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136)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136화(136/326)
“누, 누구요!”
“확인할 것이 있어 왔을 뿐이오.”
갑자기 나타난 이는 옹주 자가를 늘 곁에서 따르던 익숙한 얼굴의 겸사복이었다.
언제나 옹주 자가 앞에서 다정다감하던 사내의 얼굴은 칼날처럼 차가웠다.
“무, 무슨 확인을 할 생각이오. 나는…….”
“허성지 의원은 당신의 친조카가 아니더군.”
“!”
“그리고 그 금비라는 의녀는…….”
금비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허연태는 눈빛이 변해서 성윤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일개 의원인 그가 전직 체탐인에, 현직 겸사복인 성윤을 당해 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간단하게 제압당한 허연태의 눈이 절망으로 차올랐다.
“크윽……!”
“쓸데없는 반항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요. 허성지 의원도 이미 떠났으니 당신을 도와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소.”
성지가 없다니 차라리 다행이었다.
“주, 죽이시오.”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리 쉽게 죽으려는 게요.”
“내가 죽으면 모두 끝나는 일이 아니오?!”
“그렇지는 않소. 허성지 의원이 주상 전하를 뵙게 될지도 모르는데 수상한 자를 어찌 전하의 안전까지 데려가겠소? 이대로 옹주 자가의 곁에 두는 것도 위험한 일이고.”
“!”
성 겸사복의 말에 허연태는 당황한 눈치였다.
“성지는…… 아무것도 모르오. 아무 관련도 없소.”
“그건 들어보면 알 일이지. 내가 알고 있는 사실과, 당신이 말하는 사실이 어느 정도 일치하는지 말이오.”
그 말에, 허연태는 상대가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찌…… 아시었소…….”
“형님 부부의 딸이라고 거짓말을 할 거면 좀 더 치밀하게 했어야지.”
허연태에게는 분명 형과 형수가 있었지만 성지가 태어나기 약 1년도 전에 죽었다.
그렇다면 성지는 전혀 다른 사람의 아이라는 뜻이었다.
허연태는 포기한 듯 입을 열었다.
“성지는…… 내가 내의원에 있을 때 알고 지냈던 의녀, 금비의 아이요.”
“실은 당신의 친자인가?”
“아니오! 나와 그 사람은 그런 사이가 아니었소.”
***
의녀 금비는 젊은 나이에 의과(醫科)에 급제해 갓 내의원에 들어온 허연태보다도 관록이 있는 인물이었다.
갓 내의원에 들어와 허둥대던 그가 저지를 뻔한 큰 실수를 남모르게 조용히 수습해 준 이도 금비였다.
“고맙소! 정말 고맙소! 내가 하마터면 큰일을 저지를 뻔하였는데, 덕분에 살았습니다!”
“운이 좋아 발견했을 뿐입니다. 아직 내의원이 익숙하지 않으신 것이겠지요. 너무 자책하지 마십시오.”
“아니오. 내 실수요. 이런 실수를 하는 의원이 어찌 내의원에 있겠소.”
“……하지만 실수를 금방 깨닫고, 심지어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저를 이리 찾아와 감사 인사를 하시는 의관은 허 의원님뿐일 것입니다.”
“예?”
“신의(信義)가 있는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저는, 그런 분이 내의원에 계셔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의녀 금비는 빙그레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때 그 미소는 어째서인지 허연태의 가슴에 깊이 새겨졌다.
의녀라는 존재에 대해 익숙지 않았기에, 당시의 허연태는 의녀들의 취급이 어떠한지도 잘 몰랐다.
의녀는 천민 출신이나 학문과 의술을 익힌 여인이었다. 그 때문에 다른 관비들보다는 대우가 나았으나, 실력이 있는 의녀라 해도 남자 의관보다 신분이 아래라 그들이 불합리한 명을 내려도 거역하기 어려웠다.
그런 상황을 겪으니 면천(免賤)을 위해서, 의녀로 일하며 알게 된 양반가의 첩으로 들어가는 경우도 허다했다. 양반들 역시 교양이 있고 의술까지 있는 여인을 첩으로 들이는 데에 적극적이었고.
금비 역시 그런 권유가 여러 번 있었음에도, 응하지 않고 오직 의녀로서 충실했다.
무례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물어본 적도 있었다.
“이런 취급을 받느니 좋다고 따르는 양반의 부인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 낫지 않겠소?”
하지만 금비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어릴 적부터 의원이 되고 싶었습니다. 의원이, 의녀가 한 명이라도 더 있다면 병으로 부모님을 잃은 저 같은 아이가 생기는 것을 막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설령 천민일지라도 누군가의 첩으로 끝나고 싶지 않습니다.”
비록 비천한 대우를 받을지라도 금비는 긍지 있는 의원이었다.
