되어 버렸냐고.”
저 가느다란 몸이 제 페로몬을 뒤집어쓸 때까지 마킹 하고 싶은 충동이 용솟음쳤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제 소유가 된 여인이다. 한 번 정도는 괜찮지 않겠냐며 5년간 숨겨 왔던 악심이 달콤하게 속삭였다.
“안 돼. 하지 말아요, 제발.”
하지만 가느다랗게 떨리는 로렌의 목소리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던 시커먼 생각을 끌어 내렸다.
“빌어먹을!”
쾅! 도스턴은 안경을 쥐고 있던 손으로 벽을 내리쳤다. 안경알이 와드득 부서지면서 손바닥으로 피가 흘렀으나 도스턴은 고통을 느낄 새가 없었다.
“2층으로 올라가.”
“오라버니, 손이…….”
“2층으로 올라가라고!”
한 번 더 소리를 지른 도스턴은 구겨진 안경테를 힘주어 폈다. 알이 나간 안경을 쓰는 건 우스꽝스럽겠으나 이것이라도 눈에 걸쳐야 했다. 날것일 게 분명한 시선을 깨진 안경알로라도 가리고 싶었으니까.
“알았어요. 알았으니 손은 꼭 치료하세요.”
어깨를 흠칫 떤 로렌은 도스턴의 손을 걱정하면서 후다닥 2층으로 올라갔다.
도스턴은 로렌이 2층으로 올라가는 걸 확인한 뒤 가게를 나섰다. 우산을 쓰고 열댓 걸음을 걸어가던 도스턴은 뒤를 돌았다.
그리고 불 켜진 로렌의 방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묻힌 페로몬 또한 씻고 자거라.”
이 목소리가 로렌의 방까지 들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오라비로서 해야 할 말은 해 주고 싶었다. 미안하다고 사과하지 않은 것은 사내로서의 알량한 자존심 때문이겠지.
‘이 상태로 여관에 가면 또 여자들이 귀찮게 들러붙겠군.’
한꺼번에 많은 양을 흘려서인지 단번에 갈무리되지 않은 페로몬은 약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도스턴은 한숨을 내쉬며 밤거리를 정처 없이 떠돌았다. 우산 아래로 들이친 빗물이 양복바지를 모조리 적실 때까지도 누이동생을 향해 몰아쳤던 페로몬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이봐요, 거기 사연 있어 보이는 멋진 신사분?”
그 페로몬에 홀렸는지 엉뚱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스턴의 멍한 눈동자가 로렌과 비슷한 백금발에 닿았다.
“흐응, 그쪽 향기 때문에 내 기분이 야릇해졌는데, 잠깐 우리 집에 들렀다 갈래요?”
자신을 흰 토끼 수인이라고 밝힌 여자가 도스턴의 우산 안으로 스윽 다가왔다.
“어쩜 망가진 안경을 써도 이렇게 잘생겼을까.”
몸을 배배 꼬면서 가슴을 드러내는 행동에 도스턴은 큭 웃음을 터트렸다. 저딴 여자에게서 로렌을 떠올리다니. 어째서 이렇게 형편없는 사내가 되어 버린 걸까.
“꺼져.”
오늘따라 반듯한 도스턴의 입에선 날카로운 욕설이 자주 흘러나왔다.
“하지만 당신도 이렇게 됐잖아요. 우리 서로 손해는 아닌 것 같은데.”
뺨을 물들인 토끼 수인이 한쪽 무릎을 올려 도스턴의 부풀어 오른 바지 섶을 느릿하게 비볐다.
“손해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여자를 보면 빳빳하던 것도 죽어 버려서.”
도스턴은 제 몸에 찰싹 붙은 토끼 수인의 어깨를 휙 밀어 버리고 가던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동그랬던 눈을 더 동그랗게 뜨고서 황당해했다.
