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uebird Lady and The White Lion Family RAW novel - Chapter (8)
백사자가문의 파랑새 마님 8화(8/21)
마침 다른 이들도 함께 가자며 슈페나를 붙잡았다.
그러다 보니 가족 욕탕에서 다 같이 온천욕을 즐기게 되었다.
그런데 온천의 참맛을 즐기고 있던 슈페나는 의외의 난관에 봉착했다.
뜨끈한 물속에서 몸을 지지고 있던 칸이 꺼낸 화제 때문이었다.
“도심 중앙에 있던 시계탑이 갑자기 무너졌다는구나.”
아하하, 그렇군요.
영혼 없이 맞장구를 치던 슈페나에게 리카도르가 속닥였다.
“부인, 설마 사고 치고 오느라 어제까지 아팠던 건 아니지?”
“에이, 아니야.”
역시 눈치 하나는 귀신같아.
슈페나는 괜스레 물장구만 치며 머쓱하게 고개를 저었다.
힘숨찐 히어로의 삶은 고달픈 법이었다.
이런 슈페나의 부정에도 의심의 눈초리는 더욱 심해졌다.
꼬르륵.
슈페나가 온천달걀이 된 기분으로 리카도르의 시선을 피해 잠수했다.
미간을 슬며시 일그러뜨리던 그도 슈페나를 따라 물속에 얼굴을 집어넣었다.
-뭐야, 둘이 누가 숨 더 오래 참는지 내기해?
그리고 그건 이내, 사소한 내기로 번져갔다.
“야, 카누스! 그건 반칙이지! 너만 냉탕 쓰기냐?”
-나 저 뜨거운 온천 들어가면 뱀고기 된단 말이야!
“뱀고기가 의외로 맛있대.”
끝내 리리엘라까지 끼어들었다.
-리리엘라 누나. 그게 말이야, 방구야? 되게 야만적이야!
뿔이 난 카누스는 꼬리를 사용해 리리엘라에게 차가운 냉탕의 물을 튀겼다.
안타까운 건, 리리엘라를 겨냥했던 물벼락이 슈페나에게로 날아왔다는 점이었다.
“야, 너!”
당연하게도 슈페나 또한 한쪽 입매를 슬며시 비틀어 올리며 온천물 깊숙이 손을 넣었다.
그리곤 그대로 카누스에게 풀스윙을 날렸다.
“아! 일부러 그런 거야, 부인?”
근데 왜 리카도르가 맞은 걸까?
그 이후로 물세례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모두에게 돌아갔다.
어쩌다 보니 온천은 사방에서 물방울이 빗발치는 전쟁터가 되어버렸다.
그들은 일상적이고 새로운 추억을 쌓아갔다.
그렇게 르쉐에서의 여정이 끝났다.
그 여행을 통해 슈페나는 보물말고도 몇 가지 의문점을 가지게 되었다.
‘그 의문을 푸는 건 내 몫이지.’
저택으로 돌아온 슈페나는 곧장 제인을 불러들였다.
“제인, 내가 예전에 시계 맡겼던 공방 말이야. 거기 좀 조사해줘.”
일단 수상쩍은 정보상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 계획이었다.
제인네 아버지가 제법 유명한 상단 주인이라 하더라고.
체드윅 가는 사용인들조차 아무나 뽑지 않다 보니 다들 뒷배경이 좋은 편이었다.
아무튼 그래서인지 제인도 넓은 인맥을 통해 여러 이슈를 곧잘 가져오곤 했다.
지난번 로네악 꽃에 관한 호의적인 소문을 퍼뜨린 것도 제인의 작품이 아니던가.
아마 알아 올 수 있을 터.
그리고….
슈페나는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버지가 상단을 운영하신다고 했지?”
“네? 네.”
“장부 하나만 만들어줄래? 은밀하게.”
비밀장소에서 여러 물건을 가져온 만큼 잘 활용하고 싶었다.
그런데 누군가 갑자기 생긴 테네 도르의 출처를 묻는다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잘 세탁할 방법을 찾는 수밖에.
제대로 한판 벌여볼 예정이었다.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58화
두 달 뒤.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어 슈페나는 15살이 되었다.
리카도르도 17살이 되었고.
그러는 동안, 일은 착착 진행되었다.
제인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상단을 통해 그럴듯한 장부도 만들어 놨다.
사실 거짓 장부라는 게 들킬까 조금 불안했으나, 어머님도 별말씀이 없었다.
-굳이 이리 보고할 필요 없단다.
며늘아가. 나는 너를 믿거든.
이렇게 지지해주셨을 뿐.
그렇게 테네도르를 개시하기 위한 밑작업은 무리 없이 완료되었다.
또한 제인에게 맡겼던 시계 공방에 관한 조사도 마무리되었다.
제인 자체가 발이 넓어서인지 여러 소문을 골고루 건진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보고를 들은 슈페나는 의아함을 표했다.
“그러니까 공방 주인이 몇 달 전에 바뀌었단 소리야?”
“네, 원래는 얼굴에 칼자국이 있는 남자였대요. 나무늘보가 대대로 운영하는 곳이랬나.”
제인은 작게 숨을 고르고 이야기를 덧붙였다.
“그리고 공방 이름도 원래는 ‘스노우 시계 공방’ 이었대요.”
그 말을 들은 슈페나는 저도 모르게 혼잣말했다.
“이상하다…….”
그럼 지금 정보상은 원작에 나왔던 인물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미아닌가?
정보상에 관한 건 자세히 나오지 않아서 정확히 알지는 못했다.
그러나 시계 공방은 대대로 가업처럼 이어져 온 곳이라서 역사가 제법 된다고 책에서 그랬는데.
정보상도 어렸을 때부터 일을 배워 베테랑인 인물이라 묘사되었고.
응?
설마 지금 정보상이 매번 느릿느릿 정보를 가져다주는 게 이런 이유 때문인가?
원작에 나온 진짜 정보상이 아니라서.
게다가….
‘그 정보상 진짜 수상해.’
마지막에 시계탑이 무너져 내린 것.
그건 결코 자연적으론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누가 일부러 수작을 부린 거면 몰라도,
‘그런 거라면 정보상이 가장 유력한 범인이겠지.’
슈페나가 시계탑에 다녀왔다는 사실을 알 만한 인물은 정보상밖에 없지 않은가.
‘이럴 때 그냥 안일하게 넘어가면 뒤통수 맞기 십상이던데.’
소설에서 많이 봤다.
보통 이런 정보상의 포지션은 딱 두 가지로 나뉘었으니까.
흑막인데 아군, 그리고 흑막이면서 적군.
‘뭐가 됐든 속을 알 수 없는 흑막이라는 게 찜찜하단 말이야.’
설마 그 가을 순회 때 수상했던 사고와도 연관되어있는 건 아니겠지.
확실히 알아봐야겠다고 다짐한 슈페나는 음산하게 뇌까렸다.
“….…미워할 거야.”
시계탑에서 살아남기 한 권은 쓸 뻔했다고!
좀 박진감 없게 무너지긴 했지만 놀랐단 말이야.
그 살기 어린 독백에 가만히 있던 제인이 어색하게 눈을 끔뻑였다.
“네?”
“아무것도 아니야. 혹시 그거 말곤 또 없어?”
슈페나가 황급히 정신을 차리곤 도리도리 고개를 저으며 되물었다.
그에 제인이 면목이 없다는 듯 멋쩍게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더니 답했다.
“…… 죄송해요.”
“아니야. 괜찮아.”
말은 그렇게 했으나 슈페나는 손끝으로 테이블을 툭툭, 두드리며 고민했다.
이걸로 정보상의 의도를 파악할 순 없을 것 같아서.
그 수상쩍은 정보상에게 한 방먹이려면 일단 뭐부터 해야 할까.
슈페나는 우선 차근차근 알아내기로 결정했다.
“그럼 예전 공방 주인이었다던 나무늘보, 만나고 싶은데 어디 사는지 알고 있어?”
직접 찾아가서 대화를 나눠볼 생각이었다.
나무늘보를 체드윅 가로 데려오는 건 나중에 귀찮아질 수도 있지 않은가.
다행히도 제인은 긍정적인 대답을 입에 담았다.
“네! 바로 준비해놓을까요?”
“당장은 힘들고, 그 시연회 끝난 뒤에 나무늘보한테 찾아가야겠어.
미리 채비해줘.”
사실 지금은 조금 바쁜 실정이었다.
본격적인 사업 준비도 진행되고 있었으니까.
이미 시범적으로 저택 내 꽃밭에 테네도르를 설치해둔 참이었다.
어머님이 준 땅에도 순차적으로 적용시킬 계획이었고.
‘잘 돌아가는지 확인해봐야지.’
슈페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제인에게 말했다.
“그럼 난 정원 좀 둘러보고 있을테니 이만 가봐.”
“예, 작은 마님.”
제인이 물러가자 슈페나도 얇은 카디건을 챙겨 입고는 방을 나섰다.
각양각색의 꽃과 나무로 화사했던 정원은 겨우내 대부분 시들어서인지 조금 황량해졌다.
슈페나는 본디 로네악 꽃을 심어 놓았던 화단으로 다가갔다.
여기도 꽃이 져서 휑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
“앗, 차가~!”
슈페나는 얼굴에 튀긴 물방울을 닦아내며 반사적으로 중얼거렸다.
이 소란의 근원은 테네도르를 박아놓은 화단 근처 우물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였다.
테네도르에 이능을 담은 결과물이었지.
알다시피 테네도르에는 어떤 수인의 이능이든 주입할 수가 있었다.
이능이 담긴 테네도르는 각기 다른 빛을 띠었으며, 탈리테를 불어 넣어야 작동되었다.
테네도르가 석탄오븐이라면, 이능은 음식이고, 탈리테가 연료를 공급하는 석탄 같은 느낌이랄까.
‘요점은 테네도르로 나도 다른 수인의 이능을 쓸 수 있다는 거지.’
그래서 테네도르가 굉장히 귀한 광석이라는 거였다.
물론 한계는 명확했다.
테네도르는 광석인 만큼 반영구적이었지만, 주입한 이능은 사용할수록 닳아 없어졌다.
‘결국엔 일회성이란 말이야.’
그때, 화단의 관리자로 임명한 사용인 중 하나가 테네도르를 슥 매만졌다.
그러자 뿜어져 나오던 물이 점차 멎어 들었다.
이렇듯 다른 이들도 테네도르를 통해 염력을 다루는 게 가능했다.
더구나 염력은 시전자의 의지를 따라 움직이는 힘이어서 이런 농사일에 효과적이었다.
‘다른 농기구에도 테네도르를 박아두길 잘했지.’
덕분에 힘들일 거 하나 없이 수확이 가능했다.
‘이것저것 많이 했는데, 테네도르가 생각보다 엄청 필요하지 않아서 다행이네.’
슈페나는 뿌듯하게 미소를 지으며 주변을 슥 둘러보았다.
“와, 이렇게 보니까 진짜 신기하긴 하다. 이제 봄이니까 꽃만 심으면 되겠네.”
마치 공장제 시스템을 보는 것 같지 않은가.
“굉장하네.”
그 순간, 낯익은 미성이 들려왔다.
리카도르였다.
-오, 되게 신기한 메커니즘이란 말이야.
카누스도 와있었다.
카누스는 짐짓 위풍당당하게 슈페나에게 말을 걸었다.
-누나, 사업할 거라며. 내가 뭐 도와줄까?
아무래도 카누스는 사업에 좀 끼고 싶은 듯 보였다.
-나 천재라서 일 잘하는 거 누나도 알자낭. 웅?
카누스는 몹쓸 애교를 부렸다.
‘뭐, 카누스가 똑똑한 건 사실이니까. 동업하자고 꼬드길 생각이긴 했는데.’
결국, 슈페나는 카누스와 하이파 이브를 했다.
매끈한 카누스의 꼬리가 그녀의 손바닥과 착 마찰음을 만들어냈다.
“좋아, 앞으로 잘 부탁하네, 카누스 박사.”
