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uebird Lady and The White Lion Family RAW novel - Chapter (9)
백사자가문의 파랑새 마님 9화(9/21)
Mai L Ailli
나무늘보가 보여준 계약서와 같은 이름.
‘나한테 사기를 친 건 아녔나 봐.’
슈페나가 앞에 놓인 티푸드를 야금야금 집어먹고는 비장하게 운을 띄웠다.
“그동안 당신한테 궁금한 게 참 많았어요.”
“편히 물어보세요, 고객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여유로운 태도, 슈페나는 살짝 부루퉁해진 목소리로 정보상의 속내를 떠보았다.
“편히 물어보면 거짓 없이 대답해줄 건가요?”
정보상은 일언반구 없이 그저 고아하게 차향만 음미했다.
아니란 소리였다.
남몰래 이죽거린 슈페나는 이윽고 미끼를 던졌다.
“내기 하나 하실래요?”
내기, 라는 단어에 정보상의 눈동자에 숨길 수 없는 이채가 돌았다.
슈페나는 은은하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종목은 포커. 상품은 아무거나 이긴 사람이 원하는 모든 걸 들어주는 걸로.”
슈페나가 제 손목에 걸린 금팔찌를 짤랑짤랑 흔들었다.
유혹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게끔.
“이번에 제 사업이 대박 난 건 아시죠?”
“으음, 뭐 통째로 넘겨주기라도 하시려고요?”
정보상이 도발적인 언사로 대꾸했다.
‘그건 좀….’
슈페나는 잠시 망설였다.
먹지 말고 피부에 양보하며 개고생을 해서 키운 사업이 아니던가.
그러던 중, 포커를 알려준 리리엘 라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포커는 기세야. 기세라는 건 곧 판돈이지.
그래, 솔직히 내가 지기 힘든 싸움이야.
사실 슈페나는 믿는 구석이 따로 있었다.
‘염력이 뭔가 꽁치는 데에 특화된 능력이거든!’
결심을 마친 슈페나가 자신만만하게 보이려 부러 다리를 꼬면서 되받아쳤다.
“그럼 가질 수는 있으세요?”
“세게 나오시네요, 고객님.”
정보상이 고개를 살짝 틀더니 경계심을 물씬 내비쳤다.
슈페나는 더욱 자신만만하게 상대를 압박했다.
“그 말, 쫄린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나요? 하긴 질 것 같으면 피하는 게 상책이긴 해요.”
허공에서 둘의 시선이 부딪쳤다.
슈페나는 눈에 힘을 주곤 어디 해보자는 듯 물러서지 않았다.
가면 사이 벌어진 틈새로 보이는 정보상의 입매가 움찔대었다.
정보상은 이내 수긍했다.
“좋아요. 하죠.”
그렇게 내기가 시작되었다.
밑장빼기의 진수를 보여주마!
슈페나의 눈빛이 의기양양하게 빛났다.
착착착~
테이블 위에 일렬로 늘어선 카드와 요리조리 움직이는 시선들.
슈페나는 빛보다도 빠른 손놀림, 아니 이능 놀림으로 카드를 가로 챘다.
그 광경을 유심히 보고 있던 정보상이 의구심 어린 음성으로 따졌다.
“동작 그만, 지금 밑장빼기 하는 건가요, 고객님?”
“제가요?”
시력이 좋군.
그렇지만 슈페나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당당하게 허리를 폈다.
정보상은 손가락으로 턱을 느른 하게 매만지더니, 확 몸을 일으켜 슈페나의 손을 붙잡았다.
“하, 내가 빙다리 핫바지로 보이나.”
“증거 있어요?”
슈페나도 정보상의 팔을 탁, 쳐서 떨구며 팽팽하게 맞섰다.
‘여기서 맞다고 하면 계획이 틀어질 거야.’
애초에 위험할지도 모르는 인물인데 인정사정 가릴 건 없지 않은가.
슈페나는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그러나 정보상도 역시 허투루 정보를 파는 일을 해온 건 아니라는 듯 기민하게 허를 찔렀다.
“이능 쓴 거죠? 가을 순회 때 신비한 이능으로 새끼 사자를 구하셨다던데.”
역시 호락호락한 이는 아니었다.
‘그래도 모른 척 잡아떼면 별수있겠어?’
슈페나는 동요하지 않고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심증뿐인 것 같은데, 마저 게임이나 이어가죠?”
“그 좋은 이능을 고객님은 밑장빼기 하는 데 쓰시네. 그렇게 포커 치다간 손모가지 날아갑니다.”
그 반응에 정보상이 돌연 불길하게 입꼬리를 활짝 올려 웃었다.
“그러니까 이건 무효로 하죠.”
그러곤 당당하게 포커 카드 아래 깔린 천을 들어 엎어버렸다.
“뭐 하는 짓이에요, 이게?”
슈페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경악했다.
그녀의 눈길은 엉망으로 뒤집힌 포커 카드에 머물렀다.
그 순간, 어딘가 짙게 잠긴 듯한 정보상의 중저음이 은은히 귓가에 스였다.
“처음으로 다시 되돌린 거죠. 그 어떤 것도 가능할 수 있도록.”
꼭 꿈을 꾸는 듯 나직한 음성.
정보상의 녹안에 슈페나가 담겼다.
그건 슈페나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떠올리는 눈빛이기도 했다.
“난 감사하던데.”
“무슨 뜻이에요?”
지금 상황에 대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
왜 이런 뜬구름 잡는 소리를……
이상한 기분에 슈페나가 눈가를 찌푸리던 순간, 정보상이 활짝 미소 지었다.
“다시 시작해요, 내기.”
뭐야, 이 수인.
통 제멋대로인 태도에 말문이 막 힌 슈페나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는 사납게 눈을 빛냈다.
“이번에도 지고 나서, 이능 쓴 거 아니냐며 떼쓰지나 말아요.”
지혜로운 파랑새는 12개의 둥지를 만들어놓는 법이었으니까.
이능이 아니더라도 믿는 구석은 몇 개 더 있었다.
다시 리셋된 2차전.
탁탁—
카드가 섞이는 소리만이 공허하게 허공을 배회했다.
7개의 카드가 다 정해지고.
정보상은 제 패를 자신감 있게 보여주었다.
“풀하우스.”
평상시엔 보지도 못한, 쉽게 나오기 힘든 족보였으니.
그리고 바로 뒤에 슈페나가 뒤집어 보인 패는…….
“여왕을 기리며, 로열 스트레이트플러쉬.”
최고위 족보.
깔끔한 슈페나의 승이었다.
“이런, 제가 또 이겨버렸네요?”
자못 도도한 슈페나의 목소리가 잇새를 가르고 튀어나왔다.
이래 봬도 조금 놀란 상태였다.
역시 카드 윗면에 나만 알아볼수 있는 표식을 새기길 잘했어.
전판 카드 순서를 외워둔 것도.
혹시나 실수할까 봐 걱정했는데 무사히 해내서.
그녀는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슈페나가 정보상을 향해 앙칼지게 되물었다.
“이번에도 이능 때문이라고 하실건 아니겠죠?”
“결과에 깔끔히 승복하죠, 고객님.”
예상외로 정보상은 쌈박하게 슈페나의 승리를 인정했다.
그러면서 숨 쉬듯 자연스럽게 추파를 던졌다.
“난 포커 잘하는 사람이 좋더라.
그때도 매력 있었지만, 더 관심이 가네.”
이 인간이 왜 이래.
갑자기 칭찬해도 소원권은 양보못 한다고.
“….… 선생님, 저는 유부녀입니다.”
슈페나는 기겁을 하며 슬금슬금 의자를 뒤로 빼었다.
아무튼 소원권을 얻는 데에 성공했다.
끈질긴 정보상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푹 숙인 슈페나는 결연한 태도로 이야기했다.
“그럼 어디 소원권을 한번 사용 해볼까요?”
원하는 건 딱 두 개였다.
의뭉스러웠던 정보상의 속셈을 파헤치는 것.
그리고 앞으로 피해가 될 만한 짓은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것.
이런 걸 확실히 해놓으려면 타나 토를 이용하는 게 제일 좋지 않으려나.
슈페나는 고개를 들고 정보상을 직시했다.
“타나토 계약. 그걸로 맹세해줘요.”
그 단어를 들은 정보상의 표정이 요상하게 변했다.
그녀가 깊은 울림이 느껴지는, 묘한 중저음으로 경고했다.
“아직 우리 고객님이 타나토 계약의 위험성을 잘 모르시네. 그 위력을 몸소 겪고 있는 당사자면서.”
“무슨 말이에요. 그거?”
슈페나의 눈동자가 도르륵 굴러갔다.
‘내가 제인이랑 계약했다는 걸 알고 있는 건가?’
그렇지만 하나도 안 위험했었는데..….
그리 속으로 생각하던 순간, 정보 상이 손끝으로 툭툭 테이블을 쳐서 슈페나의 시선을 끌었다.
“타나토 계약에는 두 종류가 있어요. 일반적인 계약, 그렇지 않은 계약.”
그 이야기에 슈페나가 의아함을 내비쳤다.
계약에 종류가 있다는 소리는 책에서도 보지 못했으니까.
“처음 들어보는 말인데요?”
“고서에도 안 나와 있는 내용이에요.”
정보상은 꼭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조금 파리해진 안색으로 설명했다.
“후자는 영혼까지 서로 연결될만큼 강한 계약이죠. 그 증거 중 하나로 상대의 체향이 본인에게 스며들어요. 표식의 색도 조금 다르고.”
어찌 보면 로맨틱하죠?
정보상이 애써 웃으며 실없는 농담을 던졌다.
안에 뼈가 든 듯한 발언 같아서 기분이 이상했지만.
그런 그녀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우리가 계약을 맺으면 그 후자가 되어버려요. 원래 각성자끼린 그렇거든.”
각성.
나무늘보가 마지막에 내뱉었던 단어였다.
‘각성자끼리, 라는 말은 나도 포함된다는 거지?’
그러니까 내가 각성자라고?
그게 뭔데?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67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원작에 등장했던 개념도 아닌 듯하고, 아는 게 하나도 없었으니까.
슈페나는 눈매를 가늘게 좁히면서 답답함을 표출했다.
그녀의 몸이 자연스레 정보상 쪽으로 기울었다.
“알아듣게 설명을-”
“그러니까. 이미 고객님은 그 계약이 맺어져 있어서 난 못 끼어들어요.”
“네?”
그게 말이 되나?
이미 계약이 맺어져 있다면…….
슈페나가 팔을 들어 킁킁 냄새를 맡았다.
‘제인이 쓰는 향수 냄새는 안 나는데.’
살갗에선 오히려 시원하고 청량한 향이 났다. 늘 맡아 와서 자각조차 없었던.
‘순전히 감이지만 제인은 아니야.’
그때, 정보상이 조금 갈라진 목소리로 선을 그었다.
“더는 나도 말 못 해요. 지금도 아슬아슬하거든.”
뭔가 사정이라도 있는 걸까?
슈페나가 더 말을 꺼내기 직전, 정보상은 짐짓 여유롭게 말을 돌렸다.
“나랑 영혼의 단짝이 되어서 로맨틱해지고 싶은 건 아니죠?”
“무슨 그런.…….”
슈페나의 깔끔한 부정에 정보상이 픽 웃음을 지었다.
그러더니 돌연 숨넘어갈 듯 쿨럭쿨럭, 기침을 했다.
“왜, 왜 그래요? 괜찮아요?”
놀란 슈페나가 손수건을 건네며 정보상의 등허리를 조심스레 두드렸다.
허억, 깊이 숨을 들이마신 그녀는 머쓱하게 고백했다.
“사레들렸어요.”
“아…….”
어디 아픈 건 줄.
‘하긴 치료 이능을 쓸 수 있는 사슴 수인이랬는데, 진즉 사용했겠지.’
정보상도 창피했는지 서둘러 본론에 들어갔다.
“그나저나 물어볼 거 있지 않아요? 거짓말하지 않고 대답해줄게요, 고객님.”
정보상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장난스레 눈을 찡긋거렸다.
“제 머리카락을 걸고 맹세할 수 있어요.”
“너무,인생을베팅하셨는데”
슈페나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저도 모르게 혼잣말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는 단호하게 제안했다.
“계약서 써요. 신물로 만들어서 결코 어길 수 없는 걸로.”
납득은 되지 않았으나, 본인이 타나토 계약은 결단코 안 되는 이유가 있다는데 어쩌겠어.
다른 방법을 사용해봐야지.
슈페나는 혹시 몰라 사전에 작성해두었던 계약서를 꺼내 들었다.
일전에 리리엘라 언니에게 포커를 배우면서 수다 떨다가 알게 된 사실이 몇 가지 있었다.
진실의 이능을 가진 악어들의 영지에선 그와 비슷한 효력이 있는 나무 신물이 자란다는 것.
그 나무로 만든 종이를 이용하면 강제성을 띤 계약을 할 수 있다는것.
‘언니 친구가 악어라서 이 귀한 종이를 묶음째로 가지고 있다 그랬지.’
덕분에 조금 얻어온 참이었다.
슈페나는 정보상에게도 그 사실을 친절히 알려주었다.
정보상은 눈가를 살짝 찡그리더니 난색을 표했다.
“씁, 조금 곤란한데…….”
“내기에서 졌잖아요. 딴말할 거예요?”
“계약서에 이름 적으면 되는 거 죠, 고객님?”
그 서슬 퍼런 지적에 정보상은 뭐라 작게 중얼거리고는 조금 전의 태도완 다르게 서둘러 계약서를 가져갔다.
“네, 뭐. 앞면이 거의 다니까 그냥 대충 읽어봐요.”
슈페나는 슬그머니 정보상을 흘깃흘깃 쳐다보며 조금 재촉했다.
닦달을 들은 정보상은 의아해하면서도 휘리릭, 계약서를 살펴보았다.
이윽고, 계약서에 두 사람의 서명이 쓰이고, 슈페나와 정보상은 허심탄회한 대화를 시작했다.
“……알고 있었죠? 내가 시계탑에 가려던 거.”
“네. 그래서 제가 예언까지 알려 줬잖아요. 고객님.”
정보상은 부정하지 않았다.
슈페나가 더 본격적으로 파고들었다.
“그럼 시계탑이 무너진 거, 그쪽 짓이에요?”
“네, 무슨 문제라도?”
그것 또한 긍정이었다.
그 담담하고도 시원한 수긍에 슈페나의 눈이 커다래졌다.
슈페나의 목소리 끝이 저절로 높아졌다.
“그, 그것 때문에 내가”
“멀쩡히 살아 있잖아요. 그다지 위험하지도 않았을 텐데? 넉넉히 시간 지난 후에 무너지도록 설계해서.”
정보상이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교활한 마녀처럼 조곤조곤 속삭였다.
“아, 그 시계탑에 있던 물건은 잘챙겼죠?”
불난 집에 부채질하듯 슈페나의 주머니 사정마저 걱정해주는 태도.
‘지금 나 약 올리냐?’
애초에 멀쩡한 시계탑을 터뜨려서 누군가 다칠 수도 있던 상황이었다면 사과가 먼저 아닌가?
화난 슈페나가 저도 모르게 다다 다다 쏘아붙였다.
“저기요. 너, 얌생이니?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뻔뻔해요?”
“뭐, 얌생이?”
“그럼 쌍욕이라도 대차게 박아드려요?”
슈페나는 굴하지 않고 거세게 딜을 박아 넣었다.
그 공격에 정보상이 어질어질한 지 머리를 부여잡았다.
“하…….”
정보상의 붉은 입술에선 깊은 탄식이 새었다.
그녀가 정신적 충격을 세게 받은 건지, 비틀거리며 헛소리를 했다.
“나를 얌생이라고 부른 여자는 고객님이 처음이야. 관심 끌려는 거면 성공했어요.”
“무슨 재벌이세요? 그리고 공감능력 없어요? 이 상황에서 장난이 나와?”
슈페나가 더욱 버럭버럭 분노했다.
그러고는 앞에 놓인 미지근한 차를 벌컥벌컥 들이켜며 진정하려 노력했다.
얼마 후에야 겨우 이성을 되찾은 슈페나가 이런 일을 벌인 목적을 캐물었다.
“어쨌든 왜, 무슨 이유로 그런 짓을 한 건데요?”
“한 가지 확실한 건, 난 고객님의 적이 아니에요. 죽여버려야 할 놈은 따로 있지.”
정보상이 당당하게 자신했다.
고백 아닌 고백은 덤이었고,
“난 고객님이 정말 마음에 들어요.”
슈페나는 전혀 믿지 못했지만.
“못 믿겠다는 눈치네. 맹세할 수 있는데.”
티베트 여우같이 뚱한 슈페나의 표정에 정보상이 미친 제안을 건넸다.
“계약처럼 심장을 거는 건 좀 곤란하고 뽑아 줄 수는 있는데, 가질래요?”
“싫은데요. 그쪽 거는 줘도 안 가져요.”
슈페나가 반사적으로 몸서리쳤다.
게다가 심장을 어떻게 뽑는다고, 이런 헛소리를.
정보상은 그런 슈페나의 생각을 읽어내기라도 한 것처럼 호언장담했다.
“진짠데. 줄게요. 가져요, 내 심장.”
왜 그쪽이 로판 남주나 할 법한 대사를 치는 건데.
그것도 이런 상황에서!
슈페나가 큰 소리로 정보상의 정신 상태를 염려했다.
“미쳤어요?”
“반쯤은?”
정보상은 태연히 받아쳤다.
각설하고 슈페나는 원래대로 날카롭게 정보상을 떠보았다.
“그나저나 그쪽이 왜 제 편이에요? 나한테 한 짓이 있는데 어떻게 믿어요? 앞뒤 맥락이 안 맞잖아.”
“생각해봐요, 고객님.”
정보상은 열심히 약을 팔았다.
“내가 로네악 꽃 전설 알려줬죠, 시계탑 암호도 가르쳐줬죠, 시계탑 털었다는 흔적까지 다 지워줬잖아요.”
이런 결론까지 도달하면서.
“고객님은 저한테 고마워해야죠.”
“이 인간, 양심 없네?”
무슨 그런 개논리가 다 있어?
슈페나는 굴하지 않고 눈을 부릅뜨면서 정보상을 거세게 노려보았다.
“남이 원하지 않았던 도움은 폭력이거든요? 안 고마워요.”
“……그래요?”
그녀가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이 미적지근하게 호응했다.
그러곤 방바닥을 바라보며 곰곰이 생각하다 슈페나에게 담백하게 사과했다.
“그렇구나. 제 행동이 실례가 되었다면 죄송해요, 고객님.”
순순히 고개를 숙이는 모습.
슈페나가 정보상의 얼굴을 면밀히 훑어보았다.
정말 깨닫지 못한 것처럼 한 대얻어맞은 표정이 아니던가.
‘뭐야. 이 사람….’
슈페나는 한풀 꺾였지만 여전히 단단한 목소리로 마지막으로 못을 박았다.
“앞으론 그런 의뭉스러운 행동, 하지 말아주세요. 그걸 이런 식으로 포장하는 것도요.”