“페로몬을 풀풀 흘리고 다니길래 기껏 상대해 줬더니! 가다 코나 깨져라, 이 싸가지 없는 새끼야!”
토끼 수인이 도스턴의 뒤통수에 대고 꽥 소리를 질렀다. 망설임 없이 걸어가던 도스턴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았다.
“그러게. 가다가 코나 깨지면 좋겠어. 그러면 정신이 좀 들겠지.”
알이 다 깨진 안경을 쓰고 그렇게 말하는 얼굴은 어쩐지 슬퍼 보였다.
* * *
다음 날.
우편국 책상에 팔을 괴고 앉아 있던 샬럿은 벽시계를 힐끔거렸다.
‘비가 많이 와서 그런가.’
하루도 빠짐없이 수요일이면 왕에게 보낼 편지를 들고 오던 로렌이 감감무소식이었다.
보통은 고객을 특별 대우 하진 않지만 로렌은 달랐다. 자기가 죽은 수호신이라는 사이비 교주 같은 말을 하는 여자였지만 샬럿은 그런 로렌이 참 좋았다.
무식하게 센 힘을 당당하게 드러내며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는 것이나 꾸미지 않은 얼굴로 헤실헤실 웃는 점은 샬럿과 정반대였지만 그렇기에 더욱더 로렌에게 마음이 갔달까.
‘기차역에서 무거운 걸 들고 오다가 사고라도 난 거 아냐?’
내 그럴 줄 알았어. 그러니 험한 일은 하지 말고 남자 하나 잡아서 결혼하라니까는!
잘 다듬은 손톱으로 책상을 딱딱 두드리던 샬럿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디 가, 샬럿?”
옆자리 남직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객님 좀 찾으러.”
“고객? 아! 정신이 살짝 이상한 그 여자 수인 말하는구나.”
그러게. 이 시간이면 산더미만큼 짐을 이고 왔어야 했는데 아직도 안 왔잖아?
남직원은 시계를 확인하면서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렇다고 네가 직접 찾으러 나서는 건 좀 아니지 않아?”
“단골손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하다고.”
“하지만 아직 근무 시간인데…….”
“혹시 국장님이 물어보면 나 외근 나갔다고 전해 줘. 자기만 믿을게?”
남직원의 말을 자른 샬럿은 쪽, 하고 손 키스를 날린 후 우비를 걸쳤다.
“다, 다음에 꼭 저녁 식사해 주는 거야!”
얼굴을 붉힌 남직원은 우편국을 나서는 샬럿을 뒤따라가며 외쳤다. 이것 봐. 남자들은 이렇게 쉽다니까? 샬럿은 대답 대신 손을 흔들면서 우편국 뒷문으로 몰래 빠져나왔다.
문을 열자마자 거센 빗소리가 쏴아 몰아쳤다. 바닥 위로 자작하게 찬 빗물을 빗줄기가 때릴 때마다 그 물방울이 사정없이 구두로 튀어 올랐다.
‘하아, 내 드레스.’
지난달 월급을 온통 주고 산 옷자락이 젖어서 짜증이 났으나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로렌의 안위만큼은 이유 없이 확인하고 싶었다.
‘이렇게 가는데 멀쩡하기만 해 봐. 찻집 메뉴를 모조리 얻어먹어 버릴 테다!’
샬럿은 씩씩대면서 짧지 않은 길을 따라 걸었다. 그나마 반듯한 돌을 박아 정비한 인도 덕분에 구두 굽이 푹푹 빠지는 일은 없었다.
오늘따라 잡히지 않는 마차를 구하기 위해 걷다 보니 어느새 중앙 광장이었다. 사고라도 났는지 장비를 든 인부들이 오가며 소란스럽다. 그중 곡괭이를 든 인부가 샬럿에게 소리쳤다.
“이봐요, 아가씨! 이 길은 안 돼. 저쪽으로 돌아가슈!”
