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uebird Lady and The White Lion Family RAW novel - Chapter (20)
백사자가문의 파랑새 마님 20화(20/21)
“아까 보니까 뱀도 잡아먹을 것 같던데 왜 사자는 못 먹나 싶어서.
이거라도 드시고 힘내시라고.”
너는 시방 한 마리의 위험한 사슴이여.
파랑새의 낯이 파랗게 질렸다.
일리아는 그러한 슈페나를 모른 척하곤 카누스를 향해 눈짓했다.
“우리는 가서 즐거운 독서 생활이나 즐기자, 카누스.”
– 녜!
망할 불청객들은 천진난만하게 사라졌다.
결국, 슈페나와 리카도르만이 남게 되었다.
리카도르가 그녀에게 말을 건네었다.
“시간도 늦었는데 안 졸려, 부인?”
그 한마디에 슈페나의 머릿속에는 방금 들은 일리아의 말이 돌림노래처럼 맴돌았다.
-남녀가 애틋하면 함께 밤을 보내기 마련이거든요.
정신 차려, 이 쓰레기야!
슈페나는 날개로 제 뺨을 찰싹 내리쳤다.
엉뚱하기 그지없는 그녀의 모습에 리카도르는 귀엽다는 듯 피식, 웃었다.
콩깍지가 단단히 쓰인 모양이었다.
그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슈페나를 들어 올려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그만 자러 가자.”
목적지는 부부침실이었다.
슈페나는 옴짝달싹도 못 하고 침실로 이송되어 도로 인간화까지 마쳤다.
잘 때까지 새의 형상으로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재워줄게.”
리카도르가 잠옷까지 야무지게 갖춰 입은 슈페나한테 이불을 덮어주며 속살거렸다.
그러는 그의 손에는 서류 뭉치가들려있었다.
여태 슈페나를 도와 권능을 수련하느라 다른 문서 처리 업무가 남은 참이었다.
그걸 힐끗거리던 그녀가 슬그머니 리카도르를 올려다보았다.
“…여기서 안 잘 거야, 리카도르?”
“너 자는 거 보고, 이것들 좀 더 검토하다가 잘게.”
리카도르는 햇살이 담겨 화사하게 부서지는 바다처럼 따스한 눈빛으로 슈페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리고는 다정히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애정이 듬뿍 묻어나오는 리카도르의 손길에 슈페나는 일리아와의 대화를 곱씹으며 생각했다.
‘좋긴 한데…… 내 남편은 너무 건 전해.’
아쉬움에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리카도 르가 했던 고민이었다.
물론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폭풍전야 같은 고요함이 깃든 상황인 만큼 이해는 되었다.
뭐, 따지자면 아직 흑표범 측도 눈에 띄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아서 퍽 평화로운 실정이긴 했다만.
어쨌건 아무런 걱정 없이 꽁냥대는 게 더 멍청한 짓일 터.
그렇지만….
얘는 나를 얼마나 좋아할까?
좋아하면 시도 때도 없이 닿고 싶어 하는 게 보편적이지 않다.
이런 의문이 조금씩 피어나긴 했다.
리카도르와의 추억이 담긴 기억을 떠올려서인지 무언가 조바심이라도 든 걸까.
솔직히 리카도르에게 마음을 더 확인받고 싶었다.
사실 슈페나도 알고 있었다.
부끄럼을 많이 탔던 자신을 배려 해 리카도르가 그간 보폭을 맞춰주었단 걸.
그만큼 리카도르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걸.
‘그러니까 이젠 내가 먼저 좀 더 속도를 높여도 괜찮지 않을까.’
슈페나는 리카도르의 옷자락을 은근하게 잡아끌었다.
“…키스해줘. 그럼 잘게.”
평소와 달리 묘하게 적극적인 슈페나의 태도.
오늘따라 당돌해 보이는 슈페나의 밤색 눈동자를 홀린 듯이 응시하던 리카도르가 짧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하.”
이후에 그 둘의 입술이 포개어진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살과 살이 적나라하게 맞닿는 소리와 함께 서로의 코끝이 스쳤다.
익숙한 체향이 폐부 깊숙이 파고들었다.
하아, 다 내뱉어지지 못한 가냘픈호흡이 슈페나의 입술 사이로 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에게 머물러 있었던 리카도르의 입술이 잠시 떼어졌다.
슈페나는 감겨있던 눈을 살짝 떠리카도르를 바라보며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멈추지 말라는 신호였다.
“그, 렇게 조르는 건 어디서 배웠어, 부인?”
리카도르가 위험하리만치 낮은 저음으로 슈페나의 귓가에 속닥이며 숨을 헐떡였다.
그리곤 다시금 입을 맞추었다.
그 야심한 밤은 서로의 숨결을 겹쳐놓고, 깊어져만 갔다.
“잘 자, 부인.”
리카도르가 발갛게 달아오른 슈페나의 볼을 손등으로 나긋하게 쓸며 중얼거렸다.
“으응.”
내가 아주 훌륭하게 미쳤었구나.
뒤늦게 불어닥친 부끄러움에 그녀눈을 질끈 감았다.
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곤 그에 리카도르는 못 참겠다는 듯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리며 서류뭉치를 챙겨 방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그날 밤.
리카도르는 꿈을 꾸었다.
어린 시절의 슈페나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다 커버린 슈페나가 죽어가는 것도 아닌, 제법 신비한 꿈을.
그 꿈에 특이하게 자신도 함께였다.
그 꿈속의 슈페나와 리카도르는 어쩔 땐 앳된 외양이다가도 또 어느 때엔 다 자란 어른의 얼굴이었다.
같이 나이라도 먹어가는 것처럼.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길래 너와 나는 그리 환하게 웃고 있는 걸까.
리카도르는 되게 안온하고 행복해 보이는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생각했다.
왜인지 그리운 느낌이 들어…….
꿈에서 깬 리카도르의 푸른 눈망울에는 투명한 눈물이 고여있었다.
***
한편, 흑표범 영지 안.
흑표범 가주는 이어지는 토끼의 예언을 듣고 있었다.
“그게, 그러니까….”
토끼는 흑표범 가주의 눈치를 보며 말을 더듬었다.
레놀드는 답답하다는 듯 손으로 허리를 짚더니 사납게 토끼가 했던 말을 되물었다.
“그래서 그대 말의 핵심은 뭡니까? 그 파랑새의 심장이 내 대업에 필요하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습니다.”
말을 잇는 레놀드의 음성이 일견날카로워졌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 파랑새가 독수리 가문에서 자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아냐고 묻는 거지? 그게 내 대업과 무슨 연관이라도 있는 겁니까?”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153화
토끼는 흑표범 가주의 눈치를 살피며 천천히 예언의 내용을 더듬었다.
파랑새는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을 거란, 다소 모호한 메시지였지.
토끼는 애써 그런 예언에서 그럴듯한 진의를 추론했다.
“내려온 예언의 내용으로 추려봤을 때 아마 그 파랑새는 신수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뭐?”
뜻밖의 이야기에 레놀드의 말이 짧아졌다.
그러자 토끼가 힐끗 레놀드를 올려다보며 불안하게 입술을 짓씹었다.
아무래도 성질 더러운 흑표범이다.
보니 무서워진 탓이었다.
우물쭈물하던 토끼가 결심했다는 듯 도리어 빠르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독수리 영지 가까이에는 신의 땅이 있죠. 신의 땅엔 신수가 잠들어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요.”
“그래서요?”
레놀드의 눈가가 의뭉스럽게 일그러졌다.
토끼는 괜스레 손을 비비적거리며 작게 덧붙였다.
“더구나 파랑새는 고서에서 꿈과 희망을 상징하는 동물이라 했으니 어느 정도 그럴듯하지 않겠습니까…요.”
토끼가 고서의 내용을 거론했다.
솔직히 잘 알려진 내용은 아니었다.
예언을 해석하느라 각종 고서에 빠삭한 토끼들이나 몇몇 알고 있는 것들이었지.
“…근거가 그게 다인 겁니까?”
유심히 토끼의 말을 듣던 레놀드가 일견 비스듬히 눈썹을 들어 올렸다.
어떻게 그 예언이 이리 연결되나 싶을 정도로, 언뜻 들으면 두서없는 결론이어서, 그러나 토끼가 그리 추론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예전에 내려온 예언에선 파랑색 새는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지금과는 앞뒤가 맞지 않은 예언이었다.
‘예언의 해석이 다양하긴 하지만 이렇게 번복되는 일은 없지.’
그러니 예언조차 거스를 수 있을 만큼, 파랑새가 특별한 존재인 게 아니겠는가.
게다가 독수리 가문에서 파랑새가자랐다는 게 신기하여 따로 조사해본 적이 있었다.
‘분명 독수리 가주가 신의 땅 근처인 리만 운하를 탐방하고 나서 둥지에 알이 늘어났다고 그랬었지.’
토끼는 그 얘기까지 마저 꺼내었다.
“……이런 이유로 그 파랑새가 독수리 가문에서 자라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예언에 관한 대화가 한바탕 오간 후,
“신의 땅이라……….”
레놀드는 제 목에 걸린 펜던트를 유독 조심스러운 손길로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거긴 계약자를 잃고 힘조차 다 써버린 신수가 잠들었다는 곳인데…….’
그 신수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모르겠다만, 전해 내려오는 소문이 하나 존재했다.
생명체 하나 살지 못한다는 신의 땅에는 보란 듯이 부리를 내려 생생하게 피어있는 거목이 있지 않은가.
그 거목에 신수의 힘이 깃들어 있을 거란 항설이었다.
레놀드는 이러한 이야기들에 관심이 아주 많았다.
그의 입술이 저절로 벌어졌다.
“신의 땅에 있는 커다란 나무엔 100년에 한 번씩 열매가 맺힌다지.”
정확히는 극악의 환경에서도 끈질 기게 꽃을 피운 나무가 가졌을 강고한 생명력이 절실했다.
‘설마 그 파랑새가 신수의 후예라도 되는 건 아니겠지.’
더 이상 신의 땅에 있을 수 없어 보금자리라도 찾고자 독수리 영지에 둥지를 틀었다던가.
더구나 독수리들에게 내려진 예언은 이중적인 의미로 해석될 테니, 버릴 수도 키울 수도 없었겠지.
그냥 던져본 가설이었다.
뭐가 어찌 되었건, 레놀드에겐 각성자들의 심장이 필요했다.
대업을 이루기 위해.
만약 그 파랑새가 신수와 연관이 있는 존재라면 더 잘된 일이겠지.
‘조금만,조금만 더 기다리면돼…..’
펜던트를 더듬던 레놀드의 손이 더 느릿해졌다.
그리 어딘가 느른하면서도 위험한 분위기가 감돌던 순간.
방 안에서 토끼와 레놀드의 대화를 들으며 눈치만 살피고 있던 수하가 큼큼, 헛기침했다.
본래 레놀드와 먼저 얘기를 하고 레와 있었던 건, 그 수하이지 않은가.
“그…… 가주님, 사자들에게 가실 겁니까?”
“아, 안내하세요.”
레놀드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까딱고갯짓했다.
그들은 곧장 사자들이 갇혀있는 감옥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조금은 초췌해진 행색의 제인과 아스터가 뻣뻣하게 굳은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레놀드를 경계하는 기색이 완연했다.
처음 잡혀 올 때는 정신지배에 당한 터라 저항할 생각조차 못 했으나, 어느 정도 이능의 위력이 옅어진 지금은 아니었으니.
마른침을 삼키던 제인이 허리를 곧게 펴곤 레놀드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당신, 목적이 뭡니까?”
어찌 보면 도발이라고 할 수 있는 맹랑한 한마디.
그에 레놀드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곤 서늘하게 식어버린 흑안으로 똑같이 그녀를 마주 응시했다.
“글쎄. 어떻게 사자들은 하나같이다 내 신경을 거스르는 건지.”
사자들의 소굴인 체드윅 가에서도 구역질이 나왔었지.
특히나 수틀리면 송곳니로 물어버릴 거라는 듯 오만하기 그지없는 사자 가주를 보았을 때.
이렇듯 사자들은 건방지기 짝이 없었다.
돌연 레놀드의 시야에 해묵은 기억 속 장면 하나가 스치었다.
활활 불타는 붉은 숲, 요란히 승리의 함성을 내지르는 사자들, 그리고 죽어가는 동족들.
