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uebird Lady and The White Lion Family RAW novel - Chapter (4)
백사자가문의 파랑새 마님 4화(4/21)
“이 책, 빼먹었습니다.”
리카도르는 여상스럽게 앞에 꽂혀있는 책들 중 하나를 집어 그녀한테 넘겼다.
그렇지만 슈페나는 그 서적을 거 두어들일 수 없었다.
“아”
“아…….”
슈페나의 입술이 작게 벌어지고 그 사이로 짧은 탄성이 새었다.
푸른 호수처럼 맑은 리카도르의 눈동자에 그녀가 담겨있었다.
‘오늘따라 인상이 조금 다른 것 같은데.’
평소 길쭉했던 눈매는 기분 탓인지 묘하게 부드러이 풀려있었다.
맨날 올려다보기만 하던 이를 이리 내려다보게 된 기분은 퍽 새로웠다.
슈페나는 멍하게 눈을 깜박였다.
그 작은 움직임을 따라 푸른색 속눈썹도 같이 한들대었다.
마찬가지로 그녀를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던 리카도르도 느릿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다 찾은 것 같은데 이만 돌아가 죠.”
그가 가져가라는 듯 쥐고 있던 책을 다시 한번 들이밀었다.
쌉쌀하고 미묘한 종이 냄새가 슈페나의 코끝을 간질였다.
그녀가 얼떨떨하게 서책을 품에 안고는 사다리에서 내려왔다.
그러고 나서야 리카도르도 툭툭무릎을 털고 일어섰다.
리카도르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저벅저벅 앞을 향해 걸어 나갔다.
‘뭐 이렇게 걸음이 빨라.’
덩그러니 남게 된 슈페나가 바닥에 놓인 책더미를 한 아름 끌어안고는 쫄래쫄래 그를 따랐다.
시간이 얼마 흐르지도 않았는데, 도서관은 그새 한적해졌다.
소리를 내어 떠들어도 괜찮을 정도로 꼬마개미 한 마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팔 저려.’
점점 더해지는 무게감에 슈페나가 저릿저릿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 순간, 어떻게 알아챈 건지 리카도르가 비스듬히 몸을 돌렸다.
그러더니 슈페나에게로 다가왔다.
‘뭐지……?’
그녀가 방긋 입꼬리를 끌어올리곤 이리저리 눈알을 굴렸다.
곧이어 슈페나의 낮에는 미세한 놀람이 번졌다.
“어?”
슈페나의 팔이 가벼워졌다.
리카도르가 그녀의 마음이라도 읽은 듯 책더미를 가져간 덕분이었다.
갑자기 왜 도와주는 거람.
슈페나가 제 손에 들린 단 한 권의 책을 괜스레 뒤적거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설마 내가 불쌍하게 생겨서 챙겨주는 건 아니겠지?’
그녀를 당황시킨 장본인은 대수롭지 않은 말씨로 짐짓 타박했다.
“앞에 잘 보고 걸어요. 누구 덕분인지 뒤통수에 구멍 뚫리겠네.”
그런 그의 듣기 좋은 미성에는 은근한 장난기가 깃들었다.
“그러면 부인이 나 먹여 살릴 겁니까?”
“아니요?”
슈페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곤 도리질했다.
리카도르도 지지 않고 되받아쳤지만,
“의문문인데?”
“이게 귀 기울여서 들으면 평서 문이에요. 그리고 저 지금 굉장히 진지해요.”
그녀가 잘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속사포로 웅얼거리며 항변했다.
그에 리카도르가 피식, 웃음을 흘리다 아닌 척 헛기침했다.
‘너무 소심하게 말했나. 왜 웃지?’
슈페나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뚱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 아옹다옹하는 사이, 그 둘은 원래 자리를 잡았던 곳에 다다랐다.
그녀가 리카도르의 맞은편에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그는 탁, 책들을 내려놓곤 이지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음성으로 제안했다.
“우선 이 서적을 참고하면서 예산안이랑 세부 계획을 짜야 할 것 같군요.”
“네!”
슈페나는 똘망똘망한 눈망울로 긍정했다.
그러나 잠시 뒤, 그 사슴처럼 말간 눈빛은 곧 죽을 동태처럼 구슬프게 썩어 들어갔다.
“이거 계산 틀렸습니다.”
…나 설마 새대가리인가?
복잡한 숫자들의 향연에 슈페나의 머릿속은 새하얘졌다.
큰 규모의 연회라서 단위 자체가 달랐으니.
더구나 연회 때 지켜야 할 규칙은 또 얼마나 많은지…….
내놓아야 할 음식의 색깔마저 깐깐히 따지는 건 처음이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자신 있었는데.
보고서 칭찬도 받았고.’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은 거의 없었지만 인생 2회차 버프라는 게 있지 않은가.
그런데 그게 말짱 꽝일 줄이야.
“생각보다 되게 복잡하네….”
슈페나는 끙끙 골머리를 싸매며 입 안쪽 살을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이 일을 도맡았다는 수인은 천재인가?’
얼굴도 보지 못한 자에 대한 존경심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그러던 중, 묘한 의문이 피어났다.
‘어쩌면 원작 중요인물일 수도.’
거기까지 생각이 도달한 슈페나가 눈을 빛냈다. 그녀는 팔꿈치로 리카도르를 살며시 찔렀다.
“근데 원래 연회 준비는 그동안 누가 해온 거예요?”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26화
“제 모자란 혈육이요.”
그는 일견 단호하게 답했다.
“아….”
슈페나가 멋쩍게 탄식했다.
사이가 안 좋은가? 아니면 현실 가족?
솔직히 남주의 형제자매에 관한건 잘 알지 못했다.
이곳에 도착하고 체드윅 가의 가계도 같은 걸 배우면서 조금 이야기를 들었을 뿐.
‘누나가 존재한다는 건 알았는데 남동생도 있는 줄은 몰랐었지.’
원작에서는 남주의 가족들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별로 없었는걸.
어머님조차 비중이 공기보다도 적지 않았던가. 아버님은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는 설정이라서 보이지도 않았고, 여러모로 남주의 주변인에 관해선 잘 서술되지 않은 소설이었다.
슈페나는 아리송한 마음을 내비치며 다시 질문했다.
“누님분이요? 아니면 남동생?”
“덜 모자란 쪽입니다.”
그 냉정하고도 가차 없는 한마디에 슈페나의 입술이 동그랗게 모아졌다.
그래서 누구라는 거야?
리카도르의 누나도, 남동생도 직접 만나본 적이 없으니 궁금증이 들었다.
‘결혼식 때는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누님 쪽은 옆 영지를 시찰 중이라고 들었고, 남동생 쪽은 여우 수인들과 생긴 문제를 해결하러 갔다고 그랬나.
이 집 식구들은 전부 밖돌이라서 의아했다.
‘처음 왔을 땐 리카도르도 저택에 없었지.’
그리고 방금 리카도르의 반응을 보니 그다지 살가운 관계는 아닌 것 같았고, 본디 로판 남주네 집안은 어딘가 문제가 있는 게 국룰 아니던가.
‘관심 두지 말자. 괜히 파고들면 귀찮아질지도 몰라.’
그래도 언젠가는 리카도르의 형제자매들과도 한번 마주치게 될 터.
어떤 성격인지 알아둘 필요는 있을 듯싶었다.
슈페나의 두 눈썹이 추욱 늘어졌다. 그 모습을 목격한 리카도르는 자못 무뚝뚝하게 알려주었다.
“누님입니다.”
아하, 슈페나가 작게 호응했다.
이쪽은 나름 소소한 분량을 차지하는 조연이라서 언뜻 알고 있었으므로,
‘차가운 분위기의 피도 눈물도 없는 사자라 악명이 자자했었지.’
여주한테마저 싸늘함의 극치를 자랑하던 이였다.
‘그리 무섭다는데, 내가 본인 일을 대신했다고 미움받는 건 아니겠지?’
슈페나가 살짝 침울해진 낯빛으로 슬며시 말을 얹었다.
“………그, 누님분은 타 영지를 시찰하는 중이라고 들었는데, 언제 오신대요?”
리카도르가 잠깐 생각에 잠긴 건지 느릿하게 속눈썹을 드리웠다.
그 안에 담긴 눈망울은 퍼석하게 메말라 있었다.
“아마 늦을 겁니다. 사자들의 영역이 워낙 넓은 터라.”
“아, 네.”
하긴 소설 속에서도 남주의 누나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바쁜 느낌이었지.
슈페나가 알겠다는 듯 아랫입술을 앙다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일견 부드러워진 말씨로 짧게 덧붙였다.
“누님은 좋아할 겁니다. 일 덜었다고.”
뭐지?
갑자기 묘하게 달라진 그의 행동에 슈페나가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하나, 그 느낌은 착각이었다는 듯 리카도르가 쌈박하게 매듭지었다.
첫사랑 이야기를 해주다 수업 진도로 돌아가는 선생님처럼 칼 같은 태도였다.
“그러니 이런 시답잖은 얘기는 그만하고 마저 집중하죠?”
“…….”
그녀는 멋쩍게 아랫입술을 깨물고는 딴짓하다 들킨 학생과도 같이 대답했다.
그렇게 그 둘은 다시 연회 계획을 세우는 일에 집중했다.
처음만 해도 그리 어려웠던 계산은 익숙해지니 점점 괜찮아졌다.
슈페나가 방긋, 웃음을 걸치더니 뿌듯하게 자화자찬했다.
‘나 새대가리는 맞지만, 새대가리까진 아닌 듯?’
그리고는 리카도르한테 발랄하게 얘기했다.
“이걸로 대략적인 건 대충 된 거 죠?”
“아직 한참 남았습니다.”
돌아온 답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으으….”
슈페나가 앓는 소리를 내며 책상에 푹 얼굴을 박았다.
이래 봬도 연회 계획서는 다 완성한 상태였다.
물론 세세한 건 확인해봐야겠지만.
이내, 그녀는 다시 정신을 차리곤 열심히 작업에 몰두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주변의 온도가 딱 기분 좋을 만큼 서늘해져 있었다.
슈페나가 슬쩍 얼굴을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찌르르, 풀벌레 소리가 울리는 상냥하고 고즈넉한 밤.
그녀는 만년필을 내려놓고 툭툭발끝으로 바닥을 건드렸다.
따스한 조명만 남긴 채 어둠이 내려앉은 도서관의 정경에 시선을 고정하면서, 그 잠시간의 여유를 만끽하던 슈페나가 슬며시 테이블에 엎드렸다.
그러곤 리카도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온종일 붙어 있으니 리카도르랑도 나름 편해진 것 같네.’
단정한 리카도르의 낯은 주위의 어둠 덕분에 유화처럼 명암이 졌다.
그는 무언가 잘 풀리지 않는 건지 미간을 찌푸리며 펜대의 끝을 잘근 물었다.
덩달아 도톰한 붉은 입술도 오밀조밀하게 오므려졌다.
슈페나는 괜스레 도로 반대편으로 돌아누웠다.
그러다가 실수로 책을 탁, 쳐버린 탓에 필기구가 와르르 쏟아졌다.
순식간에 바닥이 지저분해지고 조용했던 분위기에도 파란이 일었다.
집중이 깨진 모양인지 리카도르가 책을 손에서 내려놓았다.
‘그냥 계속 얼굴 구경하고 있을 걸….’
그녀는 나무열매를 훔쳐 먹다 걸린 새처럼 땡그랗게 눈을 뜨곤 동공 지진을 일으켰다.
리카도르는 아랑곳하지 않고 떨어진 물건들을 주웠다.
그리곤 왜 그런 표정이냐는 듯 무덤덤하게 슈페나의 안색을 살폈다.
“괜찮습니까?”
그녀가 횡설수설 입을 떼었다.
“아, 괜찮”
꼬르륵.
그 순간, 배꼽시계가 요란하게 제 역할을 수행했다.
‘넌 또 왜 이 모양이니?’ 슈페나의 두 볼이 연지곤지라도 찍은 것처럼 발갛게 물들었다.
이런 생리적인 현상은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밥을 먹은 지도 꽤나 오래되었으니.
“오늘은 이만 끝내도록 하죠.”
그 사실을 인지한 리카도르가 난 잡한 책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슈페나도 그를 따라 대출해갈 책들을 한 아름 품에 안고는 도서관을 나섰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선선한 밤공기와 푸른 달이 그들을 반겼다.
