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126)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126화(126/326)
***
혜민서는 여전했다.
다행히 환자가 그리 많지 않아서 내가 왔다는 소식을 들은 세화가 곧 나를 찾아왔다.
“세화.”
“아기씨 오셨습니까.”
“응. 시영원에 갔다가 여기 허성지 의원한테서 소설 얘기를 들어서. 혹시 지금 볼 수 있을까?”
“물론입니다. 아기씨.”
내가 찾아올 걸 예상하고 있었던 것인지 세화는 안에서 원고를 꺼내 왔다.
“탈고했으면 말을 하지 그랬어.”
나한테 연락할 수단도 가르쳐 줬는데. 물론 시영원이든 내 사저든 한 단계 거쳐야 하니 귀찮긴 하겠지만.
“아직 탈고라고 할 정도는 아닌걸요. 그리고 아무리 그래도 이 글을 궁……에 들여보내는 건 조금…….”
음. 왕실을 경원시하는 건 보편적인 감성이지.
‘권위를 위해 일부러 그렇게 조장하는 것도 있고.’
세화는 나에게 원고를 주고 다시 일하러 갔고 성지도 함께했다.
소이가 간절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기에 할 수 없이 나란히 앉아 책을 보기로 했다.
혼자 읽는 게 속도가 더 빠르긴 하지만 감상을 말해 줄 사람이 하나 더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성 겸사복과 천호는 둘이 여기서 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밖으로 나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인력 낭비 같은데.’
둘이 체력 단련이라도 하고 오려나.
일단 소이와 함께 원고에 집중했다. 이번에는 아예 원고 단계부터 한글로 썼더라.
덕분에 읽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는데, 내용도 흡족했다.
재미도 있고, 과하지 않은 수준으로 자연스럽게 세자를 올려치기 해 주고 있었다.
‘흐음. 그날 일도 약간 넣어 놨는데…….’
심지어는 그날 세자가 했던 대사까지 들어가 있다니.
이건…… 아는 사람은 아는 시그널이랄까?
요즘 세태까지 반영했는지 세자가 노비제에 부정적인 것에 대신들이 반발하며 세자를 괴롭히려는 내용까지 들어 있다. 워후.
나의 니즈를 완벽하게 충족해 주는 아름다운 글이었다.
이건 왕실이 아니라 다른 놈들이 반발하겠는데.
“어때?”
“재밌습니다!”
소이도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작은 소리로 외쳤다.
나는 원고를 잘 갈무리한 후 세화를 불렀다. 세화는 약간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마음에 드시옵니까.”
“맘에 들어!”
내가 원하던 바로 그 작품입니다!
세화는 뜻밖에도 이미지 선전용 작품 만드는 데에도 재능이 있는 인재였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는데.”
내 말에 세화가 약간 긴장한 듯 침을 꿀꺽 삼켰다.
아니, 나 그렇게 무서운 사람 아니야…….
“무엇입니까?”
“아무래도 세자가 너무 잘난 척하고 무게를 잡는데.”
“……아, 예.”
그리고 내 대답에 기운이 빠진 듯 어깨가 축 늘어지는 것이 보였다.
저기요. 나름 진지한 의견인데요.
“조금 멍청…… 아니, 허술한 면을 넣자.”
“네엡…….”
세화가 웃음을 참고 있는 것 같았지만 나는 모르는 척했다.
“인간이…… 너무 완벽하면 재미가 없어. 약간 인간미가 있어야지.”
“예, 지당하십니다.”
내 말이 뭐가 그리 재밌는지 내 옆에 있던 소이, 성지와 함께 셋 다 푸후후 하면서 웃음을 참질 못했다.
“웃지 말고.”
“예, 후후. 그런데 혹시 아기씨께서는 직접 글을 써 보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내가?”
말을 돌리려는 것인지 계속 웃음을 흘리던 세화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예. 이 글도 사실 아기씨께서 거의 만들어 주신 이야기가 아니옵니까. 저는 살을 붙였을 뿐이지요.”
“아니, 나는 창작의 재주는 별로 없거든.”
내가 세화에게 말한 건 이미 알고 있는 원작의 스토리이자, 이미 벌어진 일들을 간단하게 요약하고 적당히 개연성을 지어낸 것뿐이다.
말하자면 원래 있는 이야기라는 뜻이다. 애초에 이야기의 살을 붙이는 능력도 없고.
‘음. 사실 내가 원래 알고 있던 역사를 그대로 소설로 써 보면 재미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있지만.’
실제 역사면 남의 창작물을 베끼는 게 아니니 마음도 편하고 말이지.
