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ue Wind Pyo Country Strongest Eater RAW novel - Chapter 72
청풍표국 최강식객 072화
72화. 꽃잎 흩날리는 계절(2)
한산사가 있는 방향으로 향하는 임요성의 머릿속은 그동안의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우연히 인연을 맺은 두혜련과 함께하게 되었고, 여러 일들을 겪었다.
이제는 그녀의 집안일에도 깊이 얽혀 가모를 직접 이송하게 되자 이 인연의 끝이 문득 궁금해졌다.
아무 목적 없이 내디딘 강호에의 발걸음이 처음에는 어떻게 흘러가나 보자라는 마음에 수동적으로 끌려갔다면, 지금은 자신의 의지로 나아가고 있었다.
자신을 둘러싼 인연들이 목적 없던 강호행에 목적을 만들어주었고, 온통 회색빛이던 세상에 색깔을 입혀주었다.
‘이제는 이 길이 내 길이다.’
한산사로 가는 동안 임요성과 홍국헌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리고 강연화 역시 멍한 눈으로 말의 움직임에 몸이 터덜터덜 움직일 뿐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이동한 끝에 일전에 새벽에서 노승과 만남을 가졌던 한산사에 도착했다.
“이곳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절에 도착해서야 입을 땐 홍국헌의 말에 임요성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우연히 알게 됐습니다. 우연히요….”
그야말로 우연히 알게 되었기에 임요성 또한 그 말 말고는 할 말이 없었다.
경내로 들어서자 한 젊은 승려가 천천히 다가왔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 저희를요?”
홍국헌이 놀라 임요성을 쳐다봤으나 놀란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저희 방장스님께서 아침부터 손님이 오실 거라고 하더군요. 딱 보니 알겠습니다. 하하.”
밝게 웃는 젊은 승려를 보며 두 사람이 잠시 서로의 얼굴을 봤다가 말에서 내렸다.
“맞습니다. 그 노승께 볼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방장스님인 줄은 몰랐지만요.”
임요성의 말에 젊은 승려가 역시 웃는 낯으로 말했다.
“저희도 많이 골탕먹습니다. 하하하. 말은 걱정 마시고 절 따라오시지요.”
강연화까지 말에서 내리게 한 임요성 일행은 승려의 뒤를 따랐다.
임요성은 한 번 가봤던 길이라 낯설지 않았지만, 그때는 그냥 멋모르고 지나쳤던 길이라 이렇게 알고 가자 느낌이 새로웠다.
저 멀리 예전 자신을 이끌었던 종의 누각도 보였다.
새벽에 왔을 때보다는 신도들이 많아 붐비는 것이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그때는 한적한 새벽의 절이었다면 지금은 소주에서도 이름난 절에 걸맞게 많은 이들이 분주히 오갔다.
그렇게 도착한 방장의 거처는 미리 얘기가 되었는지 한적했다.
방장 정도 되면 그에게 좋은 덕담이라도 들으려고 꽤 복잡할 텐데도.
끼익.
“어서 오시게.”
방장이 방 안에서 문을 열며 고개를 내밀었고, 임요성을 보며 밝게 웃다가 뒤에서 멍한 얼굴로 서 있는 강연화를 보더니 눈을 반짝였다.
“어서 안 들어오고 뭐 하나?”
툭 던진 말에 임요성 일행이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작은 방에 네 명이나 들어앉자 꽉 찬 느낌이었다.
중앙에는 이미 데워진 물을 부어둔 작은 다관(茶罐)이 있었다.
오기 전에 미리 우려둔 것이리라.
“가끔 차나 한잔하러 오라고 했더니 이 노납을 성가시게 하려고 왔구먼.”
쪼르륵.
찻잔에 차를 따르는 모습은 무척이나 차분했다.
모두 그가 차를 따르는 모습을 보며 입을 다물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게 뭐라고 그냥 마음이 평온해진 것이다.
“자네 다선일미라고 들어보았는가?”
그러던 중 갑자기 툭 내뱉은 노승의 말에 임요성이 별생각 없이 답했다.
“차 마시는 것과 수행하는 것이나 같은 원리란 말씀입니까?”
임요성은 그냥 단어를 해석해서 말했을 뿐이다.
그의 대답에 노승 역시 달리 특별한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딱히 어떤 대답을 원한 건 아닌 터였다.
