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uebird Lady and The White Lion Family RAW novel - Chapter (7)
백사자가문의 파랑새 마님 7화(7/21)
남자가 헛웃음을 내뱉곤 제 까만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
바보같이 위치를 들켜 귀한 신물을 망가뜨린 셈이었으니.
어쩌면 상대방이 그의 정체를 알아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도 목적은 달성했으니 봐주시겠지.”
리카도르는 거센 급류 속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았던가.
그 옆에 있던 파랑새도.
남자는 제 발자국을 비롯한 흔적들을 재빠르게 지우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난 그 토끼놈의 예언대로 행동했어.’
토끼놈은 분명 사자놈과 파랑새를 같이 담가버리라고 그랬었다.
한 입 거리도 안 되는 소동물을 굳이 골로 보내버리란 조언은 의아했으나, 결과적으론 옳은 선택이었다.
사자놈이 저 스스로 계곡물 속에 뛰어들 줄은 몰랐으므로.
‘혹시 그 파랑새가 약점이라도 되는 건가.’
이것도 보고해야 하는 건가.
그런 고민을 하던 남자는 어깨를 으쓱이곤 음산한 어조로 단정 지었다.
“그럴 필요까진 없겠지. 각성도 못 한 사자놈 따위가, 감히 자연의 힘이 담긴 신물의 위력을 거스르고 살아남을 수는 없을 테니.”
그렇지만 남자는 망각했다.
훼손된 신물이 그 본연의 힘을 완전히 발휘하긴 힘들다는 사실을.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50화
그리고 그 남자에겐 안타깝게도 리카도르는 살아있었다.
그는 뛰어난 신체 능력으로 슈페나를 찾아 하류의 기슭으로 몸을 피한 참이었다.
다만, 문제는….
“제길.”
리카도르가 흠뻑 젖은 제 하얀색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뒤로 넘기며 사납게 뇌까렸다.
자신은 그나마 괜찮았지만 슈페나는 아니었으니까.
크게 다쳐서인지 인간화가 풀린 채, 파랑새의 모습으로 기절한 슈페나가 리카도르의 눈에 들어왔다.
일단 임시로 몸을 뉜 동굴은 아늑했다.
일부러 체온을 떨어뜨리지 않게 불을 피워 따뜻하기도 했고, 하지만 파랑새는 미동조차 없이 죽은 듯 파리한 안색으로 누워있었다.
리카도르가 그녀의 부리 끝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동굴로 옮길 때만 해도 새액새액, 붙어있었던 숨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뭐?’
리카도르의 눈가가 파르르 일그러졌다.
그가 파랑새의 심장 부근 깃털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조심스레 마사지를 했지만 슈페나는 축 늘어져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안 좋아진건 아니겠지.
리카도르의 푸른 눈에 동요가 일었다.
청명하게 반짝였던 눈망울은 그 빛을 잃고 한들대었다.
‘과연 이 방법이 통할까.…….’
이내, 리카도르는 결심한 듯 마른 침을 삼켰다. 살짝 튀어나온 목울대가 단연히 움찔대었다.
그가 작디작은 파랑새의 몸을 제 손바닥으로 덮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탈리테를 끌어올렸다.
새벽녘 달처럼 청량한 기운이 동굴 안을 은은히 채우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리카도르의 오른손에 있던 표식도 눈부신 빛을 발했다.
슈페나의 날갯죽지에 있던 문양도 호응하듯 서서히 새하얀 빛이 퍼져나갔다.
그렇게 리카도르의 탈리테가 슈페나에게로 흘러 들어갔다.
그러고 있기를 10분째.
충만한 생명력이 흘러서일까. 쿵쿵 심장 소리가 슈페나한테서 아득하게 울렸다.
물에 쫄딱 젖어 앙상하기 그지없었던 파랑새의 깃털도 점차 보송보송하게 말랐다.
메말라가던 탈리테가 다시 흐른 덕분이었다.
반면, 리카도르의 낯빛은 갈수록 퍼석해졌다.
생기를 잃은 사람처럼.
기다란 그의 하얀색 속눈썹이 처연하게 일렁였다.
탈리테를 다루는 건 위험했다.
슈페나가 클라이드 나무에 흘렸던 것처럼 극소량이 아닌, 이렇게 모조리 쏟아붓는 건 더더욱.
이제 한계점에 다다랐다.
리카도르는 꾸욱 눈을 감고는 머리를 굴렸다.
밖에도 불을 피워놨으니 알아서 연기를 보고 오겠지.’
때마침, 멀리서 익숙한 가족들의 기척이 읽혔다.
안도감이 느껴지는 리카도르의미성이 겨우 입술을 가르고 속삭이듯 슈페나에게로 닿았다.
“이걸로 목숨값은 갚은 거야, 부인”
그 뒤론 암전이었다.
***
슈페나가 깨어난 건 꼬박 열흘뒤였다.
눈을 뜬 그녀 앞에 보인 건 낯익은 천장이었다.
리카도르와 방을 합치기 전 사용했던, 이젠 집무실로 쓰이는 슈페나의 방 인테리어.
아무래도 체드윅 가로 옮겨진 것 같았다.
‘어떻게 된 거지?’ 생각나는 건, 땅이 갈라져 계곡밑으로 추락했고 물속에서 리카도 르를 보았던 것뿐.
그 이후의 기억은 없었다.
‘몸 상태는 괜찮은 것 같은데.’
물에 빠졌던 게 무색하게 정신은 개운했다.
오히려 평소와 다른 것 같기도 했다.
‘좋은 냄새.’
예전에도 맡아본 적이 있는 것 같은, 어딘가 익숙한 냄새가 몸에 배어 있었으니.
‘리카도르는 어떻게 된 걸까?’
그녀는 우선 이불을 걷어차 내었다.
왜 안 차내져?
슈페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밤색 눈동자를 도르르 굴렸다.
“벳?”
그제야 슈페나는 자신이 파랑새의 형태로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어쩐지 이불이 너무 크게 보이더라.
그녀가 잠시 이불과의 사투를 펼치고 있는 사이, 방문이 열렸다.
그 문틈으로 들어온 이는 제인이었다.
“좀 괜찮으세요. 작은 마님?”
“삐비비비빗!”
잠깐 기다려봐.
슈페나는 우선 뽀르르 날아가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제인이 눈치 있게 방문을 열어주곤 옷도 같이 꺼내어 화장대에 올려놓았다.
탁, 드레스룸의 문이 닫히고 슈페나는 인간화를 했다.
무심코 거울을 본 그녀가 의아함이 담긴 짧은 탄식을 내었다.
“……음?”
왜인지 모르게 팔뚝에 있던 검은 반점의 색깔이 달라진 것 같았다.
정확히는 은은한 빛이 나는 것 같달까.
‘기분 탓인가.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슈페나는 도리질을 하곤 도로 방으로 돌아가 제인한테 물었다.
“제인, 근데 리카도르는?”
“…그, 그게 아직 깨어나질 못하셨어요.”
그 대답에 슈페나는 확신했다.
역시 물살에 휩쓸렸었던 그때, 리카도르와 손을 잡았던 게 맞구나.
‘그럼 리카도르도 나처럼 떨어진 걸까?’
골똘히 생각하느라 슈페나의 표정은 점차 심해처럼 깊게 가라앉았다.
그 낯빛에 제인이 두 손을 꼭 주먹 쥐며 위로했다.
“금방 일어나실 거예요!”
“리카도르는 어디 있어?”
슈페나가 제인을 똑바로 직시하며 말했다.
그러자 제인은 약간 머뭇거리며 동요 어린 어투로 말을 받았다.
“……신방 말고 원래 기거하시던 방에 계세요. 가보시게요?”
“응. 혼자 갈 수 있으니 안 따라와도 돼, 제인.”
슈페나가 애써 씩씩한 발걸음으로 걸어갔다.
기다란 복도를 지나 코너를 꺾고 나니 리카도르의 침실이 보였다.
한 차례 심호흡을 한 뒤, 마저 발을 내딛던 슈페나는 돌연 백스텝을 밟았다.
저 끝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어머님과 흰 가운을 입은 의사 선생님.
슈페나는 커다란 기둥 뒤로 몸을 숨기곤 숨소리조차 죽였다.
그냥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어머님과 의사 선생님이 심각한 얘기를 하는 듯 보였으니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칸은 다른 곳에 신경을 집중하느라 아직 슈페나의 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 싶었다.
슈페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예민한 파랑새의 청각 덕에 말소 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먼저 어머님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귓가에 스쳤다.
“왜 이렇게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거지?”
“아무래도 타나토에 깃들어있던 탈리테가 빠져나간 것 같습니다.”
탈리테가?
슈페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머님도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인지 반문했다.
“탈리테가?”
그에 의사 선생님은 차분히 설명했다.
“작은 마님 또한 열흘 정도 고열로 앓으셨죠. 타인의 탈리테가 스며들 때 제 것으로 융합시키기 위해 겪는 과정이었습니다.”
“그 말은..….”
“소가주님이 작은 마님에게 본인의 탈리테를 불어넣으신 것 같습니다.
칸이 미간을 찌푸리곤 되물었다.
“그게 가능한가?”
탈리테를 불어넣어 타인을 치료한다니, 들어본 적 없는 얘기였으니까.
탈리테는 개개인이 가지는 고유의 생기.
융합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애당초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다면 세상에 죽는 수인은 없지 않겠는가.
“아마 파장이 잘 맞아떨어진 게 아닌가 싶습니다. 보통 타인의 탈리테는 잘 흡수되지 않는 편이니까요.”
“신기한 일이군. 타나토 계약을 맺을 때 공유된 탈리테마저 금방 사그라들기 마련인데.”
뭐?
그렇다는 건 리카도르가 나를 살렸다는 거야?
그러나 놀랄 만한 일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의사 선생님이 머리가 아프다는 듯 손으로 미간을 부여잡으며 침울하게 덧붙였다.
“더구나 소가주님께서 작은 마님을 구하려고 계곡물에 뛰어드셨다”
“잠깐. 그래서 언제쯤 깨어날 수 있을 것 같은가?”
가만히 듣고 있던 어머님이 돌연의사 선생님의 말을 끊었다.
그러곤 뭔가를 눈치챈 모양인지 슈페나가 서 있는 방향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어지는 의사 선생님의 소견에 그 눈길도 멎었지만,
“생명력이야 또 서서히 차오르는 것이니 요양만 잘한다면 금세 기운을 회복하실 겁니다.”
“그렇지. 금방 좋아질 게야.”
칸이 꼭 누군가를 안심시키듯 신신당부하며 되뇌었다.
그 말을 엿듣고 있던 슈페나의 얼굴이 말로 형용할 수 없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대충 대화를 마친 어머님은 리카도르의 방으로 들어갔다.
기둥 뒤에서 그 모든 전말을 알게 된 슈페나가 숨죽여 자책이 담긴 목소리를 토했다.
“나 때문에 다쳤나 봐…….”
그녀는 기둥에 체중을 싣고 겨우 두 다리를 지탱한 채, 불안하게 눈만 감았다 떴다.
차가운 벽을 더듬는 손끝이 지나치게 무감각했다.
그냥, 그냥 미안했다.
리카도르에게, 어머님에게, 모든 사람들에게.
짐이 된 것만 같아서.
‘흉조. 언니는 나보고 불운을 몰고 다니는 불길한 존재라고 했지.’
어쩌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뒤덮었다.
이곳에서도 미움받을지 몰라.
인간은 이기적인지라 이 상황에서도 그런 걱정이 들었다.
‘차라리 지금 쫓겨나는 게 나을지도.’
슈페나가 잘근잘근 입술을 깨무는 사이.
어머님과 의사선생님은 리카도르의 상태를 확인했는지 밖으로 나왔다.
차마 인사를 드리지는 못하곤 점이 되어 사라져가는 어머님의 뒷모습만 물끄러미 응시했다.
