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uebird Lady and The White Lion Family RAW novel - Chapter (16)
백사자가문의 파랑새 마님 16화(16/21)
“감히 용서해달라는 말은 안 할게.
다만…… 지금 내가 하는 말들이다 진심이란 것만 알아줘.”
버림받아도 할 말이 없는 처지라고 생각했다.
제멋대로 부인을 오해했으니 슈페나로서는 배신감이 들지 않았겠는가.
‘솔직히 어떻게든 부인을 붙잡고 싶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어떠한 변명이나 임기응변이 아닌 진짜 사과겠지.
리카도르가 씁쓸하게 속으로 뇌까렸다.
어쩌면 이러는 것도 슈페나에겐 불쾌할 수 있지 않겠는가.
비 맞은 강아지처럼 처량한 리카도르의 얼굴을 본 슈페나의 눈이 크게 깜박였다.
‘얘는 나한테 정말 미안해하고 있구나.’
어쩐지 눈가가 촉촉해질 것만 같았다.
리카도르가 자신에게 품은 마음이 그만큼 올곧다는 뜻일 테니까.
이상하게 약간 즐겁기도 하고 그 간 바보처럼 착각해온 리카도르가 밉기도 한, 이율배반적인 감정이 엄습했다.
그에 따라 슈페나의 낯도 묘하게 일그러졌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슈페나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묘한 표정으로 입을 떼었다.
“알고 있었어. 나도 어쩌다 제인한테 들은 참이었거든.”
그녀는 차분히 제 속내를 끄집어내었다.
“처음엔 조금 놀랐어. 어이도 없었고.”
그 여러 감정을 겹겹이 쌓아둔 결과, 도달한 결론은 한 가지였다.
“…..… 그러니까 앞으로 내 옆에 찰싹 붙어서 내가 하는 부탁은 다 들어주는 걸로 갚아.”
미우나 고우나 착한 남편은 내가 데리고 살아야지.
슈페나가 한결 발랄해진 어투로 리카도르에게 말을 건네었다.
“그럼 되잖아. 나도 뭐, 잘한 것만 있는 건 아니고.”
그리고 슈페나도 도긴개긴이었던 점이 있지 않은가.
리카도르는 모르겠지만.
그가 솔직하게 진심을 고백한 만큼 자신도 그러고 싶었다.
그게 리카도르에게 갖출 수 있는 존중일 터.
슈페나는 잠깐 입술을 잘근잘근 짓씹다가 곧이어 말했다.
“사실 나도 네가 그 사슴 후계자랑 바람날까 봐 걱정했었거든.”
“뭐?”
리카도르의 음성에는 의아함이 깃들었다.
슈페나가 괜스레 제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자초지종을 대강 이야기했다.
금제 때문에 전부 다 말할 순 없을 것 같지만 이 정도는 괜찮겠지.
“사슴 후계자가 워낙 예쁘다는 소문이 자자해서 그랬어. 내가 본 소설에선 다 전쟁 나가서 여자를 데려오더라고…. 내가 너무 바보 같았나 봐.”
더불어 그때 지하감옥에서 했던 말들도 다 그 때문이었다고 멋쩍게 덧붙였다.
그러면서 리카도르가 그랬듯이 진솔하게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나도 의심해서 미안해.”
홀가분하게 사실을 토해냈건만 말끝은 살짝 흔들거렸다.
덜컥 겁이 난 탓이었다.
‘그래도 리카도르는 겉으로 보기에 명백한 이유라도 있지. 내 사정은 너무 뜬금없게 들릴 것 같은데.’
이해해줄까?
슈페나가 리카도르를 빤히 응시했다.
그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사실 리카도르는 생각지도 못했던 얘기를 들어서 조금 당황해 있었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무언가 만족스러워서, 그런 본인의 심리 상태에 경악한 참이었고,
‘그렇다면 부인은 내가 전쟁에서 돌아왔을 때부터 나를 의식하고 있었다는 뜻 아닌가?’
리카도르의 입매에 희미한 곡선이 걸쳐졌다.
중증이었다.
그가 슈페나와 맞닿은 손에 아프지 않게 힘을 주며 단단히 이야기했다.
“.…그럼 부인도 내 옆에 찰싹붙어서 갚아야겠네.”
“응. 그래야겠네.”
그제야 슈페나도 예쁘게 눈꼬리를 휘었다.
그 둘은 근처에 있는 나무 밑으로 몸을 피하곤 쭈뼛쭈뼛하며 웃기만 했다.
오해를 풀었더니 뭔가 어색해서.
그러기를 10분째.
슈페나는 보슬비에 젖어 곱슬곱슬하게 말려 들어간 머리끝을 매만지며 혼잣말했다.
“다 젖었네.”
“이제 들어가자. 감기 걸리겠어, 부인.”
그에 리카도르가 조심스레 그녀의어깨를 감쌌다.
그러더니 비를 피할 수 있도록 커다란 손으로 슈페나의 시야 위에 장막을 드리웠다.
슈페나는 그의 손을 꼭 잡고 걸어가면서 작게 미소 지었다.
“그래도 괜찮은 것 같아.”
물기를 머금은 정원에 여름비가 내렸다.
그리고 그 빗줄기는 슈페나와 리카도르의 마음을 포근히 적셨다.
그렇게 비를 맞으면서도 서로 힐끗대며 정원을 가로지르던 순간.
불현듯 슈페나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스쳤다.
끝은 잘 매듭지어야 하지 않겠는가.
“참, 너 나무늘보한테는 제대로 사과했지? 들어보니까 되게 불쌍하던데….”
“했어. 아주 성의 있게.”
이런 슈페나의 염려는 기우였다는 듯 리카도르가 듬직하게 대답했다.
그 말을 마친 직후, 체드윅 가에 증기자동차가 줄줄이 도착했다.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리카도르가 직접 운전해서 도착한 모양이었다.
‘어쩐지 운전석에서 내리더라. 그렇게 조급했나.’
리카도르는 어깨를 으쓱이곤 저택안으로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그런데……
“그……. 우리 해결해야 할 문제가 더 남은 것 같은데……?”
슈페나가 어느새 커튼 뒤로 숨어버린 체드 가 식구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
한편, 흑표범들의 영역 안.
휘황찬란한 흑표범 가주의 방에는 피딱지가 덕지덕지 앉은 벨라트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리카도르에게 당했던 상처가 아직 낫지 못한 모습.
벨라트는 자신의 주군에게 깊이 고개를 숙이며 연거푸 사죄했다.
“…주군, 죄송합니다.”
사자들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힘겹게 빠져나오지 않았던가.
그의 주군인 흑발의 사내는 차갑게 비소했다.
“멍청하긴. 사자들이 알아차리기 전에 그 장소를 찾아내라는 게 그리 어려운 명령이었나.”
사내가 의식적으로 존대를 하며 벨라트를 압박했다.
“내가 못 해낼 일을 맡긴 겁니까?”
“아니, 아닙니”
“그럼 어떻게든 해냈어야죠.”
언뜻 들으면 자비로운 듯했으나, 상대를 업신여기는 감정이 물씬 풍기는 말투였다.
사내가 벨라트의 뺨을 툭툭 치며 못마땅한 기분을 적나라하게 내뿜었다.
“하……. 내가 널 언제까지 살려둬야 하지?”
그리곤 온기 한 점 없이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살벌하게 겁박했다.
“네 동생이 갔던 길을 그대로 답습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그리고 다른 가족들마저 그 길을 걷게 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다음 임무는 똑바로 수행해내. 알겠습니까?”
“.… 알겠습니다. 주군.”
명백한 살의가 넘실거리는 어투에 벨라트는 더욱 바짝 자세를 낮추었다.
잔인한 주군이 이리 참아주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으니..
본디 사내의 목적은 각성과 권능에 관한 정보가 들어있는 서적이었다.
각성을 완성하고 싶었으니까.
‘이젠 필요 없어. 이미 내 권능은 완성되기 직전인 것 같으니.’
사자들의 손에 들어갔다 한들 상관없었다. 어차피 이기는 건 그가 될 테니.
사내가 한결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벨라트에게 명했다.
“이번 임무는 조금 특별할 거다.
그 사자를 투입할 거니까.”
“…… 사자라면?”
벨라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사내는 피식 웃으며 구름 위를 거니는 듯 가벼워진 음성으로 단정짓듯 얘기했다.
“아스터 해링턴. 세뇌는 완벽하게 걸렸으니 아주 재미있는 그림이 만들어질 겁니다.”
이 체스말 또한 사자이니, 건방진 사자놈들의 뒤통수를 치기 쉬울 터.
판도를 뒤집기엔 딱이었다.
“우선 체드윅 가의 소가주 놈과 파랑새를 떼어놓는 것부터 시작하세요.”
사내가 잔혹하게 말을 더했다.
“그래야 죽이지.”
분명 그 사자가 전달한 첩보에 따르면….
‘파랑새와 소가주 놈의 탈리테가 서로에게 잘 들어맞는다고. 그래서 살았다지.’
거슬렸다.
일단 둘 중 하나는 확실히 죽여야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더구나 그 꿈.
죽어가는 하늘색 머리 여자가 권능을 사용하던 그 불쾌한 꿈.
분명 그 권능은 그에게 치명적인 상극의 힘이었다.
그러니 꼭 없애야 했다.
대업을 완성하기 위해선.
“한데…… 주군.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사내의 눈이 예리해지던 찰나, 벨라트가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그 파랑새 말입니다. 제 이능이 아예 통하지 않았습니다. 분명 소가 주에게는 조금이라도 먹히려던 느낌이 있었는데…..”
그 보고에 사내는 의아해하는 기색 하나 없이 무던하게 실소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꿈에서 보았던 권능을 가진 파랑 새에겐 흑표범의 이능이 통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 많군.”
“이번엔 꼭 성공하겠습니다, 주군.”
주군의 심드렁한 태도에 벨라트는 약간 고민하는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회고록을 사자들에게 빼앗긴 것 같은데.’
알아볼 수 없는 언어로 적어두긴 했으나, 언젠가는 세상에 공개하고자 일기처럼 시시콜콜한 것까지 기록해둔 치부책이 아니던가.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나, 이어지는 냉정한 축객령에 벨라트의 생각은 이어지지 못했다.
“그만 가보세요.”
사내는 벨라트가 방을 나서자 쯧, 혀를 차며 느른하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성공작이라고 너무 많이 봐준 건가.”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123화
‘이를 어쩐담.’
그 시각, 슈페나는 리카도르와 함께 가족들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어차피 들켰는데 왜 커튼 속에서 안 나오시는 거지….…?’
슈페나가 어리둥절하게 갸우뚱거릴 동안, 체드윅 가 식구들은 속닥속닥 저들끼리 떠들며 신호를 주고받았다.
“어머니, 아무래도 둘이 사이가 나쁘진 않은 것 같죠?”
“확실히 그래 보이는구나, 리리엘라.”
“형님이 아무래도 예비 이혼남까지 가지는 않을 듯하네요. 다행입니다.”
물론 리헨테온이 깐족거렸다가 리리엘라에게 한 대 얻어맞은 건, 공한공연한 비밀이었다.
아무튼 그들도 무언가 상황이 예상과는 다르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슈페나가 리카도르에게 볼뽀뽀를 하는 시점부터 지켜보고 있었으니.
그때, 슈페나가 조심스레 칸을 불렀다.
“어머님…?”
“어, 거기에 있었니? 우린 잠시 정원을 구경 중이었단다.”
그 부름에 그제야 칸은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커튼 안에서 나왔다.
리리엘라와 리헨테온도 멋쩍게 목을 긁적이고는 따라 나왔다.
하하하, 웃으며 호응한 슈페나가 리카도르를 툭툭 치더니 시그널을 보냈다.
얼른 나무늘보를 데려오든지 뭘 좀 하라고.
의도가 분명한 손길에 리카도르는 서둘러 입술을 달싹였다.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그동안 부인에 대해 어머님이 들으셨던 거, 다 오해입니다.”
그러면서 모두에게 보란 듯이 슈페나와 손을 맞잡아 들어 올렸다.
슈페나가 저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뜨곤 리카도르를 올려다보았다.
“야, 너…!”
“가족들이랑도 오해는 풀어야지, 부인.”
리카도르가 멋쩍게 어깨를 으쓱이며 변명했다.
