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Snake Finds the Wolf Who Played With the Snake RAW novel - Chapter 7
6. 각인이 해제되지 않았다 (1)
가구를 대충 구석으로 밀어 둔 응접실은 공터처럼 휑했다. 그 한가운데에는 푸른 가루를 뿌려 그린 마법진이 있었고 아홉 명의 용족이 정교한 자수가 수 놓인 하늘색 실크 로브를 뒤집어쓴 채 서 있었다. 그중 둘은 알렉의 부모였고 나머지는 일족의 장로였다.
저택으로 복귀해 그들의 수발을 들던 하인들은 벽에 바짝 붙어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용은 그 존재만으로도 상대를 눌러 버리는 아우라를 풍기는 족속. 그나마 용 중에서 그 기운을 적당히 조절할 수 있는 건 인간들 사이에 섞여 생활한 알렉 정도였다.
숨 막히는 침묵이 계속되었다. 장로 중 하나가 품에서 정교한 회중시계를 꺼내더니 이를 씹었다.
“각인을 해제해 달라고 먼저 요청한 주제에 늦는 것입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거처에서 기다리는 게 나았습니다.”
장로는 알렉의 아버지를 향해 불만을 토했다. 저택에 꽁꽁 감춰 둔 약점이나 중요한 비밀이 있을까 싶어서 기습적으로 찾아왔으나 기대했던 것이 없어서 실망스럽던 차였다.
‘설계도 하나 찾지 못한 무능한 자객들이 알렉의 목이라도 쳤더라면 나았을 텐데.’
하다못해 비실비실하던 놈이 지금처럼 강대해진 비결이라도 알았더라면 이토록 화가 나진 않았을 것이다.
장로는 로브에 튄 피 몇 방울을 대충 털어 내면서 혀를 끌었다. 이곳에서 얻은 유일한 성과는 저택 지하에 갇혀 있던 자객들을 정리해 후환을 없앤 것이다.
“날개도 없이 태어나 젠카이저의 이름을 더럽혔던 놈이오. 그 반푼이에게 무얼 더 바라겠소.”
알렉의 아버지는 들고 있던 작은 늑대 조각상을 바닥에 툭 던졌다. 그러자 낡은 조각상이 바닥에 떨어지며 몸뚱이가 깨져 나갔다.
‘본디 용은 가장 귀중한 것을 제 둥지에 감춰 두는 습성이 있거늘.’
웬 볼품없는 조각상 하나가 귀하게 보관되어 있길래 중요한 비밀이라도 있는 줄 알았더니만 그저 평범한 돌덩이였을 줄이야.
‘하기야 날개도 없는 놈에겐 애초에 용의 습성이 없었는지도 모르지.’
뱀의 습성이라면 모를까.
“이런. 제가 늦은 겁니까?”
그때 응접실 문이 활짝 열리며 알렉이 성큼 들어왔다. 로렌의 손을 꼭 붙들고 걸어오는 모습은 퍽 다정해 보여서 오늘 각인을 해제하는 사이처럼 보이지 않았다.
‘건방진 자식.’
알렉의 아버지가 입을 열어 그를 꾸짖었다.
“일족 회의에서도 보였던 무례함을 아직도 못 버렸구나, 알렉산더.”
깊이 눌러쓴 로브가 얼굴 절반을 가리고 있었기에 잔뜩 구겨진 표정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으나 실내를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엔 노기가 가득했다.
“마지막이 될 제 반려에게 식사 한 끼는 제대로 대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알렉은 제 옆에 서 있는 로렌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웃음이 절로 흘러나올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은 용을 마주하면 벌벌 떨기 바빴는데 그녀는 너무도 담담했으니까.
알렉은 방구석에 박혀 어깨를 잔뜩 움츠린 사샤를 한심하게 쳐다보다가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자세로 일족을 마주한 로렌을 응시했다.
‘과연 내가 각인한 반려답게 용맹하달까. 어여쁘군.’
손수 입힌 하늘색 드레스 또한 틀리지 않은 선택이었다. 다음엔 노란색으로 준비해 볼까 고민하던 알렉은 입술 끝을 꿈틀거렸다. 각인을 해지하기 위해 마주한 자리에서 이딴 생각을 하다니. 알렉은 그녀와의 결속이 마지막임을 한 번 더 상기했다. 그러자 별다른 노력 없이도 비쭉 올라갔던 입술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지금 시작하실 겁니까.”
알렉이 일족을 둘러보며 물었다. 저 구경꾼 중에 형님이 없는 걸 보면 며칠간 폭우를 쏟아 내느라 뼈에 구멍이라도 난 모양이었다.
“하여간에 뻔뻔하기 짝이 없군. 고개를 숙여 요청해도 모자랄 판에!”
“이래서 실패작은! 쯧쯧.”
뜬금없는 타박이 돌아왔다. 로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같은 일족끼리 서로 아껴 주지는 못할망정 대놓고 알렉을 무시하는 언사를 내뱉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알렉이 발을 굴러 쿵 소리를 냈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일족들 발아래 부서진 작은 늑대 상에 박혀 있었다. 서로 그것에 관해 묻고 답하진 않았으나 묘한 긴장감이 오갔다. 소란스럽던 실내가 일순 조용해졌다.
