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101)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101)화(101/326)
‘대리청정(代理聽政)이라…….’
얼마 전부터 부왕이 은연중에 내비치고 있는 태도에 세자, 이화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부왕의 심중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부왕은 이미 지쳤다.
몇 해 전 성원 세자를 잃은 후부터 지친 기색이 역력한 부왕은 그날부터 하나 남은 아들을 흠 없는 세자로 만들어 내는 데에 온 힘을 다했다.
마치 그것이 마지막 의무인 것처럼.
세자빈을 들이는 것을 거부하는 세자의 뜻을 용납하는 것도 그 때문인지도 몰랐다.
‘스스로의 자리를 온건히 한 후, 원하는 세자빈을 들이라는 뜻이신 걸까.’
누구보다도, 정궁(正宮)은 신뢰할 수 있는 이를 들여야 했다. 그렇지 않다면 평생 등 뒤를 불안해하며 보내야 할 테니까.
덕분에 세자빈이 해야 할 일은 중전과 어린 옹주가 대신하고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화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규장각 내부에는 세자 자신이 선별한 젊은 인재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 몇몇은 세자와 마찬가지로 손을 멈춘 채 문가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
“…….”
그러다 문득 세자와 눈이 마주친 걸 깨달은 이들은 놀라서 다시 고개를 처박고 손을 움직였다.
‘저러는 게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만.’
곧 신시(申時:오후 3~5시)이니 다들 출출할 시간이었다.
늘 이맘때가 되면 내관이 간식을 가지고 오는데, 며칠에 한 번씩은 평소와는 다른 별식을 먹곤 했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그 며칠에 한 번꼴인 별식을 먹는 날이었다.
나이나 품계와 관계없이 다들 그 별식을 애타게 기다리는 것을 보면 인간이란 이렇게 단순한 거구나 싶어 조금 재미있을 정도였다.
“세자 저하. 옹주 자가 드셨사옵니다.”
그들이 그리 애타게 기다리는 것은 바로 옹주가 가져오는 간식들이었다.
문이 열리고 작은 소반을 든 시아와 그 뒤를 따르는 궁녀들이 나타났다.
본래 이런 것은 세자빈이 챙기는 법인데 세자빈 대신 옹주가 챙겨 주고 있으니 조금 미안하기도 했다.
오늘 간식은 고기와 채소를 넣어 만든 완자를 식빵으로 감싸 만든 음식이었다.
‘이름을 좀 지으라고 했더니 귀찮다고 적당히 완자빵이라고 부르자길래 어감이 좋지 않다고 거부했더니 여전히 까탈스럽다고 툴툴댔지.’
나중에 신하들에게도 물어보니 다들 애써 웃음을 참으며 ‘그 이름은 좀…….’이란 반응이었던 것을 보면 자신이 까탈스러운 건 아니라고 세자는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런 거 가져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는데도 뭘 이렇게 자꾸 가져오느냐.”
“세자 저하께서는 필요 없을지 몰라도 다른 사람에게는 필요할 것입니다. 싫으시다면 세자 저하 몫은 소녀가 다시 가져가겠사옵니다.”
“어허, 내가 언제 필요 없다고 했느냐.”
이러니저러니 해도 시아가 가져오는 간식들은 맛있다.
게다가 무엇보다, 누가 가져오는 것들보다 안심하고 먹을 수 있었고.
사실은 누구보다 세자 자신이 옹주가 가져오는 간식들을 가장 기다리고 있었다.
“저하. 옹주 자가께서 오셨는데 조금 쉬시는 것이 어떠하신지요.”
“일의 흐름이 끊기면 좋지 않은데.”
“아닙니다! 딱 쉬기 좋을 시간에 오셨으니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되옵니다!”
다들 간식에 눈이 멀었구나.
조금 한심했지만, 세자는 못 이기는 척 주변에서 권하는 대로 옹주와 함께 편한 곳으로 가기로 했다.
‘내가 있는 것보다는 없는 편이 더 마음 편히 쉴 수 있겠지.’
그러고 보니 이런 걸 먼저 말한 사람도 옹주였다.
따로 자리를 잡고 마주 앉자 제 몫의 간식까지 챙겨 온 시아가 오늘 가져온 간식에 들어간 재료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자연스레 먼저 음식을 먹었다.
이 아이는 꼭 기미라도 하는 것처럼 먼저 음식을 먹는데 그게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세자는 한숨을 쉬며 완자빵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맛있군.’
시아가 가져오는 음식이 맛이 없던 적이 없다. 누구보다 시아 본인이 가장 입맛이 까다로운 사람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하달까.
“어때? 후추를 더 넣는 게 좋을까?”
“이 정도가 딱 좋지 않겠느냐?”
그렇게 음식 얘기로 시작해 중요하지 않은 잡담을 이어가던 중 시아가 입을 열었다.