– 엣헴. 주식만 적당히 챙겨줘.
나름 화기애애하게 친목을 다지고 있던 찰나, 리카도르가 슈페나를 불렀다.
“부인.”
“응?”
“제품시연회를 벌일 거라고?”
그는 로네악 꽃을 힐끔 바라보더니 이야기했다.
슈페나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그게 효과가 좋을 것 같아서.”
로네악 꽃 치료제의 효험을 제대로 목격한 자는 연회에 초대된 이들뿐이었으니까.
모두의 머릿속에 각인시켜주고 싶었다.
잘 팔리도록.
해서 기자들도 부르고 판을 키우기로 했다.
다름 아닌 제품시연회를 통해서.
리카도르는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곤 팔짱을 꼈다.
이 상황이 딱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근데 그거에 누님은 왜 가는 거지?”
‘누님보단 내가 먼저여야 하는 거 아닌가.’ 사실 리카도르는 슈페나가 누님만 불러서 조금 언짢았던 상태였다.
이러한 리카도르의 심정을 알 리 없던 슈페나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응, 리리엘라 언니가 시연회 모델이 되어주겠다고 그래서.”
언니가 자신은 이능 부작용이 바로 나타나는 타입이라 더 도움이 될 거라고 그랬었지.
처음에는 괜히 다치게 하는 것 같아서 거절했었다.
언니가 재차 이야기하는 바람에 승낙했지만.
그리고 아무래도 체드윅 가의 인물이 나서면 화제성이 더해지지 않겠는가.
그 순간, 리카도르의 표정이 약간 누그러졌다.
슈페나가 먼저 청한 게 아니라 누님이 매달린 거란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까.
그는 슈페나에게 되물었다.
“어디서 한다고 했지? 시연회.”
“마을광장. 왜?”
“나도 가려고.”
그가 당당하게 선언했다.
슈페나는 반색하며 해맑게 헤헤, 미소 지었다.
“그래? 그럼 나야 좋지.”
오. 더 주목받겠는걸.
돈이 쌓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러다 문득 온천여행을 갔을 때가 생각났다.
뭐든 들어주겠다고 했었는데 아직도 리카도르는 소원을 말하지 않았으니까.
슈페나가 리카도르를 쿡 찔렀다.
“근데 그 소원권은 언제 쓸 거야?”
“글쎄. 아직 고민 중인데.”
그는 애매모호하게 답했다.
도대체 뭘 얼마나 시키려고.
걱정은 되었으나, 더 파고들어 물어보지는 않았다.
신경 쓸 일이 산더미가 아닌가.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시연회 일정이 바로 코앞으로 다가왔다.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59화
제품시연회 당일.
슈페나는 헤실헤실 웃으며 리리 엘라에게 고마움을 드러냈다.
“리리엘라 언니,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이 정도야, 뭘…….”
미쳤나 봐!
슈페나가 나한테 볼을 부볐어!
리리엘라는 감격스러움에 내적 호들갑을 떨며 말끝을 흐렸다.
“그만 가자.”
그때, 리카도르가 은근슬쩍 슈페나의 손을 잡아끌며 재촉했다.
“응!”
슈페나는 아무 생각 없이 희희낙락 마차에 올라탔다.
고풍스러운 체드윅 가의 인장이 새겨진 마차는 빠르게 저택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차창에 달라붙어 풍경을 구경했다.
와, 사람 진짜 많다.
마을광장은 소식을 듣고 몰려온수인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런 많은 이들 앞에서 결과물을 내보인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긴장되었다.
꽁지깃이 튀어나와 비죽 설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리카도르는 그런 슈페나를 곁눈질하더니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내리시죠?”
“넵.”
그 손길에 잡다했던 상념이 모조리 날아갔다.
“잘할 수 있어. 내가 그냥 완제품을 마시기만 하면 되는 일이잖아.”
옆에 있던 리리엘라도 응원의 말을 보냈다.
슈페나는 차분히 심호흡을 하곤 리카도르의 에스코트를 받아 한 걸음 한 걸음 대중에게로 다가갔다.
수인들은 복작복작 수군대었다.
“지금 뭐 하는 거래요?”
“요즘 그 이능 부작용을 없애준다던 꽃에 대해서 말이 많았잖아요.”
“이번에 체드윅 가에 시집온 파랑새 마님이 만든 거라면서요?”
파랑새라고 배척하는 분위기는 그리 심하지 않은 것 같았다.
하찮게 여겨질까 못내 염려되었는데.
“제품 시연은 언제 시작하는 겁니까?”
미리 대기시켜놓은 기자들이 수첩에 받아 적을 준비를 하며 일제히 슈페나를 응시했다.
슈페나는 광장에 준비된 단상 위로 올라갔다.
이제 제품의 효과를 보여줄 시간이었다.
슈페나가 살짝 떨리지만 단단한 목소리로 군중에게 이야기했다.
“그럼 지금부터 시연을 시작하겠습니다.”
걱정이 기우였다는 듯 제품 시연은 순조로웠다.
사실 슈페나의 역할은 그리 크지 않았다.
리리엘라에게 미리 만들어놓은 로네악 꽃 주스를 건네는 게 전부였으니까.
탁.
때마침, 리리엘라가 모두의 앞에서 이능을 사용하여 준비된 나무 판자를 두 동강 내었다.
슈페나는 조심스레 리리엘라에게 말을 건네었다.
“언니, 아프죠?”
“전혀.”
리리엘라가 듬직하게 부정했다.
웃고 있는 그녀의 낮에는 고통 따윈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슈페나는 서둘러 주스를 권했다.
그와 동시에 붉게 부풀었던 리리리 엘라의 팔이 육안으로 봐도 확연할 정도로 멀쩡해졌다.
그 광경을 목격한 수인들은 어머머, 연신 감탄사를 연발했다.
“정말 소문대로 효과가 굉장하네요!”
“이건 특종이야!”
기자들도 신이 나서 나무궤짝같이 생긴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다.
‘분위기는 좋고’
결정적인 멘트를 칠 차례였다.
이 시연회의 목적은 제품의 효험을 확인시켜주는 것도 있었지만, 결국 많이 팔려는 게 아니던가.
“여기 와주신 분들에 한해서 특별 예약 주문을 받겠습니다.”
슈페나는 자신만만하게 씨익 웃었다.
“50% 할인으로.”
특가 세일한다는데 안 사고 배기겠어?
더불어 특별한 몇 가지 구매 체계를 도입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저희 제품이 만족스러우셨다면 지인분들께 마음껏 추천해 주세요.”
추천인 할인.
원래 친구 따라 사자 영지 간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만큼 입소문은 무서운 법.
개인정보를 받아서 회원제 시스템 같은 걸 도입한 뒤, 추천인 할인을 해줄 계획이었다.
“추천하신 분과 받으신 분, 모두에게 5% 할인가가 적용된답니다.”
상큼하게 설명한 그녀가 사람들이 솔깃할 만큼 은근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또한 몇 가지 정보만 기입해주신다면 찾으러 오실 필요 없이 간편하게 배달해드릴 테니, 바쁘신 분들도 편히 이용해주세요.”
우리가 어떤 종족이던가.
배달의 종족.
물론 지금도 옷을 사거나 할 때 저택까지 배달해달라고 할 수 있었다.
근데 그건 가까워서 그런 거고.
전국 방방곡곡, 밤이는 새벽이든, 24시간 안에, 집에서 편하게 받아 볼 수 있는 배달 시스템을 만들 생각이었다.
‘원래 이런 편의성에 중독되면 못헤어나오는 법이잖아.’
산업혁명도 이뤄지고 있는 중이었고, 사자 영지 내의 도로명주소정리가 잘 되어 있어서 가능할 것 같았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니에요, 여러분.”
슈페나는 옥장판을 팔았다.
그 옥장판, 아니 로네악 꽃 치료제는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특별 예약? 반값?”
“놓치지 않을 거예요!”
“할인이라니 이건 못 참지.”
사자들은 삼삼오오 모여들어 예약표를 작성했다.
그렇게 시연회는 잡음 없이 완벽하게 진행되는 듯했다.
하지만 점점 사람들이 몰릴수록 문제가 발생했다.
질서.
나름 타인을 배려하며 사회적 거리를 두었던 사자들이 결국 서로 부닥쳤으니까.
인파가 집중되었기에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식품코너 바겐세일을 보는 것 같네.’
시연회를 보조하던 체드윅 가의 기사들이 교통정리를 하는 사이, 슈페나는 슬쩍 뒤로 빠지곤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옆에 있던 리카도르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개구지게 웃으며 리카도 르의 앞을 보호하듯 가로막았다.
“걱정 마, 넌 내가 지켜줄게!”
“누가 누굴 지킨다고.”
리카도르가 어이없다는 듯 픽 실소를 흘렸다. 그리고 그 말은 이 내 현실이 되었다.
정반대로,
“어? 어?”
슈페나가 중심을 잃고 아래로 휘청거렸다.
워낙 사람이 많은 탓에 사자들을 줄 세우던 기사도 밀려나, 그에 휩쓸린 덕분이었다.
하나, 그녀는 넘어지지 않았다.
“지켜준다던 사람은 어디 갔지?”
반사 신경이 좋은 리카도르가 맹수답게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 잡아주었으니까.
“야, 주변에 사람도 많은데.….”
졸지에 공공장소에서 리카도르와 스킨십을 하게 된 그녀였다.
슈페나가 주춤 몸을 움찔거리며 커다래진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리카도르는 그게 뭐가 문제냐는듯이 한쪽 눈썹을 들썩였다.
그리고는 슈페나의 허리를 감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가 조심스레 그녀를 안아서 사람들에게 치일 염려가 없는 뒤쪽에 내려주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리리엘라가 미련이 많이 남은 전남친 같이 그 윽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부럽다.”
나도 공주님 안기 잘할 수 있는데.
광장에 모여 있던 다른 사자들의 시선도 리리엘라를 따라 슈페나와 리카도르에게 머물렀다.
“오마마, 언제부터 겨울에 벚꽃이 휘날리게 된 거람?”
“아, 나도 모르게 웃고 있었더니 잇몸이 다 말랐네.”
사자들은 본인들이 연애하는 것도 아닌데 대리 설렘을 느끼며 히죽거렸다.
남의 연애를 구경하는 건 언제나 흐뭇하고 므흣한 법이었으니.
더구나 슈페나는 사자들 사이에서 제법 호감형으로 자리 잡은 참이었다.
일전에 슈페나가 원로 사자들의 충성을 받아내는 데에 성공했으니까.
자연히 그 분위기는 다른 사자들에게도 옮겨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가을 순회 때 있었던 사고.
슈페나가 계곡 아래로 떨어지자, 모두 똑같이 뛰어내려 구하지 않았던가.
그 덕분에 슈페나는 체드 가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며느리라 소문이 자자했다.
아무튼 작은 해프닝으로 좋은 구경을 한 사자들은 갑자기 점잔을 빼었다.
“흠흠. 사람이 너무 많아서 이런 일도 다 생기는구먼.”
“줄 좀 섭시다, 줄 좀!”
호들갑스러운 사자라니, 수인들의 왕으로서 위엄이 떨어지지 않는가.
뒤늦게 정신을 차린 거였다.
흐트러진 대형은 빠르게 원래대로 돌아왔다.
‘깜짝 놀랐네.’
슈페나도 힐끗 리카도르를 쳐다 본 뒤, 시연회에 다시 집중했다.
시연회는 무슨 소란이 있었냐는 듯 재개되었다.
그런데 여기 어그로 정신이 자존심보다 더 투철한 사자가 하나 있었다.
“타이틀만 좀 자극적으로 뽑으면 판매 부수를 높일 수 있을 것 같은데?”
기자는 데구르르 눈알을 굴리며 머릿속 계산기를 두드렸다.
「사랑은 사업을 타고, 체드윅 가꼬마부부, 공개적인 사업시연회에서 벌써부터 애정행각?」
이런 제목의 기사로 내면 쏠쏠할 것 같았으므로, 그런 기자의 카메라 안엔 조금 전 장면이 고스란히 찍혀있었다.
