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uebird Lady and The White Lion Family RAW novel - Chapter (15)
백사자가문의 파랑새 마님 15화(15/21)
얘가 미쳤구나.
슈페나가 얼을 타는 사이, 리카도 르의 입술이 다시금 가까워졌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또 한번 맞물려질 무렵, 눈치 없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가주님, 작은 마님!”
독수리 가주를 감시하라고 보냈던 수하가 돌아온 것이었다.
그에 다른 사자들이 수풀에서 튀어나오더니, 그 수하의 발등을 잽싸게 밟아 필사적으로 만류했다.
“야, 넌 사회생활 모르냐!”
“악!”
졸지에 봉변을 당한 수하가 펄쩍 제자리에서 뛰었다.
사실 강가에 남아 수색을 더 하고 있던 다른 사자들은 심상치 않은 소가주 내외의 분위기를 보곤 눈치껏 몸을 숨긴 참이었다.
핑크핑크한 기류를 내뿜는 순간에 다른 관람객이 있으면 곤란하지 않은가.
그 정도 짬밥은 있는 사자들이었다.
그러나 이 가상한 노력은 다른 수하의 난입으로 수포가 될 수밖에 없었다.
느닷없는 인기척에 화들짝 놀란 슈페나가 리카도르를 팍 밀쳐내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사자들이 멋쩍게 뒤통수를 긁적이는 광경.
“리, 리카도르……….”
미쳤네. 망했어.
슈페나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건 리카도르도 마찬가지였다.
정확히는 짜증이 난 거였다.
그가 최대한 감정을 억누른 채, 겉옷을 벗어 슈페나에게 꽁꽁 여며주었다.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으니까.
그러곤 심기가 불편해진 맹수처럼 으르르, 약한 살기를 내뿜으며 수하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지?”
수하는 쭈뼛거리며 보고했다.
“독수리 저택에서 비밀공간을 발견했습니다. 아무래도 확인해보셔야 할 것 같아서…….”
리카도르가 손으로 미간을 짚으며 말했다.
“하……. 일단 독수리 저택으로 복귀한다.”
***
한편, 그 시각 체드윅 가의 저택안.
남은 체드윅 가의 식구들은 티타임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수인 종족에게 사절로 보냈던 리리엘라와 리헨테온은 빠르게 저택으로 귀환한 참이었다.
그렇게 칸과 리리엘라, 리헨테온 그리고 카누스.
이 네 사람이 모인 티타임 시간.
먼저 서두를 연 건, 리리엘라였다.
“리카도르는 잘하고 있을까요, 어머니?”
“글쎄다. 영 불안하군.”
칸이 호로록 따뜻한 차를 음미하며 연륜이 묻어나오는 저음으로 뇌까렸다.
그러자 와그작와그작, 초콜릿 쿠키를 집어 먹던 리헨테온이 얄밉게 맞장구쳤다.
“부디 이별 여행이 되지 말아야 할 텐데 말입니다, 어머니.”
“넌 그 재수 없는 소리 좀 하지 마, 리온.”
유순한 리리엘라마저 타박할 만큼 얄궂은 어그로 실력이었다.
멍청하고도 착한 동생을 째려보던 리리엘라가 돌연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니다. 그냥 리카도르는 버리라고 하고 슈페나는 내가 데리고 살까….”
그녀의 머릿속엔 어떻게 해야 슈페나를 끼고 살 수 있을지밖에 없었다.
그때, 잠자코 있던 카누스가 발랄하게 끼어들었다.
“아이, 끝내주는 입맞춤이 이루지 못할 건 없다니까!”
이윽고, 모두의 화제는 그런 쪽으로 모였다.
“그 둘이 과연 뽀뽀를 했을까?”
모두의 눈망울이 초롱초롱해졌다.
칸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순진한 꼬꼬마 둘이 뽀뽀라니.
아직 어머니의 눈에는 너무나도 어린 둘이었다.
칸이 살짝 비장해진 어조로 모두와 찬찬히 눈을 맞추며 이야기했다.
“일단 며늘아가를 붙잡을 준비나 단단히 하자꾸나. 환영회는 작전대로 준비되었지?”
“네! 물론이죠. 어머니.”
활기차게 고개를 끄덕인 리리엘라는 슬며시 생각했다.
얼른 슈페나를 보고 싶다고.
“며늘아가는 언제 오려나.”
“형수님이 빨리 오시면 좋겠습니다.”
“홍, 카누스도 슈페나 누나, 쪼금은 보고 싶긴 하네!”
그리고 그건 다들 똑같았다.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115화
체드윅 가 식구들이 도란도란 수다를 나누는 동안.
독수리 영지에 있는 슈페나와 리카도르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흘렀다.
리카도르가 복잡미묘한 감정이 묻어나오는 저음으로 슈페나에게 이야기했다.
“부인, 제인을 불러오라고 할 테니 일단 여기 있어.”
막 물에서 나와 홀딱 젖은 상태가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우락부락 땀 냄새가 나는 수하들이랑 부인을 함께 두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 상태로 저택까지 데려갈 수도 없었다.
제인에게 부인을 맡기고, 자신만 먼저 독수리 저택에 가서 수하의 보고를 확인할 생각이었다.
리카도르가 수하들에게 슈페나를 지키라 눈짓한 뒤, 힐끗 곁눈질했다.
‘입을 맞추었는데도 부인이 날 피하지 않았다고.’
사실 지금 리카도르의 심경은 혼돈 그 자체였다.
슈페나가 자신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리 입을 맞추게 되니 좋으면서도 불안했다.
꿈만 같아서.
그리고 나무늘보 놈의 이야기를 꺼냈을 때 얼떨떨해하던 슈페나의 표정.
그게 턱, 마음에 걸렸다.
‘뭔가 착오가 있었던 건가.’
그간 차마 부인에게 다른 남자를 좋아하게 된 거냐고 물어볼 수는 없었다.
슈페나가 긍정하며 자신을 떠나 갈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여태껏 비 맞은 강아지처럼 낑낑거리며 슈페나의 곁을 맴돌았는데….
“확실히 부인의 반응이 이상해.”
입맞춤의 힘이 강력하긴 했던 모양인지 원래의 귀신같은 눈치가 차츰 돌아오고 있는 리카도르였다.
하나, 더 이상 상념을 이어갈 순없었다.
“소가주님……?”
수하들의 재촉이 들려왔으므로.
일단은 당장 닥친 문제를 해결할 차례였다.
“…어, 얼른 가봐, 리카도르.”
슈페나도 넋이 빠져나간 듯한 음성으로 리카도르를 향해 멍하게 훠이훠이, 손을 내저었다.
차마 그를 마주 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갑작스럽게 뽀뽀한 사이에 무슨 대화를 나누겠는가.
그렇게 폭풍처럼 휘몰아치던 일들이 일단락된 후.
슈페나는 제인을 기다리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역시 리카도르도 자신과 같은 마음일 거란, 거의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 들었다.
제 남편이 마음에도 없는 여자랑 입을 맞출 성정은 아니었으니까.
슈페나에게서 배, 웃음이 흘러 나왔다.
그렇지만 찜찜한 기분은 아직 남아있었다.
‘그러고 보면 리카도르가 했던 말들…… 다 너무 허무맹랑했는데.’
이혼이니 도망이니, 어디서 소설이라도 읽고 온 건지 헛소리만 해대지 않았었나.
‘생각해보면 그동안 리카도르가 좀 이상하긴 했지.’
답지 않게 약간 초조해 보이기도 했고, 묘하게 질투가 많아진 것 같기도 했고, 그러고 보면 떠나기 전 어머님이랑 다른 가족들도 영 수상쩍었는데.
아무래도 리카도르랑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눠보아야 할 것 같았다.
슈페나가 그리 다짐하는 사이,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스였다.
“작은 마님! 제가 모실게요!”
제인이었다.
슈페나는 제인이 건넨 기다란 담요를 둘둘 두르고는 독수리 저택으로 향했다.
다른 수하가 끌어온 인력거 비슷한 걸 타고 숲길을 나아가던 그녀가 제인에게 넌지시 물었다.
“제인, 근데 내가 다른 남자 만나고 다닐 것처럼 생겼어?”
“예?”
당연히 제인은 당황했다.
어딘가 정곡을 찔린 표정으로.
그에 슈페나는 배신감이 진하게 묻어나오는 눈빛으로 제인을 쳐다보았다.
“내가 진짜 그렇게 생겼어?”
제인이 머뭇거리다 이야기를 꺼내었다.
“…저, 마님. 있잖아요. 그 잘생겼다고 하셨던 나무늘보는..….”
“응?”
나무늘보?
그 수인이 갑자기 왜 나와?
무언가 기이한 감각이 스멀스멀피어올랐다.
슈페나의 얼굴이 깊은 고뇌를 하는 티베트 여우처럼 변할 무렵, 제인은 쭈뼛쭈뼛 눈치를 살폈다.
“죄송합니다, 작은 마님.”
그리고는 도르륵 눈알을 굴리더니 슬금슬금 슈페나에게서 멀어져갔다.
혼이 날까 저어된 탓이었다.
“허.”
슈페나는 그런 제인의 뒷모습을 보며 실소했다.
‘지금 나무늘보랑 나랑 뭔가 있어 보였다는 거야?’
어이없네.
도대체 왜?
문득 체드 가를 떠나기 전, 나무늘보에게 받았던 술주정 편지가 떠올랐다.
대충 옷을 갈아입은 뒤, 독수리 가주를 탈탈 털던 참이었다.
독수리 저택에 남은 흑표범의 잔당이 숨어있을지도 모르니 수색해야겠다는 명목으로.
아무튼 그 결과.
지도 속 장소에서 주운 이상한 책의 하편과 수하가 보고했던 비밀공간을 발견한 상황이었다.
그곳은 다름 아닌, 지금 리카도르가 있는 부엌이었다.
부엌 한구석에 만들어둔 비밀공간에는 불법 서류와 패물들이 널 수 없었다.
“저희 독수리가 사자들과 잘 지내기 위해 그간 노력을 얼마나 많이 했는데! 이 정도 비자금 조성은 남들도 다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독수리 가주는 뭐가 그리 불안한지 자신의 처지도 잊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었다.
리카도르가 못 봐주겠다는 듯 미간을 사정없이 찌푸렸다.
“그 별로 대단하지도 않은 노력, 오늘로 끝난 듯한데 주제 파악 좀하지?”
“..… 예, 예에?”
어벙하게 반응하는 독수리 가주의 모습에 리카도르가 주먹을 꽉쥐었다.
당장이라도 후려갈기고픈 심정이라서.
험악한 취조가 이어지려던 찰나, 슈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 몸이 조금 차긴 했으나, 더운물로 샤워도 하고 옷도 두껍게 챙겨 입어서 괜찮아진 참이었다.
오면서 다른 사자들에게 상황 보고를 대충 들은 그녀는 에휴, 한숨을 쉬었다.
‘뭐야? 또 부엌이야? 진짜 창의 성 없다.’
예전에 독수리 가문에 엿 먹였을 때도 부엌에 있던 금고를 털지 않았던가.
어쨌든 지금 독수리 가주가 뻗대고 있는 상황이란 말이지.
슈페나는 잠시 망설이다 리카도 르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잠깐만 리카도르, 나한테 맡겨 봐.”
아까와 같은 일을 겪고 난 후, 리카도르에게 말을 걸려니 이상하게도 쑥스러웠다.
그러나 그녀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내색하면 더 어색할 것 같잖아.
‘우선 저 독수리 먼저 처리하는 게 급선무니까.’
일순간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독수리 가주를 살살 구슬려 가진 밑천을 다 털어버리고 세상에 박제시켜버릴 방법이.
그녀가 꿀꺽 마른침을 삼키곤 리카도르에게 제안했다.
“그리고 혹시 몰라서 가져온 네 만년필 사용해도 돼?”
처음 체드윅 가에 입성했을 때, 건방졌던 하녀들의 유죄를 입증하는 데에 쓰였던 신물.
제법 유용하지 않을까 싶어 리카도르에게 양해를 구하고 가져오지 않았던가.
이번에도 잘 활용할 수 있을 듯했다.
“…어. 마음대로 해, 부인.”
리카도르가 힐끗 슈페나를 바라보더니 답지 않게 뚝딱거리며 대답했다.
그런 그의 눈빛은 복잡미묘한 각양각색의 감정을 띠고 있었다.
뽀뽀의 여파는 커다랬다.
‘뭐지?’
슈페나도 덩달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하튼 상황은 슈페나의 뜻에 따라 조금 바뀌었다.
