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107)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107화(107/326)
혜민서 사람들은 내 신분을 대강 알고 있었으므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적당히 약을 바르고 다리를 흔들며 잡담을 하고 있는데 뜻밖에도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아기씨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아, 성지? 성지야말로 이 시간에 혜민서에는 어쩐 일이야?”
“저는 좀 논의할 일이 있어서요.”
“아, 연수 때문에?”
“예.”
요즘에는 학당에서 의학을 배운 아이들 중 일부라도 혜민서에서 연수를 받을 수 있도록 추진하고 있었다.
내가 아직 병원을 세우지 않은 탓도 있고, 아무래도 혜민서나 활인서 같은 곳이 실전 경험해 보기 좋은 곳이라. 활인서도 있긴 한데 우선 혜민서에서 시범적으로 해 보자고 말이 오가고 있었다.
혜민서 입장에서는 성가시기는 하지만 일손이 들어와서 좋고, 학생들 입장에서는 실무를 접할 수 있어서 좋았다.
아무래도 현장을 접해 보지 않은 책상물림이 하기에 좋은 일은 아니니까.
‘내가 의원을 열겠다고 했지만 아직 학생을 키우는 데 더 집중하고 있고, 의원들은 수집 중이라.’
특히 부인과 질환에 대해 논하다 보니 개중에는 산파도 있었고, 성지 같은 여의들도 소문을 듣고 찾아오고 있었다.
다들 전문 분야가 있었으므로 만난 김에 교류의 장을 마련하곤 했는데, 괜히 다투지 않도록 시영원에서 만나도록 주선하곤 했다.
그리고 총괄하는 역할은 어쩌다 보니 전직 내의원 의관이라는 감투가 있는 성지의 숙부, 허성태가 하고 있는데, 실질적으로는 성지가 실무를 맡고 있어서 이렇게 바빴다.
대신 봉록을 넉넉하고 주고 있었지만 본인은 돈보다는 연구에 더 관심이 있는 듯했다.
“허 의원께서 요즘 혜민서를 자주 찾으시죠.”
“연수 때문도 있지만 새로이 뽑은 의녀들 중에 새로운 의술을 알고 있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르는 법이거든요.”
의서는 아직 만드는 중이었으므로 검증된 것들만 아래로 전달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다른 지역에서 온 이들을 만나면 다이렉트로 교류가 가능하다는 장점도 있었다.
“또 세화를 찾아오셨나 했습니다.”
“세화?”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성지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 혜민서에 새로 들어온 의녀들 중 한 명입니다. 가끔씩 처음 듣는 치료법 이야기를 하기에 종종 대화를 나누고 있거든요.”
“아기씨께서 지난번에 진희를 보러 오셨을 때 소개해 드린 의녀들 중 하나랍니다. 오늘은 저녁에 번이니 곧 오겠네요.”
“아.”
한 번에 여러 명씩 보다 보니 이름이랑 얼굴이 헷갈리네.
“아기씨께서 만나는 사람이 많으니 이름과 얼굴을 다 외우시긴 힘드실 겁니다.”
“한번 본 걸론 확실히 기억이 좀 흐릿하네.”
“하지만 세화 얼굴은 기억에 남지 않으세요?”
“왜?”
“어머나.”
내 말에 다들 까르르 웃었다.
“무슨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으세요?”
그때 마침 여인 한 명이 책 보퉁이를 들고 안으로 들어오며 말을 걸었다.
“세화. 일찍 왔네. 또 무슨 책을 그리 들고 왔어? 의서?”
“아뇨. 세책방에 좀 들렀어요.”
“와, 뭐 가지고 왔어? 나중에 나도 보여 줘.”
잠시 수다를 떨던 의녀들은 곧 정리할 일이 있다며 밖으로 나갔다.
“아기씨. 나중에 또 뵈어요.”
“응. 치료해 줘서 고마워.”
“앗? 다치셨습니까?”
“조금.”
안으로 들어선 세화를 보며 나는 왜 내가 기억 못 한다는 말에 다들 깔깔 웃었는지 깨달았다.
‘음. 미인이네.’
나는 잠시 세화를 지그시 쳐다보았으나 곧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그동안 여주가 아닐까 의심했던 여의와 의녀들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내가 괜히 신경 쓰면 더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올 것 같아 이젠 반쯤 포기한 상태였다.
주인공의 요건을 다 채우는 사람이 흔치 않은 데다 검증에는 시간이 걸리는 탓이었다.
게다가 지화라고 생각해서 세자랑 만날 수 있게 밀어줬다가 아니면 어떡해.
‘하지만 비쥬얼도 그렇고, 이름도 지화랑 좀 비슷한데. 그날은 내가 딴 데 신경 쓰느라 눈에 안 들어왔나.’
분명 아픈 애들도 데려오고 카스텔라도 나눠 주고 바로 시영원으로 가느라 바빴지.