“주의하도록 하죠, 고객님.”
“이 이후로는 서로 딱 돈 준 만큼만 거래하는 사이로 남도록 해요.”
그리 말한 슈페나가 슬그머니 입매를 끌어올리며 슬쩍 정보상을 곁눈질했다.
“참. 아까 사인했던 계약서 조항에 관해서 하나 확실히 알아두셔야 할 게 있어서요.”
“무슨 말씀이시죠, 고객님?”
정보상은 조금 굼뜬 동작으로 팔랑팔랑 계약서를 넘겼다.
그 행동에 슈페나는 손가락으로 더 넘기라는 신호를 보냈다.
“거기. 항목이 좀 애매모호한데 아까 사인할 때, 제대로 못 보고 하신 것 같아서요.”
을은 갑과 전속 계약을 맺으며, 갑이 원하는 정보는 뭐든 넘겨주는 동시에, 갑의 신상에 위해가 될 만한 자의적인 행동은 하지 않는다.
대강 이런 조건의 조항을 아주 뱅글뱅글 돌려서 계약서 구석에 써놓았었다.
한 번 즉, 보는 걸로는 알아채기 힘들 만큼 어렵고 복잡하게.
물론 여기서 갑은 슈페나였고 을이 정보상이었다.
‘정보상이 진짜 제대로 이 계략에 걸려들 줄은 몰랐지.’
슈페나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는 슬쩍 정보상을 올려다 보며 당부했다.
“참고로 어길 시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는 구절 봤죠? 반드시 지킬 수밖에 없다는 건 아실 테고.”
‘정보상은 시계탑을 무너뜨렸고, 나는 저 계약서에 사인을 하게 만들었고.’ 서로 한 번씩 주고받은 셈이지 않으려나.
슈페나가 꾸벅 인사했다.
“아무쪼록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이런, 당했네요.”
정보상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슈페나는 어깨에 들어갔던 힘을 스르륵 풀고는 마른침만 삼켰다.
‘이 정도면 선방한 거지?’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68화
새로운 형국을 맞이했다.
리카도르와 대화를 나누던 리헨테온은 슈페나를 찾아 나서던 참이었다.
아무튼 사용인들에게 물어물어 이곳까지 오게 되었고, 손님 접대를 하고 있단 얘길 듣지 못한 채 벌컥 문을 열어버린 거였다.
빼꼼 고개를 내민 리헨테온이 정보상을 보며 의아해했다.
“……누구십니까?”
이럴 땐 보통 선약이 있는 줄 몰랐는데 죄송합니다, 라고 하지 않나?
슈페나가 이내 여상스레 말을 돌렸다.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괜히 캐물을까 봐 걱정되기도 했고.
“아, 잠깐 약속이 있는 걸 깜박해서…. 아까 갑자기 사라지는 바람에 오신 거예요?”
“네, 형수님한테 따로 드릴 말씀도 있어서요.”
“도련님, 그럼 조금만 기다려주실래요?”
하지만 그 답변은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다름 아닌 정보상에게서.
“괜찮아요. 볼일은 다 끝난 것 같으니 이만 가볼게요, 고객님.”
무언가 놀란 듯 크게 뜨인 정보 상의 녹안. 그 짙은 눈망울엔 얕은 습기가 고여 있었다.
‘응?’
슈페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느낌이 이상해서.
그 순간 정보상이 자못 처연하게 속눈썹을 드리우곤 인사도 없이 슈페나를 지나쳤다.
정확히는 그럴 정신이 없는 것으로 보였지만.
정보상이 그리 방을 빠져나가려던 찰나, 리헨테온이 작은 호의를 내비쳤다.
“지금 눈에 뭐 묻은 것 같은데.”
그는 정보상에게 제 손수건을 주었다.
“닦으십시오.”
“….…고마워요.”
정보상은 목이 탁 막힌 건지 먹먹한 음성으로 그를 받아들였다.
뭐지, 이 기류?
슈페나의 시선이 요리조리 사방을 움직였다.
정보상의 구두 소리가 쓸쓸하게 울려 퍼지고, 방 안에 슈페나와 리헨테온만 남게 되었다.
‘눈에 먼지가 들어갔나? 왜 정보 상 눈가가 글썽글썽해 보였지?’
나중에 물어볼까.
아니야, 그러든 말든 내가 왜 신경을 써.
애써 잡생각을 정리한 슈페나가 손뼉을 치며 주의를 환기했다.
“곧 저녁 먹을 시간이긴 한데, 차한잔하실래요?”
“예, 감사합니다.”
그렇게 도련님과 티타임 시간을 갖게 되었다.
감미로운 차향을 맡던 슈페나가 천천히 본론을 물어보았다.
“근데 무슨 할 말이 있으셨던 거예요, 도련님?”
“아. 일주일 뒤쯤, 다시 여우수인 영역으로 가야 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왔는데?
슈페나가 커다란 눈을 데굴데굴굴리며 말끝을 흐렸다.
“무슨큰일이라도생겼나요…….?”
“아, 사실 전투가 일어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는데 대충 정리하고 돌아온 거라서요.”
“예?”
리헨테온이 평온하기 짝이 없는 말투로 덤덤히 고자질했다.
빨갛게 부풀어 오른 제 옆 이마를 가리키면서.
“형님한테 맞았습니다. 오다가 어머니도 뵈었는데 또 혼났고요.”
도련님은 분명 여우수인과 생긴 분쟁을 해결하러 갔었다고 했지.
일을 완벽히 처리하지 않았는데 그냥 돌아온 건가?
문득 어렴풋이 어떤 기억 하나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원작에 나온 전쟁도 원래 사소한 싸움이었다가 일이 틀어졌던 걸로 기억하는데.’
에이, 도련님이 다시 수습하러 가는 모양인데 아니겠지.
그때, 나름 심각한 슈페나의 상념을 깨우는 한마디가 들려왔다.
“앞으로도 저희 부족한 형님을 잘 부탁드립니다.”
학부모가 선생님에게 아이를 잘 부탁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비장한 어투.
“아…예.”
슈페나는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곧 떠날지도 모른다고 했으니까 이런 얘기를 하는 건가?’
서로 다투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정은 있는 형제지간인가 보네.
슈페나가 퍽 흐뭇한 형제라고 미소 짓던 찰나.
리헨테온은 슬쩍 고개를 돌리더니 큼큼, 헛기침했다.
그러곤 제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처음엔 놀랐습니다. 누님이 저택에서 생일을 보냈다고 들어서요.”
아, 리리엘라 언니의 얘기인가?
그런 슈페나의 궁금증에 답하듯 리헨테온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저희 집 얘기는 대충 아시죠, 형수님?”
“아…… 그, 아버지 일은 들었어요. 돌아가셨다고.”
슈페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조심스레 위로했다.
도련님이 갑자기 왜 그 얘기를 꺼냈는지는 의문이었다만.
‘뭐, 혈육을 챙겨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는 건가..’
방금 리카도르 이야기를 한 것과 비슷한 맥락일지도.
슈페나의 예상은 정답이었다.
“저희 가족들을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형수님.”
리헨테온은 깍듯한 폴더인사를 하며 극진하게 고마움을 표했다.
그리고 나선 당최 가늠이 안 가는 새로운 화제를 끌고 왔다.
“….…그리고 형수님도 조심하셔야 합니다.”
“네?”
리헨테온이 쩌렁쩌렁 점호 명령을 하듯 우렁차게 신신당부했다.
“흑표범, 그놈들이 얼마나 악랄한데요. 그 괴이한 이능에 당하지 않도록 늘 정신수련을 하십시오!”
“예? 명심하겠습니다, 도련님?”
깜짝이야.
슈페나는 맹렬한 기세에 순간 쫄아서 의문문으로 그에 동조했다.
그러다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곤 두뇌를 풀가동했다.
웬 흑표범?
‘괴이한 이능이라면….….’
표범 고유의 이능이 지배였지.
상대방의 머릿속에 침투해 행동을 조종할 수 있는 능력.
이 무시무시한 이능에 당하지 않는 법은 맑은 정신력을 키우는 것 밖에 없었던가.
원래 정신력이 이능을 오래 쓸 수 있게 하는 만큼, 타인의 힘에도 저항할 여유를 만들어주었지.
여하튼 표범은 굉장한 능력치를 지닌 맹수였다.
소설에서도 사자 가문과 원수로 등장하지 않았던가.
‘조금 전까지 도련님이랑 나눴던 얘기가 리리엘라 언니의 생일에 관련된 거였지.’
그 새아빠라는 분과 흑표범이 무슨 관련이라도 되어있나.
그때 리리엘라 언니가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새아빠는 죽어버렸다고 했었는데.
전자는 자연사고 후자는 사고사인 거 아니야?
그것도 흑표범에 의한 그럴듯한 추론이 완성되었다.
슈페나가 비상한 자신의 추리력에 감탄하는 찰나, 리헨테온이 듬직한 저음으로 지뢰를 투척했다.
“제가 이 저택에 있는 동안은 형수님의 정신수련을 책임지겠습니다.”
체드윅 가 사람들은 적어도 한번씩은 표범과 격돌해본 이력이 있었다.
그래서 그 골치 아픈 이능에도 어느 정도 견딜 수 있었고, 그러나 형수님은 아니지 않은가.
혹여나 흑표범이 그때처럼 체드윅 가를 노린다면……..
‘형수님은 내가 완벽히 교육해드려야 해.’
착하지만 어리바리한 누님과, 못된 데다가 혼자만 잘난 줄 아는 형님, 그리고 바쁘신 어머니..
그런 그들 사이에서 형수님을 세심하게 챙길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지!’
리헨테온은 그리 생각했다.
게다가 본디 그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성정이 아니던가.
군기가 바짝 든 리헨테온이 슈페나의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따라오십시오, 형수님.”
“예에?”
슈페나는 영문도 모르고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제가 몇 년간 고안해온 정신력 향상 비법이 있습니다. 특별히 형수님만 알려드리는 겁니다.”
그가 개발한 효과적인 정신수련방법은 명상이었다.
그것도 폭포를 맞으면서 하는.
폭포 소리를 들으면 모든 상념이 날아가고 집중력이 올라간다나 뭐 라나.
결국, 슈페나는 도련님과 함께 저택 근처 뒷산에서 사이좋게 폭포를 맞게 되었다.
콸콸콸.
머리에 떨어지는 게 물인가 회한의 눈물인가.
바야흐로 이 짓거리도 이제 4일째.
폭포 아래 놓인 판판한 돌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경건하게 수양하던 슈페나는 리헨테온을 보며 질색했다.
쟤도 정상은 아니야.
‘이러다 신선 되겠네…….’
파랑새인데 승천하게 생겼다.
***
리헨테온이 슈페나에게 효과적인 정신수련 방법을 전수하고 있을 무렵.
리카도르는 며칠 동안 깊은 고민에 빠져있었다.
“부인은 저 녀석 뭐가 그리 좋다고 따라다녀 주는 거지?”
한창 리헨테온이랑 둘이서 헤실 헤실 놀러 다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보아하니 폭포 밑 바위에 내리 앉아서 명상하는 것 같던데.
‘물도 그리 좋아하지 않으면서.’
일전에 동물화한 모습으로 욕조에 빠졌을 때에도 있는 성질 없는 성질 다 부렸던 슈페나가 아니었던가.
동생 놈이 뭐가 예쁘다고 오냐오냐 동참해주는 건지.
‘짜증 나네.’
그래, 신경질이 났다.
– 형수님은 형님한테도 소중한 사람이 아닙니까.
리헨테온이 이런 말을 한 직후로 더더욱.
이 이상한 감정은 아마 르쉐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계속 의식하게 되었으니까.
아니, 어쩌면 그 이전부터였을지도 몰랐다.
저도 모르게 슈페나의 생일을 축하해주겠다고 말했을 때부터.
마음을 열었던 걸지도.
‘그럼 나는 슈페나를 친구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건 아니었다.
친구를 사귀었을 때 느꼈던 그 감정이 아니었다.
– 세상에는 다양한 사랑의 형태가 있지.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 아들이 어머니를 사랑하는 마음, 친구가 친구를 사랑하는 마음.
불현듯 이젠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이야기가 리카도르의 머릿속을 스쳤다.
-당장 아빠라고 불러주진 않아도 된단다. 그저 친구 정도로만 여겨 주렴.
한때 리카도르의 첫 친구였던 새아빠가 했던 말.
‘소중해지는 건 위험하지.’
그런데 아무래도 슈페나와의 일상에 길들여진 것만 같았다.
슈페나가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이라던 리헨테온의 갑작스러운 한 마디에도 부정하지 못했으니까.
리카도르는 습관적으로 최악을 을가정했다.
그때처럼 잃어버리면 어떤 감정이 들까. 슈페나가 그에게서 없어 진다면.
“다신, 죽어도 그 꼴은 못 봐.”
리카도르의 푸른 눈이 짙게 침잠했다.
특유의 청량감이 감도는 미성에는 요요한 울림이 대신 자리를 잡았다.
‘그 계약, 분명 영혼까지 묶일 만큼 강력했지.’
피치 못할 사정으로 떨어지게 된다고 하더라도, 탈리테를 흘려보냄으로써 상태를 파악할 수 있을 만큼.
그 연결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기에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누가 말을 해주지 않았음에도 계약의 실체에 대해 알아서 파악해 가고 있는 리카도르였다.
그렇지만….
‘슈페나가 자의로 날 떠나려 한다면…?’
막을 권리는 있는 걸까.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리리엘라의 생일 때 가족이라는 단어에 슈페나가 보였던 머뭇거림도.
르쉐에 갔을 때 혼자 독단적으로 무언가를 숨겼던 모습도.
왜인지 모르게 불안했다.
훨훨 나는 새답게 흔적도 없이 사라질까 봐.
“그럴 생각이 못 들게 만들면 그만 아닌가.”
리카도르가 느른히 중얼거렸다.
그러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각.
“내일 시간 돼, 부인?”
리카도르는 곧장 슈페나에게 직진했다.
데이트 신청이었다.
“도련님이랑 내일도 수련하기로 했는데.”
“걔도 괜찮다고 할 거야.”
물론 동생 정신교육은 사전에 미리 다 시켜놓은 참이었다.
“싫어?”
리카도르가 고이 눈을 휘어 어여 쁜 미소를 만들어내었다.
결 좋은 하얀 머리칼이 바람에 명화처럼 한들거리고 초저녁의 달빛이 눈부시게 그를 감쌌다.
그 간질거리는 웃음은 더욱 진해졌다.
이런 미소를 지을 때, 슈페나가 흠칫 동요한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69화
‘웃는 거 진짜 예쁘네.’
그리고 그 리카도르의 미소는 곧바로 먹혔다.
슈페나가 슬그머니 입술을 달싹였다.
“뭐 할 건데?”
“안 정했는데? 하고 싶은 거 있어, 부인?”
그에 리카도르가 고개를 젓곤 슈페나의 의중을 물어보았다.
그녀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은근슬쩍 리카도르와 눈을 맞추곤 잠재적인 긍정 의사를 밝혔다.
“벚꽃 졌을까?”
“거의?”
그리 답하던 리카도르는 돌연 두루뭉술하게 말을 바꾸었다.
“아니다. 잘하면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있을 거야.”
이미 봄이 어느 정도 지나간 때라서 없을 것 같은데.
뭔가 단언하는 듯한 리카도르의 모습이 의아했으나, 슈페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자.”
“아, 카누스 데려가는 거 금지.
둘이서만 가는 거야, 부인.”
그에 리카도르는 단단히 못을 박았다.
‘답지 않은 말을 하네.’
슈페나가 짐짓 장난스럽게 눈가를 찡긋거리며 리카도르를 놀렸다.
“내가 요즘 도련님이랑만 놀아줘서 서운했구나?”
“응.”
그리고 돌아온 건, 칼 같은 긍정이었다.
당황한 슈페나가 도르륵 눈알을 굴리며 반문했다.
“응?”
“서운했다고, 아주 많이.”
리카도르가 슬며시 슈페나의 옷소매를 끌며 시선을 아래로 내리 깔았다.
정말 속상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 기다란 속눈썹 아래 감추어진 푸른 눈망울은 보는 이에게 죄책감을 심어줄 만큼 청초하게 빛나고 있었다.
“야, 어…… 음… 미안?”
슈페나가 뭐에 홀린 듯이 사과했다.
미인계에 당해버린 것이었다.
그녀는 손으로 턱을 쓸며 진지하게 상황을 분석했다.
‘하긴 친한 친구가 다른 사람이랑 갑자기 룰루랄라하면 좀 속상하긴하지.’
리카도르는 아마 로판 남주라서인지 좀 독점욕이 있는 타입인 것 같았다.
사실 얘 나 좋아하나?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물어봤다가 또 저번처럼 미적지근한 반응이 올까 저어되었다.
아니라고 하면 좀 쪽팔리잖아.
‘아, 원래 로판 남주가 누구 좋아하면 질투하는 게 국룰이긴 한데.’
일단은 까짓 거 놀아주지.
심플하게 마음을 먹은 그녀가 리카도르와 짝, 하이파이브를 했다.
그랬더니 그는 그대로 슈페나의 손에 깍지를 끼곤 자연스레 스킨 십을 했다.
“가자. 내일 하루 종일 밖에 돌아다니려면 얼른 자야지.”
슈페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하지만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말투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도 얼떨결에 정원을 가로질러 리카도르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자자.”
어쩌다 보니 리카도르의 진두지 휘로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드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슈페나는 리카도르가 덮어준 이불을 턱 끝까지 올리곤 힐끔 곁눈질했다.
불이 다 꺼진 방.
희미하게 옆 사람만을 알아챌 수 있는 어둠.
슈페나의 망막에는 예쁘게 누워 있는 리카도르의 옆모습이 맺혔다.
‘코가 진짜 예쁘네.’
그녀는 저도 모르게 그 천사 같은 얼굴을 보고 감탄했다.
리카도르의 눈가가 움찔대었다.
슈페나는 황급히 몸을 반대로 돌리며 이불을 뭉개었다.
잠이 잘 오지 않았다.
그때, 살짝 잠기운에 젖은 느른한 리카도르의 미성이 들려왔다.
“꼼지락거리지 말고 자.”
리카도르는 뒤척거리지 말라는 듯 슈페나의 손에 자신의 것을 느슨히 포개었다.
“일찍 자야 내일 안 피곤하지, 부인.”
뒤에 이어진 말은 잘 들리지도 않았다.
침대 한가운데에 길쭉한 인형으로 그어진 선, 그동안 넘어온 적없었던 선이 허물어져서.
놀라서.
그 당혹스러움도 잠시, 따스한 타인의 온기가 점차 슈페나에게 스며들었다.
잠이 들 듯 들지 않는 밤이었다.
***
그다음 날.
슈페나는 리카도르와 예정대로 바깥 외출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우와, 진짜 벚꽃이야!”
다 져버렸을 줄 알았던 벚꽃은 구불구불한 산책로에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얇고 보드라운 분홍빛 꽃잎이 주변을 하늘하늘 수놓았다.
