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115)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115화(115/326)
“아니, 그럴 리가…… 없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내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뭔가 눈에 들어오는 특징이 있는 게 아니다 보니 그날 잠깐 본 어린아이와 동일 인물일 거라 장담할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이미 데려왔으니 어쩔 수 없지. 꼬마야, 얌전히 있으면 해치지는 않을 거다. 알겠니?”
나는 엉엉 울며 애처롭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갖다 놓으면 다른 꼬맹이들도 같이 울어서 시끄러워질 테니까 좀 있다가 데려다 놔.”
“예, 형님.”
내가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제대로 말도 못 하고 울기만 하자, 눈물이라도 닦으라는 뜻인지 묶었던 손목만 풀어 주고는 둘 다 찜찜한 표정으로 나가버렸다.
‘후우.’
아기 시절부터 갈고 닦은 눈물 스킬이 아직 건재해서 다행이었다.
‘그냥 서러워서 운 것도 맞지만.’
내가 살면서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런 일에 휘말리냐. 진짜.
나는 아직 오열의 여운이 남아서 훌쩍거리며 눈물을 닦았다.
그런데 잠시 후, 뜻밖의 방향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톡톡톡.
“?”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니 광에 있는 작은 창살 너머로 누군가의 손이 보였다.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자, 마찬가지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 있……어?”
“아기씨, 접니다. 천호요.”
“?!”
천호? 천호면 그날 기방에서 본 그 아이?
“괜찮으십니까?”
“왜 여기 있어?”
“혜민서 앞에서 어떤 남자가 아기씨 같은 사람을 데려가는 걸 봐서 혹시나 하고 따라왔습니다.”
혜민서 앞이라는 걸 보면 맞긴 한데. 그런데 어떻게 여기까지 따라왔지?
“……너 정말 저 납치범들이랑 관계없는 거 맞아?”
“정말 아닙니다. 아기씨를 뵈러 혜민서에 갔다가 우연히…… 아니, 그보다 괜찮으신 겁니까?”
“응. 다친 데는 없어.”
“울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일부러 운 거야.”
“?”
설명하기가 귀찮았으므로 자세한 설명은 생략했다.
그런데 저 아이도 뜻밖의 말을 했다.
“날이 어두워지면 몰래 구해 드리겠습니다.”
“……아니, 그러긴 힘들 거야. 여긴 불법 노비 거래 현장이고, 저들은 오늘 나를 노비로 팔 생각이거든.”
“!”
애초에 오늘 거래가 있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고 지역까지는 특정해서 소이를 통해 전달했다. 하지만 정확한 장소는 모르니 수색에 시간이 걸릴 터였다.
“하지만 네가 이대로 여기 위치를 기억해서 전달하면 늦지 않게 저들을 일망타진할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사이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아기씨가 너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나 말고 잡혀 있는 다른 사람들도 위험해지긴 마찬가지야. 그리고 나는 어린 여자아이라 일단 상품 가치가 있고 저항할 힘도 없으니 오히려 쉽게 죽이지는 않을 거야.”
원래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여자 노비가 더 비싼 법이다. 하지만 키우는 기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딱히 어린아이를 선호하지는 않지.
‘그러니 역시 아까 말한 대로 기방으로 팔려고 할 가능성이 높아.’
기예가 필요한 기녀들은 어릴 때부터 가르쳐야 하니까.
아까 분명 시영원 덕분에 여자애가 씨가 말랐다고 했지.
예전에 매향이에게도 비슷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아이를 기방에 팔러 오는 부모가 줄었다고.
아이를 팔아 푼돈을 버는 것보다야, 시영원에 버리는 편이 훨씬 마음이 편하고, 나중에 아이가 자란 후엔 자신들이 잃어버린 아이라며 다시 데려가는 것도 가능할 거라는 생각에 시영원에 아이를 버리는 사람이 많았다.
재정적으로는 부담이지만, 결과적으로 불행해지는 아이의 수는 줄어든다.
처음에는 대단한 생각으로 시작한 일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좋은 작용을 하고 있다면 잘된 거지.
지금도, 남편이나 아버지의 빚 때문에 시영원에 도망치듯 들어오는 사람은 적지 않으니까.
‘어라, 생각해 보니 시영원 애들이 혼인 생각이 없는 건 그 탓도 있나.’