이윽고, 제품시연회가 성황리에 마무리된 후.
그 현장이 생생하게 담긴 기사들은 사자 영역 방방곡곡에 퍼졌다.
물론 가장 잘 팔린 건, 조금의 조미료를 더한 그 기자의 기사였다.
그렇게 돌고 돌아, 기사는 사자 영역 밖에 있는 이들에게까지 전달되었다.
***
사자들의 영지가 아닌, 여우 수인 영역 한가운데 쳐진 군영 안.
그중 사자가 그려진 가장 큰 막사 안에는 새하얀 머리칼과 시냇물처럼 맑고 푸른 눈을 가진 소년이 앉아있었다.
뒤로 봐도 앞으로 봐도 백사자 특유의 외양이었다.
매일 아침, 신문을 읽는 소년은 어느 기사를 보며 무뚝뚝하게 미간을 좁혔다.
그의 눈동자는 슈페나를 안아든 리카도르에게로 고정되어있었다.
화기애애했던 시연회의 분위기를 대변하듯 퍽 꽁냥꽁냥하게 잘 나온 사진이었다.
활자를 바삐 읽어 내리던 소년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짧게 읊조렸다.
“이게 무슨…….”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60화
변성기가 온 건지 앳된 나이에 맞지 않게 걸걸하고도 정적인 목소리, 소년은 경악이 깃든 표정으로 팔랑팔랑 신문을 넘겼다.
갓 산골에서 상경한 듯 순박하기 짝이 없는 얼굴은 점차 꾸깃꾸깃일그러졌다.
소년은 못 볼 걸 봤다는 듯 신문을 뒤집어 저 멀리에 치워버렸다.
그리고는 옆에 기립해있던 제 보좌관에게 정중히 말을 붙이며 애써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나저나 요즘 여우들은 뭐 하고 있는 겁니까? 답지 않게 조용해서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늑대수인들과 결탁한 것 같습니다.”
보좌관은 약간은 못마땅한 듯한 소년의 태도와 다르게 차분히 답했다.
그 대답에 소년이 눈을 두어 번 깜박이더니 아아, 작은 침음성을 흘렸다.
“그것 때문에 여태 잠잠했던 거였습니까? 역시 교활한 놈들입니다.”
소년은 책상 위에 놓인 여우꼬리를 손으로 짓이기며 자못 잔혹하게 뇌까렸다.
“이래서 저는 여우 새끼들이 싫습니다. 비열한 수 쓰는 건 흑표범 놈이랑 똑같아서.”
점점 뾰족해지는 음성에 묘한 분노가 담겨있었다.
그러자 보좌관이 못내 절레절레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그리 일을 키우신 겁니까?”
본디 여우 수인과의 간단한 마찰을 풀기 위해 왔던 게 아니었나.
소년의 해맑고 더러운 성질머리 때문에 이런 막사까지 치고 싸울 정도로 일이 심각해졌지만.
그간 저질러 온 만행에 스스로 찔린 소년은 지레 큰 소리를 내었다.
“경도 잔소리할 거면 가서 수련이나 하십시오!”
“아, 말씀드릴 게 아직 남았습니다.”
하나, 보좌관은 꿋꿋하게 대꾸했다.
그러곤 혹시나 엿들을 만한 이가 없는지 주변을 한 차례 살폈다.
“무슨 일인데 그렇게 경계하는 겁니까?”
보다 못한 소년이 순진무구한 얼굴로 궁금증을 표했다.
그에 보좌관은 잽싸게 허리를 숙여 소년의 귓가에 속닥였다.
그 기밀 사항을 전해 들은 소년이 멍하게 입을 벌리곤 천진하게 반응했다.
그런 소년의 눈빛엔 의아함이 감돌았다.
“독수리? 별 거지 같은 게 지랄입니다.”
“꽤 심각한 사안이긴 하지만…
이대로 가주님께 보고를 올릴까요?”
보좌관은 도로 뒷짐을 지면서 소년의 의중을 확인했다.
그러나 그는 뜬금없는 화제를 꺼내 들었다.
아까 보았던 슈페나와 리카도르에 관한 기사가 영 소년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수하가 독수리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는가.
‘분명 독수리 가문에서 시집왔다.
고 했지.’
소년은 도로 그 신문을 집어 들어 쫙 펼쳤다.
“근데 이 기사, 보셨습니까?”
보좌관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의연하게 말을 받았다.
“네. 봄 무렵에는 이곳에도 보급 될 거라 합니다. 그럼 사정이 훨씬 나아지겠죠.”
이리 태연해 보여도 그들이 있는 곳은 병영이 아니던가.
매일 부상자가 나오는 곳.
그런 장소에서 슈페나가 개발한 로네악 꽃 치료제는 필수적이었다.
그렇지만 소년의 관심을 앗아간건 이런 사실이 아니었다.
“그거 말고, 사진 말입니다!”
“예?”
“누님이고 형이고 이런 기사를 내버려둘 위인이 아니잖습니까!”
그런 그의 손끝은 리리엘라를 지나 리카도르에게 머물렀다가, 마지막엔 슈페나한테 위치했다.
“으, 소름 끼칩니다.”
소년은 다정한 낯의 리카도르를 보더니 기겁했다.
제 혈육의 연애 사정을 듣는 건, 알고 싶지도 않고 극도로 혐오스러운 일이 아니던가.
두 손을 퍼덕거리며 난리를 치던 소년에게 보좌관은 머뭇거리다 말했다.
“실은 리리엘라 님이 생일을 저택에서 보냈다고 합니다. 다 같이 화기애애하게 가족여행까지 가셨다고”
“뭐라고요?”
소년의 눈이 커다래졌다.
깨끗하고 소박한 눈망울에 경악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가 지난번 편지를 보내주셨을 때 비슷한 이야기를 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럼 내가 놓친 거란 말이야?
소년은 제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생난리를 쳤다.
보좌관은 괜히 이야기를 한 건가 잠시 고민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이실직고했다.
“아무래도 새로 들어오신 작은 마님 덕분인 것 같습니다.”
“…작은 마님이라면 그 파랑새말입니까? 그걸 왜 이제야 말하는 겁니까.”
소년이 제 머리칼을 거칠게 헤집으며 불만스레 타박했다.
“죄송합니다. 괜히 방해가 될 듯하여.”
보좌관이 잽싸게 고개를 조아렸다.
빠릿빠릿한 대처였다.
소년은 불퉁하게 한숨을 쉬곤 대충 손을 휘저었다.
“됐습니다. 이미 지난 일인데요.”
이래 봬도 그는 나름 뒤끝이 없는 편이었다.
정확히는 뒤끝이 있을 겨를이 없는 타입이었지만.
소년이 천진난만하게 입꼬리를 를끌어올리면서 폭탄을 던졌다.
“이 전쟁 대충 마무리해야겠습니다. 흥미가 식었거든요.”
애초에 낚을 게 있어서 질질 끌었던 싸움이 아니었던가.
더 재미난 것이 생겼으니 그만둬야지.
“네?”
“형수님은 뭘 좋아하실까요?”
황당하다는 보좌관의 반문에도 그는 개의치 않고 혼잣말을 이어 나갔다.
“재밌는 수인일 것 같습니다. 특히 우리 형 반응이 궁금한데.”
“리헨테온 님, 제발…….”
이럴까 봐 말 안 했던 건데.
또 사고 하나 거하게 칠 듯한 기세에 보좌관이 마른세수를 하며 간절히 애원했다.
리헨테온 체드윅.
순백의 뇌와 제멋대로인 성격을 가졌지만, 한편으론 깍듯한 성격인 그는 슈페나의 시동생 되는 백사자였다.
***
한편, 슈페나는 시연회에서 얻은 결과물을 셈하고 있었다.
“와, 이거 진짜 짭짤하네.”
가히 대박이었다.
연회에 참여했던 소수의 사자들 말고 다른 이들도 로네악 꽃 치료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니까.
‘나 완전 부자 되는 거 아니야?’
개인정보를 기재하고 회원이 된 사자들만 수백 명에 달했다.
생각보다 호응이 좋아서 물량이 딸릴까 걱정도 되었으나, 이내 좋은 소식이 도착했다.
어머님이 선물해주신 땅에도 테네도르 설치를 끝냈다는 보고가.
이제 그냥 재배에만 신경 쓰면 된다는 뜻이었다.
열매도 맺혀야 해서 치료제로 가공되기까지는 한두 달 더 걸리겠지만.
‘아예 매장을 만들어야겠어.’
지금은 주문을 받는 식으로 운영하고 있었으니까.
체드윅 가로 날아오는 예약 서신 때문에 기쁘면서도 골치였다.
사자 영역 군데군데에 분점을 세우면 이런 일도 줄어들고 모두 쉽게 치료제를 구입할 수 있을 터.
배달하기도 더 쉬울 거였다.
어차피 사자들에게 받은 예약금도 있고 비밀장소에서 얻은 금은 보화도 가득했으니, 돈은 문제가 아니었다.
‘안정되면 다른 사업으로도 확장하고 싶은데.’
치료제를 담은 용기 겉면에 귀여운 사자 캐릭터 하나 박아두고 마케팅 좀 해봐?
이름은 라이언으로,
“확실히 기억되도록 브랜드 이름을 정하면 좋겠네.”
슈페나는 열심히 행복회로를 돌렸다.
물론 그 기대를 실현할 구체적인 계획표도 작성해두었다.
제인과 어머님이 고용해준 다른 하인들에게 바로 전달할 수 있도록.
그러고 있을 무렵, 타이밍 좋게 집무실의 방문이 똑똑 두들겨졌다.
“작은 마님.”
제인이었다.
제인이 방문을 꼭꼭 닫고는 목소리를 낮추곤 작게 속닥였다.
“준비 마쳤어요! 중간에 갈아탈 마차도 구했어요.”
“그래? 그럼 가자.”
사업도 차근차근 진행 중이고 잠시 숨 돌릴 틈이 생겨서, 원래 공방 주인이었다던 나무늘보를 만나보기로 했었다.
슈페나는 가방에 몇 가지 물건을 주워 담곤 제인을 따라 저택 밖으로 나섰다.
목적지는 여성복만 전문적으로 파는 상점이었다.
그녀가 따라온 호위기사들에게 말했다.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
이제 슈페나 곁에 남은 건 제인 뿐.
그렇게 호위를 따돌린 슈페나는 몰래 뒷문으로 나와, 제인이 미리 빌려둔 짐마차로 갈아탔다.
몰래 나무늘보에게 찾아갈 계획이었으니까.
혹 어머님이나 리카도르가 왜 나무늘보를 만났냐고 물으면 어떡해.
둘러대기 곤란하지 않겠는가.
‘파고 들어가면 결국 원작 얘기까지 해야 하는데, 그럴 순 없지.’
슈페나는 휴, 한숨을 쉬곤 덜커덩거리며 나아가는 마차 안에서 생각했다.
첩보 작전이라도 수행하는 것 같다고.
마차는 얼마 지나지 않아 멈춰섰다.
“와….”
제인의 에스코트를 받은 슈페나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절로 감탄했다.
“밀림이 여기 있네.”
나무가 빼곡하게 가득한 저택.
나무늘보가 살기 딱 좋은 환경이었다.
들어가기 전, 그녀가 제인에게 다시 한번 확인하듯 말을 건넸다.
“네 이름으로 미리 약속 잡아놓은 거지?”
방문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한 일말의 조치였다.
“그럼요. 전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에 슈페나는 그 피톤치드 향이 물씬 나는 저택 안으로 발을 디뎠다.
화분에 나무가 자라고 있는, 자연 친화적인 나무늘보의 방 안.
그곳에는 회갈색 밀짚모자와 화려한 트로피컬 꽃무늬 셔츠 착장의 호리호리한 청년이 앉아있었다.
의외로 젊네?
20대 초중반 정도로밖에 안 보이는걸?
속으로 놀라워하던 슈페나는 일순 미간을 찌푸렸다.