그녀가 보는 이가 없도록 사람을 물려달라고 했으니까.
곧이어 부엌이 조용해지고, 그녀가 무릎 꿇은 독수리 가주를 향해 자못 상냥한 어투로 말을 붙였다.
“솔직하게 아는 거 다 말씀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그, 그게 무슨……….”
슈페나는 메고 있던 가방에서 테네도르를 꺼내었다.
“관찰 이능이 담긴 테네도르예요.
이걸로 가주님을 조금 감시했어요.”
그러고는 술술 다 얘기했다.
테네도르로 들었던 독수리 가주의 혼잣말에 관한 내용을.
‘일단 독수리 가주가 알고 있는 게 더 있을지도 모르니까.’
물론 열심히 약을 파는 것도 잊지 않았다.
흑표범이 찾는 게 바로 리만 운하 상류에 있는 장소였다고. 그런만큼 같이 묶여 의심받을 수 있다고.
겁을 주던 슈페나가 이내 쐐기를 박았다.
“아는 걸 다 이야기해주셔야 저도 돕죠.”
“…… 돕는다고요, 저를?”
그 갑작스러운 호의적인 언사에 독수리 가주의 눈이 휘둥그레 뜨여졌다.
슈페나는 천연덕스레 싱긋 미소지었다.
입에 발린 혼신의 구라였지만.
“뭐, 친척이니까요. 피가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왜 있겠어요, 숙부 님.”
“흐음.”
독수리 가주는 약간 의심이 남은 어투로 침음성을 흘렸다.
그러다 기댈 곳은 슈페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숨겨진 이야기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116화
“리만 운하 상류에 숨겨진 장소가 신의 땅으로 통하는 관문이라더군요.”
오호라.
이건 생각지도 못했던 건데.
‘그 탑에 아래로 내려가는 통로가 있었지. 잠겼지만.’
설마 그곳을 열었다면 신의 땅을 밟을 수 있었던 걸까.
딱히 관심은 없었지만 궁금해졌다.
그 이후, 독수리 가주는 더욱 심층적인 뒷얘기를 쏟아내었다.
뱀 가문의 어느 할머니에 관한 얘기였다.
우연히 리만 운하 근처에서 쓰러져가던 뱀을 발견해 전 가주였던 슈페나의 호적상 아버지에게 보고 했다지.
그랬더니 호적상 아버지가 뱀 할머니에게서 책의 하편을 뺏었단다.
상편도 있으면 강탈하려 했으나, 뱀 할머니가 가진 건 하편뿐이었다나 뭐라나.
어쨌든 그 뺏은 책은 지금 독수리 가주한테 아무도 모르게 잘 간직하라며 맡겼다는 것이 사건의 전말이었다.
슈페나는 손으로 턱을 쓸었다.
딱 견적이 나왔다.
저 독수리 가주를 보내버릴 방도가.
그러는 사이, 독수리 가주가 슬그머니 의아함을 내비쳤다.
“근데 그 할망구 말로는 선택받은 이만이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랬는데 어떻게…?”
슈페나가 이런 쓸데없는 질문은 무시하고 제법 날카롭게 받아쳤다.
“그 뱀 가문 할머님은 어찌 되셨는데요?”
“그리 맞은 데다가 원래부터 골골대는 노인네였으니 죽었겠지요.”
카누스가 할머니는 돌아가셨다고 그랬지.
그게 저 독수리 때문이었겠구나.
슈페나는 그저 참담하게 속눈썹을 드리웠다.
“아무튼 이곳 금고에는 여러 부정한 방법으로 모은 패물들을 보관한 것이지요?”
“하하, 부정하다니요. 무슨 그런 말씀을….”
달라진 그녀의 분위기를 감지한 독수리 가주가 불안하게 떨리는 눈으로 애써 너스레를 떨었다.
슈페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카운터를 날렸다.
“지금 가주님이 말씀하신 내용은 영상으로 기록되었답니다. 발뺌하실 수가 없어요.”
독수리 가주의 잘못은 이미 자백받지 않았던가.
질질 끌 것 없이 이대로 끝낼 생각이었다.
슈페나가 만년필을 허공에 대고 비스듬히 선을 그었다.
그러자 방금 그 둘이 나누었던 대화가 소리까지 내면서 생생한 그림으로 재생되었다.
“이, 이게 무슨-!”
독수리 가주는 기함하며 뒷목을 붙잡았다.
그녀가 목소리를 높여 부엌 밖에 있던 사자들에게 엄중히 명령했다.
“끌어내. 그리고 감옥에 가둬.”
사자들이 우르르 들어와 슈페나의 명을 따라 독수리 가주의 양팔을 붙잡았다.
독수리 가주가 당황해하며 슈페나를 올려다보았다.
“아니, 분명 도와주신다고-”
“도와주는 거예요. 더는 나쁜 짓안 하고 반성하도록. 감사 인사는 필요 없어요, 숙부님.”
그녀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방긋 어여쁜 웃음을 걸쳤다.
온기 한 점 없이.
“이…… 말도 안 되는, 여긴 내 영역이야! 나를 이렇게 끌고 갈 수는 없다고!”
급기야 독수리 가주는 실성이라도한 듯 발버둥을 쳤다.
사자들이 특유의 이능을 사용한 덕에 바로 밖으로 끌려 나갔지만.
어찌어찌 시끄러웠던 소란이 멎고리카도르는 잽싸게 다가와 슈페나의 상태를 세심히 살폈다.
그녀의 뜻이 완강해서 독수리 가주와 독대하는 걸 내버려 두긴 했으나 계속 걱정이 되었으니까.
“어떻게 할 생각이야, 부인?”
“일단 지금까지 저지른 부정을 세상에 낱낱이 공개하고 벌을 받게 해야지.”
슈페나는 단호히 말을 받았다.
그러곤 리카도르에게도 동의를 구했다.
“가주 지위도 몰수하고 가장 큰 피해를 본 뱀 가문에 넘기는 게 좋지 않을까?”
아마 좋은 처우를 기대하긴 힘들 터였다.
뱀들은 은혜는 안 갚아도 원수는 배로 갚아주는 성정이었으니.
아마 죽지 못해 사는 조생이 되지 않을까.….
결국, 독수리 가주는 감옥에 갇혀 옥살이하는 신세가 되었다.
절차상 다른 독수리 원로들에게도 동의를 구해 치러진 일이었다.
‘꽤 세력 있는 뱀 가문과 사이가 틀어질 수도 있는 만큼 빨리 손절하고 싶었겠지.’
그리고 독수리 가문은 가장 가까운 직계인 슈페나가 임시로 맡게 되었다.
정확히는 체드윅 가에서 가주 대리를 파견할 계획이었다만.
그리 문제가 일단락되어가던 때.
저택 한구석에 가둬둔 흑표범들의 관리를 맡던 사자 하나가 뛰어왔다.
“소가주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이지?”
슈페나의 옆에 남아 독수리 가주에 관한 일을 같이 마무리하던 리카도르가 눈매를 좁혔다.
“그게, 심문 도중 새로운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수하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빠릿빠릿하게 이야기했다.
“아무래도 흑표범들의 지원군이 오고 있는 듯합니다. 병력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거기까진 잡아 온 흑표범들도 모르는 것 같다고 수하가 덧붙였다.
제법 심각한 사항이었다.
그 이야기를 잠자코 듣던 리카도 르가 차분하게 추가적인 질문을 했다.
“지원군이 어디까지 도달했는지는 알아냈나?”
“다음 주까진 올 수 있을 거라 연통을 넣었던 모양입니다.”
수하가 흑표범들의 자백을 적어놓은 문서를 리카도르에게 건네며 보고를 이었다.
그걸 꼼꼼히 읽어내리던 리카도르가 곤란하다는 듯 혀를 차더니 빠르게 상황 판단을 마쳤다.
“일단 가문에 급보를 보내라. 그리고 우리는 내일 아침 은밀히 이곳을 떠난다. 준비하도록.”
결국, 몇몇 사자들만 이곳에서 상황을 살피기로 했다.
아직 완벽히 준비되지 않은 상태이니 마찰을 피하자는 이유에서였다.
사자들도 정예만 골라 데려오긴 했으나, 본격적으로 맞붙게 되는 전투는 현실적인 문제였으니까.
곁에서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던 슈페나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럼 리카도르와 나는 다시 체드윅 가로 돌아가야겠네.’
더구나 독수리 가문에서 볼일은다 끝났으니 더 이상 남아있을 이유도 없긴 했다.
구린 짓을 많이 했던 독수리 가주도 뱀 가문의 수인이 와서 호송해 가기로 했으니까.
애당초 독수리 원로들도 다 동의한 사안이라서 가주가 빠져나갈 통로는 없었다.
책의 하편도 무사히 손에 넣었고.
‘책을 본격적으로 읽어보긴 해야 하는데…….’
독수리 가주의 일을 매듭짓느라 바빠서 정작 본래 목적이었던 책에는 신경을 쓰지 못했었다.
내일 떠날 거라면 열차 안에서 리카도르와 같이 머리를 맞대는 게 좋을 터.
‘맞다. 리카도르한테 물어봐야 할게 더 있는데.’
일전에 입을 맞추면서 했던 이야기들이 당최 무슨 뜻이었는지.
아직 제대로 물어보지 않았으니까.
그간 바쁘기도 했고, 리카도르의 얼굴을 볼 때마다 부끄러워서 뚝딱대기만 하느라 이야기를 못 꺼내지 않았는가.
‘제인도 자꾸 우물쭈물하며 나를 피했었지.’
왜 그 속 터지는 나무늘보랑 나를 엮어서 생각했는지 캐물어보려고 했는데!
죄라도 지은 것처럼 피할 줄이야.
다들 너무 이상했다.
슈페나는 꼭 자초지종을 듣고야 말겠다며 전의를 활활 불태웠다.
그러는 사이, 독수리 영지를 떠나는 날이 되었다.
***
은밀히 떠난다고는 했지만, 왔을 때와 똑같이 열차를 타기로 결정되었다.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하기엔 인원이 너무 많았으니까.
물론 혹시 모를 위험을 대비하여 다른 길로 약간 우회해서 가게 되었다.
흑표범 지원군이 독수리 영지로 올 때 사용할 만한 루트와 겹치지 않도록.
“햇빛이 되게 쨍쨍하네.”
제인을 따라 열차를 기다리던 슈페나가 손차양을 드리우며 괜스레 두리번거렸다.
열차가 드나드는 승강장은 체드윅가의 사신 행렬로 가득 차 번잡했지만, 활기가 넘쳤다.
이제 완연한 여름이었다.
‘곧 있으면 늘 내가 맡아왔던 여름 연회가 시작할 텐데. 그 전까진 갈수 있겠지.’
이번 연회는 어머님이 대신 준비해주신다고 그랬지.
슈페나의 상념이 길어지려는 찰나, 삐이익 익숙한 증기 소음과 함께 열차가 들어왔다.
‘리카도르는 언제 와.’
분명 뭔가를 놓고 왔다며 잠시 가지러 가겠다고 사라졌었지.
슈페나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이다 멈춰 선 열차를 타기 위해 발을 내디뎠다.
“작은 마님, 잠시만요!”
그때, 꿀 먹은 곰처럼 입을 꾹 다물고는 눈치를 살피던 제인이 그녀를 멈춰 세웠다.
제인의 손끝이 향한 곳에 리카도 르가 있었다.
“어머, 소가주님이 오시네요!”
포스스, 흩어진 희부연 열차 증기 사이로 뚜벅뚜벅 정적인 구두 소리가 울려 퍼졌다.
화려한 제복을 입은 리카도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금술과 장식이 주렁주렁 달려 조금 불편해 보였다만 잘난 얼굴을 더욱 부각해주는 차림새였다.
손에는 무언가를 쥐고 있었다.
직접 꺾어오기라도 한 듯 어설프지만 화사한 하얀 꽃다발.
피 터지는 연애고사의 산물이었다.
사람은 본디 생각하지도 않았던, 그리고 정성이 들어가 있는 선물에 크게 기뻐한다고 배웠으니까.
어찌 되었건 입맞춤도 했으니 굳히기에 들어갈 차례였다.
리카도르는 그 꽃다발을 슈페나에게 멋쩍게 건네며 여상스러운 저음으로 통보하듯 말했다.
“오다 따 왔어, 부인.”
“엉?”
슈페나는 황당해했다.
때마침 뚜루뚜뚜, 풀피리 부는 소리가 들렸다.
곁에 있던 수하들이 황급히 땅에 난 잡초를 뽑아서 낸 나름의 효과음이었다.
