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uebird Lady and The White Lion Family RAW novel - Chapter (1)
백사자가문의 파랑새 마님 1화(1/21)
백사자가문의 파랑새 마님 1-99
뉴토
★
공금
★
ㅅㅋㅌㄲ
★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1화
“이혼은 못 해줘.”
기억 속 앳된 미성이 아닌, 위험하고도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들이박혔다.
리카도르 체드.
마냥 친구 같던 남편은 어느덧 어엿한 남자가 되어있었다.
리카도르가 얼핏 다정하게 슈페나의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짙게 침잠한 남편의 벽안이 그녀를 진득하게 훑었다.
“가지고 놀다 버릴 거였으면 진작 달아났어야지.”
“……이혼이라니?”
이혼할 생각 따위 사라진 지가 언제인데.
슈페나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리카도르를 올려다보았다.
하나, 리카도르는 발뺌하지 말라는 듯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슈페나, 네가 다른 남자를 마음에 품었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어.”
네? 제가요?
꼬꼬마 시절부터 남자라곤 너밖에 없었던 제가요?
슈페나는 할 말을 잃은 채, 헛웃음만 흘렸다.
아무래도 남편이 가당치도 않은 오해를 하고 있는 듯해서.
리카도르가 언뜻 물기 어린 말투로 못내 애절하게 그녀를 갈구했다.
“그때, 그날. 넌 나를 구하지 말았어야 했어.”
그러니 내가 돌아버리는 꼴을 보고 싶은 거라면 성공이야, 부인.
그가 어느새 말투를 바꿔 느른히 조소하며 중얼거렸다.
슈페나는 아직 상황 파악이 덜된 얼굴로 눈만 깜박였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그리곤 리카도르를 망막에 새기며 찬찬히 옛 기억을 되짚었다.
그들이 처음 만났던 가을날을.
***
이곳이 책 속의 세상이라는 걸 알게 된 건, 10살 때부터였다.
독수리 언니의 심부름으로 인적 드문 숲속에 들어갔던 가을날.
슈페나는 울창한 느티나무 아래에서 사자처럼 아주 커다란 고양이를 마주쳤었다.
크게 다친 모양인지 피를 흘리며 죽어가던 하얀 고양이였다.
이상하게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직 인간화하는 방법도 깨우치지 못한 파랑새의 몸으로 뽈뽈뽈 돌아다니면서 약초를 뜯어왔다.
“벳, 삐빗!”
슈페나는 조그마한 부리로 짓이긴 약초를 꼼꼼하게 상처 부위에 올려주었다.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날개로 닦아낼 만큼 열심히.
사력을 다해 고양이를 간호하던 그녀는 결국 탈진하여 쓰러졌다.
다음 날 아침.
슈페나는 제 몸에 덮여있는 커다란 나뭇잎을 발로 차내곤 기상했다.
‘킁킁, 좋은 냄새……어? 어디 갔지?’
그녀가 돌보았던 고양이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새 몸을 회복하고 떠난 듯했다.
‘은혜 갚을 줄 모르네.’
속으로 투덜거린 그녀가 씩씩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어쨌든 몸을 추스른 것 같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슈페나는 얼마 못 가 푸른 배를 보이며 풀썩 주저앉았다.
온몸의 힘이 싹 빠진 건지 쓰러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으니까.
‘너무 무리했나……?’
가느다란 새의 다리가 파르르 떨렸다.
갑자기 찌르르 울리는 두통 때문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내 몸이 왜 이러지?’
슈페나가 아련한 밤색 눈망울로 하늘을 바라보다 혼절했다.
정신을 잃은 사이, 그녀는 전생을 떠올렸다.
깨어나 보니 지난 생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잘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어렴풋이 자신은 새가 아닌 다 큰 성인이었고, 여러 장르의 로맨스 소설을 좋아했던 애독자라는 사실 정도만 남아있었을 뿐.
어쩌면 파랑새라서 그에 동화되느라 까먹은 걸지도 몰랐다.
‘무의식중에 무언가를 다시 떠올 릴지도 모르지.’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녀가 19금 피폐 수인물 로판 세계로 환생해버렸다는 사실이었다.
‘수인들이 타나토’라는 두 번째 심장을 지니며, 종족별로 제각기 다른 이능력을 사용한다는 설정의 글이었지.
퍽 판타지스러운 세계관이었다.
‘나에게 주어진 배역은 뭘까?’
조연? 엑스트라? 설마 주인공?’
부푼 기대를 안고 머리를 쥐어 짜냈으나 결과는 참담했다.
‘하필……!’
백사자 남주에게 집착하다 버려지는 파랑새 전 부인, 슈페나 체드윅.
소위 말하는 악녀였다.
그렇지만 제법 불쌍한 캐릭터이기도 했다.
슈페나의 일생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외톨이.
집안의 골칫덩어리였던 그녀는 백사자 남주와 정략결혼을 하게 된다.
새와 사자의 동맹을 나타내는 증표로서.
어쩌면 당연하게도 결혼생활은 불행했다.
사자들은 고작 파랑새 따위가 안주인이 된다는 걸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들 새들의 수장, 독수리가 사자의 신부로 올 거라 알고 있었으므사자들 입장에선 사기 결혼을 한 셈이었지만, 무슨 영문인지 파랑새인 슈페나는 쫓겨나지 않는다.
물론 주변 시선은 곱지 않았다.
괴롭힘에 고통받던 슈페나는 이 내 안식처를 찾는다.
그건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정략결혼 대상, 남주였다.
그녀를 구원할 만한 권력을 쥔 이는 그가 유일했으니까.
‘그래서 슈페나가 남주에게 매달리기 시작했지. 살고 싶어서.’
그녀는 제 감정을 사랑이라 착각하여 미친 듯이 애정을 갈구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슈페나가 구애한답시고 남주의 방을 귀뚜라미와 밀웜으로 가득 채웠던 적이 있었다.
남주는 벌레를 몹시도 싫어한다는 걸 모르고.
‘새는 본디 벌레를 잡아먹는 동물이니까. 제 딴에는 최고의 선물이었겠지.’
문화 차이, 아니, 종의 차이였던 건가.
그 이외에도 여러 골 때리는 사건이 있었다나 뭐라나.
남주가 학을 떼며 슈페나를 기피하게 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여기서 문제는 전쟁에 나간 남주가 여주를 데려왔다는 점이었다.
인질로 잡힌 사슴 여주와 그 주인이 된 백사자 남주.
둘은 첫 만남부터 미묘한 끌림을 느끼고, 훗날 아슬아슬한 사랑에 빠진다.
‘좋았었지.’
씨
아, 이게 아니고!
여하튼 이 상황에서 슈페나가 행한 게 과연 무엇이겠는가.
질투와 악행.
결국, 슈페나는 남주한테 버림받는다. 그리고 평소 그녀를 꺼리던 사자들이 던진 돌에 맞아 죽는다.
그게 그녀의 엔딩이었다.
‘이거 실화냐.’
충격적이었지만 당장은 원작을 피해 도망갈 수조차 없었다.
인간화도 제대로 못 하는 쪼렙파랑새인걸.
‘일단 쥐 죽은 듯이 있다가 기회를 엿봐야 해.’
그리 호시탐탐 튈 준비를 시작했건만,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흘렀다.
***
그리고 3년 뒤.
슈페나는 13살이 되었다.
인간화 방법도 깨달아 나름 성장한 시점이었으나, 전혀 기쁘지 않았다.
그녀는 기구한 제 운명에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빌어먹을 원작!’
어렸을 때부터 이어져 온 독수리 언니오빠들의 구박.
그 시발점은 어디서부터였을까.
대륙 서쪽을 지배하는 조류 연합의 대표, 독수리 가문에서 태어난 유일한 파랑새.
파랑새는 남의 둥지에 알을 낳기도 한다고 들었다. 그러니 독수리들과 잘못 섞여 부화했겠지.
아무튼 성깔 더러운 독수리들은 슈페나를 무척이나 업신여겼다.
어딘가 쓸모 있을 테니 살려두라던 독수리 가주의 명 덕분에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처지가 아니었나.
사실 그런 가주의 판단은 탁월했다.
원작에서도 사자 가문이 새들의 영토로 쳐들어오자, 천덕꾸러기였던 슈페나를 냉큼 남주에게 시집보내지 않았던가.
말이 좋아 혼인동맹이지 볼모나다름없었다.
슈페나는 몸을 부르르 떨며 상념을 날렸다.
그러고 나니 이제 현실적인 문제가 머릿속을 치고 올라왔다.
“그나저나 한겨울에 산딸기를 어떻게 구해오지?”
그래, 이런 말도 안 되는 독수리 언니오빠들의 요구로 집에서 쫓겨 난 참이었다.
슈페나가 고개를 떨구고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인간화를 한 덕에 영락없는 꼬마아이의 것으로 보이는 손가락은 볼품없이 갈라져 있었다.
신발조차 신을 겨를 없이 내쫓긴 탓에 빨갛게 부푼 맨발이 점점 아려왔다.
“추워…….”
살을 에는 듯한 냉기가 밀려왔다.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하아, 탄식하듯 나온 허연 입김이 을씨년스레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흩어진 차가운 숨결처럼 슈페나의 낯빛도 시시각각 변했다.
정확히는 부글부글 끓는 용암처럼 뜨거워졌다.
“망할 독수리들…. 머리나 벗겨져라!”
그녀가 손에 들린 갈색 바구니를 내팽개치더니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분노 조절을 못 해서인지 푸른 파랑새의 꼬리가 뿅 튀어나왔다.
슈페나는 억지로 꼬리를 잡아 감추려 애쓰며 눈을 부릅떴다.
이 일을 시킨 첫째 언니도 지금 날씨에 산딸기가 달려있을 리 없다는 걸 잘 알 터였다.
그런 만큼 빈손으로 돌아가도 크게 혼내지는 않겠지.
기껏해야 골방에 가두곤 음식을 주지 않는 정도의 벌을 내릴 거다.
그쯤은 괜찮았다.
미리 간식을 숨겨놓았으니까.
‘적당히 대들다가 골방에서 쉬어야겠다. 동물화를 해서 빠르게 날아가는 게 낫겠지?’
슈페나는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동물화를 했다.
그러자 퐁실퐁실 하얀 구름이 사뭇 신비롭게 주변에 쫙 깔렸다.
그 속에서 작고 푸른 꼬꼬마 새가 모습을 드러냈다.
“삐벳.”
떨어진 옷을 안에 담은 슈페나가 부리로 작은 바구니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힘차게 기합을 넣었다.
‘조금 무겁긴 하지만 이 정도는 들 수 있지!’
그녀가 빠르게 날개를 위아래로 움직이며 독수리들의 저택으로 향했다.
그런데 북적이던 집안 분위기가 평소와는 달랐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소란스러운 건 똑같았지만………
은근히 경직된 느낌이었다.
오들오들 공포에 떨고 있는 피식 자가 된 것처럼.
타다닷—
그때, 휘황찬란한 보석을 온몸에 휘감은 채 부리나케 뛰고 있던 첫째 언니와 마주쳤다.
“걸리적거리지 말고 꺼져, 이 멍청아!”
“삐비비빗!”
어김없이 쏟아지는 폭언에 슈페나는 짐짓 반항적으로 대꾸했다.
안타깝게도 소용은 없었다.
불만스러운 슈페나의 울음소리를 비웃은 언니는 대차게 꿀밤을 먹였다.
“한 입 거리도 안 되는 주제에 건방지게.”
힘겹게 들고 온 바구니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슈페나가 얻어맞은 머리를 날개로 문지르며 언니를 노려보았다.
생각보다 언니는 화가 나지 않은 듯 보였다. 정확히는 아예 관심이 없는 눈빛이려나.
언니가 돌연 삐딱한 미소를 걸치곤 슈페나를 응시했다.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듯한 표정으로,
“아니다. 잘됐네.”
불길한 예감에 슈페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피식, 웃음을 흘린 언니가 복도에 널브러진 바구니를 주워들어 걸치고 있던 보석을 풀어 쑤셔 넣었다.
