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uebird Lady and The White Lion Family RAW novel - Chapter (13)
백사자가문의 파랑새 마님 13화(13/21)
백사자뉴토가문의 파랑새 마님. 100-159完
뉴토★
공금★ ㅅㅋㅌㄲ★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100화
한동안 고민하던 그녀가 아, 작게 탄성을 흘렸다.
그러고 보니 나무늘보와 안면 있는 수인이 하나 있지 않던가. 그것도 퍽 친밀할지 모르는.
‘그 얌생이한테 가봐야겠네.’
슈페나는 곧장 일리아한테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침, 일리아는 별채 후원에서 산책을 하고 있었다.
슈페나가 자연스레 그녀의 옆자리를 꿰차곤 그 보폭에 맞추어 나란히 길을 거닐었다.
사실 여전히 일리아는 별로였다.
그래도 그간 오며 가며 교류하면서 관계를 회복했다.
나름 예전처럼 아웅다웅하면서 이야기하는 정도로.
어찌 되었건 나한테 필요한 사람인 것 같으니까.
회귀한 거라면 일리아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기억 때문에라도.
‘뭐, 계약서도 다시 새로 썼으니까!’
리리엘라 언니에게 다시 신물을 받아와서, 이중삼중으로 꼼꼼하게 그물망을 드리운 참이었다.
처음에 속은 기분에 배신감도 들었으나, 그건 신물인 회중시계의 금제 때문에 어쩔 수 없지 않았던가.
‘이상하게 나쁜 수인은 아닌 듯하단 말이야.’
말과 행동이 얄미워서 그렇지.
그리고 간혹 일리아가 하는 말들.
-난 고객님이 행복했으면 좋겠거든요.
그 사탕발림 같은 한마디가 툭툭슈페나의 마음을 움직였다.
‘과거에 나랑 일리아는 꽤 괜찮은 사이였나 봐.’
이런 생각이 들 만큼.
게다가 일리아도 예전처럼 장난 스레 슈페나를 대하다 보니 적응이 된 참이었다.
슈페나는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떨치곤 일리아에게 말을 걸었다.
“그, 나무늘보한테서 이런 편지가 왔거든요?”
그녀가 냅다 나무늘보의 서신을 꺼내 일리아한테 보여주었다.
“잘못 보낸 거겠죠?”
하나, 일리아는 조금 전의 슈페나처럼 어리둥절하게 갸웃대었다.
그러곤 얼마 지나지 않아 무언가 기억났다는 듯 덧붙였다.
“그 나무늘보, 갑자기 떠난다던데요. 당분간은 사자 영지에서 벗어나야 안전할 것 같다나 뭐라나.”
그 대답에 슈페나는 삐죽 입술을 내밀었다.
편지에서도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지 않을 거라 쓰여 있었지.
이사라도 가려는 건가.
‘나랑 뭔 상관이야.’
슈페나는 대강 서신을 접어 종이 비행기로 만들어 날린 뒤, 화제를 돌렸다.
“그럼 시계 공방은 어떻게 되는 건데요?”
“그 나무늘보 집안 웃어른이 와서 맡아주기로 했어요.”
대대로 정보상이었던 가문이라고 했지.
뭐, 안심이네.
시계 공방은 나름 중요한 장소가 아니던가.
혹시 문이라도 닫을까 봐 걱정되어서 왔던 거였다.
거슬리던 점을 해결한 슈페나는 탁탁 무릎을 털곤 힐끗 일리아를 올려다보았다.
일리아가 슬쩍 슈페나의 눈치를 살피더니 입술을 달싹였다.
“오늘은 뭐 안 물어보려고요?”
“그동안 건질 만한 게 없었잖아요.”
여태껏 일리아와 서서히 관계 회복을 하면서 여러 대화를 나누었다.
아무래도 기억이 온전치 않을 거라고 하니, 궁금한 점들이 날이 갈수록 퐁실퐁실 솟아나서.
솔직히 얻은 소득은 거의 없었다.
대답을 듣기 무섭게 일리아가 기침을 해서, 죄짓는 기분이 들더라고.
뭐, 새로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긴 했다.
리카도르가 아니라 도련님이 소가주 자리에 있었다지. 적어도 일리아가 도련님을 만난 시점에는.
그런 얘기를 들으니 오히려 미궁속에 갇힌 느낌이었다.
‘왠지 리카도르도 나도 그다지 좋은 최후는 맞이하지 못했을 것 같달까.’
그래서 더 알고 싶다가도 두려워졌다.
어떤 기억이든 떠올려보려 노력은 하고 있었지만.
슈페나가 의식적으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작별을 고했다.
“궁금한 게 생기면 또 물어보러 올게요. 그럼 전 이만.”
그때, 뺀질거리는 일리아의 목소리가 그녀를 붙잡았다.
“고객님은 내가 너무 좋은가 봐요. 더 물어볼 것도 없다면서 그 새를 못 참고 쪼르르 나 보러 왔네?”
“미친”
슈페나는 짧게 혀를 찼다.
그러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그대로 왔던 방향으로 직진했다.
그러나 그 도피는 오래갈 수 없었다.
망부석처럼 우두커니 서 있던 일리아가 우렁찬 발성으로 더한 헛소리를 나불대었으니까.
“나한테 욕한 여자는 고객님이 처음이에요. 정말-”
“욕설이라뇨. 방금 한 말은 단지 추임새였어요. 일상적인 감탄사 정도?”
슈페나가 천연덕스레 눈동자가 사라질 만큼 눈을 휘어 웃으며 변명했다.
그런 슈페나의 입꼬리를 자세히 보면 경련이 일어나고 있었다.
아무튼 미소로 몰래 쌍욕을 퍼부은 슈페나는 시니컬하게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뭔데요?”
“그냥.”
짧게 대답한 일리아는 꽈배기처럼 몸을 배배 꼬며 은근하게 덧붙였다.
“우리 고객님이랑 오붓하게 수다나 떨까 했죠. 리헨테온도 바쁜 모양이어서 심심하더라고요.”
그에 슈페나의 속눈썹이 크게 일렁대었다.
요 며칠 가족들이 이상했으니까.
다들 묘하게 바빠 보인달까.
그런데 그러면서도 예전과 다르게 서로 붙어 다니며 이러쿵저러쿵 속닥거리는 것 같았다.
뭔가 일을 꾸미고 있는 사람들처럼.
호기심에 슬쩍슬쩍 기웃거렸지만 소용없었다. 다들 어색하게 웃으며 얼버무리기 일쑤였으므로,
‘리카도르도 뭐랄까, 좀 더 멋있어졌어.’
특히나 옷 입는 스타일이 부쩍 성숙해진 듯했다.
그 때문에 더 부끄러웠다.
아직도 간사한 꼬마 뱀이 했던 그 말이 머릿속을 떠나가지 않아서.
덕분에 싸웠을 때보다 더 내외하게 되지 않았던가.
‘차라리 카누스 말대로 뭐라도 갈기면 이 부끄러움이 사라지지 않을까?’
어머, 미쳤나 봐!
슈페나는 마구니가 낀 제 머리를 주먹으로 콩콩 치며 혼자만의 세상에서 자유자재로 유영했다.
그 모습을 실시간으로 관람하던 일리아가 떨떠름하게 얘기했다.
“고객님, 갑자기 이러니까 좀 무섭다. 드디어 미친 거예요?”
“나 요즘 짝사랑하잖아요.”
슈페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양 볼에 손등을 가져다 대며 수줍게 대답했다.
그러자 일리아가 귀신같이 비어 있는 목적어를 때려 맞혔다.
“누구를? 고객님 남편을?”
“어떻게 알았어요?”
너무 티 났나?
하긴 원래 누구 좋아하는 마음은 숨기려야 숨길 수가 없댔어.
“아무튼 내가 연애 관련 조언을 하나 들었거든요.”
슈페나는 잘됐다는 듯 다다다다 하고 싶던 이야기를 꺼내었다.
“아니, 남자 꼬시는 법을 물었는데 느닷없이 뽀뽀하라는 거 있죠?
어이없지 않아요?”
동의를 구하는 슈페나의 두 눈이 초롱초롱 반짝였다.
곰곰이 그 말을 듣던 일리아가 진중하게 웃음기 하나 없는 낯으로 긍정했다.
“네. 되게 어처구니가 없네요.”
그 공감에 신이 난 슈페나는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아니, 늘어놓으려고 했다.
“그러니까요! 내가 그것 때문에 계속”
“왜 뽀뽀하래. 그냥 확 잡아먹어버리라고 해야지.”
예?
굶주림을 채우고자 무언가를 섭취한단 뜻으로 말한, 그런 건전한 의미인 거죠?
카누스보다 더한 수인이 있다는 걸 알기 전까진.
‘내가 이걸 피폐물이라고 생각한 이유가 있었네.’
여주가 너무 화끈해.
슈페나가 살짝 질린 얼굴로 주춤주춤 일리아와 멀어졌다.
“아, 맞다.”
일리아는 불길하게 탁, 손뼉을 치면서 성큼성큼 도로 거리를 좁혔다.
그리곤 슈페나를 향해 말했다.
“어디 간다면서요? 그것도 고객님 남편이랑.”
리만 운하 이야기였다.
카누스가 해독한 지도가 가리킨 지형이 그 근처 아니던가.
원래는 어머님한테 다녀오게 해달라고 부탁할 계획이었는데, 오히려 그 반대로 일이 전개되었다.
어머님이 독수리들에게 보내는 사신단에 합류해서 그 지도 속 장소를 탐사해달라고 했으니까.
‘일이 술술 풀린단 말이야.’
어머님이 흑표범들과 얽힌 일이니 부디 조심해야 한다고 겁을 주어서 좀 쫄긴 했다만.
그나저나 정보상 아니랄까 봐 되게 빠르네.
슈페나는 일리아를 보며 못내 감탄했다.
“소식 진짜 빠르네요.”
어제 일인데.
아님 일리아가 기억하는 과거에도 이런 적이 있었던 건가?
슈페나의 눈이 게슴츠레하게 뜨일 무렵, 돌연 들뜬 기색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리아는 오른쪽 눈썹을 꿈틀꿈틀 엉큼하게 들썩였다.
“그때 하면 되겠네!”
뭘, 뭘 해? 이 양반아!
슈페나는 경계심 많은 파랑새처럼 꽁지깃을 빳빳이 세울 듯이 일리아를 노려보았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대충 짐작이 갔으니까.
일리아가 찡긋 윙크했다.
능글맞은 걸 넘어 가증스럽기 그 지없는 행동이었다.
일리아는 더 나아가 은근슬쩍 슈페나의 등을 토닥거리며 말했다.
“잘 꼬셔봐요. 고객님 얼굴이면 귀여워서 충분히 가능할 거예요.”
일리아의 눈에 사랑스러운 하늘색 머리칼과 총명함이 감도는 밤색 눈동자를 가진, 예쁘게 자란 슈페나가 비쳤다.
외모가 수인생의 전부는 아니라지만 플러스 요소인 건 맞지 않은가.
퍽 진심 어린 격려였다.
“그거 참 든든하고 응원되는 말이네요.”
슈페나는 짜게 식은 눈으로 무성의하게 고마움을 표했다.
그러자 일리아는 뒷짐을 진 채, 무언가를 하는 것처럼 꾸물대었다.
슈페나는 멀뚱멀뚱 일리아를 흘대었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일리아는 계속 끄적거리고 있던걸 펼쳐 슈페나에게 보여주었다.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101화
극장에서 최애 연극배우를 향해 흔드는 슬로건처럼 다채롭게 꾸민 기다란 쪽지.
-고객님의 불꽃 뽀뽀를 응원합니다♥이 인간은 미쳤어.
아, PTSD 올 것 같아.
‘뽀’로 시작하는 단어만 봐도 온몸의 깃털이 비쭉비쭉 서는 것만 같았다.