그날 일을 떠올리며 고개를 주억거리는데 문득 세화가 보퉁이에서 꺼낸 책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 그거.”
비죽이 튀어나와 있는 책 표지를 보고, 나는 그 책의 정체를 한눈에 간파했다.
“이건, 화영(花影)의 한역본 삽화 한정판?”
“앗? 아기씨께서도 이거 아시는군요.”
세화가 조금 부끄러운 듯 웃으며 책을 꺼내 보였다.
기존의 다른 책들과는 다르게 표지부터 티가 나기 때문에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물론 표지에까지 화려하게 일러스트를 넣었다든가 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표지에 압화(押花)와 작은 검은색의 꽃무늬를 그려 넣어 제목인 꽃 그림자를 이미지화했기에 다른 책들의 표지와는 확연하게 차이가 났다.
조금 시험적인 시도이기는 했지만 처음으로 내 보는 거였기에 기왕이면 사람들의 이목을 끌자는 생각이었다. 애초에 예약금까지 받은 한정판이 아니던가. 비싼 만큼 공을 들인 티가 팍팍 났다.
“그거 예약했구나. 꽤 비쌌을 텐데. 어라, 그런데 책이 벌써 나왔어?”
“아, 그게, 오늘 마침 소량 나와서 받아 왔습니다.”
“와. 나도 돌아가는 길에 들러 봐야겠네.”
내 말에 세화는 조금 당황한 듯 서둘러 말했다.
“지금 가셔도 오늘은 이제 물량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아기씨께서도 이 책을 예약하셨습니까?”
“그럼.”
내가 그거 제작 과정부터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데.
표지에 일일이 압화까지 하느라 꽤 힘들었는데 다행히 표지도 예쁘게 잘 나온 거 같고. 인쇄는 잘 됐겠지?
지금 방 안에 있는 얼굴들을 보니 다들 이 책에 대해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역시 베스트셀러는 다르구나.
하긴 남들 다 읽고 있는데 혼자 안 보기도 좀 그렇지.
다만 원래도 패관소설을 좋아하는 소이는 그렇다 쳐도 성지는 조금 의외였다. 의서 외에는 들여다보지도 않을 거같이 생겼는데 역시 사람을 인상으로만 판단하면 곤란했다.
“으음. 그러고 보니 이거 꽤 인기 있는데 연극으로 만들어도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을까?”
“연극, 말씀이십니까?”
“응. 시영원 쪽 그 놀이터에 사당패들이 공연을 하기도 하니까. 그쪽이랑 연결해서 연극으로 각색해서 공연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네.”
공연을 본 사람들은 다시 원작인 소설을 보고 싶어 할 테고.
이미 유명하지만 아직 보지 않은 사람들도 꽤 있을 터였다. 연극으로 각색한다면 생략하거나 달라지는 점이 있을 테니, 원작을 다시 보는 사람도 생길 테고.
그런 것도 재미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옆에 있던 소이가 초를 쳤다.
“하지만 소설 속에 묘사되는 것 같은 미남미녀가 있을까요?”
“아…… 그건 어렵네.”
원래 1D의 2D화와, 2D의 3D화는 어지간해서는 이미지에 안 맞는다고 욕을 먹게 되어 있었다.
“하하. 그럼 탈을 쓰고 하면 안 될까요?”
“뭐, 그런 방법도 있고. 으음. 아니면 여자배우들만으로 연극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네.”
안 그래도 남녀가 함께하면 눈에 음란마귀가 낀 분들에게 또 뭔 소릴 들을지 모르니까.
“그거 좋네요. 하지만 여자배우들이 얼굴을 내놓고 하면 성가신 일들이 많이 생길 것 같으니 역시 탈을 쓰는 게 어떨까요?”
“……무슨 성가신 일이라도 있었나 보지?”
내 말에 세화가 당황해 고개를 저었다.
“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혜민서에서는 환자들 성별을 가능한 한 나눠서 관리하는 편이니 괜찮습니다만, 그 외의 다른 곳들은 그렇지도 않으니까요. 환자나 보호자들이 의녀들에게 치근덕거리는 일도 있거든요.”
“어휴. 하여간에. 역시 의원 만들 때 경비 인력이 꼭 필요하겠어.”
소이와 마찬가지로 옆에서 듣고 있던 성지도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래도 이제 여의들에게는 비교적 함부로 하는 일이 덜하다고 들었습니다. 품계가 있는 의관이라는 사실이 새삼 꽤 위력이 있다더군요. 게다가 잘못했다가는 중전마마와 옹주 자가께 이야기가 들어갈 거라는 사실을 다들 알고 있으니 감히 쉬이 대하는 자가 없답니다. 역시 사람에게는 돌봐줄 뒷배가 있어야 하나 봅니다.”
