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12)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12)화(12/326)
‘선빈이 여긴 왜 왔지.’
가벼운 인사를 나눈 뒤 언니와 담소를 나누던 선빈은 멀뚱멀뚱 쳐다보는 나를 보고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나에게 진지한 얼굴로 양해를 구했다.
“아기씨, 소인이 아기씨를 안아 보아도 되겠는지요.”
“우으?”
고개를 갸웃거린 나는 언니를 쳐다보았다. 언니가 고개를 끄덕이자 나도 선빈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선빈은 나를 조심스레 안아 들며 옆에 앉아 있던 아이를 소개해 주었다.
“경원군. 경원군의 누이동생입니다. 앞으로 동생을 잘 돌봐 주세요.”
“예. 그리하겠습니다.”
첫 대면이었지만 사실 저 경원군이란 아이와는 처음 만나는 게 아니었다.
‘그날 대비전에서 날 붙잡은 게 이 아이였지.’
생각해 보니 내가 버둥거리며 발로 좀 찬 것 같은데…….
‘쫌 미안하군.’
나는 사과의 뜻으로 손을 뻗어 아이의 다리를 도닥여 주었다.
“웅.”
“어머나.”
그런 내 뜻을 오해했는지 선빈은 흐뭇하게 웃으며 나를 경원군에게 안겨 주었다.
‘아니아니아니아니, 얘한테 가겠다는 뜻은 아니었는데!’
거부하고 싶었지만 아기 안는 게 서툰 어린애 손에서 버둥거리다간 괜히 떨어질 거 같아 얌전히 있었더니 선빈과 언니가 푸근하게 웃었다.
“오누이가 참으로 정다워 보이지 않는가.”
“그렇사옵니다.”
저기요, 이쪽 의견도 좀 물어봐 주면 안 될까요?
그렇게 적당히 겉치레 대화를 나누던 선빈은 곧 언니와 둘이 할 얘기가 있다면 나와 경원군을 밖으로 내보냈다.
‘무슨 비밀 얘기를 하길래.’
시중을 들 필요도 없다고 궁인들까지 물린지라 안에는 둘뿐.
‘궁금해!’
내가 방 쪽으로 팔을 뻗자 어째서인지 나를 계속 안고 있던 경원군이 냉정하게 몸을 돌렸다.
“우으!”
“대화하시는 데 방해하면 아니 된다.”
경원군이라 불린 이 아이는 그 미친놈, 아니 경언군보다도 조금 더 어려 보였는데 어린아이 주제에 꽤나 차분한 인상이었다.
‘음. 아직 꼬꼬마 애기 같지만 얼굴은 잘생겼구나.’
하긴 사람은 얼굴만 봐서는 모를 일이었다. 경언군도 겉보기에는 멀쩡했으니.
‘설마 얘도 그런 성격인 건 아니겠지.’
아직 사라지지 않은 인간 불신은 사람을 경계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설마 몇 되지도 않는 왕자라는 놈들이 다 그런 놈들일 리가 있을까마는…….
문득 선조의 아들들, 아니 정확히는 광해군의 미친 형제들이 떠올랐지만 애써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궁인이나 다른 평민을 때리고 죽이는 놈들은 있었지만 태종이나 세조처럼 정변을 일으킨 것도 아닌데 친혈육을 죽일 정도의 미친놈은 역사에 흔치 않았다.
‘연산군이나 사도세자 정도는 되어야…….’
젖먹이인 자기 자식은 연못에 던지고, 그 생모(후궁 경빈 박씨)는 때려 죽였다는 사도세자를 떠올리니 왠지 또 불안해졌다.
‘이건 아는 게 힘이 아니라 아는 게 공포야!’
등골이 오싹해져 부르르 떨자 아이가 놀란 듯 진지한 얼굴로 내 상태를 살폈다.
“혹 어디가 아픈 것이냐?”
“우우.”
아니야.
“아니면 혹시 기저귀를…….”
“우우우!!”
아니라고! 짜증을 내며 손을 내젓자 본의 아니게 아이의 얼굴과 어깨를 때리는 셈이 되었다.
찰싹, 찰싹!
“이런, 어찌 오라비에게 손찌검을 하느냐.”
“우우!”
“그래 알았다. 내 말이 틀렸단 게지? 어린아이 손이 매섭기도 하구나.”
아이는 의외로 맞은 것은 별로 신경 쓰지 않고 미안한 듯 눈썹을 늘어뜨리며 웃었다. 그렇게 웃으니 무뚝뚝한 표정일 때와는 인상이 달라 조금 귀여웠다.
‘으음, 그래. 어린아이에게 화풀이를 하는 건 좀 아니지.’
사과도 받았겠다, 이번에는 조심스레 얼굴을 토닥이자 아이는 킥킥 소리 죽여 웃었다.