“어”
“어…… 고마워! 정말 예쁘다.”
슈페나가 데구르르 눈알을 굴리다가 애써 발랄하게 대답했다.
느닷없는 꽃 선물에 조금 놀라긴 했으나,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오히려 조금 설레고 만족스러운 간질거림이 발끝부터 살랑살랑 피어올랐다.
아무튼 슈페나와 리카도르는 나란히 열차에 올랐다.
예쁘게 꾸며진 부부 전용 열차 칸에 자리를 잡은 슈페나가 가방 안에서 책을 꺼내 들었다.
리만 운하 상류에서 발견한 책의상편과 하편이었다.
“아, 이 책 자세히 살펴보자.”
군데군데 훼손된 흔적도 있고 종이가 누렇게 변색되어서 대충 훑어보기만 했었다.
이제 여유가 생겼으니 제대로 읽어볼 생각이었다.
“응. 그럼 나한테 좀 기대는 편이 좋지 않아, 부인?”
그에 리카도르는 은근슬쩍 슈페나의 어깨를 감싸 안아 자신에게로 기대게 했다.
아주 자연스러운 개수작이었다.
슈페나는 눈치채지 못한 채, 머뭇머뭇 리카도르의 어깨에 제 머리를 뉘곤 책을 펼쳤다.
각성과 권능, 상편.
리카도르의 시선도 팔랑, 책이 넘어가는 소리를 따라 움직였다.
길고 긴 서론을 설렁설렁 건너뛰자, 퍽 중요한 주제가 나왔다.
– 권능이란 무엇인가.
슈페나가 책의 활자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천천히 읊조리듯 혼잣말을 내뱉었다.
“우리가 신으로 받들었던 자연이 지닌 힘이라…….”
구름, 달, 태양, 눈, 비.
정확히는 이런 것들이 지닌 힘의 일부를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권능이란다.
그리고 그 능력을 깨닫는 것 자체를 각성이라고 한다나 뭐라나.
“각성에도 그 단계가 있다는데, 부인?”
쿵 하면 짝 손뼉이 맞부딪치듯 호응하는 리카도르의 저음이 귓가에 내려앉았다.
슈페나는 그 말을 따라 눈알을 도르륵 굴렸다.
-각성은 총 세 단계로 나뉜다. 무의식중에 권능을 사용할 수 있는 발현, 점차 능숙하게 권능을 쓰기 시작하는 숙련, 그리고 자유자재로 권능을 다루게 되는 경지인 완성.
이게 책에 적혀있는 내용이었다.
‘내가 무의식중에 권능이란 힘을 쓴 적이 있었나?’
그런 신비한 힘을 사용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문득 이상하게 로네악 꽃을 정화했을 때가 떠올랐다.
보라색 꽃이 하얗게 물드는 건 분명 신기한 일이었지만, 그건 클라이 드 나무의 효능 덕분이 아니던가.
카누스가 나무와 자신의 파장이 잘 맞아서 그런 거라고 했었는데.
정보상은 회중시계를 가지고 있다보면 알게 될 거라 했었고,
‘아, 몰라. 그나저나 내가 가진 권능은 뭘까…….’
슈페나는 가방 속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들어 꼭 쥐었다.
잘만 떠오르던 기억은 가는 날이장날이라는 듯 머릿속에 비치지 않았다.
“그 회중시계, 잘 들고 다니네.”
그때, 리카도르가 힐끔 슈페나를 곁눈질하며 넌지시 말을 붙였다.
분명 나무늘보 놈이 일했던 시계 공방에서 산 것이랬지.
‘주인이 한 번 바뀌었다고 들었는데.’
아주 예전부터 가지고 있었으니, 이 물건은 나무늘보와 관련된 건 아닐 터.
그래도 역시 신경이 쓰였다.
나무늘보에 관한 이야기를 들먹였을 때 슈페나의 반응이 미적지근하지 않았던가.
‘그 개자식과 도대체 무슨 사이냐고 물어보긴 해야 할 텐데…….’
어떻게 해야 슈페나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고 말을 꺼낼 수가 있을까.
리카도르는 고심했다.
한편, 슈페나 또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회중시계를 보니 일리아가 떠올랐고, 일리아를 생각하니 나무늘보가 저절로 기억났으니.
‘제인은 왜 나무늘보랑 나를 엮은 걸까?’
설마 리카도르도 그렇게 생각한 건가?
슈페나의 입술이 불퉁하게 오리처럼 튀어나왔다.
만약 그런 거라면 리카도르의 머리통을 후려갈길 생각이었다.
슈페나가 결심했다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근데 있잖아. 리카도르, 네가 저번에 했던 말들….”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117화
리카도르가 은근슬쩍 슈페나를 를제 쪽으로 더 끌어당기며 느른하게 말을 받았다.
“왜, 부인?”
“이혼이니 도망이니, 뭐 그랬던 것들 말이야. 그게 무슨-”
하지만 그 얘기는 계속되지 못했다.
쾅-!
어디선가 요란한 폭발음이 들려 왔으니까.
금방이라도 기울어져 땅바닥에 처박힐 듯 열차 차체가 흔들렸다.
열차 천장에 달린 남포등, 세련된 원목 테이블, 아늑한 캐노피 침대.
열차 칸 안을 차지하고 있던 가구들이 쿵쿵, 바닥과 마찰하며 슈페나쪽으로 쏠렸다.
자칫 위험한 상황이었다.
우당탕—
덜덜, 요동치던 원목 의자가 간발의 차로 슈페나가 있던 곳을 향해 기울었다.
“리, 리카도르?”
그러나 슈페나의 입에선 비명이 아닌, 억눌러진 탄성과도 같은 한 마디만이 새어 나왔다.
리카도르가 상처 하나 입히지 않겠다는 듯 돌연 그녀를 너른 품에 가두었으므로, 제법 단단한 의자에 부딪혔는데도 그는 아픈 내색 하나 하지 않았다.
그러고선 제복 겉옷을 벗어 꼼꼼히 슈페나를 감쌌다.
“놀라지 마, 부인.”
리카도르의 낮은 음성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슈페나의 시야가 순식간에 어둠으로 물들었다.
그와 동시에 와장창, 차창의 유리가 깨지는 소음이 고막을 뒤흔들었다.
무언가를 던진 모양이었다.
리카도르는 한 손으로 가볍게 그녀를 안아 들곤 달리는 열차 밖으로 뛰어내렸다.
당연하게도 슈페나는 그의 품에 안긴 채, 데굴데굴 구르게 되었다.
움직이는 열차에서 뛰어내린 것이었다만, 리카도르가 가져다주는 묘한 안정감 덕분인지 다치진 않았다.
“..…괜찮아, 리카도르?”
얼마 뒤.
정신을 차린 슈페나가 볼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떼어내며 리카도르를 바라보았다.
그 또한 본래의 멀끔한 얼굴이었다.
안심한 그녀는 이내 타던 열차로 시선을 옮겼다.
열차가 끼이익, 듣기 싫은 소음을 내지르며 천천히 선로에 멈춰 섰다.
열차 마지막 칸은 아까 폭발음의 여파인지 형편없이 찌그러져 불타 오르고 있었다.
다행히 다른 사자들이 잽싸게 마지막 열차 칸의 이음새를 끊은 덕분에 다른 피해로 번지지는 않았다.
리카도르가 슈페나를 조심스레 일으켜 세우며 안색을 살폈다.
“다친 곳은 없지, 부인?”
“응. 난 괜찮아.”
그녀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가주님, 작은 마님. 괜찮으십니까?”
그 순간, 상황을 수습하던 다른 사자 수하가 그들에게로 뛰어왔다.
“갑자기 한 남자가 열차로 뛰어든 뒤, 이런 폭발이 일어났습니다.
아무래도 폭발물을 심어둔 것 같습니다.”
“폭발물?”
리카도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다른 열차 칸도 황급히 조사해 봤으나 아직 수상한 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 빠릿빠릿한 보고를 들은 리카도르가 날카롭게 추가 질문을 던졌다.
“그나저나 마지막 열차 칸엔 잡은 혹표범들이 있었을 텐데.…..
그들은?”
“죄다 죽었습니다.”
사자 수하는 약간의 한숨이 섞인 음성으로 착잡하게 답했다.
그러곤 사견이 담긴 이야기를 살짝 덧붙였다.
“한데 그 우두머리 놈의 시체는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갑자기 뛰어들었던 사내가 혼란을 틈타탈출시킨 것 같습니다.”
그에 리카도르가 으득, 이를 갈며 감정을 억누른 듯한 탁한 저음으로 뇌까렸다.
“흑표범들의 소행이겠군.”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슈페나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점을 지적했다.
“참, 우리가 미끼로 사용했던 흑표범은 다른 열차 칸에 가둬줬잖아.”
흑표범 무리 사이에 있으면 아마 자신은 죽을지도 모른다고 하도 사정하는 바람에 따로 떨어뜨려 놨었지.
쓸 만한 인질이 아예 사라진 건 아니었다.
그걸 상기시킨 그녀가 다시 입술을 달싹였다.
“그런데 어떻게 되는 거지, 이러면?”
결론적으로 리카도르는 남아 상황을 정리하고 슈페나만 먼저 체드윅 가로 돌아가게 되었다.
남은 인질인 미끼 흑표범을 끌고.
흑표범들과 관련됐을 걸로 추정되는 위험천만한 상황이긴 했으나, 누군가는 뒷수습을 해야 했으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 헤어지기 전.
단단히 무장한 제복 차림의 리카도르가 슈페나가 타게 될 차의 문을 열어주며 물었다.
“혼자서도 잘 갈 수 있겠어, 부인?”
“걱정하지 마. 도착하면 바로 연락할게.”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쳤다.
운 좋게도 열차가 멈춘 곳 가까이에 동맹관계인 다른 수인 종족이 살고 있어서, 체드윅 가로 돌아가는 여정 동안 경호를 받기로 했다.
급보를 받은 어머님도 다른 사자 병사들을 보내주기로 했고, 생각보다 불리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슈페나는 리카도르에게 신신당부했다.
“너야말로 무모한 짓은 절대 하지 마.”
그리 단단히 엄포를 놓은 슈페나는 살짝 작아진 목소리로 슬며시 진심을 내비쳤다.
“…… 걱정된단 말이야.”
그리고는 부끄럽다는 듯 얼른 차안으로 쏙 들어갔다.
그 귀여운 걱정에 리카도르의 입꼬리가 픽 유려한 곡선을 그렸다.
그가 차에 타지는 않은 채, 돌연몸만 쑥 안으로 들이밀더니 슈페나에게 치대었다.
살랑살랑 눈웃음을 치던 리카도르는 슈페나의 어깨에 메여 있던 신물 가방을 슬그머니 잡아끌었다.
“그나저나 이 안에 든 테네도르.
거기에 이능을 불어 넣어 준 수인 이 나보다 잘생겼어, 부인?”
끝까지 집요한 리카도르였다.
슈페나의 반응을 보니 무언가 꼬인 게 있는 듯하지만, 제인이 거짓말을 했을 리도 없지 않은가.
슈페나의 심미안에 나무늘보의 외모가 들어맞았던 건 사실일 터.
그 점이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리카도르는 짙게 침잠한 푸른 눈으로 그녀를 지그시 응시했다.
“무슨 그런……”
슈페나가 도리도리 고개를 저으며 부정의 의사를 내비쳤다.
‘아무래도 리카도르가 그때 했던 이혼이니 도망이니 하는 말들, 나무늘보와 관련 있는 것 같지?’
슈페나도 점차 사실에 도달해가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가 결심했다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네가 도대체 어떤 오해를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리카도르가 무슨 오해를 한 것 같긴 한데 구구절절 이야기할 시간이 없었으니까.
이제 떠날 때가 아니던가.
일단 확실히 못 박아둘 생각이었다.
“나, 너 안 버려. 절대로.”
슈페나가 리카도르의 두 손을 덥석 움켜쥐었다.
평상시엔 조금 서늘했던 그의 투박하고 커다란 손은 오늘따라 뜨겁기 그지없었다.
리카도르의 푸른 눈망울이 별빛이라도 수놓은 듯 일렁였다.
그가 목을 긁는 듯 쇳소리가 스며 나오는 잠긴 목소리로 읊조렸다.
“……부인이 날 버려도 안 놔줄 거긴 했어.”
끝이 살짝 말려 올라간 도톰한 입술이 만들어내는 언어에는 은은 한 집착이 묻어나왔다.
무언가 달라진 분위기를 감지한 슈페나가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물렸다.
푹신한 자동차 시트가 등 뒤에 위압적으로 닿았다.
