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144)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144화(144/326)
‘됐으니까 빨리 가.’
뭔가 맘에 안 드는 모양이었으나 내가 인상을 꽉 썼더니 소리 없이 투덜거렸다.
저기요, 님은 지금 여동생 친구들 와서 노는 자리에 눈치 없이 낀 오빠 포지션이에요. 심지어 까마득한 직장 상사급.
“흠. 나는 이만 가 봐야겠구나. 옹주가 두 사람을 잘 챙겨 주거라.”
“예, 세자 저하.”
말은 공손했으나 나는 입으로 ‘가, 가.’를 반복하고 있었다. 세자 역시 근엄한 표정 그대로 입 모양으로만 ‘너 나중에 보자.’라고 쫑알거리며 사라졌다.
“이제 세자 저하도 아니 계시니 좀 편하게 있어도 괜찮네.”
“그, 그리하여도 괜찮사옵니까?”
“응.”
내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두 사람은 작은 한숨과 함께 안심한 듯 어깨를 늘어뜨렸다. 사실 옹주 앞에서 이러는 것도 원래라면 실례겠지만, 나는 관대하니까.
본래라면 법도에 엄격한 가이가 주의를 주었겠지만, 나를 치료해 주겠다는 의원들이라 그런지 조용히 눈썹만 한 번 추켜올렸을 뿐 관대하게 넘어갔다.
“무서워?”
“그, 그런 것은 아니옵니다. 국본(國本)을 가까이에서 뵈옵는 것은 크나큰 영광이오나, 저희는 긴장 때문에 심장이 멈출 것 같사옵니다.”
“성지 의원 같은 분도 긴장을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세화 의원이야말로 다른 때에는 전혀 긴장하지 않더니 역시 어전에 들어오는 것은 조금 떨렸던 모양입니다. 아까 목소리가 떨렸지요?”
“당연하지 않습니까.”
세자가 없어서인지 두 사람은 조금 편해진 얼굴로 가볍게 투닥거렸다. 전에도 친밀해 보이긴 했는데 아무래도 이번에 두창을 함께 겪으면서 더 격의 없어진 모양이었다.
음. 그러고 보니 왕은 몰라도 중전은 지화를 한 번 본 적이 있긴 한데. 세화도 그 때문에 좀 긴장했을지도.
‘아무리 며느리 후보였다고는 해도 8년 전쯤에 한 번 본 사람을 기억하는 것은 무리지.’
아무리 중전이 내궁에서만 생활한다지만 궁녀들 외에 외명부의 부인들과도 얼굴을 마주하게 되니 기억해야 할 얼굴이 많았다.
지화의 얼굴이 어딘지 낯익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어느 부인과 닮았나?’ 정도로 넘어갈 가능성이 높았다.
‘세상에 워낙에 생판 남이라도 닮은 사람이 많기도 하고.’
전생에 연예인들 중에도 전혀 혈연관계가 없는 사람들끼리 닮은 경우도 꽤 있었지.
나는 세화를 보며 예전 얼굴을 떠올리려 애썼지만 이젠 저 얼굴이 더 익숙해서 그런가, 예전에 어땠는지 잘 떠오르지 않았다. 닮은 거 같기도 하고.
현대처럼 사진으로 자주 보는 것도 아니고, 계속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처지이니 옛날 기억은 흐릿할 수밖에 없었다.
“궁에 오니 어떤가?”
“떨려서 아무 생각도 안 나옵니다.”
“뭐,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긴 하다만 조심해야 할 일들이 많으니까. 앞으로도 긴장해야 할 걸세. 그나마 왕족이 별로 없어서 좀 편하겠지만.”
내 말에 두 사람은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모르겠는 얼굴을 했다.
너무 겁줬나.
하지만 후궁들조차 조용하니 별로 존재감이 없는 곳이 지금의 궁이었다.
가끔 보면 여기 사는 사람들 중에서 내가 제일 시끄러워.
“이제 좀 편안하게 차를 좀 마시게. 보기 드문 과자도 준비했으니까 꼭 먹고. 모처럼 궁에 왔으니 궁궐 구경도 좀 해 봐야지. 오늘 아니면 이제 일하는 곳만 가게 될걸.”