슈페나는 그런 벚꽃잎을 잡으려 손바닥을 쫙 편 채, 허공을 휘저었다.
“말했잖아. 있을 것 같다고.”
방방 뛰는 슈페나를 자연스레 제안쪽으로 오게 만든 리카도르는 피식 웃음 지었다.
그러고는 생각했다.
벚꽃이 다시 피게 만들기를 잘한 것 같다고, 뭐, 별 건 아니었다.
재생 이능을 가진 새끼 뱀에게 부탁했을 뿐.
그 대가로 카누스가 여러 가지를 요구해서 좀 귀찮기는 했지만, 어찌 되었건 좋아하는 슈페나의 얼굴을 보니, 리카도르도 내심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상황의 전말을 모르는 그녀는 천진하게 제안했다.
“우리 심심한데 내기하자!”
“무슨 내기?”
“음, 저기 저 가게 앞까지 먼저 뛰어갔다가 오는 사람이 이기는 내기!”
슈페나가 쭈욱 손가락을 뻗어 길목 끝에 있는 디저트 가게를 지목했다.
그리곤 리카도르가 뭐라 이야기할 틈도 없이 스타트를 끊었다.
“자, 시작!”
어쩔 수 없이 그는 슬금슬금 뛰기 시작했다.
그렇게 리카도르가 길목의 반쯤 도달했을 때, 달리는 시늉만 하던 슈페나는 해맑게 손을 흔들었다.
리카도르, 나는 딸기생크림와플로 부탁해! 아, 바닐라 젤라또도 하나만!”
그녀의 입가엔 씨익 올라간 곡선이 서렸다.
‘좋은 부려먹기였다.’
애초부터 그릴 작정이었으니까.
리카도르는 별수 없이 슈페나의 주문을 받아 디저트를 사 왔다.
미리 봐둔 벤치에 앉은 그녀는 앉으라는 듯 팡팡 바닥을 두드렸다.
리카도르가 슈페나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아, 누가 사준 건지 완전 맛있네.”
슈페나는 리카도르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포장을 풀며 립서비스 했다.
그러고는 와플을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사르르 녹는 생크림과 상큼하게 씹히는 딸기의 조화.
가히 환상적인 맛이었다.
그리 무아지경의 경지로 먹방을 찍고 난 후, 제 몫의 와플을 해치운 슈페나는 그제야 리카도르를 쳐다보았다.
와구와구, 잘 먹는 그녀와 달리 그는 반도 다 먹지 못한 모습이었다.
“뭐야, 거의 입도 안 댔네?”
“달아서.”
의아함이 담긴 그녀의 목소리에 리카도르는 담담히 대꾸했다.
아. 맞다.
단 거 엄청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
‘그럼 좀 덜 달콤한 걸로 사오지.
다 시럽 폭탄이네.’
리카도르의 손에 들려있는 건 블루베리 생크림와플이 아니던가.
슈페나가 두 번째로 좋아하는.
‘음식 남기면 벌 받지.’
그녀는 아마도 어쩔 수 없이 리카도르 몫의 디저트까지 가져갔다.
“그럼 내가 대신 먹는다, 괜찮지?”
딱 적당한 양이네.
다시 슈페나가 오물오물 토끼처럼 여기저기 생크림을 입가에 묻히며 먹고 있던 순간.
리카도르가 품 안에서 다갈색 손수건을 꺼내 그녀에게 쥐여주었다.
“여기.”
그러더니 제 오른쪽 볼을 톡톡가리켰다.
멀뚱멀뚱 지켜보던 슈페나가 느릿하게 왼쪽 볼을 손수건으로 문질렀다.
“요기?”
엉뚱한 곳만 짚어내는 행동에 보다 못한 리카도르가 직접 닦아주었다.
슈페나는 리카도르를 팔꿈치로 쿡 찌르곤 일견 단호하게 못을 박았다.
“그거랑 같이 생각해봐. 무리한건 안 들어줄 거야.”
언뜻 새침하기까지 한 어투에 리카도르가 손등으로 제 입가를 가렸다.
소원으로 얘기해둘 건 이미 생각해 놓은 상태였다.
슈페나의 성격상 싫어하지 못할만한, 그렇지만 자신의 곁에 머물러 있게 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방법의.
리카도르의 눈빛이 안개 속에 갇힌 듯 오묘해졌다.
“아니, 뭐 들어줄 수 있는 선에선 최대한 노력해보겠다는 거지.”
그 표정에 지레 찔린 그녀가 어물쩍어물쩍 항변했다.
그때, 시원한 물방울이 슈페나의 콧등에 내려앉았다.
슈페나는 손을 쭉 앞으로 내밀었다.
활짝 펴진 손바닥에 가느다란 물기가 어렸다.
“어? 비 온다.”
그 말과 함께 보슬비가 내렸다.
얼른 먹었던 걸 정리한 슈페나는 리카도르의 팔을 잡고 뛰었다.
비를 피할 수 있는 나무 그늘 아래로.
물이 묻은 하얀 원피스 자락을 툭툭 털어냈다.
슈페나는 단숨에 흐려진 하늘을 올려다보며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벚꽃, 다 지겠네.”
“봄이 오면 다시 피어날 거야.”
리카도르가 고요하고도 잔잔한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며 슈로 을 돌
그러며 슈페나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심심한데 또, 내기할까, 부인?”
“어떤 거?”
“진 사람이 10초간 비 맞고 오기.”
리카도르는 슈페나가 생각할 새도 없이 가위바위보를 했다.
아직 상황 파악을 못 한 슈페나는 계속 주먹을 쥐고 있었고, 리카도르는 얄밉게도 손바닥을 펼쳤다.
“뭐 해? 안 나가고.”
그가 까딱 고갯짓했다.
씨이, 입술을 삐쭉 내민 슈페나는 터벅터벅 앞으로 걸어 나가 숫자를 세었다.
뭉친 앞머리를 옆으로 넘긴 슈페나는 리카도르를 흘기며 호승심을 불태웠다.
“야, 다시 해.”
리카도르가 못 이긴 척 져주었다.
신이 난 슈페나는 뻔뻔하게 기간을 늘렸다.
“뭐 해? 20초 세고 와.”
“10초였잖아.”
“몰라, 몰라. 이제 20초야.”
이윽고 서로 사이좋게 비를 맞게 되었을 때.
둘 사이에는 시원한 웃음만이 가득 찼다.
슈페나의 어깨가 기분 좋게 들썩였다.
“리카도르, 너 머리 봐.”
“부인도 만만치 않은데?”
리카도르가 결 좋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찬찬히 슈페나를 눈에 담았다.
서로 홀딱 젖어 엉망이 된 모양새였다.
마음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그 어떤 이야기를 꺼내도 괜찮을 만큼 부드러운 분위기 속.
리카도르의 목울대가 일렁였다.
그의 입술이 달싹여지려는 순간, 먼저 선수를 친 건 슈페나였다.
“근데 그 상처, 어쩌다가 생긴 거야?”
비 덕분에 벌어진 셔츠 틈새로 보이는 제법 깊은 흉터.
슈페나의 시선은 그것에 고정되어있었다.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70화
그 물음을 들은 리카도르의 푸른 눈동자에 동요가 일었다.
슈페나에게도 털어놓을 생각이었지만, 막상 먼저 물어보니 조금 망설여져서.
그는 한 차례 숨을 내쉬고는 담담한 음성으로 이야기했다.
“발톱이 박혔었어.”
“…. 발톱?”
뭔가 깊이 팬 흔적 같긴 했는데.
발톱이라는 단어의 뉘앙스가 조금 섬뜩해서인지 슈페나는 괜스레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는 사이, 리카도르의 말은 계속되었다.
“누님한테 대충 들었지? 생일 때, 새아빠가 죽었다는 거.”
그제야 슈페나는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도련님과 말했을 때 추측했던 내용과 연관이 있을 것 같다고.
‘그러면 너무 개인사 아닌가?’
이런 거 털어놓으면 꼭 플래그꽂던데.
내가 그걸 들을 자격이 있는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다.
슈페나는 괜히 눈을 깜빡거리며 고개를 떨구었다.
“응. 말하기 힘든 거면 그냥-
“새아빠가 낸 상처야.”
그러나 들려오는 충격적인 한마디에 다시 슈페나의 고개가 들렸다.
“뭐?”
슈페나의 눈에 들어찬 리카도르는 모든 걸 놓아버린 사람처럼 씁쓸하게 보였다.
“흑표범한테 조종당해서 나와 다른 가족들을 공격했었어.”
“어떻게 그런.…….”
소설 속에서도 분명 사자와 표범간의 사이는 안 좋았었다.
그렇지만 이렇게까지 악랄한 짓을 하다니.
리카도르도 정말 아팠겠지.
어렸을 때일 텐데.
슈페나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리카도르는 저도 모르게 쌉싸름하게 자조적인 비소를 지었다.
이게 이야기의 끝은 아니었으니까.
“어머니는 그런 새아빠를 단칼에 베어버렸지. 낳아주신 아버지도 흑표범과의 전쟁에서 돌아가셨거든.
그래서 그 상황이 끔찍했나 봐.”
그것이 체드윅 가를 둘러싼 비극의 전말이었다.
“어머니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겠지.”
리카도르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슈페나에게 부담을 주고 싶진 않았다.
그저 가문의 일원인 만큼 언젠가는 알아야 할 것 같아 말했을 따름이었으니.
그래서 리카도르는 일견 산뜻하기까지 한 어조로 끝맺음을 했다.
“그냥 그런 일이 있었어.”
“….…미안”
슈페나는 리카도르의 손에 제 것을 얽으며 사과했다.
누군가의 온기가 닿으면 조금 더 위로되지 않을까 싶어서.
그러자 리카도르가 닿은 손마디에 더욱 단단하게 힘을 주며 말했다.
“고마워, 부인.”
“어? 뭐가?”
“새아빠는 좋은 분이었고 내게 첫 친구가 되어주셨었지.”
이 일을 통해 하고픈 얘기는 딱 하나였다.
“그래서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게 참 싫었는데..….”
슈페나, 네가 소중해졌다고.
“너랑은 아닌 것 같네, 슈페나 체드윅.”
어느새 리카도르의 낯엔 주룩주룩 흐르던 어둠이 걷히고 청명한 웃음이 걸려있었다.
“비가 그쳤어.”
슈페나의 속삭임이 그 둘의 사이를 갈랐다.
보슬보슬 내리던 비가 멎고 구름속 감추어졌던 햇살이 은은히 내리쬐었다.
슈페나는 괜스레 큼큼, 목을 가다듬고는 화답하듯 진심을 전했다.
“…나야말로 고마워, 리카도 르.”
생각해보면 리카도르에게 고마운 점이 참으로 많았다.
행복도, 감동도, 즐거움도.
리카도르와 함께였을 때 차츰 알아가게 되었고.
“내 생일을 만들어준 것도, 해마다 축하해주겠다고 한 것도, 말안 해도 늘 한 발짝 다가와 도와주는 것도.”
슈페나의 말끝이 사뭇 먹먹해졌다.
“나한텐 네가 처음이었어.”
왜인지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그녀는 조금 물기 어린 목소리로 자신의 가장 밑바닥을 고백했다.
“사실, 나 되게 속물적인 수인일지도 몰라.”
원래 리카도르와 친분을 쌓으려고 했던 목적은 따로 있지 않았던가.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처음에 너한테 친구 하자고 했을 때, 순수한 의도만 있었던 건 아니었거든.”
“그럼?”
“뭐, 네가 소가주고 힘도 세고 그러니까 콩고물 좀 떨어지나 했었지.”
슈페나는 후우,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마저 덧붙였다.
“근데 점점 널 알아갈수록 그런 감정이 사라지더라. 그냥 너라는 사람 자체가 되게 좋은 것 같아.”
바로 이 진심을 전하고 싶었다.
그냥 리카도르, 너 자체가 좋다고,슈페나가 부끄러움에 발끝으로 땅바닥을 쓸고는 멋쩍게 탁탁 손뼉을 쳤다.
“아마도 결론은, 나랑 친하게 지내줘서 고맙다고.”
그런 말을 하는 슈페나의 하얀 볼에는 발그레한 홍조가 올라왔다.
슈페나가 손부채질을 하며 로봇처럼 어색하게 다리를 움직였다.
“아, 덥다. 이제 가자.”
손과 발이 동시에 나가는 행동에 리카도르는 픽 실소했다.
그리고는 민첩하게 슈페나의 옆에 따라붙어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갑자기 걸음이 빨라졌네, 부인?”
“그냥 모른 척해!”
아, 씨. 창피해.
슈페나는 양옆으로 팔을 휘저으며 더욱 속력을 높였다.
구두끈이 풀리는 것도 모르고.
그러는 순간, 리카도르가 그녀를 멈춰 세웠다.
“잠깐만.”
“왜?”
“끈 풀렸는데.”
리카도르는 주저 없이 비가 내려질척질척한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면서 어느 순간 풀려버린 슈페나의 구두끈을 손에 쥐었다.
“이렇게 풀린 신발끈, 네가 꼬부랑 할머니가 될 때까지 묶어줄게.”
투박하지만 애정이 듬뿍 담긴 손길이 지나가고, 조금은 엉성한 리본이 만들어졌다.
리카도르는 고개를 들어 슈페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니까 너는 오늘처럼 나랑 같은 길을 걷기만 해, 슈페나.”
그러곤 아껴두었던 소원권을 사용했다.
“그게 내 소원이야.”
그에 그녀가 멍하니 리카도르를 내려다보았다.
물기 때문에 살짝 곱슬거리는 하얀 머리칼, 우주가 들어찬 것처럼 청명하게 이채를 발하는 푸른 눈동자.
어쩐지 그 모습을 보기 힘들어 슈페나는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
심장이 너무 빨리 뛰는 것 같아서, 무서워서.
그녀가 흡, 홉 짧게 호흡했다.
“괜찮아?”
순식간에 창백해진 안색에 리카도르가 슈페나의 양어깨를 부드러이 움켜쥐었다.
그렇게 있기를 10여 분째.
“어, 이제 괜찮아.”
슈페나는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찌뿌둥했는지 뼈에서 뚝 소리가 나며 아우성이었다.
그녀가 힐끔 리카도르를 쳐다보았다.
아까 머릿속을 뒤덮었던 이상한 감정은 이제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다.
‘뭐지?’
슈페나가 입술을 오므리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금 진정이 된 듯한 상태에 리카도르는 아까 그녀가 했던 말과 비슷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나도 속물적이었어.”
슈페나가 쳐다보자, 그는 제 오른손을 펼쳐 내밀었다.
슈페나와의 계약이 담긴 증표.
그 검은 문양이 그녀에게도 보였다.
저번 가을 순회 이후에 정신을 차렸을 때는 경황이 없어서 다 말하지 못했으니까.
기억을 전혀 하지 못하는 듯해 기다려볼까 고민도 했으나, 일단 알려주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리카도르는 진지한 눈빛으로 슈페나를 직시했다.
“이거, 뭔지 알 것 같아?”
“음?”
손바닥으로 뭘 알겠냐는 거야?
중앙에 약간 커다랗고 동글동글한 점이 있긴 했지만,
‘뭔가 생긴 게 익숙한데.’
그러한 기시감이 들 무렵, 리카도르는 고개를 푹 숙이더니 못내 미간을 찌푸렸다.
슈페나에게 증표를 보이니 불현듯 머리가 빠개질 것만 같이 아파와서.
‘뭐지?’
슈페나한테 계약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
묘하게 찝찝한 느낌이 엄습했다.
그는 황급히 슈페나에게 펼쳐 보여주었던 손을 거두었다.
“리카도르, 왜 그래?”
슈페나가 물끄러미 리카도르의 안색을 살폈다.
때마침, 호위기사들이 다다다 달려왔다.
“소가주님, 작은 마님! 얼른 저택으로 돌아가셔야 할 듯합니다!”
응?
뭔가 심각한 일이라도 생긴 건가?
슈페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리카도르에게 눈짓했다.
조금 진정이 된 것 같은 리카도 르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 이곤 기사들을 향해 물었다.
“무슨 일이지?”
“그게, 이곳에서는 말씀드리기가 애매한 사항이라……. 가주님 호출입니다.”
호위기사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그들은 얼떨떨하게 저택으로 돌아왔다.
***
한편, 평소와 달리 긴장감이 서린 칸의 집무실.
“선전포고라………. 귀여운 짓거리를 하는군.”
그녀는 책상에 놓인 빽빽한 서류를 찢어발길 기세로 노려보며 뇌까렸다.
그러던 중, 똑똑 노크소리와 함께 슈페나와 리카도르가 들어왔다.
칸은 일그러진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표정 관리를 했다.
그러고는 따스하게 며늘아가를 맞았다.
“아, 왔구나. 아가.”
리카도르가 기민한 눈치로 못마땅했던 칸의 속내를 알아챘다.
“큰일이라도 난 겁니까?”
“어느 정도는.”
칸은 쯧쯧, 혀를 차며 반쯤 긍정했다.
이내, 그녀가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구기듯 들고는 손님들을 응대하는 티테이블 옆 의자에 걸터앉았다.
슈페나와 리카도르도 잽싸게 어머님의 맞은편에 착석했다.
칸이 문제의 그 서류를 보여주었다.
“선전포고문이 도착했단다. 여러 가문에서.”
슈페나의 눈이 서류 속 활자를 따라 바쁘게 굴러갔다.
여우, 늑대, 사슴 등의 동물들이 사자 가문에 전쟁을 선포한다는, 제법 심각한 내용..
어머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도련님한테 쓸렸던 여우들이 작정하고 타 종족을 끌어들였다지.
아무래도 날이 갈수록 더 강해지는 사자를 견제하기 위함인 것 같았다.
본디 수인끼리 땅따먹기하며 싸우던 혼란스러운 세계관이 아니었던가.
‘원작 속 전쟁이 이 전투인 건가?’
사슴 수인들도 있는 걸 보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그때에도 비슷한 사유로 전쟁이 터지지 않았던가.
그렇지만 아직 이럴 타이밍이 아니었다.
원작 속 슈페나의 나이로 어림잡으면 거의 6개월 정도 남은 사건이었는걸.
슈페나는 선전포고문에 쓰인 여러 명분 중 하나를 주목했다.
사자가 독수리 가문을 핍박해 땅을 뜯어내고 멸문시켰다는 것.
‘아, 그 운하 때문인가?’
원작에서는 운하를 빌리는 형식이었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독수리 가문을 발아래에 꿇리고 아예 가져갔으니까.
중요한 곳이라 들은 만큼 다들 경각심을 느꼈을 터.
그러한 이유로 더 빠르게 앞당겨진 걸지도 몰랐다.
확실하진 않았지만.
맹렬히 머리를 굴리고 있을 무렵, 칸은 차분히 슈페나를 안심시켰다.
“걱정할 건 없단다, 며늘아가. 잔챙이들뿐이라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테니.”
칸이 슬그머니 슈페나에게 시선을 고정하곤 포근하게 덧붙였다.