슈페나는 조심스레 한 발짝 한 발짝 걸어가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죽은 듯이 잠들어있는 리카도르가 시야 끝에 걸렸다.
그는 인간화할 힘도 남아 있지 않은 건지, 사자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커다랗고 새하얀 백사자.
리카도르가 동물화한 형태는 처음이었다.
그래서 더 아무런 말도 입에 담을 수가 없었다.
무게감이 다른 것만 같은 적막한 공기가 방 안에 흘렀다.
그 중압감 속에서 슈페나는 울음을 뚝뚝 토할 듯 서글프게 눈만 깜빡였다.
이윽고, 그녀가 침대 옆 작은 의자에 걸터앉아 조그맣게 사과했다.
“미안.”
그 한마디에도 리카도르는 어떠한 반응조차 보이지 않았다.
슈페나의 시선이 창백한 리카도 르를 훑었다.
푸석푸석 윤기가 사라진 듯한 흰색 털, 살짝 부은 듯한 핑크색 코, 여전히 촘촘하고 기다란 눈썹.
그러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뭐지?’
리카도르의 머리맡에 놓인 작은 쪽지.
슈페나는 소심하게 그 쪽지를 펼쳐 눈으로 읽었다.
리카도르는 곧 좋아질 거란다.
네 잘못이 아니니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단다. 오히려 어른 된 도리로 지켜주지 못해 내가 더 미안하구나, 며늘아가.
칸의 따뜻한 마음씨가 물씬 묻어 나오는 위로였다.
활자를 따라 바삐 움직이던 슈페나의 밤색 눈망울이 점점 촉촉해졌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곤 속눈썹을 드리웠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정말, 정말 미안해.’
슈페나가 쪽지를 고이 접어 주머니에 넣더니 굳게 다짐했다.
우선 리카도르가 깨어날 때까지 그녀가 할 수 있는 걸 하기로.
그날 이후, 슈페나는 꼭 도움이 되어야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묵묵히 리카도르를 간호했다.
다른 이들이 피곤할 텐데 쉬라고 말릴 만큼 열심히.
여느 때와 다름없이 리카도르의 방에 드나들던 오후.
‘어? 이런 것도 있었나?’
그간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서인지 못 보던 물건이 눈에 띄었다.
침대 옆 협탁에 놓인 액자.
이 그림, 어렸을 때 초상화인가?
초상화 안에는 핑크빛 코를 가진 백사자가 그려져 있었다.
‘고양이처럼 생겼어.’
고양이?
문득 리카도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4년 전, 낙엽이 우거진 숲에서 사자 하나 구해준 적 있지 않습니까?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51화
슈페나가 쥐 죽은 듯 누워있는 리카도르에게로 즉,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는 갈팡질팡 망설이다 소심하게 이불을 들추었다.
스치기만 해도 살이 찢어 발겨질 듯 무시무시한 사자의 앞발이 드러났다.
그녀는 긴장한 눈빛으로 이리저리 눈알을 굴렸다.
“미안하지만 실례 좀 할게, 리카도르.”
망설이던 슈페나가 결국 그 앞발을 낑낑 뒤집었다.
“…핑크색 젤리.”
새하얀 발바닥에는 안 어울리게 깜찍한 핑크색 젤리가 콕콕 박혀 있었다.
‘그럼 혹시 내가 구한 게 고양이가 아니라 사자였던 걸까?’
퍼즐이 맞아떨어졌다.
그동안 리카도르가 이상하리만치 잘해주었던 이유는 무엇이었겠는가.
“사자는 은혜를 갚는 동물이지.”
그녀가 멍해진 얼굴로 한 단어씩 곱씹듯 느리게 문장을 완성했다.
이게 무슨 원작 여주 자리 꿰차는 빙의물 여주에게나 벌어질 법한 상황이란 말인가.
슈페나가 멍청하게 눈을 깜박였다.
그러다가 곱게 새근거리는 백사자를 바라보았다.
‘정말 그런 거라면, 더 미안해지 는데.’
우선은 리카도르가 정신을 차려야 이 의문도 해결되지 않을까.
4년 전 일에 대한 사정은 그 후에 물어보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협탁에 있던 물수건을 들어 마저 리카도르의 이마를 닦아주었다.
얼른 훌훌 털고 일어나라는 마음을 담아 성심성의껏.
사실 동물화한 상태라서 털만 이리저리 뭉치게 되었지만, 아무튼 여전히 뜨뜻한 리카도르의 얼굴을 열정적으로 정돈하던 슈페나는 한참 후에야 물수건을 도로 내려놓았다.
그때, 실수로 다른 물건을 쳐서 넘어뜨렸다.
그런데….
달칵—
서랍 맨 아래 칸에 걸려있던 자물쇠가 홀연히 풀려버렸다.
뭐야, 무슨 장치라도 있는 건가?
갑자기 왜 풀렸지?
불현듯 조금 불길한 기분이 엄습했다.
‘이런 거 끼어들면 꼭 플래그 꽂던데.’
또 못 본 척하기도 뭐하고.
어차피 리카도르는 자고 있어서 모를 테니 조금만 볼까.
슈페나는 호기심에 굴복해버렸다.
그녀가 자물쇠를 걷어내고 서랍을 열어, 그 안에 든 게 뭔지 들여다보았다.
‘목각인형?’
슈페나는 저도 모르게 그 사자 모습의 목각인형을 집어 들었다.
그을린 자국이 있지만, 손때가 묻어나오는 인형 뒤편엔 작은 음각이 새겨져 있었다.
-너의 소중한 친구, 아빠가.
아빠?
‘리리엘라 언니가 언급했던 그 새아빠일까.’
분명 언니가 친부는 아버지라고 그랬으니까. 리카도르도 비슷하지 않으려나.
어찌 되었건, 이렇게 보관해놓은 걸 보면 소중한 물건인 것 같은데,리카도르도 언니처럼 힘들었겠구나.
슈페나는 제 윗입술로 살짝 말려 들어간 아랫입술을 꾹 눌렀다.
그러던 중, 문득 의문이 들었다.
이 일에도 무언가 숨겨진 이야기가 있을까.
이것도 로판 남주이기에 겪는 시련인 건가.
뭐, 이런 쓸데없는 상념들이.
어쩌면 리카도르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은 마음에 든 생각일지도 몰랐다.
‘일단 이건 되돌려놓자.’
슈페나는 한결 더 조심스러워진 손길로 인형을 다시 안에 넣어놓았다.
그리곤 자물쇠를 다시 잠갔다.
서랍은 열린 흔적도 없이 원래의상태로 돌아갔다.
휴우, 여러 감정이 섞인 작은 한숨이 내뱉어졌다.
그녀는 착잡함이 담긴 눈으로 리카도르를 내려다보았다.
고마움, 미안함, 안쓰러움.
리카도르를 보면 그런 감정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조금 불안했다.
혹시나 깨어났을 때 원망이라도 들을까 봐.
‘친구한테 미움받는 건 좀 싫은데.’
물속으로 뛰어든 게 리카도르의 선택이었다 한들, 지금의 결과를 보면 후회될 수도 있었으니까.
슈페나는 잔떨림이 이는 손으로 리카도르의 앞발을 쓰다듬었다.
복슬복슬한 하얀 털은 부드러웠다. 앙증맞은 핑크색 젤리도 푹신 푹신했다.
일방적인 젤리 테라피를 받고 나서야 슈페나는 마음을 가라앉힐수 있었다.
그렇게 조몰락거리고 있던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새벽녘의 달빛처럼 빛이 새어 나오며 잠든 리카도르가 갑자기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 게 아닌가.
그렇지만 완전히 정신을 차린 건 아니었다.
뒤척이지도 눈을 뜨지도 않았으다.
‘잠결에 인간화를 할 정도로 기력이 회복되었다는 건가?’
슈페나가 늘 보던 얼굴이 된 리카도르를 응시했다.
허여멀건 피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는 선홍빛 입매, 곧게 뻗은 콧날.
확실히 예전보다 좋아진 것 같았다.
이제 한시름 놔도 될 만큼 안심할 만한 일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불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 네.’
리카도르가 맨몸이란 사실이었다.
슈페나는 두 손으로 수줍게 눈을 가렸다.
손가락 틈새로 앞이 다 보여서 딱히 소용은 없었다만.
“이런, 난 못 본 거야….”
아직 성장기인 리카도르의 어깨가 제법 튼실하고 쇄골도 움푹 파였다는 건 절대 보지 못한 거라고!
슈페나는 눈 가리고 아웅을 시전했다.
근데 왜 가슴팍에 맹수의 발톱이 박힌 듯이 기다란 흉터가 있는 것 같지?’
그녀가 의아함에 더 살펴볼까 갈등하던 무렵, 리카도르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그 작은 움직임은 이내 더욱 커다랗게 번져갔다.
가느다란 하얀 속눈썹 사이로 멍한 푸른 눈망울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
그에 슈페나는 말까지 더듬으며 리카도르의 낯빛을 살폈다.
“저, 정신이 들어? 이거 몇 갠지 알아보겠어?”
그러곤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어가며 그와 대화를 나누려 애썼다.
안타깝게도 그럴 만한 힘은 없는 것인지 리카도르는 입술조차 달싹이지 못했다.
대신 그는 시선만 옆으로 돌린채 무언가를 빤히 쳐다보았다.
슈페나도 덩달아 그의 눈길이 향한 곳을 눈으로 더듬었다.
달력?
가을 순회를 나가기 전인 9월에서 멈춘 달력을 슈페나가 한 꺼풀넘겼다.
벌써 10월 첫째 주였으니까.
‘그러고 보니 리카도르의 생일도다 지나버렸네.’
아무래도 경황이 없어, 체드 가내에서도 이번 생일은 조용히 넘어가기로 했다.
며칠 전이었던 3일에 슈페나만 간단히 선물을 받았을 뿐.
이것도 어머님이 조용히 챙겨주신 덕분이었다.
리리엘라 언니의 생일날, 리카도 르와 친구가 되면서 나누었던 대화를 어머님도 조금 들으신 모양이었다.
‘감사하긴 한데 리카도르한테 미안하네.’
슈페나는 애써 감정을 갈무리하며 .
며 리카도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돌연 리카도르가 힘없이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다.
그러고는 평상시보다 나지막한 미성으로 한 글자 한 글자 느릿하게 내뱉었다.
“….…늦, 었지만”
“뭐라고?”
슈페나는 리카도르에게 몸을 기울이며 반문했다.
“..……생일 축하해, 슈페나.”
그가 그녀의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곧이어 스르륵 잠에 빠졌다.
‘쟤, 방금 뭐라고 한 거야?’
친구가 되었을 때 리카도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매년 축하하게 해주시겠습니까?
태어나줘서 고맙다고.
‘설마 그 약속을 지키려고, 일어난 거야?’
슈페나의 갈색 눈망울이 별무리가 쏟아져 내리는 것처럼 찬란하게 일렁였다.
‘나는 리카도르한테 축하한다고 제대로 말도 못 해줬는데…….’
슈페나는 리카도르에게 붙잡힌 제 손을 놓을 수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리카도르가 나한테 정말 소중해졌나 봐.’
심장이 콩닥콩닥 난로 옆 귤처럼 따뜻해졌다.
***
일주일 후,
리카도르는 문제없이 몸을 가눌수 있게 되었다.
완벽하게 회복하려면 조금 시일이 걸린다고 했으나, 장족의 발전이었다.
슈페나와 리카도르는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녀가 그를 아주 극진히 챙겨주며 껌딱지처럼 달라붙은 거였지만.
“몸은 좀 어때?”
일부러 부축하 리카도르와 팔짱을 낀 슈페나가 물었다.
그러자 그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팔은 빼지 않은 채로 대꾸했다.
“과잉보호야, 그거.”
“야, 나한테 이런 간호 받는 경험이 흔한 줄 알아? 그냥 가만히 있어.”
그에 슈페나도 지지 않고 받아쳤다.
그녀는 리카도르를 상쾌한 피톤치드 향이 나는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로 그를 이끌었다.
