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ue Guard RAW novel - Chapter 2
1.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
“예에?”
민영은 경악한 얼굴로 눈앞의 최 경사를 쳐다보았다, 방금 들은 충격적7 인말에 머7대리 위로 따갑게 내리쬐는 뙤약볕조차 잊을 만큼 얼어 버렸다.
“지,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말조차 잘 나오지 않을 정도로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그런 민영의 심정을 다 이해한다는 듯 최 경사는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너하고 나하고 이번에 망망해수욕장 여름해양경찰서 근무 나가게 됐 다. 넌 좀 빼 주자고 말했는데 이번 여름해양경찰서에는 꼭 여자 경찰이 하나 나가야 한다는 거야. 그런데 왜 굳이 너여야만 하느냐고, 넌 작년에도 여름해변에서 근무를 했었으니까 이번에는 좀 빼 주자고 했는데……“
미안한 듯 쳐다보는 최 경사에게 민영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여 보
였다.
그래, 난 작년에도 했잖아. 그러니까 이건 말이 안돼.
“그런데도 먹히지가 않아. 네가 작년에 익사할뻔한 시장 부인을 구출해 줘서 상까지 받았잖아. 그 덕에 위에서 널 위에서 주시하고 있는 모양이야. 게다가 아직 홍보가 미약한 122해양긴급신고센터의 홍보를 위해서라도 이번 여름해양경찰서의 활약이 아주 중요하단 말이지. 대외 흉보용으로도 네가 딱이라는 거야.”
위에서 날 주시해? 그래, 물론 주시하겠지. 재 이용해서 뭐 좀 건질 것 없나, 해서 잔머리나 굴렸겠지.
“말도 안 돼……“
민영은 어이없는 상황에 말문이 닫혀 버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작 년에 그 개고생을 했는데 올해에 또 그 빌어먹을 일을 해야 한다니!
민영은 죽을상을 하며 최 경사를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전 못해요. 작년에 저 초주검되는 거, 보셨잖아요. 저, 그때 5킬로나 빠 졌어요. 저, 살 빼고 싶은 생각 요만큼도 없는 사람이에요. 돈 주고 먹어 서 붙은 살, 왜 빼요? 이런게 어딨어요? 작년에 근무 나갔으면 됐지, 또 나가라니요. 한번도 여름근무 안 해 본 사람도 많은데 왜 하필 또 저에 요? 전 싫어요. 싫다고요!”
생각만 해도 치가 떨렸다. 그 여름 뙤약볕 아래에서 해변을 순찰하고 사람들에게 치이고, 술주정뱅이들과 상대하느라 녹초가 되는 것도 모자라 안전요원들을 자기들 심부름꾼쯤으로 치부하는 정신 빠진 놈들을 또 다시 상대할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민영은 눈에 힘을 주며 이를 빠득 갈았다. 그리고 막무가내로 떼를 쓰 기 시작했다.
“싫다고요! 싫어요! 소장님한테 정식으로 건의할 거에요. 저, 또 거기 가라고 하면 진짜 경찰복 확 벗어 버릴 거라고요!”
털썩!
파출소 뒷마당에 있는 정자에 힘없이 주저앉은 민영은 조금 전 동갑내 기 친구인 황지연 경장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야! 아닌 말로 네가 안 가겠다고 우기면 어쩔 건데? 개기면 어쩔 거나 고? 위에서 까라는데 별수 있어? 네가 돈이 있냐, 힘이 있나, 그렇다고 빽이 있냐? 쥐뿔도 없는 게 위에서 가라고 하면 가는 거지, 아무 소용도 없는 반항은 왜 해?”
밉지만, 황 경장 말이 틀린 건 아니다. 뭐 하나 내세울 것도 없는 일개 파출소 순경이 뭔 재주로 위에서 내린 명령을 불복하겠는가! 빌어먹을!
“그냥 아무 소리 말고 순순히 가. 솔직히 소장님이 너 아니면 누굴 보내 겠어? 이제 갓 임용된 김 순경을 보내겠어? 얼빵한 이 순경을 보내겠어? 그렇다고 만날 사고나 치는 박 순경을 보내겠어? 그래도 너니까 믿고 가 라는 거야. 그래도 네가 수상인명구조 자격증까지 있는 경찰이잖아. 혹 시 알아? 이번 여름안전요원으로 근무하고 나면 인사고가에 고평가될지. 너, 빨리 승진해야 한다며? 그러니까 그냥 찍소리 말고 가!”
나쁜 년! 친구라는 년이 편은 되어 주지 못할망정 불난 집에 기름통을 들이붓는 소리만 하고 자빠졌다. 내가 뭐, 수상인명구조 자격증을 이렇게 써먹으려고 딴 줄 아나? 해경 시험 볼 때 혹시나 가산점이라도 붙을까 싶어서 따놓은 건데 이게 이렇게 내 발목을 잡을 줄 누가 알았겠냐고!
물론 황 경장 말이 구구절절 다 옳은 말이지만 그래도 ‘우리 소장 나쁜 놈, 지독한 놈, 편협한 놈‘ 이런 욕이라도 해 주면 안 되느냔 말이다. 비록 뒤늦게 순경 시험에 합격해 새파란 놈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는 있지만 그래도 내가 저하고는 고등학교 동창인데 어떻게 그렇게 매몰차게 말을 하느냔 말이다. 못된 것!
“후우”
한숨이 절로 나온다. 해안가에 위치한 파출소와 출장소는 여름 한철 몸살을 앓는다. 굳이 해변이 아니라도 날이 더워지면 크고 작은 사건 사고 들로 내륙에 근무하는 해경도 쉴 틈이 없었다. 그런데 해변은 어떻겠는 가. 그저 노는 것을 목적으로 온 사람들은 즐기는 것에 빠져 스스로의 안전에 소홀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곧잘 위험에 빠진다. 그러니 한시도 숨을 들릴 수 없는 곳이 바로 여름철 피서지 근무였다.
“말이나 들어 처먹어야 말이지.”
중얼거리며 새어 나오는 말이 곱게 나오지 않는다. 물론 가족들이나 연 인들이 오붓하게 여행 와서 안전하게 즐기고 가는 사람들에게는 불만이 없었다. 그런데 꼭 어딜 가나 진상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술 처먹고 물에 뛰어드는 놈, 같이 온 여자친구한테 잘 보이려 무모하게 안전선을 넘어 가는 놈, 낚시 삼매경에 빠져 자기가 썰물에 떠밀려 내려가는지도 모르는 인간들……어쨌든 여름해수욕장은 온갖 인간들로 넘쳐 나는 천태만상의 현장이었다. 바로 그런 곳에 또 파견이 되게 생긴 것이다! 작년에 이어 또!
“그놈의 시장 마누라를 구해 주는 게 아닌데I”
갑자기 민영은 주먹을 불끈 쥐며 파르르 떨었다. 보기에도 심히 부담스 러운 몸매로 비키니를 쫘악 입어 주셔서 온갖 민망한 자태를 다 드러내 시는 것도 모자라 그 큰 엉덩이를 커다란 튜브에 걸치고 망망대해를 향 해 열심히 팔을 저으시더니 결국은 안전 경계선을 넘어 둥실둥실 떠내려 가지 않았는가. 다행히 그녀가 타고 있던 순찰정이 마침 그 옆을 지나다가 겁에 질려 바다에 빠져 버린 그 사모님을 구해 낼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사건이 이렇게 자신에게 시련을 줄줄은 정말 몰랐다.
