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uebird Lady and The White Lion Family RAW novel - Chapter (3)
백사자가문의 파랑새 마님 3화(3/21)
곤히 잠든 모양새였다.
그녀가 도로 천장에 그려진 사자 그림으로 눈길을 돌리곤 허탈하게 실소했다.
‘뭐야, 쟤 왜 이렇게 안전해?’
밤은 점점 깊어져 갔다.
슈페나는 말똥말똥 눈을 깜박이다 구석에서 새우처럼 몸을 웅크렸다.
늘 홀로 잠들었던 침대에선 타인의 온기가 느껴졌다. 낯설고 말로 형용하기 힘든 감각이 찾아왔다.
‘결혼식을 마쳤으니 정말 남주의 부인이라고 할 수 있겠네.’
그 사실이 뒤늦게 실감 났다.
그렇게 슈페나는 슈페나 체드윅이 되었다.
***
다음 날 아침.
“으아, 잘 잤다.”
슈페나는 양팔을 쭉 벌려 기지개를 켰다. 힐끗 창밖을 내다보니 벌써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늦잠을 자서인지 몸이 개운했다.
다만, 한 가지 의아한 점을 발견했다.
‘언제 내가 이불을 다 차지한 거지….’
무심코 옆을 살피자, 리카도르는 보이지 않았다.
기린 인형도 어느 틈에 침대 밑으로 떨어져 있었고,
‘혹시 내 잠버릇이 험해서 도망간건 아니겠지.’
슈페나는 괜히 머리를 긁적였다.
“어디 간 거람.”
그래도 정략결혼 부부가 으레 첫날밤 아침에 맞이할 머쓱한 상황은 겪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지만 인사하기 부끄럽잖아.’
그녀가 꾸물꾸물 침대에서 기어나와 스트레칭을 했다.
똑똑—
때마침, 누가 방문을 두들겼다.
“일어났니, 며늘아가?”
어머님이었다.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17화
웬일이시지?
어머님이 방에 직접 찾아오는 일은 드물었기에 갸웃 고개가 기울었다.
슈페나는 신방에 딸린 작은 접견실로 어머님을 안내했다.
칸이 손수 차를 우려 잔에 졸졸졸 따르며 말을 건넸다.
“며늘아가, 간밤에 잘 잤니?”
“네에.”
슈페나는 은은한 향의 차로 목을 축이며 답했다.
아직 잠이 덜 깨서인지 말끝이 묘하게 늘어졌다.
비몽사몽 눈가를 비비적거리던 슈페나의 표정이 이내 극적으로 변했다.
“어? 근데, 어머님 손 다치셨어요?”
생채기가 가득한 어머님의 손끝.
슈페나는 걱정스러움이 가득한 어투로 질문했다.
칸이 괜찮다는 듯 우아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도리어 살뜰히 며늘아가의 안색을 훑어보았다.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간밤에 하녀들이 또 다른 일을 벌였다는 소식은 없었지.’
칸은 하녀들에게 감시를 붙이곤 결혼식 때의 소동과 관련된 정보를 알아보았었다.
혹여나 관여된 이들이 더 있을까 싶어서.
그리고 증좌를 확실히 모아야 만족스럽게 일을 처리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 결과, 하녀들의 짓이 맞는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얻은 상태였다.
‘며늘아가가 상처받지 않게끔 말해야 할 텐데.’
당최 사근사근한 위로엔 소질이 없는 터라 고민이었다.
칸이 살짝 비어있는 슈페나의 찻잔을 따스하게 채워주며 안부를 물었다.
“별일 아니란다. 며늘아가, 너야말로 어제 일로 많이 놀라진 않았고?”
어제 일이라면….
“아, 그 뱀이요? 전 괜찮아요.”
슈페나가 밝게 마주 미소 지으며 일견 씩씩한 답변을 입에 담았다.
그 모습을 본 칸의 속눈썹이 동요를 내비치 한들대었다.
어머님은 찻잔을 입가에 가져다 대더니, 끝 음이 살짝 떨리는 어투로 이야기했다.
“네가 놀라진 않았나, 그런 것부터 살폈어야 했는데. 다 내 불찰이란다.”
음? 왜 어머님이 자책하는 거지?
평상시 감정표현을 잘 하지 않는 어머님이 아니던가.
묘하게 감정이 풍부해진 언사에 슈페나가 눈만 끔벅였다.
그러다 어색하게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니에요. 어머님.”
칸은 안도하듯 눈썹을 늘어뜨리더니 재빨리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리곤 달그락, 찻잔을 내려놓으며 고고하게 허리를 곧추세웠다.
“다행이군.”
그 말을 끝으로 테이블에는 묘한 정적이 흘렀다.
‘며늘아가한테 이야기를 꺼내긴 해야 하는데.’
칸이 힐끗 슈페나를 쳐다보았다.
슈페나도 슬쩍 칸의 낯을 곁눈질했다.
그러다 보니 서로 짧고 반복적인 아이컨택을 하게 되었다.
칸이 결심했다는 듯 마른침을 꼴깍 삼키던 찰나, 슈페나 또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았다.
‘지금 여쭤봐야겠지?’
결혼식 때 나타난 검은 뱀. 그리고 수상했던 하녀들의 행동.
이 모든 걸 알아내고 원하는 대로 매듭지으려면 밑밥을 잘 깔아둬야 할 테니까.
슈페나가 은근한 어조로 먼저 조심스레 입술을 달싹였다.
“그런데 그 뱀은 도대체 정체가 뭐래요? 막 어머님처럼 전음을 보내던데….”
“우두머리 뱀 가문의 꼬맹이라는구나.”
“예에?”
생각지도 못했던 답변에 슈페나의 두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
칸이 골치 아프다는 듯 머리칼을 쓸어 넘기면서 설명을 더했다.
“이번에 뱀 가문이 내분으로 뒤숭숭하다는군. 그를 피해 도망쳐온 새끼란다.”
사자 영역에 들어온 명문가의 뱀이라. 흔치 않은 경우였다.
‘설마…?’
무언가 짚이는 게 있었다.
맹렬히 머리를 굴리고 있는 사이, 어머님이 고저 없는 음성으로 상황을 정리했다.
“자세한 건 조사 중이니 금방 알아낼 수 있을 게야.”
미묘한 기시감은 점차 진해졌다.
슈페나는 우선 조금 더 파고들어 물어보는 걸 선택했다.
“그럼 어쩌시려고요?”
“일단은 데리고 있어야지.”
“…아아, 그렇군요.”
미온적으로 맞장구친 그녀가 살며시 시선을 아래로 비껴 내리고는 입을 떼었다.
“어, 혹시 그 뱀 이름이 뭔지 아세요?”
그걸 알면 확실히 알쏭달쏭했던 사실을 기억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칸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카누스 블랙.”
아, 카누스 블랙!
뭔가 퍼뜩 생각났다는 듯 슈페나의 몸이 움찔거렸다.
포지션은 여주의 조력자이자 천재 과학자, 그리고 뱀 가문의 막 내아들.
소설 속에서 제법 비중 있게 다뤄졌던 인물이었다.
여주가 위기에 빠질 때마다 특유의 지혜로 도와주는 파워 오지라 퍼였지.
‘정말 보통 뱀이 아니었잖아!’
심지어 발명의 귀재라서 혁명적인 사업아이템도 많이 만들어냈으니까.
‘그 뱀이랑 동업을 할 수 있다면 벼락부자가 되는 건 일도 아닐 텐데.’
아무래도 꼬마 뱀과는 취조 대신 친근한 대화를 해봐야 할 것 같았다.
“그건 왜 묻는 거니?”
갑자기 혼자만의 세계에 빠진 듯한 슈페나를 의아하게 쳐다보던 칸이 말을 붙였다.
“헤헤, 그냥요.”
그녀가 애교스럽게 잔망을 떨며 얼렁뚱땅 화제를 전환했다.
“그건 그렇고 어쩌다 뱀이 식장에 나타난 건지 단서라도 잡혔나요?”
“뭔가 알고 있는 모양이구나.”
계속해서 결혼식 때 일에 대해 파고드는 며늘아가의 행동.
칸은 기민하게 깨달았다.
슈페나도 무언가 알아챈 게 있다고,
“네, 사실 짐작 가는 범인이 있어서요.”
슈페나가 순순히 긍정했다.
그러고는 씨익 웃으며 자못 담대하게 본심을 드러냈다.
“제가 해결해 봐도 될까요?”
범인이 누군지 대충 느낌 오고, 밝혀낼 방법은 생각해뒀고, 그 이후에 쏠쏠하게 이득 볼 것도 있을 듯하고.
‘이런 기회를 놓칠 이유가 없지.’
그녀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러렴.”
다행히도 허락이 떨어졌다.
그와 함께 슈페나의 입가에는 싱글벙글 웃음꽃이 피었다.
칸이 그런 그녀의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요런 경우는 계산에 없었는데.
기특하군.’
독수리 영지에서도 며늘아가는는제법 놀라운 계책을 보여주었지.
불현듯 칸은 슈페나가 앞으로의 일들을 어떻게 헤쳐나갈지 궁금해졌다.
‘하녀들에 관한 건, 굳이 얘기할 필요가 없겠어.’
이제 슈페나가 풀어낼 일이 아닌가.
원래의 목적대로 말한다면, 오히려 며늘아가의 청을 뭉개버리는 못난 배려가 될 것이 뻔했다.
칸이 해야 할 최선은 슈페나의 행동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것뿐.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게…….
칸이 답지 않게 뜸을 들이더니 슈페나를 불렀다.
“..……그, 며늘아가.”
“네, 어머님!”
“뭐 필요한 건, 없니?”
어머님의 입에서 짐짓 비장하게 나온 말은 꽤나 뜻밖이었다.
슈페나가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저었다.
“네. 없는데요.….….”
그에 칸의 표정은 시시각각 달라졌다.
살며시 올라간 눈썹과 눈에 띄게 굳어버린 눈매.
못마땅해하는 것 같기도, 시무룩해진 것 같기도 한 오묘한 표정이었다.
슈페나는 잽싸게 말을 바꿨다.
“없었는데, 있습니다.”
그제야 어머님이 입매를 끌어 올리며 여유롭게 손으로 턱을 매만졌다.
“말해보렴.”
“어, 사실 필요한 거라기보다는…. 진범을 잡으면 제 마음대로 처벌해도 될까요?”
“당연하지. 넌 체드 가의 차기 안주인이잖니.”
칸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며늘아가가 직접 나서서 해결해 보려는 태도가 썩 대견했으니.
슈페나가 얼떨떨하게 눈을 깜박이다가 꾸벅 허리를 접었다.
“가, 감사합니다. 어머님.”
슈페나는 그러면서도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더니 생각했다.
‘어머님이 오늘따라 되게 다정하시네.’
원래도 상냥하게 대해주시는 편이었으나, 왜인지 더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았다.
정식으로 체드윅 가의 며느리가 되어서 그런가.
슈페나가 번지려는 웃음을 감추려 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그러는 사이, 칸은 무심한 척 손목에 찬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벌써 티타임을 마쳐야 할 정도로 시간이 많이 흘러버린 참이었다.
칸은 잠시 망설이다가 주섬주섬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러곤 도도한 말투와 함께 내밀었다.
“그리고 이건, 오다 따왔다.”
옷 주머니에서 따끈하게 데워진 형형색색의 나무열매.
‘첫 만남 때, 며늘아가가 나무열매를 가장 좋아한다고 했었지.’
잔가시에 손까지 찔려가며 퍽 신경 써서 채집한 선물이었다.
직접 애를 써서 준비한 게 더 의미 있을 테니까.
슈페나는 두 손으로 공손히 열매를 건네받았다.
‘내가 좋아하는 라즈베리! 근데 설마 어머님 손가락에 있던, 자잘하게 베인 듯한 상처…….’
나무열매를 직접 가져오느라 생긴 건 아니겠지?
슈페나가 반신반의하면서 칸의 정곡을 찔렀다.
“너무 감사해요. 그런데 이거 혹시 어머님이 하나하나 따오신 거예요?”
칸의 볼에 면밀히 보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할 만큼 연한 홍조가 떠올랐다.
어머님은 부러 목을 가다듬으면서 대답을 회피했다.
그러더니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큼, 그만 가보마.”
칸이 사자답게 엄청난 운동신경을 자랑하며 쏜살같이 사라졌다.