그 안에 있는 제 동생.
발음도 제대로 내지 못했던 어린 핏덩이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죽어갔던가.
잊히지도 않고 잊을 수도 없는 기억이었다.
‘빌어먹을….’
그 사자들의 표정이 딱 저 사자처럼 굳어있었지.
제인의 모습과 옛 기억이 겹쳐졌다.
그가 제인의 어깨를 한 손으로 덥석 우악스레 잡아채었다.
그리곤 맹수 특유의 힘으로 벽에 가두듯 밀치었다.
“…으, 윽.”
제인은 몸을 구부리며 반사적으로 으으, 앓는 소리를 흘렸다.
레놀드는 아랑곳하지 않고 반대편 손으로 힘을 주어 그녀의 목을 감싸듯 짓눌렀다.
금방이라도 목을 졸라 죽일 것처럼.
그가 쿵쿵, 미세한 소리를 내며 흐르는 경동맥을 손톱으로 누르곤 웃음소리가 깃든 목소리로 뇌까렸다.
“그것도 죽일까 말까 고민이 들정도로 애매하게.”
“목걸이.”
누구 하나는 죽어 나갈지도 모르는 삼엄한 공기 속, 잠자코 있던 아스터가 입을 떼었다.
그녀는 흑표범 가주의 분노를 제게로 돌리려는 듯 부러 겁 없이 말을 이었다.
“저 펜던트 안에 든 타나토를 되살리는 것. 그게 당신 목적이죠?”
완전히 파괴되어야 죽는,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각성자의 심장을 탐내는 것.
다른 수인들의 심장을 가지고 신체를 더 강하게 만들기 위한 실험을 해대는 것.
‘이건 작은 마님이 알려준 정보였지.’
더불어 아스터는 제인이 가지고 있는 테네도르를 통해 레놀드와 토끼의 대화를 들은 참이었다.
‘아까 흑표범 가주는 강대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을 나무의 열매에 관심을 드러냈어.’
이런 단서들로 추론한 결과였다.
그 물음에 레놀드는 제인에게서 손을 뗀 뒤, 잘근잘근 입술을 짓씹었다.
‘역시 그 권능을 가진 자라서 눈치가 빠르군.’
그러다가 차갑게 비소했다.
예상치 못하게 정곡을 찔려서인지 오히려 끓어올랐던 감정은 차게 식었다.
레놀드는 무기질한 눈으로 다시금 기억을 더듬었다.
뭐, 별 대단한 사연이 있는 건 아니었다.
흑표범과 사자는 사이가 안 좋은 만큼 그간 크고 작은 충돌을 겪으며 싸워오지 않았던가.
그러는 과정에서 하나뿐인 동생이 죽었던 것뿐이었다.
‘죽으면서 심장을 남겼으니 되살릴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니, 어떻게든 되살리겠지만.
아주 어렸을 때의 일이었으나 레놀드에겐 뼈에 사무치는 원한이었다.
그래서 그간 사자들을 노린 것이었다.
사자 가주의 첫째 딸의 생일날, 그녀의 아버지들을 앗아간 것도.
독수리 영지 근처를 지나던 리카도르에게 흑표범들을 보내 해하려던 것도.
다 그의 계략이었다.
모두가 몰살당한 숲에서 홀로 살아남을 만큼 레놀드는 태생부터가 남다른, 타고난 사냥꾼이었으니.
‘이번 전쟁은 이기는 것밖엔 선택지가 없겠군. 반드시 사자들을 무릎꿇리고 그 앞에서 심장을 갈라 내 동생의 거름으로 바칠 거다.’
그의 시선이 제 앞의 사자들을 번갈아 훑었다.
예전과 달리 반항적인 반응을 내보이는 아스터와 캑캑, 마른기침을 내뱉으면서도 꺾이지 않는 꼿꼿한 태도의 제인, 그 모습이 몹시도 거슬렸다.
하나, 아직은 쓰일 구석이 있는 미끼.
죽여서는 안 되었다.
그는 들끓는 살심을 갈무리한 채, 이능을 끌어올렸다.
그러곤 우선 아스터를 싸늘히 내려다보았다.
“아아, 난 그대가 멍청하게 파랑새의 편에 붙어버릴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도 그간 함께한 세월이 있었는데.”
칠흑같이 새까만 눈동자에 오묘한 이채가 번뜩이고, 아스터의 눈망울 또한 동시에 흐려졌다.
이능이 먹힌 것이었다.
그다음 차례는 당연하게도 제인이었다.
이제 좀 조용해졌군.
둘 다 무력하게 만든 레놀드는 작게 혼잣말하더니 근처에 있던 수하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저 둘, 꽤나 재밌는 역할로 쓰일테니 철저히 감시하도록 해요.”
그러는 사이, 흐리멍덩한 눈으로서 있던 제인이 제 귀걸이를 결연하게 감싸 쥐었다.
아무리 이능에 당했어도 슈페나를 향한 충정만큼은 잃지 않는 그녀였다.
그랬기에 그동안 테네도르로 흑표범들의 동태를 슈페나한테 전달할 수 있던 것이 아니겠는가.
그를 알 리 없던 레놀드는 뚜벅뚜벅, 무거운 발걸음으로 감옥을 나섰다.
그리고 며칠 뒤.
“병사들을 대기시키세요.”
레놀드가 전쟁 관련 서류에 사인하며 명했다.
결국, 전쟁이 터지고 말았다.
***
한편, 체드윅 가의 정원 안.
슈페나와 리카도르는 낙엽이 진정원을 거닐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내용은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퍽 살벌한 종류라는 게 함정이었다만.
다름 아닌 흑표범이 선포한 전쟁에 관한 화제였다.
“흑표범 가주가 이렇게 빨리 선전포고를 해올 줄은 몰랐어.”
슈페나의 입술이 뾰로통하게 튀어 나왔다.
물론 언제 이 아슬아슬한 평화가 깨어질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각오는 하고 있었다.
이미 전쟁을 한 번 겪은 적도 있었고, 그래도 전쟁이란 단어가 주는 중압감은 쉬이 넘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제인과 아스터를 빼내는 일이 생각보다 힘들어서 기분이 좋지 않기도 했고, 아무래도 제대로 이 둘을 이용하려는 듯 흑표범 영지의 경계가 더 삼엄해졌다고 들었으니까.
‘차라리 아예 흑표범 가주가 일을 벌일 때 뒤통수를 치는 게 낫겠어.’
그러기 위해 벨라트를 스파이로 만든 것이 아니던가.
‘그래도 우리에게 불리한 상황은 아니야.’
일리아와 나무늘보의 활약 덕분에 흑표범들의 세력도 예상보다 덜 모이지 않았던가.
한결 가라앉은 슈페나의 낯을 유심히 바라보던 리카도르가 느닷없이 제자리에 멈추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리더니 정중한 몸놀림으로 슈페나의 손을 잡아끌었다.
“널 위협하는 건 뭐든 내가 치워버릴게, 부인.”
리카도르가 작고 하얀 슈페나의 손등에 도장을 찍듯 제 입술을 꾹내리눌렸다.
간질간질한 입술의 촉감이 피부 위로 스였다.
그제야 슈페나의 입가에도 스르르, 옅은 웃음이 번졌다.
그렇지만 그 찰나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오래갈 수 없었다.
“소가주님, 그리고 작은 마님.”
무장한 수하가 갑자기 무언가를 들고 나타났으니.
흑표범 가주에게서 온 서신이었다.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154화
“무슨 내용이지?”
리카도르가 수하의 손에 들려있던 갈색 봉투를 집어가 그 안의 내용물을 펼쳤다.
이내 리카도르의 미간이 가늘게 찌푸려졌다.
꼭 무언가를 역겨워하는 듯한 표정.
“왜 그래, 리카도르?”
왜인지 모를 불안감에 슈페나는 약간은 긴장한 얼굴로 리카도르를 곁눈질했다.
“…이거 부인도 봐야 할 것 같은데.”
그가 답지 않게 뜸을 들이며 내민건, 갈색 서류 봉투에 담겨있는 흑백 사진이었다.
정신지배 이능에 단단히 당한 듯 초점이 없는 눈의 제인과 아스터의 모습이 찍힌.
“…허어.”
슈페나의 입에서도 탄식이 새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다친 곳은 없는 듯했으나,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미리 빼내지 못한 내 잘못이야.’
그녀는 자책했다.
물론 따지자면 슈페나의 잘못은 아니었다.
흑표범 가주가 작정했다는 듯 제 인과 아스터에 대한 감시를 늘린 탓에 어쩔 수 없었으니까.
그 마음을 눈치챈 리카도르가 한숨을 쉬고는 슈페나를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나지막한 저음으로 토닥토닥 그녀를 다독였다.
“괜찮아. 네 잘못 아니야, 슈페나.
그리고 금방 구해낼 거잖아.”
그 따스하고 커다란 손이 슈페나의 등허리를 다정히 어루만졌다.
오롯한 애정이 어린 손길에 잘게 떨리던 슈페나의 몸도 점차 안정을 찾았다.
‘리카도르의 말이 맞아.’
침착함을 유지하기만 한다면, 언제 든 기회를 노려 제인도 아스터도 온전히 데려올 수 있을 거였다.
그리 마음을 가라앉히다 보니 좀 미묘한 점이 눈에 띄었다.
분명 감옥 안에 제인과 아스터를 가둔 걸로 알고 있는데, 사진 속의 배경은 파릇한 하늘이 보이는 밖이었으니.
‘어디로 데려간 거지?’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의외의 인물에게서.
“아아안녀어엉하아아세에요오오?”
나무늘보였다.
“덕분에 안녕하지 못할 것 같은데.”
“안타깝지만 동감이야, 부인.”
슈페나와 리카도르는 퍽퍽한 고구마를 물 없이 먹은 듯 썩은 표정으로 짧게 시선을 교환했다.
나무늘보는 개의치 않고 새로운 소식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니까 어제부로 흑표범들이 독수리 영지를 향해 대규모 이동을 했다고요?”
더구나 제인과 아스터도 끌고?
“예…….”
“예에에…”
나무늘보는 굼뜬 동작으로 끄덕끄덕 고개를 움직여 긍정했다.
슈페나는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한창 전쟁 중인 시점에 왜 이런 갑작스러운 거동을 보이는 걸까?’
사실 최근 들어 전세는 급격히 흑표범들에게 불리해진 상황이었다.
흑표범 가주의 만행을 낱낱이 까발린 덕분이었다.
일리아가 다른 표범에게 레놀드가 괴상한 실험을 해왔다는 걸 비밀리에 알렸던 것처럼.
다른 이들에게 자백받은 사실.
그간 일리아가 흑표범 영지를 조사하며 모아두었던 물증.
이런 증거들을 일제히 터뜨린 것이었다.
흑표범 저택에서 도망친 토끼만 고발자로 내세워서.
벨라트 같은 다른 증인도 있긴 하지만, 그는 아직 해줄 역할이 남아 있었기에 일절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만에 하나 흑표범 가주가 의심하면 안 되니까.
다행히 흑표범 가주는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한 듯싶었다.
아무튼 여론은 사자들에게 더욱 유리해졌다.
원래도 흑표범 측의 일방적인 도발로 벌어진 전쟁이지 않은가.
이러한 태세의 흐름이 이 돌발행동에 영향을 미친 걸 수도.
‘그나저나 왜 독수리 영지로 가려는 거지?’
그것도 제인과 아스터의 사진을 보내어 따라오라고 도발이라도 하는 것처럼.
문득 떠오른 게 있었다.
‘분명 흑표범 가주는 신의 땅에 관심을 보였다고 토끼가 그랬었지.’
신의 땅이라면 독수리 영지와 가까운데.
더불어 테네도르를 통해 엿들은 게 있지 않은가.
흑표범 가주가 말하던 대업이 무엇인지, 왜 그런 일을 꾸미게 된 것인지.
나름의 사정은 있었으나, 그렇다고 그게 악행의 면죄부는 결코 되지 못했다.
그래서 레놀드를 향한 그 어떠한 감정도 들지 않았다.
단지 더 이상의 못된 짓을 막고 단죄하게 해야겠다는 다짐만 들었을 뿐.
“어쨌건 흑표범 가주는 신의 땅과 각성자들의 심장에 관심을 보였어.”
