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uebird Lady and The White Lion Family RAW novel - Chapter (6)
백사자가문의 파랑새 마님 6화(6/21)
“네가 우리에게로 와줘서 참 고마워.”
“아니에요. 제가 더 감사하죠. 어머님.”
슈페나는 쑥스럽게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는 본론을 꺼내 들었다.
리리엘라 언니에게 행복한 생일을 만들어주기 위한 계획을.
“참, 어머님이 도와주실 게 있어요. 리리엘라 언니의 생일 관련으로요.”
그 말을 들은 칸은 살짝 머뭇거렸다.
“내가? 과연 도움이 될 수 있을지….”
그간 자식과 내외한 세월이 있는 만큼, 선뜻 다가가려 마음을 먹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무리 아까 잠깐 자아성찰의 시간을 가졌어도 말이다.
그리고…….
‘그 일도 결국 내 과오였을 수도 있겠지.’
칸의 얼굴이 일순 씁쓸하게 일그러졌다.
한편, 슈페나는 나름대로 칸의 속마음을 짐작했다.
어머님도 힘드셨겠지.
그동안 언니랑 엇나가기만 해서.
‘그래도 언니는 어머님을 싫어하는 눈치가 아니었는걸. 오히려 미안해하는 것 같았고.’
그녀가 애교스레 웃으며 칸을 설득했다.
“언니도 엄청 좋아할 거예요!”
“워낙 신경 써준 게 없는 어미라서 잘 모르겠구나.”
“가족이잖아요.”
슈페나가 어색하게 답했다.
사실 가족이란 단어의 의미를 잘 모르는데 꺼낸 말이라서.
칸은 어딘가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얼굴로 수락했다.
“그래, 어떤 계획인지 들어보자꾸나.”
“그게요…….”
슈페나가 종알종알 이야기를 늘어놓던 찰나, 익숙한 미성이 귓가에 파고들었다.
“제가 도울 건 없습니까?”
리카도르였다.
그 또한 미묘한 저택의 분위기를 알아챈 참이었다.
평소보다 짙푸른 리카도르의 시선이 끈덕지게 슈페나에게로 박혔다.
슈페나가 도우려던 건 리리엘라인데.
마치 그가 구원이라도 받은 것처럼 집요한 눈빛이었다.
***
다음 날 아침.
슈페나는 알람이라도 맞춘 듯 빠릿하게 눈을 떴다.
시야에 비친 건, 익숙하지 않은 리리엘라 방의 천장이었다.
리카도르에게 미리 이야기를 한 뒤, 리리엘라와 꽁냥거리며 잠이 들었으니까.
‘이 언니, 되게 잘 자네.’
슈페나가 당장 업어 가도 모를 수인처럼 쿨쿨 숨을 내쉬는 리리 엘라를 보며 감탄했다.
그녀는 조심조심 깨지 않게 침대에서 내려와 미리 준비해두었던 무언가를 들고 왔다.
‘지금쯤이면 다이닝룸에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겠지?’
사자들은 보통 아침에 선물을 주며 생일을 축하한다지.
슈페나는 리리엘라를 다이닝룸까지 에스코트하는 역할을 맡았다.
“생일 축하해요, 언니!”
슈페나가 살살 리리엘라를 흔들어 깨우며 발랄하게 외쳤다.
으으, 응?”
겨우 일어난 리리엘라가 부스스한 금발을 손으로 마구 헤집고는 멍하니 반문했다.
‘잠결이라서 좀 걱정이네.’
아직 상황 파악을 못 한 리리엘라는 생각보다도 순순히 그녀의 손길을 따랐다.
그러다 슈페나의 손에 이끌려 방 밖으로 나가게 되었다.
슈페나는 리리엘라를 꼭 붙들고 부푼 마음을 감춘 채 조심조심 발을 내디뎠다.
타인의 생일이었지만 슈페나도 들떠 있었다.
14년의 조생 동안, 누군가의 생일파티에 초대받은 경험은 없었으니까.
언니오빠들한테 생일 축하 인사를 하면 ‘네까짓 게 뭔데 재수 없게 생일날 말을 거냐!’ 라며 혼났었지.
더구나 에스코트라니 멋진 일을 맡지 않았는가.
꼭 동화 속 왕자님이 된 기분이라 설레었다.
‘다이닝룸에는 엄청 맛있는 아침이 준비되었겠지?’
사뿐사뿐 1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간 그 둘은 곧 목적지에 도착했다.
시야를 가리던 검은 천이 풀려 동공으로 빛이 들어오자, 리리엘라가 탄성을 내뱉었다.
“와아.”
식탁 위에 오른 뽀글뽀글 기포가 올라오는 탄산음료와 훈연향이 몽글몽글한 각종 고기, 그리고 거대한 3단 케이크.
꼬리로 작은 폭죽을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는 카누스, 제각기 다른 선물을 들고 있는 어머님과 리카도르.
완벽한 생일 아침의 풍경이었다.
슈페나는 리카도르에게서 기다란 빨간색 비단 끈을 받아 들고는 제 몸에 둘둘 감쌌다.
정확히는 굴비를 엮듯 모두의 허리에 칭칭 동여매었다.
그 끈이 리리엘라에게까지 연결되었을 때 슈페나는 천진하게 선언했다.
“우리 오늘 다 같이 행동할 거예요. 떨어지지도 않도록.”
기차놀이를 하듯 우스꽝스러운 모양새가 되었지만, 모두의 입가에는 웃음이 걸려있었다.
때마침, 어머님이 촛불이 켜진 케이크를 리리엘라에게로 들이밀며 어색하게 말을 건넸다.
“.……생일 축하한단다, 아가.”
그에 리리엘라의 눈이 번쩍 뜨였다.
여태 살짝 어색했던 모녀지간이 아니었던가.
“……네, 어머니.”
리리엘라가 금방이라도 울 듯 일렁이는 눈망울로 후우, 촛불을 힘차게 불었다.
그런 그녀의 입가에는 미려한 곡선이 서서히 번졌다.
모두 조금 어색하지만 기쁘게 케이크를 먹었다.
그리고선 같이 즐길 수 있는 활동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선물 교환, 보드게임, 의미 없는 일상 대화 나누기, 끝말잇기, 일안 하고 퍼질러서 낮잠 자기.
사소한 것들이었으나 지루하지는 않았다.
-리리엘라 누나, 잡아당기지 말라니까!
“그게,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는데….”
실은 엉망진창에 가까웠다.
무언가를 새로 하려고 할 때마다 칙칙폭폭 아슬아슬한 기차놀이를 해야 했으므로, 리리엘라가 가까스로 중심을 잡고는 짐짓 바로 앞에 있던 리카도 르를 흘겼다.
“순서 좀 바꾸지.”
슈페나의 바로 옆자리가 리카도 르라서 부러웠던 탓이었다.
“어, 어?”
그 여파에 휘말려 슈페나도 새된 비명과 함께 철푸덕 넘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 옆엔 다른 이들도 함께였다.
드물게 체면을 구기게 된 칸은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적이곤 실없이 웃었다.
“이거, 참. 생각보다 쉽지 않구나.”
“그러게요, 어머님.”
슈페나 또한 말간 웃음을 터뜨리며 씩씩하게 일어서서 걸었다.
뒤뚱뒤뚱.
우당탕탕 오합지졸 같은 행진은 계속되었다.
그래도 방금보단 조금 달라졌다.
“보폭을 맞춰 걷는 건 어떠니?
또 넘어질라.”
칸이 산전수전 다 겪은 가주답게 침착히 좋은 방법을 제시한 덕분이었다.
“네, 어머니.”
그 어느 때보다 다정한 칸의 눈빛에 리리엘라도 수줍게 마주 미소 지으며 긍정했다.
오합지졸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는 순간이었다.
그 이후,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금방 하루가 지나고 밤이 되어 그들은 다 함께 별을 구경하러 정원에 나갔다.
슈페나는 행복하게 잔디밭에 누워 잠든 체드윅 가의 모녀를 바라보며 깨달았다.
‘가족은 저런 거구나.’
뭔가 트러블이 있는 것 같다가도 서로의 관계 안에 정의되어 스스럼없이 다가갈 수 있는 사이.
견고히 둘린 울타리 안에서 지켜주고 보호받을 수 있는 사이.
‘나도 저런 가족을 가질 수 있을까.’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43화
‘더구나 언젠가는 이혼하고 떠날 계획이었잖아.’
슈페나가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땅굴을 파고 있을 무렵.
리카도르는 그런 슈페나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데구르르 몸을 굴려 슈페나 와의 거리를 좁혔다. 그러더니 팔베개라도 해주겠다는 듯 제 팔을 툭툭 쳤다.
‘어?’
슈페나가 멀뚱거리자, 리카도르는 그냥 도로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러곤 고개를 기울여 짐짓 얼굴을 들이밀었다.
리카도르의 눈부신 하얀 머리칼이 잘게 흐트러졌다.
달빛처럼 청명하게 반짝이는 푸른 눈망울에는 슈페나만이 가득했다.
깜짝이야.
슈페나가 라즈베리를 훔쳐 먹다 걸린 파랑새처럼 몸을 뒤로 내빼곤 화들짝 움찔대었다.
찹쌀떡처럼 몰랑몰랑한 볼 살도 같이 떨려왔다.
리카도르는 개의치 않고 뜬금없는 화제를 꺼내 들었다.
“생일, 잘 모르겠다고 그랬었죠?”
“네? 네.”
얼떨떨하게 수긍하자, 또 한 번 의도를 짐작할 수 없는 물음이 튀어나왔다.
“10월 3일, 어떻습니까?”
“뭐가요?”
“기억이 안 나면, 새로 만들면 되니까.”
리카도르가 괜스레 시선을 내리 깔고는 덤덤하게 말했다.
그냥 마음에 걸렸었다.
잠깐 바깥나들이를 갔을 때 슈페나가 했던, 생일 따위 모른다는 한마디가.
‘그저 그뿐이야.’
조그마한 이유를 덧붙이자면….
본인 일도 아닌데 이리 나서서 생일을 기획한 슈페나가 참, 모난 구석 없는 동그라미 같아서.
그 덕에 덩달아 조금 위로받은 것 같아서.
“매년 축하하게 해주시겠습니까?
태어나줘서 고맙다고.”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슈페나의 볼이 일순 발갛게 달아올랐다.
“……괜찮은데.”
그녀는 그의 손을 붙잡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작게 투덜대듯 이야기했다.
리카도르는 참 이상했다.
‘꼭 내 마음이라도 읽은 것 같잖아.’
늘 그랬다.
필요할 때마다 나타나서 도와주고선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제법 사람 기분을 묘하게 만들었다.
누군가의 챙김을 받는다는 건, 그 상대가 나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의미였으니까.
문득 리카도르와 친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주와 친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리카도르와 함께하고 싶어서.
“와. 막, 막 나랑 친구 하고 싶은가 보다. 되게 감동적인 멘트 함부로 남발하네.”
그 청아한 목소리는 점점 길을 잃은 아이처럼 두서없이 흔들렸다.
“나, 이런 말 듣는 거……… 처음이라서, 그래서 기분 이상하단 말이에요.”
너는 되게 좋은 사람이구나.
그 한마디를 괜스레 에둘러서 툴툴거리듯이 표현했다.
대놓고 얘기하긴 부끄러워서.
“원한다면 언제든지.”
“뭘요?”
리카도르의 목울대가 큰 결심이라도 한 듯 울렁거렸다.
“친구요.”
여전히 친구라는 단어는 마음에 차지 않았다.
걷잡을 수 없이 마음의 거리가 좁혀질까 걱정도 되었다.
친구가 된다는 건 감정적 교류를 하겠다는 거고, 이는 리스크가 큰 행위였으니까.