‘고객님 좋아하시네.’
슈페나는 번개와도 같은 속도로 못마땅하게 화제를 돌렸다.
“근데 왜 내가 계속 고객님이에요?”
사실 그간 조금 궁금하기도 했던 점이었다.
회중시계 덕택에 떠올린 기억을 되짚어보면 서로 제법 사적으로 친분이 있던 사이 같은데.
굳이 고객님이란 호칭을 고집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더구나 기시감이 들었다.
나무늘보와.
“나무늘보도 계속 손님이라고 하던데.”
하나, 돌아온 대답은 심플하기 그 지없었다.
“컨셉.”
응?
슈페나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생겨났다.
일리아는 목을 긁적거리며 정말 아무 생각이 없는 듯 멍청한 말투로 부연 설명을 했다.
“내가 시계 공방 인수해서 정보 상 됐잖아요.”
“아….”
극한의 컨셉러가 여기 있었네.
슈페나의 눈빛이 티베트여우처럼 공허하고 근엄하게 굳었다.
일리아는 그런 싸늘함을 눈치채지 못한 건지 천연덕스레 말을 이었다.
“그 나무늘보, 꽤 나랑 공통점이 많은 수인이라서요. 좀 따라 해봤어요.”
“공통점?”
슈페나의 목소리 끝이 높아졌다.
‘혹시 나무늘보도 이 회귀에 연관이 있는 게 아닐까.’
실은 계속 이런 의문을 머릿속에서 떨쳐낼 수 없었으니까.
시계 공방.
그 주인인 만큼 나무늘보도 시계를 잘 다룰 수 있는 기술을 지녔겠지.
‘혹 회중시계 신물을 개조했다던 이가 나무늘보는 아닐까.’
아주 예전에 찾아갔을 때, 일리아에 대해 꽤나 잘 알고 있지 않았던가.
그리고 방금 요상한 편지를 본 일리아의 반응.
무력이 딱히 강하지 않은 나무늘보가 사자 영지를 떠났는데도 별걱정 없는 태도가 아니었나.
‘나무늘보도 각성자라서 스스로를 보호할 능력 정도는 있는 걸지도.’
뭐, 이런 의심이 들었다.
한데, 그 의심은 산소 하나 안 남기고 휘발될 수밖에 없었다.
“미모.”
“예?”
“나 예쁘잖아요. 그 머저리는 잘생겼고.”
공통점이라는 게 너무 재수 없어서.
그런데 반박하기 힘든 답변이었다.
객관적으로 일리아는 욕이 튀어 나올 만큼 예뻤고 나무늘보도 무척 멀끔했으니까.
그리 슈페나의 궁금증을 묵살한 일리아가 싱긋 미소 지으며 이야기했다.
매우 자연스러운 손놀림으로 찹쌀떡 같은 슈페나의 볼살을 쭈욱 쭈욱 늘이면서.
“고객님, 잘 갈기고 와요!”
명절날 거나하게 취한 삼촌 같아.
슈페나가 학을 떼며 슬금슬금 멀어지려던 찰나, 일리아는 막 생각났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아, 고객님. 근데 내가 무슨 고객님 사업에 필요하다고 했다면서요.”
“엥?”
슈페나의 동공이 지진을 일으켰다.
“그냥 리카도르한테 둘러대려고 한 말이었는데…….”
그리 중얼거리던 슈페나가 이내 바람난 남편 휘어잡는 아내 같은 눈빛을 쏘아 보내며 급발진했다.
“설마 내 남편이랑 말 섞었어요?”
“아니요? 그건 아니고 소문이 들리던데. 뭐, 도와줄까요?”
그러한 제안을 하는 일리아의 눈은 먹이를 낚아채는 맹수처럼 스산하게 번뜩였다.
사슴이 언제부터 육식동물이었지?
슈페나는 도르륵 눈알을 굴리며 애매하게 긍정했다.
“…..…그럼 저야 좋죠. 아, 연구 쪽은 나 말고 카누스라는 꼬마 뱀이 맡아서 하는데 아는 사이죠?”
물론 기회를 엿봐 떠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기억 중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착각인지는 늘 확인하고 있었으니.
특히나 카누스는 친분 있는 상대도 알차게 등쳐 먹는 타입이 아니었던가.
일리아가 한쪽 입매를 틀어 올렸다.
언뜻 살기까지 넘실거리는 표정.
‘많이 당했구나.’
슈페나는 약간 측은하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본채랑 바깥출입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허가증 좀 주실래요, 고객님?”
무언의 눈인사가 오가는 사이, 일리아가 곱게 눈을 접어 웃으며 속내를 내비쳤다.
“신물 때문에 영 까다로워서.”
체드윅 가의 신물에는 탐지 기능이 있는 만큼 포로가 도망치긴 쉽지가 않지.
어쩐지 집요하게 붙잡는다 싶었더니 이게 본 목적이었구나.
못 들어줄 이유는 없었다.
이미 한배를 탄 사이인 것 같았으니까.
우리 도련님을 아주 열렬히 좋아하는 것 같기도 했고.
‘설마 저 수인이랑 동서지간 되는 건 아니겠지.’
슈페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정말로 마지막을 고했다.
“아무튼 가볼게요. 앞으로는 웬만 하면 보지 맙시다.”
심술궂은 덕담은 덤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
드디어 리만 운하로 향하는 행렬이 꾸려졌다.
‘횡단열차를 타고 간다지?’
독수리 가문에서 탈출했을 때는 그냥 자동차를 이용했는데, 칙칙폭폭 증기가 새어 나오는 열차는 처음이라 소풍을 가는 듯한 설렘이 마음속을 옅게 물들였다.
더구나 체드윅 가가 소유한 열차로 이동하는 거라 편하게 갈 수 있을 거라 어머님이 그랬었지.
오붓하게 리카도르와.
‘열차 데이트란 건가.’
퍽 몽실몽실한 감정이 피어올라 슈페나는 제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러면서 이번 여행 때는 리카도 르와 좀 더 가까워지도록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언제까지 쑥스러워만 할 순 없었으니까.
일리아도 뭐든 해보라고 조언해 줬었고, 뭐든이 그 뭐든은 아니긴 했지만, 슈페나가 바로 눈앞에 있는 기다랗고 검은 증기 기관차를 바라보았다.
저택 바로 근처에 있는 기차역으로 가족들이 다 같이 모인 참이었다.
그때, 뒤에서 따스한 어머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도 눈이 부시게 사랑스럽구나, 며늘아가.”
곱게 땋아 내린 양 갈래 머리와 탐정소녀같이 귀여운 봄코트를 입은 슈페나의 모습.
칸은 진심이 듬뿍 묻어나오는 눈빛으로 양봉을 했다.
그건 리리엘라도 마찬가지였다.
“슈페나 이목구비가 내 미래보다 뚜렷하네. 그냥 내가 보쌈해 갈까.”
특유의 사신미소 때문인지 조금 위험해 보이긴 했다만.
그다음은 리헨테온이었다.
도련님이 공손히 허리를 직각으로 접으며 아부했다.
“형수님, 아름다우십니다!”
심지어 카누스마저 아침에 먹은 고기에 약이 뿌려져 있던 모양인지 드물게 칭찬했다.
“오늘은 봐줄 만하네, 누나.”
모두에게 둘러싸인 슈페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멋쩍게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다들 기분이 좋은가? 되게 띄워 주네.”
여기 모인 가족들 모두가 몰래몰래 아이컨택을 하며 의지를 다지고 있다는 건 알지 못하는 슈페나였다.
“보고 싶을 거예요. 얼른 다녀올 게요!”
슈페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배시시 웃음을 터뜨렸다.
“아, 그리고 리리 언니랑 도련님도 곧 다른 수인들 사신단으로 갈거라 들었는데 조심히 다녀와요.”
슈페나가 리리엘라와 리헨테온을 번갈아 쳐다보며 이야기했다.
언니와 도련님은 독수리 영지처럼 멀리 있는 곳에 가는 건 아니라서 좀 널널하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흑표범 때문에 좀 걱정이 네.
슈페나도 칸에게 이미 얘기를 전달받은 상황이었다.
걱정이 듬뿍 담긴 슈페나의 눈길에 리리엘라가 와락 안겨들었다.
“보고 싶을 거야, 슈페나!”
“알겠습니다, 형수님.”
리헨테온도 꾸벅 고개를 끄덕였고,그때, 호시탐탐 타이밍을 재던 칸이 입술을 달싹였다.
“리카도르가 오는구나.”
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깔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리카도르가 있었다.
어디선가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나부낄 정도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리카도르의 하얀 머리칼도 결 좋게 한들대었다.
삐이익—
짜인 시나리오처럼 예스러운 소음과 함께 열차가 증기를 내뿜었다.
그와 동시에 어디선가 머스크 향이 날 것만 같은 깊은 분위기의 바이올린 선율이 들려왔다.
뭉게뭉게 눈앞에 자욱한 증기를 헤치고 리카도르가 유유히 슈페나를 향해 걸어왔다.
리카도르가 입은 깔끔한 정장이 멋스럽게 휘날렸다.
마치 그림과도 같은 자태였다.
‘뭐야. 옷에 뭐가 묻어서 갈아입고 온다더니….’
슈페나의 볼엔 엽게 홍조가 올라왔다.
리카도르는 머쓱하게 헛기침을을하더니 모른 척 아무 말도 없이 손을 내밀었다.
“…… 가자, 리카도르.”
슈페나가 쑥스러움을 뒤로하곤 리카도르의 손에 제 것을 얹었다.
체드윅 가 식구들은 일제히 성공했다는 듯 야호,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는 한마디씩 거들었다.
“아들, 잘하리라 믿는다.”
“리카도르, 누나가 응원할게. 힘내!”
“형아, 내가 알려준 대로만 해.”
“형님, 성공 못 하면 이제 형님이 제 아우가 되는 겁니다?”
리헨테온은 도를 지나친 어그로 때문에 꿀밤을 맞았다만.
“친애하는 동생아, 넌 좀 닥쳐.”
“옙.”
그 소란에 슈페나가 무슨 일이냐고 묻는 낯으로 리카도르를 올려다봤다.
그는 별일 아니라는 듯 살짝 웃어주었다.
그렇게 그 둘이 시야에서 안 보이게 되자, 칸이 뒤편에 몰래 숨어있던 이들에게 손짓했다.
커다란 대형 부채를 들고 있던 사자와 악기 연주를 하던 수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사라졌다.
그 모습을 뿌듯하게 지켜보던 리리엘라가 칸에게 속닥대었다.
“어머니, 만에 하나라도 리카도르가 슈페나를 못 꼬시면 어떻게 하죠?”
“매달려야지. 남편은 버려도 우리를 잊진 말아 달라고.”
칸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중한 태도로 받아쳤다.
한술 더 떠 리헨테온이 무슨 군사 기밀 대책 회의를 하듯 거들었다.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형수님을 붙잡을 수 있을지 대비해야 할것 같습니다.”
“그래, 지혜로운 사자는 열두 개의 굴을 파놓는 법이니까.”
칸이 비장하게 뒷짐을 졌다.
“그러면 얼른 작전회의를 시작하자꾸나.”
체드윅 가 식구들의 며늘아가 사수하기 프로젝트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102화
한편, 슈페나는 씩씩하게 지면과 살짝 떨어져있는 계단을 밟아 열차 안으로 진입했다.
덜덜덜.
여러 칸들이 이음새로 고정된 열차 내부는 기분 좋게 흔들렸다.
슈페나가 괜스레 바로 옆에 있는 지지대를 붙잡곤 나아갔다.
열차 칸으로 들어가는 나무문을 밀려는 순간, 뒤따라서 에스코트하던 리카도르의 팔이 불쑥 내밀어졌다.
슈페나의 뒤로 정제된 사내의 호흡이 닿았다.
