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uebird Lady and The White Lion Family RAW novel - Chapter (5)
백사자가문의 파랑새 마님 5화(5/21)
“신물?”
-응, 신물이니만큼 뭔가 엄청난 효능을 가지고 있나 봐. 정확히는 안 나와 있는데…..
그 정보상의 꿍꿍이는 뭘까.
떡밥만 투척해줄 테니 알아서 잘 처리하라는 건가.
‘선금을 많이 낸 것도 아닌데 이런 고급정보를 왜 주는 거지? 땅파서 장사하나?’
모든 게 의심스러웠다.
그렇지만 이 정보가 사실이라면 굉장한 기회가 될 수 있을 터.
우선은 그 효능을 알아내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슈페나가 약간 가라앉은 표정으로 시선을 내리깔곤 고심했다.
“이곳에서 피어난 거니까 사자들에게 필요한 힘을 가진 걸까.”
-아, 여기 힌트가 나와 있네. 치료 계열이라는데?
꼬마 뱀이 유순하게 맞장구치다한 페이지를 가리켰다.
“치료 쪽이라고?”
슈페나는 심 봤다는 표정으로 놀라워했다.
치료 능력은 여러모로 쓸모가 많았다.
특히나 사자들은 이능을 사용하고 나면 피멍이 드는 등의 부작용을 겪기도 했으니까.
수인마다 그 정도가 다르고 대부 분 쉬면 자연 치유되지만, 확실히 도움이 될 터.
게다가 원작 여주가 속한 사슴수인들의 이능이 치료인 걸 보면 말 다 했지, 뭐.
인 걸
‘이건 확실히 기회야.’
카누스도 사냥감을 포착한 뱀처럼 붉은 혀를 내밀어 입맛을 다셨다.
-근데 사용법은 안 적혀있어. 이거 재밌다. 나 이런 수수께끼 좋아해.
신이 난 카누스는 진실은 언제나 하나라고 외치는 꼬마 탐정처럼 신들린 추리를 했다.
-뱀 가문에도 행운을 가져다주는 나무 신물이 있는데, 잎을 따다가 차로 우려 마셨어. 비슷하지 않을까?
오호라.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한번 해보지, 뭐.”
슈페나는 씩씩하게 주먹을 말아쥐었다.
***
그런 다부진 각오와 달리 결과는 꽝이었다.
근 이 주일간, 그 둘은 열심히 꽃의 사용법에 관해 연구해왔다.
이파리를 우려서 마시고, 꽃차도 만들어 먹고, 음식에도 넣어서 먹고, 그냥 질겅질겅 씹어 먹고.
게다가 치료 계열이라고 해서 저택의 사용인들 중 몸이 좋지 않은 수인에게도 권했었는데.
‘이파리를 찧어서 상처 부위에도 올려봤다고!’
다만, 이런 필사적인 노력이 무색하게 아무런 효험도 나타나지 않았다.
먹지 마세요. 피부에 양보하세요.
이제는 하다 하다 오이팩을 하듯 로네악 꽃 팩까지 만들게 된 상황이었다.
끈끈한 진액이 나올 만큼 열정적으로 빻은 잎사귀를 온몸에 바른 카누스가 능청스레 말을 걸었다.
-누나, 내 피부가 좀 더 탱글해진 것 같지 않아?
“네 비늘은 원래부터가 미끄덩거렸어.”
화단에 걸터앉은 슈페나가 조생의 쓴맛을 음미하듯 로네악 꽃잎 아이스티를 마시며 시니컬하게 받아쳤다.
-나, 너무 귀여워지면 어떡하지?
카누스는 개의치 않고 자화자찬만 해대었다.
그리 아웅다웅하고 있을 무렵, 리카도르가 그녀의 앞에 나타났다.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34화
그는 슈페나가 저택의 사용인들을 모집해 요상한 일을 벌인다는 소식을 접한 참이었다.
리카도르가 비스듬히 팔짱을 끼곤 짐짓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짓을 벌이려는 겁니까?”
“에이, 무슨 짓이라뇨!”
슈페나는 결백한 표정으로 손사래 쳤다. 꼬마 뱀도 고개를 까딱거리며 열심히 거들었다.
안타깝게도 설득력은 없었다.
-마자, 형아. 우리 나쁜 수인 아-아니야. 하나도 안 수상해.
야, 그렇게 말하는 게 더 이상해.
에휴, 한숨을 쉰 그녀는 한층 더 그럴듯한 이유를 덧붙여 수습했다.
“어…… 그냥 로네악 꽃을 어떻게 잘 활용할지 고민 중이었어요!”
그러면서 리카도르에게 여유분의 로네악 꽃 아이스티를 권했다.
시음할 사람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으니까.
“꽃잎으로 만든 건데 마셔볼래요?”
리카도르는 얼음이 가득한 연분홍빛 음료를 꼼꼼히 살피더니, 잔을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슈페나가 그런 그를 은근하게 힐끔거렸다.
‘지금이 기회인가?’
마침, 좋은 생각이 떠올랐으니.
“근데 있잖아요오…….”
그녀는 부러 말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차가운 음료가 리카도르의 입술을 적실 때까지 뜸을 들였다.
그러다 어정쩡한 미소를 내걸고는 폭탄을 투척했다.
“이거 마시면 우리 친구 하는 거다?”
“크흡”
그 호기로운 제안을 들은 리카도 르가 돌연 고개를 숙이더니 잔기침을 했다.
사레라도 들린 모양이었다.
“괘, 괜찮아요?”
놀란 슈페나가 리카도르의 등을 팔꿈치로 퍽퍽 두들겼다.
결코 고의는 아니었다.
아마도.
리카도르가 손수건으로 입가를 톡톡 닦으며 그녀를 밀어냈다.
“단지, 사레가…… 들린 것, 뿐입니다.”
예상치 못한 사태에 잠시 흐트러졌던 그는 곧 본래의 차분함을 되찾아갔다.
슈페나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말끔한 낯의 리카도르를 관찰했다.
“근데 또 있잖아요.”
조그만 슈페나의 입술이 불길하게 달싹였다.
그에 따라 리카도르의 푸른 눈이 물결치는 호수처럼 일렁였다.
그런 미묘한 대치가 계속될 무렵, 그녀는 순진무구한 눈빛을 하곤 물었다.
“사레들린 거면 저거 마신 거 아니에요?”
“아닙니다.”
단박에 단호한 부정이 돌아왔다.
그러나 슈페나는 지지 않고 슬금슬금 되물었다.
“조금이라도 마신 것 같은”
“정말 아닙니다.”
“분명 목울대가 꿈틀거렸는데.”
“아무튼 아닙니다.”
그때마다 리카도르는 냉한 얼굴로 서늘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그의 귓불은 살짝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쪽팔린 건가.
“뭐. 그렇다고 쳐요, 그럼.”
슈페나는 헤실헤실 웃으며 기꺼이 눈감아주었다.
늘 의뭉스러운 구석이 있던 리카도르였는데, 요즘 들어 좀 말랑해진 듯 보여서.
기분이 썩 좋아졌다.
‘진짜 친해지고 있는 것 같잖아.’
슈페나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배시시 미소가 걸린 슈페나의 얼굴에 리카도르가 속눈썹을 드리우곤 잠시 사색했다.
‘내가 지금, 놀림 받는 건가.’
그리고 부인은 왜 저렇게 기쁘다.
는 듯이 웃는 거지?
그런데 환한 슈페나의 표정이 이상하게 얄밉거나 싫지가 않았다.
갑자기 얼굴이 홧홧해지는 것 같았다.
실제로도 리카도르의 목덜미가 발그레 달아올랐다.
그는 손등으로 얼굴을 가리곤 계우 아무렇지 않은 체했다.
얼마 후에 평정을 되찾은 리카도 르가 서둘러 본 목적을 꺼내 들어 화제를 돌렸다.
“참, 연회 초대장에 대한 답신이 도착했습니다.”
리카도르가 건넨 건, 확정된 연회참석 명단이었다.
그동안 슈페나는 카누스와 난리 브루스를 추면서도 틈틈이 연회준비를 해왔었다.
연회의 기본 테마 선정이나, 사들여야 할 물품 검토나, 현장 시뮬레이션 같은 일들을.
초대장 발송은 그 준비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건 슈페나가 심혈을 기울인 일이기도 했다.
‘하얗게 정화된 로네악 꽃을 말려 같이 동봉한, 세상에서 하나뿐인 초대장이라고!’
무릇 초대장이란 그 행사의 얼굴과도 같은 역할을 하지 않던가.
이번 연회에선 무언가 특별한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사람들한테 심어주고 싶었다.
호기심이 들게끔.
‘그래서 밑 작업도 하나 했지.’
제인에게 우선 저택 사용인들 사이로 알음알음 로네악 꽃에 관한 이야기를 퍼뜨리라고 명했었다.
로네악 꽃을 전부 사 온 덕에 소소한 영지 문제가 해결되었고, 꽃이 가진 특유의 냄새가 완전히 없어져 하얀색으로 변했으며, 무언가 신기한 효능을 가지고 있을 것 같다는 뉘앙스의 소문을.
제인이 생각보다도 발이 굉장히 넓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덕분에 사용인들이 쭈뼛쭈뼛 물어오기도 했다.
“꽃을 파는 상인이 되게 힘들어 했다는데, 좋은 일을 하셨네요!”
“진짜로 완전히 새하얘졌어요. 처음 봤을 때만 해도 쨍한 보랏빛 아니었나요?”
“작은 마님, 정말 꽃에 신비한 힘이 깃들어있습니까?”
뭐, 이런 질문들이었다.
그때마다 그저 빙그레 웃으며 더 소문내라는 식으로 부채질을 했지.
‘그래, 어서 이 미담이 저택 밖으로도 퍼졌으면 좋겠다.’
좀 애를 먹고 있긴 하지만, 계획대로 진행되어가는 상황에 슈페나는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그러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곤 리카도르가 내민 리스트를 훑어보았다.
‘어?’
그 마지막엔 예상치 못한 인물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리리엘라 체드윅
피도 눈물도 없는 사냥꾼, 얼음으로 빚어진 것 같은 사자, 웃을 때 가장 살벌한 여인.
이런 휘황한 수식어를 지닌 수인인 리리엘라 체드윅은 바로.…….
리카도르의 누나였다.
‘이번 연회에 리카도르의 누나도 참석한다고?’
분명 결혼식 때도 바쁘다는 이유로 못 본 터라,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는데…
슈페나의 두 눈이 휘둥그렇게 뜨였다.
***
그 시각.
체드윅 가가 위치한 곳과 다소 멀리 떨어져 있는 어느 영지.
시차가 조금 있던 탓에 이곳은 저녁이었다.
리리엘라는 어둑어둑해진 길거리를 활보하고 다니면서 수첩에 무언가를 빼곡히 적었다.
이래 봬도 그녀는 타 영지 감찰임무를 수행하는 중이었다.
리리엘라 곁을 졸졸 따라다니던 수하가 졸린지 살짝 하품하더니, 넉살 좋게 말을 붙였다.
“리리엘라 님, 이번 연회의 책임자가 그 파랑새라는 걸 알고 계셨습니까?”
“예상했어.”
그녀의 손에는 하얀색 드라이플라워로 꾸며진 초대장이 들려있었다.
‘무던한 분인데 이리 들고 계신걸 보면, 초대장이 어지간히 마음에 드셨나 보군.’
힐끗 곁눈질하던 수하가 넌지시 알은체했다.
“꽃이 참 예쁩니다. 원래는 보라 색이라고 책에서 봤던 기억이 나는데 신기하지 않으십니까?”
“응.”
리리엘라가 무덤덤하게 답했다.
이런 단답은 익숙했기에 수하는 재잘재잘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 혼자만의 수다는 이윽고 슈페나에 관한 화제로 넘어갔다.
“참 말세입니다. 파랑새가 사자 가문에 시집오다니…….”
그 순간, 리리엘라의 황금안이 맹수의 것처럼 가늘어지며 설핏 흉포하게 번뜩였다.
오금이 저릴 듯 매서운 살기에 수하가 두 손을 싹싹 비비며 사정했다.
“죄, 죄송합니다. 이 방정맞은 입은 하루빨리 시정하겠습니다!”
그렇게 그들 사이에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 둘은 거리를 사찰하는 업무에 마저 집중했다.
언뜻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리리 엘라의 곁에서 우물쭈물하던 수하는 또다시 대화의 물꼬를 틔웠다.
“아무튼 연회 시작에 맞춰 귀환하게 되어서 다행입니다.”
그러더니 최대한 쾌활하게 말을 이었다.
“연회 직후가 바로 생일인데 이번에는 어찌하실 겁니까?”
“글쎄.”