특별히 원기 회복에 좋다는 재료로 직접 도시락을 만들었으니까.
“자, 환자분, 이리로 오세요!”
“선생님.”
장난스러운 슈페나의 멘트에 리카도르가 자못 천진하게 눈꼬리를 휘며 장단을 맞추었다.
그녀는 살짝 당황한 기색을 내비치곤 반응했다.
“어?”
“뭘 놀라. 네가 나보고 환자라며.
그럼 넌 의사 선생님인 거 아니야?”
그가 안색 하나 바뀌지 않고 천연덕스레 논리를 펼쳤다.
요망한 백사자는 한쪽 눈매를 찡그리며 짐짓 투정을 부렸다.
“선생님, 여기가 아픈데.”
그 칭얼거림은 생각보다 진득하게 슈페나를 옭아매었다.
“어떻게 해줄 거예요?”
그런 말을 하는 리카도르의 벽안에는 명백한 장난기가 깃들어 있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골골거렸던 사람이라곤 믿을 수 없는 행동에 슈페나가 도끼눈을 떴다.
“너, 지금 나 놀리는 거지?”
“나 환자야. 진짜 아파.”
그는 타박상이 난 발목을 가리키며 능숙하게 엄살을 피웠다.
“봐봐. 부었잖아.”
확연히 보이는 상처에 슈페나는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많이 아파?”
“호, 해줘.”
그녀의 걱정에 배부른 사자처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던 리카도르는 능청스레 이야기했다.
확 물어버릴까.
“네가 애냐.”
그리 핀잔을 준 슈페나가 그에게서 슬금슬금 멀찍이 떨어진 상태로 호, 입김을 불었다.
“! 됐지?”
리카도르는 피식 입꼬리를 끌어 당기며 그녀의 호는 닿지도 않았을 상처 부위를 매만졌다.
“하란다고 진짜 해주네.”
“저, 얌생이 같은-”
“착하네.”
그가 슈페나와의 거리를 단숨에 좁히더니 그녀의 하늘색 머리칼을 나릿하게 쓰다듬었다.
“뭐래.”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놀란 그녀가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그건 됐고..….”
어떤 이야기를 꺼낼까, 고민하던 슈페나는 일견 결연한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원래 물어보고자 다짐했던 걸 이야기할 작정이었으니.
“리카도르, 너 혹시 4년 전에 나 만난 적 있어?”
화끈하게 저질러버렸다.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52화
그 직설적인 언사에 리카도르는 잠시 멈칫거리다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불도저같이 시원한 수긍에 되레 놀란 슈페나가 되물었다.
“그럼 그 느티나무 아래에 쓰러져 있던 고양이가 너였어?”
“고양이?”
생각지도 못한 앙증맞은 단어에 리카도르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딱 생긴 게 고양이던데.”
“자존심 상하네.”
그가 짧게 실소하더니 무심하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긍정이었다.
슈페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계속 나한테 잘해줬던 거야?”
“뭐, 마음대로 생각해.”
그 의문에 리카도르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동안은 딱히 잘해주려고 했던건 아니었으니.
그저 경계심을 풀려는 거였지.
슈페나는 리카도르에게 종잡을 수 없는 존재가 아니던가.
위험이 될지 걸림돌이 될지 아군이 될지 알 수 없는.
이번 일도 그랬었을 터였다.
그녀가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챘을 때.
리카도르는 어떠한 판단도 내리지 못하고 무작정 탈리테를 불어 넣지 않았던가.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만에 하나 슈페나가 죽어버리기라도 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난 건지 알아낼 수 없을 테니까.’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을 택한 것뿐이었다.
그는 그렇게 자기합리화를 했다.
그리고는 중요한 걸 되물었다.
“그나저나 날 어떻게 구한 거지?”
“뭘?”
“그때 제법 중상을 입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의 기억은 온전치 않았으니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는 수밖에.
그러나 슈페나 또한 그 일을 자세히 떠올리지 못했다.
“그냥 숲에 있던 약초 따다 얹어주고 잠들었더니 어느새 네가 사라졌던데?”
그 대답에 리카도르의 눈빛이 탁하게 가라앉았다.
‘역시 숲에서 마주쳤던 날, 계약을 맺은 건 아니라는 건가.’
서로의 타나토 모양을 나타내는 표식은 그 이전부터 새겨져 있던 거였으니까.
그런데 왜 그때부터 문양에서 슈페나의 기운이 흐르기 시작한 걸까.
계약의 조건은 언어로 이루어진 약속, 그리고 탈리테의 공유.
크게 이 두 가지였다.
그 하녀와 계약할 때에도 서약서를 쓴 뒤 탈리테를 나누지 않았던가.
보통의 계약은 그 내용이 온전히 이행되고 나서야 증표가 사라졌다.
슈페나가 제인과 맺은 계약의 경우에도 아직 행해지고 있었기에, 문양이 남아 있는 게 아니던가.
그러니 리카도르와 슈페나에게도 미처 끝맺어지지 못한 맹약이 잔존한다는 뜻일 터.
‘도대체 뭘 약속한 걸까.’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나도 강하게 연결된 계약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일반적인 계약이 아닐 테니, 또다른 무언가가 있는 건가.’
리카도르가 맹렬히 머리를 굴리는 사이, 슈페나도 한 가지 의문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생명의 은인이라서 잘해준 거면 왜 그동안 친구 하자고 할 때는 싫다고 그런 거지?’
설마….
보통 소설을 보면 남주는 본디 본인을 지켜주었던 여자한테 반하기 마련 아니던가.
얘, 나 좋아하나?
그래서 친구는 싫다고 그런 건가?
그런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딱히 원작을 무조건 지켜야 한다는 강박이나 그런 건 없었다.
그간의 경험들을 보면 애초에 원작은 이미 어느 정도 틀어졌는걸.
‘여주 덕질했던 것도 아니고 일단 내 조생이 더 중요하지.’
하지만 잊어선 안 되었다.
이곳이 꾸금 피폐 수인물이라는 걸.
‘나 새가슴이야.’
리카도르가 싫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이젠 수인적으로 너무너무 좋았다. 여주가 겪었던 고난을 답습하고 싶지 않았을 뿐.
슈페나는 의심 어린 눈초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너 혹시 나 좋아해?”
“갑자기 이야기의 흐름이 왜 그런 쪽으로 흐르는 거지?”
그 느닷없는 물음에 리카도르가 사고뭉치 꼬맹이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슈페나를 쳐다보았다.
물론 슈페나도 지지 않겠다는 듯 빤히 눈맞춤을 계속했다.
마침내 항복한 건 리카도르였다.
그는 하얀 돗자리가 펴진 잔디밭에 주저앉고는 반듯한 눈썹을 짐짓 찡그렸다.
슈페나도 따라 옆에 쪼그려 앉고는 말을 더했다.
“나 지금 중요하거든? 너 나 좋아해?”
그 반응에 리카도르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더니 느른히 슈페나의 표정 변화를 살폈다.
“좋아하기를 바라는 거야, 그 반대를 바라는 거야?”
그때, 누군가의 음산한 중저음이 슈페나와 리카도르 사이를 갈랐다.
“나는 좋아해.”
리리엘라였다.
그녀는 조커웃음을 지으며 살벌한 제 진심을 전달했다.
갑작스러운 고백에 당황한 슈페나가 새가슴을 부여잡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어, 깜짝이야!”
“진짠데……”
리리엘라는 그런 그녀를 일으켜주며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슈페나도 아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애써 호응했고.
그리 어수선하게 상황 파악을 하는 사이, 같이 따라온 카누스가 슈페나와 리카도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장난스레 음성을 쏘아보냈다.
-뭐야, 둘이 사랑 고백이라도 하고 있었어?
카누스는 꼬리로 제 눈가를 가리며 응석을 부렸다.
-나 일곱 짤이야. 연령제한은 못봐.
“뭐래.”
슈페나는 정색했다.
그러자 리리엘라가 눈치 없이 두주먹을 꼭 모아 쥐며 응원했다.
“난, 볼 수 있어. 그렇지만 저 도둑놈은 안 돼!”
네?
어안이 벙벙해지는 듯한 기분에 슈페나는 멍하니 눈만 끔벅였다.
그러다 곧바로 정신을 차리곤 뒤 늦게 가져온 도시락과 돗자리를 펼치며 수습했다.
“이거나 먹어요, 다들!”
도시락에는 여러 나무열매와 채소가 즐비했다.
건강식이었다.
“선생님, 먹고 죽으라는 건가요?”
리카도르는 끝난 줄 알았던 역할 극을 계속 흉내 내어 물었다.
슈페나도 눈치껏 받아쳤다.
“아니요. 무슨 문제라도.”
“도대체 뭘로 만들었길래 이런 색깔이 나온 거지?”
리카도르가 가리킨 건 파릇파릇한 오이가 들어간 샌드위치였다.
원래 오이는 호불호가 심하게 나뉘는 음식이긴 하지.
그렇지만 슈페나는 정말 의사라도 된 것처럼 자못 엄중하게 이야기했다.
“이제부터 채식 사자가 되도록해.”
“언제부터 파랑새가 채소였지?”
그에 리카도르가 짐짓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살살 눈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은근슬쩍 슈페나의 손가락을 입술로만 잘근잘근 깨문 채로.
“응?”
슈페나는 바보같이 눈만 깜박이며 얼을 탔다.
얘, 아팠다 일어나더니 진짜 미쳤나 봐!’
두 볼이 기이하게도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그녀가 서둘러 리카도르에게서 손을 물렸다.
간질간질한 정적이 흘렀다.
그 고요함을 깨고 카누스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뭐야. 분위기 진짜 뭐야.
“어… 슈페나! 나는 오이도 잘먹어!”
덩달아 어리둥절해하던 리리엘라도 빠르게 다른 얘길 하며 분위기를 띄웠다.
아무튼 그들은 희희낙락 이야기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대화는 겨울 여행 쪽으로 흘렀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랑 겨울에 휴가차 다른 지역으로 여행을 가자는 이야기가 오갔다며, 슈페나.”
먼저 말을 꺼낸 건 리리엘라였다.
그 이야기를 들은 카누스는 기쁨의 꼬리 춤을 추며 반색했다.
– 정말? 여행 너무 좋아! 어디로 가는데?
리카도르가 쓰러져 꼼짝없이 올겨울엔 못 가나 싶었는데.
분위기를 보니 가능할 것도 같았다.
‘비밀장소를 뒤지기에 가장 좋은 핑곗거리는 이번 여행밖에 없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슈페나가 당차게 외쳤다.
“르쉐라는 곳은 어때요?”
슈페나가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리리엘라를 쳐다보며 무언의 시그널을 보냈다.
“어머님이 온천 여행은 어떻겠냐고 하셨거든요.”
실은 내가 졸랐지만.
슈페나는 천연덕스럽게 그 사실을 조금 비틀었다.
‘좋다고 해라, 좋다고 해라.’
그러면서 이런 주문을 외웠다.
다행히도 성공이었다.
“…거기 좋아. 뜨끈뜨끈한 온천좋아.”
리리엘라가 볼을 발갛게 물들이더니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그녀는 르쉐에 가본 적이 있는 듯했다.
좋아하는 거 맞지?
흡사 흑마법으로 누구 저주하는 악당의 포스인데.
옆에 있는 슈페나가 리리엘라를 보며 어정쩡하게 마주 웃었다.
그 순간, 카누스가 둘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명랑하게 제안했다.
-그러면 우리 여행 계획 세우자!
“..… 재밌겠다.”
리리엘라도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곤 동의를 구하듯 슈페나를 쳐다보았다.
“저도 좋아요!”
슈페나는 자연스레 리카도르를 바라보았다.
기차놀이를 하는 아이들처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움직임이었다.
“괜찮겠네. 좀 시끄럽긴 하겠지만.”
리카도르는 리리엘라와 카누스를 응시하며 아쉽다는 듯한 낯으로 속닥거렸다.