“아…… 그렇군요.”
사실 세자가 갈 때 두 사람도 함께 보낼까 생각도 했는데, 세자 때문에 긴장해서 차를 내와도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는 얼굴인 게 딱해서 일부러 세자를 눈치 줘서 일찍 보냈다.
두 사람이 조금 긴장을 푼 것 같자 앞으로 자주 보게 될 우리 처소 궁녀들을 소개해 주고, 그 외에 자주 볼 사람도 알려 줬다.
“성 겸사복은 알 거고, 음. 천호도 알지?”
“예, 알고 있습니다.”
“출세하셨네요.”
내 심부름 다니느라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니 천호에 대해서도 다들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덩치만 크지, 자신들에 비해 한참 어린 천호를 남동생 보듯 뿌듯해하는 얼굴로 보며 출세를 축하해 줬다.
천호 역시 마찬가지였고.
‘그러고 보니 천호가 하는 일이 거의 별감(別監) 아닌가…….’
얼굴도 멀끔하고 요새는 옷도 깔끔하게 차려입고 다니니 더 그런 느낌이네.
원래 일찍 하가하는 옹주한테는 딱히 필요 없지만 보통은 대전별감(大殿別監)이라든가 동궁전 별감같이 웃전을 호위하거나 심부름하는 사람이 있는 법이었다.
안 그래도 별감은 약간 얼굴마담 같은 느낌도 있어서 외모도 보고…… 근데 생각해 보니 겸사복도 그렇고 궁에서 일하는 사람들 외모 좀 보는구나.
‘음…….’
이 시대 조선만 그런 게 아니라 현대에도 대부분의 나라가 왕실 근위병들은 외모를 보고 뽑는 법이지.
내가 어쩔 수 있는 일도 아니니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차를 마신 후 세화와 성지를 데리고 나와 간단하게 궁궐 구경을 시켜 주고 구조에 대해서도 가르쳐 주었다.
궁이 처음 오면 다들 헤맬 수밖에 없는 곳이라.
구경은 구경이고, 가장 중요한 곳도 그냥 내가 데리고 갔다.
“옹주 자가.”
“음. 일들 해. 나는 길 안내하러 왔을 뿐이니까.”
이미 어전에서 어의 영감을 통해 성지와 세화 두 사람의 위치가 전해졌지만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인 의관들이 눈을 깜빡였다.
여의와 남의를 분리하기는 했으나 약재와 의서의 보관 등의 이유로 결국 가까운 곳에서 일하는 중인 의관들은 복잡한 얼굴이었다.
그동안 내 병을 못 고쳐서 구박받은 세월이 길기도 했고, 나 때문에 야근도 하고, 승진도 하고, 과로도 하고, 그래도 고생한다고 내가 좀 챙겨주기도 하고, 그렇게 온갖 풍파를 겪은 곳이 바로 내의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굴러들어 온 돌들이 내 병을 고치겠다고 하니 마음이 복잡할 수밖에.
“이 두 사람에 대해서는 다들 전해 들었을 것이니 앞으로 어려움이 없도록 잘 살펴 주게.”
“예, 옹주 자가.”
내가 이렇게 말한다고 정말 알아들었을지는 모를 일이지만.
음…… 여기저기서 눈빛이 영 껄쩍지근한데 괜찮을까.
아무래도 요새 의서 편찬도 많이 진행돼서 조금 마음에 여유가 생긴 모양이었다.
‘이럴 때는, 일거리를 안겨 주는 게 최고긴 하지.’
새로운 일거리. 그것은 무엇인가.
“여기 있는 의관들 중에는 부술에 관해 관심이 있는 이가 혹시 있는가?”
“부술이라 하심은…….”
사실 부술(剖術)이라는 게 의원들에게 전혀 생소한 개념은 아니었다. 하다못해 삼국지에서도 나오지 않던가.