그러고는 살벌하게 경고했다.
“야, 조용히 하고 따라와. 죽고 싶지 않으면.”
“삐빗?”
졸지에 동행이 된 슈페나가 눈을 끔벅였다.
언니는 손목에 찬 시계를 바라보더니 예상치도 못한 이야기를 내뱉었다.
“사자들이 쳐들어왔다고, 이 멍청아! 수인들의 왕인 사자가!”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2화
‘뭐? 사자?’
슈페나의 몸이 잠시 얼어붙었다.
어디선가 오금이 저릴 듯이 매서운 사자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와장창 창문이 깨지는 굉음도 함께.
“벳?”
사자가 독수리 가문에 쳐들어왔다는 건…….
‘나, 곧 남주랑 결혼하는 건가?’
독수리와 사자 사이의 사소한 분쟁과 그를 무마하기 위한 혼인동맹.
이건 소설 초반에 나오는 이야기였다.
‘최근에 가문 분위기가 좀 아슬아슬하긴 했지.’
독수리들이 사자 가주에게 무례를 저질러 두 종족 간 사이가 급격히 나빠지지 않았던가.
그래서 곧 원작이 시작될 거라 예상하긴 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소왕국 크기인 독수리 영지를 바로 침략할 줄이야.’
역시 사자의 전투력은 남다른 모양이었다.
슈페나는 우선 언니를 따라 열심히 비행했다.
목숨은 붙어있어야 남주의 신부가 되든 말든 할 게 아닌가.
그런데…… 왜 사자들의 포효가 아까보다 잘 들리는 것만 같지?
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어째서 언니가 저택 뒤편에 있는 비밀통로 말고 정문 입구로 가는 듯한 기분이 드는 걸까.
사자라면 정문으로 위풍당당하게 들어왔을 텐데.
‘거기 반대 방향이야, 이 새대가 리야!’
언니는 새대가리였다.
망했네.
‘이대로 가다간 나도 위험할 수 있겠는데?’
뭔가 제대로 해보기도 전에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었다.
“삐빗, 삐비비, 삐비잇!”
슈페나는 미친 듯이 날개를 퍼덕이며 경종을 울렸다.
사자들의 이빨에 물어뜯기며 염라대왕과 쎄쎄쎄 하고픈 마음은 없다고!
크아왕—
주변의 공기를 찢어발길 듯 사나운 맹수의 포효가 천지를 뒤흔들었다.
‘이미 늦었나?’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때마침, 등 근육이 우락부락한 황금빛 암컷 사자가 복도 끝에서 성큼성큼 다가왔다.
커다란 앞발에 박힌 어마무시한 발톱이 대리석 바닥을 우악스레 꿰뚫었다.
그야말로 약한 소동물을 잡아먹는 포식자, 그 자체였다.
슈페나와 언니는 잔뜩 쫄아서 땅에 다리가 박힌 듯 얼어붙었다.
여유롭게 그들을 관찰하던 사자가 쩌어억 아가리를 벌렸다.
‘저 입에 물리면 끝장이야.’
이런 생각이 든 순간, 얄미운 언니의 목소리가 고막을 강타했다.
“나 먼저 간다, 멍청아.”
그리 통보한 언니는 긴장으로 굳은 슈페나의 다리를 잡아채 있는 힘껏 던졌다.
“삐빗!”
이 미친 언니가!
작달만한 파랑새가 포물선을 그리며 사자의 입속으로 날아갔다.
얄궂은 언니는 그새 독수리로 변한 뒤, 바구니를 챙겨 이곳을 벗어난 지 오래였다.
파랑새는 부메랑같이 허공을 빙글빙글 돌며 공중부양했다.
‘윽, 토할 것 같아.’
속이 메스꺼웠다.
머릿속도 360도 팽그르르 뒤집혀서인지 제대로 된 사고조차 할 수가 없었다.
어느새 눈앞에 번뜩이는 사자의 송곳니가 보였다.
‘거지 같은 조생이었다.’
슈페나가 닥쳐올 고통을 예감하곤 눈을 질끈 감았다.
하나, 예상처럼 사지가 바스러지는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음?
슈페나는 조심스레 한쪽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곧이어 경악했다.
‘미, 미쳤나 봐!’
운명의 장난인지, 무시무시한 사자의 콧등에 엉덩이를 딱 붙이고 앉아버렸으니까!
‘내가 언제 이리 균형감각을 기른 거지?’
슈페나는 푹신한 사자 털의 감촉을 느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샛노란 사자의 눈이 스산하게 슈페나를 훑었다.
파랑새와 사자는 불과 1cm 정도 밖에 안 떨어진 거리에서, 두근두근 지옥으로 가는 아이컨택을 하게 되었다.
서로의 동공이 어지러이 움직이고.
엣취, 사자가 낮게 기침을 했다.
슈페나의 몸은 반항 한 번 하지 못하고 날아가 버렸다.
‘떠, 떨어진다!’
콩!
하찮을 정도로 작은 소리와 함께.
파랑새는 밑으로 추락하여 가벼운 엉덩방아를 찧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바닥에 드러눕다시피 엎어진 슈페나가 짧은 두 다리를 쭉 뻗고는 일어서려 안간힘을 썼다.
몇 번이나 미끄러진 끝에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꽁지깃을 꼿꼿이 치켜든 슈페나는 동그래진 눈으로 사자를 올려다보았다.
엄청 커다란 사자의 이마에는 신비한 왕관 모양의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바로 우두머리에게만 나타나는 증표였다.
그 말은…
‘내 시어머니가 될 사자인가 봐.’
남주의 엄마라는 뜻이었다.
남주는 아직 어리기에 가주가 되진 못했을 테니까.
칸 체드윅. 이번 대 사자 가주의 이름이었다.
그녀의 힘과 능력은 역대 사자 가주들 중 최고라고 그랬지.
슈페나를 내려다보는 눈빛과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카리스마.
이 모든 것들이 칸에 관한 이야기가 사실이라 말해주고 있었다.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수인이 아니야.’
슈페나가 눈치 빠르게 벌을 받는 듯한 포즈로 날개를 쭉 올렸다.
명백한 투항의 몸짓이었다.
그 광경을 가만히 구경하던 칸체드윅은 그녀에게 얼굴을 쑥 들이밀었다.
킁킁.
그리곤 냄새를 맡았다.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 역동적인 몸놀림으로.
‘무, 무서워!’
슈페나는 더 높이 날개를 들었다.
안 그래도 저질 체력인데 쥐가 날 것 같았다.
항복, 항복이라니까요?
아, 원래 사자들은 배를 보이는 게 복종의 의미였나?
“삐비잇!”
자, 여기요!
슈페나는 서둘러 푸른 배를 까뒤집었다.
그러면서 길을 잃은 아이처럼 삐삐, 애처롭게 울음소리를 내었다.
살려달라는 애원이었다.
그럼에도 칸은 아랑곳하지 않고 뒤적뒤적 슈페나를 살폈다.
간을 보는 건지 그루밍도 하고, 발로 툭툭 건드리고, 아프지 않게 목덜미를 물더니 들었다 놨다 해보고, 그러기를 몇 분.
-파랑새네.
점잖은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웅웅 슈페나의 머릿속에 울렸다.
그녀는 깜짝 놀란 얼굴로 예비시어머니를 쳐다보았다.
고위급 수인은 자신의 생각을 다른 이에게 전달할 수 있다더니.
그 능력을 쓴 게 틀림없었다.
‘역시 어머님은 대단하구나.’
멋있으면 언니, 귀여우면 동생, 강하면 어머님.
저도 모르게 칸을 어머님이라 부르게 된 슈페나였다.
그녀는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칸을 올곧게 마주 보며 감탄했다.
그에 칸의 눈썹이 슬쩍 위로 향하고 눈가가 묘하게 일그러졌다.
저런 간 큰 식사거리도 있네? 라고 말할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내가 너무 대놓고 쳐다봤나 봐.’
슈페나는 소심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그래도 당장 아그작아그작 씹어 먹을 듯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고양이가 다 잡은 생쥐를 이리저리 굴리며 가지고 노는 것과 비슷한 이치일 터.
‘죽일 것 같진 않은데.….’
슈페나가 힐끔 칸의 눈치를 살폈다.
한참 동안 슈페나를 데리고 손장난을 치던 그녀는 명쾌하게 결론을 내렸다.
– 신선하군. 반응이 즉각적이야.
예?
팔딱팔딱 활어처럼 먹음직해 보인다는 뜻은 아니겠죠?
순간 겁을 집어먹은 슈페나는 무해하게 눈웃음을 짓곤 도로 바닥에 엎어졌다.
그러고는 잽싸게 배를 드러내며 싱싱하지 못한 척을 했다.
뒤집어진 채 물 위를 둥둥 떠다니는 죽은 생선처럼.
하지만 어머님의 낯은 여전히 사납게 찡그려져 있었다.
‘이게 아닌가?’
고민하던 슈페나는 얼른 정자세로 돌아와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다 이내, 들고 있던 날개를 양옆으로 구부려 하트를 만들어냈다.
아양이라도 떨어보려는 수작이었다.
슈페나의 필사적인 노력을 차분히 감상한 칸이 무덤덤하게 의문을 표했다.
-싸우자는 건가?
아뇨, 이건 어머님의 두개골을 반으로 쪼개버리겠다는 의미가 아닌데요.
슈페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강하게 부정했다.
칸이 느릿하게 커다란 앞발을 움직였다.
한껏 겁을 집어먹은 그녀는 두리번거리면서 빠르게 주변을 탐색했다.
마침 언니가 떨어뜨린 걸로 보이는 푸른 보석 몇 알이 눈에 띄었다.
슈페나가 빛의 속도로 사파이어를 주워 어머님에게 건넸다.
“삐비이!”
뇌물이었다.
-작은데 발칙해. 그리고 그 문양…….
칸의 고개가 갸우뚱 옆으로 기울었다.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사자의 눈빛은 슈페나의 오른쪽 날개에 머물러 있었다.
슈페나가 의아하게 제 날개를 들어 쳐다봤다.
푸른 날갯죽지에는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보석 같은 모양새의 반점이 있었다.
‘왜 내 몸을 유심히 훑는 거지?’
있는 살림, 없는 살림 싹 다 털어 오라는 건가!
번뜩 깨달음이 들었다.
있는 수인이 더하다니까.
속으로 툴툴거린 그녀는 우선 보석을 입에 물고 날아가 칸의 등 위로 친히 얹어주었다.
배송 서비스까지 확실하게.
‘이 정도면 살려주겠지? 더 이상은 없는데….’
슈페나가 초롱초롱 불쌍한 눈빛을 보내고는 슬그머니 뒷걸음질을 쳤다.
소용은 없었다.
냉혈한 눈빛으로 주시하던 칸이 그녀의 뒷목을 낚아채 물었으므로, 다행히도 힘 조절을 했는지 딱히 아프지는 않았다.
그러나 슈페나의 시련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
어머님은 포스 넘치는 걸음걸이로 저택을 배회했다.
이미 저택 점령을 끝낸 건지, 가면 갈수록 험악한 인상의 사자들이 늘어났다.
그들은 그르렁거리며 우리 주위를 뱅글뱅글 스쳐지나갔다.
우두머리 사자가 파랑새를 운반하는 광경은 처음이겠지.
호기심 어린 맹수들의 시선에 질식사할 것만 같았다.
칸에게 대롱대롱 매달린 슈페나는 날개로 두 눈을 꼭 가리곤 와들와들 몸을 떨었다.
이윽고, 목적지에 도착한 듯 칸이 우뚝 그 자리에서 멈췄다.
슈페나가 슬쩍 눈길을 돌렸다.
‘여긴….…?’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3화
호적상 아버지인 독수리 가주의 집무실이었다.
‘뭐지? 같이 들어가자는 건가?’
슈페나가 갸웃거리는 사이, 칸은 오른발을 까딱거려 근처에 있던 제 비서를 불러내었다.
-정원에 가서 놀아주고 있어.
단단히 일러둔 칸은 슈페나를 비서의 머리 위에 앉혔다.