“요즘은 별일 없지?”
“왜?”
“또 연회 하겠다는 거 아닌가 해서?”
“한동안은 안 한다.”
물론 아예 안 한다는 얘기는 아니었지만.
“흐음.”
“왜 그러느냐?”
“얼마 전에 종친들을 봤는데 나한테 불평불만이 있는 거 같아서.”
“누가 말이냐?”
“영천군.”
“아아. 영천군 말이냐.”
영천군은 본인이 주선한 혼사가 어린 옹주 때문에 깨진 것에 아직도 연연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른스럽지 못한 태도였다.
조카의 혼사인데 신중하지 못했던 것을 미안해하고, 오히려 옹주에게 고마워해야 옳지 않은지.
내친김에 불만을 쏟아 내기로 했는지 시아가 말을 이었다.
“파평 부원군도 나한테 불만이 많아 보이지.”
“흠. 그건 좀 이상하구나. 부원군이 너를 싫어할 이유는 없지 않으냐. 애초에 그리 마주칠 일도 없는데.”
“음. 그렇지? 혹시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나?”
“글쎄.”
그러고 보면 예전 성원 세자 처소의 사람들도 시아를 좋아하지 않았다.
‘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거야, 뭐 이해할 수 있는 범주였지만.’
성원 세자가 시아를 싫어했다면 모를까, 힘없는 후궁 소생의 어린 옹주를 그렇게 싫어할 이유가 대체 뭐가 있었는지.
‘……어마마마는 뭔가 알고 계시지 않을까.’
자신보다야 내명부 생활이 길었던 중전께서 뭔가 알고 계실 가능성이 높지만, 이제 와 새삼 그 얘기를 꺼내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요즘 아바마마와는 어때?”
“어떻고 말고 할 것이 있겠느냐. 그저 조금 옥체가 미령하신 듯하여 조금 걱정되는구나.”
부왕이 대리청정을 염두에 두고 계신다는 것은 이 작은 누이동생도 알고 있을 터였다.
지금 이 나라에서 왕이 가장 총애하는 이를 꼽으라면 아마 세자보다도 여기 있는 수영 옹주가 아닐까.
후계자와 총애는 별개이니까.
그러고 그 사실에 질투를 하기에는 옹주가 너무 작았으며, 세자는 이미 어른이었다.
물론 저 작은 옹주가 겉보기와는 달리 이미 많은 일을 하고 있었지만.
“그러고 보니 근래에 너와 비교당하는 종친들이 적지 않더구나.”
“누가 그런 무의미한 비교를 하고 그런담.”
“덕분에 이상한 헛꿈을 꾸는 이들도 있지.”
저 어린 옹주도 저렇게 많은 일들을 하는데, 종친이라는 족쇄만 없었다면 자신들도 명성을 쌓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정작 본인은 명성에 별 관심이 없어 보이는데.’
차라리 재물이라면 모를까.
하지만 그 재물을 풀어 갈 곳 없는 이들을 먹여 살리고 살아갈 길까지 만들어 주고 있으니 그 그릇이 그런 졸렬한 종친들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이 누이동생은 도리어 제 오라비를 걱정하고 있었다.
“오라버니가 혼인을 안 하면 진짜 헛꿈 꾸는 종친이 나올지도 모르는데. 정말 이대로 괜찮겠어?”
“그런 자들이 나오면 일찌감치 싹을 밟아 버리면 그만이지 않겠느냐.”
“계속 이러면 아들이 있는 종친들은 그런 꿈을 꾸게 될지도 몰라.”
정말. 어린아이 같은데 말하는 것을 보면 전혀 어리지가 않았다.
하기야 옹주 때문에 시작된 일들이 적지 않으니.
숫자와 도표 적용부터 시작해, 여의의 분리와 의서 편찬까지.
생각해 보면 의외로 작지 않은 일들이었다.
‘하가하지 않고 궁에서 지내는 게 어쩌면 이 아이에게는 더 맞지 않을까.’
본인은 물론 하가할 필요까진 없으니 그냥 사가로 나가 독립하겠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글쎄. 이 오라비도 어느 정도는 주의를 기울이고 있단다.”
“본인이 뜻이 없어도 주변에서 부추기는 이들이 생기기 마련이고.”
“나에게 빈궁이 있다 해도 아이가 생기지 않을 경우도 있겠지만, 어느 쪽이든 결정권자는 그들이 아니란다.”
아직은 자신이 결정권자가 아니기에 이렇게 두루뭉술하게 넘기지만 그들에게 휘둘릴 생각은 없다는 세자의 말에 옹주는 조금 안심한 얼굴이었다.
“참, 은화군의 부인이 얼마 전에 회임을 했다더구나.”
“은화군이면 흥화군의 아들? 부인이 회임했어? 나도 아직 못 들었는데 오라버니 소식이 빠르네?”