허연태는 그런 금비를 응원해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금비의 부모님을 앗아 간 병은 두창이었다.
그 때문인지 금비는 두창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치료를 해 주며 알게 된 이들을 통해 인두법에 대해 알게 되고, 우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흥미로워했었다.
“휴가를 받아 우두를 앓은 적이 있는 이들을 직접 만나고 확인해 보려 합니다.”
“휴가를 받으면 쉬어야지 그러다가 병이 날 거요.”
그때 이미 허연태는 금비를 마음에 품고 있었다. 하지만 금비에게 방해가 될 뿐이라는 생각에 그 마음을 전하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리고 휴가를 다녀온 금비에게는 정인이 생겼다.
자세한 사정까지는 알지 못했지만, 길에서 다친 사람을 발견해 치료해 주고 보살펴 주다 정이 들었다고 들었다.
금비에게 정인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고 허연태는 좌절했지만 그래도 행복하게 살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부질없는 바람이었다.
사내는 역당 신허도와 관계가 있는 자였다. 관군에게 쫓기던 중 금비를 만난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금비는 이미 아이까지 낳은 몸이었다.
이웃 중 누군가가 그 사내를 알아보고 신고한 것인지 사내는 홀로 도망쳤다.
출산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아이와 함께 남겨진 금비가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미 도망치기에도 늦은 상황이었다.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에 찾아왔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허연태는 뜻밖의 상황에 당황했다.
“역적을 숨겨준 데다 그 아이까지 낳은 사실까지 알려지면 다시는 의녀로 돌아올 수 없을 겁니다. 게다가 이 아이까지도요.”
사랑했던 사내에게 버려졌지만 금비는 포기하지 않았다.
“염치없지만, 허 의관님께 청이 있습니다.”
금비는 그때 이미 두창에 대한 의서를 쓰고 있었다.
허연태 역시 두창에 관심이 있었으므로, 두 사람은 겉으로 가깝게 지내지는 않더라도 의서에 관한 내용은 공유하고 있었다.
금비는 인두법(人痘法)에 대해 알고 있었고, 스스로의 몸에 실험해 확인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하지만 상황이 이리되자 금비는 이대로 끌려갈 수는 없다는 생각에 독한 마음을 먹고 스스로에게 인두법을 실험했다.
아이는 우연히 찾아왔던 허연태에게 맡기고, 관군에게는 사내가 아이만 데려갔다는 거짓말을 했다.
아무리 역도를 숨겨 준 이라 해도 두창 증세를 보이는데 섣불리 가까이 접근하는 관군은 없었다.
그대로 지내던 방에 격리되었고, 고작 천민 의녀의 목숨을 크게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덕분에 허연태는 당시 담당 의관에게 두창 연구에 필요하다고 둘러대고, 돈을 주고 모르는 척 금비를 죽었다고 진단하게 해서 빼돌리는 데에 성공했다.
“어찌, 이렇게까지 해 주십니까. 염치없이 아기를 부탁드렸는데 이런 위험까지 감수하시다니요.”
“그리 매정하게 말하지 말게. 전부터 이녁에게 도움받은 것이 얼마인데. 그리고 이녁 같은 의원이 없어지는 것은 세상에 큰 손해가 아닌가.”
“……의녀를 의원이라고 불러 주는 사람은 허 의관님뿐일 겁니다.”
“그러니 살게.”
“예. 그래야지요.”
다행히 금비는 죽지 않고 회복되었다. 그러나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에서 두창을 앓은 탓인지 회복이 늦어져 한동안 힘들어했다. 그래도 결코 포기하지는 않았다.
“내 인생에서 가장 후회하는 걸 꼽으라면 그 사람을 만난 거예요.”
금비는 이따금, 생각났다는 듯 그런 말을 했다.
딸아이를 소중히 안고 있으면서도, 그런 후회 섞인 말을 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금비가 그자를 만나지 않았다면, 어쩌면 적어도 의녀로서 의서를 완성하고 명성을 얻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금비의 인생은 그자와 만나면서 완전히 뒤틀렸다.
허연태는 주변에 성지와 금비를 죽은 형의 아이와 형수라고 둘러대며 헌신적으로 보살폈지만, 그 마음의 구멍을 메워 줄 수는 없었다.
대신 함께 의서를 만드는 것은 가능했다.
금비는 아이를 키우며 자신이 정리해 두었고, 허연태가 미리 빼돌려 둔 자료들을 정리해 책으로 만들었다.
금비는 자신의 연구에 확신을 가지자 아직 어린 딸에게도 우두를 접종했다.
다행히 성지는 우두를 약하게 앓고 금방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금비는 이렇게 어린아이라도 우두를 접종해도 괜찮노라며 웃었다.
