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105)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105화(105/326)
그리고 동시에, 누군가가 내 머리를 가볍게 누르며 내 앞을 스쳐 지나갔다.
“죄송한데, 저 안에 계신 분들 일행이시죠? 대체 이거 언제쯤 끝난답니까?”
“너는…….”
나는 몸이 굳은 채 방금 날 지나쳐간 손의 주인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지금 잘못 움직였다가는 또 들킬 것 같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대신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저들한테 말을 건 걸 보면 아주 관계가 없는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저 목소리, 어쩐지 예전에 들은 기억이 있었다.
‘그때 그 애, 아닌가?’
슬쩍 고개를 들어보니 덩치는 크지만 다소 앳되어 보이는 옆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기억하는 얼굴이 맞았다. 한 번 본 사이긴 하지만.
긴장한 내가 침을 꿀꺽 삼키는 사이 사내들은 소년의 말에 뭔가 저들끼리 뭔가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거리가 있어서 무슨 말을 하는지까지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저놈은 뭐냐.”
“그 착호군을 따라온 어린놈 아닙니까?”
“……예에, 숙부님이 나오실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너무 오래 걸리시는 것 같아서요. 마냥 기다리려니 아무래도 좀이 쑤셔서.”
건들거리는 소년의 말에 사내들은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내뱉었다.
“어른들이 중요한 말씀 나누는데 방해하지 말고 얌전히 기다려, 곧 끝날 테니까. 하여간 이래서 어린놈들은.”
“하하, 예. 알겠습니다.”
영양가 없는 대화였으나 사내들은 그것조차 맘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어린놈이 허우대만 커다래서는…….”
“그러니 착호군으로 키우려 한 게 아니겠나. 가자.”
“예.”
사내들은 중얼거리면서도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사내들의 기척이 사라지자 소년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괜찮아? 일어날 수 있겠어?”
“……응.”
동안인가 아닌가 고민했는데 그냥 어린놈이 맞구나…….
내가 일어나지 않고 뜸을 들이고 있자 소년은 대뜸 내 겨드랑이를 잡아 달랑 들어 올렸다.
무슨 강아지 들듯이 가뿐하게 들어 올리는데, 이건 내가 가벼운 건지 얘가 힘이 센 건지.
“질 나쁜 사람들은 어린아이라도 거칠게 대하는 놈들이 많으니까 조심해. 위험한 사람들이면 어쩌려고……. 어?”
“…….”
그리고 나무 그늘에서 벗어나 내 얼굴을 확인한 소년이 나를 알아본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더니 뭐가 그리 반가운지 환한 얼굴로 웃었다.
보아하니 이놈도 여자깨나 울렸을, 아니, 울릴 상이었다,
“그때 그 아기씨 아닙니까?”
“응…….”
그러게, 너도 신기하지?
나도 신기하다. 그때 나 구해 준 그 소년을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다니.
도와준 건 고맙긴 한데…….
‘얘, 정말 저놈들이랑 아무 관련 없는 거 맞을까?’
의혹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 하지만 원래 여기…… 사람 같지는 않았는데?”
여기가 기방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는지, 내가 바닥에 발을 디디는 걸 확인한 소년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당시에 내가 아기씨라고 불리는 걸 들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판단 기준이 의심스럽기는 했지만 나도 의아해서 물었다.
“저, 아까 그 아저씨들이랑 아는 사이야?”
“아는 사이는 아니고 숙부님이 볼일이 있으셔서…… 그보다 대체 이런 곳에서 위험하게 뭐 하는 겁니까.”
내가 아까 그 남자들이 간 방향을 보며 슬슬 도망가려는 걸 눈치챘는지 소년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왜 그러십니까? 저 사람들과 아는 사이입니까?”
“…….”
쫓아가서 좀 더 엿듣고 싶은데 만에 하나 얘가 저놈들과 한패라면 곤란했다.
저놈들한테 내 얼굴은 안 들켰으니 그나마 다행이긴 한데.
“……썩 질이 좋은 사람들 같지는 않으니 조심하는 게 좋을 겁니다.”
“너는?”
“어? 아아. 저 나쁜 사람 아니든요?”
나쁜 사람이 스스로 나쁜 사람이라고 하는 거 봤나.
“나 이제 갈 거야. 비켜.”
“아무리 봐도 저 뒤를 쫓아갈 기세인데요.”
“안 쫓아가.”
장난치듯 내 진로를 방해하던 소년은 내 말이 못 미더운 듯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렸다.
“영 불안해서 안 되겠다.”
“어? 내, 내려 줘!”
쟤들 수상쩍은 소릴 해서 들어 놔야 한다고!
“아무래도 말 들을 거 같지가 않아서.”
소년은 내 몸을 달랑 들어 올리더니 그대로 안고 나무에 도움닫기를 하며 훌쩍 담을 뛰어넘었다.
“!!!”
“읏차.”
난생처음 겪은 익스트림 액션에 나는 소리를 지르는 것도 잊고 감탄했다.
‘오, 이런 걸…… 파쿠르라고 하던가?’
아닌가? 이제 현대에서 쓰이던 단어는 가끔씩 헷갈리곤 했다.
“앗, 미안. 놀랐죠?”
“음. 아니. 재밌었어.”
내 대답에 소년이 푸핫, 하고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튼 큰길까지 데려다드릴 테니 돌아가시죠. 어차피 우리 숙부는 금방 끝날 거 같지도 않으니……까!”
다음 순간, 나를 안아 들고 다정하게 웃고 있던 소년의 얼굴이 순간 굳으며 서 있던 자리에서 훌쩍 몸을 뗐다.