그곳에 우리를 다 묶어두고 결판이라도 지으려는 걸까.
슈페나의 밤색 눈동자가 한층 심오하게 깊어졌다.
그 순간, 리카도르가 살짝 허리를 숙이곤 그녀의 낯을 들여다보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부인?”
혹시나 아까처럼 초조해하는 건 아닌지 염려가 되었으니까.
리카도르의 손은 어느새 슈페나에게 다소곳이 얽혀있었다.
‘걱정 받고 있는 건가.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갑자기.’
슈페나는 리카도르의 손등을 찰싹때리며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리카도르는 뭐가 문제냐는 듯 그저 능청스레 웃기만 했다.
이런 사이좋은 부부 특유의 알콩달콩한 분위기에 닭살이 돋았는지 나무늘보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러더니 리카도르에게 말을 걸었다.
“마소오가아주우니임하안테에도오.”
“무슨 볼일 있어요? 뭔데요?”
슈페나는 칼차단을 때렸다.
안 그랬다간 또 말이 길어질 것 같아서.
그에 나무늘보가 헤벌쭉 무해한 웃음을 지으며 느릿느릿한 손길로 리카도르에게 무언가를 건네었다.
“시이이계에에-”
고풍스러운 디자인의 회중시계였다.
나무늘보는 분량, 아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관계로 이번엔 빠르게 말하기 시작했다.
“제 역작입니다. 모든 힘을 집약시킨 아이지요. 언젠가 꼭 소가주님께 도움이 될 겁니다요.”
그는 기억을 다루는 권능의 소유자가 아니던가.
모든 기억을 받아들인 슈페나의 변화를 보고 일리아가 눈치 있게 의뢰한 결과물이었다.
분명 일리아의 과거 속에서 리카도르는 각성을 완성한 상태였으니, 작은 도움만 있으면 완전히 기억을 떠올릴 수 있을 터.
‘이게 당신들에게 기쁨이 될 수 있기를…’
나무늘보는 수인 좋은 웃음을 지으며 얼른 받으라는 듯 회중시계를 쥔 팔을 흔들었다.
“이상한 건 아닐 거야.”
슈페나도 영문은 몰랐으나, 옆에서 거들었다.
나무늘보가 해로운 물건을 주진 않을 테고, 그녀가 지녔던 회중시계와도 비슷해 보였으니까.
리카도르가 의아해하면서도 일단은 그 회중시계를 건네받았다.
“뭐, 일단 받도록 하지.”
본디 남이 준 걸 덥석덥석 받는 성정은 아니었으나, 슈페나가 권한 거였으니까.
리카도르는 부인의 말을 아주 잘듣는 남편이었다.
“그으럼 저어는 이이만.”
또다시 느려진 어투를 구사하던 나무늘보가 작별 인사를 고했다.
나름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어주었던 나무늘보가 떠나자, 주변의 공기는 묘하게 무거워졌다.
슈페나가 부러 싱긋 웃으며 리카도르의 팔뚝을 손가락으로 쿡쿡, 찔러 이야기를 꺼냈다.
“아무래도 흑표범을 상대하러 독수리 영지로 가야 할 것 같아.”
리카도르는 후우, 한숨을 닮은 미소를 내걸곤 호응했다.
“어머니께 말씀드려 볼게, 부인.”
그간 슈페나와 리카도르는 칸의 만류로 인해 체드윅 가에서 전쟁을 지원하는 일만을 도맡았다.
이미 한번 흑표범과 충돌한 탓에 기력을 회복해야 했으니까.
어머니의 걱정이었다.
대신 리리엘라와 리헨테온이 각기 다른 지역에 파견되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흑표범도 흑표범이지만, 동맹관계 솔직히 리카도르는 슈페나를 저택안에 꽁꽁 감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지만 레놀드가 제인과 아스터의 사진을 보냈다는 건, 피하지 말고 승부를 보자는 뜻이 아니겠는가.
말린다고 말을 들을 슈페나도 아니었고, 그리고 그는 자신이 있었다.
‘부인을 위협에 처하지 않게 하겠다고 했으니까.’
지킬 거였다. 어떻게든.
리카도르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심을 담아 맹세했다.
흑표범 가주의 의도를 대충 파악하고 난 후, 슈페나와 리카도르는 미리 대비를 해두었다.
우선 그 첫 번째는 벨라트를 통해 흑표범 가주의 정확한 계략을 알아내는 거였다.
‘제인과 아스터를 빌미로 협박하여 나만 혼자 불러낼 거라고 그랬지.’
그래서 흑표범 가주가 자신을 부르려던 곳에 몰래 사자 정예병을 심어 역으로 함정을 파두었다.
때마침, 흑표범 가주에게서 딱 타이밍 좋게 서신이 도착했다.
어차피 함정도 파놓았고 흑표범놈이 혼자 오라 했다고 슈페나를 홀로 보낼 생각은 없었으니.
리카도르도 기척을 감춘 채 뒤에서 그녀를 지킬 계획이었다.
만반의 준비를 마친 그들은 쪽지에 쓰인 대로 흑표범 가주가 예고 한 장소에 도착했다.
유독 공기가 청량한 리만 운하 상류의 숲속엔 무장한 흑표범들이 일렬로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슈페나의 눈길을 앗아간건, 그러한 흑표범들이 아니었다.
이제 슈페나조차 알아보지 못할만큼 눈빛이 흐리멍덩해진 제인과 아스터의 모습.
슈페나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잘근잘근 짓씹었다.
“혼자 오랬더니 혹을 주렁주렁 달고 왔군.”
잠복해있던 사자들의 기척을 눈치 챈 건가.
슈페나의 눈매가 좁혀졌다.
레놀드가 비열하게 실소하더니,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리곤 제인과 아스터를 번갈아 쳐다보며 잔혹하게 뇌까렸다.
“한 발자국만 더 움직이면 네 부하는 죽어.”
그 말을 들은 슈페나는 본능적으로 잠깐 멈칫거렸다.
투명하게 와닿는 슈페나의 불안감에 레놀드는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려 더욱 진하게 웃었다.
“뭐, 그러지 않아도 죽일 테지만.”
원래도 서늘했던 분위기가 숨 막 히리만치 차갑게 냉각되었다.
레놀드의 흑안이 요요히 빛을 발했다.
이능을 사용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이능의 위력은 당연하게도 이미 정신지배에 잠식당한 당사자인 제인과 아스터에게서 나타났다.
“죽어.”
레놀드는 언뜻 즐거움까지 묻어나오는 음성으로 낭떠러지를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어차피 레놀드에게 필요한 건 각성자의 심장.
죽이고 나서 시신만 잘 건져내면 그만이었다.
휘적휘적.
명을 들은 제인과 아스터가 좀비처럼 힘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불길에 뛰어드는 부나방처럼 망설임 하나 없이.
‘저 미친놈이……..’
슈페나의 눈이 충격으로 얼룩졌다.
아무리 잔인하기 그지없는 흑표범가주일지라도 제 앞에서 이 둘을 죽이려 할 줄은 몰랐으니까.
저벅저벅.
제인과 아스터는 그 둘은 슈페나의 곁을 스쳐 계속 나아갔다.
‘두고 보기만 할 순 없어…!’
그녀가 결연한 태도로 그 둘의 팔목을 잡아챘다.
한데 그들은 이 손길마저 뿌리치고 끈 달린 인형처럼 맹목적으로 걸음을 이었다.
트득.
제인의 발끝에 차인 돌멩이가 낭떠러지 아래로 곤두박질치며 소름돋는 소음을 남겼다.
이제 정말 추락할 수밖에 없는 거리였다.
제인과 아스터는 주저하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더 내디뎠다.
그리 둘의 몸이 훅, 아래로 꺼지려던 찰나.
슈페나가 염력을 발휘했다.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155화
무형의 힘이 제인과 아스터를 감싸자, 그 둘은 둥실둥실 떠올랐다.
언제 위험에 처했냐는 듯 안전하게.
염력의 위력이었다.
눈을 질끈 감고 이능 컨트롤에 최선을 다하던 슈페나는 슬며시 속눈썹을 들어 올렸다.
밤하늘의 어둠보다도 짙게 가라앉은 진지한 밤색 눈동자가 그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 슈페나는 조금 화가 난 상태였다.
“어쩌나. 네 이능, 이제 쓸모없는 것 같은데.”
그녀가 온기 한 점 담기지 않은 눈으로 레놀드를 직시하며 까딱 고갯짓했다.
슈페나의 턱끝이 가리킨 방향에는 제인과 아스터가 서 있었다.
그들은 다리 힘이 풀린 건지 조금 휘청거리긴 했으나 무사한 상태였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다만, 아직도 낯빛이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정신지배가 완전히 풀린 건 아닌가 봐.’
그래도 제 염력이 이런 일에 도움이 되어서 한결 안도가 되었다.
레놀드는 순순히 당하고만 있지 않은 슈페나의 모습에 못마땅하다는 듯 눈매를 좁혔다.
사실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으니까.
‘특별한 새인 것 같긴 했다만 유약한 소동물이라서 벌벌 떨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본래는 눈앞에서 슈페나의 멘탈을 박살 내고 실컷 조롱하며 손아귀에 넣을 계획이었다.
충격을 입은 상대를 다루는 것만큼 쉬운 일은 없지 않은가.
특히나 정신을 지배할 수 있는 흑표범으로선.
틀어진 계책에 쳇, 혀를 차던 흑표범 가주와 달리 슈페나는 총명하게 눈을 빛냈다.
‘권능을 다루는 법도 열심히 연습했으니까.’
그리고는 제인과 아스터를 향해 권능을 불어넣었다.
하얀 구름처럼 몽글몽글한 기운이 몸 위로 따스하게 퍼져나가고 조금씩 변화가 일었다.
우선, 혼탁하기만 했던 제인의 눈에 서서히 총기가 돌아왔다.
“……작은 마님!”
멍하니 두어 번 눈을 깜박거리던 제인이 깜짝 놀라 새된 목소리를 내뱉었다.
분명 그녀는 흑표범 저택에 끌려간 처지였는데, 눈앞에 슈페나가 있었으니까.
제인은 정신지배에 당한 게 힘들었는지 두통이 느껴지는 머리를 매만지면서도 슈페나를 챙겼다.
“작은 마님, 괜찮으세요? 어떻게, 어디 다치신 곳은 없-”
“난 괜찮아, 제인. 수고했어.”
그녀가 제인을 폭 안아주며 제 겉옷을 벗어 덮어주었다.
그러더니 이내 아스터를 걱정스레 돌아보았다.
‘아스터 해링턴은 괜찮은 건가?’
제인과 다르게 그녀는 좀처럼 원래의 상태를 회복해가는 것 같지 않았으니까.
그 순간, 은은한 살기가 어린 레놀드의 음성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참 눈물겹군요.”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도 서로를 위하는 같잖은 꼴이라니.
그로서는 다행인 모습이었다.
그는 지금부터 전력을 다해서 슈페나를 공격할 생각이었으므로, 정확히는 그녀의 약점이 될 만한 이들을.
핏대가 팽팽히 선 레놀드의 팔에 지직, 요란한 마찰음을 내는 검은 낙뢰가 둘렸다.
파멸의 권능을 사용한 것이었다.
그 힘은 놀라우리만치 빠른 속도로 쏘아져 나갔다.
쿠궁.
모든 걸 없애버릴 듯 파괴적인 기운에 슈페나의 옆에 있던 나무가 뿌리째 뽑혀 산산조각이 났다.
그녀도 지지 않고 한결 능숙하게 권능을 둘러 그 공격을 막았다.
확연히 대비된 흑과 백의 힘이 허공에서 충돌했다.
언뜻 박빙의 승부를 겨루는 것 같던 그 공방은 슬슬 레놀드에게로 승세가 기울었다.
‘솔직히 좀 버거운데…….’
레놀드의 권능은 슈페나가 아닌 다른 이들을 집요하게 노리고 있었으니까.
제인과 아스터를 보호하면서 더 나아가 반격하기란 힘든 일이었다.
하나, 흑표범 가주를 상대할 이가 슈페나만 있는 건 아니었다.
잠복시켜 놓은 사자들, 밀명을 전달해놓은 벨라트, 그리고 누구보다도 듬직한 리카도르.
‘이제 상황을 뒤집을 때야.’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른 순간, 어디선가 활시위가 당겨지는 파열음이 들려왔다.
