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uebird Lady and The White Lion Family RAW novel - Chapter (2)
백사자가문의 파랑새 마님 2화(2/21)
그녀는 도리질을 하면서 침대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곤 곰곰이 아까의 일을 떠올렸다.
“그나저나 하녀들이 나눴던 대화는 도대체 뭘까?”
-결혼식 날, 첫 춤을 망치면 가주님도 더 이상 파랑새에게 관심 주지 않을걸.
그 마지막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사자들은 신랑과 신부의 왈츠가 완벽해야 결혼생활이 잘 풀릴 거라 여긴다지.
그만큼 결혼식의 첫 춤은 중요했다.
실수라도 한다면 꼬리표처럼 붙어 자신을 괴롭힐 테니까.
을
‘원작처럼 돌에 맞아 죽는 엔딩은 싫다고!’
일단은 결혼식을 무사히 치러야 했다. 그래야 앞으로의 계획에도 차질이 없을 터.
하녀들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알아야 잡아낼 텐데.
‘들키지 않게 해야 한다고 했던가.’
너무 티가 나면 안 될 테니 하녀들이 수작을 부려봤자…..
“드레스에 무슨 짓을 해놓는 정도겠지.”
하지만 확실히 할 필요가 있었다.
정확히 어떤 계략인지 모른다면 범위를 좁히는 것도 괜찮겠지.
옷에 무언가를 해놓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 작정이었다.
‘그렇다면 일단…….’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9화
슈페나는 설렁줄을 당겨 하녀들을 불렀다.
그들은 쭈뼛쭈뼛 모습을 드러냈다.
아까 슈페나를 험담하던 걸 들켜서 그런지 눈조차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는 태도였다.
뭔가 감추고 있는 듯하기도 했고, 그런데 하녀들을 보니 뭔가 깜박한 듯한 기분은 더욱 커졌다.
‘뭐였지? 아냐. 우선 하려던 거부터 하자.’
한 차례 고개를 갸웃거린 슈페나가 방 한구석에 곱게 놓인 하얀색 드레스를 가리키곤 말했다.
“내 드레스 말이야. 결혼식 전까지 너희들이 관리해줄래?”
슈페나는 여상스러운 어투로 말을 더했다.
“그리고 여기 장식이 살짝 흔들거리는데 조금만 수선해줘.”
그 명을 들은 하녀들은 얌전히 고개를 조아렸다.
“알겠습니다, 슈페나 님.”
걸려들었어.
다른 꿍꿍이가 있었더라도 이리 쉬운 길이 생겼으니 제 뜻대로 움직여줄 확률이 높았다.
어차피 어머님이 이것저것 많이사주신 덕분에 여유분의 드레스들도 많았다.
개중 마음에 드는 것들은 하녀들이 손댈 수 없게끔 옮겨놓을 생각이었고, 옷에 난도질을 하든, 티 나지 않게 잘라놓든 상관없었다.
“이제 가봐.”
하녀들을 내보낸 슈페나는 힘없이 침대에 늘어졌다.
‘그나저나 왜 왜 이렇게 졸리지…… ?’
스트레스를 받아서인지 이능을 써서인지, 스멀스멀 피로감이 엄습했다.
인간화가 풀릴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기력을 회복하는 데에 동물 모습으로 있는 편이 더 효과적이지.’
몽실몽실 하얀 구름이 번져가고 푸른 새가 뿅 튀어나왔다.
파랑새가 된 슈페나는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했다.
“삐비이.….”
어머님과의 저녁 식사 시간은 지금으로부터 1시간 뒤.
잠시 쪽잠이라도 자는 게 나을 듯싶었다.
파랑새는 색색 숨소리를 내며 끓아떨어졌다. 저녁에 무슨 일이 벌어질 줄도 모르고.
***
슈페나가 어머님과 늘 단둘이 단란하게 시간을 보내왔던 저녁.
식탁에는 정갈하게 놓인 식기가 하나 더 늘어났다.
그 주인은 분쟁을 해결하고 귀환한 사자들의 어린 후계자, 리카도 르 체드윅이었다.
칸은 리카도르를 향해 넌지시 말을 건네었다.
“내일 온다더니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구나.”
“예. 일이 일찍 끝났습니다.”
리카도르도 절도 있는 어투로 짤막하게 대답했다.
“네 신부를 빨리 보고 싶었던 건 아니고?”
칸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고는 제 아들의 얼굴을 샅샅이 훑었다.
매사에 시큰둥한 아들놈이 함께 딸려 보낸 기사들을 제치고 혼자서 먼저 저택에 오다니.
확실히 며늘아가랑 인연이 있는 건 맞나 보군.
리카도르는 이런 칸의 속내를 모르는 척 비스듬히 눈을 내리깔았다.
촘촘한 속눈썹 너머 감추어진 리카도르의 푸른 눈은 묘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피식, 칸의 잇새에서 웃음이 흘렀다.
이내 그녀는 물로 목을 축이며 화제를 돌렸다.
“늦는군.”
칸은 슈페나에게 제 아들을 소개해줄 계획이었다.
서로 대화는 나눠보고 식장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사실 그렇다기엔 빼도 박도 못하게 결혼 날짜를 엄청 일찍 잡았다.
만,
잠자코 있던 리카도르가 무료한 기색을 감추려 온기 없는 웃음을 걸치고 입을 열었다.
“제가 데려오겠습니다.”
“아니.”
칸은 단호히 거절했다.
“내가 간다.”
말을 마친 칸이 쏜살같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들놈이 벌써부터 며늘아가를 챙기려는 것은 퍽 귀여웠으나, 왜인지 뜻대로 따라주기가 묘하게 싫었으니까.
게다가 장유유서라는 게 있지 않은가.
또 홀로 남겨진 소년은 괜스레 미적지근한 귓불을 매만졌다.
한편, 칸은 슈페나가 있을 방의 문을 정중하게 노크했다.
하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가 예민한 사자의 오감을 발휘했다.
제 며늘아가의 기척이 읽혔다.
‘분명 방 안에 있는 건 맞는데.’
칸이 저도 모르게 걱정스레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문고리를 돌렸다. 곧이어 조심스럽게 슈페나의 방을 둘러보았다.
푹신한 침대 위에서 미동도 없이 뻗어 있는 파랑새가 보였다.
그녀가 심각한 표정으로 미간을 좁혔다.
“죽은 건가.”
쿨쿨 –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파랑새의 잠꼬대가 방 안 가득 울렸다.
칸은 픽, 웃고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니군.”
그녀가 오르락내리락하는 파랑새의 푸른 가슴팍을 조심스레 흔들었다.
“일어나렴, 며늘아가.”
“삐비이….”
슈페나가 뒤척이며 날개로 어머님의 손가락을 툭툭 밀어내었다.
완전히 꿈나라를 헤매고 있는 모양이었다.
칸은 무뚝뚝한 음성으로 학교 가는 딸내미를 깨우는 엄마처럼 타일렀다.
“밥은 먹어야지. 한 숟갈만 뜨자 꾸나.”
엄마, 10분만…….
슈페나는 몸을 뒤척거리더니 아예 반대쪽으로 돌아누웠다.
“별수 없군. 수인은 밥심이다.”
아무래도 며늘아가는 인간화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닌 듯싶었다.
칸이 그녀의 양 날개를 붙잡아 질질 끌어냈다.
정신을 반쯤 놓은 슈페나가 힘없이 끌려가서 어머님의 손바닥 위에 안착했다.
결국, 그녀는 다이닝룸으로 운송되었다.
“솜뭉치……?”
조막만 한 파랑새가 칸의 손바닥위에서 졸고 있는 광경에 리카도르는 언뜻 말끝을 흐렸다.
그러는 사이, 슈페나는 유아용 의자에 착석하게 되었다.
파랑새에게는 이것도 커서 이유 식을 놓는 책상 위로 앉혀졌다.
그녀가 책상에 엉덩이를 붙이고 다리를 뻗은 상태로 축 늘어져 졸았다.
뒤로 고꾸라질 듯하면서도 용케 균형을 유지하는 모습이었다.
잠자코 구경하던 리카도르의 눈동자에는 이채가 돌았다.
“생각보다도 더 작네.”
분명 꿈에서도, 그림으로도 미리 봤었는데.
조금 전에도 그랬던가.
요 며칠 표식이 이상하다 했지만, 정말 그때의 파랑새와 조우하게 될 줄이야.
낮잠이나 자려고 올라간 나무 위에서 익숙한 제 기운을 느꼈을 땐 언뜻 반갑기까지 했었다.
파랑새에게서 알아내고 싶은 게 있었으니까.
그가 넘어갈 듯한 슈페나의 뒤통수를 저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받쳤다.
부드러운 털의 촉감이 나쁘지 않았다. 리카도르의 눈이 일순간 커다래졌다.
그 순간, 파랑새가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흐릿한 슈페나의 시야 속 서서히 초점이 잡혀갔다.
누군가의 찬란한 얼굴이 보였다.
반듯한 은회색 눈썹, 베일 듯이 날렵한 콧날, 햇살 냄새가 날 것처럼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은 뽀얀 피부.
그야말로 천사 같은 생김새였다.
근데 왜 낯이 익지?’
소년의 푸르른 눈동자에 파랑새인 슈페나가 담겨있었다.
그가 그녀와 끝까지 눈을 맞추며 순백색의 머리칼을 무심히 쓸어 넘겼다.
이거, 초상화에서 봤던 남주 얼굴 이랑 완전 똑같은데?
“삐비잇…!”
놀란 슈페나가 퍽 우렁찬 울음소리를 내뱉었다.
“자기소개라도 하라는 건가.”
리카도르는 그 신호를 제멋대로 착각했다. 그리고는 시크하게 이름을 알려주었다.
“리카도르 체드윅.”
진짜 남주라고?
청명한 악기처럼 말간 미성마저 귀에 익었다.
불현듯 깨달았다.
남주가 아까 만났던 그 자해공갈단 또라이라는 걸.
한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뭐야, 내일 온다며?’
어머님이 분명 그렇게 말해서 내일 만반의 준비를 해야겠다고 다 짐했었는데.
슈페나는 연신 리카도르와 칸을 번갈아 응시하며 의아해했다.
그 눈길의 의미를 기민하게 알아챈 칸이 짐짓 친절하게 자초지종을 설명해주었다.
“아, 리카도르가 조금 이르게 도착해서 오늘 자리를 마련했단다.
놀랐니, 며늘아가?”
“삐비이….”
조금요?
파랑새의 꽁지깃이 힘없이 스르르 내려갔다.
사태 파악을 하고 나니, 돌연 걱정이 밀려들었으므로.
웬만하면 엮이지 않겠다는 의지는 초장부터 와장창 금이 간 듯했다.
첫 만남이 제법 강렬했을 것 같은데.
‘지금이라도 데면데면하게 굴면 쇼윈도 부부로 살 수 있으려나.’
슈페나는 슬며시 딴청을 피우고는 모른 척했다.
그러자 리카도르가 무감각하게 잘난 얼굴을 들이밀었다.
“설마 남편 될 수인의 이름도 모르는 겁니까, 부인?”
“삐비비!”
깜짝이야.
슈페나가 흠칫 몸을 떨며 새된 울음소리를 내뱉었다.
그는 그 소리를 어떻게 해석한 건지 악수라도 하자는 듯 손을 내밀었다.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하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랬더니 리카도르가 강아지라도 다루듯 슈페나를 재촉했다.
“손.”
내가 개냐?
에잇, 슈페나는 잘못 알아들은 척 리카도르의 손바닥에 발을 얹었다.
그도 어처구니없는지 자신을 빠히 쳐다보았다.
너무 티가 났나.
아무리 소 닭 보듯 지내고 싶어도 밉보이면 곤란할 터.
슈페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천진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딴청을 피웠다.
새의 부리에선 삐비비, 삐비비, 휘파람 소리가 흘러나왔다.
리카도르는 그런 슈페나를 끈덕지게 주시했다.
얼결에 허공에서 시선이 얽혔다.
그런데…….
‘왜 안 피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떨결에 서로 눈싸움을 계속하던 순간, 그가 퍼석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새들은 인사를 발로 하는 건가.”
음, 그럴 리가.