더구나 슈페나와 제 사이에는 계약이라는 변수가 있지 않은가.
서로 원할 때까지만, 위험하지 않을 때까지만. 그럼 괜찮겠지.’
리카도르는 슈페나한테 닿은 손가락에 더욱 힘을 주었다.
따스한 타인의 온기가 손끝에서부터 몽글몽글 뭉클하게 스며들었다.
슈페나의 입 안에서 차마 완성되지 못한 단어가 맴돌았다.
“진짜…”
알다가도 모를 수인이야.
슈페나는 리카도르의 팔을 꼬옥붙잡은 채 슬며시 고개를 숙였다.
‘기분이 너무 이상해…….’
그 순간, 곤히 자던 리리엘라가 잠꼬대를 하며 그녀에게 달라붙었다.
피식 웃음이 샌 슈페나는 리리엘 라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 손길 때문인지 리리엘라는 슬며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어스름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슈페나를 툭툭 두들겼다.
“별똥별이야…….”
정말 그녀의 말대로 반짝이는 별 무리가 검푸른 밤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와.”
슈페나가 작게 탄성을 흘렸다.
꾸벅꾸벅 졸고 있던 카누스도 반색하더니 방방 기쁨의 춤을 췄다.
– 별똥별? 어디?
“모두 소원을 빌어야겠구나.”
어느새 깨어난 어머님이 모두의 손을 잡고는 찬찬히 기도했다.
슈페나의 머릿속에도 별똥별이 내렸다.
소원을 빌던 슈페나는 슬그머니 눈을 떠 리카도르를 쳐다보았다.
서로의 시선이 얽히고, 어색하지 않은 침묵과 동시에 고요한 웃음이 번졌다.
다른 이들에게 둘러싸여 소원을 비는 지금 이 시간이 너무나도 포근했다.
“뭐가 그리 재밌는 거니?”
그 둘을 번갈아 쳐다보던 칸이 짐짓 장난스럽게 말을 건네었다.
슈페나는 배시시 입꼬리를 올리곤 어머님에게 물었다.
“어머님은 어떤 소원 비셨어요?”
“여기 있는 우리 가족 전부 매일 매일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가족,
그 단어가 슈페나의 심장에 콕박혀 들었다.
‘내가 이 사람들을 감히 가족이라고 생각해도 되는 걸까?’
그런 자신감 없는 생각이 엄습하는 순간, 무언가 당기는 듯한 힘에 슈페나는 데굴데굴 바닥을 굴렀다.
그리곤 리카도르의 곁에 착 안착했다.
허리를 감싼 비단 끈이 리카도르의 움직임 탓에 당겨진 덕분이었다.
“이게 생각보다 단단하더라고, 부인.”
슈페나는 그 비단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어쩐지 허리에 매인 빨간 실이 끊어지지 않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슈페나는 리카도르와 친구가 되었다.
*
한바탕 생일파티가 끝나고 하루 뒤, 슈페나는 발랄한 어조로 리카도르에게 말을 걸었다.
“야!”
“왜.”
천진한 말투에 리카도르가 짧게 받아쳤다.
친구먹은 후로 슈페나와 리카도르는 편하게 말을 놓기로 했다.
‘말도 트다니. 장족의 발전이다.’
늘 존댓말로 대화해서 반말은 어색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자연스럽게 입에 착착 감겼다.
찐친이 되어버린 기분이랄까.
슈페나는 싱글벙글 입이 귀에 걸린 미친 수인처럼 웃으며 궁금증을 토했다.
“근데 10월 3일이 무슨 날이야?”
예전에 생일이 대충 가을쯤이라고 말한 기억은 있었지만, 왜 굳이 그날인지 아리송했으니까.
그에 리카도르는 침대에 걸터앉아 유유자적 다리를 꼬았다.
그러곤 턱을 괸 채 앞에 서 있는 슈페나를 느른히 올려다보았다.
“맞혀봐.”
자못 오만하기까지 한 한마디였다.
슈페나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지금 네 생일 다음 날이라고 그냥 급조한 건 아니지?”
리카도르의 생일은 10월 2일이 아니던가.
그럴듯한 추론이었다.
그가 비스듬히 입꼬리를 틀어올리더니 짐짓 짓궂게 슈페나를 놀렸다.
“그럴지도.”
“뭐어?”
발끈하는 슈페나의 모습에 리카도르는 픽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그날은…….
‘4년 전, 저 파랑새를 처음 본 날이었지.’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던 리카도르였다.
하나, 퍽 짓궂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척 잡아떼었다.
“그냥 그 가을날이 딱 적당할 것 같았어. 부인은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기억?”
슈페나가 그 끝마디를 곱씹었다.
리카도르는 알쏭달쏭한 단어들만 나열하곤 어깨를 으쓱였다.
“단풍. 느티나무, 사자.”
“응?”
“그리고….”
능청스레 이야기하던 그가 갑자기 말끝을 흐렸다.
‘계약, 이란 단어를 말하려 했는데 왜 입이 안 떨어지지?’
조금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리카도르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 이다가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이었다.
“줄 만한 힌트는 다 준 것 같은데.”
리카도르의 입가에 고운 호선이 걸렸다. 그가 슈페나의 귓가에 대고 느른히 속살거렸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게.”
어찌 되었건, 일단은 슈페나가 스스로 떠올릴 때까지 기다려줄 계획이었으니.
정 답답하면 다 터놓고 말할 생각이긴 했다.
‘뭐, 다 말한다고 정확한 전말이 밝혀질지는 모르겠군.’
그는 슈페나의 머리를 한 차례 쓰다듬고는 유유히 방을 나섰다.
혼자 남은 그녀가 어안이 벙벙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쟤, 나랑 만난 적이 있나?”
당최 뭔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
그런 상념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 맞다. 어머님이랑 언니랑 티타임을 가지기로 했는데!”
앞으로는 어머님과의 티타임에 리리엘라 언니도 함께하기로 한참이었다.
슈페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룰루랄라 복도를 거닐었다.
그녀가 낙낙, 리듬을 타듯 칸의 집무실 문을 두들겼다.
“저 왔어요!”
“왔구나, 아가.”
칸은 손수 문을 열어 며늘아가의 등장을 반겼다.
슈페나가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리리엘라 언니는 보이지 않았으니.
그에 어머님이 다 알고 있다는 듯 먼저 이야기했다.
“리리엘라가 오기 전까지 잠깐 산책이나 하지 않으련?”
“네! 전 좋아요!”
갑자기 산책이라니, 뭔가 할 말이 있으신 건가.
어머님과의 산책은 퍽 재밌었다.
체드윅 가의 정원은 굉장히 복잡해서 종종 길을 잃곤 했는데 어머님이 여러 샛길을 알려주었으니까.
슈페나는 어머님을 쫓아 아기 새처럼 쫄랑쫄랑 걸음을 내디뎠다.
칸이 걸음을 멈춘 곳은 로네악꽃이 한 아름 피어있는 화단 근처였다.
“다시 봐도 신비한 광경이구나.”
거대한 클라이드 나무와 새하얀 로네악 꽃.
어머님은 그 장엄한 풍경을 번갈아 쳐다보며 다시 한번 감탄했다.
“하잘것없다고 여겨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 꽃에 그런 효능이 있었다니.”
칭찬하려고 부르신 건가.
슈페나는 쑥스럽게 뒤통수를 긁적이며 그저 헤헤,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어떻게 발견하게 된 거니?”
칸의 물음에 그녀가 겸손하게 답했다.
“그냥 고대 문헌을 읽다가 의아함을 느껴서 조금 조사해봤어요.
카누스가 식물에 지식이 해박해서 도움이 되기도 했구요.”
“아, 그 뱀 가문의 꼬맹이.”
칸은 그런 슈페나의 말을 듣더니 잠깐 생각에 빠진 낯으로 대꾸했다.
“다른 수인들과도 잘 어울리는 듯해서 다행이군.”
슈페나는 참 특이한 아이였다.
천적에다가 본인을 해하려 했던 뱀과도 잘 지내는 편이었으니.
사용인들의 보고에 따르면 거의 내내 붙어있으며 놀기도 한다지.
어쩌면 사람이 가진 마음의 넓이가 다른 걸지도 몰랐다.
‘연회 준비를 완벽하게 한 것도, 리리엘라의 생일 때 마음을 써준 것도.’
슈페나에겐 고마운 것들이 참 많았다.
어느새 칸도 슈페나를 대견한 며느리가 아닌, 속 깊은 딸아이같이 여기게 되었다.
‘가족 관계에도 은혜는 확실히 갚아야지.’
칸은 자상한 어조로 말을 건넸다.
“내가 갑작스레 큰일을 맡겨서 힘들었을 텐데 고생 많았단다. 어제 일도 그렇고.”
“아니에요. 좋은 경험이었어요.”
슈페나는 마구 도리질을 하며 손사래를 쳤다.
교과서적인 답만 내보이는 슈페나의 태도에 칸이 짐짓 손가락을 튕기며 분위기를 전환했다.
그녀가 품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었다.
“그래서 말인데 오다 사왔다. 너한테 꼭 필요한 물건일 거란다.”
“그게 뭔데요, 어머님?”
웬 갈색 봉투?
선물인 것 같으나,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는 외양에 슈페나가 어리 둥절하게 반문했다.
어머님은 무뚝뚝하게 답했다.
“땅문서.”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44화
“네에?”
당황한 슈페나의 목소리는 하늘높은 줄 모르고 높아졌다.
“따, 땅이요?”
이 집 스케일 뭐야?
일 좀 잘했다고 부동산을 턱턱내놓는 거 실화냐?
예기치 못한 일에 슈페나의 속눈썹이 파르르 한들대었다.
물론 당혹스러움과 기쁨이 뒤섞여 있는 떨림이었다.
‘와, 역시 남주 가문.’
돈줄 나는 게 이런 기분일까 싶어 슈페나는 괜스레 슬픈 생각을 했다.
너무 좋아하면 속 보이잖아!
아무튼 큰 충격에 휩싸인 슈페나 와는 다르게 어머님은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별거 아니란다. 몇 푼 하지도 않는 거고 며늘아가, 너에게도 도움이 될 듯하니.”
그렇지.
부동산은 변하지 않아.
늘 오르거든.
그녀는 속으로 그리 독백하며 힐끔 칸을 곁눈질했다.
“지금 봐도 될까요?”
“그럼.”
칸이 고개를 끄덕였다.
슈페나가 기다렸다는 듯, 하지만 초연함이 느껴질 만큼 조심스러운 손길로 봉투를 열었다.
검은 것은 전문용어요. 흰 것은 여백인가.
아, 계약서 너무 어렵다.
팽글팽글 돌아가는 슈페나의 머리가 티 났는지 칸은 친절하게 설명했다.
“큼, 로네악 꽃이 자라는 지역이란다.”
로네악 꽃?
어머님이 그걸 왜?
의문이 꼬리를 물고 생성될 무렵, 어머님은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꽃의 재배를 도울 하인들도 몇 명 더 뽑을 생각이란다.”
아무래도 꽃으로 하려던 사업을 도와주시려는 것 같았다.
그 예상은 정답이었다.
“그 꽃으로 뭔가 해보려는 것 같던데, 잘 되었으면 좋겠구나.”
칸은 괜스레 슈페나의 시선을 피하며 머쓱하게 격려의 말을 내뱉었다.
“…너무 감사해요. 어머님!”
도움의 손길에 슈페나가 꼬꼬마유치원생처럼 두 손을 모으곤 거 듭 감사 인사를 했다.
그러다 눈에 띄는 점을 발견했다.
“어? 근데 브로치, 하고 계셨네요?”
“크흠.”
슈페나가 인형 가게에서 직접 골라 선물했던 용맹한 사자 모양 브로치.