서로 거리낌이 없이 꽁냥거리는 모습에 체드윅 가 식구들이 일제히 입을 떡 벌렸다.
리카도르는 아랑곳하지 않고 주변에 있던 사용인들에게 명했다.
“나무늘보를 데려와.”
“아, 제인이랑 일리아도.”
슈페나가 총총총 사라지는 사용인들을 향해 재빨리 덧붙였다.
그렇게 모든 오해를 청산할 자리가 마련되고.
나무늘보를 비롯한 증인이 되어줄 인물들이 체드 가 식구들과 마주본 채, 소파에 착석하게 되었다.
“오해라니 그게 무슨 말이더냐?”
급작스러운 상황 속, 먼저 침착하게 서두를 연 이는 연륜 넘치는 칸이었다.
칸의 눈길은 리카도르에게 고정되어있었다.
“직접 말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나무늘보 씨.”
그러자 리카도르는 예의 있게 나무늘보를 향해 손짓했다.
불을 내뿜던 예전과는 달리 확실히 친절해진 모습이었다.
나무늘보는 사자 무리에 둘러싸인 현실이 조금 무서웠는지 잠시 눈알을 굴렸다.
그리고는 일전에 리카도르에게 했던 이야기를 특유의 느린 음성으로 똑같이 풀어내었다.
“……자아근 마아니이임과~”
“제대로 말해, 이 머저리야.”
평소 나무늘보와 안면이 있었던 일리아가 타박을 주는 바람에 도로 말이 빨라졌지만.
“…저와 소가주님의 아내분은 아무런 사이도 아닙니다. 제 심장을 걸고 맹세할 수 있어요!”
나름 빠릿빠릿해진 나무늘보의 말이 끝나자, 체드윅 가 식구들은 동공 지진을 일으켰다.
당연하게도 당황한 탓이었다.
여러 정황이 맞아떨어졌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다고?
아직 아리송한 점은 남아있었지만, 칸도 리리엘라도 선뜻 입을 열 순없었다.
어떻게 물어봐야 최대한 정중하게 들릴 수 있을지 고민하느라.
둘이 눈치를 보던 찰나, 리헨테온이 손을 번쩍 들곤 질문했다.
리카도르가 인정한 가장 모자란 동생인 리헨테온답게 거침없는 자태였다.
“결국엔 안면도 제대로 없던 사이라고요?”
“그으렇지요오.”
나무늘보가 느릿느릿 굼뜬 몸동작으로 긍정했다.
그럼에도 리헨테온은 아직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마저 궁금증을 토했다.
“제인 말로는 형수님께서 나무늘보의 외모를 마음에 들어 하셨다고 했는데…… 그건 어찌 된 일입니까?”
모두의 시선이 슈페나에게 집중되었다.
‘내가 왜 바보같이 그때 제인한테 나무늘보 얼굴 칭찬을 했을까…….’
약간의 후회가 스치긴 했으나 그녀는 사실대로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그건 그냥 예의상 한 말이죠. 그리고 나무늘보가 솔직히 못생긴 건 아니니까…….”
“사실 작은 마님이 스쳐 지나가듯하신 이야기인데 제가 너무 과민하게 받아들였나 봐요. 죄송합니다.”
제인도 눈치껏 슈페나를 거들었다.
그 혼신의 수습에 모두 나무늘보의 얼굴을 스윽 쳐다보더니 ‘하긴 그건 그렇지.‘라고 중얼거리며 수긍했다.
묘하게 인정이 빠른 태도였다.
나무늘보도 에헴, 헛기침을 하더니 자신만만하게 어깨를 폈고, 하지만 여기 납득하지 못한 수인 이 하나 있었다.
‘부인의 심미안에 저 나무늘보가 들어맞는다고.’
리카도르였다.
그는 시무룩하게 눈매를 늘어뜨리더니 슈페나에게로 손을 뻗었다.
주저한 탓에 닿진 못했지만.
슈페나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머쓱하게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때마침,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리리엘라가 조심스레 슈페나에게 말을 건네었다.
“슈페나, 미안하지만 그러면 섬은 어떻게 된 거야? 리카도르가 무슨 쪽지를 주웠다고 그랬던 것 같은데.”
그렇다면 왜 정착할 섬을 찾았는지 의문이었으니까.
그 날카로운 물음에 슈페나는 필사적으로 변명거리를 만들어내었다.
“신혼여행! 여태껏 신혼여행을 가본 적이 없으니까 만약 가게 된다면…… 섬이 좋을 것 같더라구요.
여행 가면 며칠 지내야 하잖아요.
뭐, 별장처럼 쓰는 것도 좋을 것 같구.”
본의 아니게 좀 선의의 거짓말을 하는 셈이 되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가족들 앞에서 리카도르가 바람피울까 봐 그랬다고 어떻게 말해!’
그렇게 되면 일리아에 관한 이야기까지 해야 하는데, 금제도 그렇고 너무 허무맹랑하게 들릴 것 같단 말이야.
다행히도 가족들은 순순히 슈페나의 말을 믿어주었다.
“시, 신혼여행…….”
“형수님은 다 계획이 있으셨는데 저는 그것도 모르고..….”
“그래서 그런 거였구나, 며늘아가.”
체드윅 가 식구들은 착잡한 감정이 묻어나오는 음성으로 제각기 혼잣말했다.
슈페나가 옆에 있던 일리아의 옷자락을 잡아끌면서 확실히 못을 박았다.
“맹세코 그런, 오해하실 만한 일은 없었어요. 일리아도 나무늘보와 아는 사이거든요. 그래서 알 거예요.
그렇죠, 일리아?”
“네! 그럼요. 고객님, 아니 슈페나 양과 최근 친하게 지낸 수인으로서 보증할 수 있어요.”
일리아는 눈치 있게 잘 받아쳤다.
그러면서 일견 짓궂은 미소를 입가에 걸치더니 슈페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왜, 뭐. 뭔 말을 하려고.’
갑자기 싸한 기분이 들어 슈페나가 손사래를 쳤다만, 일리아는 기어이 핵폭탄을 던졌다.
“연애 상담을 하면서 친해졌는데 그때 본인 남편이 잘생겼다고 어찌나 자랑을”
“조용히 해요.”
슈페나가 이를 으득 갈며 일리아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러더니 그녀를 으슥한 방구석으로 질질 끌고 갔다.
일리아는 내가 뭘 잘못했느냐는 표정으로 천연덕스레 어깨를 으쓱였다.
‘창피하단 말이야!’
슈페나도 개의치 않고 일리아에게 마구마구 솜방망이 주먹을 날렸다.
이 둘이 아옹다옹하는 사이, 방 안의 분위기는 미묘하게 흘렀다.
이제야 슈페나의 결백과 진심을 알게 되지 않았는가.
체드 가 식구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얼굴이 홍당무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부끄러워서.
여태껏 같이 온갖 추억을 공유하며 함께한 슈페나를 믿지 못한 셈이 아닌가.
뭐, 그럴듯한 상황들이 뒷받침되기도 했고 슈페나와 리카도르의 불화를 목격했다 한들 말이다.
리카도르가 씨 없는 수박이라던 소문에 현혹되지 말았어야 했는데.
누군가가 빠득 이를 갈았다.
아무튼 체드윅 가 식구들은 다짐했다.
슈페나의 마음이 풀릴 때까지 어떻게든 잘못을 빌겠다고.
제일 먼저 사과한 건, 칸이었다.
“.… 정말이지 면목이 없구나, 며늘아가.”
늘 위엄이 가득했던 어머님의 낯은 답지 않게 수척해져 있었다.
리리엘라와 리헨테온도 따라서 진심 어린 어투로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미안해, 슈페나.”
“정말 죄송합니다, 형수님.”
본디 마음이 여렸던 리리엘라의 눈망울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일렁였고, 리헨테온도 시무룩해진 기색이 역력했다.
심지어 그 둘의 엉덩이에 사자 특유의 꼬리가 튀어나와 추욱,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괘, 괜찮은데…….”
이런 색다른 가족들의 모습에 도리어 슈페나가 당황하여 손사래를 쳤다.
어차피 가족들이 오해하고 있었다.
는 사실은 저번부터 알고 있어서 이미 마음을 가라앉히지 않았나.
그리고 이미 섬 문서니, 나무 열매니 선물 공세를 받을 대로 받아서 화도 나지 않던 참이었다.
‘가족들도 나한테 되게 미안해하는 것 같으니까.’
그러나 가족들 생각은 조금 다른 듯했다.
칸이 살짝 잠긴 중저음으로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줄 듯 비장하게 이야기했다.
“감히 용서해달라곤 못하겠지만 지금부터라도 우리가 더욱 노력하고 싶구나. 그래도 괜찮겠니, 며늘아가?”
왜인지 모를 박력이 느껴지지만 다정한 어조.
슈페나는 얼떨떨하게 반문했다.
“예?”
왜 이리 느낌이 불안하지 ..…..
그때, 누군가가 슈페나의 어깨를 톡톡 두들겼다.
“나도 슈페나, 네가 날 봐주는 날까지 열심히 노력할게.”
“형수님, 제 썩어빠진 정신머리를 제대로 개조하고 오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두 주먹을 앙증맞게 쥔 리리엘라와 금방이라도 사고를 칠 것 같은 리헨테온..
슈페나의 불안감은 가중되었다.
하지만 슈페나의 기분을 알아챌여유가 없던 가족들은 머뭇거리다 우르르 사라졌다.
이 와중에 제 썸녀가 신경 쓰였는지 리헨테온이 은근슬쩍 일리아를 끌고 간 건 덤이었다.
제인도 쭈뼛거리더니 꾸벅 인사를 하고 방을 나섰다.
결국, 방 안에는 슈페나와 리카도 르만 서 있게 되고.
“부인.”
느른한 리카도르의 저음만이 남겨졌다.
리카도르는 몸을 돌리더니 올곧게 슈페나를 마주 보았다.
툭 불거진 목울대가 움찔거리고 손등에 퍼렇게 선 핏줄이 존재감을 발했다.
묘하게 정적인 분위기가 흘렀다.
슈페나는 괜스레 제 팔뚝을 쓸어 내리며 리카도르에게 별 잡스러운 이야기를 했다.
“우리도 그만 나가자. 지금 몇 시지?”
리카도르는 이젠 말끔하게 마른 새하얀 머리칼을 헤집으며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글쎄. 밖에 보면 거의 저녁 먹을 때쯤인 것 같긴 하네, 부인.”
“아까 비를 좀 맞았더니 좀 찌뿌둥하다.”
슈페나가 부러 팔을 양옆으로 쭈욱 내뻗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상하게 리카도르가 무언가 말하고 싶어 하는 듯 타이밍을 재는 것 같아서.
그리고 그건 정답이었다.
리카도르가 약간은 처량하게 눈매를 늘어뜨리더니 슈페나의 옷소매를 은근슬쩍 잡아끌었다.
아주 애처로운 기색으로.
그러곤 살랑살랑 처연하고도 맹목적인 저음으로 속삭이듯 그녀를 졸랐다.
“네 눈에 나만 잘생겼으면 좋겠어, 부인”
리카도르는 아까 했던 말이 신경쓰였다.
‘그 사슴 후계자에게 내가 잘생겼다고 했다지.’ 그건 마음에 들었으나, 나무늘보도 슈페나의 심미안에 들어맞는다고 생각하니 어딘가 심통이 났다.
‘나만 부인에게 특별했으면 좋겠는 데….’
그간 끙끙 속앓이하게 했던 오해도 풀렸고, 슈페나에게 용서도 받지 않았던가.
그러니 이젠 가감 없이 더 들이댈 생각이었다.
‘제대로 고백해야지.’
리카도르는 굳게 마음을 먹으며 슈페나의 손을 제 볼에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는 그 손목에 입을 맞추었다.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124화
푸른 피가 비치는 여린 살갗에 끝이 살짝 말려 올라간 요사스러운 입술이 포개어졌다.
살과 살이 맞닿아서인지 간질간질한 감촉이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슈페나의 손끝이 둥글게 말려들었다.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뭐 하는 거야?”
그녀가 커다란 눈을 더욱 동그랗게 뜨곤 고개를 들어 리카도르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그는 못 들은 척 성큼 다가갔다.
