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110)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110화(110/326)
그리고 뭔가 이상한 책이라 안 주려고 필사적이었던 게 아닐까 착각한 사실이 더 부끄러워졌다.
‘화해에도 조금은 정성이 필요한 법이지요.’
“하아.”
이거 새 책을 구해 봐야겠다.
세자는 다음 날 송 내관을 통해 시아의 안부를 물었다.
“근래에는 외출을 자제하시고 가끔 성 겸사복이 찾아와 안부를 묻고 대화를 나누신다고 합니다. 그 외에는 언제나처럼 후궁들이나 궁인들을 챙기실 뿐, 평소와 다르신 점은 없다고 하옵니다.”
시아는 요즘 나가지 않고 잘 붙어 있는 모양이다.
애초에 의관들에 관한 일을 맡기면서 그렇게 한가한 몸이 아닐 텐데 어떻게 그리 잘 놀러 다니는지.
어릴 적부터 궁 안을 빨빨거리고 돌아다니며 여기저기 챙기고 다니기는 또 얼마나 잘 챙기고 다니는지 후궁들에게까지 늘 신경을 써 준다고 들었다.
아바마마께서 후궁들을 그리 신경 써 주시는 편이 아니고 다들 자식도 없는 처지이니 안됐다는 생각은 하지만 자신이 뭘 챙겨 주려는 생각은 해 본 적 없는데. 누가 그런 것을 가르치지도 시키지도 않았을 텐데 시아는 늘 주변을 잘 챙겼다.
‘시아는 어린아이 때부터 이상한 데서 어른스럽고 세심한 아이였지.’
자라지 않는 본인이 가장 괴로울 텐데도 한 번도 내색한 적 없이 언제나 활기차고 웃는 낯으로 주변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세자가 된 오라비를 걱정해 언제나 먹을 것을 가져다주고, 일찍 자라고 잔소리를 하고, 가끔은 정말로 오라비의 일을 덜어 주기도 했다.
가끔씩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종알종알 떠드는 그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잠시나마 머리 아픈 일들도 잊을 수 있었는데.
그런 아이인데, 자신이 너무 심했던 게 아닐까.
“……나가 봐야겠다.”
“네?”
그렇게 누이동생을 핑계로, 세자는 갑작스러운 미행(微行)을 결심했다.
세자 역시 궁 밖으로 몰래 나오는 게 처음은 아니었다.
시아만큼은 아니어도 이렇게 가끔, 몰래 밖에 나온 적은 있었다.
시아의 궁가(宮家)가 완성되었을 때도 몰래 와서 본 적이 있었으니까.
시아는 자기 집을 사가(私家)라고 부르지만 그곳은 그야말로 총애를 한눈에 알 수 있는 궁이었다.
어쩌면 부왕은 일찍 왕위를 물려주고 시아의 궁가에서 노후를 보내실 생각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쓸데없는 생각이지만.’
오랜만에 나오니 자연히 옛 생각도 났다.
그 초파일날, 세자빈이 될지도 모르는 소녀와 함께 보냈던 그 짧은 기억은 오랫동안 마음에 남아 있었다.
어찌 되었을까, 무사히 도망하였을까.
이제는 다시 만난다 하여도 알아보지 못할 만큼 긴 시간이 흘렀지만 우연히 스쳐 지나갈 일이라도 있을 것인가.
“그 책을 어디서 판다고 하더냐.”
“종로 세책방에 가보시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감상에 잠기는 것도 좋지만, 송 내관과 신임하는 시위(侍衛)만 데리고 나온 길이니 가장 중요한 볼일부터 보아야 했다.
하지만 처음으로 찾아간 세책방에서 세자는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없었다.
가져간 책을 보여 주고 같은 책을 찾는다고 하자 세책방의 주인은 찢어진 책을 보고 우는소리부터 했다.
“아이고, 이 아까운 책이 이리 찢어지다니…… 송구하오나 이 책은 예약본이라 달리 재고가 없습니다요.”
“방금도 사 가는 사람을 보았네만. 돈은 얼마든지 낼 수 있네. 새로 찍어 내면 되지 않나.”
“하지만 이 책은 초판 특전으로 작가의 수결까지 있는 책이라 더는 구하기 힘드실 겁니다.”
“꼭 구해야 하는데 방법이 없겠나.”
“그게…….”
세책방 주인이 난처한 듯 대답을 흐리는 사이 다른 이가 잠시 끼어들었다.
“저기, 죄송하지만 책 받으러 왔는데 괜찮을까요?”
“앗, 죄송합니다. 잠시만요. 여기 책을…… 아.”