슈페나는 폭신폭신한 비서 사자의 털 위로 얌전히 엉덩이를 붙이고 착석하게 되었다.
‘응?’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일까 싶어 슈페나는 밤색 눈망울을 요리조리 굴렸다.
조막만 한 파랑새가 얼떨떨해하는 모습에 희미하게 웃은 칸은 왼발로 방문을 설렁설렁 걷어찼다.
퍽—
튼튼한 나무문이 종잇장처럼 찢어발겨졌다.
가공할 괴력에 부리가 저절로 벌어졌다.
집무실 안에는 밧줄에 꽁꽁 묶여 포박당한 호적상 아버지가 보였다.
아무래도 예비 시어머니가 아버지와 정다운 상견례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살벌한 안부인사와 붉은 선혈이 낭자한 협상을 하려는 거겠지만.
‘나 고어물은 못 본다고.’
물론 남보다 못한 아버지가 참교육 당하는 건 환영이었다.
슈페나는 응원의 마음을 담아 살랑살랑 날개만 흔들었다.
비서 사자가 느릿느릿 정원으로 향한 탓에 더는 엿볼 수 없었으나, 둘이 나눌 대화는 뻔했다.
호적상 아버지는 분명 슈페나를 팔아넘길 터.
‘가자, 결혼!’
어차피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그동안은 원작을 피해 달아날 수조차 없었다. 독수리들의 이능은 추적 계열이었으니.
뒤쫓을 대상의 깃털 한 올만 있어도 바로 그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골치 아픈 능력.
도망가 봤자 다시 잡혀올 게 뻔했다.
한 달 전만 해도 심부름하는 척 탈주하려다가 걸려서 혼나지 않았던가.
‘나 같은 애를 왜 굳이 추적하려 하는지 모르겠지만.’
독수리 가문 사람들은 슈페나를 구박하면서도 묶어두려는 것 같았다.
이상하게도.
‘뭐, 몸을 내뺄 곳도 없긴 하지.’
책에서도 푸른색 새는 슈페나밖에 없었는걸.
‘그리고 무슨 예언 때문에 파랑새는 새들 사이에서 흉조가 되어버렸다고 했나.’
파랑새를 반길 이들은 없었다.
차라리 원작대로 남주의 부인이 되는 것이 나았다.
합법적으로 독수리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인 데다가 정해진 미래도 알고 있으니까.
슈페나의 죽음.
그건 그녀가 남주한테 집착했기에 벌어지는 엔딩이었다.
좀 더 면밀히 따지자면 그녀 때문에 여주가 다칠 뻔한 까닭이었지.
슈페나가 무능해서 주변 사자들의 미움을 샀던 탓도 있었고, 그런 결말을 알고 있으니 피해 가면 그만이지 않으려나.
‘나 완전 방목형 수인이야!’
슈페나는 원작과 달리 남주를 열심히 방목할 자신이 있었다.
귀뚜라미나 밀웜은 절대 주지 않을 거였다.
‘질투? 나쁜 짓? 그럴 시간에 잠이나 더 자겠다.’
그런 생산성 없는 일에 기력을 쏟을 생각 없었다.
잠손실 온다고!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다가 깔끔하게 이혼해줄 계획이었다.
능력을 중시하는 사자들에게 맞춰 유능한 면모를 보이면, 원작처럼 핍박받지도 않겠지.
설령 누군가가 괴롭힌다고 해도 잠깐 주저앉았다가 일어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난 잘 살 거야.’
슈페나의 양 날개가 주먹을 쥐듯 비장하게 말려들어갔다.
***
슈페나가 한창 행복회로를 돌릴 무렵, 칸은 비즈니스를 하고 있었다.
칸 체드윅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던 독수리 가주가 겨우 입을 열었다.
“저, 저번 회담 때 몰라뵙고 저지른 무례한 언사는 사죄드립니다.
그래서 말인데… 제안을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귀찮은데.
칸은 심드렁하게 대꾸하며 날카롭게 튀어나온 발톱을 바닥에 대고 갈았다.
서걱서걱, 대리석이 썰리는 소리가 스산하게 방 안을 맴돌았다.
그 싸늘한 태도에 독수리는 허겁지겁 본론을 꺼냈다.
“살려만 주신다면 매년 일정량의 공물을 보내겠습니다. 그, 그리고!”
잠깐 마른침을 삼킨 그가 비장한 목소리로 말을 더했다.
“제가 금이야 옥이야 귀하게 기른 딸도 드리겠습니다.”
물론 구라였다.
귀하게 키운 딸은 무슨.
골칫덩어리였던 자식놈을 보낼 생각이었다.
바로 파랑새, 슈페나를.
그 약해빠진 파랑새가 약육강식이 모토인 사자들의 영토에서 살아남을 리는 없었으니까.
죽으면 도리어 트집을 잡아 오늘의 굴욕을 만회할 수 있을 터.
‘예언 때문에 혹시 몰라 데리고 있었는데, 그냥 이 시점에서 손터는 게 나을 것 같군.’
소중한 친자식을 사자들의 영지로 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이게 가장 좋은 선택지였다.
독수리 가주는 내심 자신의 계략에 손뼉을 쳤다.
그에 칸의 눈빛이 의뭉스레 번뜩였다.
그녀가 아까보단 흥미가 도는 듯한 낯빛을 하곤 물었다.
-혼인동맹이라도 맺자는 건가?
종족 간의 화합을 위한 결혼은 드물긴 하지만 이따금씩 벌어지는 일이었다.
독수리 가주는 비굴한 태도로 손을 비비적거리더니 대답했다.
“네, 네. 그러합죠.”
-흐음.
고민하는 기색을 알아차린 그가 간신배처럼 활짝 웃으며 설득했다.
“독수리 가문은 조류 연합의 대표이지요. 저희와 동맹을 맺으시면 신의 축복을 받은 땅으로 통하는 리만 운하도 개방하겠습니다.”
확실히 사자들에게 나쁠 것 없는 제안이었다.
‘병력 손실 없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겠군.’
실은 리만 운하를 노리고 이곳에 쳐들어온 게 아니었나.
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독수리 가주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연합 내의 다른 세력에게도 매년 공물을 바치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니”
-파랑새.
칸이 그의 얘기를 끊고 못을 박았다.
“예?”
-걔로 하지.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독수리 가주가 의아한 듯 되묻자, 칸이 맹랑했던 파랑새를 떠올렸다.
‘분명 파랑새의 날개에 있던 표식에서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지. 내 첫째 아들놈의 냄새가.’
후각이 발달된 그녀조차 뒤늦게 알아챘을 만큼 희미한 잔향.
흥미가 돋았다.
3년 전, 몇 달 동안 행방불명이었던 아들이 돌아왔을 때에도 푸른 새의 깃털을 묻히고 있었지.
그 파랑새가 제 아이와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뜻이었다.
그것도 꽤나 밀접한.
문양은 수인들에겐 목숨이나 다름없는 두 번째 심장, 타나토를 걸고 모종의 계약을 맺었을 때만 생겼으니까.
기왕 혼인동맹을 맺게 될 거라면 아들놈과 인연이 있는 듯한 쪽을 고르는 게 나을 터.
그리고 신경 쓰이는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예언 속의 푸른 새.’
만약 그 아이가 맞는다면…….
곁에 두고 지켜봐야겠지.
그녀가 깊어지려는 상념을 갈무리한 뒤, 시니컬한 말투로 답했다.
-너희들이 말한 내 아들의 신붓감.
‘사자 가주가 그 파랑새를 어디서 만났지? 멍청하게 눈에 띄었나?’
독수리 가주는 어리둥절했지만 잠시뿐이었다.
안 그래도 팔아넘길 생각이었는데 사자 가주가 먼저 냉큼 데려가겠다니, 이게 웬 떡인가.
뜻밖의 개이득에 독수리는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그리하겠습니다.”
-공물은 1년에 1000만 칼리아로 하지.
“예? 그건 너무…..”
5년 치 가문 예산과 맞먹는 막대한 금액에 독수리 가주가 곤란하다는 듯이 말끝을 흐렸다.
한 가
-싫다는 건가?
으르르, 흉포한 울음소리와 함께 사자의 턱 끝이 잘게 진동했다.
칸은 저승사자와도 같이 짙게 가라앉은 저음으로 그를 위협했다.
-이곳이 네 무덤이 되길 원한다면 기꺼이 죽여주마.
“노력, 해보겠습니-”
그녀의 황금안이 서슬 퍼렇게 번뜩였다.
그 눈빛을 정면으로 받아낸 독수리는 벌벌 떨더니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
“죄송합, 니다. 어, 얼마든지 드리겠습니다.”
독수리 가주는 우선 칸의 심기를 어그러뜨리지 않도록 사죄하며 생각했다.
진짜배기인 땅문서를 숨긴 비밀 금고 위치는 들키지 않았으니, 괜찮을 거라고, 본디 다른 수인들에게서 빼앗은 땅을 거래하며 세를 불린 독수리들이 아니었던가.
-그래?
칸의 목소리가 설핏 누그러지는 듯했다.
독수리 가주는 이제 된 건가, 하는 생각으로 마음을 놓았다.
“예, 예! 물론입니.… 컥!”
그때였다.
칸이 짐짓 혀를 차곤 육중한 무게를 실어 앞발을 휘두른 것은.
퍼억, 둔탁한 소리가 집무실 안을 우레와도 같이 크게 울렸다.
독수리 가주가 피를 흩뿌리며 벽면으로 날아가 박혔다.
죽은 건 아니었다.
몹시도 아픈 치명상을 입었을 뿐.
독수리 가주를 후려친 칸의 앞발에는 심상치 않은 황금빛 오오라가 서려있었다.
강력한 신체 계열인, 사자 고유의 이능을 사용했다는 증거였다.
칸이 부하가 건넨 타월에 앞발을 닦으며 독수리 가주를 향해 서늘히 뇌까렸다.
-근데 너, 구린내가 나.
아까부터 다른 꿍꿍이가 있는 듯 눈치를 보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처리하는 게 편하지.’
어차피 독수리 가주 대신 그 자리에 앉힐 꼭두각시는 많았다.
칸은 무심하게 턱짓했다.
인간화해 있던 부하가 기민한 눈치로 기절한 독수리의 발에 인주를 묻혔다.
그러고는 급히 작성한 계약서에 발바닥 도장을 찍었다.
정말 빠른 일처리였다.
이후로도 칸은 몇 가지 명을 더 내려 쌈박하게 사태를 매듭지었다.
그리곤 아무도 없는 방에 들어가 인간화를 했다.
이제 무력을 쓸 일은 딱히 없지 않은가.
딱 떨어지는 핏의 검은 정장까지 갖춰 입은 그녀는 벌컥, 방문을 열었다.
또각또각, 칸의 검은 구두 소리가 소름 끼치리만치 적막한 복도의 공기를 타고 울려 퍼졌다.
‘잘 놀고 있으려나.’
칸은 곧장 정원으로 걸어갔다.
“삐빗?”
그곳에는 그녀의 비서와 엎치락뒤치락 레슬링 놀이를 하는 슈페나가 있었다.
“삐비비비!”
슈페나는 사자의 발바닥을 향해 파랑새 왼발킥을 날렸다.
검정 젤리에는 새의 발 모양을 따라 폭 자국이 났다.
비서 사자가 느른하게 크앙 소리를 내었다.
천진난만한 손녀딸과 놀아주는 듯한 할아버지 사자의 고충이 담긴 울림이었다.
한껏 땀을 흘리다 보니 지친 슈페나도 미약하게 울음을 토했다.
“삐비이….”
비서 사자가 힘이 떨어진 기색이 역력한 슈페나의 곁에 자리를 잡고 털썩 엎드렸다.
그녀도 슬금슬금 비서한테 다가가 축 늘어졌다.
‘사자랑 놀아주는 것도 힘드네.’
속으로 중얼거린 슈페나는 허공에 대고 발길질을 했다.
그러던 중, 금발의 여인을 발견했다.
‘어?’
화려하고도 우아한 기백이 느껴지는 중년의 여성이었다.