먼저 문을 열어준 것이었다.
그녀는 괜스레 속눈썹을 팔랑이곤 작게 고개를 까딱였다.
“고마워, 리카도르.”
그 둘은 천천히 열차 칸 내부로 발을 디뎠다.
슈페나는 묘한 적막감을 떨쳐내고자 부러 열차의 내부 풍경을 두리번거렸다.
고급스러운 와인빛 벨벳 소재의 커튼과 잠을 청할 수 있는 푹신한 소파 좌석, 그리고 고풍스러운 멋이 있는 열차 벽에 걸린 장식들.
꼭 명화 속에 들어온 것 같아.
슈페나의 입꼬리가 살포시 위로 향했다.
그리 구경하다 보니 그녀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늦추었다.
당연하게도 뒤에 있던 리카도르와의 거리 또한 좁혀졌다.
결국, 슈페나는 리카도르의 가슴 팍에 콩 머리를 찧고 말았다.
“어?”
리카도르가 넘어지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슈페나의 양어깨를 감싸쥐곤 속닥이듯 이야기했다.
“우리 좌석은 조금 더 가야 해.”
여긴 사용인들이 지내는 칸이라고 짤막하게 덧붙이면서.
얇은 코트까지 입었건만 피부에 닿아오는 커다란 손바닥이 유난히도 뜨거웠다.
슈페나는 티 나지 않게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태연한 체했다.
“미안.”
하나, 리카도르의 시선은 귀신같이 슈페나의 손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의 귀도 덩달아 달아올랐다.
물론 앞에 있던 슈페나가 알 도리는 없었지만.
아무튼 그들은 배정된 열차 칸으로 향했다.
또다시 리카도르의 손에 문이 열리고.
슈페나의 눈앞에 펼쳐진 건, 저택에서의 침실처럼 인테리어가 화려한 공간이었다.
“와아…….”
화사한 디자인의 침대까지 있었으니 말 다 했지, 뭐.
슈페나와 리카도르는 티타임을 위해 마련된 듯 보이는 의자에 일단 마주 보고 앉았다.
그런 그들의 옆으로 제인이 잰걸음으로 다가오더니 물었다.
“작은 마님, 그리고 소가주님. 차라도 한 잔 내올까요?”
“응. 난 얼그레이로 부탁해, 제인.”
슈페나가 열차의 투명한 유리창너머를 힐끔거리며 평소보다 조금 빠른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반면 리카도르는 일견 무심하게까지 느껴지는 정적인 저음으로 응답했다.
“같은 걸로.”
그는 상체를 기울이곤 동그란 테이블 위에 팔을 올려둔 채, 느른히 턱을 괴었다.
특유의 고요한 시선 끝에 당연하게도 슈페나가 담겼다.
‘뭐지?’
그 강렬한 눈빛을 슈페나 또한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법.
분위기가 점차 살랑거리는 봄바람처럼 미묘해졌다.
좋아한다고 생각하니, 사소한 것들이 신경 쓰였다.
내쉬는 숨소리가 크진 않은지, 행동이나 말투가 뚝딱거리진 않는지, 웃는 게 예쁘게 보일지.
‘아, 씨. 또 괜히 입술만 보인단 말이야.’
립밤이라도 바른 건지 유난히 매끄러운 리카도르의 입술이 유려한 곡선을 그렸다.
슈페나는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괜스레 제인이 언제 올지 가능했다.
때마침, 슈페나의 바람처럼 제인 이 간단한 디저트와 차가 담긴 트레이를 끌고 왔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불편하신 점이 있다면 불러주세요.”
안타깝게도 부부의 시간을 방해 하지 않겠다는 듯 금세 사라졌다만,슈페나가 데굴데굴 눈알을 굴리며 다짐했다.
‘나름 여행 왔는데, 불도저까진 아니어도 모종삽 정도는 돼야지.’
그간의 내외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살갑게 대하려 노력하며 리카도르한테 말을 걸었다.
“리카도르, 너 요즘 바빴어? 서재에 틀어박혀서 공부하는 것 같길래.”
그간 슬금슬금 내빼면서도 신경은 온통 리카도르에게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 사신단 파견 때문인지 분주한 것 같더라고.
다른 가족들이랑 평소보다 더 왕래하는 듯했으니까.
리카도르가 차분한 호수가 담긴 듯한 벽안으로 긍정했다.
그 요요한 음성에는 어딘가 깊숙이 감춰진 듯한 감정이 깃들어있었다.
“했지, 공부.”
“재밌어?”
“재밌어졌으면 좋겠어.”
너도, 나도 같은 마음을 공유할 수 있도록..
리카도르는 그 뒷말을 삼키며 짐짓 속눈썹을 드리웠다.
길고 촘촘한 하얀 속눈썹 사이로 가려진 푸르른 눈동자에는 알아봐달라는 듯이 잔잔한 물결이 일었다.
그 속내를 알 길이 없는 슈페나는 향긋한 차를 입에 가져다 대었다.
그러다 창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와아, 밖에 봐봐. 되게 새롭다.”
따뜻한 차가 부드러이 입 안을 감싸며 약간은 쌉싸름한 뒷맛을 남겼다.
역시 뭐라도 마시니까 낫네.
그녀가 힐끔 눈치를 보다가 리카도르의 옷소매를 천진하게 잡아끌었다.
그러곤 살포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마차나 자동차를 타는 거랑은 또 다른 기분이잖아.”
차창 너머의 광경은 싱그럽기 그 지없었다.
여전히 봄이었으니까.
일정한 박자의 기차소리, 파릇파 릇 푸른 기찻길 옆 나무들, 따스한 가향차의 잔향, 그리고 옆에 있는 리카도르.
이 모든 걸 망막에 새긴 그녀가 웃음기 없는 표정으로 조심스레 진심을 고백했다.
“너랑 같이 보게 돼서 더 아름다운 것 같아.”
그 말을 들은 리카도르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툭 튀어나온 그의 목울대가 움찔움찔 위태롭게 일렁거렸다.
“….…그러게. 예쁘다.”
리카도르는 가까스로 무덤덤하게 맞장구칠 수 있었다.
차마 슈페나를 쳐다보진 못한 채.
꽃가루가 아직도 날리는 건지 코끝이 조금 간지러운 것 같다고 리카도르는 생각했다.
그 상념은 이내 의아함으로 번져 나갔다.
나무늘보와의 일 때문이었다.
공을 들여 곱게 에둘렀지만 명백한 이별 편지를 며칠 전에 보내지 않았던가.
분명 슈페나에게 잘 전달했다고 제인이 그랬는데.
‘슬퍼할 거라 예상했는데 깊은 관계는 아니었던 건가.’
슈페나한테선 그늘 한 점 느낄수 없어서인지 더욱 마음 한구석이 텁텁하게 막혀왔다.
‘다행, 인 걸까.’
슈페나가 울지 않아서, 그 바람둥이 놈이 슈페나에게 큰 의미는 아닌 듯해서.
그때, 슈페나가 고개를 갸웃 움직였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니.”
자각조차 못 한 사이에 슈페나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던 리카도르가 느른하게 부정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거슬리는 걸 치웠으니, 이제 나한테도 기회가 있다는 거겠지.’
리카도르의 맑은 눈매가 작정했다는 듯 초승달처럼 낭창하게 휘었다.
“이 의자, 좀 불편하네.”
그는 멀쩡한 의자를 불량품 취급하며 슈페나의 옆자리로 옮겼다.
그 과정 자체가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서 슈페나는 그저 말똥말똥눈을 끔벅였다.
하필이면 슈페나가 앉아있는 의자는 소파 같은 기다란 형태여서 더욱 밀착될 수밖에 없었고.
서로의 어깨가 스쳤다.
슈페나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킁킁.
그녀가 딸꾹질을 하듯 숨을 들이 마셨다.
무언가 익숙하고도 좋은, 햇살 같기도 하고 밤공기 같기도 한 냄새가 폐부에 스였다.
리카도르에게서 나는 향이었다.
슈페나는 허리를 꼿꼿이 편 정자세로 로봇처럼 삐걱거리며 앞만 바라보았다.
그 순간, 리카도르의 머리카락이 슈페나의 목덜미에 요망하게 내려앉았다.
“졸려서.”
그가 덩치도 생각 못 하고 애교를 부리는 대형견처럼 슈페나의 어깨에 기댄 것이었다.
리카도르는 살짝 고개를 틀어 슈페나를 올려다보며 졸랐다.
더운 숨이 여리고 예민한 그녀의 목덜미를 의도인 듯 아닌 듯 괴롭혔다.
“재워줘, 부인.”
“무, 무거워!”
그 심상치 않은 간지러움에 슈페나의 목에선 삑사리가 났다.
그러자 리카도르가 도로 고개를 들곤 도리어 제 어깨를 툭툭 자신 있게 두들겼다.
“그럼 부인이 기대든지.”
“.…그래, 그럼.”
슈페나는 마지못해 그 말을 따르는 척 느릿느릿하게 널따란 리카도르의 어깨에 머리를 뉘었다.
그러고는 무의식적으로 더 편한 자세를 찾아 뒷머리를 느릿하게 부볐다.
리카도르의 입매가 일순 위태로 이 씰룩대었다.
그는 은근슬쩍 곁눈질을 하며 편하게 풀어진 슈페나의 얼굴을 더듬었다.
그 은근한 시선에 그녀는 눈치채지 못한 척 눈을 꾹 감고 속으로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셋.
조금 시간이 흐르고 리카도르가 창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피식 작게 웃음을 흘리며 부러 창슈페나는 힐끔 그를 올려다보았다.
금세 다시 눈을 내리깔곤 딴청을 피웠지만.
서로의 시선이 미묘한 차이를 두고 엇갈리길 벌써 한 시간.
그 둘은 스르륵 얕은 잠에 빠졌다.
그리고 어둑어둑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저녁.
슈페나는 일생일대의 위기를 맞이했다.
명색이 사절단인 만큼 인원이 제법 되는 행렬, 하지만 한정적인 열차의 탑승객 수.
고로 각방은 쓸 수 없는 환경.
리카도르가 나른하게 새하얀 캐노피 커튼으로 공간 분리가 되어 있는 열차 칸 구석 침대에 걸터앉았다.
“왜. 또 피하게, 부인?”
그러더니 제 옆자리를 은근하게 탁탁 두드렸다. 얼른 부인도 옆에 누우라는 듯이.
“난 이제 각방은 쓰기 싫은데.”
리카도르의 입꼬리가 씨익 시원하게 올라갔다.
“언제까지 날 홀로 버려둘 셈이야, 부인.”
“그게, 일부러 그랬던 건 아니고…….”
혹시 그동안 좀 데면데면하게 피하느라 리카도르가 오해했을까?
저번처럼 본인을 싫어해서 그랬던 거라고 생각하면 어떻게 하지?
슈페나는 비장하게 손끝을 말아쥐며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기 위한 일종의 주문이었다.
“그냥 부끄러워서, 너랑 같이 자는 게 뭔가 이상해서. 아니 이상한 건 아니고 그냥, 아…….”
그녀가 재잘재잘 얘기를 쏟아내다가 돌연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는 제 머리를 자그만 주먹으로 콩콩 내리쳤다.
‘나 완전 뚝딱거렸지? 목각인형이었지?’
자괴감이 밀려 들어왔다.
일단 속에 있던 말을 막 했는데 국어도 못하는 머저리처럼 보였을 것 같아서.
슈페나가 짝, 박수를 치며 애써 태연한 척 상황을 정리하려 노력했다.
“어, 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살짝 높았던 목소리의 끝이 잘게 떨리며 조금 잔잔하게 내려갔다.
“우린 이제 서로 금 긋고 자던 꼬맹이들이 아니잖아.”
슈페나의 눈망울이 햇살에 비친 비눗방울처럼 투명하게 일렁였다.