어디 관아에 뛰어드는 것보다 확실하게 사람을 보호해 주다 보니 가정폭력 피해자들이 노비로 팔려 가기 직전 뛰어 들어온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가능하면 그렇게 되기 전에 빨리 오면 좋을 텐데, 제 처자를 팔아먹는 망종들도 가족이라고 믿다 보니.
한숨과 함께, 나는 내가 거의 유일하게 가지고 있던 소지품을 창가로 던졌다.
어린아이라고 뭐 제대로 몸 뒤짐도 안 한 게 다행이었다.
“?”
내가 던지니까 일단 받아 든 천호가 어리둥절해 하는 것 같았지만, 그놈들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시간이 없었다.
“그걸 혜민서에 가져다주고 내 상황을 전해. 알았…….”
거기까지 말하는데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기에 나는 말을 멈추고 아까 앉아 있던 대로 다시 구석에 웅크렸다.
천호도 눈치껏 몸을 숨긴 듯했다.
끼이익-
“이제 다 울었냐?”
“나와라.”
나는 다시 훌쩍이면서 내심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무섭네. 이거.’
잘난 척 말하긴 했지만 잘못하면 이거 정말 노비로 팔려 갈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가 애써 울음을 삼키며 소매로 눈물을 닦는 모습을 본 사내들도 그리 난폭한 짓은 하지 않았다.
다만 내가 몸을 일으키려다 묶여 있는 다리 때문에 도로 넘어지는 것을 보고, 나를 묶은 남자를 괜히 한 대 더 때렸을 뿐.
“저거 걷기나 하겠어? 네가 잘 옮겨 놔라.”
“예.”
“물이라도 좀 주고. 거 얼굴이 멀쩡해야 값을 제대로 받을 것 아냐.”
납치범 일행은 내가 겁에 질려 고분고분한 것이 만족스러운 듯 난폭하게 대하지는 않았다.
그래 봤자 내가 들어갈 곳은 아까 본 나무 감옥들 중 하나겠지만.
‘역시 천호를 돌려보내길 잘했네. 이거 어두워졌다고 구해 주고 어쩌구 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닌걸?’
그렇게 냉정하게 생각하면서도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이 밀려들었다.
나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까?
‘으음, 이럴 줄 알았으면 세자와 화해는 해 주고 올 걸 그랬나.’
나한테 뭔 일이라도 생기면 엄청 자책할 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내 주변 사람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다 보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어쩌지.
내가 생각해도 내가 책임져야 할 사람이 너무 많았다.
‘시아가 화가 좀 풀린 것이 맞겠지?’
오늘 해야 할 일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처소로 돌아오는 세자의 발걸음은 근래 들어 가장 가벼웠다.
잠깐 짬을 내서 시아에게 갔다 오기도 했고, 처리하는 데 오래 걸릴 거라 생각했던 성가신 일들도 생각보다 일찍 정리했다.
덕분에 해가 지기도 전인데 모처럼 조금 편히 쉴 시간이 생긴 것이다.
평소라면 시아를 불러내 요즘 어찌 지내는지를 묻고 아이가 가져온 음식을 먹으며 시간을 보냈을 텐데, 시아는 아직도 처소에서 꼼짝을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송 내관 말로는 시아가 화가 난 기색은 아니었다고 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수년간 시아를 봐온 송 내관이니 그가 그렇다고 하면 틀림없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화를 내고 있었는데 책을 사다 줬다고 바로 아무렇지 않게 찾아오기는 조금 민망하겠지.
하지만 아마 머지않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두 눈을 반짝이며 ‘오라버니, 오라버니.’ 하고 종알종알 말을 걸어오지 않을까.
‘그야 조금 버릇없게 키웠다는 건 부정하지 않겠지만.’
지엄한 궁 안에서 시아는 유일한 예외였다.
주상 전하나 중전마마가 계시지 않는 곳에서는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거침없이 뛰어다니는 하나뿐인 누이동생.
풀리지 않는 문제로 골치가 아플 때에도 그 아이를 보고 있노라면 저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성원 형님도 이런 기분이었겠지.’
어릴 적에는 형님이 시아만 너무 예뻐하는 것 같다고 조금 토라질 때도 있었는데.