“독수리들도 신경 쓰지 말렴.”
선전포고문에 독수리 가문도 참전한다고 나와 있었으니까.
물론 독수리 종족 전체가 아닌, 어머님한테 혼쭐났던 호적상 아버지와 언니오빠들만 반기를 든 거지만,
‘그런데 원작에선 독수리 가문은 전쟁에 안 끼어들었을 텐데.’
소설과 달리 독수리 가문을 불태우고 남주의 신부가 되어서 이렇게 틀어진 걸까.
뭐, 고작 독수리 하나 더해진다고 해서 문제가 생기겠어?
슈페나는 산뜻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남보다도 못한 존재였는데 미련이 있을 리가.
“전 괜찮아요, 어머님.”
리카도르가 덤덤한 기색의 슈페나를 곁눈질하더니 칸에게 말을 건넸다.
“어떻게 하시려고요?”
“리온을 부사령관으로 임명할 계획이란다. 리리엘라에게는 후방 지원 임무를 맡길 거고.”
어머님은 느른히 팔짱을 끼면서 씨익 입매를 끌어올렸다.
“너도 귀찮겠지만 사령관으로서 수고 좀 해줘야겠다, 아들.”
슈페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모두 바빠지겠구나.
‘설마 다치는 일은 없겠지?’
원작에서도 별다른 일 없이 승전보를 울렸잖아.
괜찮을 거였다.
다만, 바삐 움직이는 이들과 달리 자신에게만 아무 임무도 주어지지 않은 듯해서 조금 시무룩해졌다.
‘이리 다들 노력하는데 나만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지.’
슈페나가 비장하게 두 주먹을 꽉말아 쥐고는 각오를 다졌다.
“저도 도울게요. 어머님.”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71화
호기로운 슈페나의 한마디에 어머님은 자애롭게 웃으며 칭찬했다.
“장하구나. 어떤 도움일지 기대해 봐야겠군.”
그간 보여준 공로들이 있어서인가, 칸의 눈에는 언뜻 이채가 서렸다.
슈페나가 손을 번쩍 들고는 제일 중요한 걸 물어보았다.
“그럼 리카도르는 언제 떠나는 거예요, 어머님?”
흐음, 잠시 고민하던 칸은 이내 손가락을 접어가면서 날짜를 세었다.
“최대한 빠르게 준비를 할 예정이니, 한 3일 후에 가야겠지.”
그렇게나 빨리?
슈페나의 눈썹이 시무룩하게 축 늘어졌다.
‘더 가까워졌다고 느껴질 때, 바로 멀어지게 됐네.’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 기색을 눈치챈 리카도르가 믿음직스레 맹세했다.
“금방 돌아올게, 부인.”
“응. 금방 돌아와, 리카도르.”
슈페나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가기 전에 뭐라도 해주고 싶은데…….’
손수건이라도 만들어서 줘야 하나.
보통 그러는 게 일반적이잖아.
소중한 친구를 위해 바느질 정도는 도전해볼 수 있지.
그리 마음먹은 슈페나는 방을 나서자마자 제인에게 바느질에 필요한 것들을 가져오라 명했다.
물론 리카도르 몰래.
그리고는 대충 핑계를 대곤 자신의 집무실에서 열심히 자수를 놓았다.
“앗, 따가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역시 가사노동은 어려워.
날카로운 바늘에 벌써 몇 방 찔려서인지 손끝에는 자잘한 상처가 가득했다.
새로 샤워를 하고 갈아입은 뽀송뽀송한 원피스에 동그랗게 맺힌 피가 쪼륵 흘러 묻었다.
“아, 이거 새 옷인데!”
저도 모르게 짜증을 낸 슈페나는 털썩 손수건을 내려놓았다.
그러다가 입술을 댓 발 내민 채, 생각에 잠겼다.
‘원작 속 배경이 되는 전쟁일 테니 제법 오래 걸리겠지.’
적어도 모든 등장인물이 성인이 될 때까지는.
혹시나 그동안 리카도르가 다치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하지.
리리엘라 언니나 도련님도 걱정되는데.
솔직히 소설에선 남주가 승전보를 울리고 여주를 사로잡아왔다는 짤막한 서술밖에 안 나왔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과정에서 리카도르가 어떤 고통을 겪었을지, 다른 이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그런 건 잘 모르겠단 말이야.
‘특히나 도련님은 비중이 정말 아예 없었는데.’
“에이, 도련님 강해 보이던데.”
슈페나는 애써 긍정회로를 돌렸다.
전투력 만렙인 사자들이 패할 리 없었다.
그러니 도련님도 무사할 거고, 여러 수인 종족들이 힘을 합친것 같았다만, 쪽수로는 이쪽도 만만치 않았으니까.
‘그리고.… 여주가 등장하는 건 소설이랑 똑같겠지.’
이내, 상념은 원작 여주에 관한 내용으로 넘어갔다.
본디 여주는 전쟁에서 패해 포로로 잡혀 오지 않았던가.
여주는 사슴들의 후계자라서 사슴 종족이 참전하기만 한다면 결국 이곳에 끌려올 수밖에 없었다.
슈페나는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턱을 괴며 고민했다.
‘아무튼 내가 할 수 있는 거, 그게 뭘까.’
영지관리 돕기, 로네악 꽃 치료제많이 만들어두기, 내부가 흔들리지 않도록 여론 관리하기.
이런 게 제일 먼저 떠올랐다.
‘중요한 일이긴 한데, 더 직접적으로 도움이 될 수는 없으려나.’
갑작스레 닥친 일에 머리가 바보처럼 굳어버린 것만 같았다.
“일단 이거나 예쁘게 만들어야겠다.”
슈페나는 방치해두었던 손수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다시 씨름하기 시작했다.
노동이라도 하면 좋은 생각이 떠오르겠지.
그렇게 무아지경의 경지에 이르러 바느질 머신이 될 뻔한 찰나, 똑똑 노크 소리가 울렸다.
“뭐 하고 계십니까, 형수님?”
그 소리의 주인은 리헨테온이었다.
슈페나가 잽싸게 손수건을 등 뒤로 감추며 대충 둘러대었다.
“아, 그냥 잠시 취미활동을…….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세요?”
“어머니께서 오늘 저녁은 기분 전환도 할 겸 정원에서 들자고 하셔서요.”
생각보다 의외인 답변에 슈페나가 아아, 침음성을 흘리며 수긍했다.
남은 기간은 알차게 보내야겠지.
바느질도 틈틈이 해서 손수건도 완성하고.
리헨테온은 그리 멍을 때리던 슈페나를 정중하게 에스코트했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도련님, 잠깐만요!”
그녀는 잠깐 리헨테온을 멈춰 세우더니 집무실 책상에서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슈페나가 꺼낸 건 다름 아닌, 작은 유리병이었다.
샘플로 미리 가지고 있던 것이었지.
“로네악 꽃 치료제를 소분해놓은 거라 휴대하기 편할 거예요!”
“감사합니다. 근데왜 이런걸….”
리헨테온은 넙죽 받아들고는 얼떨떨한 눈망울로 목덜미를 긁적였다.
슈페나는 그 순박한 낯의 도련님을 보며 절로 울상을 지었다.
‘그래도 불안하네.’
도련님이 괜히 다쳐서 올까 봐.
그간 같이 폭포에서 수련하며 정도 많이 든 상태였으니..
그녀가 애써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우리 같이 수련한 동료잖아요.
동지애 정도로 하죠.”
“형님 속 뒤집어놓기 딱 좋아 보여서 마음에 듭니다. 동료.”
슈페나의 동료 선언에 리헨테온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만족스레 주억거렸다.
슈페나도 황당하다는 듯 실소했다.
도련님 머릿속엔 형한테 엿 먹일 생각밖에 없나 싶어서.
‘가족이라서 그런가. 그래도 그만큼 도련님이 리카도르를 생각하고 있다는 방증이 아닐까.’
여태 저택 밖을 전전했던 것처럼.
리카도르의 말을 듣고 보니 이 집 식구들이 저택에 발을 못 붙인 이유가 짐작되었다.
흑표범을 잡기 위해서.
표범은 설표, 흑표 등 여러 종류로 나뉘어있다고 들었다.
특히 흑표범 쪽이 사자와 사이가 가장 안 좋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게다가 단독으로 생활하는 동물이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자신의 영역이 아닌 곳에도 나타난다.
지.
‘그래서 다들 이 전쟁에 군말 없이 참여하는 게 아닐까.’
퍽 많은 수인 종족이 참여한 전쟁인 만큼, 표범도 관심을 기울일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러다 흑표범도 독단적으로 싸움에 끼어들지 모르는 일이었고.
‘사자들의 라이벌 종족인 만큼 이전쟁에 어떻게든 관련되어있을 확률이 크단 말이지.’
슈페나는 조금 진중해진 목소리로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그런데 조금은 쉬어가도 될 것 같아요, 도련님.”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뜬금없는 조언에 리헨테온은 반듯한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슈페나는 리헨테온의 속내를 다 들여다본 것처럼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말했다.
“오늘 리카도르한테 다 얘기 들었거든요. 흑표범들이 되게 나쁜 수인이더라구요. 그렇지만…”
슈페나가 시선을 내리깔고 말끝을 흐리다 마저 이야기했다.
“다치지 말고, 위험한 짓도 하지 말고, 본인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세요. 저도 도울 수 있는 건다 해볼게요.”
그런 우려가 섞인 따스한 말씨에 리헨테온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이번에야말로 흑표범들을 끌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감정도 있었으니.
리헨테온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슈페나를 응시하며 이내 안타깝다는 듯 탄식했다.
“형수님은 성격도 좋으시고 참 괜찮으신 분인데 왜 우리 형 같은 걸 만나서 ….….”
그때, 못 미더운 리헨테온을 뒤따라온 리카도르가 타이밍 좋게 등장했다.
“만나서, 뭐?”
“혀, 형님?”
리카도르는 괘씸한 만큼 힘을 담아 제 동생의 발을 지그시 밟았다.
“악!”
리헨테온이 꼬리에 불붙은 생쥐처럼 펄쩍 뛰어올랐다.
리카도르가 피식 한쪽 입꼬리만 비틀더니 슈페나를 잡아끌었다.
“가자, 부인.”
슈페나는 이 안타까운 상황에 그저 조의를 표했다.
어쨌건 그들은 사이좋게 정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싱그러운 정원은 어울리지 않게 고소하고 기름진 음식 냄새로 가득 찼다.
꼭 캠핑 온 것처럼 가운데에 모닥불을 피워놓은 풍경 속, 어머님이 직접 여러 식재료가 꽂힌 꼬치를 구웠다.
평소에는 잘 볼 수 없는 광경.
옆에서 음식을 기다리던 카누스가 종알종알 노래를 불렀다.
-바비큐 좋아! 최고로 좋아!
“나도 좋아.”
리리엘라도 헤벌쭉 사신미소를 지으며 군침을 흘렸다.
그러다 슈페나의 기척을 눈치챘는지 해맑게 손짓했다.
“이리 와서 앉아, 슈페나!”
“네. 제가 도와드릴까요?”
슈페나는 착 리리엘라의 옆에 달라붙어 앉아 애교스레 물었다.
“아니이….”
리리엘라의 볼에 불그스름한 홍조가 올랐다.
꽁냥거리는 그 둘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칸이 입을 떼었다.
“어서 먹으려무나. 며늘아가, 그리고 리리엘라.”
“넹!”
“네, 어머니.”
둘은 발랄하게 대답했다.
그러는 사이, 리카도르는 슈페나의 곁에 은근슬쩍 자리를 잡았다.
리헨테온도 쭈굴쭈굴 형의 눈치를 보며 반대편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 모습을 본 칸은 피식 웃으며 추억에 잠긴 듯 읊조렸다.
“아주 어렸을 땐, 가족끼리 이리 정원에 나와 도란도란 식사를 하며 불꽃놀이를 즐기곤 했지.”
리헨테온이 싹싹하게 맞장구쳤다.
“그때가 참 좋았습니다, 어머니.”
“기억은 나니? 리헨테온, 넌 그때 이유식을 먹었잖니.”
소용은 없었지만,
안타까운 정적이 흘렀다.
리헨테온이 머쓱하게 힐끗 칸을 쳐다보며 호응했다.
“아… 그렇습니까?”
그러자 리카도르가 드물게 리헨테온의 편을 들어주었다.
“지금 기억하게 될 테니까 상관없죠.”
그러고는 슈페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이 추억에 그녀도 포함된다는 듯이.
슈페나의 밤색 눈동자가 잘게 일렁였다.
그녀는 괜히 접시에 얼굴을 묻을 기세로 음식만 흡입했다.
어느덧 식사시간이 끝나갈 무렵, 어머님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모두에게 무언가를 나누어주었다.
“폭죽이란다.”
그러곤 모닥불에 기다란 폭죽을 가져다 대었다.
타닥타닥, 기다랗고 뾰족한 붉은 불꽃이 사방에 만개한 꽃처럼 피어났다.
– 불꽃 조아아!
카누스가 분위기에 취한 건지 말꼬리를 늘이며 좋아했다.
리리엘라도 폭죽으로 허공에 그림을 그리며 슈페나에게 말을 건넸다.
“와아, 불꽃 예쁘다. 그렇지, 슈페나?”
“네, 언니. 너무 예뻐요.”
슈페나가 그런 그녀를 따라 똑같이 하트를 만들어내었다.
탁탁.
폭죽이 타들어 가는 소리가 정겹게 울려 퍼졌다.
포근한 밤의 힘을 빌려 조곤조곤 대화도 하고, 누구 불꽃이 더 빨리 타들어 가나 내기도 하고, 서로 뜀박질을 하며 아웅다웅하기도 하고.
슈페나는 또다시 폭죽을 손에 쥐곤 느릿하게 다른 이들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다들 웃고 있구나.
그리고….
‘나도 웃고 있었구나.’
슈페나는 깨달았다.
어느새 자신도 이 사람들 속에 녹아들었다는 사실을.
슈페나는 이 아름다운 풍경을 두 눈 가득 담아 마음에 새겼다.
지금 이 애틋한 일상이, 그 일상속 녹아든 따뜻한 진심이, 그 진심이 은은히 전해지는 이 순간이.
폭죽에서 터져 나오는 불꽃 같았다.
사그라들지 않고 본연의 휘황한 빛을 발하는 위대한 불꽃.
“이렇게 가족끼리 시간을 보내니까 좋다. 그렇지, 슈페나?”
슈페나가 감상에 젖어있는 사이, 따스한 리리엘라의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슈페나는 그 말을 곱씹었다.
가족끼리 보내는 시간.
그렇지만 이젠 보기 힘든 경치가 되겠지.
어쩐지 아주 많이 서글퍼졌다.
나중에라도 다시 한번 이렇게 다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그녀가 저도 모르게 입술을 달싹였다.
“우리…….”
그 작은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앞으로도 자주 이렇게 같이 밥도 먹고 얘기하고 웃으면서 놀아요.”
슈페나는 활짝 어여쁜 미소를 지으며 가족들과 찬찬히 눈을 맞추었다.
“가족이잖아요.”
가족.
세상에서 가장 기적적이고 평범한 단어.
비로소 슈페나에게도 가족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이 사람들을 지켜야겠어. 털끝하나라도 다치지 않도록.’
굳게 결심한 순간,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72화
소소한 일상이 지나가고 다음 날 아침.
슈페나는 방앗간에 쌀알을 숨겨 둔 참새처럼 뽀르르 제 집무실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드레스룸 안 깊숙이 숨겨두었던 가방을 하나 꺼내 들었다.
르쉐에서 발견한, 어느 것이든 무한정 넣을 수 있는 핸드백.
저택으로 돌아와 알아보니 가방자체에도 잠금 기능이 있었지만, 혹시 몰라 이리 보관해둔 것이었다.
슈페나는 가방 앞쪽에 달린 고리를 풀었다.
달칵, 소리와 함께 꾹꾹 욱여넣은 내용물이 와르르 쏟아졌다.
보석, 금화, 고서, 장신구, 씨앗등의 귀물들.
개중에는 쓸모 있는 것도 많을터.
르쉐에서의 여정 이후에는 바쁜 일도 많았고, 딱 필요한 물건만 꺼내는 바람에 자세히 살펴보지 않았었다.
‘애초에 내 것이 아니라 생각했으니.’
그러나 이젠 한번 봐야 할 것 같았다.
원작 여주고 나발이고 일단 소중한 가족들의 안위가 더 중요하지 않은가.
원래 원작을 지킬 생각은 딱히 크지도 않았고.
‘꾸금 피폐물이라 고생하는 여주여도 마지막엔 해피엔딩이니까 조금은 탐내도 괜찮겠지.’
응?
해피엔딩…이었나?
머릿속에 두둥, 물음표가 등판했다.
‘생각해보니까 완결까지 읽은 기억이 없네..….’
억…
슈페나의 죽음까진 또렷하게 생각나는데.
그 이후의 스토리는 암전이었다.
‘몰라. 일단 이 일에 집중하자!’
소설에서 비중을 많이 차지하지 않았으면서도 유용해 보이는 걸로만 적당히 솎아내면 되겠지.
슈페나는 큰 수술을 집도하는 의사처럼 비장하게 두 손을 활짝 펼쳤다.
그리곤 물건을 마구마구 헤집었다.
그러기를 한 시간.
“이건 수인이 할 짓이 아니야.”
슈페나는 소중한 금화를 던지려다 가까스로 움켜쥐며 울분을 토했다.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골라낼 수 있을까.
고민이 되었다.
그러다가 번뜩 좋지만 찝찝한 아이디어가 뇌리를 스쳤다.
‘그 정보상이라면 이 많은 물건의 쓰임새를 다 알고 있을지도……?’
계약서라는 족쇄를 채워두었다 .
해도, 섣불리 믿기에는 좀 의뭉스러운 수인이 아닌가.
조금 망설여졌다.
‘그래도 빠릿빠릿하게 지은 잘못을 사과하는 거 보면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정보상에게 물어보지 못했던 점들이 더 남아있었다.
특히 그 똑같은 회중시계.
‘사슴 수인인 걸 보면 원작 여주랑 관련이 있을 듯한데.’
보통 소설은 얽히고설켜 하나로 귀결되는 법.
생각의 추가 점점 기울었다.
정보상과 적절히 교류하면서 궁금증을 파헤치는 게 좋겠지.
당연히 경계심은 풀지 말고.
그리 결심한 슈페나는 곧장 제인을 시켜 정보상에게 편지했다.
그러곤 집무실 한구석에 놓인 손수건을 도로 집어 들었다.
‘이건 마무리해야지.’
그렇게 나름 괜찮은 결과물이 완성되고, 이별의 순간이 성큼 다가왔다.
출정하는 모든 사자들이 모인 정원 내 커다란 공터 안.
저택의 공기는 생각보다도 활기 찼다.
수인들의 왕이라 일컬어지는 사자라서인지 웃으면서 이기자는 느낌이랄까.