“기분이 묘해졌나 봐.”
비가 내리는 호수처럼 동요 가득한 슈페나의 얼굴을 본 리카도르가 픽, 웃으며 말했다.
“그걸 알긴 아네.”
그로서도 조금은 충동적이었던 한마디였다.
제어하지도 못하고 튀어나온 속마음에 리카도르는 눈썹을 살짝 들썩였다.
금방 표정을 수습하며 두 손을 털고 침대에서 일어났지만.
“다행이야, 부인.”
“뭐가?”
꼭 내 기분이 묘해져서 다행이라는 것처럼 들리는데.
그 말은 내가 널 이성으로 본 게 기쁘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듯한데.
슈페나는 오른손으로 제 팔뚝을 쓸어내렸다.
‘리카도르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거지?’
슈페나가 그리 얼 타고 있는 사이, 리카도르는 성큼 거리를 좁혔다.
그리곤 슈페나를 번쩍 들어 올렸다.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았다는 듯 가볍게.
“야? 야!”
새된 슈페나의 음성이 날아들었다.
리카도르는 개의치 않고 자못 능글맞게 침대로 걸어갔다.
“그럼 자자.”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103화
“리카도르! 뭐, 뭐 해?”
리카도르의 품에 고이 안긴 슈페나는 동동 발버둥을 쳤다.
적당히 떨어지지 않을 만큼만.
뭐, 슈페나도 이 와중에 또 각방을 쓸 생각은 없었다.
푹신한 침대 시트가 꺼지고, 슈페나는 리카도르의 옆에 눕게 되었다.
그녀가 부러 열차 천장만 응시하며 딴청을 피웠다.
오랜만에 한 침대에 있게 되어서인지 기분이 조금 오묘했으므로, 그런 슈페나와 달리 리카도르는 꽤나 적극적으로 다가갔다.
“아. 어렸을 때로 돌아가서 손이라도 잡고 잘까, 부인?”
리카도르는 일견 짓궂게 그녀가 아까 했던 말을 따라 했다.
“묘해지지 않게.”
그게 더 묘해, 멍청아!
슈페나는 진땀을 빼며 간곡히 거절했다.
“아니요. 제가 손에 땀이 많아서.”
“부인이 그런 체질이었나?”
“그렇습니다.”
오늘부터.
“잘됐네. 난 촉촉한 거 좋아해.”
간곡한 이 부정은 강적을 만난 건지 소용없었다.
커다랗고 단단한 사내의 손이 작은 슈페나의 것을 빈틈 하나 보이지 않게 완전히 뒤덮었다.
결국, 그 둘은 손을 꼬옥 붙잡은 채로 잠을 청하게 되었다.
벗어날 수도 없이 기분 좋게 옥죄어오는 감각에 슈페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진짜 땀나는 것 같아…….’
괜스레 마른침이 삼켜졌다.
슈페나는 제 목에서 들린 작은 소리에도 놀라며 눈치를 살폈다.
그 꼬물거리는 움직임에 리카도 르가 가만히 자자는 듯이 슈페나와 잡은 손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하필이면 탄탄한 가슴팍으로, 쿵쿵쿵쿵.
박동이 느껴졌다.
일정한 박자의 고요한 울림이 아닌, 불규칙적으로 요동치는 떨림이.
‘이건 리카도르에게서 나는 걸까, 나한테서 들리는 걸까.’
혈액이 혈관을 부딪치며 타고 흐르는 소음으로 귓속이 가득 찼다.
어쩌면 칙칙폭폭 달리는 기차의 배기음보다 더 큰 것 같기도 했다.
슈페나가 까만 밤같이 조곤조곤하고도 몽글한 어조로 입술을 달싹였다.
“리카도르, 근데 너 심장 소리가 왜 이렇게 커?”
그녀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심장박동을 리카도르의 책임으로 돌렸다.
그의 기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한 들거렸다.
답지 않게 두 뺨에도 엽게 홍조가 올라왔으나, 어두운 주변 덕에 슈페나는 볼 수 없었다.
리카도르가 자유로운 반대 손으로 침대보를 그러쥐며 쥐어짜듯 답을 내뱉었다.
“잠이 안 오네.”
“…나도.”
슈페나도 이불을 슬쩍 발로 차내고는 맞장구쳤다.
리카도르가 돌연 고개를 돌려 슈페나를 바라보았다.
“코코아 타줄까?”
달리는 열차 안, 요요히 스미는 달빛 아래로 그의 하얀 머리칼이 베개 위에 파도처럼 부서져 내렸다.
‘한껏 흐트러진 리카도르의 모습도 나만이 볼 수 있는 거겠지.’
적어도 지금은.
슈페나의 입꼬리가 슬며시 말려 올라갔다.
그녀가 쭈욱 기지개를 켜며 늦은 밤 엄마 몰래 간식을 훔쳐 먹으려는 아이처럼 키득거렸다.
“응, 코코아 타줘. 마시멜로도 듬뿍 넣어서.”
그렇게 슈페나와 리카도르는 사이좋게 코코아를 마셨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그러고는 오붓하게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하늘에 수놓아진 별을 헤었다.
밤이 깊어져갔다.
***
그 이후로 열차 안에서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슈페나와 리카도르는 열차 안에서의 새로운 일상들을 맞이했다.
어느 날은 같이 체스를 두기도 했고, 언제는 나란히 앉아 같은 책을 읽고는 대화했다.
하루는 정차한 열차에서 내려 이 색적인 다른 지역의 풍경을 눈에 담았으며, 그다음 날은 열차 위에 걸터앉아 칙칙폭폭 증기가 뿜어져 나오는 걸 구경했다.
덕분에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종착역에 도착했다.
“오랜만이네.”
슈페나는 구름 한 점 없이 탁 트인 하늘을 올려다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 모습을 본 리카도르가 연극속 신사처럼 우아하게 손을 내밀었다.
“가실까요. 부인?”
“넹.”
슈페나가 피식, 잔웃음을 흘리며 기꺼이 그의 에스코트를 받아들였다.
그 둘은 미리 준비되어있던 마차로 몸을 실었다.
마차의 바퀴가 매끄럽게 미끄러져 굴러갔다.
목적지는 독수리 저택이었다.
어머님의 활약으로 불타버린 옛 독수리 저택 부지에 새로이 건물을 올렸다지.
지금 정권을 잡은 방계 쪽 독수리들은 자연스레 신설된 저택으로 옮겨갔고, 한마디로 독수리들의 수도에 방문하는 거였다.
슈페나가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을 무렵, 마차가 멈추고 리카도르의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내 손 잡고 내려, 부인.”
그 둘은 우선 독수리들과 인사를 나누며 사신단으로서의 일을 수행했다.
그러기를 한 시간째.
잠시 분위기가 느슨해진 틈을 타 슈페나는 은근슬쩍 농땡이를 피웠다.
리카도르가 어련히 혼자서도 잘하겠지.
‘독수리는 재수가 없단 말이야.’
사실 어머님이 새로 임명한 독수리 가주도 친척이긴 해서 가끔가다 본 사이였다.
빌어먹을 언니 오빠들처럼 슈페나를 괴롭힌 건 아니었다만, 좋은 추억은 그다지 없는 관계.
방관자도 똑같은 쓰레기 아니던가.
그녀가 향한 곳은 저택의 정원이었다.
슈페나는 묘한 감회에 젖어 담벼락을 따라 한 바퀴 빙 둘러보았다.
제법 많은 세월이 흘러서일까 달라진 것들이 아주 많았다.
저택도, 정원도, 사람들도.
“어? 이 나무는 안 베어졌네?”
슈페나를 멈춰 세운 건, 커다란 거목이었다.
어렸을 때 언니오빠들을 피해 이 큰 나무 뒤로 숨기도 했지.
이상하게 입 안이 썼다.
슈페나는 손차양을 만든 뒤, 괜히 다른 곳을 두리번거렸다.
신록이 우거진 푸르른 숲이 보였다.
‘저 숲에서 리카도르를 처음 만났었나.’
숲에 한번 가보고 싶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으니까.
슈페나는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자신을 따르고 있던 제인에게 말했다.
“저기 보이는 숲에 잠깐 가보고 싶은데.”
“네, 작은 마님.”
제인은 곳곳에 시립해있던 사자 호위들에게 손짓했다.
곧이어 슈페나의 등 뒤로 우르르호위가 따라붙었다.
저택 바로 뒤편에 조성된 숲은 오랜만이라서인지 몹시도 낯설었다.
하나, 그녀는 기억을 더듬어 수풀을 헤치며 계속 나아갔다.
‘분명 이쯤이었던 것 같은데.’
퍽 오랜 시간 동안 숲을 뱅글뱅글 돌고 있을 무렵, 커다란 느티나무가 슈페나의 앞에 펼쳐졌다.
“어?”
아무래도 맞게 찾은 것 같았다.
애초에 이 숲에 느티나무가 별로 없었으니까.
더구나 이렇게 큰 것은.
그 순간, 머리가 띵하고 울렸다.
퍼뜩 어떤 장면 하나가 머릿속을 날카롭게 스치고 지나갔다.
슈페나는 반사적으로 제 머리를 움켜쥐곤 나무 기둥에 무너지듯 기대었다.
곁에 있던 제인이 슈페나를 부축하며 염려했다.
“작은 마님, 괜찮으세요?”
“…..… 괜찮아.”
그녀가 겨우 입꼬리만 끌어올린 채, 제인에게 부탁했다.
혼자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서.
“앉아있으면 괜찮아질 거야. 제인, 미안한데 물 좀 가져다줄래?”
제인이 사라지고 호위기사들도 몇 발짝 떨어지도록 물린 슈페나는 느티나무 아래에 주저앉았다.
‘이게, 뭐지?’
파릇파릇한 나뭇잎이 우거진 봄인 듯 보이는 숲속.
어린 백사자를 치료하려는 건지 끙끙대는 슈페나의 모습.
정확히는 파랑새가 아닌, 분홍색 원피스를 입은 인간의 외양.
‘그 옷.’
분명 내가 인간화를 하게 되었을 때, 언니가 선심 쓰듯 버린 거였는데.
‘내가 분명 인간화를 11살 때, 봄쯤에 했었지.’
리카도르를 만난 건 10살 가을, 인간화하는 방법조차 깨우치지 못했을 때였고, 무언가 이상했다.
시기가 안 맞지 않는가.
그때, 누군가의 기척이 들려왔다.
“여기 있었어, 부인?”
리카도르였다.
“어? 어.”
슈페나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리카도르는 슈페나의 옆에 털썩앉더니 물이 담긴 머그컵을 건네었다.
“두통 있다며. 하녀가 그러던데.”
아무래도 제인과 마주친 모양이었다.
“고마워. 이제 아무렇지 않아.”
슈페나가 애써 방긋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내가 뭔가 잘못 본 걸지도 몰라.’
그냥 단편적으로 짧게 지나간 기억이었으니까.
그녀가 씩씩하게 일어나더니 보란 듯이 물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그에 리카도르는 피식 웃으면서 빈 컵을 자연스럽게 가져갔다.
그리고는 슈페나 쪽으로 몸을 기울이더니 귓가에 슬며시 속삭였다.
“아, 리만 운하는 내일 아침에 가면 될 거야.”
마침 독수리가 뱃놀이를 하자고 제안했다는 말과 함께.
“뱃놀이?”
슈페나는 동그래진 눈으로 되물었다.
“싫어?”
“아니, 그건 아니고..”
도련님이랑 폭포 수련도 해봤는데 뱃놀이쯤이야.
슈페나는 아직도 생각나는 폭포수련에서의 추억에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도리질하며 생각했다.
‘독수리가 먼저 말을 꺼냈다니 다행이네.’
아무래도 타 종족 수인의 땅인 만큼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게 좋았다.