뾰족한 화살이 레놀드의 오른쪽 눈을 노리며 매섭게 공기를 갈랐다.
흑표범 가주의 매끈한 볼에 기다란 자상이 그어졌다.
“하……. 누가?”
가까스로 그 일격을 피한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제 내가 처리할게, 부인.”
리카도르가 화살집을 수하에게 맡기며 유유히 레놀드와 슈페나의 사이를 헤집고 끼어들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를 제 등 뒤로 쏙 감추었다.
원래는 슈페나의 신호가 있을 때까지 숨어있기로 했으나, 못 버티고 나온 거였다.
너무 위태위태해 보였으니까.
그 누가 사랑하는 사람이 궁지에 몰리고 있는 걸 참고만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작은 마님! 저희가 지켜드리겠습니다.”
리카도르를 따라 공격태세를 갖춘 다른 사자들도 빠릿빠릿하게 말했다.
그녀는 한시름 놓았다는 듯 가슴을 쓸어내리며 답했다.
“일단 제인과 아스터를 부축해주세요.”
그러자 사자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고생했을 그 둘을 돌보았다.
아스터는 흑표범 가주의 이능이 덜 가신 듯 여전히 넋이 나간 표정이긴 했지만.
‘괜찮아지겠지.’
예전만 해도 서로 대립하던 사이였는데.
감사하다며 흑표범 가주를 대신 상대하겠다고 하질 않나. 그러다가 이렇게 다치질 않나.
슈페나는 아스터를 볼 때마다 기이한 기분을 느꼈다.
그간 아스터가 지은 죄는 컸지만 갱생할 여지가 있어서일까.
아무튼 사자들의 등장으로 상황은 또 다른 국면을 맞이했다.
레놀드가 리카도르 뒤에 있는 그녀를 응시하며 비뚜름하게 입매를 틀어 올렸다.
슈페나도 눈꼬리를 휘며 마주 웃어주었다.
‘게다가 이건 예상하지 못했겠지.’
슈페나가 돌연 품에서 작은 단도를 꺼내어 던졌다.
흑표범 가주의 미간을 과녁 삼아서.
“이걸 공격이라고, 우습지도 않군요.”
휘잉, 기세 좋게 날아가던 검은 레놀드의 손짓 한 번에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렇지만 상관없었다.
이건 신호였으니까.
레놀드의 신경이 느닷없이 쏘아진 검에 몰린 사이, 벨라트의 칼이 레놀드의 목에 닿았다.
금방이라도 베어버릴 것처럼.
그가 벨라트를 바라보며 차게 식은 눈빛으로 언짢은 기색을 내비쳤다.
“지, 금 이게 무슨 짓입니까, 벨라 트?”
레놀드의 입술이 움직일 때마다 차갑고 날카로운 칼날이 묵직하게 피부를 짓눌렀다.
벨라트는 그저 꾸벅 고개를 숙이곤 검을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주군을 향한 마지막 예우였다.
그 모습에 레놀드의 입에선 기가 찬 탄식이 새었다.
한껏 비틀어진 입꼬리가 바르르, 떨려왔다.
이런 건, 레놀드가 구상한 시나리 오에 없는 내용이었다.
더구나 벨라트는 리카도르의 도움으로 레놀드를 구해내어 작게나마 신임을 얻지 않았던가.
슈페나는 낭랑하지만, 그 안에 서늘함을 감춘 고운 목소리로 레놀드를 한껏 비웃어주었다.
“어때? 홀라당 사자들의 편에 붙었을 거라 상상도 못 한 수하에게 배신당하는 기분이.”
제 아래로 낮춰보았던 이들에게 역으로 철저히 짓밟힌 상황.
레놀드의 자존심이 구겨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너……. 너……!”
그가 빠득 이를 갈며 슈페나를 향해 삿대질했다.
적잖이도 당황한 모양이었다.
레놀드는 당장이라도 슈페나를 두동강 내어버릴 듯 살벌하기 그지없는 살의를 내뿜으며 노성을 토했다.
“!?”
“감히! 감히, 네가 나를 농락해?”
리카도르가 슈페나가 겁먹지 않도록 손깍지를 끼며 느른히 귀엣말했다.
“신경 쓸 거 없어, 부인.”
그리곤 레놀드에게도 들릴 만큼 커다란 저음으로 시니컬하게 맞받아쳤다.
“속은 놈이 멍청한 거지.”
“그렇지. 개 수인도 아니고 얼마나 개차반으로 굴었으면 바로 밑에 있던 부하가 배신을 때리겠어.”
예상외로 흑표범 가주의 살기에도기죽지 않았던 슈페나가 짐짓 얄밉게 호응했다.
심지어 한마디 더 얹으면서 어그로를 끌었다.
“하긴. 가까이에 있는 최측근이 딴생각을 품었다는 것조차 모를 만큼 능력 없는 가주인데. 업보지, 뭐.”
“안쓰러울 정도로 한심하기 그지 없군.”
리카도르는 유순히 고개를 끄덕거려 동의하며 슈페나의 어깨에 머리를 부비적거렸다.
부부는 닮는 법.
속을 뒤집는 앞담이라면 리카도르도 뒤지지 않았다.
명백히 레놀드를 겨냥한 대화였다.
그 확인 사살과도 같은 수군거림에 간신히 유지하고 있었던 레놀드의 평정이 깨지고 말았다.
그는 허, 헛웃음을 터뜨리곤 손으로 허리를 짚으며 어떻게든 차분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전시상황에서 이성을 잃는 것만큼 바보 같은 짓도 없을 테니.
‘빌어먹을.’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은 레놀드는 자신에게 불리해진 상황을 도로 되돌려놓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그 움직임에 벨라트는 칼을 더 바싹 가져다 대었다.
흑표범 가주의 목에서 붉은 피가 한 방울 떨어졌다.
꽤나 그에게 불리한 상황이었다.
‘감히 한 입 거리도 안 되는 놈이….’
성공작이라고 너무 봐주었던 모양이군.
지금 필요한 것은 기민한 판단력과 압도적인 힘.
레놀드가 제 목을 겨누고 있던 검을 주저 없이 맨손으로 잡아챘다.
단단했던 검이 단숨에 부러졌다.
미처 대비할 틈도 없을 정도로 갑작스러운 행동이었다.
“이, 무슨… 주군!”
벨라트는 두려움에 질린 낯으로 레놀드를 올려다보며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감히 너희들이 나를 속여…….”
분노에 잠식된 레놀드의 검은 눈망울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조금 우세를 점했다고 이리도 오만한 낯짝이라니, 차라리 죽고 싶단 말이 나오게 해주죠.”
레놀드는 이를 악물더니 이때까지보다 거세게 공격을 퍼부었다.
폭발을 일으키듯 분출되는 힘.
모든 걸 다 부숴버릴 듯 위협적인 검은 낙뢰가 온 하늘을 빼곡하게 뒤덮으며 우르르, 지면을 진동시켰다.
그가 가진 권능의 최대치를 개방한 것이었다.
순식간에 상황은 심각해졌다.
아까까지 서로에게 검을 겨누었던건 애들 장난이었다는 듯이.
아군이고 적군이고 할 것 없이, 모두 레놀드의 권능 아래에 쓰러져갔다.
리카도르는 반사적으로 양팔을 벌려 슈페나를 제 뒤로 가두듯 숨겼다.
“내가 해결할 테니, 우선 부인은 도망가는 게 좋겠어.”
“리카도르, 조심”
슈페나의 입에서 새된 비명이 새었다.
동그란 구처럼 서로 똘똘 뭉친 검은 낙뢰가 맹렬한 기세로 날아드는 게 아닌가.
그건 명백히 슈페나와 리카도르를 노리고 있었다.
바로 곁에 슈페나가 있었기에 차마 피하지 못한 리카도르의 옆 이마에서 새빨간 선혈이 흘렀다.
“리카도르!”
슈페나는 일렁이는 눈으로 리카도 르를 바라보았다.
‘나 때문에 리카도르가….’
그녀의 밤색 눈동자가 죄책감에 더욱 까맣게 물들었다.
그 시선을 눈치챈 리카도르는 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척 옷소매로 피를 훔쳐내었다.
그리고선 눈꼬리까지 어여쁘게 휘며 씨익, 시원한 웃음을 지었다.
슈페나가 걱정할 테니까.
덕분에 분위기는 어느 정도 풀어졌으나, 상황은 좋지 못했다.
리카도르의 상처에 묘한 승리감을 느낀 레놀드가 더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으니.
그완 대조적으로 슈페나의 눈망울은 점차 가라앉았다.
‘리카도르가 다쳤잖아.’
다 자신의 탓인 것 같았다.
리카도르가 방금 전의 일격을 피하려다가 제 얼굴을 보곤 그러지 못해서 생긴 일이란 걸 알았으니.
짐이 된 걸까.
‘내가 빨리 권능을 사용해서 막아줬어야 했는데.’
그녀의 손끝에서 이제는 익숙한 하얀 기운이 당사자의 의지를 대변하듯 저절로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이때까지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그 흰 구름같이 새하얀 권능은 레놀드의 힘을 집어삼킬 듯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156화
하늘에는 새하얀 구름이 몽글몽글구름꽃처럼 피어났다.
그와 함께 파괴적이던 검은 낙뢰의 위력이 한순간에 무력화되었다.
권능을 완벽히 다룰 수 있는 경지.
그에 다다른 것이었다.
리카도르를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던, 그 오롯한 마음 덕분에.
“말했잖아, 리카도르. 나도 널 지키겠다고.”
슈페나가 살짝 피곤이 묻어있지만, 특유의 올곧은 낯으로 말갛게 웃었다.
그러면서 리카도르에게 두었던 시선을 황급히 거두곤 눈을 부릅뜨더니 흑표범 가주를 노려보았다.
파랑새치곤 퍽 맹수다운 눈빛이었다.
그에 리카도르는 어쩐지 웃음을 흘릴 것만 같았다.
‘귀엽네.’
위험천만한 상황인데도 이런 생각이 들다니.
중증이었다.
그러한 리카도르의 속내를 알 리 없는 슈페나는 꽤나 듬직하고 기특하게 이야기했다.
“우린 부부잖아. 서로가 서로를 지키는 사이.”
그때, 흑표범이 사자 영지를 벗어나는 경계 지역에서 습격해왔던 날.
리카도르도 한계치 이상의 권능을 쓰고 나서 꽤 한참 동안 힘들어하지 않았는가.
이번에도 리카도르가 자신 때문에 겨우 버티며 괴로움을 참는 걸 원치 않았다.
같이 이겨내야지.
게다가 흑표범 가주의 것과 자신의 힘은 상극이지 않은가.
이런 슈페나의 마음이 전해진 걸까.
권능의 온전한 힘을 발현하는 것은 힘들었지만, 생각보다는 수월했다.
더구나 슈페나가 가진 권능은 구름의 힘.
본디 번개도 비도 눈도 구름에서부터 태어나지 않던가.
번개의 힘을 지닌 레놀드는 태초부터 슈페나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레놀드도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깨달았다.
“빌어먹을……!”
악문 잇새로 거친 욕설이 새어 나왔다.
그러는 사이, 리카도르의 몸이 곧장 레놀드에게로 쏘아졌다.
레놀드는 제 힘이 무용지물이 된 현실이 믿기지 않는지 살짝 넋이 나간 모습이었다.
리카도르의 검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흑표범 가주의 급소를 파고들었다.
“아깝게 됐군. 이번엔 심장을 도려 내겠다고 다짐했는데.”
그래도 일전에 흑표범 가주와 격돌했을 때, 팔 하나라도 베어버릴걸 그랬다고 생각했었지.
그 아쉬움을 이렇게나마 달랠 수 있어서 다행인가.
리카도르가 서늘하게 중얼거리며 검을 도로 물렸다.
뚝뚝.
바닥에 피가 흘러 고였다.
당연하게도 레놀드의 것이었다.
레놀드는 끊어질 것만 같은 고통이 밀려오는 팔을 부여잡곤 리카도 르를 노려보았다.
그 눈에선 흉흉한 살기가 묻어나왔다.
레놀드도 알고 있었다.
더 이상 어찌해보기 어려운 형국이라는 것을.