“웬만하면 저택에서 보내시죠. 가주님 걱정도 이만저만이 아닐 겁니다.”
그에 골몰히 고심하는 건지 리리 엘라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간은 연회만 빠르게 준비한 뒤, 생일이 다가오기 전에 저택을 떠나지 않았던가.
‘이번엔 가족들과 생일을 보내는 것도 괜찮을지 몰라.’
많은 곳을 돌아다니면서 여러 가지를 듣고 보고 배운 덕분에 확실히 좋아졌잖아.
리리엘라는 놀랍도록 차분해진 낯빛으로 혼잣말했다.
“그리고 그 파랑새도 볼 수 있을 테니까….”
말을 잇는 리리엘라의 두 뺨이 은근하게 상기되었다.
‘초상화가 귀여웠어.’
그동안 옆 동네 악어놈이 제 친구인 악어새를 자랑하는 모습이 아니꼬웠었지.
‘이제 나도 있어, 새 친구..….’
리리엘라가 두 손을 꼼지락거리며 핑크빛 미래를 그렸다.
기대감으로 물든 리리엘라의 낮은 아이러니하게도 망자의 목을 베러 온 사신처럼 스산하게 일그러졌다.
“사, 살기는 거둬주시지요…….”
옆에 있던 수하가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리리엘라는 더욱 심각해진 표정으로 고민했다.
‘쟤처럼 파랑새가 내 웃는 얼굴이 무섭다고 피하면 어떡하지?’
그럼 인간화한 모습을 안 보여주면 되지.
명쾌하게 결론지은 리리엘라가 동물화를 했다.
그리고는 사자의 형태를 띤 채,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도 남들이 보기엔 완연한 맹수의 살인 예고라는 게 참 아이 러니했다.
아니나 다를까, 수하가 떨리는 동공을 부여잡으며 애처롭게 얘기했다.
“리리엘라 님? 갑자기 왜 동물화를…… 아니, 어디 가세요!”
리리엘라는 개의치 않고 싱글벙글 앞으로 달려 나갔다.
기분이 좋아진 탓이었다.
그것도 잠시, 리리엘라가 돌연 제자리에서 멈추었다.
그러곤 발바닥을 들어 자신의 초콜릿색 젤리를 내려다보았다.
‘잠깐만, 내 발바닥 젤리가 핑크색이 아니라고 싫어하면?’
느닷없이 별 게 다 걱정스러워졌기 때문이었다.
나를 반겨줄까…?
용맹한 사자의 두 귀가 힘없이 축 늘어졌다.
사나운 외모의 리리엘라는 사실 걱정을 사서 하는, 겁쟁이 사자였다.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35화
한편, 슈페나는 남몰래 삐질삐질 땀을 흘렸다.
‘남주의 누나라니 무서울 것 같은데. 원작에서도 엄청 차가운 캐릭터였잖아!’
이제 이런 시누이를 직접 만날거라고 생각하니, 괜한 걱정이 밀려 들어왔다.
슈페나는 딱딱하게 경직된 얼굴로 데굴데굴 눈알을 굴리며 리카도르에게 물었다.
“저어, 누나분은 어떤 성격이에요?”
설핏 울먹거림까지 감도는 질문을 들은 리카도르가 생각에 빠진 듯 잠깐 머뭇대었다.
그러곤 가라앉은 미성으로 중얼거렸다.
“조금-”
“조금?”
“종잡을 수가 없는 성격입니다.
사고의 흐름이 남들과는 달라요.”
그 대답에 슈페나의 낯빛이 곧바로 파리해졌다.
‘어마어마하게 난폭한 성정을 지녔나 봐!’
무시무시한 맹수, 사자가 아니던가.
장난 아닐 것 같았다.
슈페나는 시무룩해진 채 좀비처럼 팔다리를 늘어뜨렸다.
조금 시간이 지나 진정이 된 후, 그녀가 양손을 꼬옥 주먹 쥐곤 각오를 다졌다.
“갑자기 열심히 살고 싶어졌어요.
연회 준비 잘해야겠다….….”
리카도르 누나한테 본인이 주관한 작년 연회보다 못하다고 혼나면 어떡해!
시월드는 싫단 말이야!
슈페나는 미친 듯이 의욕을 불태우며 옷소매를 팔뚝까지 걷어붙였다.
그러더니 성큼성큼 화단 앞으로 향했다.
그녀는 열심히 옆에 있는 곡괭이로 땅을 팠다.
꽃이라도 더 캐낼 요량으로, 일을 하자, 일을!
슈페나는 열정을 불태웠다.
-저 누나, 갑자기 왜 저래.
피부미용에 신경 쓰던 카누스가 쯧쯧, 혀를 차며 핀잔을 주었다.
슈페나는 묵묵부답으로 우직하게 하던 작업을 마저 계속했다.
그러자 꼬마 뱀은 떨떠름한 음성을 쏘아 보내며 슈페나의 노동에 저도 모르게 합류했다.
-뭐야. 누나, 왜 열심히 살아. 나도 그래야 할 것 같잖아!
어느새 그 둘은 훌륭한 일꾼이 되었다.
그 일꾼들을 묘해진 눈빛으로 관찰하던 리카도르가 일순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그의 시선은 훤히 드러난 슈페나의 팔뚝으로 향했다.
정확히는 팔뚝 한가운데에 박힌 문양에.
‘역시 맞네.’
그 문양은 명백히 리카도르의 타나토인 월장석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슈페나와 제인의 계약 장면을 보았을 때, 그가 느꼈던 직감이 정확했다.
슈페나를 홀린 듯이 쳐다보던 리카도르가 짙게 침잠한 눈을 비껴내리곤 이야기했다.
그냥 넘어갔던 바깥나들이 때와 달리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알아낼 생각이었으므로,
“그런데 그 팔뚝에 있는 거, 뭡니까?”
“뭐요?”
슈페나는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팔뚝에 뭐가 묻었나? 설마 벌레?’
그녀가 몰랑몰랑한 제 살결을 찰싹 때렸다.
그러나 벌레는커녕 먼지 하나도 붙어있지 않았다.
“응? 아무것도 없는데요?”
슈페나는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리카도르가 한쪽 눈썹을 들썩이며 약간 못마땅하게 고갯짓했다.
슈페나가 잡아떼는 게 아닌가 싶었기에.
“반달같이 생긴 그거요.”
그녀는 이윽고 깨달았다는 듯 제 팔뚝을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아, 이 점이요?”
그 물음에 리카도르의 얼굴이 활칵 구겨졌다. 그가 의구심 어린 어투로 되물었다.
“점?”
“네. 모양이 좀 특이해서 점처럼은 안 보이죠? 근데 왜요?”
“아닙니다.”
리카도르는 황급히 고개를 돌리곤 손등으로 가리더니 부정했다.
그런 그의 손끝은 미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리카도르는 지금 이 상황이 잘 이해되지 않는 상태였으니까.
‘이렇게 떠보면 조금 얼버무린다 든가 도리어 캐물으려 한다든가 하는 반응을 보일 줄 알았는데.’
아예 저게 문양이라는 것도 모르는 듯이 순진한 표정이라니.
‘설마, 정말로 계약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건가.’
분명 슈페나가 그에게 바라는 게 있다고 생각해왔다.
그건 필시 계약과 연관된 것일테고.
그런데 그 믿음이 흔들렸다.
사실 최근 들어 묘한 느낌이 피어올랐었다.
슈페나가 정말 그와 가까워지고 싶어 하는 듯한 기분이..
본디 눈치가 기민한 리카도르였다.
그러니 상대방의 목적이 호의 인지 의도인지 직감적으로 알아차릴 수밖에.
더 이상 슈페나의 행동이 가진 저의를 판단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뭔가 목적이 있다면 더 편할 텐데.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리카도르는 이렇게 제 계산에서 벗어난 상황을 가장 싫어했다.
더구나 언제, 어떻게 맺어졌는지도 모를 계약이 그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칠 거라고 추측되는 만큼 더더욱.
불안했다.
슈페나는 그런 리카도르의 기분을 눈치채지 못하곤 천연덕스레 말했다.
“그렇게 신기하게 생겼어요? 뭐, 만지는 건 좀 그렇고 가까이서 볼래요?”
그녀의 천진한 모습이 리카도르한테는 혼란을 부채질하려는 듯 날카롭게 다가왔다.
그는 복잡해진 머리를 손으로 짚으며 슈페나의 속내를 떠보았다.
“..… 지금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는 압니까?”
“네?”
하나, 아무런 소득도 얻을 수 없었다.
돌아온 건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슈페나의 반응뿐이었으니까.
리카도르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에 슈페나는 힐끔힐끔 리카도 르의 눈치를 살폈다.
무언가 기분이 안 좋아 보여서.
그녀가 손가락만 꼼지락거리며 각이었다.
“와, 이렇게 단박에 나를 거절한 예비 친구는 그쪽이 처음”
“됐습니다.”
하지만 그 시도는 제대로 해보기도 전에 와장창 실패했다.
리카도르가 슈페나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빠르게 정원을 빠져나갔다.
“아니. 그 다음 대사는 좀 들어보고, 가지 이…….”
덩그러니 남은 그녀가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멋쩍게 혼잣말했다.
“근데 맘에 안 들면 그냥 갈 것이지 왜……. 아, 자존심 상해.”
싫어할 거면 왜 그전까진 웃어주고 잘해줬던 건데?
결국, 슈페나도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쳇, 혀를 찼다.
조금 삐진 탓이었다.
***
그리 심통이 난 상황이 무색하게 슈페나는 리카도르와 생각보다도 빨리 화해 아닌 화해를 했다.
며칠이 지난 날 밤, 도서관에서 홀로 연회 관련 보고서를 검토하던 슈페나는 저도 모르게 잠들어버렸었다.
코오코오, 얕은 숨을 내뱉는 그녀를 향해 리카도르가 걸어왔다.
그는 추운지 어깨를 잘게 떨고 있는 슈페나에게 두꺼운 담요를 덮어주며 생각했다.
‘정말 친구라도 되고 싶은 거라고?’
친구.
그 짧은 단어가 입 안에서 까끌거리며 기분 나쁜 이물감을 남겼다.
그동안 리카도르는 찬찬히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나 머릿속은 백지상태가 되었다.
한 가지 떠오르는 건……….
그 꿈.
어릴 적부터 드문드문 꾸었던, 분홍색 원피스를 입은 앳된 슈페나가 그를 구해주는 꿈.
역시나 슈페나는 그에게 미지의 존재였다.
‘그 친구라는 게 되면 알 수 있을까.’
너의 모든 걸 낱낱이.
리카도르가 천천히 속눈썹을 드리웠다.
그리고는 제 오른쪽 손바닥에 있는 표식을 지그시 응시했다.
‘소중해지지만 않으면 돼. 그때처럼.’
딱 슈페나가 그에게 위험이 될지 아닐지 판단하는 것까지만 할 테니까.
리카도르의 새하얀 속눈썹 아래 숨겨진 동공이 고양잇과 맹수답게 세로로 길게 갈라졌다.
먹잇감을 노리는 완연한 포식자의 것처럼.
리카도르는 슈페나가 좋아하는 코코아도 책상 위에 올려두곤 발걸음 소리를 죽여 도서관을 빠져나갔다.
얼마 후에 슈페나는 느릿하게 눈을 떴다.
밤색 눈동자가 멍하니 끔벅였다.
곧이어 놀람이 묻어나오는 슈페나의 목소리가 입술을 갈랐다.
“뭐야, 이건?”
따뜻한 담요와 코코아.
처음에는 사용인이 준비한 건가 했지만, 금세 리카도르가 준 것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리카도르의 담요였으니.
짜식, 내가 한 번만 용서해주지.
슈페나는 피식 웃으며 코코아를 호호 불더니 소중히 아껴 마셨다.
유난히 혀끝이 달았다.
‘센스가 없진 않네.’
커다란 마시멜로를 세 개나 넣어줬어.
먹잘알인가 봐!
그녀는 좋아진 기분으로 일에 매진했다.
그런데 문제는…….
‘연회 날이 일주일 뒤였다니! 시간이 왜 이렇게 빨라?’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는 사실이었다.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36화
“카누스 교수님. 오차범위와 그 이유, 그리고 다른 실험 방법까지 생각해본 보고서입니다.”
-흠. 슈페나 양, 이게 실현 가능하다고 보나?
“교수님, 제발 낙제만은……!”
그 불은 쉽게 꺼지지 않았다.
이렇듯 슈페나는 카누스와 로네 악 꽃의 사용법을 연구하는 데에 더욱 매진했다.
하나, 여태껏 피부에 양보하며 생난리를 피웠던 건 헛짓거리였다는 듯 성과는 전무했다.
‘그 망할 정보상!
슈페나가 빠득 이를 갈았다.
