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109)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109화(109/326)
“어어. 사가랑, 시영원이랑 여기저기?”
“여기저기?”
“음…….”
내가 말을 흐리자 세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또 세책방에 간 것이냐.”
기방 갔다는 사실을 알면 기절하겠지?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웃전들의 귀여움을 받고 있다고는 하나 일국의 옹주고 체통을 지켜야 할 것인데 이렇게 방종하니 큰일이로구나.”
오늘 기분이 별로 안 좋은가 본데.
“대체 세책방에서 무슨 책을 본다고 이렇게 늦게까지…….”
잔소리를 이어 가던 세자가 말을 멈추더니 시선이 묘하게 내 얼굴보다 아래로 향했다. 그러고는, 내가 소중히 안고 있던 책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리 내 보거라.”
“앗, 안 돼.”
딱히 뭐 켕기는 게 있는 건 아니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 책은 일종의 로맨스 소설이었다.
현대에서도 로맨스 소설이나 드라마를 좋아하면 연애에 환상을 품고 있고, 연애하고 싶어 하는 사람으로 취급받곤 했다.
추리 소설이나 스릴러물 좋아하면 뭔데, 그럼.
심지어 지금 이 시대에선 결혼적령기에 혼인도 못 하는 처지인 내가 연애 소설 읽는다는 걸 알면 대체 무슨 생각을 할지, 진짜 알고 싶지 않았다.
로맨스 소설 좋아한다고 연애하고 싶다는 뜻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걸 설명해 봤자. 애써 변명한다고 믿지도 않고 딱하다는 눈으로 볼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내가 혼인 생각 없다고 해도 믿는 사람이 있어야지.
안 그래도 불쌍한 아이로 통하고 있는데 이런 걸로 동정받는 건 여러 가지 의미로 짜증 났다.
나는 책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어린아이인 내가 성인 남성의 힘을 당해 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리 내 보라지 않느냐. 대체 무슨 이상한 책이기에 이러는 것이냐.”
“싫어, 못 줘!”
부우욱-
그렇게 오늘 받아온 신상 리미티드 에디션은 요란한 효과음과 혈육의 손에 의해 무참히 찢어지고 말았다.
“아…… 아니, 이건…….”
“…….”
“…….”
“…….”
세자도 본의는 아니었는지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했고, 주변에서 말리지도 못하고 바라만 보고 있던 이들도 다들 그대로 굳어 버린 채, 잠시간 적막이 감돌았다.
가장 먼저 입을 뗀 것은 당연히 나였다.
“바보! 멍청이! 쭉정이! 꼴도 보기 싫어!!”
“……!”
폭언과 함께 찢어진 책을 세자에게 집어 던지고 나는 그대로 내 처소로 뛰어들었다.
“옹주 자가!”
소이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내 책! 내 책!!! 작가한테 직접 사인도 받은 건데!
심지어 아직 읽어 보지도 못했는데!!
“세자 저하. 괜찮으시옵니까?”
“……괜찮다.”
시아가 던진 책이 세자의 가슴에 직격한 걸 본 송 내관이 당황해 안부를 물었으나 세자는 괜찮다고 손을 내저었다.
저 쪼끄만 것이 무슨 힘이 이렇게 센지 제법 아프긴 했으나 큰일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에게도 이러면 큰일인데 아이가 너무 응석받이로 자랐구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소인이 알기로 옹주 자가께서 이리 대하시는 사람은 세자 저하뿐이옵니다.”
아랫사람에게도 관대하고 인심 좋기로 유명한 옹주가 아니던가.
대신 세자에게 좀 막 대할 뿐.
“아니, 일국의 세자가 만만해?”
“하나뿐인 오라버니가 아니십니까. 게다가 어릴 적부터 두 분께서 워낙에 우애가 깊으셨지요. 옹주 자가께서 가장 의지하고 가까이 여기시는 분이 세자 저하가 아니겠사옵니까.”
“…….”
저 말에 함축되어 있는 뜻을 알고 있으니 할 말이 없었다.