리카도르의 눈동자에 슈페나만이 들어찰 정도로 그 둘은 가까워졌다.
속눈썹의 미세한 떨림 하나하나까지 알 수 있을 만큼 좁혀진 거리 속.
리카도르는 다시금 슈페나의 손목에 입을 맞추었다.
아까보다는 진득한 입맞춤이었다.
그러곤 슈페나의 낯을 샅샅이 훑어보며 슬쩍 마음을 떠보았다.
리카도르의 두 눈은 요요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싫었어?”
“아니. 그건 아니고.”
슈페나는 잽싸게 고개를 가로로 흔들더니 부정했다.
싫은 건 절대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깃털로 발끝을 살랑살랑 간질이는 듯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기분이었다.
쑥스럽기도 했고.
이런 생각을 하자 슈페나의 발끝이 저절로 들렸다.
덩달아 그녀의 머리도 스윽, 위로 올라갔다.
그러다 결국, 슈페나가 리카도르를 들이박는 모양새가 되었다.
“아!”
리카도르의 짧은 신음이 흘렀다.
그는 슈페나의 머리에 박치기당한 제 코를 붙잡곤 피식, 실소했다.
“괘, 괜찮아? 아니, 아팠어?”
나 돌머리였니?
슈페나도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리카도르의 팔에 손을 얹고는 상태를 살폈다.
그 걱정 어린 눈길에 리카도르는 부러 더 아픈 체하면서 꾀병을 부렸다.
“뼈가 부러진 것 같기도 하고.”
퍽 익숙한 한마디.
예전에 리카도르를 이 저택에서 만났을 때도 비슷한 말을 했었지.
슈페나의 눈매가 부드러이 풀어졌다.
이내 슈페나와 리카도르는 마주본 채, 말간 웃음을 터뜨렸다.
이윽고 그 둘에게서 웃음기가 걷혔을 때.
그들은 서로 힐끗거리며 눈치만 보았다.
조금 전의 헤프닝으로 분위기가 풀어지긴 했으나, 미묘한 기류가 오갔던 상황에선 어떤 대화를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솔직히 둘 다 알고 있었다.
그 크기가 어느 정도일지는 가늠이 가지 않지만, 서로의 마음이 같다는 걸.
좋아하고 있다는 걸.
다만, 아직 입 밖으로 끄집어내지 못했을 뿐이었다.
조금 더 소중하게, 상대방이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느낄 수 있을 듯한 순간에 말해주고 싶었으니까.
마음의 크기가 커다란 만큼 더욱 커다란 용기가 필요한 법이었다.
그리고…
‘다른 가족들이랑 완전히 화해한 것도 아니고, 오늘은 부인도 혼란스럽겠지.’
아직 타이밍이 아닐 터.
대신 리카도르는 슈페나의 양어깨를 감싸 쥐며 약간 진지해진 저음으로 조곤조곤 애교를 부렸다.
“더, 나 좀 봐줘. 나 좀 더 걱정하고 예뻐해 줘.”
“어?”
흔히 볼 수 없는 리카도르의 모습에 슈페나는 얼어붙었다.
그가 그런 그녀를 잡아끌며 짐짓 천연덕스레 말했다.
“이만 가자.”
***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슈페나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복도에 펼쳐진 광경을 두리번두리번 바라보며 입만 떡 벌렸다.
‘이게 다 뭐야…….’
일렬로 늘어선 사용인들이 무언가를 들고 있는 게 아닌가.
금가루를 뿌린 라즈베리 한 무더기, 하늘하늘 예쁘게 살랑거리는 드레스, 그와 어울리는 화려한 장신구.
저택이라도 한 채 살 수 있을 만큼 값나가는 물건들이었다.
그런 사용인들 사이에 서 있던 칸이 쭈뼛쭈뼛 그녀를 반겼다.
“좋은 아침이구나, 며늘아가.”
다정하지만 과도하게 슈페나의 눈치를 살피는 칸의 행동.
어제의 일이 마음에 걸리는 듯싶었다.
그건 다른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무열매를 한 아름 든 리리엘라와 리헨테온이 조심스레 슈페나에게 다가왔다.
“…안녕? 잘 잤어, 슈페나?”
“평안한 밤 보내셨습니까, 형수님.”
슈페나는 얼떨결에 그 선물들을 건네받으며 어머님에게 질문했다.
“이게…… 다 뭐예요, 어머님?”
“네가 뭘 좋아할지 알긴 안다만 일단 다 준비했단다. 다다익선이란 말도 있잖니.”
칸은 멋쩍게 큼, 헛기침하더니 대답했다.
리리엘라도 조심스레 슈페나에게 여러 옷을 들이밀며 거들었고.
“아, 이건 여름 연회 때 입으면 좋을 것 같아서 산 옷이야. 부담 가지지 말고 입어줄래, 슈페나?”
너무 많은데?
아침부터 너무 갑작스러운 선물을 일으켰다.
공세에 당황한 슈페나는 동공 지진
‘혹시 이러는 것도 슈페나가 싫어하려나?’
그 반응을 본 리리엘라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다른 가족들의 머릿속에도 비슷한 생각들이 스쳤다.
체드 가 식구들은 열의 넘치게 슈페나에게 사과 선물을 안겨주면서도 걱정했다.
원하지 않은 호의는 오지랖이고 더 나아가 불쾌감만 조성할 수 있었으니까.
일단 잘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 급히 이런 걸 준비하면서도, 한편으론 망설였다.
갈등하던 칸이 우선 선물들은 남는 방 안에 고이 놓아두라 명한 뒤, 슈페나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그리고 이건…… 아무래도 직접 손으로 쓰는 편이 더 와닿을 것 같아서 준비했단다.”
손편지였다.
슈페나를 생각하는 모두의 진심이한 글자 한 글자 소복이 쌓인.
“별로 대단한 건 아니지만 괜찮으실 때 읽어주신다면, 그것만으로도 저흰 기쁠 것 같습니다. 형수님.”
리헨테온이 꾸벅 허리를 접었다.
칸과 리리엘라도 희미하게 웃으며 아련한 눈빛으로 슈페나를 쳐다보았다.
슈페나의 낮은 점점 미묘해졌다.
“우린 그만 가보마. 그리고 선물들은 언젠가 요긴하게 쓰일 날이 있을 테니 부디 받아주렴.”
그러는 사이, 칸이 슈페나에게 간절히 당부하며 다른 가족들을 이끌고 빠르게 사라졌다.
“이게 다 뭔 일이람.”
홀로 남은 슈페나는 우선 가족들이 준 편지를 천천히 읽어내리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다 너무 정성스럽게 써줬네.’
어머님은 특유의 성격처럼 담백하고도 진심이 듬뿍 묻어나는 내용이었고, 리리엘라 언니는 울었는지 편지지에 눈물 자국이 묻어났으며, 도련님은 각 잡힌 필체로 쓴 아주 많은 양의 편지였다.
‘이렇게까지 미안해할 줄은 몰랐는데.’
얼른 용서해야겠네.
슈페나는 아침 식사를 하느라 가족들이 다 같이 모여있을 다이닝룸으로 향했다.
역시나 예상대로 다이닝 룸 안엔 가족들 모두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아침 수련을 간다며 나갔던 리카도르도 있었고.
다만,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은 듯 보이긴 했다.
기계적으로 스테이크를 칼질하던 칸이 저도 모르게 나이프를 떨구슈페나를 쳐다보았다.
“며늘아가.…?”
다른 가족들도 요동치는 감정을 숨기지 못한 채 헉, 숨을 들이마셨다.
슈페나는 손에 든 편지들을 더 꽉움켜쥔 채, 부러 발랄한 목소리로 가족들을 불렀다.
“어머님, 리리엘라 언니, 도련님!”
그리고는 모두의 손을 잡고 끌어다 와락 껴안았다.
“아, 리카도르도.”
가족들은 식사를 하다 말고 얼결에 다 같이 부둥켜안게 되었다.
그들은 놀란 토끼 눈을 하곤 믿기지 않는다는 듯 멀뚱멀뚱 슈페나를 응시했다.
슈페나가 가족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따스하게 눈에 담으며 이야기했다.
“저 괜찮아요. 다 용서했으니까 앞으론 저한테 미안해하지 말고, 대신 많이 좋아해 주세요. 네?”
애교스레 조르는 슈페나의 음성.
그 이야기를 들은 리리엘라가 말끝을 흐리더니 슈페나에게 얼굴을 파묻었다.
“슈페나! 나는 정말..….”
칸도 다정히 슈페나의 손을 맞잡으며 울컥, 치미는 감정을 갈무리하려 노력했고,
“며늘아가, 정말이지 미안하고 고맙구나.”
“저희가 그리 못난 짓을 했는데도 진정 용서해주시는 겁니까, 형수님?”
리헨테온은 처음 보는 얼굴을 하더니 울먹이면서 물었다.
“가족이잖아요.”
슈페나가 다시금 가족들을 힘차게 끌어안고는 제 마음을 내보였다.
“서운한 일이 있어도 금방 다시 좋아지는 그런 사이 아니었어요?”
식탁 위는 한바탕 눈물바다가 되었다.
감정 표현에 무던했던 칸마저 눈시울을 몰래 붉힐 정도로.
슈페나가 일부러 못 본 척하며 가족들에게 말했다.
“이제 밥 먹어요, 우리.”
모두 그녀의 말을 따라 유순히 자리에 앉더니 거의 울면서 밥을 먹기 시작했다.
여기서 그나마 아무렇지 않아 했던 수인은 이미 슈페나에게 용서를 받았던 리카도르만이 유일했다.
그날의 아침에선 묘한 눈물의 짠맛과 체드윅 가 수인들의 따스한 마음씨가 느껴졌다.
***
이렇게 한바탕 서로 부둥부둥하며 다시 돈독하게 정을 쌓고 일주일뒤.
슈페나는 집무를 보고 있었다.
곧 여름 연회가 시작될 시기였으니까.
그동안 준비는 어머님이 해주셨으나 연회 진행은 여태 해오던 대로 슈페나가 맡게 되었다.
아무래도 어머님은 다른 신경 쓸 일들이 많았으므로,
“아, 고객님. 그 뱀 꼬맹이는 연회끝나고 나서야 올 것 같던데요?”
서류를 살피던 슈페나에게 일리아의 음성이 내려앉았다.
슈페나는 보고 있던 문서에 시선을 고정한 채, 여상스레 받아쳤다.
“그래도 그쪽이 먼저 사업 얘기 꺼내면서 카누스 몫까지 도와주겠다고 했잖아요.”
일리아가 일전에 카누스와 함께 사업을 도와주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 일의 연장선이었다.
여름 연회는 슈페나와 카누스가 만들어낸 발명품의 시연회처럼 변한 지 오래였으니.
대화의 화제가 사업에 관련된 쪽으로 흐를 무렵, 서류를 넘기던 슈페나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아스터 해링턴?’
여름 연회 참석자 명단 하단부에 쓰인 이름.
해링턴이란 성이면…….
예전에 가을 순회에서 아기 사자와 그 아버지인 원로사자를 구했던 기억이 생각났다.
메인 악녀의 성이 해링턴인데 원로사자 또한 같아서 개이득이라고 좋아했었지.
분명 소설이라 생각했던 과거 속자신에게 누명을 씌운 존재였는데.
그때 기억에 따르면 이제 슬슬 등장할 시점이긴 했다.
‘어떤 사람인지 일리아도 알고 있겠지? 대충 떠보면 괜찮지 않을까.’
슈페나가 일리아한테로 고개를 돌리곤 입을 떼었다.
“근데 저기”
“아, 고객님, 약속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먼저 선수를 친 건, 일리아였다.
슈페나는 이제야 떠올랐다는 듯 탄성을 흘렸다.
“맞다. 춤 연습.”
이번 여름 연회는 저번이랑 사뭇다른 점들이 있었다.
어머님이 준비하면서 여러 가지를 바꾸셨더라고.
‘그래서 리카도르랑 소질도 없는 춤을 맞춰보게 생겼지.’
사실 며늘아가와 아들을 엮어주기 위해 칸이 야심차게 준비했던 계략이었다.
슈페나는 몰랐지만.
그녀가 우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일리아에게 당부했다.
“물어볼 게 있는데 이따가 다시 올게요.”