낙엽과 쓰레기 따위가 수로를 막아 지대가 낮았던 중앙 광장에 물이 차 버렸다는 설명이 뒤를 따랐다. 로렌과 얽힌 사고가 아니라서 다행이었지만 사고 때문에 여기서 30분은 더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막막했다.
샬럿은 어깨를 늘어뜨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검은 뱀 상단이 운영하는 중앙은행에도 물난리가 났는지 상단 관계자들이 비를 맞으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도움을 청할 만한 사람이 있을 텐데.’
그중 근육이 우락부락한 사내가 눈에 띄었다. 풀어진 셔츠 사이로 가슴 근육을 자랑 중인 사내는 문을 활짝 열어 놓은 마차에 앉아 꿀물을 홀짝이고 있었다. 달콤한 꿀물을 마시며 한 번씩 황홀한 표정을 짓는 것이 알맞게 멍청해 보였다.
‘적당히 호구 같아서 괜찮네.’
샬럿은 그 사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꿀물을 마시던 사내가 화답하듯 헤벌쭉 웃음을 지었다.
“이봐요, 거기 잘생긴 오라버니!”
“누구? 설마… 나?”
사내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자신을 가리켰다. 잘생긴 사내가 본인을 지칭하는 게 아니라고 판단한 걸 보니 멍청하면서도 제법 양심 있는 사내였다.
“그래요, 당신요. 혹시 시간 있으면 요 앞까지 마차 좀 태워다 줄래요? 내가 지금 좀 도움이 필요해서요.”
샬럿은 다 젖어 버린 드레스 자락을 무릎까지 들어 올렸다. 젖은 스타킹으로 싸인 날렵한 종아리가 드러나자 순진한 사내는 안절부절못하면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 버렸다.
“이봐요?”
샬럿이 치마를 더 높게 들어 올리려는 순간, 사내는 맹한 곰처럼 허둥지둥 뛰어나와 샬럿의 치맛자락을 끌어 내렸다.
“알았으니까― 이런 곳에서 치마는 들어 올리지 말아요, 레이디.”
곰처럼 느릿한 특이한 말투. 정말 모든 게 곰탱이 같아서 샬럿은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그사이 사내가 샬럿에게 손을 내밀었다.
“잠시― 실례해도 될까요?”
마차까지 에스코트라도 해 주는 건가. 샬럿이 손을 겹치자 팔이 휙 당겨지면서 몸이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꺅! 샬럿은 눈을 빠르게 깜박거렸다. 정신을 차리니 사내의 넓은 등짝과 바닥이 시야에 들어왔다. 사내가 저를 어깨에 짐짝처럼 올리고서 마차로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봐요,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바닥에 빗물이 이만큼 차서요. 마차까지 걸어가다간 레이디의 치마가 홀―딱 젖어 버릴 거라고요.”
사내는 발을 굴러 첨벙거리며 빗물이 발목 위로 차올랐음을 보여 주었다. 방수 칠을 한 가죽 부츠 덕분에 그의 발은 빗물에도 무탈했다.
“그렇다고 숙녀를 이렇게 냅다 짐짝처럼 짊어지나요?”
“이게 왜요?”
“공주님처럼 들어 줘야죠. 그게 매너잖아요!”
“아― 그런가?”
사내는 멍청한 소리를 하면서도 샬럿을 고쳐 안지 않았다.
그는 샬럿을 마차에 살포시 내려놓은 후 함께 마차에 탑승했다. 그리고 머리를 휘리릭 털어 내자 떨어져 나간 물방울이 샬럿에게 몽땅 튀었다.
“꺅, 이 곰탱이 같은 남자가!”
“이야, 눈썰미가 좋으시네요. 저는 사샤예요.”
사샤가 헤벌쭉 웃으며 축축하게 젖은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내려다보기만 한 샬럿은 얼굴에 튄 물을 닦아 내며 우비 모자를 벗었다.