피식, 어디선가 바람 빠진 듯한 웃음소리가 흘렀다.
어머님이 물이 담긴 와인잔을 휘휘 흔들며 여유롭게 입을 열었다.
“아들, 그냥 네가 마음에 안 드나 본데?”
그 도발을 들은 리카도르의 미간이 슬쩍 좁혀졌다.
슈페나는 어머님의 얘기에 속으로 슬며시 맞장구를 쳤다.
‘솔직히 남주랑 친해지고 싶지는 않지.’
열심히 방목해야 하니까.
그때, 어머님이 우아하게 손을 내밀었다.
“며늘아가, 이리 온.”
대충 서로 인사를 나누었으니 밥을 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며늘아가가 자신의 품에 안겼을 때 보일 아들놈 반응도 궁금했고.
꽤나 짓궂은 칸의 속마음을 모르는 슈페나는 쪼르르 날아가, 펼쳐진 손바닥 위에 안착했다.
칸이 나무열매가 놓인 접시를 가져오고는 몹시도 근엄하게 말했다.
“밥 먹을 시간이다.”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10화
때마침 파랑새의 오동통한 배에서 꼬르륵, 자연스러운 배꼽 알람이 울렸다.
슈페나가 멋쩍게 눈알을 굴렸다.
“삐벳…….”
‘쪽팔려. 근데 배고파.’
슈페나는 칸의 손 위에서 펄쩍, 뛰어내리더니 앞에 놓인 접시를 힐끔힐끔 살폈다.
그리곤 엉거주춤 그 안에 담긴 나무열매를 콕콕 쪼았다.
기다란 병에 담기지 않아서인가, 자꾸 열매가 이리저리 굴러갔다.
‘부리 컨트롤 왜 이래!’
살짝 약이 오른 슈페나가 맹렬한 기세로 옴팡지게 나무열매를 사냥했다.
달큰한 과즙이 부리에 묻었다.
그 모습을 목격한 칸이 작게 잔웃음을 흘리더니 제 아들에게 년지시 속닥였다.
“엄청난 기세군.”
리카도르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느른히 턱을 괴면서 본격적으로 슈페나를 관찰했다.
서늘하고 푸르른 리카도르의 눈동자는 한낮의 호수처럼 잔잔했다.
다만, 각인이라도 하듯 조막만한 파랑새의 모습을 집요히 망막에 새겼을 뿐.
한편, 얼추 다 먹은 슈페나는 볼록 튀어나온 푸른 배를 날개로 통통 두들겼다.
그러다 묘한 낌새를 눈치챘다.
‘뭐지? 이 시선?’
식사에 열중하던 그녀가 슬그머니 리카도르를 올려다보았다.
공들여 빚은 도자기 인형처럼 찬연한 소년의 낯은 여전히 무덤덤했다.
‘달라는 건가?’
선심 쓴다 생각하고 특별히 가장 달콤해 보이는 블루베리를 남주의 손에 물어다 주었다.
“삐!”
“나한테 주는 겁니까?”
이건 벌레 아니다.
슈페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리카도르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열매를 받아들곤 우물우물 씹어 삼켰다.
“어.”
그가 한쪽 눈을 살짝 찡그리곤 중얼대었다.
그러한 불퉁한 말과 달리 리카도르는 블루베리를 남김없이 먹어 치웠다.
리카도르의 표정은 어느덧 선선하게 풀어져 있었다.
볼도 보기 좋게 빵빵해져 있었고, 살짝 비껴 내린 속눈썹 탓에 그의 눈가에는 촘촘하고 기다란 그늘이 졌다.
‘진짜 잘생기긴 했네.’
작중에선 분명 선이 굵은 미남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아직 소년 티를 못 벗어서인지 곱상하게 예쁜 외모였다.
“뚫어질 것 같습니다만.”
화들짝 놀란 슈페나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리카도르는 첫 만남 때와 마찬가지로 담담하게 공갈을 놓았다.
“너무 쳐다봐서 광대뼈가 함몰된 듯한데.”
“삐이?”
슈페나는 부리를 쩍 벌리곤 목소리를 높였다.
‘미래의 보험사기단이 여기 있네!’
그거 조금 봤다고 뼈에 구멍이 나는 미친 경우가 어디 있단 말인가.
“책임져야죠, 부인.”
그가 소름 끼치도록 여상스러운 미성으로 이야기했다.
마치 당연한 걸 요구하듯.
붉은 입매가 매끄러운 곡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그를 따라 새초롬했던 눈매도 어여쁘게 휘었다.
더할 나위 없이 상냥하고 천사같은 미소였다.
“아마 아파서 죽을지도 모르겠네요.”
리카도르는 신뢰감이 드는 말끔한 얼굴로 씨알도 안 먹힐 개논리를 펼쳤다.
분명 평온한 어조였음에도 슈페나에게는 이상하리만치 살벌하게 다가왔다.
‘어머님, 아드님이 저를 홀딱 벗겨 먹으려고 해요…….’
슈페나가 그를 피해 어머님에게 뽀르르 날아갔다.
화려한 어머님의 금발 속에 파묻혀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미처 숨기지 못한 파랑새의 토실 토실한 엉덩이가 씰룩거렸다.
보다 못한 칸이 짤막하게 일갈했다.
“아들, 아무리 마음에 들어도 그만 괴롭히렴.”
궤변이었다.
당연히 리카도르는 헛웃음을 지었고,
“허.”
“삐빗?”
슈페나는 새된 고음으로 반문했다.
그 맹렬한 반응에 칸이 큼큼, 헛기침을 했다.
“마저 먹자꾸나.”
식기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주변을 배회했다.
절도 있는 몸짓으로 스테이크를 썰던 칸이 이제야 떠올랐다는 듯 입을 떼었다.
“참, 내일모레에 있을 결혼식은 야외 정원에서 치를 거란다. 가볍게 즐기는 연회처럼.”
리카도르에게 하는 말이었다.
슈페나는 이미 예전에 들어서 알고 있는 내용이었으니까.
칸은 슈페나와도 슥 눈맞춤을 하며, 일견 믿음직스레 새끼손가락을 내걸었다.
“나중에 둘 다 성인이 되면 성대하게 다시 마련해주마.”
‘어차피 그 시점이면 여주가 등장할 타이밍이라 이혼 얘기가 거론될 텐데.’ 슈페나는 시니컬한 속내를 감추곤 발랄하게 삐삐, 대답했다.
“삐삐삐!”
“….… 알겠습니다.”
이런 슈페나와 달리 리카도르는 앞에 놓인 샐러드를 퍼먹으며 반박자 늦게 긍정했다.
이내, 그가 곧장 우아한 손짓으로 냅킨을 들고는 입 안에 있던 내용물을 깔끔하게 뱉어내었다.
칸의 말에 정신이 팔려서 싫어하는 걸 먹기라도 한 모양새였다.
그러는 사이, 식사가 끝나고.
그릇을 깨끗이 비운 어머님이 와인으로 입가심을 하고는 슈페나에게 물었다.
“식사는 입에 맞았니?”
“벳!”
고개를 주억거리며 씩씩하게 답했다.
그러자 칸이 칭찬하듯 검지로 파랑새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슈페나는 고양이처럼 골골거리는 소리를 내뱉으며 그 손길에 몸을 맡겼다.
한창 정답게 깃털을 골라주던 어머님은 작별을 고했다.
“내일 아침에 보자, 아가.”
이제는 꿈나라로 빠질 시간이었다.
슈페나가 예의 바르게 두 날개를 모아 허리를 접었다.
반면, 리카도르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둘이 남아서 할 이야기라도 있나?’
슈페나는 별생각 없이 다이닝룸을 나서려 했다.
순간, 칸이 그런 리카도르를 또렷이 응시하며 타이르듯 이야기했다.
“이제 가서 잘 시간이란다. 꼬마들.”
꼬마들.
그건 명백히 슈페나와 리카도르, 이 두 사람을 칭하는 말이었다.
리카도르의 눈가가 왈칵 찌푸려졌다.
본인은 일찍 자야 하는 ‘꼬마’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하나, 칸은 아랑곳하지 않고 코웃음을 쳤다.
어미의 눈에는 여전히 어린 아들이 어른인 척하는 게 가소로워서.
물론 후계자로서 맡은 일도 성실히 해내고 있지만, 리카도르는 외양만 보아도 소년이라는 단어가 딱 어울리지 않는가.
“예비 부인에게 에스코트를 할 예의 정도는 가지고 있겠지, 꼬마?”
어머님은 꽤 짓궂게 그를 놀렸다.
장유유서를 따졌던 아까와 다르게 이젠 아들한테 며늘아가를 에스코트할 권한을 넘기면서.
리카도르는 체념한 건지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슈페나에게로 다가왔다.
그렇게 그녀는 리카도르와 나란히 복도를 거닐게 되었다.
슈페나가 힐끔힐끔 곁눈질하며 날개를 파닥거렸다.
차디찬 새벽처럼 정적인 눈빛은 여전히 고요하기만 했다.
그런 그녀의 시선을 느낀 리카도 르의 속눈썹이 나릿하게 한들대었다.
“신기한 능력을 사용하던데.”
그는 특유의 건조한 미성으로 이야기했다.
아까 낮에 있었던 일을 말하는 건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자, 그가 표정변화 없이 말을 이었다.
“새들은 원래 그런 겁니까?”
“삐비비!”
아마 파랑새 고유의 능력일걸?
동족을 만난 적이 없어서 확신할 순 없지만, 슈페나가 적당히 답을 내놓았다.
하지만 그 울음소리를 들은 리카도르는 명료하게 결론을 내렸다.
“뭐라는지 모르겠네요.”
하긴 네가 새소리를 알아들을 리가 없지.
슈페나는 힐끗 리카도르를 곁눈질했다.
‘남주가 어디 가서 내 이능을 함부로 얘기할 성격은 아닐 테고.’
원작에서도 입이 가벼운 자들을 경멸하는 성정 아니었던가.
조금은 안심해도 될 것 같았다.
복도에는 오묘한 정적이 흘렀다.
둘은 아무런 대화도 없이 어색하게 길을 재촉했다.
이윽고, 슈페나의 방이 코앞에 보였다. 리카도르가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며 말을 걸었다.
“이건 깜박 잊어버린 것 같아서…”
그는 담백한 손놀림으로 슈페나의 목에 하늘색 손수건을 둘러주었다.
꼼꼼하게 리본 모양으로 묶어서.
슈페나는 앙증맞게 목에 감겨 있는 손수건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이거 내가 새로 산 물건인데?’
그제야 문득 기억이 떠올랐다.
남주에게서 도망쳤을 때 세탁바구니를 놓고 갔다는 사실을.
‘뭘 잃어버린 것 같더라니, 이거였구나!’
하녀들을 추궁할 증거로 쓰려던 건데, 내일 아침에 제대로 찾아봐야겠지?
더 이상 상념이 이어질 틈도 없이, 리카도르가 슈페나를 향해 말했다.
“고맙다는 말, 안 합니까?”
그가 정중하게 에스코트라도 하듯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달칵, 방문이 열렸다. 리카도르는 비스듬히 문간에 기대어 조용히 속살거렸다.
“몰인정하네, 내 부인은.”
“벳?”
“은혜 갚은 수인 속상하게.”
그는 제 가슴께에 손을 올리곤 무던하게 뇌까렸다.
서운함에 심장이 욱신거리기라도 한다는 듯이 가련한 자태였다.
전혀 슬퍼 보이는 얼굴은 아니었다는 점이 함정이었지만.
‘은혜? 무슨 은혜?’
당최 뭔 말을 하는 건지 알아들을 수 없어 어안이 벙벙해진 슈페나는 리카도르를 올려다보았다.
“그럼 좋은 꿈, 꾸시길.”
그는 샐쭉 눈꼬리를 휘더니 그녀를 방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리고는 매끄럽게 문을 닫았다.
달칵.
꾹 닫힌 문을 바라보던 리카도르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복도에는 저벅저벅, 일정한 박자로 울리는 리카도르의 발소리만이 가득 찼다.
“아.”
그가 갑자기 걸음을 멈춰 제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표식.”
요요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검은색의 문양에선 슈페나의 향이 묻어나왔다.