어차피 흑표범인 줄 알았던 토끼와 관련된 일로도 일리아에게 질문할 것들이 있었으니까.
토끼는 사자들의 삼엄한 감시 중에 여전히 심문 중이었다.
생각보다 아는 게 없어서 좀 귀찮아지긴 했지만.
어쨌건 아무것도 모르는 일리아는 잔망스레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
“오해도 풀었는데 고백이라도 하고 와요, 고객님!”
“저 수인이 미쳤나 봐…….”
그 장난에 슈페나가 소스라치게 기겁하며 서둘러 방 안을 나섰다.
그리고 리카도르와 만나기로 한 장소인 빈 연회장에 도착했을 때.
슈페나는 더욱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125화
사실 연회장에 도착했을 당시에는 별생각이 없었다.
‘리카도르는 어디에 있지?’
사용인들이 드나들긴 했으나 리카도르가 보이지 않아 의아했을 뿐.
고개를 갸웃거리던 슈페나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위층 발코니로 올라갔을 때였다.
“좋아해.”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들리는 한 마다.
리카도르의 목소리였다.
‘좋아해, 라고?’
슈페나가 염력을 사용해 기척을 죽이곤 발코니 안의 풍경을 빼꼼내다보았다.
리카도르는 발코니 안에 세워둔 전신 거울을 친구 삼아 진지하게 분위기를 잡고 있었다.
춤 연습을 핑계로 좋아하는 사람과 온종일 붙어있을 수 있는 기회.
그리고 좋아한다는 진심을 전할 수 있는 딱 좋은 타이밍.
오늘 리카도르는 슈페나에게 고백할 계획이었다.
미리 예행연습을 하는 그의 귓가는 불이라도 난 듯 요란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한편, 슈페나는 어리둥절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리카도르가 고백 연습을 하고 있는 듯한 모습.
평상시라면 발소리를 죽였어도 슈페나의 기척을 귀신같이 읽어냈을게 분명했지만, 긴장해서인지 그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상태였다.
‘뭐야. 귀여워.’
그녀가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입매를 손으로 틀어막은 채, 조심조심 도로 1층으로 내려갔다.
잠시 숨어서 지켜보고 있으니 리카도르가 위층에서 내려왔다.
슈페나는 손차양을 드리우곤 이제 막 도착한 척 주위를 크게 두리번 대었다.
그러곤 국어책을 읽는 것처럼 또박또박 낭랑한 어조로 다 들리게 중얼거렸다.
“어? 리카도르는 어디에 있지?”
그제야 그는 슈페나가 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왔어, 부인?”
아까 슈페나가 발코니 안의 풍경을 엿보았다는 것은 아직도 모르는 듯했다.
기척을 느꼈다 해도 사용인들이 지나다니나 보다, 여긴 모양이겠지.
‘그나저나 나 고백받으려는 것 같지?’
슈페나는 슬그머니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손으로 문지르며 내심 기뻐했다.
뭐, 고백을 누가 먼저 하느냐는 중요한 게 아니긴 하지만 막상 상상하니 기분이 좋아졌으니까.
슈페나가 모른 척 시치미를 떼며한 발짝 한 발짝 리카도르에게 다가갔다.
“언제 위에 올라가 있었어?”
“조금 전에.”
그는 조금 당황했는지 잠시 눈을 깜박이다가 간단하게 답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리카도르가 돌연 슈페나와 한 뼘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는 뒷짐을 지면서 슈페나를 느른히 내려다보더니 여유롭게 고갯짓했다.
잔잔한 호수처럼 짙고 고요한 푸른 눈동자에 슈페나가 담겼다.
‘왜 그런 눈빛으로 쳐다보는 거지?’
그녀는 반사적으로 속눈썹을 드리웠다.
그러다가 묘한 부끄러움에 본의 아니게 짧고 불퉁스러운 의문을 내비쳤다.
“왜?”
리카도르가 조막만 한 슈페나의 손을 자연스레 잡아끌었다.
“손. 줘야 잡지.”
“아..”
그녀의 입에서 가느다란 탄성이 새었다.
어느새 손은 제 짝을 찾은 듯 리카도르의 것과 하나가 된 채였다.
리카도르는 슈페나를 연회장의 한가운데로 이끌었다.
본디 연회 시작 때 추가된 왈츠를 추기 위해 만나기로 한 것이 아니던가.
그가 사용인들을 향해 눈짓했다.
그에 제 할 일을 하고 있던 사용 인들이 음악이 흐르도록 축음기를 재생시키곤 일제히 연회장 밖으로 빠져나갔다.
덕분에 연회장에는 슈페나와 리카도르만이 남게 되었다.
그 둘은 차근차근 스텝을 밟았다.
슈페나의 손은 얌전히 리카도르의 어깨에 올려졌고, 리카도르는 정중하게 슈페나의 허리를 휘감았다.
서로의 호흡의 형태를 알 수 있을 만큼 좁혀진 거리 속.
리카도르가 나지막하지만 다정한 음성으로 속닥였다.
“그래도 예전보단 많이 좋아진 것 같은데?”
그 따뜻함이 물씬 담겨있는 울림이 슈페나의 귓가를 빨갛게 간질였다.
“당연히 많이 늘었겠지.”
슈페나는 그를 의식하지 않은 척하며 짐짓 새침하게 받아쳤다.
너무 가까이 붙어있어서 조금 부끄러웠으니까.
지금도 음악이 고조될수록 리카도 르와 코끝이 맞닿을 듯 가까워졌다 멀어지기를 수십 번째 반복하고 있지 않은가.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 박동이 리카도르의 귀에 스며들까 걱정될 만큼 쿵쿵 거세게.
하아, 남몰래 한숨을 내쉬던 그녀가 그의 리드를 따라 제자리에서 핑그르르 돌며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근데 어머님은 왜 갑자기 연회의 룰을 바꾸신 걸까? 보니까 이상하게 너랑 이것저것 같이 해야 할 일들이 많던데.”
“큼.”
그 물음에 그가 사레라도 들린 듯이 헛기침했다.
사실 리카도르는 알고 있었다.
칸이 슈페나와 그를 엮어주고자 일부러 손을 썼다는 걸.
혹여나 그 사실을 들킬까 봐 리카도르는 아까의 슈페나처럼 다른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아, 맞다. 부인.”
그가 데려왔던 나무늘보에 관한 얘기를.
“그 나무늘보랑 별로 안면 없는 사이라고 했지?”
“어, 왜?”
슈페나가 도르륵 눈알을 굴리며 슬쩍 그를 올려다보았다.
리카도르는 끝이 약간 뭉툭한 저음으로 뇌까렸다.
“영 수상해서.”
일단은 지은 죄가 있어서 보상도 하고 잘 대접해주었지만, 나무늘보는 미심쩍은 인물이지 않은가.
하필이면 흑표범을 쫓다가 다시 마주쳤으니까.
뭐, 나무늘보에게서 사정을 듣긴 했었다.
“그 나무늘보의 말에 따르면, 자신은 흑표범들 뒷조사를 했을 뿐이라지.”
리카도르가 그리 읊조리는 사이,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춤곡은 아까보다 격정적인 리듬으로 변주되었다.
그는 슈페나를 붙잡은 손에 아프지 않게 힘을 주며 일순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한데 나무늘보가 왜, 흑표범을…. 도무지 이해가 안 돼. 혼란스러운 상황에 딱 마주친 것도 그렇고.”
슈페나는 리카도르의 움직임에 호응하듯 배운 대로 드레스를 살짝 들어 올리곤 생각했다.
하긴 나무늘보와 일리아, 그리고 그들이 지닌 비밀을 모르는 리카도 르 입장에선 찝찝할 터.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발랄하게 종알거리며 동의를 구하기 위해 눈짓했다.
“그래도 그 덕에 알게 된 정보들이 있잖아!”
어쨌건 흑표범의 뒤를 캤던 나무 늘보 덕분에 여러 정보를 공유받은 참이었다.
슈페나가 그 점을 끄집어내었다.
“흑표범들도 내부 사정이 복잡하다며? 표범, 흑표범, 설표, 이렇게 나눠서 이권 다툼을 하느라.”
“그 정도는 원래 알고 있는 사실이긴 했어, 부인. 무슨 마을에 관한건 처음 들어보는 내용이었지만.”
그러자 리카도르가 무던하게 맞장구쳤다.
마을 얘기를 거론하면서.
그 방정맞은 토끼를 탈탈 털었을 때도 어떤 마을에 대한 걸 알려주지 않았던가.
역시 나무늘보도 그 마을의 구린 점을 파내고 있던 모양이었다.
사실 여기까진 별 특별할 것 없는 정보였다.
토끼가 술술 부는 바람에 이미 알고 있던 것들이었으니까.
여기서 중요한 건…….
“확실히 흑표범들은 이상해. 그 마을 근처에서 흑표범들이 죽어 나갔다니……. 안 그래, 리카도르?”
또 다른 새로운 비밀이 파헤쳐졌다는 것이었다.
“흑표범 말고도 다른 동물들도 시체로 발견되었다지. 그것도 신체 일부분이 사라진 채로.”
슈페나의 말에 첨언하는 리카도르의 목소리가 저절로 심각해졌다.
쉬이 왈가왈부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으므로, 그런 주제로 대화가 흐르자, 리카도르의 허리를 감고 있던 슈페나의 팔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골몰히 생각에 잠긴 탓에.
이런 분위기에 발맞추어주는 건지 어느새 음악도 멎어버린 지 오래였다.
슈페나가 잠자코 손으로 턱을 괴곤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뭔 짓을 하는 걸까?”
고민해봤자 나오는 결론은 없었다.
뭔가 이상한 용도로 수인들을 이용하는 게 아닐까 싶긴 했지만.
그에 리카도르가 그녀의 볼을 손등으로 살살 안심시키듯 쓰다듬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부인.”
“응?”
“네가 위험하게 두는 일은 없을 테니까.”
웃음기 하나 담겨있지 않은 리카도르의 얼굴.
그랬기에 더욱 담백하고 진솔하게 느껴지는 한마디였다.
얘는 저런 멘트를 얼굴 하나 붉히지 않고 친다니까.
문득 밀려들어 오는 쑥스러움에 슈페나가 횡설수설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아무튼, 그 뭐지……. 나무늘보는 너무 경계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우리 편 같던데?”
“어째서 그렇게 단정 지을 수 있는 거지, 부인?”
하나, 그건 조금 무리수였던 듯싶었다.
묘하게 나무늘보를 두둔하는 말투에 리카도르가 귀신같은 눈치로 이상함을 감지했으니까.
‘분명 일리아는 나한테 우호적이니까. 그런 일리아한테 꽁꽁 붙잡혀 사는 듯한 나무늘보도 비슷하겠지.’
더구나 예전에 일리아와 나누었던 대화를 곱씹어보면 나무늘보도 각성자 같았으니까.
그런데 금제 때문에 그걸 말해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손사래를 치곤 최대한 리카도르가 납득할 수 있는 설명으로 수습을 시도했다.
그리고 그 수습은 성공적이었다.
“애당초 나쁜 수인이었으면 이런 정보도 안 알려줬…아!”
안타깝지만 의도치 않게 발을 삐끗하여 리카도르의 관심을 분산시키는 방향으로, 리카도르가 넘어지려는 슈페나의 허리를 단단하게 낚아채었다.
“괜찮아?”
“응. 계속 구두 신고 움직이다 보니까 좀 부었나 봐.”
슈페나가 구두를 반쯤 벗은 채, 살짝 붉게 부푼 발꿈치를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제법 높은 굽의 신발을 신고 내리 춤을 추었으니, 발을 삐는 것도 당연했다.
그래도 못 걸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가 씩씩하게 도로 구두를 구겨 신고는 리카도르에게 제안했다.
“바깥 정원에 어머님이 인공 개울 같은 걸 새로 만드셨던데 거기 가볼래?”
춤을 추긴 이미 그른 듯하고, 시원한 물에 발을 담그고 있으면 통증도 가실 것 같아서.
또, 흑표범의 이야기를 하느라 분위기가 많이 딱딱해지지 않았는가.
분위기를 좀 유하게 풀고 싶었다.
“응?”
리카도르는 못 알아들은 척 슈페나에게로 고개를 숙였다.