‘근데 왜인지 익숙하다?’
밀림에 오신 여러분들을 환영한다고 말할 것 같은데.
제인 말대로 칼자국이 있긴 했지만, 멀끔한 신전오빠처럼 신뢰가 가는 얼굴.
슈페나는 바로 자리에 앉아 만면에 미소를 띠고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그런데…….
“아아아안녀어어어엉하아~”
나무늘보는 사람 좋게 하, 하, 하, 너털웃음을 짓더니 마주 인사했다.
아주 여유롭고 느릿느릿하게.
나무늘보, 그 자체처럼.
망할. 상대를 잘못 골랐네.
슈페나는 좌절했다.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61화
“네, 안녕합니다.”
슈페나가 잽싸게 나무늘보 오빠의 말을 받았다.
왠지 오늘 하루가 굉장히 길고 또 길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으래에서어, 왜에 차아아~”
“왜 찾아온 거냐구요?”
“마아자아요오오.”
이런 고구마가 있을 줄은 몰랐어.
슈페나는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으으, 단전에서 우러나오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힐끔 나무늘보의 눈치를 보곤 다다다다, 말을 쏘아붙였다.
“부탁할 게 있어요. 보수는 원하는 만큼 넉넉히 드릴 거고요.”
“부우우타아악이이 뭐어언~”
계속되는 나무늘보의 말 늘이기 공격에 그녀는 서둘러 방어했다.
“지금 솔레제 시계 공방 주인에 대해 아는 만큼 내게 말해줘요.”
그 말을 들으며 눈만 끔벅거리던 나무늘보는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짧고 굵은 한마디를 내뱉었다.
“롸?”
뭐라는 거야.
슈페나는 개의치 않고 하려던 말을 계속했다.
“당신이 원래 공방 주인이었다는거 다 알고 있어요. 그러면서 정보를 팔았다는 것도.”
그리고는 테이블 위에 금화 주머니를 척 올려두었다.
나무늘보는 아닌 척 제 무테안경을 매만지며 곁눈질했다.
슈페나가 그 주머니 속이 잘 보이게끔 입구를 막고 있던 리본을 풀어주었다.
황금빛 동전이 차르르, 쏟아져 내렸다.
반쯤 감겨있던 나무늘보의 눈이 그 어느 때보다도 재빨리 뜨였다.
나무늘보는 간신배처럼 두 손을 모으곤 히죽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세요. 사랑합니다. 일단 뭐부터 보여드릴깝쇼, 손님?”
예?
180도 뒤바뀐 태도에 그녀는 떨떠름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갑자기 말이 빨라졌네요?”
“돈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 마련입니다요, 손님.”
그 수상한 정보상이랑 컨셉이 비슷해.
당혹스러움에 슈페나의 동공이 방황할 무렵, 나무늘보는 옆 서고에서 서류 가방을 꺼내왔다.
그러곤 나무늘보가 아닌 치타라고 해도 믿을 만한 속도의 음성으로 깔끔하고도 정확하게 설명했다.
“이건 중요한 정보를 모아놓은 가방입니다. 찾아보면 지금 공방주인에 관한 것도 있습지요.”
나무늘보는 찡긋, 윙크를 하며 덧붙였다.
“이건 지금 공방 주인을 만났을 때 작성했던 계약서입니다. 손님.”
나무늘보가 서류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어떤 문서를 꺼내 들었다.
오호라?
슈페나는 무심코 그 서류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나, 소용없었다.
“선금부터 주셔야죠, 손님.”
뭐지, 이 익숙한 멘트?
데자뷔를 겪는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그녀는 순순히 금화 중 일부를 나무늘보에게 밀어주었다.
그제야 나무늘보가 문서를 그녀에게 보여주며 얘기했다.
“사실 별 내용은 없습니다. 그냥 건물 넘기고, 시계 만드는 노하우도 알려주고, 정보도 몇 가지 공유해주겠다는 겁지요.”
“아하. 살펴볼게요.”
슈페나는 빼곡한 검은 활자로 채워진 문서를 읽어 내렸다.
그 내용물은 나무늘보 오빠가 말한 것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래도 보통 계약서엔 개인정보가 조금은 나와 있으니까.’
슈페나는 꼼꼼히 훑어보았다.
역시나 꽤나 쓸 만한 정보가 하나 정도는 있었다.
이름.
-Mai L Ailli
‘가명인가? 미들네임을 쓰네.’
이 세계관에서 미들네임을 쓰는 사람은 한 명도 못 봤는데.
그리고… 이름이 왜 이래?
뭔가 철자 조합이 어색했다.
꼭 끼워 맞춘 것처럼.
슈페나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 나무늘보 오빠에게 물었다.
“이거 말곤 다른 건 없나요?”
나무늘보는 아무 말 없이 손을 내밀었다.
조금 더 달라는 뜻이었다.
슈페나가 쳇, 혀를 차곤 금화를 몇 개 더 얹어주었다.
그러자 나무늘보는 추가 서류를 밀어주며 와들와들 떠는 어투로 말을 이었다.
“기본적인 인적사항입니다요. 워낙 비밀스러운 분이라서 저도 이정도밖에 모릅니다만.”
비밀스러운 분?
두려워하는 것처럼 상대를 높이는 이유는 뭘까?
조금 마음에 걸렸으나, 그녀는 서류를 살펴보았다.
그 문서에는 지금 정보상의 취미, 하루일과, 성격, 주거지 등이 나와 있었다.
‘왜 나이나 외양 같은 기본적인건 없는 거지?’
오히려 취미 쪽이 더 알아내기 힘든 정보 아닌가.
나무늘보는 은근히 세부적인 것들을 많이 알고 있었다.
‘나름 유능해 보이는데, 역시 저 나무늘보가 원작 속 정보상인 걸까?’
뭐가 되었든, 지금 정보상의 의도를 캐내는 게 최우선이어야 했다.
‘그러려면 떠보기라도 할 수 있는 카드가 있어야 할 텐데…….’
나무늘보가 준 이 자료들로는 힘들었다.
사실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거라 확신하지도 않았었고, 그럼에도 많은 금화를 꺼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 금화 주머니, 마저 드릴 테니까 하나만 더 부탁하죠.”
슈페나가 가방에서 챙겨온 물건을 꺼내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테네도르,
사업에도 사용했던, 수인들의 이 능을 담을 수 있는 희귀한 광석.
“이 광석들에 당신의 이능을 불어넣어 주세요.”
슈페나는 틈틈이 나무늘보에 대해서도 알아보았었다.
나무늘보가 가진 이능은, 관찰.
누군가에 대해 알아보기엔 최적의 능력이었다.
‘이 이능을 이용해서 그 정보상에 대해 낱낱이 파헤칠 거야.’
누군가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는 듯한 상황은 무척이나 싫었으니까.
최소한의 자기방어 수단이었다.
“롸?”
나무늘보도 슈페나의 의도를 눈치챈 건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가 곱게 눈꼬리를 접어 웃으며 쐐기를 박았다.
“당신이 능력 있다면 제가 누군지는 알고 있겠죠?”
순순히 따르는 게 좋을 거란 뜻이었다.
“에이, 당연히 들어드릴 수 있고말고요. 몇 개든 상관없습죠.”
나무늘보도 샤바샤바, 제 손을 비비며 긍정했다.
슈페나는 슬며시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마지막 입단속까지 완벽하게 당부했다.
“오늘 일은 비밀로 해야 하는 거 아시죠?”
“물론입죠. 오늘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요. 손님?”
나무늘보는 순진무구한 낯으로 능청을 떨었다.
생각보다 말이 잘 통하는 상대네.
거래는 성립되었다.
슈페나는 관찰 이능이 주입된 테네도르를 얻을 수 있었다.
목적을 다 달성하고 떠나기 전.
그녀가 툭, 질문을 던졌다.
“근데 지금 정보상이 대단한 신분을 가졌나 봐요? 호칭이 조심스럽네요.”
“그으거어엇보오다아안…….”
갑자기 또 말꼬리가 길어지네?
슈페나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그것보단 뭐요?”
나무늘보는 짐짓 몸을 부르르 떨면서 성실히 대답했다.
“궈어어언느으으응때에무우운~”
“권능?”
처음 들어보는 개념의 단어인데.
슈페나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캐물었다.
“권능이 뭔데요?”
그 순수한 궁금증에 나무늘보는 영문 모를 답변으로 화답했다.
“각성을 했다는 뜻이지요.”
그런 나무늘보의 말은 도로 빨라진 채였다.
어쩐지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이상하게 소름이 돋을 것 같은 느낌에 입을 떼려던 찰나, 나무늘보는 작별을 고했다.
“사랑과 열정을 손님들에게. 그럼 안녕히 가시길.”
그리고 며칠 후,
“작은 마님, 그 테네도르는 주인 몰래 공방 안에 놔두었습니다.”
제인이 손님인 척 위장해 테네도 르를 설치하는 데에 성공했다는 보고를 올렸다.
결국, 미끼는 던져졌다.
***
그 미끼는 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내었다.
슈페나는 제 집무실에 틀어박혀 그 결과물을 살펴보며 감탄했다.
“진짜 신기한 이능이네.”
관찰.
그건 참 굉장한 능력이었다.
반경 100m 내의 그 어떤 정보도 수집할 수 있는 이능.
느리디느린 나무늘보들이 드물게 나무에서 내려갈 때, 포식자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발달한 거랬지.
그래서인지 나무늘보끼리는 상대 방을 관찰한 결과를 음성으로 공유할 수도 있었다.
‘그럴 줄 알고 미리 테네도르를 여러 개 받아왔지.’
테네도르는 본디 다른 수인의 이 능도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지 않던가.
그러니 굳이 시계 공방에 놔둔 테네도르를 수거하지 않더라도, 정보를 보고받을 수 있을 터였다.
‘테네도르만 있다면 임시 나무늘보가 된 거나 마찬가지겠지.’
슈페나가 본격적으로 어떤 수확을 얻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테네 도르를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탈리테를 흘렸다.
이윽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지직……지지직…….]테네도르에서 마법처럼 소리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슈페나는 쉿, 입을 꾹 다물고는 귀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런데..
[관찰 대상이 오늘 먹은 아침은 연어회.…점심은 연어 스테이 크…저녁은 연어 샐러드와 알리 오올리오..]응?
지금 나랑 장난하냐?
그리고 정보상은 극지방에 살아?
왜 연어만 먹어?
설마 곰인가?
슈페나는 진지하게 고심했다.
그러다 재미없는 전공 강의를 듣는 것처럼 멍해진 동태눈깔로 테네도르를 응시했다.
‘참자. 참고 듣자.’
그녀가 털썩 푹신한 안락의자에 파묻히듯 앉아 눈을 감았다.
그러니 소리는 더욱 또렷하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귀를 기울이던 것도 10분째.
드디어 건질 만한 소식 하나가 들렸다.
[지직. 지지직……관찰 결과, 관찰 대상의 종족은 사슴. 오늘 하루 독서하다 손가락을 베여 가벼운 치료 이능을 사용하였습니다.]“정보상이 사슴이라고? 그럼 사슴인데 연어만 먹었던 거야?”
뭐야, 이 끔찍한 혼종은.
잠시 중얼거리던 슈페나는 이내 인상을 찡그렸다.
‘그럼 그 종이학은 이능이 아니었던 건가?’
의문이 들었으니까.
혹시 나무늘보가 마지막에 얘기했던 그 권능이란 것과 관련 있는 걸까?
이능, 권능.
뭔가 끝 글자가 같아서 통일감이 들잖아.
그리고 문득 중요한 사실이 떠올랐다.
‘원작 여주도 사슴이었지.’
정보상이 원작 여주와 관련 있는 존재인 건 아닐까?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62화
그냥 그런 의문이 들었다.
파랑새 특유의 직감이랄까.
원작 여주가 슈페나 또래였으니, 딱 봐도 어른 같아 보이는 정보상일 수는 없을 텐데.
‘그러고 보니 눈 색이 닮았네. 푸르른 녹안.’