만에 하나 그 약도에 쓰인 곳을 찾아 무언가를 발견하더라도, 독수리가 소유권을 주장한다면 귀찮아질 테니까.
어머님이 리만 운하를 확실히 뺏어오긴 했지만, 이 근방은 독수리들의 것이 아니던가.
지도에 표기된 위치도 애매했고, 그리고 무엇보다 흑표범.
그들의 동태에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리카도르는 흑표범의 이능에 익숙한 정예들만 호위로 끌고 왔다.
고 했으나, 본디 위기는 안전하다 생각될 때 찾아오지 않던가.
그래서 리만 운하 근처를 둘러보는 것도 그냥 산책하는 척 잠깐만 훑어보기로 했다.
세세한 조사는 호위들에게 맡기고,
‘아무튼 최대한 빠르게 약도에 적힌 곳을 찾아봐야겠네.’
슈페나는 그리 다짐했다.
***
다음 날 아침.
독수리들과 같이 뱃놀이를 하러 슈페나와 리카도르는 예정대로 나왔다.
끝없이 기다란 수로를 따라 푸르게 반짝이는 거대한 운하, 그 길에 맞춰 옹기종기 모인 동화 속나라 같은 집, 그리고 이 모두를 환영하듯 찬란하게 빛나는 주홍빛 태양.
“와아, 예쁘다.”
그녀가 감탄하고 있을 무렵, 몇 번 오가며 봤던 방계 독수리들의 얼굴이 보였다.
그들은 내심 못마땅해하면서도 사자 가문의 며느리를 향해 예를 표했다.
이제 슈페나는 독수리 가문의 천덕꾸러기가 아니었으니.
슈페나도 까딱 고개 인사를 했다.
재수는 없었다만 인사까지 씹는 건 조금 그러니까.
그리 인사를 마무리하고, 슈페나는 갑판 난간을 조심스레 쥐며 리카도르에게 말했다.
“리카도르, 근데 어떻게 빠져나가려고?”
그 물음에 리카도르는 돌연 제 머리를 부여잡았다.
“갑자기 어지럽네.”
“어?”
천연덕스레 슈페나에게 안기듯 듯치대면서.
꾀병이었다.
슈페나가 허, 실소했다.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104화
“어지러워.”
유독 오늘따라 붉어 보이는 입술사이로 언뜻 유혹 같은 칭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슈페나는 사냥당한 소동물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로 계우 입을 열었다.
“……야.”
“.…좀 맞춰줘, 부인.”
리카도르가 더 깊숙이 슈페나에게로 파고들었다.
부드러운 입술이 다분히 고의적으로 그녀의 목덜미에 닿을 듯 스쳤다.
슈페나가 토끼 눈을 하곤 괜스레 꽁지깃이 튀어나오진 않았나 살폈다.
너무 놀라서 온몸의 깃털이 비쭉설 것만 같은 기분이었으니.
조금은 아슬아슬한 정적이 둘 사이에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이내, 그녀는 세차게 도리질하며 정신줄을 붙잡았다.
그리곤 톡 건드리면 터질 듯 심약한 체리처럼 울먹거리는 음성으로 속닥였다.
“…야아, 뭘 맞춰?”
꾀병을 부리려는 목적인 걸 대충 눈치챘으나, 어안이 벙벙했다.
그 반응에 리카도르의 입꼬리가 유려한 곡선을 그린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슈페나의 목소리 끝은 갈대처럼 흔들렸다.
그는 돌연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대며 슈페나에게 속살거렸다.
“쉿. 온다.”
“누가?”
슈페나가 소리 없이 입술만 달싹거리는 사이, 시야 끝에 누군가가 비쳤다.
슈페나의 친척이었던 새 독수리 가주였다.
그는 잠시 흠칫 머뭇거리다가 슈페나와 리카도르에게로 다가갔다.
가주로서 사신단의 대표를 잘 대접하는 게 마땅한 도리가 아니던가.
예의상 잠깐 들르려던 거였다.
“뱃놀이는 즐거우십니까?”
염소가 떠는 것처럼 간교하고 얇은 어투의 인사가 들려왔다.
“소가주님, 그리고… 작은 마님?”
슈페나를 호명했을 때, 약간 경련이라도 이는 듯 떨떠름한 감정이 묻어나오는 목소리가.
자연스레 슈페나의 한쪽 눈썹이 사선으로 들썩였다.
새로운 독수리 가주는 젠체하며 느닷없이 자랑을 했다.
“크흠, 리만 운하는 신의 땅으로 통하는 길목으로 광활한 자연의 아름다움이 잠든 곳이지요. 와보니 어떠십니까?”
“아, 네. 경치가 되게 아름답네요.”
슈페나가 썩 내키지는 않는 듯한 어조로 맞장구쳐주었다.
그러자 독수리 가주는 딱 걸렸다.
는 듯이 솔깃한 표정을 짓더니, 돌연 손수건을 꺼내었다.
독수리 가주가 흑흑, 어딘가 가식적인 울음을 흘리며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쳤다.
“본디 이것보다도 더 아름다운 곳이었거늘…….”
그러더니 은근슬쩍 운하 너머의 낙후된 건물을 가리켰다.
“저기 보이십니까?”
어쩌라는 거지?
슈페나의 고개가 뚱하게 기울어질 무렵, 가주는 본심을 드러냈다.
“아무래도 사자 영지는 이곳과 멀어서 관리가 어렵겠지요. 독수리들은 운하를 대대로 지키고 가꿔온 터라”
다시 달라는 거구나.
빠르게 상대방의 의도를 파악한 슈페나는 단호히 칼차단을 때렸다.
“이제는 과거형이 되었네요. 정정하셔야겠어요.”
“어험, 그간 저희도 나름 성의 표시를 하지 않았습니까. 사자 가주님께 잘 말씀해주시면 참 좋을 듯한데.”
생각보다 앙칼진 슈페나의 먹금실력에 독수리 가주는 내심 혀를 내둘렀다.
‘10살배기 꼬맹이였을 땐 어딘가 좀 멍청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점점 자라면서 맹랑해졌다고 하더니 더 싸가지가 없어졌구나.
참으로 아쉬운 일이었다.
독수리 가주는 그런 내색은 하지 않고 딸랑딸랑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리만 운하 교역권이라도 다시 주시면….”
그때, 이런 독수리 가주의 야심을 좌절시킬 만큼 서늘한 한마디가 들려왔다.
“어디서 쓰레기 냄새가 나서 토할 것 같군, 부인.”
“그래? 큰일이네.”
슈페나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리카도르가 흉흉한 기세를 흘리며 중얼거렸다.
그런 그의 벽안은 당장이라도 독수리 가주를 치워버릴 듯 예리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슈페나는 의기양양하게 한쪽 입매를 비스듬히 들어 올리곤 일갈했다.
“제 남편이 좀 과격해서, 수틀리면 앞에 있는 독수리 정도는 베어버릴지도 모르거든요. 죄송하지만 비켜주시겠어요?”
당황한 독수리 가주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무슨 이런 경우가”
그와 함께 리카도르는 허리춤에 매인 검을 슬쩍 만지작거렸다.
철컥, 검이 검집에서 빠져나올락말락 공포스럽게 소리를 내었다.
그에 독수리 가주는 얼굴 가득 환한 웃음을 띤 채로 공손히 허리를 접었다.
“살펴 가시지요. 뭐, 필요한 거라도 있으십니까?”
놀라울 정도로 빠른 태세 전환이었다.
“간단하게 멀미만 가라앉히고 주변을 돌다가 올 거니까 뭐, 따로 신경 쓸 필요는 없어요.”
슈페나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곤 제법 위엄 있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의아한 물음이 돌아왔다.
“어디로 가실 겁니까?”
왜, 뭐?
독수리 가주는 왜인지 모를 미세한 걱정이 깃든 어조로 당부했다.
“상류 쪽으로는 가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신의 땅으로 통하는 입구라서 생명체가 자라지 못하는 지대니까요.”
신의 땅.
그 누구도 가보지 못한 미지의 공간이었다.
고대 수인들이 땅을 파서 만들었다는 리만 운하 상류 끝부분에 위치하는 지대였지.
끝위
자욱한 안개로 인해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어 더욱 신비한 장소였고, 작은 산 하나 정도의 규모로 짐작되는 신의 땅에는 어떠한 생명체도 뿌리내릴 수 없었다.
심지어 그곳을 탐사하러 들어간 수인들 모두 행방불명되었다지.
그래서 다들 죽어버린 거로 추측했다.
‘미지의 땅이긴 하지.’
왜 신의 땅이라고 불리는지는 솔직히 납득하기 힘들었지만.
그 이유가 고작 거대한 나무 하나 때문이었으니까.
망원경을 사용해 유심히 관찰하는 것 외엔 조사 방법이 없었는 데, 아주 커다란 나무 한 그루만 발견되었다나 뭐라나.
수인들은 그걸 세계수라고 불렀다.
‘촌스럽긴. 이게 무슨 구석기 시대 설정이야.’
심드렁하게 세계관 디스를 한 슈페나는 차분히 대답했다.
“아, 주의할게요.”
자칫 실수로 신의 땅에 들어가지 않게끔 조심하면 되겠지.
그러면서 리카도르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가자, 리카도르!”
슈페나와 리카도르가 배에서 내리고, 독수리 가주는 물을 거니는 그들을 빤히 응시하며 불안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혹시라도 그곳을 발견하는 건 아니겠지.”
***
슈페나와 리카도르는 운하 근처에 쫙 펼쳐진 숲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쏴아아, 나뭇잎이 바람에 나부끼는 노랫소리가 들리는 숲.
평화롭고도 아름다운 곳이었다.
푸른 운하의 정경만큼이나.
슈페나는 시원한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곤 약도를 펼쳤다.
카누스가 제법 센스를 발휘한 모양인지 화살표까지 그려진 지도는 무척이나 세세했다.
슈페나는 나침반을 꺼내어 들더니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했다.
“이쪽인 것 같은데?”
문제는 슈페나가 길치란 점이었지만.
꽤 오랜 시간 동안 같은 곳만 뱅글뱅글 돌며 길을 헤매었다.
이윽고, 슈페나는 들판에서 신명나게 뛰어논 삽살개처럼 헤엑, 숨을 골랐다.
신체적으로도 심적으로도 지치기 시작했으니까.
그녀가 제자리에 멈춰 서서 손으로 무릎을 짚고는 리카도르에게 이야기했다.
“리카도르, 내가 동물화라도 해서 찾아볼까?”
그 투정 섞인 제안에 리카도르는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부인, 장담컨대 새로 변해서 날아가면 단숨에 미아가 되고 말걸?”
일리 있는 말이었다.
슈페나는 멋쩍게 약도를 리카도 르에게로 넘겼다. 그리고는 주먹으로 콩콩 괜히 제 다리를 때렸다.
“다리 아프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혼잣말을 내뱉으면서.
“다리도 아프고, 무릎도 쑤시고, 걷기는 힘들고, 누가 나 좀 업어줬으면 좋겠다.”
그녀가 슬그머니 리카도르를 올려다보았다.
많이 걷다 보니 다리가 딴딴한 나무토막이 될 것만 같았으니까.
슈페나의 표정은 점점 천연덕스럽지만 노골적으로 변해갔다.
“그러면 정말 좋을 텐데. 누구 없나?”
종내에는 까치발까지 들곤 리카도르의 눈앞에서 아른아른 알짱거렸다.
“……진짜 없나?”
“업혀, 부인.”
리카도르가 못 이기는 척 뒤로 돌아 무릎을 굽혀주었다.
“응!”
슈페나는 사양하지 않고 해맑게 매달려 리카도르의 목에 손을 둘렀다.
따스한 온기가 피부 가득 전해졌다.
그녀가 판판한 그의 등짝에 푹얼굴을 묻곤 헤실헤실 소리 없이 미소를 지었다.