구해 낸 사람이 다름 아닌 대한시 시장 사모님이라는 이유로 그녀는 표 창장까지 받았고 그해, 여름해양경찰서의 영웅으로 추대 받았다. 얼마나 큰 사건으로 확대되었으면 지역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일굴까지 실렸겠 는가.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그 이후로가 문제였다. 그날 이 후로 대한해양경찰서에서는 홍보 관련 행사만 있으면 그녀를 불러내서 이것저것 시켜대는 통에 아주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 그저 조용히 살고 싶은 그녀에게는 절대로 달갑지 않은 해였다. 그 지긋지긋했던 여름이 가고 이제야 좀 잊을 만하다 했더니 ……
‘대외 흉보용으로도 네가 딱이라는 거야.’
빌어먹을, 내가무슨 현수막이야? 찌라시야? 왜 뻑하면 날 홍보용으로 써먹느냐고오!
탁, 덜그럭 .
석 달째 읽고 있는 를 상자 속에 툭 던져 넣고 아침 회의때II 낙서 비슷하게 끼적인 것 외에는 별로 쓴 적이 없는 수첩도 던져 넣었다. 두어 달간은 주인 없이 지낼 책상을 정리하며 간단히 짐을 싸고 있는데 누군가 뒤로 슬쩍 다가서는 것이 느껴진다.
“뭐 해?”
민영은 뒤를 돌아보며 인상을 썼다. 얄미운 황 경장이다.
“보면 몰라?”
점심 식사 후 짧은 휴식 시간를 즐기느라 사람들은 모두 밖으로 담배를 태우러 나간 뒤인지라 파출소는 팅 비어 있었다. 그 덕에 민영은 직급으 로나 호봉으로나 자신보다 훨씬 위인 황지연 경장을 친구로 대할 수 있 었다.
“너 그 얘기 들었어?”
웃음가 잔즉 묻어나는 지연의 질문에 민영은 시큰둥한 얼굴로 대꾸했다
“뭔 얘기? 내가 해변으로 파견 나가게 된 거 취소된 소식 아니면 나한테 그 어떤 감흥도 기대하지 마라.”
“취소된 건 아니지만 네가 들으면 감흥 좀 느낄걸?”
민영은 재있어 죽겠다는 얼굴로 속닥거리는 황 경장을 찌릿 노려보았 다.
“넌 뭐가 그렇게 재밌냐?”
그러자 지연이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대꾸한다.
“내가 언제 재밌댔어? 난 그냥 이 상황이 흥미로울 뿐이야.”
여우 같은 년! 저것도 동창이라고 만나서 그렇게 반가워했다니 내가 미친년이다!
민영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쏘아붙였다.
“나, 지급 바쁘거든? 내일부터 안전교육 받으러 가려면 오늘은 일찍 퇴근해서 푹 쉬어야 해. 넌 잘 모르겠지만 안전교육, 그거 사람 잡는 교육 이거든. 마네킹 같은 거, 물에 휙 던져 놓고 목숨 걸고 구해야지, 호루라 기 얼마나 세게 불 수 있는지 그 끝을 시험해 봐야지, 또 시끄러운 해수 욕장에서 목청껏 소리를 지르려면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생달걀 먹어 둬 야 한단 말이다. 네가 이런 안전교육에 대해 뭘 알기나 해?”
“그래! 그거 말이야. 그 안전요원으로 가는 거, 그거!”
갑자기 흥문하는 지연를 보며 민영은 더욱 인상을 썼다.
“뭔 소리야?”
“빅뉴스 하나 알려 줄게.“.
“빅뉴스?”
그다지 기대하지 않는다는 얼굴로 민영은 지연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지연은 무슨 대단한 뉴스를 전해 주기라도 하는 듯 흥분한 표정이다.
“이번에 네가 파견 나가는 해수욕장 안전요원에 누가 또 있는지 알아?”
“최 경사님,”
무슨 그런 당연한 걸 묻느나는 식으로 민영이 즉각 대답하자 지연이 인 상을 썼다.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내가 최 경사님을 두고 이렇게 흥분하 겠어? 최 경사님하고 너 빼고 말이야. 나머지, 또 다른 누가 가게 될지 아느냔 말이야,”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다른 파출소나 출장소에서 애먼 경찰 두어명 차출하겠지. 그것도 아니면 저기 높은 경찰서에서 두어 명 차출하겠지.”
갑자기 지연이 민영에게 바짝 다가섰다. 민영은 흠칫 놀라며 몸을 뒤로 뺐다.
“얘가 왜 이래?”
“내가 방금 경찰서 해상안전과에 근무하는 동기하고 통화했는데 …… ”
민영은 갑자기 불안해졌다. 은근하게 낮아지는 지연의 목소리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놀라지 마라.”
“도대체 뭘 갖고 그래? 말할려면 빨리 해! 뜸 들이지 말고!”
민영이 옥박지르자 지연이 재빨리 말을 쏟아냈다.
“그 애 말로는 이번에 너하고 같이 근무하게 된 안전요원 두명이 해양특수기동대원이란다.”
“뭐어!”
놀라서 동그랑게 눈을 치뜨는 민영을 보며 지연이 더욱 키득거리며 웃었다.
“아직 놀라기는 일러. 그 사람들이 왜 해수욕장 안전요원으로 오는지 알게 되면 더 기함할걸? 그 대단한 사람들이 무슨 이유로 여름 한철 운영 되는 해수욕장 근무로 오는 거겠어?”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민영이 흥분하자 지연은 더욱 신이 나서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그게 바로 빅히트야. 그 사람들, 한우리함에서 특수기동대로 활동하는 사람들이야. 한무리함이 보통 함정이야? 해군에서 보유한 함정 중에 가 장 큰 함정에 속하는 5천 톤급 아니나. 동해 바다를 지키는 함정 중에서 도 최고의 함정인데 그런 함정에서 기동대로 활약하는 사람들이 어떤 사고를 쳤기에 여기까지 ?겨 왔는지 궁금하지 않아?”
“궁금해. 그것도 무지하게.”
이건 말이 아니었다. 어이가 없어 기가 차는 신음이었다. 민영은 오만 가지 인상을 쓰며 지연을 쏘아보았다.
“그러니까 네 얘기는 뭐야? 해양특수기동댄가 뭔가 하는 인간들이 무슨 큰 잘못을 해서 징계를 받았는데 그 징계가 바로 여름해양경찰서 파견근무라는 겨야?”
그러자 지연이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참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나쁜 년! 다른 건 몰라도 나의 불행이 저년의 행복인 것만은 분명하다.
“무슨 잘못인지는 나도 잘 모르는데 어쨌!든 대단한 꼴통인가 봐. 동기 말에 의하면 경찰서 높은 곳에 있는 사람들도 그 강 경산가 하는 남자라면 고개를 흔든대. 쇠고집에 똥고집에 막가파고 성질은 무지 더럽대.”
“그런 놈을 뭐 하러 데리고 있어? 당장 짤라 버리지.”