‘왜 익숙하지?’
아름다우신 아주머니가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를 발견한 비서는 돌연 빳빳하게 털을 세우곤 복종의 자세를 취했다.
감흥 없이 그 인사를 받은 여인은 표정 변화 한 점 없는 무뚝뚝한 낯으로 슈페나를 내려다보았다.
“안녕?”
그녀가 고저 없는 음성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며늘아가.”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4화
그 시린 입가에는 언뜻 희미한 호선이 그려진 것 같기도 했다.
슈페나는 얼떨떨하게 두 날개를 공손히 모았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은 분위기여서.
‘방금 저 아주머니가 며늘아가, 라고 하지 않았나? 그러면 설마’슈페나는 뽁뽁, 멋진 아주머니의 주위를 서성이며 세심히 관찰했다.
눈부신 금발과 샛노란 황금안.
예비 시어머니가 사자의 모습이었을 때 지녔던 특징이었다.
“삐?”
슈페나의 꽁지깃이 슬그머니 위로 솟았다.
아무래도 예비 시어머니가 맞는 듯했다. 호적상 아버지와도 원작대로 이야기가 끝난 모양이었고,
‘그럼 나 이제 며느리인 거야?’
가족이 될 사이인데 죽일 리는 없겠지.
계산을 마친 슈페나는 어머님에게로 날아가 날개를 내밀었다.
“삐비비비빗!”
잘 부탁드린다는 의미의 악수였다.
‘빠른 태세 전환만이 조생의 살길이지!’
그런데 칸은 슈페나의 악수를 받아주지 않았다.
대신 슈페나를 요상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새가 악수하자는 게 이상한가?’
아니면 의미를 알아듣지 못하는 것일지도.
입던 옷을 잃어버려서 인간화는 못 하는데….
별수 없이 어머님의 시선을 받아내며 파닥파닥, 부산스럽게 날갯짓을 했다.
인간화를 하지 못한다는 사정을 설명하는 몸짓이었다.
한참 그런 슈페나를 지켜보던 칸이 입을 열었다.
“먼저 자기소개를 하라는 건가.”
대범하군.
대놓고 잘못 짚은 칸은 짤막하게 통성명을 했다.
“칸 체드윅, 사자들의 지배자다.”
“삐비이.”
이미 알고 있던 사실에 슈페나는 김빠진 기색으로 울음소리를 내었다.
‘자기소개하자는 건 아니었는데.’
그래도 예의는 지켜야지!
그녀가 퍼드득퍼드득, 더 요란해진 몸놀림으로 호응해주었다.
점점 날개가 저려왔다.
그때, 짤막한 칸의 한마디가 들렸다.
“그리고.”
느려진 슈페나의 움직임을 감지한 어머님이 손가락을 즉 들이밀었다.
올라타라는 신호였다.
눈치 빠르게 슈페나가 칸의 검지에 발을 디디자, 칸은 말을 이었다.
“오늘부터 네 시어머니가 될 수인이지.”
슈페나는 몰랐다는 양 화들짝 오른쪽 날개로 제 부리를 가렸다.
연기대상을 받아도 될 만큼 천연덕스러운 손짓이었다.
‘알고 있던 걸 티 내면 의심할 수도 있으니까.’
그에 칸은 피식 웃으며 퍽 친절하게 슈페나와 눈높이를 맞추어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새와 사자가 혼인동맹을 맺기로 했거든. 이해했나?”
슈페나가 빠릿빠릿하게 날개를 제 이마에 갖다 붙여 칼 같은 경례각을 만들었다.
슈페나로서는 바라던 일이었으니 바로 대답을 할 수 밖에.
“삐벳!”
막 들어온 신입처럼 우렁찬 기합은 덤이었다.
“내가 본 새 중에 가장 독특하네.”
칸 체드윅은 일견 떨떠름한 어투로 속마음을 내비쳤다.
그녀가 보기에 슈페나한테는 특이한 구석이 있었다.
맹수 집안에 타의로 시집갈 상황이라면 보통은 두려워하는 게 정상 아닌가.
그렇지만 겁대가리를 상실한 저런 모습이 이상하게도 싫지는 않았다.
칸의 눈매가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한 만큼 슬며시 휘었다.
슈페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눈을 말똥말똥 깜박이고 있었다.
문득 칸은 궁금해졌다.
‘사자 영지에 가서도 지금 같은 반응이려나.’
어쩐지 얼른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내일 아침에 본토로 귀환한다.”
칸이 저음으로 얘기했다.
비서에게 하는 말이었다.
칸은 슈페나를 아까처럼 제 비서의 머리 위로 얹고는 신신당부했다.
“잘 데리고 있도록.”
“크왕”
비서가 믿음직스레 대답했다.
“나는 할 일이 있으니, 나중에 다시 보자꾸나.”
“삐빗!”
칸이 말을 마치자마자, 슈페나는 복슬복슬한 사자의 머리털에 배를 가져다 대고 엎드렸다.
둥둥 떠다니는 작은 섬에 탄 기분이었다.
그 과정을 어이없게 지켜보던 칸이 저도 모르게 뺨을 긁적였다.
그러다 미련 없이 등을 돌려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처리할 게 아직 많이 남아 있었으니까.
까만 점이 될 때까지 어머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배웅한 슈페나는 생각에 잠겼다.
‘내일 아침에 출발한다고 했지?’
그렇다면 서둘러야 했다.
저택 곳곳에는 돈과 보석 같은 사치품이 숨겨져 있었다.
주로 언니오빠들이 잃어버린 물품을 슈페나가 차곡차곡 모은 거였다.
세상 살기가 얼마나 팍팍한데 비자금은 챙기고 새 출발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비서 사자가 있어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어딘가 가려고 하면 따라올 테지.’
눈치를 보던 순간, 마침 비서 사자가 지루한 듯 하아암, 하품을 했다.
곧 곯아떨어질 것 같은 안색에 슈페나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얼른 주무셔라.’
일부러 삐비삐비, 자장가를 부르며 슬금슬금 튈 준비를 했다.
드르렁, 쿨~
어느새 비서는 코오코오, 잠을 청하고 있었다. 원래 사자는 낮잠으로 유명한 동물이 아니던가.
그가 깨기 전에, 빨리 비자금만 챙기고 돌아올 계획이었다.
슈페나는 재빨리 저택 안으로 날아갔다.
사치품을 찾아 꺼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저택을 차지한 사자들이 어슬렁어슬렁 복도를 걸어 다니긴 했으나, 다행히 마주칠 일은 없었다.
워낙 외진 장소에만 숨겨둔 덕분에.
슈페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이능력을 사용하고자 벳기합을 불어넣었다.
“올겨울에 능력을 깨우쳐서 얼마나 다행인지.”
슈페나의 이능은 염력이었다.
물건을 허공에 둥둥 띄우고 조종할 수 있는 힘.
큰 제약 없이 변신할 수 있는 인간화와 달리, 이능은 정신력을 소모했다.
갈고닦을수록 향상되는 정신력은 이능을 더 오래,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게끔 도왔다.
그래서 그동안은 이능을 발현했다는 걸 감추고 몰래몰래 수련해 왔었다.
이능력을 습득한 지 얼마 안 되었기에, 실력이 부족한 편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언니오빠들 성격상, 들키면 나를 더 개처럼 부려먹을 게 뻔해!’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삐비잇!”
가방에 푸른 지폐와 자잘한 보석이 염력에 의해 담기는 현장을 감독하던 슈페나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러는 사이, 하던 일은 마무리되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골방에 뒀던 내 물건만 가져오면 되겠다!’
슈페나는 다른 이들이 없는지 힐끔힐끔 살피며 골방으로 이동했다.
그렇게 열심히 짐을 챙길 무렵, 문밖에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 왔다.
‘누구지?’
그녀가 서둘러 가방을 구석에 처박았다.
문이 열리고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벳?”
“사자에게 던져졌는데도 살았네?
생명력이 참 끈질겨.”
도망간 줄 알았던 첫째 언니와 그 똘마니 언니오빠들이었다.
슈페나는 깃털을 빳빳이 세우곤 긴장상태로 그들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첫째 언니는 가소롭다는 듯 픽, 코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껄렁껄렁하게 말을 이었다.
평소처럼 손찌검을 할 기색은 아니었다.
“느닷없는 혼인동맹이라니. 소식은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네가 우리들 대신 수고 좀 해라.”
“삐빗?”
벌써 아버지가 슈페나를 팔아넘겼다는 이야기를 듣고 온 듯했다.
아마 실컷 비웃고 조롱하러 온 거겠지.
그러나 이 혼인동맹은 누구보다 슈페나가 바라던 일이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준비는 이미 되어있었다.
첫째 언니가 비스듬히 팔짱을 끼고는 이야기했다.
“아버지가 오늘내일하셔. 망할 사자 놈들 때문에 말도 안 되는 계약까지 체결했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누르려는 듯 잠긴 목소리.
이 얘기를 하는 언니의 이마에는 만화처럼 빠직 마크가 솟아있었다.
예상대로 호적상 아버지는 우리 어머님한테 된통 당한 것 같았다.
오늘내일한다니 생각보다 심각한 듯해서, 이걸 좋아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조금 쌤통이란 생각은 들었지만.
첫째 언니 곁에서 슈페나를 노려보며 서 있던 둘째 오빠가 돌연꾸깃꾸깃한 종이를 내밀었다.
“여기 계약서 보여?”
독수리 가주의 것으로 보이는 거대한 발바닥 도장이 찍힌 문서였다.
“말이 좋아 신부지. 너도 사자들한테 잡혀가서 먹힐 신세고.”
첫째 언니는 그 계약서의 조항을 조목조목 손가락으로 짚어 가리키곤 입을 떼었다.
‘이렇게 설명해주는 걸 보면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한데.’
익숙하고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간 독수리 집안에서 눈칫밥을 먹으며 살아온 삶의 데이터베이스가 말해주는 직감이었다.
그리고 슈페나의 예상은 적중했다.
둘째 오빠가 기다렸다는 듯 고급스러운 벨벳 케이스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딱 봐도 비싸 보이는 루비 목걸이였다.
그가 동네 양아치처럼 불량한 말투로 거들먹거리더니 말을 건넸다.
“이건 평범한 목걸이 같아 보이는 폭탄이야.”
폭탄이라고?
슈페나의 눈이 크게 뜨였다.
생각나는 게 하나 있었으니까.
‘이거 설마 원작에 나온 그 물건인가?’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5화
소설에는 슈페나가 몰래 지니고 있던 루비 목걸이에 관한 사건이 나온다.
‘무려 폭약이 숨겨져 있는 무시무시한 보석이었지.’
그리고 그 에피소드에는 또 다른 메인 악녀가 얽힌다.
권력욕이 대단한 사자 악녀.
그녀는 교묘히 슈페나를 속여 원작 여주에게 보석을 선물한다.
그러다 여주인공이 크게 다칠 뻔하고 모든 죄는 슈페나가 뒤집어 썼다.
한마디로 이 목걸이는 슈페나를 죽게 만드는 가장 큰 원흉이었다.
‘그거 언니오빠들이 준 거였어?’
슈페나는 충격에 휩싸인 낯으로 깃털을 부르르 떨었다.
정말이지 조생에 도움이 하나도 안 되는 수인들이었다.
그때, 첫째 언니가 목걸이를 낡은 나무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명령하듯 말했다.
“효도한다, 생각하고 결혼식 날 터뜨려. 아버지 원수는 갚아야지.”
허, 상상을 초월한 몰상식한 발언에 기가 찼다.
슈페나는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곤 남몰래 이죽거렸다.
‘뭐래.’
그러니까 여태까지 가족 취급도안 하고 박대해왔으면서 자기들을 위해 죽으라는 개소리였다.
‘양심 뒤졌냐?’
수인이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분노를 담은 기다란 파랑새의 꽁지깃이 부들부들 요동쳤다.
그럼 원작에선 이 목걸이를 터뜨리는 데 실패해서 가지고만 있었던 걸까?
그러던 중, 메인 악녀한테 들켜서 이용당한 거고?