그와 함께 커다란 리카도르의 손도 슈페나의 한쪽 어깨를 감쌌다.
고양잇과 맹수답게 느른히 올라 간 눈꼬리가 여우처럼 휘었다.
리카도르의 입술이 슈페나의 이마에 내려앉은 건 순식간이었다.
부드럽지만 거침없는 타인의 흔적이 피부 위에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슈페나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가 겨우 입술을 달싹여 리카도르를 지칭했다.
“야, 너….”
“그럼 좀 이따 만나, 부인.”
그로서는 나름 자제한 거였다.
더한 걸 했다가는 걷잡을 수 없을 것만 같아서.
그렇게 되면 부끄럼을 많이 타는 부인이 곤란해할 게 분명했다.
리카도르는 씨익 입매를 끌어올리곤 자연스레 그녀에게 벨트를 매어주었다.
어딘가 위험한 리카도르의 체향이 슈페나의 코끝에 훅 불어닥치고.
탁, 차의 문이 닫혔다.
슈페나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로 그저 차창 밖만 응시했다.
리카도르는 바지 주머니에 한 손을 꽂은 채로 여유롭게 손을 흔들 그녀는 우두커니 서서 눈 앞에 펼쳐진 가공할 만한 광경을 바라보며 끔벅끔벅 눈만 깜박였다.
칸이 얼떨떨해하는 슈페나를 다정하게 끌어안으며 저택으로 이끌었다.
“왔니, 며늘아가.”
덩달아 안겨드는 리리엘라와 깍듯하게 90도 인사를 하는 리헨테온은 덤이었고,
“보고 싶었어, 슈페나!”
“오셨습니까, 형수님.”
카누스도 새침데기처럼 툴툴대더니 은근히 살가운 이야기를 건네었다.
“카누스도 좀 보고 싶은 것 같긴 하더라. 그러게 왜 이렇게 늦게 오래?”
다들 슈페나를 반기는 모습.
여기까진 괜찮았다.
문제는….
슈페나가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둘러보며 의아함이 감도는 음성으로 질문했다.
“근데 저택이 왜 이렇게 된 거예요, 어머님?”
왜 저택 정원 나무가 다 라즈베리 나무로 바뀐 거지?
그리고 어째서 가족들은 다 어디 놀러 갈 법한 디자인의 트로피컬셔츠를 입고 있는 거지?
바나나 그림이 그려져 있는 노란 셔츠를 입은 칸은 근엄하게 선언했다.
“우리 집안 분위기를 조금 바꾸기로 했단다.”
리리엘라가 은근슬쩍 슈페나에게 팔짱을 끼곤 휴양지에서나 팔 법한 오색빛깔 꽃목걸이를 걸어주며 이야기했다.
“어때? 경치 좋은 섬 같지 않아, 슈페나?”
그녀의 말마따나 정원에는 인공호수라도 판 건지 곳곳에 시냇물이 쪼르르, 흘렀다.
슈페나가 나무늘보에게 의뢰했던 섬의 외관처럼.
이게 끝이 아니었다.
저택 안으로 들어가자 더욱 환장할 만한 상황이 펼쳐졌다.
여기저기 슈페나의 취향에 딱 맞게 꾸며진 인테리어와 달라진 가구 배치.
그리고 요즘 유행한다는 건 다 모아놓은 저택 안의 풍경.
리헨테온이 부동산 중개업자같이 청산유수로 집의 스펙을 읊었다.
“수인체공학적으로 설비된 최첨단 시설을 도입했습니다. 아마 이런 완벽한 저택은 처음 보실 겁니다.”
“게다가 풀옵션이지. 다른 곳으로 이사 가게 된다면 누나도 불편해서 못 견딜?”
카누스가 타이밍 좋게 슈페나의 옆에 따라붙어 거들었다.
리리엘라도 열심히 바람을 잡았다.
“특히나 외딴 섬 같은 곳 말이야.
그런 데는 수인도 없고 벌레만 많아서 살기 힘들어, 슈페나.”
슈페나를 제외한 모두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설령 리카도르가 슈페나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실패하더라도 어떻게든 떠나지 못하게 하는 것.
그게 그들의 계획이었다.
칸이 힐끗 슈페나를 곁눈질했다.
“평생 여기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니, 며늘아가?”
초롱초롱한 눈빛들이 슈페나에게로 향했다.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118화
“…예?”
당연하게도 슈페나는 당황했다.
이제 막 집에 왔는데 이게 무슨 소란이란 말인가.
‘다들 내가 무슨 반응이라도 해주길 바라는 것 같은데?’
데굴데굴 눈알을 굴리던 그녀가 이내 눈치 빠르게 헤실헤실 웃으며 호응했다.
“제가 없는 사이에 집이 굉장히 화사해졌네요. 예뻐요!”
그 호의적인 감탄을 들은 체드윅가 식구들은 동시에 휴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서로 만족스레 눈빛을 주고받더니 곧이어 슈페나를 다이닝룸으로 이끌었다.
수인은 밥심이지 않은가.
먼 길을 돌아 집에 왔으니 얼른 밥이라도 먹일 계획이었다.
칸은 손수 의자를 빼주더니 그 어느 때보다도 다정하게 슈페나를 에스코트했다.
“앉으렴, 며늘아가.”
“감사해요, 어머님!”
그동안 못 뵈어서 그런가, 어머님이 더 스윗해진 것 같은데?
슈페나는 약간 얼떨떨해하면서도 배시시 입가에 미소를 걸쳤다.
그렇게 단란한 오찬이 시작되었다.
비록 리카도르는 없긴 했지만, 가족끼리 다 같이 모인 게 오랜만이라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슈페나는 가족들과 일일이 정겹게 눈을 맞추며 식기를 손에 쥐었다.
마침 리리엘라가 포크로 무언가를 푹 찍어 슈페나에게 내밀었다.
“슈페나, 이 스테이크 먹어봐!”
그녀가 권한 건 그냥 평범한 스테이크였다. 그런데 느닷없이 라즈베리 소스를 곁들인.
그러고 보니 식탁은 온통 나무열매 밭이었다.
블루베리 에이드, 크랜베리 샐러드, 라즈베리 치즈 카나페.
육식을 즐기는 사자완 어울리지 않는 식탁 위 메뉴들에 슈페나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왜 소동물이 좋아할 법한 음식들만 있는 거지?’
혹시 가족들이 제가 집에 왔다고 배려해주는 건가?
정답이었다.
정확히는 배려라기보단 슈페나에게 잘 보이려는 목적이었지만, 여하튼 슈페나를 살찌우던 식사시간이 어느덧 무르익고.
칸은 물로 목을 축이며 슬슬 본론을 꺼내 들었다.
시작은 가벼운 안부를 묻는 것이었다.
“…아무튼 먼 길 다녀오느라 힘들었을 텐데 몸은 괜찮니, 며늘아가?”
“네, 어머님, 전 괜찮아요!”
슈페나는 부러 제 어깨를 땅땅치며 씨알도 먹히지 않을 튼튼함을 강조했다.
파랑새가 사자 앞에서 주름잡는 모습에 칸이 피식 웃음 지었다.
그러다 큼큼, 헛기침을 하곤 다시 말을 이었다.
“급보로 대충 내용은 전달받았단다. 갑자기 열차가 폭발하였다지.”
지도 속 장소에서 발견한 책, 독수리 가주를 처벌한 사건, 흑표범 한 마리를 인질로 데려온 것.
칸도 이 모든 일을 보고받은 상황이었다.
“네, 아무래도 흑표범의 소행인 것 같아요. 자세한 건 리카도르가 남아서 조사 중이니 곧 밝혀질 거예요, 어머님.”
슈페나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하나, 그런 그녀의 목소리엔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옅은 수심이 깃들어있었다.
‘간단히 뒷수습만 하는 거니까 리카도르도 금방 돌아오겠지? 다치면 안 되는데…..’
데려간 사자 정예들을 남겨두고 왔다 하더라도 안심이 되지 않았으니까.
‘대놓고 습격하지 않고 열차 마지막 칸을 터뜨린 걸로 봐선 흑표범들도 많은 지원군을 보낸 것 같진 않지만.’
속이 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칸이 이런 슈페나의 마음을 기민하게 알아채곤 따스하게 이야기했다.
“리카도르는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강한 아이잖니.”
칸은 리카도르를 믿었다.
여태껏 어떤 위험이 닥쳐도 잘이겨냈던 아들이 아닌가.
‘누구 아들인데 어련히 잘 돌아오겠지.’
모두들 연약한 파랑새인 슈페나만 걱정했을 뿐, 리카도르는 사실 안중에도 두지 않았었다.
그렇지만 주변의 공기는 살짝 무거워졌다.
같이 올 거란 예상과 달리 귀가가 늦어지니 못내 리카도르가 염려된 탓이었다.
그동안 이러니저러니 놀리고 굴리긴 했어도 가족이었으니까.
그때, 리헨테온이 착 가라앉은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 슈페나에게 말을 붙였다.
“그나저나 형수님!”
그가 입 밖에 내뱉은 건, 다 같이 궁금해하던 화제였다.
“형님과는 별일 없으셨습니까?”
아무리 보고를 받았다 한들 남녀간의 비밀스러운 사정을 알고 있을 리 만무하지 않은가.
더구나 리카도르와 슈페나가 입을 맞추는 광경을 목격한 사자들은 뒷수습을 위해 두고 온 상태였다.
고로 체드윅 가 식구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실정이었다.
아무튼 그 직설적인 질문은 잔잔했던 식사 자리에 파문을 일으켰다.
칸은 아닌 척 허리를 곧게 폈고, 리리엘라는 냉수를 통째로 원샷했으며, 카누스는 흥미진진하다는 듯 팝콘을 와구와구 퍼먹었다.
‘뭐지? 이 긴장감….’
묘한 소란스러움에 슈페나가 의아하게 반문했다.
“예?”
“그게 그러니까-”
리헨테온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멋쩍게 뜸을 들였다.
잠시간의 정적이 흐르고.
보다 못한 카누스가 대신 끼어들어 수습했다.
“뭐, 둘만 여행 다녀온 건데 재밌었냐 그런 뜻이지. 그렇지, 형아?”
“어, 응. 그렇지. 재미있으셨습니까, 형수님?”
그제야 리헨테온도 카누스와 하이파이브하며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뭐, 유익한 여행이었어요.
리만 운하 풍경이 되게 아름답더라구요.”
이거 말하는 게 아닌가?
슈페나는 조곤조곤 이야기하면서도 본능적으로 이상함을 감지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가족들 표정이 압박 면접이라도 보고 있는 것처럼 시시각각 변했으니까.
결국 자신감 없는 의문문으로 이야기를 끝맺었다.
“아, 그리고 지도 속 장소에서 신비한 물건도 얻었고 독수리 가주의 악행도 밝혀냈으니 제법 쏠쏠한 여정이었겠죠.…?”
그 여행 감상을 경청하던 체드윅가 식구들은 멍하니 눈만 깜박였다.
꿀 먹은 곰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가족들의 모습에 슈페나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다 카누스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이번 일이 카누스의 할머니와도 연관된 만큼 신경이 쓰였으니까.
“카누스, 근데 넌 괜찮아?”
여기 있는 수인 중에서 가장 어려서인지 아직 오동통한 카누스의 볼이 빵빵하게 부풀었다.
꼬마뱀은 답지 않게 살짝 시무룩해진 얼굴로 말을 잇다가 급발진했다.
“아…. 그래서 집에 다녀오려구.
누나랑 형아 얼굴 좀 보고 갈까 싶어서 여태까지 기다렸던 건 아니야! 오해하지 마!”
안 물어봤는데.
‘보고 싶었나 보네. 귀엽게 굴긴.’
생각보다는 충격이 크지 않은 듯해서 다행이었다.
슈페나가 피식 웃는 사이, 칸이 상황을 정리하며 자애롭게 두 팔을 벌렸다.
“큼. 아무튼 집에 돌아온 걸 환영한단다, 며늘아가.”
“감사해요, 어머님!”
슈페나는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나 어머님에게 포옥 안겼다.
그러자 칸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는 건, 말하지 않아도 자명한 사실이었다.
“…나도 잘 안아줄 수 있는데.”
옆에서 지켜보던 리리엘라는 슬그머니 사심을 내비쳤다.
“리리 언니도 너무 보고 싶었어요!”
슈페나가 잽싸게 리리엘라에게도 다가가 팔을 뻗었다.
슈페나의 손길이 닿자마자 그녀는 마시멜로처럼 의자에서 스르르녹아내렸다.