“??”
“어이쿠, 저한테 무슨 볼일이십니까?”
소년이 나를 꼭 붙들고 있어서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지만 아무래도 누군가와 대화하고 있는 듯했다.
‘설마, 아까 그놈들이 나를 발견한 건가?’
놀라서 숨을 삼키는데, 뜻밖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 겸사복의 목소리였다.
“지금 안고 있는 그 아이, 당장 내려놓아라.”
“와. 이 아기씨, 참 인기가 많으시네?”
웃을 때가 아니다, 얘야.
“잠…… 아우.”
나는 일단 성 겸사복의 오해를 풀기 위해 고개를 들었으나, 소년이 무슨 생각인지 내 머리를 더 꼭 끌어안는 바람에 좌절됐다.
아마 나를 보호하려 한 게 아닌가 싶지만 그 모습을 본 성 겸사복은 당연히 더 분노했다.
“네 이놈!”
스르릉-
‘아악! 검 뽑지 마!!’
살기 좋은 조선 땅에서 검을 뽑는다는 것은 현대에서 총을 꺼내 드는 것과 비슷한 의미라고 할 수 있었다.
“위험하게 검을 뽑으시네.”
그리고 나를 내려놓은 소년 역시 어느새 검을 뽑아 성 겸사복에게 달려들었다.
잠시 비틀거리며 일어난 나는 이 이상한 상황을 멈춰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잠깐 잠깐, 둘 다 멈춰!!”
이거 리얼 버전 ‘나 때문에 싸우지 마!’ 아냐.
하지만 진검 들고 싸우고 있으니 식은땀만 흘렀다. 저러다 누구 하나 크게 다치면 어떡해!
안타깝게도 둘 다 내 목소리가 안 들리는지 둘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끼어들어 말리자니 진짜 크게 다칠 거 같고. 애초에 둘이 아주 훨훨 날아다니며 싸우고 있으니 내가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와…… 살벌하게 싸우는데 신기하게 어린애가 생각보다 별로 안 밀리네.’
성 겸사복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잠시 거리를 두곤 감탄했다.
“네놈. 대체 뭐 하는 놈이냐. 아직 새파랗게 어린 놈이 제법이구나.”
“아……. 또 그놈의 어린놈. 아저씨, 무서우니 그만 좀 하시지요.”
“저기이~ 지금 둘이 신난 건 알겠지만 그만하고 내 말을 좀 들었으면 좋겠는데에~”
나는 두 사람이 일단 멈춘 것을 보고 조심스레 다가가 말을 걸었으나 의외로 성 겸사복 쪽이 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런 놈은 본때를 보여 줘야 합니다. 어린놈이 할 짓이 없어서 유괴라니, 이 파렴치한 놈 같으니.”
“엑? 잠깐, 아닙니다!”
분노에 찬 성 겸사복의 말에 뭔가 오해가 있었음을 깨달은 소년이 질색팔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싸울 의사가 없다는 듯 먼저 검을 집어넣고 내게 툴툴거렸다.
“저기, 아기씨? 말 좀 해 주시죠.”
“음, 아니 근데, 나도 솔직히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모르겠어서.”
“와, 너무하시네.”
나를 보며 난처한 듯 눈썹을 찡그리는 걸 보니 대형견 같아서 조금 마음이 흔들렸다.
“근데 예전에 나 납치당했을 때 도와준 사람인 건 맞아.”
“네? 정말입니까?”
그 말에 겨우 안심했는지 성 겸사복이 검을 거두었다. 나는 그 모습을 확인하고 다음 말을 이었다.
“응. 근데 아까 나 납치한 사람이랑 대화하는 것도 봐서.”
아무래도 쫌 의심스럽지.
“네??”
그리고 내 말에 소년 쪽이 더 놀란 듯 펄쩍 뛰었다.
“납치라니, 누, 누가요?”
“아까, 대화하던 남자들.”
“……아까 그자들이요? 그 사람들이, 이런 어린…… 아기씨를 납치했단 말입니까?”
“응.”
해치려고 해서 도망쳤다는 말까지 하면 옆에 있는 성 겸사복이 기절할 거 같아서 그 부분은 적당히 넘어갔다.
“유괴범들과 한패였나, 네놈.”
“아니, 아닙니다. 오늘 처음 본 사람들인걸요. 어찌 그런 흉악한 자들과 어울리겠습니까? 어쩐지 분위기가 심상치 않더라니…….”
조금 의심스럽긴 하지만, 만약 한패라면 거기서 나를 구해 주느니 붙잡아 갔겠지. 지금도 성 겸사복을 상대로 싸우려고도 했고.
성 겸사복은 뭔가 마뜩잖은 모양이었지만 저쪽이 적의가 없다는 걸 알았는지 조심스레 나부터 챙겼다.
“오늘은 그냥 넘어가지만 앞으로 아기씨 근처에 알짱거리지 마라, 어린놈.”
“네? 아니, 잠깐만요!”
“아, 잠깐만.”
나는 그대로 나를 안고 가려는 성 겸사복을 잠시 멈춰 세우고 소년에게 물었다.
“저기. 이름, 이름 뭐야?”
“아, 저는, 천호……라고 합니다.”
그래도 일단 은인……인 셈이니 이름 정도는 알아 둘까.
“천호, 아까 도와줘서 고마웠어!”
“!”
“나중에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혜민서로 와서 ‘아기씨’를 찾아.”
“예?”
“나쁜 놈 아니면 또 보자고.”
내 말이 의외였는지 잠시 멍한 표정이었던 소년은 씨익 웃으며 내게 손을 흔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