정말 이해되지 않는다는 투로 믈었다. 그러자 지연이 가는 어깨를 으쓱 들어 올렸다.
“낸들 아나. 그 모든 꼴통 짓에도 불구하고 능력이 좋은가 보지. 아니면 뒷배가 좋던가. 이번에도 옷 벗기자고 덤비는 높으신 분들이 하나둘이 아니었다는데 구사일생으로 파면만은 면한 모양이더라.”
“그래서? 파면만은 면하고 징계를 받은게 결국 내가 근무하게 될 해수욕장 근무야?
정말 어이가 없어 성난 콧김만 쏟아져 나몬다. 하필 왜 내 구역이냐고!
“바로 그거지. 해양경찰대학 졸업에 특수기동대 팀의 팀장으로까지 근 무했으니 그 목이 얼마나 꼿꼿하겠어? 게다가 지위도 경사라던데, 최 경 사님이나 널 저기 아래에 사는 벌레 취급이나 하는 거 아닌가 몰라.“
하!
민영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 안 그래도 힘든 해수욕장 안전가이드 노릇을 할 걱정이 태산인데 덤으로 잘난 체하는 기동대 놈들 비위까지 맞춰야 한다니 ……이놈의 팔자는 왜 이 모양이란 말인가!
“쯧쯧쯧, 네 기구한 운명에 내 동정심이 끓는다, 에이. 좋다! 기분이다. 내가 너의 그 어두운 인생 터널에 한줄기 빛을 쏘아 주마.”
저년이 뭐라고 씨부렁거리던 민영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암울한 자신의 인생이 그저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
“너. 잘하면 이번 기회에 승진할 수도 있어.”
순간, 민영의 눈이 빠르게 돌아갔다. 참으로 재빠른 반사 속도였다. 생 존을 위한 처절함마처 느껴진다.
“뭐? 무슨 소리야? 승진이라니?”
“깔깔깔. 얘가 급하긴 급한가 보네. 하긴, 남들보다 한참 늦은 나이에 겨무 순경 배지 달았는데 얼른 진급하고 싶겠지. 내가 그 마음 충분히 헤아린다.”
민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지연을 다그치기 시작했다.
“뭔 소리야? 승진이라니? 알아듣게 설명해.”
민영이 다그치든지 말든지 별로 급할 것이 없는 지연은 느긋하게 손톱을 후후 불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작년에 네가 구해줬던 그 시장 사모님 말이야.”
“그 사모님이 왜?”
“그 사모님이 이번에도 네가 근무하게 될 망망해수욕장에 휴가 가신단다.”
민영은 못 알아듣겠다는 듯 인상을 썼다.
그 시장 사모가 휴가를 어디로 가든 내 승진과 뭔 상관인가?
그 둔한 시장 사모는 그녀의 고달픈 인생에 무게를 더했으면 더했지, 절대 가볍게 해 줄 인물은 아니었다.
“그게 뭐? 그 사모님 휴가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인데?”
“쯧쯧,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들어서야……그 사모님 취향이 뭔지 알아? 그 튼튼한 몸을 튜브에 끼우시고 유유히 파도를 타시는 겨야. 망망해수욕장에서 근무했던 사람들은 다 알아. 작년에 너한테 구조되기 전까지는 그래도 물에 빠진 적은 없었지만 이번에는 또 모르지, 어떻게 될지.”
“그래서? 그래서 어찌라고? 그 사모님이 물에 빠지는 거하고 내 승진하고 무슨 상관이냔 말이야!”
답답해 죽겠다는 듯 민영이 다시 재촉했다.
“멍청한 것. 야, 박민영. 내가 여기까지 얘기했으면 딱 알아들어야지. 넌 고등학교 때도 그렇게 맹하더니 아직도 그래. 그래서 네 별명이 형광등인거야. 아니, 요즘 형광등도 너처럼 그렇게 늦지는 않아. 어떻게 이렇게 눈치가 없니?”
친구의 비난에도 민영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여우 같은 황지연이 도대체 뭘 말하는 것인지. 그러자 지연이 제 가슴을 탕탕 쳤다. 예쁘게 솟은 가슴이 출렁인다.
“아휴! 답답해. 이번에도 공을 세우라고! 공을! 그 시장 사모가 물에 빠지면 또 건져 올리라고! 그러면 넌 자동으로 승진하는 거야. 멍청아! 혁혁한 공을 두 번이나 세웠는데 위에서 가만히들 있겠어? 세간(世間)의 이목을 생각해서라도 1계급 특진이지!”
순간, 민영의 얼굴이 씰룩거리기 시작했다. 차츰 밝아지는 얼굴은 급기야 화사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이제야 지연이 말하고자 하는 뜻을 이해하게 된 그녀의 얼굴은 이슬을 머금은 한 떨기 백합처럼 활짝 피었다.
“네가 작년에는 순경으로 임용된지 일마되지 않아서 특진까지는 못 시켜 주고 표창장 선에서 끝냈지만 이번에도 시장 사모님을 또 구해 줘봐. 그럼 특진 안 시켜 주고는 못 배기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시장 사몬데.”
그래, 시장 사모! 내가 그 사모님 구해 주고 특진을 얼마나 기대했던가! 하지만 해경에 합격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1계급 특진의 혜택은 받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 또 공을 세운다면? 그렇다! 황지연의 말처럼 그 대단하신 시장 사모님을 또 구해 준다면 이번에야말로 경장 배지를 달 수 있을 것이다. 순경에서 경장까지 최단시간이 걸린 해경이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민영은 지연의 손을 덥썩 잡았다.
“엄마야! 얘가 왜 이래?”
기겁을 하는 지연을 힘껏 끌어안으며 민영은 웃음을 터뜨렸다.
“황지연! 넌 역시 내 친구야! 하하하.”
그러자 지연이 민영을 홱 밀쳤다.
“야! 징그러!”
그러거나 말거나 민영의 일굴은 웃음이 가득했다. 암울했던 인생은 환한 햇살로 가득 채워지고 그녀의 머릿속은 벌써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시장 사모를 구하는 상상에 빠졌다.
‘사모님! 기다리십시오! 제가 갑니다!’
안 빠지면 튜브에 구멍을 내서라도 제가 구해 드리겠습니다!
이른 아침, 푸르스름한 대기의 찬 기운이 영롱한 이슬을 만들어 내는 시간이었다. 풀숲에 닿는 발소리조차 서걱거리며 정겨운 소리를 낸다. 하얀 연기처럼 공기 중을 흐르는 안개가 희미하게 대지를 감싸는 그 시각, 건물안쪽에서 조그맣게 흥얼거리는 콧소리가 들려왔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팔까지 휘저으며 흥얼흥얼거린다. 해경의의 산뜻한 여름 제욕을 갖춰 입은 여자는 단아하게 빗어 올린 꽁지머리를 찰랑이며 도저히 무슨 노래인지 알 수 없는 리듬을 타고 마당으로 걸어 나왔다.