어찌 되었건 좋다는 뜻이었다.
리리엘라가 곧장 르쉐의 지명이 나와 있는 지도를 가져왔다.
언제 준비한 건지 신속한 몸놀림이었다.
리리엘라는 빨간색 색연필로 지도 곳곳에 동그라미 치며 안내 가이드처럼 열심히 열변을 토했다.
“여기, 레스토랑이 맛있어.”
“겨울에 강가에서 연꽃 만들어서 띄우는 것도 재밌고.”
“산 정상에서 보는 일출은 예쁘지.”
이곳저곳 떠돌아다녔다더니 확실히 견문이 넓은 것 같았다.
‘굳이 원작대로 동굴을 찾을 필요는 없을 거야. 시계탑 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되니까.’
다 같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게 될 테니 틈이 날 때마다 몰래 시계탑의 구조를 알아보면 될 터.
“여기에 묵는 건 어떨까요?”
슈페나는 은근슬쩍 시계탑 옆에 표시된 호텔을 가리켰다. 체드윅가에서 운영하는 사업체 중 하나라고 했지.
그러다 보니 그녀도 덩달아 열정적으로 계획을 세웠다.
이윽고, 그 여행 계획은 칸에게 전달되었다.
최종 결정은 어머님이 내리는 거였기에 허락을 받아야 했으므로, 칸은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여행 계획표를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알찬 계획이구나.”
그러고는 슈페나가 원하던 답변을 내놓았다.
“이 정도면 다른 업무 일정에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여행을 갈 수 있을 것 같군.”
“정말요?”
슈페나는 훤히 미소를 지었다.
르쉐에서 비밀장소만 찾아내면 힘들이지 않고도 로네악 꽃을 활용해 사업을 확장할 수 있을 테니까.
더불어 다른 진귀한 물건도 많았으니 사업아이템으로 활용할 만한 게 더 있을지도 몰랐다.
‘적당히 원작에 잘 등장하지 않은 것만 골라가자.’
원작 여주가 쓸 물건을 싹쓸이해 가면 괜히 양심에 찔리잖아.
그리고 무엇보다 그 수상쩍은 정보상.
딱 봐도 자낳괴가 아니던가.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
성공한 사업가가 되어 돌아오면 그 정보상이 먼저 정보를 갖다 바치곤 들러붙지 않을까?
‘메인 악녀처럼 후원해준다고 하는 거지! 그러면서 제대로 정보상의 속내를 캐는 거야.’
몰래 앙증맞게 양 주먹을 쥐며 으쌰, 계획을 세우던 슈페나는 이 내 이상한 걸 발견했다.
어머님의 책상에 올려져 있는, 설핏 봐도 심각한 내용의 보고서.
‘가을 순회 때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 조사하고 계신 건가?’
그 내용엔 기후를 조작한 배후가 따로 있을지도 모른다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그냥 좀 날씨가 워낙 변덕스러웠기에 벌어진 사고인 줄 알았는데 혹시….
‘아! 그 깃발 뭔가 수상했는데.’
머리를 팽팽히 굴리던 슈페나의 입술이 튀어나왔다.
그에 칸은 의아한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왜 그러니, 며늘아가?”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53화
“제가 리카도르랑 가을 순회 때 수상한 걸 본 것 같아요.”
이런 거 꽁꽁 감춰둬서 뭐 한다고,슈페나는 기억나는 모든 걸 어머님한테 미주알고주알 신명나게 일러바쳤다.
그런 후에 조심스레 집무실의 문을 닫으면서 묘한 확신을 했다.
아무래도 뭔가 있는 것 같다고.
‘보통 로판에선 이런 모든 일이 흑막의 계략으로 흐르지.’
근데 이 소설에 최종흑막이라 불릴 만한 인물이 있었나?
유학 간 메인 악녀가 동족을 해치려 했을 리는 없었다.
그 이외에 사자들과 대립하는 표범 같은 타 수인 종족은 있긴 했는데, 기성전….…에헴에헴 느낌의 스토리 없는 꾸금 소설이 아니던가.
‘그리고 가을 순회의 일이 원작에 있던 건가?’
남주의 어릴 적은 거의 나오지 않아서 잘 모르는데.
의심은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런 고민으로 하루하루를 지새우는 사이, 르쉐로 가는 날의 아침이 밝았다.
***
제인은 슈페나와 함께 짐 싸는 걸 돕고 있었다.
“작은 마님, 이것도 챙길까요?”
“응, 가방에 넣어줘.”
슈페나는 제인의 손에 든 자신의 애착 인형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 오랫동안 놀다 올 휴가라서인지 챙길 게 많았다.
그리 가방 정리를 하고 있을 무렵, 중요한 물건을 빠뜨렸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아, 잠깐만.”
슈페나는 곧장 제 책상으로 도도도 달려갔다. 그리고는 맨 아래 서랍 깊숙한 안쪽을 뒤졌다.
정보상이 준 지도.
어떻게 기밀정보인 군사용 지도를 손에 넣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세세해서 가지고 있으면 좋을 테니까.
제인 몰래 지도를 반듯하게 접어 주머니에 넣으려 했던 슈페나는 이내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어? 뭐지?’
지도 뒷면에 쓰인 묘한 구절.
정보상의 필체였다.
– 이 세상에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색깔은 무엇일까요?
‘이 세상에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색깔?”
슈페나의 고개가 갸우뚱 옆으로 기울어졌다.
수수께끼엔 영 젬병이었으니.
‘이런 걸 왜 적어놓은 거지.’
그 의뭉스러운 정보상이 장난으로 이런 걸 적어놓았을 리는 없고,무언가를 암시하는 것 같았다.
힌트라거나.
시계 뒷면에 새겨진 명언도 그렇고 정보상은 요런 의뭉스러운 걸 좋아하는 건가.
“작은 마님. 다른 물건들은 어떻게 할까요?”
그때, 한창 옷가지에 파묻혀 씨름하던 제인이 일을 다 끝냈는지 물어왔다.
슈페나는 허겁지겁 지도를 제 주머니 속에 감추며 축객령을 내렸다.
“이제 내가 직접 할게. 그만 가봐.”
그녀가 서둘러 마저 짐 정리를 끝마쳤다.
시계를 보니 벌써 출발할 시간이 다가왔다.
야무지게 가방까지 어깨에 멘 슈페나는 쫄랑쫄랑 방을 나섰다.
복도에는 준비를 모두 끝마친 다른 체드윅 가 사람들이 서 있었다.
슈페나를 본 리리엘라는 입틀막을 시전하곤 바닥이라도 부술 듯 발만 동동 굴렀다.
“협, 귀여워.”
앙증맞은 아이보리색 귀도리와 몽실몽실 하얀 솜이 옷깃에 달린 다갈색 코트 원피스.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연상시키는 옷차림이었다.
‘추운 지역이라고 해서 이렇게 입어봤는데 너무 오버했나?’
하긴 체드윅 가는 남쪽 지역에 위치해서 따뜻하지 않은가.
아직 르쉐에 도착한 것도 아닌데 여행은 처음이라 너무 들떴던 걸지도 몰랐다.
슈페나는 머쓱하게 귀도리를 풀고 코트 원피스의 단추도 끌렀다.
어차피 안에 다른 옷을 받쳐 입어서 상관없었다.
그러자 칸은 흔치 않게 눈꼬리마저 휘어 웃으며 다정히 슈페나가 옷을 벗는 걸 도와주었다.
“꼬까옷을 입었구나. 잘 어울리지만 가는 동안은 조금 덥겠어.”
그 광경을 목격한 카누스는 폭소했다.
-룹, 누나 바보 같아.
하지만 그리 빈정거리는 꼬마 뱀도 신이 난 모양인지 따뜻한 털실 목도리를 두른 채였다.
“그러는, 지는.”
슈페나도 굴하지 않고 되받아쳤다.
-난 그냥 패션이야, 패션.
그리 아웅다웅하고 있던 순간, 등뒤에서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의 주인은 리카도르였다.
리카도르는 땅에 끌리던 슈페나의 옷가지를 자연스레 받아들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밖으로 걸어 나갔다.
뭐야, 쟤?
졸지에 옷을 빼앗긴 슈페나가 리카도르를 따라 뛰어갔다.
그렇게 슈페나는 리카도르와 같은 차를 타게 되었다. 그 옆에는 카누스도 함께였다.
어머님과 리리엘라 언니가 있는 증기자동차 쪽은 분위기가 교육적이고 어색해서 싫다나 뭐라나.
아무튼 자동차는 특유의 예스러운 소음을 내며 매끄럽게 굴러갔다.
슈페나는 시시각각 변하는 창밖의 풍경을 멍하니 응시하며 무심코 옷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몰래 챙겨온 지도의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문득 지도에 쓰여 있던 질문이 머릿속 한구석에서 아른거렸다.
‘궁금하면 알아내야지. 더구나 좋은 상대가 있잖아?’
슈페나는 시트에 누워 코오, 늘어져 있던 카누스를 불렀다.
“야, 카누스.”
-왱?
“내가 퀴즈를 하나 낼게.”
-거부한다.
꼬마 뱀은 시크하게 거절하더니 슈페나의 손바닥을 꼬리로 찰싹찰싹 때렸다.
슈페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질문했다.
“이 세상에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색깔은?”
– 파랑색!
걸려들었어.
아직 애라서 그런가, 카누스는 제법 미끼를 잘 물었으니까.
카누스도 멋쩍게 뱀 특유의 가는 혀를 내밀더니 변명했다.
-엣헴, 본능적으로 그만.
여하튼 손쉽게 정답을 알게 된 슈페나는 의아하게 되물었다.
“근데 왜 파랑색이야?”
“왜 색?
-빛의 산란. 아니, 그건 됐고, 이거 예언에 나온 질문 아니야?
“예언?”
슈페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예언이란 건, 생각지도 못했던 주제라서.
‘분명 독수리 가문에서도 예언 때문에 나를 기피했었지.’
그 예언이 정확히 어떤 내용인지는 몰랐지만.
하도 궁금해서 언니오빠들한테 물어본 적은 있었다.
‘네까짓 게 알 필요 없다고 언니한테 꿀밤을 옴팡지게 얻어맞았었지.’
좋지 않은 기억이라, 그 이후론예언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었다.
그런데 막상 들어보니 다시 알고 싶은 마음이 불쑥 생겨나긴 했다.
한편, 은근한 호기심이 깃든 슈페나의 얼굴에 카누스는 짐짓 뺀질 대었다.
-으음, 누나 표정이 솔깃한 걸보니 알려주기가 싫다!
“야!”
슈페나는 발끈했다.
그녀가 복수하겠다는 듯 손가락으로 살살살 카누스를 간지럽혔다.
그 순간, 가만히 있던 리카도르가 카누스를 번쩍 들어 슈페나의 손이 닿지 않는 저편으로 치워버렸다.
그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무덤덤한 낯으로 대신 대꾸했다.
“예언 능력을 가진 토끼는 종종 알쏭달쏭한 질문을 던지곤 하지.
그중 하나 같은데.”
-에잇, 바가지 좀 씌우려고 했는데.
그에 카누스가 혀를 차며 아쉬워했다.
슈페나는 못 들은 체하며 리카도 르에게 물어보았다.
“근데 예언이란 게 정확히 뭐야?”
하나, 카누스가 먼저 슈페나의 말을 잽싸게 낚아챘다.
-알려주면 뭐 해줄 건데?
“넌 또 나 등쳐 먹고 싶니?”
– 웅!
꼬마 뱀은 애교스레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긍정했다. 슈페나가 덩달아 아이를 달래듯 자상하게 이야기했다.
“어휴, 우리 깜찍한 카누스!”
-우웅?
“꺼져.”
배드엔딩이었지만.
슈페나는 다시 리카도르에게 말을 건넸다.
“그래서 예언이란 게 정확히 뭔데?”
한데 리카도르 또한 묵묵부답이었다.
당황한 슈페나가 세모눈으로 그를 흘겼다.