사인은 심쿵사였다.
그리 꽁냥꽁냥 회포를 풀다 보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손목에 찬 시계를 내려다본 칸이 하품을 하는 슈페나에게 다정히 이야기했다.
“아가, 피곤할 텐데 어서 들어가서 쉬렴.”
“네. 다들 좋은 꿈 꾸세요!”
그녀는 사양하지 않고 꾸벅 인사했다.
솔직히 기나긴 여정에 살짝 지친건 사실이었으니.
슈페나가 방으로 돌아가자, 체드윅 가의 식구들은 속닥속닥 재잘대었다.
첫 타자는 칸이었다.
“그런데 며늘아가 반응이 좀 시큰둥하지 않았니?”
“별일은 없었던 것 같은데요, 어머니?”
리리엘라도 흐음, 침음성을 흘리더니 동의했다.
모두의 의견은 아무래도 리카도 르가 죽을 쑨 듯하다는 결론으로 좁혀졌다.
“그 형아, 그렇게 보긴 했지만 영맹탕이라니까!”
“나중에 형님이 오시면 제가 제대로 교육해드려야겠습니다.”
카누스와 리헨테온은 엄한 아카데미 교수처럼 서로 똑 닮은 표정으로 쯧쯧, 혀를 찼다.
그러는 사이, 칸이 냉철한 가주답게 판단을 내렸다.
“제인, 제인을 불러오렴.”
가장 가까이에서 슈페나와 리카도르를 봐왔을 사람에게 이야기를 듣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결국, 제인이 불려오고.
“사이가 나빠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근데 중간에 나무늘보 이야기를 하시긴 했어요.”
신속한 보고가 이루어졌다.
칸이 일순 미간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어떤 얘기?”
“어…. 그게, 작은 마님께서 본인이 다른 남자를 만나고 다닐 것처럼 생겼냐고 물어보셔서 그냥 얼버무리고 피했습니다.”
제인은 조잘조잘 사견을 덧붙였다.
“아무래도 저희가 나무늘보와 작은 마님의 관계를 조사해왔다는 걸 들킨 것 같습니다.”
칸이 침통한 어조로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어쩔 수 없군. 이제는 정말 매달리는 수밖에 없겠어.”
리리엘라가 당장이라도 주머니를 털털 털어버릴 듯 이글거리는 눈망울로 맞장구쳤다.
“어머니, 슈페나한테 어디 전망좋은 섬이라도 하나 사서 줄까요?”
“섬이 뭡니까, 누님. 아예 줄줄이 묶여있는 열도를 사서 드려야죠.”
리헨테온은 한술 더 떠 스케일을 키웠다.
개중에서 그나마 차분했던 카누스마저 팔불출 같은 흐름에 탑승했다.
“그냥 나무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산맥 정도면 될 것 같은뎅?”
죄다 돈으로 무언가를 해결하는 방법이었다. 본디 현금 박치기가 제일이지 않은가.
너무나도 잘 통하는 체드윅 가식구들이었다.
***
한편, 슈페나의 집무실 안.
그녀는 짐을 풀고 있었다.
조금 졸리긴 했지만, 할 일은 하고 자야 하지 않겠는가.
짐이라고 해봤자 그다지 많지 않았고, 신물 가방에 들어있는 게 전부라서 그냥 혼자 정리하던 중이었다.
가방에서 갖가지 물건을 꺼내 살피던 슈페나가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아, 맞다. 이거 돌려줘야 하는데.”
리카도르의 것인 만년필.
독수리 가주의 악행을 밝혀낼 때 쏠쏠하게 사용한 물건이 아니던가.
딸랑—
슈페나는 심부름을 시킬 요량으로 설렁줄을 당겨 제인을 불렀다.
그러나 제인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다른 사용인들도 바쁜지 보이지 않았고,
“제인이 안 보이네. 놓고만 오지, 뭐.”
어쩔 수 없이 리카도르의 집무실에 직접 가서 만년필만 놓고 오기로 했다.
안 그러면 까먹고 돌려주지 않을 것 같아서.
끼이익.
“실례하겠습니다.”
주인이 없어서인지 유독 삐걱거리는 리카도르의 방 문을 열었다.
슈페나는 널따란 방 안을 한 바퀴 빙 둘러보았다.
그간 청소를 잘한 모양인지 먼지 하나 앉아있지 않은 반듯한 원목책상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 청결함과는 달리 책상 위는 여러 서류들로 가득 채워져 있어 더 눈길을 사로잡았다.
‘중요한 문서도 있어서 사용인들이 함부로 정리하지 못한 걸까.’
슈페나는 조심스레 만년필을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그러던 중, 잔뜩 꾸겨져 있는 쪽지 하나를 발견했다.
“쓰레기인가?”
좀 널브러져 있는 것 같아도 다른 서류들은 다소곳이 놓여있는데.
그녀가 무심코 그 쪽지를 펼쳤다.
-섬을 하나 사고 싶어요.
일전에 슈페나가 나무늘보에게 보내려 했다가 잃어버린 쪽지.
“이게 왜 리카도르 책상에 있어?
설마…”
슈페나의 눈이 휘둥그렇게 뜨였다.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119화
무언가 감이 잡혔다.
이혼이니 도망이니 다른 남자니, 리카도르가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도로 재생되었다.
‘그간 계속 나무늘보 이야기를 하면서 괴상하게 굴었던 게…….’
이 쪽지를 주워서 그랬던 건가.
오해하기 딱 좋은 내용이지 않은가.
금방이라도 떠나서 정착할 수 있는 섬을 찾는다고 적어놓았으니까.
퍼뜩 예전에 팠던 땅굴 중 하나가 떠올랐다.
-그러니까 우린 부부이긴 하지만 뭐, 살다 보면 다른 사람이랑 정분이 날 수도 있는 거잖아.
리카도르가 일리아한테 반했을까봐 마음을 떠본답시고 이런 이야기를 했었지.
‘혹시 그 말을 내가 다른 사람이랑 정분이 났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게 아닐까?’
그때 삽질하고 피해 다니느라 리카도르도 꽤나 상처받은 듯했으니.
허어.
슈페나의 입술에서 깊은 탄식이 새었다. 그 한숨은 곧이어 또 다른 의문으로 번졌다.
그나저나 다른 수인이라면 나무 늘보인 걸까?
리카도르의 이야기를 들어보면의뭔가 관련이 있는 듯했으니.
불현듯 나무늘보와 자신을 엮었던 제인이 떠올랐다.
‘분명 제인도 뭔갈 아는 눈치였지.’
슈페나의 다음 목표가 결정되었다.
원래 쓰던 부부침실로 돌아온 그녀는 곧장 다른 사용인들에게 제 인을 불러오라 명했다.
그렇게 칸에게 보고를 끝마친 제인이 슈페나의 앞에 배달되고,
“제인. 나랑 얘기 좀 하자.”
슈페나는 서슬 퍼렇게 눈을 빛냈다.
***
“괜한 짓을 했구나, 제인.”
제인에게서 대략적인 자초지종을 듣고 난 뒤, 슈페나는 기가 찬 음성으로 한마디만을 내뱉었다.
아니, 나무늘보 얼굴 좀 칭찬했다.
고 뽀르르 달려가 리카도르에게 고자질했다니!
그 고자질이 자신이 나무늘보를니좋아한다는 착각으로 번졌다니!
아주 가관이었다.
제인이 비 맞은 고양이처럼 처량한 표정으로 힐끗 슈페나를 바라보았다.
“…근데 정말 나무늘보와는 어떤 사이세요?”
얘가 진짜!
슈페나가 발끈하며 강하게 부정했다.
“아무 사이도 아니거든!”
“예? 그럼 왜 소가주님이랑 한동안 사이가 안 좋으셨던 건지…….”
이미 된통 배신감을 느낀 그녀는 심통이 난 얼굴로 매섭게 제인을 쏘아 보았다.
“그건 내가 좀 오해한 게 있어서…. 그냥 부부끼리 조금 아웅다.
웅했던 거야. 너, 나 못 믿니?”
제인은 협, 입을 다물었다.
죄인처럼 고개만 숙이고 있던 그녀가 헛다리를 짚었다는 걸 깨달았는지 슬그머니 말을 붙여왔다.
“죄송해요. 제가 괜한 노파심에 그만……. 어떤 벌이는 달게 받겠습니다.”
그에 슈페나는 불퉁하게 오리처럼 입을 내밀었다.
“사실 확인은 제대로 해보지도 않고 오해하기 딱 좋을 얘기를 하면 어떻게 해!”
그럴수록 제인은 면목이 없다는 듯 더욱 쭈뼛거렸다.
방 안에는 지금 슈페나의 심정처럼 삐죽삐죽 가시 돋친 공기가 넘실대었다.
이윽고, 시간이 지난 뒤.
어느 정도 감정을 갈무리한 슈페나가 새침하게 팔짱을 끼곤 까랑 까랑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어쨌든 이 일에는 너의 지분도 있으니 제대로 수습해.”
아직도 황당하긴 했으나 얼른 이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제시했다.
원래 자신이 혼란스럽다고 해서 가만히 주저앉아있는 성격은 아니지 않은가.
“저택 내에 리카도르랑 내 사이가 안 좋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했지? 우선 그거부터 바로잡자.”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제인. 너, 6개월 감봉이야.”
슈페나의 낮은 파랑새답지 않게 무시무시한 오오라를 내뿜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졸지에 불륜녀가 되었는데 기분이 좋을 리가.
지금도 손이 덜덜 떨려오고 입술에 잇자국이 패일 만큼 복합적인 감정이 치밀었다.
어이없음, 짜증, 분노.
뭐, 이런 감정들이.
그러다 슬며시 다른 생각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사실 나도 리카도르가 일리아랑 바람났을까 전전긍긍했으니 도긴 개긴이긴 한데…….’
리카도르의 행동이 이해되긴 했다.
자신도 그에게 일리아와 무슨 일 없었냐고 물어봤을 때,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우물쭈물하지 않았던가.
그간 이상하게 행동했던 게 리카도르 딴에는 의사소통을 하려던 것일 터.
‘어처구니가 없는데 또 엄청 화가 나지는 않네.’
적어도 이런 오해 때문에 리카도 르가 슈페나를 막 대한 적은 없었으니, 오히려 제멋대로 자책하더니 울면서 버리지 말아 달라고 예쁘게 애원하지 않았던가.
슈페나로서는 좋은 구경 했다고 생각될 만큼.
‘왜, 지 혼자 구르고 난리야.’
그래도 좀 괘씸하긴 하니까 만나면 몇 대 때려줘야지.
어휴, 한숨을 내쉰 슈페나가 미간을 부여잡으며 확인차 제인에게 한 가지 더 물었다.
일단은 단편적인 정황만 들은 거였으니까.
“참, 그리고 그런 얘기는 리카도 르한테만 한 거지?”
“아뇨, 그게..….”
제인은 뜨끔한 눈빛으로 못다 한 이야기를 마저 실토하려 했다.
사실 모두의 앞에서 술술 불어버리지 않았던가.
하지만 제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작은 마님, 실은-”
똑똑.
경쾌한 노크 소리가 들리고.
“며늘아가, 아직 안 자고 있으면 같이 자자꾸나. 그래도 괜찮겠니?”
커다란 베개를 쥔 칸이 답지 않게 수줍은 기색으로 들이닥쳤으니까.
“슈페나, 내가 특별히 인형도 가져왔는데 같이 자면 안 될까?”
“형수님, 저는 그냥 잠깐 놀다 가겠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커다란 사자 인형을 끌어안은 리리엘라와 주전부리를 들고 있는 리헨테온이 있었다.
“슈페나 누나, 오늘 누나 방에서 수다 떨다가 갈 건데 누나도 와!”
키 큰 사자들에게 가려 보이지 않았던 카누스도 똥꼬발랄하게 손을 흔들었다.
다들 파자마 파티라도 하려는 건지 편한 잠옷 차림이었다.
“…네? 네.”
슈페나가 얼떨결에 승낙했다.
칸과 리리엘라는 잘되었다는 듯 반색하며 쪼르르 부부침실로 밀려들어왔다.
주인이 없어 쓸쓸했던 방 안은 빠르게 타인의 온기로 데워졌다.
본디 슈페나와 리카도르가 사용했던 킹사이즈 침대는 다른 가족들에게 점령당한 지 오래였다.
칸이 살뜰히 이부자리를 정돈해 주며 슈페나에게 말을 건네었다.
“피곤하진 않니, 며늘아가? 우리가 갑작스럽게 와서 괜히 귀찮게 하는 것 같아 미안하구나.”