“어머님, 어머님?”
결국, 슈페나는 혼자 방 안에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그녀가 멋쩍게 뒤통수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진짜 손수 따오신 건가 봐…….”
***
그리고 몇 시간 뒤.
슈페나는 어머님한테 일임받은 권한으로 그 꼬마 뱀을 불러왔다.
본격적으로 범인을 잡아볼 차례였다.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18화
검은색 꼬마 뱀은 신방 한가운데에 엎드린 채, 삐진 티를 내며 슈페나를 홀기고 있었다.
“어… 그, 안녕?”
슈페나가 바닥에 쪼그려 앉아 서 먹서먹하게 손을 흔들며 꼬마 뱀에게 먼저 인사했다.
– 흥!
꼬마 뱀, 카누스는 픽 토라져 고개를 돌렸다.
그도 그럴 것이, 독사라는 이유로 입마개가 채워져 슈페나에게 배달되었으니까.
시작부터 순탄치 않은 뱀의 반응에 그녀는 삐질 땀을 흘렸다.
카누스가 꼬리를 휘둘러 후드리 찹찹 대리석 바닥을 내리쳤다.
그러면서 슈페나의 머릿속으로 불만스레 음성을 쏘아 보냈다.
-이 답답한 입마개부터 어떻게 해봐! 너무 비수인적이라고!
슈페나는 입술을 삐쭉 내밀며 거절했다.
“네가 날 안 문다는 보장이 없잖아.”
아.
더구나 저 뱀은 전적이 있지 않은가.
이 상태로도 대화는 가능했고, 뱀은 꼬리로 슈페나의 발바닥을 콕 찌르더니, 한심하다는 듯한 뉘앙스로 되받아쳤다.
-사자들 소굴에서 그런 짓을 하겠냐? 너 사자 가주의 며느리라며,일리 있는 얘기에 조금 고민이 되었다.
이렇게 실랑이하다간 친근한 대화는 고사하고 말싸움으로 번질 것 같아서.
그걸 알아챈 모양인지 카누스는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교활하게 아양을 떨었다.
-우웅, 나 아직 일곱 짤이라서 이런 건 너무 가혹한…….
천년의 동정심도 휘발할 것 같은 애교였다.
슈페나는 저도 모르게 정색하며 싸늘한 눈빛으로 카누스를 내려다보았다.
티베트여우처럼 사정없이 찡그려진 슈페나의 밤색 눈과 동글동글한 카누스의 검은색 눈망울이 마주쳤다.
서로의 시선이 교차하여 무언의 시그널이 오가고, 카누스가 쳇, 이죽거리더니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알았어. 우리 가문의 명예를 걸고 맹세할게.
그 진위를 확인하려는 듯 슈페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아니면 저번의 그 이상한 힘을 써도 되잖아. 그거, 네 짓 아니었어?
염력이 눈에 확 드러나는 능력은 아니라 확신하진 못하는 건가.
‘그럼 대충 두루뭉술하게 넘어가야겠네.’
딱히 이능에 대해 떠벌리고 다닐 생각은 아니었으니까.
슈페나는 못 알아들은 척 한 차례 어깨를 으쓱거리곤 카누스에게로 손을 뻗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우선 풀어줄게.”
-구랭. 시치미 떼는 것 같긴 한데, 나도 비밀로 할 테니까 얼른 풀어줘!
저런 약삭빠른 뱀 아가를 봤나.
슈페나가 불안하게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입마개에 달린 끈을 마저 끌렀다.
카누스는 드디어 살 것 같다는 듯 꼬리를 흔들었다.
미끈하고 유연한 꼬마 뱀의 몸이 꾸물꾸물 리듬을 탔다.
기쁨의 춤이었다.
슈페나는 손으로 눈을 가리곤 절 레절레 고개를 젓다 말을 건넸다.
통성명은 해야 할 듯해서.
“난 슈페나야.”
-어쩌라고. 뭐, 포식자랑 피식자 – 뭐끼리 하하호호 자기소개라도 하자고?
카누스는 사춘기 소년처럼 예민하게 빈정대었다.
슈페나가 슬며시 저 구석에 놔두었던 입마개를 도로 들어 올렸다.
“이거 다시 씌운다.”
실은 머릿속에 생각을 전달하는 형식으로 말하는 거라서 마개를 채운다고 조용해지진 않았다만.
– 난 카누스 블랙이야, 슈페나 누나!
카누스가 해맑은 음성으로 누구보다도 빠르게 태세를 전환했다.
영리한 뱀다운 처세술이었다.
“그래, 만나서 반가워.”
슈페나도 방긋 눈웃음을 지었다.
카누스가 맹수로서 착잡하며 수군거리더니, 이내 쌈박하게 악수를 청했다.
– 에휴, 어쩌다 비상식량이랑 말튼 사이가 됐는지 모르겠지만………
꼬리 인사나 하자!
아무튼 슈페나와 카누스는 다소곳이 마주 앉아 인사를 하게 되었다.
한 차례 인사 시간이 끝난 뒤, 슈페나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물어볼 게 있는데 사실대로 대답해줄 수 있어?”
하지만 슈페나의 말을 들은 카누스는 아무런 반응도 내보이지 않았다.
방 안에 묘한 적막만이 가득 찼다.
그 고요함을 깨고 꼬마 뱀이 빨갖고 가는 혀를 내밀어 입맛을 다셨다.
-뭐야, 내가 필요한 거야?
아직 세상물정도 잘 모를 아가 뱀의 눈이 영민하게 번뜩였다.
맹수는 맹수라는 듯이.
카누스는 일부러 말꼬리를 늘이며 잔뜩 거드름을 피웠다.
– 으음, 내 입이 조금 많이 비싸서 말이지….
뱀들은 원체 셈이 빠른 종족이었다.
더구나 원작에서도 카누스는 호락호락한 성격과 거리가 멀었다.
여주인공의 조력자였으나, 친해지기 전까진 여주도 속여먹지 않았던가.
슈페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새침하게 이야기했다.
“그래? 그럼 어쩔 수 없네. 다른 방법도 있으니까.”
그런 그녀의 태도에 카누스는 말똥말똥 눈을 깜박였다.
돌아가는 상황을 가늠하려는 듯 꼬마 뱀의 눈매가 세모꼴로 가늘게 좁혀졌다.
-일단 말은 해봐. 들어주긴 할게.
꼬마 뱀이 일견 거만하게 말하곤 대리석 바닥에 푹 엎어졌다.
잘 꼬드기면 큰 대가를 주지 않아도 넘어올 듯했다.
‘일단 떡밥을 조금 풀고.’
슈페나는 조금 전의 카누스처럼 딴청을 피우고는 뜸을 들였다.
“으음, 그게…… 생각해보니까 네 도움은 없어도 되겠다!”
그에 카누스가 언짢은 기색을 내비치며 똬리를 틀려는 듯이 몸을 둥글게 말았다.
슈페나는 그 광경을 그저 슥 훑어본 뒤,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옆에 있는 책상을 뒤져 무언가를 찾아냈다.
어제 하녀들에게서 슬쩍한 가죽주머니.
리카도르의 말로는 이 안에 칼립스 나무껍질 가루가 들어있다지.
그녀가 은근한 말투로 무심한 척 주머니를 열었다.
“근데 너 이거 뭔지 알아?”
입자가 고운 고동색 가루가 저절로 공기 중을 부유했다. 방 안에 약간 쌉싸름한 향이 퍼져나갔다.
카누스의 꼬리가 신이 난 강아지처럼 붕붕 한들대었다.
-킁킁, 완전 좋은 냄새.…!
뱀수
꼬마 뱀은 아이같이 좋아하며 슈페나에게로 돌진했다.
그녀가 슬그머니 뒷짐을 지곤 주머니를 숨겼다. 그와 함께 자연스레 미끼를 던졌다.
“어제 네가 내 발에서 맡았던 그 맛있는 냄새도 이거지? 칼립스 나무껍질 가루.”
-응!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거야!
긍정이었다.
근데 이 가루는 뱀 전용 캣닙 같은 건가.’
슈페나가 손으로 턱을 쓸며 생각했다.
카누스는 그저 맹렬히 그녀의 움직임을 쫓았다.
-누나, 이거 어디서 났어?
엄청 간절하게 물어보면서.
‘걸려들었어!’
슈페나가 뿌듯하게 미소 지었다.
꼬마 뱀은 마음에 드는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생떼를 부렸다.
수틀리면 슈페나의 다리 위로 올라타 훔쳐 가기라도 할 기세로.
-나 이거 줘.
“싫은데.”
-물어버린다? 내 독 완전 맹독이거든?
단호한 거절에 힝, 울상을 짓던 꼬마 뱀은 악동처럼 겁을 주었다.
쩌어억, 벌어진 입 안에서 뱀 특유의 날카로운 송곳니가 매섭게 번뜩였다.
‘이건 조금 위험한데..’
어린 뱀이라도 작은 새의 천적이지 않은가.
본능적인 두려움이었다.
‘입마개를 괜히 풀었나?’
슈페나는 살짝 뒤로 주춤 발을 물리고는 애써 천연덕스레 받아쳤다.
“안 문다며. 가문 이름까지 걸었는데 한 입으로 두말하게?”
-아, 맞다.
그제야 카누스는 정신을 차린 듯 수긍했다.
퍽 위협적이었던 입도 얌전하게 다물렸다.
‘큰일 나는 줄 알았네.’
휴, 슈페나가 남몰래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꼬마 뱀이 짐짓 어른스럽게 제안했다.
-그럼 그 물어본다는 거, 거짓말 하나도 안 하고 알려줄게. 대신이 가루 나한테 줘.
슈페나가 카누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꼬마 뱀이 눈치 있게 그녀의 팔을 타고 올랐다.
그녀가 카누스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는 의자를 빼어 앉았다.
곧이어 슈페나는 작은 그릇에 가루를 반쯤 옮겨 담았다.
“이건 선불.”
슈페나가 카리스마 있어 보이도록 눈에 힘을 주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네 대답에 따라 나머지를 줄지 말지 결정할 거야.”
꼬마 뱀을 통해 정말 그 하녀들이 범인인지 확인할 계획이었다.
맞는다면 증인으로 세울 거였고.
이런 슈페나의 계획을 알 리 없는 카누스는 뾰로통하게 혀를 찼다.
-칫, 쩨쩨하긴.
“네가 결혼식장에 난입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게 누구야?”
슈페나가 개의치 않고 의문을 던졌다.
꼬마 뱀이 아예 접시 안에 들어가 몸을 뒹굴면서 답했다.
-몰라.
“뭐어?”
슈페나가 동그랗게 눈을 뜨곤 불만스레 입술을 달싹였다.
카누스는 어쩔 수 없었다는 듯 사정을 설명했다.
-커다란 방에 갇혀 있을 적에는 잠만 잤단 말이야.
그는 뿌에엥, 눈물을 훔치곤 자신의 개고생 연대기를 늘어놓았다.
-난 하루 다섯 끼는 먹는데 여긴 세 끼밖에 안 주더라고. 덕분에 위가 줄었는지 이젠 괜찮아졌어!
이렇듯 주로 심심하고 배고파서 힘들었다는 내용이었다.
한창 주절주절 떠들어대던 카누스는 뒤늦게 결정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나중에 깨어났을 때 어떤 수인들이 들이닥치긴 했는데, 복면을 쓴 데다 바로 자루 안에 넣어버려서 모르겠어.
그 말을 들은 슈페나는 골똘히 고민했다.
“꽤나 치밀하게 행동했나 보네.”
카누스는 가루를 헤집으며 놀다가 흘낏 슈페나를 곁눈질했다.
그리고는 짧게 덧붙였다.
-진짜야.
나름 눈치를 보는 듯했다.
“그래?”
슈페나는 영혼 없이 호응했다.
그 반응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카누스가 서둘러 대안을 제시했다.
-아냐.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어.
그러니까 저거 줄 거지?
그녀는 솔깃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떤 방법?”
-목소리, 그리고 냄새. 내가 다른 뱀들보다 청각이 좋거든.
아, 얘 뱀이었지.
후각과 진동 감지 능력이 발달한 맹수.
슈페나는 한발 늦게 떠올린 사실에 이마를 탁, 쳤다.
그러는 사이, 카누스가 신속한 브리핑을 시작했다.
-분명히 20대 초반 암컷 사자의 냄새였어. 말하는 걸 들어보면 이 저택에서 일하는 느낌이었고.