사람 몸을 째고 꿰매고 하는 일은 원래 병 때문이 아니라 외상(外傷) 치료로 시작되는 법이니까. 화살 맞아서 화살촉 잘못 박히면 째서라도 빼내야 하지 않겠는가.
말하자면 전쟁을 겪으면서 발전하는 분야이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은 워낙에 머리카락만 잘라도 기겁하는 동네라. 하다못해 신분이 높은 사람은 부검도 못 한다. 독살당했는데 부검을 못 하다니…… 어이없지만 시대에 따라 중요시하는 가치관의 차이는 큰 법이었다.
“얼마 전 여기 있는 세화 의관이 부술로 병을 치료했다는 소문은 다들 들었을 것이네.”
내 말에 모여 있던 내의원 의관들이 술렁거렸다.
이미 연차가 차고 안정적으로 자리 잡은 의관들은 다소 떨떠름한 얼굴이었지만, 아직 젊고 혈기가 넘치는 의관들은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앞으로 내의원에 있으면서 어찌 내 병만 치료하겠는가? 새로운 의술이 있으면 서로 배우고 익히면 좋은 일이겠지.”
“하오나 아직 검증되지 않은 방법이 아니옵니까.”
“그러니 검증하는 것이 자네들의 일이 아니겠는가.”
“…….”
이런 젠장.
이건 내가 아니라 의관들의 마음의 소리였다.
“물론 내가 꼭 하라는 것도 아니고. 모든 의관이 배울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배워 볼 생각이 있는 사람이 하면 되는 것이지. 본인이 직접 익혀 보아야 이것이 제대로 된 방법인지 아닌지 알 수 있지 않겠는가.”
자기 계발을 꼭 하라는 건 아니야. 그래도 배워 두면 다 피가 되고 살이 되잖아요?
내가 강요하는 건 아닌데, 그래도 역시 더 능력 있는 사람이 승진에도 더 유리하지 않겠어요?
이상하다. 딱히 그런 의도는 아니었는데 왜 악덕 상사가 된 기분일까.
“아,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나한테 부술 쓰겠다는 거 아니니까 그거 걱정하진 말고.”
“예. 옹주 자가.”
몇몇은 긴장하고 있었는지 대놓고 안도하는 기색이었다.
보아하니 세화를 맘에 들어 하지 않는 의관들도 있었으나, 대부분 외과 수술에는 호기심을 보이는 듯했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배우고자 하는 이가 있는가?”
그리고 눈치를 보던 이들은 하나둘 배우고 싶다고 나섰다. 세화 역시 원하는 이들에게 얼마든지 가르치겠노라고 했다.
‘단순히 신입으로 들어오면 이리저리 치이기만 하겠지만, 가르치는 입장이 되면 약간 다르지.’
아무래 경력직 특채라고 해도 기존 체계에 있던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냥 굴러들어 온 돌이었다.
‘그래도 일단 여의들은 모아 놓고 조금 설득을 해 봐야겠는데.’
지금은 아직 여의들이 저들끼리 공을 다툴 때가 아니었다. 특출나게 공을 세우는 이가 있으면 그로 인해 함께 위상이 올라가는 법.
세화가 공을 세우고 상을 받으면 여의들도 덩달아 가능성을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간단한 이치다만 이게 본인 일이 되면 자기 밥그릇 뺏길까 봐 연연하게 되는 것이 사람이었다.
‘일단 설득은 하겠지만 안 되면 권력으로 찍어 누르는 수밖에.’
하지만 여의들은 오히려 다루기가 쉽다.
여의들을 따로 분리하고 처우 개선을 하면서 의원이 되겠다고 나선 여인들이 많아졌지만 아직 대부분의 여의들은 공노비 출신. 말하자면 면천이 최대 목적이었다.
내 말을 따르지 않고 뻗댈 이유가 없었다.
‘문제는 기존의 어의들이지.’
일단은 지켜볼까.
이후 세화가 정식으로 내의원에 출근을 시작하면서 부술을 가르치는 것 또한 정식 업무로 삼도록 했다.