그 시계탑에서 보았던 기억 속여주랑 인상이 비슷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나저나 더 강력한 카드를 쥐어야 정보상을 추궁해볼 수 있을 텐데..….
능구렁이 같은 자라 그냥 만났다간 돈만 뜯길 듯했다.
그때, 테네도르에서 또 다른 관찰기록을 읊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관찰 대상은 오늘 온종일 옆집사자와 포커를 치면서 놀았습니다.잃은 금액 다 합치면 최고급 레터링 케이크가 30개. 내기에는 소질이 없지만 환장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내기?
이걸 이용해볼까.
자낳괴인 정보상이 솔깃할 만큼 강력한 무언가를 걸고 게임을 하자고 하면 응하지 않겠는가.
‘이겼을 때 소원을 들어달라고 하는 거지.’
그 소원으로 약속을 받아내면 될 것 같았다.
앞으로 미심쩍고 피해가 될 만한 행동은 하지 않겠다고.
그리고 나선 서로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눠보는 게 좋지 않으려나.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다면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는 방법도 나쁘지 않겠지.
고급 정보들은 턱턱 내놓는 걸로 보아, 친해지면 이득 볼 게 많을 것 같았다.
더구나 차후에 등장할 소설 속메인 악녀.
위험인물일 가능성이 큰 만큼 정보상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래, 그럼 이제부터 포커 연습을 해봐야겠어!’
계획이 막 세워질 무렵, 슈페나의 집무실 문에 똑똑 노크소리가 울렸다.
“들어가도 될까요, 작은 마님?”
“어, 들어와.”
슈페나는 손수 문을 열어주며 우렁차게 화답했다.
그간 사업 때문에 덩달아 바빠져서인지 제인의 얼굴은 묘하게 수척해진 듯했다.
‘내가 너무 혹사시켰나?’
슈페나는 슬금슬금 그녀를 곁눈질하며 입을 떼었다.
“마침 또 얘기할 게 있었는 데…..”
당연하게도 정보상에 관한 것이었다.
“그 시계 공방에 숨겨두었던 테네도르, 다시 가져와 줄 수 있을까?”
목적을 이뤘으니 이젠 필요 없지 않은가.
‘정보상이 점심으로 스테이크를 썰었다는, 시시콜콜한 사실은 알고 싶지 않단 말이지.’
쓸모 있는 건 이미 건졌고, 어차피 테네도르에 주입한 이능은 사용할수록 줄어드니까.
괜히 공방에 테네도르를 숨겨놓았다는 사실을 들키면 귀찮아질지도 모르고, 다행히도 제인은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슈페나는 그 반응에 힘입어 한가지 더 부탁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공방 주인한테 서신 좀 전해줄래? 잠깐만…….”
그녀가 급히 책상에 앉아 딥펜촉에 검은 잉크를 묻혔다.
정보상에게 보낼 편지를 얼른 써내릴 생각이었으니.
‘만나자고는 해야 하는데, 언제가 좋을까….’
갑자기 무언가를 작성하는 슈페나의 행동에 제인은 의아한 낯이었지만 센스 있게 고개를 돌렸다.
사실 제인에게 딱히 숨기려는 생각은 없었다.
‘타나토 계약까지 맺어서 누군가에게 말할 수도 없을 테고.’
그래도 모든 걸 알려준 건 아니었다.
제인 또한 물어보는 일 없이 묵묵히 맡은 임무를 해내어서 언질을 줄 틈도 없었지만.
“확실히 제인을 내 전속 하녀로 선택한 건 옳은 선택이었어.”
슈페나는 약간은 피곤해 보이는 제인을 슥 훑어보았다.
‘뭐라도 주고 싶은데.’
그녀가 일하면서 먹으려고 잔뜩 사둔 최고급 초콜릿을 서랍에서 아예 상자째로 꺼내었다.
그리곤 그걸 망설임 없이 제인에게 건넸다.
제인도 달다구리한 간식을 제법 좋아하는 것 같더라고.
아니나 다를까, 제인이 반색하며 슈페나를 쳐다보았다.
“헉, 작은 마님!”
“별거 아니지만 먹어. 내가 너무 많은 걸 부탁한 것 같아서.…미안.”
슈페나는 솔직하게 제인에게 제 마음을 고백하며 손을 맞잡았다.
“전 괜찮아요! 뭘 이런 걸, 다….”
초콜릿 상자를 한 아름 받아들며 말끝을 흐리던 제인이 돌연 무언가가 떠올랐다는 듯 이야기했다.
“아, 작은 마님. 근데 전해드릴 소식이 있어요.”
“뭔데?”
제인이 전한 건 뜻밖의 이야기였다.
“아무래도 곧 리헨테온 님이 오실 건가 봐요.”
“리헨테온 님이라면….…?”
“가주님의 막내 아드님이세요.”
어머님의 막내아들이라면… 리카도르의 남동생 아닌가?
갑자기?
여우 수인들과의 트러블을 해결하러 갔다고 들었는데 해결한 건가?
슈페나는 어리둥절하게 갸웃거리며 물었다.
“언제 오는데?”
“일주일 뒤요.”
그 순간, 문밖에서 평소보다 신이 난 듯 명랑한 중저음이 들려왔다.
“슈페나!”
리리엘라의 목소리였다.
아직 티타임 시간은 아닌데, 혹시 방금 제인이 알려준 이야기 때문에 온 건가.
“들어오세요, 언니.”
슈페나가 우선 대충 다 쓴 서신을 제인에게 쥐여주며 태연하게 표정 관리를 했다.
그러곤 리리엘라에게 리헨테온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참. 리리엘라 언니, 얘기 들었어요?”
“어떤 거?”
“그… 제 도련님 되는, 언니한텐 동생인 분이 온다고.”
리리엘라는 기분이 최고조일 때만 짓는 사신 미소를 만면에 가득 피곤 맞장구쳤다.
“아, 리온?”
그녀가 와락 슈페나를 끌어안고는 쾌활하게 제안했다.
“들었지. 그래서 말인데.… 우리 환영회 준비하자!”
“예?”
얼떨떨한 슈페나의 반문에 리리 엘라가 잽싸게 말을 더했다.
“어머니한테도 허락받았어.”
실행력이 어마무시하네.
그렇게 슈페나는 리헨테온의 환영회 준비에 동참하게 되었다.
자연스레 정보상을 만나는 일은 뒤로 미뤄졌다.
어차피 포커 룰을 잘 몰라서 연습할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으니까.
환영회를 준비하는 동안 틈틈이 타짜가 될 수련을 하면 될 터.
‘마침 리리엘라 언니가 포커 잘하기로 저택에서 소문났더라고.’
긍정회로를 돌린 슈페나는 탁탁제 손바닥을 마찰시켜 털었다.
도련님 환영회 준비나 해보자!
그리 결심한 슈페나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사용인들 틈에서 바삐 움직였다.
도련님이 꽃을 좋아한다고 해서 저택을 아주 그냥 꽃밭으로 꾸미고 있던 참이었으니.
꽃으로 가득 찬 정원 한가운데.
슈페나는 야외 테이블에 앉아 꽃꽂이를 하고 있는 리리엘라에게 은근슬쩍 이야기했다.
“언니, 근데 도련님은 어떤 성격이에요?”
도련님과도 잘 지내고 싶어서.
모두와 이렇게 도란도란 가까워졌는데, 남은 사람도 잘 공략해봐야지.
‘데드엔딩은 사절이란 말이야!’
은근한 슈페나의 눈짓에 잠시 말을 고르는 건지 고민하던 리리엘 라가 심플하게 한마디를 했다.
“음, 착해.”
착하구나.
하긴 이 집 사람들이 안 그렇게 보여도 심성은 고운 편이더라고.
왜인지 모르게 예감이 좋았다.
그런데 이어지는 얘기를 들은 슈페나의 입꼬리가 어정쩡하게 경련을 일으켰다.
“착한데 가끔… 미친 애 같아.”
“네?”
“되게 예의 발라. 귀여운 애니까 잘해줘, 슈페나.”
미쳤는데 예의 바르고 귀여울 수가 있나?
‘영 불길한데.’
여하튼 리리엘라 언니와 도련님의 사이는 제법 좋은 것 같았다.
리카도르와는 딱 거리 있는 현실 남매 같더니 이쪽은 이상적인 타입인 건가.
어제 어머님한테도 슬쩍 여쭤보니 반응 괜찮던데.
그러는 찰나, 시큰둥한 리카도르의 미성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귀엽기는 무슨. 잘해줄 필요 없어, 부인.”
그는 꼭 쌤통이 난 아이처럼 부루퉁한 눈빛으로 예쁘게 꾸며진 꽃 장식을 흐트러뜨렸다.
오랜만에 동생이 온다는 희소식에도 전혀 반갑지 않은 듯해 보였다.
“에이, 그래도 도련님인데 잘해드려야지.”
슈페나는 부러 천연덕스럽게 받아치며 화병에 꽃을 꽂았다.
뭔가 리카도르의 반응이 평소보다 극적인 것 같아서 신기했으니까.
그러자 리카도르가 아닌 척 자꾸 슈페나를 방해했다.
집사가 노트북을 열려고 할 때마다 그 위에 자리 잡아버리는 고양이처럼.
사자도 고양잇과 맹수가 아니던가.
그 냥아치 같은 행동에 가만히 있던 리리엘라는 슈페나에게 귀띔했다.
“연년생이라서 그런가, 리카도르랑 리헨테온은 맨날 싸우거든.”
오, 재밌겠는걸?
세상에서 싸움구경이 제일 흥미진진하댔는데.
슈페나의 입 모양이 동그랗게 모아졌다.
이윽고, 리헨테온이 도착하는 날.
“안녕하십니까, 형수님!”
새하얀 백발, 순수하게 반짝이는 벽안.
리카도르보단 조금 더 통통하고 순박해 보이는 백사자 수인이 허스키한 저음으로 깍듯하게 폴더인사를 했다.
뭐지, 아카데미에서 모범상을 휩쓸고 학생회장까지 역임했을 것 같은 이 바른생활소년의 기운은.
질 수 없지!
슈페나도 활짝 미소 짓고는 똑같이 90도로 허리를 접었다.
“안녕하세요, 도련님!”
슈페나와 리헨테온은 자연스레 악수를 나누었다.
그리고는 건실하게 하하호호 즐거운 이야기꽃을 피웠다.
“배는 안 고프세요? 음식은 뭐 좋아하세요?”
“초코우유. 사랑합니다.”
“아, 진짜요? 저는 코코아 좋아하는데. 우리 좀 잘 맞나 봐요.”
그 대화는 이내 어느 지역의 카카오 분말이 제일 맛있는지에 관한 토론으로 흘렀다.
초면임에도 쿵짝이 잘 맞는 둘의 모습에 뒤에서 리카도르가 사납게 손을 풀었다.
뼈에선 으득, 마찰음이 새었다.
빌어먹을 카카오나무.
다 태워버리든가 해야지.
‘왜 짜증이 나지.’
리카도르는 괜스레 제 머리를 헤집었다.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63화
한눈에 보기에도 예의 바른 도련님은 성격도 참 진국인 듯싶었다.
“형수님, 결혼식 때는 못 가서 죄송합니다.”
산골소년같이 소담한 리헨테온의 눈매가 정말 미안하다는 듯 축 늘어졌다.
“에이, 아니에요! 뭘 그런 걸 가지구.”
슈페나는 수더분하게 손을 내저었다.
‘어차피 리리엘라 언니도 못 왔는 데, 뭐. 둘 다 일이 있었으니 어쩔 수 없지.’
그러면서 리헨테온을 빤히 응시했다.
‘리카도르가 청량하고 곱게 잘생겼다면, 도련님은 갓 서울에 상경한 사람처럼 순박하게 잘생겼네.’
키도 리카도르와 엇비슷할 만큼 선머슴같이 커서인지 그런 느낌은 더욱 가중되었다.
꼭 군기가 바짝 든 아카데미 운동부 학생 같았다.