기껏해야 초등학교나 들어갔을까 싶은 어린아이에게서 드디어 아이다운 표정이 나왔다.
“너는 영 갓난아기 같지가 않구나.”
너도 좀 애늙은이 같은데.
아까보다는 조금 부드러워진 얼굴이었지만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로 아이는 나름 성의 있게 나를 안고 도닥거렸다.
“걷지도 못하고 답답하지 않으냐?”
“우으.”
답답해 죽겠다.
“하지만 걸을 수 있게 되어도 답답할 것이다.”
“우으?”
아이는 나를 안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궁 안은 답답하고 위험한 곳이니 늘 조심하여야 한다.”
아니, 여기 형제들은 왜 말도 못 알아듣는 아기한테 이렇게 중요한 얘길 속삭이지?
지난번에 세자도 그러더니?
“세자 저하께서 너를 마음에 들어하신다 들었다. 형님께선 좋은 분이시지.”
“오오.”
너도 아는구나.
“하지만 형님 저하는 바쁘신 분이니 귀찮게 해서는 안 된다.”
야, 내가 찾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무슨 수로 귀찮게 해.
“그리고 경언군은…… 가능한 한 마주치지 말거라.”
너도 뭔가 아는 얼굴인데? 근데 그거 나 말고 우리 언니한테 해 주면 안 될까?
아직 걷지도 못하는데 내가 무슨 수로 피해.
속으로 매우 딴지를 걸었으나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옹알이뿐이었다.
“오우.”
“마주친다면 가능한 피하는 게 좋다. 이런 말을 너에게 한다고 알아들을 리도 없다만…….”
내가 그 말의 의미를 알게 된 건 돌이 지나고 혼자 걸어 다닐 수 있게 된 후였다.
***
“아기씨, 발밑을 조심하시옵소서.”
“으응.”
요즘엔 주변이 평온해 자연히 몸도 마음도 평화로웠다.
괴롭히는 사람도 없고 나인들은 지극히 공손했다.
‘하긴 요즘 생물학적 아비가 자주 찾아오니 다들 신경 쓰겠지.’
생물학적 아비는 나를 생모에게 보낸 후, 내가 걸음마하는 것을 보겠다고 매일같이 찾아왔었다.
그리고 찾아와서는 주로 나를 두고 둘이 흐뭇하게 대화를 나누곤 했다.
덕분에 알게 된 건데 생모는 가족들이 일찍 세상을 떠나 제대로 된 친정도 없고, 친구들 외에는 지인도 별로 없는 고독한 처지라고.
그러니 언니에게 혈육이라고는 나 하나뿐이었다.
‘이런 건 비슷하지 않아도 되는데.’
한숨을 쉬며 아직 힘이 부족한 다리로 뒤뚱뒤뚱 걸었다.
‘어휴, 남들은 어려지면 뽀짝뽀짝 걷는다는데 기력이 부족하다.’
덕분에 내 뒤를 따르는 나인들은 불안불안한 눈으로 나를 보며 꾸물꾸물 걷고 있었다.
‘옆에서 보면 되게 웃기겠군…….’
아직 애기라고, 어쩔 수 없다고.
자기합리화를 하며 걷고 있는데 갑자기 내 뒤를 걷던 송비가 다급하게 숨을 삼키며 나를 감싸 안았다.
“히익.”
“?”
아니 저게 뭐야.
아무래도 내 눈을 가리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조금 늦었다.
바닥에는 새로 추정되는 동물의 사체가 조금 잔인한 형체로 널브러져 있었다.
“어찌 저런 흉한 것이……!”
“아기씨를 이쪽으로 뫼시어라.”
“놀라지 않으셨습니까?”
“웅.”
댁들 때문에 더 놀라겠는데.
“수선 피우지 말고 어서 사람을 불러 치우도록 해.”
“예, 예에.”
의외로 나인들 중에서 가장 침착한 사람은 송비였다.
“저런 흉한 것을 보았는데 어째 동요도 없으십니다?”
“닭도 잡아 봤는데 저런 것에 놀랄 것까지야.”
송비 닭도 잡을 수 있구나……. 파리 한 마리 못 잡을 거같이 생겼는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송비는 나를 안아 들어 시야를 가린 채 다른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나도 딱히 그런 걸로 놀라지는 않지만 역시 보기 좋은 건 아니지.’
전생에서도 차에 치인 비둘기 사체 같은 건 본의 아니게 여러 번 본 적이 있고.
하지만 문제는 여긴 궁 안이고, 자동차도 없는데, 저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데 있었다.
이후에도 몇 번인가 죽은 새나 동물의 사체가 종종 눈에 띄었으니까.
‘궁 안은 살생이 금지되어 있는 게 아니었던가.’