‘애초에 소설 속 슈페나가 폭탄을 터뜨릴 만한 성정은 아니긴 하지.’
소설 속의 죽음까지 함께 곱씹을수록 더욱 어이가 없었다.
슈페나는 성난 황소처럼 콧김을 내뿜으며 언니오빠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동자에 그녀가 담겨있지 않았다.
냉기만이 가득했을 뿐.
‘그래도 13년을 같이 살았는데..….’
기대가 없었기에 실망감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묘하게도 허탈한 기분이 이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최악이었다.
그 현실을 인정하고 나니 결심이 섰다.
저 못돼 처먹은 언니오빠들의 일그러진 낯짝을 봐야겠다고.
‘이대로 그냥 떠나기엔 아깝지.’
슈페나는 세차게 날아올라 김이 서린 창문에 날개로 글씨를 썼다.
-머리나 벗겨져라, 이 빌어먹을 독수리들아!
늘 내뱉고 싶던 저주였다.
약 올리려는 속셈이기도 했고, 사자 가문의 신붓감으로 정해진 이상, 그들은 슈페나를 어떻게 하지 못할 터였다.
‘뭐, 성질 정도는 부리겠지만.’
역시나 다혈질인 둘째 오빠가 손을 올리곤 위협했다.
“저걸 그냥, 확!”
그러자 슈페나를 죽일 듯이 째려 보던 첫째 언니가 그를 말렸다.
“야, 참아. 어차피 사자들 장난감으로 던져질 애야. 건드리면 일만 더 복잡해져.”
그녀는 슈페나의 속내를 다 꿰뚫고 있다는 듯 짐짓 무섭게 으름장을 놓았다.
“사자한테 일러봤자 소용없을걸.
걔네가 널 살려둘 것 같아? 불길한 파랑새인 너 따위를?”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었다.
결국 원작에서 슈페나는 배드엔 딩을 맞이하지 않았던가.
그렇지만 자신을 괴롭힐 사자보단 괴롭힌 독수리가 미운 게 당연한 이치였다.
“언니, 이제 가야 해. 겨우 둘러 대서 다 같이 빠져나왔는데 시간을 끌면 사자들이 의심할 거야.”
똘마니들 중 하나가 첫째 언니를 재촉했다.
첫째 언니는 퍽 세찬 힘으로 슈페나의 머리에 꿀밤을 놓았다.
그리고는 한 번 더 살벌한 경고를 한 뒤, 골방을 빠져나갔다.
“선택 잘해라.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그녀가 사라지자, 똘마니들은 일사불란하게 악담을 퍼붓고 따라 나갔다.
휘몰아치듯 지나간 폭풍에 가슴을 쓸어내린 것도 잠시.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둘째 오빠가 잽싸게 슈페나의 부리를 잡아했다.
“삐비비빗!”
뭐 하는 거야, 이 인성 터진 오빠놈아!
슈페나는 날개를 푸드덕푸드덕움직이며 반항했다.
소동물인 파랑새의 모습이라 인간화해있던 오빠놈을 이길 순 없었다만,
“벌 받으면서 가슴 깊이 생각해 봐라, 이 멍청아!”
그는 가느다란 슈페나의 다리에 하얀 실을 묶고, 그 끄트머리를 천장 아래 낡은 남포등과 단단히 엮었다.
당연하게도 슈페나는 뒤집힌 채로 굴비처럼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리게 되었다.
워낙 갑작스레 벌어진 일이라 반항조차 할 수 없었다.
“삐비비비잇!”
그녀가 날개를 파닥거리며 속으로 욕을 했다.
‘와 씨, 피 쏠려….’
발버둥 치는 슈페나를 보던 둘째 오빠는 빈정거렸다.
“그러니까 어디서 감히 말대꾸하래.”
“삐비빗!”
“고작 파랑새 주제에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그는 얄밉게 비아냥거리는 것도 모자라 바닥에 튀, 침까지 뱉었다.
그러더니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혼자 남은 슈페나가 빠득 부리를 갈았다.
그녀는 침착하게 염력으로 실을 풀고는 흥, 코웃음을 치며 꽁지깃을 씰룩씰룩 흔들었다.
‘내가 이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은 몰랐겠지!’
이능력?
불현듯 망할 언니오빠들을 엿 먹일 신박하고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어머님한테 방금 일을 꼰지르는 것뿐 아니라.
“삐빗!”
슈페나는 그들이 사라진 자리를 응시하며 비장하게 소리를 내었다.
앙증맞은 날개가 둥글게 말리며 주먹이 쥐어졌다.
내일 아침이면 영영 이곳을 떠날 텐데, 가기 전에 시원하게 복수는 해줘야지.
겸사겸사 목걸이도 처리하고.
***
슈페나가 전의를 불태우는 와중, 대충 일을 마친 칸이 다시 정원으로 돌아왔다.
“그 파랑새는 어디 갔지?”
칸이 드르렁 쿨, 퍼질러 자고 있는 제 비서를 깨우며 물었다.
아직 잠에서 덜 깬 비서 사자는 의아함이 서린 울음소리를 내뱉었다.
“크왕?”
모른다는 뜻이었다.
그에 칸이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엄하게 질책했다.
“적진 한복판에서 늘어지게 낮잠이나 자고, 군기가 빠졌군.”
“크와우우웅…….”
그제야 본인의 실책을 깨달은 비서가 시무룩하게 말꼬리를 흐리며 반성했다.
“내가 찾아볼 테니 반성하고 있도록.”
칸은 그런 비서의 등을 툭 치곤 예리하게 이리저리 시선을 돌렸다.
‘다행히 멀리 간 것 같진 않네.’
칸은 뛰어난 사냥꾼이었다.
작디작은 파랑새의 자취를 찾아 나서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였다.
“이곳인가.”
칸은 슈페나가 있는 골방 바로 앞에 멈추어 중얼거렸다.
안에서 자그마한 생명체의 기척이 느껴졌으니까.
칸은 주저 없이 그냥 문짝 자체를 떼어버렸다.
문고리를 돌린다는 게 그만, 힘을 너무 많이 준 덕분이었다.
“벳?”
시방, 뭐여.
갑작스러운 재해에 자라같이 목을 움츠린 슈페나는 쭈뼛쭈뼛 눈치를 살폈다.
언니 오빠들이 다시 돌아온 것인가 했는데 어머님이었다.
‘날 찾으러 온 건가?’
그렇다면 지금이 기회일 터.
어머님에게 이 루비 목걸이의 정체를 알려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 마음먹은 그녀가 목걸이를 입에 물고 어머님에게로 성큼 발을 디뎠다.
그 적극적이고 비장한 태도에 칸은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한 발짝물러났다.
슈페나가 날개를 쫙 펴곤 무언가 하는 시늉을 했다.
‘나에겐 바디랭귀지라는 원초적이지만 효율적인 의사소통 방법이 있지!’
사실 인간화를 하면 쉽게 해결될 일이었다.
그런데.….
옷이 없지 않은가.
겨울용 원피스는 산딸기를 따러갈 때 입었던 게 전부였으니.
아무튼 슈페나는 폭탄의 여파에 휩쓸려나가는 소시민1을 연기하며 목걸이 설명에 사력을 다했다.
바닥을 데굴데굴 구른 파랑새가 씩씩하게 일어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그리곤 뿌듯한 표정으로 짜잔 날개를 들어 올렸다.
“삐빗”
짠!
끝맺음의 세리머니였다.
그에 칸은 일정한 박자로 기립박수를 치며 못내 감탄했다.
“생각보다 유연하군. 잘 봤단다.”
이건 서커스가 아닌데요?
딱 봐도 알아듣지 못한 듯싶었다.
‘내 묘사가 얼마나 자세했는데!’
답답함이 들었다.
슈페나가 제 가슴팍을 날개로 퍽 두들긴 뒤, 다시 설명에 박차를 가했다.
그렇게….
“벳!”
“그래, 앞구르기.”
“삐삐삐!”
“뒤구르기를 더 잘하는군.”
“삐비비이….
“호오, 옆돌기도 할 줄 안다니.”
이런 심각한 의사소통의 오류를 대략 1시간 동안 거치고 난 뒤.
“요약하자면 저 목걸이는 폭탄이고 독수리들이 너에게 강제로 취여 줬다는 건가?”
“삐빗!”
정답입니다!
저질 체력 때문에 헥헥대던 슈페나가 신나게 고개를 끄덕이곤 반짝반짝 눈빛을 보냈다.
어머님에게 사실을 알렸으니 이제 다음 플랜으로 넘어갈 차례였다.
‘빅엿을 먹여주마!’
그녀는 남다른 각오로 의지를 활활 불태웠다.
슈페나가 생각해둔 계획을 실행에 옮기려 눈치를 보는 사이, 어머님은 문득 떠올랐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그 얘기를 왜 동물의 모습으로 하고 있던 거지?”
“삐비…….”
묘기를 부리느라 진이 다 빠진 슈페나는 터덜터덜 어머님에게로 다가갔다.
그러더니 칸이 입은 검은 바지 정장 끝을 부리로 앙 물었다.
올망졸망한 파랑새의 밤색 눈망울이 칸을 올려다보았다.
옷이 없다는 뜻의 바디랭귀지였다.
어머님은 담담하게 슈페나와 눈을 맞추곤 입을 열었다.
“옷을 새로 맞춰야겠군.”
그리 중얼거리는 칸의 낯은 여느때보다도 진지해 보였다.
그녀가 느른하게 머리칼을 넘기더니 슈페나를 향해 손짓했다.
“따라오렴.”
슈페나는 간신히 힘을 내어 날아올랐다.
그러곤 꽁지깃을 씰룩거리면서 파닥파닥 어머님을 따라 날았다.
목적지는 근처에 있던 손님용 드레스룸이었다.
독수리 저택은 이미 사자들에게 완전히 점령된 덕에 눈치 따윈 보지 않고 들어갈 수 있었다.
칸이 카리스마 넘치는 어조로 옷을 구해오라 명령했다.
사자 가주의 명은 절대적이었다.
드레스룸에는 놀랄 정도로 많은 양의 의복이 겹겹이 쌓였다.
저택 밖 번화가에 있는 옷이란 옷은 모조리 싹쓸이해온 모양새였다.
이제 꽃단장을 할 차례였다.
‘우와.’
거의 한나절 만에 인간화를 하게 된 슈페나는 거울 앞에서 소리 없이 감탄했다.
생기가 깃든 밤색 눈동자와 맑은 바다를 닮아 청명한 하늘빛 머리칼.
사실 달라진 건 별로 없었다.
그래도 옷이 날개라는 말처럼 창백뺨에 생기가 도는 듯했다.
백하던 두 뺨엔 발그스름하게 생그녀가 발목까지 오는 꽤나 긴 개나리색 치마의 주름을 조심스레 매만졌다.
원피스를 재단할 시간이 없어 급하게 기성복을 걸쳤으나, 정말 마음에 들었다.
‘이런 옷은 처음 입어봐.’
새 옷 특유의 자극적이지만 기분좋은 냄새.
매번 언니들이 버린 원피스를 해질 때까지 입지 않았던가.
슈페나의 조생에서 누군가의 체향이 묻어나오지 않는 옷은 처음이었다.
그녀가 멋쩍게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어머님한테 가서 제 옷차림을 보여주었다.
‘어머님은 별로라고 하시면 어쩌지.’
긴장 어린 목소리를 담아 슈페나가 물었다.
“어떠세요…?”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있던 어머님은 무뚝뚝하게 말을 건넸다.
그 입에서 나온 얘기는 뜻밖의 것이었다.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6화
“이름.”
“…네?”
언뜻 칸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당황한 슈페나는 영문도 모른 채소리 높여 이름을 말했다.
“슈, 슈페나입니다!”
슈페나를 꼼꼼히 살펴보던 칸이 솔직한 감상을 말했다.
“작네. 말랐고.”
슈페나는 괜스레 제 팔뚝을 문질렀다.
작다는 이야기 때문일까. 묘한 부끄러움이 몽실몽실 머릿속을 뒤덮었다.
이내 어머님이 무심히 툭 말을 내뱉었다.