그야, 주상 전하께서는 시아를 아낀다고는 하나 바쁜 몸이시고, 중전마마께서는 워낙에 몸이 약하시기도 하고 사람을 가까이 두시는 분이 아니었다. 친아들인 자신조차도 어마마마가 중전이 된 이후로는 문안드릴 때 외에는 편히 찾아뵙지 못했으니까.
어린 시절, 성원 세자가 있을 무렵에는 시아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날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 후 시아의 몇 안 되는 혈육 중 절반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그나마 자신조차도 세자가 된 이후에는 바빠서 시아를 돌봐 주지 못했으니 외로웠을 것이다.
그래도 약한 소리 한번 하지 않고 언제나 혼자 뭔가 열심히 하며 즐겁게 바쁘게 사는 아이였으니…….
‘……왜 내가 나쁜 사람이 된 거 같지?’
동생이 말도 없이 외출했다 늦게 들어오다 들켰으면 오라비가 훈계 정도는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그것도 저렇게 작은 아이가!
“저하, 이것은 어찌 하올까요.”
“……이리 주거라.”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송 내관이 세자의 가슴을 타격하고 떨어진 책을 주워 세자에게 내밀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조금 혼을 내려고 한 것뿐이었다. 책을 좋아하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 때문에 이렇게 귀가가 늦어져서야. 아무리 도성 안이라지만 위험하지 않은가.
‘통금(通禁)령이라도 다시 시행하자고 건의해 볼까.’
통금령이 내리면 오히려 해시(亥時:저녁 9~11시)까지는 여자들만 돌아다닐 수 있으니 안전한 셈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번에는 아예 밤늦게까지 돌아다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그것도 썩 달갑지는 않았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자.”
“예, 저하.”
몇 번이나 사람을 보내 언제 돌아오는지 확인하다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도 돌아오지 않은 것을 알고 걱정이 되어 찾아왔는데, 제대로 한마디 해 주지도 못하고 화만 사고 돌아가려니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괜히 책을 뺏으려고 해서는.’
그건 건드리지 말걸.
후회하면서도 그래도 내일쯤이면 시아가 화를 풀고 먼저 찾아올 거라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에도 별거 아닌 이유로 종종 싸우곤 했었지만 다음 날이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놀자고 찾아오곤 했으니까.
하지만 시아는 동궁전을 찾지 않았다.
***
세자의 측근 신하들은 근래 세자의 심기가 몹시 불편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유는 몰랐다.
자신들이 뭔가 잘못한 것도 없고, 딱히 정치적으로 급박한 현황도 없었다.
평소에도 일할 때 사람 쪼는 거 외에는 누구 못살게 구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차마 그걸 대놓고 물어볼 만한 용감한 이는 없었기에 다들 말없이 묵묵히 일만 하고 있었다.
그나마 오늘은 약간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래도 오늘은 옹주 자가께서 간식을 가지고 오시는 날이니 좀 기분이 좋아지시지 않을까?’
까칠한 세자가 가장 총애하는 인물이 바로 하나뿐인 여동생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들의 기대는 오래지 않아 산산이 부서졌다.
“소녀는 이만 가보겠사옵니다.”
“……그래.”
간식 가지고 온 옹주는 세자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음식만 주고는 딱딱한 인사와 함께 쌩하니 사라져 버렸으니까.
지금까지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으므로, 바보가 아닌 이상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모를 수가 없었다.
“세자 저하. 혹시 옹주 자가와…… 다투셨사옵니까?”
“……다툰 것이 아니라 조금 언쟁이 있었을 뿐이다.”
그런 것을 세간에서는 싸웠다고 합니다.
하지만 세자에게 차마 그렇게 말할 수 없는 노릇이라, 다들 눈치를 보다 결국 한 명이 총대를 멨다.
“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여쭈어도 되겠사옵니까?”
“옹주의 행동이 지나치게 자유로우니 그저 조금 언행을 주의하라고 했을 뿐인데…… 조금 훈계를 하다 그만, 옹주가 가지고 있던 책을…….”
“……책을, 어찌하셨사옵니까?”
“뺏으려다 실수로 그만…….”
아앗…….
거기 듣고 있던 이들의 표정이 다들 조금씩 일그러졌다.
“……혹시, 찢으셨사옵니까?”
“찢은 것이 아니다. 찢어진 것이다!”