듣자 하니 출전하는 이들을 기쁘게 보내주는 것이 사자들의 전통이란다.
전장에서 맞이하는 영예로운 죽음도, 승리를 거머쥔 뒤 이어가는 삶도 모두 중요하기에.
체드윅 가 사람들은 일제히 모여 출정식 행렬을 준비했다.
슈페나가 애써 미소를 지은 채, 잽싸게 손수건을 건넸다.
그런 슈페나의 얼굴은 나무열매를 훔쳐 먹다 걸린 파랑새처럼 묘하게 일그러져있었다.
눈치를 살피는 것처럼.
‘내가 봐도 손수건 상태가 좀 구린데?’
이런 걱정이 담긴 눈빛이었다.
리카도르도 반신반의하며 받아들더니 짐짓 슈페나를 놀렸다.
“이건. 저주 인형 아니야, 부인?”
구석에 삐뚤빼뚤하게 리카도르의 얼굴이 새겨진 손수건.
어떤 무늬를 넣을까 고심하다 얼굴을 그린 거였다.
‘쳇, 나름 신경 써서 만들어준 작품인데 너무해.’
슈페나는 입술을 삐쭉 내밀고는 부정했다.
“아니거든!”
“이 구멍 숭숭 뚫린 게?”
“착한 수인 눈엔 그런 거 안 보여.”
그녀가 돌연 뻔뻔하게 받아쳤다.
그러면서 아이, 완벽하다. 중얼거리고는 손수건을 쓰다듬었다.
“어? 진짠데? 내 눈엔 예쁘기만한데…..”
“그래, 다시 보니 예쁜 거 같기도 하고.”
그 반응에 리카도르가 픽 웃음을 흘렸다.
그가 슈페나에게로 시선을 고정한 채, 툭 한마디를 던졌다.
“예쁘네.”
뭐지?
괜스레 이상한 기분이 들어 슈페나는 한참 뜸을 들이다 대꾸했다.
“.…조심해서 다녀와.”
“응.”
짧게 대답한 리카도르는 잠시 고개를 떨궜다.
지금 시점에서 계약의 존재를 알려줘도 될지 고민이 든 탓이었다.
‘그때 느꼈던 묘한 거부감도 그렇고, 슈페나를 괜히 혼란스럽게 만들 필요는 없겠지.’
둘 사이에 어색한 정적이 흐를 무렵, 어디선가 끈덕진 시선 하나가 날아들었다.
“아.”
슈페나는 조심스레 고개를 돌려 그 시선이 쏘아진 방향을 쳐다보았다.
이글이글 불타는 눈망울의 리리 엘라가 서 있었다.
리카도르한테만 먼저 인사해서 서운했나?
그녀가 총총총 리리엘라에게로 다가가 손을 흔들었다.
“리리엘라 언니도 잘 다녀와요.”
그러자 리리엘라가 작게 중얼거렸다.
“…나도.”
“네?”
“……손수건.”
조곤조곤하지만 노골적인 욕망이 담긴 간략한 한마디.
‘손수건은 이거 말고 없는데……,’
바느질이 의외로 힘들고 시간을 많이 잡아먹더라고.
다른 이들의 것까지 만들 여유가 없었다.
슈페나는 괜히 볼을 긁적거리며 데구르르 머리를 굴렸다.
“어, 음. 그게, 언니한텐 더 좋은 걸 주려고 했죠.”
“뭔데?”
그에 리리엘라가 솔깃한 표정으로 궁금한 심정을 내비쳤다.
때마침, 좋은 묘수가 떠올랐다.
“보고 싶을 거예요. 리리 언니!”
슈페나는 리리엘라를 와락 끌어 안고 애교스레 볼 뽀뽀까지 해주었다.
앙증맞은 애칭은 덤이었다.
가족끼리 이 정도 애정 표현은 할 수 있지 않나……?
슈페나는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리리엘라의 눈치를 보았다.
“히익!”
리리엘라가 요상한 비명을 지르며 놀란 미어캣처럼 고개를 내뺐다.
내가 너무 성급했던 건가?
슈페나는 동공지진을 일으켰다.
안타깝게도 리리엘라는 그런 슈페나의 마음 상태를 돌볼 겨를조차 없었다.
포옹에, 볼 뽀뽀에, 그간 염원했던 애칭까지 불러주지 않았는가.
“……..”
리리엘라가 그대로 얼어붙어 뒤로 넘어갔다. 싸늘하게 행복사한 자의 시신이었다.
‘이 언니 좀 이상해. 건드리지 말자.’
슈페나는 입꼬리에 경련이 일어날 만큼 힘겹게 웃으며 슬금슬금 리리엘라한테서 멀어졌다.
그런데 이제는 또 다른 난관이 부닥쳤다.
“형수님, 저는 뭐 없습니까?”
리헨테온이었다.
정중한 얼굴로 물어오던 리헨테온이 갑자기 힐끗 리카도르를 쳐다보았다.
무언가 알 수 없는 강렬한 기운이 느껴졌다.
리카도르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였다.
그에 리헨테온이 퍼렇게 질린 낯으로 슈페나에게 한탄했다.
“..… 왜인지 오한이 듭니다. 봄인데 춥습니다, 형수님.”
“아, 네.”
그건 저도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슈페나는 대신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가죽 주머니를 하나 꺼내 들었다.
원래는 모두에게 주려고 했던 건데, 도련님이 뭔가 선물을 바라는 것 같아서.
“이건 로네악 꽃으로 만든 비스킷인데 다 같이 나눠 드세요!”
“감사합니다.”
꾸벅 감사인사를 하는 리헨테온을 향해 슈페나는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이건 무려 이능 부작용 회복 효과까지 깃든 비스킷이라고!
전쟁이 잦아서인지 전장에서 유용한 비상식품 레시피도 있어서 적용해본 거였다.
‘근데 건빵은 솔직히 선 넘었나?’
약 올리려는 의도는 아니었는데.
슈페나가 머쓱하게 손을 탁탁 털고 있는데, 쫄래쫄래 따라 나온 카누스가 작별 인사를 했다.
– 누나형아들, 잘 다녀와!
꼬마 뱀은 짐짓 귀엽게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카누스가 집에서 열씨미 응원하께!
천년의 사기도 식을 만한 애교였다.
어머님마저 안타깝다는 듯 탄식.
을 흘리더니 싸해진 분위기를 수습했다.
“허어, 모쪼록 다들 몸 성히 돌아와야 한다.”
상황을 정리하던 칸은 알 수 없는 감정이 담긴 눈빛으로 멀뚱멀뚱 서 있는 슈페나를 불렀다.
“그런데 며늘아가.”
어머님이 갑자기 대자로 팔을 벌렸다.
무언의 메시지가 담긴 헛기침까지 하면서.
“큼.”
“네?”
“흐흠.”
슈페나가 알아듣지 못하자, 칸은 더욱 강력한 신호를 쏘아 보냈다.
설마….
그녀는 시험 종료 1분 전 애매모호한 문제를 찍는 사람처럼 어머님한테 포옥 안겼다.
“.… 저어, 어머님?”
칸은 히죽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억누르며 점잔을 빼었다.
“나 원 참, 내가 떠나는 것도 아닌데 유난이구나. 나쁘진 않군.”
그러시구나.
슈페나의 눈빛이 짜게 식었다.
아무튼 고부지간의 사랑을 다지고 있을 때, 리카도르가 성큼성큼 슈페나와의 거리를 좁혔다.
그는 슈페나가 뭐라 얘기할 겨를도 없이, 빈틈없이 그녀를 꽉 껴안았다.
슈페나의 눈이 커다래졌다.
살짝 잠긴 듯한 청량한 미성이 그녀의 귓가에 서글프게 내려앉았다.
“보고 싶을 거야, 슈페나.”
정말 떠나는구나.
화기애애한 사람들의 웃음에 가려 못내 현실을 부정했는데, 이제야 실감이 났다.
왜인지 눈물이 고일 것 같았다.
슈페나는 너른 리카도르의 품에 안긴 채로 눈가를 즉, 훔쳤다.
“눈에 먼지가 들어갔나.”
여기서 울면 다들 더 슬퍼지겠지.
슈페나는 대신 눈꼬리가 초승달처럼 휘어질 만큼 활짝 웃으며 리카도르를 보내주었다.
“나도. 정말, 정말 보고 싶을 거야, 리카도르, 편지 꼭 해. 나도 자주 보낼 거니까. 그리고 절대 다치지 마.”
그게 슈페나가 해줄 수 있는 가장 산뜻하고도 아름다운 이별이었다.
슈페나의 눈에 비친 리카도르가 점점 멀어져갔다.
기나긴 출정식 행렬도 분주히 체드윅 가의 저택을 빠져나갔다.
모두 까만 점이 되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슈페나는 웃음기가 싹 걷힌 표정으로 독백했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걸 해봐야겠어.”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에 울기만 하는 성격은 아니었으니까.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73화
때마침, 정보상도 빠르게 답신을 보내왔다.
곧 방문하겠다는 내용의.
결국, 슈페나는 시계를 수리한다는 대외적인 명분으로 정보상을 불러들였다.
일전에도 사용했던 체드윅 가의 응접실 안.
그 작은 소동 이후로 처음 만난 정보상은 여전한 모습이었다.
그녀가 여상스러운 중저음으로 서두를 열었다.
“부르셨습니까, 고객님?”
“네. 이번에 의뢰한 것도 그렇고, 생각해보니까 그때 못다 한 이야기가 있더라고요.”
약간 도전적인 슈페나의 언사에도 정보상은 그저 허허, 도사처럼 웃었다.
계약서 때문에 좀 껄끄러울까 했는데 상관도 안 하는 기색이잖아?
슈페나 또한 그런 감정을 티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본론을 꺼내들었다.
“그 비밀장소에 있었던 회중시계 말이에요. 처음에 시계 공방에서 받은 거랑 똑같아 보여서요.”
정보상이 한쪽 눈썹을 휙, 들어올렸다.
슈페나는 그 표정 변화를 주시하며 말을 더했다.
“그거 장난질이에요, 아니면 뭔가 있는 거예요? 분명 이상한 기억같은 게 떠올랐단 말이에요.”
“뒷면에 쓰여 있을 텐데요. 변하지 않는 건, 기억이라고.”
“네?”
정보상이 돌연 진지해져서는, 어쩐지 조금 서글픈 낯으로 한마디만을 불쑥 내뱉었다.
“난 늘 힌트를 주고 있어요, 고객님.”
그게 무슨 뜻이지?
슈페나의 밤색 눈망울도 덩달아오묘한 빛을 띠었다.
‘장난을 쳐놓은 건 아닌 것 같은데, 나한테 전하고 싶은 메시지라 비밀장소에서 발견된 걸로 보아 그 회중시계도 신물일 것 같은데.’
‘처음 받았던 회중시계랑 비밀장소에서 발견한 것, 왜 두 개지?’
본디 신물은 신의 고유한 힘을 가진 만큼 똑같은 게 있을 수 없는데.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신물이 아닌 건가.’
전혀 감이 잡히질 않아 조금 찝찝했다.
그런 슈페나의 모습에 정보상이 흐음, 한숨을 흘리더니 화제를 전 환했다.
“아, 이건 의뢰하신 것에 대한 정보예요.”
비밀장소에 있던 물건의 그림까지 붙은 제법 세세한 자료.
그 정보를 본 슈페나의 두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역시 비밀장소에 대해 먼저 알고 있었던 사람이라 그런가, 많은 걸 아네.’
꼭 다 써본 사람처럼 세세한 사용법과 장단점까지 나열되어있는 설명.
슈페나는 서류뭉치를 하나하나 꼼꼼히 넘겨보며 툭 감탄하듯 정곡을 찔렀다.
“굉장한 정보가 많네요. 이걸 다 알고 있었으면서 왜 먼저 가져가지 않은 거예요?”
“더 잘 써줄 사람이 있을 것 같아서?”
수수께끼처럼 의미심장하게 대꾸한 정보상은 여상스러운 어투로 오히려 떠보듯 되물었다.
“그나저나 고객님, 이것들은 뭐에 쓰시게요?”
집중하던 슈페나가 무심코 입술을 달싹였다.
“그냥, 이제 막 전쟁이 시작됐으니까 뭐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서….”
근데 내가 왜 사정을 설명하고 있지?
말끝을 흐리던 그녀는 정보상을 향해 눈을 홉떴다.
“궁금한 게 너무 많으시네요.”
“제가 생각보다 호기심이 많은 편이라.”
노련히 받아친 정보상이 슈페나에게서 문서를 가져왔다.
그리고는 특정 페이지를 펼쳐 보여주었다.
“그러시다면 뭐, 요런 거라도 고객님 남편분한테 쥐여주시든가요.
이거 엄청 좋은 물건이거든요.”
정보상이 가리킨 건 다름 아닌 검이었다.
분명 뭐든지 벨 수 있고, 영혼에까지 상처를 입힐 수 있는 특수한 칼이었지.
원작에 나왔던 거라 슈페나도 알고 있던 검이었다.
하나, 사용할 생각은 없는 물건이었다.
원작 여주가 아끼던 아이였는걸.
괜히 남의 것을 빼앗는 기분이잖아.
“아, 그건 안 되는데.”
슈페나가 작게 혼잣말했다.
그 미세한 중얼거림을 기민하게 포착한 정보상이 은근하게 말꼬리를 잡았다.
“왜죠?”
“그냥 안 돼요.”
슈페나는 정보상에게서 문서 뭉치를 가져와 다른 걸 살피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정보상이 그녀에게 고개를 훅 들이밀고는 뺀질대었다.
훅 .
“신선하네. 내 말을 단칼에 자른 여자는 고객님이 “
“처음이라고요?”
슈페나는 심드렁하게 말을 가로 했다.
처음이니 뭐니, 그런 쓸데없는 농담은 왜 하는 거야.
정보상은 능청스레 윙크했다.
“네, 매력 있다고요.”
이 수인이 왜 재벌 멘트를 날리는 거야, 느끼하게.
슈페나는 치근덕거리는 진상 고객을 퇴치하는 알바생의 마음으로 되받아쳤다.
“나한테서 매력 찾아 뭐 하시려고요? 저 유부녀인데요?”
그러나 돌아온 건 의외의 답이었다.
“저도 곧 유부녀 될 건데요?”
응?
슈페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결혼하세요?”
“할 거예요, 엄청 잘생긴 남자랑.
한 몇 년 뒤에?”
“아, 꿈속에서?”
뭐야, 난 또.
슈페나는 저도 모르게 놀리듯 되받아쳤다.
‘내가 왜 이러지. 꼭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이랑 대화하는 것처럼.’
이상했다.
수상한 사람이고, 양심은 더더욱 없는 무뢰한인데.
그저 나중에 필요할 것 같다는 이유로 붙잡아두고 있는 건데.
서로 극혐하면서도 허물없이 대하는 사이처럼 왜 이렇게 기분이 쌈박하지?
슈페나가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정보상이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탁두들기며 상념을 깨웠다.
정보상은 다시 이야기를 원점으로 돌려놓았다.
“그래서 왜 안 되는 건데요, 고객님?”
정보상이 어째서 이런 일에 계속 관심을 보이는 거지?
대답하지 않으면 지구 끝까지 쫓아올 기세였다.
슈페나가 짤막하게 대답했다.
“쓸 사람이 따로 있어서요.”
아무리 그래도 믿을 수 없는 상대인데 구구절절 사연을 설명할 순 없지 않은가.
그 이후로 다시 비슷한 일이 반복되었다.
정보상은 권유하고 슈페나는 이건 아니라고 부정하는 쳇바퀴 같은 상황이.
“참 이상해, 우리 고객님.”
정보상은 슈페나의 속을 훤히 들여다본 것처럼 정곡을 찔렀다.
“꼭 다른 주인이 하나 더 있는 것 같네요. 이런 건 발견한 사람이 임자인데.”
그녀가 언뜻 심드렁하게 턱을 괴곤 슈페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노골적인 시선에 슈페나는 괜스레 속눈썹을 드리웠다.
확실히 이상했다.
생각지도 않았던 사람이 저런 말을 하니까 정말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솔직히 원작 여주한테 관심은 없는데, 그냥 잘될 사람 인생에 피해를 줄까 봐.’
부채감 갖기 싫어서 그런 거지.
한편, 정보상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사람이 쓸데없이 착해. 그거 문제야, 고객님.”
그녀가 손을 뻗어 칭찬하는 것처럼 툭 슈페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곤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양 천연덕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보상이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혹시 몰라서 따로 추린 게 하나 더 있는데 줄게요.”
뭐지….
‘왜 꼭 옛날부터 나를 알았던 것처럼 말하지?’
그런 의문이 드는 찰나, 정보상은 깔끔하게 작별인사를 하곤 사라졌다.
“그럼 이만 가볼게요, 고객님.”
순식간에 혼자 남겨진 슈페나는 멍하니 눈만 깜박였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곤 정보상이 놓고 간 서류를 들여다보았다.
꼭 슈페나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직접적인 도움이 되는 내용만 담긴 문서.
‘어?’
이거다!
슈페나의 표정이 단숨에 밝아졌다.
문서에서 건질 만한 자료를 찾은 덕분이었다.
전쟁에 도움이 될 만한 게 뭐가 있겠는가.
무기와 그 근간을 이루는 금속.
치료제는 이미 만든 만큼 다른 쪽을 알아볼 생각이었다.
비밀장소에는 여러 종류의 광석들도 있었다. 개중엔 신비한 특성을 지닌 것도 존재했고, 슈페나가 눈여겨본 광물은 두 가지였다.
세상에서 가장 날카로운 광석과, 자아 비슷한 걸 지녀 주인을 보호하는 특성을 가진 광석.
‘합금을 만들어야겠어.’
그럼 창과 방패의 기능을 둘 다가진 새로운 금속이 태어날지도 몰라.
물론 이런 건 처음이라 실패할 확률이 높았지만.
‘그래도 여기 만능 천재 과학자가 하나 있잖아?’
슈페나는 곧장 카누스에게로 직행했다.
카누스는 정원을 꾸물꾸물 기어다니며 산책하고 있었다.
슈페나가 답지 않게 상냥한 손길로 카누스를 번쩍 들어 안으며 칭찬했다.
“우리 똑똑하고 귀엽고 멋있고 세상 좋은 건 혼자 다 하는 카누스!”
누가 봐도 노골적으로 원하는 게 있는 모양새였다.
카누스가 흥, 코웃음을 쳤다.
-내가 잘난 건 맞지만 안 들을래.
슈페나는 못 들은 체하며 꼬마뱀을 살살 꼬드겼다.
“우리 획기적인 발명 하나만 해볼까?”
갈려라, 연구원!
그런 슈페나의 본심이 새어나간 건지 카누스는 예전과 다르게 밀당을 시전했다.
– 발명? 아냐. 내가 그 수작에 또 넘어갈 줄 알아? 개고생 시킬 거잖아!
“이 누나가 무기 사업을 해볼까 해. 잘되면 사장 자리 너한테 줄게.”
결국, 슈페나는 비장의 한 수를 꺼내 들었다.