언제든 부탁하면 등을 내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좋아서.
그게 리카도르여서.
한편, 리카도르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슈페나도 이제 조금 넘어온 것 같은데.’
열차 안에서도 그 나무늘보를 신경 쓰는 기색은 없지 않았던가.
리카도르는 이렇게 슈페나가 늘 자신에게 기대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살짝 후덥지근해진 늦봄과 초여 름 사이의 바람을 맞으며 그 둘은 천천히 걸어 나갔다.
부드럽게 흩날리는 리카도르의 하얀 머리칼을 슬며시 정리해주던 슈페나가 넌지시 얘기했다.
“근데 우리 예전에 만났었잖아.
여기 근처 또 다른 숲에서.
아까 보았던 이상한 장면.
‘그동안 봐왔던 기억은 회귀했다.
던 시절의 것이었지.’ 그러니 이번에 스치듯 본 장면도 그럴 텐데.
설마 그때는 인간화를 할 줄 알았던 시점에서 리카도르를 만난 걸까?
사실 리카도르가 뭔가를 알고 있을 거란 기대는 없었다.
그렇지만 그냥 차이점이라도 찾고 싶었다.
10년 전 느티나무 아래에서 리카도르를 구해주었을 때와 방금 떠올린 이상한 기억의 다른 점을.
‘난 리카도르를 치료하다 기절하는 바람에 생각나는 게 없단 말이지.’
마침, 리카도르는 선선히 긍정했다.
“그랬지.”
“그때 난 분명 인간화를 못 깨우친 시점이었는데…….”
슈페나는 잠시 미온적으로 혼자서 머뭇머뭇 뇌까렸다.
그러다가 조심스레 입을 떼었다.
“이상한 꿈 같은 걸 꿨거든.”
“무슨 꿈?”
리카도르가 되물었다.
꿈.
그건 그에게도 해당되는 단어였으니.
“인간화한 내가 다친 널 끌어안고 있는 기억.”
기억이라니, 실수.
슈페나는 리카도르가 알아채지 못하게끔 얼른 말을 더했다.
“개꿈……일까?”
더불어 힐끔힐끔 훔쳐보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리카도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역시 잘 모르는 눈치였다.
근데 리카도르는 왜 저렇게 가라 앉은 낯빛이지?
‘잘 떠오르지도 않는데 괜히 물어봐서 그런 건가.’
조금 시무룩해진 슈페나는 괜스레 발을 앞뒤로 동동거리며 수더분하게 말했다.
“나 이제 내려줘.”
리카도르는 순순히 슈페나를 내려주었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 조금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혹시 부인도 내가 꾸었던 것과 비슷한 꿈을 본 걸까.’
화창한 봄날, 곱게 땋은 머리의 슈페나가 죽어가는 어린 백사자를 구슬피 바라보는 꿈을.
슈페나는 그런 리카도르의 상태를 알아채지 못한 채, 부러 천진하게 말을 건넸다.
“이번엔 내가 업어줄까?”
“….…부인이?”
리카도르가 제 표정을 무던히 수습하더니 반 박자 늦게 반응했다.
슈페나는 조금 어물쩍거리는 듯한 그의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짐짓 새침을 떨었다.
“야, 내가 성공할 수도 있지. 무시하냐?”
그녀가 노빠꾸로 직진했다.
땅에 쪼그려 앉아 리카도르보고 업히라는 듯이 자세를 취하며.
“아야!”
리카도르가 장난스레 조금 무게를 싣는 것만으로도 그 시도는 좌절되었지만.
그리 서로를 업어주느니 마느니, 소꿉놀이 같은 실랑이를 벌이던 찰나.
리카도르의 눈빛이 돌연 뾰족하게 벼려졌다.
“잠깐만 부인.”
“왜?”
“누가 따라오는 것 같아서.”
슈페나에게만 들릴 정도로 나직한 저음이 도톰한 그의 입술을 가르고 흘러나왔다.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105화
“누가 따라오는 것 같다고?”
슈페나도 덩달아 손으로 입가를 가리면서 작게 속삭였다.
그러곤 갸웃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그녀의 눈엔 그저 고요하기만 한 평범한 숲의 풍경밖에 보이지 않았으니까.
‘역시 백사자라서 오감이 남다른 건가.’
슈페나는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슬쩍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혹시 몰라서 준비한 것들이 있긴하지.’
슈페나 또한 아무런 방비도 없이 이곳에 온 건 아니었다.
그녀가 발뒤꿈치를 들고는 리카도르에게 귓속말했다.
“나 챙겨온 거 몇 개 있는데.”
“응?”
“테네도로”
그 대답에 리카도르는 이제야 알겠다는 표정으로 슈페나에게 되물었다.
“계속 돌아다니면서 무언가를 수풀에 숨기더니 테네도르였어? 무슨 이능이 담긴 건데, 부인?”
안 그래도 꼼지락꼼지락 꾸물대던 슈페나의 행동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미리 다 계획을 하고 있었던 거였군.
역시 내 아내다워.
리카도르는 뿌듯하게 입매를 끌어올렸다.
그러나 그 어여쁜 곡선 형태의 입꼬리는 곧이어 곤두박질칠 수밖에 없었다.
“관찰 이능. 이걸 쓰면 방금 네가 말한 수상한 자의 정체를 알아내기 쉬울 거야.”
슈페나는 메고 온 가방 속에서 무언가 잔뜩 담긴 벨벳 주머니를 꺼내었다.
그리고는 주머니 입구만 열어서 안에 아직 제법 남아있는 테네도 르를 짠, 하고 리카도르에게 보여주었다.
‘주변에 수상한 사람이 있다는데 대놓고 보일 순 없잖아.’
아주 예전에 일리아의 정체를 캐내려고 나무늘보한테 이능을 담은 테네도르를 넉넉히 얻어왔었지.
아직 몇 번 더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아 가져온 거였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리카도르는 일순 사납게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관찰 이능이라면?”
관찰 이능.
빌어먹을 나무늘보의 능력이 아니던가.
슈페나는 이런 리카도르의 예상과 딱 맞게 나무늘보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아, 사자 영지에 살고 있는 나무 늘보를 하나 알거든.”
리카도르의 이가 빠득, 퍽 거칠게 갈렸다.
‘그 개자식을 말하는 거겠지.’
사자 영지에 사는 나무늘보 가문은 단 하나뿐이고, 슈페나가 연락해본 적이 있을 만한 이는 그놈밖에 없지 않은가.
리카도르는 휘몰아치는 제 감정을 숨기지도 못하고 끙끙대었다.
주인이 관심을 안 줘서 화는 나지만, 차마 성질내진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대형견처럼.
‘얘, 왜 이래.’
슈페나가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리카도르를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알 수 없는 대치 상황이 지속되기를 10여 분째.
리카도르가 짜증을 억누르며 살짝 잠긴 저음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연락해?”
“어?”
“그 나무늘보란 놈이랑 연락하는 사이냐고.”
리카도르의 말끝이 맹수가 으르렁거리듯 거칠게 갈라졌다.
슈페나는 당황했다.
연락하는지 아닌지를 왜 물어보는 거고, 놈이라는 건 어떻게 안거지?
뭐지, 이 상황?
흡사 밖에 나도는 걸 좋아하는 못 미더운 아내를 말리는 질투쟁이 애처가 남편과도 같은 느낌.
슈페나는 남편이 듣기엔 0점짜리 답변을 내놓았다.
“아, 지인의 지인이라서.”
지인의 지인.
바람나기 딱 좋은 연결 루트가 아니던가.
막장 소설 속 사례를 들여다보면, 남편의 친구와도 눈이 맞기 십상이지 않나.
‘현실은 소설보다 더한 법이지.’
리카도르가 오히려 감정을 꾹꾹눌러 담아 누그러진 것 같아 보이는 어조로 더욱 캐물었다.
“지인? 누구?”
“내가 자주 가던 시계 공방이 있는데, 그 주인이랑 나무늘보가 안면이 있는 사이거든.”
슈페나는 조금 얼떨떨해하면서도 성실하게 대답해주었다.
이 정도는 이야기해주지 못할 이유도 없었으니까.
그 답을 들은 리카도르가 자못진지하게 속으로 살벌하게 뇌까렸다.
아예 그 시계 공방을 없애버릴까.
이내, 들려오는 슈페나의 한마디에 그 상념은 오래가지 못했지만,
“뭐, 연락 잘 안 해.”
그녀가 손사래를 치며 짤막하게 덧붙였다.
“어디 멀리 간다고 하더라고.”
애초에 필요한 일 아니면 연락할 사이도 아니었는데, 뭐지?
어머님이 나무늘보 가문을 알고 있던데 리카도르도 대충 이야기를 들어서 궁금해하는 걸까.
슈페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리카도르의 푸른 눈망울에는 훨씬 더 위태로운 폭풍우가 몰아쳤다.
연락을 잘 안 한다고.
그건 하긴 한다는 뜻으로도 해석 될 수 있지 않은가.
‘설마 그 나무늘보 놈이 나 몰래 슈페나에게 연락했던 건 아니겠지.’
그간 이별 통보를 받았다기엔 너무나도 담담했던 슈페나의 모습.
그게 혹 나무늘보한테 개수작이 담긴 다른 연락을 받아서 그런 게 아니었을까.
피가 머리 위로 솟구치는 기분이었다.
꽉 말아 쥔 리카도르의 두 손이 슈페나에겐 티 나지 않을 정도로 부들부들 떨려왔다.
그는 저도 모르게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땅굴을 팠다.
그 건방진 나무늘보 놈과의 사이가 더욱 발전해 슈페나가 그를 떠나려 하는 가상의 미래가.
‘이혼은 절대 못 해줘.’
리카도르의 눈이 결연하게 빛났다.
그는 일단 사자 영지 밖으로 떠났다던 나무늘보를 잡아 와야겠다고 다짐했다.
그와 함께 슈페나를 자신의 옆에 묶어둘 수만 가지의 계책을 생각해내었다.
물론 부인에겐 생채기 하나 나지 않는 방법으로.
‘꼬시라고 했지.’
그래서 얼토당토않은 연애고사마저 보지 않았던가.
아무튼 배운 게 있으니 응용을 해야 할 터.
리카도르가 애써 예쁘게 눈을 접어 웃은 채 슈페나를 향해 말했다.
“부인.”
“응?”
어딘가 심상치 않은 리카도르의 기세에 슈페나의 속눈썹이 흠칫 팔랑거렸다.
리카도르는 성큼 슈페나와의 거리를 좁혔다.
그리곤 비스듬히 고개를 틀며 몸을 그녀에게로 기울였다.
입맞춤이라도 할 것처럼 가까이.
‘분명 책에서 질투를 하려거든 그 렁그렁 눈물을 매달고 예쁘게 하랬지.’
리카도르가 얌전히 속눈썹을 드리웠다.
길쭉하고 야살스러운 푸른 눈이 비련의 남주인공처럼 청초한 빛을 발했다.
그 그윽한 눈빛에 슈페나는 도르륵 눈알만 굴렸다.
‘뭐지. 이 표정.’
그녀가 어리둥절하게 주춤 뒤로 물러섰다.
리카도르는 낑낑, 주인을 붙드는 대형견처럼 슈페나의 옷소매를 스리슬쩍 붙잡았다.
그러곤 다시 한번 슬픈 생각을 떠올리려 애썼다.
문제는 눈물은커녕 작은 물기조차 망막에 맺히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백날 해봐야 소용없겠어.’
아무래도 그는 눈물연기에 재능이 그다지 없는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이 눈물 작전을 포기한 리카도르가 다시금 슈페나를 불렀다.
“슈페나 체드윅.”
그는 대신 볼우물이 움푹 파일정도로 말갛게 웃으며 직구를 던졌다.
“잊어.”
“..… 뭘?”