“…샬럿이에요. 벨파슨 기차역 근처 루즈벡 찻집에 세워 주세요.”
“아― 로렌 양의 찻집!”
“어머? 로렌과 아는 사이인가요?”
“그럼요. 거기 벌꿀 차가 참 맛있는데. 또 마시고 싶네요.”
사샤가 머리를 긁적이면서 헤실헤실 웃었다. 샬럿은 저 곰탱이도 로렌의 단골이었다는 사실에 조금 놀라다가 이 와중에 차를 사 달라고 작업 거는 곰탱이가 제법 부지런하다고 생각했다. 하, 참. 샬럿은 피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뭐, 신세를 졌으니 벌꿀 차 정도는 제가 사 드리는 거로 하죠.”
꼴에 눈구멍은 두 개라서 예쁜 건 알아보네. 샬럿은 머리를 매만지면서 쯧쯧 혀를 찼다. 그런 샬럿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사샤는 벌집 과자를 와그작와그작 씹어 먹으면서 행복해했다.
으― 저 끈적한 건 뭐야. 샬럿이 대놓고 눈살을 찌푸렸다.
“먹고 싶어요? 하나 드릴까요?”
꿀이 묻은 끈적한 손이 벌집 과자를 권했다. 싫다, 정말. 입꼬리를 내린 샬럿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거절을 표했다.
“예의상 권했던 건데― 거절해 줘서 고마워요. 편하게 혼자 다 먹을 수 있겠네요.”
사샤가 진심으로 고마워하자 샬럿의 눈꼬리가 새초롬해졌다. 저 곰탱이, 나사 하나 빠진 거 아냐?
뾰족한 시선이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아도 사샤는 처음부터 끝까지 과자를 먹는 데만 열중했다. 어쩐지 저 미련한 사내에게 진 것 같아서 샬럿은 이유 없이 기분이 나빴다.
마차는 찻집까지 빠르게 달렸다. 이 부근 또한 바닥에 빗물이 흥건했지만 다행히도 중앙 광장보다는 상황이 좋았다.
“갈 때도 마차 좀 부탁할게요, 샤샤 씨.”
“저는 샤샤가 아니라 사샤…….”
“기왕 도와주는 거 확실하게 에스코트해 주면 더 멋있잖아요.”
샬럿이 사샤의 팔뚝을 쿡 찌르면서 사샤의 말을 대충 넘겼다. 보통 사내를 뜯어먹을 땐 손 한 번쯤은 잡아 주자는 주의였으나 꿀 범벅인 저 끈적한 손엔 닿기도 싫었다.
“아― 그런 게 멋있는 거구나.”
알렉은 그런 거 안 해도 여자들이 줄을 섰던지라 모르고 있었다. 사샤는 새로운 걸 배웠다면서 흡족해했다.
‘저런 호구 같은 놈이 어떻게 상단에 취직한 거지?’
아무래도 상단주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니 얼마 전에도 저를 농락한 여인을 찾는다면서 웬 사기꾼 찾는 전단지를 사방에 붙였겠지. 그런 놈이 어떻게 최고의 상단을 운영하는 거야?
샬럿은 끌끌거리면서 상단 마차에서 내렸다. 불 하나 켜지지 않은 찻집은 닫혀 있었다.
“로렌, 안에 있어?”
샬럿이 출입문을 흔들며 가게 주인을 불렀다. 잠긴 문은 열리지 않았다.
“로렌!”
여러 번 그녀를 불렀으나 반응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할 수 없네. 문을 쾅쾅 두드리던 샬럿은 잔머리를 고정하던 실핀을 빼서 열쇠 구멍을 쑤시기 시작했다.
“저기요, 레이디? 그건 좀도둑이나 하는― 얼라리?”
덜컥. 사샤의 걱정이 채 끝나기도 전에 출입문은 손쉽게 열렸다. 사샤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럼 여기서 기다려요. 갈 때 태워 주기로 한 거 잊지 말고요?”