카리스마 있는 어머님의 분위기와 참 잘 어울리는 장신구였다.
‘내가 나름 안목은 좋다니까!’
슈페나는 짐짓 자화자찬을 하며 귀엽게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누가 고른 건지 참 잘 어울리네요!”
“아무렴 누가 준 건데.”
칸이 재롱을 부리는 손녀를 보는 듯한 표정으로 자애롭게 맞장구쳤다.
‘앗, 그렇게 말해주실 줄은 몰랐는데. 뭔가 부끄럽네.’
슈페나는 괜히 화제를 돌렸다.
마침 궁금한 것도 있었고,
“근데, 저 브로치를 산 가게요.
되게 신기하더라구요.”
“어떤 점이?”
“물건에 타 수인의 이능이 녹아있었어요. 영구적인 건 아니라고 했지만요.”
가게의 주인은 영업기밀이라고 절대 알려주지 않았지만, 어머님은 알 수도 있지 않은가.
여러모로 박학다식한 분인데.
그리고 칸은 그러한 슈페나의 동경을 배반하지 않았다.
“아, 테네도르를 이용했나 보구나.”
테네도르?
어디서 들어본 건데?
묘하게 신경을 거스르는 단어였다.
‘이러면 꼭 원작에서 나온 거더라.’
슈페나가 도르륵 눈알을 굴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도통 정확히 뭐였는지 떠오르지 않아서.
영 기억이 나지 않을 것 같은 기분에 슈페나는 어머님을 반짝반짝 올려다보았다.
호기심이 풍부한 꼬마같이 초롱초롱한 슈페나의 눈빛.
칸이 흐뭇하게 미소 짓고는 간략히 설명해주었다.
“이능을 담아 저장하는 그릇 같은 역할을 하는 희귀한 광석이지.”
어머님은 아주 귀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사자 영역에서도 테네도르가 나는 광산은 딱 둘밖에 없거든.”
그냥 말로는 잘 생각나지 않는데.
직접 봐야 어렴풋이 감이라도 잡힐 것 같았다.
“정말요? 어떻게 생긴 거예요?”
사실 그냥 한번 던져본 물음이었다.
그리 귀한 건데 바로 볼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지는 않았으니까.
“몇 개 보관해두긴 했지. 이만 집 무실로 돌아가자꾸나.”
슈페나는 어머님을 따라 다시 저택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도착한 칸의 집무실 안.
어머님은 벽장에 숨겨져 있던 금고를 매만졌다.
그리고는 그 안에서 반짝거리는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어머님이 가까이 다가오자, 그 물건은 본연의 자태를 드러냈다.
가공이 된 건지 매끄럽게 깎여 찬란한 빛깔을 내뿜는 주먹 크기의 감람색 광석.
“이렇게 생겼단다. 한번 본 이들은 그 아름다움에 절대 테네도르를 잊을 수 없다고들 하지.”
이거 분명 본 적 있어. 설마?
퍼뜩 소설 속의 에피소드가 머리를 스쳤다.
피폐물의 정석은 무엇이겠는가.
여주가 한번 도망을 갔다가 잡혀야 스릴 넘치고 재미있는 법.
원작 속 여주는 주인공답게 남주와 싸우고 홀연히 떠나버린 타지에서 신비한 기연을 얻었다.
이러니까 장르가 좀 잡탕인 거 같긴 하네.
여하튼 신비한 미지의 장소를 발견하게 되는데, 거기서 여러 귀물을 줍게 된다.
그곳은 신물이 모여 있는 보물창고 같은 장소였으니까.
‘로또 맞은 거지.’
어머님이 말한 테네도르라는 광석은 아마 그 장소에서 여주가 득템한 물건 중 하나인 듯싶었다.
‘분명 여주가 도망치다 숨어들게 된 도시 이름이…….’
그건 모르겠고, 온천이 유명한 곳이었는데.
큼, 분명 원작 여주가 남주에게 딱 잡혔을 때의 배경이 온천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온천에선…….
‘참 좋았었지.’
아휴, 내가 뭔 상상을.
힘겹게 으른의 생각을 몰아낸 슈페나는 고민했다.
그 테네도르라는 광석만 빼내오면 안 될까.
원작에 방해 안 되게 몇 개만.
‘소설 속에 등장한 것치곤 어디에 활용된 적은 없었던 물건 같은데.
괜찮지 않으려나.’
사실 하인들을 몇 명 더 뽑는다.
고 해도 인력난은 어찌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어머님이 땅까지 주셨으니까………
농사 담당, 분류 담당, 배달 담당, 사람이 되게 많이 필요하겠는걸.’
더구나 사자들의 영지는 광활하지 않은가.
산 넘어 산이었다.
‘역시 스타트업, 어렵다.’
결국 슈페나의 생각은 그 미지의 장소에 가보는 걸로 굳어졌다.
그녀가 명랑하게 칸을 불렀다.
“어머님!”
그리곤 비장하게 먼저 어머님의 손을 꼬옥 붙잡고는 최대한 애교스러운 목소리로 졸랐다.
“저희 언제 다 같이 여행 가면 안 되나요?”
“여행?”
“네! 근처에 온천이 유명한 곳으로요.”
원작 여주가 생각보다 멀리 도망을 쳤던 건 아니었으므로 인근 어딘가 도시일 터.
‘그래도 확실하진 않으니까 정보가 필요한데, 어떻게 알아본담.’
아, 그 제정신 아닌 정보상!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한 번쯤은 직접 만나볼 생각이었다.
수상한 상대이니만큼 제대로 대화해보는 게 좋을 테니까.
실력도 꽤 대단한 편인 것 같았고,
‘마침 잘됐어.’
슈페나는 꼭 그 정보상의 속내를 낱낱이 파악하겠다고 다짐하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한편, 칸은 갑작스러운 슈페나의 제안에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호오, 온천이라. 괜찮구나.”
아쉽게도 지금 당장은 불가능하겠지만, 칸도 가족끼리의 여행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쏙 들었다.
“가을엔 순회가 예정되어있으니 힘들 것 같고, 겨울쯤에 가자꾸나.”
“역시 온천은 겨울이죠!”
그 허락에 슈페나가 발랄하게 호응했다.
“구체적인 것도 순회가 끝난 후에 의논해보고.”
“좋아요, 어머님!”
그럼 나야 땡큐지.
그때까지만 그 도시가 어딘지 알아놓으면 되겠네.
슈페나가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입가에 헤헤, 매달았다.
“참, 가을 순회 장소는 타 수인 영역과의 경계 지역인 숲이 될 거 란다.”
칸은 자연스레 이야기의 흐름을 순회 쪽으로 옮겼다.
여름에 열린 연회는 무사히 마쳤으니 그다음도 대비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가을 순회는 가주가 직접 준비해 온 만큼 슈페나에게 맡기지는 않을 테지만.
“채비를 단단히 해야 할 텐데 괜찮겠느냐?”
그래도 며늘아가한테는 첫 순회이고, 사자들보다 연약한 파랑새종족이라서 걱정되었다.
‘동물화한 모습을 보니 한 대 치면 쓰러질 것 같던데.’
혹시나 숲에서 사자들의 발에 밟혀 다치지는 않을까 의문이었다.
파랑새가 하늘을 날 수 있는 조류라는 사실은 망각해버린 칸이었다.
그 염려하는 기색이 고스란히 비치는 칸의 표정에 슈페나도 지레겁을 먹었다.
그냥 돌아다니면서 탐사하는 행사라고 알고 있었는데, 위험한 건 아니겠지?
하긴 경계 지역은 수인들 간의 분쟁이 발발할 수도 있는 무법지대가 아니던가.
그녀가 동공 지진을 일으키며 조심스럽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육을 길러볼까요?”
“어째서?”
그러자 칸도 덩달아 의문을 표했다. 슈페나는 긴장 어린 기색으로 비장하게 답했다.
“누가 습격이라도 한다거나, 다툼이 벌어진다거나, 그럴까 봐………
요.”
“감히 누가 사자들을 건드리겠니.
비열한 표범놈들이 몰려와도 끄떡없으니 걱정 말렴.”
결연하게 나무열매를 사수하려는 소동물과도 같은 태도에 칸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가 겨우 원래대로 표정을 수습하곤 슈페나에게 조언했다.
“그냥 숲에 산책하러 간다고 생각하려무나. 어렵지 않단다.”
오, 괜히 쫄았네.
슈페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계속되는 칸의 말을 경청했다.
“그래도 방금 건 나쁘지 않군.”
“네?”
“며늘아가, 너는 조금 더 운동을 배울 필요가 있어. 순회를 돌려면 쉴 새 없이 움직여야 할 테니 체력은 필수란다.”
어머님은 슬쩍 슈페나의 팔뚝을 손가락으로 찔렀다.
우유푸딩같이 말랑말랑한 살이 조몰락조몰락 찰흙처럼 만져졌다.
“물렁물렁하잖니.”
“제가 도울게요!”
그때, 어느샌가 나타난 리리엘라가 담화에 끼어들었다.
리리엘라는 아직 어색하긴 하지.
만 전보다 풀어진 낯으로 칸에게 말을 걸었다.
“허락해주세요. 어머니.”
“좋은 생각이긴 하다만….….”
칸은 말끝을 흐리며 슈페나의 의견도 물었다.
“어떠니, 며늘아가?”
“저야, 좋죠!”
슈페나는 은근슬쩍 리리엘라한테 달라붙어 팔짱을 끼며 긍정했다.
이번 기회에 더 끈끈한 사이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게 얼마 후.
슈페나는 팔자에도 없던 체력 훈련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언제부터 파티원에 리카도르랑 카누스도 추가된 거지?
-형아, 달려!
“부인, 저 새끼 뱀은 갖다 버릴까?”
슈페나가 어느덧 제 곁을 맴돌기 시작한 다른 이들을 바라보며 속으로 읊조렸다.
대환장 파티네.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45화
‘일단 나부터 갖다 버려주면 안될까?’
슈페나는 입 안에 감도는 진심을 숨긴 채 허허, 너털웃음만 지었다.
리리엘라는 고목나무에 붙은 매미처럼 졸졸 자신을 따라다녔고, 카누스는 그게 재밌어 보였는지 합류했으며, 리카도르는 그런 그들을 못마땅하게 흘겨보았다.
꼬리에 꼬리를 문 상황 때문인지 정신이 없었다.
더구나….
‘이들이 로판 세계관 최강자 라인이라는 걸 망각했지.’
본디 로판에선 폭군도 성실히 일하는 게 도리가 아니던가.
‘성실해도 너무 성실하게 나를 굴려…..’
그냥 체력만 조금 기르면 될 거라 여겼는데, 극기 훈련을 하게 될 줄이야.
엊그제는 검술, 어제는 창술, 오늘은 궁술.
그리고 혼자 틈틈이 하게 된 이 능 수련까지.
심지어 아침에는 기초 체력을 기르기 위해 사이좋게 저택 한 바퀴를 달리고 온 참이었다.
‘수인이 소화할 수 있는 스케줄 맞아?’
사실 체력이 그리 좋지 못한 슈페나로서는 살인적인 일정이었다.
-누나, 저 형아가 나 째려봐!
“시끄러, 새끼 뱀.”
“슈페나, 내가 물 가져다줄까?”
속으로 푸념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다른 이들이 슈페나에게 아는 척을 하며 매달렸다.
슈페나는 그들을 스리슬쩍 훑어보며 이를 갈았다.
‘보통 로맨스소설을 보면 운동 메이트부터 시작해서 감정이 싹트던데.’
뭐, 퍽 극적인 감정이 생기긴 했다. 그 명칭이 킬링이란 게 함정이었지만,
‘원작이고 뭐고, 내가 죽인다.’
특히나 카누스랑 리카도르.
리리엘라 언니는 물이라도 잘 챙겨주니까 논외.