카누스가 좋아할 만한 단어로.
-사장?
“그래, 넌 이제 사장님이 되는 거야.”
슈페나의 목소리가 악마의 것처럼 은근하게 변했다.
본디 사업을 좀 더 확장할 계획이었다.
치료제 말고도 로네악 꽃으로 식품을 만든다든지.
이번에 광물까지 개발하여 납품하게 된다면 사업체는 더욱 복잡해질 터.
그러니 능력 있는 인사가 필요했다.
‘그게 딱 카누스란 말이야.’
슈페나가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카누스에게 눈짓했다.
꼬마 뱀은 꼬리로 제 머리를 긁적이다. 곧이어 수락의 답을 내놓았다.
-에헴. 그럼 말해보든지.
걸려들었어!
그렇게 슈페나는 영원한 연구직노예를 득템했다.
그리고 며칠 후.
그들은 슈페나의 집무실 한구석에 마련한 실험실에 퍼질러 앉아 있었다.
우리의 불쌍한 연구직 노예, 카누스가 한순간의 그릇된 판단을 원망하며 슈페나에게 불평했다.
-내가 속았어. 벌써 열흘째 비늘도 못 감고, 망할 실험 일정에 내 뱀생이 맞춰졌다고!
님아, 대학원 길은 걷지 마오.
아카데미생들 사이에 떠돈다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으나, 슈페나는 뻔뻔하게 카누스에게 말했다.
“그러게. 누가 좋다고 하래?”
– 나 때려치운다?
“어? 야, 저기 넘친다.”
제법 반항기 어린 카누스의 말투에 그녀는 능숙하게 말을 돌렸다.
카누스는 기대를 한 치도 저버리지 않고 그녀가 원하는 대로 두리번거렸다.
-어디, 어디?
-?
슈페나가 이능을 사용하여 비커를 가열하던 알코올램프를 치웠다.
부풀어 오르던 검은 액체도 차츰 잠잠해졌다.
그녀는 더러워진 책상을 티슈로 닦으며 카누스에게 이야기했다.
“나도 이렇게 돕고 있잖아.”
-흥, 내가 아직 인간화를 못 하는데 이것도 안 도와주면 어쩌려고?
본전도 못 찾았다만.
여하튼 티격태격하면서도 성실히 일하던 슈페나는 적어놓은 실험 일지를 훑어보았다.
“근데 어째 성과가 하나도 없냐?”
-두 광석이 너무 상극이야. 고온에 녹여서 섞고 굳히면 고유의 특성이 잘 안 살아.
역시 세상에 쉬운 건 없구나.
슈페나는 실험을 위해 조성해놓은 기다란 책상에 푹 엎어졌다.
“화학 죽어라.”
-죽어라.
카누스도 슈페나를 따라 쿵 몸을 치대었다.
이런 현타와 명상의 시간이 지나고.
퍼뜩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안 섞으면 그만이잖아!’
슈페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들면서 카누스에게 제안했다.
“그럼 완전히 섞지 말고 군데군데 접합하는 느낌으로 가면 어떨까?”
-오, 내가 생각해낸 거랑 좀 비슷한데? 들어봐…….
카누스도 마침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고서에서 봤다던 고대 광물의 제련법을 알려주었다.
슈페나는 짠, 손을 내밀었다.
“어? 야, 너 진짜 천재인가 봐!”
카누스가 팔랑팔랑 기쁨의 춤을 추더니 꼬리로 하이파이브를 했다.
번뜩이는 아이디어의 힘으로 연구에 박차를 가하던 어느 날.
카누스가 각기 다른 색의 마블링이 수놓아진 금속 완성품을 바라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누나, 이거 봐봐! 느낌이 좋지 않아?
“그러게. 왠지 때깔이 곱다.”
슈페나는 곧장 그 금속을 밖으로 들고 나가 사용인들을 불러 안전하게 실험했다.
– 성공이야!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리카도르한테 알려줘야겠다.”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혼잣말했다.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74화
곧장 자신의 집무실로 향한 슈페나는 펜촉에 검은 잉크를 먹였다.
그리고는 멋들어진 필기체로 수즉, 글씨를 적어 내렸다.
-안녕, 리카도르? 거긴 어때? 벌써 시간이 꽤나 흘렀네. 난 잘 지내. 사실 카누스랑 뭔가 만들고 있어. 기대해도 좋아. 또 편지할계.
p.s. 읽씹, 아니 답신 안 보내면 죽는다!
마지막 온점을 찍은 그녀는 또다른 종이를 꺼내 쭉쭉 편지를 써내렸다.
그리고는 제인을 불러 말했다.
“이건 리카도르 거, 요건 리리엘라 언니 거, 마지막은 도련님 거.”
리카도르한테만 편지하면 다른 봐.
사람들이 아쉬워할까 봐.
어머님한테 대충 들어보니 다들 잘 지내고 있는 듯했다.
그래도 꾸준히 편지를 하면, 떨어져 있어도 서로가 서로의 곁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지 않으려나.
싱긋 의식적으로 미소를 지은 슈페나는 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험에 성공한 만큼 본격적으로 할 게 많았으니까.
이런 금속이 어디서 났는지 변명할 방법도 생각해야 하고, 이걸 사자 영지 내에서 구할 수 있는지도 알아봐야 하고, 대량생산 준비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어머님한테 받은 로네악 꽃 군락 쪽에 금속을 제련할 공장도 하나 만들어볼까?’
겨울엔 꽃이 져서 테네도르가 무용지물이 되니까, 이때 활용하면 효율적일 터.
대량생산을 하려거든 아무래도 사람의 손보단 이능의 도움을 거치는 게 낫지 않으려나.
그렇게 슈페나는 카누스와 다시 열심히 일을 하기 시작했다.
3주 후.
슈페나는 이 모든 일을 적당히 포장하여 어머님한테 보고서를 올렸다.
알아보니 광물이 사자 영지 내의 광산에서도 드물게 채굴이 되더라고.
공장을 짓는 건 어머님이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샘플이 될 모델 몇 개를 만들어서 하나는 리카도르에게 보냈다.
같이 노력한 카누스가 완성된 검날을 조심스레 꼬리로 쓸며 방방기쁨의 세레나데를 추었다.
-누나, 그 구린 브랜드 이름 말이야. 검에 그것도 새겨놓는 게 어때?
“구리다니, 너무한 거 아니야?”
슈페나는 흥칫뿡 삐진 얼굴로 팔짱을 끼곤 부러 카누스를 흘겨보았다.
로네악 꽃 치료제의 제품시연회가 끝나고 구체적인 계획표를 하나 만들지 않았던가.
사람들의 기억에 박히도록 브랜드명을 정하고, 매장을 세워야겠다.
는 내용의.
그간 일이 진행되어 로고와 심볼을 정했었다.
‘오프라인 매장을 만드는 것도 거의 다 끝냈지.’
여하튼 로네악 꽃 치료제는 이제 막 물량이 확보되어 사자 영지 곳곳에 배송되고 있었다.
당연히 리카도르가 있을 전쟁터에도.
그런 실정에서 똑같은 로고의 검이 보급되면 효과가 쏠쏠하겠지.
알고 보면 카누스도 은근히 사업머리가 돌아가는 편이라니까.
슈페나가 못내 흐뭇해할 무렵, 카누스는 눈치 없이 빈정대었다.
-브랜드 이름이 라이언이라며.
가슴에 손을 얹고 맹세해봐. 이게 세련됐니?
“야, 라이언이 어때서? 귀엽기만한데.”
사자들을 위한 치료제이고, 여긴 사자 가문이고, 사자도 나름 고양잇과 맹수라 귀엽지 않은가.
귀여운 사자 캐릭터가 왕관을 쓴 모습으로 지팡이를 들고 서 있으면 얼마나 사랑스러울까!
사자들이 자기애도 강한 편이라 이런 걸 좋아할 것 같더라고.
슈페나는 단호하게 덧붙였다.
“라이언에 대한 내 사랑을 의심하지 말아줘. 진심이니까.”
-어, 그래….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카누스는 이내 구시렁대었다.
-차라리 뱀 캐릭터가 더 귀엽겠다. 이름은 카누스로.
굉장히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카누스였다.
“야, 그게 더 구려.”
자기 PR을 무슨 그딴 식으로 하냐.
한차례 그리 아웅다웅하던 순간, 슈페나의 눈이 돌연 가늘어졌다.
창가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서.
“아, 그나저나 여기 공기가 왜 이리 탁하지?”
그녀가 환기를 하는 척 집무실의 창문을 슬금슬금 열었다.
이제는 익숙한 종이 새가 창틀에 매달려있었다.
슈페나는 아직 아무런 낌새도 눈치채지 못한 카누스를 곁눈질하곤 그 쪽지를 펼쳤다.
사실 정보상에게 적군 세력에 관한 정보를 의뢰해둔 참이었으므로.
-적군 세력이 대륙 동부로 비밀스럽게 집결 중.
이건 어머님한테 넌지시 따로 조사해달라고 말씀드려 봐야겠네.
쪽지를 잽싸게 주머니에 숨긴 슈페나는 문득 무언가를 떠올렸다.
‘생각해보니까 그 정보상이 했던 이상한 얘기들, 카누스라면 알고 있지 않을까?’
각성, 권능.
그 이야기를 할 때 정보상이 조금 이상하지 않았던가.
꼭 금제라도 걸린 사람처럼.
또다시 물어봐도 정보상은 아무런 답을 주지 않았었다.
도서관을 뒤져봐도 관련된 내용은 나오지 않았고.
정보상에게 여전히 일감을 맡겼음에도 계속 경계하고 있는 슈페나였다.
‘이런 로판 세계에선 늘 통수 조심해야 한다고.’
슈페나가 도로 창문을 꼭 걸어 잠그곤 카누스에게 질문했다.
“근데 카누스. 너 각성이란 거, 들어봤어? 무슨 권능이랑 연관된 것 같던데.”
그냥 한번 찔러보듯 물었는데, 카누스는 이상하리만치 과민하게 반응했다.
-몰라! 내가 그런 걸 어떻게 알아!
어라. 이거 뭔가 있는데?
슈페나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
“왜 화를 내?”
-큼. 누나가 못생겨서 갑자기 화가 났다, 뭐 어쩔래? 난 이만 간다.
…죽일까?
슈페나가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가 슬그머니 내빼려는 카누스의 앞을 가로막곤 단호하게 캐물었다.
“우리 카누스, 오늘 언어표현이 상당히 거칠다? 알고 있구나? 뭔지.”
하나, 카누스는 앙칼지게 쏘아붙이며 꼬리를 빳빳이 치켜들었다.
-물어버린다? 나 독액 분비해?
“야, 우리 사이에 그런 것도 못알려주냐. 뭔데? 비밀로 할게.”
얘는 이렇게 가끔씩 맹수 티를 낸다니까.
반사적으로 겁먹은 슈페나가 한 발짝 뒷걸음질을 치며 태연한 척 구슬렸다.
“진짜야. 말해봐, 카누스.”
그에 카누스의 꼬리가 점차 시무룩하게 아래로 내려갔다.
-아무한테도 알려주면 안 된다고 그랬단 말이야!
“누가?”
돌아가신 울 할머니가.
슈페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카누스가 붉고 가는 뱀의 혀를 내밀더니 뾰로통하게 슈페나를 올려다보았다.
-진짜 비밀로 할 수 있어?
“내 전 재산을 걸고 맹세한다. 진심으로.”
-뭐, 그 정도면 믿을 수 있겠네.
흥, 코웃음을 친 카누스는 시니컬하게 대꾸했다.
그러고는 엄청난 비밀을 토로하는 양, 꼬리로 귀를 가져다 대라는 시늉을 했다.
어차피 음성을 머리에 전하는 식으로 대화를 하니 상관없을 텐데.
오버하네.
속으로 피식 웃은 슈페나가 누구보다 진지하게 표정을 바꾸곤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착 가라앉은 카누스의 말소리가 전달되었다.
-각성한 수인은 권능을 사용할 수 있대.
“권능?”
-이능과는 또 다른 신묘한 힘.
근데 자세한 건 모르겠어. 당사자인 나도 모르다니 이상해.
카누스는 점점 혼잣말하듯 투덜대었다.
그 모습에 슈페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분명히 그 정보상이 나보고 각성자랬지.’
그게 뭘까?
보아하니 카누스도 본인이 각성을 했다는 것 같은데..….
슈페나가 눈높이를 맞추어 카누스를 또렷이 응시했다.
“그럼 너 각성자야?”
하지만 카누스는 푹 책상에 엎어 지더니 영문 모를 딴소리를 해대었다.
-로네악 꽃을 클라이드 나무로 정화했을 때, 내가 했던 말 기억해?
“응?”
-나무랑 누나의 탈리테 파장이 비슷하다고 했던 거.
그게 어쨌다는 거지?
카누스는 그런 슈페나의 의문을 읽은 건지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그냥 보면 뭔가 촉이 와. 그래서 내가 천재 소리 듣잖아!
자기 자랑인가 싶어 잘 이해는 되지 않았지만.
여하튼 카누스가 꼬리로 탁탁 바닥을 내려치며 결론지었다.
-이런 촉이 그 권능이란 것 같기도 하고, 카누스도 뭔지 잘 모르는 건가.
슈페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쳇, 혀를 찼다.
그래도 소득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이능이랑은 또 다른 능력이 권능이고, 그 힘을 가진 자를 각성했다고 표현한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깔끔하게 상황을 정리한 슈페나는 홀로 독백했다.
“신기하네.”
-어디 가서도 말하지 마.
카누스가 마지막으로 그런 그녀에게 입단속을 시켰다.
섬뜩한 이야기를 덤으로 해주면서.
-할머니가 그랬어. 각성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예기치 못한 심각한 단어에 당황한 슈페나가 얼른 대꾸하지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저 교활한 꼬마 뱀이 왜 저한테 이런 중요한 얘기를 하나 싶어서.
그동안 정말 많이 친해진 건 맞지만 이럴 애가 아닌데.
“…누가? 아니, 그럼 그걸 왜 나한테”
-느낌이 왔으니까. 누나는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퍽 살벌한 카누스의 음성이 머릿속을 요요히 울렸다.
뱀 특유의 찢어진 검은 눈망울이 짙은 수렁처럼 슈페나를 빨아들였다.
‘꼭 내가 알던 꼬마 뱀이 아닌 것 같아.”
슈페나가 얼어붙은 사이, 카누스는 원래의 명랑한 어투로 무슨 일있었냐는 듯 재촉했다.
-그럼 이제 농땡이 피우지 말고 얼른 일이나 해!
그녀는 얼떨떨한 기색으로 의자에 앉아 멍하니 속눈썹만 팔랑였다.
죽일 거라고?
도대체 누가?
정보상이 말을 아낀 이유도 그 때문이었나.
똑똑.
그 순간, 기분 탓인지 평소보다.
커다란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슈페나가 화들짝 어깨를 떨었다.
“작은 마님!”
다행스럽게도 위험한 인물이 아닌 제인이었다.
느닷없이 나타난 제인은 희소식을 건네주었다.
“소가주님한테서 답신이 왔어요!”
리카도르에게서 서신이 도착했다.
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거리도 멀고, 바쁠 것 같아서 다음 달에나 답신이 오지 않을까 했는데 빠르네.
슈페나는 조금 전의 껄끄러움은 저편에 밀어둔 채, 기분 좋게 올라간 입꼬리로 편지 봉투를 뜯었다.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75화
-나도 잘 지내. 새끼 뱀이랑 만들었다는 게 검일 줄은 몰랐네.
마음에 쏙 들어. 잘 사용할게, 부인.
그리고 생일 때, 꼭 연락할게. 보고 싶을 거야.
P.s. 답신 썼으니까 죽이지 마치, 추신이 뭐 이래.
그리 불평하는 슈페나의 낯은 부드러이 풀어져 있었다.
편지 마지막에 쓰인 이야기가 썩마음에 들어서.
‘나도 리카도르 생일 때, 선물이랑 같이 서신 보내줘야겠다.’
지난 생일은 가을 순회에서 다치는 바람에 정신없이 그냥 지나갔으니까.
슈페나는 씩씩하게 다짐했다.
그때, 제인이 뿌듯한 언니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아, 아가씨랑 도련님한테서도 왔는데 보실래요?”
“응.”
슈페나는 우선 리리엘라의 것부터 꺼내 들었다.
-안녕, 슈페나? 편지는 처음이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
나는 요즘.…(중략)……그, 아무튼 건강하고 보고 싶을 거야. 사, 사, 사…….
약간 두서없이 적힌 편지의 마지막은 계속 지웠다가 쓴 흔적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어 한 것 같은데 부끄러웠나.
피식 웃은 그녀가 리헨테온의 서신도 펼쳐 읽어보았다.
– 안녕하십니까, 형수님? 리헨테온입니다. 보내주신 로네악 꽃 치료제는 잘 썼습니다. 효능이 이렇게 좋은 줄은 몰랐습니다. 역시 폭포 수련을 견디신 분답네요. 존경합니다. 형수님.
아, 갑자기 악몽이 떠오르네.
그래도 다들 잘 지내고 있는 듯해서 다행이었다.
리카도르에게 보낸 검도, 군영에 전달한 치료제도 좋다고 해서 안심이었고, 이렇게 하나씩 해나가면 되겠지.
슈페나는 서신을 상자 안에 넣어 두었다.
그러다가 다시 한번 리카도르의 편지를 꺼내 정독했다.
실실, 웃음이 흘렀다.
-뭐야. 왜 웃어? 갑자기 분위기가 분홍분홍한데?
갑자기 옆에 있던 카누스가 힐끔 힐끔 편지를 엿보려 몸을 꿈틀대었다.
“안 보여줄 거거든?”
슈페나는 잽싸게 서신을 사수했다.
-뭐야. 이제 봄 다 지났는데 왜 또 봄이야.
카누스가 캬악입을 쩍 벌려 소리를 내더니 불퉁하게 툴툴대었다.
아까의 섬뜩함은 온데간데없이 평소처럼 새치름한 모습이었다.
‘착각이었나.’
슈페나는 반신반의하며 언뜻 귀여운 꼬마 뱀을 빤히 응시했다.
그리고는 총총총 집무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
“아무튼 급한 불은 다 꼈으니까 난 어머님한테 다녀온다?”
완성품도 다 만들었고 당분간은 자유의 몸이 아닌가.
정보상에게 받은 기밀이 있는 만큼 어머님한테도 서둘러 언질을 드려야 할 것 같았다.
뽀르르, 복도를 가로지른 그녀가 어머님의 집무실 문을 똑똑 두들겼다.
“들어오렴.”
슈페나의 발걸음 소리를 들었는지 칸은 여상스러운 목소리로 화답했다.
“어머님, 바쁘세요?”
조심스레 문고리를 돌려 닫은 슈페나가 익숙하게 집무실 한가운데에 있는 소파에 자리 잡으며 물었다.
칸이 보던 서류를 내려놓고 그 맞은편에 앉아 말했다.
“며늘아가와 담소를 나눌 시간 정도는 충분히 있지.”