맑은 새벽 공기만큼이나 상쾌한 듯 노래를 부르는 민영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개미 새끼 한 마리 지나가지 않는 적막한 하늘을 향해 두 팔을 힘껏 뻗었다
“으으으……”
누가 봤으면 참 볼성사납다 할 만큼 있는 힘껏 기지개를 켜며 사지를 쭉 뻗은 그녀는 연이어 깊은 숨을 들이켰다. 낯선 곳에서 첫 밤을 보내서 그런지 잠을 설쳤다. 새벽녘까지 잠이 들지 못해 뒤척이다가 결국에는 날이 밝자마자 이불을 걷어차고 나온 것이다. 오지 않는 잠을 청하느라 괴로워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몸을 움직이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후우욱.”
민영은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짠 공기를 폐 깊숙이 들이 마셨다.
비릿한 바다 냄새 내지는 상쾌한 시골 공기를 예상했는데 갑자기 콧속으로 밀려오는 범상치 않은 역겨운 냄새에 재빨리 숨을 멈추고 마시던 공기를 도로 내뱉었다. 온통 논밭으로 둘러싸인 곳이라 그런지 솔직히 바다 냄새보다는 퇴비 냄새가 더 강하다.
민영은 코를 찌르는 쾌쾌한 냄새에 눈살을 찡그리며 회색빛 벽돌집을 돌아보았다.
해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민박집이라는 이유로 여름 한철 해변에서 근무하게 된 안전요원들의 숙소로 정해진 곳이었다. 해변에서 가까운 민박집은 숙소로 정하기에 너무 비싸고 또 바캉스 손님 하나라도 더 받았으면 받았지, 경찰 지정 숙소로 내줄 만한 곳이 없다는 이유로 숙소는 이런 시골구석에 정해졌다.
‘높으신 분들, 해외 원정 골프 보내 주는 돈으로 공무원 관사나 멋지게 짓지.’
턱도 없는 바람이었다. 이놈의 나라는 공공연하게 공무원을 위한 복지에 신경 쓰면 욕먹는 나라다. 공무원은 무조건 근면, 성실이라는 모토 아래 후진 환경 속에서도 몸이 부서져라 일만 해야 했다. 그런데 왜 높으신 양반들은 해마다 원정 골프니 , 연수를 핑계로 관광을 가는 걸까?
그게 바로 공식과 비공식의 차이가 아니겠는가. 같은 공무원이라도 급이 다르다. 소수의 높은 분들은 비공식적으로 놀러 가도 업무차 나가는 것이라 둘러대면 그만이지만 대다수 낮은 공무원들은 뭘 하려고 해도 대외적으로 알려진다. 시민을 위해 봉사하는 낮은 공무원은 자기 돈으로 좋은차 사도 욕먹고, 높은 곳에서 한자리 차지하고 계신분은 나랏돈으로 멋들어진 관광하면서 놀고 다녀도 괜찮다. 그리고 그런 사실이 혹시 알려지기라도 하면 가만히 일만 하던 공무원들까지 깡그리 욕으 먹는다. 이런 나라에서 후진 공무원으로 살아가는 내가 대단하다.
민영은 스스로를 낮은 공무원이라 칭하는 것에 대해 거리낌이 없었다. 실제로 하위 공무원이었고, 골치 아프게 높은 공무원이 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냥 평범하게 편안하게, 머리 쓰는 일 없이 그냥 이렇게 낮은 공무원으로 사는 것이 속 편하다는 주의였다.
그녀는 뭉근한 퇴비 냄새에도 불구하고 상쾌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닷가에서도 멀고 시내로 나가기에도 먼, 온통 논밭으로 둘러싸인 허름한 민박집이었다. 그녀는 문득 어젯밤에 이곳에 도착해 마당으로 들어 서던 어린 전경들의 일그러진 떠올렸다. 절로 웃음이 난다. 자신들이 묵게 된 숙소가 쾌적하고 시원한 2급 호텔쯤은 될 것이라고 기대한 것 같았다. 민박집 건물을 올려다보던 그들의 얼굴은 형용할 수 없는 좌절감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큭큭, 불쌍한놈들.’
민영은 아직도 낯선 잠자리에 적응하지 못해 뒤적이고 있을 어린 전경들을 생각하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니들, 이번 여름에 빡센 군 생활이 뭔지 제대로 알게 될 거다.‘
죽네 사네, 울고불고할 그들을 생각하니 괜스레 웃음이 차올랐다. 어젯밤 자기들 끼리 떠드는 소리를 듣고 난 후라 그런지 더 의미심장한 미소가 그려졌다.
“이렇게 더운 여름날, 해변에서 근무하는 거니까 적어도 더위는 안 먹겠지.”
“그러게. 내가 아는 형이 그러던데 안전요원으로 근무하는 거, 무지 쉽대. 그냥, 호루라기만 불면서 다니면 된다던데?”
민영은 그들의 대화가 다시 떠오르자 키득거렸다.
그 ‘아는 형”이라는 놈이 누군지 모르지만 뭘 잘 모르시고 하는 말이지. 아니면 입술에 힘도 안 바르고 천덕스럽게 거짓말을 한 건지도. 여름해변 근무가 쉽다니! 정확히 일주일 안에 집에 가고 싶다고 징징거릴게 뻔한 놈들한테 말이야!
철컥.
민영은 마당 한쪽에 서 있는 자전거로 다가갔다. 그리고 자전거를 받치고 있는 스탠드를 발로 툭 차올리고 핸들을 틀었다. 서슴없이 다리 하나를 번쩍 들어 올려 안장에 올라탄 그녀는 천천히 페달을 밟으며 마당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드르륵, 드르륵’ 경쾌하게 돌아가는 바퀴 소리를 들으며 이른 아침 텅빈 오솔길을 달려 나갔다.
비록, 힘든 여름 근무가 시작되는 이른 아침이지만 자전거로 달리는 시골길만큼은 변함없이 상쾌하고 시원했다.
민영은 100미터 전방에 보이는 붉은색 벽돌 건물을 보며 열심히 페달을 밟았다. 제법 거센 바닷바람에 태극기와 경찰 마크가 그려진 깃발이 미친 듯이 퍼덕이고 있었다. 파출소가 통폐합되는 과정에서 비어 버린 건물을 해수욕장 개장 시기에 맞춰 여름해양경찰서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비록 여름 한철이지만 그래도 폐가처럼 음침해져 비행 청소년들의 아지트로 쓰이는 것보다는 이렇게라도 운영하는 것이 훨씬 나은 행정이었다.
작년에도 저곳에서 근무를 했던 민영은 익숙한 동작으로 건물 뒤편의 주차장으로 향했다.
싸아아.
부드럽게 밀려왔다 나가는 은은한 파도 소리와 저 먼 하늘에서 들리는 갈매기 소리……참으로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부아아앙!
그런데 고요한 아침 공기를 가르고 귓바퀴를 진동할 만큼 우렁차게 들리는 오토바이의 굉음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어떤 놈이 이른 아침부터 파워풀한 엔진 자랑질인가 하며 눈살을 찌푸리는 순간!
촤르르륵!
무언가 묵직한것이 그녀의 곁을 쏜살같이 지나쳤다. 바로옆에서 이는 사나운 바람에 놀라 본능적으로 자전거를 세운 그녀는 황당한 눈빛으로 앞서 달려가는 검은색 오토바이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뿌연 먼지가 그녀의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오토바이가 지나가며 일으킨 먼지바람에 그녀의 머리칼이 헝클어진 건 물론이고 깨끗하게 빨아 입은 경찰복에 흐릿한 얼룩까지 보였다.