슈페나는 어후, 한숨을 내쉬곤 바닥에 내려놓았던 활대를 도로 잡아챘다.
그리고는 배운 대로 활시위를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활 쏘는 동안은 귀찮게 안 하겠지.’
그러나 슈페나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광경을 본 리카도르가 자연스레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자세가 또 삐뚤어졌네.”
짐짓 타박한 그는 살짝 틀어졌던 슈페나의 손의 위치를 원래대로 옮겨주었다.
그러다 뭔가 걸리는 점을 발견한 듯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보호대는 꼭 차고 해야지.”
리카도르가 바로 옆 벤치에 올려져 있는 아대를 가져와 슈페나의 손목에 꼼꼼히 둘러주었다.
얼핏 온기가 스민 천 조각이 피부 위로 덧대어졌다.
‘치, 쓸데없이 세심해.’
그제야 리카도르는 과녁을 가리켰다.
“이제 쏴봐.”
지이익, 활줄이 당겨지는 소리가 적막 속에 울려 퍼졌다.
‘활 쏘다가 손바닥 찢어지게 생겼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손놀림이었지만, 무거운 활을 다루는 건 어려웠다.
슈페나의 손에서 벗어난 화살이 공기를 갈랐다.
명중이었다.
“와, 대박….”
과녁 한가운데를 꿰뚫은 건 처음이었다.
‘나 재능 있나 봐.’
슈페나가 내심 자화자찬을 하고 있을 무렵, 리리엘라도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흡사 학예회에서 조카의 재롱잔치를 보고 온 이모와 같은 태도였다.
“내 올케가 천재인가 봐.”
-저건 좀 멋있네.
매사 깐깐하던 카누스도 정중앙에 박힌 화살을 보더니, 감탄했다.
리카도르마저 살짝 놀란 표정을 짓고는 헝클어진 슈페나의 머리칼을 넘겨주며 다독였다.
“조금만 더 하면 나보다 잘할지도.”
퍽 다정한 손길이었지만 슈페나는 샐쭉 그를 흘겨보며 물었다.
“그거 더 하라는 소리지?”
“똑똑하네.”
리카도르는 피식 웃으며 화살통에 꽂혀있던 화살을 그녀에게 건넸다.
그때,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리리엘라가 화살을 낚아채 대신 활시위에 걸어주며 말했다.
“슈페나, 이번엔 내가 도와줄게!”
‘도와주면서 애칭으로 불러달라고 해야지!’ 야심만만한 리리엘라였다.
아무튼 슈페나는 다시 맹훈련에 돌입했다.
리리엘라는 그녀를 보조하며 은은근슬쩍 본심을 내비쳤다.
“슈페나, 이제 나를 애칭으로 불러주면-”
하지만…..
‘더는 못 버텨! 꽁지깃이 튀어나올 것 같다구!’
슈페나는 자신과의 싸움을 벌이 느라 미칠 지경이었다.
정말 꽁지깃이 돋아나려는 듯 엉덩이 부근이 살랑살랑 간질거렸다.
불현듯 발끝에서부터 기묘한 감각이 올라왔다.
뿅!
뭉게뭉게 퍼지는 하얀 구름과 함께 볼따구가 빵빵하게 부푼 파랑 새가 나타났다.
결국 인간화가 풀려버렸다.
본디 너무 무리를 하면 동물의 모습으로 변하지 않던가.
게다가 활쏘기 전엔 이능 연습도 조금 했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 이 험난한 조생이여.’
파랑새가 된 슈페나는 미약한 울음소리를 내었다.
“와….”
동물화한 슈페나의 모습을 처음 보게 된 리리엘라가 멍하니 입만 벙긋거렸다.
그리고선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크기를 가늠해보더니, 부르르 몸을 떨었다.
리리엘라는 개미만 한 보폭으로 슈페나에게서 스스슥 멀어졌다.
‘귀여워. 근데 무서워.’
저도 모르게 쓰다듬다 힘을 확줘버려서 슈페나가 다칠까 걱정된 탓이었다.
리리엘라는 앙증맞은 파랑새를를 보지 않으려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면서 혹여나 밟지 않도록 구석에 홀로 웅크려 숨었다.
한편, 한참 낮아진 시야에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슈페나는 삐이이, 미약한 울음소리를 내었다.
그리곤 바로 근처에 있던 리카도 르를 향해 살기를 내뿜었다.
“삐빗!”
야, 이 수인아!
슈페나가 없는 기력을 쥐어 짜내어 뽀르르 날아가 리카도르의 머리를 콕콕 쪼았다.
훈련을 계속하게 만든 리카도르에 대한 원망감이 차오른 탓이었다.
“아!”
제법 날카로운 부리에 리카도르가 입술을 달싹였다.
“제법 아픈데.”
“벳!”
뭐, 어쩌라고.
슈페나는 삐딱선을 탔다.
리카도르가 그런 슈페나를 슬쩍 흘낏하고는 올라타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못 이기는 척 그 손바닥에 발을 디디자, 리카도르는 처량하게 속눈썹을 드리우더니 짐짓 엄살을 피웠다.
“아파, 슈페나.”
그 하얀 속눈썹 아래에 감추어진유수한 푸른 눈망울에는 장난기가 깃들어있었다.
“두개골에 금이 간 것 같은데.”
수인은 학습의 동물.
첫 만남 때 당했던 개수작이 더 이상 먹힐 리 없었다.
슈페나는 상큼하게 날개를 들어올려 세밀한 깃털 컨트롤을 통해 법규를 만들어냈다.
엿 먹으라고.
“비비펫!”
파랑새가 뽁뽁뽁 발로 리카도르의 손을 옴팡지게 밟았다.
그러자 리카도르는 반대쪽 손도 내어주며 못내 아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안 통하네.”
한참 정의 구현을 하던 슈페나가 털썩 주저앉았다.
물론 땅바닥이 아닌 리카도르의 손바닥에.
‘아, 다리 아파.’
그녀가 리카도르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시그널을 보냈다.
“삐비빗.”
주물러.
“삐비비비잇!”
주무르라고!
너 때문에 흥이 깨졌으니 책임져!
그렇지만 파랑새의 언어를 사자가 알아들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내가 각종 수인 고유의 울음소리를 배워서 아는데, 주물러달라는 뜻 같은데?
저편에서 풉, 비웃으며 상황을 관망하고 있던 카누스가 친절히 통역을 해주었다.
그에 리카도르는 작은 파랑새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집사야, 거기.
슈페나는 나름 테라피를 받으며 쌓인 피로를 풀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삐비이…?”
쥐가 나버렸다.
파랑새는 날개를 뻗어 가느다란 다리를 어떻게든 조물조물하고자 애를 썼다.
찌르르, 전류가 몸을 타고 피어오르는 감각에 슈페나는 데굴데굴리카도르의 손바닥 위를 굴렀다.
피식, 반사적으로 리카도르는 실소했다.
그가 손등으로 제 입가를 가리곤 몸을 들썩였다.
그 사이로 보이는 붉은 입매는 시원한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다짜고짜 쥐가 난 파랑새라니.
‘웃어? 이게 웃겨?’
슈페나는 잘게 밀려오는 아픔에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엉엉 울상을 지었다.
-새가 쥐도 나네.
얄미운 카누스의 반응 때문에 더 서러웠다.
“슈페나, 아파?”
사각지대에서 무릎을 세우곤 조용히 있던 리리엘라도 쭈뼛쭈뼛슈페나에게 다가갔다.
‘뭘 어떻게 해줘야 하지?’
리리엘라는 일단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슈페나의 옷자락을 주워들곤 눈알을 데구르르 굴렸다.
이내, 할 일을 찾았다는 듯 집게 손가락으로 슬그머니 파랑새의 다리를 잡아당겼다.
혹시라도 부러질까 미약한 힘으로,
‘무서워. 너무 작아.’
한껏 겁을 집어먹었지만 리리엘라는 열심히 쥐를 풀어주기 위해 애썼다.
이윽고 슈페나의 증세가 호전되자, 리카도르는 자그마한 파랑새를 땅바닥에 내려주었다.
그리곤 속닥였다.
“이 정도로 지치면 어쩌려고, 부인.”
그가 손등으로 파랑새의 머리를 부드러이 쓸어내리며 걱정을 내보였다.
“가을 순회 때는 번잡해서 내가 신경 써주기도 힘들 텐데.”
리카도르는 단단히 못을 박았다.
“강하게 커야지.”
네가 내 아빠냐?
육아물이야?
왜 육성을 하고 있어…
슈페나는 시무룩하게 늘어졌다.
빳빳이 솟아있던 꽁지깃도 추욱처졌다.
그 모습을 본 리카도르가 달래는 건지 꿀 같은 휴식 제안을 했다.
“그래도 힘들면 내일까지 쉬고.”
“벳?”
슈페나가 반색했다.
“싫어?”
그럴 리가.
‘내일 정보상에 가면 되겠다!’
그동안은 피곤해서 바로 곯아떨어지기 일쑤가 아니었던가.
저택 밖으로 나갈 엄두도 못 냈었다.
드디어 만끽하는 휴일에 행복해진 슈페나는 날개를 들어 하트 모양을 만들어냈다.
일종의 감사 표시 겸 아부였다.
하나, 그 위력은 리카도르가 아닌 다른 이에게서 나타났다.
“협.”
너무 귀여워.
파랑새가 날개 하트를 날렸어.
리리엘라는 들고 있던 슈페나의 운동복을 무심코 구기며 제 심장을 부여잡았다.
그러더니 그대로 땅에 코를 박더니 고꾸라졌다.
사인은 심쿵사였다.
“삐비비빗!”
언니, 정신 차려!
슈페나는 난감한 기색으로 찢어진 제 옷자락과 리리엘라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46화
하루를 꼬박 지지고 볶으며 보낸 뒤, 그다음 날 아침.
깔끔한 흰색 상의와 멜빵바지를 야무지게 차려입은 슈페나가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그 요상한 정보상을 만나러 가는 만큼 활동성이 좋은 옷들로 골라 입은 참이었다.
농사라도 지으러 가는 듯 자유분방한 슈페나의 차림을 본 리카도 르가 걱정스레 물었다.
“정말 혼자 가려고?”
“난 애가 아니야.”
그에 슈페나가 천연덕스레 대꾸했다. 똑 부러진 참새처럼 눈을 부릅뜨고는, 그런데 리카도르는 슈페나와의 거리를 바짝 좁혔다.
그리고는 그녀의 어깨에 가볍게 두 손을 얹곤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14살이?”
슈페나는 어쩔 수 없이 리카도르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 정도면 다 컸지.”
전혀 신빙성 없는 발언이었다.
“그렇다기엔 너무 작은데.”
리카도르는 손도, 발도, 키도, 체구도, 얼굴도, 모든 게 조막만 한 제 부인을 낱낱이 뜯어보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슈페나가 발뒤꿈치를 들어 올리더니 이마를 그의 가슴팍에 콕 박았다.
“봐봐. 까치발 서면 네 어깨까지는 닿아.”
“고작?”
“내가 나중에 너보다 더 크면 어쩔 건데?”
그녀는 한술 더 떠 오른손을 머리 위로 쭈욱 스트레칭하듯 뻗더니,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그 물음에 리카도르가 도로 침대에 앉아 슈페나를 쳐다보며 답했다.
“그럼 내가 이리 부인을 올려다 봐야겠지.”
활짝 젖힌 커튼 너머로 들어온 햇빛이 리카도르의 낯에 내려앉았다.
그 빛을 따라 그의 푸른 눈망울에도 물결이 쳤다.
‘이런 각도에서 보니까 또 새롭네.’
그 청명한 리카도르의 눈동자는 이내 이채를 띠며 어여쁘게 반달모양으로 휘었다.