그때, 저도 다친 주제에 치료해주겠다며 오지랖을 부리던 파랑새를 만난 가을처럼.
사실 그날의 일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중상을 입어 제법 피를 많이 흘렸기에.
한 가지 분명한 건…….
‘그 이후로 원래 있던 문양에 파랑새의 기운이 흐르기 시작했지.’
모르는 사이, 계약이라도 맺었던 걸까.
좀 의뭉스러운 구석은 있었지만, 그것 말곤 이 기운이 흐르는 이유를 설명할 방법이 없었으니까.
리카도르가 손바닥에 새겨진 오팔 모양의 표식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어차피 차차 알아 가면 풀릴 일이었다.
이 문양에 대해서도, 그 꿈에 대저해서도, 저 파랑새에 대해서도.
그러니 당분간은 조금 붙어있어 볼까.
‘빚도 갚을 겸.’
리카도르의 얼굴에는 오묘한 미소가 봄꽃처럼 흐드러졌다.
***
다음 날 아침.
저택은 참으로도 평화로웠다.
평소보다 이른 시각에 눈을 뜬 슈페나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다 마른 채 곱게 개어져 있는 옷가지와 세탁바구니.
“설마 리카도르가 가져다준 건가.”
그 많은 세탁물 중에서 손수건만 꺼내다 준 건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
묘한 기분이 들었다.
본디 안 그럴 것 같던 상대가 선행을 베풀면 더욱 충격적인 법이 아니던가.
‘나를 도와준 걸까? 왜?’
리카도르가 성격은 이상해도 이 타심이 있는 편이었나.
뭐, 나름 지인들에겐 베푸는 성격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이 정도는 그냥 아무 의미 없는 친절일지도 몰랐다.
의아함이 가득 담겼던 슈페나의 낯은 어느덧 스르르 풀어졌다.
‘아무튼 나한텐 좋은 일이니까.’
처음 봤는데 음험한 꿍꿍이를 품었을 리도 없고.
그리 긍정적으로 결론을 내린 순간, 옷들 사이에서 삐쭉 튀어나온 작은 종이가 눈에 띄었다.
“이건 뭐지?”
-이거 들고 오느라 팔이 빠지는 줄 알았습니다.
해석하기도 힘든 악필로 쓰여 있는 짧은 쪽지.
리카도르가 보낸 게 분명했다.
도대체 이건 무슨 뜻일까.
“지금 은혜는 몇 배로 갚으라는 협박 편지인가? 아니면 손해배상청구서?”
차라리 벼룩의 간을 빼먹어라.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나는 못 본 거야.’
그녀는 쪽지를 고이 접어 원래 있던 곳에 살포시 던졌다.
골인이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결혼식 날이 되었다.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11화
치장을 마친 슈페나는 멍하니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 안에는 낯선 여자애가 어색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와아, 예쁘다.’
한쪽으로 곱게 땋아 내린 하늘빛 머리카락 사이에는 군데군데 하얀 생화가 피었다.
슈페나의 밤색 눈동자가 청명한 빛을 발했다.
그녀가 발목을 덮는 길이의 하얀 드레스자락을 붙잡고 한 바퀴 핑그르르 돌았다.
무언가 뿌려져 있는지 조명이 비칠 때마다 치맛단이 반짝거렸다.
그야말로 완벽한 자태였다. 실밥이 뜯어진 부분도, 흠집이 난 곳도 없이.
‘그래서 더 수상하단 말이야’
슈페나는 다시 한번 꼼꼼하게 복장을 살폈다. 문제가 될 만한 구석은 없었다.
혹시 몰라 바닥에 탁탁, 구두굽을 부딪쳐보았다.
‘이것도 멀쩡하네?’
의아함에 얼굴이 한껏 구겨졌다.
‘그 하녀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는데.’
무슨 짓을 하려거든 드레스에 하라고 판까지 깔아줬는데 말이야.
그때, 똑똑 노크소리가 울렸다.
그녀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아무 일도 없던 척 태연하게 말했다.
“들어오세요.”
칸과 리카도르가 문을 열고 걸어왔다. 슈페나는 동그래진 눈으로 그 둘을 반겼다.
‘이 집안은 유전자가 이기적이야.’
지배자답게 포스가 넘쳐흐르는 어머님과 소싯적 덕질하던 종이남친처럼 청량한 미모를 자랑하는 남주.
왠지 모르게 시력이 좋아지는 느낌이었다.
슈다
슈페나는 쪼르르 어머님에게 다가가 아부를 떨었다.
“어머님, 오늘 굉장히 멋있으시네요!”
진심이었다.
어머님은 누가 봐도 반할 만큼 멋진 분이었으니까.
그 칭찬을 들은 칸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의 시선은 꼬까옷을 차려입은 파랑새에게 고정되어있었다.
어머님이 쑥스러운지 괜스레 다른 곳을 바라보면서 입술을 달싹였다.
“… 며늘아가, 너도 썩 괜찮구나.”
이건 예쁘다는 뜻이겠지?
슈페나의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어머님한테 이런 칭찬을 들어보보는 건 처음이라, 어쩐지 마음 한 구석이 간질거렸다.
슈페나는 칸의 소매 끝을 잡고는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감사해요!”
“큼.”
그에 어머님은 헛기침을 하며 슈페나의 시선을 피했다.
“이거, 진짜 꽃입니까?”
그 순간, 약간의 궁금증이 깃든 듯한 청명한 미성이 슈페나의 귓가를 두드렸다.
그 음성의 주인은 리카도르였다.
슈페나는 그가 가리킨 꽃들 중 가장 작은 하나를 조심스레 빼어 들곤 보여주었다.
“…네. 생화인데, 왜요?”
“퍽 잘 어울려서, 꽃이랑.”
리카도르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것도 느닷없이 짧아진 말투로, 슈페나가 작은 기척에도 화들짝놀라는 아기 새처럼 동그랗게 눈을 뜨곤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제 봤을 때보다 미끈하게 다듬어진 얼굴.
구김 없는 하얀 셔츠와 반듯한 정장은 리카도르를 조금 더 어른스럽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이제 막 만개하기 시작한 꽃처럼.
‘꽃이랑 잘 어울리는 건 본인인 것 같은데.’
슈페나는 데구르르 눈알을 굴려 리카도르를 쳐다보지 않은 척, 시 시치미를 떼었다.
그런 그녀를 유심히 내려다보던 리카도르가 돌연 팔을 뻗었다.
그리고는 슈페나의 손에 들린 생화를 가져가 정장 앞주머니에 꽂았다.
으레 결혼식 날, 신랑 정장의 부토니에와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리카도르가 슈페나를 향해 까닥고갯짓했다.
“안 가고 뭐 합니까?”
다시금 존댓말로 돌아왔다.
‘쟤, 뭐지?’
슈페나는 살짝 벌어진 잇새로 작게 탄식하며 멀뚱멀뚱 머뭇대었다.
이 미묘한 둘의 대치 상황을 살피던 칸은 재미있다는 듯 쳐다보았다.
그러다 온유한 말씨로 슈페나를 이끌었다.
“어서 가자꾸나. 며늘아가.”
“…네!”
반 박자 늦게 정신을 차린 슈페나는 어머님과 리카도르를 따라 정원으로 나갔다.
꽃 넝쿨이 얽혀있는 테이블, 갖가지 꽃잎이 깔린 웨딩로드, 바람에 나부끼는 예쁜 장식들.
오색빛깔의 꽃이 만발한 정원의 풍경은 몹시도 사랑스러웠다.
여기서 결혼식이 열린다는 사실을 단박에 알아챌 수 있을 만큼.
‘정말 결혼을 하는구나.’
새삼 그 사실을 깨닫자 손끝이 저절로 말려 들어갔다.
게다가 처음으로 남들에게 자신을 선보이는 자리라서인지 입 안이 바싹 메말랐다.
꽁지깃이 뿅 튀어나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
팔도 갑자기 달달달 떨렸고.
심호흡이라도 하려던 찰나, 리카도르가 말을 걸었다.
“손.”
“예?”
“잡아야죠, 부인.”
뭐지, 이거?
슈페나가 얼떨떨하게 리카도르를 응시했다.
그와 자신은 손을 잡을 만큼 낯간지러운 사이가 아니었으니까.
애초에 만난 지 삼 일밖에 안 되었는걸.
“왜요?”
“그럼 부인이 날 에스코트하시는지.”
그가 앞에 있는 웨딩로드를 향해 까닥, 고갯짓했다.
‘아, 예의상 어쩔 수 없이 한 말이었구나.’
신부가 신랑의 손도 잡지 않고 입장하면 그게 더 이상할 터.
그제야 그녀는 리카도르의 호의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또래들보다 한 뼘은 커다란 듯한 리카도르의 손이 제 손바닥을 덮었다.
어렸을 때부터 검을 잡았다고 했던가.
리카도르의 손마디에는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타인의 온기가 피부를 타고 흘렀다.
덕분에 몸의 떨림도 차츰 멎어들었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아니, 사실 오히려 좋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누군가와 손을 잡는다는 건 생각보다 든든하구나.’
적어도 걷다가 미끄러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한 걸음 한 걸음, 슈페나는 꽃잎이 뿌려진 길을 거닐었다.
굽이 낮고 검은 에나멜 구두가 풀잎과 만나 빠스락거리는 소리를 만들어냈다.
각양각색의 감정이 담긴 눈초리가 쏟아졌다.
슈페나가 꿋꿋하게 어깨를 펴곤 어머님이 서 있는 단상 앞으로 나아갔다.
‘이제 슈페나 체드윅이 되는 건가. 기한부지만.’
칸은 기포가 뽀글뽀글 올라오는 샴페인을 들더니 개회사를 시작했다.
리카도르와 슈페나는 상큼한 오렌지 주스를 집어 들었다.
“오늘은 이 둘의 결합을 하늘에 고하는 기념비적인 날이다. 모쪼록아무 소란 없이 즐겨주길 바란다.”
칸이 샴페인을 높이 치켜들며 엄숙하게 좌중을 훑어보았다.
“만약 작은 잡음이라도 들릴 시, 엄중히 죄를 묻겠다.”
사자들의 군주답게 절제되었지만, 명을 거스르면 큰일 날 것 같은 카리스마가 담긴 한마디.
왁자지껄했던 분위기는 소가주내외를 향한 예우에 맞게 차분해졌다.
칸이 만족스레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표정을 부드럽게 풀며 짐짓 다정하게 슈페나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녀가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속닥였다.
“모두 다 네 발아래에 있다고 생각하렴. 넌 체드윅 가의 사람이 아니더냐.”
두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
‘어머님표 격려인 건가.’
칸은 제 아들의 팔꿈치를 툭툭쳤다.
리카도르는 어머님을 밉지 않게 흘겨보다 괜스레 귓불을 매만졌다.
그리곤 사용인이 건넨 반지를 받아들어 슈페나에게 끼워주었다.
리카도르가 하얗고 가는 슈페나의 손가락에 보기 좋게 얽힌 반지에 시선을 고정했다.
“딱 맞네요.”
슈페나는 제 약지에 걸린 다이아몬드 반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투명한 보석이 영롱하게 반짝였다.
이제 슈페나의 차례였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리카도르의 손가락에 반지를 얽었다.
반지는 리카도르의 손에도 꼭 들어맞았다.
짝짝짝짝~
기계적인 박수가 쏟아졌다.
그와 함께 수인들은 다시 한번 서로 샴페인 잔을 부딪쳤다.
슈페나도 오렌지 주스를 홀짝였다.
‘한 달 동안 배운 사자들의 예법에서 반쯤은 남겨야 한다고 했었지.’
그녀는 보기 좋게 찰랑이는 음료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트레이를 든 갈색머리 하녀가 신속히 다가와 잔을 수거했다.
하필 작당모의를 하던 하녀들 중 하나였다.
‘임시로 배정된 하녀라서 결혼식 일손도 돕나 보네.’
살짝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 어?”
하녀는 반쯤 남은 음료들이 담긴 트레이를 든 채, 갑자기 슈페나 쪽으로 넘어지려 했다.
돌부리에 걸린 것도, 누군가와 부딪힌 것도 아닌 고의적인 움직임이었다.
슈페나는 재빨리 몸을 틀고 티나지 않게 이능력을 사용했다.