빡빡한 현실에 몰래 서신을 보내어 쥐고 있는 정보 모두 알려달라는 의뢰를 했건만, -고객님이라면 밝혀내실 수 있어요! 힘내세요~따위의 답변만 전달받았으니까.
아무래도 정보상은 세기말 감성의 괴짜임이 틀림없었다.
아니면 그 이상은 본인도 알지 못해서 뻥카를 날리는 거라든가.
여하튼 그 손에 놀아나고 있다는 불쾌함마저 들었다.
‘조생이 쓰다.’
로네악 꽃 화단 옆에 조성된 야외 테라스에서 다른 방법을 강구하고 있던 슈페나는 시무룩하게 한탄했다.
“으아, 망했어.”
-맞아, 망했어.
관련 자료를 살피던 슈페나가 테이블에 머리를 박자, 카누스도 따라서 푹 엎어졌다.
“차 우리기, 아이스티로 냉침 시키기, 알약으로 만들기, 피부 미용에 사용하기, 생식하기…. 그것 말고도 한 스무 가지는 더 있었던 것 같은데.”
그가 카누스 대신 답했다.
“…….”
슈페나는 짧게 침음성을 흘렸다.
워낙 이것저것 요란하게 하다 보니 결국 리카도르도 알게 되었다.
로네악 꽃의 사용법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그래서 카누스가 고대 서적을 뒤 지다 로네악 꽃이 신물일 수도 있다는 걸 알아냈다고 둘러댄 참이었다.
‘정보상에 관한 건 아무한테도 얘기 안 했으니까 괜찮겠지.’
슈페나가 긍정적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는 사이, 카누스는 리카도르의 말에 호응하며 팩트폭력을 시전했다.
-와, 우리가 그렇게 개고생을 했다고? 근데 아직도 제자리걸음이라고? 개판이네.
슈페나도 울상을 지으며 속으로 동의했다.
이 정도면 노력이 가상해서라도 뭐 하나 걸려줘야 할 타이밍 아닌가?
그녀는 씁쓸하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다가 은근슬쩍 목소리를 낮추곤 카누스의 귀에만 들릴 정도의 크기로 속닥였다.
“야, 너 그 책 잘 해석한 거 맞아? 치료 계열이라며.”
-누나, 나 못 믿어? 나 두 짤 때부터 고대어 배운 천재야.
카누스도 슈페나에게만 들리도록 음성을 쏘아 보내며 사납게 대꾸했다.
“어…… 그래, 미안.”
그럼 뭐가 잘못된 거지.
치료 계열이라면 아픈 환자들에겐 효험이 나타나야 하지 않겠는가.
‘꽃으로 만든 차를 아픈 사자 어르신한테 꾸준히 드렸는데도 아무런 차도가 없었단 말이지.’
암담한 미래에 그녀가 꾹꾹 제 미간을 누르던 순간, 어딘가 못마땅한 듯한 미성이 들려왔다.
“시간 내서 도와주러 왔는데 둘이서만 떠들고.”
리카도르는 언뜻 상냥하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쐐기를 박았다.
“질투 나려고 하네.”
질투?
그 마성의 단어에 슈페나의 두 눈이 본능적으로 커다래졌다.
‘어쩌면 리카도르가 마음을 열고 있다는 신호일 수도?’
슈페나가 감개무량한 표정을 짓더니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꽁지깃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이내, 그녀는 팔랑팔랑 신이 난 음성으로 헤헤, 웃음을 흘리면서 마구마구 질문했다.
“질투 나요? 막 나랑 친해지고 싶고 그래요?”
그 맹렬한 기세에 리카도르가 주춤 뒤로 물러나면서 부정 대신 되물었다.
“그게 그렇게 해석됩니까?”
“네! 당연하죠.”
그녀가 밝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리카도르는 카누스가 보던 식물 관련 서적을 괜스레 뒤적 거리며 화제를 돌렸다.
“근데 열매를 사용한 적은 없는 것 같네요.”
슈페나와 친구가 되어볼까 했던 생각을 읽힌 것만 같아서.
딱히 먼저 누군가와 친분을 쌓아야겠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인지 쉬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친구, 라는 단어를 내뱉으면 정말 그 말뜻과 같은 관계가 될까 두렵기도 했고,
‘용기를 내긴 해야 하는데.….’
리카도르가 잠시 상념에 빠진 순간, 슈페나는 곰곰이 머리를 굴리며 대답했다.
“그동안은 열매가 열릴 시기가 아니었거든요. 이제 사용해봐야 죠?”
슬슬 열매가 한두 개씩 달릴 계절이었다.
슈페나가 천진하게 리카도르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열매 따러 가요!”
그 제안을 들은 리카도르는 슈페나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러곤 유유히 정원을 가로질렀다.
-형, 나도 데려가…..
얼떨결에 홀로 남게 된 꼬마 뱀은 작게 앙탈을 부렸다.
그 칭얼거림을 들은 그녀가 슬쩍 뒤로 돌아 리카도르에게 이야기했다.
“카누스도 데려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저 새끼 뱀은 자립심을 좀 키워야 해요. 그동안 너무 부인이랑 붙어 있었어.”
리카도르는 대수롭지 않은 듯한 어투로 카누스한테 쏠리는 슈페나의 관심을 차단했다.
그리고는 슈페나와 맞닿은 손에 조금 더 단단히 힘을 주었다.
‘뭐지?’
슈페나는 쭈뼛거리면서도 리카도 르를 따라 걸었다.
얼떨결에 둘이서만 클라이드 나무 앞 화단으로 향하게 되었다.
“자, 내가 열매를 딸게요.”
그들은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했다.
새하얀 꽃무리 중 몇몇은 지기 시작하여 설익은 열매를 맺고 있었다.
‘열매 색깔도 어쩜 이리 새하얄까.’
토마토처럼 동글동글하고 두부처럼 몰랑몰랑한 앙증맞은 과실.
도무지 어떤 맛일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슈페나는 궁금함을 이기지 못하고 열매를 조심스레 입 안에 넣어 굴렸다.
톡 쏘는 듯한 상쾌함과 함께 녹진한 달달함이 혀끝을 몽글몽글하게 간질였다.
“어? 뭐야, 왜 맛있어?”
슈페나는 하나 더 따다가 오물오물 맛보았다.
음음음, 콧노래가 저절로 나왔다.
작은 것에도 행복해하는 듯한 슈페나의 모습에 리카도르가 말을 붙여왔다.
“맛있습니까?”
“네, 완전.”
그녀는 맹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긍정에 리카도르가 길쭉한 눈매를 어여쁘게 휘어 웃더니 제 입가를 톡톡 검지로 두들겼다.
뭐, 먹여달라고?
슈페나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곤 붉게 살랑이는 리카도르의 입술안으로 열매를 넣어주었다.
그리곤 괜히 하늘색 머리카락을 배배 꼬며 딴청을 피웠다.
‘꼭 어미 새가 된 기분이네. 사실 그것보단 좀…… 느낌이 묘하긴한데.’
이게 다 리카도르가 웃는 게 청량하고 예쁜 탓이야.
분명 피폐물이라서 퇴폐섹시 남주였는데, 아직 유년 시절이라 그런가.
슈페나가 열매를 우물거리는 리카도르를 쳐다보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한편, 리카도르는 살짝 놀란 듯 푸른 눈을 깜박이더니 작게 감상을 내뱉었다.
“상당히, 괜찮네요.”
그간 리카도르에게 이런저런 맛있는 걸 먹이며 본 반응 중, 가장 긍정적인 감탄이었다.
‘이게 사자 입맛에도 맞나 봐.’
슈페나가 붕어처럼 동그랗게 입술을 모으며 오오, 탄성을 흘렸다.
그때, 꾸물꾸물 짧지 않은 거리를 빠르게 기어온 카누스가 둘 사이를 비집고 끼어들었다.
-나만 두고 가버리고 너무해! 근데 저 허여멀건 열매가 정말 맛있어?
“먹어봐.”
카누스가 매서운 송곳니로 열매를 옴뇸뇸, 먹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한껏 신이 난 음성으로 시식평을 내놓았다.
-음식감이 부들부들해서 좋다!
까다로운 꼬마 뱀이 내놓은 답도 합격이었다.
“그렇지? 이번엔 뭔가 느낌이 좋다니까.”
슈페나의 표정이 더욱 밝아졌다.
얼른 주방 요리사한테 음식으로 만들어달라고 해서 아픈 수인들한테 먹여봐야지.
슈페나는 열심히 행복회로를 돌렸다.
그녀가 열매를 바리바리 싸서 들고는 저택 안으로 도도도도 달려 갔다.
하지만……..
“이것도 아니라고?”
잔인하리만치 아무런 효과도 나타나지 않았다.
테이블 위에 널브러진 열매를 바라보며 그녀가 한탄했다.
“내일모레가 연회인데 망했다.”
카누스는 열매를 한입에 삼키더니 낙천적으로 호응했다.
-괜찮아. 못해도 1년만 더 조사하다 보면 풀릴 거야.
“1년은 너무 갔고 한 4개월만 더하면 될 것 같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리카도르가 냉정히 현실을 판단하며 카누스의 의견에 반대했다.
“차라리 악담을 퍼부어라…….”
슈페나는 풀이 죽은 낯으로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미 연회 날에 로네악 꽃을 선물하기로 정했단 말이야.”
심지어 연회가 열리는 파티홀도 로네악 꽃을 이용해 싱그러운 자연의 느낌이 물씬 풍기도록 꾸며 놓은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어찌 결정을 번복할 수 있겠냐고!
‘누가 꽃의 효능이 정말 있는 거 냐는 물음을 던지진 않겠지?’
그냥 카더라라서 적당히 대처할 순 있었다만 소문이 어느 정도 퍼진지라 고민이었다.
‘미리 밝혀서 연회 날에 빵 터트릴 계획이었는데.’
물론 보랏빛이었던 꽃을 하얗게 정화한 것만으로도 괄목할 만한 성과였다.
가장 큰 문제였던 악취가 사라졌으니 사자들도 로네악 꽃을 더는 기피하지 않을 테고, 그래도 아쉬운 마음이 앞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의기소침해진 슈페나를 살피던 카누스가 자못 친절하게 제안했다.
-근데 혹시 모르니까 그 열매, 연회에도 가져가는 게 어때?
“응?”
-주스 같은 걸로 만들어서 내놔도 좋을 것 같단 말이야. 다들 달콤하다고 그랬잖아.
꽤나 좋은 아이디어였다.
미각이 예민한 주방장 사자마저 난요런 식재료는 어디서 난 거냐고 찬탄을 했으니까.
이왕 일이 엎어진 이상, 다른 곳에 쓸 방법을 많이 마련해놓는 게 좋을 터.
이 열매의 맛에 반한 사자들이 호의적인 반응을 보일지도 몰랐다.
‘로네악 꽃으로 갖가지 음식을 만들어서 대접하는 것도 괜찮겠네.’
슈페나는 아닌 척 카누스를 띄워주었다.
“너 좀 똑똑하구나?”
-헤헷, 내가 그런 편이지.
그 칭찬에 꼬마 뱀이 몸을 배배꼬며 부끄러워했다.
슈페나는 남은 기간 동안에도 최선을 다했다.
안타깝게도 극적인 소설에서 나올 법한 기적은 발휘되지 않았다.
그렇게 연회가 시작되었다.
‘노력했으니까 난 만족해.’
슈페나는 몰랐다.
때때로 기회는 더 막다른 순간에서 찾아오기도 한다는 걸.
그리고 노력해왔던 자는 그 기회를 기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걸.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37화
체드윅 가 내에서도 제일 규모가 커다란 파티홀은 초대받은 수인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여름의 초입에 다다른 지금의 날씨를 연상시키듯 싱그럽고 생기 넘치는 원색의 장식부터.
장미 넝쿨이 감겨있는 벽과 꽃을 엮어 놓은 아름다운 샹들리에까지.
부러 보통의 연회와는 사뭇 다른 무드를 연출했다.
기존의 장엄하기만 한 연회 분위기가 질린다는 의견도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건 은근히 효과가 있는 듯했다.
“어머, 장식이 되게 산뜻하네요.”
“그러게요. 이 하얀색 꽃으로 꾸민 음식도 예쁘네요. 로네악 꽃이 랬던가?”
사자들은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조곤조곤 점잖게 감탄을 내뱉었다.
물론 모두가 호의적인 건 아니었다.
“크홈, 중요한 연회인데 분위기가 이리 방방 떠서야. 나 원 참.”
저번 결혼식 때 슈페나에게 시비를 걸었던 원로 사자, 제임스가 헛기침을 하며 불평했다.
그것도 잠시, 화제는 새로운 곳으로 옮겨갔다.
“그나저나 이번 연회의 축복 때 내릴 선물이 아주 특별하다던데요.”