하지만 사극에서도 자주 다뤄지다 보니 비교적 가장 상세하게 알고 있는 조선 시대 건국 초기 스토리를 떠올리고는 그냥 일찌감치 마음을 접었다.
여말선초(麗末鮮初) 이야기를 소설로 쓰면 분명 독자들은 전개상 주인공인 이성계한테 푹 빠질 수밖에 없다. 백전 무패의 무장에다 투구 끈을 활로 맞히는 신궁(神弓)이니까.
그런데 그랬던 이성계가 고려 멸망시키고 조선 건국하면 갑자기 노망난 것처럼 본처 소생의 장성한 5형제를 두고, 어린 후처의 소생인 꼬꼬마 막내아들을 세자로 세우겠다고 생떼를 쓴다?
‘작가 미친 거냐고 캐붕 소리 듣겠지.’
내 이성계는 이렇지 않다며 온갖 욕을 먹을 거다.
자극적인 막장 스토리 쓰겠다고 이렇게 주인공 망치는 거냐, 아무리 그래도 후처한테 빠져서 저러는 건 아니지 않냐고 작가에게 실망했다는 독자가 속출할 거고.
이거 혹시 유목민들 풍습이라는 말자(末子) 상속 같아 보이는데 실은 이성계가 그쪽 사람 아니냐는 말도 안 되는 왜곡된 주장과, 고래(古來)로부터 권력자들 중에 젊은 새 부인한테 빠져서 본처와 본처 자식 홀대하다 망하는 거 실제로 자주 있던 일이라는 역덕들의 의견이 분분해지겠지.
심지어 이성계의 쟁쟁한 아들들 중에서 유일하게 무장이 아니고 문관이었던, 5형제(*6남 이방연도 고려조에 과거에 급제했으나 조선 건국 전후에 요절했다.) 중에서도 막내인 이방원이 이복형제들은 다 죽이고 둘째 형 왕위에 올려놓은 다음 자기가 다음 왕위에 오른다?
작가 최애가 이방원이라 갑자기 튀어나온 놈이 푸시 받는다는 소릴 들을 것이 눈에 선했다.
어쩐지 무인 집안에서 갑자기 과거급제 했더라니, 이러려고 한 빌드업이었던 것이 틀림없다고.
그런데 그렇게 왕이 된 이방원이 백전 무패의 장수였던 아버지와 전쟁에서 이기기까지?
편애도 이런 편애가 없다. 작가가 뭐에 눈 돌아가서 저러는지 모르겠다, 글 쓰다 보니 이성계가 싫어진 거 아니냐는 소릴 듣겠지.
게다가 이방원 그놈이 거기서 멈추지 않고, 왕이 되는데 가장 큰 조력자였던 처가도 외척을 제거한다고 풍비박산을 내고…….
그랬으면 잘 살기라도 하지, 세자로 삼은 큰아들이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패륜 양아치라 결국 폐세자시키고는, 둘째도 아닌 셋째가 똑똑하다고 세자로 삼는다. 그래 놓고 또 외척 잡겠다면서 셋째 아들의 사돈댁까지 풍비박산을 낸다.
아니, 혹시 작가님 취향이 좀 미친놈이신가? 혹시 지금 왕실의 외척에 뭐 불만이라도?
그리고 그렇게 험난한 과정을 거쳐 세자가 되고 후딱 왕위에까지 올라 버린 셋째 아들이 훗날 어마어마한 성군(세종)이다?
진짜 작가가 변태 아니냐고 욕하지 않을까.
작위적인 것도 정도가 있지. 작가가 이방원 실드친다고 별짓을 다 한다는 욕을 먹을 것이 분명했다.
‘물론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전개라고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거 같지만.’
하지만 그렇게 욕먹으면서까지 글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심지어 그 성군의 큰아들(문종)은 일찍 죽고 둘째 아들(수양대군)이 어린 조카(단종)의 왕위를 빼앗아 결국 죽이기까지 하고, 그렇게 왕이 된 둘째 왕자의 자식들 줄줄이 죽는 스토리까지 나오면 정말 작가 취향 이상하다는 말밖에는…….
‘역시 논픽션 스토리가 제일 자극적이다. 인간의 상상력이 쫓아갈 수 없어.’
실제 역사라는 걸 모르고 보면 그냥 작가가 미친놈이 되는 거지.
스토리 자체가 막장 맛이 있어 인기가 있을 거 같기도 하지만 욕도 오지게 먹을 것이 뻔해서 평범한 멘탈을 가진 나는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그렇게 창작의 야욕은 포기했으니 그냥 사업이나 열심히 굴려야지.