그에 슈페나가 헤실헤실 웃음을 지었다.
역시 어머님은 스윗하시다니까.
그녀는 반짝반짝 눈을 빛내더니 먼저 서두를 열었다.
“근데 어머님, 그 금속 제련 공장은 어떻게 됐나요?”
어머님이 설렁줄을 당겨 사용인들에게 다과를 내오라 명한 뒤, 천천히 그 이야기에 답변했다.
“원래 있던 건물을 매입해서 새로 꾸미는 거라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란다.”
사실 슈페나가 이 이야기를 꺼내 든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일단 어머님과 자신이 함께 관여 하는 일이라 언제 물어도 어색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조금만 방향을 틀면 또다른 화제로 넘어가기도 쉬웠다.
“어느 정도 다 만들어지면 어떻게 유통하실 거예요?”
바로 이렇게.
어머님은 슈페나와 다정히 눈을 맞추며 벽 한 면을 차지하고 있는 대륙 지도를 가리켰다.
칸의 손끝이 향한 건, 평탄한 평야로 이루어져 있는 대륙 서부였다.
칸은 슈페나가 알아듣기 쉽도록 친절하게 설명했다.
“보다시피 대륙 서쪽 길이 더 잘닦여있으니 그리로 보내야겠지.”
“동쪽으로 보내는 게 거리상 더 가까울 것 같은데………. 아, 동쪽은 산에 사는 수인들이 많아서 지형이 조금 복잡하죠?”
슈페나는 눈을 가늘게 찡그리며 지도에서도 산세가 험한 대륙 동부를 거론했다.
칸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긍정했다.
“그렇지.”
이제 거의 다 됐어.
슈페나는 칸을 따라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걱정 어린 목소리로 호응했다.
“확실히 위험하겠네요. 혹여 적들이 매복해있다면 애써 만든 걸 빼앗길지도 모르겠어요.”
그러고는 결정적인 한마디를 덧붙였다.
어머님은 가주답게 섬세하고 예민하신 분이니, 경각심이 피어올랐을 터.
그런 슈페나의 예상은 정확했다.
칸의 눈매가 일순간 날카로워졌으므로,
“흠, 이번 전쟁에 참여한 수인종족들 중에 은신에 능한 이능을 가진 자도 있었지.”
어머님은 돌연 제 책상에 놓인 서류를 들추곤 혼잣말했다.
칸이 슈페나를 힐끗 곁눈질하곤 잠깐 양해의 말을 구했다.
“아, 잠시 떠오른 것이 있어 실례좀 해야겠구나.”
“괜찮아요. 바쁘실 텐데 괜히 귀찮게 해드렸다면 죄송해요, 어머님.”
슈페나가 배시시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럴 리가. 간식 좀 먹으면서 기다려주련?”
“네, 어머님!”
때마침, 사용인들이 다과를 내온 참이었다.
슈페나는 바삭한 버터 비스킷을 아그작아그작 씹어 먹으며 상념에 빠졌다.
‘어머님도 대륙 동쪽을 경계할 것 같으니까 위험한 일은 없겠지.’
미끼는 성공적으로 드리운 셈이었다.
그녀가 열심히 암호로 무언가를 작성하는 칸을 슬쩍슬쩍 바라보았다.
‘이거 카누스가 알려준 암호인데?’
지난번에 놀다가 카누스가 심심풀이로 퀴즈 맞히자면서 알려줬었지.
완전히 다 외우진 못해서 통 해석은 불가했으나, 대충 동쪽에 정찰병을 보내라는 내용인 것 같았다.
슈페나의 의도가 통한 것이었다.
이윽고, 제 비서를 불러 그 쪽지를 전한 칸이 슈페나에게 이야기했다.
“다 마무리했단다. 이제 차나 들자꾸나.”
유익한 티타임이었다.
***
“이른 시점에 발견하여 우리에게 유리하도록 이용할 수 있어 다행이었지.”
칸은 대서특필된 신문을 눈으로 훑으며 배부른 사자답게 위엄 있는 카리스마로 중얼거렸다.
슈페나는 눈치 빠르게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마구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님이 그런 슈페나를 따스하게 바라보며 공을 돌렸다.
“귀찮아질 뻔했는데 다 네 덕분이란다, 며늘아가.”
“제가요?”
그냥 힌트를 드린 것뿐인데.
슈페나는 짐짓 겸양을 떨며 되물었다.
그러자 칸이 그녀의 하늘색 머리칼을 엄마처럼 푸근하고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답했다.
“그래, 너와 나눈 대화 덕분에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방 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몽글몽글해졌다.
슈페나는 괜스레 주먹을 쥐었다 펴며 도르르 눈알을 굴렸다.
그러다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대곤 넌지시 운을 띄웠다.
“참, 어머님.”
카누스와 같이 발명한 금속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해졌기 때문이었다.
공장 건설도 이제 마무리되어서, 시범적으로 만든 합금을 사자들에게 전달하기로 했으니까.
“합금으로 만든 무기, 말이에요.
다들 쓸 만하다고 하던가요?”
그 긴장과 기대감이 뒤섞인 눈빛는지 입꼬리를 미려하게 끌어올렸다.
“너무 걱정하진 말거라. 다친 사자들도 별로 없고, 우리 가족 모두 잘 지내고 있다 들었으니.”
솔직히 염려하고 있었는데 너무나 반가운 이야기였다.
다른 가족들과도 계속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어머님에게 모두 무사하다는 말을 들으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슈페나의 표정이 저도 모르게 편히 풀어졌다.
칸은 며늘아가에게 갓 구운 마들 렌을 권하며 새로운 얘기를 꺼내들었다.
“그나저나 아가, 다른 일에도 손을 대고 있다면서?”
“네에.”
슈페나는 괜스레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곤 작게 대답했다.
비밀장소에서 얻은 진귀한 물건이 많은 만큼, 모두에게 도움이 될 만한 다른 것들도 개발하고 있었다.
사실 어머님한테는 들켜버렸다.
비밀장소에 대한 걸.
처음 로네악 꽃 치료제로 가짜장부를 만들었을 적부터 수상함을 알아채셨다 하더라고.
‘나를 믿고 있어서 그동안 모른 체해주신 거였지.’
어쩐지 모든 일들이 너무 술술 풀리더라니!
미심쩍은 행동에도 신뢰해주신 어머님한테 감사하기도 했다.
그래서 어머님한테는 우연히 비밀장소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서 그리되었다고 설명했었다.
‘그랬더니 단박에 정보상을 찾아간 거냐고 물어보셨지.’
어머님도 소싯적에 시계 공방을 자주 이용하셨다나 뭐라나.
공방 주인이 나무늘보에서 사슴으로 바뀌었다 하니 놀라시더라고.
어머님의 윗세대 때부터 나무늘보가 정착해 운영하던 곳이었다지.
어머님은 공방과 얽힌 옛 경험담을 동화구연을 하듯 도란도란 읊어주었다.
덕분에 확신이 들었다.
그 요상한 사슴 정보상은 원작속 공방 주인이 아닌 것 같다는 직감이.
어머님과 대화를 나눠보니 나무 늘보가 원작 속 인물과 더 겹치는 게 많았으니까.
슈페나가 과거를 떠올리며 멍하니 있는 사이, 칸이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니, 며늘아가?”
“괜찮아요. 다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어머님.”
슈페나가 슬그머니 몸을 뒤로 빼고는 어색하게 빙구 웃음을 지었다.
“기특하기도 하지.”
칸은 의젓한 슈페나의 이야기를 듣곤 흐뭇하게 엄마 미소를 지었다.
‘역시 그 예언은 슈페나를 뜻하는 게 맞았어.’
지금도 며늘아가의 도움을 톡톡히 받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역시 그 예언에 같이 등장했던 하얀 사자는 리카도르를 의미하는 것이겠지?
‘그 특이했던 문양도 그렇고, 며늘아가와 내 아들이 운명이라는 건가.’
예언이 뜻하는 정확한 해석과 문양의 정체는 몰랐으나, 칸은 그리 생각했다.
칸이 체통 없이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억누르곤 헛기침을 했다.
그러더니 가볍게 박수를 쳐 분위기를 환기했다.
“참, 아가. 생일 선물로 받고 싶은 건 없니?”
“생일이요?”
“벌써 가을이잖니.”
시간이 그렇게 빠르게 흘렀구나.
“그러네요. 가을이네요.”
한창 분주히 지내느라 시간개념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슈페나가 발랄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전 어머님이 주시는 거라면 뭐는 좋아요!”
“……크흠, 집안 기둥이라도 뽑아야 하나.”
며늘아가가 나무열매를 따다 줬더니 좋아했었지.
칸은 슬며시 고개를 돌리곤 진지한 낯으로 중얼거렸다.
집 안 곳곳을 슈페나의 나무열매로 채우기라도 할 기세였다.
한편, 슈페나는 심각해진 칸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혼자만의 고민에 빠졌다.
‘그나저나 이제 리카도르 생일도 곧 다가올 텐데 무얼 해주지?’
뭘 원하는지 물어볼까?
아니야. 명색이 선물인데 직접 뭘 원하는지 물어보기는 좀 그렇지.
그렇게 끙끙 머리를 쥐어 싸매며 고심하다 보니 벌써 10월이 되었다.
“이제쯤이면 도착했겠지? 그걸 마음에 들어 할까?”
리카도르의 생일이 다가온 만큼 미리 선물을 보낸 참이었다.
아무래도 전쟁터니 실용적인 게 좋을 듯하여 깔끔한 검집을 골랐었다.
곧이어 슈페나의 생일날.
어머님이 주신 나무열매 더미에 파묻힌 슈페나한테 선물을 잘 받았다는 리카도르의 편지가 도착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소포가 하나 배달되었다.
그 안에 든 건, 작은 느티나무 묘목이었다.
느티나무의 나무말은 영원.
슈페나가 리카도르와 처음 만났던 계절, 숲속에 피어있던 나무였다.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76화
슈페나는 그 나무 화분을 볕이 잘 드는 창가 아래에 내려놓았다.
그간 리카도르와 나누었던 서신도 따로 창가 쪽 협탁에 보관하였고.
따뜻한 햇볕이 가득 찼던 슈페나의 집무실 안은 점차 리카도르가 보내온 선물로 차곡차곡 채워졌다.
리카도르가 있을 지역에서만 나는 나무열매, 조금은 애틋한 꽃말을 지닌 푸른 물망초, 직접 나무를 깎아 만든 건지 앙증맞은 파랑 새 모형, 자기 없이도 잘 자라는말과 함께 동봉된 오르골.
슈페나의 방 안은 점차 풍족해졌다.
어느새 거의 4년이란 세월이 흘러, 슈페나는 19살의 겨울을 보내고 있었다.
“와, 시간 되게 빠르네. 원작에선 이것보다 더 오래 기다려야 했었던 것 같기도 했는데..”
픽, 시무룩한 한숨을 내쉰 슈페나는 습관적으로 리카도르와의 편지를 꺼내어 살폈다.
15살.
이제 막 편지를 주고받았던 시기.
티격태격하면서도 서로의 안부를 물어보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보고 싶다는 이야기는 항상 마지막에 있었구나.
16살.
봄에는 바빴는지 유독 리카도르에게서 편지가 늦게 도착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미안했다고 적혀있네.
17살.
이때의 여름은 엄청나게 더웠던 것 같았다.
리카도르가 낮잠을 자러 나무 위에 올라갔다가 떨어질 뻔했다는 서신을 보냈었구나.
18살.
가을에 리카도르가 생일 선물로 직접 만든 파랑새 나무 인형을 주었다.
답신으로 내가 이렇게 못생겼었냐고 장난을 쳤었지.
근데 솔직히 좀 조잡하긴 했었다.
가장 최근인 19살,
겨울을 배경으로 한 리카도르의 초상화가 도착했다.
리카도르가 어떻게 자랐을지 궁금해서, 흑백 사진이라도 찍어 보내주면 안되겠냐고 졸라 얻은 결과물이었다.
길이가 자란 듯 눈가를 가릴락말락 한 하얀 머리칼, 청량하게 반짝이는 푸른 눈망울.
다만 기억 속 모습보다는 조금 더 다부지고 골격이 자라 멋있어진 얼굴이었다.
막상 마주치면 어색할까?
슈페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는 켜켜이 쌓인 리카도르와의 추억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세월의 흐름이 묻어있는 소중한 선물을 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너는 나와 함께 자랐구나.’
그러니 다시 만나도 우린 약간의 풋풋함과 함께, 이내 말갛게 웃을 수 있겠구나.
“새삼 보고 싶어지네…….”
슈페나가 이제는 제법 커다래진 느티나무에게 물을 주며 아스라이 독백했다.
***
“갈수록 더 보고 싶어지네.”
그건 리카도르도 마찬가지였다.
리카도르의 막사 안은 슈페나의 흔적으로 온통 에워져 있었다.
슈페나가 보내온 기다란 편지, 밤에 끌어안고 자라던 큰 인형, 꼭 먹으라고 신신당부한 각종 약재, 특별히 더 신경 써서 만들었다는검.
그리고 슈페나가 직접 만들어준 엉성한 손수건.
어느덧 리카도르의 세상도 슈페나로 물들어있었다.
떨어져 있는 아니든.
“만나게 되면 부인은 어떤 모습 일까.”
리카도르는 슈페나의 초상화를 꺼내 쭉 손을 뻗어 펼쳤다.
그리고는 한쪽 눈을 찡그리듯 감아 별을 헤듯 쳐다보았다.
아련한 색감의 수채화처럼 부드러운 하늘색 머리칼, 그 누구보다도 어여쁘게 반짝이는 밤색 눈동자.
‘기억 속 그대로인데.’
19살의 슈페나가 담긴 초상화를 봐도 전혀 짐작이 가질 않았다.
더 귀여워졌을까.
아님 더 성숙해지고 예뻐졌을까.
리카도르의 입꼬리가 미려한 곡선을 그렸다.
궁금했다.
어른이 되었을 슈페나가.
‘나를 낯설어할까.’
걱정도 되었다.
그럼 먼저 의젓하게 인사를 해주어야겠지.
어쩔 줄 모르고 굳어버린 슈페나를 구경하는 것도 제법 재밌을 것 같은데.
그런 미래를 상상하니 리카도르의 입가에 걸린 웃음은 더욱 진해졌다.
리카도르가 표정을 갈무리하며 그림을 가죽 주머니에 넣으려던 찰나, 수하가 막사의 문을 두들겼다.
“소가주님,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리카도르는 의복을 갖춰 입고는 느른하게 중얼거렸다.
“이제 끝을 볼 시간이 되었지.”
예감이 좋았다.
곧 슈페나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한편, 체드윅 가 저택 내 슈페나의 집무실 안.
그곳에는 슈페나 말고도 검은 머리칼과 눈을 가진 앳된 소년이 서 있었다.
“누나, 신문 봤어?”
인간화를 한 카누스였다.
보통 인간화는 10살 전후에 하는 게 일반적이라, 이제 카누스도 자유자재로 모습을 바꿀 수 있었으다.
‘아무리 봐도 익숙하지 않은 낯이라니까.’
슈페나는 짐짓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신문? 아직.”
그도 그럴 것이…… 카누스는 제법 깜찍한 외양을 자랑했으니까.
언뜻 보기엔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육아물 주인공처럼 귀여운 느낌이지만, 자세히 살피면 뱀답게 갸름한 얼굴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카누스가 처음 인간화를 하고 나서는 꽤 놀랐었다.
뭘 꼬나보냐고 시비를 걸어서 금방 정신줄을 챙겼지만.
어우, 가까스로 상념을 몰아낸 슈페나는 카누스가 보던 신문을 슬쩍 가까이로 끌어당겼다.
“왜. 좋은 기사라도 떴어?”
“응, 이번에 사자들이 대승을 거 두었다. 이제 적군들도 힘이 다 빠져서 부리나케 후퇴 중이려나 봐.”
카누스가 신문 1면에 대서특필된 빼곡한 기사를 손끝으로 짚으며 설명했다.
그에 슈페나가 작은 가방에 만년 필과 종이 같은 것들을 집어넣으며 홀가분하게 이야기했다.
“이 전쟁도 끝나려나.”
왜인지 모르게 느낌이 좋았다.
햇수로도 은근히 많이 지나서 이 맘때쯤이면 전쟁이 마무리될 것 같기도 했고.
슈페나에게선 저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살짝 신이 난 듯한 슈페나의 기색에 카누스는 슬금슬금 눈치를 살폈다.
그러더니 몹쓸 애교를 부렸다.
“아, 근데 카누스도 데료가면 안대?”
슈페나는 슬슬 외출준비를 하려던 참이었다.
카누스도 그걸 알아챈 모양인지 같이 놀자고 아우성이었다.
저 뱀은 인간화를 하나 안 하나 변하는 게 없어.
아주 일관적이야.
천년의 잔정도 식을 법한 혀 짧은 소리에 슈페나가 이를 꽉 악물었다.
카누스는 이런 슈페나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진하게 칭얼대었다.
“나도 바깥 구경하고 싶단 말이야!”
“그럼 너 따로, 나 따로 가든지.”
그녀는 시니컬하게 무시했다.
저 꼬마 뱀이 혼자서 아무것도 못 하는 애도 아니고.
“어차피 너 당분간은 또 계속 있을 거라며.”
더구나 카누스는 이제 거의 체드윅 가 식솔처럼 눌러앉게 되지 않았던가.
같이 사업하다가 돈맛을 알아버렸는지, 더 머무를 거라나 뭐라나.
뭐, 어찌 되었건 부모님한테 허락을 받았다고 하니까.
‘어쩌면 그냥 원작대로 가고 있는 걸 수도.’
기억 속에선 카누스도 원작 여주옆에 있지 않았던가.
‘내가 원작을 열심히 비튼 건 맞지만, 중요한 흐름은 그대로일지도 모르니까.’
슈페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가방에 짐을 쑤셔 담고는 이야기했다.
“아무튼 난 간다!”
“치사해!”
카누스의 원망을 뒤로하고, 슈페나를 태운 마차가 저택 밖으로 매끄럽게 굴러갔다.
그녀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시계 공방이었다.
원래 노른자땅을 알아보려 의뢰를 했었는데, 직접 만나자 하더라고.
사업은 역시나 잘 되고 있었다.
치료제도, 합금도.
새로 뻗어나간 식품과 생필품 쪽도 연신 매출 신기록을 갱신하고 있었다.
전쟁 때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건빵이나 캔 종류의 밀봉 식품 등을 만들었지.
일전에 도련님한테 준 것처럼.
아무래도 전시상황에는 위생이 중요하다 보니, 청결에 효과가 좋은 식물을 찾아다 비누 등의 생필품도 생산했다.
비밀장소에서 가져온 것 중에 신기한 효과를 가진 씨앗이 많아서, 아예 의약품 계열로 사업을 늘릴 계획이었다.
그러려면 연구에 쓰일 토지가 필요해서 정보상과 접촉한 거였다.