로네악 꽃에 관한 이야기로, 제임스는 회의적인 어투로 일갈했다.
“그깟 쓸모도 없는 꽃.”
“하긴 쉴 그늘을 만들어주는 나무도 아니고 좀 거추장스럽긴 하죠.”
몇몇 사자는 그의 의견에 동조했다.
그러나 슈페나가 제인을 통해 알음알음 퍼뜨렸던 소문 덕에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이들도 있었다.
“그래도 설화에 등장한 꽃이 아닙니까. 흔히 널린 게 아니라서 마음에 듭니다.”
“호호호, 뭐가 되었든 이로써 소상공인의 경제난 같은 영지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게 중요하지요.”
“그러게요. 타지에서 온 신붓감이라 영지 일에는 통 관심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듯 제각기 다른 입장은 이내한 갈래로 모였다.
여하튼 지켜봐야겠지요. 이번 연회도, 저 파랑새도.
사자 수인들의 눈은 하늘거리는 시폰 소재의 하얀색 꼬까옷을 입은 슈페나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어머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많이 공들인 티가 나는구나.”
칸은 따스하게 슈페나를 쳐다보며 칭찬했다.
“특히나 며늘아가, 네가 아주 많이 고생했다지.”
그간의 노고를 알아주는 한마디에 슈페나의 두 볼이 발갛게 물들었다.
“이번 축복을 위해 준비한 선물이 특별하다는데 기대해도 되겠니?”
“……네!”
슈페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잠시 다른 상념으로 빠졌다.
‘잘할 수 있겠지……?’
아쉽게도 로네악 꽃이 어떤 능력을 지닌 신물인지 밝히는 건 실패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더더욱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킬 다른 타개책이 필요했다.
그 결과, 정화되는 과정을 직접 보여주며 최대한 있어 보이도록 포장할 계획이었다.
이건 카누스가 귀띔해준 아이디어였다.
카누스는 결혼식 때 구경거리가 됐던 경험 때문인지 사자들이 많은 연회는 질색이라며 나오지 않은 참이었다.
여하튼 화단에는 다시 주문한 보랏빛 로네악 꽃들이 가득했다.
‘이 정도 퍼포먼스면 기억엔 단단히 박히겠지.’
게다가 꽃을 처음 들여왔을 때의 목적은 이뤘으니까.
대충 사자들의 소곤거림을 들어보니, 영지 문제에 관심 있는 제법 유능한 파랑새라는 타이틀을 얻는 데에 성공한 듯싶었다.
슈페나의 계획대로 일은 술술 진행되었다.
규모가 커다란 것치곤 즐겁게 노는 게 전부인 연회라서인지 힘든 일은 없었다.
양해를 구하고 연회의 손님들을 정원으로 불러 모은 슈페나는 하얀색 거목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힘들면 말해요.”
졸졸 뒤를 쫓던 리카도르가 의젓하게 그녀의 옆을 지켰다.
그런 그의 미간은 사자들만 느낄수 있는 악취 때문에 살짝 일그러져있었다.
“중화해준다고는 들었지만, 그 효과가 미비하다고 알고 있는데.”
이런 감탄에는 의구심이 깃든 볼멘소리도 군데군데 섞여 있었다.
“보아하니 탈리테를 불어넣었군요. 이건 다른 이들도 할 수 있는거 아닙니까?”
주로 별일도 아닌데 왜 호들갑이 냐는 의견이었다.
예상했던 의문에 슈페나는 일부러 남겨둔 한쪽 구석의 보랏빛 꽃을 응시했다.
그러다가 힐끔 리카도르를 곁눈질했다.
그는 눈치 빠르게 거목에 본인의 탈리테를 주입했다.
하나, 그 쨍한 보라색 꽃잎은 살짝 희미해졌을 뿐 거의 변화가 없었다.
이상하게도 클라이드 나무는 슈페나가 아닌 다른 이의 탈리테엔 잘 반응하지 않았다.
예전에 카누스가 파장 어쩌고저쩌고하면서 했던 이야기가 맞는 듯싶었다.
한편, 사자들은 의아하게 눈을 깜박였다.
“소가주님이 힘을 불어넣었는데도 달라진 게 없군요.”
“그러게요. 제가 한번 해볼까요?”
한 사자가 궁금했던 모양인지 슬그머니 다가가 나무에 제 탈리테를 불어넣었다.
다른 사자들도 하나둘씩 모여들어 탈리테를 흘렸다.
그런데 미동조차 하지 않자, 다들 같은 결론을 내렸다.
“저 작은 마님의 탈리테만 통하는 것 같네요.”
“허허, 확실히 흥미롭습니다.”
쉬이 볼 수 없는 상황에 사자들의 얼굴도 제법 호의적으로 바뀌었다.
“큼.”
제임스처럼 여전히 못마땅해하는 이들도 있긴 했다만.
어쨌든 중요한 일은 무사히 끝마쳤다.
슈페나와 리카도르는 하얗게 물든 꽃을 사자들에게 나누어준 뒤,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왔다.
“방금은 훌륭했단다. 이제 본격적으로 연회를 즐겨야지 않겠니, 아가?”
칸이 기다렸다는 듯 슈페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했다.
“아, 그리고 아들.”
곧이어 칸의 시선은 슈페나의 옆에 붙어있던 리카도르에게로 향했다.
“잠시 연회장 밖에 나갔다 오지 않으련? 오늘 도착한다고 들었는데 영 오지 않아서 걱정이구나.”
칸이 제 아들에게 넌지시 명령했다.
리카도르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살짝 미련이 남은 걸음으로 슈페나에게서 멀어졌다.
슈페나는 면봉이 되어버린 리카도르의 뒤통수를 흘낏거리며 어리 둥절해했다.
‘응? 방금 무슨 대화가 오간 거지?’
슈페나가 얼 타는 사이, 칸은 도움이 될 만한 인맥을 소개해주기 시작했다.
어머님의 손에 이끌려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슈페나는 퍼뜩 무언가를 떠올렸다.
‘리카도르의 누나도 참석한다고 했는데 안 보이네…….’
혹시 마주치면 어떻게 할까,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있었는데 보이지 않아 맥이 빠졌다.
요런 슈페나의 상념은 계속될 수 없었다.
마치 긴장을 풀지 말라 경고하듯, 반대편에서 큰 소음이 났으니.
음식이 가지런히 놓인 기다란 테이블 근처에서 옥신각신 실랑이하는 두 명의 사자 수인.
아무래도 말싸움이 붙은 모양이었다.
“어머님, 제가 가볼게요.”
요리조리 눈알을 굴리던 슈페나는 쭈뼛쭈뼛 어머님한테 이야기했다.
연회의 책임자로서 그냥 두고 볼수는 없지 않은가.
‘리카도르도 아까 연회장을 빠져나간 뒤로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적임자는 그녀밖에 없었다.
슈페나가 소란이 발생한 곳에 발을 디디는 순간, 급기야 한 사자는 음식을 뒤엎었다.
“이럴 거면 때려치워!”
탄탄한 면발을 자랑하는 우윳빛 크림 파스타가 상대방의 왼쪽 뺨을 강타했다.
‘우와, 파스타 싸대기를 실제로 보게 되다니.’
그녀가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그러다 얼른 정신을 부여잡고는 이미 음식물 범벅이 된 그들을 만류했다.
“저기, 먹을 걸로 이러지 마시고 하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서로 언쟁을 벌이던 두 사자는 더욱 격하게 막장소설 속 한 장면을 써내리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스테이크가 빗발쳤다.
‘무슨 피구 하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뭐야.’ 유연하게 음식 잔해를 피해 다니던 슈페나가 울상을 지으며 발만 동동 굴렀다.
그러는 사이, 이 난리통을 구경하던 몇몇 원로 사자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연기라기엔 너무 과한 거 아닙니까?”
“현실감 좀 살리려고 평소 앙숙이었던 둘을 붙여나서 그런지, 진심으로 싸우는 모양인데요?”
그들이 은밀하게 속닥대었다.
원로 사자들은 본디 슈페나의 존재를 그냥 무시해버릴 계획이었다.
슈페나가 연회에서 뱀을 맨손으로 잡는 걸 보기 전까지만 해도.
생각보다 용맹해 보이니, 테스트를 해보자는 게 원로 사자들의 결론이었다.
이건 그 결과물이었고,
“그냥 내버려 두죠, 뭐. 세상에서 싸움 구경이 제일 재미나는데.”
조금 비틀어진 시나리오를 보며 입맛을 다시던 어느 원로 사자가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했다.
“이야, 이 집 쿠키 잘하네.”
다른 이들도 와그작와그작, 버터쿠키를 씹어 먹으며 싸움 현장을 관람했다.
모두의 눈길이 머문 곳에 난감한 표정으로 고심하고 있는 슈페나가 있었다.
‘이능이라도 써서 멈춰야 하나.’
좀 더 멋있는 상황에서 밝히고 싶었는데.
우선 그녀는 다시 한번 평화로운 담화로 상황을 해결하고자 마음먹었다.
‘더는 던질 음식도 남지 않은 것 같아 보이니까.’
아직은 다친 사람도 없지 않은가.
안타깝게도 슈페나는 한 가지를 간과했다.
호승심이 강한 사자들은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싸울 종족이라는 걸.
“아직 한 발 남았다.”
그리 비장하게 뇌까린 사자가 상대방을 향해 좀 전까지만 해도 음식이 담겨있던 접시를 던졌다.
어디선가 비장한 선율의 클래식.
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다만, 문제는….
사자의 손에서 벗어난 그 접시가 애먼 수인에게 날아갔다는 사실이었다.
‘안 돼!’
슈페나는 몰래 이능을 사용해 궤적을 틀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애먼 수인 이 접시를 잡아채 깨트리는 게 더 빨랐다.
“……짜증 나.”
약간은 허스키한 음성이 연회장의 분위기를 날카롭게 갈랐다.
금발의 여성이 유리 파편 때문에 흐르는 피를 닦지도 않고 서늘하게 눈을 번뜩였다.
뭐든 잡아먹을 듯한 냉철한 황금안, 옷을 입었음에도 탄탄히 단련되어있는 게 느껴지는 근육질의 몸.
그리고 무엇보다 사납게 올라간 눈매 때문인지 차가운 이목구비.
절로 오금이 저릴 만한 포스였다.
“리리엘라 님?”
주변에 있던 수인들은 떡 벌어진 입을 손으로 가리며 두려움이 묻어나오는 어조로 말했다.
그녀의 정체는 같은 사자들도 무서워한다는 리리엘라 체드윅이었으니까.
정답게 음식을 주고받으며 몸의 대화를 나누던 사자들도 땅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복종의 의미였다.
“사, 살려주십”
“그게, 저희가 일부러 그러려던게 아니고 다 사정이……….”
그리 애달프게 비는 모습에도 리리엘라의 눈빛은 미동조차 없었다.
터벅터벅, 그녀가 사자들에게로 다가갔다.
그러더니 말도 없이 단번에 두사자의 멱살을 틀어쥐곤 위로 던졌다.
그런 리리엘라의 오른쪽 손목에는 황금빛 오오라가 맺혔다.
이능을 사용한 것이었다.
가련한 사자들은 포물선을 그리며 천장을 뚫고 저 하늘의 별이 될 듯 날아갔다.
한참 뒤에 쿵, 무언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죽진 않았겠지? 신체 능력이 월등한 사자인데.’
살벌한 괴력에 슈페나가 혀를 내둘렀다.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일을 꾸민 원로 사자들은 열심히 모른 척하며 몸을 사렸다.
“아하하, 조용히 입 닫고 즐깁시다.”
“오호호, 무슨 일 있었나요?”
다들 황급히 리리엘라에게서 눈길을 거두곤 슬금슬금 튈 준비를 했다.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38화
‘그럼 뭐 해. 성격이 장난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 다가가냐고!’
마침 로네악 꽃을 이용해 만든 요리가 지척에 널려있었지만, 엄두가 나질 않았다.
괜히 말 걸었다가 저 사자들 꼴날까 봐.
그렇다고 다른 사자한테 다가가 ‘부작용 좀 구경하게 이능 한번 사용해보시겠어요?‘라고 말할 순없지 않은가.
슈페나는 사람 모양의 구멍이 뚫린 동그란 하얀색 천장을 올려다 안 그래도 싸늘한 리리엘라의 표정이 몹시도 살벌해서.
사실 리리엘라는 몹시도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
새 친구한테 잘 보이려고 열심히 꽃단장까지 했는데 이상한 접시던지기범 때문에 피가 나서.
‘파랑새가 힘만 더럽게 센 사자 주제에 피 냄새까지 난다고 나를 싫어하면 어떡해?’