안 그래도 가까웠던 거리가 더욱 좁혀졌다.
미세한 속눈썹의 떨림이 보일 정도로,
‘얼굴 공격은 반칙이라니까.’
시선을 어디 둬야 할지 고민하던 슈페나가 은근슬쩍 그를 밀어내며 조잘조잘 말을 늘어놓았다.
“발이 뜨거워서 열도 식힐 겸, 그냥”
소용없었지만.
“데려다줄게.”
리카도르는 그 말을 마치자마자, 슈페나를 번쩍 들어 안았다.
새된 슈페나의 비명이 새었다.
“야!”
“그럼 그 발로 어딜 가려고, 안아달라는 거 아니었나?”
그가 짐짓 능글맞게 받아치더니 아랑곳하지 않고 저벅저벅, 연회장을 가로질렀다.
반사적으로 버둥거리던 슈페나도 멋쩍게 반항을 멈추었다.
놀람이 감돌던 슈페나의 목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뭐, 그건그런데 이렇게까진..”
리카도르의 품은 안락했다.
온기 도는 체온 덕분에 뜨끈했고, 힘이 좋아서인지 안정감이 들었고, 어딘가 익숙한 좋은 향도 났고.
‘좋네….’
슈페나는 괜히 저도 모르게 그 가슴팍에 볼을 부비며 얼굴을 감추었다.
리카도르의 목울대가 움찔대었다.
그렇게 정원 한구석에 만들어진 졸졸 흐르는 개울에 도착하고, 리카도르는 안전하게 슈페나를 개울가 바닥을 뒤덮은 잔디 위에 앉을 수 있도록 내려주었다.
“고마워….”
그녀가 잠시 잔디 바닥을 손으로 짚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노란 나비가 날아다니고, 물길을 따라 우거진 나무에 붉은 동백이 흐드러진 풍경.
평화롭고 아름다운 한때였다.
슈페나는 드레스 자락을 살짝 걷고는 부어오른 한쪽 다리를 물에 살포시 담갔다.
“앗, 차가~!”
그녀의 발끝에 바위 표면을 미끄덩미끄덩 뒤덮은 이끼가 닿았다.
꼭 바위 속에 숨은 물고기들이 모여들 것만 같은 느낌에 슈페나는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래도 혼자만 당할 수는 없지.’
그녀가 리카도르의 팔을 붙잡고는 장난스레 재촉했다.
“너도 얼른 발 좀 담가봐!”
얼결에 리카도르도 두 발 모두 차가운 개울에 입수하게 되고.
슈페나는 부러 그를 향해 철벅철벅, 발장구를 쳤다.
“이 정도는 그냥 간지럽기만 한데, 부인.”
물론 당하고만 있을 리카도르가 아니었다.
“야, 리카도르! 옷 다 젖었잖아!”
도리어 당하게 된 슈페나는 새치 름한 세모눈을 하곤 더욱더 세게 물을 튀겼다.
서늘한 물줄기가 그들을 간지럽혔다.
아이처럼 천진하게 놀고 난 후.
드레스 밑단만 조금 젖은 슈페나와 달리, 리카도르는 상체까지 흠뻑 젖은 상태였다.
‘내가 너무 심했나?’
슈페나는 힐끗 리카도르를 곁눈질하며 입술만 깨물었다.
이내 동요 어린 그녀의 한마디가 허공을 갈랐다.
“어…?”
옷을 왜 훌렁훌렁 벗고 그래………?
갑자기 리카도르가 겉에 입고 있었던 여름용 제복의 단추를 툭툭끄르는 게 아닌가.
안에까지 물이 스민 건지, 입고 있던 얇고 하얀 셔츠는 이미 쓸모없어진 지 오래였다.
몸에 착 달라붙은 흰 셔츠 사이로 다부진 근육이 비쳤다.
남사스러운 광경에 슈페나는 눈을 가렸다.
앞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쫙 펴진 손가락으로, 슈페나는 흡, 숨을 들이마시곤 부러 그를 등지며 돌아앉았다.
그 투명한 반응에 리카도르의 푸르른 벽안은 별빛을 담아놓은 호수처럼 싱그럽게 반짝였다.
정확히는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처럼 생기 넘치게.
‘뭐야? 왜 그런 표정이야?’
갈팡질팡하던 슈페나의 입매가 어정쩡한 곡선을 그렸다.
그러는 순간, 리카도르도 입매를 말아 올리더니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슈페나의 것보단 훨씬 위험하고도 야살스러운 미소.
어딘가 솜털이 비쭉 설 만큼 오묘한 기류가 오갔다.
리카도르가 웃음기 걷힌 냉한 낯으로 슈페나에게 손을 뻗었다.
슈페나는 피하지 않았다.
‘근데 왜 얘는 좋아한다고 말을 안해? 아까 거울 앞에 두곤 잘만 하더니.’
분명 지금이 딱 좋은 고백 타이밍인 것 같은데 그냥 내가 먼저 얘기할까?
이런 상념에 잠긴 사이, 리카도르는 슈페나의 하늘빛 머리카락을 느른하게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 손길은 떨어지기 싫다는 듯 끈덕덕지고 미적거리는 기색이 있었다.
무언가를 바라는 것이 명백한 시그널.
뽀뽀 정도는 예전에도 해봤으니 괜찮지 않을까.
슈페나가 용기 내어 입을 떼었다.
“뽀뽀… 해도 돼.”
“더한 건 안 돼, 부인?”
그의 입술이 슈페나의 것에 내려앉았다.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126화
‘더한 거?’
리카도르의 입술이 닿는 동시에 슈페나는 멍하니 생각했다.
더한 거.
그저 가벼운 입맞춤인데도 예전에 했던 것보다도 더, 더 길었다.
그녀가 꽉 감긴 리카도르의 눈을 깜박깜박 바라보다 이내 똑같이 속눈썹을 드리웠다.
그 반응에 리카도르는 슈페나의 허리를 단단하게 끌어안으며 기분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살짝 고개를 틀어 다시금 입을 맞추었다.
단지 않은 입맞춤일 뿐이었던 아까와는 다르게 깊이.
‘어?’
작은 손끝이 어설프게 말려 들어 어디에다 두어야 할지 갈 길을 잃어갔다.
벌어진 슈페나의 입술 사이로 흐으, 한숨 같은 작은 탄성이 새었다.
그럴수록 감긴 눈꺼풀 아래에 숨겨진 리카도르의 눈빛은 집요해져만 갔다.
그가 자연스레 슈페나의 뺨을 오른손으로 감쌌다.
따스한 온기가 온몸에 퍼졌다.
‘이상한데…… 좋은 것 같아. 좋은 향이 나.’
밝은 햇살 같기도, 시린 달빛 같기도 한 익숙한 내음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숨이 가빠서인지 호흡이 거칠어졌다.
“코로 숨 쉬어, 슈페나.”
리카도르가 그런 그녀의 등을 커다란 손으로 살살 쓸어내리며 다정하게 말했다.
슈페나는 사냥당한 소동물처럼 가련히 그의 품에 안긴 채, 숨을 몰아쉬었다.
평소보다 많이 긴장하여 도드라진 빗장뼈가 그 숨결을 따라 위로 들렸다가 가라앉았다.
리카도르는 아무 말 없이 자잘하게 슈페나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달래었다.
차츰 그녀도 안정을 찾아갔다.
“하아.”
길게 숨을 내쉰 슈페나가 홀린 듯이 리카도르를 응시했다.
따뜻한 밤색 눈동자에 어딘가 가라앉은 듯한 리카도르가 차오르고 마주친 시선이 몽롱해졌다.
또 한 번 입술이 맞물렸다.
그렇게 숨을 나누고 있던 순간.
서로가 서로를 갈구하는 감정이 더욱 강해지면서 슈페나의 몸이 뒤로 기울어졌다.
리카도르는 능숙하게 그녀의 뒤통수를 한 손으로 받쳐 조심스러운 몸놀림으로 바닥에 눕혔다.
고운 하늘색 머리카락이 잔디밭위에 꽃처럼 어여쁘게 흐드러졌다.
“잠깐만……!”
순식간에 뒤바뀐 자세에 슈페나는 리카도르를 살짝 밀어내며 주저했다.
그가 놀란 토끼 눈을 하고 있는 슈페나를 안심시켰다.
“괜찮아.”
그리 이야기하는 리카도르의 푸른 눈은 이미 맛이 가 있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구미호처럼 야살스럽게 휜 리카도르의 눈매가 슈페나를 옴짝달싹 못 하게 했다.
그녀는 결국 리카도르의 목에 손을 둘렀다.
그러자마자 둘의 입이 겹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리카도르의 목을 더듬던 슈페나의 손이 점차 위로 올라갔다.
서로 감정을 교류하는 시간이 길어져 갈수록 반듯했던 하얀색 머리칼은 엉망으로 헝클어졌다.
제 일인데도 리카도르는 아랑곳하지 않았지만.
‘어?’
그 순간, 그녀가 입고 있던 드레스의 단추가 툭툭 풀리기 시작했다.
슈페나의 몸이 움찔 떨려왔다.
여름이지만 지금은 해가 진 시각이었고 날씨가 꽤나 선선했으니까.
벌어진 옷 틈으로 스미는 공기가 차가웠다.
슈페나가 멋쩍게 한마디 했다.
“..…추워.”
뒤늦게 리카도르의 눈에 슈페나가 들어찼다.
“미안.”
내가 잠시 이성을 잃었었군.
자책한 리카도르가 하던 짓을 멈추곤 그녀에게 담백하게 사과했다.
그러고는 벗어서 한쪽에 곱게 개어두었던 겉옷을 집어 슈페나의 어깨에 꼼꼼히 둘러주었다.
미약하나마 온기가 전해지도록.
리카도르는 돌돌 싸매어진 슈페나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 짓다가 물었다.
“아직도 추워, 부인?”
“아니, 부끄러워……”
슈페나도 그 웃음소리를 들었는지 고개를 푹 숙인 채 빠르게 지금 느끼고 있는 심정을 토로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슈페나와 리카도르의 시선이 허공에 얽히고.
그 둘은 쑥스럽게 마주 웃었다.
리카도르는 그런 슈페나를 지그시 눈에 담아두다가 마른침을 삼켰다.
아직 하고픈 말이 남았으니까.
“잠깐 뒤로 돌아봐, 부인.”
그가 슈페나의 어깨를 부드러이 감싸 쥐곤 돌아앉게 했다.
그리곤 바지 뒷주머니에서 작은 벨벳 케이스를 꺼내 들었다.
“뭐 하려고?”
졸지에 리카도르에게 백허그를 당한 슈페나는 영문도 모른 채 동공지진을 일으켰다.
‘뭐지. 이 자세? 굉장히 음란한데…….’
슈페나는 두 손으로 양어깨를 감싸더니 방어적인 태세를 취하며 움츠러들었다.
그때, 그녀의 목에 차가운 금속이 닿았다.
슈페나가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하얀 꽃이 새겨진 다이아몬드 목걸이.
‘으음?’
생각지 못한 선물에 슈페나의 머릿속에 있던 마구니가 사르르 증발하였다.
“목걸이?”
“예쁠 것 같아서.”
리카도르가 마저 고리를 채워주며 속살거렸다.
고백하는데 그냥 딸랑 말 한마디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칸의 성화로 읽게 된 책에서도 목걸이 같은 선물이 좋을 거라 쓰여 있기도 했고, 리카도르는 착실한 학생이었다.
게다가 특별한 의미가 있는 물건이었으니 딱 알맞을 터.
그가 슈페나를 한 번 더 다정히 안아주며 나직한 음성으로 진심을 고백했다.
“좋아해.”
그 말을 들은 슈페나의 눈망울이 수줍게 일렁였다.
그녀가 배시시, 번지는 미소로 리카도르를 졸랐다.
“다시 한번 말해봐.”
리카도르는 기꺼이 그 청을 받아 들였다.
“좋아해, 슈페나.”
“응.”
슈페나도 크게 고개를 끄덕이곤 리카도르의 손을 맞잡았다.
같은 마음이란 화답이었다.
***
그리고 다음 날.
일리아의 의구심 어린 말투가 슈페나의 정신을 일깨웠다.
“뭐 잘못 먹었어요, 고객님?”
“아뇨. 너무 잘 먹었어서 문제지….”
