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10)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10)화(10/326)
잘 웃으며 기어 다니던 내가 뜬금없이 울음을 터트리자 가장 놀란 것은 곁눈질로 나를 지켜보던 후궁들이었다.
“아까까지는 웃고 계셨는데 왜 갑자기 이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죄 없는 후궁들은 당황해서 고개를 조아렸다.
그 사이에서 입을 연 것은 나가려던 나를 붙잡고 있던 손의 주인이었다.
“아바마마, 누이는 누군가를 찾는 듯했습니다.”
“누군가를 찾았다고? 그게 무슨 말이더냐, 경원군.”
나는 그제서야 나를 붙잡은 이가 이 방에 있던 유일한 남자 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후궁들 사이를 지나다니며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한 명 한 명 얼굴을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경원군의 말에 그 옆에 있던 조금 창백한 안색의 여인이 말을 이었다.
“전하. 아기씨께서 생모를 그리워하고 계신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그럴지도 모르겠소.”
“전하, 감히 신첩이 청하옵건대 윤 상궁이 왕녀 아기씨를 모시게 해 주시옵소서. 갓 태어난 어린 아기씨께서 신열을 앓을 적 윤 상궁이 제 몸을 돌보지 못하고 성심을 다해 돌봐 왔다 들었사옵니다. 총명하신 아기씨께서 그런 윤 상궁의 정성을 어찌 쉬이 잊겠사옵니까.”
그리 말하며 여인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과연 선빈이 왕녀를 깊이 염려하는구려.”
선빈이라 했으니 영빈과 마찬가지로 정1품 빈(嬪)인 모양이었다.
‘나를 언니한테 보내 주려는 건가. 좋은 사람이네…… 아?’
훌쩍거리며 고개를 들자 고개를 숙인 선빈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보였다. 밑에서 올려다보는 각도인 내 눈에만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였다.
‘오. 역시 정1품 빈 정도 되려면 저 정도는 해야 하나.’
그냥 평범한 ‘좋은 사람’이 아닌 모양이었다.
지금 저렇게 나를 칭찬하는 척 모정(母情)을 강조하며 나를 생모에게 보내는 것으로 본인은 점수를 따고, 나를 데려가려 했으나 제대로 돌보지도 못한 영빈에게는 은은하게 엿을 먹인 셈.
‘꽤 고단수인데? 영빈이랑 사이가 안 좋은 건가.’
어찌 되었건 나로서는 해가 될 것이 없었다.
선빈이 영빈처럼 나한테 해코지를 한 것도 아니었고.
‘혹시 아들이 있어서 사이가 안 좋은 걸까.’
적의 적은 동지라는데 잘된 일일지도 몰랐다.
나는 나를 붙잡고 있던 남자아이의 손을 뿌리치고 슬금슬금 생물학적 아비에게로 돌아갔다.
“히잉.”
“그래, 네가 실망한 모양이구나.”
“우우우.”
“괜찮다. 곧 만나게 해 주마.”
진짜지? 나 믿는다? 어? 믿는다?
나는 눈을 반짝이며 생물학적 아비에게 꼭 매달렸다.
지금 세상에서 믿을 수 있는 내 편이라고는 생물학적 아비와, 생명의 은인과 나의 생물학적 어미이기도 한 언니뿐이었다.
앞에 두 명은 바빠서 나를 계속 돌볼 수 없으니 나는 언니에게 가야 안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왕이 그렇게 호언장담했음에도, 또 무슨 과정이 필요한지 나는 그날 이후로도 여러 날이 지나도록 언니를 만나지 못했다.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던 나도 슬슬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삐뚤어질 테다.’
부우욱-
“어머나, 아기씨! 심심하셨나 봐요. 자, 여기 이쪽이 잘 찢어지는 종이이옵니다.”
퍽퍽!
“아이고, 아기씨. 여기 이 얇은 책을 던지시면 되옵니다. 큰 책은 무거우시지요?”