겁쟁이 사자, 리리엘라는 또다시 걱정을 사서 하기 시작했다.
뭐, 이번에는 제법 사실과 가까운 추론이었다.
리리엘라는 서둘러 옷에 피를 닦곤 어깨를 추욱 늘어뜨렸다.
동물화를 했다면 필시 꼬리가 땅에 끌렸을 터였다.
‘아니야. 새 친구는 착할 거야.
생긴 게 귀여우니까.’
개논리였으나, 리리엘라는 긍정적으로 마음을 다잡으려 노력하며 입꼬리를 씨익 끌어올렸다.
그러고는 슈페나에게 말을 걸었다.
“…파랑새.”
문제라면 타인의 눈에는 목숨을 거두러 온 저승사자처럼 보인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옷에 피가 번져있어 더욱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슈페나 또한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라처럼 소심하게 목을 움츠렸다.
암살예고인가.
잔뜩 긴장한 순간, 구세주와 같은 인물이 슈페나 앞에 등장했다.
“찾으러 갔었는데 길이 엇갈렸나 봅니다, 누님.”
리카도르였다.
그는 잘게 떠는 슈페나를 제 뒤로 쏙 숨기곤 자연스레 리리엘라를 상대했다.
아직 어린데도 키가 커서인지 리카도르는 제법 듬직했다.
슈페나가 그러한 리카도르의 등을 방패 삼아 빼꼼 고개만 내밀었다.
“엇갈렸다고?”
가로로 찢어진 리리엘라의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이래 봬도 반색하는 표정이었다.
모자라고 귀염성 따윈 없는 남동생이지만, 마중을 나와주었다는 것에 기분이 좋아진 덕분이었다.
리리엘라가 뻐근하지 않은 왼손으로 괜스레 볼을 긁적거리다 리카도르를 쿡쿡 찔렀다.
“소개, 안 해?”
슈페나와 정식으로 인사를 하게 해달라는 신호였다.
그를 찰떡같이 알아들은 리카도르는 슬쩍 몸을 틀곤 정중하게 슈페나에게 손짓했다.
그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얘기는 엄밀히 따지자면 앞담에 가까웠다.
“이쪽은 제 생물학적 누나, 리리 엘라 체드윅입니다. 얼굴은 저래도 남을 쉽게 해치는 성격은 아닐 거예요.”
가정법인데?
이미 다른 사자가 하늘의 별이 되어버릴 뻔한 걸 봤는데?
슈페나의 머릿속이 물음표로 뒤덮였다.
그렇지만 내색하지 않고 생존용 웃음을 입가에 장착했다.
그러는 동안, 리카도르의 소개는 계속 이어졌다.
“이쪽은 슈페나입니다.”
“응.”
귀여워.
리리엘라가 홀린 듯이 혼잣말했다.
실제로 보게 된 파랑새는 생각보다도 깜찍했다.
윤기가 흐르는 하늘색 머리칼, 호기심이 많아 보여 절로 사랑스러운 밤색 눈동자, 그리고 무엇보다…….
꼬집으면 기분 좋을 것 같은 부들부들하고 오동통한 볼살.
‘솜사탕처럼 폭신폭신한 부라타치즈 같아.’
느닷없이 생각난 먹을거리에 리리엘라는 입맛을 다셨다.
그 모습을 본 슈페나는 당연하게도 화들짝 쫄았다.
‘내가 야들야들하게 생겼나?’
보기 좋게 살이 오른 슈페나의 토실토실한 두 뺨이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아니야. 저 사자는 내 시누이다.
가족이다. 잘 보여야 한다.’
슈페나는 가출하려는 정신줄을 부여잡곤 꾸벅 허리를 숙였다.
“아, 안녕하세요.”
“으응.”
리리엘라도 어색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슈페나는 용기를 내어 먼저 물었다.
“그, 근데 제가 뭐라고 부르면 될까요?”
“……이름, 이름으로 불러.”
리리엘라가 개미만 한 목소리로 답했다.
슈페나는 빠릿빠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리리엘라 언니.”
리리엘라와 최대한 친하게 지내고 싶었으니까.
적어도 서로 껄끄러운 관계가 되고 싶진 않았다. 한집에서 부대껴살아야 하는 처지인걸.
‘근데 언니는 좀 오버였나?’
이러한 걱정이 들 정도로 리리엘 라의 표정은 험악하기 그지없었다.
슈페나가 까치발을 들곤 리카도 르의 귀에 속삭이듯 말을 걸었다.
“내가 뭐 잘못했어요?”
리카도르는 똑같이 속살거리는 미성으로 담담하게 대꾸했다.
“기분 좋을 때 짓는 표정입니다.”
“저게요?”
슈페나의 말끝이 저절로 높아졌다.
누가 기분 좋을 때 상대방을 죽일 기세로 노려보나 싶어서.
파랑새가 나를 이름으로 불러줬어! 게다가 언니래!’
의외로 여기, 기쁠수록 안면근육이 험악해지는 수인도 있었다.
‘다음에 애칭으로 불러달라고 해야지.’
심지어 단계까지 착실히 밟아가려는 야망가였다.
나름 잘 알 만한 가족이 그렇다고 하니 슈페나는 어쩔 수 없이 수긍했다.
‘아, 참. 이능 부작용에 로네악꽃이 효과가 있을지 궁금한데.’
슈페나는 아까보다는 많이 나아진 듯한 리리엘라의 팔을 보며 머리를 굴렸다.
‘리리엘라 언니의 상처가 자연 치유되기 전에 시도해봐야겠지.’
그리고는 비장한 자세로 리리엘 라에게 이야기 했다.
“혹시 아까 이능을 쓰셔서 손목에 조금 무리가 가신 거 아니에요?”
그 물음에 리리엘라의 동공이 지진을 일으켰다.
세심한 염려에 감동한 거였다.
“나 튼튼해. 안 아파.”
리리엘라는 빙그레 웃으며 튼튼함을 증명하고자 팔에 황금빛 이 능을 둘렀다.
그러더니 옆에 있던 테이블 다리를 한 손으로 우그러뜨렸다.
리리엘라의 손이 육안으로도 확인될 만큼 봉긋하게 부풀어 올랐다.
사실 리리엘라는 강한 대신, 남들과는 달리 바로 부작용이 나타나는 체질이었다.
그만큼 아픔도 잘 못 느끼고, 자가회복력이 뛰어나 빠르면 수 분내에 괜찮아졌지만.
그걸 알 리 없던 슈페나가 어두워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완전 의원에 가야 할 것처럼 보이는데…….”
그 혼잣말을 들은 리카도르는 피식 실소했다.
그러곤 쉿, 눈감아주자는 듯 손가락을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아…….”
하긴 본인이 괜찮다는데 말렸다.
가 저 꼴 나면 큰일이지.
그래도 리리엘라의 낯이 은근 뿌듯한 듯해서 다행이었다.
슈페나는 은근슬쩍 본론을 꺼내들었다.
“저… 리리엘라 언니?”
“응?”
“이거 마셔보실래요? 몸에 좋은 거예요.”
슈페나가 멀쩡한 주변 테이블에 놓인 로네악 꽃 열매 주스를 가져와 내밀었다.
리리엘라는 이상하게 꾸물거리다가 이내, 단 하나의 의문만을 던졌다.
“……써?”
“아뇨. 달아요.”
리리엘라의 눈매가 유순하게 풀어졌다.
‘친절해! 아마 파랑새가 옆집 악어새보다 더 상냥할 거야!’
그녀는 얌전히 주스를 받아들곤 원샷했다.
꿀꺽꿀꺽, 음료가 목 뒤로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슈페나의 가정대로 놀라운 효과가 나타났다.
“…어?”
동요가 묻어나오는 리리엘라의 외마디 탄성.
검붉게 부르튼 팔이 치료 이능이라도 건 듯 마법처럼 멀쩡해지는 게 아닌가.
어안이 벙벙한 상황이었다.
‘와, 정말 이거였다고? 여태껏 계속 헛다리를 짚은 거였네.’
슈페나는 이때다 싶어 모두가 들을 수 있을 만큼 커다란 목소리로 설명했다.
“실은! 로네악 꽃이 치료계열의 능력을 지녔거든요.”
곁에 있던 리카도르도 눈치껏 그녀를 거들었다.
“부인이 설화와 꽃을 연구했는데, 로네악 꽃은 치료의 힘을 지닌 신물일 거란 결론이 나왔었죠.”
“네, 그래서 일부러 연회의 선물로 가져온 거였어요.”
슈페나도 잽싸게 말을 맞추곤 몰래 리카도르와 하이파이브를 했다.
리리엘라는 다 마신 컵을 바라보며 놀라움에 입만 벙긋거렸다.
“정말?”
“참고로 출처는 고대문헌입니다.”
슈페나가 야무지게 덧붙였다.
그 대화는 제법 효과가 있는 듯했다.
탈주닌자가 되기 위해 한데 뭉쳐서 리리엘라만 주시하고 있던 사자들이 웅성대었다.
“….. 방금 진짜로 이능의 부작용이 치료된 거 봤어요?”
“호오, 호오, 호오.”
사자들은 이런 건 예상 못 했는지 그저 감탄만 내뱉었다.
이윽고, 그 감탄은 구매 욕구로 번져나갔다.
“어머, 저건 꼭 사야 해!”
“어떻게 구할 수 있을까요? 꼭 갖고 싶은데.”
이능의 부작용을 치유할 수 있는 꽃이라니, 사자에겐 꼭 필요한 거였다.
사자들의 눈은 무조건 득템을 해야겠다는 의지로 활활 불타올랐다.
그건 슈페나를 시험하려 했던 원로 사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험, 저 치료제는 우리 아들내미 이능 수련에 쓸모 있을 것 같구먼.”
시종일관 슈페나에 대해 박했던 제임스가 한 수 접어 관심을 드러냈다.
“엣헴, 엣헴. 그렇다 해서 저 파랑새를 작은 마님으로 완전히 받아들인 건 아니고.”
입덕부정기였다.
아무튼 슈페나는 밀려드는 사자들의 관심 속에 파묻히게 되었다.
종내에는 정화된 로네악 꽃을 얻기 위한 대기자 명단을 받게 될 정도로.
한편,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칸도 속으로 무척이나 경탄했다.
‘정말이지 특별한 선물이군.’
로네악 꽃과 연관된 설화는 칸도 익히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실용적이지도 않고 악취까지 나는 꽃이라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었다.
정화까지 해가면서 활용할 생각은 더더욱 하지 못했다.
그건 다른 사자들도 마찬가지였기에 이리 모두 놀라는 것일 터.
‘참으로도 획기적인 발상이야.’
며늘아가가 가주인 그녀조차 짐작하지 못한 선물을 당당히 선보인 게 자랑스러웠다.
더구나 사자들의 이능 부작용을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신물이라니!
앞으로 사자들의 미래에 영향을 줄 수도 있는 엄청난 일이었다.
‘생각해보니 며늘아가가 소싯적 팔팔할 때의 나를 닮은 것 같구나.’
칸은 흐뭇하게 입매를 끌어올리며 크흠, 헛기침했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주변 사자들에게 자랑을 흘렸다.
“우리 며늘아가가 이런 수인일세.”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39화
“허허허, 체드윅 가에 인복이 넘치나 봅니다. 감축드립니다, 가주님!”
사자들은 아카데미 교수의 자식 자랑에 딸랑딸랑 맞장구치는 조교가 된 기분으로 부리나케 손뼉을 쳤다.
‘리리엘라도 며늘아가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 참 다행이군.’
칸의 눈길은 한창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며늘아가한테로 향했다.
곧이어 그 눈빛이 오랜만에 보는 딸, 리리엘라에게까지 닿았을 때.
칸은 차마 다가가진 못한 채 어정쩡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 시각.
리리엘라는 칸이 본 대로 슈페나와 수줍게 얘기하고 있었다.
“꽃, 나도 사갈 수 있을까?”
대화의 화제는 로네악 꽃에 관한 내용이었다.
“네! 얼마든지요.”
고개를 끄덕인 슈페나가 아부성발언도 더했다.
“특별히 가족 할인 해드릴게요.”
기분 좋아지라고 친 멘트에도 리리엘라는 멀뚱멀뚱 어정쩡한 반응만 보였다.
‘혹시 가족이란 말이 거슬렸나?’
슈페나가 말실수라도 한 건가 고민하고 있던 찰나, 리리엘라는 입술을 달싹였다.
“있잖아.”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의 것이었다.
“나도 너, 이름으로 불러도 돼?”
“당연하죠!”
슈페나는 해맑게 눈을 사르르 접어 웃었다.
그런데….
‘이런. 괜히 된다고 했나?’
슈페나는 잠시 갈등했다.
돌연 리리엘라가 음산하게 마주웃으며 들고 있던 컵을 손가락 하나만으로 반쪽 내어버렸으니까.