슈페나는 어제의 기억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미친.’
눈앞에 리카도르가 어른거리는 것만 같은 기분에 그녀가 외마디 비명을 흘렸다.
“으앗!”
그에 일리아가 미친 수인 보듯 그녀를 쳐다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일리아에겐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아직 남아있어서 만나게 된 참이었다.
처리해야 할 연회 일들이 있기도 했고, 특히나 여름 연회가 코앞으로 다가온 터라 바빠진 실정이었다.
슈페나가 서류를 뒤적거리다 일리 아한테 말을 건네었다.
“아무래도 그 토끼가 자백하는 내용들의 신빙성을 확인하기가 힘들어서요.”
그녀가 꺼내든 건, 방정맞은 토끼에 관한 주제였다.
본인 주장으론 흑표범 저택 내에서도 삼엄한 감시를 받다 보니 아는 게 별로 없다고는 했는데…….
‘묘하게 나를 볼 때마다 유심히 관찰하는 눈치인 게, 뭔가 숨기고 있는 것 같단 말이지.’
그게 뭔지 몰라서 추궁해도 별 소득은 없었고, 슈페나가 쩝, 입맛을 다시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궁금한 게, 특히 그 마을 말이에요. 토끼가 얘기하고 나무늘보도 조사했던 마을.”
슈페나의 목소리가 일순간 낮아졌다.
“예전에도 있었던 걸까요?”
여태 떠올린 기억에는 그런 마을에 대해 들은 게 없는데, 의문이었다.
퍽 날카로운 질문.
일리아는 손깍지를 끼곤 흐음, 침음성을 흘렸다.
그러더니 천천히 대답할 적절한 단어를 찾으며 입을 열었다.
“난 지금도 정보상인 척하는 것일 뿐이라서. 대답은 못 해주겠네요, 고객님.”
모른다는 뜻이었다.
슈페나가 아쉽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한편, 일리아는 깍지 끼워진 두 손으로 턱을 괴며 고심했다.
‘나무늘보, 그 머저리도 마을에 관한 정보는 접해본 적이 없다고 했는데.’
일전에 슈페나에게도 말했던 기억과 관련된 권능을 가져 회중시계를 개조한 자.
나무늘보였다.
슈페나도 눈치채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만큼 나무늘보는 신물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과거의 일을 어느 정도는 떠올릴 수 있었다.
그래서 일리아가 나무늘보와 친분을 쌓아 정보상 행세를 해온 것이 아니던가.
‘그 나무늘보는 제일 먼저 세상을 뜬 수인인 터라 아는 게 적어서 도움이 안 된다니까.’
일리아가 속으로 툴툴대었다.
어쨌건 결론은 두 가지였다.
마을이 있었지만 알려지지 않았던 것, 혹은 이번 생에 새로 생겨난 것.
그리고 또 하나 이를 뒷받침해줄 그럴듯한 가설이 있었다.
일리아는 진지한 표정으로 그 가설을 풀어내었다.
“근데 한 가지 짐작 가는 건 있어요. 저번에 고객님이 보여준 책, 그거 보고 생각난 게 있거든요.”
혹시 몰라 일리아에게도 책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역시나 그녀 또한 책의 이상한 언어를 해석할 수 있어 묘한 느낌이 들었었지.
슈페나는 제인을 시켜 리만 운하에서 주운 책을 가져오게 했다.
그리 책이 배달되고.
그 둘은 옹기종기 머리를 맞대곤 책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곧이어 한 페이지에 둘의 눈길이 머물렀다.
“완성된 권능은 다른 힘에 구애받지 않는다?”
슈페나가 글씨를 읽어내렸다.
일리아는 가볍게 손뼉을 치더니 그와 대비되는 무거운 이야기를 입에 담았다.
“만일 시간을 되돌려서 그로 인해 과거의 기억이 사라졌다 한들, 권능을 완성한 이라면 그게 완전히 통하지 않을 거란 의미겠죠.”
“그렇다면..…?”
슈페나의 눈빛이 불안하게 요동쳤다.
“그 흑표범 놈은 어렴풋이 알고 있을지도 몰라요.”
그러나 일리아는 흔들림 하나 없는 꼿꼿한 태도로 결론을 내렸다.
“고객님처럼 기억의 파편이 떠오른 것이든지, 혹은 꿈이나 뭐 다른 방법으로 기억나는 것이든지. 어떤 형태로든.”
슈페나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게 사실이라면 얘기가 더 힘들어지겠네요.”
방 안에는 씁쓸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이윽고, 그 적막을 깨고 일리아가 슈페나에게 말했다.
“더구나 여름 연회에는 그 여자가 참석한다면서요.”
“네?”
“아스터 해링턴.”
짧게 대꾸한 그녀가 슈페나를 슥쳐다보며 말을 더했다.
“아, 고객님은 그 여자에 관한 기억은 없으려나?”
슈페나가 고개를 저었다.
아스터란 이가 자신에게 우호적인 인물이 아니었다는 것쯤은 알았으니.
“아뇨. 대충은 알아요.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이건 너무 직접적인 질문-”
“가련하고 가식으로 점철된 사람?”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일리아의 낯은 창백하게 질렸다.
이제 금제로 인한 고통도 익숙해 지긴 했다만 영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
“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나도 돕겠지만.”
일리아가 마지막으로 경고했다.
분명 그녀가 알고 있는 기억 속마지막에서 아스터는 흑표범 가주에게 조종당하는 모습이었으니.
그리고 시간은 흘러 여름 연회 날이 되었다.
완벽한 한 쌍처럼 차려입은 리카도르가 슈페나에게로 걸어왔다.
“리카도르!”
그녀는 발랄한 어투로 그를 반겼다.
리카도르가 정중한 몸짓으로 슈페나를 에스코트하며 넌지시 속닥였다.
“잘 어울리네, 목걸이.”
슈페나가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기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멋지게 꾸며놓은 연회장과 슈페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가족들, 그리고 옆에 있는 리카도르.
퍽 괜찮은 연회 날이었다.
하나, 슈페나는 밝은 얼굴을 계속 유지할 수 없었다.
“어머, 유학 갔다더니 해링턴 영애는 낯빛이 더 훤해진 것 같은데요?”
“그러게요. 해링턴 가 가주님은 좋으시겠어요. 늦깎이 동생분이 잘 커서.”
거슬리는 사자들의 수군거림이 들려와서.
때마침 화사한 금발과 그와 대비되는 붉은 눈을 가진, 별처럼 반짝이는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스터 해링턴.
슈페나에게 누명을 씌웠던 장본인.
그러한 아스터를 훑어보던 슈페나의 미간이 돌연 일그러졌다.
그녀는 아아, 앓는 듯한 신음을 흘리며 그 자리에 철푸덕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 쥐었다.
불현듯 기억이 떠올랐으니까.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127화
예전처럼 무언가 장면이 머릿속에 스치거나 음성이 들리는 게 아닌, 직접 겪는 것처럼 생생한 감각이 느껴졌다.
지금과는 인테리어가 사뭇 다른 체드 가의 정문 바로 앞.
슈페나는 화난 표정의 여러 수인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자신을 향한 적대적인 감정,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말소리, 피부를 따끔따끔 찌르는 햇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벌벌 떨고 있는 슈페나에게 누군가가 다가왔다.
화사한 금발과 그와 대비되는 붉은 눈을 가진 여인.
아스터 해링턴.
어딘가 죄책감 어린 낯의 그녀는 슈페나에게로 고개를 숙여 귀엣말했다.
-미안해요. 오명을 쓰고 쫓겨나게 해서. 하지만, 하지만 난… 그 사람 말을 듣지 않으면 안 돼요. 미안, 정말 미안해요.
말을 마친 아스터가 저벅저벅 멀어지자마자, 슈페나는 저택 밖으로 내쫓겼다.
그리고 그다음에 벌어진 일은 익히 아는 것이었다.
돌에 맞아 죽는 엔딩.
퍽—
둔탁한 소음이 귓가에 위잉위잉, 위태로운 이명처럼 울려 퍼졌다.
반사적으로 머리를 움켜쥐자 손에 무언가가 묻어나왔다.
피. 뜨겁고 붉은 피.
수인들은 개의치 않고 자신을 향해 돌을 던졌다.
악녀라고, 이곳에 얼씬도 하지 말라고 소리 지르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몸에 난 상처는 늘어만 가고 비릿한 피 냄새가 사방에 자욱해졌다.
아파. 내가 그러지 않았어. 살려줘.
슈페나는 어떻게든 살고자 흙바닥을 손으로 긁어 버둥거리며 느릿하게 중얼거렸다.
입 안에 피가 잔뜩 고인 터라 내뱉어지지는 못했지만, 그렇게 자신은 죽어갔다.
이대로 죽겠구나, 하는 생각이 엄습했을 때.
흐릿한 시야 너머로 목에 걸고 있던 펜던트 속 월장석이 푸르고 요요한 빛을 발했다.
그와 동시에 슈페나는 끔찍했던 기억에서 벗어났다.
‘이게 뭐야…….’
어느새 리카도르에게 안겨있게 된 슈페나의 몸이 잘게 경련을 일으켰다.
아까 주저앉았을 때 그가 특유의 운동신경을 발휘하여 붙잡은 덕분이었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엎어진 것도 아닌데 한기가 들면서 팔뚝이 아릿하게 아팠다.
‘감각이 너무 선명했어. 그저 허상이란 걸 알고 있었는데도…….’
슈페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흐, 후으…….”
“괜찮아. 괜찮아, 부인.”
부인이 왜 이러는지는 몰랐으나 리카도르는 그저 나지막이 속삭이며 등을 토닥였다.
그래, 제 옆엔 리카도르가 있었다.
슈페나가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할 무렵, 다른 이들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이게 무슨……. 어디 아픈 거니, 며늘아가?”
“슈페나!”
“형수님, 괜찮으십니까?”
느닷없이 슈페나가 고통을 호소하는 모습을 보고 놀란 가족들이 한 걸음에 달려온 거였다.
그녀는 리리엘라와 리헨테온, 그리고 칸을 찬찬히 눈에 담았다.
또한 제 곁에는 언제나 서로 믿고 의지하며 지켜줄 가족들이 있었다.
그러니 그 기억과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을 터.
‘나는 괜찮아.’
차츰 떨림이 멎었다.
돌아온 따뜻한 현실에 긴장이 풀린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제야 주변 상황이 인식되었다.
“어머, 작은 마님이 어디 안 좋으신 걸까요?”
“그나저나 소가주님이 작은 마님을 참 지극하게 생각하시는 모양입니다.”
“그러게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작은 마님도 이제 좀 진정되신 듯한데….”
다른 사자들이 걱정 어린 눈길로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기억 속 장면의 사자들이 보인 반응과는 다르게 무척이나 호의적인 태도였다.
하지만 슈페나를 신경 쓰이게 하는 건, 그게 아니었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계속 리카도르한테 안겨있었다고?’
반사적으로 짧은 탄성이 새었다.
“앗!”
슈페나가 화들짝 놀라 움찔거리며 엉거주춤 리카도르의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소심하게 몸을 비틀었다.
그렇다고 놔줄 그가 아니었다.
“가만히 있어. 또 쓰러질라.”
리카도르는 짧게 혀를 차곤 슈페나가 벗어나지 못하게끔 팔로 가느다란 허리를 감았다.
그런 자식 내외의 모습을 못내 흐뭇하게 바라보던 칸이 큼큼, 헛기침을 하더니 힐끗 눈치를 살폈다.
그리곤 슈페나에게 손을 뻗었다.
열이 있나 만져볼 요량으로,
“며늘아가, 몸이 차구나.”
“?”
“아하하, 그런가요?”
그녀가 리카도르의 옆구리를 쿡찔러 눈치를 준 뒤, 대답했다.
아무리 그래도 다른 수인들도 많고 어머님 앞인데 과잉보호는 창피하지 않은가.
칸은 주변에 있던 사용인에게 카리스마 넘치는 말투로 빠르게 조치를 취하도록 명했다.
“당장 의사를 불러오도록!”
더한 과잉보호였다.
“슈페나, 리카도르 말고 나한테 안겨. 내가 더 듬직하고 튼튼해!”
“형수님, 약을 지어올까요?”
리리엘라와 리헨테온은 한술 더 떴다.