당연하게도 슈페나는 동그란 눈으로 반문했다.
리카도르가 슈페나의 손에 들린 테네도르를 자연스럽게 가져갔다.
“이거.”
그러고선 당장이라도 부숴버릴 듯, 나무늘보의 이능이 담긴 테네 도르를 움켜쥐었다.
물론 그러지는 않았다.
슈페나가 필요로 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참았다.
꾹.
다만, 이 일만 마무리되면 제 손으로 저 테네도르들을 다 없애버리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그런 속내를 은근하게 드러내며 슈페나에게 매달렸다.
“네 옆엔 내가 있잖아. 이 일만 끝나면 저거 버릴 거지?”
“어?”
어리둥절한 슈페나의 외마디 의문에 리카도르가 결정타를 날렸다.
활활 불타오르는 벽안으로.
“나 지금 질투하고 있는 중이야.
알아둬.”
갑자기?
무슨 이유로?
리카도르가 나무늘보를 만난 적이 있다는 것도, 가당치도 않은 오해를 하고 있다는 것도.
알 리 없는 슈페나였다.
슈페나는 어버버, 횡설수설하며 리카도르에게 되물었다.
“지, 질투? 무슨 질투? 왜 질투?”
리카도르의 입가에 걸려있던 미소는 더욱 진해졌다.
그를 따라 슈페나의 머리도 맹렬히 돌아갔다.
‘설마 본인 능력 안 믿고 테네도 르를 쓰는 것 같아서 자존심이 상한 건가?’
아니면 나무늘보랑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인데, 뭔가 안 좋은가?
이게 슈페나가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사유였다.
리카도르가 입술을 달싹이려던 찰나, 슈페나가 먼저 손사래를 치며 이야기했다.
“아…. 나는 그냥 이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그녀는 잽싸게 리카도르의 손아귀에 있던 테네도르로 손을 가져 다 대었다.
그리고는 탈리테를 불어넣었다.
“봐봐. 쓸모 있을걸?”
관찰 이능이 담긴 테네도르의 위력을 보면 리카도르도 인정할 수 밖에 없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때마침, 테네도르에서 익숙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지, 지…… 지직…지지직.]슈페나는 리카도르의 옷자락을 끌어당기며 손짓했다.
자연스레 서로의 거리가 좁혀졌다.
짐짓 당황한 리카도르가 쉬이 입을 열지 못하곤 동요를 내비쳤다.
“….…왜, 부인?”
“누가 쫓아오고 있다. 대놓고 들으면 우리가 감시하려는 게 티날 거 아니야. 좀 붙어봐!”
그녀가 발뒤꿈치를 들곤 그의 귓가에 촉새처럼 속닥였다.
결국, 리카도르는 슈페나에게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그가 은근슬쩍 슈페나의 허리에 제 손을 휘감은 건, 별수 없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덕분에 슈페나 또한 바르르, 입술을 떨었다.
‘조금만 다가오라고 했는데 남사스럽게….’
그녀가 황급히 눈을 비껴 내리며, 발갛게 달아오른 듯한 뺨을 손등으로 꾹꾹 눌렀다.
리카도르는 똑같이 내리깐 눈으로 슈페나를 흘낏대었다.
묘한 기류가 흘렀다.
숨은 어떻게 쉬는지도 반쯤 까먹은 채, 서로 부끄러워하던 순간.
테네도르에서 본격적인 관찰 결과가 흘러나왔다.
[이…곳은 리만 운하 근처 숲.감지된 생명체는 총 7,368개체.
그중 가장 가까이에서 보이는 건, 눈꼴사납게 붙어있는 파랑새와 백사자.]
얼결에 팩폭을 당해버렸다.
리카도르도 머쓱해졌는지 슈페나를 내려다보며 큼큼, 헛기침했다.
둘 사이에 내려앉은 분위기가 산뜻하지만 따뜻한 봄처럼 살랑살랑 간질거렸다.
그 순간, 타이밍 좋게 테네도르에서 또다시 음성이 울렸다.
[두 번째로 가까이 있는 건, 200m 뒤 단풍나무 아래에 은신한 검은 머리 흑표범. 품 안에 표창과 단검 같은 무기들을 여럿 소지하고 있음. 주의 요망. 삐용삐용.]‘흑표범?’ 슈페나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리카도르도 은근히 놀란 듯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다.
그런 그에게는 잘 정제되었지만 일견 흉포하기까지 한 감정이 서려 있었다.
흑표범은 리카도르에게 해묵은 빚이 있는 원수였으니까.
슈페나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허공에서 서로의 시선이 긴밀하게 얽혀들었다.
“흑표범이라고 했지? 이번에야말로 잡자, 무조건.”
슈페나의 밤색 눈동자가 결연하게 신호를 보냈다.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106화
더구나 흑표범이라면 어떤 수를 쓴 건지는 몰라도 저택에 침입해 난동을 피우지 않았던가.
뒤쫓았지만 아깝게 놓쳤고.
같은 수인일지 아닐지는 모르겠으나, 동족인 만큼 잡아서 털면 뭐라도 나오겠지.
‘게다가 리카도르가 그랬었지.’
저번 전쟁에서 제3의 세력이 개입했었던 것 같다고.
공교롭게도 그 유력한 용의자 또한 흑표범이 아닌가.
뭐든 앞길에 방해가 될 만한 건 미리 치워버려야 후환이 없을 터.
슈페나의 눈빛이 나무열매를 노리는 파랑새처럼 날카로워졌다.
‘근데 단풍나무 밑에 있다고 했지.’
그걸 어떻게 찾냐?
슈페나는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뾰로통한 얼굴로 툴툴대었다.
하나, 리카도르는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부인, 흑표범들이 얼마나 있는지 더 알아봐 줄 수 있어?”
그가 잘 벼려진 칼날같이 서늘함이 감도는 푸른 눈으로 테네도르를 응시했다.
여전히 못마땅했지만, 쓸모가 있는 건 사실이었으니.
“어? 어. 잠깐만.”
슈페나는 어느새 잠잠해진 테네 도르에 다시 탈리테를 불어넣었다.
그러자 테네도르가 위잉, 진동하며 마저 정보를 내뱉었다.
[그 밖에도 숲에는 대략 30마리의 흑표범이 포진해있음.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으로 보임.]흑표범이 30마리나 된다고?
단독행동을 하기로 유명한 흑표범들이 이렇게나 많이 무리 지어다니다니.
흔치 않은 일이었다.
분명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나저나 오늘은 잠깐 수색 도는 느낌으로 숲에 온 거라서 호위를 많이 데려오진 않았는데.
얼른 연락을 취해야겠지?
슈페나가 잽싸게 머리를 굴리고 있는 사이, 리카도르도 상념에 빠졌다.
‘무언가를 찾고 있다고……….’
체드윅 가의 기사들이 약도를 빼앗았으니 흑표범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야 할 텐데.
어떻게 먼저 리만 운하를 뒤지고 있었던 거지?
심지어 표범들의 영역은 독수리 영지와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러니 사자들이 사절단을 보낸다는 소식을 듣고 왔다 한들, 이렇게 빠를 수는 없었다.
‘다른 방법으로 지도를 손에 넣은 건가, 아니면 여유분이 있었던 건가.’
혹은 또 다른 약도가 있는 걸까.
리카도르는 손에 쥔 약도를 툭툭건드리며 슈페나에게 이야기했다.
“부인, 일단 여기 있어.”
“응?”
슈페나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리카도르의 벽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잠잠하게 잠긴, 어두운 빛을 띠었다.
“흑표범 한 마리만 잡아 올게.”
그리 말한 리카도르가 돌연 검지와 엄지를 둥글게 모아 입에 가져 다 대며 휘파람을 불었다.
휘이, 기다랗고도 날카로운 소음이 허공을 휘저었다.
하지만 슈페나는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사자들만 알아들을 수 있는 주파수의 수신호였으니.
마찬가지로 흑표범들도 알아채지 못했을 터.
“곧 호위가 하나 도착할 거야. 이 주변에 또 다른 기척은 느껴지지 않지만 조심하고 있어.”
리카도르는 부러 여유로운 낯으로 미소를 지으며 슈페나의 머리를 느른하게 쓰다듬었다.
골치 아픈 이능을 가진 흑표범일지라도, 제 기척 하나 숨기지 못하는 애송이는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으니까.
무엇보다 그는 수인들의 왕이라 불리는 사자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실력을 지니지 않았던가.
리카도르가 제 겉옷을 벗어 슈페나에게 꼼꼼히 여며주곤 저벅저벅, 멀어졌다.
“야, 리카도르!”
슈페나는 크게 소리 내지도 못하고 새된 목소리로 속닥거리며 발만 동동 굴렀다.
“가버렸네.”
결국, 슈페나만 덩그러니 나무 아래에 남게 되었다.
조금 기다리자, 리카도르의 말대로 호위가 도착해서 무섭거나 외롭지는 않았지만.
그리고 정확히 15분 뒤.
‘얘 언제 와?’
슈페나는 발로 스윽 흙바닥에 낙서를 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약간 심심해진 참이었다.
일순간 팔뚝이 찌르르 울리는 듯한 감각이 찾아왔다.
그와 동시에 슈페나의 팔 위로 새겨진 표식이 웅웅, 무언가를 말해주는 듯 은은한 빛을 발했다.
‘뭐지? 방금 좀 이상했는데…….’
이번에도 슈페나는 눈치채지 못했다.
애당초 옷에 가려져 슈페나가 알아채기도 힘들었고.
그렇지만 그녀는 직감적으로 이거 하나만은 느낄 수 있었다.
리카도르가 곧 올 것 같다고.
신기하게도 딱 타이밍 좋게 저 멀리에서 리카도르가 보였다.
그는 흑표범으로 추정되는 검은 머리의 앳된 남자를 어깨에 들쳐 멘 상태였다.
리카도르가 갑자기 멈춰서더니 제 오른쪽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표식의 연결이 갑자기 강해졌어.’
부인의 위치를 알려주듯이.
그가 골몰히 고민하는 사이, 슈페나는 미어캣처럼 힐끔힐끔 상황을 파악했다.
‘저 검은 머리는 흑표범인가 봐.’
이러한 슈페나의 상념은 오래갈 수 없었다.
리카도르가 흑표범을 흙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치곤 호위에게 고갯짓했으니까.
“묶어두겠습니다, 소가주님.”
슈페나의 옆을 지키던 호위는 널브러진 흑표범을 눈치 빠르게 포박했다.
리카도르는 다시 한번 휘파람을 불어 은밀히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일단 지금 일을 해치우는 게 급선무였다.
표식이 이리 존재감을 과시하는 것도 처음 있는 일은 아니지 않은가.
방금 그것은, 리카도르의 의지가 아니긴 했어도.
한편, 슈페나는 살금살금 리카도 르와의 거리를 좁히며 곁눈질했다.
‘그나저나 리카도르 얼굴에 묻은 저 붉은 거…… 피 아니야?’
놀란 그녀가 헐레벌떡 달려가 그의 안색을 살폈다.
“리카도르, 괜찮아?”
쓸린 상처나 생채기 같은 건 없는데.
흑표범의 선혈이 묻은 건가?
그녀는 피 묻은 그의 볼을 조심조심 손수건으로 쓸어내리며 걱정을 쏟았다.
“다친 건 아니지?”
“갑자기 아픈 것 같기도 하고.”
그 정성 어린 손길에 리카도르가 짐짓 아픈 체를 했다.
반쯤 감긴 눈으로 슈페나를 내려다보면서 은근하게.
그에 슈페나는 말끝을 흐렸다.
“야, 너….”
리카도르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 뺨을 슈페나의 손등에 부볐다.
그녀가 동공지진을 일으키며 그를 만류했다.
그러나 그 말은 끝까지 이어질 수 없었다.
“장난치지”
“호, 해줘. 부인.”