덕분에 슈페나한테로 떨어지던 샴페인과 크리스털 잔은 도리어 그 하녀를 향해 기울었다.
“꺄악!”
새된 하녀의 비명이 울렸다.
슈페나는 끈적끈적한 음료를 몸에 뒤덮은 채 고꾸라진 하녀를 차가워진 눈으로 쳐다보았다.
‘처음부터 이럴 계획이었나.’
하녀가 어쩔 줄 모르겠다는 눈치로 입술을 짓씹었다.
그러던 것도 잠시, 서둘러 떨어진 잔해들을 정리하고 깍듯하게 고개를 조아렸다.
“죄, 죄송합니다, 슈페나 님.”
“어? 그래.”
분한 모습을 보일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달리 순순히 사과하는 태도에 슈페나는 머쓱하게 대답했다.
‘…내가 너무 예민했나?’
어쩌면 정말 실수였을지도.
때마침, 이 사태를 수습하려는 건지 다른 하녀가 다급히 뛰어왔다.
그녀 역시 슈페나를 험담했던 하녀들 중 한 명이었다.
“죄송합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슈페나 님.”
그녀가 납작 엎드려 슈페나의 드레스 자락을 정돈했다. 혹여 구두에 음료가 튀었을까 꼼꼼히 살피기도 했고, 정말이지 얼굴이 홧홧해질 만큼 예의 바른 모습이었다.
‘용서를 안 해주면 나만 나쁜 수인이 되겠네.’
슈페나는 싱긋 웃으며 덩달아 무릎을 굽혔다.
“나보단 너희들이 고생이지. 나는 괜찮아.”
“정말 죄송합니다.”
슈페나는 하녀들을 일으켜주기 위해 몸을 낮췄다.
반짝-
‘어?’
그러던 도중, 이상한 걸 발견했다.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12화
한 하녀의 손아귀에서 색모래처럼 고운 빛을 발하는 가루.
‘왜 저런 걸 묻히고 있는 거지?’
슈페나의 표정이 저절로 의아해졌다.
그녀는 뭐에 홀린 듯 팔을 뻗어 하녀의 손가락에 묻은 가루를 만져보려고 했다.
하녀가 재빨리 손을 물리는 바람에 실패했지만,
“그럼 돌아가 보겠습니다!”
당황한 하녀들은 꾸벅 허리를 숙이곤 빠르게 달아났다.
슈페나는 민망해진 손을 갈무리하며 생각했다.
하녀들이 기이하리만치 몸을 사리는 것 같은 게 몹시 찜찜하다고.
‘그나저나 저 하녀들, 세 명이서 뭉쳐 다니던데. 한 명은 어디 있지?’
갑자기 든 궁금증에 슈페나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수선해진 풍경 속, 저 구석에서 찾고 있던 나머지 한 명의 하녀가 웅크리고 있는 게 보였다.
‘뭐 하는 거지?’
무언가가 담긴 바구니를 옮기는 듯한 광경.
수상함에 슈페나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
그때, 리카도르가 청량한 미성으로 말을 걸었다.
“도와달라고 말하면 도와줄 수도 있는데.”
그는 의뭉스러운 눈빛으로 슈페나를 빤히 응시했다.
이제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 것만 같은 시선.
모든 걸 다 꿰뚫고 있는 흑막과도 같은 태도였다.
‘설마…… 저 하녀들 이야기를 하는 건가?’
좀 미심쩍긴 한데, 아직 무슨 일이 벌어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한들, 내 일이니까.’
슈페나는 눈만 깜빡이다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는 서둘러 다른 곳으로 눈길을 던졌다.
‘그나저나 그 하녀는 어디로 간 거지?’
리카도르와 잠시 대화를 나누는 찰나, 하녀는 시야 밖으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 순간.
스스스스, 이상한 소음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뱀?”
꾸불꾸불, 삼 일은 굶은 것처럼 맹렬하게 잔디를 헤집는 작고 검은 뱀.
사자들만 사는 이곳에 뱀이라니.
문득 어머님과 차를 마시다가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경계 지역에서 잡은 뱀이 배가 고프다고 난동을…….
‘혹시 그 뱀인가?’
다른 이들 눈에도 띄었는지 주변이 삽시간에 소란스러워졌다.
당연히 느닷없이 나타난 뱀을 무서워하는 이들은 없었다.
그저 호기심일 뿐이었다.
하객으로 온 사자들이 뱀을 힐끗 거리며 수군댔다.
“갑자기 무슨 뱀이래요? 별식인가?”
“이번에 경계 지역에서 어린 뱀을 발견했다고 들었는데, 그거인가 보군.”
맹렬한 기세로 다가오던 뱀은 이윽고 멈춰 섰다. 그러더니 슈페나를 노려보며 따리를 틀었다.
“캬아악!”
꽤나 날카로운 송곳니에서 투명한 독액이 뿜어져 나왔다.
‘미친, 독사잖아?’
팔뚝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본디 뱀은 새의 천적이 아니던가.
슈페나가 도리질을 하며 제 뺨을 찰싹찰싹 때렸다.
‘정신 차리자! 이능이라도 쓰면 빠져나갈 수….’
킁킁거리며 간을 보던 뱀이 이내 그녀를 향해 아가리를 쩍 벌렸다.
머리가 굳어버린 것만 같았다.
가
본능적인 두려움이 발끝을 타고 엄습했다.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반사적으로 두 눈을 꽉 감고 계우겨우 몸에 이능을 둘렀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위험하다는 생각에 다급하게.
그런데… 왜 손이 미끄덩한 걸까?
‘나 뭐냐…?’
슈페나는 얼떨떨하게 밑을 내려다보았다.
“캬악, 캬오옥!”
슈페나의 손아귀에 꽉 잡힌 채, 버둥대는 작고 검은 뱀.
뱀
어느새 검을 빼 들어 겨눈 리카도르마저 흥미롭다는 듯 그녀를 응시했다.
“재미있네.”
슈페나는 어안이 벙벙해진 표정으로 슬그머니 뱀에게 염력을 걸었다.
‘일단 독부터 못 쓰게 막아야겠어.’
무색의 힘이 작은 뱀의 아가리를 둘러쌌다. 뱀의 입이 꽉 다물렸다.
뱀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의아해하며 눈을 크게 끔벅였다.
슈페나가 무심코 뱀의 얼굴 뒤쪽 여린 살갖을 엄지손가락으로 지그시 눌렀다.
그러자, 이상한 이명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살려줘! 하지 마. 내가 잘할게.
그리고 저 사자한테 검 좀 치워달라고 하면 안 될까?
‘말을 전할 수 있어?’
이건, 어머님처럼 고위급 수인만 할 수 있는 건데?
슈페나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그 음성은 다급하게 계속되었다.
-누나 구두에서 좋은 냄새가 나서 그랬어. 맛만 보려고 했다. 뭐.
그래서 날 잡아먹으려고 달려들었다는 건가.
슈페나의 눈초리가 일순간 사나 워졌다.
그를 기민하게 알아챈 뱀이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불쌍한 척했다.
-미안. 나 아직 인간화도 할 줄 모르는 아가 뱀인데, 죽일 꼬야?
이래 봬도 일곱 짤인데?
천년의 무서움도 짜게 식을 만한 애교였다.
덕분에 천적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마저 사르르 눈 녹듯 사라졌다.
“응, 편하게 보내줄게.”
슈페나는 곱게 눈꼬리를 휘어 웃었다.
– !
-거참, 세상 인심 팍팍하네!
꼬마 뱀은 엉엉 울며 호소했다.
하지만 그녀가 아랑곳하지 않고 주위를 훑어보았다.
‘평범한 뱀은 아닌 것 같아서 내가 함부로 막 처리하긴 그런데…’
그러다 리카도르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무던하게 까딱, 고갯짓을 했다.
그의 눈길이 닿은 곳에는 칸이 있었다.
아, 맞다.
어머님이 있지!
“어머님!”
슈페나가 반색하곤 칸에게로 뛰어갔다. 그녀의 손에 들린 뱀도 덩달아 허공에서 롤러코스터를 탔다.
-야, 골 울려….
그 한마디와 함께 뱀은 힘없이 축 늘어졌다.
“뭐야?”
슈페나는 의아한 기색으로 뱀의 몸통을 쿡쿡 찌르다. 어머님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얘 그냥 기절했는데요?”
“사냥 실력이 제법이구나, 며늘아가.”
호오, 칸은 영문 모를 감정을 내비치며 슈페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건 내가 데려가마.”
“네!”
슈페나의 하얀 볼따구를 슬쩍 손등으로 부비며 칭찬하던 칸은 결국 뱀을 가져갔다.
최고 권력자의 호의적인 반응에 주변에서도 쭈뼛쭈뼛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뱀은 새의 천적 아니었나요?”
“파랑새인데 생각보단 용맹한 편이네요.”
깐깐한 사자들에게서 이런 유한 평가를 받다니 의외의 수확이었다.
슈페나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볼을 긁적였다. 그러곤 작게 혼잣말했다.
“근데 저 뱀은 도대체 뭘까? 그리고…..”
이 일, 설마 작당 모의를 했던 하녀들의 짓이려나?
‘뱀이 분명 구두에서 좋은 냄새가 난다고 했지. 왜 하필 내 구두였을까?’
아까 하녀들이 엎어진 음료를 구실로 드레스와 구두를 살피지 않았던가.
‘분명 그때 색모래 같은 걸 봤었어..’
수작을 걸기엔 충분했을 터.
확실히 수상한데…….
그러나 이런 의심은 더 이상 이 어지지 못했다.
“그딴 거에 정신 팔려있을 겨를, 없을 텐데.”
어느 순간 그녀에게로 다가온 리카도르가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으니까.
“춤춰야죠, 나랑.”
‘맞다.’ 그제야 결혼식의 하이라이트인인첫 춤을 아직 추지 못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아직은 긴장을 풀 타이밍이 아니었다.
‘왈츠는 단기속성으로 배운 거라 잘하지 못할 텐데.’
슈페나는 괜스레 걱정하며 저도 모르게 어물쩍대었다.
기다리던 리카도르가 은근슬쩍 그녀에게 제 손가락을 얽었다.
“손 안 잡습니까?”
“아뇨. 잡아요.”
슈페나는 마른침을 삼키곤 리카도르의 손을 맞잡았다.
단단한 온기가 스며들었다.
어린 남녀가 아장아장 호흡을 맞출 때 나오는 발랄한 무도곡이 연주되었다.
모두의 시선이 슈페나와 리카도 르에게 절로 향했다.
명실공히 이 음악의 주인공들이었으니까.
슈페나가 우선 예법에 맞게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렸다.
그 손짓에선 감출 수 없는 긴장감이 묻어나왔다.
‘이 상황에서 삐끗하면 퍽 우호적이었던 반응도 안 좋아지겠지.’
그렇게 땅바닥을 쳐다보며 걱정하던 슈페나는 이내 고개를 들었다.
보송보송한 솜털마저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 속, 시선이 마주쳤다.
‘……이건, 너무 가까운데?’
슈페나는 파르르 옅게 떨리는 속눈썹을 드리운 채, 리카도르를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이렇게 누군가와 가까이 마주 보고 있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반면 호수처럼 푸르른 리카도르의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제대로 꽉 잡아야 할 텐데요, 부인.”
그는 천연스레 속닥거리며 더욱 거리를 좁혔다.
슈페나도 엉겁결에 리카도르를 따라 스텝을 밟았다.
점차 두 사람이 호흡을 맞춰가고, 지켜보던 다른 수인들도 하나둘씩 정원의 꽃들을 배경 삼아 왈츠를 추었다.
활기찬 사람들의 춤처럼 음악의 분위기도 한층 경쾌해졌다.
‘나 맨날 여기에서 틀렸는데.’
슈페나는 긴장감에 아랫입술을 슬쩍 깨물고는 주의를 기울였다.
빨라진 템포에 마음 같지 않게 저절로 동작이 꼬였다.
그녀가 의도치 않게 리카도르의 발등을 구두로 찍어버렸다.
‘굽이 낮긴 해도 아플 텐데.’
반질반질한 정장 구두에 푹 팬흠을 본 슈페나는 잽싸게 사과했다.
“미, 미안해요.”