“뭐야, 왜 너도 말 안 해?”
“알려주면 뭐 해줄 건데, 부인?”
리카도르는 몸을 시트에 더 깊숙이 기대며 그녀에게 나긋하게 눈짓했다.
아, 조생이 쓰다.
슈페나가 못마땅하게 툴툴대었다.
“너도 쟤 닮아가니?”
“그건 싫은데.”
리카도르는 본능적으로 단호하게 부정했다.
아주 학을 떼면서 싫어하네..
학을 떼
슈페나가 남몰래 웃으며 선심을 쓰듯 이야기했다.
“음, 알려주면 내가 이따 르쉐에서 재밌게 놀아줄게!”
“그러든지.”
그 답변에 리카도르는 의외로 순순히 설명해주었다.
“토끼 수인들은 미래를 단편적으로 엿볼 수 있다지. 그걸 토대로 모호한 질문을 던지며 타인을 시험하는 걸 좋아하는 족속이야.”
그런 이야기를 하는 리카도르의 눈빛에는 약간의 경멸이 스며있었다.
‘뭔가 토끼 수인이랑 트러블이라도 있었던 건가.’
슈페나는 최대한 영혼이 느껴지게 맞장구를 쳐주었다.
“성격 나쁘네.”
-맞아, 걔네, 별로야. 너무 속물적이야.
그리고 그에 대한 호응은 카누스에게서 나왔다.
슈페나가 도르륵 눈알을 굴리며 파고들었다.
“왜, 뭔 일 있었어?”
-예언으로 장사하는 놈들이잖아.
예언도 종족이랑 신분, 차별해서 알려준다고!
카누스가 말을 덧붙였다.
보통 예언은 가문을 이끄는 고위급 수인들에게만 비싼 값에 푸는 정보라면서.
자기는 막내아들이라 잘 안 알려 줘서 서운하다며 힝, 울상을 지었다.
시무룩해하던 카누스는 돌연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리카도르한테 말했다.
-형아는 예언도 많이 들어봤겠네, 그렇지?
“예언에 대해선 딱히 관심 없어서. 아마 어머니는 잘 알고 계시겠지.”
그러나 리카도르는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럼 나중에 은근슬쩍 어머님한테 여쭤볼까.
그런 예언이 왜 그 지도 뒷면에 적혀있었을까?’
애초에 고위급 수인들에게만 풀리는 정보라면…….
정보상도 보통 신분이 아니라는 건가?
머리를 팽팽히 돌리느라 집중한 한슈페나의 볼이 빵빵하게 부풀려졌다.
그때, 그런 슈페나의 상념을 방해 하는 카누스의 한마디가 들이박혔다.
-근데 갑자기 왜 이런 쪽으로 이야기가 빠졌어? 누나, 그 예언은 어떻게 알아낸 거야?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54화
슈페나는 잠시 뜸을 들이며 생각했다.
‘예언이 고급 정보인 거면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게 더 이상하겠지.’
적당히 모른 척해야 할 것 같았다. 어차피 답이 파란색이란 건 알아냈으니까.
‘카누스, 쟤는 쓸데없이 날카롭단 말이야.’
고개를 돌리진 않았지만 리카도 르의 시선도 느껴졌다.
슈페나는 싱긋 입꼬리를 끌어올리곤 여상스러운 가면을 덧대었다.
“그냥 수수께끼 같은 건 줄 알고 물어본 건데? 난 예언이라고 한 적 없어.”
-싱겁긴.
“아, 졸려.”
그녀가 부러 하품을 하며 더 이상의 대화를 차단했다.
그리곤 차창에 머리를 뉘며 꾸벅꾸벅 조는 척을 했다.
그러던 슈페나는 정말로 깜박 잠에 빠졌다.
“잘 자네.”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리카도르는 슬며시 제 어깨를 그녀에게 내주었다.
리카도르에게 기대어 숙면을 취하던 슈페나가 눈을 뜬 건 한참 뒤였다.
– 우와, 여긴 눈이 와!
카누스는 오랜만에 고향 땅을 밟은 사람처럼 꼬리콥터를 주체하지 못하며 좋아했다.
창문 밖에는 하얀 눈발이 흩날리는 장관이 펼쳐져 있었다.
‘벌써 도착한 건가?’
슈페나도 무거운 눈을 비비적거리며 카누스처럼 차창에 매달렸다.
“와, 진짜 눈이 내리네. 함박눈일까?”
색색 지붕에 소복이 내려앉은 하얀 눈, 사람이 잘 지나다니지 않지만 아늑해 보이는 도심.
르쉐의 풍경이었다.
“예쁘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위치한, 에델바이스가 새겨져 있는 시계탑.
‘어? 시계탑!’
슈페나는 홀린 듯이 그 시계탑을 올려다보았다.
“내려, 부인.”
어지간히도 마음에 드는가 보군.
그런 슈페나의 모습을 본 리카도 르가 피식 웃으며 에스코트를 위해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카누스도 얼른 내리고 싶은지 꼬리를 동동 구르며 재촉했다.
-나도, 나도 내려줘!
“네네.”
슈페나는 피식 웃고는 늘 그랬듯 자신의 가방에 카누스를 넣어 주었다.
그들은 드디어 르쉐의 땅을 밟았다.
슈페나가 한 바퀴를 핑그르르, 돌며 제법 번화한 도시의 정경을 구경했다.
그러는 사이, 다른 이들도 차에서 내렸다.
슈페나는 비글처럼 달려가 칸과 리리엘라를 반겼다.
“어머님, 그리고 언니!”
“슈페나…!”
리리엘라는 은근슬쩍 그런 슈페나를 껴안으며 사심을 가득 채웠다.
‘좋은 사자생이었다.’
리리엘라가 그리 관을 짤 준비를 하다가 이내 도리도리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그러더니 한 발짝 더 용기를 내어 다가갔다.
“옷, 역시 잘 어울려.”
슈페나는 내리기 직전 도로 옷을 갖춰 입은 참이었다.
그녀가 괜히 부드러운 제 털옷을 만지작거리며 해맑게 아부했다.
“언니가 사준 거잖아요!”
효과는 굉장했다.
야생의 리리엘라는 심장을 부여 잡은 채 얼어붙었다.
그것도 모자라 황금빛 사자의 귀가 뿅 튀어나와 버렸다.
도를 지나친 기쁨으로 인간화가 조금 풀린 덕분이었다.
‘이건 좀 안 무섭네.’
여전히 웃는 얼굴은 살벌했지만, 제법 앙증맞은 고양잇과 동물의 귀가 붙어있어서인지 귀여웠다.
슈페나의 시선을 눈치챈 리리엘 라가 소심하게 자신의 귀를 잡아 내렸다.
그런다고 감추어지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그리 화기애애한 일상대 화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쏴아아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슈페나는 괜스레 팔뚝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와, 근데 조금 춥네요.”
그 혼잣말에 리카도르가 기민하게 반응했다. 그는 슈페나 몫의 장갑을 주머니에서 꺼내어 권했다.
“여기, 장갑.”
“고마워. 근데 내 장갑이 왜 너한테 있어?”
“네가 두고 내렸잖아.”
아하, 그랬구나.
슈페나는 머쓱하게 볼을 긁적였다.
리카도르가 슈페나를 향해 짧게 이야기했다.
“손.”
그녀가 얌전히 손을 내밀자, 푹신 푹신 온기가 느껴지는 털실 장갑의 감촉이 피부 위로 덧대어졌다.
“그럼 계획했던 것부터 차근차근히 해볼까?”
그때, 두어 번 손뼉을 쳐 이목을 집중시킨 칸이 이제 이동하자는 듯 채근했다.
슈페나는 어머님에게 쪼르르 달라붙어 팔짱을 꼈다.
‘어머님한테 맛있는 거 많이 사달라고 해야지.’
다소 속물적인 목적이었다.
그렇게 여정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동서남북 도시 구석구석을 쏘아 다니며 추억을 쌓았다.
처음 먹어보는 요리도 맛보고, 유명하다는 건축물도 구경하고, 서로 까르르 장난도 치고.
좋은 사람들과 함께였기에 몹시도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한편, 헤실헤실 미소 짓던 슈페나의 머릿속에 잠시 다른 생각이 들어찼다.
‘나?’
‘어떻게 빠져나간다?’
시계탑을 한번 가봐야 할 텐데 언제 어떻게 스리슬쩍 샛길로 빠질지 고민이었다.
계속 묵기로 한 숙소도 1인실을 잡은 게 아니라서 더더욱.
‘리리엘라 언니가 다 같이 자자고 그랬었지.’
뭐. 그것도 싫지는 않았으나, 조금 짬을 내기 힘든 건 사실이지 않은가.
‘차라리 지금 혼자 있을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게 낫겠어.’
슈페나는 1차원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아, 갑자기 배가!”
꾀병이었다.
음파음파, 입술을 지워 초췌함을 더한 슈페나는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덩달아 그녀의 가방 안에서 낙하하는 경험을 하게 된 카누스가 예리하게 지적했다.
-뭐야, 배가 아픈데 왜 머리를 잡고 인상을 쓰는 거야?
아, 실수.
슈페나는 슬그머니 손을 아래로 내려 통통 배를 문질렀다.
약간 어설픈 연막이었지만 신기하게도 잘 먹히는 것 같았다.
먼저 걱정스럽다는 듯 슈페나를 부축한 건 리리엘라였다.
“왜 그래, 슈페나?”
“어디 아픈 거니, 아가?”
어머님도 본연의 차분함이 살짝 흐트러진 목소리로 슈페나를 염려 했고.
‘아, 좀 미안한데.’
슈페나는 미묘한 죄책감을 느끼며 수업을 빼먹는 아카데미생에 빙의해 혼신의 연기를 펼쳤다.
“너무 많이 먹어서 체했나 봐요.
조금 쉬면 괜찮아질 거예요…….”
거의 반쯤은 죽어가는 목소리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머리카락마저 연기를 돕는 모양인지 처녀 귀신처럼 갈라져 슈페나의 얼굴을 가렸다.
삐끗했던 아까와 달리 준수한 연기력이었다.
그에 깜빡 속아 넘어간 칸은 제 턱을 손으로 쓸며 자못 심각하게 해결책을 제시했다.
“흠, 그렇다면 잡아놓은 숙소로 이동해서 쉴까?”
“아, 아니에요. 저 때문에 그러실 필요는 없어요. 그냥 저만 우선 들어가서 쉴게요.”
의외의 전개에 눈알을 굴리던 슈페나가 간곡히 사양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어머님은 부드럽게 못을 박았다.
“가족인데 그럴 수야 있나.”
“네? 네에.”
슈페나는 얼떨떨하게 다소곳이 손을 모아 긍정했다.
‘이게 아닌데…?’
그렇지만 가족이라서 걱정된다는데 거기에다 대고 무슨 말을 하겠어.
가족이라는데.
‘내가 그렇게 생각해도 되는 걸까?’
정말이지 곤란했다.
슈페나는 울 것처럼 촉촉한 물기가 어린 눈망울로 머리카락만 쓸어 넘겼다.
리리엘라가 이런 그녀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손을 내밀었다.
“슈페나, 나한테 업힐래?”
슈페나는 화들짝 아픈 표정을 사수한 채, 되물었다.
“예?”
“아니다. 그냥 업혀.”
다행히도 리리엘라는 터프하게 슈페나를 들쳐 메며 보호자 역할을 자처했다.
“그래,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구나.”
칸도 진지하게 수긍하며 카누스가 담겨있던 가방을 리리엘라의 목에 걸어주었다.
-뭐야, 나 취급 왜 이래?
툴툴대던 카누스는 힐끔 슈페나를 곁눈질했다.
– 진짜 아파? 난 또, 꾀병인 줄.
저 눈치 빠른 자식.
슈페나가 속으로 뜨끔한 얼굴을 하고 있을 무렵, 꼬마 뱀이 새치 름하게 한마디 했다.