그 말을 들은 슈페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역시 그 하녀들이 진범인 것 같네. 걔네 말고는 딱히 짚이는 자가 없는데.’
슈페나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자들은 많았으나, 아직 원작처럼 밉보일 만한 일은 없었으니까.
그녀는 손가락을 세워 툭툭, 책상을 두들기며 결론을 내렸다.
“그러면 그 수인으로 추정되는 이들을 네 앞에 데려다 놓으면 맞힐 수 있겠네?”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19화
-그럼, 그렇지.
카누스는 드디어 가루를 전부 받을 수 있을 거란 기대감에 눈을 빛냈다.
그렇지만 애석하게도 카누스에게 떨어진 건, 딱 반절에 해당하는 분량이었다.
-야, 누나, 말이 다르잖아. 사기 치냐?
“네 답변이 정확하진 않았잖아.”
슈페나는 새치름하게 변명했다.
카누스도 지지 않고 시니컬하게 받아쳤다.
-뭐래. 밑천 탈탈 털어서 알려줬더니, 누나 완전 도둑이네?
“나한테 잘하면 마저 줄게.”
지금 다 줄 순 없었다.
하녀들을 추궁할 증거로 쓸 건 남겨둬야 했으니.
그런 속내를 모르는 꼬마 뱀은다소 삐딱하게 대꾸했다.
-왜, 배라도 까뒤집어서 보여줘?
슈페나가 떨떠름하게 마른침을 삼키곤 무시로 일관했다.
슈페나가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자, 사나웠던 카누스의 언행은 이윽고 손바닥 뒤집듯 바뀌었다.
-우웅, 나 똑땅해!
카누스는 결국…… 재롱을 부리기 시작했다.
꼬마 뱀이 책상 위를 데구르르구르며 잔망스레 윙크하는 광경.
‘분명 독사인데, 경계할 필요가 없을 듯한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슈페나가 손으로 미간을 부여잡으며 혀를 찼다.
카누스는 못 들은 척 계속해서 망할 애교를 시전했다.
슈페나도 더 이상 관심을 주지 않고 혼자만의 사색 시간을 가졌다.
‘어쨌든 이제 그 하녀들을 불러서 물어보면 되겠네.’
그리 다짐하고 있을 무렵, 작은 노크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벌어진 문틈으로 보인 건, 리카도 르였다.
그가 방 안에 들어오자마자 냉담하게 혼잣말했다.
“…파충류 냄새.”
미세하게 찌푸려진 미간, 원래의 반듯했던 선을 잃어버린 눈썹, 만년설처럼 차가운 미성.
그는 왜인지 모르게 조금 신경질이 난 듯한 낯빛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사자는 아무에게나 제 공간을 허락하지 않는 고고한 영역 동물이었으니까.
슈페나는 멀뚱멀뚱 리카도르를 쳐다보았다.
그러던 중, 돌연 목에서 서늘하고 미끄덩한 비늘의 감촉이 느껴졌다.
‘왜 꼬마 뱀이 내 목덜미에 매달려있는 걸까.’
카누스는 슈페나의 목을 꼬리로 찰싹찰싹 가볍게 두드리며 칭얼대었다.
-누나, 저 사자 좀 어떻게 해봐!
서늘한 기세의 리카도르를 보고 겁을 집어먹은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느닷없이 들러붙다니.
‘네가 무슨 목도리도마뱀이냐…… ’슈페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며 목도리처럼 둘려 있는 꼬마 뱀의 몸통에 턱, 손을 올렸다.
‘불쌍하긴 하지만, 새 모가지를 감싼 뱀이라니 끔찍하잖아.’
아무리 위험해 보이지 않는 꼬마뱀이라도 천적은 천적이지 않은가.
얼른 떼어내 버릴 생각이었다.
그 손길에 카누스는 리카도르를 향해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 흥!
아무래도 슈페나가 자신의 편을 들어주리라 여긴 듯했다.
– 영역 침범 좀 했다고 살기를 저렇게까지 내뿜냐? 인성 문제 있어?
그런 꼬마 뱀의 으름장은 오래가지 못했다.
-잉?
“내 목에서 떨어져.”
쌀쌀맞은 슈페나의 목소리가 들려왔으므로, 슈페나는 눈으로 욕을 했다.
당장 뱀술로 담가버리겠다는 각오를 담아 스산하게.
-네…..
어쩐지 그 말을 들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카누스는 슬금슬금 내려왔다.
그제야 슈페나가 표정을 풀었다.
“웃기는 게 굴러들어왔네.”
그 흔치 않은 광경을 바라보던 리카도르가 재밌다는 듯 픽 실소했다.
-힝….
시무룩해진 카누스는 조금 후에야 은근슬쩍 슈페나에게 말을 걸었다.
-근데 누나 향수 뿌려?
느닷없는 질문에 슈페나가 의구심 어린 어투로 대답했다.
“아니. 그나저나 너 내 목, 킁킁거렸니?”
질겁하는 슈페나의 표정에도 카누스는 꿋꿋하게 의문을 표했다.
-왜 누나한테서 남자 향수 냄새가 나지? 시원한 달을 뿌려놓은 것 같은 향인데.
뭐라는 거야.
뚱한 슈페나의 낯에 카누스가 으스대며 이야기했다.
-나 후각 완전 좋거든? 저 사자 형아가 들어오고 더 심해졌단 말이야.
그건 또 무슨 의미지?
슈페나가 속눈썹을 드리우곤 느릿하게 깜박이며 잠시 고심했다.
그 순간, 리카도르가 터벅터벅 다가와 책상 옆 침대에 느슨히 걸터앉았다.
그의 시선은 조그마한 꼬마 뱀에게로 고정되어 있었다.
“제법 친해진 모양입니다. 저 새끼 뱀이랑.”
하지만 웃음기 하나 없는 말은 슈페나를 향해 살랑거렸다.
‘리카도르는 저 뱀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 같네. 하긴 원작에서도 그랬었지.’
그녀가 은근슬쩍 화제를 돌렸다.
“근데 어디 갔다가 온 거예요?
아침에는 없던데.”
리카도르는 대답 대신 제 볼을 슬며시 손등으로 쓸어내렸다.
그 뽀얀 피부에는 살짝 벌겋게 흠집이 나 있었다.
누군가의 발에 얻어맞은 것처럼.
‘하하, 설마…… 내가 그런 건 아니겠지?’
아침에 일어나보니 침구가 엉망이 되어있던데.
내 잠버릇이 험했나?
슈페나가 고개를 떨구곤 애써 땅바닥만 쳐다봤다.
문득 어제의 그 흑역사가 떠올라서 조금 부끄러워졌다.
‘친구 되기 참 험난하네.’
리카도르는 고요하고도 차분한 눈빛으로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도 어정쩡하게 몸을 뒤로 물렸다.
옴짝달싹도 못 하게 하려는 듯 리카도르가 작게 읊조렸다.
그 음성에선 미약한 장난기가 묻어나왔다.
“누구 때문에 볼이 얼얼하네요.”
그 누구가 나구나.
슈페나가 시선을 둘 곳을 찾지 못해 눈알을 도르륵 굴렸다.
그를 따라 리카도르의 웃음은 더 진해졌다.
그가 일견 산뜻하게 물었다.
“어떻게 책임질 거예요, 부인?”
리카도르가 느른히 입매를 늘어뜨렸다.
맹수 중의 맹수인 사자라 그런가, 미소를 띠고 있음에도 묘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요상한 긴장감이 흘렀다.
“괜찮아요? 많이 놀랐죠?”
슈페나는 그 정적을 가르고 목각인형처럼 삐걱대며 발연기를 펼쳤다.
그에 리카도르가 여유롭게 답했다.
“안 괜찮고 적당히 놀랐습니다만.”
“아… 네, 그러시구나.”
그녀가 어색하게 호응했다.
여기서 뭘 더 어떻게 받아치냐고!
슈페나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뜸을 들이는 사이, 리카도르가 말을 걸어왔다.
“그나저나 저 뱀한테서 뭔가 알아냈습니까?”
뭔가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의 말투.
“아! 그게…으음?”
반사적으로 말을 받은 슈페나의 목소리 끝이 얼떨떨하게 올라갔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꿰뚫고 있는 거람.’
슈페나는 입술을 꾸욱 오므리곤 리카도르를 진득하게 훑어 내렸다.
참 잘난 낯이란 감탄이 나올 무렵, 번뜩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하녀들을 취조할 때 리카도르도 있으면 괜찮지 않을까?’
아무래도 소설 속 세계관 최강자니까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되지 않으려나.
슈페나가 용기를 내어 입술을 달싹였다.
“그, 이 뱀을 정원에 풀어놓은 범인을 찾아볼 계획인데.”
그 이야기를 계속하던 슈페나의 눈동자가 정처 없이 한들거렸다.
“같이 갈래.……요?”
리카도르의 눈매가 언뜻 둥글게 풀어졌다.
카누스는 그런 둘의 모습을 번갈아 쳐다보며 오오, 바람을 잡았다.
-뭐야, 이 분위기 뭐야.
그 방정맞은 음성에 그녀가 볼멘소리로 꼬마 뱀을 흘겼다.
“이거, 마저 얻고 싶으면 이제부터 잘해야 할걸?”
슈페나는 남은 가루가 든 주머니를 짤랑짤랑 흔들었다.
꼬마 뱀이 깨갱, 꼬리를 내렸다.
-아, 알았어. 엄청 까탈스럽게 구네.
카누스는 빨리빨리 해결하자며 그녀의 팔을 휘감았다.
-얼른 가자.
슈페나의 팔뚝에 앙증맞은 뱀 모양 팔찌가 생겨났다.
서늘하고 미끄덩한 감촉이 다시금 피부에 닿았다.
귀찮았으나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떨어질 테니 그냥 내버려 뒀다.
“응?”
그런데 잠깐 눈을 뗀 사이에 꼬마 뱀이 획 떨어져 나갔다.
리카도르가 갑자기 뱀의 꼬리를 잡아채더니 자신의 팔목에 돌돌둘러매는 게 아닌가.
그는 매끄럽게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아, 제가 원래 뱀 새끼를 좋아합니다.”
오, 어감이 좋지 않은걸.
전혀 그래 보이지 않는 변명에 꼬마 뱀이 천연덕스레 애교를 피웠다.
– 이왕이면 새끼 뱀이라고 해줄래, 형아?
“그래, 뱀 새끼.”
리카도르가 담담하지만 살벌하게 대답했다.
카누스는 귀여운 척이 먹히지 않자 몸을 축 늘어뜨렸다.
그러고는 인생의 쓴맛을 맛본 어린애처럼 푸념했다.
-아, 나 아직 일곱 짤인데. 뱀생이 괴롭다.
리카도르가 개의치 않고 방을 나섰다. 슈페나도 그 뒤를 졸졸 따랐다.
그들은 나름 사이좋게 복도를 거 닐게 되었다.
목적지는 슈페나가 원래 쓰던 방이었다.
그곳에 또 다른 증거자료가 될 세탁 바구니를 숨겨놨으니까.
나란히 걷는 동안, 슈페나는 리카도르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범인이 하녀들 같다는 것과 일전에 그들의 작당모의를 들은 것.
그리고 꼬마 뱀이 열쇠를 쥐고 있다는 것까지 모두 다.
설명을 들은 그의 눈은 잔잔한 호수처럼 평안하기 그지없었다.
‘역시 뭔가 알고 있다니까.’
슈페나가 의심스러운 눈길로 빠히 그를 응시했다.
그 시선을 느낀 리카도르도 느긋하게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뭐지?’
눈싸움을 하자는 건 아닐 테고.
슈페나가 눈알을 데구르르 굴렸다.
그러다 괜스레 말랑말랑한 볼을 만지작거렸다.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싶어서.
-아무것도 안 묻었어. 그러니까 하던 거 계속해.
그때, 속마음이라도 읽은 건지 꼬마 뱀이 정곡을 찔러 왔다.
그나저나 하던 걸 계속하라고?
슈페나는 무심코 다시 그를 올려다보았다.
허공에서 시선이 얽혀들었다.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는 듯 균열이 져 있는 푸른 눈동자.
맹수의 그것과 똑 닮은 눈빛에 황급히 속눈썹을 드리웠다.
슈페나는 괜스레 걸음을 재촉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러다 보니 금방 원래 방에 도착했다.