세책방 주인은 방금 말을 건 여인과, 양반 복장을 하고 있는 세자를 번갈아 보더니 뭔가 생각난 듯 여인을 불러 속닥거렸다.
“어떻습니까?”
“그렇게 돈이 급한 건 아니니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돈은 얼마든지 줄 수 있다는데 괜찮지 않습니까? 수결본 수량이 정해져 있기는 하지만…….”
세자에게 대화 내용이 제대로 들린 것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분위기상 알 수 있었다.
저 여인이, 자신이 찾던 책의 수결본을 가지고 있고, 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걸 거절하고 있다는 것도.
“저는 책을 받았으니 이만 가 볼게요.”
“예, 다음에 또 오십쇼.”
괜히 주인에게 매달리는 걸 포기한 세자는 세책방을 나서는 여인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저기, 잠깐만 괜찮으십니까?”
“무슨 일이십니까?”
“그, 혹시 꽃 그림자, 수결본을 가지고 계시다면 제게 양보해 주지 않겠습니까?”
“네?”
우우우.
내 금쪽같은 새 책이…….
방으로 뛰어들어 울적한 마음에 바닥에 엎어져 버둥거리며 울분을 달래고 있는데, 다른 궁녀들은 들어오지 못하게 막은 소이가 따라 들어와 나를 달랬다.
“옹주 자가. 고정하시옵소서.”
“고정 못 해! 고정 못 해!!”
바닥을 치며 빽빽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아! 아까워! 내 책! 작가한테 친필사인까지 받은 건데! 자기가 세자면 다야??
저놈이…… 누군 역모 일어나는 거 아닌가 막아 보겠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데 남의 속도 모르고!
빨리 결혼해서 후사나 볼 것이지!
정말 확 고X설이나 만들까 보다!
‘……로맨스물 의뢰 전언 철회하고 세자가 남자랑 사랑에 빠지는 소설이나 의뢰할까 보다.’
잠시 그렇게 장르를 벗어난 비뚤어진 생각이 들었으나, 그랬다간 유포되는 순간 왕실모독죄로 작가가 끌려가는 수가 있었으므로 바로 지워 버렸다.
그러니까 기왕 쓸 거면 배경을 조선이 아니라 가상 동양풍 국가의 세자, 아니 왕으로…… 아니,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무의식의 흐름 덕분에 잠시 냉정해진 나는 몸을 일으키고 생각을 정리했다.
‘이거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이렇게 화를 냈으니 한동안은 세자도 나를 찾지 않을 듯했다. 의외로 소심한 구석이 있어서 어릴 때부터 나랑 싸우고 나면 먼저 찾아오질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러니까 기왕 이렇게 된 거 그사이에 이번 일을 확실히 마무리 짓는 것을 좋을 것 같았다.
“……옹주 자가. 그렇게 갑자기 고정하지 좀 마세요.”
“익숙해져라.”
진정시키려고 노력할 땐 씨알도 안 먹혔는데 갑자기 혼자 진정하는 것을 본 소이가 지친 얼굴로 내게 물을 한 사발 내밀었다.
세자를 떠올리니 또다시 열불이 났으므로 나는 소이가 건네주는 찬물을 받아 벌컥벌컥 마시고 다시 한번 생각을 정리했다.
‘책이 찢어진 건 열 받지만 그거 외에도 소장용으로 여러 권 사 놨으니까.’
금수저라 다행이야.
그리고 그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던 소이도 의아한 듯 물었다.
“이번 책은 처음 내는 것이니 기념 삼아 일부러 여러 권 사두시지 않으셨습니까? 궁에도 두고 사가에도 두신다고요. 그런데 한 권 찢어졌다고 어찌 그리 화를 내시는 것이옵니까?”
“당연히 화나지. 소이는 옥가락지가 10개 있으면 하나 정도는 깨트려도 괜찮다고 생각해?”
“……아니요.”
“그렇지?”
소이는 뭔가 아닌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곧 수긍했다.
대량 생산 체계가 잡혀 있는 현대사회였으면 아니라고 반박했을 법도 한데. 이 시대는 책도 귀한 물건이었다.
“소이도 이제 가서 쉬어. 하지만 혹시 성 겸사복에게서 연락이 오면 나한테 바로 오도록 해 주고.”
“알겠습니다. 겸사복 나리는 괜찮을까요?”
“괜찮을 거야.”
안 괜찮으면 바로 수색에 들어가야겠지만.
사실 성 겸사복은 체탐인으로 살아온 경력만 봐도 그런 위험한 일에는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고, 겸사복으로 몇 년간 지내며 여기저기 인맥도 많았으니 위험하다면 알아서 대처할 터였다.
물론 그렇다고 걱정이 안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날 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쉽게 잠이 들지 못했으나, 나는 그래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잠이 들고 말았다.