와당탕-
“자, 아기씨. 여기 다양한 굵기의 붓이랍니다. 마음껏 가지고 노셔요.”
“끼야우!”
방바닥을 굴러다니며 온몸을 던지는 나의 갑작스러운 폭주에 유일하게 당황한 왕은 상궁들에게 물었다.
“시아가 왜 저러는 것인지 알겠는가?”
“심려치 마시옵소서. 자연스러운 발달 과정의 하나이옵니다. 오히려 지금껏 너무 얌전하셨던 것이옵니다.”
“삐에에엥!”
아니다!!
‘이럴 수가…… 말썽을 부려도 다들 올 것이 왔다는 기특한 눈으로 보며 장단을 맞춰 주고 있어……!!’
원통한 마음에 이불을 퍽퍽 내려쳤으나 워낙에 폭신해서 먼지만 날렸다.
그런 나를 보며 대전 상궁과 내관들이 흐뭇한 목소리로 나를 칭찬했다.
“아기씨께선 어찌나 의젓하고 얌전하신지 모르겠사옵니다.”
“책도 그저 아무것도 없는 구석에 던지기만 하시지 중요한 문서를 찢거나 더럽히지는 않으시지 않사옵니까?”
아. 들켰는걸…….
진짜 아기들에 비하면 나의 진상력이 너무 부족했다…….
어쩔 수 없었다. 그것은 인간의 양심…….
성인까지 살아온 나의 존엄…….
중요한 공문서는 물론이고 차마 수작업으로 제작되는 이 시대의 책을 더럽힐 수 없었다.
난 전생에 대량 생산된 책에도 밑줄 긋거나 접는 건 극혐했다고! 그런데 여기선 더 귀한 책들을 어떻게 망가트려!
‘진상도 부려 본 놈이나 부리는 거지.’
멀쩡한 물건 망가트리는 것도 싫고, 지저분하게 어지럽히는 것도 싫고, 아까운 음식 버리는 것도 싫으니 선택지가 너무 좁았다.
“빼애앵!”
“아기씨께서 이제 졸리신가 보옵니다.”
며칠간 열심히 진상 행각을 연기했으나 결국 내가 먼저 지쳐 버렸다.
나에게는 아기의 체력이 있으니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정상적인 성인의 정신으론 무리였다.
며칠간 난리를 피우던 내가 하루아침에 다시 얌전해지자 오히려 당황한 생물학적 아비가 걱정스러운 듯 내 이마를 짚었다.
“열은 없는데, 오늘은 안 하는 것이냐?”
“아우우.”
사람을 진상 취급하다니! 확 저 수염이라도 뽑아 버릴까 보다!
‘어, 방금 그거 좀 괜찮은 생각 같은데.’
하지만 하루 24시간 붙어 있다 보니, 가끔 나와 노잼으로 놀아 줄 때 외에는 워커홀릭 수준으로 일만 하고 있는 아저씨의 수염까지 뽑아 괴롭히는 건 역시 좀 너무한 거 같아서 참기로 했다.
진상질도 못 하겠고, 방 안에 있던 구경할 만한 것들은 이미 나의 진상질 기간 동안 치워져서 볼 것도 없고. 결국 귀찮아진 나는 방 안을 뒹굴다 그대로 엎어져 잠이 들었다. 생물학적 아비가 나를 안아 들어 이불 위에 뉘어 주는 것이 잠결에 희미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깨어 보니 어쩐 일로 방 안에 사람이 많았다.
‘승지랑 사관도 들어와 있는 걸 보면 정무에 관한 일이겠지만…….’
뒹굴거리다 꾸물꾸물 기어나가 고개를 들자 마침 생물학적 아비의 말을 받아 적다 비슷한 타이밍에 고개를 든 사관 한 명과 딱 눈이 마주쳤다.
“…….”
“…….”