“근데 그런 날이 오긴 할까?”
명백히 슈페나를 놀리는 듯한 눈빛.
그녀는 쩝 혀를 차더니, 입을 국닫았다.
할 말이 없네.
로판 남주는 뭐든 다 큰 게 정석이었으니까.
키도, 손도, 가슴통도 그리고……
크흠.
이하 생략하며 슈페나가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었다.
상념을 없애버리려는 몸동작이었다.
그러는 사이, 리카도르의 당부는 계속되었다.
“치안이 좋은 곳이긴 하지만 호위는 꼭 대동하고.”
그가 심플한 검은 칼집에 싸인 예리한 단검을 건넸다.
도대체 저 파랑새가 무슨 생각으로 평소와는 다른 옷을 입은 건지 의문이었으니.
“호신용품도 꼭 챙겨가. 뭐, 배운 거 써먹을 일은 없으면 좋겠지만.”
설마 어머니한테 로네악 꽃이 핀땅을 받았다더니 열매 뽑으러 가는 건 아니겠지.
바로 근교에 있는 땅이던데.
리카도르가 그리 실없는 생각을 할 무렵, 슈페나는 부러 장난스레한 발짝 다가가 허리를 숙였다.
그러곤 그대로 리카도르에게 헤드락을 걸었다.
“이렇게?”
갑자기 덮쳐진 힘 때문에 리카도 르의 몸이 살짝 뒤로 쏠렸다.
슈페나도 덩달아 그의 품에 안기듯 기울어졌다.
내재된 운동신경 덕에 손으로 침대 시트를 짚은 그는 아무렇지 않게 그녀를 받아내었다.
“자세가 좀 이상하긴 한데 레슬링하는 것 같네.”
슈페나가 아랑곳하지 않고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구르며 다시 한번 그에게 치대었다.
그러면서 신이 난 꾀꼬리같이 청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아니면 요렇게?”
“까분다.”
리카도르가 손가락으로 슈페나의 이마를 살짝 퉁겼다.
힘 조절을 했기에 전혀 아프진 않았지만, 그녀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작게 신음을 토했다.
“아!”
다 티 나는 오버액션에 리카도르는 남몰래 피식 웃고는 짐짓 속아넘어가 주었다.
“아파, 부인? 내가 너무 세게 때린 건가.”
그것도 모르고 슈페나는 침대에 엎드린 채 헤헤,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죽을 것 같다.…….”
끙끙 앓는 듯한 그녀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주변을 배회했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슈페나는 슬그머니 얼굴을 들고 힐끔 리카도르를 곁눈질했다.
‘어?’
그는 가만히 눈을 감은 상태로 침대 위에 앉아있었다.
리카도르가 벌을 받는 것처럼 얌전하게 속살거렸다.
“기분이 풀릴 때까지 마음대로 해도 돼.”
오, 그런 기회를 사양할 리가.
슈페나는 살금살금 무릎으로 기어가 리카도르의 바로 앞에서 멈추었다.
‘그나저나 뭘 하지?’
얼굴에 그림을 그릴까? 아니면 꿀밤을 먹일까?
속눈썹이 촘촘히 드리운 리카도 르의 얼굴은 곱게 빚은 백자같이 단정했다.
아직 젖살이 완전히 빠질 나이는 아니라 그런가, 하얀 편인 볼 살도 제법 말랑말랑해 보였고, 슈페나는 저도 모르게 검지로 리카도르의 볼을 콕 찔렀다.
약간은 차가운 듯한 피부의 감촉르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 전해졌다. 그리고 그건 리카도
“간지러워.”
그가 눈가를 찡그리더니 입술을 달싹였다.
“간지러워? 그럼 더 해야지!’ 슈페나가 신이 난 기색으로 간지럼을 태웠다.
처음엔 가만히 당해주던 리카도르는 점점 몸을 뒤로 뺐다.
그렇게 그 둘은 점점 침대 위를 데구르르 구르며 엉겨 붙었다.
그 순간, 노크 소리가 들렸다.
슈페나는 리카도르와 엎치락뒤치 락하느라 다른 곳에 신경이 쏠린 상태였다.
곧이어 살짝 문이 열리고 그 틈새로 리리엘라가 빼꼼 얼굴을 들이밀었다.
남의 방 문을 함부로 여는 건 예의가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만, 하도 대답이 없는 탓에 한 행동이었다.
“들어가도 돼?”
그런 리리엘라의 두 눈이 일순 크게 뜨였다.
침대 위에서 슈페나와 리카도르가 뒹굴고 있는 광경.
“……응?”
도르륵 눈알을 굴리던 리리엘라는 어버버, 말을 더듬더니 살포시도로 문을 닫았다.
언니,
그거
아니야…돌아와
뒤늦게 타인의 기척을 알아챈 슈페나가 동공 지진을 일으켰다.
리카도르는 뭐가 문제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저게, 이 씨.’
슈페나가 아연실색해진 낯으로 호달달 입술을 짓씹을 무렵, 리리 엘라가 도로 방에 들어왔다.
그녀는 잔뜩 흥분한 기색이었다.
씨익씨익, 콧김을 내뿜으며 리카도르를 노려보던 리리엘라는 기어코 비장한 한마디를 내뱉었다.
“이, 이 도둑놈!”
그녀가 재빨리 슈페나를 둘러업고는 방에서 빠져나왔다.
리카도르의 마수에서 슈페나를 구해낸 용사, 리리엘라는 땀이 송골송골한 제 이마를 뿌듯하게 닦았다.
“언니, 뭔지 모르겠지만 저 좀 내려주시면 안 될까요?”
그러는 동안, 짐짝처럼 리리엘라의 어깨에 매달려있던 슈페나가 어리둥절하게 부탁했다.
“어? 미안.”
리리엘라는 빠릿빠릿하게 슈페나를 바닥에 내려주었다.
그러면서 꼭꼭 당부했다.
“저놈이 혹시나 또 그러면 나한테 와!”
“네? 무슨..…?”
“…그, 아까처럼 막, 음……아무튼 내가 지켜줄게!”
굳은 마음가짐으로 선언한 리리 엘라는 무언가 할 말이 남았다는 듯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그러다가 이내 용기를 내어 입술을 달싹였다.
“그리고 혹시… 오늘 나랑 같이 저택 밖으로 가지 않을래?”
그녀는 메고 있던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었다.
어제 슈페나가 입었던, 지금은 다해진 운동복.
사실 리리엘라는 슈페나에게 같이 옷을 사러 가자고 말할 계획이었다.
어제 자신이 망가뜨렸던 옷에 대한 사과와 저번 생일 때 입은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새로 사줄게.”
“네?”
“긍정이지? 그럼 지금 시간 돼?”
이거 그냥 의문이었는데.
그렇지만 솔직하게 말할 수가 없었다.
웃고 있는 리리엘라의 얼굴이 지나치게 살벌해서.
아니라고 말했다가 풀이 죽으면 더 험악해질 것만 같았다.
그때, 뒤늦게 정신을 차린 리카도 르가 픽 웃으며 걸어와 그들 사이를 갈랐다.
“도둑은 누님인 것 같은데.”
“왜?”
“잘 놀고 있는데 방해한 건 누님이잖습니까.”
리카도르는 주저 없이 슈페나의 손을 맞잡고는 보란 듯이 들어 올렸다.
그리곤 슬쩍 허리를 숙여 슈페나의 귓가에 속삭였다.
“보아하니 같이 나가자는 것 같은데 혼자보단 낫겠네. 다녀와, 부인.”
그 모습을 본 리리엘라는 주먹을 옴팡지게 쥐고는 투지를 불태웠다.
“내 동생이지만 너무, 너무……
재수 없어.”
리리엘라의 낮은 분노를 눈물로 분출해낼 듯 억울하게 울상 지어졌다.
금방이라도 티격태격할 것 같은 상황에 슈페나는 잽싸게 리리엘라의 등을 떠밀었다.
“가요, 언니!”
그렇게 바깥 외출 계획에 리리엘 라가 추가되었다.
슈페나는 리리엘라를 따라 마차에 올라타면서도 고개를 갸우뚱기울였다.
‘정보상을 어떻게 만난담? 몰래 다녀올 방법을 생각해봐야 하나?’
좀 불안하긴 했으나, 긍정적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한편, 리리엘라는 힐끔힐끔 슈페나를 곁눈질하며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노란색 프릴 달린 원피스 입으면 병아리 같을 텐데. 아, 순회 때 필요한 옷도 사줘야겠다.’
슈페나를 어떻게 꾸밀지에 관한 치밀한 시뮬레이션을.
이윽고, 마차는 번화가를 향해 매끄럽게 나아갔다.
“내 손 잡아.”
리리엘라는 데리고 나온 호위 기사들을 제치곤 듬직하게 슈페나를 에스코트했다.
“그럼 이제 가볼까?”
“네?”
언뜻 결연함까지 엿보이는 제안에 슈페나가 본능적으로 반문했다.
리리엘라는 힐끔 슈페나의 눈치를 살폈다.
“왜, 싫어?”
햇살이 환해서인가, 유독 눈빛이 이글이글 불타는 듯해 보는 이들은 약간 기겁했지만.
슈페나는 바들바들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무한 긍정했다.
“아니요. 좋습니다. 무조건 좋을 것 같아요.”
나름 친해진 것 같았으나, 리리엘 라의 포스는 여전히 어마어마했으니까.
어쩌다 보니 리리엘라 언니와 오붓한 데이트를 하게 되었다.
그 둘은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와, 차라리 어제처럼 특훈하는 게 나을 것 같아.’
별수 없이 따라다니게 된 슈페나는 녹초가 되어 늘어질 정도로, 역시 수인들의 왕이라 불리는 사자의 체력이란 남다른 법이었다.
“이번엔 여기.”
리리엘라가 휘황찬란한 인테리어의 의상실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슈페나 또래의 수인들이 입을 법한 옷들이 널려있었다.
연분홍색 코튼 원피스, 주황색 호박 바지, 발목 길이의 하늘하늘한 흰색 치마.
“저런 사냥복 같은 것도, 순회를 가려면 필요할 거야.”
개중 리리엘라가 고른 건 튼튼한 갈색 가죽으로 만들어진 여성용 라이딩 슈트였다.
더구나 재킷이 딱 달라붙고 짧아서 맵시 있는 디자인이라서 야외활동에 적합해 보였다.
“입고 와, 슈페나.”
리리엘라는 선선히 손을 흔들었다.
얼떨결에 의상실 한편에 조성된 드레스룸에서 15번째 의상을 갈아입게 된 슈페나가 멍하니 생각했다.
‘내가 어째서 이러고 있는 거지?’
그런 슈페나의 의문은 오래가지 못했다.
직원들이 다가와 환복을 도와줬으니.
‘뭐, 옷은 예쁘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옷은 죄가 없었기에 그냥 즐기기로 했다.
이윽고, 치장이 끝난 후 슈페나는 방문을 열고 리리엘라에게 말을 건넸다.
“잘 어울려요?”
그에 리리엘라는 숨을 헉, 몰아쉬었다.
쪼꼬미가 사냥복을 입었어!
잡으려던 게 사냥감이 아니라 내 심장이었나 봐!
밀려드는 감격스러움에 그녀가 본능적으로 주먹을 쥐었다. 그와 동시에 가볍게 기둥을 쳤다.
그랬더니….
벽이 박살 났다.
저절로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슈페나가 애써 밝게 웃으며 수습을 시도했다.
“아하하, 지은 지 조금 된 건물일까요……?”
하지만 이어지는 직원의 말에 장렬히 실패했다.
“신축건물입니다, 손님.”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47화
“아….”
“아…”
결국 거듭 사과를 한 뒤 배상해야만 했다.