당연히 안 배우고 보이콧 하려는 자들도 꽤 있는 듯했지만, 대부분의 혜민서 의관들은 배우겠다고 나섰고, 의외로 야심 있는 내의원 의관들도 못마땅한 얼굴로 배워 보겠다고 모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꽤 많이 모였다.
“부술은 칼로 사람의 살을 가르는 것이 아닙니까? 어찌 다들 그런 피 튀기는 의술에 관심이 있는지 모르겠사옵니다.”
소이는 몸서리를 치며 그리 말했다.
“다들 좋아서 하는 건 아닐걸.”
“그럼 어찌하여 배우려는 걸까요?”
“순순하게 의술로 사람을 구하고 싶은 사람도 있겠지만, 남들은 할 수 있는데 내가 못 하면 자존심이 상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
사람은 의외로 단순하거든. 심지어 이미 수술로 살아난 사람이 있으니 어느 정도는 근거가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참고로 세화에게 수술을 받은 사람은 몸에 흉터는 남았으나 무사히 회복 중이라고 들었다.
‘반가의 여인이라 감히 상처 부위를 보고 싶다고 할 수 없어서 다들 애가 타는 모양이지만.’
나는 문득 전생에 맹장 수술을 했던 친구의 흉터를 보았던 것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 세화가 하는 것은 그런 개복수술까지는 아니겠지만 발전하다 보면 거기까지 가지 않을까.
소설에서는 어디까지 갔더라.
‘으음. 배를 째서 기생충을 빼내는 얘기가 여기서 나온 얘기였던가, 다른 데서 나온 얘기였던가.’
내가 이런 생각을 해 보았자 의미가 없지만.
세화의 존재는 여러모로 파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에 관해서 결국 중전마마에게까지 이야기가 전해진 모양이었다.
영문도 모르고 오랜만에 세자와 함께 중궁전에 문안을 드리러 갔더니, 근래에 세화에게 받고 있는 치료에 대해 대화를 나눈 후 중전이 자연스럽게 이 화제를 꺼냈다.
“아직 뭔가 평소와 다른 것은 없습니까.”
“어찌 금방 효과가 나오겠습니까. 느긋하게 기다려 주시옵소서, 중전마마.”
“세화라는 의관이 그리 의술이 뛰어나다면 믿고 기다려 볼 만하겠지요. 근래에는 부술을 가르친다고 들었습니다. 옹주도 들은 바가 있겠지요?”
“예. 의관들에게 뜻이 있다면 배워 보라고 권한 것이 소녀이니까요.”
에잉, 다 아시면서.
“부술을 가르치는 일로 옹주를 치료하는 데 소홀해지지는 않을까 걱정입니다.”
“아직은 시침(施鍼)과 탕약을 쓰고 있을 뿐이니까요. 모르는 병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알고 있는 치료법을 쓰는 것이니 너무 염려하지 마시옵소서. 근래 내의원의 분위기는 어떻다고 하옵니까?”
이걸 나와 세자에게 굳이 말을 꺼낸 이유가 있을 터였다.
“부술을 배우는 것 자체보다는 그것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이 많아 보였습니다.”
“음.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은 소녀도 했습니다.”
아무래도 좀 그렇지.
“하지만 배우는 일에 생각보다 어려움이 있는 듯하니 세자와 옹주가 한번 살펴 주지 않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중전마마.”
뭔 일인데 그래.
‘내가 도울 일이 있나? 게다가 어지간한 일이면 중전마마가 아니라 나한테 다이렉트로 올 텐데?’
아무리 지금 여의들의 책임자가 중전마마라고는 하지만, 의관들이 새삼 중전마마를 나보다 편하게 여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 이는 다른 문제가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세자를 데리고 세화와 면담 시간을 가졌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아, 다름이 아니오라, 부술은 실습이 필요한 일인데 이를 궐내에서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아직 괜찮지만 나중에는 궐 밖에서 수업을 해야 하니 공간이 필요하옵니다.”
“공간만 필요한 게 아닐 텐데.”
“……예.”
“?”
세자는 감이 잘 오지 않는 모양이었지만, 현대의 기억이 있는 나는 부술에 필요한 실습이 뭔지 좀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