“아…… 하하.”
나 뒷배인가요.
“의녀들이 곧 여의가 될지도 모르다 보니 의녀들에게 함부로 하는 자들도 줄어들었답니다. 민간의 여의들은 물론 그러기 쉽지 않겠지만요. 하지만 이렇게 마음 편하게 의술에만 전념할 수 있는 것도 다 옹주 자가 덕분이지요.”
“그거 다행이네.”
어쨌든 고생한 보람이 있다는 좋은 일이었다. 그나저나 자기를 치료해 주는 사람한테까지 치근덕거리는 건 대체 뭐 하는 놈들이냐.
“세화도 빨리 시험 쳐서 여의로 올라가는 게 어때.”
“공부는 하고 있습니다만 시험까지 시간이 걸리니까요.”
“무슨 공을 세우지 않고는 무리지. 의원이 공을 세울 만한 일은 생기지 않는 편이 낫고.”
“맞아요.”
내 얼굴에 금칠을 하던 두 사람은 화기애애하게 동종업계에 대한 대화를 나눴다.
이제 제도적으로는 여의를 의원으로 취급하고 있지만, 올라가는 진급 과정은 다른 의관들보다 다소 성가셨다.
말하자면 여자들 능력은 못 믿겠다는 거였다.
덕분에 처음부터 의관으로 인정해 주지 않고 의녀로 먼저 수습 기간을 거친 후 시험을 통해 진급이 가능했다.
‘불공평하긴 하지만 내가 이 이상 강요하면 역효과가 날 수도 있으니…….’
중요한 건 실적이다. 여의가 남자들 못지않게 뛰어나다는 걸 보여 주지 않으면 설득할 근거가 부족하니까.
이 시대에 전국 단위로 남녀 지능 검사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여인들에게는 교육의 기회조차 부족한데 뛰어난 여인이 어디서 갑자기 와르르 쏟아질 수는 없었다. 물론 가끔 주머니 속의 송곳 같은 사람이 튀어나오긴 하지만.
‘내가 지화를 굳이 찾지 않기로 한 이유 중 하나지.’
괜히 주인공이랴. 알아서 송곳처럼 튀어나오겠지.
“보시겠습니까?”
“어?”
세화가 내 앞으로 공손히 책을 내밀었다. 아무래도 내가 딴생각하며 빤히 쳐다보고 있었나 보다.
‘어우. 미안하네.’
남의 새 책을 탐하는 걸로 보였나 보다…….
근데 지금 내가 거절해도 안 믿어 줄 거 같네.
“음. 그럼 잠깐 봐도 괜찮을까?”
“그럼요.”
나는 조심스레 책을 받아 표지 상태를 꼼꼼히 살핀 후 종이를 몇 장 넘겼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아, 이거…….”
“어찌 그러시옵니까?”
“제본이 잘못된 거 같은데. 여기랑 여기 그림이 안 이어져.”
“그렇습니까?”
“응.”
왜냐하면 삽화 들어가는 페이지를 내가 최종 확인하고 넘겼었거든.
뭐 제본 과정에서 실수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검수도 안 하고 이런 물건을 팔다니. 장씨 아저씨 이러면 곤란한데. 아니, 인쇄 쪽 문제인가?
“세책방에 가서 말해 줘야겠는데. 한두 푼짜리도 아닌데 이런 걸 팔면 안 되지.”
“앗, 제가 가서 말하겠습니다.”
“아냐, 말했잖아. 나도 어차피 책 받으러 가 볼 생각이었어.”
내가 책 제작에 관여했다는 걸 아는 소이는 난감해하면서도 말리지는 못했다.
아직 해가 떨어지지 않은 시간이어서 더 그럴 수도 있고.
“아, 그럼 저도 지금 함께 가도 괜찮을까요?”
“세책방에? 아, 하긴 책 주인도 함께 가야지.”
어차피 책 새로 받아야 할 테니. 아까 일찍 왔다는 걸 보면 시간은 넉넉한 모양이고.
흐음. 나한테 뭐 할 얘기라도 있나.
묘한 분위기를 느꼈는지, 아니면 그냥 돌아갈 시간이어선지 성지도 합류했다.
소이는 사람이 많은 것이 오히려 기꺼운 모양이라 안심한 얼굴이었다.
“혹시 다치신 곳 말고 다른 불편한 곳은 없으십니까?”
“괜찮아. 아픈 곳 없어. 원래 건강하기도 하고.”
“그러하시다면 다행입니다. 그럼 혹시 친가나 외가 친척분들 중에 체질이 약하신 분이 계십니까?”
“글쎄 친가 가족들은 다들 건강하고, 외가는 사람이 없어서 모르겠네.”
생각난 김에 옷도 갈아입고 세책방으로 가는 도중 세화는 내게 은근히 건강 상태 등을 물었다.
‘직업병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