그리곤 살며시 눈치를 살폈다.
‘또 뼈가 으스러진 것 같다고 하려나.’
전적이 있는 자해공갈단이라서 뭐라 말할지 내심 걱정되었다.
하나, 돌아온 건 의외의 반응이었다.
그가 지독히도 차분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잠잠히 가라앉은 눈빛은 깊은 바다처럼 물결조차 휘몰아치지 않았다.
그만큼 정적이고도 장난기 없는 표정이었다.
“이 정도론 안 부러질 것 같습니다만.”
“네?”
“더 세게 밟아도 된다고.”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13화
설마 배려받은 건가?
슈페나는 그 후로도 실수로 그의 발을 몇 번 밟게 되었다.
그러나 리카도르는 눈썹 한 번 일그러뜨리지 않고 춤에 집중했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그러던 그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제안했다.
“그냥 내가 부인을 붙들고 있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네에?”
“내가 아니라 그 발목이 부러질 것 같아서.”
리카도르는 대수롭지 않게 시선을 아래로 미끄러뜨렸다.
그 눈길은 높이가 낮음에도 위태위태한 슈페나의 구두 굽에 고정되어있었다.
“조심조심할게요.”
그녀가 멋쩍게 웃으며 정중히 사양했다.
‘불편하단 말이야.’
리카도르에게 온전히 의지하여 춤을 추게 되면 가시방석에 앉은 느낌일 게 뻔했다.
슈페나는 애써 꼿꼿하게 허리를 세운 채, 음악에 맞춰 턴을 돌았다.
하늘하늘한 슈페나의 머리카락이 허공에 나부꼈다.
선율이 어느새 잔잔해졌다.
다행히 1막은 무사히 춤을 마칠수 있었다.
이제 꼬마숙녀와 꼬마신사가 눈인사를 하며 왈츠의 2막을 시작할 차례였다.
슈페나는 배운 대로 한쪽 다리를 교차시키며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늘 실내에서만 춤 연습을 하다.
보니 야외의 울퉁불퉁한 흙바닥에는 적응하지 못한 게 문제였다.
슈페나의 발이 살짝 접질려 옆으로 미끄러졌다.
이대로라면 바보처럼 다리 찢기를 할 형국이었다.
‘망했다….’
어떻게든 중심을 잡으려 버둥거리던 찰나, 리카도르가 슈페나의 팔뚝을 잡아챘다.
다행히 우스운 꼴은 피할 수 있었다.
리카도르에게 매달려있던 그녀가 후우, 숨을 골랐다.
‘덕분에 산 건가.’
그리고는 다시 자세를 가다듬으며 겨우 고마움을 표했다.
“고마워요.”
그러자 리카도르는 정중히 물어왔다.
“좀 닿아도 됩니까?”
“예?”
“아무래도 내 파트너가, 춤에는 영 소질이 없는 듯해서.”
‘이거 대놓고 멕이는 거지?’
그녀는 어정쩡한 눈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슬프게도 반박할 수가 없었다.
이미 한 차례 도움을 받은 데에다 실력도 들통 난 상황이었으니까.
“그럼 실례.”
우물쭈물하는 슈페나의 태도를 긍정이라고 해석했는지, 리카도르가 슬그머니 반듯한 눈썹을 치켜 세웠다.
그러곤 단단히 손을 움켜쥐었다.
“아….”
결국, 슈페나는 리카도르의 리드를 따라 왈츠를 추게 되었다.
아까보다 안정적으로.
‘얘, 왜 이리 힘이 세?’
역시 남주는 떡잎부터 남다른 모양이었다.
수인의 왕 사자, 그중에서도 희귀하다던 백사자가 아닌가.
‘어른이 되면 이거보다 더 완력이 세지려나.’
그녀의 입술이 삐죽 내밀어졌다.
슈페나의 상념이 다른 곳으로 흐르고 있다는 걸 감지한 리카도르가 가늘게 눈매를 찌푸렸다.
“집중을 하나도 안 하네.”
“아, 아니에요.”
슈페나는 수업시간에 딴짓을 하다 걸린 학생처럼 이리저리 눈알을 굴렸다.
그리 묘하게 아옹다옹하는 사이, 춤곡은 끝을 맺었다.
짝짝, 그들을 지켜보던 수인들이 박수갈채를 보냈다.
‘휴, 끝났다.’
이제야 긴장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녀가 단정하게 가슴께에 손을 얹곤 리카도르를 향해 끝인사를 했다.
그러면서 힐끗 그를 곁눈질했다.
‘그래도 무사히 첫 춤은 마쳤네.’
다행히 리카도르가 붙잡아줘서 마무리할 수 있었지.
하마터면 결혼식 왈츠를 망친 신부가 될 뻔했으니, 그야말로 구사일생이었다.
문득 리카도르를 그리 경계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탁바구니를 가져다준 것도, 조금 전의 일도. 결국 그녀에게 유리한 쪽으로 흘러가지 않았던가.
‘하긴 아직은 남주가 나를 싫어할 이유는 없으니까.’
그렇다면… 앞으로의 일은 나에게 달려있다는 뜻, 아닌가?
리카도르와 적당히 모나지 않은 사이처럼 지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원작과는 다르게.
괜스레 먼지도 안 묻은 옷자락을 쓸었다.
생각에 빠진 슈페나의 귓가로 사자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음악이 멈춘 덕에 그들의 대화가 선명하게 전달 되었다.
“오호, 썩 봐줄 만한 춤사위군요.
아까도 꽤나 용감하지 않았나요?”
“그래도 우리 사자를 다스릴 만한 배짱과 능력이 있는지는 잘…….”
“크흠. 저도 그리 생각하지만, 가주님의 뜻이니 일단 두고 봐야지요.”
사자들은 제각기 다른 의견을 내세웠다.
이 정도라면 슈페나에게는 꽤나 나쁘지 않은 성과였다.
원작에선 모두에게 미움받지 않았던가.
‘앞으로 더 인정받으면 되는 거야.’
그렇게 결혼식이 점차 무르익었다.
***
한편, 저 뒤편에 멀찍이 떨어져있던 칸은 무언가를 못마땅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임시방편으로 뱀을 넣어둔 바구니였다.
‘뱀들과의 경계 지역에서 주운, 인간화조차 할 수 없는 새끼랬지.’
적당히 손님방에 가둬두다 뱀 영역으로 돌려보내려 했었다. 뱀들과는 동맹관계였으니까.
독니를 제거했기에 위험하다 생각하지도 않았다.
뱀들의 이능이 재생이었음에도.
인간화 방법조차 모르는 꼬맹이가 이능을 깨우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래서 수하들에게서 상황설명만 들은 뒤,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한데, 하루 만에 이빨이 자랄 줄이야.’
말도 안 되는 재생 속도였다.
이능의 위력이 심상치 않은데, 뛰어난 피를 이은 우두머리 집안의 자식이라도 되는 걸까.
이능은 타나토에 깃든 힘에 따라 그 위력이 달라졌다.
이는 이능을 오래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정신력과는 또 다른 개념이었다.
‘어찌 되었건 답지 않게 너무 안일했군.’
칸이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그러곤 가라앉은 눈빛으로 사색했다.
‘그 하녀들이 무리수를 뒀어.’
양육강식의 세계에서 당당히 가주의 자리를 거머쥔 칸이었다.
그런데 돌아가는 상황을 모를 리가.
칸은 확실히 목격했었다.
하녀들 중 하나가 뱀을 꺼내 풀어놓는 걸.
그러나 도와주러 달려가지는 않았다.
정확히는 못 했다.
뱀의 속도가 빠르기도 했고 칸은 멀찍이 떨어져 있던 터라, 슈페나를 보호해주기가 힘든 상태였으니.
“리카도르가 며늘아가의 옆에 있어서 다행이었지.”
게다가 며늘아가는 모두의 앞에서 기특하게 위기를 이겨내지 않았던가.
결론적으론 잘 해결된 셈이었다.
하지만 그 대견한 상황에서 조금 가슴이 철렁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자칫 잘못하여 쪼매난 파랑새가 뱀한테 물렸다면…….
‘그건 별로군. 놀랐을 테니 뭐라도 먹여야 할 텐데, 며늘아가가 어떤 걸 좋아했더라.’
신기하게도 칸은 제 며느리가 신경이 쓰였다.
그녀 조차도 놀랄 정도로 꽤나 많이.
칸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저 건너편에 있는 슈페나를 바라봤다.
‘하녀들의 처벌은 며늘아가의 의견도 들어봐야겠지.’
하녀들이 슈페나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공과 사는 구분할 줄 안다고 생각했는데.
괜히 혈기왕성한 젊은 사자를 하녀로 붙여준 건가.
칸은 여느 사자들과 달리 자식을 혹독하게 절벽 아래로 떨어뜨려 키우는 편이었다.
그녀는 슈페나가 당당하게 사자들마저 굴복시키길 원했다.
이곳에서 살아가려면 타인 위에 군림하는 법을 배워야 했으니까.
그게 더 도움이 되는 길이라 여겼다.
방금 하녀들이 낸 사달을 보고 나서야 아니라는 걸 깨달았지만.
‘오늘은 정신이 없을 테니, 며늘아가에겐 내일 찾아가서 이야기해 주어야겠군.’
하녀들한테는 일단 더는 허튼짓못 하도록 감시역을 붙이고.
칸은 굳게 다짐했다.
그러는 사이, 리카도르 곁에 있던 슈페나는 칸을 발견하곤 작게 미소 지었다.
어느덧 칸의 입가에도 미약한 호선이 걸쳐졌다.
처음 슈페나를 데려왔을 때 차안에서 느꼈던 감정이 떠올랐다.
어쩐지 저택에서의 일상이 예전보다 더 다채로워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
칸이 본 것처럼 슈페나는 리카도 르의 옆에 서 있었다.
의외의 사건에 조금 피로감이 쌓이긴 했으나 내색할 순 없었다.
명색이 결혼식이니만큼 하객들의 축하 인사는 받아야 했으니까.
역시 소가주의 혼례라 그런지 수인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그 안엔 가지각색의 감정이 공존했다.
슈페나에게 호기심을 지닌 이들, 적개심을 가진 이들, 아무런 관심이 없는 이들.
한 원로 사자가 제일 먼저 말을 건넸다.
“결혼을 감축드립니다. 소가주님.”
리카도르에게만.
‘너무 티 나는 거 아니야?’
아무래도 그는 적개심을 가진 이에 속하는 듯했다.
리카도르가 싸늘히 표정을 굳혔다. 그러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슈페나가 더 빨랐다.
“축하해줘서 고마워요, 경.”
그녀는 뻔뻔하게 받아치는 것을 택했다.
이 정도에 기가 죽을까 보냐?
이래 봬도 독수리 언니오빠들 밑에서 14년간 굴러왔다고!
“에헴.”
민망해진 원로 사자는 괜히 헛기침을 했다. 그러면서 주섬주섬 가져온 무언가를 꺼냈다.
“제가 가진 농장에서 재배한 포도로 갓 빚은 포도주입니다.”
이번에는 슈페나와 리카도르, 모두를 바라보며 하는 말이었다.
슈페나의 뻔뻔함이 성공적으로 먹혀들어 갔다.
선물을 받았으니 답례품을 줘야 할 터.
슈페나는 한쪽 테이블에 미리 준비해둔 물건을 집었다.
안이 들여다보이는 포장지로 싸인 보랏빛 과자였다.
“약소하지만 답례예요.”
원로는 곧장 선물을 받아들지 않았다.
대신 다른 걸 가리키며 짐짓 눈치를 주었다.
“어험, 제 아들이 노란색을 더 좋아해서.”
아.
괜한 투정이었다.
슈페나는 이쯤이야 가뿐하다는 듯 여상스러운 어투로 친절히 말을 받았다.
“아드님보단 본인을 먼저 챙기시는 게 어떨까요? 이 보라색 다과는 눈에 좋은 약초들로 만들어졌답니다.”
“예?”
슈페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원로가 반문했다.
“아, 노안이라도 오신 듯해서요.”
그녀가 싱긋 눈꼬리를 휘며 한마디 더 덧붙였다.
호구같이 멀뚱멀뚱 있다간 원작처럼 당하기만 할 것 같았으니까.