-흥! 카누스 꼬리는 약손이 필요하면 말해! 흥!
아프면 배 정도는 문질러줄 수 있다는 뜻이었다.
‘웬일이래.’
슈페나의 눈이 살짝 동그랗게 뜨였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시선은 다른 곳으로 향했다.
리카도르한테로.
‘왜 리카도르는 아무 말도 없지?
들킨 건가?’
하얀 그의 속눈썹에 더 새하얀 눈이 살포시 안착했다.
리카도르가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는 슈페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시선이 닿았다.
슈페나는 영문 모를 불안함이 들어 괜스레 리리엘라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가, 간지러워………!”
리리엘라는 아닌 척 좋아했다.
그 반응에 리카도르가 픽, 주먹으로 입가를 가리며 헛웃음을 흘렸다.
그제야 슈페나도 작은 한숨을 쉬었다.
꾀병을 알아챈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마음을 놓아도 될 것 같아서.
아무튼 슈페나는 묵기로 한 호텔로 운반되었다.
가문 내에서 운영하는 곳이라 가장 호화로운 최상층에 짐을 풀었다.
사실 호텔 전체를 체드 가의 이름으로 비워둬서 어느 객실에 묵든 상관은 없었다만.
슈페나를 커다란 퀸사이즈 침대에 눕힌 리리엘라가 말했다.
“슈페나, 괜찮겠어?”
“가서 제 몫까지 피로 풀고 와요, 언니.”
다른 이들은 숙소 내에 있는 온 천에서 잠시 몸을 담그고 오기로한 참이었다.
다들 딱히 갈 필요 없다고 했으나, 슈페나가 다녀오라며 열심히 설득한 결과였다.
슈페나가 방긋 웃으며 말을 더했다.
“괜찮아지면 저도 얼른 갈게요!”
아, 이건 너무 해맑았나?
그녀가 눈알을 데구르르 굴리며 마른침만 삼켰다.
때마침, 편한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리카도르가 슈페나와의 거리를 좁혔다.
가까이서 본 리카도르의 푸른 눈동자는 눈부신 샹들리에 아래에서 선득하게 빛을 발했다.
슈페나는 저도 모르게 이불을 턱끝까지 뒤집어쓰곤 눈만 내놓았다.
그는 따뜻한 방 안의 공기처럼 나른한 미성으로 속살대었다.
“피곤해서 그랬던 거면 푹 쉬어.”
들켰네, 꾀병인 거.
그래도 눈감아주려는 것 같았다.
슈페나는 무해하게 배시시 입매를 끌어올리며 자연스레 리카도르를 등지고 돌아누웠다.
그리곤 몰래 꾸깃꾸깃 표정을 구겼다.
‘망했다. 이대로 나가도 되려나.’
갈등하는 사이, 탁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슈페나는 발로 마구마구 이불을 차며 으으, 앓는 소리를 내었다.
그러던 와중, 결심했다.
‘아, 몰라.’
그냥 나가기로.
내일도 아픈 척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렇게 혼자 남게 된 기회는 흔치 않았다.
퐁!
뭉게뭉게 퍼지는 익숙한 구름과 함께 조그마한 파랑새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냥 나가면 너무 눈에 띌 거란 말이야.’
밖에는 저택에서 온 사용인들도 있었고, 이능을 사용하기라도 한다면 동물화를 한 게 훨씬 나았으니.
옷가지를 이불 속에 잘 감춘 슈페나가 염력으로 창문을 열었다.
그러곤 곧장 파닥파닥 날개를 위아래로 흔들며 시계탑 쪽으로 날아들었다.
“벳!”
드디어 순백색 에델바이스가 새겨진 시계탑 앞에 도착했다.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55 화
‘진짜 높고 뾰족하네.’
붉은 벽돌이 차곡차곡 쌓인 첨탑에는 길거리 벽화처럼 에델바이스가 예쁘게 그려져 있었다.
슈페나는 능숙하게 시계탑 꼭대기에 난 창문을 따고 안으로 들어갔다.
시계탑 내부는 복잡했다.
더구나 관리가 잘 안 되는 모양인지 더러웠다.
나무 바닥에 나뒹구는 시계, 먼지 쌓인 책, 벽을 장식하는 싸구려 그림.
‘원작에서 여주가 분명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시계탑 안이라고 했으니, 어딘가에 통로가 있다는 말인데.’
파랑새의 날갯짓은 점점 바빠졌다.
“삐비잇!”
보통 추리소설을 보면 이런 곳엔 비밀의 공간이 존재하지.
그리고 그 비밀공간은 대개 액자, 서고, 벽장 뒤에 있어.
슈페나는 추리소설 좀 읽던 짬밥으로 열심히 이곳저곳을 뒤졌다.
그러다 결국…….
‘아, 내 엉덩이.’
한쪽 벽면이 움직이는 감각과 함께 휘리릭 앞으로 무게중심이 쏠리더니, 엉덩방아를 찧어버렸다.
대리석 바닥의 딱딱한 감촉이 느껴졌다.
조막만 한 파랑새는 끙차, 기합을낸 뒤 엎어진 상태로 눈알만 데굴데굴 굴렸다.
“삐빗?”
그런데 정말 비밀공간을 찾아버린 것 같았다.
슈페나가 가느다란 두 다리로 바닥을 딛고 일어나 다시 제대로 주변을 살폈다.
‘벽이 무슨 회전문인가 봐.’
그녀는 방금 자신이 넘어온 벽처럼 생긴 입구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몇 발자국 더 앞으로 걸어가던 슈페나는 장미 넝쿨이 얽힌 커다란 문을 발견했다.
‘글씨가 쓰여 있어!’
그 문에는 멋들어진 필기체의 문장이 적혀있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색깔은?
이건 아까 그 예언이잖아?
이상한 일이었다.
‘설마 그 정보상은 알고 있었던 건가?’
의뢰로 찾아달라고 했던 장소가 이 비밀공간이라는 걸.
또한 이곳에 저런 암호가 있을 거란 사실을.
‘혹시 그러면 정보상도 여기 와본적이 있는 거 아니야?’
꽤나 그럴듯한 추론이었다.
상황에 경각심을 느낀 슈페나가 두 손으로 힘차게 문을 밀었다.
하지만 끄떡도 하지 않았다.
한참을 문과 씨름하던 슈페나는 이윽고 결론지었다.
‘설마 저 수수께끼 같은 예언의 답을 맞히라는 건가?’
파란색!
“삐비빗!”
열려라, 참깨!
근엄한 표정으로 한쪽 날개를 곧게 뻗어 문을 가리켰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지금 새 언어 차별해?
삐, 비, 빗!”
한 글자씩 끊어가며 대답했으나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화가 난 슈페나는 문에 있는 문고리를 발로 찼다.
그러자 바로 밑바닥에서 드드득, 단상 같은 게 올라왔다.
‘뭐야.’
슈페나는 저도 모르게 그 단상을 밟고 올라섰다.
그와 함께 거대한 문의 테두리를 따라 얽혀있던 붉은 장미가 파랗게 물들었다.
“삐잇….”
문이 열려버렸다.
와, 설마 제물을 바치는 것처럼 파란색인 이 단상에 무언가를 올려놓아야 되는 거였나?
‘내가 파랑새라서 다행인가……?’
슈페나는 빛의 추리를 하며 뒤뚱뒤뚱 날개를 퍼드덕거리곤 조심스레 앞으로 향했다.
계세요?
만면에 경계심이 가득했던 얼굴에는 이내 놀람이란 감정이 새로 들어찼다.
파랑새의 부리가 저절로 벌어졌다.
여러 귀물이 잠들었다던 비밀공간은 그야말로 별천지였으니까.
마치 잘 가꾸어진 정원에 온 듯 싱그럽게 깔린 잔디밭과 어디서 들어온 건지는 모르지만 화사한 햇살.
그런 평화롭고 신비한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형형색색의 진귀한 꽃들과 나무까지.
‘비밀공간이 이런 곳일 줄은 몰랐어..’
슈페나는 신대륙을 발견한 탐험가에 빙의해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이 비밀공간에는 구역이 나뉘어 있는 듯했다.
온갖 금은보화가 있는 곳, 여러 특이한 광물을 모아둔 곳, 희귀한 식물을 전시해놓은 곳.
마지막으로 신물을 정리해놓은곳.
모든 구역에 물건들이 풍성한 걸보니 정보상이 손을 댄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자낳괴 정보상이 왜 다 쓸어가지 않았을까?’
이런 의문이 엄습했으나, 슈페나는 우선 신물들이 모인 곳을 꼼꼼히 뒤졌다.
그러곤 염력으로 무언가를 하나 챙겼다.
“벳!”
원작 속에서 본 신물이었다.
뭐든 무한정으로 담을 수 있는 주머니.
원작 여주가 들고 다니던 앙증맞은 핸드백이었지.
‘그 조그만 가방 속에서 온갖 물품이 탈탈 쏟아져 나와서 얼마나 신기했었는데.’
일단은 그걸 이용한 생각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필요한 걸 저택까지 들키지 않고 가져가겠는가.
훗날 다시 시계탑에 들러 고이 돌려주는 수밖에.
‘빌려 쓴 셈이니까 괜찮겠지?’
원래는 원작 여주가 찾아낸 것들이다 보니 막 쓸어 담긴 기분이 좀 그랬다.
“삐빗.”
슈페나는 그 가방을 들곤 우선 금은보화가 가득한 방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다이빙했다.
어디로?
금화더미 속으로.
적당한 금전은 사업 초반에 큰 도움이 되는 법.
워낙 많아서 어느 정도는 집어가도 티조차 나지 않을 거였다.
돈 냄새는 상쾌했다.
슈페나는 마치 물고기처럼 활기차게 황금 위를 헤엄쳤다.
파랑새의 날개가 지느러미라도 된 듯 신명나게 펄럭 대었다.
‘아, 취한다.’
헤롱헤롱, 지금 이 순간을 즐기던 그녀가 날개로 제 이마를 퍽 때렸다.
‘정신 차려, 이 멍청아!’
슈페나는 총총총 새 걸음으로 뛰어다니며 분주히 비밀장소를 헤집었다.
“삐비비비빗!”
이능을 담아줄 광석, 테네도르도 곧바로 찾아냈다.
그렇게 제 몫의 귀물을 챙기던 슈페나는 어쩌다 보니 비밀공간의 중심부에 서 있게 되었다.
“벳?”
여기 또 뭐가 있네?
이끼가 낀 바위 위에 올려져 있는 고급스러운 벨벳 케이스.
그 위론 신성한 햇빛이 내려앉아 있었다.
‘소설에서 보면 이런 건 꼭 엄청 중요한 거더라.’
슈페나는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케이스에 있던 걸쇠를 달칵, 풀었다.
회중시계?
그 안에 담겨있던 건 다름 아닌 시계였다.
멋스럽게 콧수염을 기른 신사들이 썼을 법한 고풍스러운 디자인의.
이거 왜 익숙하냐.
슈페나는 염력을 이용해 시계를 이리저리 뒤집어가며 낱낱이 들여다보았다.
곧, 그 뒷면을 보게 되었을 때.
“삐비비비펫!”
미친.
슈페나는 안 그래도 동그란 눈을 더욱 커다랗게 뜨며 충격이 뒤섞인 울음소리를 내었다.
[변하지 않는 것, 바로 기억,]정보상이 만들어주었던 것과 똑같은 문구가 새겨진 회중시계.
‘이거 대체 무슨 상황이야?’
당혹스러웠다.
혼란스러운 상황 가운데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정보상은 역시 다 알고 있었던 거야.’
파랑새의 두 날개가 결연하게 주먹 쥐어졌다.
어딘가 뻐근한 기분에 고개를 한 바퀴 돌리며 스트레칭을 하자 목근육에서 터프하게 뚜둑, 소리가 났다.
슈페나는 잔혹한 뒷골목의 살인마같이 살벌하게 몸을 풀었다.
