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137)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137화(137/326)
“아, 아니옵니다.”
“하지만 자네가 내 말에 따라 주면 자네가 살리고 싶은 사람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살릴 수 있을 거라네.”
“그 말씀은…….”
그리 말하며, 대나무 발 너머의 영빈은 제 배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 몸짓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자네가 왕녀를 살리지 않으면 다른 아이가 살 수 있는 거라네. 어떠한가. 의원으로서 어느 쪽을 택할 텐가?”
“그런, 그런 선택은…….”
“이 아이가 만일 무사히 태어난다면 그건 자네의 공일세. 내가 어찌 자네를 못 본 척하겠는가. 그러니 내 말을 잊지 말게.”
“어찌, 이런 일까지, 하시는 것이옵니까.”
겨우 쥐어짜 낸 목소리에 영빈은 애처로운 목소리로 답했다.
“중궁전의 시선이 다른 곳에 집중되어 있어야 내가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네. 후궁에서 많은 이들이 이미 몇 번이나 아이를 떠나보내야 했다는 사실은 자네도 알 것 아닌가.”
그리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중전이 낳은 아기를 위해 다른 후궁들의 아이는 태어나지도 못 하게 하였으니 그 벌을 누군가는 받아야지…….”
오싹한 내용이었다.
그 말은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후궁의 자식들을 죽여 왔다는 말처럼 들리지 않는가?
설마 지금껏,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던 아이들이 사고나 자연 유산이 아니라면…….
그동안 세자 저하도 아닌 왕녀 아기씨를 돌보는 자신은 이런 권력 암투와 큰 관계가 없을 거라 안심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얼마나 순진한 생각이었던가.
그리고 영빈은 마지막으로 경고했다.
“자네가 이 자리에서 들은 말을 잘못 흘렸다가는 어찌 될지 잘 알 것이네. 내가 내일 당장 끌려가더라도 병약한 여인과 어린 여자애 하나 어찌하는 것 정도가 어려운 일이겠나.”
감히 거부의 말을 하지 못하고 겁에 질려 취영당을 빠져나온 허연태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왕녀를 치료하는 것도.
그날 들은 일을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도.
그렇게 허연태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이 왕녀는 결국 세상을 떠났다.
어린 왕녀는, 자신이 죽인 것이었다.
무서웠다.
모든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금비와 성지를 지켜야 한다는 것도 핑계에 지나지 않을지도 몰랐다.
자신 역시 역도로 몰릴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어찌 두렵지 않을까.
잘못하면 지금껏 쌓아 올린 모든 것이 무너질지도 몰랐다.
그래서 저 어린 왕녀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자신은 방관한 것이다.
왕녀가 죽고 두려움과, 안도와, 죄책감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런 허연태를, 주변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위로했다.
심지어는 주상전하와 중전마마조차 그를 탓하지 않았다.
그동안 성실하게 왕녀를 돌보아 왔던 그를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허연태는 견딜 수 없어 사직을 청했다.
궁을 떠났지만 영빈의 독기 어린 목소리는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죽은 왕녀 아기씨의 얼굴 역시 마찬가지였다.
공포와 죄책감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날부터 술독에 빠져 살기 시작했다.
금비는 허연태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저 왕녀의 죽음이 충격이었으리라는 생각에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왕녀의 두창을 살피느라 궁에서 지내는 동안 그들을 보살피지 못하였으니 모를 만도 했다.
그리고 그렇게 그가 술독에 빠져 있는 사이 금비의 건강 역시 점점 악화되었다.
인두법으로 두창을 겪고 살아난 몸이었으나 출산 후 몸이 채 회복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겪은 후유증이 적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아이를 키우며 두창에 대한 연구도 계속했으나, 힘들다는 것을 결코 드러내지는 않았다.
금비의 상태에 대해 허연태가 깨달았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일찍 알았다 한들 해 줄 수 있는 것은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허연태는 또 후회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을 꼽으라면, 그날 허 의원님을 도와드린 걸 거예요.”
“그걸 이제 알았는가.”
우스갯소리로 넘기고 싶었으나 눈물이 떨어지는 걸 참지 못했다.
그러나 금비는 이미 앞도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웃고 있었다. 후회는 없다는 듯.