“결혼 축하 인사를 신랑에게만 건네시는 걸 보니 신부가 보이지 않았던 듯한데. 경의 건강이 걱정되어서 그만.”
그녀의 천연덕스러운 임기응변에 리카도르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원로 사자의 얼굴이 금세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원로 사자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떼었다.
“이, 무슨 망발이란-”
“특별히 몇 개 더 드릴게요!”
그녀는 과자꾸러미를 한 아름 안겨주며 발랄하게 등을 떠밀었다.
“많이 드시고 회복하셔서 다음번엔 제가 잘 보이길 바랄게요. 그럼 살펴 가세요.”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14화
얼결에 과자를 왕창 받게 된 원로 사자가 뒤를 흘깃 돌아보았다.
뒤쪽에는 인사를 하러 온 다른 사자 수인들이 한 줄로 서 있었다.
“지금 싸우는 거래요?”
“소란 피우지 말라는 가주님 말씀도 있는데 적당히 하시지, 허허.”
사자들은 귀찮음이 반, 호기심이 반쯤 어린 시선으로 구경하고 있었다.
“크험.”
그에 원로 사자가 멋쩍게 과자를 까먹으며 순순히 물러났다.
이 상황에서 더 화를 내기엔 애매하지 않은가. 답례품도 산처럼 받았고.
‘휴, 다행이네!’
슈페나는 싱긋 웃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무시는 받지 않고 큰 미움도 사지 않을 정도로 대처했고, 그게 통했으니까.
그런 그녀를 보던 리카도르의 벽안에는 이채가 돌았다.
그 뒤로도 진상을 부리는 이들이 몇몇 더 있었으나, 슈페나는 유연한 처세술로 자연스레 내보냈다.
‘이제 마지막인가?’
하객들은 삼삼오오 떠나기 시작했다.
덕분에 정원은 점차 한산해졌다.
뒷정리를 하는 사용인들의 손길만 분주해졌을 뿐.
그 바빠 보이는 이들 틈에 묘하게 수상쩍었던, 문제의 하녀들도 있었다.
분명 하녀들이 세탁 바구니를 놓고 갔을 때 했던 대화로 봐선 어떻게든 결혼식을 훼방 놓을 기세였는데.
‘저들을 한번 떠봐야겠어.’
슈페나는 테이블을 청소하고 있는 하녀를 슬쩍 바라보았다.
조금 전, 정체 모를 검은 뱀.
하녀들과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 아직 확실한 증거가 없으니.
꽤나 소란이 벌어졌던 만큼 어머님도 알아보시겠지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리 다짐한 그녀가 씩씩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왜 따라와요?”
리카도르는 왜 졸졸졸 쫓아온담?
의아한 슈페나의 질문에 그가 느른히 답했다.
“구경.”
구경은 무슨.
그러고 보니 리카도르는 뭔가 아는 게 있는 듯한 눈치였는데.
슈페나가 눈을 가늘게 뜨고 리카도르를 응시했다.
그는 순진한 어린 양과도 같은 눈망울로 무해하게 눈만 깜박였다.
그러곤 안 가냐는 듯 고갯짓을 했다.
결국 슈페나는 리카도르라는 아주 커다란 혹을 단 채, 하녀들에게로 다가갔다.
***
한편, 슈페나의 하녀들은 옹기종기 모여 대화를 나누었다.
정확히는 낭패감 어린 기색으로 푸념을.
“우리 완전 사고 친 거 맞지?”
“나라고 그 뱀이 독사인 줄 알았겠니? 새끼라니까 데려온 건데.”
“괜찮아. 증거 같은 건 진즉에 없했어. 인간화도 못하는 새끼 뱀이 말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들도 이런 상황을 예상했던 건 아니었다.
단지 새의 천적이 뱀이니, 화들짝놀라게 겁만 줘서 결혼식을 방해할 계획이었다.
하녀들 중 가장 양심이 있는 편인 갈색 머리 사자가 입을 열었다.
“사실대로 말하고 사과해야 하는거 아닐까?”
이런 제안을 들은 나머지 하녀들이 학을 떼며 만류했다.
“우리 그러다 진짜 잘려!”
“맞아. 입만 꾹 닫으면 안 들킬거야.”
절레절레 고개를 젓던 하녀들은 누가 들었을까 힐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저 멀리서 하녀들에게로 걸어오고 있는 슈페나와 리카도르를 발견했다.
그들은 소곤소곤 속삭였다.
“설마 우리한테 오는 건 아니겠지?”
“일단 못 본 척 피하자.”
결론을 내린 한 하녀가 눈에 띄게 놀라 하며 말했다.
굉장한 발연기로,
“이런, 별관에 청소업무가 남은 걸 까먹었네?”
“어? 그러게?”
다른 하녀도 또박또박 한 음절씩 끊어지는 듯한 고음으로 맞장구쳤다.
그 둘은 빠르게 하던 일을 멈추고, 도둑질하다 걸린 수인처럼 부리나케 튀었다.
“가, 같이 가. 얘들아!”
남겨진 갈색 머리 하녀가 서둘러 동료를 따라 뛰다시피 걸었다.
마주치자마자 하녀들이 부산스레 어딘가로 향하는 광경.
슈페나는 멍하니 볼을 긁적이다.
저도 모르게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자 하녀들도 은근슬쩍 속도를 더욱 높였다.
‘아니, 쟤네는 왜 도망가? 그리고 난 어쩌다 쟤들을 뒤쫓게 된 거지?’
영문도 모른 채, 서로 쫓고 쫓기는 레이스가 펼쳐졌다.
리카도르는 그 한복판에서 유유히 상황을 관망했고.
그렇게 소리 없는 사투를 벌인지도 5분째.
“잠깐 멈춰!”
결국 슈페나가 헉헉, 벅찬 숨을 몰아쉬면서 소리쳤다.
굽이 낮긴 해도 불편한 구두를 신고 움직이니 다리가 아파 왔다.
이러다 발목을 삐면 어쩌나 불안불안할 정도로.
제법 위태로운 슈페나의 안색에 리카도르가 유유자적 구경하던 걸 그만두고 다가갔다.
그는 슈페나가 넘어지지 않도록 은근슬쩍 곁에 바짝 붙어 서서 곁눈질했다.
그 사실을 모른 채, 슈페나가 하녀들에게 말했다.
“멈추라니까? 내 말 안 들리니?”
그 질책에 덩달아 숨을 고르던 하녀들도 쭈뼛쭈뼛 눈치를 살폈다.
갈색머리 하녀가 제자리에서 멈추더니 당황한 듯 동공 지진을 일으켰다.
“예? 어…… 저희요?”
아무리 그래도 예비 안주인의 말인데 모르는 척할 순 없는 법.
게다가 지금은 옆에 리카도르까지 있지 않나.
슈페나는 입술을 삐쭉 내밀곤 뾰로통하게 물었다.
“지금 왜 날 피하는 거야?”
다른 하녀들도 찔끔찔끔 백스텝을 밟아 돌아왔다.
한 하녀가 대표로 해명했다.
“……저희를 찾고 계신지 몰랐습니다.”
그걸 변명이라고.
속으로 이죽거린 슈페나는 골똘히 생각했다.
분명 찔리는 점이 있어서 이리 달아나려 했을 터.
어찌해야 탈탈 잘 털었다고 소문이 날까 고민이었다.
확실한 건 그 꼬마 뱀을 취조하면 알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일단은 슬쩍 찔러보는 정도로만 끝내야겠어.
슈페나는 천연덕스레 말을 받았다.
“아, 그래? 부탁할 게 있어서 찾은 거였어.”
“하명하세요.”
“아까 그… 뱀 있잖아.”
살짝 뜸을 들인 그녀는 하녀들의 안색을 살폈다. 유독 갈색 머리 하녀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의외로 티가 많이 난단 말이지.’
슈페나는 여상스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 일 때문에 깜짝 놀라서 그런가, 자기 전에 코코아를 먹고 싶어.”
“예, 준비해놓을게요.”
별 대수로울 것 없는 이야기에 하녀는 슬그머니 가슴을 쓸어내렸다.
슈페나가 아랑곳하지 않고 넌지시 뼈가 든 의문을 던졌다.
“근데 그 뱀은 어떻게 된 걸까?
무언가에 홀린 듯이 나한테 달려들었는데.”
슈페나는 날카로운 눈으로 하녀들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그 뱀이 한 얘기가 잊히지 않는 단 말이야.’
구두에서 맛있는 냄새가 난다고 했던 한마디가.
혹시 하녀들이 드레스와 구두를 살필 적에 봤던 색모래 같은 가루와 관련이 있는 건 아닐까?
그 가루가 구두에도 묻었을 게 뻔하니까.
슈페나는 작은 단서 하나라도 건지기 위해 하녀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러던 도중, 어느 하녀의 레이스앞쪽이 불룩 튀어나와 있다는 걸 알아챘다.
‘뭔가 넣어둔 모양인데, 꺼내기 힘든 곳에 보관한 걸 보면 중요한 건가?’
슈페나가 본능적으로 하녀의 옷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 그럼 일이 밀려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 하녀는 거의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깍듯하게 허리를 접었다.
그러더니 발에 바퀴라도 달린 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신체 계열 이능을 가진 사자다운 발놀림이었다.
“하지만 이건 몰랐겠지.”
염력이라는 능력이 무언가를 슬쩍하는 데에 최적화되어 있다는 사실은!
‘오늘따라 이능 발현이 매끄러운걸?’
보통 이때쯤이면 지쳐서 인간화도 간당간당하지 않았나?
슈페나는 속으로 감탄하며 흡족스럽게 갈색 가죽 주머니를 흔들었다.
안에는 자잘한 알갱이가 들어있는지 쏴아아, 쌀알이 부딪히는 듯한 소리가 났다.
뭐에 쓰는 물건이지? 잘 가져온건 맞나?
슈페나가 가죽 주머니를 열어 안에 든 내용물을 뒤적거렸다.
반짝, 다채로운 빛을 발하는 고운 고동색 가루.
하녀들의 손에 묻어있던 것과 딱봐도 유사했다.
“칼립스 나무껍질 가루, 뱀들이 사족을 못 쓰고 좋아하는 겁니다.”
여태 잠자코 슈페나의 옆을 지키고 있던 리카도르가 건조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깜짝이야. 뭔가 알고 있는”
갑작스레 귓가에 스미는 목소리에 슈페나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뭐야.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 리카도르가 지척에 있었다는 걸 이제야 알아챈 슈페나였다.
하녀들에게만 집중하느라, 이렇게까지 가까이 있었는지는 몰랐으니까.
슈페나가 반사적으로 리카도르와 멀어지려 발을 움직였다.
그 순간, 다리에서 돌연 찌르르작은 통증이 올라왔다.
‘아!’
아무래도 하녀들과 의문의 경주를 벌였을 무렵 발목이 결렸던 게 원인인 듯싶었다.
그녀가 털썩 무릎을 굽히곤 특불거진 복사뼈를 두 손으로 감쌌다.
저릿한 둔통이 파도처럼 몸을 덮쳤다.
방금까지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리카도르에 대한 의구심은 일순간 휘발했다.
결국 슈페나는 철푸덕 넘어졌다.
아니, 넘어질 뻔했다.
바로 곁에 있던 리카도르가 타이 밍 좋게 붙잡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결 좋은 하늘색 머리칼이 그의 가슴팍 위로 내려앉았다.
리카도르의 품에 어정쩡하게 안기다시피 한 모양새.
슈페나는 괜히 땅바닥에 시선을 고정하곤 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도리어 발을 접질려, 이번엔 제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야!”
슈페나가 탁탁, 손을 털며 일어나려 애를 썼다.
하나, 다리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그때, 리카도르가 청명한 미성으로 말했다.
“업혀요.”
“음?”
그녀는 고개를 들어 쳐다봤다.
자연스레 호수처럼 짙게 가라앉은 푸른 눈과 마주했다.
리카도르가 흘낏 속눈썹을 드리웠다. 그 시선은 저절로 아래를 향했다.
흐트러진 옷매무새와 발갛게 부어오른 발목.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발견한 리카도르의 미간이 못마땅하게 좁혀졌다.