리리엘라는 또다시 피가 흐르는 제 손을 수습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머뭇머뭇 얘기했다.
“일주일 뒤, 내 생일. 기억해줘.”
방금까지만 해도 나름 신이 났던 리리엘라의 표정이 스르륵 자신감 없게 풀 죽었다.
그녀에게 생일은 사실 남들과는 조금 다른 의미가 아니던가.
그래도 이번만큼은 새로이 가족이 된 슈페나에게 축하받으며 다함께 생일을 보내고 싶었다.
‘이젠 나도 괜찮지 않을까.’
리리엘라가 속으로 고민하는 사이, 슈페나 또한 나름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얼핏 연회 다음이 누군가의 생일이라 듣긴 했는데, 그게 리카도르의 누나였다니 ….….’
생일날 상다리가 휘어질 만한 선물을 가져오지 않으면 끔살하겠다는 뜻인가.
‘철저히 준비해야겠어.’
슈페나가 마른침을 삼키곤 전투를 앞둔 군인처럼 결연한 마음가짐으로 대답했다.
“네! 그럼 생일파티에 저도 초대 해주시는 거죠?”
“응, 슈페나.”
덩달아 비장해진 리리엘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연회가 마무리되었다.
***
그다음 날부터 슈페나는 아주 바쁜 일상을 보냈다.
사자 수인들이 로네악 꽃으로 만는 치료제를 사가겠다며 무수히 많은 러브콜을 보내왔으니까.
클라이드 나무에 통하는 탈리테는 슈페나의 것밖에 없어서, 더 호기심을 가지고 몰려든 눈치였다.
‘이것도 생각해보면 참 이상하단 말이야.’
카누스는 내가 나무와 비슷한 파장의 탈리테를 가졌다고 그랬었지.
그때는 그냥 꽃이 정화되는 과정이 신기해서 넘어갔었는데 한번 알아보는 것도 좋을 듯싶었다.
‘일단 밀린 주문부터 마무리하고’예약이 폭주한 바람에 로네악 꽃을 더욱 사들여 정화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힘들지만 그럴수록 통장 잔고는 차곡차곡 쌓이겠지!’
물론 수익 중 일부는 일해주기로한 사용인들에게 나누어줘야 했다.
정화작업을 제외한 나머지 잡무는 하인들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으니.
-누나, 탈리테 불어넣으라고 한건 나인데 뭐 없어?
더구나 제 몫을 주장하는 영악한 카누스 때문에 삥까지 뜯긴 처지였다.
어쨌든 스스로 자립할 능력이 생긴 것 같아 퍽 뿌듯했다.
‘지금은 동네 구멍가게 느낌이지만, 아예 더 크게 일을 벌여보는 것도 좋을 텐데.’
사업아이템으로도 적격이지 않은가.
하나, 인력이 부족해서 힘들었다.
하인들도 본래의 업무가 있었고, 새로 뽑기에 여러모로 걸리는 문제가 많았으니까.
‘어머님한테 허락도 따로 받아야 할 테고, 까다롭게 면접도 준비해야 하고, 뽑으면 교육도 새로 해야 하는데.’
너무 복잡했다.
일단은 이 정도로 만족하는 수밖에.
‘아직은 초창기니까 차차 방법을 찾으면 될 거야.’
그나저나 그것보다 더 급하고 중요한 일이 남아있었다.
바로 며칠 후가 리리엘라의 생일이었으므로, 리리엘라의 생일은 급하게 준비되었다.
여태까진 생일을 집에서 보낸 적이 드물었다나 뭐라나.
‘연회 이후에 어머님이 리리엘라 언니와 따로 이야기를 나눈 것 같던데.’
서로 아주 어색해 보였었지.
어머님은 요상하게도 눈가가 촉촉했고, 여하튼 리리엘라 언니의 생일은 단출하게 가족들만 모여 치르기로 결정되었다.
문제는 생일선물을 직접 골라야 한다는 점이었다.
“리카도르, 누님분은 뭘 좋아해요?”
슈페나는 리카도르에게 도움을 청했다.
딱히 친해 보이진 않았으나 가족인 만큼 더 잘 알고 있을 게 아닌가.
리카도르가 대수롭지 않게 답을 내놓았다.
“부인이 붉은 끈을 선물 매듭처럼 머리에 둘러도 기꺼워할 것 같습니다만.”
“.……진심으로 하는 소리예요?”
슈페나는 씨익, 저승사자 미소를 짓던 리리엘라를 떠올리며 바들바들 떨었다.
그 험악한 표정이 실은 기분 좋은 모습이라고 했던가.
연회 때 들었던 리카도르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역시 농담이겠지?’
슈페나는 약간 긴장감이 서린 낯으로 입술을 오므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리카도르가 제안했다.
“그렇게 고민되면 같이 나가죠?
도와줄 테니까.”
“어딜요?”
“밖에요.”
그 이야기에 슈페나는 도로록 눈알을 굴렸다.
‘이거 혹시 친구라이트?’
그간 슈페나가 뭐 좀 같이 하자며 꼬드긴 적은 많았어도, 지금처럼 리카도르가 먼저 손을 내민 적은 드물었다.
그러니까 이건 좋은 징조일 터.
슈페나는 밝게 마구마구 고개를 끄덕거렸다.
“완전 좋아요!”
그때, 어디선가 나타난 카누스도 방방 꼬리를 흔들며 끼어들었다.
-나도 같이 가!
뱀 특유의 까만 눈이 반짝반짝 빛을 발했다. 나갈 생각에 들뜬모습이었다.
아, 이런 얼굴을 보니까 데려가기 싫은데.
꿈틀거리는 청개구리 심보에 못내 고민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흐음.”
-약속 잊었어?
그에 카누스는 옛일을 들먹였다.
카누스가 클라이드 나무에 탈리 테를 불어넣으면 된다는 걸 알려 주었을 때, 그 대가로 몇 가지 구두 약속을 했었지.
그중에는 바깥 구경도 포함되어 있었고.
슈페나는 우선 시치미를 떼었다.
“약속? 난 그런 기억이 안 나는”
-누나, 새대가리야?
카누스는 탈룰라를 시전했다.
“파랑새인 부모 밑에서 태어났을 테니까 당연히 새겠지 ……”
얘가 나름 아픈 상처를 찌르네.
슈페나는 짐짓 한쪽 눈썹을 추켜 세우곤 카누스를 째려보았다.
뱀술을 넘어서 뱀꼬치를 만들어버릴 듯한 눈빛에 카누스가 소심하게 말꼬리를 늘였다.
– 아니이, 나는 바깥 공기 좀 쐐고 싶어서…
한 번만 봐준다.
결국, 카누스와의 동행이 확정되었다.
***
여러 풍경이 빠르게 차창에 맺히는 증기자동차 안.
카누스는 꼬리로 슈페나에게 장난을 치며 놀고 있었다.
“저 새끼 뱀은 버려도 될 것 같은데.”
리카도르가 그런 카누스를 보며 냉정하게 뇌까렸다.
무언가 마뜩잖은 모양이었다.
-아, 왜 이래. 누나도 허락했는 데, 그렇지?
카누스는 슈페나의 무릎 위에서 꼬리콥터를 뱅글뱅글 돌리며 유순한 척을 했다.
-우웅, 왜 구랭.
망할 애교는 덤이었다.
리카도르의 푸른 눈이 지극히도 자연스레 식어버렸다.
그리 티격태격하다 보니, 시가지에는 빠르게 도착했다.
리카도르의 에스코트를 받아 차에서 내린 슈페나가 이리저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달콤한 디저트가 즐비한 빵집, 좋은 원단으로 만든 옷들이 진열된 부티크, 장인이 한 땀 한 땀 정성을 쏟아 제작한 인형 가게.
선택지가 참 많았다.
-나는 참고로 저 딸기 바움쿠헨먹고 싶어.
어느새 그녀의 하얀 복조리 가방에 자리를 잡은 꼬마 뱀이 종알대었다.
슈페나는 늘 그랬듯이 카누스의 말을 흘려 넘기곤 흐음, 턱을 괴었다.
“인형..… 같은 걸 선호할 타입은 아닌 듯하고.”
“좋아할 것 같은데요?”
그 혼잣말을 들은 리카도르가 의외로 긍정했다.
“이런 걸요?”
슈페나는 천연덕스레 호러 컨셉의 인형을 가리켰다.
그것도 핏자국이 덕지덕지 괴이 하게 묻어있는 드라큘라로.
“아뇨. 그런 거 말고.”
그가 까딱 고갯짓으로 그 옆에 진열되어있는 다른 귀여운 인형들을 가리켰다.
개중에는 연분홍빛 에이프런을 두른 깜찍한 파랑새 인형도 있었다.
‘오, 기분이 좀 묘한데?’
뜻밖의 동족을 본 슈페나의 눈이동그랗게 뜨였다.
그 표정을 관심의 표시라고 해석한 리카도르는 정중한 꼬마신사처럼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분명 마음에 들어 할 겁니다.”
“정말이죠?”
그녀가 꽤나 익숙하게 그 손을 맞잡았다. 살짝 굳은살이 박인 피부의 온기가 따뜻하게 스며들었다.
슈페나가 리카도르를 끌곤 와다 다다, 인형 공방으로 달려 나갔다.
-아……. 골 울려.
그 사이에서 죽어 나가는 건, 멀미에 시달리는 카누스뿐이었다.
아무튼 인형 가게에 도착한 그들은 연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가게엔 재미난 게 많았다.
‘과연 근엄하고 무시무시한 맹수인 사자가 이런 걸 받고 기뻐할까?’
이런 의문이 들긴 했지만.
물건을 고르던 슈페나의 표정이 솔깃해졌다.
가게 안쪽에는 각종 이능이 녹아들어 있는 인형도 진열되어 있었으니까.
평범한 곳은 아닌 듯했다.
‘이능을 다른 사물에도 적용할 수 있는 건가?’
그러고 보니 무언가가 떠올랐다.
독수리 가문에 있었을 때, 첫째 언니가 옆 동네 악어 수인의 이능을 담은 반지를 샀다고 자랑한 적이 있었지.
무슨 진실의 이능이랬나.
덕분에 언니한테 구라쳤던 걸 들켜서 혼난 경험이 있었다.
아주 뼈아픈 기억이었지.
‘하도 약이 올라서, 내가 그때 언니한테 물어봤던 것 같은데.’
도대체 어떻게 타 수인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거냐고.
더는 기억이 나지 않는 걸로 봐선 언니가 알려주지 않았던 게 분명했다.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건가?’
고유 이능인 염력을 다른 물건에 불어넣을 수 있다면 편할 텐데.
‘특히 로네악 꽃을 대량재배할 때 말이야.’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40화
딱딱 이능으로 물을 주고 관리하면 잘 기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럼 지금처럼 인력 문제로 골머리를 앓지 않아도 될 테고.
가게 주인에게 넌지시 물어봤으나, 돌아온 건 영업기밀이라는 답변이 전부였다.
‘원작에서도 본 것 같은데.’
무언가 기시감이 들었다.
하지만 딱히 떠오르지 않아 그냥 넘기곤 대형사이즈의 귀여운 사자 인형을 품에 안았다.
리리엘라 언니에게 줄 선물이었다.
‘설마 샌드백으로 쓰진 않겠지?’
리카도르가 이걸로 고르는 게 나을 거라고 해서 집은 거긴 하지만 반신반의했다.
한편, 카누스는 자신과 똑같이 생긴 뱀 인형을 꼬리로 칭칭 감고는 슈페나를 올려다보았다.
– 나 아직 일곱 짤이라서 이런 거 넘모 조아!
그녀가 멀뚱멀뚱 딴청을 피웠다.
그 반응에 카누스는 단단히 못을 박았다.
– 좋다고,
“왜 날 보고 말해?”
-왜겠어?
시장 가서 엄마한테 장난감 사달라는 꼬맹이도 아니고, 카누스의 생떼에 결국 슈페나는 못 이기는 척 인형을 사주었다.
‘로네악 꽃 덕분에 돈 좀 만지게 생겼으니 한 번만 사치하지, 뭐.’
그러는 김에 다른 사람들의 것도 같이 골랐다.
어머님한테는 인형 대신 고풍스러운 수제 브로치를, 리카도르한테는 꼬꼬마 백사자 인형을.
얌전히 인형을 받아든 리카도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게 설마 나라는 겁니까?”
“왜요? 귀여운데.”
“누가 보면 고양이라고 할 것 같습니다만.”
리카도르는 무심하게 말하면서도 싫은 건 아닌지 인형을 꼬옥 제 품에 안았다.
그 이중적인 자태에 슈페나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백사자 인형은 언뜻 고양이처럼 생긴 것 같기도 하네.’