“저런 썩을!”
절로 욕설이 터져 나온다. 이른 아침부터 시끄러운 오토바이 소음을 쏟아 내는 것도 모자라 감히 해양경찰서 주차장을 제집이라도 되는 듯 들어가다니!
“넌 오늘 제삿날이다!”
사심이 깊이 내포된 경찰로서의 의무감을 앞세우며 민영은 재빨리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어떤 놈인지 너, 오늘 제대로 걸렸쓰!
끼이이익!
바람을 가르고 쏜살같이 주차장으로 들어온 민영은 자전가의 브레이크를 급하게 잡았다. 눈으로는 그 재수 없는 오토바이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아니, 두리번거릴 필요도 없었다. 경찰차 두 대가 세워져 있는 주차장 한가운데에 척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서 있는 오토바이는 찾아 헤매고 자시고 할 필요도 없이 그녀의 눈에 한 번에 들어왔다. 제집 주차장이라도 되는 듯 오토바이를 세운 남자가 이제 막 헬멧을 벗는 것이 보였다. 민영은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곧장 페달을 밟아 덩치 큰 오토바이 가까이로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더 울분이 치솟는다. 오토바이는 평범한 중국집 오토바이 수준이 아니었다. 소위 자동차 한 대 값이라는 명품 오토바이라는 것을 오토바이에 무지한 그녀도 한눈에 알 수 있을 만큼 광이 번적번적 난다.
‘이런 순 양아치 같은 놈!’
민영은 자전거에서 내려서며 험악한 인상을 지었다.
“안녕하십니까.”
비록 평범한 인사로 말이지만 그 어투는 지극히 감정적이었다. 좋게 말할 때 꺼지라는 듯 거칠기 짝이 없는 어투였다.
“실례지만 경찰서에는 무슨 일로 오셨나요? 여긴 경찰서 전용 주차장이라 일반 시민들은 주차를 할 수 없는데요. 혹시 주차하실 곳을 찾으시는 거라면 저 위로 200미터쯤 더 올라가시면 공용주차장이 있습니다.”
혹시 실수로 길을 잃었거나, 정말 경찰의 도움을 받으러 온 일반인일 수도 있으니 민영은 최대한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설명했다. 그때였다. 그녀가 설명하는 내내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경찰서 건물을 훑어보던 남자가 갑자기 그녀를 돌아보았다, 마치 성가시게 하는 날파리를 돌아보듯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남자의 얼굴이 천천히 이쪽을 향한 그 순간, 민영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하, 그 양아치, 참 바람직하게 생겼네.”
소위 말하는 조각 같은 얼굴에 몸매 또한 단단해 보이는 것이 수영복 입으면 비키니녀들 가슴을 제법 울렁거리게 할 외양이었다. 단지, 차가운 기가 물씬 느껴지는 눈빛이 옥의 티라면 티랄까……
저도 모르게 헤벌쭉 벌어지려는 입을 단속하고 정신을 차리는 찰나, 민영은 세 단계의 감정변화를 겪었다.
‘첫째는 양아치가 아니구나.‘
최소 한 명 이상의 조직에게 ‘형님‘ 소리는 들을 것같이 생겼다.
‘둘째는 어디서 봤는데……‘
진짜 낯이 익다. 한번 본 얼굴이나 이튿날 잘 기억 못하는 걸로 유명한 내가 기억할 정도면 진짜 아는 사람임이 틀림없다.
‘셋째는……빌어먹을!”
기억났다!
민영은 입술을 꽉 붙인 채 눈을 크게 다. 남자는 그녀를 쓰옥 훑어보고 다시 건물을 한번 쳐다보더니 또다시 그녀에게 눈길을 돌렸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가 입은 하늘색 제복에 달린 배지로. 무궁화 순이 두 개 그려진 초라한 순경 배지에 그의 눈길이 잠시 멈추더니 정말 어처구니없게도 그녀를 싹 무시한 채 오토바이에서 내려 건물로 걸어가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민영은 얼어 버린 눈길로 남자의 뒷모습을 끈질기게 노려보았다.
모른다! 저 인간은 나를 못 알아보는 거야!
민영은 자기 자신이 없어졌다. 자신을 못 알아보는 저 남자가 이상한 것이 아니라 첫눈에 남자를 알아보는 자신이 더 이상했다. 그게 언젠데? 고등학교 1학년 때니까 벌써 10년은 훨씬 지나지 않았는가. 10년이 뭔가? 지금 내나이가 서른하나니까……31에서 17을 빼면 ……제길! 14년이다.
민영은 자신의 눈을 쓱쓱 비비며 이제는 건물 안으로 사라진 남자의 발자취를 훑었다.
‘에이, 잘못 본 거겠지.’
그래. 잘못 본 것일 거다. 내가 무슨 용빼는 재주가 있다고, 내가 무슨 천재도 아니고! 난 천재보다는 둔재에 가깝지 않은가. 14년 만에 다시 본 남자를 어떻게 첫눈에 알아보냐고! 고등학생 까까머리 소년의 얼굴과 서른한 살의 성인 얼굴은 천지 차이잖아! 어떻게 이렇게 한눈에 알아보냐고!
스스로의 기억력과 판단력을 의심하며 고개를 가로젓던 그녀는 자전거를 아무렇게나 팽개치고 방금 남자가 들어간 건물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이럴게 아니라 다시 보자! 어쨌든 저 인간이 저기 안에 있는 동안에는 다시 봐야 하는 거잖아!‘
덜컹.
힘차게 문을 열고 들어선 민영은 사무실 안쪽에 서 있던 남자와 다시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꿀꺽 침을 삼키고 거칠게 말을 시작했다.
“무슨 일이시죠?”
남자의 태도가 너무 당당했다. 민영은 질문을 툭 던져 놓고 남자의 얼굴을 세세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남자가 못마땅한 얼굴로 그녀의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주욱 훑어본다.
상당히 기분 나쁘다. 마치, 저 남자 눈앞에서 땅벌레라도 된 듯 작아지는 자신이 한심했다.
남자의 입가가 슬며시 비틀어 올라갔다. 닦달하는 그녀가 몹시 가소롭다는 듯 쳐다보는 것이 확실했다! 민영은 인상을 확쓰며 다시 물었다.
“여긴 해양경찰서입니다. 무슨 볼일이시죠?”
그러자 남자는 몹시 귀찮다는 듯 짙은 눈썹을 휘었다. 그리고 정말로 무성의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오늘부터 출근인가? 꽤 일찍 출근하는군.”
민영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이젠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성질을 버럭 내려는데 그가 주머니 안쪽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또 그것이 그녀의 가슴에 달린 경찰 배지와 갈은 형태로 만들어 진 것임을 깨닫는 순간, 얼굴은 놀라움으로 굳어 버렸다.
그녀의 것보다 정확히 두 개가 더 많은 무궁화 순!
민영은 자신의 눈앞에 보였다가 사라지는 배지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경찰이다. 그것도 그녀보다 훨씬 높은 계급의…….
그녀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남자가 사무실을 이리저리 배회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강세종‘.