‘초크슬램을 걸어버릴 거야!’
암살계획을 세우는 중이었다.
수상해도 너무 수상하지 않은가.
왜인지 모르게 정보상의 술수에 놀아난 듯해서 기분이 나빠졌다.
허공을 향해 날개로 주먹질을 하하던 슈페나는 시간이 조금 흐른 후에야 진정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이 시계는 뭘까?
‘원작에서 본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기억이 희미했다.
누군가 머릿속에 탁한 물감을 뿌려놓은 것처럼.
묘연한 안개 한가운데를 걷는 기분이 스멀스멀 피어오를 무렵, 한가지 이상한 점을 떠올려냈다.
근데 정보상이 준 시계는 내가 원래 가지고 있던 금줄로 만든 건데?
슈페나는 황급히 새로 발견한 시계에 매달려있는 금줄을 훑어보았다.
진주처럼 동그란 모양의 금이 알알이 엮인 줄의 정중앙.
그곳엔 눈의 결정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이 도시에 와서 처음 본 함박눈과 같은.
그리고….
‘내가 어렸을 때부터 지녔던, 이번에 정보상에게 맡겼던 금줄에도 이런 문양이 있었지.’
파랑새의 깃털이 비쭉 위로 세워졌다.
조금 묘한 감정이 엄습했다.
나, 뭐지?
아니면 정보상이 날 골리려고 비슷한 외양의 회중시계를 가져다 놓은 건가?
슈페나가 날개로 제 머리 깃털을 쥐어뜯었다.
머리에 쥐가 날 것 같아서.
‘어?’
그 순간, 머릿속에 이상한 기억이 홀로그램처럼 떠올랐다.
가을철 찬란한 밭과 같은 밀빛 머리칼과 짙은 신록이 피어난 듯 화사한 녹안을 가진 여인.
‘원작 여주인가?’
원작 여주의 외양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옆에…..
익숙한 하늘빛 중단발과 밤색 눈동자를 가진 슈페나가 서 있었다.
성인이 된 건지 키는 훌쩍 자란 모양이었지만,
‘사이가 왜 좋아 보이냐.’
그 둘은 환하게 웃으며 뭐라뭐라 떠들었다.
이 아리송하고 단편적인 장면을 끝으로 기억이 끊어졌다.
‘…이게 뭐야.’
슈페나는 실이 끊긴 인형처럼 축 늘어져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런 그녀의 날개 끝이 파르르떨려왔다.
이상한 기억이 흘러든 여파인지 잠시 경련을 일으킨 슈페나는 곧 초조하게 사색했다.
요. 회중시계도 정보상과 관련이 있는 건가 싶었으니까.
‘정보상, 정보상에 대한 정보가 너무 부족해.’
슈페나는 오른쪽 날개로 턱을 쓸며 고심했다.
솔깃할 만한 고급 정보도 가져다주고, 비밀공간으로 통하는 문의 암호도 알려주고, 정보상이 그녀에게 도움이 되는 건 맞았다.
하나, 그 호의의 의도가 짐작조차 안 간다는 점이 문제였다.
정보를 줄 때조차 변덕스러워 보인다는 것도 그렇고.
저택으로 돌아가면 그 정보상에 대해 면밀히 조사해야 할 것 같았다.
‘우선 너무 시간을 끌면 내가 호텔을 벗어났다는 게 걸릴지도 몰라.’
슈페나는 동공지진을 일으키며 도로 시계를 케이스에 넣었다.
그러던 중, 또 기이한 무언가를 포착했다.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56화
“삐빗?”
머리카락?
살짝 곱슬기가 있고 기다란 밀빛 머리카락.
방금 환상에서 본 원작 여주의 머리카락과 똑같았다.
‘이런 게 떨어져 있다니…….’
그럼 원작 여주가 이곳을 다녀간 건가?
그럴 리는 없었다.
원작 여주는 사슴 영지에서 잘살고 있을 시점이었으니까.
‘뭐, 제법 흔한 머리 색이니까.
그나저나 정보상은 무슨 관계가 있는 거람.’
슈페나는 딜레마에 빠졌다.
그때, 느닷없이 드드드드, 무언가 마찰하는 듯한 소음이 들려왔다.
위에서 나무 파편이 먼지처럼 잘게 흘러내렸다.
“벳…?”
지금 무너지고 있는 거냐?
파랑새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쳐다보았다.
나무 천장은 한 30분 후면 무너질 듯 느리지만 위태롭게 금이 가고 있었다.
와, 가지가지 하네.
원작 여주가 찾아내고 나서도 멀쩡했던 건데 갑자기 왜?
슈페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침 사방에 널려있던 귀물이 눈에 들어왔다.
‘너무 아까운데.’
슈페나는 갈등했다.
이대로 간다면 저 값비싼 아가들은 고스란히 잔해에 깔려 빛을 보지 못할 테니까.
솔직히 탐이 나는 것도 사실이었다.
‘애초에 이렇게 되면 원작 여주도 이 귀물들을 얻지 못하는 거 아닌가?’
마침내 그녀가 결단을 내렸다.
일단 다 챙겨야겠다고.
‘뭐, 나중에 때가 돼서 내가 원작여주한테 돌려주면 깔끔하잖아!’
슈페나는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이능을 일깨웠다.
그리고는 소중한 아가들에게 흠집이 나지 않도록 섬세하게 염력을 컨트롤했다.
온갖 물건들이 각기 다른 빛을 발하며 가방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차곡차곡 쌓였다.
의외의 노동을 하느라 시간이 흐르고,
‘휴, 다 된 거 맞지?’
머리만 빼꼼 집어넣은 상태로 번 잡한 가방 안을 들여다본 슈페나가 날개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땀이 송골송골 맺힌 이마도 야무지게 닦았다.
이능을 너무 많이 사용해서인지 꽁지깃이 간질간질했다.
그래도 그동안 체드윅 가에서 이 능 수련을 열심히 한 덕에 버틸수 있었다.
시계탑은 이제 조금만 있으면 쓰러질 듯 흔들리고 있었다.
떨어지는 파편의 크기도 점점 커져갔다.
‘이젠 진짜 가야 돼!’
목에 핸드백을 매단 슈페나는 슬쩍 뒤를 돌아보며 얼른 시계탑에서 빠져나왔다.
그와 동시에 건물의 외벽도 쩌적, 갈라졌다.
‘이거 나름 도시 중앙부에 있는 건데.….’
죄 없는 이들이 다칠까 봐 걱정되었다.
파랑새는 비장하게 퍼드덕퍼드덕날개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리고선 남은 이능을 쥐어 짜내어 시계탑을 감쌌다.
쿵, 건물은 그 상태 그대로 붕괴되었다.
눈먼 조각이 튀어 타인에게 피해를 줄 겨를조차 없이.
‘이게 되네?’
졸지에 정의의 히어로가 되어버린 슈페나는 비틀비틀 현장에서 멀어졌다.
그렇게 다시 숙소에 도착했다.
그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곤 천근만근 피곤한 다리를 날개로 두드렸다.
그러곤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런데…….
“어딜 다녀온 것 같은데.”
네가 왜 거기서 나와?
리카도르가 방 한가운데 있던 흔들의자에 앉아있는 게 아닌가.
그는 서서히 슈페나와의 거리를 좁혔다.
“꾀병까지 부리고.”
슈페나는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했다. 새의 모습으로 있어서 소용은 없었다만.
리카도르가 바닥에 널브러진 핸드백을 주워들곤 읊조리듯 말했다.
감정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나지막한 미성으로.
“못 보던 가방도 새로 생겼네?”
망했네.
파랑새의 눈가가 파르르 요동쳤다.
그를 따라 푸른 깃털도 사시나무처럼 와들와들 떨렸다.
때마침, 벌컥 거실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또 누구야? 이거 잣된 거 맞지?’
슈페나의 낯빛이 아연실색하게 질렸다.
슈페나가 우왕좌왕 어쩔 줄을 모르며 덤벙대는 사이, 열린 문 사이로 누군가가 걸어 들어왔다.
저벅저벅.
그 발걸음의 주인은 리리엘라였다.
그녀는 어떤 기척을 느낀 모양인지 리카도르와 슈페나가 있던 방에 들어와 의아함을 내비쳤다.
“너, 그 방에서 뭐 해? 슈페나는?”
그 물음에 리카도르가 뒷짐을 진 자세로 뒷걸음질을 하며 차분히 답했다.
“아, 배가 아프다고 화장실에 갔습니다.”
리카도르는 문이 열리는 순간부터 잽싸게 슈페나를 제 손바닥 위로 숨긴 참이었다.
다행히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리리엘라가 순진하게 슈페나를 염려했다.
좀 곤란한 방향이었지만.
“그래? 그럼 가서 약이라도”
“이미 줬으니 누님은 신경 쓰지 마요.”
잘하고 있어, 리카도르!
슈페나는 티 나지 않게 날개로 리카도르의 손을 두들기며 응원했다.
하지만 그런 슈페나와 달리 리리 엘라는 시무룩하게 긍정했다.
“응, 그래.”
남동생의 반응이 묘하게 날카로워서 좀 서운해진 탓이었다.
리리엘라의 눈썹이 축 늘어져 짐짓 음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이 언니는 저런 얼굴일 때 제일 무섭더라.’
어떻게든 달래주고 싶은데.
이제는 슈페나도 리리엘라의 표정 언어를 조금 읽을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슈페나는 가느다란 발로 리카도 르의 피부를 꾹꾹 눌렀다.
뭔가 하라는 듯 사부작거리는 몸짓.
한 차례 눈가를 가늘게 찡그린 그가 한결 부드러운 어조로 리리 엘라를 안심시켰다.
아무래도 슈페나의 텔레파시가 통한 듯했다.
“그래도 아까보다는 괜찮아 보였으니, 연꽃을 같이 만들 수 있는지 물어보겠습니다. 먼저 내려가 있어요, 누님.”
“응, 너무 무리하진 말라고 전해줘.”
리리엘라도 비로소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리곤 대꾸했다.
기분이 나아졌다는 표시였다.
그리 한바탕 리리엘라가 휩쓸고 간 뒤.
리카도르는 슈페나를 침대에 내려주며 속삭였다.
“누님은 갔어.”
“벳?”
새인 상태로는 말이 안 통하는데..
슈페나는 잠시 바디랭귀지를 사용했다.
“삐, 삐빗!”
이불을 들추어 아까 숨겨두었던 옷을 염력으로 꺼내었다. 그리곤 날개로 드레스룸을 가리켰다.
후딱 옷만 갈아입고 올 거니까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슈페나가 쪼르르 날아가 드레스룸 안으로 사라졌다.
혼자 남게 된 리카도르는 어딘가 멍해진 눈빛으로 털썩 침대에 주저앉았다.
이윽고, 편한 일상복으로 환복한 슈페나가 빼꼼 열린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더니 살짝 뜸을 들이며 리카도르를 올려다보았다.
“…리카도르.”
머뭇대던 슈페나의 입에서 나온 말은 사뭇 발랄했다.
“우린 친구잖아!”
“그래서?”
“끈끈한 우리 같은 친구 사이에 필요한 게 뭘까?”
언뜻 냉한 듯한 리카도르의 반응에도 슈페나는 굴하지 않고 천연덕스레 자문자답했다.
“비밀, 아니겠어?”
방금 리리엘라 언니가 왔을 때 숨겨준 걸 보면 괜찮을 것 같긴 했지만, 확실히 해둘 요량이었다.
“이건 우리 둘만의 비밀인 거지.”
오늘의 산책이 다른 누군가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슈페나가 애써 함박웃음을 지으려 노력하며 은근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 비밀로 해줄 거지?”
“싫은데.”
“야, 왜에?”
돌아온 답은 부정이었다.
슈페나는 잽싸게 다가가 리카도 르의 팔을 꽁꽁 붙들었다.
그러고는 아이가 생떼를 쓰듯 이리저리 흔들었다.
“방금은 그냥 넘어가 줬잖아, 응?”