새하얀 벽지와 깔끔한 인테리어.
신방이 생긴 탓에 이곳은 슈페나의 개인 집무실 정도가 되었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애초에 하루밖에 안 지났으니.
슈페나가 익숙하게 널따란 방 한가운데에 있는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리카도르는 자연스레 그녀의 옆에 착석했다. 물론 그의 팔에 매달린 꼬마 뱀도.
그렇게 앉아있게 된 지도 15분째.
까딱까딱 리듬을 타던 카누스가 심심하다는 듯 칭얼거렸다.
-근데, 그 범인으로 추정되는 수인들은 언제 와?
“글쎄. 아까 지나가다 마주친 사용인에게 하녀들을 데려오라 명했으니 금방 오겠지.”
때마침, 호랑이도 부르면 온다는 격언처럼 하녀들이 바로 등장했다.
“부르셨습니까, 슈페나 님?”
꾸벅 허리를 접은 그들은 리카도 르한테도 예를 갖췄다.
그런 그들의 얼굴엔 살짝 당황한 기색이 엿보였다.
“소가주님도 계셨군요.”
그리고 리카도르의 손목에 감겨 있는 카누스를 본 순간, 하녀들의 낯빛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중 한 하녀가 일그러진 표정을 가까스로 수습하곤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질문했다.
“그, 그런데 그 뱀은….…?”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20화
꼬마 뱀이 가는 혀를 해맑게 빼꼼 내밀었다.
그러더니 리카도르의 몸을 타고 소파로 내려왔다.
아는 척을 해줘서 기쁜 듯했다.
약 올리는 걸로 보였다는 게 함정이었지만.
슈페나는 대충 꼬마 뱀을 도로 리카도르에게 안겨주곤 차분하게 운을 띄웠다.
“너희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아주 많거든.”
그녀가 품 안에서 가죽 주머니를 꺼내었다. 그리고는 그걸 소파 앞 낮은 테이블 위로 던졌다.
미처 다 닫히지 못한 틈새로 갈색 가루가 스르륵 흘러나왔다.
내용물을 확인한 하녀들의 안색이 다시 한번 파리해졌다.
잘 넣어두었던 물건이 왜 여기에 있냐는 얼굴.
‘찔리나 보네. 이제 모두 실토하게 만들어야겠지.’
슈페나가 얕보이지 않게끔 인형처럼 차가운 표정을 덧그렸다.
나름의 전략이었다.
슈페나는 가죽 주머니 쪽으로 고개를 까딱 움직였다.
“일단 이 가루. 뭔지 알지?”
고저 없는 음성이 방 안의 공기를 날카롭게 갈랐다.
하나, 가장 침착함을 유지하던 하녀가 약삭빠르게 모르쇠로 일관했다.
“죄송하지만, 모르겠습니다. 이외에 뭐 시키실 일이라도-”
“정말 몰라? 너희 물건이잖아.”
슈페나는 그 말을 끊고 단호하게 사실만을 이야기했다.
그 하녀는 여전히 가증스러운 낯으로 잡아떼었다.
“예? 무슨 말씀이신지.”
그 뻔뻔하고 가증스러운 태도에 슈페나의 눈가가 절로 찌푸려졌다.
‘이렇게 나온다고?’
차라리 바로 인정하고 합당한 이유를 댔다면 납득했을지도 모를 텐데.
이리 티 나는 거짓말을 하는 것부터가 수상쩍었다.
슬슬 기분이 불쾌해졌다.
슈페나는 후우, 기다란 숨을 내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곧이어 그녀가 한 음절씩 곱씹듯 결연히 이야기했다.
“결혼식 날, 이 칼립스 나무껍질 가루를 내 구두에 뿌렸잖아. 뱀들이 사족을 못 쓰고 좋아하는 거라서.”
“저희는 정말 모르는…….”
“그래? 그럼 너희가 나눴던 대화는 뭐지?”
슈페나가 얼핏 새된 고음으로 되받아쳤다.
두서없이 튀어나온 얘기에 하녀들의 얼굴에는 의아함이 떠올랐다.
슈페나는 벌떡 소파에서 일어났다.
아니, 일어나려 했다.
잠자코 있던 리카도르가 그녀를 제지하지 않았더라면.
도로 자리에 앉혀진 슈페나가 커다래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리카도르는 묵묵하게 방 한구석으로 향했다.
그러곤 흰 천에 감싸인 세탁 바구니를 가뿐하게 들고 돌아왔다.
‘내가 세탁 바구니를 가지러 일어난 걸 눈치챈 건가? 그나저나 저거 무거운데……’
슈페나가 멀끔히 제자리로 원상복귀한 리카도르를 힐끔대었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리곤 하얀 천을 걷어내며 시원하게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 옷들을 빨면서 했던 그 이야기들 말이야. 내가 들어버렸거든.”
슈페나는 하녀들의 얼굴을 하나 하나 샅샅이 훑어보았다.
그들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처음 잃어버렸을 때는 눈치를 봤지만, 슈페나가 찾지 않아 그들조차도 잊고 있던 옷들이었다.
그리고 그건 하녀들이 성실하지 못했음을 증명하는 증거와도 같았다.
“그때 너희가 내 결혼식 첫 춤을 망칠 거라고 얘기했었는데.”
슈페나가 결정적인 한마디를 입에 올렸다.
하녀들은 일제히 헉, 놀람이 묻어나는 탄식을 내뱉었다.
여태껏 제일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던 갈색 머리 하녀가 죄책감이 어린 낯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인정할 수 없다는 듯 입술을 짓씹은 한 하녀가 끈질기게 부정했다.
“오해이십니다. 무언가 잘못 들으신 게 틀림없어요.”
“마, 맞아요! 저희는 그런 적이 없습니다. 소가주님.”
그러자 다른 하녀도 필사적으로 맞장구쳤다.
슈페나가 아닌 리카도르를 바라보며.
‘지금 더 힘센 사람한테 잘 보이려는 거야? 당사자인 내가 아니라?’
그 교활한 태도에 슈페나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고는 의미 없이 대꾸했다.
“그래?”
그 한마디에 하녀가 기다렸다는 것처럼 청산유수로 말을 쏟아냈다.
“물론 일전에 저희의 언행으로 마음이 상하셨을 수 있지만, 결단 코 그런 짓은 하지 않았습니다!”
슈페나는 그 이야기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꼬마 뱀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카누스, 네가 보기엔 어때?”
– 더 두고 볼 것도 없이 쟤네 맞아.
카누스가 명쾌하게 답했다.
그는 야무진 말투로 확실히 못을 박았다.
-날 검은 자루에 넣어서 정원으로 데려갔던 수인들의 목소리야.
파장이 똑같거든.
“이게 무슨, 고작 꼬마 뱀이 어떻게 이런 능력을…….”
모두의 머릿속으로 일제히 스며든 뱀의 음성, 하녀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역시 이 하녀들이 나를 곤경에 처하게 했던 범인이었구나.’
슈페나가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손끝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직 하녀들이 놀랄 만한 일이 더 남아있었다.
카누스의 폭로는 이걸로 끝이 아니었으니까.
-아, 그리고 내가 자루에 담겼을 때 누가 ‘걱정하지 마, 제인.’ 이라고 말했었는데, 꼬마 뱀이 붉은 혀를 내밀더니 얄밉게 살랑살랑 흔들었다.
– 여기 제인 있어?
촌철살인과도 같은 물음이었다.
‘제인이면, 코코아잔 밑에서 발견한 쪽지의 주인으로 보였던 갈색 머리 하녀일 텐데.’
슈페나가 그 하녀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제인?”
제인이 털썩, 무릎을 꿇고는 죄를 시인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이야기를 흐느끼듯 내뱉었다.
“……죄, 죄송합”
“모함입니다, 슈페나 님!”
그때, 다른 하녀가 잽싸게 제인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러면서 똑같이 바닥에 주저앉아 퍽 절박하게 고개를 저었다.
덜덜 떨리며 울먹이는 음성이 슈페나를 향해 썩 애처로이 호소했다.
“믿어주세요. 저 간악한 새끼 뱀이 어떻게 제인의 이름을 알아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술수를 부리는 거예요.”
“신뢰할 수 없는 이의 말이잖아요. 속고 계신 겁니다. 두 분 모두!”
유일하게 서 있는 채로 상황 파악을 하던 하녀도 고개를 조아리며 옆에서 거들었다.
그 두 하녀는 눈물까지 짜내며 애걸복걸 매달렸다.
실상을 모르는 이들이 보기엔 깜박 속아 넘어갈 만한 연기실력이었다.
끝까지 발뺌할 심산인 듯했다.
-와, 완전 뻔뻔하다.
졸지에 거짓말쟁이가 된 꼬마 뱀은 뚱하게 감탄했다.
기가 차는 듯한 기분에 슈페나도 짧은 헛웃음을 지었다.
이대로 갔다간 도돌이표일 것 같아서.
슈페나가 꽉 쥔 주먹으로 소파 팔걸이를 퍽 내려치며 카운터를 날렸다.
“나와 이 뱀이 직접 보고 들었는데 그보다 확실한 게 있을까?”
그 날카로운 칼날 같은 한마디가 허공을 매섭게 갈랐다.
하녀들에게 딱히 유감은 없었다.
‘나를 싫어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슈페나가 일부러 싱긋 웃으며 표정을 꾸며내었다.
그리곤 차분한 말씨로 비꼬았다.
“증인도 증거도 있는데 언제까지 모른 척할 셈이니?”
본능적으로 달리진 분위기를 감지한 하녀들이 타깃을 바꾸어 이젠 다시 리카도르에게 애원했다.
“소, 소가주님! 저희의 말을 믿어 주세요. 같은 사자로서 ”
“귀찮게 구네. 재미도 없고.”
리카도르가 바짓가랑이라도 붙들 듯한 하녀를 내려다보며 말간 미성으로 뇌까렸다.
그는 돌연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려는 듯 부스럭대었다.
리카도르가 슬그머니 몸을 기울이더니, 그 정체 모를 물건을 슈페나에게 쥐여주었다.
은빛 만년필?
그녀는 의아함이 서린 눈으로 빤히 그를 쳐다보았다.
그 눈빛에 리카도르가 슈페나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닥였다.
“허공에 대고 비스듬히 선을 그어봐요. 그게 시동어니까.”
“네?”
슈페나는 저도 모르게 만년필을 들어 사선으로 비껴 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펜촉의 움직임을 따라 잔잔한 빛과 같은 무언가가 새어 나왔다.
그 형형색색의 입자들이 모여 그림을 만들어냈다.
푸르른 나뭇가지에 가려진 수인들의 모습.
정확히는 하녀들이 일전에 슈페나가 맡긴 옷을 빨고 있는 광경이었다.
이윽고, 그 그림은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소리까지 내면서.
[경계 지역에서 새끼 뱀을 잡아왔다. 그걸 결혼식에 풀어놓으면 될 거야. 뱀은 새의 천적이니 겁만 주자고.]모두가 경악할 만큼 생생한 증거였다.
“마,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걸….”
당황한 하녀가 슈페나를 보곤 말을 더듬었다.
그러나 슈페나 또한 영문을 알리가 없었다.
‘도대체 이 만년필은 뭐지?’
그녀가 가늘게 눈을 찡그리며 리카도르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는 어깨를 으쓱거리곤 유유자 적한 몸짓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인이 잘 해결하신 듯하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갑자기요?”
느닷없는 발언에 슈페나가 무심코 리카도르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리카도르는 자못 부드러운 손길로 슈페나의 팔을 잡아 내리며 말했다.
“제가 없는 게 나을 겁니다. 나머지도 잘 처리할 수 있죠?”
그게 무슨 소리지?
그런 의문을 느낄 새도 없이 리카도르는 저벅저벅 걸음을 재촉했다.
달칵, 문고리를 잡아 돌리던 그가 불현듯 고개만 돌려 꼬마 뱀에게로 눈길을 주었다.
“새끼 뱀.”
-왜, 형아?
“수틀리면 저것들 물어버려.”
그 자비 없는 말과 함께 방문이 닫혔다.
슈페나는 멍하니 눈만 깜박였다.
-안 그래도 요즘 이빨 새로 나서 근질거렸는데!
카누스가 옆에서 조잘조잘 해맑게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아가리를 쩍 벌리며 캬아악, 울음을 토했다.