숙연한 얼굴로 의상실을 벗어나며 슈페나는 분위기를 풀고자 어색하게 이야기했다.
“힘이 굉장히 좋으시네요, 언니.”
“.. …미안.”
리리엘라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리듯 대답했다.
그 순순한 사과에 슈페나의 속눈썹이 크게 한들대었다.
‘그래, 저 언니가 나쁜 수인은 아니야.’
그런 감상이 머릿속을 부유하던 순간, 리리엘라가 비장한 어조로 슈페나에게 쇼핑백을 한가득 쥐여주었다.
“이것들은 선물이야.”
“고마워요. 근데 왜 저한테 이런걸….”
슈페나는 말끝을 흐리며 감사를 표했다.
그러자 리리엘라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꾸물거리며 입만 벙긋거렸다.
쪼꼬미가 쇼핑백에 파묻혔네.
“……귀여워.”
“네?”
슈페나는 그 앞 글자밖에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더 이상 질문하면 귀를 물어뜯어버리겠다는 살인 예고인가.
그녀가 자못 심각하게 고민했다.
한편, 리리엘라는 부끄러움에 몸서리치며 저도 모르게 앞으로 전력 질주를 했다.
“저기요! 언니, 같이 가요!”
슈페나는 숨을 헥헥, 내쉬며 혼자만의 세계에 빠진 리리엘라를 쫓았다.
어쩌다 보니 술래잡기가 시작되었다.
몇 분 후.
슈페나는 마차 안에서 멀뚱멀뚱멍을 때리고 있었다.
쇼핑백을 줄줄이 들고 따라온 호위 기사들은 급발진한 리리엘라를 찾으러 뿔뿔이 흩어졌으니까.
혹시나 리리엘라 언니가 길을 잃고 헤맬까 싶어서 가라고 시켰었다.
‘뜻밖의 개꿀인가?’
어떻게 몰래 정보상을 찾아가나 고민했는데.
“잠깐 시계 공방에 다녀올게.”
그녀가 상대적으로 난도 낮은 마부에게 통보하듯 이야기했다.
그러고는 마차에서 내려 공방이 있는 시장을 향해 도도도도 뛰어갔다.
바삐 걷자 나름 익숙한 시계 공방이 눈에 띄었다.
슈페나는 주머니 안에 있는 호신용 단도를 꾹 움켜쥐었다.
‘원작에서는 정보상이 무력을 소유했다고는 나와 있지 않았지만.
그래도 조심하는 게 나을 터.
뭐, 마부에게도 행선지를 말해놓았으니 괜찮겠지.’
날고 기는 정보상이라도 체드윅가를 건드리는 위험부담을 지는 건 쉽지 않을 테니까.
슈페나는 힘차게 문고리를 움켜쥐었다.
딸랑—
문 위쪽에 걸어놓은 종이 청아한 소리를 내었다.
은은한 조명만이 불을 밝히는 가게 안은 밖에서 본 것과는 달리 포근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조심스레 입을 떼었다.
“저기요…?”
눈부신 황금으로 장식된 새하얀 대리석 카운터에 이곳의 주인으로 보이는 누군가가 앉아있었다.
‘와, 보송보송한 햇살 냄새. 향수라도 뿌린 건가.’
화려한 금발 곱슬머리와 짙은 신록이 피어난 듯 화사한 녹안의, 나비 가면을 쓴 여인.
‘소설에서도 정보상이 가면을 쓰고 있었다는 묘사가 있었나?’
기억이 잘 나질 않았다.
그때, 어딘가 나직하고 시니컬한 중저음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안 팔아.”
“네?”
슈페나의 의문에 여인은 그제야 고개를 들고 슈페나를 빤히 응시했다.
“어라?”
그러더니 완전히 태도를 뒤바꾸어 이제는 연극을 하듯 과장된 어투로 이야기했다.
“저희 솔레제 시계 공방을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객님.”
그 음성의 끝은 얼핏 고조되었다.
기다리던 이를 만난 사람처럼.
“드디어 오셨군요.”
뭐지?
본능적으로 이상함을 감지한 슈페나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하나, 정보상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이끌었다.
여인이 입은 검은색 실크 드레스가 요사스레 바닥에 끌렸다.
“이쪽으로.”
슈페나는 정보상을 졸졸졸 따라 카운터 바로 옆에 있는 작은 방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의 인테리어는 고풍스러웠다.
조명도 아까보다는 훤했고.
슈페나가 푹신한 소파에 앉으며 운을 띄웠다.
“일전에 의뢰를 맡긴 적이 있는데 기억하시나 봐요.”
“예. 제법 특별한 의뢰였기에.”
그리 답하는 정보상의 목소리에는 기묘한 울림이 들어있었다.
‘분위기가 참 묘한 수인이야.’
슈페나는 그런 감상은 잠시 묻어 두곤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꺼내들었다.
“알아보고 싶은 게 있어서 왔어요.”
슈페나가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으면서 설명했다.
“온천이 유명한 도시를 찾고 싶어요.”
“그런 조건이라면 수십 군데는 나올 텐데.”
“어”
“어…….”
슈페나는 잠시 말끝을 흐렸다.
쥐고 있는 정보를 어디까지 오픈해야 할까 싶어서..
혹시라도 정보상이 보물창고라는 걸 눈치채고 먼저 다 털어 가면 어떡해!
망설이다 부가적인 설명을 덧붙였다.
“도심 한가운데에 시계탑이 있는 곳이요.”
그 미지의 장소는 시계 톱니가 굴러다니는 뾰족한 첨탑 안이라고 그랬으니까.
온천 근처 뒷산의 어느 동굴로 흘러들었다가 도심 중앙에 있는 시계탑까지 당도하게 되었다지.
“찾을 수 있나요?”
“며칠 말미를 주셔야겠어요. 웬만한 도시에는 시계탑 하나쯤은 다 있는지라.”
“아, 탑 표면에 어떤 꽃이 새겨져 있는 걸로 알아요.”
그 말을 들은 정보상의 낯에는 미세한 균열이 일었다. 무언가를 계속 인내해온 사람의 평정이 깨진 것처럼.
“여기요.”
로네악 꽃 덕에 가능해진 씀씀이였다.
아직 대량재배 같은 건 못해서, 동네 구멍가게 정도의 규모라곤 해도 제법 예약이 많았으니까.
정보상은 편하게 다리를 꼬더니 그 자리에서 봉투를 열어보았다.
후후, 액수를 가늠해보는 듯한 입김 소리와 함께 설핏 만족스러운 웃음이 들려왔다.
그 미소에 슈페나는 은근슬쩍 끼워 팔기를 했다.
주었던 여인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한 미끼였다.
하지만 예상치도 못했던 답이 돌아왔다.
“저번은 첫 구매 서비스.”
“아, 신박하네…”
슈페나가 작게 탄식했다.
정보상이 싱긋 미소 짓고는 사근사근하게 말을 이었다.
“다음에도 오시면 등급 올려드릴 게요. 혜택 자체가 다르답니다.”
이 집 장사 잘하네.
“제가 드렸던 그 회중시계. 본 적있을 텐데.”
본 적이 있을 거라고?
슈페나는 품 안에 있던 회중시계를 홀린 듯이 꺼내 들어 살폈다.
“잘 생각해봐요. 그게 곧 고객님의 물음에 대한 답이 될 테니.”
정보상이 처음 느꼈던 것과 같이 미궁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 오묘한 중저음으로 뇌까렸다.
‘뭐라는 거야.’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으나, 목소리가 너무 진지했기에 그저 도르륵 눈알만 굴렸다.
정보상은 우아한 몸놀림으로 손을 가슴께에 올리곤 작별 인사를 건넸다.
“부디 이곳이 고객님의 기억 속에서 변하지 않고 영원하기를.”
회중시계 뒷면에 새겨진 문장과 비슷한 멘트였다.
말을 마친 정보상은 자리에서 일어나 드레스 자락을 툭툭 털었다.
그러곤 빤히 슈페나를 쳐다보았다.
이제 가라는 건가?
“영업 끝났어요, 고객님.”
정답이었다.
“저기. 제대로 알려주시지도 않고, 전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했는데요! 저번도 그렇고 지금 장난해요?”
슈페나는 나가지 않겠다는 듯 엉덩이를 딱 붙이곤 눈에 힘을 잔뜩주었다.
돈은 돈대로 냈는데 명쾌한 해답을 얻지 못했으니까.
그러나 소용없었다.
부드러이 슈페나를 일으킨 정보 상이 단호하게 못을 박았다.
“또 봐요. 고객님.”
슈페나는 어쩔 수 없이 공방 밖으로 나가게 되었다.
그렇게 공방에 도로 정적이 내려앉고.
혼자 남게 된 정보상은 붉은 나비 가면을 벗었다.
찬란한 금발이 가을철 찬란한 밭처럼 밀빛으로 물들었다.
그와 함께 여인은 보다 어려진 외양으로 변했다.
슈페나 또래로 보일 만큼 어린 소녀의 모습으로.
소녀는 슈페나가 나간 출입문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자못 처연히 독백했다.
“어렸을 땐 저렇게 생겼었구나.”
그런 소녀의 녹안에는 은은한 그리움이 담겨있었다.
***
“씨이, 말렸어!”
한편, 슈페나는 후덥지근한 바깥 공기를 마시며 퉁명스레 발을 굴렀다.
며 을
괜히 돈 낭비를 했다는 생각에 우울해진 탓이었다.
살갖에는 습한 기운이 묻어나왔으나, 해가 저물고 있는 시각이었다.
‘시간은 그렇게 많이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때마침, 체드윅 가의 마차가 슈페나의 앞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슈페나!”
리리엘라는 차창을 열고 슈페나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면서 멋쩍게 사과했다.
“내가 잠깐 이성을 잃었나 봐. 나 때문에 혼자 돌아다닌 거야?”
“그냥 시계가 고장 나서 맡기러간 거라 별일 아니었어요.”
슈페나는 대수롭지 않은 척 노련하게 둘러대었다.
“그래도 앞으론 호위 대동하고 다녀. 위험해.”
“네, 언니.”
리리엘라는 미안한 마음이 컸는지 별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은 채, 슈페나에게 폭 안겼다.
두 사람을 태운 마차는 체드윅가로 향했다.
신방 앞.
리리엘라가 작게 손을 흔들며 뿌듯하게 당부했다.
“옷 편하게 입어.”
“네, 매일매일 다른 걸로 바꿔 입을게요.”
슈페나도 배시시 미소를 지으며 긍정했다.
리리엘라가 사준 옷들은 한 계절동안 매일 다른 옷을 입어도 될만큼 많았다.
하루는 연보라색 시폰 원피스.
또 다른 날은 편안한 와이드 팬츠,매일매일 새로운 옷이었다.
바람이 선선해질 무렵, 슈페나가 라이딩 슈트를 꺼내 드는 날이 왔다.
순회의 계절, 가을이 되었다.
그리고 조금 늦는다 싶었지만, 정보상에게서도 서신이 도착했다.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48화
“진짜 저 정보상 정체가 뭐지?
정보가 생각보다 고퀄인데.”
슈페나는 저번과 마찬가지로 종이학을 통해 전달받은 쪽지를 보며 내심 감탄했다.
-고객님이 의뢰하신 곳의 지명은 르쉐 상세한 군사용 지도도 동봉합니다~군사용 지도?
어떻게 이런 걸 구한 거지?
딸려온 지도를 야무지게 펼쳐 살핀 그녀가 혼잣말했다.
“르쉐?”
확실히 들어본 적 있는 지명이었다. 그것도 원작에서.
슈페나의 눈매가 좁혀졌다.
‘어…?’
지도를 쥔 채 파들거리던 손의 떨림이 이내 멎어 들었다.
지도에 수상한 게 하나 있었다.
“설마 이 정보상…… 알고 있던건 아니겠지.”