‘한 번만 더 비틀거리면 침대에 눕힐 기센데..….’
슈페나가 아연해진 낯으로 모두를 만류했다.
“괘, 괜찮아요. 잠깐 어지러워서 그랬어요.”
어차피 기억을 떠올린 여파로 이러는 거라 뭘 해도 소용없을 텐데.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슈페나는 어쩌다 보니 일리아와도 시선을 마주쳤다.
드물게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한 표정.
‘내가 모두에게 너무 염려를 끼친 건가.’
슈페나는 괜찮다는 뜻으로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아직도 이게 무슨 일이냐며 소곤거리고 있는 다른 사자들을 향해 최대한 의연하게 이야기했다.
“소란스럽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귀빈 여러분. 연회를 마저 진행하도록 하죠.”
어느 정도 진정되었고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칸은 의젓한 슈페나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부드러이 말했다.
“무리할 필요 없단다, 아가.”
“어머님, 저는 정말 괜찮아요. 의사까지 부르진 않으셔도 돼요. 정말로.”
여전히 그녀는 완곡히 화답했다.
가만히 그 대화를 듣던 리카도르가 다정하게 슈페나의 손을 맞잡았다.
“부인.”
“봐봐. 나 멀쩡하잖아.”
그녀는 부러 그와 맞닿은 손을 펄럭펄럭 흔들어 보이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럼에도 안심이 되지 않는지 리카도르는 웃음기 없는 낯이었지만.
그가 슈페나의 어깨에 달랑달랑 매달려있던 숄을 여며주며 다시 한번 당부했다.
“아프지 마. 걱정되니까.”
아까도 슈페나가 돌연 바닥에 주저앉았을 때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그리 아파하는 표정은 처음이었으니까.
‘분명히 부인이 살려달라고 중얼거렸었지.’
슈페나는 정신이 없어서 제가 뱉은 말도 기억하지 못하는 듯 했다만.
기민한 리카도르의 감이 경고했다.
무언가 그가 모르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고, 그리고 표식.
슈페나의 팔뚝에 있는, 자신과 연결된 계약의 증표가 이상했다.
저번에 독수리 영지에서 흑표범의 습격을 받았을 때처럼 표식이 위험을 경고하듯 번쩍거리지 않았는가.
‘이대로라면 슈페나도 곧 알아챌수 있지 않을까.’
바로 근처에 있던 칸만 해도 표식이 발하는 빛을 보고 눈매를 좁혔으니.
슈페나 또한 조금만 여유가 있었다면 바로 눈치챘을 게 분명했다.
리카도르가 깊이 고민하던 사이, 슈페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춤 안 춰, 리카도르?”
다시 연회를 재개하기로 했으니 그 첫 번째 절차였던 춤을 춰야 하지 않겠는가.
“…한 곡 하시겠습니까, 부인?”
리카도르가 한 박자 늦게 답하며 서둘러 그녀를 연회장 한가운데로 이끌었다.
악공들이 기다렸다는 듯 악기를 연주하고, 아름다운 선율을 벗 삼아 슈페나와 리카도르는 마주 인사하여 왈츠의 시작을 알렸다.
그녀가 꿀꺽, 마른침을 삼키곤 리카도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왜 이렇게 부끄럽지.’
일전에 춤 연습을 핑계로 리카도 르와 벌였던 일이 떠오른 탓이었다.
그리 서로의 마음을 고백한 이후로 이리 닿을 때마다 더 뚝딱거리게 되는 느낌이랄까.
‘연애해서 그런 건가.’
하나, 리카도르는 그러한 슈페나와 달리 다른 상념에 잠긴 듯했다.
그가 연신 표식이 있는 슈페나의 팔뚝을 흘낏거렸다.
‘내 팔뚝에 뭐가 있나?’
슈페나가 데굴데굴 눈을 굴리며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게 아까 기억을 떠올렸을 때 팔뚝 부근이 아렸었는데.
기억 속 장면에서 돌에 팔뚝을 맞았었나.
슈페나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너무 실감 나서 무섭긴 했으나, 환영일 뿐이었고 리카도르도 옆에 있으니 괜찮았다.
어느덧 춤곡이 멎고 길었던 왈츠도 막을 내렸다.
이제는 원래 여름 연회 때 슈페나가 펼쳤던 사업 시연회와 관련된 일을 해낼 차례였다.
슈페나는 리카도르와 손 인사를 한 뒤, 사업을 도와주기로 했던 일리아한테 총총총 다가갔다.
일리아가 혹시 몰라 치료 이능을 둘러 슈페나의 머리를 맑게 진정시켜주며 물었다.
“뭘 떠올렸길래 그랬던 거예요, 고객님?”
“내가 죽는 광경을 봤어요. 그 때…… 일리아는 없던데.”
슈페나는 살짝 어두워진 눈으로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그 많던 군중들 속에서도 일리아와 다른 가족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지.
‘나를 구해주지 못한 사정이 있었던 게 아닐까.’
아스터 해링턴이 체드윅 가를 제 집처럼 헤집는 듯했던 것도 그렇고.
그리고 그 짐작은 정답인 것 같았다.
“난 고객님 편이니까. 이번엔 꼭 지켜줄게요.”
그럼 과거엔 그러지 못했다는 뜻일 터.
그래도 꽤나 든든해서인지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슈페나가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일리아를 향해 생기 있게 눈을 빛냈다.
“일단 지금 해야 할 일을 완벽히 해내야겠죠. 도와줘요, 일리아.”
우선은 연회에서 좋은 반응을 끌어내는 게 먼저였다.
이번에는 흑표범에게도 사용했던 영양제를 조금 보완해서 출시하기로 했다.
적당량만 잘 복용하면 몸에 좋은 약제라 쓸모가 많았으니까.
‘겸사겸사 아스터 해링턴도 주시해야겠어.’
일단 연회 참가 소식을 듣자마자 어떤 수인인지 알아보긴 했으나 직접 겪어야만 알 수 있는 점들도 있으니.
한편, 아스터도 슈페나를 바라보며 비슷한 생각을 했다.
정확히는 흑표범 가주에게 받았던 밀명을 떠올렸다.
-슈페나 체드윅, 그리고 리카도르체드. 그 둘을 죽이세요.
‘그러면서 우선적으로 파랑새 쪽을 건드리라고 했지. 그래야 소가주를 없애기도 쉬워질 거라고.’
아스터는 그의 말을 따라야 했다.
머릿속에 희부연 안개에 둘러싸인 듯 혼란스러웠으나 그것만은 명확했다.
‘죄책감이 들긴 하지만 어쩔 수 없어…’
그녀는 이제 막 사자들에게 영양제에 관한 소개를 끝마친 슈페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리곤 예의 사교적인 미소를 입가에 내걸면서 슈페나한테 말을 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작은 마님. 해링턴 가의 아스터라고 합니다.”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128화
‘이렇게 먼저 말을 걸어온다고?’
일리아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영양제 사전 예약 명단을 받아 두던 슈페나는 잔뜩 경계했다.
그 기억 속에서 아스터는 제 죽음에 일조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티를 내지 않고 똑같이 여상스러운 미소로 화답했다.
“슈페나 체드윅이에요, 레이디 아스터.”
“저도 여기 대기 명단에 이름 적으면 될까요?”
아스터가 테이블 위에 있던 만년 필을 들고는 붙임성 있게 대화의 물꼬를 틔웠다.
아스터 해링턴과의 담소는 생각보다도 깔끔했다.
‘생각보다 말끔하고 사교적인 성격인 것 같네.’
분명 권력욕이 어마어마해서 일리 아를 시기하고 자신마저 골로 보내버린 수인이었는데.
불같은 성격일 거라 짐작한 게 틀렸나 봐.
슈페나는 아스터를 주시하며 결론지었다.
“그럼 한잔하실까요?”
어찌어찌 매끄러운 대화가 이어질 무렵, 아스터가 바로 근처 테이블에서 기다란 와인잔에 담긴 위스키를 집어 들었다.
가볍게 놀고먹으며 즐기는 자리이다 보니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그래도 위험인물이 건네는 건데 넙죽넙죽 받아먹을 수는 없는 법.
“전 이걸로, 알코올에 약해서요.”
슈페나는 다른 테이블에 올려진 아이스티를 가리키며 거절했다.
‘넙죽 받아먹었다가 무슨 꼴을 당하려고.’
다행히 추리소설 속 한 장면처럼 아이스티에서 청산가리의 맛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이에게서 발견되었다.
-고객님.
일리아가 왜 나한테 전음을 보내는 거지?
슈페나가 어깨를 으쓱이자 일리아는 마저 이야기했다.
-고객님, 이능으로 저 수인, 발 좀 걸어서 넘어뜨려 보는 건 어때요?
잽싸게 잡아주면서 탈리테 좀 불어 넣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다짜고짜 알 수 없는 말만 하는 게 아닌가.
“그게 무슨 개소리예요.”
슈페나가 하하호호, 웃으며 눈치를 보다 옆에 있던 일리아 쪽으로 고개를 기울여 속닥였다.
일리아도 한껏 소리를 죽인 감미로운 중저음으로 맞받아쳤다.
“나 사슴이거든요? 정체성 좀 지켜주실래요?”
이런 류의 티키타카가 오가다 보니 그 둘은 본의 아니게 티격태격하였다.
그리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어리둥절하게 서 있던 아스터가 본인들의 세계로 빠진 둘의 태도를 에둘러 지적했다.
“두 분끼리 하실 말씀이 있었는데 제가 방해한 걸까요?”
일리아가 낭패라는 듯 슈페나의 옆구리를 푹, 찌르며 속닥거렸다.
“고객님, 그냥 웃어요. 웃어.”
“아하하, 아무런 일도 아니에요.
오히려 저희가 무례했던 건 아닐지 염려되네요, 레이디 아스터.”
그녀는 삐진 아이처럼 일리아를 흘기면서도 사회용 미소를 장착했다.
어찌 되었건, 방금 자신의 행동은 실례가 맞았으니까.
그때, 또다시 일리아의 목소리가 뇌리를 파고들었다.
-그냥 지금 내가 말한 대로 해요!
발을 걸고 잡아주라고?
로맨스 소설에서 성격 더러운 아카데미 초등생 남주도 그런 식으로는 안 굴겠다.
그렇지만 슈페나는 순순히 일리아의 말을 따랐다.
뭔가 이유가 있을 테니까.
대신 그녀가 택한 방식은 보다 도의적인 것이었다.
아직은 아스터도 자신에게 간교한 수작을 걸지 않았으니까.
“어? 여기 뭐가 묻은 것 같은데…”
‘접촉한 뒤 탈리테를 불어넣으라는 게 핵심인 것 같으니까. 그것만 잘하면 되겠지.’ 슈페나가 아스터의 팔에 묻은, 착한 수인 눈에만 보이는 미세 먼지를 떼어주며 슬쩍 탈리테를 흘렸다.
상대방이 착각이라고 느낄 만큼 아주 미세한 양의 탈리테였으니, 눈치채도 잡아떼면 그만이겠지.
그런데 그 순간.
생각보다 더 커다란 반응이 돌아왔다.
“으, 윽……!”
아스터가 돌연 머리를 부여잡곤 괴로운 듯 미간을 구겼다.
‘뭐지?’
슈페나가 그녀를 유심히 살피며 염려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왜 그러세요? 어디 불편한 점이라도……?”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겨우 입꼬리를 끌어올린 아스터가 완곡하게 슈페나의 손을 뿌리쳤다.
사실 지금 그녀는 조금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방금 뭐였지? 불쾌한데 머리가 맑게 갠 느낌이었어…..’
일순간 아스터의 붉은 눈에 혼탁한 검은 빛이 서렸다.
다시금 두통이 일었다.
-슈페나 체드윅, 그리고 리카도르체드. 그 둘을 죽이세요.
찌를 듯이 조여오는 고통 속에서 떠오르는 건, 흑표범 가주가 그녀에게 내렸던 명령뿐이었다.
아스터는 차갑게 비소하며 슈페나를 빤히 응시했다.
‘지금 당장 여기서 저 작은 마님을 죽일 수는 없어.’
보는 이도 너무 많았고, 이런 자리에선 뒤처리도 거의 불가능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스터에겐 목표가 있었다.