기다란 독니 아래로 툭툭 떨어지는 투명한 독액을 본 하녀들이 흠칫 팔을 떨었다.
이내, 맹수로서 자존심이 상했는지 사납게 째려보았지만.
‘일단 만년필은 하녀들부터 처리하고 난 뒤에 물어봐야겠네.’
슈페나가 하녀들에게로 눈길을 돌리곤 어디 한번 대답해보라는 듯 싸늘하게 질문했다.
“또 부정할 거니?”
슈페나의 말이 끝나고 방 안에는 정적이 흘렀다.
몇분 후,
제인이 뭔가 결심한 듯 담담해진 낯으로 잘못을 인정했다.
“어떤 벌이는 달게 받겠습니다.
정말이지 죄송해요.”
제인의 사과에 나머지 두 하녀는 눈을 데구르르 굴렸다.
“제인, 너…!”
하지만 동료가 죄를 시인한 마당에 무얼 더 변명하겠는가.
나머지 하녀들도 너나 할 것 없이 앞다투어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슈페나 님, 아니 작은 마님! 그러니까요, 그게….”
이제야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깨달은 모양이었다.
애석하게도 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은, 슈페나의 화를 더욱 돋우는 것이었다.
“저, 정말 죄송해요. 일부러 그런건 아니었습니다. 작은 마님.”
“그저 저희는 저 뱀이 독사인 줄 모르고, 가벼운 장난처럼 저지른 일인데…. 용서해주세요! 작은 마님, 제발…….”
순 본인들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변명.
슈페나는 끝까지 죄를 제대로 뉘우치지 않은 채, 선처만 바라는 두 하녀한테 다가갔다.
하녀들은 자연히 슈페나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슈페나가 모두에게 들릴 만큼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너희 둘은 해고야.”
그 단호한 통보를 들은 하녀들의 낯이 새하얗게 질렸다.
두 하녀는 엉거주춤 일어나 슈페나의 옷소매를 움켜쥐었다.
그러더니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새된 음성으로 현실을 부정했다.
“그러실 수는 없어요! 아무리 작은 마님이라도 저희를 내치시는건”
“권한을 받았거든, 어머님께.”
슈페나가 망설임 없이 하녀들의 손을 쳐내며 눈에 힘을 주었다.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21화
기세에서 밀리고 싶지는 않았다.
맹수인 사자가 옷자락을 물고 늘어지며 항의하는 상황은 자못 위협적이었으니까.
‘나도 화낼 줄 아는 사람이란 말이야.’
슈페나는 지지 않고 최대한 무시무시하게 안면근육을 일그러트렸다.
동물화를 했다면 필시 꽁지깃이 빳빳하게 세워졌을 터.
이런 결연한 슈페나의 태도에 하녀들은 당황한 듯 되물었다.
“궈, 권한이라면……?”
“너희의 인사권을 내가 쥐고 있다고. 이제 나도 이 집의 작은 마님이잖니.”
슈페나가 살짝 건조해진 말씨로 단단히 못을 박았다.
하녀들의 두 눈에서 초점이 사라졌다.
넋이 나간 건지 그들은 허공에 대고 혼잣말을 했다.
“그, 그럼 저희는 어떻게.……..”
“그러니 당장 짐 싸서 나가.”
슈페나가 얼른 설렁줄을 당겨 다른 사용인을 불렀다.
더는 딱히 할 말도 없을 것 같아서.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우락부락한 사자들이 들어왔다.
아까 하녀들을 불러오라 명하면서 미리 대기시킨 이들이었다.
슈페나가 도로 소파에 앉고는 망연자실한 표정의 하녀 둘을 향해 고갯짓했다.
“끌어내.”
그 한마디에 하녀들이 정신을 차린 듯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작은 마님, 작은 마님!”
그들은 끌려가면서도 언성을 높이며 뻗대었다. 그간의 과오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결국, 쾅 방문이 닫히고 나서야 주변이 조용해졌다.
소파 위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던 카누스가 탁탁 꼬리를 치며 뾰로 통하게 투덜대었다.
-쟤네 사자 맞아? 누가 보면 거머리라고 해도 믿겠다.
슈페나는 피식 웃으며 카누스의 투정에 내심 동의했다.
그러다 찬찬히 눈을 비껴 깔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잘한 거야. 반성의 의미도 모르는 자들에게 내 곁을 내줄 순 없잖아.’
이대로 저택에 둔다면 그들이 또 어떤 흉계를 꾸밀지 몰랐다.
다만, 모두를 완전히 내쫓은 건 아니었다.
슈페나는 홀로 남게 된 갈색 머리 하녀, 제인에게 말을 건넸다.
“그리고 제인, 너한텐 물어볼 게 있어.”
그녀가 일전에 챙겨두었던 코코아 잔 밑의 쪽지를 꺼내 들었다.
“이 쪽지. 네가 쓴 거지?”
제인은 쪽지를 보더니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만 숙였다.
역시 제인이었구나.
약간 누그러진 슈페나의 목소리가 제인에게로 향했다.
“무슨 뜻으로 두고 간 거였어?”
“그, 그게…….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제 발로 이 저택을 나갈게요.”
제인은 착잡해 보이는 얼굴로 마지막 인사를 하려는 건지 꾸벅 허리를 접었다.
여타 하녀들과는 달리 순순히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태도.
슈페나의 한쪽 눈썹이 절로 치켜 올라갔다.
“정말?”
“작은 마님을 모시라는 하늘 같은 가주님의 명에 불복하고, 사자 답지 못하게 비열한 수를 썼어요.”
덤덤하게 이야기하던 제인이 급격히 작아진 목소리로 진심을 토했다.
“너무 부끄럽네요.”
제인의 볼은 창피함 때문인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슈페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잔잔히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나한테 미안해하는 것 같긴 하네.”
그녀가 크게 숨을 들이마시곤 결정을 내렸다.
“그러면 약속해. 앞으론 이런 일 없이 충심을 다해 나와 일하겠다.
고.”
제인까지 내치게 된다면 새로운 하녀들이 들어올 터였다.
‘그렇다면 또다시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어.’
그나마 반성하고 있는 듯한 제인을 잘 구슬리는 게 나았다.
든든한 아군이 되게끔.
“네?”
제인이 놀란 듯이 입매를 부르르떨며 되물었다.
“특별히 기회를 주겠다는 뜻이야.”
슈페나는 선선한 웃음을 내걸며 설핏 자애롭게 답했다.
그렇다 한들 호락호락하게 넘어갈 계획은 아니었다.
혹시 몰라 준비한 비장의 한 수도 있었고.
‘그거면 제인을 곁에 둬도 괜찮겠지.’
슈페나가 살짝 침잠한 눈빛으로 제인을 응시했다.
제인은 감격한 낯으로 연거푸 고개를 숙였다.
“……저, 정말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꼭 모아진 제인의 두 손이 달달 떨려왔다.
슈페나는 그 모습을 빤히 내려다 보며 웃음기 하나 없는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방금 그 다짐, 두 번째 심장에 대고 맹세할 수 있어?”
슈페나가 생각해둔 건, 바로 계약이었다.
두 번째 심장, ‘타나토’를 걸고 한 약속은 어떻게든 지켜야만 했다.
타나토,
수인의 영혼을 담는 그릇이라 불리는 제2의 심장.
심장이 멈춰도 타나토만 멀쩡하다면, 이론적으론 생명을 되살리는 것도 가능했다.
그 정도로 중요한 것이었다.
‘그런 만큼 꼭 약속을 이행해야 하지.’
솔직히 믿을 수 없었다.
남의 주장에 휩쓸려 그릇된 선택을 한 자의 의지를.
‘제인이 나한테 죄책감을 느끼는 건 사실이겠지.’
하지만 감정은 시간이 지나면 엽어지기 마련이었다.
그 말인즉슨, 또 언제고 이러한 일을 벌일 수 있다는 뜻일 터.
그러니 이기적이라 할지라도 확실한 계약을 통해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해놓는 수밖에.
슈페나는 자연스레 소파에서 일어섰다.
그러곤 몇 발자국 걸어가, 옆 책장에 쌓인 서적을 손끝으로 훑어 내리며 얘기했다.
“싫으면 거절해도 괜찮아. 대신 다른 곳에서 일할 수 있도록 소개장을 써줄게.”
일말의 친절이었다.
그 어디에서도 체드 가의 눈치를 보느라 제인과 다른 하녀들을 받아주진 않을 테니.
“…..…아니요. 하겠습니다.”
망설이던 제인이 굳게 결심한 듯 주먹을 꼬옥 말아 쥐었다.
“그래, 좋아. 그럼 날 따라 해.”
슈페나가 살펴보던 책 중 하나를 골라 펼치곤 말했다.
타나토에 대해 저술한 서적이었다.
‘실은 나도 잘 모른단 말이지.’
애초에 요런 계약은 흔치 않아서, 은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드물었다.
그래서 미리 찾아둔 책을 보고 따라 할 요량이었다.
두꺼운 책은 어지러운 활자로 가득했다.
슈페나는 계약 방법에 대해 나열되어있는 페이지를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손으로 글자를 짚으며 나와 있는 설명을 천천히 읊조렸다.
“타나토가 있는 오른쪽 가슴 위로 손을 얹고 눈을 감아라. 그리고 심장에 깃든 힘, 탈리테를 느껴라.”
탈리테는 두 번째 심장, 타나토속에 밀집된 무형의 기운이었다.
타나토가 혼을 담는 그릇인 것처럼 탈리테도 영혼과 관련된 힘이었다.
살아 있는 수인이 가지고 있는 생기, 그 자체랬지.
모든 수인이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기도 했고.
탈리테의 순도가 높을수록 이능의 위력도 강하고 신체적으로도 우월하다나 뭐라나.
아무튼 중요한 거였다.
없으면 죽으니까.
슈페나는 그 설명대로 눈꺼풀을 드리우고 몸 안의 소리에 집중했다.
꼬르륵.
아, 이거 말고,
세차게 도리질을 하곤 다시 명상에 돌입했다.
몸 안의 감각에 집중하니 묘하게 주위가 고요했다.
슈페나의 귀가 쫑긋대었다.
‘무언가 흐르는 듯한 기분인데.’
그 기묘한 감각은 점차 구체화되었다.
절로 금방 알아챌 수 있을 거란 책의 얘기가 맞았다.
둥, 둥, 등.
혈맥에 부딪히며 나아가는 느긋하고도 폭신폭신한 구름 같은 기운.
탈리테였다.
보이진 않았으나, 이 탈리테의 색 깔이 하얗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제 손을 잡고 서로의 기운을 공유할 차례인가.’
슈페나가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려 애쓰며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아까와 다를 바 없는 방 안의 풍경.
그리고 호기심 어린 표정의 카누스와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제인.
기분이 묘했다.
평소와는 무언가 다른 것처럼 심장이 쿵쿵 요동치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제인은 아직 탈리테를 못 느낀 건가.’
슈페나가 힐끗 제인을 들여다보았다.
때마침, 제인이 번쩍 눈을 떴다.
슈페나와 제인은 자연스레 시선을 교환했다.
‘서로의 탈리테를 나누기 전에 계약 사항을 서면으로 작성해야 한다고 했지.’
슈페나는 책장에 같이 끼워져 있던 기다란 양피지와 만년필을 꺼내 글씨를 썼다.
아까 약속했던 그 내용 그대로.
그러고는 제인과 손을 맞잡았다.
기다렸다는 듯 신비한 감각이 손가락 끝에서부터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살랑살랑, 깃털이 피부를 간지럽히는 듯한 감촉이 전해졌다.
그와 더불어 평소 제인이 사용하던 향수처럼 달큰한 냄새가 확 풍겨왔다.
슈페나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이게 제인의 탈리테구나!!
‘말랑말랑한 솜사탕 같은 기운.
나랑은 또 다른 느낌인데.’
타인의 탈리테를 알아챈 순간, 아주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슈페나가 홀린 듯이 고개를 들곤 말끝을 흐렸다.
“글씨가…”
메마른 검은 잉크로 쓰인 글자가 양피지 위에서 떨어져, 빙그르르공기 중을 배회하는 게 아닌가.
오묘한 색으로 반짝이던 철자는 맞닿은 두 손으로 돌연 빨려 들어갔다.
잇새로 탄성이 새었다.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22화
“어……!”
그 글씨들은 손목을 타고 특이한 고대 문자처럼 새겨졌다가 사그라들었다.