초조함에 느닷없이 들이닥치긴 했지만 며늘아가 입장에선 당황스러웠을 테니까.
뒤늦게 역지사지가 된 거였다.
슈페나는 무해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칸을 안심시켰다.
칸을 .
“괜찮아요!”
이미 잠은 달아난 지 오래였다.
제인과의 대화가 퍽 충격적이었던 탓에.
그 순간, 멀뚱멀뚱 미어캣처럼 두리번거리던 제인이 꾸벅 허리를 접었다.
“그,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작은 마님.”
제인의 대답을 못 듣긴 했으나, 이 상황에서 계속 그렇고 그런 이야기를 할 순 없지 않은가.
슈페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제인을 내보냈다.
어쩌다 보니 예정에 없던 파자마파티가 시작되었다.
갑작스레 벌어진 것치곤 퍽 잔잔하고 좋은 시간이었다.
한구석에 있던 오르골에선 은은하고도 폭신폭신 나긋한 선율이 새어 나왔고.
“내가 특별히 마시멜로도 다섯개나 넣었어, 슈페나!”
리리엘라 언니가 가져온 코코아에선 달콤한 초콜릿 냄새가 났으며,
“큼, 이리 모이니 너희들이 어렸을 때가 생각나는구나. 책이라도 읽어줄까, 아가?”
어머님이 펼친 동화책에서는 수채화처럼 포근하게 물든 그림이 펼쳐져 동심으로 돌아간 우리를 반겼다.
잔잔한 공기와 구름처럼 몰랑몰랑 부드러운 이불,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소중한 가족들.
“하암.”
슈페나의 입에서 기분 좋은 하품이 흘렀다.
칸이 그런 슈페나의 어깨를 포근하게 감싸 쥐며 엄마처럼 다정히 이야기했다.
다 자란 성인이었음에도 칸의 시야 속 슈페나는 아직 아이인 모양이었다.
“치카치카는 하고 자야지.”
“나도, 나도!”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과자를 먹던 카누스도 방정맞게 손을 위로 올렸다.
그 둘은 쫄래쫄래 기차놀이 하듯 방에 딸린 욕실로 걸어갔다.
“이제 자야 할 시간이 다 되었군요.”
한편, 리헨테온은 손목에 찬 시계를 바라보았다.
벌써 12시였다.
리헨테온과 카누스는 각자 방으로 가서 자기로 했고, 리리엘라와 칸은 슈페나와 함께 있기로 한 상황 속.
어딘가 긴장감으로 팽팽해진 기류가 흘렀다.
“양치하고 왔습니다아.”
슈페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양치를 하고 카누스와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체드윅 가 식구들은 일제히 시선을 교환하며 비장하게 신호를 주고받았다.
슈페나는 아무런 낌새도 눈치채지 못하고 꾸물꾸물 침대에 엎어졌다.
“이불은 꼼꼼히 덮어야지, 며늘아가.”
칸이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이불을 덮어주었다.
다른 식구들도 부산스레 움직이며 슈페나가 편안한 숙면을 취할 수 있게 도왔다.
자연스레 아늑한 분위기가 조성된 순간.
칸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감미로운 중저음으로 노곤하게 풀어진 슈페나의 귓가에 속닥였다.
“며늘아가, 네 남편은 버려도 나는 모른 척하지 말아주렴.”
그 한마디에 다른 식구들도 조심조심 입술을 달싹였다.
“형수님, 못난 형님은 제가 잘 교육하겠습니다. 부디 떠나지 마십시오.”
“슈페나, 잘 생각했어. 그냥 나랑 사는 게 어때?”
옆에 있던 카누스마저 슈페나의 팔을 쿡쿡 찌르며 장단을 맞추었다.
“슈페나 누나, 리카도르 형아가 좀 맹탕이긴 한데 그만한 남자가 또 없다?”
응?
으응?
슈페나는 감겨오는 눈을 비비적 거리다가 제 귀를 의심했다.
이게 다 무슨…….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오를 무렵, 리리엘라가 슈페나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톡 건드리면 뿌엥,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체리처럼 처연한 표정으로.
“약속해줘. 어떤 상황이 와도 우릴 외면하지 않겠다고. 나는 네가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슈페나.”
예?
떠나요? 설마…….
‘리카도르 말고 다른 가족들도 제인이 말했던 오해를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어쩐지 아까 물어봤을 때, 제인 반응이 이상하더라.
슈페나는 보이지도 않는 제인을 부르짖었다.
그러는 사이, 체드윅 가 식구들은 얼떨떨해하는 슈페나와 꼭꼭 새끼 손가락까지 걸고 약속했다.
조곤조곤 졸라보자는 체드윅 가식구들의 작전은 성공이었다.
원래 자기 직전에 하는 부탁은 귀찮아서라도 들어주는 게 수인 심리 아니던가.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슈페나의 머리맡에는 오다 주운 섬 문서들이 주르륵 놓여있었다.
“돌아버리겠네.”
단숨에 땅 부자가 된 슈페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이없어하는 그녀의 머리 위로 웃음기가 깃든 음성이 내려앉았다.
“와, 고객님. 이게 다 뭐예요? 굉장하다.”
일리아였다.
슈페나는 일리아를 부른 참이었다.
가족들의 모습을 보니 나무늘보를 불러와서 삼자대면이라도 해야 이 오해가 풀릴 것 같아서.
아침에 천천히 대화해보려 했으나 다들 바짓가랑이를 붙들길래내린 결론이었다.
어쨌건 나무늘보의 행방을 알 만한 이는 일리아가 유일하지 않은가.
대충 얘기해보니 일리아도 정보 상답게 이 사태의 인과관계를 다 알고 있는 듯했다.
일리아가 방글방글 웃으며 슈페나에게 농을 던졌다.
“나는 뭐, 고객님한테 다이아 광산이라도 줘야 하나?”
“놀리지 마요!”
슈페나가 앙칼지게 일리아의 손길을 쳐내었다.
그녀가 아랑곳하지 않고 토실토실한 슈페나의 볼을 은근슬쩍 문질렀다.
“아휴, 귀여워.”
“뭐래.”
정색한 슈페나가 이내 본론을 꺼내 들었다.
“아, 아무튼 나무늘보 좀 데려올 수 없어요? 너무 난장판이라서 직접 만나게 해야 할 것 같은데.”
일리아가 내뱉은 답변은 의외의 것이었다.
“어디 갔는지는 나도 모르고, 아마 흑표범들 조사하고 있을걸요?”
“흑표범?”
슈페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일리아가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손가락을 튕기며 말을 덧붙였다.
“참, 그 무슨 흑표범 하나 인질로 잡아 왔다면서요. 고객님이야말로 뭐 건진 거 없어요?”
그 질문에 슈페나는 손으로 턱을 괴며 혼잣말했다.
“맞다. 이제 그 종이 뭉텅이에 적힌 걸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은 미끼 흑표범뿐인데…….”
그때, 어젯밤 시한폭탄을 투척한 원흉 중 하나인 제인이 슈페나에게 달려왔다.
“작은 마님!”
그녀가 들고 있는 건, 리카도르에게서 온 서신이었다.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120화
제인이 건넨 편지를 받아든 슈페나는 의아함이 담긴 외마디 탄성을 흘렸다.
“응?”
“왜 그래요, 고객님?”
그에 일리아가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나는 잘 지내고 있어, 부인, 아무래도 흑표범의 소행이 확실한 것 같아. 그리고 조사하다가 나무 늘보를 잡았어. 부인도 아는 얼굴일 것 같은데… 아무튼 금방 돌아갈 수 있도록 노력할게.
나무늘보의 이야기가 적혀있는 구간은 지웠다 다시 쓴 건지 지저분한 잉크 자국이 남아있었다.
슈페나는 그 편지를 일리아에게 냉큼 보여주었다.
“잘됐네. 그 오해 빠르게 풀 수 있겠어요.”
일리아의 말을 들은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문득 촉이 왔기 때문이었다.
‘리카도르는 나와 나무늘보가 뭔가 있는 사이라고 오해하는 중이라 그랬었지.’
게다가 안면이 있는 사이 같던데.
리카도르가 나무늘보에게 찾아가 본 적이 있지 않을까?
왜인지 나무늘보가 자신에게 보냈던 그 술주정 서신이 떠올랐다.
“근데 나무늘보가 보냈던 이상한 편지 말이에요. 그거 어떻게 된 건지 알아요?”
“아……. 그게, 알아보니까…….”
일리아는 이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
한편, 리카도르가 타고 있는 증기 자동차 안.
그는 빠르게 체드윅 가로 귀환하는 중이었다.
기차로 뛰어들었다던 사내의 흔적을 겨우 추적하여 이 일의 배후가 흑표범이란 걸 밝힌 상황이었으니.
그렇게 한차례 마찰이 있긴 했지만, 싸움을 피하려는 건지 흑표범들이 도망가는 턱에 교전이 더 이 어지지는 못했다.
계속 뒤쫓았다가는 오히려 위험할 듯했으니까.
리카도르가 후우, 한숨을 내쉬곤 자동차 시트에 몸을 깊이 묻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 복잡한 머리를 식히고 있던 때, 옆에 있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저어어기, 소가주님………?”
나무늘보였다.
리카도르는 그대로 눈을 감은 채, 나무늘보에게 못다 푼 의문을 내던졌다.
“내 아내랑 무슨 사이지?”
최대한 목을 가다듬었으나 말이 곱게 나오지는 않았다.
부인이 잘생겼다고 했다던 나무 늘보의 얼굴을 보니 저절로 부아가 치밀어 오른 탓이었다.
아무리 제 의심이 틀린 것 같다고 해도 말이다.
‘그래도 멋대로 오해한 게 맞는다면 깊이 반성하고 사과해야겠지.’
슈페나에게도 저 나무늘보에게도.
얌전히 드리운 리카도르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는 동안, 나무늘보는 습관적으로 말을 늘이며 대답했다.
“그으으게에에~”
“빨리 말해.”
“넵.”
잔뜩 겁먹은 나무늘보가 드디어 재빨리 입을 열었다.
“아무 사이 아닙니다.”
“뭐?”
리카도르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슈페나는 아니더라도, 솔직히 나무늘보만큼은 무언가 사심이 있었을 거라 생각했다.
나무늘보의 시계 공방에 찾아가서 추궁했을 때.
진솔하게 말할 시간이 충분했는데도 나무늘보는 아무 말 없이 제 의견에 따르지 않았던가.
“정말 맹세코 아무 사이도 아닌데요……. 애당초 일 문제로 두번 정도 만난 게 전부인지라.”
나무늘보는 말을 하면서도 힐끔 힐끔 리카도르를 올려다보았다.
“그…… 일전에는 너무 살기를 내뿜으시길래 무서워서 사실대로 말 못 했습니다요.”
정확히 따지자면 리카도르가 나무늘보를 내쫓지 않았어도 사자 영역을 잠깐 떠나있을 계획이긴 했었다.
슬슬 흑표범의 동태에 대해 자세히 알아봐야 할 타이밍이었으니까.
그래서 나무늘보가 찍소리도 하지 않고 리카도르의 말을 들은 거였다.
정말로 무섭기도 했고.
사실 그는 리카도르에게 유감은 없었다.
명성이 드높은 체드윅 가인데 피해보상 정도는 두둑이 해주지 않겠는가.
어찌 되었건 차 안에는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그 적막을 가르고 나무늘보가 한번 더 못을 박았다.
“제 타나토를 걸고 약속할 수 있습니다요. 그리고 아내분이 바람을 피울 수인인지는 소가주님이 가장 잘 아실 듯한데….”
안다.
안다마다.
슈페나는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나무늘보를 정말로 좋아했다면 깔끔하게 사과하고 이미 이혼을 고했겠지.
‘나는 결국 부인을 믿지 못한 걸까.’
정황상 그럴 수밖에 없는 일들이 펼쳐졌다 한들, 가족들이 영혼까지 탈탈 털었다 한들 넘어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부인이 다 알고 나면 내게 실망하겠지.’
밀려오는 자괴감에 리카도르는 이마를 짚었다.
하루라도 빨리 부인을 만나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
“와…. 그거 진짜예요?”
리카도르가 자아 성찰을 하는 사이, 슈페나는 일리아에게서 숨겨진 사정을 들었다.
나무늘보와 새로 편지를 주고받다가 알게 된 사실이라나 뭐라나.
‘그 술주정 같던 이별 편지가 리카도르의 작품이었다니.’
얘는 어떻게 지 혼자 내핵까지 파고들었대.