암녹빛 정원을 아름답게 수놓은 반딧불이와 활짝 만개한 꽃송이.
“여긴 본 저택의 정원보다 야경이 예쁜 것 같네요.”
슈페나가 리카도르와 보폭을 맞추어 산책로를 거닐며 감탄했다.
달빛이 걸린 그의 얼굴도 느른하게 풀어져 있었다.
그때, 돌연 쾅, 굉음이 울렸다.
그 폭발음은 연달아 고막을 강타했다.
껍질에 숨은 거북이처럼 몸을 움츠린 슈페나가 잠시 후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폭죽 소리였잖아?’
다름 아닌 불꽃이 팡 터지고 있는 광경.
리카도르는 이런 거에도 놀라냐는 듯, 개복치를 보는 것만 같은 시선으로 슈페나를 응시했다.
그녀는 머쓱하게 볼만 긁적였다.
그러다 홀린 듯이 여러 색깔의 꽃이 피어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우와, 불꽃놀이…… 예쁘다. 축제라도 하는 건가?’
별이라도 헤듯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담장 너머를 바라보던 슈페나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 조막만 한 입술에서 꿈꾸는 것처럼 나긋나긋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저택 밖이 되게 들뜬 것 같네요.
무슨 날인가 봐요.”
“내일모레가 달이 뜨는 날입니다.”
리카도르는 어느새 걸음을 멈춘슈페나를 뒤돌아보고는 이야기했다.
슈페나가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맞장구쳤다.
“그 엄청 커다란 달이요? 이번에 말이 나왔다던.”
예언 이능을 가진 토끼가 점성술로 슈퍼문이 곧 떠오를 거라 예고 했다지.
사자들에게 이건 꽤나 중요한 일이었다. 사자 수인은 달을 받들었으니까.
‘어쩐지 요새 저택 사람들이 들뜬것 같더라니.’
그럼 지금 시기에 밖으로 나가면 완전 축제 분위기라는 건가.
슈페나의 두 눈이 밤하늘의 별처럼 생기 있게 반짝였다.
리카도르는 그저 가만히 슈페나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사자 수인도 아닌 그녀가 달 이야기로 천진하게 종알대는 게 신기해서.
그가 살짝 의아함이 서린 어투로 말을 걸었다.
“기대됩니까? 달이 뜨는 게.”
“뭐, 예쁠 것 같긴 하네요.”
슈페나는 달을 움켜쥘 듯 손을 뻗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그녀에게 한 발짝 다가가 검지로 톡톡 어깨를 건드렸다.
“그래서 저택 밖에 나갈 생각이었습니까?”
“네?”
어떻게 알았던 거지……?
이 의문은 물어보기도 전에 바로 풀렸다.
“문 너머로 들어버려서요. 부인이 어머니랑 나눈 대화.”
역시 맹수라서 청력이 좋네.
슈페나는 소리 없이 감탄했다.
그러고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반쯤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딱히 비밀로 할 것도 아니었으니까.
“아……. 꼭 그것 때문은 아니었는데 내일모레쯤 나가 보려구요.”
그러나 리카도르는 의외의 제안을 했다.
“같이 나가죠?”
“왜요?”
은근한 당황이 섞인 슈페나의 반문에 리카도르가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어차피 한 번은 나랑 나가봐야 할 테니까.”
그는 그녀가 들고 있는 종이 뭉텅이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축복을 내리는 데에 쓰일 물건은 직접 골라야 하잖아요.”
그 얘기를 들은 슈페나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아, 맞다. 축복!’
무탈한 순회를 기원하는 연회에는 조금 특별한 관례가 존재했다.
명칭은 ‘순회의 축복.
연회를 주관하는 이가 손수 선별한 귀물을 가져와, 초대받은 자들에게 선물하면서 앞길을 축복하는 절차였다.
그 물건은 매년 달라야 했고, 모두의 귀감이 될 만한 상징성을 지녀야 했으며, 사자 영지에서 나는 것이어야 했다.
연회 책임자의 센스를 알 수 있는 행사였지.
‘평판을 올리기에 좋은 기회야.’
슈페나의 눈빛이 해사하게 반짝였다.
그 극적인 표정 변화에 리카도르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러더니 아쉬울 것 하나 없다는 듯 짧게 어깨를 으쓱였다.
“싫음 말고.”
“누가 싫대요? 가요.”
슈페나가 리카도르의 옷자락을 잡아끌며 대꾸했다.
우선 연회를 준비하는 일이 먼저였다.
어차피 영지 내의 분위기를 알고자 둘러보려고 했던 거였으니, 같이 가도 파악할 수 있을 터.
‘정보상과 접촉할 기회는 나중에도 있을 거야.’
언제든 나가도 된다는 어머님의 확답을 받았으니까.
다행히도 아직은 메인 악녀가 활개 칠 시점이 아니었다.
애초에 유학 가 있어서 사자 영역에 있지도 않은걸.
그렇지만 외출하는 김에 겸사겸사 정보상이 있는 곳이 어딘지 확인해보는 것도 좋을 듯했다.
‘그나저나 리카도르랑 나가게 되면….’
친구 하자고 다시 말해볼까?
슈페나가 그의 옷 끝을 쥔 손가락만 괜스레 꼼지락거렸다.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27화
그때, 은근하고도 진득한 리카도 르의 미성이 귓가에 들이박혔다.
“썩 내키지 않아 보이는데.”
그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곤 슈페나의 얼굴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완전히 내키는데요? 되게 중요한 일이잖아요.”
그녀가 힘차게 도리질을 하며 부정했다.
리카도르는 슈페나의 말의 진위를 가늠하려는 듯 성큼 거리를 좁혔다.
그 수려한 얼굴이 지척에 내밀어졌다.
‘얼굴 공격은 너무한 거 아니냐.’
슈페나가 괜스레 머리카락을 배배 꼬았다.
“진심, 이에요.”
“조금 더 해봐요. 그럼 믿을 것도 같으니까.”
그러자 그가 짐짓 방어적으로 팔짱을 끼더니 느른하게 시선을 비껴 내렸다.
그녀는 억울한 다람쥐처럼 불퉁스레 안면근육을 구겼다.
‘뭐지. 이 주객이 전도된 것 같은 기분.’
그래도 원하는 대로 해주지, 뭐.
진심이라는 걸 강력히 피력할 방법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던 그녀는 이윽고 결단을 내렸다.
“음…. 제 지갑으로 증명할게요.”
비루한 액수였지만, 그랬기에 더욱 결연하고 진실한 각오였다.
슈페나가 민망한 듯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러더니 곧이어 멋쩍은 감정을 감추려 배, 말간 웃음을 터뜨렸다.
“같이 가면, 까까라도 사줄까요?
특별히 비싼 걸로.”
그 말이 끝맺어짐과 동시에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여전히 그녀는 반달 모양으로 눈꼬리를 휘며 웃고 있었다.
슈페나의 하얗고 보드라운 볼 살이 특유의 싱그러운 미소를 따라 귀엽게 튀어나왔다.
그가 본 것 중 가장 밝고 원한 미소였다.
리카도르의 푸른 눈이 일순간 크게 동요를 일으켰다.
그는 홱 고개를 돌리더니 저벅저벅 앞으로 걸어 나갔다.
까까는 좀 아니었나?’
슈페나가 양손을 입가에 가져다 대곤 머쓱하게 소리쳤다.
“어? 이거 완전 어려운 결정인데, 진짠데.”
정말 억울하게 들리는 말투.
리카도르는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입가를 손등으로 가렸다.
그리고는 최대한 무뚝뚝한 목소리를 가장하여 수락의 답변을 내뱉었다.
“부인께서 그리도 애원하시니…… 가야겠군요.”
“네?”
슈페나는 어리둥절하게 눈만 끔벅였다.
그리 말한 리카도르는 큼큼, 헛기 침하더니 슈페나보다 먼저 앞서나갔다.
멀어져가는 리카도르의 뒷모습을 보며 그녀가 중얼거렸다.
“뭐야, 까까가 취향이었나 봐.”
***
한편, 이틀 후,
슈페나는 개인 집무실에서 카누스와 함께 간략한 채비를 하고 있었다.
-나도 같이 데리고 나가는 거 맞지? 나 너무 좋아!
꼬마 뱀은 천진하게 꼬리를 부비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물론 그 음성은 슈페나의 머릿속에서만 메아리쳤지만.
그녀는 널찍한 가방 안에다 열심히 필기구나 수첩 같은 작은 짐을 쑤셔 넣었다.
‘그동안 리카도르랑 같이 준비한 예산안이랑 자료도 챙겼고.’
예정에는 없었지만 카누스도 바깥나들이에 동행하기로 했다.
어떻게 소식을 들은 건지 꼬마뱀이 하루 5끼도 마다하고 단식투쟁을 벌인 덕분이었다.
‘그리고 카누스가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
명색이 천재 과학자 지능캐가 아니던가. 오히려 영지 분위기를 더 잘 파악해서 알려줄지도 몰랐다.
대가 없는 호의를 줄 성격은 아니었다만.
그나저나 정보상에 대한 게 걱정이었다.
시계 공방으로 위장하여 영업하고 있다는 건 알았으나,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는 몰라서.
‘조급해하지 말고 차근차근 해내자!’
슈페나는 씩씩하게 결심했다.
그리곤 준비를 다 마쳤는지 앙증맞은 빨간색 리본을 맨 꼬마 뱀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그녀가 카누스를 향해 신신당부했다.
“꼭 나랑 같이 다녀야 해. 알지?”
– 알지. 한집 식구 된 처지인데, 내가 도망가겠냐?
카누스는 천연덕스레 되받아쳤다.
아예 이곳에서 지낼 수 있도록 사자 가문과 뱀 가문 간의 협의가 끝난 상태였으니.
혼란스러운 뱀 수인들의 사태가 진정되려면 시간이 퍽 걸릴 거라나 뭐라나.
아무튼 카누스도 사자 영지에 제법 적응한 듯했다.
-그나저나 칼립스 나무껍질도 사주는 거지?
꼬마 뱀이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에 슈페나는 장난스레 대답했다.
“응. 뇌물이야.”
-뭐야, 나한테 바라는 거 있어?
카누스가 떨떠름해진 어조로 슬금슬금 똬리를 틀었다.
방어적인 경계 태세였다.
‘저 뱀은 종잡을 수가 없다니까.
물렁물렁했다가도 이리 맹수라는 티가 확 나니.’
그녀는 부러 상냥하게 꼬마 뱀을 칭찬했다.
“아직은 근데 생길지도 모르잖아, 너 되게 똑똑하다며.”
-아이. 뭘 또 그렇게까지 가아니라, 그걸 어떻게 알아?
헤벌쭉 웃던 카누스가 일견 새침하게 대꾸했다.
슈페나는 여상스러운 태도로 천연덕스레 말을 늘어놓았다.
“너 뱀 가문에서 천재로 유명했다던데?”
-아, 그래? 벌써 여기까지 소문이 났어?
카누스가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슈페나의 가방 뒤로 가렸다.
‘이런 쪽은 그냥 대놓고 정공법으로 나가는 게 낫지.’
칭찬도 많이 하고, 뇌물도 팍팍주고, 그런 슈페나의 계획을 모르는 카누스는 한껏 잘난 체를 했다.
안타깝게도 그 끝은 주먹을 부르는 애교였다.
-천재의 삶이란 고달프다. 나 아직 일곱 짤인뎅.
이런 혀 짧은 소리를 들은 그녀가 본능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 장면을 목격한 꼬마 뱀이 삐진 건지 픽 토라져 버렸다.
-흥! 누나, 내가 귀여워서 질투해?
카누스가 빵빵하게 몸을 부풀렸다.
화난 꼬마 뱀의 머리가 유독 뾰족한 삼각형으로 보이는 것 같았다.
‘쟤, 지금 독액 분비하는 거 아니지?’
슈페나가 괜스레 보송보송한 이마를 닦으며 어색하게 연기 톤으로 대사를 읊조렸다.
“어머, 어쩜 이렇게 귀여운 꼬마뱀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지?”
-그래? 더 해보든지 말든지.
카누스는 홉뜬 눈으로 슈페나를 지그시 쳐다보며 밀당을 시전했다.