문득 일전에 리카도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숲에서 사자 한 마리 구해준 적 없냐던.
‘에이, 설마.’
원래 설마가 수인 잡는 법인데.
왜인지 모르게 찝찝했으나, 잔금을 치르곤 가게를 빠져나왔다.
‘오랜만에 나온 건데 이대로 가긴 아쉽지.’
슈페나는 리카도르를 쳐다보며 더 놀자는 뜻으로 싱긋 미소 지었다.
그렇게 그들은 근처 빵집에서 샌드위치를 산 뒤, 바로 옆에 있는 강변에 돗자리를 펼쳤다.
슈페나는 분홍색 앞치마를 맨 파랑새 인형을, 리카도르는 노란색 앞치마를 맨 백사자 인형을 들고선 자리에 앉았다.
누가 봐도 사이좋게 소풍 나온 같은 반 짝꿍처럼 닮은 모습이었다.
강가의 바람이 살랑살랑 두 뺨을 간질였다.
상큼한 샌드위치의 채소 냄새도 코끝을 맴돌았다.
고개를 위로 치켜든 채, 두 눈을 감고 있던 슈페나가 이야기했다.
“바람 진짜 시원하다. 그죠?”
“네, 뭐.”
리카도르는 선선한 미소를 입가에 걸치곤 짧게 긍정했다.
‘이 정도면 솔직히 친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같이 놀러 나가고, 온종일 수다 떨고, 이렇게 간식도 같이 먹는데?
더구나 요즘 리카도르의 반응도 전보다 훨씬 호의적으로 변하지 않았던가.
‘좀 더 친한 척해볼까?’
슈페나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카누스가 천진하게 끼어드는 바람에 실패했지만.
-남 생일선물 사는 게 이렇게 재밌을 줄은 몰랐네.
쟤는 눈치가 없어요.
슈페나는 속으로 툴툴대면서도 맞장구쳐주었다.
“그러게.”
뱀 인형을 칭칭 감으며 행복해하는 카누스의 모습을 보니 도저히 눈치를 줄 수가 없었다.
-나는 맨날 생일선물로 책만 받았는데, 인형도 나쁘진 않은 것 같아!
생일 이야기를 조잘조잘하던 카누스가 돌연 슈페나에게 질문했다.
-근데 누나는 생일 언제야? 난초봄이라서 이미 지나버렸는데.
슈페나가 새치름하게 대꾸했다.
“생일? 모르는데?”
-그걸 왜 몰라?
카누스는 악의 없이 순수한 얼굴로 천진하게 되받아쳤다.
‘엄마도 없고 아빠도 없으니까.’
독수리 가문에 얹혀사는 천덕꾸러기한테 생일 따위 있을 리가.
그나저나 어느 파랑새가 간 크게 독수리들에게 알을 두고 갔는지 아직도 미스터리였다.
성격 더러운 독수리들이 소동물인 파랑새를 버리지 않고 가문에 입적시킨 것도 의아했고.
‘맘껏 구박할 대상이 필요해서 그랬던 건 아니겠지.’
슈페나는 흠, 작게 숨을 내쉬곤 상념을 갈무리했다.
하여간 이런 사실을 카누스가 알리 없지 않은가.
‘모르고 한 말인데 뭐라 할 수도 없고.’
그다지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생일 같은 거 없이 산 세월이 벌써 14년인데.
가끔 거하게 생일파티를 벌이는 언니오빠들을 볼 때면 부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으나 그걸로 끝이었다.
‘난 정말 아무렇지 않아.’
슈페나가 그리 되뇌며 무던하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래도 가을쯤이라는 건 알거든.”
‘호적상 아버지 말로는 그즈음에 내가 태어났다고 그랬으니까.’ 말을 마친 슈페나는 샌드위치를 한 입 크게 베어 물고는 무릎을 세워 두 손으로 끌어안았다.
리카도르가 시무룩한 기색의 그녀를 힐끔 곁눈질했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는 작게 균열이 졌다.
리카도르가 평소보다 탁해진 듯한 미성으로 카누스를 나무랐다.
“내 부인한테서 관심 꺼, 새끼 뱀.”
-그럼 형아는 생일, 언젠데?
“나도 몰라.”
그는 여상스레 어깨를 으쓱이며 슈페나와 똑같은 답을 입에 담았다.
슈페나는 멍하니 그런 리카도르를 응시하다가 이내 속눈썹을 드리웠다.
‘이 정도면 친구 하자는 건데?’
뭔가 편을 들어주는 것 같아서 기분이 이상해졌으니까.
– 둘 다 신비주의야, 뭐야.
무언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눈알을 굴리던 카누스는 괜스레 툴툴대었다.
그러자 리카도르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슈페나에게 눈짓했다.
“저건 그냥 여기 버리고 가는 게 어떻습니까?”
“확실히 구미가 당기네요.”
그녀는 명랑하게 맞장구쳤다.
그러면서 카누스만 놔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리카도르의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아니야! 버리지 마! 내가 미아내!
카누스는 엉엉 울상을 지으며 부리나케 그 둘의 뒤를 쫓았다.
오랜만의 바깥나들이가 끝이 났다.
그리고 리리엘라의 생일은 코앞으로 다가왔다.
***
리리엘라의 생일 하루 전, 오후.
저택의 분위기는 묘하게 절제된 느낌을 풍기며 들떠있었다.
‘리리엘라 언니가 저택에서 생일을 보내는 게 근 7년 만이랬나.’
제인이 알려준 이야기였다.
아무리 밖돌이라도 생일조차 걸 렀었다니 조금 기이했다.
역시 로판 남주네 집안이라 뭔가 사정이 있는 건가, 하는 합리적인 의구심이 들 정도로, 리리엘라에게 줄 인형을 포장하고 있던 슈페나가 입술을 댓 발내밀고는 중얼거렸다.
“뭔가 이상하단 말이야.”
어머님과 리리엘라 언니의 관계는 척 보기에도 기묘했으니까.
서로서로 과할 만큼 눈치를 보는 듯한 느낌.
오랜만에 만나는 가족이라 그렇다기엔 너무 조심스러워 보였다.
꼭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던 것처럼.
슈페나는 본인 집무실 방 책상에 기대어 말랑말랑한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내일 아침이 생일이라서인지 더욱 궁금해졌다.
리카도르도 그 분위기가 익숙한 듯 뭔가 알고 있는 눈치였으니까.
‘곧 어머님이랑 티타임 시간인데 은근슬쩍 물어볼까?’
아냐. 남의 가정사엔 신경 쓰지 말랬어.
내 일에나 집중하자.
애써 잡념을 몰아낸 슈페나가 방 한구석에 놓여있는 선물박스를 가져왔다.
그리고는 예쁜 빨강색 리본으로 묶은 인형과 귀여운 카드를 그 안에다 넣었다.
‘형형색색 색연필로 꾸민 편지는 덤이라구!’
리리엘라에게 잘 보여 친해질 계획이었다.
연회 이후로 쭈뼛쭈뼛 이야기를 나눠보니 좀 무섭긴 해도 그리 나쁜 수인 같지는 않아서.
그때, 똑똑 노크소리와 함께 귀에 익은 음성이 머릿속을 비집고 파고들었다.
-우리 왔어!
아주 사자 집안이 지네 집 안방이지.
슈페나는 짐짓 혀를 차며 문을 열어주었다.
그런데 문 앞에 서 있는 건 카누스만이 아니었다.
“……안녕, 슈페나?”
짙은 남청색 옷을 입어서인지 더욱 으스스해 보이는 리리엘라도 함께였다.
-리리엘라 누나랑 오늘 누나 방에서 놀기로 했는데, 누나도 올래?
흡사 친구들이 집에 막무가내로 쳐들어온 상황이었다.
거절하겠다는 선택지는 없는 거니?
당사자의 의지 따윈 없는 막무가 내에 슈페나가 두 손 두발 다 들고 별수 없이 길을 내어줬다.
“잠깐이라면 괜찮아…요.”
리리엘라를 의식한 슈페나는 어색하게 말을 높이며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호기롭게 들어온 그들은 정작 친구 집에 처음 온 사람처럼 두리번거렸다.
“우와.”
이건 리리엘라의 순수한 감탄사였고, -뭐야, 인테리어가 묘하게 달라진 것 같은데? 더 깔끔해졌네.
요건 카누스 나름의 칭찬이었다.
그 둘은 그새 친해졌는지 합을 맞추어 수군수군 수다를 떨었다.
-이 가구는 처음 보는걸? 풍수지 리에 신경 썼나 봐. 돈 많이 들어오겠어.
“응. 소녀소녀하다. 귀여워.”
슈페나는 그 모습을 보며 의식의 흐름에 정신을 맡겼다.
‘역시 맹수는 맹수끼리 노는 건가.’
카누스는 어떻게 리리엘라의 카리스마에 쫄지 않고 대화할 수 있는지 신기했다.
뭐, 워낙 약삭빠르고 넉살 좋은 성격이라 이해는 되었지만.
‘일단 손님이니 차라도 대접해야 하나?’
슈페나는 설렁줄을 당겨 제인에게 테이블 세팅을 부탁했다.
급조된 손님맞이가 이뤄질 무렵, 맹수다운 눈썰미를 지닌 리리엘라가 선물상자에 관심을 보였다.
“근데, 저거 뭐야?”
누가 봐도 선물이라는 듯 화려한 포장과 커다란 크기의 상자.
리리엘라의 안면근육이 점차 통제를 잃고 씰룩거렸다.
‘설마 내 선물?’
그녀가 흐뭇하게 번지는 미소를 참고자 애써 자신의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날카로운 사자의 송곳니에 입술이 짓이겨지고 피가 흘렀다.
“헉.”
슈페나는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야말로 뱀파이어라고 봐도 무방한 외양이 되어버린 게 아닌가.
-와, 살기 장난 아니다.
겁 없이 룰루랄라 꼬물거리던 카누스마저 놀랄 지경이었다.
‘기분 좋아.’
그렇지만 리리엘라는 한껏 흥이 오른 상태였다.
그 신이 난 기세를 타고 그녀가 음음음, 콧노래 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다 돌연 부끄러움에 말끝을 흐렸다.
“나, 생일선물 너무 오랜만에 받아봐…….”
리리엘라는 시선을 내리깔곤 저도 모르게 헤벌쭉 잇몸미소를 개장했다.
그동안은 딱히 생일을 챙기지 않았다고 그랬지.
‘원작에서는 어땠었지?’
불현듯 묘한 기시감이 슈페나의 머릿속을 잠식할 무렵, 리리엘라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좋아.”
허스키한 목소리 탓인지 스산하게 울려 퍼지는 짧은 문장.
반어법이지, 저거?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41화
식은땀이 흐를 것 같았으나, 슈페나는 아닌 척 시치미를 떼었다.
“선물인 거, 들켰어요?”
“그래도 내용물은 몰라.”
리리엘라는 짐짓 어른스레 위로 했다.
그에 슈페나가 발랄하게 받아치고는 내심 궁금했던 점을 슬쩍 찔러보았다.
“내일 알 수 있을 거예요. 근데 언니는 생일 잘 안 챙기는 타입이에요? 저택에서 보내는 건 오랜만이라고 하길래.”
슈페나가 힐끗 리리엘라의 얼굴을 살폈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건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 리리엘 라의 낯빛.
‘괜히 물어본 건가?’
슈페나가 서둘러 수습을 시도했다.
“실례였다면 죄송해요, 언니. 말안 하셔도 괜찮아요!”
그러나 리리엘라의 표정은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무언가 골몰히 생각하는 것 같기도, 불안해하는 것 같기도 한 모습이었다.
리리엘라가 초점이 잡히지 않은 눈으로 고해성사를 하듯 저도 모르게 소곤소곤 이야기했다.
“생일날이 되면 항상 불행해지니까. 저택에 있으면 다른 사람들도 그럴 테니까.”
“네?”
누군가의 호응을 바라고 내뱉은 말은 아닌 듯했다.
리리엘라는 슈페나의 반문에도 답하지 않고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현듯 또 한 번 겁이 난 탓이었다.
새로운 가족이 된 파랑새를 보고 싶다는, 들뜬 마음 하나로 저택에 귀환했지만 두려워졌다.
혹시나 이 집에서 생일을 보내게 되면 슈페나도 불행해질까 봐.
‘그간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극복했다고 생각했는데.’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아닌 건가.
리리엘라의 낯이 서글퍼졌다.
“이만, 갈게. 슈페나.”
리리엘라는 의식적으로 히죽 입매를 끌어올렸다.
그러면서 작별 인사를 건넸다.
갑작스럽게 처진 자신의 태도로 슈페나가 상처받는 건 원하지 않았으니.
이윽고, 쾅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리리엘라가 떠나갔다.