섬 문서니, 뭐니 휘황찬란한 것들을 안겨주던 다른 가족들도 그렇을 고하도 스케일이 크다 보니 이제는 화도 나지 않았다.
정확히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그럴 틈이 없었던 거였지만.
‘오해…… 풀 수 있겠지?’
슈페나가 심각해진 낯으로 고심했다.
일단 나무늘보가 이곳에 도착하면 가족들도 무언가 착각했다는 걸 저절로 깨닫지 않으려나.
리카도르도 그렇고,
‘그렇게 해도 안 된다면 제인과 일리아를 증인으로 내세우지, 뭐.’
그때, 일리아가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아무튼 다들 진실을 알면 이불깨나 차겠네요. 어쩌면 오해해서 미안하다고 울지도 모르죠. 그럼 진짜 재밌겠다.”
애초에 이대로 쭉 착각해도 고객님한테 나쁠 건 없을 것 같던데?
일리아는 천연덕스레 속을 긁으며 개구쟁이처럼 씨익 웃었다.
슈페나의 표정이 불 뿜는 고양이처럼 사나워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놀리던 일리아가 뭔가 떠올렸다는 듯 손가락을 탁, 튕겼다.
“아, 근데 그 고객님이 잡아 왔다던 흑표범 말이에요. 나도 좀 볼 수 있을까요?”
그 제안에 슈페나는 게슴츠레 눈을 뜨고 일리아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믿음직스레 이야기했다.
“내가 도움이 될 수도 있잖아요.”
하긴 일리아는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걸 알고 있는 수인이었으나.
‘흑표범과의 취조에서 내가 놓친걸 기민하게 알아챌지도 모르지.’
슈페나는 일리아에게 따라오라는 듯 고갯짓하곤 짐짓 의젓하게 잔소리했다.
“피만 토하지 마요.”
“걱정돼서 그러는구나.”
“아니거든요.”
누가 앞에서 괴로워하는 걸 좋아할 수인은 없지 않은가.
하나, 슈페나는 아닌 척 새치름하게 시치미를 떼었다.
그 둘은 곧장 미끼 흑표범을 가둬둔 방으로 향했다.
원래는 지하감옥에 수용하려고 했으나, 미끼 흑표범이 두루마리의 뒷부분 해석이 아직 남았다고 해서 내린 관용이었다.
방에는 미끼 혹표범과 함께 그를 감시하는 사용인이 있었다.
“오셨습니까, 작은 마님.”
꾸벅 인사한 사용인은 혹여나 이 능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흑표범에게 안대를 씌웠다.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슈페나는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 사용인을 보며 생각했다.
벨라트라는 수인을 상대했을 때, 그 대단한 정신지배가 자신에겐 안 통하지 않았던가.
도련님이 알려준 정신수련법 덕분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슈페나는 본격적으로 취조를 시작했다.
“그거, 이제 다 해석했나?”
“예. 대충 다 해석을 끝냈습니다.”
미끼 흑표범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는 예전과 달리 도로 발음이 완벽해진 듯 보였다.
‘하긴 그 독약은 다 구라였으니까.’
저 미끼 흑표범을 속일 정도로 약의 위력이 잘 나타난 게 오히려 더 의아한 일이었다.
원래 큰 동물한테는 잘 안 통할 줄 알았는데.
“그래서 어떤 내용이지?”
슈페나는 잡다한 상념은 몰아내고 곧바로 심문했다.
미끼 흑표범이 잽싸게 옆에 있던 해석본을 그녀에게 상납했다.
슈페나와 일리아는 옹기종기 머리를 맞대곤 그를 꼼꼼히 살폈다.
“치부책 같은 걸까요, 고객님?”
가만히 활자를 훑어내리던 일리 아가 한마디 했다.
슈페나는 진지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느릿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그 문서에 쓰여 있는 내용은 쉬이 넘길 수 있을 만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드디어 오늘 주군께 이름을 받았다. 가을순회에서 체드윅 가의 각성자를 죽이는 데에 실패하여 폐기당한 동생과 다르게 나는 살아남을 수 있겠지. 살아남아야만 한다. 나만 약점이 잡힌 건 아니니까. 마을 사람들도…….
대충 이런 회고록 같은 이야기가 담긴 문서,
‘가을순회 때 일어났던 일도 역시 흑표범의 짓이 맞았구나.’
의심은 되었지만, 확증이 없어서 묻어두고 있지 않았던가.
슈페나의 손끝이 둥글게 말려 들어갔다.
아무래도 그 벨라트라는 자랑 혹 표범들의 가주는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은 듯싶었다.
동생이 주군에게 버림받았다는 것도 그렇고, 여기 적힌 것들 대부분이 은근히 흑표범 가주의 잘못을 폭로하는 내용이었으니.
‘언젠가 배신할 생각이었던 게 아니었을까.’
두려워하는 건지 무언가를 저당잡힌 건지, 흑표범 가주에게 매여 있는 것 같긴 했다만.
여하튼 그 관계를 잘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작은 균열은 곧 커다란 홍수로 불어닥치는 법이었으니까.
‘그나저나 이 문서에 언급된 마을은 뭐지?’
미끼 흑표범도 어떤 마을 사람들이 쓰는 언어로 적혀있다고 했었는데.
슈페나는 곧장 그 점을 물어보았다.
“근데 여기 나와 있는 마을이 어떤 곳인지 아는 게 있는 눈치던데?”
“아!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미끼 흑표범은 슈페나에게 잘 보이려는 듯 과장스레 긍정하며 설명했다.
“원래 쓰레기를 묻어두던 터라 사람은 얼씬도 하지 않았던 지역인데, 언제부턴가 마을이 생겼다더군요.”
“그런데?”
“여기까진 그럴 수 있지만 좀 이상한 곳입니다. 흑표범 가주의 명으로 출입이 통제된 곳이기도 하고, 가주가 그 마을 출신을 중용하는 편이라서요.”
말을 마친 미끼 흑표범은 안대로 덮인 눈가를 괜스레 문질렀다.
그러다가 이내 이야기를 더했다.
“그 마을 출신도 기이하리만치 가주의 명에 복종하는 편이죠. 주위 동료가 실패작이라고 개죽음을 당해도.”
어딘가 의미심장한 구석이 있는 음성.
그러나 남 일이라는 듯 태연자약하기 그지없는 태도였다.
‘뭔가를 더 깊이 알고 있는 듯한 눈치인데….’
보이는 행동도 묘하게 찜찜하고.
더구나 저 문서에는 각성자라는 용어가 버젓이 쓰여 있지 않은가.
미끼 흑표범도 이게 뭔지 의아해 하지 않고 물 흐르듯이 받아들인걸 보면….
흑표범들도 각성과 권능이 무엇인지 안다는 뜻일 터.
‘저 미끼 흑표범, 그냥 멍청이인 줄 알았는데 아닐지도 모르겠어.’
슈페나의 밤색 눈동자가 예리하게 빛났다.
그와 동시에 일리아도 슈페나의 어깨를 툭 건드리더니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 손끝을 따라가니 흑표범이 걸고 있는 에메랄드 목걸이가 보였다.
‘응?’
슈페나의 눈매가 좁혀졌다.
“아휴, 저번에도 임무에 실패했다.
고 몇이나 죽어 나갔는지 모릅니다. 흑표범이 이렇게 잔인하다니까 욧?”
미끼 흑표범은 그것도 모르고 슈페나의 비위를 맞추려는 듯 뒷담을 해대었다.
슈페나는 잠자코 그 장단에 맞춰주었다.
그럴수록 그는 신명나게 나불대었다.
이윽고 슈페나는 미끼 흑표범의 푸념 속에서 미묘하게 거슬리는 점을 잡아내었다.
박쥐과인 것 같긴 했지만 왜 이리 자신은 그런 흑표범이 아니라는 듯이 말하는 걸까.
“너도 흑표범 아니니? 아무리 그래도 동족인데 너무한 거 아닌가.”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121화
“예?”
미끼 흑표범은 멍청하게 반문했다.
슈페나가 덤덤한 말투로 아랑곳하지 않고 몰아붙였다.
“뭘 더 알고 있는 거지?”
미끼 흑표범이 도르륵 눈알을 굴리며 슈페나의 눈치를 살피던 찰나, 돌연 일리아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잠깐만요, 고객님.”
그리고는 흑표범에게 채워져 있던 안대를 벗겼다.
그러자 맹수들이 가졌다기엔 맑고 앙증맞은 느낌의 붉은 눈이 드러났다.
일리아는 그런 미끼 흑표범에게 단호히 명령했다.
뭔가 눈치챈 게 있는 모양이었다.
“동물화해봐요. 냄새가 영 흑표범같지 않아서.”
그 명에 미끼 흑표범은 안절부절못하며 주저하다가 겨우 긍정의 답을 내뱉었다.
의 답
“그, 그게……음, 알겠습니다”
그와 동시에 자욱한 검은 안개 같은 연기가 사방에 쫙 깔리더니 커다란 동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왜인지 어정쩡하긴 했으나 영락없는 흑표범이었다.
“크르릉?”
미끼 흑표범은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갸르릉, 맹수 특유의 울음소리를 내었다.
결백을 주장하는 듯 유순한 태도.
다만, 한 가지 이질적인 점이 있었다.
그런 흑표범의 목에 걸린 에메랄드 목걸이.
본디 동물화를 하면 입고 있던 옷이나 장신구가 저절로 벗겨지지 않던가.
커다란 맹수로 변했으니 목걸이도 끊어져야 정상일 텐데.
왜 멀쩡하지?
“저 목걸이.…….”
슈페나가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일리아도 의아함을 느꼈는지 흑표범의 목에 걸려있던 목걸이를 쥐어 뜯듯 잡아챘다.
그랬더니….
퐁!
또다시 검은 연기가 방 안에 자욱하게 퍼졌다.
그 안개 속에 비친 건, 자그마한 동물의 인영이었다.
토끼?
슈페나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다 래졌다.
“삐이잇!”
“잇!
다리 부분만 새하얀, 검은 토끼가 멋쩍게 울음소리를 내뱉었다.
걸걸하면서도 익숙한, 아까 들었던 미끼 흑표범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이거 귀한 건데! 신물이란 말이에욧-!
저도 모르게 쏘아붙인 토끼는 동공지진을 일으키더니 잽싸게 꼬리를 내렸다.
-속인 건 죄송한데… 살려주세요!
카누스나 칸 같은 고위급 수인만이 사용할 수 있는 능력.
슈페나는 할 말을 잃고 바닥에 소심하게 서 있는 토끼를 내려다보았다.
-아니, 저 흑표범이 아니라 토끼라니까요? 예언 이능도 있고 쓸모도 많으니까 살려주시면 안 될까요? 해독제도 필요하고 말은 정말 잘 들을 자신 있습니다!
흑표범일 때보다 묘하게 방정맞아진 것 같은 말투.
이게 도무지 무슨 상황인지…….
지금 내 기분이 그래.
어이가 없네.
일리아도 마찬가지였는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허어. 이건 또 예상치 못한 시나리오인데.”
“뭐, 토끼들에 관해서 아는 거 없어요?”
슈페나는 기가 찬 듯 실소하던 그녀를 향해 조곤조곤 속닥였다.
예언 이능을 지닌 토끼가 어째서 흑표범의 곁에 있는 건지, 슈페나는 알 길이 없었으니까.
일리아가 반사적으로 대답하려다 콜록콜록, 기침을 토해냈다.
“흑표범들 편이라는 것 말고는 없어요. 워낙 뒤에 꼭꼭 숨어있던 족속…쿨럭!”
“그냥 말하지 마요. 지금부터 저 토끼와 정겨운 담화를 나눠보면 뭐든 나올 테니까.”
슈페나가 일리아에게 손수건을 건네며 토닥였다.
‘까다로운 금제는 이 정도도 허용하지 않는 걸까. 그래도 건진 건 하나 있지만.’
아무튼 토끼와 흑표범이 긴밀한 관계가 있다는 거지?
슈페나가 무릎을 꿇고 자그마한 검은 토끼와 눈을 맞추었다.
흑표범도 아닌데 경계할 이유는 없으니.
“삐이익!”
“베!”
미끼 흑표범, 아니 토끼가 토끼 눈을 하곤 지레 겁을 집어먹었다.
“근데 왜 토끼가 흑표범인 체하면서 독수리 영지에 가 있었던 거지?
다른 흑표범들도 네 정체를 모르는 듯했는데.”
-아휴. 이게 말하자면 긴데…….
깡충 뒤로 물러나 도도도도, 발을 구르던 토끼가 알고 있던 모든 걸 재잘재잘 토해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후,
“그러니까 흑표범인 척 위장해서 도망치려 했던 거라고?”