그렇게 그녀는 꼬마 뱀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그것도 어언 15분째.
지친 슈페나가 시니컬하게 꼬마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무 귀여워서 그냥 뱀술로 담가버리고 싶네?”
그러다 짐짓 카누스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으스스한 표정으로 뇌까렸다.
본디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리는 법이 아니던가.
게다가 이곳은 사자들의 영역이었다.
그 사실을 눈치챈 카누스가 힝, 울상을 지으며 꼬리를 말았다.
-발효식품이 되는 건 싫단 말이야….
“한 번만 봐준다.”
꼬마 뱀과는 이토록 스스럼없이 대화할 수 있을 만큼 나름 편해졌다.
성격이 잘 맞는 건지 처음부터 티키타카가 잘 되기도 했고.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은 슈페나가 꼬마 뱀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 가자!”
카누스는 꼬물꼬물 기어가 기다란 몸으로 그녀의 손목을 팔찌처럼 동그랗게 감았다.
그녀가 바닥에 놓인 가방을 들곤 길을 나섰다.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복도를 헤집던 슈페나는 꺾어지는 코너에서 누군가와 부딪쳤다.
“어…?”
얼얼한 이마를 문지르는 그녀의 귓가에 익숙한 미성이 스몄다.
“준비는 다 했나 봅니다.”
리카도르였다.
그는 자못 능글맞게 검지로 스스로를 가리켰다.
“근데 중요한 걸 빼먹을 뻔했네.”
그런 리카도르의 입가엔 장난기 어린 웃음이 그려져 있었다.
‘지금 자기 놓고 갈 뻔했다고 시위하는 건가?’
사실 꼬마 뱀이랑 티격태격하느라 까먹고 그냥 가려고 했던 것은 맞건만, 슈페나는 천연덕스레 시치 미를 떼었다.
“안 빼먹었는데요? 딱 찾으려던 참이었어요!”
“완전히 까먹은 눈치였는데.”
슈페나가 입술을 오므리며 슬금슬금 눈치를 봤다.
“누구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입어서 괴롭습니다.”
리카도르는 특유의 무심한 낯으로 담담하게 공갈을 놓았다.
– 저 형아가 괴롭다잖아! 얼른 책임져! 책임져!
덩달아 카누스도 신이 난 듯 부채질을 했다.
‘저 수인들이 진짜 왜 저래.’
슈페나는 제자리에 미어캣처럼 서서 요리조리 눈알을 굴렸다.
황당해하는 슈페나의 반응을 즐기던 리카도르는 한참 후에야 장난을 그만두었다.
“안 가고 뭐 합니까?”
그러곤 따라오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까딱였다.
‘나 놀림당한 건가?’
그녀는 뒤늦게 현실을 자각하곤 있는 힘껏 그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얄미운 꼬마 뱀의 몸통을 찰싹때려주는 건 덤이었다.
결국, 슈페나는 혹을 두 개나 달고 저택 밖으로 향하는 마차에 올라탔다.
나름 기술이 발달된 세계관이라서 증기자동차라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오늘은 클래식한 걸 타고 싶었으니까.
수인들이 항상 붐비는 시가지까지는 금방이었다.
리카도르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서 내린 그녀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막 알을 깨고 나온 아기 새처럼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사람이 되게 많네요?”
“아무래도 날이 날이라.”
그 말마따나 거리는 유독 수많은 인파로 가득 차 있었다.
리카도르가 슈페나에게로 슬그머니 신경을 기울이며 길을 텄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다 보니, 수인들의 활기가 넘실거리는 시장에 도착했다.
규모가 아주 커다란 장터라, 사자 영지 내 방방곡곡에서 올라온 특산품이 모여 있다고 했지.
물건을 고르기에 가장 최적의 장소였다.
시끌벅적한 사람들의 수다 소리, 꼬까옷 입고 놀러 나온 사랑스러운 아이들의 모습, 졸졸졸 물이 흐르는 강변을 장식하는 노랗고 푸른 꽃무리.
정겹고 평화로운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어느새 슈페나의 가방 안에 자리를 잡은 카누스가 입맛을 다시며 이야기했다.
-고소한 냄새!
그에 그녀가 시니컬하게 받아쳤다.
“카누스, 너 미각은 꽝이잖아.”
뱀은 본디 맛을 못 느끼는 동물아니었나.
-누나가 내 미각 찾아줄 거야?
안 그래도 서러운데 아픈 곳을 찌르네, 잔인하게.
슈페나와 카누스는 정다운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러다 옆에 누군가가 지나가는 것도 모르고 작은 충돌사고를 낼 뻔했다.
비틀거리던 슈페나가 무심코 리카도르의 팔을 붙들었다.
슬쩍 밀어낼 거란 예상과 달리 그는 그녀를 단단히 제 안쪽으로 끌어당긴 채, 입술을 달싹였다.
“그냥 잡고 있어도 됩니다.”
“네?”
“보아하니 또 이럴 것 같아서.”
날 뭐로 보고.
슈페나가 짐짓 뾰로통하게 입술을 삐쭉거리다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 말은 끝까지 이어질 수 없었다.
“아뇨. 저는 괜찮”
-하나도 안 괜찮아 보이는데? 그냥 사이좋게 오붓이 손잡고 걸어다녀!
가방 속에서 빼꼼 머리를 내민꼬마 뱀이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둘을 번갈아서 쳐다봤으니까.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28화
“뭐래?”
슈페나가 괜스레 카누스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뒤덮고는 시야를 가렸다.
그에 꼬마 뱀이 버둥거리면서 불만을 토로했다.
-누나, 숨 막혀! 나 아직 일곱짤인데 질식사시킬 셈이야?
카누스는 엉엉 우는 시늉을 했다.
자못 격렬한 반응에 머쓱해진 슈페나가 어물쩍거리며 손을 치웠다.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사람도 많은데 어영부영하다가 서로 놓치면 어떡해!
꼬마 뱀은 어지간히 못마땅했는지 계속 툴툴대었다.
그러더니 눈을 빛내며 리카도르에게 동의를 구했다.
-그렇지, 형아?
그 유치하기까지 한 행동에 슈페나는 코웃음을 쳤다. 리카도르가 긍정할 리 없었으니까.
‘길 잃어버릴까 봐 서로 기차놀이 하는 애도 아니고.’
하지만 돌아온 답은 예상외의 것이었다.
“꽤나 합리적이었어, 새끼 뱀.”
무미건조한 미성으로 툭 내뱉어진 칭찬.
하나, 그랬기에 더욱 진심으로 들려왔다.
카누스는 꼬리를 빳빳하게 들어올리곤 잘난 체를 했다.
-헤헤, 내가 쫌 그래.
저건 신경 끄자.
그녀가 애써 카누스에게서 시선을 떼었다.
그리고는 의구심 어린 표정으로 리카도르를 향해 말을 걸었다.
“혹시 저랑 손잡고 싶으세요?”
“..딱히.”
그는 반 박자 느리게 모호한 부정을 내놓았다.
‘순간 당황할 뻔했네.’
슈페나는 부러 가슴을 쓸어내리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아니라며, 이건 뭐야?
“그런 건 잡아봐야 알죠.”
살짝 냉기가 감도는 리카도르의 손가락이 어느새 그녀에게 얽혀있었다.
어딘가 모르게 앳되었지만 군데군데 굳은살이 박인 손.
그 손바닥은 슈페나의 조막만 한손을 다 뒤덮기에 충분했다.
슈페나는 괜스레 손가락을 꼼지 락거렸다.
그 움직임에 리카도르가 더욱 단단하게 손을 맞잡았다.
벗어날 수 없는 수렁처럼 끈덕지게.
선선한 바람이 옷깃을 스치는데도 뜨뜻한 타인의 체온이 피부를 타고 전해졌다.
‘뭐야, 이 상황?’
슈페나가 울지도 웃지도 못한 채, 어정쩡하게 리카도르를 올려다보았다.
짙게 침잠한 푸른 눈동자는 그 어떤 미동도 없이 잠잠했다.
그 태연한 모습에 슈페나의 속눈썹이 바람에 휘둘리는 나뭇잎처럼 파르르 한들대었다.
그때, 오묘한 분위기를 뒤바꿀 만큼 천진난만한 물음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그래서 형아는 손잡으니까 어때?
리카도르는 삐딱하게 한쪽 팔을 허리에 얹곤 카누스를 쳐다보았다.
그 눈빛에선 미약한 살기까지 느껴졌다.
꼬마 뱀이 깨갱, 낑낑대며 억울함을 토로했다.
-아니, 내가 뭘 했다고…….
“……나쁘진 않아.”
이내, 리카도르는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지나칠 만큼 작은 목소리로 빠르게 대답했다.
진심이었다.
이미 결혼식 때, 더한 것도 했는데 뭐가 거리낀다고.
그 흔들림 없는 눈빛을 확인한 카누스는 양갓집 규수처럼 꼬리를 들어 떡 벌어진 입을 가렸다.
그건 슈페나도 마찬가지였다.
리카도르가 모르는 척 헛기침을 했다.
그러곤 한껏 흐트러진 슈페나의 머리칼을 무심히 정리해주며 이야기했다.
실크처럼 부드럽고 가느다란 하늘색 머리카락이 그의 손끝에서 스르륵 흘러내렸다.
“애초에 좋고 말고 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부인?”
그녀는 슬며시 그의 눈길을 피하고는 발끝으로 고운 흙바닥을 툭툭 건드렸다.
그러면서 리카도르의 말에 담긴 속뜻을 파악하려 무진 애를 썼다.
번뜩 깨달음이 머릿속을 일깨웠다.
‘그렇고 그런 피폐물 남주라서 이정도는 스킨십 축에도 못 끼나?’
일리가 있는 추론이었다.
그렇지만 불현듯 신방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첫날밤, 침대를 반반 나누어 넘어 오지 말라며 금을 긋는 남편이 아니던가.
‘절륜하다기엔 너무 맹탕이었는 걸.’
원작과는 달리 성인도 되지 못한 시점이라 이해는 되었다만.
‘아무튼 별 의미 두지 말자.’
본능적으로 내재되어 있던 치명섹시남주의 피가 흐르고 있는 걸지도 몰랐으니까.
마음을 다잡은 슈페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고작 손잡는 건데.”
한결 편안해진 그녀의 얼굴과 달리 리카도르의 낮은 점점 묘하게 일그러졌다.
슈페나의 동의를 구한 건 그였음에도.
리카도르가 잠시 제자리에 멈춰서더니 살짝 잠긴 미성으로 중얼거렸다.
“손은 안 된다더니 상당히 개방적이네.”
신방에서 처음 잠들었던 날, 기겁을 하던 슈페나의 모습이 생각난 탓이었다.
손을 잡고 자면 아이가 생긴다는 말을 믿을 만큼 순진한 그녀가 아니었나.
‘침대 밖이라서 그런 건가?’
리카도르는 골똘히 고민했다.
그럼에도 이해할 수 없는 변화였다.
그 중얼거림을 들은 슈페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개방적………인데요?”
“혼잣말이었습니다.”
리카도르가 말끔한 낯빛으로 돌아와 여상스레 변명했다.
갑자기 왜 저런담.
슈페나는 하하, 어색하게 웃고는 그를 잡아끌었다.
“우리, 어서 일해야죠. 일하러 온 거잖아요.”
리카도르는 슈페나를 따라 유유자적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아까 본 것처럼 시장의 분위기는 활기찼다.
슈페나는 신대륙을 발견한 탐사대처럼 시장 구석구석을 꼼꼼하게 누볐다.
장터에는 진귀한 것들이 정말 많았다.
그녀는 많고 많은 상점들 중 한 과일가게로 발길을 돌렸다.
‘어떤 걸로 하지?’
슈페나가 가판대에 진열된 과일을 한 바퀴 훑어보며 고민했다.
역대 축복에 쓰인 물품은 다양했다.
순회 때 쓰일 호신용 무기, 건강에 좋은 약초, 상큼한 비타민이 가득 든 과일….
그만큼 선택의 폭이 넓었다.
‘그러니까 확실히 통통 튀고 뜻깊은 걸로 해야 할 텐데.’
그간 리카도르와 도서관에서 생각해보긴 했지만, 확실히 결정된건 없었다.
‘문제는 하나같이 다 마음에 안차서 다시 둘러봐야 할 것 같다는 점이지.’