“살을 찌워야겠어.”
포동포동 살찌워서 잡아먹을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아하하, 어색하게 웃은 그녀가 애먼 바닥에 시선을 고정했다.
느긋하게 슈페나를 훑어 내리던 어머님이 질문했다.
“좋아하는 음식은 뭐지?”
칸의 날카로운 눈매가 번뜩였다.
알아내면 그 음식을 모조리 사들일 듯한 기세였다.
몹시도 매서운 눈빛에 슈페나는 최대한 무해하게 눈웃음을 지었다.
“나무열매를 좋아합니다!”
벌레는 별로 안 좋아해요…….
“고기.”
“……?”
“송아지가 야들야들하니 맛있어.
앞으론 그걸 먹도록 해.”
칸이 턱을 괴더니 시크하게 말을 이었다.
슈페나가 동그래진 눈으로 빤히 그녀를 쳐다보았다.
‘저는 파랑새인데요.’
물론 인간화를 한 상태에선 개의치 않고 뭐든 먹을 수 있으나, 기분이 좀 그렇지 않은가.
수인과 동물이 구분되어있는 세계관이라곤 하나, 좀 미안하기도 했고.
더구나 송아지는 귀엽잖아.
“넵!”
그러나 슈페나는 유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 보여야 할 어머님한테 어찌 토를 달겠어.
“그럼 옷도 해결되었으니 이만 가봐야겠구나.”
할 말을 마친 칸은 소파에서 일어나 슈페나를 지나쳤다.
내일 아침에 돌아가기 위해선 아직 마무리 지어야 할 일들이 남았으니까.
그저 저 조그마한 파랑새가 이상하게 눈앞에 아른거려서, 잠시 어울려주었을 뿐이었다.
한편, 슈페나는 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바쁘신 건가. 아직 부탁드릴 게 남았는데.….’
슈페나가 용기를 내어 칸을 불렀다.
“저어, 어머님!”
칸이 뜻밖의 소리라도 들은 듯 우두커니 멈춰, 끔벅끔벅 속눈썹을 팔랑거렸다.
다부진 칸의 상체가 슈페나를 향해 천천히 돌려졌다.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다 입술을 달싹였다.
“..?”
“……어머님?”
“네, 어머님.”
슈페나가 쑥스러움을 감추려 살짝 아랫입술을 깨문 채, 말간 미소를 그렸다.
그러곤 정중하게 본론을 꺼내들었다.
“아까 그 목걸이 말이에요. 혹시 저한테 주실 수 있으세요?”
“왜지?”
어머님의 의문에 슈페나가 자못애처로운 어투로 이유를 설명했다.
“언니오빠들한테 되갚을 게 있어서요. 제가 사용하면 안 될까요?
약속할게요. 어머님께 해가 되는 일은 절대”
“맘대로 하렴.”
칸은 대수롭지 않게 허락했다. 그리고는 짧게 말을 덧붙였다.
“..… 며늘아가.”
며늘아가라는 퍽 친밀한 단어를 입에 담은 칸의 귓불은 평소보다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라있었다.
아까도 슈페나를 며늘아가라고 부르긴 했지만, 어감이 묘하게도 새로워서.
‘어머님이라고?’
아마 저 쪼그만 파랑새에게 낯선 호칭으로 불려서 그런 게 아닐까.
마치 새로운 가족이라는 듯이 .
칸의 속마음을 알 리 없던 슈페나는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내일 출발 전까지 편히 쉬도록.”
어머님은 그 말을 끝으로 방을 나섰다.
물론 제 비서에게 이번에는 슈페나를 잘 돌보라 명하는 것도 잊지 않은 채.
그렇게 슈페나는 평상시처럼 골방이 아닌, 독수리 저택 내에서도 가장 좋은 손님방을 사용할 수 있었다.
듣자 하니 언니오빠들과 호적상방에 아버지는 각자의 방에 임시 구금되었다나 뭐라나.
어머님한테 다 일러바친 만큼, 좋은 처우를 기대하긴 힘들 터였다.
‘꼴좋네.’
슈페나는 풉, 비웃음을 흘리곤 문제의 루비 목걸이를 꺼내 들었다.
그리곤 스산하게 중얼거렸다.
“각오해라, 이 새대가리들아.”
***
어느덧 늦은 밤이었다.
대부분의 이들이 꿈나라를 유영하고 있을 시간.
계속 호위를 서듯 놀아주던 비서 사자도 잠시 자러 간 것 같았다.
슈페나는 염력으로 소리 없이 방문을 열곤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복도를 돌아다녔다.
불침번을 서는 사자들이 있긴 했지만 대충 둘러대니 비켜주었다.
목적지는 주방이었다.
그곳엔 금고가 숨겨져 있었으니까.
뻔질나게 주방을 드나드는 언니 오빠를 훔쳐보다 알게 된 비밀이었다.
그 금고에 든 건 다름 아닌 땅문서였다. 힘없는 소동물 수인들을 협박해 갈취한.
‘원작을 깨달은 시점부터 분주히 어떤 일이든 하려고 노력했었지.’
이제야 이 노력이 빛을 발하는구나!
슈페나가 이능력을 사용해 무거운 주방의 가구를 치웠다.
그러자 바닥에 지하로 통하는 입구가 드러났다.
그녀는 뻑뻑한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뭐 하는 거지?”
난데없이 어머님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더라면.
“차, 착한 일이요.….…?”
깜짝 놀란 슈페나가 아무 말이나 되는대로 지껄였다.
칸은 쿨한 낯으로 까딱, 고갯짓을 했다.
“방해하지 않을 테니 계속해봐, 착한 일.”
어쩔 수 없이 어머님과 함께 사다리를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슈페나는 좁은 공간 속에 어머님과 옹기종기 앉게 되었다.
눈앞에는 총을 쏴도 부서지지 않을 정도로 단단한 금고가 놓여있었다.
“흐음. 금고라?”
칸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상황을 주시했다.
그녀는 사자 특유의 청각으로 파랑새의 기척을 느끼고 온 참이었다.
슈페나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어머님의 눈치를 봤다.
‘여기선 내 염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데.’
슈페나는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이능을 이용해 손쉽게 금고를 땄다.
“호오.”
어머님이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녀는 물끄러미 슈페나를 관찰했다.
저런 이능력은 처음이었다.
파랑새라는 종은 수인학백과에도 실려 있지 않을 만큼 희귀했기에.
그 사이 슈페나가 어마어마한 양의 땅문서를 품에 안고 지하를 빠져나갔다.
칸도 뒤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무심하게 제 며늘아가의 이마에 붙은 먼지를 떼어주며 물었다.
“이걸로 무얼 할 생각이지?”
다량의 땅문서.
척 봐도 몰래 숨겨놓은 재산 같았다.
독수리 가주의 행동이 구리다고 느껴졌던 이유가 이거였나.
칸의 호기심이 더욱 커졌다.
슈페나가 커다래진 눈으로 어머님을 올려다보곤 언뜻 짓궂게 씨익 웃었다.
“골탕 좀 먹이려구요.”
그 한마디를 끝으로 빠르게 아침이 밝았다.
***
아침은 분주했다.
사자들이 떠나기로 한 시각이었으므로, 중상을 입은 독수리 가주는 나무 휠체어를 타고 정원까지 나와 다 쉬어버린 음성으로 사자를 배웅했다.
“조,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칸 체드윅이 무서워 강제로 나온 티가 역력했다.
언니 오빠들도 함께였다.
호적상 아버지는 청심환이라도 털어먹을 것 같은 기세로 달달달 떨며 허리를 숙였다.
꽤나 봐줄 만한 광경이었다.
이제껏 슈페나를 그렇게 괴롭히더니 강자 앞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못 하는 꼴이라니.
그리고 역시나, 독수리 가주는 슈페나에겐 인사 한마디조차 건네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기대는 하지 않았으니 미련도 남지 않았다.
“이제 출발하지.”
칸이 힐끗 슈페나를 쳐다보았다.
고개를 끄덕인 슈페나는 손을 슬쩍 움직였다.
칸만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미묘한 손놀림.
팔랑—
그와 동시에 땅문서로 접은 종이 비행기가 첫째 언니의 머리 위로 콕 떨어졌다.
“이게 뭐야?”
내용물을 들여다본 언니는 경악이 서린 표정으로 호적상 아버지에게 보여주었다.
“아.”
“아, 아버지.”
“이, 이게 왜, 여기에…….”
독수리 가주는 기침을 하며 굼뜬몸짓으로 서류를 감추려 했다.
그렇지만 소용없었다.
슈페나가 염력을 사용하여 두둥실 하늘 위로 떠오르도록 조종했으니까.
무형의 투명한 힘이 서류를 요요히 감쌌다.
수백 개의 종이비행기가 거대한 구의 형태로 모여 하늘을 배회했다.
“어, 어?”
언니오빠들 중 하나가 입을 떡벌리곤 소스라치게 놀라 했다.
놀라운 광경이었다.
스스슥, 종이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귓가를 진동시켰다.
슈페나는 슬쩍 입매를 말아 올렸다.
‘이제 시작인데. 놀라기는.’
슈페나는 제 목에 걸려있던 루비목걸이를 풀어 언니오빠들을 향해 얄밉게 흔들었다.
“이게 뭔지는 알지?”
혹시나 보지 못할까 봐 친히 알려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목걸이는 염력에 의해 슈페나의 손에서 벗어나 마법처럼 날아갔다.
콰앙!
작은 폭발음이 공기를 갈랐다.
수많은 문서들이 공중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모습이 슈페나에게는 마치 독수리 가문 탈출을 축하하는 폭죽처럼 느껴졌다.
‘해먹은 게 많던데 한동안은 배아파서 잠도 못 잘걸?’
재물 욕심이 대단한 가족들에게 딱 맞는 복수 방법이었다.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망할 가족들에게 직접 엿을 먹여서.
그리고….
‘원작처럼 죽을 순 없지..’
소설 속 그녀를 옭아매었던 물건을 없애는 데에 성공해서.
어머님한테 목걸이를 맡긴다 한들 나중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지 않은가.
“말도 안 돼! 내 땅!”
새된 첫째 언니의 비명이 들렸다.
뭐, 첫째 언니는 저 재산을 물려받을 암묵적인 후계자였으니까 더 절망적이겠지.
둘째 오빠 또한 떨어진 종이쪼가 리라도 찾겠다며 바닥을 더듬다가 엉엉 울었다.
“감히 누가! 서, 설마.…….”
거세게 분개하던 오빠가 이내 겁에 질린 표정으로 어머님을 올려다보았다.
설마 사자들의 작품이라고 생각한 건가.
피식, 저도 모르게 비웃음이 새었다.
“이거 내가 한 건데.”
슈페나는 슬며시 오빠에게로 다가가 다른 이한테는 들리지 않도록 작게 귓속말했다.
어차피 이제는 밝혀도 언니오빠들에게 이용당하지 않을 테니까.
또, 이게 더 통쾌하잖아.’
그 말을 들은 둘째 오빠는 경악어린 표정으로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너, 너……!”
때마침, 칸이 둘째 오빠와 슈페나의 사이를 가르고 들어왔다.
“이만 가자꾸나.”
“네, 어머님.”
슈페나는 부러 더 새침하게 대답했다.
그러고는 가벼운 걸음걸이로 어머님의 에스코트를 따라 증기자동차에 올랐다.
‘휴, 피곤하다.’
차에 타는 순간, 긴장이 풀려서인지 파랑새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인간화를 사용하는 것에는 큰 제 약이 없긴 해도, 피로가 누적되면 동물의 모습으로 돌아왔으니.
게다가 아직 이런 복잡한 규모의 이능 컨트롤에 익숙하지 않아 금방 진이 빠졌다.
“삐비이..…..”
슈페나는 푹신한 시트에 기대어 다리를 쭉 뻗고 슬그머니 눈을 감았다.
어머님은 그녀를 바라보며 픽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다.
“집요하군.”
칸이 슬며시 칭찬하듯 슈페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결 좋은 파랑새의 깃털이 손끝에 스치었다.