슈페나는 토끼에게 확인하듯 되물었다.
-예! 흑표범 가주가 좀 미친놈이라서요. 다른 토끼들도 괜히 코 꿰여서 개고생하고 있거든요. 저는 못견뎌서 빠져나온 거고요…….
토끼 일족이 흑표범 가주에게 빚을 지는 바람에 저당 잡혔다나 뭐 라나.
근데 근무환경은 열악하고 흑표범가주 비위 맞추는 것도 뭐 같아서 혼자라도 탈출했다지.
흑표범인 척 독수리 영지에 파견되어서.
이게 이 토끼의 주장이었다.
가만히 음, 침음성을 흘리던 슈페나가 의아한 점을 지적했다.
“그럼 우리를 뒤쫓으란 임무를 받았을 때, 일을 수행하는 척 그냥 도망쳤으면 되잖아?”
-빌어먹을 호기심 때문에 그만….
합당한 의문에 토끼는 쳇, 혀를 찼다.
슈페나가 팔짱을 끼곤 되받아쳤다.
“호기심?”
– 파랑새도 백사자도 예언 속에 나온 동물인 만큼 궁금했거든요. 들켜서 독약 먹고 이렇게 협박당할 줄은 몰랐죠.
예언이라.
슈페나가 은근슬쩍 토끼를 떠보았다.
“예언? 뭐, 파란색 동물은 없을 거란 말은 들어봤는데.”
– 아뇨. 원래 예언은 여러 개가 있지 않습니까. 제가 본 건 다른 예언이라서요.
“뭔데?”
토끼가 바닥을 뒷발로 차 펄쩍 뛰어오르더니 슈페나의 발밑에 착지했다.
느닷없이 근엄해진 토끼는 의기양양한 음성을 쏘아 보냈다.
– 하얀색 사자와 파란색 새가 만나서 천지가 하늘색으로 물들 것이다.
뭐야, 역사 시간에 설화 배우는 것도 아니고 왜 이래..
슈페나는 약간 아연해진 낯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의미지?”
-예언의 해석은 수인마다 달라서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그러나 토끼에게서 돌아온 답변은 김빠지는 것이었다.
그때,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일리아가 못마땅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흑표범 가주는 그 예언이 자신에게 불리하다고 생각했겠죠, 고객님.
그러니까 그때도 지금도 이리 생난 리를 피우는 거고.”
언뜻 보면 슈페나한테 말한 듯하지만, 실상은 토끼에게 건네는 핀잔이었다.
말을 마친 일리아는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할 찰나 동안 미약하게 눈가를 일그러트렸다.
그렇지만 곧 태연자약한 태도로 천천히 손바닥을 펼쳤다.
그 손바닥 안에선 불그스름한 물방울 같은 것이 떠올랐다.
일전에 슈페나에게 보여주었던 권능.
하나, 이번에는 그 기운의 크기가 달랐다.
“아는 거 다 토해내는 게 신상에 이로울 텐데. 그렇게 생각 안 하나 봐?”
붉은 구체는 스스로 똘똘 뭉쳐 어느덧 동물의 형상을 나타내었다.
일리아가 그 형체를 토끼에게로 내밀면서 서늘히 경고했다.
비현실적인 광경에 토끼는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며 눈을 부릅떴다.
-가, 각성자…!
“토끼의 천적이 여우라지. 지금 당장 널 씹어 삼킬 맹수 하나쯤은 만들어낼 수 있는데, 어때?”
환히 빛을 내는 작은 태양은 금방이라도 토끼를 집어삼킬 듯 무섭게 일렁였다.
– 어떻게, 당신 정체가 뭐길래 태양의 힘을…. 이 힘을 가진 각성자에 관한 예언은 없었는데.
“예언 이능이 있다더니 이런 것까지 아네. 그래서 그 혹표범이 너희를 데리고 있는 건가?”
일리아와 토끼가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사이, 슈페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방금 저 토끼가 태양의 힘, 이라고 했지.’
리만 운하 상류에서 발견한 책의 후반쯤에 쓰여있던 것들이 저절로 떠올랐다.
열차가 폭발하는 바람에 앞부분만 읽다 말지 않았던가.
체드윅 가로 귀환하면서 그 뒷부 분을 마저 정독한 참이었다.
‘태양의 힘은 무언가를 창조해내고, 번개의 힘은 뭐든지 파멸시키려 하며, 비의 힘은 어떤 본질이는 통찰할 수 있다고 그랬지.’
그 밖에도 여러 자연의 힘들이 서술되어 있었으나, 종이가 얼룩덜룩한 탓에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맨 뒷면에는 권능을 완성하기 위한 조언 같은 게 적혀있었지.
‘아직 권능이 어떤 건지도 깨우치지 못한 것 같은 나한테는 소용없겠지만.’
아무튼 내가 가진 권능은 무엇일까?
슈페나가 그러한 의문을 품을 무렵, 울먹거리는 토끼의 목소리가 뇌리에 퍼졌다.
-흐, 흑표범 가주는 각성자를 죄다 죽이고 싶어 했습니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각성자를 죽이고 싶어 했다고?
예전에 일리아와 대화를 나누었을 때, 우리가 좋은 최후를 맞이하진 못했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었지.
그건 역시 흑표범 때문이었을까.
애당초 표범은 사자의 정적이기도 하지 않은가.
그 순간, 토끼가 덜덜 떨면서 말했다.
-그래서 토끼들을 수족으로 부린 겁니다. 예언을 통해 각성자를 솎아내기 위해서, 그 대답을 들은 슈페나가 일리아를 팔꿈치로 슬쩍 건드리며 눈치를 주었다.
일리아가 권능을 보여주었던 그때에도 점차 안색이 안 좋아지지 않았던가.
그리고 너무 몰아붙였다간 저 토끼가 울 것 같았으니까.
‘음, 본체는 덩치 큰 청년이 운다고 생각하니까 조금 짜증 나네.’
리카도르가 우는 모습은 귀여웠던 것 같은데.
자연스레 리카도르를 떠올린 슈페나가 도리도리 고개를 저으며 상황을 일단락시켰다.
“어쨌건 네가 알고 있는 거, 몽땅 실토하는 게 좋을 거야.”
그리 슈페나가 독수리 영지에서 얻은 소득을 하나둘씩 정리하고 있을 무렵.
리카도르에게서 또 다른 서신이 도착했다.
***
어딘가 절박함이 묻어나오는 필체의 짤막한 서신에는 말린 자주색 히아신스가 들어있었다.
별 내용은 없는 편지였다.
그저 곧 도착할 것 같으니 제발 자신과 이야기 좀 해달라고 적혀있었을 뿐.
“얘는 부디, 라는 단어를 도대체 몇 번을 쓴 거야.”
툴툴거리면서도 편지를 소중히 서 랍 안에 넣어둔 슈페나가 한쪽 눈썹을 슬그머니 들어 올렸다.
‘리카도르도 나무늘보를 통해 알게 된 걸까? 여태껏 오해했다는 사실을?’
하긴 오면서 나무늘보가 어떤 목적을 가졌는지 파악하기 위해 대화 정도는 나눠봤을 테니까.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깨달았을지도 몰랐다.
그 후로 일주일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여러 일이 벌어졌다.
우선 카누스가 예정대로 뱀 가문에 돌아갔다.
워낙 존재감이 큰 꼬마 뱀이었기에 저택 내의 일상이 심심해지지 않을까 했는데, 그건 오산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텐션이 넘치는 다른 가족들 덕분에.
가족들은 여전히 전전긍긍하며 슈페나의 환심을 사려 노력했고, 슈페나는 오해를 풀기 위해 애썼다.
나무늘보의 ‘나’자만 꺼내도 가족들이 경기를 일으키는 바람에 실패했지만, 슈페나가 창가에 몸을 기댄 채, 양주먹을 꽉 쥐곤 다짐했다.
‘리카도르가 도착했을 때 확실히 보여주는 수밖에 없겠어.’
때마침, 슈페나의 옆에 끈덕지게 붙어있던 리리엘라가 말을 걸어왔다.
“비 오네. 슈페나, 코코아 먹을래?”
리리엘라의 말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밖에는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리카도르는 언제 오려나.’
슈페나와 리리엘라는 후후, 창문에 입김을 불어 글씨를 쓰며 도란도란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순간, 자동차의 배기음이 희미하게 그녀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슈페나의 속눈썹 끝이 파르르 떨렸다.
감이 왔으니까.
리카도르가 올 거란 예감이.
체드윅 가의 정문이 열리고, 세련된 증기 자동차 한 대가 가공할 속도로 들어왔다.
그리고 뒷좌석이나 조수석이 아닌 운전석의 문이 격하게 열렸다.
차체가 덜컹 흔들렸다.
그 안에서 나온 건, 리카도르였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리카도르는 제 어깨가 젖어 들어가는 것도 모르고 길쭉한 다리를 뻗어 성큼성큼 정원을 가로질렀다.
싱그러운 잔디가 그 움직임을 따라 애처롭게 밟혔다.
새하얀 머리카락 끝에 맺힌 빗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리카도르는 갖추어 입은 정장 겉옷이 느슨하게 풀어지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앞으로 나아갔다.
누군가를 쫓는 듯 여유를 잃은 모습이었다.
“리카도르!”
창밖으로 그 모든 걸 보고 있었던 슈페나 또한 곧장 리카도르에게 달려갔다.
둘은 그렇게 보슬비가 내리는 정원 한가운데서 마주쳤다.
허공에서 시선이 맞부딪혔다.
갈급한 리카도르의 푸른 눈동자에 내리는 빗물처럼 말간 슈페나의 밤색 눈망울이 담겼다.
슈페나를 내려다보던 리카도르의 목울대가 움찔거렸다.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 듯 위험한 기류가 흐르고.
슈페나가 먼저 리카도르의 옷자락을 잡아챘다.
그리곤 약간은 야윈 듯한 그의 볼에 살포시 입을 맞추었다.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122화
리카도르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한편, 슈페나는 살짝 홍조가 오른 볼을 손등으로 꾹꾹 누르며 방금 자신의 행동을 복기했다.
보슬보슬 내리는 빗물이 스민 리카도르의 뺨은 솔직히 축축했다.
그래도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이렇게 당황하는 모습을 보니 피식 웃음이 샐 것 같기도 했고.
“부인.”
리카도르가 어딘가 죄책감이 묻어 나오는 저음으로 나지막이 슈페나를 불렀다.
지금 그는 조금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정확히는 너무 미안한 거였지만.
리카도르는 우선 본능적인 매너로 겉옷을 벗어 슈페나의 머리에 얹어주었다.
연약한 부인은 계속 비를 맞으면 감기에 걸릴 게 뻔했으니.
그러곤 담백하게 이야기했다.
“슈페나, 기분 나빠하지 않고 들어줬으면 해.”
그런 그의 목소리에는 때때로 보이는 미약한 장난기도, 능글맞은 모습도 들어있지 않았다.
잘못을 고백하며 사과할 때는 그 어떤 수식도 걸치지 않고 본래의 자신을 드러내는 게 옳았으니까.
“응?”
슈페나는 잠시 도르륵 눈알을 굴리며 반문했다.
이윽고, 들려오는 말에 슈페나는 고개를 들어 리카도르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부인을 조금 오해했었어.”
오해?
설마 나무늘보를 잡아 오면서 뭔가 전해 들은 건가.
정답이었다.
리카도르는 그간 알게 된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런 일들이 있었는데, 그래서 부인이 다른 남자를 마음에 품었다고 생각했어. 이젠 아니란 걸 깨달았지만.”
그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버거운 듯 숨을 골랐다.
그러다 다시금 슈페나와 시선이 마주치고.
비에 홀딱 젖은 리카도르의 속눈썹 끝에선 투명한 물이 뚝뚝, 떨어져 흘렀다.
눈물처럼.
리카도르는 손등으로 뿌연 습기를 대충 훔치며 어딘가 물기 어린 먹먹한 목소리로 입술을 달싹였다.
“다 내 잘못이야.”
그가 이내 고개를 떨궜다.
그러고는 슈페나의 손을 잡아 제게로 끌었다.
얼떨결에 주먹 쥐어진 슈페나의 손은 리카도르의 가슴팍에 안착했다.
꼭 슈페나가 리카도르를 원망하며 그 작은 주먹으로 콩콩, 내려치려는 듯한 자세가 되었다.
“실망해도 좋아. 화가 풀릴 때까지 때려도 돼.”
리카도르의 입매가 초조하게 파들 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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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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