민영은 속으로 조용히 이름 석 자를 중얼거렸다. 정말 기가 막히게도 그녀는 그 이름을 정확히 기억해 냈다. 그녀 스스로 기억력이 좋다고 인정한 적도 없고, 사람 이름을 잘 외운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강세종’이라는 이름 석자를 14년이나 지난 지금까지 정확히 외울 정도로 깊은 사연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정확히 ‘강세종’이라는 이름을 기억해 냈다. 그의 얼굴을 14년 만에 다시 본 지 채 5분도 되지 않아서!
강세종…… 다시한번 그의 이름을 되뇌며 민영은 키가 큰 남자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엄밀히 말하면 그렇게 썩 많이 변하지도 않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도 저 정도의 키는 됐었고, 아니, 그때보다 지금이 조금 더 큰가? 어쨌든 그때도 그녀보다 훨씬 컸으니까 지금도 그렇게 큰 차이를 느낄 수는 없다. 얼굴은…… 음, 얼굴은 좀 변했다. 하지만 그렇게 몰라볼 만큼은 아니었다. 아까 주차장에서 단숨에 알아본 얼굴이니 말해 뭣 하랴. 전국 청소년 수영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하는 것과 동시에 단숨에 학교의 킹카로 뛰어올랐던 만큼 여전히 얼굴은 잘 생겼다.
그때야, 뭐 아직 애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소년의 티가 완전히 가시고 거친 남성미를 완벽히 갖춘 성인 남자였다.
“순경”
민영은 자신만의 생각에 잠겨 있느라 그가 부르는 것을 듣지 못했다. 다시 자신을 부르는 짜증섞인 목소리가 두어 번 더 이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네?”
그 순간, 정확히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녀의 뇌리에 100만 볼트 전류가 흘렀다. 마치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도 친 그녀의 머리는 ‘띠잉!’ 하는 소리를 내며 전율했다.
“이번에 너하고 갈이 근무하게 될 안전요원 두 명이 해양특수기동대원이란다.”
“동기 말에 의하면 경찰서 높은 곳에 있는 사람들도 그 강 경산가 하는 남자라면 고개를 흔든대. 쇠고집에 똥고집에 막가파고 성질은 무지 더럽대.”
며칠 전, 황지연 경장이 했던 말이 마른하늘에 치는 날벼락처럼 그녀의 뒤통수를 후려갈긴다. 민영은 거친 숨을 들이켰다.
“강경사…….”
자신도 모르게I 입술을 움직이며 중얼거렸다. 맞은편에 서서 험악하게 인상을 쓰는 그를 인식하지도 못한 채 그녀는 그를 아는 티를 내고 말았다.
“어떻게 알았지?”
그녀는 멍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가 한걸음 앞으로 나와 다시 묻는다.
“나를 아나?”
민영은 화들짝 놀라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닙니다.”
그의 눈이 의심스러운 듯 좁아진다.
“그런데 내성을 어떻게 알지?”
그녀의 얼굴을 꼼꼼하게 살피는 폼이 사뭇 진지하다. 혹시 자신을 알아 볼까봐 살짝 긴장했지만 다음에 이어지는 말에 민영은 자신이 괜한 걱정을 했음을 깨달았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
그럼 그렇지. 날 알아 볼 턱이 없지.
민영은 떨떠름하게 얼굴을 굳히며 어깨를 으쓱했다.
“여기 오기 전에 강경사님에 대해 조금 들었습니다. 그래서 집작해 본 겁니다.”
“나에 대해 들어?”
그가 씨익 웃었다.
“그렇다면 썩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던 것 갈군.”
그녀는 긍정한다는 듯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가 재미있다는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름이 뭔가?”
민영은 다시 긴장했다. 하지만 이내, 스스로를 비웃었다. 이름뿐 아니라 그와 같은 고등학교를 다녔었다고 해도 저 인간은 그녀를 기억해 내지 못할 것이다.
“박민영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강세종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며 돌아섰다.
“박 순경 꽤 일찍 출근했군.”
“………”
민영은 대꾸하지 않았다. 기분이 땅을 파고 가라앉는다. 강세종에게서 ‘박순경’이라고 불리는 기분은 한마디로 비참하고 처참했다. 한때, 사춘기 소녀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짝사랑의 상대를 근15년 만에 다시 만났는데 상대는 그녀보다 훨씬 앞에서 달리고 있었다. 대등한 지위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맞설 수 있는 직급이었다면 이렇게 비참한 기분이 들지 않았을 것이다.
덜컹.
“경사님, 생각보다 일찍 도착하셨…….“
갑자기 문이 확 열리더니 낯선 남자가 들어섰다. 처음엔 민영을 보지 못하고 강세종을 향해 인사를 하던 남자가 그녀의 존재를 확인하더니 갑자기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다물었다.
“어, 누가 또 있었네요?”
늘 그렇듯 이번에도 남자는 그녀가 입은 경찰복과 가슴에 달린 배지를 확인했다.
“순경?”
놀란 듯 묻는 남자의 어투에서 ‘순경치고는 나이가 좀 있네?’ 하는 느낌 이 물씬 풍겨 왔다. 평소에 나이가 들어 보이는 얼굴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5년 이상을 뚝 떼어 먹을 만큼 동안도 아니었다.
민영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나이 많은 순경 노릇 꽤 많이 적응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아니다. 강세종을 상관으로 모셔야 한다는 것을 아는 순간부터 자신의 처지가 한없이 초라해지기 시작했다. 이 낯선 남자가 자신에게 순경이냐고 묻는 것조차도.
“반가워. 난 김동운 경장. 순경치고 나이는 좀 많아 보여도 나보다는 어린 것 같은데 말 놓는다. 우리 경사님하고는 인사했지? 경사님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어젯밤에 서울에서 출발해서 이제 막 도착하는 바람에 아직 옷도 못 갈아입었어.”
‘너 몇 살이야? 민증 까봐!’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민영은 그러지 않았다. 그런들 무슨 소용인가. 나이 많은거 자랑하면 경장이 순경되고, 순경이 경장되나?
갑자기 남자가 강세종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경사님, 아침 드셨어요? 아침을 먹으려고 배회하다가 우연히 경사님 오 토바이를 보고 들어왔어요. 여기가 경찰선지도 몰랐네. 하하하.”
그러자 세종이 시큰쿵하게 대꾸했다.
“먼저 숙소부터 정해야지.”
“숙소는 벌써 정해져 있을걸요?”
김동운 경장이라고 소개한 남자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해변 근무자들 숙소 정해져 있지? 혹시 어딘지 알아?”
민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네. 약도 그려 드릴까요?”
“그래줄래? 그럼 고맙…….“
“생전 처음 온 길인데 약도 가지고 되겠엉? 네비도 못 찾는 시골길을 직접 안내해.”
순간, 민영은 강세종이 자신을 향해 말한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말을 한 것이 아니라 명령한 것을.
“네?”
멍하게 되묻는 그녀에게 세종이 인상을 썼다.
“직접 안내하라고. 시간 되려면 아직 두 시간도 더 남았는데 여기 않아서 뭐 할 거야? 숙소가 여기서 3 것도 아닐 테고. 그러니까 박 순경이 직접 우리를 안내하라고.”