잡아 온 사자들을 미끼로 슈페나를 사로잡고, 그를 통해 다른 각성자들마저 사냥하겠다는 계획은 이미 수포로 돌아간 셈이 아니던가.
‘우선 몸을 피해야 해..’
그렇지만 순순히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그는 일전에 독수리 영지에서 찾으려던 걸 생각해내었다.
당시에는 권능을 완성해냈기에 별관심을 두지 않았다만, 뒤늦게 알아낸 소식이 하나 있었다.
‘그 약도 속 장소가 신의 땅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랬지.’
어차피 일이 틀어진 거, 뭐라도 하나 건져야 했다.
레놀드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쓰러진 사자 무리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 안에는 그나마 강해서인지 아직 의식이 있는 듯한 아스터가 있었다.
‘아스터 해링턴. 저 사자도 끌고 가야겠어.’
결심을 마친 레놀드는 항복하겠다는 듯 그나마 멀쩡한 왼쪽 팔을 번쩍 들곤 뒷걸음질을 쳤다.
“뭐 하자는 거지?”
“항복할 테니 이쯤 하자는 겁니다, 소가주.”
그가 그리 입을 털며 남몰래 이능을 발휘했다.
물론 그 태세변환에 넘어갈 리카도르가 아니었다.
“흑표범 가주를 끌고 와서 내 앞에 무릎 꿇리도록.”
냉정한 리카도르의 명에 운 좋게 살아남은 몇몇 사자들이 일사불란하게 흑표범 가주를 에워쌌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레놀드의 행동이 한 발 더 앞섰다.
첨벙—
커다란 물소리가 일었다.
아까 제인과 아스터를 떨어뜨리려고 했던 낭떠러지로 뛰어내린 것이었다.
그 아래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짙푸른 강물로 가득했으니까.
“소가주님, 작은 마님!”
어디선가 사자들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와 동시에 또다시 철럭! 누군가 강물로 떨어지는 듯한 소음이 고막을 강타했다.
아스터가 두르고 있던 스카프가 허공에 휘날렸다.
‘혹시…?’
슈페나의 눈이 커다래졌다.
아스터에게 걸린 정신지배가 아직 덜 풀린 것 같아서 못내 불안했는 데….
‘무슨 바퀴벌레도 아니고 저 끈질긴 작자가!’
슈페나는 지친 몸을 일으켜 레놀드와 아스터가 사라진 곳으로 서둘러 도도도도, 달려갔다.
그러곤 고개를 내밀어 낭떠러지 바로 밑을 내려다보았다.
잔잔한 물결이 이는 푸른 강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고요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 딱 그 수중 동굴을 발견했던 곳이야!’
이곳은 무슨 탑의 다락방 같은 비밀공간이 있던 리만 운하 상류 지역이 아니던가.
‘분명 그 비밀공간이 신의 땅으로 통하는 관문과도 같은 장소라고 했었지.’
흑표범 가주가 노리는 건, 각성자의 심장과 신의 땅에서 자란다던 나무.
그가 어디로 가려는 건지 알 듯했다.
‘저 미꾸리지 같은 흑표범, 꼭 잡고 말 거야.’
슈페나는 굳게 마음먹었다.
“리카도르, 너 다이빙 잘해?”
그리고는 어느새 제 곁으로 온 리카도르를 향해 물었다.
“설마, 부인…….”
리카도르의 눈이 가늘어졌다.
슈페나는 한껏 뿔이 난 표정으로 리카도르에게 폭 안기며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뭐 해, 안 뛰어들고?”
그는 그녀의 의도를 눈치챘는지 골 때린다는 듯 잠깐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슈페나의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눈 감고 숨 참아, 부인.”
그러고는 남아있는 수하들에게 지원군을 불러오라 명령했다.
지난번의 경험상 그 동굴에 각성자밖에 들어갈 수 없겠다만, 최소한의 대비는 해놔야 할 테니까.
‘흑표범 가주는 많이 지친 상태야.
그러니 금방 이길 수 있어.’
리카도르의 눈빛이 비장해졌다.
결국 슈페나와 리카도르는 다른 자들이 그랬듯 풍덩,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물속의 풍경은 예전에 독수리 영지에서 보았던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슈페나가 한쪽 눈을 찡그리듯 뜨며 생각했다.
다만 다른 점이라면……..
‘강물이 살짝 붉어.’
아무래도 흑표범 가주가 흘린 피가 물의 흐름을 따라 번진 듯했다.
뚝, 피가 떨어져 있었다.
역시 저쪽으로 흑표범 가주가 들어갔을 확률이 높았다.
‘이곳에 다른 사자들이 들어오지 못하는 만큼 우리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해.’
레놀드가 정말 신의 땅을 찾아가기라도 해서 뭔가 해내도록 내버려 둘 순 없지 않나.
지금 리카도르와 자신이 그를 잡는 게 최선이었다.
‘힘들긴 하지만 이 정도는 괜찮아.’
슈페나 또한 무겁게 가라앉은 얼굴로 리카도르를 마주 보았다.
“아스터 해링턴은 내가 맡을게.”
흑표범 가주가 이 상황에서도 무리해서 아스터를 데려간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인질로 쓰일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거겠지.
‘흑표범 가주의 이능이야 내 권능으로 풀면 그만이고, 아스터 해링턴도 사자인 만큼 무력적인 힘은 월등하지.’
정신지배만 사라지면 제 몫은 너끈하게 해낼 터.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슈페나와 리카도르는 서로 손을 꼭 맞잡은 채, 문 너머로 발을 내 디뎠다.
“와…….”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감탄사가 흘렀다.
뭉게뭉게 피어올라 주변을 둘러싼하얀 구름, 파릇파릇한 신록이 우거진 숲의 경관, 그리고 커다란 나무.
그야말로 성스럽게 느껴질 만큼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 감탄은 오래갈 수 없었다.
휘익~
어디선가 단검이 날아왔으니.
리카도르가 잽싸게 슈페나를 끌어 당겨 그 일격을 능숙하게 피해내었다.
다행히도 다친 곳은 없었다.
품 안에 그녀를 가둔 리카도르는 아예 보호하듯 한쪽 팔로 꽁꽁 감쌌다.
그리고는 짙게 침잠한 저음으로 속닥였다.
“저 사자가 부인에게 방해가 된다면 난 주저 없이 죽일 거야.”
리카도르의 시선 끝에 피를 철철 흘리는 흑표범 가주와 아직 정신지 배에 잠식당한 아스터가 있었다.
리카도르가 가리킨 건 아스터겠지.
‘내 남편은 역시 아스터가 못마땅한가 보네.’
슈페나도 그녀가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으나 죽음을 바라지는 않았다.
결국 아스터도 레놀드에게 이용당한 거고, 지금 이리 고생하고 있으니까.
물론 그동안 저지른 죄의 값은 마저 치러야겠지만.
‘최대한 빨리 끝내야겠어.’
이러한 결심이 든 찰나, 텔레파시라도 통한 듯 리카도르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가 슈페나에게서 살짝 떨어져 사자 특유의 이능을 끌어올리며 스릉, 검을 빼 들었다.
슈페나도 남은 힘을 쥐어짜 권능을 발휘했다.
하얀 구름 같은 힘이 아스터의 발돌연 강렬한 감정이 전달되었다.
고마움, 그리고 각오.
이런 감정들이.
좀 이상했지만, 뭔가 목적하는 바가 있는 듯하여 일단 모른 척했다.
그러는 사이, 리카도르는 슈페나를 등 뒤에 그나마 안전히 숨긴 채 흑표범 가주를 상대했다.
한 가지 문제는 레놀드의 권능이 거리를 가리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찝찝한 위기감에 리카도르가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허튼수작을 부리지 못하도록 나머지 팔도 베어야겠군.’
리카도르의 검이 레놀드의 나머지 팔 한쪽을 갈랐다.
“악!”
고통스러움이 뚝뚝 떨어지는 흑표범 가주의 비명이 공기 중을 울렸다.
다만, 간발의 차이로 검은 낙뢰 또한 슈페나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다행히 슈페나는 다치지 않았다.
대신….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157화
“…아스터 해링턴?”
끝 음이 살짝 떨리는 듯이 불안정한 슈페나의 목소리가 입술 사이를 갈랐다.
아스터의 몸이 힘없이 무너져내렸다.
슈페나를 밀치곤 그 공격을 맞은 것이었다.
그에 레놀드는 낭패감 어린 기색으로 한마디 했다.
“이런.”
“다시는 그 입에서 어떤 말도 안나오게 해주지.”
리카도르는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다.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흑표범가주는 리카도르의 상대가 될 리 없었다.
그리 레놀드를 무릎 꿇린 리카도 르가 일단 슈페나에게로 달려갔다.
“괜찮아, 부인?”
“난 괜찮아. 근데…….”
그녀는 바로 제 발밑에 쓰러진 아스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무릎을 꿇어 거리를 좁히곤 아스터의 양어깨를 붙잡아 조심스레 흔들었다.
“저, 저기, 정신 좀 차려봐!”
그 손길이 점차 조급해졌다.
‘심장 부근에 자상이 나있는데…….?’
걱정이 묻어나는 슈페나의 눈길은 피로 얼룩덜룩해진 아스터의 상체로 향했다.
아스터가 힘겹게 눈을 떴다.
그러곤 드문드문 끊어지는 문장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가, 각성자는 심장을 완전히 파괴해야 목숨이 끊어지니까, 전 괜찮아요.”
그런 말을 하는 아스터의 낯은 독기 어린 눈으로 상황을 주시하던 레놀드에게로 고정되었다.
꼭 흑표범 가주의 심장을 꺼내 가루로 만들라는 말로 들리는데.
‘일전에 일리아가 제 심장을 내게 보인 적이 있었지.’
그때처럼 하면 되려나.
때마침, 아스터가 슈페나의 손에 무언가를 쥐여주곤 더 이상은 버티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떨구었다.
“여기 …”
“어…?”
슈페나의 외마디 탄식이 새었다.
흑표범 가주가 늘 하고 다니던 펜던트.
‘테네도르로 엿들으니 누군가의 타나토를 되살리고 싶어 했었지.’
아마 흑표범 가주에겐 중요한 수인이었을 터.
그런데 그 펜던트 안의 타나토에선 특유의 희미한 기운이라든지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타나토는 영혼을 담는 그릇.
그런 만큼 되살릴 수 있을 만큼 멀쩡하다면 희미하게라도 그 주인의 흔적이 깃들어있어야 할 텐데.
꿈속에서 리카도르의 타나토를 보았을 때도 특유의 달 같은 느낌이 들었으니까.
‘허상을 붙들고 있었던 건가?’
그래서 강대한 생명력을 지녔을지도 모르는 신의 땅의 나무와 특별한 능력을 지닌 각성자들의 타나토에 집착했던 걸까.
명백하게 죽었던 이를 살려내고자.
슈페나의 밤색 눈동자가 어두워졌다.
‘그렇다면 지금 이 현실은 흑표범가주에게 더할 나위 없는 형벌이 되겠네.’
비소가 흘렀다.
더구나…
흑표범 가주는 몹쓸 짓을 많이 하지 않았던가.
동족인 흑표범에게도, 사자에게도, 그리고 체드윅 가 식구들에게도.
리리엘라 언니 생일날 벌어졌던 일들, 리카도르가 독수리 영지에서 습격받았던 일들.
그 외의 흑표범과 관련된 모든 일들.
“다 흑표범 가주의 지시였다고 벨라트가 실토했었지.”
이번에 편지로 벨라트와 접선하면서 들은 정보였다.
슈페나는 복합적인 감정이 담긴 눈으로 리카도르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그런 그녀의 행동을 무슨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잠시 흐음, 침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아스터에게 제 권능을 사용했다.
저번에 한번 보았지만, 다시금 놀랄 만큼 신비한 광경이 되풀이되었다.
아스터의 시간이 되돌려지는 장면, 어느새 심각했던 상처가 아문 채, 새액새액 잠든 아스터를 보며 슈페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렇게 해달란 건 아니었는데, 누구 남편인지 센스 넘친다니까.’
이러한 속마음을 눈치챈 건지 리카도르가 피식 웃으며 슈페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 잘했어, 부인?”
흡사 칭찬을 받고 싶어 하는 고양이 같은 모습.
“조금?”
슈페나의 입꼬리도 부드러이 올라갔다.
잠시 풀어졌던 둘 사이의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아직 완전히 처리하지 못한 이가 있지 않은가.