“감사하고, 감사했습니다. 마지막까지 염치없지만 성지를…… 부탁드릴게요.”
“성지는 이미 내 딸이나 마찬가지이니 그런 소리 말게.”
“성지와, 허 의원님과 셋이 함께 보낸 시간이…… 제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허연태는 아직 어린 성지를 홀로 키우기 위해 왕녀가 죽은 뒤 손에서 놓았던 의원의 일을 다시 시작해야 했다.
의원의 자격이 없는 몸이지만, 어린아이를 키울 수 있는 방법을 달리 알지 못했다.
어린 성지는 그런 허연태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자연스레 의술에 흥미를 보였다.
어미를 닮아 총명하고 의학에 관심이 많은 아이.
어쩌면 이 아이가, 금비의 뜻을 이어 주지 않을까.
의원의 자격이 없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건, 이 아이를 의원으로 키우는 것뿐일지도 몰랐다.
허연태는 성지를 의원으로 키우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아이는 어미를 닮았는지 눈을 반짝이며 의술을 익혔다.
하지만 여인이라는 한계를 허연태는 모르지 않았다.
금비가 아무리 의술이 뛰어나도, 사람들은 금비의 실력을 잘 믿지 않았으니까. 금비가 쓴 의서 역시 아무도 믿지 않았으니까.
괜한 짓을 한 것이 아닐까, 그냥 곱게 키워 좋은 집에 시집이나 보낼 것을.
하지만 저 의술을 썩히는 것 역시 아까운 일이었다. 누군가의 부인이 된다면 저 의술 역시 규방에서 썩게 되는 것이 아닐까.
성지에 대한 걱정과 동시에, 언젠가 허연태가 어린 왕녀를 죽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성지가 자신에게 환멸을 느끼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언제나 그를 떠나지 않았다.
고통스럽게 지내며 다시 술독에 빠져 지내던 어느 날, 영빈과 그 아들 경언군이 실각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뒤이어 경언군이 사약을 받았다는 소식도.
기쁨과 동시에 허탈함도 있었다. 그때, 영빈의 배 속에 있던 아이도 결국 그리 죽었으니 자신이 행동은 참으로 무의미했다.
경언군에 대한 안 좋은 소문들은 술자리에서도 들려왔으니, 점점 더 술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성지도 이제 다 자랐으니 이대로 자신은 없어져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고주망태가 되어 집으로 돌아오던 그날, 길에서 죽은 왕녀 아기씨와 마주쳤다.
수년이 지났으나 허연태는 왕녀 아기씨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었다.
자신을 보면 반갑다며 웃던 얼굴도, 고열에 시달리면서도 ‘허 의관이 왔으니 이제 안 아프게 해 줄 거지?’ 하며 힘없이 웃던 얼굴도, ‘어마마마가 보고 싶다.’ 하며 울던 얼굴도 바로 어제 일같이 떠올랐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왕녀 아기씨가 꿈에서 원망스러운 듯 자신을 보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자신이 알고 있는 왕녀 아기씨보다 조금 자란 듯 보이는 왕녀 아기씨가, 별안간 눈앞에 나타났다.
드디어 자신을 데리러 온 거라는 생각과 동시에 비명을 질렀던 거 같다.
죽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성지가 자신을 한심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말했다.
“시영원 아기씨께서 다녀가셨어요.”
“시영원 아기씨?”
“숙부님도 소문은 들으셨지요? 자라지 않는 옹주 자가요. 몇 년 전에도 잠깐 뵈었는데 정말 조금도 자라지 않으셨더군요.”
“옹주 자가께서, 오셨다고?”
“예.”
“왜?”
“의원을 양성하고 싶으시대요.”
“의원을?”
“네. 그래서 숙부님께도 학생들을 가르치시면 어떨까 하고 말씀을 드렸는데 숙부님은 옹주 자가 앞에서 기절까지 하셨다니…….”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다고 성지는 구박을 했다.
“옹주 자가께서…….”
그럼, 자신이 본 아이가 옹주 자가였던가.
그것은 무언가의 계시처럼 느껴졌다.
그날 이후로 전처럼 고주망태가 되어 다니는 일은 없어졌다.