“그러게, 내가 왜 또 넘어가 줬을까.”
그에 리카도르는 혼잣말인지 답인지 모를 희미한 한마디를 내뱉었다.
리카도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조금 전엔 왜 도와준 건지 이해가 되질 않았으니까.
‘그동안 도와줬던 습관 때문인가.’
목숨값도 제대로 갚았고, 정작 슈페나는 그날의 기억도 해내지 못했고, 자신을 친구라 여기고 있으니 위험하진 않을 텐데.
그저 이 기이한 계약에 관해서만 파헤치고 주의하면 되었을 텐데.
방금 일은 모른 척하고 내버려 둬도 괜찮았을 텐데.
왜 그는 슈페나를 숨겨주었는가.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으나, 리카도르는 무심한 낯을 가장하여 슈페나를 추궁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슈페나가 무슨 일을 벌이고 온 건지 아는 게 급선무였으니.
“도대체 뭘 하고 온 거지?”
“히어로 놀이.”
“응?”
슈페나는 알쏭달쏭 뜻 모를 대답을 하며 다음으로 넘어갔다.
“비밀로 해주면 내가 진짜 뭐든다 할게.”
리카도르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만큼 매력적인 미끼로, 그러나 그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오히려 슈페나를 압박했다.
리카도르가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을 하곤 한 발짝 한 발짝 거리를 좁혔다.
“내가 뭘 시킬 줄 알고.”
“뭐, 뭐 시킬 건데……?”
그녀는 본능적으로 슬쩍 발을 뒤로 물리며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러한 슈페나의 모습이 담긴 리카도르의 푸른 눈은 짙게 가라앉은지 오래였다.
그 서늘한 얼굴에 슈페나는 횡설수설 말을 이었다.
“나 요즘 운동해서 힘도 세. 네가 업어달라고 하면 업어줄게.”
그 내용은 제법 엉뚱했다.
리카도르가 어이없다는 듯이 실소하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웃기려고 한 말이야?”
슈페나는 똑같이 고개를 기울이며 동그래진 밤색 눈동자로 되물었다.
“웃겼어?”
“전혀.”
“아니, 그러니까 그만큼 각오가 되어있다는 거지.”
슈페나는 열심히 변명했다.
그러자 리카도르가 어깨를 으쓱 이곤 꽤나 흡족한 속내를 감추며 미적지근하게 호응했다.
“…그것참 믿음직하네. 생각해 볼게. 어떤 소원을 말할지.”
딱히 지금 그녀에게 무얼 바라진 않았으나, 언젠가는 쓸모 있을 테니까.
슈페나가 밖에서 뭘 하고 온 건지는 의문이었지만 일단 캐묻지 않기로 했다.
외딴 도시에 와서 할 게 뭐가 있겠는가.
새로 생긴 가방을 보니 혼자 돌아다녀 보고 싶어서 그랬던 것일수도 있고,
‘그렇지만 내 부인은 너무 겁이 없어. 다치면 어떻게 하려고.’
조금만 더 내게 의지해줬으면 좋겠는데.
무심코 내뱉어질 뻔한 진심에 리카도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57화
‘쟤는 왜 갑자기 표정이 얼었어?’
느닷없이 심각해진 리카도르의 태도를 본 슈페나는 꼴깍 마른침만 삼켰다.
“나 생각보다 연약한 수인이야, 리카도르. 그것만 명심해줘.”
슈페나가 긴장감이 묻어나오는 말투로 눈치를 살폈다.
리카도르는 서둘러 표정을 수습했다.
그러더니 사냥감을 바라보는 포식자처럼 한결 여유로워진 눈빛으로 슈페나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대수롭지 않게 고갯짓을 했다.
“밖에 나가게 옷이나 더 껴입고와, 부인.”
다른 이들은 다 도시 분위기를 즐긴다고 호텔 근처 강가로 나가지 않았던가.
리카도르는 겉옷을 걸쳐 입기 시작한 슈페나를 향해 별 의미 없는 척 당부했다.
“그리고 세상은 험해.”
“응?”
“어디 가고 싶으면 그냥 말해. 데려가 줄 테니까.”
그에 슈페나의 입술이 비죽 튀어 나왔다.
걱정해준 건가, 싶어서.
‘뭐야. 그런 건 그냥 솔직하게 말하지.’
기분이 살짝 좋아진 그녀는 음음음, 콧노래를 부르며 리카도르에게 이야기했다.
“근데 뭐 하기로 했어? 아까 들어보니까 연꽃 어쩌고, 그러던데.”
“밖에 추워.”
그는 그 물음에 대한 답변 대신 목도리를 둘러주었다.
슈페나가 어딘가에 막힌 듯 조금 작아진 음성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어……고마워.”
얘는 가만 보면 예고도 없이 훅들어오더라.
남몰래 중얼거린 슈페나는 리카도르의 뒤를 쫓아 호텔 밖으로 나왔다.
모두 강변에 사이좋게 돗자리를 펴고 앉아있었다.
그들이 일제히 슈페나를 반겼다.
“몸은 좀 나아진 거니, 아가?”
“슈페나, 배는 좀 괜찮아?”
-나 때는 말이야. 배앓이 정도는 1시간 만에 떨쳐냈다 이 말이야!
짐짓 슈페나를 타박하던 카누스마저 멋쩍게 덧붙였다.
-안 그렇게 봤는데 누나 약골이 네.
모두 슈페나를 염려하고 있었다.
‘내가 괜히 아프다고 꾀병을 부린 건가.’
그녀는 양심이 콕콕 찔려오는 걸 느끼며 그린 듯한 미소로 화답했다.
칸은 슈페나의 볼따구를 아프지 않게 조물딱거리며 기민하게 이야기했다.
“근데 안색이 전보다 어두워진 것 같구나. 식은땀도 흘린 듯하고.”
“괘, 괜찮아요!”
솔직히 좀 힘들긴 했으나, 참을 만했다.
동물화를 해서 이능을 사용하니 훨씬 힘이 덜 들더라고, 리카도르한테 들킨 충격 때문인지 피로도 싹 날아가 버렸다.
‘손을 다쳤을 때, 발도 책상 모서리에 찧어버리면 요상하게 안 아픈 것과 같은 이치인가.’
슈페나가 잠시 상념에 빠진 사이, 리리엘라는 자신이 만든 연꽃을 쥐여주며 얘기했다.
“어서 점괘 뽑아, 슈페나.”
그리고는 슈페나에게 설명해주었다.
이 도시에선 점괘를 하나 뽑은 뒤, 직접 종이로 만든 연꽃에 넣고 띄우는 게 전통이라고.
슈페나는 얌전히 나무통에 담겨 있는 점괘를 가져갔다.
‘뭐야, 꽝이네.’
그리고선 리카도르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나 꽝인데 너 뭐 나왔어?”
“대통.”
“와, 그럼 난 너랑 찰싹 달라붙어 있어야겠다.”
슈페나는 자못 애교스레 아부성발언을 했다.
그러자 그가 쌀쌀맞다고 느껴지 리만큼 냉정하게 받아쳤다.
“그런다고 안 봐줘.”
“쳇.”
하지만 슈페나는 보지 못했다.
리카도르의 귓가가 강물 위로 띄워진 등불 달린 연꽃처럼 달아올랐다는 사실을.
다사다난했던 하루가 지나갔다.
***
다음 날.
슈페나는 앓아눕게 되었다.
‘어제 너무 무리했나 봐.’
이능을 남발한 데에다 멀쩡한 척 밤바람까지 씌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빠른 기력 회복을 위해 파랑새의 모습으로 변한 슈페나는 베개 위에 파묻히듯 누워있었다.
덜덜덜, 조막만 한 파랑새의 부리가 계속 떨려왔다.
“삐비잇….”
머리는 뜨거운데 왜인지 모르게 기분 나쁜 오한이 들었다.
몸살이 나도 단단히 난 모양이었다.
“부인, 뭐라도 먹어야지.”
그때, 리카도르가 쟁반에 무언가를 한가득 담아 슈페나한테 다가왔다.
슈페나는 파르르, 눈꺼풀을 들어올리곤 그 내용물을 확인했다.
“….…삐, 삐빗?”
이내, 놀람이 담긴 희미한 울음소리가 튀어나왔다.
‘저게 뭐람?’
파랑새는 커다란 눈을 깜박거리며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며
쟁반 위에 산처럼 쌓인 오색빛깔나무열매와 쌀알, 그리고 얇고 비쩍 메마른 나뭇가지 같은.….
‘밀웜이잖아! 그것도 건조 밀웜.’
슈페나는 경악했다.
저걸 왜 리카도르가 들고 있단 말인가.
삭신이 쑤셨지만, 저절로 몸이 일으켜졌다.
파랑새가 이불을 들춰내곤 베개에 엉덩이를 딱 붙이고 앉아 리카도르를 올려다보았다.
잘난 그의 낯은 평소와 다를 게 없어 보였다.
오히려 벌레라는 흉측한 절지동물의 존재는 지금 리카도르에겐 관심 밖인 듯했다.
리카도르는 혼란스러운 슈페나의 마음도 모르고 걱정이 가득 묻어 나오는 낯으로 밀웜을 권했다.
“카누스가 이게 단백질 보충에 좋다던데, 싫어?”
“벳?”
슈페나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으며 눈알을 도르륵 굴렸다.
며
‘분명 책에서 리카도르는 벌레를 극혐했는데 설마…….’
카누스의 말 한마디 때문에 들고 온 건가.
‘그럼 나 때문에 싫은데 티도 안내고 노력하는 거야?’
아니면 죽은 벌레라서 거부감이 좀 덜한 걸지도.
아무튼 저 징그러운 밀웜도 리카도르의 정성이라는 뜻이 아니던가.
슈페나가 동그란 밤색 눈망울을 글썽거리며 자못 감격했다.
‘그렇지만 안 먹어!’
물론 감동과 섭취는 별개의 문제였다.
슈페나는 그간 꿋꿋이 나무열매만을 사랑하지 않았던가.
‘파랑새인데 지조가 있지.’
그리고 로판 속 새는 원래 벌레안 먹어!
그녀는 리카도르가 내민 쟁반에서 나무열매만 쏙쏙 골라 이불 속에 저장해두었다.
당장은 먹을 힘이 나지 않았으니.
리카도르가 그런 그녀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방금 행동이 먹이를 숨겨두는 다 람쥐 같아서 좀 귀여웠으니까.
그렇지만 그는 단호했다.
“입맛 없어도 먹어야 해, 부인.”
결국, 슈페나는 리카도르의 품에 안긴 채 이유식을 먹는 아가처럼 나무열매를 쪼아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날 밤.
리카도르는 줄곧 슈페나의 곁을 지키며 간호했다.
다른 이들도 슈페나를 염려하며 자리를 지켰지만, 리카도르는 더욱 극진하게 살폈다.
왜냐하면….
‘괜히 밖에 나가게 한 건가.’
죄책감이 들었으니까.
리카도르가 고이 잠든 파랑새의 깃털을 손끝으로 조심스레 쓸어내렸다.
아직 열이 덜 떨어진 건지 슈페나의 몸은 뜨끈뜨끈했다.
‘진짜 손이 많이 가네. 신경 쓰이게.’
속으로 중얼거리던 리카도르는 파랑새의 이마에 놓인 앙증맞은 물수건을 갈아주었다.
“얼른 나아, 부인.”
그 노력 덕분인지 슈페나는 바로 하루 뒤에 멀쩡해졌다.
인간화를 한 슈페나가 어제보다 쌩쌩해진 목소리로 리카도르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고마웠어, 리카도르. 이제 온천이나 가볼까?”
명색이 온천 여행인데 즐기지도 못하다니, 남은 기간만큼은 열심히 놀 생각이었다.
슈페나는 리카도르를 끌고 온천으로 향했다.
-나도, 나도!
“나도 같이 가고 싶어, 슈페나.”
“온천에 한 번 더 다녀오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며늘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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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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