이런 우라질!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었다. 민영은 갑자기 끓어오르는 분노로 얼굴을 붉히며 강세종을 노려보았다.
“에이, 경사님. 기껏 출근했는데 어떻게 다시 숙소로 가자고 해요. 그냥 약도 받아서 저희끼리 찾아가죠. 시골길인데 찾기 어렵기야 하겠어요?”
민영의 얼굴이 변한 것을 김 경장이 알아차리고 재빨리 나섰다. 하지만 세종은 그런 민영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시 명령했다.
“숙소로 안내하는데 무슨 문제 있나?”
천연덕스러운 놈의 눈길이 이쪽을 향하는 순간, 민영은 경찰서 건물을 폭파 시키고도 남을 만큼 엄청난 살의를 느꼈다.
성질 더럽고 저밖에 모르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민영은 두 남자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서 비릿한 실소를 머금었다. 순간, 잘생긴 낯짝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강세종의 짙은 눈썹이 스윽 치켜 올라갔다. 그녀는 바로 앞 책상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이면지와 볼펜을 홱 끌어당겨 약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직접 안내하라는 자신의 명령을 무시하고 민영이 약도를 그리기 시작하자 세종이 더욱 눈살을 찌푸리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묵묵히 약도를 그려 나갔다. 초딩이라도 알아볼 수 있도록 아주 크고 선명하게. 그리고
“여기, 숙소로 가는 약돕니다”
세종이 못마땅한 얼굴로 민영과 그녀가 내민 종이를 번갈아 쳐다보기만 하자 두 사람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김 경장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오, 센데? 만만치 않아. 쿡쿡.”
아무래도 지금 상황을 즐기는 사람은 김동운이라는 저 남자뿐인 듯 싶다.
“뭐 하는 짓인가, 박 순경?”
말끝마다 ‘순경, 순경‘ 하는 게 배알이 뒤틀렸지만 민영은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그리고 비웃음을 가득 머금은 채 친절하게 설명하기 시작 했다.
“죄송합니다. 경사님. 저도 직접 안내해 드리고 싶지만 보시다시피 여기 사무실 정리를 해야 해서요. 모르시겠지만 제가 올해로 여기 근무가 두 번째입니댜. 그래서 이곳 환경을 제일 잘 아는 사람도 저죠. 그리고 제가 오늘 이렇게 일찍 출근한 건 제 상사인 최순황 경사님의 명령 때문 입니다. 며칠 전부터 이곳에 내려와 대기하고 있는 민간자원안전요원들의 캠프를 둘러보라는 명령이 있었거든요.”
일부러 두 번째 근무라는 것을 알리며 ‘네가 특수기동대라고 해 봤자 여기서는 내가 선배다‘라는 뉘앙스를 팍팍 풍겼다. 그리고 최 경사님을 언급함으로써 ‘너보다 상급자의 명령이 우선이다’라는 뜻을 과감히 어필했다. 직급으로만 본다면 같은 경사지만 호봉으로 따지면 최 경사님이 저 인간보다 훨씬 위가 아닌가.
물론 모두 거짓말이다. 그냥 잠이 오지 않아 나왔으니 시간은 철철 넘친다. 하지만 저 놈을 위해 쓸 시간은 결단코 없다. 없는 일도 만들었으면 만들었지, 그렇게는 못하지!
순경 주제에 명령 한마디만 내리면 순순히 따를 것이라 여겼던 탓인지 두 남자는 마치 뒤통수라도 한 대 얻어맞은 듯 얼이 빠진 얼굴이었다. 아니, 뜻밖의 반격에 충격을 받은 사람은 성질 더러운 강세종 경사였다. 그는 점점 분노의 화신으로 변신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붉은 화염을 토해 낼 듯이 성난 얼굴이 그녀를 사납게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 어디 한번 해 보자고! 막가는 거야! 나한텐 시장 사모가 있잖아!
민영은 일부러 더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혹시 경장님과 경사님께서 제 일을 함께 해 주시겠다면 제 시간을 쪼개어 숙소로 직접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보란 듯이 사무실 곳곳에 어지럽게 쌓여 있는 책상들과 의자들, 그리고 바닥의 휴지들을 눈으로 쓰윽 훑었다. 그녀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세종을 쳐다보았다.
“같이 청소를 하잔 말인가?”
잇새로 내뱉듯 묻는 세종에게 민영은 순진한 척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굳이 제게 숙소 안내를 받고 싶다면요.”
사무실 안은 전운이 감돌았다. 그리 넓지도 않은 공간에서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시선이 부딪쳐 불꽃을 피우자 다른 한 명의 방관자는 슬그머니 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이런 일에 괜히 끼어 봤자 득 될 것 없다는 재빠른 판단에 의해서 나온 생존전략이었다.
“김 경장”
“에, 예?”
문을 열고 나가려던 동운은 자신을 부르는 낮은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동운은 이 싸움에서 누가 이겼는지 깨달았다.
“차, 가져왔나?”
“아, 예.”
“시동 걸어.”
강세종 1패.
“예. 알겠습니다.”
동운은 이때다 싶어 재빨리 문을 열고 나왔다. 동운이 나가고 세종은 맞은편에 서 있는 여순경을 지그시 응시했다. 만만치 않은 물건이다. 순경 주제에 자신보다 2계급이나 높은 상관의 명령을 어기는 것도 기함할 일인데 느물거리며 이죽거리는 폼 또한 예사로운 인물은 아니었다.
타도 대상 1호.
세종은 눈앞에 서 있는 여자를 한 번에 정의했다. 이곳 해변에서 타도하고 휘어잡아야 할 첫 번째 대상인 셈이다. 겨우 두 달 근무지만 말썽 없이, 휴가 온 것처럼 편안하게 적응하기 위해서 꼭 거쳐야 할 관문이란 뜻이다.
오늘은 이대로 물러서기로 했다. 우선, 지금과 같은 유치한 상황에서 네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 싸우는 것 자체가 치졸하다. 그리고 앞으로 저 하찮은 순경을 밟을 날은 새털같이 많음을 상기했다. 어차피 이번 여름동안에는 다른 급한 볼일도 없지 않은가. 잘하면 지루한 해변 근무에서 낙이 생길 것도 같았다.
“이름이 뭐라고 했지?”
순간, 민영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무뚝뚝 하게 내뱉었다.
“박민영 입니다.”
상당히 기분이 나빴다. 나는 저를 단 한 번에 알아보고 이름까지 기억해 냈는데 저 인간은 내 이름을 말한 지 5분도 되지 않았는데 또 잊어버렸다. 새대가리 같은 놈.
“박순경”
게다가 온전한 이름을 부르지도 않는다. 그럴 거면 이름은 왜 물어! 나쁜자식!
“……네.”
“나에 대해 들은 바가 있다고 했지?”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나 하는 얼굴로 쳐다보는 민영에게 씨익 그가 웃어 보였다. 잘생긴 얼굴이 시니컬하게 웃으니 어째 저승사자보다 더 무서워 보였다.
“뭘 들었는지 몰라도 들은 것, 그 이상을 경험하게 해 주지. 기대해.”