“맞네. 단어의 뜻 그대로지. 하지만 다선일미일 뿐만 아니라 생활의 모든 부분이 곧 수행과 같지. 꼭 구분하지 않아도 말일세.”
네 번째 잔을 따를 때 홍국헌이 움찔했다.
“대사님, 굳이 네 번째 잔은….”
“예끼! 이 사람. 사람 면전에서 그러는 거 아닐세.”
방장의 타박에 홍국헌이 목을 움츠렸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노승이었기에 그라면 한 수에 목숨을 취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왠지 모를 기세에 밀리는 느낌이었다.
“자, 한 잔 들지.”
한산사의 방장인 법운(法雲)이 향을 음미하며 차를 마시자 홍국헌이 쭈뼛쭈뼛 차를 입에 가져가 마시다가 그대로 차를 내뿜을 뻔했다.
아예 인지가 없던 것처럼 보이던 강연화가 차 향기에 이끌려 찻잔에 손을 뻗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용히 차를 홀짝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신을 차린 건 아니었다.
그냥 차를 마시고 싶어 보였고, 그렇게 행동했을 뿐이다.
임요성도 그런 강연화의 모습에 내심 놀라며 그녀를 곁눈으로 쳐다봤다.
만약 그 독심이 다시 돌아오는 기미가 보인다면 욕을 먹더라도 그녀의 근맥이라도 잘라버릴 생각이었다.
그녀로 인해 이 절에 피해를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혀 그런 모습은 없었다. 그냥 아기가 어미의 젖을 찾듯 그렇게 본능적으로 마실 뿐이었다.
홍국헌은 이 차가 영약에 비할 어떤 큰 비밀을 담고 있나 싶어 냄새를 다시 맡아보고 맛을 음미했지만,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들 볼 것 없네. 향이 좋으니 마시고 싶었겠지.”
법운의 느긋한 말에 두 사람의 마음에도 왠지 모를 편안함이 스며들었다.
“그날 이후로 수련에 진척은 있었는가?”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임요성이 법운을 쳐다봤다.
뭘 알고 묻는 걸까? 의문이 들었으나 왠지 저 노승이라면 세상 모든 걸 알고 있을 듯한 생각이 들었다.
의심스럽게 쳐다보는 임요성을 보며 법운이 피식 웃었다.
“경계할 것 없네. 친한 친구가 무림인이다 보니 나도 풍월을 읊었을 뿐일세.”
“아… 네.”
“두고 가게.”
그냥 한마디였다. 그리고 법운은 다시 입을 열지 않았다.
임요성과 홍국헌이 눈을 마주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임요성이 고개를 숙이고는 방을 나섰다.
닫히는 문틈으로 여전히 차를 홀짝이고 있는 편안한 얼굴을 한 강연화의 모습이 비쳤다.
“거참,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뭐 어디 소림의 고승이라도 되는 겁니까?”
홍국헌이 아직도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듯 뒤돌아보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임요성도 모르긴 마찬가지였다.
단지 보통 스님이 아니란 것만 느껴질 뿐.
나올 때 보였던 강연화의 얼굴을 떠올리며 욕심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온 그녀에게는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방장과의 첫 만남 때 그가 했던 방하착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나중에서야 집착을 내려놓으라는 불가(佛家)의 화두(話頭) 중에 하나라는 걸 알았지만, 화두라는 것은 어차피 인연이 되어야만 깨어지는 것이다.
임요성은 그 말을 곱씹어도 딱히 와닿는 것이 없었다. 아직 인연이 아닌 것이다.
생각에 빠져있던 임요성은 머리를 흔들어 상념을 털어냈다.
때가 되면 깨질 화두였고, 지금부터 고민하고 싶지 않았다.
고민해서 깨질 거였으면 진작에 깨졌으리라.
초인의 경지를 넘어 반선의 영역으로 진입하는 화경의 경지는 그렇게 생각만으로 오를 곳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을 타고 가다가 다시 뒤를 돌아본 임요성의 눈빛은 처음 강호에 나올 때에 비해서는 많이 부드러워져 있었다.
스스로는 느끼지 못했지만, 표정과 말투 역시 뭔가 여유로워졌다.
그것은 교룡의 기연으로 인한 경지의 상승 때문도 있었으나,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이 가장 컸다.
이번 일도 사람을 죽이는 것으로 모든 일의 결착을 보던 자신이 뭔가 새로운 방법으로 해결했다는 게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렇게 임요성은 자신도 모르는 새에 조금씩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고 있었다.