“위대하신 장로들의 불만이 이토록 많다면, 거래를 도로 물릴까요?”
화가 난 눈동자 아래로 웃는 입술은 섬뜩했다. 그 기세에 눌리지 않으려 장로는 이를 물었다.
“펴, 평범한 늑대 수인 따위에게 각인해 놓고도 기고만장한 것이냐!”
“그럼 일족의 실패작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에게 각인하리라 생각하신 겁니까.”
“윽!”
훈수를 늘어놓던 장로가 입술을 꾹 물었다. 알렉의 아버지가 장로들을 진정시켰다.
“더는 이곳에 있기도 싫군. 얼른 끝내고 돌아가지.”
아버지가 알렉에게 신호를 보내자 알렉은 로렌의 손을 잡고 마법진 안으로 들어갔다. 그 동작엔 망설임이 없었으나 그의 마음엔 마지막까지도 각인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었다. 이게 맞나. 아니 이게 맞아. 조금 전까지만 해도 굳게 먹었던 결심이 마지막에 와서 비틀거렸다.
그때 로렌이 알렉의 손을 맞잡았다. 긴장한 건지 그녀의 작은 손바닥은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시선을 정면에 두고 있던 알렉은 로렌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혹시 무서워, 달링?”
“아니.”
“흐음, 그런 것 치고는 손을 꽉 잡는데?”
“널 잡아 주는 것이다.”
“…뭐?”
“그냥.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말이다.”
로렌이 말을 마치자마자 주문을 읊는 용들의 목소리가 들렸고 마법진에서 뻗어 나온 푸른 빛이 둘을 감쌌다.
알렉은 로렌에게 무언가를 되물으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주문 때문에 잘 듣진 못했지만 ‘혼자서도 무너지지 말거라’라고 그녀가 속삭인 것도 같았다.
정면을 응시하던 알렉의 눈동자가 파르르 흔들렸다.
누가 누구를 의지하기 위해 잡은 건지 모를 남녀의 손은 각인 해제가 끝날 때까지 떨어지지 않았다.
* * *
며칠 뒤.
“로렌, 로렌?”
멀리서 저를 찾는 목소리가 들렸으나 로렌은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정신 차려, 로렌!”
화려한 손톱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그제야 로렌은 흐릿하던 시야에 힘을 주고 앞을 응시했다. 기차역에서 의뢰받은 작은 소포들을 샬럿에게 건네고서 잠시 넋을 놓은 모양이었다.
소포를 정리한 샬럿이 로렌의 팔을 잡아끌고서 우편국을 나왔다. 가느다란 빗줄기 때문에 현관 지붕을 벗어나진 못했으나 주변에 사람이 없어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긴 충분했다.
“요즘 이상한 거 알아, 로렌?”
“내가?”
“그래. 찻집에서도 넋을 놓고 있잖아. 살도 좀 빠진 것 같고.”
“그랬구나.”
로렌은 씁쓸하게 웃으며 툭툭 떨어지는 빗방울을 응시했다. 비를 볼 때면 언제나 기분이 좋았었는데 요즘은 비를 맞던 알렉의 모습이 불현듯 떠올라 심장이 불편했다.
‘에블린처럼 심장에 병이 생긴 건가.’
로렌은 답답한 명치를 주먹으로 꾹꾹 눌렀다. 그렇다고 해서 욱신대는 통증은 쉬이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샬럿이 로렌의 귀에 속삭였다.
“혹시 그 남자랑 헤어졌어?”
“나, 남자라니!”
화들짝 놀란 로렌이 어깨를 들썩거렸다.
“하여간에 시치미도 못 떼는구만.”
샬럿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 눈은 못 속여, 로렌. 검은 뱀 상단 간부랑 사귀었던 거 맞지? 누구였어? 어디 지부장인가? 아니면 은행 쪽? 이름이 알 뭐시기였던 것 같은데.”
호기심이 동한 샬럿이 질문을 쏟아 냈다.
“아니다. 오해야.”
로렌은 붉어진 뺨을 손등으로 누르면서 고개를 저었다. 사귀다니. 사고처럼 들이닥친 첫 만남이었고 그때 엉켜 버린 실타래를 이제야 풀었을 뿐이다. 이제는 아무 사이도 아닌 관계.
‘이거야말로 내가 원하던 바였잖아.’
그런데 한 번씩 심장에 살얼음이 끼듯이 초조해졌다. 로렌은 마른침을 꼴깍 삼키면서 시선을 돌렸다.
“설마… 질 나쁜 사내에게 걸려서 사기라도 당한 거야? 누구니? 딱 말해!”
웬만한 사내의 이름은 다 안다는 샬럿이 소매를 걷으면서 씩씩 콧김을 내뿜었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 난 이만 가마.”
로렌은 우비용 망토를 머리에 쓰고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잠깐, 로렌. 그냥 가려고?”
“왜 그러느냐.”
“오늘 수요일이잖아.”