‘인력은 공고를 냈으니까. 전쟁 때문에 실업률도 올라가서 많이 지원하겠지.’
그때, 따라온 호위 기사가 슈페나에게 말을 건넸다.
“도착했습니다, 작은 마님.”
슈페나는 기사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시계 공방으로 총총총 들어갔다.
공방 안은 평소와는 달리 휑했다.
커다란 여행용 가방에 정보상의 것으로 추정되는 물건이 담겨 있었다.
‘뭔가 이상한데……’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는 고요 한 분위기에 그녀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의아함을 표했다.
“뭐야. 왜 이렇게 조용해?”
슈페나의 눈에 문득 테이블 위에 놓인 수첩이 들어왔다.
‘뭐지?’
이런 의문이 엄습할 무렵, 돌연이상한 환청이 들려왔다.
– 일기장이야. 난 늘 일기를 쓰는 게 습관이라. 슈페나, 나랑 같이 공유 일기장 써보는 건 어때?
익숙한 울림이 담긴 중저음의 여자 목소리.
‘이게 뭐지?’
예전에 비밀장소에서 원작 여주와 슈페나에 관한 기억을 엿보았을 때와 무언가 비슷한 기분.
그때는 그 요상한 회중시계를 만진 여파라고 생각했는데.
슈페나가 눈을 가늘게 찌푸리곤 손바닥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오랜만이네요, 고객님.”
그때,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카운터 옆쪽 방에서 정보상이 튀어 나왔다.
‘목소리가……거의 똑같아.’
슈페나는 뭐에 홀린 듯이 정보상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 기묘한 환청 속 음성과 정보 상의 어투가 오버랩되었으니까.
‘뭐지, 착각인가? 기가 허해서 헛소리가 들렸던 걸까?’
그러다 그녀가 애써 표정을 수습하곤 불퉁하게 받아쳤다.
“2주 전에도 봤잖아요. 갑자기 그쪽이 저택으로 쳐들어와서.”
“에이, 그건 고객님과 오붓한 우정을 다지고 싶어서 그런 거죠.”
쳇, 슈페나는 고개를 숙이곤 꿍얼거렸다.
“우정은 개뿔.”
제법 긴 세월 동안 지지고 볶다 보니 이 수상한 정보상과도 미운정 정도는 든 탓에.
물론 완전히 신뢰하진 않았다.
그간 준 정보가 알짜배기여서 가끔 경계심이 흐물흐물해지기도 했지만, 슈페나는 마음을 다잡고 정보상을 힐끔 응시했다.
“근데 다 뭐예요? 곧 떠날 사람처럼 짐이 한가득…….”
“빙고.”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인 정보상이 톡톡 튀는 중저음으로 달래듯 얘기했다.
“너무 아쉬워는 말아요. 다시 만날 테니까.”
“네? 갑자기요?”
슈페나의 목소리가 자연스레 높아졌다.
당황스러웠다.
잘만 지내던 사람이 왜 떠난다고.
‘나 아직 정보상 더 부려 먹어야 한단 말이야.’
실은 다소 불순한 목적이었다.
정보상이 가져다주는 정보들이 너무 쏠쏠해서 도무지 놔줄 수가 없었으니, 그러자 정보상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위를 향했다.
가면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분명 웃고 있는 낯이었다.
그리운 누군가와 재회할 기쁨에 찬 사람처럼.
“네, 갑자기요. 이제 만나야 할 사람이 있거든요.”
슈페나의 눈매가 묘하게 좁혀졌다.
이내, 그녀는 후회남주에 빙의해 정보상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어딜 가요? 우리 계약도 있고, 나름 손발도 잘 맞아서 괜찮았는데..”
그리고 오늘 의뢰에 대한 정보는 알려주고 가야 할 게 아닌가.
계약서에 이런 상황은 명시를 안해놔서 무작정 막기도 애매한데.
뭐, 정보상도 개인 사정이 있을 테니까 잠깐의 일탈 정도는 이해 했다.
슈페나가 조금 불퉁스러워진 어투로 물었다.
“아니, 가면 언제 돌아오는데요?”
그에 돌아온 대답은 기가 찬 능청이었다.
“금방이요. 근데 고객님, 왜 저한테 집착하세요?”
“집착이요? 제가요?”
후회남주가 아니라 집착남주였 였나?
슈페나의 안면근육이 딱딱하게 경직되는 사이, 정보상은 능글능글너스레를 떨었다.
“제가 또 집착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알고.”
“아………예. 그, 가세요. 영영 가버리세요. 놔드릴게요.”
슈페나가 진담 반, 농담 반으로 말하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기분이 좀 묘하네.’
그래도 돌아온다니까.
아예 떠나갈 거면 몰래 빠져나갔겠지.
슈페나는 너른 마음으로 정보상을 보내주기로 했다.
그 표정에 정보상이 여유로운 손짓으로 카운터 책상을 툭툭 두들겼다.
“의뢰하신 정보는 여기에 놔뒀어요.”
슈페나가 힐끗 쳐다보더니 질문했다.
“그럼 그쪽이 자리 비운 사이에 의뢰는 어떻게 해요?”
“아, 저 이전에 있었던 공방 주인이 잠시 맡아주기로 했어요. 나무 늘보인데 뭐, 실력 있는 수인이니까 의뢰는 그냥 하면 돼요.”
말하는 걸로 보아 나무늘보와 내가 안면이 있다는 건 모르나 보네.
나무늘보가 비밀을 잘 지켰나 봐.
슈페나가 머리를 굴리고 있는 사이, 정보상은 방금 떠올랐다는 듯이 손가락을 튕겼다.
“아, 그리고 좋은 소식.”
정보상이 건넨 건, 몹시도 반가운 희소식이었다.
“전쟁이 곧 끝날 거예요. 그럼 안녕.”
또각또각, 가벼운 여인의 구두소리와 함께 문 위에 달려있던 종이 청명하게 울렸다.
정보상은 유유히 떠나갔다.
지가 괴도야, 뭐야.
백사자 가문의 파랑새 마님 77화
어쩌다 보니 텅 빈 공방에 슈페나 혼자 남게 되었다.
“진짜 가버린 거야..…?”
그녀는 머쓱하게 볼을 긁적이며 고개만 갸웃거렸다.
저 수인은 뭘 믿고 나만 혼자 내버려 둔 거야.
퉁명스레 중얼거린 슈페나가 정적이 흐르는 공방을 한 바퀴 빙거닐었다.
혹시나 건질 게 없나 싶어서.
그러던 중, 정보상만이 드나드는 카운터 안쪽에서 무언가를 주워들었다.
밀빛 머리카락.
‘정보상 머리 색은 이것보다 더 밝은 느낌인데.’
화사한 금발이 아니던가.
하지만 손님이 그다지 많지는 않은 한적한 공방에, 더구나 이런 구석에 머리카락이 떨어져 있다면.….
“정보상의 것일 텐데. 아니면 따로 친하게 지냈던 자가 있었나?”
더구나 밀빛 머리칼은 원작 여주의 상징이 아니던가.
문득 비밀장소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그때, 회중시계가 담겨있던 벨벳케이스 안에서도 밀빛 머리카락이 떨어져 있었지.
‘뭔가 관련이 있을 것 같은데……’
방금 들렸던 환청도 영 이상하고.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늘 주시하고는 있지만, 비밀스러운 수인이었으니.
볼 때마다 저 수상한 가면을 눌러쓴 채, 실없는 농담으로 무언가를 감추지 않던가.
‘그런데 왜 굳이 가면을 쓰는 거지? 얼굴이 다 가려지는 것도 아닌데.’
뭐가 있나?
다음에 보게 되면 한 번 벗겨볼까?
퍽 장난꾸러기 같은 생각에 슈페나는 괜히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고는 의뢰했던 정보가 담긴 종이를 집어 들었다.
“어?”
짧은 탄성이 새었다.
정보상이 예언을 적어놓았을 때와 같이 뒷면에 무언가 적혀있는 게 아닌가.
유려한 필기체로 쓰인 단어.
“고대어?”
아쉽게도 고대어에는 소질이 없어서 지금도 잘 읽지 못했다.
‘로네악 꽃 설화 해석했던 것처럼 카누스한테 물어봐야겠지.’
그냥 고대어를 배워볼까.
괜히 카누스한테 잔소리나 얻어들을 것 같아 망설여지긴 했지만.
아무튼 슈페나는 정보상이 남긴 서류를 챙겨 대신 문단속까지 해주곤 저택으로 돌아왔다.
슈페나는 목을 칭칭 감고 있었던 목도리를 풀며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편한 실내용 원피스로 갈아입고 나오니, 방 안에는 카누스가 와있었다.
슈페나는 꼬마 뱀을 흘깃 째려보며 볼멘소리를 내었다.
“뭐야, 노크 좀 하고 들어오라니까.”
“열 번은 더 했거든? 누나가 못들은 거지.”
카누스도 지지 않겠다는 듯 깍쟁이처럼 받아쳤다.
그 맹렬한 핀잔에 슈페나는 도르륵 눈알을 굴렸다. 그러곤 이내 탁 손뼉을 쳤다.
카누스에게 물어볼 게 있지 않은가.
그녀는 정보상에게서 받아온 종이 뒷면을 펼쳐 보여주었다.
“아, 맞다. 너 이게 무슨 뜻인지 알아?”
“고대어로 ‘반대’ 라는 의미의 단어네. 갑자기 뭐야?”
역시나 천재답게 간단히 해답을 건넨 카누스가 호기심을 내비쳤다.
슈페나는 그 궁금증을 칼 차단했지만.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 그건 됐고…….”
의외로 더는 캐묻지 않은 카누스가 슈페나를 향해 은밀히 손짓했다.
그에 그녀는 솔깃한 표정으로 다가가 고개를 기울였다.
“뭔데, 왜?”
카누스가 손을 입가에 가져다 대어 비밀스러운 차양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까치발을 서서 슈페나의 귓가에 재잘재잘 속닥였다.
“긴급 속보야. 내가 우리 부모님 이랑 연락하다가 알게 된 건데… 여우 쪽은 항복할 생각인가 봐.”
슈페나의 속눈썹이 놀람을 담아 한들대었다.
카누스는 의기양양하게 덧붙였다.
“원래 여러 수인 종족들이 연합해서 사자한테 덤볐던 거잖아. 그런데 그 주축이었던 여우가 항복한다는 건 내부분열이 시작될 거란 얘기지.”
“그럼 전쟁도 빨리 끝나겠네?”
정보상이 한 말이 맞았구나.
원작에선 워낙 길었던 전쟁이라 서술되어 있어서, 더 오래 걸릴 거라고 예상했었는데.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과도 같은 슈페나의 한마디가 입 밖으로 부서져 내렸다.
최근에도 연락을 해보니까 다들 무사히 잘 지내는 것 같던데.
이제 만날 수 있겠구나.
그래도 완전히 전쟁을 마무리 지으려면 조금 시일이 걸릴 터.
‘이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면 만날 수 있을까.’
슈페나는 부푼 마음을 안고 하루 하루를 보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앙상한 나무에 이파리가 파릇파 릇 피어오르는 계절, 봄이 되었다.
***
평상시보다 들뜬 분위기가 만연한 체드윅 가의 저택 안.
슈페나는 꼬마 뱀을 소파에 끌어다 앉히곤 방구석 패션쇼를 벌였다.
“카누스! 이 옷이 어울려, 아님 저게 나아?”
딱 봐도 비슷한 디자인의 하얀 원피스를 몸에 대어 비교하는 슈페나의 행동을 보며, 카누스는 젖쯧 혀를 찼다.
1시간 동안 이어지는 생난리에 질린 탓이었다.
슈페나는 질색하는 카누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스스로 결론을 지었다.
“아, 근데 둘 다 너무 수수하지 않나? 아니야, 너무 화려한 것도 좀 그렇긴 하지.”
“이 디자인은 어떠세요, 작은 마은 마님?”
옆에서 치장을 돕던 제인은 한술 더 떠 슈페나를 부추겼다.
보다 못한 카누스가 사력을 다해 빈정거렸다.
“뭐, 결혼식 초대받았어, 누나?
그냥 입어.”
“아니다. 이게 확실히 얼굴이 사네. 나 가을 뮤트톤인가 봐. 쿨톤은 확실히 아닌데……”
전혀 먹히지는 않았지만.
“아휴, 눈꼴시어.”
체념한 꼬마 뱀이 테이블에 놓인 아이스티를 벌컥벌컥 흡입했다.
슈페나는 개의치 않고 제인과 폭풍 수다를 나누었다.
“제인, 나 뭐 입지?”
“역시 처음 입으셨던 게 제일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작은 마님.”
이후로도 계속 고민하던 그녀는 결국 처음 골랐던 하얀 실크 소재의 원피스를 입었다.
마지막으로 제인의 손길을 따라 오랜만에 화장도 조금 했고, 슈페나가 준비를 다 마치고 나오니, 문밖에는 어머님이 서 있었다.
칸은 드물게 감탄하며 며늘아가를 향해 다정히 말했다.
“며늘아가, 옷이 참 잘 어울리는군.”
하늘하늘한 소재의 흰 원피스가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슈페나였으니까.
그 진심 어린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슈페나는 짐짓 잔망스레 꽃받침을 하더니 물었다.
“어머님, 저 예뻐요?”
“…무척.”
칸은 잠시 뜸을 들이며 심장을 부여잡다가 가까스로 긍정의 말을 내뱉었다.
그리곤 자상하게 슈페나를 에스코트했다.
“그럼 가자꾸나.”
그들은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며 정원으로 이동했다.
오색빛깔 꽃이 만발한 정원에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각기 다른 높낮이의 말소리가 종알종알 새의 노랫소리처럼 아름다운 선율을 자아냈다.
이렇듯 체드윅 가 사람들이 모인 이유가 있었다.
오늘이 승전보를 거둔 리카도르가 귀환하는 날이었으니까.
물론 리리엘라 언니랑 리헨테온을 비롯한 다른 가족들도.
그래서 슈페나가 그리 부산을 떤거였다.
‘오랜만에 보는 건데 잘 보이면 좋잖아.’
사실 슈페나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왜 이렇게까지 설레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녀는 어머님의 옆에 꽂꼿이 서 있으면서도 미어캣처럼 자꾸 주변을 곁눈질했다.
리카도르가 언제 오나 하고, 그때, 기민한 파랑새의 청각에 미세한 소음이 잡혔다.
바깥이 웅성거리는 듯한 느낌.
우레와도 같은 박수와 사자들의 환호 소리가 언뜻 들려왔다.
어머님도 그걸 알아챘는지 우아한 미소를 입가에 내걸곤 목을 가다듬었다.
아무래도 전쟁에서 돌아온 이들이 오고 있는 듯했다.
리카도르가 타고 있을 기나긴 증기자동차 행렬이 드디어 체드윅가의 정문을 두드렸다.
자동차 보닛 위에 박힌 황금빛 사자 모양 엠블럼이 요요히 승리의 빛을 발했다.
드드드, 자동차 특유의 소음이 고조된 분위기 속에서 배경음처럼 깔렸다.
‘다치진 않았겠지……?’
슈페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물기 어린 눈망울로 정원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행렬을 응시했다.
이윽고 천천히 움직이던 자동차들이 멈추고, 덜컥, 차 문이 열렸다.
길쭉한 사내의 다리가 그 문틈으로 빠져나왔다.
어깨에 달린 금빛 술, 목깃을 따라 박힌 세련된 푸른 보석, 그 안에 걸친 넉넉한 품의 흰색 셔츠.
멀끔한 제복을 차려입은 남자의 모습이 비쳤다.
제 하얀 머리칼을 대충 손으로 쓸어 넘긴 사내는 느른히 고개를 돌렸다.
단번에 눈이 마주쳤다.
어딘가 나른하고 퇴폐적인 기운이 묻어나오는 푸른 눈동자가 슈페나에게로 고정되었다.
슈페나의 입술이 저절로 달싹였다.
“…..… 리카도르.”
리카도르였다.
리카도르도 조금 놀란 얼굴로 느릿하게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예쁘게 양 갈래로 땋아 내린 중단발 길이의 하늘색 머리칼, 여전히 초롱초롱한 밤색 눈망울과 생기가 도는 핑크빛 뺨.
하나, 슈페나는 리카도르의 기억속 모습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키가 큰 건지, 젖살이 빠진 건지.
말랑말랑 귀여웠던 어릴 적보다 길쭉해진 체구.
반듯한 어깨까지 이어지는 길고 가는 목선.
여리여리한 하얀 원피스는 슈페나를 더 청초하면서도 사랑스럽게 보이도록 해주었다.
리카도르는 우두커니 서서 그런 슈페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했다.
‘끌어안으면 한 손에 허리가 잡힐것 같은데.’
이렇게까지 다른 모습일 줄 몰랐는데.
그간 상상했던 것보다 슈페나는 훨씬, 훨씬 더 예뻤다.
가슴께가 욱신거릴 정도로.
‘뭐지?’
리카도르는 괜스레 슈페나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늘 슈페나가 그리웠다.
그리웠고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
그렇지만 막상 마주하니까.….
‘이상해. 소중한 건 맞지만 역시 친구는 아니야.’
예전에도 계속해서 그를 괴롭혔던 감정의 정체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이 마음은….
리카도르가 그리 상념하고 있는 사이, 슈페나 또한 갈등했다.
다시 만나게 된다면 어떻게 인사를 건넬까. 손을 흔들면 리카도르는 똑같이 마주 인사해줄까.
홀로 거울을 보고 아무렇지 않은 척 수없이도 많이 인사연습을 했다.
그런데 정작 리카도르와 말을 섞으려니 몽글몽글 부끄러운 감정이 밀려 들어왔다.
‘너무 반가워서 그런가.’
아니면 리카도르가 너무 어른처럼 멋있어 보여서 그런 걸까.
그래도 용기 내서 인사하고 싶은데.….
슈페나가 성큼 거리를 좁혔다.
그러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의 어색함을 감추려 부러 더 발랄하게 물었다.
“뭐야. 나 안 반가워?”
“보고 싶었어.”
리카도르는 조금 먹먹해진 목소리로 답했다.
예전의 그 청량한 미성이 아닌, 남자답게 낮고 굵어진 감미로운 저음.
그 낯선 음성에 놀랄 새도 없이 리카도르는 슈페나를 품에 안았다.
그녀의 허리가 예상대로 그의 손아귀에 전부 잡혔다.
“……?”
어?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놀란 슈페나가 흠칫 몸을 떨었다.
그러다 괜히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나도.”
슈페나의 입가에도 배시시 미소가 번졌다.
그녀가 이제는 듬직해진 리카도 르의 등을 토닥토닥 다독였다.
그에게선 어딘가 익숙하고도 좋은 냄새가 났다.
슈페나와 리카도르는 한참을 부둥켜안고 있었다.
“그..… 이제, 그만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슈페나는 머뭇머뭇 리카도르를 올려다보았다.
그제야 서로의 몸이 떨어졌다.
곧이어 리카도르의 눈길은 슈페나의 발밑으로 향했다.
“신발끈, 또 풀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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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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