“제법 맹수다워.”
우리 집 식구가 될 만해.
칸은 무심코 내뱉어질 뻔한 속내를 삼키며 도도하게 팔짱을 꼈다.
그저 맹랑하다고만 여겼던 파랑 새는 원석이었다.
가공에 따라 어떠한 빛을 발할지 기대가 되는 보석.
아들놈의 흔적과 예언 때문에 데려오려 했던 것인데.
‘쓸 만한 아이를 며느리로 들인 걸지도 모르겠군.’
당연히 더 두고 봐야겠지만.
도통 움직이지 않던 칸의 눈매가 설핏 반달 모양으로 접혔다.
증기자동차는 특유의 규칙적인 소음을 내며 매끄럽게 굴러갔다.
좋은 기억은 없는 곳이지만 보금자리였던 독수리 저택이 멀어져갔다.
비로소 실감이 나는 것 같았다.
정말 남주의 신부가 되는구나, 하고.
본디 특정한 동물의 영역에는 같은 종족의 수인들만이 살아가는 게 보편적이었다.
이렇게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곤.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은근한 걱정이 밀려올 무렵, 난데 없는 굉음이 주변을 진동시켰다.
콰앙!
“삐빗?”
슈페나는 깜짝 놀라 날개를 들어올리곤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 뭐야?’
작은 소동이 벌어졌던 아까와는 달리, 웅장한 독수리 저택이 무너질 것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어머님은 커다란 손으로 슈페나의 눈앞을 가리곤 아무렇지 않게 얘기했다.
“지지야, 지지.”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7화
사자들의 영토에는 제법 빠르게 도착했다.
‘이곳에서도 잘 적응하고 살아야지!’
제법 각오를 다졌으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평화로운 나날만 계속되었다.
사자들은 슈페나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듯하면서도 건드리지 않았다.
사기 결혼을 한 처지와 가주가 직접 데려온 혼약자는 확연히 다른 모양이었다.
‘정원에 이파리가 새하얀 나무가 있다니, 무슨 동화 속 한 장면 같아.’
특히나 사자들의 영역에는 어찌나 신기한 게 많던지 지루할 틈이 없었다.
여하튼 기초 소양을 쌓고자 사자들의 풍습과 역사, 휘하 가문에 대해 공부하며 시간을 보냈다.
틈틈이 이능 수련도 했고, 그러다 보니 어느덧 한 달가량의 시간이 흘러 봄이 되었다.
그렇게 슈페나는 14살이 되었다.
“근데 남주는 도대체 언제 돌아오는 거야?’ 슈페나가 퍽 불퉁스레 입술을 삐죽이곤 생각에 잠겼다.
다른 수인과의 분쟁을 해결하러 떠났다던 남주는 지금껏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분명히 결혼식을 한다고 했는데.
‘어머님이 알아서 준비해주신다고 한 만큼 내가 신경 쓸 건 없지만.’ 어차피 당사자들의 나이가 어린만큼 약식으로 간단하게 치른다나 뭐라나.
이내, 슈페나는 다른 곳으로 생각을 돌렸다.
‘남주는 둘째 치고 언니오빠들은 어떻게 됐을까?’
떠나올 때 목격했던 것처럼 독수리 가문은 망해버렸다.
반쯤은.
저택이 불에 탔다고 해서 가문전체가 완전히 패망한 건 아니었으니까.
‘와’
‘듣자 하니 아버지와 언니오빠들은 화재 속에서 겨우 살아남아 도망쳤다는데.’
조금 찝찝함이 들었다.
생각지 못한 일이기도 했고, 복수한다며 무슨 흉계라도 꾸밀까 싶어서.
어쨌든 그들은 집과 숨겨둔 재산은 물론, 가주 지위까지 빼앗겼다.
칸은 슈페나와도 호적상 친척관계인 방계 쪽 독수리를 골라 가주자리에 앉혔다.
애초에 저택을 불태운 것도 그를 위한 계략인 듯싶었다.
결과적으로 사자와 새의 동맹은 계속 유지되었다.
‘뭐, 나름 정의롭기로 소문난 사자라서 이 정도로 끝낸 거겠지.’
이 모든 게 원작에는 없던 사건이었다.
현실은 소설의 흐름과는 또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자, 다행이란 감정이 들었다.
‘데드엔딩만 피하자.’
그러기 위해 해야 할 건 총 세가지였다.
우선 집착 대신 남주를 방목하기.
그다음은 원작과는 달리 유능하게 영지 경영을 도와 사자들에게 인정받기.
마지막으로 누명 따윈 쓰지 않도록 적당한 때에 이혼하기.
‘사업을 하든, 뭘 하든 노후 자금도 마련해놔야지.’
상념이 깊어지려던 순간,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하녀가 들어왔다.
그녀에게 임시로 배정된 세 명의 하녀들 중 하나였다.
“가주님께서 부르십니다.”
“그래? 알려줘서 고마워.”
하녀는 무던하게 그저 비스듬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러다 까딱 고개를 숙이곤 자리에서 벗어났다.
얼핏 공손한 태도였으나, 슈페나는 알 수 있었다.
‘저 하녀는 확실히 나를 싫어해.’
태어나서부터 받아온 게 미움뿐이라 그런가, 이런 부정적인 감정은 기민하게 알아챌 수 있었다.
‘무시무시한 사자가 소동물인 파랑새에게 초장부터 충성을 다한다.
면 그게 더 이상하겠지.’
예상은 하고 있던 일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언행만큼은 정중한 편이라 트집을 잡기에도 미묘했고.
그러니 당분간은 지켜보는 수밖에.
모든 게 편하기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차근차근 나아가다 보면 점점 더 좋아지겠지.’
생각을 정리한 슈페나가 가벼운 숄을 걸치곤 어머님의 집무실로 향했다.
“왔구나, 며늘아가.”
“어머님!”
금색 동글이 안경을 쓰고 서류를 처리하던 어머님은 익숙하게 슈페나를 반겼다.
늘 표정 변화가 없고 무뚝뚝하던 어머님과도 은근히 친해졌다.
종종 티타임을 가질 정도로.
“앉으렴.”
칸은 첫 만남 때보다 유해진 말투로 자리를 권했다.
슈페나가 의자에 앉자 그녀는 우아한 손길로 직접 차를 따랐다.
쪼르르, 찻물이 흘러 하얀 잔에 고였다.
쌉싸름한 차향과 모락모락 나는 김이 코끝을 간질였다.
‘원작에서 슈페나는 어머님과 어떤 사이였을까.’
문득 그런 궁금증이 들었다.
어머님은 소설 속에서도 거의 비중이 없었으니까.
아들인 남주에게 가주의 권한을 위임한 채, 세계 방방곡곡을 떠도는 은둔 고수 같은 캐릭터였지.
‘지금은 남주가 성인이 되지 못한 시점이라서, 어머님이 가주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슈페나는 작게 어깨를 으쓱이며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대었다.
그리 차 맛을 음미할 겨를도 없이, 칸이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을 전했다.
“결혼식은 내일모레로 정했단다.”
“네에?”
슈페나의 깊은 밤색 눈동자에 파란이 일었다.
아니, 아직 남주 얼굴도 못 봤는데요?
어머님이 따뜻한 차를 단숨에 들이켜곤 시니컬하게 말을 이었다.
“내일, 네 남편 될 놈이 돌아온다더군.”
네 남편 될 놈.
몹시도 간결하고 터프한 표현이었다.
슈페나가 찻잔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면서 얼떨떨하게 대꾸했다.
“굉장히 빠르네요.”
갑작스러워도 까라면 까야지.
리카도르 체드윅, 제 예비 남편이자 이 세상의 남자주인공이었다.
그가 등장한다고 하니 정말 현실로 내던져진 기분이었다.
슈페나보다 2살 더 많다고 했나.
슈페나가 체드윅 가에 시집왔을 당시 남주는 16살이었다고 했던 것 같은데.
나이 흐름상으로는 딱 맞아떨어졌다.
실은 이곳에 와서 그의 초상화를 보기 전까진 이름마저 까먹고 있었다.
리 뭐시기라,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을 뿐.
그도 그럴 것이.
– 일리아 리암, 너에게 난 뭐지?
-.…주인.
-그러면 뭐라고 불러야겠어.
작품 내에서 여주가 지칭하는 남주의 호칭은 늘 저랬으므로, 애초에 여주는 인질로 잡혀 온 처지가 아니던가.
참고로 일리아 리암은 여주의 이름이었다.
여하튼 남주는 이 시대의 진정한 노빠꾸 미친놈이라고 할 수 있었다.
‘조심해야겠어.’
그런 만큼 절대 이성 관계로는 엮이지 않을 작정이었다.
여주 대신 피폐물을 찍고픈 생각은 없다고!
새가슴인 자신은 무언가를 제대로 해보기도 전에 쇼크사할지도 몰랐다.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때, 느닷없이 어머님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왜 갑자기 히죽 웃는 거지? 어디 아픈가?”
“아뇨. 전혀.”
슈페나는 손으로 입꼬리를 축 내리곤 필사적으로 도리질을 했다.
‘나 미쳤나 봐!’
그러면서 말랑거리는 두 뺨을 찰싹찰싹 번갈아 내리쳤다.
그 돌발적인 행동을 뭐라 해석한 건지 칸이 슈페나를 다독였다.
“네 남편 될 놈은 종잡을 수 없는 구석이 있긴 해도 쓰레기는 아니란다.”
어머님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눈빛으로 파격적인 말을 입에 담았다.
차를 홀짝이던 슈페나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다래졌다.
“혹여 그 애가 네 말을 안 들으면 엉덩이를 발로 차주렴.”
“예?”
“그리곤 내가 허락했다고 전해.”
제가요? 남주를요?
“아하하.”
슈페나는 어정쩡하게 웃으며 호응했다.
칸도 그녀를 따라 슬그머니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정말 그리해도 된다는 듯이 믿음직스러운 자태였다.
가득 차 있었던 찻잔은 어느덧 말끔히 비워졌다.
그 순간, 누군가 밖에서 똑똑 문을 두들겼다.
“들어와.”
칸이 언짢은 듯 미간을 찌푸리곤 말했다.
그러자 들어온 비서가 잽싸게 서두를 열었다.
“가주님, 일전에 말씀드렸던 그 경계 지역에서 잡은 뱀이 배가 고프다고 난동을….”
경계 지역? 뱀?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슈페나가 의문을 느낄 새도 없이 칸은 살벌하게 일갈했다.
“고작 그런 걸로 티타임을 방해 하지 말았으면 좋겠군. 적당히 처리하도록.”
슈페나에게는 잘 드러내지 않았던 냉엄한 군주의 모습이었다.
“네! 얼른 처리하겠습니다.”
칸의 명령에 비서는 군기가 가득찬 목소리로 답을 남기고는 재빨리 사라졌다.
“흐음.”
칸은 한숨을 내쉬더니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벌써 파할 시간이었으니.
사실 이 티타임은 바쁜 칸이 겨우 시간을 쪼개어 만든 게 아니던가.
그녀가 방금 비서에게 보인 모습과는 달리 부드럽게 슈페나를 향해 축객령을 내렸다.
“이런,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되었구나. 아들놈은 나중에 제대로 소개해주마.”
“네. 이만 가볼게요, 어머님.”
슈페나는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한 뒤, 집무실을 나왔다.
그녀가 차분한 발걸음으로 복도를 거닐었다.
모퉁이를 돌려는 찰나, 낯익은 음성이 신경을 건드렸다.
“소식 들었어? 소가주님이 돌아 오신대.”
“그러면 정말로 그 파랑새가 예비 안주인이 되는 거야?”
제 담당 하녀의 말소리였다.
‘파랑새라면 딱 나밖에 없는데?’
발걸음을 멈춘 슈페나는 일단 잠자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하녀들은 슈페나를 안주 삼아 시시덕거렸다.
“솔직히 나는 저 파랑새 모시는 거, 자존심 상해.”
“그런데 가주님 명에 불복할 수는 없잖아. 뭐, 방법 없을까?”
이렇게까지 나를 싫어하는구나.