리카도르는 짐짓 유들유들하게 능청스러운 어투로 엄살을 피웠다.
안 그래도 나무늘보 때문에 심란해 죽겠는데, 부인의 관심을 받아 낼 기회가 어디 흔하단 말인가.
“나도 여기 맞았어. 쓰라리단 말이야.”
그가 목 끝까지 잠겨있던 셔츠단추를 풀어 살갖이 약간 붉게 달아오른 목덜미를 가리켰다.
벌어진 셔츠 틈새로 적당히 드러난 가슴팍과 툭 불거진 빗장뼈.
슈페나의 얼굴이 화르륵 불타올랐다.
‘다른 수인도 다 보고 있는데.’
호위의 눈치를 살피며 부끄러워하던 그녀는 저도 모르게 리카도 르를 퍽, 밀쳤다.
“아!”
리카도르가 피식 웃으며 장난스레 신음을 흘렸다.
“원래 아픔은 아픔으로 이겨내는 거랬어.”
슈페나는 리카도르를 밉지 않게 흘기며 흥, 코웃음을 쳤다.
‘갈수록 능글맞아지는 것 같아.’
그녀가 힐끗 리카도르를 훔쳐보았다.
그리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화제를 돌리려 노력했다.
“그, 그나저나…….”
슈페나의 시야에 끈으로 칭칭 묶인 채 죽은 듯 눈을 감고 있는 흑표범이 들어찼다.
그녀가 살짝 낮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저거, 죽은 건 아니지?”
“그냥 기절한 거야.”
리카도르가 여상스레 답했다.
혹시 시체일까 싶어서 깜짝 놀랐네.
가슴을 쓸어내린 슈페나는 슬그머니 리카도르의 의중을 떠보았다.
저기 쓰러진 흑표범을 활용할 방법이 많을 듯해서.
“…저 흑표범을 가지고 뭐 하려고?”
“뭐든 해야지. 인질로 쓰는 고문아니, 알고 있는 걸 죄다 토해내게 하든.”
리카도르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흑표범을 내려다보며 서늘하게 눈을 빛냈다.
역시 내 남편답게 영리한 게 아주 듬직해. 멋있어.
슈페나는 뿌듯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다 이내 표정 관리를 했다.
‘너무 속 보였으려나?’
이런 슈페나의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리카도르가 토닥토닥다독였다.
“걱정 마, 부인. 금방 마무리 지을 거니까.”
리카도르는 절도 있게 손을 들어 뒤에서 조용히 기립해있던 호위에게 명을 내렸다.
호위는 꾸벅 고개를 숙이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흑표범을 커다란 자루에 담았다.
슈페나가 그 광경을 구경하며 의아하게 의문점을 제기했다.
“근데 이 큰 걸 어떻게 처리하려고? 숲에 다른 흑표범들도 있다고 그랬잖아.”
저렇게 자루에 담아 가는 건, 너무 티 나지 않나?
이런 슈페나의 의문이 투명하게 비친 모양인지 리카도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일단 눈가림은 해야지.”
그 말에 슈페나는 씨익 시원하게 미소를 지었다.
“나한테 더 좋은 방법이 있는데.”
시계탑 비밀장소에서 얻은 게 좀 많지 않은가.
그중 여러 가지 귀물들을 챙길 때 사용했던, 어떤 물건이든 모조리 들어가는 가방.
그걸 가져왔었다.
혹시나 약도 속 그려진 장소에 보물이라도 있다면 꼼꼼히 다 챙겨야 할 테니까.
슈페나는 자루에 담긴 흑표범을 들고 있는 호위에게로 망설임 없이 다가갔다.
그러곤 일견 새침하게 보일 만큼 알쏭달쏭한 부탁을 했다.
“저 흑표범 좀 이 가방에 넣어주실래요?”
“예?”
그녀가 들고 있던 가방 입구를 열곤 툭툭 쳤다.
“여기. 여기로 가져오기만 하면 되는데.”
사람을 담기엔 너무나도 작은 핸드백 크기의 가방이 아닌가.
호위는 어리둥절해하며 조건반사적으로 리카도르에게 눈짓을 보냈다.
어떻게 할까요? 라는 의미를 담아.
리카도르도 영문은 모르지만 일단 부인 말을 들어보라는 뜻으로 까닥 고갯짓했다.
호위가 쭈뼛쭈뼛 슈페나의 가방 쪽으로 흑표범을 기울였다.
그러자 마법처럼 흑표범이 가방속으로 빨려 들어가 담겼다.
이 신비한 광경에 호위의 눈이 눈알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커다 래졌다.
“이, 이게 무슨…!”
그보다는 점잖았지만 놀란 건 리카도르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건 어디서 났어?”
리카도르가 슈페나의 옷소매를 끌며 바짝 거리를 좁혔다.
슈페나는 그러한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의기양양하게 가방을 두드리며 이야기했다.
“설명하자면 좀 길고 나중에 어머님한테 물어봐.”
비밀장소에 관한 걸 미주알고주알 설명하면 시간을 너무 잡아먹을 것 같았으니.
대신 슈페나는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
“아. 그리고 네가 저 흑표범 잡으러 갔을 때, 테네도르로 들은 게 하나 더 있는데…….”
실은 아까 리카도르와 잠시 떨어지고 나서 얻은 정보가 몇 가지 더 있었다.
[흑표범들은 5시간마다 특정한 장소에서 모이는 것으로 보임. 이제 4시간 남음.]이런 내용이었다.
슈페나는 이 은밀한 정보를 곱씹었다.
‘4시간. 쓰임에 따라서 길 수도 짧을 수도 있는 시간이야. 뭔가 괜찮은 방법이 없을까?’
때마침, 제법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흑표범이 본인들 손에 스스로 놀아나는 아주 재미난 그림이.
‘리카도르는 잡아다가 족칠 기세였으니까.’
리카도르 입장에선 저주스러운 흑표범이니 당장이라도 죽여 버리고 싶겠지.
하지만 분명 방금 테네도르에선 4시간 후에 흑표범들이 집결할 거라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흑표범도 얼마 지나지 않아 눈치챌 게 뻔했다.
동료 중 하나가 사자들에게 잡혀 갔을지도 모른다는 걸.
‘그럼 일이 더 귀찮아질 거야.’
흑표범들이 바짝 경계하고 사자들을 바로 공격할지도 모르니까.
차라리 지금 잡힌 저 흑표범을 잘 요리해서 이쪽 입맛대로 움직이는 편이 더 효율적이었다.
더구나 슈페나에겐 단 10분 만에 흑표범의 멘탈을 탈탈 털어버릴 방법이 있었다.
“이렇게 하는 건 어때?”
슈페나는 의미심장한 눈빛을 하곤 리카도르에게 말을 건네었다.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107화
독수리 저택 안, 사자들에게 배정된 별관.
잡아 온 흑표범은 대충 응급처치를 한 뒤, 별관 맨 안쪽 골방에 가둬두었다.
정신지배 이능에 당하지 않도록 흑표범에게 안대까지 채워서.
“저, 저에게 이러셔도 별 소용 없을 겁니다. 전 그냥 선량한 말단 흑표범일 뿐입니다.”
이윽고, 깨어난 흑표범의 말투는 일견 절박하기까지 했다.
바로 지척에서 리카도르가 어마무시한 살기를 내뿜고 있었으니까.
덩달아 눈에 힘을 주고 있던 슈페나는 최대한 냉정한 음성으로 다른 호위들에게 지시했다.
“먹여.”
슈페나의 손에 들린 하얗고 동글동글한 눈깔사탕처럼 생긴 무언가.
호위들은 그걸 받아들곤 저벅저벽, 흑표범에게로 다가갔다.
당연하게도 혹표범은 도리도리 미친 듯이 고개를 젓더니 이상한 괴성을 내지르며 반항했다.
“절대, 결코 먹지 않을……!”
그 생난리에 호위들이 억지로 흑표범의 입을 벌려 삼키게 했다.
“……. 사탕?”
어쩔 수 없이 정체불명의 음식을 먹은 흑표범이 꿀꺽, 침을 삼키곤 의아해했다.
동글동글한 무언가에서는 달콤한 딸기 맛이 났으니까.
슈페나가 만면에 웃음을 띠며 사형선고를 내리는 판사처럼 진지하게 설명했다.
“사탕은 아니고 곧 마비가 오게 될 거야.”
그녀는 반지작 반지작, 오른손에 걸려있던 은반지를 느릿하게 매만졌다.
시린 서늘함이 묻어나오는 슈페나의 한마디에 흑표범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예, 예에?”
1분 뒤.
불안하게 다리를 떨던 흑표범이 약간 부은 듯 퉁퉁해진 입술을 뻐끔대었다.
“이, 입이 안 우, 움…지겨”
“알려줬잖아. 마비가 올 거라고.”
슈페나는 어딘가 어정쩡한 입꼬리를 억누르며 일견 잔혹하게 뇌까렸다.
그녀의 손에 걸린 은반지가 매섭게 번뜩였다.
“이제 너는 점점 손발에 힘이 없어질 거고, 게거품을 문 채로 죽게 되겠지. 아주 고통스럽게.”
“우! 무, 무슨! 갑자기 배가”
흑표범은 잘 움직이지 않는 입을 달싹이더니 경악했다.
흑표범의 낯빛이 단번에 새파랗게 질렸다.
슈페나가 최대한 냉혹한 수인처럼 느껴지도록 노력하며 종지부를 찍었다.
“네가 먹었던 사탕 같은 이건, 사실 독이거든.”
실은 구라였다.
아주 새빨간 거짓말.
극독의 정체는 그냥 영양제였다.
다만, 많이 복용했을 시에 알레르기 반응과 복통을 유발하는 그런 의약품.
‘다음 날, 속앓이를 하고 마는 정도의 부작용이 전부라고 그랬나.’
주로 작은 동물들에게 부작용이 나타난다고 그랬는데, 흑표범한테도 꽤 반응이 오는 듯했다.
본디 약은 쓰임과 정도에 따라서 독이 되기도 하는 법이었다.
비밀장소에서 가져온 물건 중에 약초가 많아, 사업을 의약품 계열로 넓히지 않았던가.
카누스가 1차 임상을 끝냈다고 한바탕 자랑했던 그 영양제였다.
이후에 꼬마 뱀이 영양제 샘플을 보내줬었는데 아무래도 섞여 들어간 모양이었다.
독수리 영지로 떠나기 전, 오만 것들을 다 쓸어 담아왔으니까.
‘뭐, 결론적으론 잘됐지.’
그래도 가려움과 왕성해진 배변활동 덕에 흑표범도 좀 고생할 게 분명했다.
사건의 전말을 모르는 흑표범은 안대 사이로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며 슈페나에게 애원했다.
알레르기 반응 때문인지 흑표범의 입에서 어눌한 변명이 새어 나왔다.
“……저, 저는 아지익, 어리고 살날이 마니 남았는데. 그저 이곳에서 뭔가 찾으면 돈을 준다기에….”
결박이 풀려있었다면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을 것만 같은 기세였다.
슈페나의 연기가 제대로 먹혀들어 간 듯싶었다.
‘표범은 원래 단독행동을 주로 하는 동물이지.’
역시 그런 종족인 만큼 서로에 대한 의리나 충성심 같은 감정이 깊을 리 없었다.
저 흑표범이 자기 먼저 살겠다고 이리 비는 것처럼.
‘이번에 흑표범 여럿이 뭉친 게 희귀한 일이지.’
애당초 흑표범들은 싸움이 벌어지는 등, 꼭 필요한 경우에만 힘을 모으는 종족이었으니.
어찌 되었건 다행이었다.
흑표범이 순순히 넘어올 것 같아서.
슈페나의 예상대로 흑표범은 더욱더 애처롭게 매달렸다.
“저, 저………제바, 제바알……사려 주시”
“살려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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