바닥에 엎어져 있던 레놀드가 겨우 몸을 일으키곤 다리를 질질 끌며 다가왔다.
“…하, 당장 내놔! 그거 당장, 내 심장……!”
그의 입에서 부서져 내린,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도 모를 단어의 배열.
금방이라도 폭주할 듯이 흉흉한 기세가 흑표범 가주에게서 터져 나왔다.
이성을 잃은 게 분명했다.
레놀드가 검은 타나토를 쥐고 있는 슈페나에게 달려들었다.
물론 두고 볼 것도 없이 리카도르에게 막혔지만.
“이제 끌 것도 없이 저자를 잡아 다 심판대 위에 세우면 되겠군.”
그가 냉기를 폴폴 풍기며 무정히 이야기했다.
“응. 이미 끝났어.”
슈페나도 땅바닥에 볼품없이 엎어진 레놀드를 응시하면서 긍정했다.
그녀가 혹시 몰라 이능을 사용해 옴짝달싹 못 하도록 그를 묶어놓았다.
그러면서 검은 타나토를 툭, 레놀드의 머리맡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이거, 이미 완전히 죽었던데?”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을 알려주기에 딱 적합한 어투.
경악으로 물든 레놀드의 동공이 사정없이 한들대었다.
“뭐?”
“이미 영혼조차 남아있지 않은 타나토로 뭘 어쩌겠다고.”
슈페나가 고저 없는 음성으로 무심히 대꾸했다.
흑표범 가주는 그나마 온전한 목을 가로로 내저으며 부정했다.
“아니, 아니. 아니야!”
그간 많은 접전을 겪으며 시달려 서일까. 검은색 타나토가 타이밍 좋게 콰직, 부서졌다.
그와 동시에 레놀드의 흑안도 깊이 침잠했다.
‘이렇게 자멸하는 건가.’
슈페나는 감흥 없이 어깨를 으쓱였다.
“남의 눈에 피눈물 내면서 넌 네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봐. 멍청하게.”
그 서늘한 한마디가 레놀드의 주변을 떠돌다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레놀드는 그나마 멀쩡한 다리를 버둥거리며 다 쉬어버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살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래서 부단히도 노력했는데……..”
온몸에 피 칠갑한 악인이 온전치 않은 몸으로 절규하는 광경은 퍽 기괴했다.
슈페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속눈썹을 드리웠고, 리카도르는 무표정한 얼굴로 이를 눈에 담았다.
“별 볼 일 없는 자인데, 저자 하나 때문에 그동안 너무 많은 이들이 고통받았네.”
리카도르가 조소했다.
슈페나는 슬며시 리카도르의 손에 제 손가락을 얽었다.
그리고는 슬며시 그를 바라보며 위로의 눈빛을 보냈다.
뭐, 레놀드는 자신에게도 빌어먹을 수인이긴 했으나 리카도르에 비할 바는 아닐 것 같아서.
가문의 원수이지 않은가.
어떤 처벌을 내릴지는 리카도르와 체드윅 가 식구들의 의견을 들어봐야 할 터.
“일단 끌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부인.”
리카도르도 그렇게 생각한 듯 비슷한 이야기를 꺼내었다.
그 대화에 레놀드는 악다구니를 쓰며 어떻게든 발로 땅바닥을 딛고 일어서려 했다.
“내가 왜 여기까지 왔는데……. 내가 왜!”
“시끄러워.”
나지막한 목소리가 기저에 깔렸다.
리카도르의 검이 레놀드의 복부를 꿰뚫었다.
물론 슈페나의 눈을 가린 채로.
캄캄한 어둠과 함께 들려오는 서걱, 살벌한 소리에 슈페나가 리카도 르의 이름을 불렀다.
“리카도르!”
이렇게 쉽게 보내려고?
이런 의미가 함유된 한마디였다.
잔인한 바람일지도 모르겠으나, 그 간 지은 죄에 대한 죗값을 다 치르고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차하면 권능 좀 쓰지, 뭐.”
리카도르는 대수롭지 않다는 어조로 받아쳤다.
“이렇게.”
리카도르의 손끝에서 달처럼 푸르고 청명한 기운이 퍼져나가자, 죽을듯이 피를 철철 흘리던 흑표범 가주는 회복되었다.
물론 딱 숨만 붙어 있는 정도의상태로만.
그럼에도 뭔가 안심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슈페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잠깐만.”
“왜 그래, 부인?”
리카도르가 눈을 깜박였다.
그녀가 한 발짝, 흑표범 가주에게로 걸어가 쪼그려 앉고는 이야기했다.
“그토록 끈질기게 우릴 괴롭혔던 자인데, 기력을 조금 되찾았다고 또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모르니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해놔야지.”
타나토.
그걸 쥐고 있을 계획이었다.
영혼을 담는 그릇인 만큼 중요한 게 아니던가.
아마 타나토를 뺏기면 흑표범 가주도 제 이능과 권능을 예전처럼 구사하지 못할 것이었다.
‘그리고 타나토가 없다고 해서 죽는 건 아니니까.’
일리아도 본인의 심장을 뽑아내고 나서 좀 아파하긴 했으나, 죽진 않았으니까.
“꿈속에서의 리카도르도 그렇고.
게다가 각성자는 타나토를 완전히 파괴해야 죽으니까.”
슈페나는 예전의 경험을 되살려 흑표범 가주의 가슴께에 손을 얹곤 타나토를 끄집어내었다.
‘외간 남자 몸을 너무 덥석덥석 만지는 거 아닌가.’
그에 곁에 있던 리카도르의 표정이 불퉁해진 건, 안 봐도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슈페나가 남몰래 절레절레 고개를 젓곤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살짝 금이 간 검은색 타나토.
레놀드의 것이었다.
‘으으, 윽, 하…… 이게 무슨!’
살점이 뜯어져 나가는 것만 같은 기분에 레놀드는 온몸을 비틀며 고통을 호소했다.
‘아우.’
슈페나가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리카도르는 더는 그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검의 손잡이로 어깨를 으깨듯 짓눌렀다.
약간의 질투심이 담긴 행동이었다.
레놀드에게선 반사적으로 신음이 새었다.
아…
“…흐, 으윽………!”
리카도르는 지렁이처럼 꿈틀대는 비루한 레놀드의 모습을 차갑게 내려다보며 서늘히 뇌까렸다.
“널 쉽게 죽이진 않을 거다. 오래도록 살아남아서 모두에게 비난받으며 죄스러운 삶을 살아. 고통스럽게.”
죽음은 때론 자비로운 숨구멍이 되기도 하니까.
그토록 갈망하던 목표를 이루는 것에 실패하여 삶의 목적을 잃은 자에게 죽지 못하는 건 최고의 벌이 아닐까.
“괜찮아, 리카도르.”
슈페나는 리카도르의 어깨를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
조금 지쳐서일까, 그의 얼굴이 미약하게 일그러져 있었으니까.
슈페나와 리카도르는 서로 잠시간 눈을 맞추며 작게 눈꼬리를 휘었다.
이제 다 끝이었으니.
“아…….”
슈페나의 입에서 작은 탄식이 새었다.
큰일을 다 치르고 나니,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신의 땅, 지금 그들이 밟고 있는 곳의 경관이.
하늘하늘한 꽃잎이 그들의 곁에 떨어졌다.
생명이 충만하다는 거목에는 어느 샌가 푸른 꽃들이 화사하게 흐드러져 있었다.
‘저건 뭐지?’
슈페나의 시야 끝엔 푸른색 깃털이 묻어 있는 작은 둥지 하나가 걸려 있었다.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158화
생긴 게 딱 내 깃털인데?
‘정말 이곳과 나 사이에 뭐가 있는 걸까.’
슈페나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러다 도로 거대한 나무를 훑었다.
온통 따스한 갈색인 보통 나무와 달리 표면이 새하얀 거목의 모습.
문득 테네도르로 흑표범 가주의 이야기를 엿듣다가 알게 된 정보가 떠올랐다.
100년에 한 번씩 열매가 맺힌다고 그랬는데.
‘내 깃털처럼 푸른 꽃만 피었네.’
아름다운 그림이라도 보는 것처럼 신비로웠다.
그리고 왜인지 모를 편안함이 들었다.
“왜 그래, 슈페나?”
리카도르가 싸움의 여파로 흐트러진 머리칼을 대충 쓸어넘기며 슈페나의 어깨를 손으로 감싸 안았다.
그제야 그녀는 현실로 돌아왔다.
지금은 일단 해야 할 일들이 남은 만큼 얼른 집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도 뭔가 묘한 감정이 들어.’
슈페나는 주변을 한 바퀴 즉 둘러보았다.
그동안 보았던 그 어떤 풍경보다도 생명력이 충만하게 깃든 것 같은, 푸르른 숲의 정광.
별 이상한 점은 없었다.
아까 들어오기 전에 느낀 것처럼 공기의 밀도가 다른 곳보다 빡빡한 듯하기도 했지만.
아무튼….
신수가 살았다던 신의 땅.
신의 힘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권능을 지닌 각성자만이 드나들 수 있는 신의 땅.
‘여긴 분명 우리 모두와 관련이 있어.’
그녀가 속삭이듯 얘기했다.
“언제 한번 이곳에 다시 와봐야겠어, 리카도르.”
일리아와 나무늘보에게 조사를 맡겨도 괜찮을 것 같고.
“그럼 이제 그만 정리하고 돌아갈까?”
짝, 손뼉을 쳐 분위기를 환기한 슈페나가 아스터와 흑표범 가주를 보며 짤막한 침음성을 흘렸다.
“음.”
이제 이들을 끌고 가야겠지.
슈페나가 이능을 이용해 아스터와 레놀드를 허공에 둥둥 띄웠다.
“내 염력으로 데려갈게.”
“괜찮겠어?”
“난 괜찮지. 이상하게 이곳에선 이 능을 써도 지치지 않는 기분이라서.”
슈페나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괜찮지 않은 건 자신이 아니라, 물속에서 둥둥 떠다니느라 숨도 못쉬고 물세례를 맞게 될 저 둘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결국 그 둘은 신의 땅을 벗어났다.
슈페나는 아까 지나온 다락방의 문고리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오팔이랑 월장석 문양이 새겨져 있네.”
나와 리카도르의 타나토 모양인데.
“흔한 보석들은 아닌데. 신기하네.
이곳이 출구였던가?”
리카도르가 피식, 웃고는 수중 동굴을 나갈 수 있는 지점을 가리키며 그녀를 다독였다.
그러더니 불현듯 나지막한 저음으로 말했다.
“부인, 그나저나 무슨 소리 들리는 것 같지 않아?”
“그래? 난 잘 모르겠는데.”
슈페나와 리카도르는 그 뒤로 실없는 대화를 조금 주고받다가 후다 닥, 수중 동굴 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몰랐다.
째깍째깍.
방금 이야기했던 그 소리는, 나무 늘보가 주었던 회중시계가 아주 빠르게 돌아가느라 생긴 소음이라는 걸.
“소가주님, 작은 마님!”
어느새 바글바글하게 몰려온 지원군이 슈페나와 리카도르를 반겼다.
“흑표범 가주는 저희가 호송하겠습니다.”
그렇게 일은 일단락되고, 며칠 후, 독수리 영지로 향했던 행렬은 체드윅 가에 도착했다.
집에 돌아왔다.
“다녀왔습니다!”
슈페나는 밝게 미소 지었다.
칸이 두 팔을 벌려 슈페나와 리카도르를 반겼다.
“무사히 집에 돌아온 걸 환영한단다, 며늘아가, 그리고 아들.”
“어머님!”
오랜만에 느껴보는 어머님의 품은 엄마의 것처럼 안락하고도 따뜻했다.
어머님의 옆에 서 있던 리리엘라도 와락 안겨들었다.
“보고 싶었어, 슈페나!”
리리엘라가 리카도르를 향해 수줍게 덧붙였다.
“내 동생도.”
대개 리카도르를 견제하기 바빴던 리리엘라였지만, 그 누구보다 서로를 아끼는 가족이었으니.
“무사히 돌아오셔서 기쁩니다. 형수님.”
리헨테온도 이 가족들의 상봉 대열에 합류했다.
금방 리카도르에게 엉덩이를 걷어차였지만.
“넌 좀 떨어져라, 동생아.”