누구보다도 높은 위치에 올라 사자들 위에 군림하는 것.
그것 때문에 흑표범 가주에게 고개를 숙인 게 아니었던가.
그러니 슬며시 고개를 드는 죄책감 같은 건 무시하는 편이 옳았다.
아스터의 시선이 슈페나가 한창 공들여 설명하던 영양제로 향했다.
‘저걸 이용해볼까.’
애당초 슈페나가 체드윅 가 안에 있는 이상 흑표범 가주의 명을 완수하기는 힘들었다.
어떻게든 흠을 찾아 쫓겨나게 만들거나, 밖으로 유인하는 수밖에.
무언가 기시감이 들었다.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을 것 같은 이상한 느낌.
한편, 슈페나의 옆에서 얌전히 서 있던 일리아는 맹렬하게 머리를 굴렸다.
그런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에 어딘가 몸이 좋지 않아 보이는 아스터가 있었다.
‘고객님의 탈리테가 효과 있는 모양인데….’
흑표범의 힘과 슈페나가 가졌을 거라 추정되는 권능은 상극인 만큼 일종의 실험을 해본 것이었다.
슈페나는 아직 권능을 제대로 깨우치지 못한 듯하지만, 내재되어있는 본능이란 게 있지 않은가.
“게다가 고객님은 로네악 꽃을 정화한 적도 있으니까.”
일리아의 예상이 맞다면 그때의 일은 슈페나가 무의식중에 권능을 발현한 데에 성공했다는 증표일 터.
그리고 일리아도 아스터가 정확히 언제부터 흑표범의 지배를 받게 된 건진 몰랐으니까.
아무튼 슈페나의 탈리테가 통했다는 건….
‘이미 흑표범 놈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었단 건가.’
좋지 못한 일이었다.
여태껏 나무늘보와 함께 아스터에 관한 조사도 해왔건만, 흑표범과 접촉했다는 증거는 발견하지 못했으므로, 흔적을 꼼꼼히 지운 모양이었다.
‘일단 고객님한테 어떻게 알리느냐가 문제겠네.’
일리아의 고민이 깊어질 무렵, 슈페나 또한 수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저거 딱 책에서 악당이 꿍꿍이를 풍길 때 나오는 눈빛인데?’
잔잔한 미소를 걸친 채, 영양제가 있는 테이블 쪽을 집요하게 응시하는 아스터의 얼굴.
더구나 아스터는 누명 씌우기 전문이 아니던가.
‘목걸이를 없앴으니…… 이번엔 뭘까?’
이런 일은 카누스가 귀신같이 잘예측해서 대비하던데 빨리 오라고 해야겠어.
슈페나의 밤색 눈이 기민하게 요리조리 움직였다.
모두가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 누군가가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사업 시연은 잘 봤어, 부인.”
리카도르였다.
다른 원로 사자들과 예의상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슈페나를 주시해 왔던 그가 자연스레 끼어들었다.
그러곤 주변의 시선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슈페나의 목덜미에 애교스레 제 머리를 부비며 속살거렸다.
“몸도 안 좋은데 무리하는 거 아니지?”
“괜찮다니까.”
슈페나가 밉지 않게 그를 흘겼다.
좀 떨어지지 않겠냐는 시선에도 슈페나에게 치대던 리카도르는 더욱 능청스레 이야기했다.
“이제 그만 돌아가면 안 돼, 부인?”
“왜?”
“여기 재미없어.”
리카도르는 슈페나와 도란도란 얘기하던 이들을 서늘하게 훑으며 짧게 대답했다.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는 수인들이어서, 그도 그럴 만한 게, 하나는 권능을 가진 수상쩍은 사슴에 나머지 저 사자는…….
‘눈빛이 음침해.
슈페나처럼 눈빛이 풍기는 아우라 만으로 수인의 됨됨이를 평가하는 리카도르였다.
정답이라는 게 아이러니했다만.
경계심 어린 눈초리로 그들을 훑어보던 리카도르는 순진무구한 척 무해한 미소를 지었다.
“응? 가자.”
그에 슈페나가 피식, 마주 웃으며 속아 넘어갔다.
‘애교가 더 는 것 같기도 하고.’
고백 이후로 슈페나만 눈에 띄게 부끄러워했지 리카도르는 더 능글맞아졌으니까.
어차피 벌써 저녁이라 연회가 슬슬 마무리될 시점이긴 했다.
그녀는 못 이긴 척 다른 이들을 향해 얘기했다.
“저는 이만 가볼게요.”
결국, 슈페나와 리카도르는 손을 꼭 맞잡고 연회장을 벗어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그 선택을 후회하게 되었다.
***
이제 막 서로 마음을 고백하고 사이가 돈독해지기 시작한 부부.
깊어지는 밤. 그리고 침대.
어떤 생각이 제일 먼저 떠오르겠는가.
실은 그동안은 슈페나가 재빨리 잠자리에 들면서 그렇고 그런 상황을 무마해왔었다.
아니, 솔직히 겁이 나기도 하고 부끄럽잖아.
처음인데.
하나. 오늘은 같이 방에 들어온 터라 그러기 힘들 터.
저도 모르게 머리칼을 배배 꼬던 슈페나는 근엄하게 리카도르의 등을 떠밀었다.
“어서 자거라!”
“부인, 갑자기 말투가…….”
리카도르가 순순히 그녀의 말에 에따르면서도 말끝을 흐렸다.
“가서 자라! 코오, 자라!”
슈페나는 리카도르의 얼굴까지 이 불로 덮어버리고는 침대 시트를 팡팡 두들겼다.
그러고선 자기도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썼다.
한데, 슈페나가 간과한 게 있었다.
침대 위에 이불은 하나밖에 없다.
고로 그 둘은 이불 속에서 마주볼 수밖에 없다는 것.
솜사탕을 씻어 먹는 라쿤처럼 어딘가 2% 부족한 행동을 하고 만 슈페나였다.
‘나 진짜 새대가리인가 봐…….’
남몰래 자책하던 슈페나가 리카도 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로 숨을 죽인 채 아슬아슬하게 누워있는 후덥지근한 이불 속.
시선이 마주쳤다.
‘이게 더 야해!’
안절부절못하던 그녀가 이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는 사이, 리카도르가 반달 모양으로 눈꼬리를 휘더니 아닌 척거리를 좁혔다.
사르륵, 침대보가 뭉개어지는 은근한 소리가 고막을 간질였다.
그는 슈페나의 옆얼굴을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한마디 했다.
“이대로는 못 자겠는데, 부인?”
“뭐, 뭐?”
“우리 부부잖아. 부부가 할 만한짓 좀 하자는 거지. 그럼 잘게.”
리카도르가 제 입술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리며 은근하게 슈페나를 졸랐다.
백사자 주제에 여우 같기는.
슈페나는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됐지?”
그녀가 파랑새답게 새가 쪼듯 가볍게 리카도르의 입술에 제 것을 맞대었다.
리카도르가 그 정도론 안 된다는 듯 슈페나의 얼굴을 감싸 쥐고 고개를 비트는 바람에 더 깊어지고 말았지만.
이불 속에서의 한때가 지난 뒤.
“……하아.”
약간 귓불만 빨개진 리카도르와 달리 슈페나는 대왕 토마토가 된 얼굴로 기다란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고는 이불을 그러쥐더니 뜨끈한 얼굴을 푹 묻어 감추었다.
‘부끄러워!’
그저 조금 길고 깊었던 입맞춤일 뿐인데도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리카도르는 그런 슈페나의 속내를 훤히 들여다본 듯 토닥토닥 등을 쓸어내렸다.
“책 읽어줄까?”
그러더니 매끄럽게 화제를 전환했다.
침대 옆 협탁에 올려져 있던 아름다운 표지의 책을 꺼내 들면서.
“하고 싶다며. 남편 팔베개 베고 책 읽는 게 로망이라고 하지 않았나?”
“내가 언제?”
슈페나가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리카도르에게서 고개를 홱, 돌린 채 반문했다.
‘난 같이 책 읽고 싶다 했지, 팔베개는 말 안 했는데…….’
그녀는 리카도르와 나누었던 대화 내용을 떠올렸다.
서로 마음을 고백하고 난 뒤, 그가 알려준 것이 있었다.
가족들의 등쌀에 떠밀려 여러 연애 서적까지 공부했다지.
‘가만 보면 진짜 엉뚱하다니까.’
슈페나의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올라가는 사이, 리카도르는 예쁘게 눈꼬리를 휘며 말했다.
“그 책에 적힌 거, 차근차근 다 해보자. 부인.”
그 다정한 한마디에 슈페나의 머릿속엔 그가 보여주었던 연애 서적 속 위시리스트가 주르륵, 펼쳐졌다.
같이 장보기, 공원 벤치에 앉아 빨대 하나로 커피 나눠 마시기, 남편머리 묶고 화장시켜주기.
그리고….
‘아휴, 남사스러워……!’
무심코 생각난 마구니에 슈페나는 훠이훠이 손사래를 쳤다.
그 순간, 리카도르가 불쑥 고개를 들이밀며 슈페나를 향해 유순히 눈을 깜박였다.
“뭐부터 할까?”
“같이 장보기? 아, 근데 너무 졸리다. 이제 그만 자자!”
화들짝 놀란 슈페나가 대충 아무거나 말하곤 황급히 램프 불을 껐다.
그러면서 혼신의 힘을 다하여 자는 척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정말 잠들었다는 게 함정이었지만.
리카도르가 그런 그녀를 보며 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러나 그는 쉬이 잠들지 못했다.
정확히는 꿈을 꾸느라 잠들 수가 없었다.
꿈.
그건 슈페나의 어릴 적 모습이 나왔던 저번과는 무척이나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어른이 된 슈페나가 죽어가는 꿈이었으니까.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129화
살려줘.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슈페나가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며 겨우겨우 입만 벙긋거리는 모습.
리카도르의 눈썹이 그녀의 아픔에 공감하듯 간헐적으로 들썩였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아무리 꿈이어도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스러워하고 있는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리카도르는 어떻게든 꿈에서 깨어 나려 애썼다.
하나, 이어지는 꿈의 내용에 그 시도는 자연스레 멎을 수밖에 없었다.
슈페나의 눈이 스르륵 감기자 목에 걸려있던 펜던트 안의 월장석이 요요히 빛을 발하는 장면.
살려줄게.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지켜줄게.
그러니 너도 나와 약속해줘.
그리고.
그와 동시에 들린, 끝이 뭉개어져 알아들을 수 없는 음성.
무언가 이질감을 느낀 순간, 리카도르가 깊은 물 속에서 끌어 올려진 사람처럼 번쩍 눈을 떴다.
그런 그의 푸른 눈에서는 거친 풍랑이 몰아쳤다.
리카도르가 반사적으로 제 목을 더듬더듬 매만지며 쇳소리가 나는 나지막한 저음으로 뇌까렸다.
“…방금 그거, 내 목소리였는데.”
참으로 이상한 꿈이었다.
슈페나를 만나기 이전에도 기이한 꿈들을 꾸긴 했지만, 이번같이 끔찍하진 않았으니까.
그는 이유 모를 답답함에 가슴을 주먹으로 퍽퍽 두들기곤 서둘러 슈페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새액새액, 고른 숨을 내쉬며 누가 납치해가도 모를 만큼 깊이 자고 있는 부인의 모습.
‘개꿈인가…….’
꿈에 나온 당사자는 이렇게 잘 자고 있는데.
그리 위험한 일을 앞으로도 절대 겪지 않게 자신이 보호할 텐데.
리카도르가 제 곁에서 곤히 잠든 그녀를 소중히 눈에 담았다.
그리고는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슈페나의 오른쪽 뺨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괜찮아.”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위로였다.
***
며칠 후,
슈페나는 리카도르와 같이 장을 보러 나가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원래는 말이 나왔을 때 바로 가려고 했는데 일이 생겨서 미룬 거였다.
연회 직후라서 할 일이 많더라고.
대기 명단에 적힌 수인들에게 미리 영양제도 발송해주고, 뒷정리도 하고, 카누스랑 연락도 하고, 참고로 카누스는 금방 도착할 듯 싶었다.
괜찮은 소식을 물어왔으니 기대하라고 그랬었지.
‘아무튼 요 며칠은 생각 외로 계속 평화롭단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