‘뭐, 좀 먹이고 싶게 생겼네.’
그녀 또한 그 또래라는 건 생각하지 못한 슈페나였다.
저도 모르게 골똘히 리헨테온을 쳐다보던 슈페나는 흠칫 시선을 내리깔았다.
실례였을까 싶어서.
하지만 리헨테온은 티끌 없이 말간 낯으로 듬직하게 웃고 있었다.
그가 슬쩍 슈페나의 눈치를 보더니, 등 뒤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대신, 선물입니다!”
“와, 언제 이런 걸 다….….”
언뜻 보면 동그란 구름처럼 보이는 새하얀 퐁퐁국화였다.
예상치도 못한 꽃 선물에 슈페나는 말끝을 흐리곤 못내 감탄했다.
사자들은 좀처럼 꽃 선물을 하지 않는다던데, 이런 센스가 있다니..
‘사람이 됐네, 됐어!’
기뻐하는 슈페나의 모습을 본 리헨테온이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는 안 그렇게 생긴 얼굴로 사뭇 속물적인 말을 입에 담았다.
“뇌물입니다.”
그러한 얘기를 하는 리헨테온의 입가엔 퍽 장난스러운 곡선이 그려졌다.
깜짝이야.
청렴결백하게 생긴 얼굴로 부도 덕한 단어를 말해서 좀 놀랐네.
슈페나도 배시시 마주 웃으며 너 스레를 떨었다.
“이런 뇌물은 매일매일 받아도 기분 좋겠네요.”
“노력해보겠습니다, 형수님!”
리헨테온이 싹싹하게 받아쳤다.
또다시 웃음꽃이 피며 대화가 화기애애하게 흘러갔다.
이런 그 둘을 리카도르가 저 뒤에서 못마땅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는 건, 모두가 아는 비밀이었다.
슈페나와 한 차례 인사가 끝나고.
리헨테온은 이내, 다른 이들에게도 감춰둔 꽃을 건네었다.
첫 타자는 리리엘라였다.
“이건 누님 겁니다. 생일, 저택에서 보냈다던데 바빠서 소식을 좀 늦게 접했습니다. 축하 못 해줘서 죄송합니다, 누님.”
“괜찮아, 리온.”
풍성한 꽃다발을 받은 리리엘라가 제 동생을 다독였다.
리리엘라의 입가에는 헤벌쭉한 한 조커미소가 걸려있었다.
‘역시 우애 좋은 사이가 맞구나.’
슈페나는 그 웃음을 보고 확신했다.
리리엘라에겐 기분 좋다는 뜻이란 걸 이제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 슈페나의 눈길은 리헨테온의 움직임을 따라, 리카도르에게로 향했다.
리헨테온은 오랜만에 보는 형에게 꽃 대신 악수를 청했다.
건조하기 짝이 없는, 언뜻 맹수가 다른 포식자를 경계하는 듯한 손짓으로.
“형은 뭐, 좋아 보입니다? 여전히 재수도 없고요.”
“너만 하겠니, 동생아.”
그 둘의 손이 맞닿았다.
리헨테온이 리카도르를 흘기며 삐죽 입술을 내밀었다.
“어떻게 한마디를 안 집니까?”
“이길 생각 없었어. 네가 그냥 진거지.”
리카도르는 시큰둥한 어투로 여유롭게 받아쳤다.
서로 스파크가 튈 듯 호승심이 담긴 시선이 허공에서 열렬하게 부딪쳤다.
‘도련님이 리카도르보다 한 살 어리다고 했지.’
그래서 이렇게 경쟁심이 활활 불타오르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건가.
원래 형제끼린 나이 터울이 적을수록 많이 다투지 않던가.
어찌 되었건 형과의 인사마저 마친 리헨테온은 저벅저벅 칸에게 걸어갔다.
그리고는 화려하고 붉은 꽃 한 송이를 그녀에게 바쳤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머니.”
리헨테온은 보다 살갑고 깍듯한 태도로 칸에게 제 이마를 부볐다.
그 광경을 구경하던 슈페나의 두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
‘사자인 줄 알았는데 개냥이였어.
어머님 옆에 있으니까 막내 티가 확 나네.’
리헨테온은 주변의 시선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칸의 팔에 찰싹 매달려 응석을 부렸다.
“보고 싶었습니다, 어머니.”
칸이 슬금슬금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누르곤 짐짓 핀잔을 주었다.
“그런 애가 연통 한 번 넣지도 않고 용케 사자 영지 밖에서 지냈구나.”
“죄송합니다, 그저…….”
그에 리헨테온은 뭔가 말하려는 듯 입을 벙긋거리다 슬그머니 칸의 눈치를 보았다.
칸이 엄마 미소로 퍽 다정하게 이야기했다.
“얼굴이 반쪽이 됐구나. 뭐라도 먹여야겠어.”
그렇게 자연스레 모두 다이닝룸으로 자리를 옮겼다.
도련님과 함께하는 오찬은 정말이지 평화로웠다.
우선 도련님의 예의가 만렙이었고, 이 집에 미친 붙임성의 소유자가 하나 더 있었으니까.
-형아, 진짜 여우 영역에 다녀왔어? 그 옆에 우리 뱀 영지도 있는 데, 봤어?
카누스는 벌써 형아, 형아 하면서리헨테온을 따랐다.
정확히는 고향 얘기를 듣고 싶어 서인 것 같긴 했지만.
슈페나는 기분 좋게 샐러드 위에 올라간 나무열매를 집어먹었다.
뭔가 식탁이 더 화목해진 것만 같아서.
“많이 먹어, 리온. 슈페나도.”
리리엘라도 그런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에 한 몫 톡톡히 했다.
슈페나는 리리엘라가 건넨 풀떼기를 꼭꼭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집 식구들이 다 모여 완전체가 되니까 확실히 사람 냄새가 나는구나.’
그리 식사 시간이 무르익어갈 무렵, 우아하게 스테이크를 썰던 어머님이 입을 열었다.
“앞으론 사고 치지 말고 저택에 좀 진득하게 붙어있으렴.”
리헨테온한테 하는 당부였다.
하나, 그 대답은 다른 이에게서 돌아왔다.
“뭐 하러요. 쟤 없으니까 조용하고 좋던데.”
“형 안 보니까 병영이 집 같고 좋더라고요.”
리카도르와 리헨테온은 꽤나 익숙하게 티격태격 신경전을 벌였다.
칸이 그 둘을 번갈아 바라보다 골치 아프다는 듯 미간을 짚었고,
“너희 둘, 진짜….”
그러자 리헨테온은 살짝 진지해진 음성으로 항변했다.
“아시잖습니까, 제가 한번 꽂히면 절대로 포기 안 하는 거. 전 꼭 잡을 겁니다.”
영문 모를 이야기를 하는 리헨테온의 두 눈은 묘한 감정으로 넘실거렸다.
그 눈망울에는 슈페나가 비쳤다.
“흥미 떨어지면 다시 떠날 거고요.”
지금 나 보고 얘기하는 거?
슈페나가 어리둥절하게 속눈썹을 팔랑이자, 리헨테온은 꾸벅 고개를 숙여 눈짓했다.
공손하지만 감정을 읽을 수 없는 표정.
슈페나는 잠시 도련님에 대한 평가를 수정했다.
‘리리엘라 언니 말처럼 미친 애까진 아니어도 좀 독특한 것 같기도 하네.’
아무튼 즐거운 식사를 마치고.
슈페나는 모두에게 인사한 뒤, 정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녀의 뒤로 유순한 리헨테온의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형수님, 뭐 하십니까?”
“아, 로네악 꽃 좀 보러 잠깐 정원에 가보려고요.”
슈페나가 여상스러운 어투로 답하며 슬며시 도련님과 보폭을 맞추었다.
리헨테온이 왜인지 자신과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보였으니.
아니나 다를까, 리헨테온은 잠시 눈매를 좁히더니 아는 체를 했다.
“맞다! 저 그 기사 봤습니다.”
“무슨 기사요?”
“그 시연회 기사요. 형수님이 우리 형 품에 안겨있던데.”
이런.
슈페나가 반사적으로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녀도 시연회가 끝난 후 여러 기사를 읽어봤었다. 처음 봤을 땐 제법 놀랐더랬지.
동요 어린 슈페나의 안색에 리헨테온은 걱정스레 손을 내밀었다.
“괜찮으십니까, 형수님?”
그 기자 새끼 고소할 거야.
스산하게 중얼거린 슈페나는 태연한 얼굴을 유지하려 애쓰며 손사래를 쳤다.
“타격이 좀 크네요. 잊어주세요.”
“쉽게 잊힐 만한 사진은 아니던데. 그리 말씀하시니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리헨테온은 떠올리니까 소름이은끼친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며 답했다.
그러다가 조심스레 질문공세를 퍼부었다.
흡사 찐친의 연애 소식에 경악을 금치 못하는 듯한 기세였다.
있잖아, 우리 형한테 협박받아서 결혼한 거냐고 캐묻는 그런 상황.
“형이 형수님한테 잘해줍니까?
막 간이고 쓸개고 다 퍼다 줄 것처럼 행동하는 겁니까?”
“네?”
“생일파티 했다고 들었습니다, 누님이랑.”
리헨테온은 결정타까지 야무지게 때렸다.
“우리 형 좋아하십니까?”
이거 너무 날카로운데.
슈페나는 도르륵 눈알을 굴렸다.
그녀가 괜스레 얼버무리듯 애매모호한 답변을 입에 담았다.
“네. 뭐, 좋아, 하죠. 친군데.”
좋아, 좋은데….
친구로서 좋아하는 거겠지? 고마워서.
‘뭐가 이렇게 어렵지?’
한편, 슈페나의 말을 끝까지 듣지 못한 리헨테온은 더 물어보려다 화들짝 놀랐다.
“어디가 그렇게 좋…… 친구요?”
그가 다시 한번 확인하듯 물었다.
“그러니까 쎄쎄쎄하고 노는 친구?”
“쎄쎄쎄는 해본 적 없지만 친한 편일걸요?”
왜 버튼이라도 눌린 것처럼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지?
슈페나도 덩달아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긍정했다.
그러나 리헨테온은 재차 의아함을 표했다.
“형이 형수님한테 친구 하자고 했습니까?”
“네, 뭐 따지고 보면 그랬네요.”
원래는 내가 친구 신청을 했다가 두 번이나 거절당했었지만, 마지막엔 결국 리카도르가 친구 하자면서 다가왔잖아.
그러니까 엄밀히 가려보자면 도련님 말이 진실인 거지.
슈페나는 싱긋 입꼬리를 끌어 올리고는 리헨테온을 올려다보았다.
“근데 무슨 문제라도…?”
그가 충격이라도 받은 것 같은 낯빛으로 뇌까렸다.
“친구. 그거 우리 형이 되게 싫어하는 단언데.”
“예?”
“확실히 재밌는 분입니다. 형수님은.”
리헨테온은 저 혼자서 결론을 내리며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리헨테온의 푸른 눈망울이 반짝 반짝 이채를 발했다.
그 순간, 리카도르가 그 둘 사이를 서늘하게 가르고 들어왔다.
“내 부인한테서 떨어져, 동생아.”
자연스레 슈페나는 리카도르의 등 뒤에 감추어진 모양새가 되었다.
“싫은데요. 이건 형수님 의견도 들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리헨테온이 냉한 표정의 리카도 르를 꼿꼿이 응시하며 도발적인 언사로 맞받아쳤다.
“제가 싫으십니까, 형수님?”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64화
갑자기 불똥이 왜 나한테 튀어?
슈페나가 억울하기 그지없는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는 힐끔 리카도르를 곁눈질하면서 너털웃음을 지었다.
“하하, 둘 다 그냥 사라져주면 참 좋을 것 같은데.”
그 반응에 리헨테온이 충격이라도 받은 듯 동공지진을 일으켰다.
“제가 미우십니까, 형수님?”
더 심해졌어.
슈페나가 고개를 떨구곤 몰래 혼잣말을 했다.