* * *
강연화를 한산사에 데려다주고 표국에 돌아오니 두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임요성의 집무실에 임요성과 두혜련이 마주 앉았다.
두혜련은 그가 얼마 전 정보각의 장로들과 외출을 하고 왔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
자신이 알아야 할 내용이라면 응당 말해주었을 거라 믿기 때문이다.
두혜련이 문득 눈을 흘겼다.
“너무해요. 아무리 표국을 위해서라지만 이렇게 얼굴 보기가 힘들어서야….”
“음… 그러게 말이오.”
머쓱한 표정을 짓던 임요성이 일어서서 탕관(湯罐)에 물을 데우기 시작했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짐짓 화난 표정을 짓고 들어온 두혜련의 표정이 대번에 풀려버렸다.
토라진 표정이라도 지어보려 했지만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사실 다 풀려버린 것이다.
“식객이 그 집 사람들보다 더 적극적이면 어떡하라는 거예요.”
말은 투정 부리듯 했지만 사실 두혜련은 그에게 무한한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두혜련의 말에 뒤돌아 서 있던 임요성이 피식 웃었다.
“나도 이렇게까지 깊이 빠지게 될 줄은 몰랐소.”
“왜요?”
“음?”
“왜 그렇게 깊이 빠지게 된 거냐구요.”
“글쎄. 뭐….”
임요성이 머뭇머뭇하자 두혜련이 불쑥 입을 열었다.
“그런데 언제까지 말 높일 거예요? 저보다 나이도 많으면서.”
“음? 아, 그거야 존중하는 차원에서….”
돌아서는 임요성을 빤히 쳐다보며 두혜련이 말을 끊고 들어왔다.
“이제부터 공자님을 오라버니라 부르고 싶어요. 그래도 되죠?”
“오라…버니?”
임요성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왔다.
“흠흠. 오라버니라….”
괜히 들썩이는 입언저리를 만지작거리며 임요성이 고민하는 표정을 짓자 두혜련이 내심 웃음이 났다.
눈앞의 이 남자는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어떨 땐 빈틈 하나 보여주지 않을 것처럼 딱딱하게 보이다가도 이럴 땐 아직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두혜련이 짐짓 코웃음을 치며 눈을 흘겼다.
“남자들이란… 오라버니 소리가 듣기 좋아서 그런 거죠?”
임요성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손사래를 쳤다.
“그럴 리가 있겠소? 그보다는….”
“됐구요. 정말 그 말투부터 어떻게 해봐요. 너무 거리감 느껴진다구요.”
“그럼… 편하게 하도록 하지.”
“좀 더.”
“음?”
“좀 더 써봐요.”
두혜련은 정말 작정하고 들어온 것처럼 임요성을 몰아붙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표국의 일에만 매달려 있는 것이 안심이 되면서도 뭔가 서두르는 것 같아 내심 불안하기도 했다.
말투 하나에 뭐가 바뀌겠냐마는 저 둔한 남자와의 거리를 조금이라도 좁히기 위해서는 자신이 두 팔 걷어붙이는 수밖에 없다고 여긴 것이다.
“허허, 거참… 알겠다. 이러면 되는 거냐?”
“헤헤. 좋아요.”
두혜련이 배시시 웃자 임요성이 헛기침을 하며 일어서서 물이 끓기 시작하는 탕관 쪽으로 향했다.
그때 뒤에서 나지막한 두혜련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 오라버니가 과거의 어두운 경험 때문에 마음의 문을 닫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파요. 늘 누군가를 지켜주기만 한다고 스스로의 행복에 소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
임요성이 탕관의 손잡이를 잡으려다 멈칫했다.
그리고 두혜련의 작은 목소리가 끊어질 듯 이어졌다.
“일방적으로 오라버니가 저희를 지켜주는 게 아니라 저희도 오라버니가 지치고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곳이었으면 좋겠어요. 아늑한 집처럼….”
끝말은 거의 들릴 듯 말 듯 조용히 말했지만 임요성이 듣지 못했을 리 없다.
“그냥 그 말 하러 왔어요.”
두혜련이 급히 방을 나갔고, 탕관에서 물 끓는 소리만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임요성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나에겐 이미 그렇다.”
문득 바라본 창밖에는 봄바람에 실려 온 꽃잎이 살랑살랑 흩날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