리리엘라의 깊은 배려를 알 리 없던 슈페나는 자책했다.
“내가 큰 실수를 했나 봐…….”
– 방금 그거 분명히 살인 예고용 미소였어, 누나.
카누스는 눈치도 없이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해대었다.
리리엘라의 마지막 웃음이 마음에 걸렸다.
“난 언니 좀 쫓아가 볼게. 카누스너는 놀고 있어.”
슈페나가 빠르게 리리엘라의 뒤를 따랐다.
‘분명 여기로 간 것 같은데.’
어찌나 빠른지 도통 찾을 수가없었다.
하인들에게 물어물어 길을 재촉한 결과, 리리엘라가 향했을 거라 추측되는 곳은 어머님의 집무실이었다.
‘어? 문이 열려있네?’
평상시 꽉 닫힌 집무실의 문이 열려있었다.
기묘한 확신이 들었다.
리리엘라 언니가 이곳에 있을 것 같다는.
그리고 그건 정답이었다.
“이만 떠나보겠습니다, 어머니.”
떠나겠다고?
열린 문 틈새로 귀를 가져다 댄 슈페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슈페나가 그 상태로 계속 이야기를 엿들었다.
아무래도 리리엘라 언니는 예전처럼 집 밖을 전전할 생각인 것 같았다.
“역시 제 주제에 생일이라니 아닌 것 같아요.”
“갑자기 그게 무슨”
칸이 드물게 당황한 낯으로 리리 엘라를 만류했다. 하지만 그 말은 끝까지 이어질 수 없었다.
리리엘라가 도망치듯 집무실을 을나와 저 복도 끝으로 사라졌으므로,
‘나를 못 본 건가?’
벽 옆에 찰싹 붙어 있던 슈페나는 의아한 기색으로 제 머리칼을 배배 꼬았다.
“리리엘라!”
그때, 뒤늦게 리리엘라를 쫓아 방에서 나온 칸이 슈페나를 발견했다.
“아, 며늘아가.”
어머님은 골치 아프다는 듯 집게 손가락으로 미간을 부여잡더니 얘기했다.
“오늘 티타임 때 줄 게 있었는데, 다음으로 미루자꾸나.”
칸이 문간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어 슈페나의 동의를 구했다.
“그래도 괜찮겠니?”
“네? 네.”
슈페나는 얼떨떨하게 답했다.
그 긍정을 들은 칸이 리리엘라가 사라진 방향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파르르 떨리던 칸의 손끝이 주먹쥐어졌다.
깊은 한숨을 내쉰 그녀는 도로 집무실에 들어갔다.
“며늘아가, 너도 이만 가서 쉬려 무나.”
칸은 애써 다정히 슈페나에게 말을 건네며 쾅, 문을 닫았다.
홀로 남겨진 슈페나는 망부석처럼 그 자리에 굳어 데구르르 눈알을 굴리며 고민했다.
‘이거, 어떡하지? 내 잘못인 것 같은데.’
어머님은 포기한 건지 언니를 말릴 생각조차 없어 보이고.
요상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이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을 터.
양심의 가책을 느낀 슈페나는 다시 사용인들에게서 리리엘라의 행방을 알아내었다.
리리엘라는 본인의 방에 있었다.
슈페나가 커다란 고동색 나무문을 똑똑똑, 두들겼다.
“들어가도 될까요?”
분명 리리엘라 언니의 방이 여기 랬는데.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슈페나는 심호흡을 한 차례 한 뒤, 그냥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들어갈게요……!”
문을 열자마자 보인 건, 깨끗하고 황량한 우드톤의 방이었다.
관리는 잘 되어 있었지만 묘하게 사람 사는 냄새가 나지 않는 널찍한 공간.
아마도 방 주인이 그간 잘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슈페나의 시선은 침대 아래에서 무릎을 세운 채 얼굴만 묻은 리리 엘라에게로 옮겨갔다.
슈페나는 리리엘라의 곁에 주저앉았다.
“언니, 거기 쪼그려 앉아서 뭐 해요.”
“미안. 선물은 받은 걸로 칠게.”
슈페나가 조심스레 말을 걸자, 리리엘라는 시무룩하게 대꾸했다.
힘없이 눈매가 축 내려앉은 리리 엘라의 얼굴은 전례 없이 사나워 보였다.
‘…상처 입은 맹수 같아.’
슈페나는 흠칫 몸을 떨었다.
이내, 세차게 고개를 젓곤 용기를 내어 입술을 달싹였다.
“제가 아까 혹시 잘못 얘기한 거예요?”
저래 보여도 리리엘라가 진짜로 화를 내거나 무력을 행사한 적은 없었으니까.
차츰 슈페나도 겉바속촉한 리리 엘라의 성정을 알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리리엘라는 험상궂은 얼굴로 짧게 부정했다.
“아니.”
그러더니 소심하게 슈페나를 곁눈질했다.
혹시 제 말투에 슈페나가 놀라진 않았을까 걱정스러웠으니까.
리리엘라가 슬그머니 슈페나의 등을 토닥거리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네 잘못, 아니야.”
그 말에 슈페나가 리리엘라와의 거리를 좁혀 더욱 바싹 붙어 앉았다.
서로 눈이 휘둥그렇게 뜨일 만큼 가까워진 순간.
슈페나가 말간 눈망울로 호소하듯 속삭였다.
“혹시 왜 기분이 안 좋아진 건지 알려줄 수 있어요? 제가 힘닿는 데까진 도와드리고 싶어서…….”
동그란 슈페나의 눈이 애처롭게 빛났다.
흡사 장화 신은 고양이처럼 순수하고도 가련한 눈빛에 리리엘라는 갈등했다.
‘안 되는데, 슈페나가 너무 귀여 워.’
내가 안 알려줬다가 저 사랑스러운 눈에서 눈물이라도 나면 어떡하지?
고개를 떨구곤 중얼거리던 리리 엘라가 한참 뒤에야 입을 떼었다.
“그게….”
리리엘라의 잇새에서 흘러나온, 아직 못다 완성된 자그마한 음성.
그게 꼭 마음을 열고 있다는 신호 같아 슈페나는 제 주먹을 앙증맞게 말아 쥐었다.
“그러니까, 그게..….….”
리리엘라는 차츰 이야기를 털어 놓기 시작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리리엘라의 입에서 나온 사정은 제법 충격적이었다.
“생일날,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그러고 보니 리카도르의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체드윅 가의 가계도와 원작에는 사별했다고 나와 있었을 뿐.
뭔가 가슴 아픈 과거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버지와 관련된 건가.
슈페나의 낯빛은 저절로 숙연해졌다.
‘그런데 가계도의 아버님 자리에 지워진 흔적이 하나 더 있던데.’
퍼뜩 의아함이 들었다.
그 의문점은 금방 해결되었다.
“그러고 나서 다다음 생일날, 나중에 새로 생긴 아빠도…… 결국엔 죽어버렸지.”
어머님이 재혼을 하셨던 거구나.
하필이면 그런 안 좋은 일이 연달아 언니의 생일 때 일어나서 트라우마가 생긴 걸까.
그런데 조금 미묘한 점이 있었다.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새아빠는 결국 죽어버렸다….….’
아버지와 아빠.
돌아가신 것과 죽어버린 것.
짝이 맞지 않는 어감이 서로 겹친 것 같았다. 그 두 아버지와 사이가 좋았던 걸까, 나빴던 걸까.
슈페나가 고민하는 사이, 리리엘라는 눅진한 늪처럼 푹푹 잠기는 저음으로 착잡하게 말을 이었다.
“나 때문일지도 몰라.”
그 자책을 들은 슈페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망설였다.
‘나 때문이라니, 왜?’
기묘한 우연이긴 하지만 그게 리리엘라 언니의 탓은 아닐 텐데.
왜 계속 그렇게 여기면서 자신을 혹사해왔던 걸까.
조금 기이한 감정이 들었다.
그렇지만 당장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슈페나가 리리엘라를 어루만지려다 잠시 멈칫거렸다.
‘내가 뭐라고, 어떻게 위로를 를가족과도 연관된 심각한 상황엔 어떤 말을 해주어야 하나 모르겠어서.’
허공을 휘젓던 슈페나의 손끝이 둥글게 말리다, 곧장 리리엘라를 향해 곧게 뻗어졌다.
결심이 섰다.
‘리리엘라 언니가 이곳에 온 건 그래도 생일을 무사히 보내고 싶어서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생일을 선물해준다면 극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까.
우선 슈페나는 리리엘라를 따스히 감싸 안았다.
“힘드셨겠어요.”
리리엘라가 슈페나에겐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뇌까렸다.
“나보단 다른 가족들이 더, 특히 리카도르가”
“이번엔 안 그럴 거예요.”
안타깝게도 듣지 못한 슈페나가 단단한 어투로 맹세하듯 단언했다.
‘원래 이런 오지랖 부리면 곤란해 지는데.’
걱정도 들었지만 입술 사이로 튀어나오는 다짐은 막을 수가 없었다.
슈페나는 진지한 낯으로 리리엘 라와 눈을 맞추었다.
“제가 언니의 생일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날로 만들어볼게요.”
힘들었던 비밀을 알려준 사람 앞에서 모른 척할 수는 없잖아.
그래서 적당히 끼어들기로 했다.
‘진짜 딱 내일 생일까지만.
슈페나는 새끼손가락을 꼭꼭 걸고 리리엘라와 약속했다.
“그러니까 속는 셈 치고 내일 아침까지만 있어 줘요.”
마침 괜찮은 아이디어가 떠오른 참이었다.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42화
“정말?”
“아, 오늘은 언니랑 같이 자야겠다. 도망 못 가게 꽁꽁 껴안아 버려야지.”
슈페나가 슬그머니 힐끔거리곤 부러 애교스레 리리엘라의 팔에 매달렸다.
리리엘라의 볼이 자연스레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이제 막 세상 밖으로 나오기 시작한 거북이처럼 느릿하게 긍정했다.
“……응.”
리리엘라의 눈에는 슈페나가 해님처럼 환하게 비쳤다.
그렇게 슈페나는 한참 동안 리리 엘라를 부둥켜안았다.
자신의 온기가 리리엘라에게 작은 위안으로 느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조금 시간이 흐르고.
몸이 뻐근해질 정도로 리리엘라를 보듬던 슈페나는 움찔 손을 빼내었다.
그 움직임에 리리엘라가 주인과 떨어지기 싫어하는 강아지처럼 슈페나를 올려다보았다.
“어디 가?”
답지 않게 유순해진 리리엘라의 눈망울은 매서운 이목구비와 어우러져 아이러니함을 자아냈다.
아무래도 위로가 잘 먹힌 듯싶었다.
“저녁 먹어야죠.”
슈페나는 리리엘라의 손을 잡아 영차 일어나게 했다.
리리엘라는 멍하게 뇌까렸다.
“아……저녁.”
저녁 식사 시간에 어머니인 칸을 볼 생각을 하니 어색해진 탓이었다.
저택을 떠나겠다고 이야기한 상황이었으니까.
약간의 머쓱함과 불안함을 안고 그 둘은 다이닝룸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칸은 보이지 않았다.
리카도르와 사용인들만 있었을뿐.
늘 재잘재잘 떠들며 분위기메이 커의 역할을 하던 카누스도 오늘은 방에서 먹겠다고 했다지.
슈페나는 의자에 앉으면서도 입구 쪽을 연신 힐끔대었다.
‘어머님은 역시 식사를 거를 생각이신 건가.’
그렇게 조금은 삭막한 저녁이 시작되었다.
다이닝룸에는 식기가 서먹하게 부딪치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리리엘라와 리카도르도 서로 인사만 했을 뿐, 이후에는 데면데면 하게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다.
그 정적 속.
슈페나가 굳게 다짐했다.
‘어머님을 한번 찾아가 봐야겠어.’
이왕 도와줄 거면 확실하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리리엘라한테 먼저 방에 들어가 있을 수 있냐고 부탁한 슈페나는 곧장 걸음을 재촉했다.
목적지는 어머님의 집무실이었다.
“어머님. 들어가도 될까요?”
“들어오렴.”
어머님은 아까보단 담담하고 차슈페나 덕분에 리리엘라의 생일을 축하해 줄 수 있게 되지 않았는가.
체드윅 가에 입성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며늘아가도 이렇게 가족을 위해 애써주는데…
‘어미 된 도리로 딸아이와 더 대화를 나눠볼 용기도 못 내다니.’
어쩐지 칸은 스스로가 조금 부끄러워졌다.
‘역시 슈페나를 며느리로 들인 건 크나큰 행운일지도.’
이윽고, 칸의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스쳤을 때.
칸의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칸은 진심 어린 미소를 지으며 슈페나의 머리칼을 조심조심 쓰다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