다만 우두에 걸린 적이 있어도 시간이 오래 지난 후에는 두창을 앓게 된 사람도 있었다며, 몇 년 후에는 다시 우두를 접종해야 할 거라고도 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접종해야 할 필요가 있다며 어린 성지를 데리고 다니며 사람들을 설득하고 다니곤 했다. 두창은 돈 없고 가난한 계층의 사람일수록 취약했다.
금비는 그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것이 우두라는 사실을 숨긴 채 몰래 종두를 접종해 주곤 했다. 그러다 미친 사람으로 몰려 도망다니기도 했지만 본인은 괜찮다고 웃었다.
설령 미신으로 몰리더라도 많은 사람이 두창에 걸려 죽지 않는다면 그것이 가장 좋은 일이 아니겠느냐고.
그리고 그사이, 허연태는 내의원에서 어린 왕녀 아기씨의 담당의가 되어 있었다.
성지를 봐 온 시간이 길었기에 어린 여자아이를 돌보는 데에는 익숙했으므로, 부모와 떨어져 지내는 시간이 많았던 왕녀 아기씨는 금방 허연태를 따랐다.
건강한 성지와는 달리 병약한 아기씨였다.
어찌 비교할 수 있겠냐마는 두 아이를 볼 때마다 신분과 건강을 바꾼 듯한 격차에 복잡한 기분이 들곤 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 왕녀 아기씨가 두창에 걸렸다.
아직 많이 어리지만, 두창에 노출되고 며칠 안에 종두법을 실행하면 아기씨를 살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날을 위해 금비와 함께 두창을 연구해 온 것이 아닐까. 그리 생각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어리고 병약한 아기씨의 체력이 우두를 견딜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허연태를 찾았다.
영빈, 당시에는 아직 귀인이었던 후궁을 모시는 궁녀였다.
그리고 몰래 불려간 취영당에서 뜻밖의 말을 들었다.
“자네가 역적의 가족을 데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네.”
“어인…… 말씀이시옵니까.”
“역적을 몰래 빼돌린 게 들통나면 자네도 의금부로 압송될 것이고, 그 의녀는 끌려가 관비가 되겠지. 물론 그 딸도.”
떨고 있는 허연태가 우스운 듯 높으신 후궁 마마님은 작은 소리로 웃었다.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했나? 참 순진하기도 하지.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네. 죽여서 입을 막지 않으면 언젠가는 드러나게 되어 있지.”
“어어어, 어찌…….”
“어찌하기를 바라냐고?”
“그러, 그렇사옵니다.”
허연태는 머릿속이 텅 비어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저도 모르게 전신이 덜덜덜 떨렸다.
애초에 그런 큰일을 저지를 수 있는 위인도 아니었다.
대체 자신에게 무엇을 시키려는 것인가.
그리고 뜻밖의 지시를 들었다.
“아무것도 하지 말게.”
“예?”
“자네같이 겁 많은 사람을 어떻게 믿고 위험한 일을 시키겠나. 그저 아무것도 하지 말게. 겉으로만 열심히 치료하는 척하란 말이야.”
“…….”
그렇다면 자신을 대체 왜 부른 것인가.
그런 의문을 품고 있는 허연태의 속내를 꿰뚫어 본 것처럼 영빈이 말했다.
“자네가 두창 치료법을 연구한다는 소문이 있어서 말일세. 혹시라도 왕녀를 치료해 버릴지도 모르지 않는가?”
“…….”
“아무것도 해 주지 말게. 참 쉬운 일이지? 죽이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
허연태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영빈은 혼잣말처럼 말을 이었다.
“어설프게 흔적 같은 걸 남기느니 아무것도 하지 말란 말일세. 그저 왕녀가 오래도록 고통스러워하는 걸 중전이 볼 수 있다면 좋겠지……. 임 상궁 그 독한 것도 말이야.”
“?”
무슨 말일까. 허연태 역시 중전과 다른 후궁들의 사이가 겉보기처럼 화기애애하기만 할 거라고 믿을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았다.
자신 역시 후궁전의 일에 대해선 가능한 한 얽히지 않기 위해 언제나 조심, 또 조심하고 있었다.
워낙에 의원들이라는 것이 이런 일에 얽히지 않기가 힘드니 자연히 귀를 쫑긋 세우고 무슨 일이 있는지 계속 주시해야 했다.
금상 전하께서는 유독 자식 복이 없는 분이셨다.
중전마마께서도 세자빈 시절부터 유산하거나 태어난 아이까지 잃은 적도 있었고, 후사가 없어 들인 후궁들도 아이를 가지지 못하거나 유산하곤 했다.
그래도 지금은 세자 저하와, 왕녀 아기씨까지 있지 않으시던가.
“왜, 내가 무서운가? 어찌 그리 독한 소리를 할 수 있나 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