샬럿이 로렌에게 빈손을 내밀었다. 무얼 달라는 것이지? 로렌이 잘 다듬어진 손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요일마다 국왕 전하께 보내는 편지 말이야. 설마 잊었어?”
“아!”
로렌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벌어진 입을 손으로 막았다. 세상에, 한 번도 거른 적 없던 편지를 그만 깜박하고 말았다.
샬럿의 눈이 가늘어졌다.
“대체 어떤 사내야? 얼마나 매력적이길래 우리 로렌의 정신을 저렇게 쏙 빼놓은 거냐고.”
“사, 사내는 무슨. 요즘 정신이 없어서 그래. 내일 다시 가져오겠다.”
“웬만하면 오늘 가져와. 내일부터 닷새간 우편국 쉬거든.”
“무슨 일이지?”
“곧 국혼일이잖아. 왕께서 신성제국 황녀와 결혼하시는 날.”
국혼일. 막스웰이 신성제국 황녀와 결혼하는 날이었다. 닷새간은 귀족 평민 할 것 없이 성대한 축제가 벌어질 것이다.
“이번 결혼으로 우리 왕국이 제국의 지지를 받아 강해질 거래. 왕명을 듣지 않던 부패한 지방 귀족도 싹 밀려날 거라던데.”
샬럿은 우편국장에게 들었던 정보를 늘어놓았다. 하지만 로렌의 귀에는 뒤이어진 말 따윈 들어오지 않았다.
“막스웰이 또… 결혼을 하는구나.”
로렌이 스카프로 가린 목덜미를 만지작대며 중얼거렸다. 그의 결혼을 지켜보는 건 두 번째가 되려나. 이번에는 그의 결혼을 울지 않고 지켜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를 사랑했던 순수한 마음은 지워진 지 오래였으니.
그때 샬럿이 허둥지둥 로렌의 입을 막았다.
“미쳤어, 자기? 전하의 존함을 함부로 올리면 어떡해! 요즘 분위기 살벌하다고.”
왕권 강화를 위하여 수호신이 죽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국교까지 바꾼 왕이었다. 그런 왕의 이름을 함부로 언급하다 걸리면 치안대에 끌려가 험한 꼴을 당할 것이다.
“깜박했구나. 조심하마.”
“말만 그러지 말고 신경 좀 써. 매번 그럴 때마다 애 떨어질 것 같으니까.”
후우, 한숨을 내쉰 샬럿은 피아노를 치듯 손가락으로 허공을 두드리면서 화제를 돌렸다.
“편지는 오늘 다시 가지고 올 거야?”
“…아니.”
로렌은 고개를 저었다. 막스웰을 직접 만나고 싶은 마음은 여전했으나 오늘만큼은 그리 애쓰고 싶지 않았다.
“어머나? 정말?”
“그래. 다음에 꼭 가지고 오마. 오늘 고마웠어.”
로렌은 샬럿에게 손을 흔든 뒤 현관을 나섰다.
기름을 먹여 반질반질한 망토 위로 가느다란 빗줄기가 방울방울 떨어졌다. 로렌은 흐릿한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걸음을 옮겼다.
평소보다 한산한 거리엔 여기저기 흙탕물이 고여 있었고 고개를 꺾어 걷던 로렌은 한 번씩 그것에 풍덩 빠지기도 했다. 하늘을 보고 걸어서 제 발이 진창에 빠지는 걸 알지 못하는 걸까, 진창에 빠져서도 하늘을 보고 있었던 걸까.
로렌이 더러워진 부츠를 확인하면서 피식 웃을 때였다. 저 멀리 광장을 가로지르는 새까만 고급 마차가 시야에 들어왔다.
외국에서 가져온 최고급 흑단 나무로 만든 마차라 했던가. 로렌은 비가 오는 날씨에도 윤이 반질반질한 마차를 가만히 응시했다. 저것은 알렉의 마차였다.
“오랜만이구나.”
로렌은 작은 소리로 멀어져 가는 마차를 향해 인사했다. 고작 며칠 못 봤을 뿐이지만 몇 달은 떨어져 있었던 것처럼 그의 존재가 반가웠다.
“당신은 나를 지우고 잘 지내고 있는가.”
누군가에게서 잊히는 건 익숙한 일이었다. 심장이 콕콕 쑤시는 이 통증도 버티다 보면 곧 무뎌지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젠 당신을 속박하는 것도 없으니 바보처럼 비를 맞고 다니진 말거라.”
로렌은 점점 작아지는 마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자리를 지켰다. 그사이 부츠 위로 어지러이 묻어 있던 흙 얼룩은 떨어지는 빗물에 씻겨 조금은 흐릿해졌다.
『검은 뱀을 농락한 늑대를 찾습니다』 2권에서 계속
검은 뱀을 농락한 늑대를 찾습니다 1권
전자책 발행 : 2023년 1월 2일
지은이 : 로퓨어
펴낸이 : 권영미
펴낸곳 : (주)가람미디어허브
주소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선유로 9길 10 문래 SK V1 center 718호
출판등록 : 2020년 7월 22일 (제2020-000105호)
이메일 : garam@garammediahub.com
ISBN : 979-11-409-0448-8 05810
정가 : 3,7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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