“아, 형님!”
리헨테온이 억울한 표정으로 낑낑대었다.
자연스레 명예 가족 카누스도 어디선가 나타나 슈페나의 팔에 팔찌처럼 둘둘 감겼다.
– 머야. 카누스는 안 보고 싶었나 봐.
“너 아직 회복 못 했어?”
-아니, 허물 벗는 중이라 동물화한 건데.
어쩐지 비늘 상태가 이상하더라.
슈페나는 카누스를 째릿, 흘기며 혀를 찼다.
그렇지만 뿌리치진 않았다.
소중한 가족이었으니까.
그리고 곧 가족이 될 것 같은 일리아도 슈페나를 반겼다.
“나도 따라갔어야 했는데 다른 일을 마무리하느라……. 미안해요, 고객님.”
“괜찮아요. 대신 나중에 부탁이나 하나 들어줘요.”
그녀는 씨익 웃으며 속닥였다.
환영 인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는 걸 지켜보던 칸이 크흠, 헛기침하곤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러면서 근엄한 얼굴로 이야기했다.
“밥이나 먹자꾸나.”
데자뷔인가?
처음 체드윅 가에 왔을 때도 어머님이 그러셨던 것 같은데.
“가자, 리카도르.”
슈페나는 리카도르의 손을 꼬옥맞잡곤 다른 이들과 함께 다이닝룸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먹는 집밥에선 익숙하고도 황홀한 체드윅 가 요리사의 손맛이 느껴졌다.
“이 나무열매는 내가 직접 딴 거 란다, 며늘아가.”
“역시 어머님 음식이 최고네요!”
물론 슈페나는 사회생활을 했다.
드디어 집으로 돌아왔다.
***
그 후로 한 달이란 시간이 흘렀다.
큰일을 해결한 만큼 그동안 제법 많은 일이 있었다.
우선 흑표범 가주가 벌였던 전쟁과 관련된 뒷수습을 반쯤은 끝마쳤다.
그의 악행을 세상에 낱낱이 알렸고, 전쟁은 승리로 마무리했으며, 뒷수습도 차근차근 해나가고 있었다.
흑표범들에 대한 처벌도 끝마쳤다.
흑표범 가주의 밑에서 일했던 이들은 죄의 경중을 가려 적합한 벌을 받았다.
운 좋게 목숨을 건진 벨라트도 그 간 지은 죄가 막중한 만큼 탄광으로 보내졌다.
평생 고생 좀 해보라지.
그리고 제일 큰 흉수인 레놀드는 체드윅 가 수인들의 뜻에 따라 살려두기로 했다.
그가 실험을 자행했던 마을에서.
그 마을 수인들이 흑표범 가주에게 품은 원한이 상당하더라고.
레놀드는 차라리 본인을 죽이라고 했다나 뭐라나.
‘자업자득이지.’
혹시 몰라 타나토도 뽑아내어 보관 중이고, 감시도 철저하니 흑표범가주가 도망칠 길은 없었다.
곧 돌 맞아 죽지 않을까 싶었다.
그때, 똑똑 누군가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그 주인은 일리아였다.
“뭐 해요, 고객님?”
슈페나는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곤 답했다.
“서류 정리요.”
“저번에 고객님이 말한 거 다 알아 왔어요.”
일리아는 나무늘보와 그새 독수리 영지에 다녀온 참이었다.
“이왕이면 내가 직접 가고 싶었지만, 어머님이 걱정하시는 바람에 저택을 벗어날 수 있어야지.”
과보호였으나 이해는 되었다.
여태 워낙 파란만장한 일들을 많이 겪었으니까.
슈페나의 상념이 깊어지려는 사이, 일리아는 대화의 물꼬를 틔웠다.
“신기한 곳이더라고요. 권능을 완성한 자만이 견딜 수 있는 공기를 지닌 공간이라…….”
일리아가 꺼낸 얘기는 퍽 신선한 것이었다.
‘신의 땅만 유독 공기의 밀도가 빡빡한 듯한 느낌을 받았었지.’
처음 수중 동굴을 발견했을 때, 신의 땅까지 들어가지 못하고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이해되었다.
그때의 자신은 권능의 존재도 몰랐고, 리카도르도 미숙했던 건지 권능을 쓰고 나서 퍽 힘들어했으니까.
그러는 동안, 일리아의 말은 계속 되었다.
“아마 신의 땅 주변은 그 어떤 생명체도 살아갈 수 없다는 것도, 이 때문에 생긴 이야기겠죠.”
“어쩐지 그곳, 뭔가 우리와 관련이 있는 것 같았어요.”
슈페나도 맞장구치듯 일전에 느꼈던 감각을 털어놓았다.
그에 일리아가 진지한 표정으로 긍정했다.
“신수가 나고 자랐던 곳이니까요.”
“그런 소문은 듣긴 했는데, 진짜예요?”
슈페나는 반신반의한 심정으로 물었다.
“신의 땅에 있는 그 거목에서 신수가 태어난다는 특급 정보를 고대 문헌에서 발견했어요. 고객님.”
100년 동안 한 번, 딱 하나의 열매가 맺힌다는 강대한 생명력을 지닌 나무.
사실 그 나무에서 탄생하는 건, 열매가 아닌 알이라나 뭐라나.
알
슈페나의 표정이 모호해졌다.
솔직히 앞뒤 사정도 맞지 않고 이해가 가지 않았으니까.
“그렇지만 신수를 봤다는 수인은 여태 아무도 없었는데. 100년에 한번이면 지금도 어딘가에 있을 수 있잖아요.”
“신수라고 해서 영생을 산다거나 그러진 않는대요. 그냥 보기엔 다른 수인들과 비슷하다고 하더라고요.”
그럼 왜 신수냐?
슈페나는 본인 일도 아닌데 과몰입한 덕후처럼 억울해했다.
“아니, 그럼 신수가 불쌍하잖아요!”
“고객님, 본인 이야기라고 지금 발끈하는 거예요?”
응?
슈페나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파랑새는 고대 문헌에 상서로운 동물로 기록되었다면서요. 고객님이 보기에도, 고객님은 아무래도 신수들 중 하나였던 것 같죠?”
그렇게 말한 일리아는 주섬주섬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신의 땅에서 가져온 거예요.”
일리아가 내민 건, 빛바랜 그림이었다.
커다란 나무의 옆에 조그마한 푸른 새가 날아다니고 있는 그림.
방금까지 일리아가 했던 말을 뒷받침하듯 꽤나 신빙성이 있는 그림이었다.
슈페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토끼에게서도 파랑새에 관한 좋은 얘기를 듣긴 했는데…….
‘설마 그 예언이 그래서인가?’
문득 든 생각이 있었다.
-파랑새는 없다.
이건 파랑새가 전설 속에서만 존재한다고 여겨졌던 신수라서 내려진 게 아닐까.
‘에이, 무슨 로맨스 소설 단골 소재인 출생의 비밀도 아니고…….’
이 시점에서 그런 얘기가 안 나오면 아쉽긴 한데.
슈페나의 눈길이 다시금 일리아가 가져온 그림으로 향했다.
못 보던 사람이 눈에 띄었다.
왜인지 리카도르와 외양이 비슷한 하얀 머리의 남자애가 나무 아래에서 있었으니까.
약간은 놀란 듯한 음성이 슈페나의 입술을 갈랐다.
“하얀 머리 소년?”
“신수의 계약자인 것 같아요. 권능을 다룰 줄 아는 신수는 계약자의 영혼에 권능의 일부를 심어주었대요. 신비한 힘을 쓸 수 있도록.”
일리아는 지금 자신이 권능을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전생에 신수의 계약자였기 때문인 것 같다고 속닥였다.
“그래서 신의 땅에 각성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거겠죠.”
그러나 슈페나의 온 신경은 그림에 집중되어 있었다.
“심장에 월장석 같은 게 그려져 있는데……..”
자세히 보니 푸른 새와 하얀 머리 소년의 심장 부근에는 각기 보석이 그려져 있는 게 아닌가.
오팔과 월장석.
슈페나와 리카도르의 타나토와도 같은 종류의 보석이었다.
‘문고리에도 오팔과 월장석이 새겨져 있었지….’
설마.
리카도르와 내가 아주 오래전부터 인연이 있었던 걸까.
일리아도 그 점을 콕 짚었다.
“고객님과 남편분의 관계 같지 않아요?”
“……좀 오묘하긴 하네요.”
슈페나는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조금 혼란스러웠다.
바로 받아들이기엔 스케일이 너무 큰 소식이 아니던가.
뭐, 따져보자면 리카도르와 자신이 굉장히 운명적으로 엮인 사이 같아서 기분이 막 나쁜 건 아니긴 한데….
일리아가 연애하는 친구를 얼레리 꼴레리 놀리는 것처럼 씨익, 웃으며 짓궂게 입을 떼었다.
“옛날 옛적 연이 닿은 사이가 환생하고 또 회귀해서 지금 이렇게 마주 보고 있는 걸지도 모르죠. 운명처럼.”
‘운명.’ 슈페나의 속눈썹이 크게 한들대었다.
“내가 슈페나, 너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신부로 만들어줄게!”
아니, 그건 신랑이 해야 할 대사가 아닌가요, 언니…….
리헨테온과 카누스도 해맑게 쐐기를 박았다.
“제대로 된 결혼식은 치른 적이 없으시지 않습니까, 형수님. 그때는 저도 못 갔고요.”
-슈랑 형
-우리 슈페나 누나랑 리카도르 형아 결혼식에 갈 건데, 슈페나 누나도 와라!
영문은 모르겠지만, 졸지에 결혼을 당해버리게 생겼다.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159화
한바탕 폭풍우가 휘몰아치고.
체드윅 가 식구들은 침착해진 태도로 사정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성인이 된 이후에 한 번 더 결혼식을 올리기로 하지 않았니. 그동안 영 이런저런 일로 영 시간이 나지 않아서 망설이다가 이번 기회에 준비해보았단다. 며늘아가.”
칸이 슈페나와 손을 맞잡고는 상냥하게 이야기했다.
슈페나는 골몰히 사색에 빠졌다.
그러고 보니 체드윅 가에 입성하고 소꿉장난 같은 연회 느낌의 결혼을 하게 되었을 때.
어머님이 그랬었지.
성인이 되고 나서 정식으로 성대한 결혼식을 열어주겠다고.
아하, 그제야 가족들이 왜 이런 일을 벌였는지 알 것 같았다.
슈페나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리리엘라가 그런 그녀의 행동을 뭐라 해석했는지 티 나게 곁눈질하며 눈치를 살폈다.
“슈페나, 혹시 싫어? 우리가 너무 막무가내였나?”
“아뇨. 그럴 리가요, 리리 언니.”
슈페나는 부러 말꼬리를 늘이며 애교스레 손사래를 쳤다.
조금 놀라긴 했으나, 싫지는 않았다.
애초에 자신이 기억하지 못했을 뿐, 어머님이 미리 얘기했던 일이기도 했고.
한결 화기애애해진 분위기에 리헨테온이 슈페나를 향해 헤헤, 무해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더니 솔깃한 이야기를 건네었다.
“형수님, 이번 기회에 파티도 하고 형님과 오붓하게 신혼여행도 다녀오시죠.”
-맞아, 슈페나 누나!
카누스도 옆에서 거들었다.
신혼이라기엔 어폐가 있었지만,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제안이었다.
단둘이 독수리 영지에 다녀오면서 나름 기차 데이트를 즐긴 적이 있긴 하지만, 그건 사절단으로서 일을 하러 간 게 아니던가.
“리카도르랑 어디 멀리 놀러 간 적은 없긴 하지.”
슈페나의 입가에 사르르, 미소가 번졌다.
그 모습을 본 체드윅 가 식구들의 얼굴에는 덩달아 말간 웃음꽃이 피었다.
그들은 곧장 머리를 맞대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리리엘라가 세계지도를 가져와 펼치곤 빨간 색연필로 이곳저곳을 체크했다.
“신혼여행 장소로는 어디가 좋을까? 가고 싶은 곳이라도 있어, 슈페나?”
“글쎄요. 딱히 없는데.”
여긴 너무 더울 것 같고 저긴 또 치안이 안 좋기로 유명한 지역이라 무서운데.
딱히 끌리는 여행지가 없었다.