다 살펴본 슈페나가 두 손을 특툭 털더니 예의 바른 미소를 입에 걸었다.
“다른 곳도 둘러보고 올게요, 사장님.”
그녀는 구석에서 수박을 통통 두드리고 있던 리카도르를 팔꿈치로 아프지 않게 치고는 눈짓했다.
“다음 가게로 가요.”
다음은 약초방이었다.
안타깝게도 괜찮아 보이는 약초는 예전 연회에서 다 써먹었던 거라 손가락만 빨았지만, 벌써 몇 시간째 소득이 없자 지친 카누스는 비딱하게 투덜대었다.
-누나, 얼마나 더 허탕을 칠 셈이야?
가방 안에서 ‘이게 때깔이 곱다.’, ‘저건 푸르뎅뎅 해서 별로다. 라는 말로 훈수만 둔 주제에.
카누스, 네가 시어머니세요?
그 지옥의 잔소리를 떠올린 슈페나가 부러 꼬마 뱀을 노려보았다.
카누스는 꼬리콥터를 돌리며 딴청을 피웠다.
그래도 영 소득이 없는 건 아니었다.
사자 영지에서는 어떤 종류의 상품이 많이 나는지, 수인들은 무얼 더 선호하는지.
뭐, 자연스레 그런 시장조사도 하게 되었으니까.
물가를 비교하면서 리카도르와 함께 세운 임시 예산안과 계획서의 오차 여부도 확인했고,
‘이것만 해결하면 다 되는 건데.’
슈페나는 새무룩하게 입꼬리를 늘어드리곤 터덜터덜 거리를 배회했다.
그러다 도로를 따라 한 줄로 늘어선 화분들을 발견했다.
홀린 듯이 오색빛깔 꽃이 깔린 길을 거닐자, 허름한 듯 화사한 건물 하나가 나왔다.
푸른 넝쿨과 붉은 꽃이 하얀 외벽을 감싼 꽃가게.
“꽃집?”
그녀가 의아함이 묻어나오는 어투로 리카도르에게 말을 건넸다.
“생각해보니까 그동안 연회에서 꽃을 선물했단 이야기는 못 본 것 같은데. 맞죠?”
“아무래도 사자들이 꽃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니까요.”
본디 사자들은 실용적인 걸 더 좋아하는 성미를 지니고 있었다.
눈요기에 좋은 꽃보단 그늘을 만들어주는 나무를 더 선호하는 종족으로 유명했지.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사자들이 꽃을 아예 싫어하는 건 아니었지만.
리카도르는 손으로 턱을 짚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반신반의하는 슈페나의 목소리가 입술을 가르고 흘러나왔다.
“꽃을 주는 건 좀 별로일까요?”
“색다르긴 할 것 같네요.”
긍정이라기엔 조금 애매한 답변.
슈페나는 결단을 내렸다.
“일단 우리 구경해봐요.”
그녀가 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계세요..…?”
또랑또랑한 슈페나의 목소리가가울려 퍼졌다. 하지만 꽃집 안의 분위기는 삭막하고도 고요했다.
리카도르는 자연스레 슈페나보다.
더 앞장서서 건물 내부를 뒤졌다.
별 특별할 건 없었다.
그냥 포근한 흙냄새가 나고, 싱그러운 꽃들이 본연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평범한 꽃집의 모습이었으니까.
방금까지만 해도 꽃을 다듬었다.
는 흔적이 남은 걸로 보아, 주인은 잠시 외출을 한 것 같았다.
슈페나는 조금 더 안쪽을 들여다 보았다.
‘어?’
그러던 중, 저 구석에서 이상한 걸 발견했다.
곧 주저앉을 듯 낡은 수레에 한가득 담긴 보랏빛 꽃더미.
“그런데 저기, 수레에 한가득 쌓여있는 건 뭐지….”
팔 매물이라기엔 너무나도 관리가 안 된 모습이었다. 흙도 제대로 안 털려있었는걸.
버리려고 모아둔 건가.
느낌이 왔다.
어딘가에 기가 막히게 써먹을 수 있을 거란 예감이.
언젠가 본 느낌이 들었으니까.
그녀는 부산스레 리카도르를 끌고 왔다. 그러고는 물었다.
그동안의 전적을 보아 그가 모르는 건 없었으니까.
“저 꽃, 뭔지 알아요?”
“아마, 그나저나 냄새가…….”
리카도르는 대답을 하려다 말고 느닷없이 코를 막았다.
‘냄새라고?’
슈페나도 덩달아 손가락을 코 밑에 가져다 대면서 쿵쿵대었다.
그러는 사이, 카누스가 신이 난 기색으로 선수를 쳤다.
-나 알아! 나 뭔지 알아!
카누스가 붕붕 꼬리를 흔들며 소리쳤다.
– 저거 로네악 꽃이잖아.
머릿속에 파고드는 말간 외침에 슈페나는 아는 체를 했다.
“로네악 꽃? 그 귀한 게, 왜 여기에 저런 꼴로 널브러져 있어?”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29화
-누나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귀한 지 안 귀한지 말이야.
카누스가 안 그래도 동그란 눈을 더욱 크게 깜박이며 의아해했다.
그 한마디에 거지 같은 옛 기억이 떠올랐다. 독수리 가문에서 지내던 시절 눈물겨운 설움이 .
제일 재수 없던 첫째 언니의 유일한 취미는 식물 수집이었다.
그래서 슈페나는 팔자에도 없는 화초 키우기 노가다를 하지 않았던가.
‘덕분에 원치도 않은 이두박근이 생겨버렸어….”
슈페나가 이제는 나름 말랑말랑해진 팔뚝을 만지작거리며 기억을 떠올렸다.
‘언니가 어디서 로네악 꽃을 구해 와서는 귀한 거라며 잘 다루라고 어찌나 난리를 피우던지.’
그에 관해 읽은 전문 서적만 수십 권이었다.
특정 지역에서만 자라는 희귀성과 아름다운 외양, 그리고 까다로운 관리법.
이러한 이유로 값비싸고 귀해진 꽃이라고 했지.
‘오랜만이라 못 알아봤네.’
만감이 교차했으나 내색 하나 않고 대충 얼버무렸다.
“어쩌다 보니 식물에 일가견이 생겨서.”
– 오오, 뭐야. 좀 똑똑해 보여.
꼬마 뱀이 흥미가 동한다는 듯 붉고 가는 혀를 내밀어 입맛을 다셨다.
‘아, 쟤 이런 분야에 관심 있는 설정이었지.’
딱 봐도 나르시시즘에 찌든 카누스는 본인처럼 똑똑한 이에게만 그나마 호의적이었다.
여주의 조력자가 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고,
“고맙다.”
슈페나는 실없는 웃음을 지으며 화답했다.
예비 천재 과학자에게 받는 칭찬이라니 기분은 좋았으니까.
순순히 고마움을 표하는 그녀의 모습에 카누스는 괜스레 몸을 배배 꼬았다.
카누스가 가방 안에 얼굴을 쏘옥숨기더니 다른 이야기를 했다.
-근데 형아는 괜찮아?
그 말에 슈페나가 리카도르를 흘낏 쳐다보았다.
아까부터 그는 언짢은 듯 미간을 찌푸린 채, 집게손가락으로 코를 막고 있었다.
-가
-진짜 냄새가 심한가 보네.
카누스가 말하는 건, 로네악 꽃의 악취였다.
사자들만 느낄 수 있는.
‘그냥 특유의 쌉쌀하고 좋은 향기만 나는데, 이게 사자한테는 악취로 느껴진다니.’
이 꽃에는 해묵은 전설이 깃들어 있었다.
「비열한 표범이 주제도 모르고 사자의 영역에 침범한 날, 요란한 천둥번개와 함께 보랏빛 꽃이 생겨났다.」
서로 앙숙 관계인 표범 가문과의 과거 전쟁이 기록된 전지적 사자 시점의 설화였지.
아무튼 맹점은…….
전쟁 이후로 로네악 꽃이 이 땅에서만 피기 시작했고, 사자들은 그 특유의 향을 꺼린다는 것이었다.
‘참 신비한 일이네.’
그때, 분홍색 손수건을 입가에 두른 할아버지가 등장했다.
“뭐여? 손님이여?”
아무래도 이 꽃집의 주인장인 듯했다.
이마에 주름이 깊이 팬 할아버지.
는 정정한 몸놀림으로 수레를 가져갔다.
“잠깐 기다려보슈. 곧 돌아올 테니.”
그 할아버지가 향한 곳은 다름아닌 가게 옆에 펼쳐져 있는 푸르른 강변이었다.
“버리시려는 걸까? 아직 안 시들었는데.”
가만히 서서 지켜보던 슈페나가 진지해진 눈빛으로 의문을 제기했다.
고민이 담겨 댓 발 튀어나온 그녀의 입술에선 마뜩잖은 속삭임이 새어 나왔다.
“꽤 비싸게 팔리는 건데…….”
내가 다 아까워라.
뭔 오지랖인가 싶었지만, 눈길이 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읏차—
한 차례 기합을 넣은 할아버지는 강가에 세워둔 수레를 아래로 기울였다.
꽃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위태위태하게 달랑거렸다.
잔잔한 강물의 표면에는 동그란 파문이 일었다.
‘눈앞에서 돈을 버리고 있는데 누가 안 말리겠어!’
결심을 마친 그녀가 우다다다, 달려가 할아버지를 말렸다.
“잠깐만요, 할아버지!”
그거 조금 뛰었다고 숨이 가빠오다니.
슈페나는 무릎에 손을 얹고는 헥헥거리며 찬찬히 단어를 골랐다.
그러던 찰나, 기다란 다리로 여유롭게 걸어온 리카도르가 대신 말을 붙였다.
“어르신, 저 꽃은 어떤 연유로 버리려 하시는 겁니까?”
할아버지는 이마에 맺힌 땀을 손으로 닦으며 시크하게 답변했다.
“안 팔려서유.”
안 유”
할아버지는 쯧쯧, 혀를 차더니 구수한 목소리로 사정을 설명했다.
“로네악 꽃이 무척 예쁘고 귀한 디…….”
이윽고, 할아버지의 수더분한 음성은 점차 구슬퍼졌다. 그가 훠이 훠이, 손사래를 치며 한숨을 내쉬었다.
“특유의 악취 때문에 사자들이사갈 리는 없고.”
“저기, 괜찮으세요?”
슈페나는 괜스레 할아버지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원래는 사라질 뻔한 품종인디우연히 사자 영지를 방문한 타 수인들이 호기심을 보여서 수출용으로 키웠던 거란 말이여.”
할아버지가 한탄하며 로네악 꽃에 관한 히스토리를 늘어놓았다.
어느샌가 로네악 꽃이 유행처럼 번져나가 효자상품이 되었다나 뭐 라나.
그렇다는 말은…….
“수출에 문제가 생긴 건가요?”
슈페나가 갸웃거리며 질문했다.
할아버지는 정답이라는 듯 원래도 동글동글한 눈을 더욱 땡그랗게 떴다.
“그렇쥬.”
이어서 나온 설명은 의외의 것이었다.
“그 어디냐. 옆 동네 뱀 수인들 난리 때문에 무역길이 막혀서 오가기도 힘든 상황이라니까.”
일이 이렇게 맞아떨어지다니.
슈페나가 카누스에게로 힐끗 눈길을 돌렸다.
‘괜찮나, 쟤는?’
나름대로 염려의 의미가 담긴 시선이었다.
-뭘 봐?
곧바로 날아 들어오는 삐딱한 시비에 괜히 걱정해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만.
그리 꼬마 뱀과 아웅다웅하고 있는 사이, 할아버지는 자못 씁쓸하게 얘기를 끝맺었다.
“더구나 풍작이라서 골머리를 앓고 있쥬.”
슈페나가 살짝 숙연해진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러니까 로네악 꽃이 남아돌아서 곤란한 상황이라는 거죠?”
“네, 그렇게 됐슈.”
할아버지는 깔끔하게 인정했다.
그리고는 마저 수레 속 꽃을 강물에 탈탈탈 털어 넣으려고 했다.
“할아버지, 아직 버리지 말아주세요!”
슈페나가 그런 할아버지를 또다시 만류하며 고심했다.
‘잘하면 연회에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방법이 있을지도 몰랐다.