보물창고를 찾고 있었다는 사실을.
슈페나가 지도 속에 찍힌 두 개의 빨간 점을 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그 점은 다름 아닌, 시계탑과 작은 산봉우리 속 동굴에 찍혀 연결되어 있었다.
확실히 미심쩍었다.
슈페나가 방어적인 자세로 팔짱을 끼며 속으로 불만을 토로했다.
‘그나저나 뭘 알고 있는 건지 따질 수도 없겠네.’
오늘부터 순회 일정이 시작되었으니까.
아무튼 어딘지 알았으니, 순회가 끝나는 대로 어머님한테 말씀드리고 겨울에 르쉐로 가보면 될 터.
슈페나는 지도와 정보상의 쪽지를 제 책상 서랍 구석에 꼭꼭 숨겨두었다.
그리고는 마저 채비했다.
곧이어, 옷까지 다 갈아입었을때.
“가자, 부인.”
비슷하게 활동성 좋은 사냥복 차림의 리카도르가 노크를 하고 들어와 이야기했다.
그렇게 슈페나는 다른 이들과 함께 순회 행렬에 참여했다.
비교적 가까운 곳으로 간다고 들었으나, 며칠에 걸친 기나긴 여정이 시작되었다.
뭐, 별 건 없었다.
그냥 다 같이 경계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뿐이었으니까.
애초에 순회 자체가 그냥 경계 지역을 한 바퀴 빙 둘러보는 행사이기도 했고.
그녀가 덜커덩덜커덩 나아가는 마차 차창 너머의 풍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우와, 예쁘다.”
확실히 경계 지역으로 넘어가니 숲의 생태나 기후 같은 요건들이 점차 달라졌다.
사자 영지는 평원이 많고 따뜻했다면, 지금 가고 있는 목적지는 숲이 더 울창하게 우거진 느낌이 랄까.
확실히 경치를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창문가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슈페나를 지그시 쳐다보던 리카도르가 나른하게 답했다.
“곧 도착할 것 같네.”
그 말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는 자리에서 멈추었다.
그에 먼저 마차에서 내린 리카도 르가 슈페나를 향해 잡으라는 듯 손바닥을 펼쳤다.
“내리실까요. 부인?”
“넹!”
슈페나는 활기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산골 소녀처럼 어깨에 화살 통을 멘 슈페나는 총총총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냥 여행 온 기분이네.’
나중에 비라도 쏟아질 듯 하늘이 조금 흐리다는 것 빼곤 평화로운 숲이었다.
한창 호기심 어린 기색으로 주변을 살피던 그녀는 슬며시 주저앉아 통통 제 다리를 주먹으로 두들겼다.
‘무릎이 왜 이렇게 쑤시지.’
그간 훈련을 열심히 너무 했나.
그리 고개를 갸웃거릴 무렵, 이상 함을 감지한 리카도르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어디 안 좋은 건가.”
살짝 서늘한 리카도르의 손은 자연스레 슈페나의 이마 위로 얹혔다.
딱 기분 좋을 정도의 냉기에 슈페나가 스리슬쩍 눈을 감고는 약간 힘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계속 앉아있다가 걸으니까 몸이 찌뿌둥했나 봐.”
리카도르는 제 손을 도로 치우곤 일렁이는 눈으로 슈페나를 빤히 응시했다.
그 시선에 그녀가 장난스레 눈을 빛냈다.
“왜, 업어주게?”
“그걸 바라?”
그는 당장이라도 그러겠다는 듯 망설임 없이 받아쳤다.
“아니”
슈페나는 손사래를 치며 부정했다.
그런데 리카도르가 먼저 그녀를 번쩍 들어 업는 게 더 빨랐다.
엉겁결에 리카도르의 등짝에 기대게 된 슈페나가 살짝 난감해진 어투로 한 차례 더 거절했다.
“아니라니까.”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좀 창피하잖아.
다들 뭐라고 생각하겠어.
그러나 리카도르는 짐짓 혀를 차며 슈페나를 더 꽉 끌어안은 채, 걸음을 재촉했다.
“흔들리니까 가만히 있어.”
그 핀잔을 들은 그녀가 쳇, 입술을 삐죽이다 리카도르의 등에 체중을 실었다.
왜인지 모르게 괘씸해서.
‘편하긴 하네.’
그래도 막 싫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같은 또래인데도 리카도르는 힘이 좋았고 등판도 제법 딴딴해서 안정감이 들었다.
다만, 아까부터 느껴지는 주변의 눈길이 조금 부담스러웠을 뿐.
그 무수한 눈길의 주인 중 하나는 리리엘라였다.
그녀는 리카도르를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아쉬움이 물씬 묻어나오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나도 잘 업을 수 있는데..….”
-난 업히는 거 잘해!
그런 리리엘라의 손목에 팔찌처럼 둘러매져 있던 카누스는 발랄하게 말을 받았다.
그러자 리리엘라가 무심하게 딱 잘라 대꾸했다.
“안, 물어봤는데.”
-뭐?
“…아니야.”
얼마 못 가 서슬 퍼런 카누스의 기세에 손가락만 꼼지락거렸지만.
리리엘라는 시무룩해진 상태로 로다음을 기약했다.
이런 리리엘라와는 달리 슈페나를 보며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수인도 있었다.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이군.”
칸이었다.
칸은 제 아들에게 업힌 며늘아가의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한편, 로네악 꽃 사건 덕분에 슈페나에게 우호적으로 변한 원로 사자의 반응도 칸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작은 마님은 소가주님한테 업혀 있네요. 귀여워라.”
안타깝게도 태클을 거는 수인은 꼭 하나씩 있었다만.
입덕부정기를 겪고 있는 원로 사자, 제임스가 새침하게 쏘아붙였다.
“흥, 지금도 저리 소가주님께 폐를 끼치는데 앞으로도 잘 버틸 수나 있을는지.”
그에 다른 원로 사자는 눈썹을 추켜세우더니 제임스의 이중성을 나무랐다.
“작은 마님이 마음에 안 드시나 봐요? 로네악 꽃 치료제도 제일 먼저 예약하셨으면서.”
“그래도 테스트를 통과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인정하기엔 한참 이릅니다.”
“그럼 오늘 잘 따져보지요.”
결론은 또 두고 보자는 것으로 흘렀다.
“어험, 오늘은 우리 아들 챙기기도 바쁜데.….”
한창 슈페나를 반대하기 바빴던 제임스는 난색을 표하며 슬금슬금 뒤로 빠져나갔다.
그러고는 제 아들에게로 신경을 기울였다.
경계 지역인 만큼 갑작스러운 위험이 닥칠 확률도 있지 않던가.
아무튼 수인들은 삼삼오오 모여 숲을 탐험했다.
사자들은 숲의 깊은 곳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리카도르에게 나무늘보같이 업혀 있던 슈페나도 이제 두 다리를 딛고 숲길을 걸었다.
오르막길도 제법 나오는 곳에서 신세를 질 순 없잖아.
졸졸졸 맑은 물이 가득한 계곡이 흐르고, 살랑살랑 나뭇잎이 바람에 부대끼는 숲의 정경.
몹시도 평화롭고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몇몇 수인들은 동물화를 해서 맨발로 숲을 뛰어다녔다.
활기찬 행군 속에서 슈페나는 아무런 생각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 묵묵히 걷고 있을 때.
톡
차가운 무언가가 슈페나의 콧등 위로 떨어졌다.
그녀가 반사적으로 손으로 얼굴을 부비자 시린 물기가 묻어나왔다.
“비?”
슈페나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숲 전체를 집어삼킬 듯 까맣게 뒤덮인 먹구름.
그 불안한 날씨를 확인한 순간, 돌연 장대와도 같은 비가 쏟아져 내렸다.
금세 슈페나의 하늘색 머리칼이 여러 갈래로 뭉치며 물기를 머금었다.
그녀가 리카도르를 흘낏 곁눈질하며 말했다.
“비가 너무 많이 내리는데?”
“이만 숲을 빠져나가야 할 것 같군.”
리카도르도 동의했다.
그 둘이 눈빛을 주고받을 무렵, 다른 사자들도 바삐 상의를 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폭우로 계곡물이 불어나 급류가 밀려올 기미가 보였다.
그에 따라 토사물이 길목을 막을지도 몰랐다.
한마디로 숲을 돌아다니기엔 최악의 날씨였다.
어쩔 수 없이 숲을 빠져나가기로 결정되었다.
슈페나는 조심스레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간 걸어온 게 제법 가파른 오르막이라 그런가, 밑은 끊임없는 내리막길이었다.
발밑으로 비 때문에 질퍽해진 대지가 밟혔다.
더 미끄러워져서인지 자꾸만 손이 허공을 휘저었다.
리카도르는 위태로운 슈페나의 팔을 잡아채 중심을 잡는 걸 도왔다.
“조심.”
“어, 고마워.”
덕분에 그녀는 앞으로 고꾸라지는 불상사를 피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그냥 동물화해서 날아가는 게 빠를지도.’
아니다. 오히려 비 때문에 힘들려나.
잠시 다른 상념을 하는 사이, 그를 눈치챈 리카도르는 더욱 강하게 그녀를 붙들었다.
놔주지 않을 듯이 진득하게.
“그냥 내 손 잡고 내려가는 게 더 빠를 것 같은데.”
일리가 있는 말이었기에 슈페나도 그냥 수긍했다.
이제는 축축해진 피부 위에 습하고 따뜻한 온기가 덧대어졌다.
찝찝하기 딱 좋은 상황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차분하게 숲을 내려가고 있던 순간.
앳된 사자의 울부짖음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크왕! 크와앙!”
뭐지?
제법 위급한 듯한 울음에 슈페나가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요란스러웠던 사자의 목소리는 점차 구슬프게 잦아들었다.
“크앙….”
주변에 있던 사자들도 손으로 입을 가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어머, 어째….”
“이거… 너무 비가 많이 내리 는데.”
아가 사자가 발을 헛디딘 모양인지 물살이 세찬 계곡에 떨어진 모습.
다행히도 수영을 할 줄 아는 건지 둥둥 떠다니고는 있었지만, 곧 아래로 쓸려내려 갈 것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하늘색 공?’
아가 사자는 공을 잡으려 애를 쓰고 있었다.
저걸 가지고 놀다가 떨어진 건가.
“아들!”
그때, 원로 사자 제임스가 주저없이 소용돌이치는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안타깝게도 소용은 없었다.
오히려 아가 사자와 제임스가 사이좋게 급류에 휘말린 형국이 되어버렸다.
사자들은 재빨리 동물화를 했다.
그리고선 커다란 나무를 발톱으로 무너뜨려 어떻게든 그 둘을 구출하려고 애썼다.
동물화를 하지 않은 사자들도 이 능을 활용해 도우려 노력했다.
하지만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고 안타까운 탄성만 늘어갔다.
그 갑갑한 감정이 넘실대는 와중, 슈페나는 머리를 팽팽하게 굴리며 고민했다.
‘내 이능을 쓰면 구할 수 있지 않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간은 염력을 숨기고 있었으나, 이런 상황에서마저 가진 힘을 아낄 수는 없었다.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할 수 있을까?’
저렇게 큰 동물은 들어본 적이 없단 말이야.
그렇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눈앞에서 누군가 죽어가는 꼴을 어찌 보겠어.
되든 안 되든 해보는 수밖에.
그간 이능 수련도 틈틈이 했고, 독수리 저택에서는 엄청난 양의 종이 서류도 들었는걸.
슈페나는 눈을 부릅뜨고 손끝에 신경을 집중시켰다.
‘될 것 같아!”
형체 없는 염력이 꼬르륵 가라앉고 있는 사자들에게로 옮겨갔다.