아직 자신에게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
“그래서, 옹주 자가의 뜻을 따르기로 한 것입니다. 결코, 수상쩍은 생각을 품고 있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감사하고 있었다.
자신은 생각지도 못한 일들을 옹주 자가께서 해 주고 있었다.
성지는 의원으로 이름을 높였고, 금비가 남긴 의서가 옳았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하지만 옹주를 따르던 겸사복은 그 말들은 듣지 못한 듯 다른 것을 물었다.
“똑 닮았다고?”
“예?”
“옹주 자가께서 돌아가신 왕녀 아기씨와 똑 닮으셨단 말인가?”
“그렇소. 똑 닮으셨소이다. 왕녀 아기씨께선 성현 왕후마마와 똑 닮으셨다고 알고 있으니 그분과도 닮으신 셈이오. 그러니 아마 옹주 자가의 생모이신 숙의 마마님께서 중전…… 성현 왕후마마를 닮으셨던 것이 아닌가 했소.”
“!”
그 말을 들은 겸사복의 눈이 흔들렸다.
“성현…… 왕후마마라고?”
“그렇소. 성원 세자 저하의 모친이시기도 한 금상 전하의 원비(元妃, 첫 번째 왕비) 말씀이오.”
“그분을 직접 뵌 적이 있소?”
“왕녀 아기씨를 돌볼 적에 뵌 적이 있소이다. 물론 감히 중전마마의 존안을 직접 뵈었다는 것은 아니오. 하지만 왕녀 아기씨께서 중전마마를 많이 닮으셨다는 말은 궁녀들을 통해 들은 적이 있소.”
“…….”
오래전 세상을 떠난 중전과, 그 친딸인 죽은 왕녀 아기씨는 모녀답게 얼굴이 닮았다고 한다.
그런 왕녀 아기씨는 서로 만난 적도 없는 옹주 자가와 닮았으며, 옹주 자가는 생모인 윤 숙의와 많이 닮은 모녀간이었다.
이 말은 즉 죽은 성현 왕후와 윤 숙의가 닮았다는 뜻이 되기도 했다.
허연태는 성 겸사복이 생각에 잠긴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성현 왕후마마께서 아직 세자빈이던 시절부터 금상 전하와 그리 금슬이 좋으셨다고 들었소이다. 여색에 관심이 없던 전하께서 갑자기 궁녀를 후궁으로 들이신 것이 의외라 생각했는데, 옹주 자가를 뵙고 나니 어쩐지 의문이 풀리는 듯했소.”
“…….”
“아마, 전하께서도 옹주 자가의 존재에 많은 위안을 받으셨을 거요.”
잠시 생각을 정리한 허연태는 아직까지 말이 없는 성 겸사복에게 결연한 얼굴로 청했다.
“나는 어찌해도 좋소. 하지만 성지 그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오. 몰라야 하오. 죄를 물어야 한다면 나에게만 물으면 아니 되겠소? 성지는 이제야 겨우, 인정받기 시작했소.”
“……성지 의원에게 죄가 없다는 것은 알겠소.”
그 말에 허연태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리고 진지하게 다시 물었다.
“나를 발고할 것이오?”
“……되었소.”
성 겸사복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가 말한 것들이 지금껏 그에 대해 자신이 조사한 사실과 한 치의 다름도 없었다.
납득이 가지 않던 부분에 대해서도 방금 들은 이야기대로라면 맞지 않는 부분이 없었다.
금비라는 의녀에 대해서도 조사해 보면 뻔히 드러날 일이었다.
심지어 그 의녀가 적었다는 의서까지 조정에 제출했으며, 저자에 대해서도 결코 숨기지 않았다.
그러니 그 의녀에 대해서는 내의원에서 금방 진위를 바로 확인할 수 있을 터였다.
역적과 연루되었다고는 하나 그 의녀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그 의녀에 대해서만 부정하면 되었을 것을.’
몰랐다. 속았다. 보통은 그리 둘러대었을 일을, 허연태는 부정하지 못했다.
그의 목숨이 걸린 일임에도.
그런 성 겸사복의 생각을 눈치챈 듯 허연태가 씁쓸히 웃었다.
“……하하. 내가 한심하오?”
“아니오. 한심하지 않소. 당신은…….”
생각보다 먼저 말이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