설화에선 번개가 가진 파멸적인 힘으로 인해 꽃이 오염되어 악취가 나게 되었다고 했으니까.
만일 그런 거라면 정화의 이능같은 걸로 씻어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이건 순전히 가설이니까.”
슈페나는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들기며 생각했다.
‘그래도 성공한다면 제법 특별한 선물이 될 거야.’
더 이상 악취가 나지 않는 로네 악 꽃.
특이한 타이틀이 아닌가.
본디 수인들은 희소성이 있는 물건에 관심을 기울이기 마련이었다.
그게 어떠한 사연과 얽혀있다면 더더욱.
‘어려움을 겪던 상인, 그리고 그 고충을 알아본 체드윅 가의 며느리, 그렇게 탄생한 작품.’
이미지메이킹 하기에 딱 좋았다.
사자 영지 내의 문제에 귀 기울 이는 유능한 파랑새라고.
‘시도해볼 가치는 있을 텐데.’
슈페나는 가방 속에 얌전히 있던 꼬마 뱀의 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었다.
“사랑스럽고 멋있고 똑똑한 우리 카누스.”
반들반들한 비늘의 감촉이 피부를 타고 전해졌다.
꼬마 뱀은 식겁한 표정으로 얼굴에 경련을 일으켰다.
‘천재인데 찔러보면 뭐라도 나오겠지.’
다소 불순한 목적이었다.
“저 꽃의 냄새, 정화의 이능 같은 걸로 없앨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맨입으로 알려줄 것 같아?
그러나 영악한 꼬마 뱀은 쉽사리 걸려들지 않았다.
슈페나는 치, 입술을 삐쭉 내밀곤 받아쳤다.
“그 말은 뭔가 알고는 있단 거네?”
-당연하지.
“모르는데 허세 부리는 거 아니고?”
슈페나가 짐짓 도발했다.
퍽 얄미운 슈페나의 언사에 카누스가 흥, 코웃음을 치곤 으스대었다.
-그건 안 당연하지. 굳이 이능을 쓰지 않아도 되는 문제라고!
“어떻게?”
슈페나는 은근한 눈길을 보내며 미끼를 드리웠다.
-비슷한 힘을 가진, 여기 저택정원의 그 나무 밑에 심으면…..
이런.
카누스는 보기 좋게 걸려들었다.
꼬마 뱀이 꼬리로 제 머리를 툭툭 때리며 자책했다.
-내가 힌트를 너무 많이 줬네.
뭐, 식물학은 내 전문이니까. 인심좀 썼다.
이런 카누스와 달리 슈페나는 배시시 눈꼬리를 반달 모양으로 접어 웃었다.
‘나무? 그럼 설마…..’
감이 잡혔다.
처음 체드윅 가에 당도했을 때 보았던 하얀 이파리의 나무가 떠올랐다.
그녀는 집중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접어가며 셈했다.
슈페나의 낯빛은 점점 밝아졌다.
꼬마 뱀의 말마따나 생각보다 쉽게 풀릴 것 같아서.
슈페나가 돌연 발뒤꿈치를 들더니, 옆에 있는 리카도르의 귓가에 조잘조잘 속닥였다.
“리카도르, 지금 우리가 쓸 수 있는 여유자금이 얼마나 되나요?”
“체드윅 가의 금고는 늘 풍족합니다.”
그가 여유로운 표정으로 나지막이 단언했다.
그러곤 결정적인 한마디를 덧붙였다.
“부인이 하고자 하는 건 전부 이룰 수 있을 만큼.”
슈페나가 오오, 감탄을 흘리며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당연히 사자 가문이 부자라는 건 알았지만, 멘트가 예술이라서.
역시 사람은 유복한 지갑에 설레는 법이었다.
‘저런 수인이 되어야지.’
그녀는 동경이 담긴 눈빛으로 리카도르를 쳐다보았다.
이내, 슈페나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하곤 낡은 수레에 담긴 꽃더미를 가리켰다.
“할아버지, 이 꽃 다 주세요.”
예기치 못한 플렉스에 신이 난 그녀의 목소리는 꾀꼬리처럼 천진해졌다.
“대금은-”
“그냥 가지슈. 어차피 버리려던 거니까.”
체드윅 가로 청구해달라고 말하려 했는데.
할아버지는 쿨하게 수레를 그녀한테 넘겨주었다.
슈페나가 넙죽 받아들고는 갓 예절을 배운 유치원생처럼 꾸벅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그렇지만 양심이 따끔따끔 찔려 왔다.
안 그래도 힘드셨던 분인데, 너무 등골을 빨아먹는 게 아닐까 싶어서.
슈페나는 가방 속에서 은근히 묵직한 가죽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슈페나 개인 재산과 연회 준비용 경비를 넣어둔 꾸러미였다.
‘공짜로 가져갈 순 없으니까 몰래 다른 걸 사는 척 놓고 가야겠어.’
사실, 오늘은 가볍게 나온 터라 경비를 많이 가져오지는 않았다.
그래도 감사함을 표현하기엔 충분할 터.
나머지는 저택으로 돌아가서 보내드리면 되겠지.
슈페나는 얼른 다시 가게로 들어가 슬금슬금 카운터에 돈을 숨겼다.
뒤따라오던 리카도르가 은근슬쩍 할아버지의 주의를 돌렸다.
“어르신, 근데 저기…….”
아무래도 슈페나의 계획을 바로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러는 사이, 완벽하게 일을 끝낸 그녀가 아무렇지 않은 척 옷만 매만졌다.
그러곤 독수리 가문에서 챙긴 패물을 할아버지에게 건네며 주문했다.
“대신 다른 꽃들 좀 예쁘게 포장해주세요.”
‘꽃은 내 돈으로 사고 싶단 말이야.’ 뭐, 다 계획이 있었다.
비루한 지갑의 용기를 보여주기 위한 계획이.
“그러믄 나야 좋지.”
할아버지는 흔쾌히 연장을 가져와 꽃을 손질했다.
사르륵사르륵, 반투명한 연분홍빛 포장재가 수수한 안개꽃의 줄기를 감쌌다.
금세 풍성한 꽃다발이 완성되었다.
“우와!”
꽃이 되게 많네.
슈페나는 그 꽃다발을 한 아름 받아들고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러다가 천연덕스레 리카도르에게 안겨주었다.
“이거 받아요. 까까는 아니지만.”
그는 얼떨결에 상체를 거의 뒤덮을 만큼 커다란 꽃더미에 파묻히게 되었다.
달콤하고 싱그러운 꽃의 풋풋한 향기가 공기 중에 퍼져나갔다.
열린 문 틈새로 스미는 오후의 햇빛이 리카도르의 하얀 머리칼아래 조각조각 부서져 내렸다.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30화
“많이 파세요!”
애써 리카도르에게서 시선을 돌린 슈페나가 싹싹하게 작별 인사를 했다.
그렇게 꽃집에서의 일은 일단락되었다.
“이제 돌아가도 될 것 같습니다.
벌써 해가 저물려고 하네요.”
밖으로 나온 리카도르는 아직 남아있는 햇빛에 손차양을 만들더니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러나 되돌아온 반응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네? 이제 시작인데요?”
-형아, 그건 좀 아니지.
이때만큼은 한마음인 슈페나와 카누스였다.
슈페나가 아이처럼 명랑하게 리카도르의 소매를 잡아 흔들며 못을 박았다.
“달이 뜨는 건 보고 가요. 네?”
“뭐, 원하신다면.”
언뜻 간절하기까지 한 슈페나의 부탁에 리카도르가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괜스레 미적지근한 것 불을 매만졌다.
슈페나는 그의 옷소매를 잡은 손에 다시 힘을 주곤 이리저리 쏘다녔다.
이윽고 저녁이 된 시장의 분위기는 또 새로웠다.
불이 들어와 고즈넉하고 은은한 가로등, 살갗을 시원하게 어루만져주는 바람, 아이들은 사라지고 연인들이 가득 찬 길거리.
‘이건 좀 별론데.’
슈페나가 눈꼴신 커플을 뚫어져라 응시하다가 확, 고개를 돌렸다.
사실 볼일을 다 봤음에도 이리 열심히 돌아다니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시계 공방이 이 주위라고 했는데.’
슈페나는 숲 한가운데에서 나무 열매를 발견한 새처럼 슬쩍슬쩍 주변을 흘낏대었다.
그녀가 찾는 건, 주문 제작만 받는 수제 시계 장인이 있는 공방이었다.
‘정보상이 운영하는 곳이랬지.’
미리 제인에게 영지 내의 시계 공방이 어디어디에 있는지 알아오라 시킨 터였다.
제인 말로는 시계만 취급하는 가게는 단 2곳뿐이라고 했던가.
‘마차 안에서 지나가다가 봐둔 덕에 남은 데는 이 근처뿐인데.’
정보상이 있는 곳인지 아는 법은 딱 하나였다.
눈의 결정이 새겨진 로고.
그게 상점 간판에 달려있었으니까.
‘보는 눈이 많아서 아직 접촉할 생각은 없으니 확인만 해두면 돼.’
알아내면 저택으로 돌아가는 즉시, 시계를 맡기는 척 간단한 의뢰를 할 계획이었다.
메인 악녀처럼 후원할 재력은 없으니 미리 거래라도 터놓으려는 목적으로.
마침 딱 맡길 만한 문제가 있지 않은가.
‘로네악 꽃’
카누스에게서 힌트를 얻어 방법을 알 것 같긴 했지만, 정확하진 않았으니까.
아무래도 정보상에게 부탁하는 게 더 확실하지 않으려나.
그리 마음먹은 순간, 카누스가 말을 걸어왔다.
-저기도 가보자! 누나, 뭐 해?
빨리 가자니까?
리카도르도 슈페나의 손을 잡아 끌어 자신의 손목에 올려두었다.
“사람 많으니까 꽉 잡아요.”
“네? 네.”
그녀는 자연스레 그의 팔을 움켜 쥘 수밖에 없었다.
따스한 체온이 맞닿았다.
그 온기 때문인지, 혹은 인파의 떠밀림 때문인지 슈페나는 속수무책으로 끌려갔다.
그들이 향한 곳은 시장의 중심부였다.
새하얀 초승달 조각상이 놓여있는 분수대와 보기 좋게 푸른 넝쿨이 우거진 벤치.
그리고 그 주변에 펼쳐진 가판대.
꼬마 뱀이 기쁨의 춤을 추더니 꼬리로 무언가를 가리켰다.
그 꼬리의 방향이 향한 곳은 게임을 할 수 있는 작은 노점이었다.
다트를 던져 풍선을 맞히는 그런 종류의.
-형아, 저거! 저거, 재밌어 보인다!
리카도르가 겨눈 검을 치워달라며 무서워할 때는 언제고 그새 가까워진 건가.
‘저 꼬마 뱀이 좀 붙임성이 좋긴하지.’
리카도르는 그 노점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곤 슈페나를 곁눈질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일단 줄을 서야 하니까 조금만 기다리죠.”
“넵!”
슈페나가 반색을 하며 도르륵 눈알을 굴렸다.
허공을 날아다니며 먹이를 찾는 새와도 같은 민첩한 눈짓이었다.
‘시계 공방은 광장 중앙부에 있다.
고 했으니까… 저 근처일 텐데?’
하나, 놀러 나온 수인들이 너무 많은 탓에 제대로 살필 수조차 없었다.
그녀는 빵빵하게 볼을 부풀리면서 발 디딜 곳이 없나 탐색했다.
‘벤치?’
올라가서 두리번거리기에 딱 적당한 높이일 듯싶었다.
망설이던 슈페나가 성큼 발을 뻗었다.
곧이어 그녀는 훌쩍 커진 키로 쭈뼛쭈뼛 주위의 눈치를 보았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이래도 괜찮겠죠?”
그에 리카도르가 픽 바람 빠진 듯한 웃음을 짓더니, 고개를 들었다.
“한참은 올려다봐야겠네요.”
분주히 거리를 거니는 사람들 속, 서로의 시선이 얽혀들었다.
시간이라도 멈춘 것처럼 느릿하게.
슈페나가 멍하니 두 눈을 깜박였다.
리카도르의 푸른 눈동자에는 그녀가 담겨있었다.
슈페나는 못내 시선을 비껴 내렸다.
그 상태로 몇 분이 흘렀다.