보통 살생은 부정적으로 볼 텐데. 물론 보이는 순간 정리해야 하는 쥐나 벌레 같은 건 예외 같지만.
시끄러워지려나 걱정했지만 처소의 궁녀들도 일을 키우고 싶지 않은지 조용히 처리하는 듯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궁녀들은 내가 돌아다니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듯했으나, 아직 거동이 불편한 언니는 막 걸음마를 떼고 돌아다니고 싶어 하는 나를 막지 않았다. 상전이 막지 않으니 궁녀들도 막을 수 없었고.
그리고 돌아다니다 보면 사람도 만나는 법.
그렇게 또 산책을 나간 날, 오랜만에 경원군과 마주쳤다.
“우아아?”
“이제 걸어 다니는 것이냐?”
어째 불만인 거 같다?
“잠시 못 본 사이에 많이 자란 것 같구나.”
뚱한 표정의 아이 옆에는 오랜만에 보는 생명의 은인이 있었다.
세자는 뜻밖의 만남에 기쁜 듯 나를 향해 팔을 벌렸다.
“우리 시아가 왔구나. 어디, 이 오라비에게 오겠느냐?”
“웅.”
나는 망설임 없이 미래의 권력자 품에 안겼다.
“보아라, 참으로 작지? 경원군이 어릴 적에도 이리 작았단다.”
“그렇사옵니까?”
“귀엽기도 하지. 그래. 이 오라비가 보내 준 옷을 입었구나.”
호오. 그건 몰랐는걸.
어쩐지 요새 밖에 나올 때 입는 옷이 좀 고급이 됐다 했어.
“까르르!”
감사의 표시로 웃으며 매달리자 세자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미소년이 활짝 웃으니 좋은 풍경이었다.
“경원군과 투호 놀이를 하고 있었단다. 시아도 함께 하겠느냐.”
“우어?”
투호 놀이라, 하긴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어린애랑 점잖게 놀아 줄 수 있는 방법이 많지는 않지.
하지만 들뜬 얼굴의 세자와는 달리 아이는 모처럼 형님과 보내는 시간이 방해받은 것이 서운한 기색이었다.
‘동생이 생기면 서러운 법이지.’
그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니 양보해 주마.
‘내가 딱히 세자의 관심을 갈구하는 것도 아니고.’
누나는 부모의 관심이 고플 나이는 지났단다, 아가야.
나는 세자의 어깨를 툭툭 쳐 내려달라는 어필을 했으나 세자의 의견은 다른 듯했다.
“내려 달라고? 좀 더 안고 있으면 안 될까?”
보기 드문 미소년이 시무룩한 얼굴로 부탁했으나 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안 돼! 네 뒤를 보라고! 네 남동생의 저 초롱초롱한 눈을!
“우우으!”
귀찮아! 놔라!
전보다 많이 묵직해진 내가 몸을 비틀자 세자는 어설프게 나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흣차아!”
“앗?! 시아야?”
그리고 나는 발이 땅에 닿자마자 그대로 달려 나갔다. 뒤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멈추지 않았다.
“아기씨!”
내가 탈주하자 궁녀들 역시 당황해 내 뒤를 따랐다.
그런데, 못 따라오더라.
‘이제 걸음마 시작한 어린애 하나 못 잡다니.’
물론 오랜만에 달리니 흥분한 내가 앞뒤 안 가리고 달리다 길이 아닌 다른 데로 들어온 탓도 있었다.
‘에잉. 뭐 하지만 혼자만의 시간도 좀 필요하긴 했어.’
어차피 곧 찾아오겠거니 싶어 나는 자기 합리화를 시작했다.
요만한 아기를 키울 때는 당연한 일이긴 한데 누가 하루 24시간 따라붙는 거 너무 귀찮았다.
‘오, 여기 연못도 있네. 여기서 쉬고 있으면 금방 발견하지 않을까?’
마침 다리도 좀 아프고, 모처럼 혼자 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연못가에 서 있는 누군가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뭐…… 하는 거지?’
옷차림만 봐도 누군지는 알 수 있었다. 그때 그놈, 경언군이다.
뭘 하고 있는지 제법 굵고 긴 나뭇가지를 들고 있어 분위기가 제법 흉흉했다.
다행히 연못을 보며 등지고 있어 나를 발견하진 못했기에 나는 반사적으로 그놈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몸을 숙였다.
냐아-
‘고양이?’
뜻밖의 고양이 울음소리에 자세히 보니 아직 어린 듯 작은 고양이 한 마리가 소년의 한쪽 손에 들려 있었다.
풍덩!
“!”
그리고 그놈은 들고 있던 아기 고양이를 그대로 연못 위로 떨어뜨려 버렸다.
너무 놀라 나도 모르게 달려 나가려는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경언군 형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