그리고 성 겸사복의 소식은 다음 날 아침 일찍 도착했다.
오늘 시영원 일로 전달 드릴 일이 있어 찾아뵙겠다는 연락이었다.
다른 사람을 통해 전해진 소식이었으니 일부러 시영원 일이라고 둘러댄 모양이었다.
일단 별일 없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간식을 만들어 성 겸사복을 기다렸다.
“옹주 자가. 어제는 별고 없으셨습니까?”
“응. 그럭저럭.”
그렇게 말하며 나는 성 겸사복을 이리저리 훑었다. 일단 겉보기에 다친 곳은 없어 보이는데.
“소인은 아무 일 없었으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예. 하지만 옹주 자가. 그자들이 생각보다 위험한 자들인 듯했사옵니다. 옹주 자가께서는 더 이상 이 일에 관여하지 않으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무슨 일인데?”
“아직은…… 확실하게 드러난 것이 없이 말씀드릴 수 없지만 사람 목숨을 가벼이 여기는 자들이었습니다.”
“?”
거기서 대체 뭘 엿들은 거야. 이 사람.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음. 혹시 역모 같은 거야?”
“예?”
하지만 내 질문에 성 겸사복은 뜬금없다는 얼굴을 했다.
저 반응을 보면 역모는 아닌 건가?
‘그러고 보니 기방에서도 세자 언급을 하기는 했지만 세자를 어찌하겠다는 얘기는 아니었지. 혹시 내가 헛다리 짚은 건가.’
하지만 그놈들이 나쁜 놈들이라는 사실만은 주지의 사실이었다.
“그런 얘기까지는 듣지 못했사옵니다만…… 좀 더 확인해 보겠습니다.”
“위험할 거 같으면 너무 깊이 관여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소인이 무슨 힘이 있다고 깊이 관여하겠사옵니까. 다만…… 그자들이 다음에 모일 때 더 정확한 얘기를 할 듯하니 이번에는 옛 동료들에게 도움을 청해 볼까 합니다.”
“음. 혼자인 것보다야 그게 낫지. 시영원에 있는 사람들이지? 내가 미리 민 상궁에게 연통을 해 둘 테니 그건 걱정 말고.”
“예.”
“위험수당도 줄게.”
“예. 옹주 자가.”
농담 같은 내 말에 성 겸사복이 킥킥 웃었다.
그래, 기왕 할 거면 혼자가 아닌 게 안심이었다.
좀 더 명확한 정황을 찾기 전까지는 어설프게 공권력을 동원하는 건 솔직히 좀 못 미더웠고.
“위험하면 그냥 포기하고 빨랑 도망쳐. 알았지? 누구도 다치거나 해선 안 돼. 알았지?”
“예, 명심하겠사옵니다.”
그렇게 전직 체탐인들 몇몇은 갑작스러운 추가 업무를 뛰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나에게 무서운 소릴 했다.
“불법 인신매매?”
“예에…….”
성 겸사복은 내게 이걸 말을 하는 게 맞나 하는 얼굴이었지만, 어쩌랴.
“그러니까 사람을 노비로 만들어 몰래 사고판다는 말이지.”
“예. 본래 금지되어 있습니다만 빚을 지고 제 처자식(妻子息)을 판다거나, 갈 곳 없는 고아를 노비로 파는 건 암암리에 이루어지고 있는 일이옵니다.”
“걸리면 사형일 텐데. 안 걸릴 자신이 있으니 하는 일이겠지.”
음, 이거 뭔가 뒤에 있을 거 같기도 한데.
“심지어 노비장(奴婢場)조차 금상 전하께서 금하신 일이 아니옵니까.”
“덕분에 노비를 시장에서 물건처럼 거래하는 건 금지됐지.”
내가 태어나기 전에 발각된 반란 때문이었다던가.
물론 지나치게 비인도적이라는 이유도 있었다. 개인 거래 자체가 금지된 건 아니지만.
더 이상 노비의 인구를 늘리지 않겠다는 의미이기도 했고.
권력자들은 노비의 수를 늘리고 싶어 하는 법이었으므로 사대부들도 썩 달가워하지는 않았지만, 사노비를 모아 반역을 도모한 자들이 있었으니 왕이 노비 소유에 대해 여러 가지 규제를 정하는 것까지 막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런가, 이상하게 나한테, 정확히는 시영원에 노비를 바치겠다는 사람도 많았다.
나는 고민 끝에 그냥 받기로 했다. 다른 데로 가느니 내가 맡는 게 낫겠다 싶어서.
‘나 참. 다들 그렇게 많이 만들어서 어디다 쓰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