그러는 동안, 광장의 인파는 늘어만 갔다.
서 있던 벤치가 다른 이들의 움직임에 밀려 삐그덕 소리를 낼 정도로.
슈페나가 넘어지지 않으려 저도 모르게 리카도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가 들고 있던 꽃다발의 붉은 꽃잎이 하느작거리며 아래로 떨어졌다.
“어…?”
졸지에 스킨십을 하게 된 슈페나가 멍청하게 입을 벌렸다.
정작 당사자인 리카도르는 어떠한 미동조차 하지 않았는데도.
“가만히 있어요. 흔들리니까.”
그가 일순간 경직된 그녀를 향해 건조한 미성으로 잔소리했다.
워낙 사람이 많아 신경이 온통 슈페나에게로 쏠린 탓이었다.
“……가만히 있었는데.”
그녀가 작게 항변했다.
리카도르는 속눈썹을 드리우더니 짐짓 모른 체했다.
슈페나가 별수 없이 그를 끌어안은 자세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공방이 어디에 있는지나 봐야겠다.’
그리 주위를 둘러보고 있을 무렵, 애타게 찾아 헤맸던 게 시야에 들어찼다.
‘찾았다.…!’
솔레제 시계 공방.
고풍스러운 필기체로 꾸며진 간판에는 육각형의 눈송이가 그려져 있었다.
슈페나의 밤색 눈에 이채가 돌았다.
그를 눈치챈 리카도르의 동공이 일견 고양잇과 맹수답게 세로로 가늘어졌다.
‘…… 시계 공방?’
시계에 관심이 있는 건가.
그런 리카도르의 상념은 오래가지 못했다.
얌전히 가방 안에서 둥글게 몸을 말고 있던 카누스가 말을 걸었으니까.
-앞에 사람들 빠졌어. 이제 하러 가자!
꼬마 뱀의 보챔에 둘은 거리를 헤쳐나갔다.
어느새 그들은 노점에 도착했다.
카누스가 환호성을 내지르며 리카도르를 응원했다.
-형아, 꼭 맞혀서 경품 타와!
리카도르는 카누스의 목소리 때문에 머리가 울렸는지 못마땅하게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곧이어 그의 손에 있던 다트가 공기를 가르고 날아갔다.
명중이었다.
-오오, 제법이네?
옆에서는 카누스의 감탄이 들려 왔다.
슈페나가 노점상에서 나누어준 레모네이드를 홀짝이며 꼬마 뱀에게 물었다.
“카누스, 보는 것만으로도 재밌어?”
– 대리만족 모르냐? 대리만족.
카누스는 특유의 시니컬한 어투로 핀잔을 주었다.
칫, 몰래 이죽거리던 슈페나가 무심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째 리카도르는 먼저 가자고 했던 카누스보다도 놀이에 더 열중한 눈치였다.
‘의젓하게만 보였는데 이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구나.’
그녀는 새삼 그의 낯을 다시 샅샅이 뜯어보았다.
평소 정적이었던 소가주의 얼굴 대신 그 나이대에 맞는 소년의 모습이 드러났다.
이따금 슈페나를 놀릴 때처럼.
‘저런 표정을 지을 줄 아는 애인데 그냥 내 의심이 과했던 건가.’
첫 만남 때와 같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던 경계심은 슬며시 가라앉았다.
“나도 해봐야겠다!”
슈페나가 괜히 큰 소리를 내고는 노란색 다트를 손에 쥐었다.
안타깝게도 터트린 풍선은 한두개밖에 없어 꽝이었다만.
-내가 꼬리로 던져도 그것보단 잘하겠다.
그걸 본 카누스는 풉, 실소하더니 얄밉게 빈정대었다.
그에 슈페나가 이를 악물고 살벌하게 뇌까렸다.
“조용히 해라.”
-녜…….
그 후로도 그들은 작은 축제에서의 놀이를 즐겼다.
그렇게 제법 시간이 흘렀다.
“선물입니다.”
리카도르가 상품으로 얻어낸 커다란 사자 인형을 슈페나한테 안겨주었다.
덤으로 얻은 건 카누스에게 던져주었다.
-우웅, 나 아직 코끼리는 못 삼키는데…
카누스는 아가리를 쩌어억, 벌려 손바닥만 한 코끼리 인형을 앙 물었다.
그러면서 크기가 얼마나 되나 견적을 살폈다.
‘쟤는 저걸 씹으려고 하네.’
슈페나가 살짝 질린 낯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입술에선 한숨 같은 헛웃음이 새었다.
“실컷 움직여서 목마른데 아이스크림이나 먹어요!”
그 말을 들은 꼬마 뱀이 반색을 하며 꼬리를 흔들었다.
-나도, 나도!
“카누스, 넌 먹으면 탈나.”
슈페나는 미약한 걱정이 담긴 음성으로 핀잔을 주었다.
동물의 모습으로 인간 음식을 먹으면 몸에 좋지 않으니까.
당연히 이치였다.
어쩔 수 없이 단념한 카누스는 새치름하게 툴툴대었다.
-쳇, 커플끼리 많이 먹어라.
슈페나와 리카도르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오른 콘 아이스크림을 사이좋게 손에 쥐었다.
부러워하던 카누스는 어느덧 새액째액, 고운 숨을 내뱉으며 잠들어버렸다.
그녀가 조심스레 분수대에 몸을 기대었다. 그러고는 아이스크림의 꼭대기를 살살 입술로 뭉개었다.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혀끝에서 사르르 녹진녹진하게 녹아내렸다.
입 안 가득 서늘하고 달달한 향이 퍼졌다.
‘딱 기분 좋을 만큼 차갑네.’
슈페나는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길거리 공연 노랫소리에 맞춰 살랑살랑 몸을 양옆으로 기울였다.
펑, 퍼벙!
때마침,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다.
각양각색의 뜨거운 꽃이 검은 하늘을 다채롭게 수놓았다.
달도 떠오르고 있었다.
아주 하얗고 커다란, 일견 신비스러운 오오라까지 내뿜는 달이.
슈페나는 어여쁜 풍경을 찬찬히 망막에 새기며 공연스레 웅얼거렸다.
“바람도 좋고 분위기도 좋고.”
사람도 나쁘진 않은 것 같아.
그 작은 진심은 차마 내뱉어지지 못한 채, 입 안에 아스라이 맴돌았다.
오늘 하루가 생각보다 퍽 즐거워 서일까.
왜인지 모르게 가슴이 벅차왔다.
슈페나가 힐끔 리카도르를 곁눈질했다.
지금이라면 한번 들이대 봐도 괜찮을 것 같았다.
‘설마 또 까이지는 않겠지?’
소탈한 마음이 그녀의 조막만 한 입술을 가르고 흘러나왔다.
“우리 전보다 많이 편해진 것 같지 않아요?”
그가 폭풍전야와도 같이 잔잔한 푸른 눈으로 그녀의 속내를 떠보았다.
“무슨 의밉니까?”
“친구 하자구, 나랑.”
주사위는 던져졌다.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31화
그러나 그 결과는 도돌이표였다.
“싫은데.”
그때와 똑같은 거절.
당황한 슈페나가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어? 왜, 왜요?”
“안 끌려서요.”
리카도르는 그냥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짓씹으며 갈등하던 슈페나가 기죽지 않고 받아쳤다.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제 성격 제법 괜찮을걸요? 친구 하기에.”
바야흐로 자기 PR의 시대가 아니던가.
슈페나는 열심히 자신의 장점을 쥐어 짜내었다.
“어, 저는 나무열매를 잘 먹고요.
고민 상담도 나름 할 줄 알고, 또…….”
그녀가 손으로 미간을 부여잡고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던 손에 자그는 도로 그 아이스크림을 슈페나의 입 안에 넣어주며 의아함을 내비쳤다.
“왜 나랑 그렇게 친해지고 싶은 겁니까?”
리카도르야말로 의문이었다.
어째서 슈페나가 그리 기를 쓰고 그와 가까워지려 하는지.
워낙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성격이니 처음에는 그냥 쿡쿡 찔러보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저 파랑새도 계약 때문에 나를 떠보려는 건가.’
그게 아니라면 이런 식으로 나올 이유도 없을 테니.
설령 정말 친해지고 싶은 거라 한들 ‘친구’라는 관계에 집착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오히려 좋아한다고 고백하면 모를까.
맹수의 촉은 기민한 법이었다.
리카도르는 묘한 확신이 들었다.
슈페나도 그한테 무언가 바라는 게 있다고.
그가 숨길 수 없는 의구심이 깃든 미성으로 입을 떼었다.
“목적이 뭡니까?”
슈페나는 괜스레 뒷목을 긁적이며 마른침을 삼켰다.
조생이 순탄해질 것 같아서? 네가 남주니까 잘 보여서 데드엔딩좀 피하려고?
이런 답을 할 수는 없었으므로, 대신 그녀는 퍽 뻔뻔하게 철면피를 깔고는 책임을 전가했다.
“그쪽이 먼저 나한테 잘해줬잖아요. 난 그게 친하게 지내자는 의미인 줄 알았는데….”
제대로 듣지 못한 리카도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도대체 왜 날 도와줬어요, 그것도 몇 번씩이나?”
슈페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 할말을 했다.
‘원래 좀 친해지면 은근슬쩍 물어보려고 했는데.’
지금 그 대답을 듣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그러면 영문 모를 찝찝함도 사라질 터.
딱딱한 분수대의 기둥에 기대어선 슈페나가 발뒤꿈치로 바닥을 탁탁 쳤다.
‘뜬금없이 무슨…..’
4년 전이라면 내가 10살 때일 텐데. 이곳이 책 속의 세계라는 걸 깨달았던 시기.
의아했으나 그녀는 찬찬히 과거를 더듬었다.
하얀 고양이를 치료해준 기억은 있는데….
보통 이런 건 구원 서사가 가미된 로판 남주의 단골 멘트 아닌가?
슈페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렇지만 그 동물 발바닥에는 핑크색 젤리가 박혀있었는데.’
맹수인 사자가 그리 귀엽게 생겼을 리가 없었다.
‘품종이 딱 페르시안이었는걸.’
크기도 조금 큰 고양이 정도였고, 슈페나는 반신반의하며 대꾸했다.
“그런 적 없을걸요. 아마도.”
그 대답을 들은 리카도르가 정말 이냐는 듯 빤히 슈페나를 쳐다보았다.
슈페나는 결백함이 뿜어져 나오는 눈을 유순히 끔벅였다.
그러다 뭐라도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돌연 한숨을 내쉬는 리카도르에게 막혔지만.
“됐습니다.”
복잡함이 서린 눈매를 손등으로 가린 그는 저벅저벅 발걸음을 내 디뎠다.
‘계약의 존재를 모르는 건지, 그런 척을 하는 건지.’
필시 알고 있을 거라 여겼는데 헷갈렸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양, 순진하기만 한 슈페나의 밤색 눈망울 때문에.
한편, 멀어져가는 리카도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그녀가 잠깐 고심했다.
‘뭐야. 쫓아가야 하나.’
결국, 슈페나는 졸졸졸 그의 옆에 따라붙었다.
“걸음 되게 빠르네.”
먕먕, 언뜻 강아지처럼 맹목적이 기까지 한 긍정에 리카도르의 웃음이 더욱 진해졌다.
“그럼 내가 부인이랑 친구가 되고 싶게 만들어보든지.”
슈페나의 동공은 일순간 크게 뜨였다.
들고 있던 아이스크림이 아래로 미끄러졌다.
그가 낭패라는 듯 눈매를 좁히더니, 타고난 반사 신경으로 멀쩡히 아이스크림을 잡아 건네주었다.
그러면서 툭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쪽이라는 호칭도 좀 수정하고.”
슈페나도 입술을 삐죽이더니 와구와구 아이스크림을 씹어 먹었다.
그와 함께 속으로 투덜대었다.
‘뭐지? 저 여유롭고 재수 없는 태도는?’
두 번이나 거절당해서인지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정체 모를 호승심마저 스멀스멀피어올랐으니까!
‘내가 너랑 꼭 친구 먹고 만다!’
슈페나는 머쓱하게 다시 원래대로 몸을 틀었다.
동시에 아무렇지 않은 척 파워워 킹을 하며 타고 왔던 마차 안으로 쏙 들어갔다.