샬럿은 실핀에 살짝 침을 바른 후 그걸 다시 머리에 꽂아 넣었다. 출입문을 열어 찻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음걸이는 열쇠 구멍을 쑤시던 사람답지 않게 우아했다.
“로렌?”
샬럿의 구두 굽 소리가 적막했던 실내를 또각또각 울렸다. 찻집은 지나치게 정갈했다. 오늘 영업한 흔적이 없는 것처럼.
“로―렌!”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샬럿이 더 큰 소리로 로렌을 불렀다. 그 순간 위층에서 끙끙 앓는 소리가 들렸다. 샬럿은 곧장 소리가 나는 곳으로 뛰어갔다. 로렌은 침대 옆에 쓰러져 끙끙 앓고 있었다.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달콤한 향기가 안에서 진동했다.
“세상에, 몸이 불덩이잖아!”
샬럿은 로렌의 상태를 살피면서 식은땀을 닦아 주었다. 당장 의원을 찾아가야 하는 게 분명했다.
“이봐요, 샤샤 씨! 도와줘요!”
로렌을 옮기려면 사내의 도움이 필요했으나 사샤가 보이지 않았다. 이 곰탱이는 어디로 간 거야? 샬럿이 다급하게 창밖을 살폈다.
그는 찻집 밖에서 네모난 마도구를 가지고 누군가에게 연통하고 있었다. 돌판으로 된 마도구에 글을 쓰자 글씨들이 허공에 둥실 떠오르더니 어딘가로 휙 날아갔다. 벌집 과자를 씹어 먹던 멍청한 얼굴이 웬일로 진지했다.
“지금 거기서 뭐 해요? 들어와서 좀 도와 달라고요!”
“저는 들어가면 절―대 안 돼요, 레이디.”
“왜죠?”
“그, 암컷 페로몬이 너―무 진해서요. 아마도 발정기가 시작되는 모양이에요.”
발정기라고? 샬럿은 로렌의 상태를 살폈다. 발그스름한 볼과 높은 체온, 식은땀, 묘한 향기. 평범한 인간인 샬럿은 수인의 발정기를 본 적 없었으나 이런저런 소문은 들었기에 증상은 대충 알고 있었다.
“그럼 마차까지만이라도 업어 줘요.”
“안 돼. 안 돼요. 내가 발정기의 로렌 양을 섣불리 만졌다가는 알렉에게 뼈도 못 추릴 거라고요.”
“알, 누구요?”
아차. 사샤는 해선 안 될 말을 한 것처럼 후다닥 입술을 틀어막고서 화제를 돌렸다.
“그래도 연통을 넣었으니 곧 마차가 올 거예요.”
“방금 그 마도구로 의원을 부른 거예요?”
샬럿은 사샤가 들고 있던 메모지만 한 돌판을 응시했다. 사샤는 그걸 안주머니에 넣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비슷하죠. 로렌 양을 낫게 해 줄 사람에게 보내는 거니까요. 이 뒤는 제게 맡겨 주세요.”
사샤가 조금 의뭉스러운 대답을 하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당신을 어떻게 믿어요?”
샬럿은 살쾡이처럼 털을 세워 사샤를 경계했다. 저 사내가 로렌과 아는 사이라고 해서 발정기인 그녀를 남에게 함부로 맡길 순 없었다.
“아― 제가 아직 소개를 아직 안 했군요.”
사샤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품에서 명함 하나를 꺼냈다. 사샤가 아래에서 휙 던진 명함은 2층 창문을 넘더니 샬럿의 눈앞으로 팔랑팔랑 떨어졌다. 샬럿은 끈적한 꿀이 묻은 부분을 피해 두 손가락으로 명함을 잡았다.
[검은 뱀 상단 부단주, 사샤 베어.]새까만 종이에 금색 뱀 각인이 새겨진 명함 위에는 저 미련곰탱이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직함이 쓰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