“안 그렇게 봤는데 도련님 되게 극단적이시네.”
안타깝게도 맹수인 리헨테온이 그 중얼거림을 놓칠 리는 없었다만,그가 어리바리하게 말을 꺼냈다.
“어……죄송합니다?”
“사과할 필요까진 없는데.”
“그렇습니까?”
슈페나가 미간을 부여잡으며 절 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아, 나 맘 약한 사람인데.”
어느새 또 장단이 맞아버린 둘이었다.
그 사이에서 리카도르는 손가락을 말아 쥐고는 실소했다.
“지금 뭐 하자는 거지?”
“설마 형, 질투하는 겁니까?”
그에 리헨테온이 기민하게 반응했다.
까치발을 서서 리카도르의 얼굴 구석구석을 살피는 그의 태도는 저절로 어그로를 세게 끌었다.
저걸 때려, 말아.
고민하던 리카도르가 냉담하게 한마디만 내뱉었다.
“거슬려.”
그러더니 몸을 돌려 슈페나한테로 몸을 기울였다.
그 어느 때보다 가라앉았지만 살랑살랑 봄바람 같은 미성이 슈페나를 꼬드겼다.
“가자. 저 새끼는 버려두고 나랑 놀아.”
“어? 어…….”
얼떨떨해하던 슈페나는 결국 리카도르에게 휩쓸리게 되었다.
혼자 남은 리헨테온은 까만 점이 되어 멀어져가는 그 둘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런 그의 입술에선 작은 헛웃음이 새었다.
“뭐야, 정말 질투하는 거였어?”
이내 정신을 차린 리헨테온이 휘적휘적 걸어 나갔다.
그리고는 슈페나를 향해 우렁차게 소리쳤다.
“저도 같이 끼워주시면 안 됩니까, 형수님?”
그렇게 한차례 추격전을 벌인 그들의 종착지는 로네악 꽃이 심어져있던 화단이었다.
원래 슈페나는 로네악 꽃을 살피러 정원에 나온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하얀색 꽃이 넘실거려야 할 화단에는 아무것도 피어있지 않았다.
‘아직 씨앗을 뿌리지 않은 까닭에.
들어보니까 로네악 꽃은 딱 지금 3월 말에 심어야 한다고 하더라고.’
원래는 테네도르를 이용해 간편하게 처리하고 감독만 할 계획이었지만….
‘더 좋은 방법이 떠올랐어.’
부려 먹을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새빠지게 고생시키면 둘 다 진이 빠져서 티격태격하지도 않을 것 같았다.
‘뭐, 새참 먹으면서 붙어있으면 더 돈독해질 수도 있고!’
그런 슈페나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리카도르가 괜히 그녀의 옷소매를 움켜쥐었다.
은근슬쩍 집사의 관심을 갈구하는 고양이처럼.
리카도르는 금방 태도를 바꾸어 느른히 팔짱을 낀 채, 귀찮음이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 따라왔어?”
리헨테온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는 특유의 순박하고 순수한 낯으로 아무런 사심이 없다는 듯 순하게 받아쳤다.
“재밌어 보여서 왔습니다만.”
리헨테온이 장화 신은 고양이처럼 물끄러미 슈페나를 응시했다.
“마주치지 마. 눈 썩어.”
리카도르가 자연스레 그녀의 눈을 제 손바닥으로 뒤덮었다.
순식간에 어두워진 시야에 슈페나는 리카도르의 손등을 퍽 치곤 이야기했다.
“안 놀 건데요? 일할 건데?”
그녀가 리헨테온과 리카도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리헨테온은 말 잘 듣는 모범생처럼 번쩍 손을 들더니 질문했다.
그런 것치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차원 같아서 불안했지만.
“네? 무슨 일입니까, 형수님?”
“자,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일해요, 우리.”
슈페나는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고는 하인들을 시켜 가죽장갑을 가져오게 했다.
모두가 작업태세를 갖추게 되었을 때.
그녀가 부러 헤실헤실 무해한 미소를 걸치곤 본론을 이야기했다.
“씨를 뿌려야 꽃이 피죠. 이맘때가 씨앗을 심을 시기란 말이에요.”
리헨테온이 제 볼을 긁적거리더니 약간 굼뜬 어조로 물었다. 딱히 내키지는 않는 듯한 태도였다.
“그럼 일손을 도우란 말씀이십니까?”
“이해력이 빠르시네요.”
슈페나는 모른 척하며 명랑하게 긍정했다.
그리고는 잽싸게 씨앗 주머니를 도련님의 손에 올려놓았다.
“여기, 씨앗.”
얼떨결에 모종삽까지 들게 된 리헨테온을 향해 슈페나가 눈짓했다.
“그냥 흙 파서 씨 뿌리고 도로 덮으면 돼요. 참 쉽죠?”
그는 도르륵 눈알을 굴리더니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리헨테온이 바닥에 어기적어기적 쭈그려 앉았다.
살짝 불안하고 어설픈 자세였으나, 그것도 못할까 싶어 그냥 시선을 돌렸다.
곧이어 그 눈길은 리카도르에게로 닿았다.
“어떻게 하는지 알지?”
“알지. 쟤는 알까 모르겠지만.”
리카도르가 리헨테온을 바라보며 한쪽 눈썹을 들썩였다.
아무튼 그들은 콧등에 흙이 묻을 정도로 열심히 땅을 파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제는……….
“형수님, 이건 어떻게 하는 겁니까?”
순박한 시골소년 같은 외양의 리헨테온이 더럽게도 일을 못한다는 점이었다.
“형수님, 땅은 이 정도로 파면 되는 겁니까?”
거기에다 질문요정이었다.
슈페나는 수인 하나는 생매장해 버릴 만큼 기다란 구덩이를 내려다보며 속으로 진지하게 뇌까렸다.
‘그냥 여기다 묻어버릴까.’
누구를?
도련님을.
아냐, 사람은 착하고 우직하고 좋아 보였어.
슈페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고슬고슬하면서 조금 비린 흙의 내음이 코끝을 간질였다.
자연의 향을 맡으니 나쁜 마음이 싹 가시는 것 같았다.
그때, 어떻게 알았는지 리카도르가 슈페나의 옆에 쭈그려 앉아 인간을 유혹하는 악마처럼 속살거렸다.
“대신 묻어줘?”
“살인은 범죄랬어.”
그러자 슈페나가 도덕책을 읊조리 리카도르의 귓가에 소곤소곤 이야기했다.
그 대꾸에 리카도르는 피식 웃으며 은근슬쩍 슈페나와 더 가까이 붙었다.
“너무 남 일처럼 말하는데?”
“목격자가 되고 싶진 않으니까나 안 볼 때 묻어줄래?”
무척이나 솔직한 진심이었다.
때마침, 리헨테온이 쫄래쫄래 다가와 슈페나 바로 옆에 자리를 잡았다.
“무슨 얘기 하십니까, 형수님?”
너 묻어버릴 얘기요.
이런 살벌한 답 대신 그녀는 그저 부처 미소를 지었다.
결국, 그들은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양새가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리카도르가 리헨테온을 빵 발로 까서 대형이 흐트러졌지만,
“무슨 짓입니까!”
“왜, 문제 있어?”
화를 내던 리헨테온은 두어 번 정도 눈만 깜박이며 입을 닫았다.
순간 쫄아버린 탓이었다.
잠시 조용하나 싶었던 리헨테온이 곧 슈페나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형수님, 물도 줘야 합니까?”
“물은 나중에 테네도르로..……”
슈페나가 해탈한 표정으로 구구절절하게 알려주었다.
그런데.
“이렇게요?”
도련님이 그 안내에 따라 착실히 테네도르를 만지는 게 아닌가.
당연하게도 테네도르에선 세찬 물줄기가 사방으로 뿜어져 나왔다.
안타깝게 바로 근처에 있었던 슈페나는 물벼락을 맞았다.
“오, 미친.”
곱지 못한 언어표현이 육성으로 튀어나왔다.
곁에 있던 리카도르가 잽싸게 제 겉옷을 벗어 그녀에게 둘러주었다.
슈페나는 품이 낙낙한 검은 정복을 꼭 여미곤 물미역이 된 하늘색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겼다.
그녀가 나지막이 리헨테온을 불렀다.
“도련님….”
차에 타봐. 얘기 좀 하자.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슈페나의 심정도 모르고 리헨테온은 눈치 없이 순수하게 감탄했다.
“형수님, 꼭 물에 빠진 생쥐 같습니다.”
슈페나는 뚱한 표정으로 입꼬리만 끌어올려 웃고는 혀를 찼다.
‘저래서 형제끼리 치고받고 싸웠던 건가.’
일리가 있는 추론이었다.
그녀가 리카도르를 쳐다보았다.
리카도르 또한 물세례에 당했는지 머리끝이 살짝 젖어 곱슬곱슬하게 말려있었다.
‘역시 남주라서 그런가, 젖어도 잘생겼네.’
오히려 특유의 청량한 외모가 더 살아난 듯 보였다.
도리도리 고개를 저은 슈페나는 두 눈을 꽉 감고는 리카도르에게 말했다.
도련놈을 휘뚜루마뚜루 혼내달라는 무언의 부탁이었다.
“리카도르, 나 지금 아무것도 안보고 있어.”
가라, 리카도르!
리카도르는 가볍게 옆돌기를 시전했다.
효과는 굉장했다.
“아, 형! 지금 뭐 하자는 거-”
속수무책으로 당한 리헨테온은 제가 판 구덩이에 미끄러져 들어갔다.
깔끔한 뒤처리였다.
리헨테온은 당황했는지 일어날 생각도 못하다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악!”
“왜, 왜 그래요. 도련님?”
“벌레! 지렁이! 형수님, 살려주십시오.”
뭐야, 벌레 무서워해? 그거 아무것도 아닌데, 벌레잡이 전문 파랑새, 슈페나가 금방 마른 앞머리를 옆으로 넘기곤 씩씩하게 손을 내밀었다.
“제가 도와줄게요, 도련님!”
한 번만 봐주지, 뭐.
“그깟 벌레가 뭐가 무섭다고.”
의외로 슈페나보단 리카도르가 툴툴거리며 제 동생을 끌어올리는 게 더 빨랐다.
정확히는 멱살을 틀어쥐고 들어 분명 책에서는 리카도르가 벌레를 아주, 아주 싫어한다고 했으니까.
지금 도련님처럼.
무언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느낌에 슈페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느닷없이 심각해진 슈페나의 모습을 본 리카도르가 걱정스레 물었다.
“왜 그래, 부인?”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65화
아까의 일은 머릿속에서 지운 슈페나가 와구와구, 샌드위치를 베어 물었다.
‘역시 일하고 먹는 밥이 제일 맛있다니까!’
그건 리헨테온도 마찬가지였는지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샌드위치는 오랜만인데 진짜 꿀맛입니다!”
슈페나도 끄덕끄덕 리헨테온의 말에 동의했다. 그러다 돌연 의문이 하나 들었다.
‘도련님은 왜 계속 격식을 차리는세요.’
하긴 자리 잡은 습관을 고치긴 힘들지.
무언의 납득을 한 슈페나는 슬그머니 다른 화제를 꺼내 들었다.
“그럼 도련님은 계속 저택에 안돌아온 거예요?”
“네, 주로 다른 수인들 영역을 돌아다니느라.”
어머님 반응을 보니 아끼는 막내아들이고 나이도 어려서, 딱히 밖으로 나돌 이유는 없을 것 같은데.
리리엘라 언니는 생일 때 안 좋은 일이 생겨서 그런 거였고.
‘뭔가 사정이 있는 건가.’
냄새가 났다.
근데 오늘 처음 만난 사이에 물어보기도 참 뭐한 일이지 않은가.
슈페나는 힐끔 리헨테온을 올려다보았다.
볼에 검댕이 묻어 한결 순박해진 도련님의 눈망울은 정체 모를 감정으로 뒤덮여 있었다.
약간 어정쩡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 순간, 건조한 공기를 가르고 슈페나에게로 리카도르의 손이 불쑥 다가왔다.