리카도르는 속이 훤히 읽히는 그녀의 행동을 저도 모르게 느슨히 풀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화난 건가.”
성질을 내는 모습이 나무열매를 뺏긴 소동물같이 꽤나 하찮고 귀여워 보여서.
그를 깨달은 리카도르가 딱딱하게 표정을 굳히곤 괜히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는 당황을 감추려 허리에 한 손을 얹은 채, 그녀를 따라 마차로 향했다.
다사다난했던 바깥나들이는 드디어 끝이 났다.
***
일주일 뒤.
슈페나는 정원에 나와 있었다.
본격적으로 로네악 꽃과 관련된 일을 처리하는 중이었으니까,
‘여기서 문제는 영 진도가 안 나간다는 거지.’
심지어 시계 제작을 맡기는 척 남몰래 정보상에게 의뢰를 했건만, 아직도 답이 없었다.
언제까지 알려주겠다는 연락도 없었고.
‘소중한 내 의뢰금만 받아먹고 잡아뗄 심산은 아니겠지?’
시근거리던 슈페나의 눈길은 이 내 로네악 꽃을 심은 화단으로 향했다.
꽃의 악취는 전혀 사라지지 않았으므로,
‘지나가는 사자들에게 물어봤지만 다 코를 막더라고.’
그녀가 시무룩해진 기색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이 방법이 맞을 텐데.”
-인내심을 좀 가져!
때마침, 나타난 카누스가 쯧쯧, 혀를 차며 그녀에게 잔소리를 퍼부었다.
슈페나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그를 반겼다.
“응? 카누스, 넌 언제 왔어?”
-누나가 하는 꼴이 너무 답답해서 그런다.
그에 슈페나의 밤색 눈에는 작은 이채가 돌았다.
‘잘 구슬리면 더 확실한 비법을 알려줄 수도?’
슈페나는 음흉한 표정으로 쪼그려 앉아 꼬마 뱀의 몸통을 슬그머니 찔렀다.
“귀엽고 깜찍하고 사랑스러운 카누스.”
-뭐, 왜?
카누스가 한껏 경계하며 받아쳤다.
그녀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눈을 찡긋거렸다.
“내가 뭐 해줄까?”
-일단 그거 더 해봐. 진심이 우러나오고 성의 있게.
“어떤 걸?”
카누스가 명랑하게 대답했다.
-칭찬!
슈페나는 영혼이 가출할 만큼 카누스를 찬양한 뒤, 몇 가지 구두약속마저 하고 나서야 의문을 풀수 있었다.
“네가 이능을 쓰지 말고 심으라며? 그래서 저 나무 옆에 놔둔 건데 왜 아무런 효과가 없을까?”
그녀가 둥글게 놓인 화단 중앙에 자리 잡은 거대한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클라이드 나무.
체드윅 가에도 딱 한 그루밖에 없는 이 거목은 신기하게도 이파리가 하얀색이었다.
깨끗한 순백의 구름처럼.
‘뭐, 여러 설화에 따르면 요 나무도 구름에서 태어났다지.’
신의 힘이 담긴 신물은 아니었다.
오히려 자연, 그 자체라고 해야 하나.
참으로 신비한 생명체인 이 나무는 기적과도 같은 효험을 지니고 있었다.
기운을 중화해주는 능력.
– 예로부터 번개는 파멸을, 구름은 조화를 상징했잖아.
슈페나가 잠깐 나무를 둘러보던 찰나, 카누스는 별거 아니라는 듯 가볍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지독한 파멸의 기운을 쏙 빼서 조화로이 주변과 어우러지게 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
그리고 그 설명은 퉁명스러운 타박으로 끝을 맺었다.
-바보냐? 이런 쉬운 것도 모르고.
결국엔 기다려야 한다는 얘기였다.
아무튼 궁금증이 풀린 그녀는 장난기가 배어나는 말씨로 자못 공손히 고개를 조아렸다.
“몰라서 죄송하네요, 똑똑한 꼬마뱀 씨.”
-에헴. 알면 됐습니다, 멍청한 파랑새 씨.
카누스가 한껏 거드름을 피우면서 슈페나의 말투를 흉내 내었다.
그녀는 밉지 않게 꼬마 뱀을 흘겼다.
그리 슈페나와 한바탕 눈싸움을 하던 카누스가 은근슬쩍 귀띔해주었다.
-누나의 탈리테를 불어넣으면 시간이 단축될지도 몰라.
응? 무슨 말이지?
그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슈페나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둘이서 뭐 하는 겁니까?”
리카도르였다.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32화
-형아는 언제 왔어?
카누스가 심드렁하게 리카도르를 반겼다.
“왔어요?”
슈페나도 헤실헤실 웃으며 꼬리 모터를 단 강아지처럼 붕붕 손을 흔들었다.
같이 바깥 구경을 다녀온 이래로, 그녀는 끈덕지게 리카도르한테 치대었다.
칼자루를 쥐고 있는 듯한 리카도 르의 태도에 처음엔 좀 짜증 나긴 했으나, 뭐 어쩌겠는가.
친구 하자고 고백해서 혼내주는 수밖에!
‘게다가 본인이 허락했으니까 합법적인 거라고.’
그렇게 슈페나는 열심히 노력했다.
마주치면 졸졸졸 달려가 인사하고, 시답잖은 농도 자주 던지고, 일부러 함께 티타임을 가지려 애쓰고,
“얘, 봄감자가 맛있다더라.”
이렇듯 틈날 때마다 맛있는 것도 먹이고.
솔직히 이러는 것에 재미가 붙어버렸다.
‘들러붙어서 상대방 반응 보는 게 흥미진진하더라고.’
슈페나가 갈색 피크닉 바구니에서 찐 감자를 꺼내며 장난스럽게 눈을 빛냈다.
포슬포슬하게 익은 감자에선 모락모락 김이 솟았다. 그녀는 얼른 먹으라는 듯 엄살을 부렸다.
“아, 뜨거운데.”
어? 어?
금방이라도 떨굴 듯 위태위태한 손짓에 리카도르가 못 이기는 척 간식을 받아먹었다.
그러자 슈페나는 기대감이 서린 낯을 들이밀었다.
“맛있죠?”
부드러운 감자를 먹는 둥 마는 둥 하던 리카도르가 입가에 미려한 호선을 그려 넣었다.
그 고운 입술에서 나온 답은 단호한 부정이었다.
“아니요.”
슈페나가 뾰로통하게 팔짱을 끼곤 그를 밉지 않게 째려보았다.
“사자가 편식도 하네.”
“육식동물이 채식하는 게 더 이상하죠.”
그는 작게 베어 문 감자를 슈페나의 입속으로 자연스레 넣어주며 되받아쳤다.
얼떨결에 따끈따끈한 감자를 우물거리게 된 그녀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감자는 좋아하지 않는다. 체크.
서로 붙어있는 시간이 제법 되어서인지 뒤꽁무니를 열성적으로 쫓아서인지, 슈페나는 부쩍 리카도르에 대해 알아갔다.
늘 의젓한 리카도르는 의외로 채소류를 싫어했다.
‘그래도 좀 좋아하면 안 되나.’
그녀가 웅얼거리는 듯한 말투로 슬쩍 그를 찔러보았다.
“감자랑 이제부터라도 친해져 봐요.”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한마디는 덤이었다.
“나랑도 그렇고.”
리카도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피식 웃으며 더 해보라는 듯 여유로운 태도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에 슈페나가 눈알을 데구르르굴리고는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원하는 반응을 끌어낼 수 있을까.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녀는 입꼬리를 축 늘어뜨리곤 엄살을 피웠다. 리카도르가 으레그래왔던 것처럼.
직접 경험을 통한 반복 학습의 성과였다.
“와. 이젠 대답도 안 해주고, 나 상처받았어요.”
이건 예상치 못했는지 리카르도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슈페나는 더욱 뻔뻔해지기로 했다.
“결론 났네. 나랑 친구 하는 걸로 갚아요.”
그리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으려 노력하며 악수를 청했다.
제법 능청스러운 대처에 리카도 르가 못내 실소하며 속닥거렸다.
“그건 무슨 논리입니까?”
퍽 다정한 물음이었으나, 슈페나의 뜻에 따라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는 슬금슬금 리카도르를 올려다보며 작게 도리질했다.
“이거 안 통해요?”
“더 분발해봐요, 방금은 조금 창의적이었으니까.”
쳇, 일단 전략상 일 보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누나랑 형아는 도대체 대화가 왜 이런 흐름이야?
그들을 유유히 구경하고 있던 카누스가 바닥에 푹 엎어지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꼬마 뱀의 낯을 보니 갑자기 리카도르가 오기 전에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맞다, 카누스. 아까 얘기했던 거 더 자세히 풀어봐.”
-뭐, 탈리테?
“응.”
슈페나의 끄덕임에 카누스는 총명하게 눈을 두어 번 깜박이며 한껏 젠체하고는 얘기했다.
당연히 슈페나에게만 들리도록.
-그 하녀랑 계약했을 때 보니까, 누나의 탈리테가 저 나무랑 많이 닮은 것 같아서.
닮았다고?
꼬마 뱀이 주절주절 덧붙였다.
-비슷한 파장의 생기가 공급되면 속도도 빨라지지 않을까?
가설을 세우는 카누스의 눈은 지식에 목마른 천재 과학자처럼 섬뜩하게 반짝였다.
결론적으론 하얀 나무에 슈페나의 탈리테를 불어넣으란 소리였다.
‘응? 이게 무슨 말이람. 저 천재 꼬마 뱀이 허황된 소리를 하는 건 아닐 테고.’
슈페나가 못 미덥게 카누스를 흘기더니 의문을 던졌다.
“위험한 거 아니야? 나, 네 그 탐구욕의 실험체가 된 건 아니지?”
-어차피 시간 지나면 다시 차오르는 게 탈리테인데, 그거 조금 쓴다고 해서 문제가 되겠어?
대수롭지 않다는 태도를 고수하던 꼬마 뱀은 일견 의미심장하게 뇌까렸다.
-물론 한 번에 너무 많이 사용하면 죽을 수도 있겠지만.
“아하.”
그런데 이건, 탈리테를 완벽하게 컨트롤할 줄 알아야 실행할 수 있지 않나.
‘실수로 너무 많이 흘려버리면?’
그 생각이 읽혔는지 카누스가 얄밉게 비아냥거렸다.
-탈리테 조절은 본능적인 영역인데 그거 하나 못하겠다고 말할 건 아니지?
저게, 이씨.
카누스의 도발에 슈페나의 입이 댓 발 튀어나왔다.
“해. 할 수 있어. 저번에도 비슷한 거 해봤는데, 뭐.”
제인과 맺었던 계약에서도 탈리 테를 이용했으니까.
‘까짓 거 저택 안마당에서 하는 일인데 큰일이 나겠어?’
슈페나는 힘차게 양손을 쥐었다.
슈페나의 말소리만 들리는 대화에 잠자코 귀를 기울이던 리카도 르가 의구심 어린 음성으로 끼어들었다.
“이상한 거 하려는 건 아니죠?”
“전혀요!”
명랑하게 고개를 젓는 슈페나의 모습에도 그의 목소리는 밝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걱정되는데.”
그가 주저 없이 그녀의 손을 잡아챘다.
“하려거든 내 앞에서 해요.”
결국, 리카도르를 끌고 클라이드나무 앞으로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절로 위압감을 풍기는 하얀색 거 목이 그들의 앞에 펼쳐졌다.
슈페나가 꺼끌꺼끌한 나무 표면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기분이 이상해.”
처음 봤을 때도 묘하고 신비로운 느낌이 들었다만, 이리 직접 만져져보니 더욱…….
‘그리우면서도 편안해. 노곤노곤잠이 올 것 같은데?’
그녀는 새우잠을 자듯 나무에 옆으로 기대곤 눈꺼풀을 드리웠다.
상쾌한 피톤치드 향이 온몸에 퍼지는 것만 같았다.
슈페나가 계약을 맺었을 때처럼 탈리테를 끄집어내기 위해 몸의 감각을 집중시켰다.
그와 동시에 웅웅, 미묘한 진동이 그녀를 감쌌다. 손끝이 얕게 떨려 왔다.
‘저번에 해봐서인지 탈리테를 느끼는 건 쉽네.’
슈페나의 새하얀 탈리테가 느릿느릿하게 구름 같은 거목 안으로 스며들었다.