슈페나가 착 가라앉은 어조로 하녀들의 수다에 끼어들었다.
“너희 지금 내 얘기, 하는 거니?”
싸우려는 속셈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으면 만만하게 보일 것이 뻔했다.
이런 소리를 들어놓고도 모른 척할 순 없지 않은가.
신랄하게 슈페나의 욕을 하던 하녀는 말을 더듬더니 소스라치게 놀랐다.
“.… 어떻게, 다 들은-”
“그럼 못 들었겠어?”
슈페나는 하녀들한테 한 발짝 걸음을 내딛고는 당당하게 반문했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런 말도 못 하게 된 그들을 향해 제법 의연한 태도로 말을 건넸다.
“날 싫어하는 건 상관없어. 그렇지만 이런 뒷말은 안 들리게 해줄래?”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8화
“죄, 죄송합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입술만 깨물던 하녀들이 그제야 상황 파악을 했는지 사과했다.
가주의 명이 있는 이상 파랑새는 그들이 모셔야 할 존재였으니까.
벌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아쉽게도 엄중한 처분을 내리긴 힘들어.’
아직 슈페나는 체드윅 가의 일원으로 공표되진 않았으니까.
그렇지만 억울해서라도 가만히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법.
대신 슈페나는 하녀들에게 일감을 한가득 안겨주었다.
“그리고 저번에 산 옷들, 깨끗하게 세탁해줘.”
지금으로서는 이게 최선이었다.
“…… 알겠습니다.”
불만 가득한 긍정.
하녀들의 눈에는 슈페나를 원망망하는 기색이 서려 있었다.
‘기죽지 말자. 어머님도 나를 며늘아가라고 부르잖아.’
슈페나가 전혀 밀리지 않는 서늘한 표정으로 하녀들을 슥 훑어보았다.
하녀들은 눈을 내리깔더니, 마지못해 일을 하러 떠났다.
***
잠시간의 소란이 멎은 후.
왜인지 답답했던 슈페나는 선선한 바람이라도 쐬기 위해 정원으로 행선지를 옮겼다.
그녀가 원피스 자락을 그러쥐고는 조심스레 잔디밭에 앉았다.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녀들의 앞에선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노골적인 미움을 받고도 평정을 유지하긴 힘들어서.
슈페나는 무릎을 세워 얼굴을 파묻었다.
‘역시나 이곳에서도 환영받지는 못하나 봐.’
사랑받을 거란 기대 따윈 하지 않았으나, 어쩐지 조금 쓸쓸해졌다.
“괜찮아!”
그래도 어머님이랑은 사이가 좋은걸.
그녀가 몸을 일으키곤 앙증맞은 주먹을 꼬옥 말아 쥐었다.
슈페나는 무릎을 탁탁 털고 씩씩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산책이나 마저 하자.”
커다란 정원을 한 바퀴 빙 돌았다.
그러던 중, 근처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아까 슈페나의 험담을 했던 하녀들.
그들은 툴툴대면서도 성실하게 방망이로 옷을 두들겼다.
‘일은 열심히 하네.’
슈페나는 새치름하게 볼을 부풀리며 속으로 뇌까렸다.
그 순간.
이번에도 슈페나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한 하녀들이 영문 모를 이야기를 했다.
“……진짜 그렇게 할 거야?”
어딘가 촉이 왔다.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들어야 한다고.
슈페나는 이능으로 몸을 띄워 기척을 숨겼다.
그리곤 재빨리 벽 뒤로 몸을 숨겨 대화를 엿들었다.
“당연하지. 결혼식 날, 첫 춤을 망치면 가주님도 더 이상 파랑새에게 관심 주지 않을걸.”
그리 이야기하던 하녀가 마저 열변을 토했다.
“그럼 우리가 저 파랑새를 모시지 않아도 괜찮겠지. 안 들킬 거니까 걱정 마.”
“그래도 너무 사자답지 않게 치사한 방식 아닌가..….”
그러자 잠자코 듣고 있던 갈색머리 하녀가 소심한 목소리로 만류했다.
소용없었지만.
“정신 차려. 남들은 우릴 소동물이나 돌보는 반편이라 여긴다고.”
“맞아. 파랑새의 하녀가 됐다니까 가족들이 어찌나 나를 무시하던지.”
옆에 있는 다른 하녀도 맞장구쳤다.
그렇게 그들의 푸념은 깊어져 갔다.
그들은 슈페나가 지켜보고 있다.
는 것도 모른 채, 빨래를 마치곤 사라졌다.
슈페나는 하녀들이 있던 자리로 총총총 달려갔다.
“대체 무슨 작당모의를 하는 거지…”
방금 들은 얘기를 곱씹던 그녀가 조금 찜찜한 표정으로 괜스레 주변을 둘러보았다.
잔디 위에 세탁바구니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아무래도 맹렬히 뒷담화하다가 가져가는 걸 까먹은 듯했다.
그들의 실수를 그냥 넘어가기엔 직접 들은 이야기들이 신경 쓰였다.
‘이건 나중에 하녀들을 추궁할 때 증거로 써야겠어.’
영차영차, 세탁바구니를 옮겼다.
물건 드는 게 어려운 것도 아니고 딱히 염력을 사용할 필요는 없어 보여서.
‘생각보다 되게 무겁잖아.’
곧 아니란 걸 깨달았다만, 고스란히 전해지는 무게에 슈페나는 몇 발자국 못 가 세탁바구니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털썩 주저앉았다.
공교롭게도 그녀가 자리를 잡은 곳은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였다.
휴, 작은 한숨이 잇새를 가르고 새어 나왔다.
팔이 욕
팔이 아파서인지, 욕을 들어먹어서인지 괜스레 신경질이 났다.
‘바람이나 세차게 불었으면 좋겠다.’
다 훨훨 날아가도록.
그 속마음 때문일까, 이능이 멋대로 새어 나왔다.
무형의 염력이 사방을 하늘하늘휘저었다.
쏴아아, 꽃과 풀들이 한들거리며 맞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느티나무도 운치 있게 왈츠를 추었다.
그때, 위에서 누군가의 맑은 미성이 들려왔다.
“신부구나, 네가.”
그와 동시에 슈페나의 시야가 뒤집혔다.
“아!”
무언가가 떨어진 건지 찌르르 통증이 느껴졌다.
누가 자신을 억죄는 듯 몸이 묵직했다.
슈페나는 손바닥으로 머리를 문지르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런 그녀의 앞에 보인 건….
“다칠 뻔했잖아.”
은빛 가면을 쓴 하얀 머리 소년이었다.
서로의 숨결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
소년의 눈동자는 햇살을 머금어 반짝이는 바다처럼 푸르렀다.
머리 색을 닮아 색소가 옅은, 그의 하얀색 속눈썹이 느릿하게 한 들거렸다.
가면에 가려져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으나 숨길 수 없는 청량한 잘생김이 묻어나왔다.
‘어……?’
슈페나는 자신을 짓누르는 무게 감마저 잊은 채, 그를 빤히 응시했다.
그러다 급히 정신을 차리곤 입술을 달싹였다.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고마움을 표한 슈페나가 소년을 슬쩍 밀어내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런데 뜻밖의 대답에 사고가 잠시 멎었다.
“걱정은 내가 받아야죠.”
소년은 슈페나를 따라 짐짓 예의바른 존댓말을 사용했다.
“음?”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티 없이 말간 미성으로 냉정하게 선을 그었다.
“다칠 뻔했잖아요, 내가.”
푸른 눈동자가 슬며시 아래로 향했다.
바로 슈페나의 어깨 근처로,
‘응?’
뭔가 기시감이 들었다.
왠지 어머님과 처음 만났을 때랑 느낌이 비슷한데.
슈페나는 잔디밭을 손바닥으로 짚고는 천천히 상체를 들어 올렸다.
언제까지고 저 남자애와 여기 엎어져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
소년은 순순히 밀려나 슈페나의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더니 그저 얌전하게 슈페나를 눈에 담았다.
무언가를 탐색하는 것처럼.
어디선가 익숙하고도 좋은, 밤하늘 같은 냄새가 은은하게 풍겨왔다.
절로 긴장이 되었다.
그때였다.
‘아…!’
돌연 팔에 아릿한 감각이 퍼진 것은.
소년의 입꼬리가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미묘하게 곡선을 그렸다.
슈페나는 그런 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깊은 호수처럼 고요하고 푸른 소년의 눈망울에서는 감정을 읽기 어려웠다.
문득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호수밑바닥에 끌려가 서 있는 것 같아서.
슈페나가 옅게 눈을 깜박였다.
당최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을 하고자.
‘어쨌든 저 남자애는 나무에서 떨어졌고, 나는 나무를 흔들었고, 그럼 내 잘못이네?’
거기까지 도달한 결론에 그녀는 머쓱한 표정으로 두 손을 모으곤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그거 말고.”
아님 뭐, 어쩌라고.
삐딱한 마음과는 달리 슈페나는 우선 의례적인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괜찮으세요?”
“아니요.”
돌아온 건 빛보다도 빠른 부정이었다.
“예?”
황당함이 뚝뚝 떨어지는 슈페나의 반문에 소년은 싱긋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지극히도 차분한 어투로 멀쩡해 보이는 팔을 두들겼다.
“뼈가 부러진 것 같은데.”
당장이라도 보상하라는 듯 뻔뻔한 태도였다.
아무래도 자해공갈단인 듯싶었다.
있잖아, 어깨를 부딪쳐놓고서 암에 걸린 것 같다며 쓰러지는 그런 사기꾼.
그렇다면 더 상대해 봐야 시간 낭비지.
“잘 붙여보세요, 그럼 이만.”
슈페나가 꾸벅 인사를 하곤 잽싸게 달아났다.
혼자 외로이 남게 된 소년은 땅바닥에 놓인 세탁바구니를 다소곳이 주워들었다.
그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읊조렸다.
“책임지라고 할까.”
소년은 느릿하게 제 오른쪽 손바닥을 펼쳤다.
그 중앙에 박힌 오팔 모양의 표식이 요요히 빛을 발했다.
마찬가지로 슈페나의 팔뚝에 그려진 문양에서도 은은한 빛무리가 흘렀다.
그녀는 몰랐지만.
소년의 시선은 멀어져가는 슈페나의 뒤통수에 끈질기게 고정되어 있었다.
***
자해공갈단을 피해 허둥지둥 방으로 돌아온 슈페나는 후우, 숨을 골랐다.
그러곤 조금 전의 일을 회상했다.
‘뭔가 익숙한데…….’
하얀 머리칼과 푸른 눈동자.
그 유명한 백사자에게서만 나타나는 특징이었다.
백사자는 흔히 볼 수 없는 만큼 남들보다 강한 힘을 지녔다.
당연히 남주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여긴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란 말이야.
사자들은 여러 종으로 나뉘어 각기 다른 영지를 다스렸고, 이능의 위력이 셀수록 우위를 점했다.
몇몇 사자 명문가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여 왕의 칭호를 얻은 게 체드윅 가였다.
‘특히나 이 집안엔 남주처럼 흰사자가 제법 많다고 들었는데.’
덕분에 체드윅 가는 백사자 가문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지.
그런 이곳을 유유자적 헤집은 걸보니 예사 신분은 아닐 게 분명했다.
‘또 만날지도 모르겠는걸.’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정말 남주는 아니겠지…….
애초에 어머님이 남주는 내일 돌아온다고 그랬잖아.
“왜 이리 찝찝하지. 이능을 쓴 걸 들켜서 그런가.”
독수리 저택에서 그 난리를 피웠지만, 이능을 사용할 줄 안다는 소문은 퍼지지 않았다.
어쩌면 어머님의 배려일지도 몰랐다.
‘오빠에게 귓속말하는 걸 보고, 내가 밝히길 원하지 않는다 생각하신 거겠지.’
그래서 나중에 정말 필요한 순간에 이능을 드러내려고, 그냥 숨기고 있었는데 엉뚱한 이한테 보여주다니.
“그건 그렇고 이상하게 뭘 잃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드네.”
*****************************************************
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http://novelagit.xyz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