지금 자신이 이렇게 자라 아직도 작기만 한 시아를 보고 있으면 형님이 왜 그리 시아를 예뻐했는지 알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시아는 지금보다도 더 작고 어렸으니 정말 형님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여동생이었겠지.
자신도 시아를 꽤 귀여워했던 것 같은데 너무 어릴 적이라 당시의 시아가 어찌 생겼던가 이제는 조금 기억이 희미했다.
물론 그런 기억이 없어도, 자라지 않는 누이동생은 본래 나이보다도 어린아이 같아서 어리광을 받아주고 있다는 자각은 있었다.
시아를 생각하며 자연스레 입가에 떠오른 미소를 깨닫고, 세자는 조금 씁쓸하게 웃었다.
‘나라는 인간은, 새삼 인생에 낙이 별로 없구나.’
시아가 했던, 무(無)재미한 사람이라는 말이 새삼 확 와닿았다.
하지만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온 것을.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에는 공부도 무예도 마냥 재밌기만 했었는데, 갑작스럽게 세자 위에 오른 이후로는 그때만큼 즐겁지가 않았다.
‘형님의 자리를 빼앗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일까.’
가장 즐거웠던 기억은 언제나 성원 형님이 있던 그 시절에 머물러 있었다.
세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당연히 형님의 것이었으니까.
어린 시절 자신은 얼마나 어리석고 철이 없었던가.
그 시절의 멍청하기 짝이 없던 자신을, 주변에서 얼마나 조마조마한 눈으로 보고 있었을지 생각하면 부끄러울 정도였다.
‘아니, 떠올리지 말자.’
모처럼 휴식 시간이 생겼는데 자학하며 보낼 수는 없었다.
오랜만에 고양이들과 놀아 줄까.
그렇게 생각하며 처소에 돌아오니, 어쩐 일인지 언제나 제집처럼 남의 방을 점령하고 있는 고양이들도 보이질 않았다.
“별일이군.”
평소에는 방 안의 물건을 온통 흐트러트리고 도망쳐서 궁인들의 골치를 아프게 하던 놈들이건만 정작 놀아 주려 하면 보이질 않다니.
모처럼이니 책이나 읽을까 생각하니 이상하게도 평소 읽던 책들이 아닌 다른 것만 떠올랐다.
‘재미는…… 있었지.’
어느새 세자의 손은 찢어진 부분을 이어 붙어 너덜너덜한 책 한 권을 향하고 있었다.
평소 시아가 소설을 보는 것을 얕잡아봤는데, 자신이 그렇게 빠져 읽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어쩌면 자신이 그동안 너무 편협했던 것이 아닐까.
궁인들이 어떻게든 고쳐 보겠다고 종이를 덧대어 붙이고 글씨를 베껴 써 놓아 다소 엉망이기는 하나 읽는 데에는 문제가 없어진 책을, 세자는 그 후로도 몇 번인가 다시 읽었다.
어떻게 보아도 엉망이란 사실은 감출 수 없는 책을 내려다보던 세자는 문득 그날 만났던 여인을 떠올렸다.
***
“그, 혹시 꽃 그림자, 수결본을 가지고 계시다면 제게 양보해 주지 않겠습니까?”
“네?”
세자의 말에 여인은 가지고 있던 책을 끌어안고 몸을 뒤로 뺐다.
명백하게 경계하고 있는 모습에 세자는 당황해서 뒤로 몇 걸음 물러나며 헛기침을 했다.
“놀라게 했다면 미안합니다. 저는 수상한 사람이 아니고, 그저 그 책이 꼭 필요해서 그렇습니다. 사례는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아니 되겠습니까.”
“수결이 없는 삽화본은 얼마든지 구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하지만 꼭 수결이 있는 책이어야 합니다.”
주변 사람들의 말을 듣자 하니 작가의 수결본은 독자들에게 특별히 의미가 있는 물건이라고 했다.
명사들의 글씨를 가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많으니 그와 비슷한 심리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안 그래도 시아는 이것저것 수집하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였으니까.
그러니 수결이 되어 있는 똑같은 책이 아니라면, 시아가 용서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사정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것은 솔직히 조금, 민망했다.
“어찌하여 꼭 수결본이 필요하신 것입니까?”
“그건, 어찌 그런 것을 물으십니까?”
“알려 주시지 않는다면 저도 드릴 수 없습니다.”
맹랑한 여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