몇 초간 말없이 눈만 마주치고 있던 사관이 먼저 시선을 피했다.
생물학적 아비에게 이를 줄 알았는데 모르는 척해 주는 건가?
고개를 갸웃거리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니 대신 할아버지들이 잔뜩 있었다.
‘오, 사극의 한 장면 같아.’
나는 왕이 상소를 읽는 것을 확인하고 열심히 몸을 움직였다.
근데 어쩐지 나를 보는 할아버지들의 눈빛이 흔들리는 거 같다?
***
예문관(藝文館) 정9품 검열(檢閱) 권상익은 자신을 말똥말똥 바라보는 아기의 시선을 피하고 다시 사초 작성에 집중했다. 아무리 혼자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지만 사관(史官)이 한눈을 팔다 기록을 누락한다니 아니 될 말이었다.
하지만 저 아기씨가 어디 보통의 왕녀 아기씨던가.
무려 얼마 전 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좌상 대감의 수염을 붙잡고, 얼굴을 무자비하게 타격하신 분이 아니시던가. 당시에도 사관으로 입시해 사초를 쓰다 그 현장을 직관했던 권상익의 기억에는 아직도 그 장면이 눈에 선했다.
특히나 이미 국구(國舅)라도 된 듯 거들먹거리는 좌상을 싫어하는 문관이나 선비들 중에서는 그날 일을 안주 삼아 낄낄거리며 소심하게 축배를 드는 이들도 있다고 들었다.
좌상의 체면이 다소 상한 일이긴 했으나 상대가 병약한 데다 아직 걷지도 못하는 어리디어린 왕녀 아기씨이다 보니 다들 농담처럼 ‘그건 좌상 대감께서 잘못하셨다.’라며 웃어도 대놓고 화도 못 내는 모습이 더 통쾌했다고.
하긴 저 작은 아기씨가 주상전하의 수염을 뽑았대도 누가 뭐라 하겠냐마는.
그날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생생한 목격담을 듣고 싶다고 몰려드는 바람에 피해 다니느라 한동안 바빴던 기억이 아직 채 가시지도 않았으니, 아기씨의 움직임에 저도 모르게 손이 굳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권상익은 스스로를 정당화했다.
그리고 그건 그날 사건을 직접 목격했거나, 소문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다른 대신들도 별반 다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전하께서 상소문에 집중하고 계신 사이 아기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이를 눈치챈 대신들이 긴장하며 은근슬쩍 수염을 가리는 것이 보였으니까.
남이 당하는 건 재밌지만 내가 당하는 것까지 즐거울 일은 아닌 법이었다.
덕분에 권상익은 제 입가가 실룩거리지 않도록 단속해야 했다.
그리고 아기씨께서 깨어나신 것을 전하께 고해야 하나 하는 고민과 동시에 이것도 기록을 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참고로 그날의 폭행 사건은 일단 사초(史草:사관이 적은 초고. 나중에 이 초고를 모아 실록을 편찬한다.)에는 적어 두었다. 나중에 실록에까지 기록될지는 모를 일이지만.
왕녀 아기씨는 전하의 눈치를 보듯 뒤를 확인하며 꼬물꼬물 기어가더니 전하께서 상소문에서 눈을 떼는 순간 우의정 대감의 뒤로 쏙 숨어 버렸다.
“?!”
“?!”
수염을 보호하느라 반쯤 얼굴을 가리고 있던 정승들은 왕녀가 시야에서 사라진 사실에 안도해야 할지, 아니면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사실에 불안해해야 할지 모를 어정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대신들의 사정을 알지 못하는 주상 전하만이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전주 부윤과 판관의 파직을 반대하는 이유가 무엇이오?”
“전하. 전주 부윤 김환식은…….”
그리고 대신들 역시 모르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
열심히 사초를 적으면서도 말이 끊기는 사이사이 왕녀 아기씨의 행방을 좇던 권상익은 누군가의 옷자락 사이에서 나타난 자그마한 손가락 하나를 확인하고 서둘러 눈을 내리깔았다.