탈리테가 소용돌이치는 감각과 함께 쏴아아, 느닷없는 바람이 불어왔다.
그 덕에 나뭇가지가 서로 부딪쳐 예쁜 노랫소리를 만들어냈다.
슈페나의 하늘빛 머리카락도 그에 화답하듯 보기 좋게 휘날렸다.
주위의 공기가 미묘하게 달라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무와 교감을 하는 느낌.
걱정과 달리 전혀 위험하지도 아슬아슬하지도 않았다.
이윽고 가슴께가 어느 정도 비워진 것처럼 공허함이 엄습한 순간, 슈페나는 눈을 떴다.
-와….
카누스의 감탄이 들려왔다.
그도 그럴 것이… 진한 보랏빛을 띠고 있었던 꽃의 색이 구름처럼 새하얗게 변했으니까.
장엄한 하얀색 이파리의 나무와 주변을 둘러싼 순백의 꽃밭, 그리고 그와 대비되어 신록이 넘실거리는 정원.
자못 성스럽기까지 한 풍경이었다.
여태 리카도르의 손을 쥐고 있던 슈페나가 홀린 듯이 화단 앞으로 걸어가 꽃에 얼굴을 파묻었다.
리카도르도 그녀의 곁에 쪼그려 앉아 찬찬히 숨을 들이켰다.
그런 그의 눈동자에 작은 놀라움이 서렸다.
해사한 꽃에선 아무런 향기가 나지 않았으므로, 완벽한 성공이었다.
‘신기하다.’
슈페나는 멍하니 눈을 끔벅이며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어지럽거나 그렇지는 않습니까?”
정신이 팔린 그녀를 향해 리카도 르가 말을 걸어왔다.
“멀쩡해요.”
배시시 웃은 그녀가 화단에 놓인 꽃을 샅샅이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탐스러운 하얀색 꽃을 정원용 가위로 다듬은 후, 짠 효과음을 내더니 리카도르에게 건네었다.
“이 첫 꽃은 특별히 선물로 줄게요!”
두 번째 꽃 선물이었다.
그녀는 은근한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또다시 들이댈 요량으로,
“그런 의미로 우리 이제 슬슬 더 친목을 다져보는 건”
“잘 어울리네요.”
바로 외면당했지만.
리카도르는 냉정한 거절과 다르게 장난기가 스며있는 손길로 그녀의 귀에 꽃을 꽂아주었다.
그리고는 만족스레 눈꼬리를 반달 모양으로 휘어 웃었다.
생각보다도 더 슈페나와 하얀 꽃이 잘 어우러지는 까닭에.
그가 짐짓 다정히 이야기했다.
“이만 가볼 테니 잘 간직하고 있어요.”
상황을 인지한 슈페나가 화를 내기 전에 얼른 도망가려는 속셈이었다.
이내, 리카도르는 잽싸게 종적을 감추었다.
나름 조잘조잘 대화 소리로 복작대었던 정원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허망한 슈페나의 한마디만이 그 휑한 정원을 배회했다.
“가버렸네…..”
– 오, 누나 미친 수인 같아.
머리에 꽃을 단 슈페나를 보며 꽃단 슈카누스가 진심 어린 감상평을 내놓았다.
슈페나는 익숙하게 무시하면서 손거울을 꺼내 들었다. 그 거울에는 머리에 꽃이 피어난 그녀가 담겼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사람이 되어버렸네?’
슈페나는 리카도르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주먹을 쥐었다.
한순간에 자유분방해진 몰골이 마음이 들지 않아서.
지가 무슨 치타 수인이야?
왜 이렇게 빨리 도망가?
심통이 난 그녀가 두 손을 하늘위로 번쩍 들곤 기지개를 켰다.
으아아, 없는 유연성을 쥐어 짜내려니 앓는 소리가 다 나왔다.
카누스는 뱀의 형상으로도 떨떠름함이 가득 느껴지는 표정을 짓고는 물었다.
-누나, 뭐 해?
“포획 준비. 스트레칭.”
슈페나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금방이라도 뛰쳐나가 리카도르를 잡아 올 듯한 기세로.
그리 몸을 풀고 있는 찰나, 천진한 카누스의 말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근데 이 꽃들은 어떻게 할 거야?
“어떡하긴, 잘 써먹어야지.”
슈페나는 자신감 있게 대꾸했다.
생각해둔 아주 좋은 방법이 있었으니.
연회까지는 앞으로 대략 한 달.
일을 벌이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33화
그 순간, 저 멀리서 누군가가 뛰어왔다.
슈페나의 전속하녀 제인이었다.
제인이 헉헉, 숨을 고르며 다급히 이곳에 온 목적을 이야기했다.
“작은 마님, 그 당부하셨던 일이요. 솔레제 공방에서 시계가 도착했어요.”
그게 이제야 왔다고? 정화를 다 마친 시점에야?
슈페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제인이 내민 벨벳 가죽 꾸러미를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설렁설렁 주머니의 끈을 풀어 헤쳤다. 그 안에 담긴 시계와 작은 쪽지가 보였다.
‘뭐라 적어놨는지 일단 보자.’
무심코 그 쪽지를 펼치려던 찰나, 옆에서 기웃거리던 꼬마 뱀이 흥미를 드러냈다.
-뭐야, 시계 주문했어? 나도 볼래!
“카누스는 여기 살아. 누나는 집에 갈게.”
그리 훠이훠이 손을 휘저은 슈페나는 쏜살같이 방으로 달려가 문을 걸어 잠갔다.
그러곤 다시 정보상의 메시지를 살폈다.
이윽고, 슈페나의 두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 이쯤이면 정화에 성공하셨을까요? 로네악 꽃에는 엄청난 비밀이 있답니다. 미리 연락을 못 드린 대신 특별히 참고가 될 만한 서적을 보냅니다.
이게 무슨 말이야?
내가 정화에 성공하는 건 어떻게 예측한 거람?
서적을 보낸다는 건 또 뭐고?
슈페나가 그 벨벳 주머니를 탈탈 털어 내용물을 뒤져보았다.
“이 쪽지랑 시계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데…….”
그리 샅샅이 살펴보던 순간.
똑똑—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방문이 아닌 창문에서.
슈페나는 긴장한 기색으로 한 발짝 한 발짝 다가갔다.
그런 그녀의 시야 끝에 보인 건 다름 아닌….
종이학?
‘미친, 종이학이 살아서 움직여!’
곱게 접힌 분홍색깔 종이학이 딱따구리처럼 콕콕콕 부리로 창문을 쪼고 있는 게 아닌가 !
슈페나가 입을 틀어막고 맹렬히 머리를 굴렸다.
‘이능? 그것밖에 설명이 안 되긴 하는데. 이런 능력은 처음 봐.’
딱히 위험해 보이지는 않았다.
같은 조류라서 그런가.
그녀는 살며시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자 창가에 얌전히 앉아있던 종이학이 스르륵, 평범한 쪽지 모양으로 다시 변했다.
또한 그 옆에는 얇은 책도 함께 놓여있었다.
‘뭐야, 이건?’
내심 당황한 그녀가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집게손가락을 사용해 우선 쪽지를 펼쳤다.
그 안에 담긴 내용은……….
-다음번에도 저를 찾아주시길 바랍니다. 고객님♥쓸데없이 고아한 필체로 적힌 한 마다.
공방의 주인, 정보상이 보낸 것이었다.
“뒤에 하트는 왜 붙었어?”
고객 유치에 적극적인 타입인가.
‘공방의 주인이 사자는 아니라고 했지.’
이런 특이한 이능을 가진 종족도 있었나.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사자 영지에는 사자들만 사는 게 당연했으나, 슈페나와 같은 예외도 있으니.
‘확실히 의뭉스러운 자야. 내가 언제 무엇을 할지 정확히 예상한 것도, 경계가 삼엄한 저택에 보란듯이 들어온 것도.’
어떠한 목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확인해보는 게 좋을 듯싶었다.
‘그럼 이 책부터 읽어봐야겠네.’
하나, 시작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아무것도 안 적혀있는데?”
책은 새하얀 백지였다.
슈페나가 곧장 촛대에 불을 켜곤 그을릴 듯 바짝 종이를 가져다 대었다.
추리소설에서 보면 다들 이러잖아.
하지만 미묘한 변화조차 없었다.
그녀는 손바닥으로 제 이마를 탁치곤 한탄했다.
“내가 소설을 너무 많이 봤어.”
그냥 텅 빈 책은 아닌 듯한데 어떻게 해야 할지 의문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슈페나는 어디 힌트라도 없을까 하는 심정으로 시계를 살펴보았다.
“와, 되게 예쁘네.”
근엄하게 수염을 기른 신사들이 썼을 것만 같이 고급스러운 회중시계의 외관.
똑딱거리며 나아가는 분침 소리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슈페나가 회중시계의 금색 줄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맡긴 건 이 금줄뿐인데 원래 요런 형태였던 것 같네.’
본래 회중시계에 달려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금줄.
독수리 가문에 있었을 때, 기억이 가물가물한 어릴 적부터 지니고 있었던 물건이었다.
그간 쓸데가 없어 묵혀두었던 금줄인데 이렇게 재활용하면 좋을 듯해 함께 맡긴 거였다.
‘뭐, 더 없나?’
슈페나는 바지런히 시계를 요리 조리 훑어보았다.
뒷면을 손으로 만져보니, 음각이라도 새긴 듯 오목하게 파인 부분이 느껴졌다.
「변하지 않는 것, 바로 기억」
이런 문구를 삽입해달라고 한 적은 없는데…… 명언인가? 아니면 뭔가 암시하는 말?
슈페나는 눈을 가늘게 뜨곤 뚫어져라 시계를 응시했다.
아무런 특이점도 보이지 않았다.
‘아, 모르겠다.’ 완전 앞날이 캄캄해.
캄캄해?
문득 떠오른 아이디어에 슈페나는 도도도도 달려가 방 안의 커튼을 전부 꼼꼼히 쳤다.
순식간에 사방이 어두워졌다.
펼쳐져 있던 책에서 은은한 빛과 함께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와, 이거였네!”
야광.
그녀가 뿌듯하게 미소 짓곤 책의 내용을 살폈다.
문제는 읽을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고대어에 소질 없는데.”
책이 해독하기 힘든 고대 언어로 되어있었으므로.
슈페나는 곧장 꼬마 뱀을 불러들였다.
리카도르를 불러들일 수는 없고, 제인은 고대어를 잘 몰랐고, 그럼 남은 건 카누스밖에 없잖아.
슈페나의 방에 도착한 카누스는 꼬리로 좋지도 않은 눈을 비비적 거리며 캬악대었다.
-어우, 어두워. 뭐야, 싸우자는 거야?
슈페나가 아랑곳하지 않고 미끼를 던졌다.
“카누스, 너의 지적 욕구를 채워 줄 서적을 발견했어. 고대어로 된 거야.”
-진짜?
그는 천재 과학자답게 반색했다.
‘걸려들었어!’
그녀가 흡족한 속내를 감추고는 최대한 카리스마 있게 눈에 힘을 주었다.
“단, 조건이 있다.”
-뭐래. 왜 불안하게 목소리를 깔아?
“오늘 일은 불문에 부칠 것. 가문의 명예를 걸고 맹세할 수 있어?”
그녀의 비장한 눈초리에 카누스는 애교스레 맹세했다.
-웅, 당원하지.
“어….. 그래.”
얘를 믿어도 될까?
슈페나는 탐탁지 않게 수긍했다.
우여곡절 끝에 그녀와 카누스는 머리를 맞대기 시작했다.
슈페나가 팔랑팔랑 책을 넘겨줄 때마다 꼬마 뱀의 눈은 더더욱 초롱초롱해졌다.
-어험, 그간 5만 권의 책을 섭렵한 나로서도 이런 설화는 처음 들어봐.
“무슨 내용이야?”
-그러니까, 요점이..… 로네악꽃은 사실 사자들을 위해 자연이 내린 신물이라는데?
음?
이건 또 무슨 상황이래.
카누스의 말은 계속되었다.
-심술궂은 번개가 질투 나서 꽃을 쓰지 못하도록 오염시킨 거래.
냄새가 심하면 사자들이 들여다볼생각조차 못 할 테니까.
슈페나의 목소리가 저절로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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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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