그녀의 입가에 묻은 양상추가 떼어졌다.
“이건 아껴두고 먹으려고 묻힌 거야, 부인?”
리카도르는 자연스럽게 슈페나가 먹던 걸 제 입으로 가져갔다.
그 거리낄 게 없다는 듯한 태도에 슈페나가 깜짝 놀라 손가락으로 리카도르를 가리켰다.
“야, 너-”
“왜, 뭐?”
왜 그러냐는 듯한 기색.
“말을 말자.”
슈페나가 절레절레 고개를 젓고 샌드위치를 전투적으로 남김없이 먹어 치웠다.
옆에서 서글서글한 리카도르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대충 샌드위치를 다 먹은 후, 슈페나는 혹시 몰라 손으로 입가를 가리곤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뭔가 입을 닦을 게 있었으면 좋겠는데.’
또 부스러기가 묻어서 리카도르에게 놀림당하고 싶지는 않았으니.
그때, 리카도르가 슈페나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뇌물..”
“응?”
슈페나는 얼떨결에 그걸 받아들고는 살폈다.
휴지로 만든 꽃?
리카도르가 내민 건, 다름 아닌 티슈 몇 장과 그로 만든 장미였다.
리카도르는 제 입술을 툭툭 치며 쓰라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더니 알쏭달쏭한 말을 덧붙였다.
“이런 뇌물이면 매일매일 받아도 좋을 것 같다며.”
설마 아까 도련님이랑 했던 대화를 신경 쓰고 있었던 건가.
그 예상은 정답이었다.
리카도르가 리헨테온을 흘낏 쳐다보더니 이내 슈페나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리헨테온보단 내가 주는 뇌물이 낫지 않나?”
“…고, 고마워. 잘 접었네, 되게.”
얘는 이런 건 어떻게 배운 거람.
쓸데없이 잘 접은 장미를 고이 옷 안쪽 주머니에 넣은 슈페나가 픽, 웃음을 터뜨렸다.
어쩔 수 없이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리헨테온은 못 볼 꼴을 봤다는 듯 스스로의 눈을 찔렀다.
그리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질 무렵, 이상한 게 슈페나의 눈에 띄었다.
‘종이 나비?’
이거 정보상이 보낸 건가?
이리저리 미어캣처럼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누가 보기 전에 재빨리 그 종이를 낚아챘다.
다행히도 리카도르와 리헨테온은 또 아옹다옹하느라 모르는 듯했다.
무사히 쪽지를 펼쳤을 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정말이지 느닷없는 것이었다.
-지금 당장 만나요. 찾아갈게요.
이건 시나리오에 없던 변수인데?
제인을 통해 조만간 만나자는 연락을 보내기는 했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느닷없이 보자고 할 줄은 몰랐는데.
봐도 이쪽에서 먼저 찾아가든 오든 할 거였고.
‘나 아직 포커 마스터 못 했단 말이야!’
비장의 한 수가 남아 있으니 안심되긴 하는데….
얼른 끝장을 봐야겠어.
슈페나는 벌떡 일어나 허겁지겁 걸음을 재촉했다.
“다 먹었으니까 저 먼저 일어날 게요!”
“형수님, 형수님?”
리헨테온이 멀어져가는 슈페나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아련하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슈페나는 듣지 못한 건지 헐레벌떡 정원을 질주하고 있었다.
“가버렸네.”
리헨테온의 순박한 눈매가 구슬프게 아래로 늘어졌다.
어쩌다 보니 그와 리카도르만 남게 된 상황 속.
먼저 말을 건넨 건 리카도르였다.
“얘기 좀 하자, 동생아.”
그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미성으로 의문을 던졌다.
“왜 온 거야?”
“형수님이 재밌어 보여서요. 형이 안달복달하는 것 같길래.”
그에 리헨테온은 순수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리카도르의 심기를 건드렸다.
의도한 건 아니었다만.
‘누님이 부인에게 치대는 것보다 더 못 봐주겠네.’
자주 싸우는 동생이 보이는 관심이라서일까, 유독 기분이 언짢았다.
나만 알고 싶은데.
무의식중에 튀어나온 진심에 리카도르가 동요했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곤 수습하려 노력했다.
왈칵 일그러진 리카도르의 표정은 보지 못한 채, 리헨테온이 도리어 질문했다.
정확히는 아까 슈페나에게 들었던 걸 되물었다.
“형수님 말로는 형이 친구 하자고 그랬다던데 정말입니까?”
“….”
“…어.”
리카도르가 잠시 뜸을 들이다 수긍했다.
그 긍정에 오히려 리헨테온의 두 눈이 사시나무처럼 일렁였다.
일전에 듣긴 했으나 당사자에게 직접 확인받으니 더욱 믿기지 않아서.
그는 한참 뒤에야 한마디만을 입 밖으로 뱉어내었다.
“괜찮은 사람이라고 들었습니다.”
사실 리헨테온이 첫 만남부터 슈페나에게 공손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보좌관한테 시켜서 알아보니 누님의 생일날 신경을 아주 많이 써주셨다고 하더라고요.”
이미 슈페나가 체드윅 가 사람들에게 보였던 태도를 알고 있었으니까.
가을 순회 때 아가 사자를 구해 주었다는 미담도 익히 들었고.
뭐, 고마움 같은 감정이 섞였다고 볼 수 있었다.
리헨테온은 일견 어두워진 눈빛으로 리카도르를 올곧게 직시했다.
그리고는 그 둘만이 아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누님도 형도, 형수님한테 새아빠에 관한 일, 다 말한 겁니까?”
“글쎄, 누님 쪽은 어느 정도 그런 것 같던데.”
리헨테온의 시선은 잠시 리카도 르의 가슴팍에 머물렀다.
“그래서 지금은 그 상처 괜찮습니까?”
슈페나도 간호할 때 보았던 가슴 께에 나 있던 자상.
리카도르는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움찔거리다 일부러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정말 왜 갑자기 돌아온 거지? 그냥 슈페나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야?”
“네.”
“정말 그런 이유 때문에 다 내팽개치고 온 거라고?”
그 의구심 어린 말투에 리헨테온이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손가락을 퉁겼다.
“아, 근데 귀찮은 일이 생겼습니다.”
“뭐가?”
“일단 여우놈들을 다 쓸어버리고 오긴 했는데, 다른 종족과 결탁한 것 같더라고요.”
심각한 사항임에도 태평하기 그 지없는 태도.
리카도르는 이를 꽉 악물고는 한단어씩 곱씹듯 토해냈다.
“넌 좀 맞자.”
그러면서 팔에 은근슬쩍 이능을 두르더니 리헨테온을 향해 휘둘렀다.
손날에는 뭐든 다 베어버릴 듯한 하얀색 기운이 넘실대었다.
명백히 살의가 느껴지는 몸놀림에 리헨테온이 기겁을 하고 도망쳤다.
“아, 형! 형님!”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방어 태세를 갖추며 요리조리 피하던 리헨테온은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그중에 독수리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종족 전체가 가담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독수리?”
“아, 형수님도 독수리 가문에서 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제야 리카도르가 손에 감싸진 이능을 푼 채, 까딱 고갯짓했다.
“자세히 말해봐.”
리헨테온은 제 보좌관에게 전해 들은 사정을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그대로 전했다.
결론은… 여우 수인과의 분쟁이 타 수인 연합과의 전쟁으로 번질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는 리카도르의 표정은 답지 않게 시시각각 변했다.
이런 심상치 않은 상황에서 대충 급한 불만 끄고 저택으로 귀환했다고?
뭐, 병력과 부관은 두고 혼자서만 온 거라 당분간은 너끈하겠지만.
리카도르가 빡, 시원하게 리헨테온의 머리통을 갈긴 뒤 명령했다.
멍청한 데다가 대책도 없고 뇌는 더 없는 동생의 모습에 기가 찬 탓이었다.
“너, 당장 짐 싸서 있던 곳으로 돌아가.”
“아, 싫습니다. 오랜만에 온 집이고 형수님이랑 아직 완전히 친해 지지도 않았는데…… 아!”
“… 아!”
매를 버는 행동이었다.
리카도르는 어렸을 때의 추억을 되새기며 한참 정신교육을 해주었다.
기나긴 사랑의 손길이 끝나고.
눈탱이가 밤탱이가 된 리헨테온이 땅바닥을 굴러다니며 앓는 소리를 내었다.
그러면서 이해가 안 간다는 듯 투덜대었다.
“가을 순회 때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다쳤다면서, 순 거짓말이었습니까?”
칸이 단단히 입단속을 했기 때문에 일의 내막은 잘 모르는 리헨테온이었다.
사고로 알고 있을 뿐.
리카도르가 무감하게 제 동생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발을 헛디딘 게 아니야. 누군가 의도한 계략일 수도 있어.”
그리곤 감정을 억누르며 서늘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건너편 숲에서 검은 머리카락과 털뭉치, 커다란 맹수로 보이는 수인의 족적이 발견됐다더군.”
가을 순회 이후 정신을 차린 리카도르는 갑작스러웠던 그 사고에 관해 조사하고 있었다.
뭐, 칸이 시킨 것도 있었고.
아무튼 조사 결과, 흉수로 추정되는 이의 체모를 습득한 참이었다.
그리고 그 유력한 범인은……..
“검은색이면 설마..…!”
검은색이란 단어에 리헨테온이 기민하게 반응했다.
리헨테온의 눈은 깊디깊은 수렁처럼 섬뜩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리카도르도 똑같이 주먹을 말아쥐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치는 않지만, 그놈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걸지도 모르지.”
흑표범.
수인들의 왕, 사자와는 쌍벽을 이루는 맹수.
그리고 체드 가에 비극을 선물했던 철천지원수.
검은색은 그들의 상징이었다.
이를 으득 갈던 리헨테온이 무언가 결심한 것처럼 결연하게 눈을 빛냈다.
본디 리헨테온이 여우 수인과의 분쟁을 질질 끈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흑표범.
여우들이 흑표범과 퍽 가까운 사이라는 첩보를 전해 들었으니까.
그런 것치고는 흑표범의 그림자 하나도 보이지 않아, 분쟁을 그냥 정리한 거였다.
수하가 알려준 독수리 같은 잔챙이에 관심 없었으니까.
더구나 형수님도 궁금했고.
무언가를 꾸민다면
‘흑표범이…….’
우리 가족 중에서 가장 약한 형수님이 제일 위험하지 않을까?
불현듯 리헨테온은 슈페나가 염려되었다.
“그럼 저는 형수님한테 가봐야겠습니다.”
사고를 치기 직전의 모습에 리카도르가 날이 선 어조로 받아쳤다.
“뭐?”
“형수님은 형님한테도 소중한 사람이 아닙니까.”
하나, 이어지는 리헨테온의 대꾸에 그는 아무런 반응도 할 수가 없었다.
“소중한 사람…….”
리카도르는 망부석처럼 굳은 채로 읊조렸다.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66화
한편, 제 집무실로 달려간 슈페나는 제인을 불러 준비를 서둘렀다.
정보상은 이미 시계 핑계를 대곤 손님 자격으로 방문해서 정원을 둘러보고 있었다 하더라고.
철저히 세팅을 마친 후, 슈페나는 정보상을 응접실로 불렀다.
슈페나가 방긋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먼저 인사했다.
“어서 와요.”
“오랜만이네요, 고객님.”
낯익은 나비가면과 결 좋은 기다.
란 금발.
정보상은 일전에 보았을 때와 달리 화사한 플라워 패턴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꼭 누군가에게 잘 보이고 싶어하는 사람같이.
슈페나는 괜스레 제 귓불을 매만지다 넌지시 이야기했다.
“근데 참, 저는 그쪽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아직 이름도 모르네요.”
나무늘보가 알려준 정보가 진실인지 테스트할 요량으로, 은근한 견제가 담긴 물음에 정보 상은 여유롭게 차를 마시며 답했다.
“아일리, 그게 제 성이에요. 그냥 아무렇게나 불러주세요. 중요한 건 아니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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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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