가슴께에 찌릿찌릿 화한 이물감이 들이닥쳤다.
슈페나가 무심코 제 손등을 살펴보니 작게 계약의 인이 그려져 있었다.
하얀색의 동그란 진주 표식.
제인의 타나토 모양이었다.
본디 오른쪽 가슴에 박힌 두 번째 심장인 타나토는 특이하게도 보석 형태를 띠었다.
그것도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른 보석 종류로.
‘책에서도 계약이 끝나면 서로의 타나토 형상이 하얀색으로 새겨질 거라고 했지.’
슈페나는 제인을 상징하는 진주모양 표식을 조심스레 쓸어내렸다.
그러다 필연적으로 의문이 하나 생겼다.
‘제인의 피부에도 내 타나토가 생겼겠지?’
그녀가 초롱초롱 반짝이는 눈망울로 제인에게 말했다.
“손 내밀어봐, 제인!”
“네. 작은 마님.”
제인은 얼떨떨한 건지 조금 굼뜬몸놀림으로 손등을 쫙 펼쳐 보여주었다.
‘어디 있는 거야?’
슈페나는 유심히 제인의 손을 관찰했다.
가만 보니 제인에게도 새하얗지만 약간 오묘한 빛깔의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이게 다 된 건가?’
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제인을 향해 이야기했다.
“끝났나 봐. 생각보다 되게 간단하네.”
문득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꼭 예전에도 누군가와 계약을 맺은 적이 있었던 것처럼.
뭐, 계약의 가짓수에 제한이 있는 건 아니었으니 훗날 다른 이와도 맺을 수 있겠지.
‘그나저나 내 타나토는 어떤 보석인 거지? 방금 봤는데도 모르겠네.’
슈페나는 제인에게 새겨진 자신의 문양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가 잠시 다른 생각으로 빠지려던 찰나, 제인이 선선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작은 마님의 타나토는 오팔인 것 같네요. 신기해요, 정말.”
오팔이라고?
그에 슈페나도 눈을 동그랗게 뜨곤 되물었다.
“이게 오팔이야?”
“네, 그런 것 같아요.”
제인은 살짝 자신감 없는 말투로 긍정했다.
-오오, 나 심장에 대고 맹세하는 건 처음 봐!
상황이 마무리된 듯 보이자, 카누스가 뽀르르 슈페나에게로 기어와 오두방정을 떨었다.
그 순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짧은 찰나.
하얀 표식이 스르르 희미해졌다.
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응? 방금 조금 이상했는데.
이 미묘한 변화를 가장 빨리 감지한 꼬마 뱀이 천진하게 의문을 제기했다.
그리곤 꾸물꾸물 슈페나의 팔 위를 기어올라 냄새를 맡았다.
-킁킁, 계약을 맺으면 잠시간 상대의 탈리테 잔향이 남는다 들었는데.
카누스가 슈페나의 손등에 생긴 문양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관찰했다.
그것도 벌써 15분째.
보다 못한 슈페나가 불퉁스레 주의를 주었다.
“네가 개냐. 인제 그만 좀 킁킁거려.”
-아니이. 원래 누나한테서 나던 향기만 진동해서 그러지. 뭔가 잘못됐을까 봐…….
지가 개코야, 뭐야.
‘표식이 멀쩡한 걸 보면 계약은 확실히 성립됐다는 건데. 괜찮겠지.’
아니면 카누스가 착각하는 거라 든가.
슈페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젓곤 제인한테 말을 건네었다.
“이제 네가 내 진짜 전속 하녀야, 제인.”
슈페나는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악수를 청했다.
“앞으로 잘 부탁해.”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작은 마님.”
제인도 떨리는 손을 내밀며 꾸벅마주 인사했다.
그제야 슈페나가 유하게 표정을 풀며 반짝 눈을 빛냈다.
‘첫 단추는 좀 어그러졌지만 이젠 다를 거야.’
슈페나는 쭈뼛쭈뼛 카누스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아무튼 도와줘서 고마워, 카누스.”
– 으응? 내가 뭘…….
카누스가 답지 않게 부끄럼을 탔다.
꼬마 뱀은 꼬리로 제 얼굴을 슬며며시 가리며 작게 덧붙였다.
-악수 정도는 해줄게.
결국, 카누스는 손바닥 대신 꼬리를 부딪쳐 슈페나와 하이파이브했다.
‘뭐야. 귀여운 구석이 있긴 하네.’
피식, 웃은 슈페나가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카누스에게 주기로 했던 칼립스나무껍질 가루였다.
그녀는 가루가 든 주머니를 목걸이처럼 앙증맞게 꼬마 뱀의 몸통에 걸어주었다.
“이제 이건 다 너 줄게.”
-너무 좋아! 좋은 냄새!
당연히 카누스는 7짤스럽게 기뻐했다.
슈페나가 한껏 신이 난 카누스를 따라 싱긋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렇게 제법 소란스러웠던 상황이 일단락되었다.
슈페나가 원했던 시나리오처럼 말끔하게.
***
한편, 방 밖으로 나온 리카도르는 느티나무 위에 걸터앉아 몸을 뉘었다.
쏴아아, 나뭇잎끼리 서로 맞부딪치며 소리를 내었다.
그는 느른하게 두 손으로 뒤통수를 감싸곤 어딘가로 시선을 돌렸다.
반쯤 열린 유리창 너머, 훤히 들여다보이는 슈페나의 방 안으로,
“아, 햇빛.”
리카도르가 손등으로 눈앞을 슬쩍 가리며 인상을 찡그렸다.
그 손 틈새로 찬연한 태양빛이 삐쭉삐쭉 스며들었다.
번듯하고 고운 이마, 곧게 뻗은 콧날, 그리고 살짝 올라가 있는 입꼬리.
깎아놓은 듯 미려한 리카도르의 낯에는 그림 같은 명암이 졌다.
그 순간, 창밖으로 새어 나온 목소리에 리카도르의 귀가 쫑긋 움찔대었다.
-너희 둘은 해고야.
건방지게 굴던 하녀들을 향한 슈페나의 한마디.
그 결단력 있는 말을 들은 리카도르가 자못 흥미롭다는 듯 작게 탄성을 흘렸다.
그의 새초롬한 붉은 입가에 의미모를 미소가 걸쳐졌다.
“이젠 어떻게 하려나.”
그 푸른 눈동자에는 꾹 입술을 깨물고 있는 슈페나의 모습이 비쳤다.
또래보다 커다란 손 모양을 따라서늘한 그늘이 졌다.
“햇빛은 싫은데.”
그는 퍽 아쉽다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도로 가져올 걸 그랬나.”
은빛 만년필.
사물과 사람의 기억을 읽을 수 있고, 알아낸 기억을 바깥으로 끄집어낼 수 있는 신물.
그 만년필의 본래 형태는 가면이었다.
리카도르가 슈페나를 저택에서 처음 마주쳤을 당시에 썼던 것과 같은,
‘햇빛 가리기엔 딱 좋았는데.
뭐, 덕분에 빚은 어느 정도 갚았 다만.’
리카도르가 슬쩍 눈을 비껴 내리곤 퍽 만족스레 입매를 들어 올렸다.
우연히 나무 위에서 목격한 장면이 이런 식으로 쓰일 줄은 몰랐으니까.
처음부터 리카도르는 알고 있었다.
하녀들의 같잖은 수작질을.
“저건 봐주려는 건가.”
그가 다시 방 안을 느긋하게 훑어보더니 하암, 나른하게 하품을 했다.
그 시야에 제인과 대화를 나누는 슈페나가 담겨 있었다.
‘정이 많은 건지, 순진한 건지.
그깟 말로 이루어진 약속 따위를 믿는 건가.’
“시시하네.”
리카도르는 손으로 턱을 괴곤 지루하다는 듯 뇌까렸다.
흥미를 잃은 그가 낮잠이나 자려고 속눈썹을 드리운 찰나, 창문 너머의 슈페나가 하녀를 향해 이야기했다.
– 방금 그 다짐, 두 번째 심장에 대고 맹세할 수 있어?
슈페나가 놓은 촘촘하고 영리한 그물망.
여린 소동물답게 하녀를 순순히 용서해줄거란 예상과는 다른 제안이었다.
일견 권태롭기까지 했던 리카도 르의 낯이 단숨에 오묘해졌다.
‘두 번째 심장?’
그가 감정 따윈 깃들지 않은 듯 무기질적인 표정으로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타나토를 매개로 한 계약이라……. 부인은 재밌는 걸 하는군.”
그러곤 어여쁘게 눈매를 접어 청량한 웃음을 지어냈다.
그와 달리 기다란 속눈썹 아래에 감추어진 푸른 눈망울은 미적지근하게 식어있었다.
리카도르는 슈페나와 제인이 계약을 맺는 광경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제법 신비로웠던 계약과정이 끝나고, 리카도르의 시선은 슈페나의 손등으로 머무르게 되었다.
정확히는 그 위에 새겨진 하얀색 진주 모양 표식에.
하얀 표식에선 제인의 탈리테가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그에 리카도르가 깨달았다는 듯 크게 눈을 깜박였다.
“계약이 이런 거였군.”
계약 장면을 실제로 본 건 처음이었다.
덕분에 확신할 수 있었다.
‘역시 저 파랑새와 계약을 맺은 것이었나.’
방금 확인한 슈페나의 타나토는 오팔. 리카도르가 가지고 있던 문양의 형태도 오팔.
그리고 오늘, 본능적으로 알아챌수 있었다.
슈페나의 팔뚝에 있는 표식이 리카도르가 가진 타나토인 월장석모양이라는 걸.
서로가, 서로의 타나토 문양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건 필시, 계약을 했다는 뜻이었다.
그 이외의 경우에서 표식이 생겼단 이야기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으니까.
다만, 한 가지 걸리는 점은……..
리카도르가 제 오른쪽 손바닥에 있는 검은 오팔 모양 표식을 바라보았다.
‘이게, 기억이 남아있는 어릴 적부터 가지고 있던 문양이라는 거지.’
떠올리지 못할 만큼 오랜 과거에 슈페나와 만난 적이 있는 걸까.
아니면 또 다른 변수가 있는 걸까.
리카도르의 두 눈이 목표물을 포착한 맹수처럼 번뜩였다.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23화
그리 충만했던 기운은 표식을 타고 슈페나에게로 이전되었다.
덕분에 슈페나의 팔뚝에 있던 검은 반점 같은 문양도 은은하게 빛을 발했다.
팔을 다 덮는 옷을 입고 있었기에 당연하게도 슈페나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나 놀라운 건 이제 시작이었다.
슈페나가 제인과 맺었던 계약의 증표, 하얀 표식이 희미해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리카도르의 기운이 제인의 탈리 테를 밀어낸 까닭이었다.
그렇게 제인의 탈리테는 더 이상 슈페나에게서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리카도르의 체향만 그녀의 살갗에 감돌았을 뿐.
그가 짐짓 만족스레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혼잣말했다.
“이제야 좀 봐줄 만하네.”
계약을 어그러뜨린 건 아니었다.
어차피 상대방의 탈리테는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사라지지 않던다음 날 아침.
슈페나는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하얀 종이 위에 꼬불꼬불한 필기체로 쓰인 건, 어제 일에 관한 내용이었다.
‘내 맘대로 처리한다고 했지만, 상황 보고는 해야지.’
그녀는 제법 능숙한 손길로 표를 그려 알아보기 쉽게 정리했다.
‘나름 인생 2회차라고!’
누가 범인인지, 어떤 벌을 내렸는지, 앞으로의 재범 방지 방안은 무엇인지.
뭐, 그런 것들을 빠짐없이 적은 슈페나가 만년필을 탁 내려놓았다.
‘맞다, 만년필.’
그 수상한 은색 만년필에 관한 생각이 불현듯 엄습했다.
리카도르를 넌지시 떠보았지만 얻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짐작 가는 방향은 있었다.
‘그런 특이한 힘을 가진 걸 보면 신물일 수도.’
신묘한 신의 힘이 담긴 물건, 신물.
이곳의 수인들은 자연을 신격화해서 모셨다.
해달, 별….
해, 달, 별, 구름..….
뭐, 이런 것들을.
‘이상하단 말이야. 왜 그렇게까지 날 도와주는 거지?’
고맙긴 했으나 조금 찜찜했다.