“뭐 관료들 중에 지인이 있으면 소식이 더 빠른 법이지. 왕실에 전하는 건 조금 안정된 후가 아니겠느냐.”
“음. 은화군이 오라버니보다 조금 나이가 많던가.”
시아는 뭔가 곰곰이 생각하는 듯했다.
저 조그마한 것이 무슨 생각이 그리 많은지 툭툭 치면 뭔가 재밌는 것이 턱턱 나오는 것이 이 어린 동생과 대화하는 즐거움이기도 했다.
“그래. 요즘에는 뭘 하고 있느냐?”
“취미 생활.”
“취미 생활?”
“응. 맞아, 얼마 전에 말인데.”
시아의 취미 생활은 꽤 범위가 넓었다.
시영원 운영도 취미라고 지칭하고 있을 정도였으니까.
‘게다가 엉뚱한 짓도 많이 하지.’
지금 먹고 있는 음식들도 그렇고, 본인은 아이들 벌칙용으로 만들었다는 그 놀이기구들도 그렇고.
자라지 않는 것이 안타깝지만, 이리 멋대로 헤집고 다닐 수 있는 것도 그 덕분이라 생각하면 이상한 기분이었다.
‘시아가 자라 하가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쓸쓸하겠지.’
그렇게 상념에 빠져 있는 사이, 누이동생의 원한에 찬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한테 사기 치려고 한 놈들을 포도청에서 못 잡았고 놓쳤다고 하더라고.”
“아……. 그건 나도 들은 것 같구나.”
옹주란 사실을 알고 한 일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고액 사기 사건이었다.
안타깝게도 얽혀 있는 피해자들 대부분이 자신은 그런 놈들에게 속지 않았다고 부정하는 바람에 계속 꼬리 잡는 게 늦어졌는데 시아가 대뜸 신고해 버렸다고.
‘신분패를 묘한 용도로 쓴단 말이지.’
시아의 신분패는 이전에 길에서 기생들을 희롱하는 되먹잖은 놈들을 마주쳤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부왕이 시아에게 만들어 준 것이었다. 본래대로라면 하가할 때 만들어 줄 생각이셨겠지만 그런 날이 언제 올지 모르고, 시아가 또 궁 밖을 돌아다니는 일이 생길지 모른다고 만들어 주셨다.
직계 왕족이라는 의미로 사조룡이 새겨진 옥패였으니 그걸 받아 든 포도대장도 꽤 기겁하지 않았을까.
본인이 한 일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좋은지, 시아는 여전히 사기꾼들을 향해 분통을 터트리고 있었다. 실은 이것 때문에 푸념하러 온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흉악한 놈들 같으니.”
“그래, 나도 들었다. 심지어 어린아이를 납치하기도 했다지. 무사히 돌아왔다지만 도성의 치안이 그리 어설퍼서야…….”
“좀 군기를 잡는 게 어떨까?”
“포도청을 말이냐.”
“응.”
“흐음. 그것도 좋은 의견이구나.”
이런 일에 그리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는 아이가 아닌데 이번에는 정말 화가 난 모양이었다.
“너는 손해 본 것도 없다면서 어찌 그리 화를 내느냐.”
“내가 사려고 했던 물건은 결국 못 찾았는걸.”
“사고 싶은 물건?”
“고려 시대 유물이라고 해서 기대했는데! 위작만 있었다고!”
“아아.”
과연. 잃은 게 없더라도 기분상으로는 손해 본 기분이라는 뜻이었다.
벌써 그렇게 모인 골동품들이 적지 않을 텐데 그런 쪽으로는 의외로 탐욕스러웠다.
“대체 얼마나 모으려는 거야.”
“그렇게 많이 사지 않았어…….”
조금 골려 줄 생각으로 꺼낸 말에 생각과는 달리 소심한 대답이 돌아왔다.
방금 전까지의 활발하던 모습은 어디 가고 갑자기 목소리가 시무룩해지자 세자가 더 당황해 서둘러 손을 내저었다.
“아니, 뭐라고 하는 게 아니라.”
“하지만 곧 한정판 소설 나올 거니까 그걸 위안 삼아야지.”
“어, 그래…….”
“그럼 오라버니, 저는 이만.”
달래 주려 뻗은 손이 무색하게, 시아는 웃으며 일어났다.
그렇게 바람처럼 사라지는 시아를 보며 계속 세자의 뒤를 따르던 송 내관도 흐뭇하게 웃었다.
“옹주 자가께선 늘 활기가 넘치십니다.”
“어린아이 같은 게지.”
늘 저리 밝은 얼굴로 다니니 가끔 조용해지면 얼마나 무서운지.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모르겠지만 그만은 알았다.
그날, 독이 든 곶감을 먹던 누이동생의 얼굴을.
살면서 가장 무서웠던 날을 꼽으라면 그날 외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