거기서 세자가 찔린 듯 버럭 화를 내자, 그간 세자의 심기가 불편했던 이유가 여동생과의 불화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조금 허탈해진 이들이 반발하기 시작했다.
“아니, 세자 저하. 어떻게 저 어리디어리신 옹주 자가와 싸우실 수가 있으십니까.”
“옹주가 어리긴 뭐가 어린가. 열여섯이나 되었는데.”
세자가 울컥해서 답했으나 아무래도 조금 기세가 꺾인 얼굴이었다.
“열여섯이라도 세자 저하보다 여섯 살이나 어리신 건 맞지 않사옵니까.”
“그 정도로 연치가 차이 나면 여염집 오누이들도 그리 싸우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게다가 책을 찢으시다니요. 옹주 자가께서 책들을 얼마나 애지중지 다루시는지는 저희조차 알고 있을 정도가 아니옵니까.”
“그러니까, 결론은 내가 잘못했단 말인가?”
“세자 저하께서 심하셨습니다.”
“세자 저하께서 어른스럽지 못하셨지요.”
다 나만 갖고 그래…….
세자는 조금 마음이 상했으나 조금 찔리기도 했다.
어쩔 수 없었다. 액면가 7세와 진심으로 싸우는 22세라니. 누가 봐도 22세가 나쁜 놈 같았다.
‘나도 찢을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시아가 제 물건들을 어찌나 애지중지하는지 아는데 일부러 책을 찢겠는가.
그저 요즘 도성 근처에서 아이를 잃어버리는 사람이 많다고 하니 조금 걱정이 되기도 해서 저도 모르게 좀 거칠게 대한 것 같다는 자각이 있어서 더 찔렸다.
‘하지만 시아는 혼자 다니지 않으니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을, 내가 지나쳤던 것이 아닐까.’
궁 안에서 지내는 게 얼마나 답답할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저리 자유로운 누이동생을 자신도 모르게 부러워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동궁전으로 돌아왔으나 부끄러움과 자기혐오가 섞여 밤에도 쉬이 잠이 오질 않았다.
방 안에는 그날 가져온 시아의 책이 곱게 모셔져 있었다.
표지가 워낙에 독특하고 제법 고급스러워 보였기에 눈에 잘 들어올 수밖에 없었고, 볼 때마다 심란했다.
미간을 찌푸리고 찢어진 책을 보고 있으니 신하들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찢어진 책을 새로 구해다 주시는 것은 어떻사옵니까?’
‘그렇습니다. 세자 저하께서 넓으신 마음으로 옹주 자가께 먼저 손을 내미시는 것이지요. 옹주 자가께서 잘못을 하셨을지라도 책을 찢은 것은 과하시지 않았사옵니까. 화해에도 조금은 정성이 필요한 법이지요.’
책을 새로 구해 주는 것은 확실히 나쁜 방법이 아니었다.
다만 어떤 책이냐가 조금 문제인데.
‘그날 언뜻 보니 그림도 있던데 설마 이상한 책은 아니겠지.’
책을 넘겨 보니 일단 보이는 그림들은 비교적 건전해 보였다. 하지만 어떤 내용일지는 읽지 않으면 알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본다 해도 다들 옹주를 감쌀 가능성은…… 있었다.
옹주는 아랫사람들에게 후한 편이라 다들 좋아했고, 고작 패관소설의 내용에 관한 일이니 대충 얼버무릴지도 몰랐다.
‘역시 내가 직접 읽어 봐야 하나. 제목이…… 꽃 그림자?’
흥, 그래 봤자 뻔한 패관소설이겠지.
잠도 오지 않을 것 같고, 잔소리하러 올 옹주도 없고.
조금 심통 난 어린애 같은 마음으로 세자는 책을 펼쳤다.
그리고 금방, 소설에 빠져들어 버렸다.
‘인기 있을 만…… 하네.’
순식간에 읽어 버린 소설은 단순히 남녀상열지사를 주제로 한 소설이라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정치적인 내용까지 다루는 데다 의술에 관한 지식도 엿보였다. 박진감 넘치는 부분도 있고 이야기적으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다 읽은 소감은 그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