적당한 호의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텐데, 신물까지 얽힌 거라면 스케일이 달랐으니까.
그렇지만 무언가 목적이 있다고 하기엔 슈페나는 가진 게 쥐뿔도 없었다.
‘친해지고 나서 한번 직설적으로 물어봐?’
생각이 깊어지려던 찰나, 곁에 있던 하녀가 쭈굴쭈굴 연신 슈페나를 힐끗대며 말을 걸었다.
“작은 마님, 다 하신 겁니까?”
“아, 제인. 이것 좀 어머님께 전해줘.”
슈페나는 예전보다 훨씬 빠릿빠릿해진 갈색 머리 하녀에게 명했다.
“네, 작은 마님.”
지은 죄가 있는 제인은 뜨끔한 표정으로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이제 바르게 살겠습니다!”
눈치를 보던 그녀가 갓 출소한 복역자처럼 우렁차게 다짐했다.
방 안에 혼자 남게 된 슈페나는 의아함이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계약 효과가 많이 강력한가? 너무 기합이 들어갔네.”
하얀 진주 모양 표식이 생겼다만 딱히 예전이랑 달라진 점은 없는 듯한데.
한때 탈리테를 공유했던 것이 무색하게, 계약자끼리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손등에 예쁜 문신 하나 새긴 것 같아.’
슈페나는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대곤 빙그르르 한 바퀴를 돌았다.
‘대충 마무리했으니 원래 계획했던 걸 해야 하는데.’
슈페나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어가며 고민했다.
리카도르와는 집착 대신 절친이 되는 것도 좋을 듯했고, 결혼식 때 일을 보아 사자들의 인정을 받는 건 나름 할 만해 보였다.
노후 자금을 만드는 일도 카누스를 잘 구슬려보면 되지 않을까?
‘이제부터 차근차근하면 되지.’
슈페나는 부러 손가락으로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힘차게 마음을 다잡았다.
‘뭐부터 해야 할까……..’
그 순간, 이 목표들에 한 걸음 가까워질 아주 좋은 방법이 생각났다.
그녀가 저도 모르게 손뼉을 치며 새된 음성으로 소리쳤다.
“바깥나들이!”
모든 일의 기본은 시장조사가 아니겠는가.
영지경영도, 사업도.
슈페나에겐 사자들의 영역에 대한 정보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중요한 것들은 직접 부닥쳐야 얻을 수 있는 법이었고.
‘그럼 어머님한테 외출 허락을 받으면서 거들 만한 집안일은 없냐고 넌지시 여쭤볼까?’
슈페나는 도르륵 눈알을 굴리며 맹렬히 고민했다.
더구나 저택 밖 거리에는 신통방통한 정보상이 있었다.
원작 속에서도 간간이 언급되었던 곳이었지.
‘또 다른 메인 악녀가 후원했었으니까.”
미리 선점해놓으면 훗날 어떤 식으로는 도움이 될 터.
‘데드엔딩을 피하는 것도, 이혼후 욜로 라이프를 즐기기 위한 대비를 하는 것도, 더 쉬워지겠지?’
슈페나의 밤색 눈동자에 반짝반짝 이채가 돌았다.
그 기대처럼 바깥 구경을 할 기회는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왔다.
***
그 시각, 제인은 칸의 집무실 문을 두들겼다.
“들어와.”
제인이 꾸벅 인사를 하곤 예의바르게 서류를 건넸다.
“가주님, 이건..… 작은 마님이 작성한 보고서입니다.”
이렇다 할 부연 설명을 하지 않았음에도 칸은 차분하고 중후한 중저음으로 답했다.
“그래, 너도 이 일로 느낀 게 많겠지.”
이미 모든 일을 꿰뚫고 있는 지배자의 모습이었다.
칸이 사자 가주다운 카리스마가 배어 나오는 엄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번은 며늘아가에게 처벌을 맡겼으니 두고 보마. 하지만 두 번은 없다는 걸, 너도 잘 알고 있겠지?”
“명심하겠습니다, 가주님.”
그 단호한 일갈에 제인은 마른침을 삼키더니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결연한 낯을 확인한 칸이 무뚝뚝하게 축객령을 내렸다.
“그만 가봐.”
고요해진 집무실 안.
칸은 제인이 가져온 문서를 찬찬히 훑었다.
“보고서라니. 시키지도 않았는데 볼수록 야무져.”
그 짧은 중얼거림에 감출 수 없는 흡족함이 드러났다.
“이 내용물도 그럴듯한지 확인해 봐야겠군.”
그녀가 보고서에 부족하거나 잘못된 부분은 없는지 샅샅이 파헤쳤다.
냉철하지만 따스한 선생님처럼.
이윽고, 칸이 속눈썹을 두어 번 팔랑거리며 무심하게 딱 한 마디를 내뱉었다.
“아무래도 내 며늘아가가 천재인 모양이군.”
그녀가 깊은 고민에 빠진 듯 가라앉은 눈으로 책상 서랍에서 다른 서류를 꺼내 들었다.
‘……이 일을 맡겨도 되겠어.’
칸이 그 어느 때보다도 신속하게 옆에 놓인 설렁줄을 당겼다.
“당장 며늘아가를 데려오거라.”
칸이 명을 내리고 10분 뒤.
똑똑, 집무실의 문이 두들겨졌다.
그 노크 소리의 주인은 슈페나였다.
“왔니, 아가?”
칸은 자연스레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맞은편 의자를 빼 주었다.
슈페나는 황송하다는 듯 머쓱하게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곧이어 붙임성 있게 명랑한 어조로 대답했다.
“네. 마침 저도 찾아뵈려고 했거든요, 어머님!”
어머님이 테이블 위의 새하얀 도자기 찻잔에 주홍색 차를 따르며 입을 떼었다.
“그래?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거니?”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24화
어머님은 고민하는 건지 천천히 눈을 비껴 내렸다.
그 덕의 의
그 덕에 어머님의 눈동자의 서린 감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겉치레도 없이 너무 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나.’
슈페나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는 발을 동동 굴렀다.
하지만 그런 염려는 기우였다는 듯 칸이 눈꼬리를 휘어 웃고는 화답했다.
“호위기사를 대동한다면 언제든 괜찮단다. 굳이 나에게 허락받을 필요는 없어. 네 마음이잖니.”
“감사해요, 어머님.”
슈페나가 똑같이 마주 웃으며 고마움을 표했다.
그러자 어머님은 다감하게 며늘아가의 낯을 들여다보았다.
“아직 더 하고픈 이야기가 남은 얼굴인데.”
그 물음을 들은 슈페나가 슬그머니 눈알을 굴렸다.
‘집안일에 대한 건, 좀 이따 최대한 자연스럽게 운을 띄우자.’
호시탐탐 실권을 노리는 욕심쟁이 며느리로 비칠 수도 있었으니까.
그래서 우선 은근슬쩍 말머리를 돌렸다.
“어……그나저나 평소 티타임을 가지던 시간보단 이른 것 같은데, 어쩐 일로 부르신 거예요?”
어물쩍 넘어가려는 낌새에 칸의 눈매가 일견 가늘어졌다.
어머님이 피식 웃으며 순순히 며늘아가의 뜻에 따라주었다.
“다름이 아니라 보고서가 아주 쓸 만하더구나.”
이 보고서를 받고 나서 칸은 사실 조금 놀랐었다.
숙련자의 솜씨같이 깔끔한 보고서 상태와 범인을 색출해낸 실력도 마음에 들었지만..….
‘일처리가 거의 흠 잡을 데 없었어.’
배반자를 과감하게 내칠 줄 아는 판단력, 그 와중에도 자신의 편을 확보하는 포용력과 리더십.
하나, 완벽하게 신뢰할 수 없기에 대비책 또한 마련해놓는 철저함.
자그마한 며늘아가의 머리에서 나왔다고는 믿기지 않는 대응이었다.
‘가히 사자 가문에 어울리는, 파랑새지만 맹수 같은 인재야.’
칸이 잔주름이 진 미간을 손으로 꾹꾹 누르며 자못 뿌듯해했다.
슈페나는 늘 그녀의 예상을 뛰어 넘는 구석이 있었다.
처음엔 당돌하다고 여겼던 그 행동이 점차 대견하게 다가왔다.
‘쪼매난 게 잘해보겠다고 뽈뽈뽈돌아다니는 모습에 자꾸 눈길이 간단 말이지.’
지금은 무뚝뚝해진 제 자식들의 어릴 적을 보는 것 같았다.
리카도르만 해도, 꼬꼬마 시절 그 어린 덩치로 성체 물소를 잡겠다며 낑낑대었지..
그때 퍽 기특했었는데.
칸은 과거를 회상하며 추억에 잠겼다.
그렇게 적막이 흐를 무렵, 말간 슈페나의 목소리가 조용한 분위기를 일깨웠다.
“……어,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머님.”
그제야 상념을 떨쳐낸 칸이 앞에 놓인 찻잔의 손잡이를 쥐며 마저 말했다.
“깔끔한 일처리도 그렇고 일목요연한 보고서도 그렇고.”
칸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걸쳤다.
“체드윅 가의 사람이 된 이상, 서류 작업을 할 일이 많을 듯하여 보고서 작성법은 차차 가르칠 생각이었는데 대견하구나.”
문제에 대응하는 센스는 타고난 것이라고 쳐도, 초심자가 서류 작성을 완벽히 해내기는 힘들었을 텐데.
참 신기한 일이었다.
‘내가 일을 너무 잘했나?’
흐뭇해하는 칸을 보던 슈페나가 한껏 커진 눈으로 손사래를 쳤다.
“독학! 독학했어요. 어렵진 않더라고요.”
인생 2회차 짬밥 덕분인지 그냥 무의식중에 보고서가 잘 써지던데.
이대로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호오.”
그에 어머님은 탄성을 흘렸다.
흥미진진하다는 듯 끝이 살짝 올라간 감탄이었다.
그러던 칸이 나지막이 중얼대었다.
“정말 천재인가 보군.”
“네에?”
뭐지?
슈페나는 오늘따라 혼자만의 세계에 자주 빠지는 것 같은 어머님을 휘둥그레 쳐다보았다.
“아니다. 그냥 혼잣말이란다.”
칸은 대수롭지 않게 화제를 넘겼다. 그리고는 넌지시 흘러가듯 이야기했다.
그렇지만 그 내용은 전혀 가볍지 않았다.
“아, 그리고 내쫓은 하녀들에게는 영구 자택 연금명령을 내렸단다.”
“예?”
이게 무슨 일이람.
슈페나가 얼떨떨하게 반문했다.
칸은 독수리 저택에서 봤을 때처칸이 괜스레 헛기침만 했다.
그러다가 짐짓 태연히 본론을 꺼내 들었다.
원래 슈페나를 부른 목적은 따로 있었으니.
“아무튼 뭐 하나만 부탁해도 되겠니? 그 보고서를 보니 잘 해낼 것 같아서 말이다.”
“어, 음…. 그럼요.”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머뭇거리던 슈페나는 이내 방긋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설마 곤란한 걸 시키시지는 않겠지.’
그렇다고 어머님의 말을 거절할 순 없지 않은가.
그녀가 궁금함이 가득 묻어나오는 말투로 질문했다.
“어머님, 그런데 어떤 부탁이요?”
때마침, 문밖에서 누군가의 인기 척이 들려왔다.
돌연 어머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손수 문고리를 돌려주었다.
그 열린 문 틈새로 보인 건, 리카도르였다.
“적당한 때에 잘 왔구나, 아들.”
칸이 자연스레 그를 슈페나의 옆자리로 이끌었다.
심드렁한 표정의 리카도르가 비뚜름하게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리곤 한 손으로 느른하게 턱을 괴곤 힐끔 고개를 돌렸다.
그 작은 움직임을 따라 결 좋은 하얀 머리칼도 살짝 흐트러졌다.
그는 슈페나에게로 빤히 시선을 고정한 채, 어머님을 향해 물었다.
“무슨 일로 부르신 겁니까.”
칸은 픽 웃음을 흘리고는 손가락으로 대리석 테이블을 툭툭 건드려 이목을 집중시켰다.
“너희 둘이 해줄 일이 생겼단다.”
언뜻 비장하게까지 느껴지는 칸의 부탁에 상반된 두 반응이 튀어 나왔다.
“저희 둘……이요?”
“하겠습니다.”
새된 반문과 단호한 긍정.
물론 전자는 슈페나였고 후자는 리카도르였다.