거센 물살 속에서도 서로 놓지 않으려 꼬옥 끌어안고 있던 두 부자는 두둥실 허공에 떠올랐다.
그나마 정신을 차리고 있던 제임스가 동그랗게 뜨인 눈으로 두리번대었다.
그러는 사이, 그 둘은 무사히 건져져 땅 위로 올라왔다.
아가 사자가 물을 잔뜩 먹어 더 부룩해진 속을 게워냈다.
크 ….
“캡, 크흡.”
수척해진 제임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두 부자는 부둥켜 껴안고 나란히 콜록대었다.
그를 본 이들은 놀란 표정으로 수군대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람?”
“그러게요. 꼼짝없이 안 좋은 꼴을 보게 되는 건가 했는데…… 기적이 일어난 것도 아니고, 일단은다행”
안도감이 깃든 사자들의 수다는 곧이어 멎어 들었다.
염력으로 계곡물에 떠내려가던 아가 사자의 물건을 꺼낸 슈페나가 듬직하게 이야기했으니까.
“꼬마야, 이거 네 물건 맞지?”
“.……크왕?”
물에 홀딱 젖은 아기 사자가 빼꼼 고개를 들더니 눈을 깜박거렸다.
그러다 엉망이 된 자신의 하늘색 공을 앞발로 힘없이 가져가 꼬옥품에 끌어안았다.
“크와앙….”
이내 아기 사자는 비틀비틀 다가가 슈페나의 발밑에 푹 엎어져 고마움을 표했다.
모두의 시선은 슈페나에게로 집중되었다.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49화
수인들은 슈페나를 보며 놀란 기색을 감추지도 못한 채, 술렁였다.
“이거 설마 작은 마님이 구한 거예요?”
“이런 이능은 처음 보는데…….”
“허, 이건 정말 대단한 기적입니다…!”
물론 그 당사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물에 빠져 죽다 살아난 원로 사자, 제임스는 우선 제 아들의 상태부터 살폈다.
“어, 어떻게… 괜찮니, 아들아?”
다행히도 아들은 피로로 기절했을 뿐 고롱고롱 숨을 쉬고 있었다.
제임스는 휴,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었다.
슈페나가 그런 원로 사자에게 손수건을 꺼내어 건네었다.
꼴이 말이 아니었으니.
“저기, 이걸로 닦으세요.”
그 한마디에 제임스의 고개가 위로 들렸다.
이윽고, 원로 사자의 눈가가 가늘게 찡그려졌다.
그 오만 가지 감정이 가득한 눈에선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나왔다.
막둥이 아들과 제 목숨을 구원받은 덕분일까, 슈페나에게서 후광이 비치고 있었으니까.
완벽한 입덕이었다.
“가, 감사합니다. 제 소중한, 금지 옥엽으로 기른 아들을 구해주셔서, 흡, 하나뿐인 후계자라 눈앞이 핑도는 것 같았는데….”
그는 여태껏 본인이 슈페나를 파랑새라고 꺼려했던 것도 잊고 고마움을 표했다.
그리고는 굳게 다짐했다.
남은 사자생을 걸고 작은 마님을 따르겠다고.
“정말. 정말 감사드립니다, 작은 마님. 이 은혜는 해링턴 가문의 명예를 걸고 반드시 기필코 어떻게든 갚겠습니다.”
그는 흐느끼는 듯 격양된 목소리로 연거푸 슈페나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부담스러움에 같이 맞인사하던 슈페나가 일순 눈매를 좁혔다.
‘해링턴 가문?’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는 이름이었으므로.
메인 악녀의 성이 해링턴 아니던가.
‘그럼 악녀의 아버지란 말인가?’
슈페나의 머리가 여러 사자 가문의 계보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며 팽팽하게 돌아갔다.
분명 그간 외웠던 프로필에서는 저런 얼굴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착각인가.
‘와, 나 땡 잡았나 봐!’
어찌 되었건 악녀네 집안이 맞는 듯싶었다.
그렇다면 이번 일은 슈페나를 함정에 빠뜨릴 악녀에게 큰 빚을 지운 것일 터.
‘혹시나 악녀가 나를 싫어해도 저 원로 사자가 큰 방패막이로 나서 주지 않을까?’
이능을 드러낸 보람이 있었네.
슈페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녀가 분위기에 맞지 않게 씨익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겨우 내렸다.
그러곤 최대한 근엄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해링턴 가문의 충정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일게요.”
이렇게 못을 박아두면 아예 해링턴 가문은 슈페나의 편이 되었다.
고 해석될 터.
악녀네 집안인 만큼 사자들 내에서도 상당히 입김이 센 편이 아니던가.
앞으로 사자들 사이에서 입지를 다지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게 뻔했다.
그리고 그건 효과가 즉각적이었다.
“허어, 그 콧대 높은 해링턴 가문이 파랑새를 작은 마님으로 인정하다니.”
“이 정도면 연회에서의 시험은 자동으로 통과한 셈이 되겠군요.”
수인들은 뜻밖의 소식을 접했다는 듯 너털웃음만 흘렸다.
그리 요상한 공기가 주변을 뒤덮던 찰나, 어느 사자가 손을 번쩍 들고는 다른 이들에게 선언했다.
“파랑새라 하나 그간의 공으로 보았을 때 모시기 충분한 분이 아닙니까? 저희 가문도 찬성입니다.”
“엣헴, 그럼 우리 가문도.”
“크흠흠, 나도 숟가락 좀 얹어야겠구먼.”
그러자 너 나 할 것 없이 다른 사자들도 비로소 슈페나를 본인의 주인으로 받아들였다.
슈페나의 두 번째 목표가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물론 이 분위기가 일시적일 수도 있으니 앞으로도 꾸준히 노력해야겠지.’
본디 사람들의 반응은 손 뒤집듯 달라지지 않던가.
혹시나 삐끗하지 않도록 언제나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아무튼 화기애애해진 분위기 속슈페나는 방긋방긋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래도 지금은 기분이 좋으니까.’
그때, 남몰래 뿌듯한 미소를 짓던 칸이 성큼성큼 다가와 슈페나의 얼굴 구석구석을 살폈다.
“너는 어디 다친 곳 없는 거니, 며늘아가?”
뒤따라온 리리엘라와 카누스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되게 굉장했어, 슈페나.”
-결혼식 때 내 입을 막았던 그 이상한 힘이 역시 누나 이능이었구나. 뭐, 좋은 일 했네. 잘했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칭찬받던 슈페나는 힐끗 리카도르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는 작게 입 모양으로 속삭였다.
멋있었어, 라고,
그에 슈페나의 낯이 더욱 환해졌다.
드세게 내리던 빗줄기도 따뜻한 사람들의 온기 때문일까, 점점 약해졌다.
다시 숲을 돌아다녀도 될 정도로, 그래서 아까 일로 다친 수인들과 몇몇만 숲을 벗어나 야영지에서 몸을 추스르기로 했다.
덕분에 행군은 계속되었다.
한편, 씩씩하게 선봉에서 걷던 슈페나는 이곳저곳 두리번거리다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본디 숲은 계곡을 기점으로 두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그런데 그 반대쪽 숲에서 무언가 움직인 듯한 느낌을 받았다.
‘건너편에 누가 있는 건가? 계곡물이 불어나서 넘어간 수인은 없을 텐데.’
슈페나는 잠시 제자리에 멈춰 새의 예민한 시각을 동원하여 옆을 주시했다.
“깃발?”
방금 꽂힌 건지 비가 내렸음에도 세차게 펄럭이는 검은색 깃발.
그게 희미하게 눈에 띄었다.
“활 쏴볼 수 있어, 부인?”
리카도르도 수상한 기척을 눈치 챈 모양인지 계곡 저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응.”
지이익—
활시위가 당겨졌다.
슈페나는 배운 대로 한쪽 눈을 감고는 온 신경을 집중했다.
화살이 바람을 가르고 매섭게 쏘아졌다.
저 멀리서 무언가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방금 꿰뚫은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이 들기 무섭게 돌연쿠르르르, 땅이 진동하는 소리와 함께 번개가 쳤다.
다른 누군가도 아닌 슈페나가 있는 방향으로, 땅이 갈라졌다.
지진이라도 일어난 건지 주위에는 잡아먹힐 듯 기분 나쁜 소음이 가득했다.
“어……?”
바로 옆에 있던 나무가 두 동강이 나버린 채 슈페나한테로 튀었다.
곁에서 그녀를 보호하듯 주시하던 리카도르가 서둘러 검을 뽑아나무 파편을 쳐냈다.
그러고는 뒤를 돌았다.
그 순간, 쩌적 금이 가 있던 토양이 다시 소용돌이치기 시작한 계곡 아래로 무너져 내렸다.
하필 그곳에는 슈페나가 서 있었다.
“리카도르!”
슈페나는 반사적으로 리카도르를 향해 손을 뻗었다.
리카도르도 있는 힘껏 팔을 휘적 거려 슈페나를 잡아채려 노력했다.
두 손끝이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스치다 결국 미끄러졌다.
슈페나는 그대로 추락하는 수밖에 없었다.
흔들리는 상황 때문인지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려 애쓰며 잘근잘근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능! 이능을 쓰자.’
슈페나는 얼른 이능을 두르곤 두둥실 제 몸을 띄웠다.
하나, 소용없었다.
그런 그녀를 비웃기라도 하듯 다시 한번 번개가 내리꽂혔으니까.
운 좋게도 번개를 직격으로 맞은 건 아니었다.
그 여파로 떨어져 나온 바위가 슈페나를 덮쳤을 뿐.
그 충격에 스르륵 눈을 감은 슈페나가 끈이 풀린 인형처럼 맥없이 밑으로 가라앉았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탁하고 드센 물살이 슈페나를 집어삼켰다.
“슈페나! 하…빌어먹을!”
리카도르가 답지 않게 크게 뜨인 눈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리곤 실의에 빠진 듯 초점 없는 눈으로 그녀가 사라진 방향을 응시했다.
리카도르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흙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냉한 정적이 흘렀다.
그 적막을 가르고 초조하게 입술을 짓씹던 리리엘라가 용기를 내었다.
“..… 제가 가볼게요!”
리리엘라는 곧바로 물속으로 잠수했다.
놀라우리만치 결단력 있는 행동에 칸은 깊이 가라앉은 낯으로 한 자 한 자 울음을 토하듯 참담하게 명령했다.
“……지금 당장 수색조를 꾸려 계곡 상부와 하부를 살펴라.”
이내, 칸도 리리엘라를 따라 주저하지 않고 계곡물로 다이빙했다.
-다들 이런 상황에도 겁 없이 뛰어드네. 그나저나…….
홀로 남게 된 카누스의 눈초리가 영민하게 찌푸려졌다.
-비가 멈췄어. 이런 날씨 변화는…… 전혀 자연적이지 않은데.
목적을 달성했다는 듯, 어느새 하늘은 잠잠해진 후였다.
***
“그분께 혼나지는 않겠지.”
난장판이 벌어진 사이, 반대편 숲에서 검은 깃발을 거두어들인 남자가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중앙부에 뾰족한 구멍이 뚫린 검은 깃발에는 비구름처럼 소용돌이 치는 탁한 기운들이 요요히 넘실 대었다.
그건 바로 날씨였다.
이 깃발은 날씨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신물이었으니까.
‘분명 하찮은 파랑새라고 했을 텐데, 갑자기 활을 쏴서는……’
남자가 곤란하다는 듯 슈페나의 화살이 뚫고 지나간 깃발의 구멍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화를 못 이겨 제자리에서 격하게 발을 굴렀다.
남자는 답답했는지 머리 깊숙이눌러썼던 로브를 벗어 내렸다.
검은 로브에 걸맞은 새카만 흑발.
어딘가 음험한 기운이 물씬 풍기는 외양이었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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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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