말뜻을 채 이해하기도 전에 그가 그녀를 지나쳐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한동안 멍하니 서 있던 민영은 쾅 하고 문이 닫히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뭐야? 지금 나한이 선전포고한 거야?‘
그리고 민영은 그제야 이모든 상황을 피부 깊숙이 실감하기 시작했다.
이런 엿 같은!
그 미친 해경특수기동대원이 강세종이었다니! 아아, 신이시여. 제 인생의 바닥은 도대체 어디입니까!
부우우웅.
세종이 차에 올라타자마자 동운은 차를 출발시켰다. 자갈을 튀기며 힘차게 앞으로 나가는 차를 매끈한 아스팔트 위로 올려놓으며 동운은 옆자리에 앉은 세종을 힐끗 쳐다보았다. 애매한 표정이다. 짜증이 잔뜩 일은 듯 못마땅한 표정이긴 한데 완전히 그렇다고만은 할 수 없는 살짝 웃음기가 비치는 것 같기도 하고.
뭐지? 저 구린 표정은?
동문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경쾌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여순경이 좀 맹랑하네요.”
그러고는 슬쩍 눈치를 보았다.
별 반응 없음. 음, 그럼 조금 강도를 높여서.
“까져 가지고! 순경 주제에 말이야. 하늘 같은 경사님이 명령을 내리시는데 어디서 개겨? 개기기를! 안 그렇습니까?”
역시 반응이 없다. 동운은 무심한 얼굴로 창밖을 응시하고 있는 세종을 다시 힐끔 거렸다.
‘저럴 사람이 아닌데‘
별 이유 없이 부하가 기어오르려는 건 죽어도 못 보는 위인이다. 자신의 주관이 너무나 뚜렷해 간혹 상관의 명령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긴 했지만 거기엔 늘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조직 생활이란 것이 옳지 않은 일에도 좀 숙이고 들어가야 하는데 강세종은 그런 면에서는 꽝인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부하의 의견에 늘 귀 기울이는 상사였다. 하지만 무작정 기어오르는 부하는 절대 용납하지 못하는 벽창호였다. 그런 그가 그 맹랑한 여순경의 하극상을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봐서는 그냥 넘어갈 분위기다.
동운은 어깨를 으쓱하며 그냥 허허 웃어 버렸다.
“걱정 마십시오. 제가 다른 건 못해도 이번 여름 동안 저 안하무인 여순경의 기를 확실히 꺽어 놓고……“
“그 순경은 내 거야.”
엥?
동운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예?”
그러자 세종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마치 가지고 놀 쥐를 발견하고 입맛을 다시는 고양이 같은 얼굴이었다.
“박 순경은 내 거라고. 이 순간부터 갠 내 밥이니까 건드리지 마.”
허걱!
동운은 세종의 얼굴에 떠오른 악마의 미소를 보는 순간 귀엽게 생긴 그 여순경의 명복을 빌었다.
박순경! 자넨 이제 살아도 산목숨이 아니야!
두 남자는 이상하게 시내 곳곳을 해매고 있다는 느낌을 지을 수가 없었다. 분명 저 앞으로 직진하면 뭔가가 있을 것 같은데 약도를 보면 우무회전을 하라고 한다. 그리고 막상 우회전을 하면 차가 다닐 것 같지 않은 좁은 골목길이 나타난다. 겨우겨우 골목길을 빠져나가 보면 아까 직진을 했으면 되었을 그 길이 나왔다. 그런 과정을 두어 번 반복한 두 사람은 무언가 심상찮은 기운을 느꼈다. 왠지 이 세밀한 약도에 음흉한 음모가 숨어 있는 듯한…….
드디어 인내심이 폭발한 세종이 저 앞에서 걸어가는 아저씨를 가리켰다.
“저기 저 사람한테 물어봐.”
동운은 빈 포대자루를 질질 끌면서 걸어가는 아저씨의 옆에 차를 세웠다.
“실례합니다,”
큰소리로 부르자 아저씨가 시큰둥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장시간 바깥 활동을 한 탓인지 시커멓게 그을린 얼굴에는 작은 표정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무뚝뚝하게 쳐다보는 아저씨의 눈동자를 보며 동운은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죄송한데, 길 좀 여쭙겠습니다.”
아저씨는 말 한마디 없이 고개를 까딱하며 승낙의 표시를 했다. 귀찮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망망하늘정원 펜션이라는 곳을 찾고 있는데요.”
“무슨 펜션? 그런 데도 있나?‘”
아저씨의 무표정한 반응에 동운은 대쓱한 얼굴로 약도가 그려진 종이를 내밀었다.
“여기 그려진 곳을 찾아가려고 합니다.”
무심한 태도로 종이를 받아 든 아저씨가 약도를 쓰윽 훑어보았다.
“여기라면…… 하늘민박이잖아. 하늘민박이 언제 펜션으로 바뀌었나?”
중얼거리는 아저씨의 말에 동운과 세종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저씨가 문득 고개를 들고 동운과 세종을 한심하게 쳐다본다.
“망망 제2파출소에서 오는 길이요?” 동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기기 그려진 것처럼 예전엔 파출소였는데 지금은 여름해양경찰……“
“거기서 뭐 하러 여기까지 왔어?”
“예?”
“약도가 뭔 소용이야? 파출소 옆에 난 샛길로 쪽 가면 자동차로 10분이면 갈걸. 기름만 낭비했구먼.”
그러더니 동운에게 약도가 그려진 종이를 휙 던져 주었다.
“누가 그렸는지 이곳 지리를 영 모르는구먼.”
두 남자를 황당하게 만들어 놓고 아저씨는 가던 길을 다시 재촉하기 시작했다. 그때 세종이 재빨리 아저씨를 불렀다.
“그럼 이 약도가 잘못된 겁니까? 혹시 시내에서 펜션으로 가는 더 빠른 길이 있는 건 아닙니까?”
그러자 아저씨가 ‘뭔 소리냐’는 듯 돌아본다.
“그 약도는 쓰레기야. 시내 구내구석을 관광할 것 아니면 기름 낭비하기 딱 좋은 약도구먼.”
뜨악한 얼굴의 동운과 세종을 쓰윽 쳐다보더니 아저씨가 큰길을 가리켰다.
“저기로 나가서 좌회전을 해. 그리고 망망하수욕장이라고 적힌 이정표 대로 가. 쭉 직진하면 길가에 하늘민박이라고 적혀 있을거요. 그 샛길로 들어가면 댁들이 찾는 그 정원인가 하늘인가 하는 펜션이 나올거요.”
그리고 아저씨는 타박타박 가던 길을 가기 시작했다. 자동차 안은 한동안 정적이 감돌았다. 동운은 차마 먼저 입을 때지 못하고 핸들만 꽉 틀어 쥐고 있었다.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맹랑하기로, 어떻게 자기보다 계급이 높은 두 명의 상관을 엿 먹일 수가 있는가!
“아무래도 저희가 당한 것 같습니다.”
동운이 마지못한 듯 입을 열어 지급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인정하자 세종이 턱을 실룩거렸다.
“아주…… 아주 재미있군. 아주 재미있어.”
이를 악물고 눈 밑의 살까지 떨며 어금니 사이로 내뱉는 그 말 한마디, 한마디가 악에 받쳐 있었다. 아무래도 그 여순경, 제명에 못 살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