그리 고민하던 찰나, 어머님이 지도 바깥쪽에 늘어져 있는 섬들을 가리켰다.
“경치 좋고 물 좋은 섬에서 한번 살아보고 싶다고 그러지 않았었니, 며늘아가?”
“아….”
슈페나는 침음을 흘렸다.
‘일단 리카도르랑 이야기를 해봐야겠지. 혼자 결정할 문제는 아니니까.’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던 슈페나가 그 문서들을 챙겨 도도도도, 사라졌다.
“그럼 리카도르한테도 물어보고 올게요!”
한편, 리카도르는 집무실 한쪽에 놓인 기다란 소파에서 낮잠을 자다가 깨어났다.
‘또 그 꿈을 꿨어.’
사실 그는 그간 계속 꿈을 꿔왔었다.
회중시계 덕분에.
슈페나의 것처럼 신물은 아니지만, 이 회중시계는 나무늘보의 권능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던가.
게다가 신의 땅에 깃들어있던 신비로운 힘으로 인해 회중시계가 가진 효능이 극대화된 참이었다.
그러니 리카도르는 기억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 꿈의 시작에서 나는 늘 죽고 마는군.”
리카도르가 마른세수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난 코코아를 좋아하는 게 맞는 것 같아.
꿈속의 꿈.
그 이상한 상황 속, 재잘재잘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천천히 마음을 열어가던 여자아이.
슈페나.
리카도르는 그녀를 만날 수 있어 즐거웠다.
늘 꿈을 꾸고 싶을 정도로.
그래서 그리 맹세하며 시간을 되돌렸던 걸까.
-내 영혼을 걸어서라도 널 살려줄게. 그러니 너도 나와 약속해줘. 다음 생엔 꿈이 아닌 곳에서도 나를 만나주겠다고.
이렇듯 리카도르는 그때도, 지금도, 슈페나를 사랑하고 있었다.
“하아. 너무 오래 잔 건가. 부인한테 전해줄 게 있는데.”
그가 잠시 제자리에서 숨을 골랐다.
그리고는 저벅저벅, 발걸음을 옮겨 바로 옆 테이블에 올려두었던 붉은 장미 꽃다발을 집었다.
그 꽃다발 안에는 작은 카드와 함께 고급스러운 정사각형 모양 벨벳케이스가 숨겨져 있었다.
이건 일종의 프러포즈 선물이었다.
가족들이 결혼식을 새로 열어야겠다며 의욕을 불태우지 않았던가.
을 불
‘부인이 마음에 들어 할까.’
엄지손가락으로 꽃다발을 조심스레 쓸어내리던 리카도르의 푸른 눈망울이 초조하게 가라앉았다.
살짝 자신은 없었다만, 일단 전해주는 수밖에.
리카도르가 방을 나서고자 문고리를 잡았다.
그런데 벌컥, 방문이 열렸다.
그 열린 문 너머로 보인 이는 슈페나였다.
“부인……?”
리카도르의 두 눈이 답지 않게 커다래졌다.
그건 슈페나도 마찬가지였다.
꽃을 든 잘생긴 남편이라니.
심장박동이 저절로 빨라지는 듯한 광경에 그녀가 동공 지진을 일으켰다.
“그 꽃다발……. 아니, 가족들이 신혼여행지로 섬은 어떠냐고 해서 너랑 같이 고르려고.”
그녀는 횡설수설 말을 더듬었다.
그러다 불현듯 리카도르도 결혼식에 대한 걸 알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 어머님이 결혼식을 다시 올려 주겠다고 하셨는데 알고 있었어?”
“내가 먼저 프러포즈하면서 알려 주려고 했는데. 선수를 뺏겼네.”
그에 리카도르는 부러 입꼬리를 끌어올리곤 능청스레 꽃다발을 내밀었다.
‘놀래주려고 했는데 실패했네.’
그러면서 진심 어린 음성으로 고백했다.
“나랑 결혼해줘서 고마워, 부인.”
“…나야말로 고마워.”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슈페나가 떨리는 표정으로 반 박자 늦게 대답했다.
‘이런 걸 받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꽃향기가 달아서인지 자꾸만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 리카도르는 꽃다발안쪽에 숨겨놨던 벨벳 케이스를 꺼내고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앞으로도 이렇게 평생 함께해줘.
어렸을 때 서로 꼬부랑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도 신발끈을 묶어주겠다고 약속했던 것처럼.”
슈페나의 손가락에 심플한 디자인의 은색 반지가 얽혔다.
“…사이즈 딱 맞췄네?”
그녀가 손을 들어 천장 조명에 반지를 이리저리 살피며 짐짓 울먹였다.
리카도르는 물기 어린 슈페나의 눈을 살살 문질렀다.
“왜 울려고 그래?”
“좋아서. 너무 좋아서.”
그 기꺼운 답변에 둘의 입가에는 기분 좋은 웃음이 번졌다.
그리고 한 달가량의 시간이 흘러 결혼식 날이 되었다.
결혼식은 체드윅 가에서 가장 큰 파티 홀을 통째로 사용하기로 했다.
예전처럼 야외 정원에서 하고 싶었으나, 날씨가 많이 쌀쌀해진 탓에 내린 결정이었다.
파티 홀 안쪽에 마련된 신부대기실 안.
“오늘 정말 아름답구나.”
칸이 꽃단장을 한 슈페나를 바라보며 차마 만지지는 못한 채, 눈물을 글썽였다.
고풍스러운 샹들리에 조명 아래에서 더욱 반짝이는 하늘색 머리칼, 올망졸망 별빛이 박힌 듯 생기 있는 밤색 눈동자.
그리고 꽃잎이 수놓아진 것처럼 하늘하늘하게 슈페나의 몸을 감싼 하얀색 웨딩드레스.
누가 봐도 예쁘고 행복한 신부의 모습이었다.
칸은 옷매무새를 흩트리지 않도록 조심조심 슈페나를 껴안았다.
“새삼스럽겠지만 결혼 축하한단다.
며늘아가.”
“새삼스러우시겠지만 어머님두 이렇게 예쁜 며느리 보게 된 거, 축하드려요.”
슈페나가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볼을 손등으로 꾹꾹 누르며 아무렇지 않은 척 새침을 떨었다.
리헨테온도 어느새 들어와 한껏 호들갑을 떨었다.
“오늘 굉장히 아름다우십니다, 형수”
그 유들유들한 도련님의 말은 이어질 수 없었다.
“아, 왜 때리냐고요, 형님!”
“내 부인은 누가 봐도 예쁘니까 너까지 말 보탤 필요 없어.”
갑작스레 등장한 리카도르가 여느때처럼 도련님의 등짝을 사랑 어린 손길로 보듬었으니까..
형제는 싸우면서 크기 마련이었다.
그나저나 리카도르 정말…….
만지면 부드러울 것같이 결 좋은 새하얀 머리칼, 깊은 호수를 옮겨다 놓은 듯 맑고 푸르른 눈동자.
붉은 보석 장식을 박아놓은 깔끔한 제복 차림이 누가 봐도 잘나고 행복한 신랑의 모습이었다.
슈페나의 눈매가 반달 모양으로 휘었다.
“…오늘 되게 멋있네, 리카도 르.”
그 칭찬에 리카도르는 살짝 부끄러워하며 괜스레 헛기침했다.
그리곤 고개를 기울여 나지막한 저음으로 슈페나의 귓가에 속살대었다.
“너도 예뻐.”
옆에서 그 꽁냥거림을 들은 카누스가 휴, 한숨을 쉬었다.
-에휴, 커플들이란.
그때, 누군가가 엉엉 울며 슈페나에게 요란히 응석을 부렸다.
“………흐어엉, 슈페나.”
리리엘라였다.
아직 결혼식도 시작 안 했는데 벌써부터 눈물샘이 터진 얼굴.
리리엘라는 짓무른 눈가를 비비며 슈페나에게 꼭꼭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여행 가서 신나게 놀고 얼른 돌아와야 해. 보고 싶을 거야.”
슈페나는 아이를 어르듯 다정히 리리엘라를 다독였다.
“제가 아예 다른 곳에 이민 가는 것도 아닌데 너무 슬퍼하지 말아요, 리리 언니.”
“응.”
리리엘라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긴 또 팔불출이고, 이제 곧 식시작인데 다들 얼른 나갈 준비 해요. 시간이 없어, 시간이!
그 광경에 절레절레 고개를 젓던 카누스는 바쁘게 꼬리꼽터를 돌렸다.
몇분 후,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식은 서로 눈이 마주치면 까르르웃음을 터뜨릴 만큼 도란도란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덕분에 무사히 반지 교환식까지 마치고, 슈페나는 일전에 받았던 프러포즈반지 옆 손가락에 끼워진 결혼반지를 보며 수줍어했다.
그 순간, 누군가가 비장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뽀뽀해!”
“!”
그 한마디가 도화선이 되어 하객들은 일정한 박자로 박수를 치며 휘유, 휘파람을 불었다.
-그래! 갈겨버려!
한껏 신이 난 카누스는 꼬리를 미친 듯이 흔들었다.
럽, 럽, 럽.
악공들도 자연스레 연인끼리의 입맞춤을 부르는 사랑 노래를 연주했다.
“어쩌지, 부인.”
리카도르가 슈페나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이 상황을 즐기는 게 명백한 어투.
“뭘 어떡해.”
슈페나는 리카도르가 하고 있는 넥타이를 움켜쥐곤 끌어당겨 박력 넘치게 입을 맞추었다.
슈페나의 것과 맞물린 리카도르의 입매가 기분 좋게 올라갔다.
서로의 입술이 잠시 떨어졌다.
그는 이내 그녀의 뺨을 부드러이 감싸 쥐곤 모든 호흡을 앗아가려는 듯 깊이 파고들었다.
결혼식의 입맞춤은 제법 길고 달았다.
그렇게 어느 정도 식의 순서가 마무리되고, 결혼식의 마지막 하이라 이트만 남았다.
슈페나는 가족들을 바라보며 잔망스레 목소리를 높였다.
“부케 던질까요?”
“고객님, 나나나! 연습한 대로만 던져요. 잘 받아볼게요! 어…..…?”
리헨테온의 옆에 팔짱을 끼고 서 있던 일리아가 두 팔을 걷어붙이곤 맹렬한 기세로 투지를 불태웠다.
하지만…….
“응?”
의아한 슈페나의 외마디 의문이 새었다.
“결혼 축하드려요, 작은 마님.”
어느새 나타나 부케를 받은 아스터가 꾸벅 인사했다.
그녀는 잘못을 하긴 했지만,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열심히 사회봉사를 하고 있었다.
이제 누군가에게 베푸는 삶을 살겠다.
아무튼 미운 정이 들었기에 아스터도 결혼식에 초대한 참이었다.
“응, 고마워.”
슈페나의 입매가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그녀는 리카도르의 어깨를 툭, 치곤 해맑게 이야기했다.
“그럼 이제 피로연을 즐겨볼까?”
“가실까요. 부인?”
리카도르는 눈치 있게 슈페나와 손을 맞잡곤 파티홀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살랑살랑 경쾌한 선율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둘은 이제는 능숙하게 합을 맞추어 왈츠를 추었다.
리카도르가 슈페나의 허리를 끌어 안더니 진심을 담아 입술을 달싹였다.
“사랑해, 슈페나.”
“사랑해, 리카도르.”
그녀도 세상을 다 가진 듯 활짝웃고는 화답했다.
꼭 리카도르와 자신의 사이가 운명 같다고 생각하며.
문득 일리아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와 함께 자신을 끈질기게 따라 다녔던 예언도 생각났다.
혹자는 파랑새가 없다고 말한다.
글쎄.
그건 바로 곁에 있는 행복을 아직 알아채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리카도르와 내가 환생하고 또 회귀하여 만난 사이든 아니든 상관없어.’
지금 이렇게 사랑하고 있고, 앞으로도 사랑할 거였으므로, 파랑새가 의미하는 것들에 걸맞게 꿈처럼, 희망처럼 열렬하고도 영원히.
그러니 파랑새는 있다.
여기 너의 옆에.
‘우리의 행복은 서로가 있기에 완성되는 것일 테니까.’
슈페나는 리카도르를 바라보았다.
리카도르도 찬찬히 슈페나를 눈에 담았다.
서로의 시선이 결코 떨어지지 않을 듯 촘촘하게 얽혀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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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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