이내,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린 그가 무심히 제 외투를 슈페나의 허리에 둘러주었다.
‘어? 도와주는 건가.’
그녀가 흘러내릴 듯 어정쩡하게 매어진 외투를 움켜쥐었다.
그는 느른하게 입을 열었다. 제 말을 듣지 않으면 정말로 둘러메기라도 할 기세로,
“안아주길 바라는 거면 상관없고.”
어쩌다 보니 리카도르에게 어부 바를 당해버렸다.
슈페나는 어색하게 리카도르의 어깨 위로 손을 얹었다.
시야가 그의 보폭에 맞춰 살랑살랑 흔들거렸다.
리카도르의 팔에 붙들린 두 다리도 대롱대롱 한들대었다.
어느덧 해가 내려앉은 초저녁이었다. 찌르르, 풀벌레 소리와 함께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이 평화로운 저녁 하늘에는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신비한 마력이 깃들어있었다.
슈페나는 제법 딴딴한 리카도르의 등짝에 저도 모르게 얼굴을 기댔다.
그에게선 첫 만남 때와 미묘하게 다르면서도 익숙한 향이 감돌았다.
‘포근한 햇살 냄새 같아.’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살짝 듬직한 것 같기도 했고.
그러던 중, 발끝에서 달랑거리던 신발이 툭 떨어졌다.
리카도르가 아무렇지 않게 슈페나의 구두를 집어 들었다.
“내 부인은 손이 참 많이 가네.”
읊조리듯 말한 리카도르는 꿋꿋이 가던 길을 재촉했다.
무언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까 함께 춤을 추었을 때 느꼈던 감상과 비슷했다.
‘남주가 처음엔 좀 또라이 같았는 데, 이젠 제법 잘 지낼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
어쩌면 친구처럼.
슈페나가 물끄러미 하늘에 박힌 별을 올려다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친구 정도는 나쁘지 않을지도……?’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15화
불현듯 그런 생각이 스쳤다.
집착 대신 서로 아웅다웅하는 여사친 남사친 관계라면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남주와 엮이지 않겠다는 결심은 무너진 지 오래인 듯했으니.
뭐, 이렇게 받은 도움이 있어서인가, 조금 고맙기도 했고.
생각해보니 남주와 친구가 되면 좋은 점이 더 많을 것 같았다.
친해져서 나쁠 건 없지 않겠는가.
데드플래그를 없애기도 더 쉬울지 몰랐다.
아무렴 남주인데 친구가 죽는 꼴을 두고 보겠어?
‘적당히 방목하다가 여주가 등장할 타이밍에 깔끔하게 이혼해주면 되겠지!’
그녀는 리카도르와 아주 정다운 친구가 되기로 결정했다.
장난스럽게 놀리다가도 막상 진지할 땐 서로의 행복을 빌어주는 그런 친구.
‘운 좋으면 단짝이 될 수도 있겠지?’
슈페나가 어깨 너머로 보이는 차분한 그의 낯을 힐끗거렸다. 그리고는 웅얼대었다.
“저 무겁죠?”
그가 망설임 없이 대꾸했다.
“네, 무척이나.”
한 대 칠까?
업힌 김에 확 초크슬램을 걸어버려?
그녀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 반응에 리카도르는 나지막한 미소를 지었다.
시원하고 길쭉한 눈꼬리가 반달모양으로 살포시 휘었다.
그 웃음의 떨림이 여린 살갗을 타고 슈페나에게도 간지럽게 전해졌다.
‘저렇게 예쁘게도 웃을 수 있구나.
물론 그녀가 본 건 달빛에 반사된 옆모습뿐이었지만, 슈페나의 속눈썹이 크게 일렁였다.
마음속에서 무언가 커다란 결심이 섰다.
“친구 하자, 우리!”
슈페나는 불도저처럼 직진했다.
자못 비장하기까지 한 외침이었다.
하나, 정작 그 말을 들은 리카도르는 아무런 반응조차 하지 않고 묵묵히 걸었다.
‘뭐야. 씹힌 건가.’
나름 용기 내서 한 말인데.
그런 불만이 스멀스멀 피어오를 무렵, 그가 우뚝 멈춰 섰다.
그러곤 얼떨떨한 음성으로 한발늦게 의아함을 표했다.
“뭐?”
“친구, 하자고요!”
슈페나는 자못 명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돌아온 건 딱 자른 거절이었다.
“싫은데요.”
“왜? 아니, 왜요?”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두 눈이 멍하니 끔벅거렸다.
리카도르는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답이 없었다.
오히려 가만히 있으라는 듯 자세를 고쳐 잡아 슈페나를 업더니, 다시 걷기 시작했다.
완벽하게 까인 상황이었다.
‘피폐물 남주라서 그런가, 도도하네.’
쳇, 슈페나는 혀를 찼다.
무안하리만치 단호한 거부에 일순 기분이 상했다.
슈페나가 힐끔 그를 곁눈질했다.
리카도르의 얼굴은 예상치도 못한 기습을 당한 사람처럼 얼얼하게 굳어있었다.
비로소 그녀는 무언가 깨달았다.
는 듯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곰곰이 되짚었다.
‘내가 너무 급발진했나?’
하긴 배려심 없이 밀어붙인 경향이 없잖아 있긴 하지.
놀랐겠다.
슈페나는 시무룩하게 입꼬리를 늘어뜨렸다.
역지사지의 중요성을 알게 된 그녀가 도르륵 눈알을 굴렸다.
‘그럼 살살 꼬셔서 편해진 다음에 다시 얘기해볼까?’
그렇게 다짐하는 사이, 리카도르는 무뚝뚝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도착지는 저택 안, 처음 보는 방이었다.
그의 등에 매달린 그녀가 손가락으로 복도 오른쪽 끝을 가리키며 말했다.
“제 방은 아직 더 가야 하는 데……요.”
“그쪽이 아니라 이쪽.”
그리 못 박은 리카도르가 슬며시 슈페나의 손가락을 쥐고는 방향을 틀었다.
바로 앞에 놓인 방문을 향해서.
그가 천연덕스레 문고리를 잡아 돌리며 덧붙였다.
“신방. 부부는 같은 방을 쓰는 게 원칙이니까요.”
“예?”
신방?
생각지도 못한 현실에 얼빠진 그녀는 어느새 그에게 이끌려 방 안으로 입성했다.
신방의 인테리어는 상상과는 다르게 정말이지 평범했다.
정확히는 슈페나와 리카도르의 나이에 맞게 꾸민 듯 아기자기하고 귀여웠다.
상큼한 연노란색 벽지, 그와 어울리는 아이보리 빛 가구, 군데군데 놓여있는 앙증맞은 동물 모양 장식들.
언제 이런 걸 다 준비한 거지?
슈페나는 절로 감탄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미어캣처럼 주변을 살폈다.
“우와!”
그 천진한 탄성에 리카도르의 입매가 미약하게 실룩거렸다.
칸이 편지로 물어보길래 그도 신방의 인테리어에 안목을 살짝 보됐으니까.
리카도르는 그녀가 자세히 둘러볼 수 있도록 넓은 방 안을 슬그머니 한 바퀴 빙 가로질렀다.
한바탕 방 구경이 끝나고, 그는 슈페나를 푹신한 침대 위로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녀가 자연스레 손바닥으로 이불을 짚었다.
하얀 시트는 슈페나의 흔적을 따라 주름이 졌다.
슈페나는 다친 다리 때문에 어설프게 앉은 자세로 꼬물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리카도르가 침대맡에 있던 서랍장을 열었다.
비상약이 들어있는 구급상자.
그걸 꺼낸 그는 한쪽 무릎을 꿇어 바닥에 앉았다.
약간 가라앉은 듯하지만, 전과 같이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발”
“네?”
이번엔 손이 아니라 발이냐.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자, 리카도 르가 무심하게 물었다.
“치료, 안 합니까?”
그제야 소심하게 발을 내밀었다.
그가 상자 속에서 새 살이 솔솔 날 것 같은 연고를 꺼냈다.
알고 보니 그냥 물파스 같은 거 라나 뭐라나.
미끌미끌하고 시원한 연고의 감촉이 예민한 피부를 식혀주었다.
타인의 손길이 닿자, 육안으로 봐도 제법 부어오른 발목이 시큰거렸다.
“앗..!”
그 아픔에 으으, 앓는 소리가 흘렀다.
리카도르는 아랑곳하지 않고 차분한 손길로 연고를 발랐다.
익숙한 듯 세심한 응급처치에 슈페나는 멍하니 생각했다.
‘사자들의 이능은 신체 강화였지.’
본인의 몸을 한계치까지 강하게 만들 수 있는 능력.
주먹질 한 번으로도 태산을 쪼개고 바다를 가른다고 했던가.
그래서인지 무리하게 사용하면 위험하기도 한 힘이었다.
이능들은 제각기 한계나 부작용이 있기도 했으니까.
슈페나의 이능인 염력에는 그런 제약이 딱히 없는 것 같았다만.
‘아무튼 이런 치료를 많이 해봐서 능숙한 건가.’
의식의 흐름에 따라 그리 짐작하던 순간, 리카도르는 꼼꼼하게 리본 모양으로 붕대를 둘렀다.
깔끔한 마무리였다.
“다 됐습니다.”
“고, 고마워요.”
찌릿찌릿.
미약한 통증은 여전히 느껴졌지만, 한결 편안해졌다.
어쩐지 리카도르에게 제법 많은 신세를 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작에선 이런 호의를 주고받을 일 없는, 미적지근한 사이였다고 한 것 같은데.’
조금 전에는 친구 신청도 단칼에 끊어냈으면서.
알다가도 모를 성격이었다.
뭐, 막상 다친 이를 보면 지나치기 어려운 게 수인 심리였으니까.
다만….
‘조금 미심쩍긴 하단 말이지.’
업혀 왔을 때는 다른 데에 정신이 팔려서 깊이 생각을 안 해봤는 데, 묘하게 걸리는 게 있었다.
뭐든지 꿰뚫고 있는 듯한 리카도 르의 태도.
본디 로판의 남주들은 걸어 다니는 인간 백과사전이 아니던가.
그 때문일지도 몰랐다.
‘문제는 저런 흑막 같은 모습이 나한테 득이 될지 실이 될지 모르겠단 말이야.’
그래도 리카도르가 이렇게 손수 치료까지 해주고 있는 걸 보면, 딱히 나쁠 것 같지는 않았다.
‘뭐,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니까.’
슈페나의 입가에 가느다란 호선이 걸렸다.
그 얼굴을 올려다보던 리카도르의 푸르른 눈동자에는 물결이 일었다.
슈페나는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돌렸다.
자연스레 리카도르와 눈이 마주칠 뻔한 찰나.
문밖에서 정중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소가주님, 분부대로 요깃거리를 내왔습니다.”
사용인들이 트레이에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을 가득 담아 가져왔다.
아무래도 리카도르가 신방을 둘러보기 전부터 미리 간단한 음식을 가져오라 명한 듯했다.
평소처럼 저녁을 들기엔 늦은 시각이었으니.
“그리고 이건 슈페나 님이 말씀하셨다던 코코아입니다.”
하인이 뜨끈한 코코아를 가리키며 말했다. 하녀들이 준비한 모양이었다.
‘이건 안 까먹었네.’
슈페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다 발걸음을 옮겼다.
“잘 먹겠습니다.”
사용인들이 빠져나간 후, 슈페나와 리카도르는 나란히 앉아 고소한 수프를 떠먹었다.
방 안에는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조차 나지 않을 만큼 고요한 적막이 가득했다.
‘이렇게 어색한데 언제 친해지지?’
캄캄한 앞날에 슈페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코코아를 들이켰다.
마침, 잔 밑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 정말 죄송해요.
이름도 없고 필체로 알아보기도 힘든 자그마한 쪽지.
그렇지만 누구일지 짐작은 되었다.
그나마 가장 유순한 편인 갈색머리 하녀가 떠올랐다.
‘뭐야, 이거…….’
슈페나는 괜스레 앞에 놓인 빵을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하녀들의 잘못을 밝혀내겠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아까, 리카도르도 그 가루가 뱀들이 좋아하는 거라고 했지.’
슈페나는 결혼식 때의 해프닝이 하녀들 짓이라고 거의 확신했다.