그녀가 눈을 끔벅거리며 리카도 르를 응시했다.
쟤, 뭔지 알고 저러는 거야?
그는 괜스레 다 식은 차를 들이켜며 딴청을 피웠다.
그러는 사이, 어머님이 부드럽게 슈페나의 양손을 감싸 쥐며 조곤 조곤 대화를 이어나갔다.
“실은 그리 간단한 건 아니지만……. 며늘아가, 너한테도 꽤나 도움이 될 게야.”
칸은 며늘아가와 눈을 맞추고는 구체적인 설명을 시작했다.
“사자들은 풍요로운 가을이 되면 경계 지역으로 순회를 나간단다.”
“순회요?”
“농작물이 잘 자라고 있나, 영역에 불온한 기운이 감돌지는 않나, 그런 걸 살피기 위해 돌아다니는 행사이지.”
어머님이 중요한 이야기니 잘 들으라는 듯 검지로 테이블을 툭툭건드리며 덧붙였다.
“그리고 그 전 여름에 안전을 기원하고자 미리 연회를 벌인단다.”
들어본 적 있는 내용이었다.
남주와 여주가 처음 함께 춤을 추게 되는 에피소드의 배경이었으니까.
‘당연히 올해 연회에서는 아니지만.’
피폐물인 만큼 원작 속 등장인물은 다 성인이 아니었던가.
아직 한참 남은 일이었다.
슈페나가 딴 길로 새려는 마음을 바로잡으며 어머님의 말을 경청했다.
“연회 규모가 크다 보니 이맘때에 준비를 시작하는 편인데……”
칸이 잠시 뜸을 들이더니 흠, 작은 탄식을 내뱉었다.
그에 슈페나가 의아한 표정으로 슬금슬금 눈치를 살폈다.
‘이걸 혹시 나한테 일임하시려는 걸까?’
원작에서도 누누이 강조된 이벤트였다. 사자들에겐 가장 중요한 연회 중 하나라고 했었지.
‘은근슬쩍 내가 할 집안일은 없는지 여쭤보려 했는데….…..’
어쩌면 기회일지도 몰랐다.
어머님은 금방 도로 여상스러운 얼굴로 돌아와 그간의 사정을 늘어놓았다.
“하필이면 여태껏 연회 준비를 도맡던 아이가 지금은 저택에 없어서 일손이 부족하구나.”
칸이 씁쓸한 어조로 들릴락 말락작게 자조하듯 중얼거렸다.
“그래도 이맘때면 항상 집에 들렀었는데.”
저도 모르게 혼잣말한 칸은 혹시나 했던 슈페나의 바람대로 구미가 당기는 제안을 내놓았다.
“그래서 말인데, 실력 발휘 한번 해보지 않겠니?”
칸도 처음에는 적당히 경험이 있는 부하에게 시킬 계획이었다.
이제 막 사자 가문에 들어온 어린 며느리가 실수 없이 연회를 책임지기란 쉽지 않았으므로, 그렇지만 한번 믿어보고 싶었다.
저 작은 파랑새의 가능성을.
슈페나에게도 아주 좋은 경험이 될 거였다.
가문의 분위기를 파악하고 적응
“이래 봬도 영지 사정에 밝아서 많이 쓸 만할 게야. 내가 허락할테니 마음껏 부려 먹으렴.”
실은 부가적인 의도도 따로 있었다.
‘같이 무언가를 하다 보면 없던 정도 들겠지.’
본디 남녀 간에 친구란 존재하지 않는 법이 아니던가.
이 모든 게 며늘아가와 아들의 사랑을 응원하기 위한 시어머니의 가상한 노력이었다.
슈페나처럼 마음에 쏙 드는 며느리를 맞이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으므로, 같은 사자마저 동족을 배신하는 형국에 타 종족인 파랑새가 이리 기특해 보이다니.…….
‘충분히 못 볼 꼴도 많이 봐서 이런 감정을 다시는 느끼지 못할 줄 알았거늘.’
칸은 애써 다른 이유를 덧붙였다.
‘그 문양과 예언, 아들놈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알아봐야겠군.’
그러려면 이렇게 저 둘을 붙여놓는 게 딱 좋은 선택일 터.
칸은 아들이 앉은 의자를 툭툭발로 차며 얼른 대답하라는 듯이 신호를 보냈다.
“뭐, 원하신다면 기꺼이.”
리카도르가 입꼬리에 미려한 호선을 그려 넣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의 눈길은 슈페나에게 머문 채였다.
그 호의적인 답에 만족한 듯 어머님이 은은하게 웃음을 지었다.
이내, 그녀는 며늘아가와 아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잘할 수 있겠지?”
슈페나가 초롱초롱 강아지 같은 눈빛을 쏘아 보내며 맹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어머님!”
그것도 모자라 그녀가 주먹을 불끈 쥐더니, 머리에서 모락모락 김이 나올 듯 의욕을 불태웠다.
“정말 열심히, 완벽하게 준비해놓을게요!”
마치 돌이라도 씹어 먹을 듯한 기세였다.
슈페나는 군기가 바짝 든 신입병사처럼 허리를 반으로 접어 인사했다.
그러곤 쪼르르 칸의 집무실을 나왔다.
리카도르가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그녀의 뒤를 천천히 따랐다.
열정을 담아 앞으로 전진하던 슈페나가 돌연 걸음을 멈추었다.
‘너무 기합이 들어갔나 봐. 막상 어떤 걸 먼저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녀는 제자리에 서서 괜히 목만 긁적거렸다.
그때, 리카도르가 그런 슈페나를 내려다보며 손을 내밀었다.
“손, 줘봐요.”
그녀가 뭐라 답하기도 전에 손끝이 얽혔다. 그는 슈페나를 끌고 어딘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그 둘은 파릇파릇한 잔디가 깔린 정원을 가로지르게 되었다.
슈페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어디 가는데요?”
“도서관이요.”
리카도르가 그녀와 맞닿은 손에 아프지 않게 힘을 주며 얘기했다.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25화
저택 내에 있는 도서관에 직접 가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동안은 하녀들이 책을 빌려다주었으니까.
도서관은 별관 옆 로마네스크 양식의 고풍스러운 석재건물이었다.
육중한 문을 두 손으로 힘껏 밀어내자 사뭇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은은하고 분위기 있는 조명과 반질반질 윤이 나는 원목 책상. 그리고 켜켜이 쌓인 지혜가 묻어나오는 책장.
딱 소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곳이었다.
독수리 가주의 저택에도 도서관은 있었지만 이곳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녀가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우와, 책 냄새…….”
그 갑작스러운 소리를 들은 리카도르가 조용히 입술에 손가락을 얹었다.
슈페나도 머쓱하게 눈치를 보다가 쉿, 손으로 입을 막았다.
사실 도서관에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만 큰 소리를 내는 게 예의는 아니었으니..
더구나 저택의 사용인들 모두 드나들 수 있는 곳이니 점잖게 행동하는 게 나았다.
‘이런 차분하고 힐링되는 도서관은 오랜만이라 그런가, 실수했네.’
그녀가 까치발을 들어 소리가 나지 않도록 사뿐사뿐 걸었다.
그리고는 밤중에 엄마 몰래 야식을 먹는 아이처럼 조심히 의자를 빼어 앉았다.
그 옆에는 리카도르도 함께였다.
‘아무래도 연회 준비를 위한 책을 찾으러 온 거겠지?’
나는 무얼 먼저 해야 할지도 고민이었는데.
‘신데렐라 요정 할머니 같아.’
딱 필요할 때 나타나 적절한 도움을 주니까.
확실히 리카도르와 친구가 된다면 좋은 점이 많을 듯했다.
의뭉스러운 구석은 좀 있었다만.
‘왜 나를 계속 돕는 건지 오늘 낱낱이 살펴봐야겠어!’
결연히 두 주먹을 움켜쥔 슈페나가 힐끔 옆자리에 앉은 리카도르를 훔쳐보았다.
‘근데 너무 가까이에 자리 잡은 거 아닌가.’
워낙 고요한 환경에 있어서인지 숨소리마저 귓가에 스며들 것 같아 걱정이었다.
‘그런데 뭘 쓰고 있는 거지?’
슈페나는 책상 위에 놓인 공용 깃펜으로 무언가를 끼적이고 있는 리카도르를 빤히 구경했다.
그러다 목소리를 낮추곤 속닥였다.
“저기, 뭐 하는 거예요?”
“이 목록에 맞게 책을 대출하면 될 겁니다.”
그러자 그도 슈페나처럼 조곤조곤하게 말하며 마저 종이에 글씨를 채워 넣었다.
첫 만남 때부터 청량하다고 생각했던 미성은 조금 낮아지자, 성숙한 느낌을 물씬 풍기는 저음이 되었다.
리카도르가 완연한 어른이 된다면 어떨까.
문득 그런 궁금증이 들었다.
하며 잔근육이 보기 좋게 자리 잡
‘어깨는 떡 벌어지고 등짝은 판판 힌 퇴폐섹시………?’
19금 피폐물이 아니던가.
그 정도 섹시함은 갖추어야 남주라 할 수 있는 법.
슈페나가 히죽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붙들며 머리카락을 귀 뒤로 꽂아 넘겼다.
그렇게 한창 혼자만의 세계에 몰입하다 보니, 그녀는 현실을 망각해버렸다.
“이거, 안 받습니까?”
살짝 나무라는 듯한 리카도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완성된 리스트를 슈페나에게 건네며 슬며시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너무 멍 때리고 있었나 봐. 나한테 주는 건지도 몰랐어.’
그녀는 서둘러 종이를 받았다.
그러곤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아무렇지 않은 척 수습했다.
“…아, 받아야죠. 고마워요.”
슈페나는 속눈썹을 드리우고는 짧은 자아 성찰의 시간을 가졌다.
‘내가 너무 불순했나?’
얼른 일이나 하자!
결심을 마친 그녀가 품에 종이를 꼬옥 안고 신속하게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러면 저는 책을 가지고 올게요!”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둘러보았다. 마침, 책장 끝에 놓인 나무 사다리를 발견했다.
영차영차, 사다리를 제 앞으로 끌어다 놓은 슈페나가 발판에 오른쪽 다리를 올렸다.
꽤 높이까지 올라야 하는 터라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발을 내디뎠다.
이윽고, 사다리의 꼭대기까지 오르는 데에 성공했다.
‘이런 개고생을 해야 한다니.’
슈페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속으로 툴툴대었다.
이능을 쓰기엔 보는 눈이 조금 많지 않은가. 책의 제목도 일일이 육안으로 확인해야 했고.
특히나 위에 있는 서적은 조명에 반사되어 글자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더듬더듬 책을 빼었다 꽂아가며 서고를 뒤졌다.
그러던 순간, 등 뒤에서 누군가가 다가왔다.
느닷없는 인기척에 슈페나가 책장을 붙잡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 발걸음 소리의 주인은 리카도 르였다.
그녀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바들바들 떨리는 어투로 말했다.
“뭐야, 언제 왔어요?”
“하던 거, 마저 안 하고 뭐 합니까?”
리카도르는 대답 대신 퍽 매정하게 이야기했다.
그가 그녀의 손에 들린 종이를 슥 훑어보더니 반대편 서고로 이동했다.
그러고선 슈페나가 미처 찾지 못했던 서적을 하나하나 골라냈다.
책이 꺼내어진 자리는 허전한 빈 공간이 되었다.
그 뻥 뚫린 틈의 너머로 슈페나의 뒷모습이 보였다.
리카도르는 그런 그녀를 주시했다.
한편, 슈페나는 하얗고 보드라운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하던 일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리스트를 손가락으로 짚어 내리는 그녀의 얼굴에는 이윽고 화색이 돌았다.
“이제 이 책만 뽑으면 …….”
그녀가 저도 모르게 발끝을 살짝 들고는 옆으로 손을 뻗었다.
검은 표지의 책이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슈페나는 더욱 아슬아슬하게 팔을 휘적대었다.
무게중심이 다른 쪽으로 쏠려서인지 사다리가 아주 약간 흔들렸다.
꽤나 위태위태한 상황이었다.
‘정말이지 손이 많이 가.’
동그랗고 하얀 뒤통수.
틀림없는 리카도르의 것이었다.
슈페나가 의아함이 배어 나오는 어투로 입을 열었다.
“…..…여태껏 잡아주고 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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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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