“그리고 이거 완성하면, 이것도 조금 각색해서 연극으로 올리자.”
“예? 그래도 되겠습니까?”
“음. 사실 연극도 나중에 극장…… 같은 데를 만들어서 제대로 하면 좋겠지만 말이지.”
이 작품을 연극을 올리려는 목적은 세자의 이미지 메이킹이니까 여러 사람이 보도록 할 생각이라 사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만.
앞으로는 좀 고급화 전략도 생각해 볼 만했다.
무조건 고급화만이 능사는 아니지만 조금, 고급스러운 곳에서 잠깐의 사치를 부리고 싶어 하는 수요는 어느 시대에나 공통적으로 존재하니까.
물론 지금 하고 있는 연극들이 잘됐을 때의 얘기지만.
‘그러고 보니 식당도 더 늘리고 싶은데. 기왕이면 지을 때 공연 가능한 공간을 만들어서 정기적인 공연을 할 수 있게 해 볼까.’
사극 영화 같은 데서 그런 거 많이 본 거 같은데.
그리고 찻집도 좀 만들까.
‘요새 시영원에 사람이 더 늘어난 김에 돈도 좀 더 벌고 일자리도 더 만들고 싶네…….’
내가 잠시 사업 구상에 빠져 있는 사이 혜민서에 환자가 하나둘씩 늘어나고 있어서 나는 괜히 방해되지 않도록 돌아가기로 했다.
원래 혜민서가 만남의 장소로 썩 좋은 곳은 아니지.
그러니까 역시 찻집을 하나 만드는 게 좋겠다. 위생적으로도 내가 안심할 수 있는 곳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간다고 인사하려는데 세화가 짐을 챙기는 것이 보였다.
“어라, 세화는 어디 가?”
“왕진이요. 움직이지 못하는 환자들을 봐 달라는 경우도 있거든요.”
“성지도 같이?”
“예.”
그렇게 증상이 심하지 않더라도 여성 환자들 중에 왕진을 요청하는 경우가 제법 있다고 한다.
“그래서 어디로 가?”
“예?”
나는 이제 양 사이드에 호위를 하나씩 달고 있는 몸이니 전보다 좀 느긋하게 다녀도 괜찮겠지.
세자도 이건 예상하고 붙이지 않았을까. 아니어도 상관없고.
물론 두 사람의 퇴근이 늦어지는 건 미안하지만 우리 소중한 작가님의 신변도 중요했다. 아직 해도 안 저물었으니 늦은 시간도 아니고.
“돌아갈 거니까 데려다줄게.”
“앗, 감사합니다. 그, 하지만 아기씨가 가실 만한 곳이 아닌지라…….”
“?”
내가 가면 안 되는 곳이 어디지.
납득할 만한 답을 듣지 않으면 내가 뜻을 꺾지 않을 것을 깨달았는지 세화는 망설이다 결국 입을 열었다.
“다방골 기방이옵니다.”
“아…….”
나는 왜 안 된다고 하는지 이해했다.
“마침 잘됐다. 그럼 같이 가자.”
“예?”
“나도 한번 가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예에?”
그리고 그곳은 내가 새삼 못 갈 곳은 아니었고.
세화가 당황하거나 말거나 나는 호위를 불러내고 적아의 위에 올라탔다. 성지는 예상했다는 듯 말없이 웃고 있었다.
“아니, 아니. 아기씨?”
“세화는 다방골 기방에 가 본 적이 있어?”
“예? 아니요. 아직 가 본 적은 없습니다.”
“그럼 안내해 줄게.”
“예에……?”
공교롭게 지금 동행하고 있는 사람들 다 다방골 기방에 가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물론 성지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안에 못 들어가 본 건 소이 정도인가.’
이번 기회에 합법적으로(?) 들어가 보자.
아직 대낮이고 기방에 사람 많을 시간은 아닐 터였다.
‘지난번 일로 매향이가 많이 놀랐을 테니 그쪽에도 한번 가서 얼굴을 보여줘야지.’
일단 걱정할까 봐 무사하다고 서신은 보냈는데 매향이에게서 아기씨를 뵐 낯이 없노라며 굉장히 풀이 죽은 답장이 왔다.
아무래도 그날 내가 여기서 매향이를 만나고 돌아가는 길에 납치된 셈이라 자책하고 있는 듯했다.
‘글쎄, 그야 내가 그날 매향이를 만난다고 평범한 차림을 하지 않고, 평소처럼 양반댁 아기씨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면 그렇게 쉽게 납치당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아마 길거리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뭔가 이상하게 생각하고 납치범을 붙잡았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