그러나 마음이 조금 요상해졌다.
그녀가 얼른 쪽지를 접어 옷 주머니에 넣었다.
아무튼 식사 시간은 점점 무르익어갔다.
스푼을 먼저 내려놓은 건 리카도 르였다. 그는 고요한 낯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먼저 씻고 오겠습니다.”
씻어?
슈페나의 눈이 땡그래졌다.
그녀가 들고 있던 포크를 물어 펠리컨처럼 벌어질 뻔한 입 모양을 감추었다.
그러는 사이, 방과 연결되어 있던 욕실 문이 탁 닫혔다.
쏴아아, 희미한 물소리가 넘실거렸다.
슈페나는 퍼렇게 질린 낯으로 코코아를 꿀꺽 원샷했다.
그리곤 종종종 걸어가 소파에 몸을 뉘었다.
커다란 담요를 끌어 올려 눈만 내놓은 채로.
그러기를 벌써 20여 분.
벌컥, 문이 열리고 한층 보송보송해진 리카도르가 돌아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소설 속처럼 낯부끄러운 차림은 아니었다.
멀쩡한 청소년용 동물 잠옷을 입고 있었다고!
안심하던 찰나, 리카도르가 물기 있는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왜 그러고 있는 겁니까?”
그의 물음에 슈페나는 후다닥 달려가 욕실 문을 걸어 잠그고는 얘기했다.
“저도, 씻고 자려고요! 청결은 중요하니까.”
청결이 왜 중요할까…..
슈페나는 딱딱한 욕실 벽에 머리를 박고 중얼거렸다.
갑자기 몸을 움직여서인지 발목이 욱신거렸다. 희부연 수증기가 뭉게뭉게 눈앞을 가렸다.
‘아, 몰라. 신경 쓰지 말자.’
마구 도리질을 하던 그녀가 한숨을 내쉬곤 새로 물을 받아놓은 욕조에 입수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니 그나마 마음이 흐물흐물해졌다. 찌릿했던 발도 괜찮은 듯했고, 자꾸만 눈이 감겼다.
간신히 유지하고 있었던 정신줄이 끊어질 것만 같았다.
‘오늘 이능도 많이 쓰고 다사다난 하긴 했지. 버틴 게 용하다!’
지금껏 꾸준히 해왔던 이능 수련덕분에 실력이 조금 성장한 거 아닐까?
슈페나의 입꼬리가 나른하게 위로 올라갔다.
그녀는 괜스레 욕조에 가득한 하얀 거품을 콕콕 손가락으로 찔렀다.
찰박찰박, 물소리가 울렸다.
“이제 슬슬 나가야겠다.”
슈페나가 몸을 일으키려 상아빛 욕조의 옆면을 붙잡았다.
그와 함께 온몸의 힘이 급격히 빠져나가는 듯한 감각이 찾아왔다.
인간의 형상을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어? 여기서 인간화가 풀리면 안되는데…. 진짜 큰일인데?’
수증기와는 느낌이 사뭇 다른 하얀 구름이 스멀스멀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퐁!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앙증맞은 파랑새가 욕조 안으로 떨어졌다.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16화
“삐비비비빗!”
슈페나는 푸른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발버둥 쳤다.
파랑새의 움직임을 따라 미지근하게 식은 목욕물이 출렁출렁 일렁였다.
‘이 정도 수질이면 백조도 학을 떼고 도망가겠다!’
입욕제 탓에 거품이 몽실몽실한 물이라니, 조류에겐 최악이었다.
애초에 파랑새는 물에서 살아가는 새도 아니지 않은가.
집 안 욕조에서 익사하는 개복치 엔딩은 사절이었다.
한층 필사적으로 날갯짓을 했다.
그럼에도 꼬르륵, 파랑새의 몸은 점차 가라앉기 시작했다.
‘물이 들어가서 코가 매워!’
진짜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엄습했다.
이게 무슨 위기탈주 넘버원이냐!
딸꾹질 좀 했다고 사망, 코 좀 풀었다고 사망, 이제는 욕조에서 씻었다고 사망.
경각심을 느낀 그녀는 삐비이, 울렀다.
겨우겨우 날개 끝에 염력을 둘때마침, 문밖에서 리카도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 있습니까?”
“삐비비비, 삐벳!”
슈페나가 울음소리를 높여 긍정했다.
그런데 그는 알아듣지 못했는지 한 번 더 그녀의 의사를 확인했다.
“들어가도 됩니까, 부인?”
그런 말 할 시간에 그냥 들어와, 제발..….
다행히 욕실 문은 바로 열렸다.
문틈으로 펼쳐진, 자그마한 파랑 새가 어떻게든 살겠다며 노력하고 있는 광경.
“……..”
그를 목격한 리카도르의 표정이 모호하게 일그러졌다.
흡사 여기저기 부수고 돌아다니는 사고뭉치 강아지를 보는 집사처럼.
리카도르는 아무 말 없이 그저 묵묵하게 집게손가락으로 그녀를 들어 올렸다.
조막만 한 파랑새가 쑤욱 그의 손길에 딸려 올라갔다.
물에 빠진 생쥐도 아니고 축 늘어진 솜뭉치 같은 모양새였다.
파랑새는 곧장 부들부들한 실크수건 속에 파묻혔다.
작고 푸른 새가 부르르 몸을 털었다.
그 움직임을 따라 투명한 물방울과 하얀 비눗방울이 퐁퐁 솟아났다.
리카도르는 세심하게 그녀의 푸른 깃털에 묻은 미끄덩한 거품기를 닦아주었다.
살뜰한 케어가 시작된 지도 어느덧 1시간째.
‘아, 조생이 힘들다…….’
슈페나는 오한이 들었는지 엣취, 재채기를 했다.
그 움직임에 물방울이 다시금 퐁퐁퐁 사방으로 튀었다.
새의 머리를 수건으로 부비부비문지르던 그가 차분하게 질문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겁니까?”
“벳!”
알면 다쳐!
다시 생각해도 어이없는 흑역사에 슈페나가 괜한 성질을 내며 부리로 수건을 뺏었다.
그리곤 뽈뽈뽈 욕실 건너편에 있는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마지막은 혼자 수습하는 게 낫겠어. 쪽팔린단 말이야.’
슈페나는 남은 염력을 짜내어 문을 닫곤 다시 인간으로 변했다.
새의 형상으로 꽤나 오래 있어서인지, 인간화가 금방 풀릴 것 같지는 않았다.
‘얼른 마무리하고 잠이나 자자.’
확실히 물기를 말린 그녀가 드레스룸 서랍을 뒤졌다.
옷은 입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찾아낸 건 리카도르의 것과 같은 하얀색 청소년용 동물 잠옷이었다.
“막상 입으니까 나쁘진 않네.”
슈페나는 거울을 보며 제 몰골을 체크했다. 그러다 문득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니까 침대가 하나였어!’
그렇다는 말은……….
“나 왜 다시 인간화했냐?”
후회가 밀물처럼 밀려 들어왔다.
슈페나는 순간의 선택을 후회하며 땅을 쳤다.
그러고는 단념한 듯 초췌한 낯으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것도 잠시.
그녀가 조심조심 드레스룸의 문을 열곤 빼꼼 방 안을 내다보았다.
리카도르는 침대 위에 앉아 단정히 책을 읽고 있었다.
책을
그녀가 쭈굴쭈굴 침대 한 귀퉁이로 올라와 자리를 잡았다.
“뭐 하는 겁니까?”
그러자 리카도르가 그녀를 빤히 응시하며 말을 건넸다.
말.
슈페나는 눈알을 요리조리 굴리면서 시선을 피했다.
“자, 잠을 자려구요.
“그러니까 왜 거기서.”
“같이 자는 건 조금, 그렇지 않나…요?”
그녀가 바람이 부는 나뭇가지처럼 와들와들 떨리는 음성으로 되물었다.
소용은 없었다만.
리카도르는 머릿속에 마구니가 잔뜩 낀 슈페나와 달리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째서?”
“그게……음, 어…….”
뭐라고 말해?
이걸 뭐라고 대답해야 해?
슈페나는 고장 나버렸다.
‘남주랑 친구, 할 수 있는 거 맞겠지……?’
하지만 리카도르는 한 발짝 더 가까이 거리를 좁혔다.
“소, 손은 안 돼!”
그녀가 화들짝 놀라 눈을 깜박였다.
손만 잡고 잘게, 누나 믿지?
쓸데없는 생각만 하다 보니, 그 유명한 단골멘트가 떠오른 탓이었다.
몹시도 투명한 슈페나의 반응에 리카도르는 일순간 가늘게 눈매를 좁혔다.
그리고는 느른하게 팔짱을 끼더니 속삭이듯 얘기했다.
그의 음성엔 숨길 수 없는 웃음기가 담겨있었다.
“설마 부부끼리 손을 잡고 자면 아이가 생긴다는 말, 때문입니까?”
“네, 네?”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인 슈페나가 뒤늦게 의아함을 표했다.
그러나 리카도르는 그를 알아채지 못하곤 입을 열었다.
명백한 호선이 걸린 리카도르의 입가에서 새어 나온 말은 정말이지 상상 이상의 것이었다.
“그러면 손은 안 잡고 자겠습니다.”
응?
재, 진짜 뭐라는 거니.
슈페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가 얼핏 다정히 이야기했다.
“안 잡을 테니 그냥 자라는 뜻입니다, 편한 침대에서.”
리카도르는 그보다 두 살이나 어린 부인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아직도 아이는 황새가 물어다 준다는 류의 낭설을 믿나 보네.’
리카도르에겐 충분히 그 장단에 맞춰 어울려줄 용의가 있었다.
아직은 저 파랑새를 모르겠으니까.
느닷없이 친구가 되자며 말을 걸었던 것도, 지금 이러는 것도.
당최 종잡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의 탓도 있을 거였다.
슈페나에게 붙어 있어야겠다는 처음 다짐처럼 의도적으로 잘해준 것도 없잖아 있었으니까.
‘그저 목숨값만 갚고 적당한 관계로 지내면서 계약에 관한 걸 알아내려 했는데….’
친구고 부인이고, 리카도르는 솔직히 관심 없었다.
놀릴 때 반응이 즉각적이란 점은 조금 재밌긴 했지만, 그다지 슈페나와 가까워지고픈 생각은 들지 않았다.
소중한 사람이 생기면 나중에 괴로워질 뿐이므로, 그렇지만….
‘일단 안심시켜줘야겠지.’
리카도르의 시야 끝에는 안절부 절못하고 있는 슈페나가 담겨있었다.
그가 기다란 기린 인형을 가져와 침대 중앙에 올려놓았다.
꼬꼬마 시절, 짝꿍과 티격태격 서로의 영역을 정해놓듯이.
슈페나는 떡 벌어진 입을 억지로 닫았다.
그러면서 소리 없이 경악했다.
‘와. 미친, 이거 금 그은 거야?’
아무래도 남주의 상태가 이상했다.
그것도 원작 속 묘사와 묘하게 다른 방향으로,
‘야, 섹시한 미친놈 남주라며. 갑자기 저딴 아카데미 초등부 선생님 같은 건전한 말이 왜 나와!’
그녀는 땅이 꺼질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서로에 대한 사소한 오해가 적립되는 순간이었다.
그때, 침대 위 영역정리를 끝낸 리카도르가 나른함이 묻어나오는 말씨로 조곤조곤 말했다.
“그럼 불 좀 끄겠습니다.”
어느새 슈페나는 리카도르에 의해 얌전히 베개 위로 눕혀진 상태였다.
달칵 램프가 꺼지는 소리와 함께, 방이 바깥 풍경을 따라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슈페나가 보드라운 이불을 한껏 끌어안지도 못한 채, 슬금슬금 뒤 척였다.
가운데 선까지 생긴 마당인데 이불은 하나가 아니던가.
‘여러모로 불편한 잠자리야.’
또한 괜히 긴장을 놓았다가 그 기린 인형을 건드릴까 봐 걱정이었다.
그러던 중, 슈페나가 불현듯 리카도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속눈썹을 촘촘히 드리운 눈가, 얕은 숨이 새어나가는 듯 살짝 벌어진 선홍빛 입술, 흐트러진 하얀색 머리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