하지만 시선은 자연히 작은 손가락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주상이 다음 상소로 시선을 돌리자 기다렸다는 듯 작은 손가락이 움직이며 대신들 사이에서 왕녀의 얼굴이 쏘옥 올라왔다.
“!”
이번에도 권 검열과 눈이 마주치자 왕녀는 소리 없이 배시시 웃더니 다시 노신(老臣)들 사이로 사라졌다. 앞에 있는 이들일수록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모양이었지만 뒤에 있는 이들은 왕녀의 장난을 눈치챈 듯 얼굴에 설핏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당상관(堂上官)쯤 되면 자식이나 손주가 없는 경우가 드물었다.
울고 떼쓰는 것보다야 이쪽이 낫다고 생각했는지 왕녀를 저지하는 이는 보이지 않았다.
“평안부 성안에 화재가 나 민가가 3백여 호가 불에 탔다고 하옵니다.”
“휼전(恤典)을 시행하여 이재민들에게 관향미를 나누어 주고 한 해 동안 부역을 면제토록 하시오.”
아직 걷지 못하는 왕녀 아기씨는 부지런히 대신들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조금 인상이 좋아 보이는 대신과는 히죽 웃으며 시선을 맞추는 모습도 보였다.
참 보기 드문 광경이었으나 이걸 적어 가면 분명 예문관 선배들이 자신을 가만두지 않겠지. 권상익은 지금 눈에 보이는 풍경을 마음에만 새겨 두기로 했다.
그리고 왕녀 아기씨의 순조로운 술래잡기와는 대조적으로, 대전 분위기는 험악해지고 있었다.
“전하. 그것은 아니 되옵니다.”
“경들은 어찌하여 늘 대안을 마련할 생각은 않고 아니 된다는 말은 반복하는 것이오.”
“하오나 전하.”
“듣기 싫소!”
한창 술래잡기를 하던 왕녀도 왕이 언성을 높이자 놀란 모양이었다. 전하의 위치에선 보이지 않겠지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당황한 아기씨의 얼굴을 본 권 검열이 이번에야말로 울음을 터트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그때, 왕녀는 뜻밖에 이쪽으로 기어왔다.
“?”
“으헤.”
히죽 웃으며 고사리 같은 손을 먹을 잔뜩 갈아 놓은 벼루에 찰팍 소리가 나도록 담근 왕녀는, 사관들이 쓰고 있던 사초에 손바닥을 그대로 내리찍었다.
타다다닥! 탕탕!
그리고 더 버티지 못했는지 바로 주저앉고 말았다.
어전에는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시아? 언제 거기에.”
아까부터 잘 놀고 계셨다고 말할 수 없는 신하들은 그저 굳게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왕은 다른 이유로 놀랐다.
다시 사관들이 사초를 쓰던 서안을 붙잡고 일어난 왕녀는 먹물이 묻어 지저분해진 손을 닦아 달라는 듯 앞으로 내밀며 왕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아우.”
한 발짝, 두 발짝, 세 발짝, 네 발짝, 다섯 발짝.
대신들조차 숨을 죽이고 지켜보는 사이. 왕녀의 첫걸음마는 다섯 발짝으로 끝나고 다시 앞으로 엎어졌다.
“아우?”
어느새 후다닥 다가온 대전 내관이 왕녀의 손을 닦아 주곤 왕의 품에 안겨 주었다.
왕의 노기는 오간 데 없이, 기쁨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래. 시아가 이제 첫걸음마를 시작했구나.”
“우우.”
“허허허.”
얼음장 같던 대전에 뜬금없이 훈기가 도는 듯했다.
과거 주상의 불같던 성미를 기억하고 있는 노신들은 모두 왕녀 아기씨에 대한 왕의 총애가 생각보다 깊다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