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159)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159화(159/326)
내 말뜻을 알아들었는지 음식 대접을 하던 이들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다.
‘묘하게 견제하는 구도가 됐네.’
으음. 싸우지만 않으면 됐지.
사저라고는 해도 내 컬렉션 외에 중요한 물건도 많지 않고.
내가 사저에서 자고 가는 일은 딱히 없지만 일단은 당연히 내 방이 있었다.
그리고 내 방에는 한 가지 중요한 물건이 있었다.
“흐음.”
“왜 그러십니까?”
“아니, 아무것도 아냐.”
상이 치워지고 방 안에 유일하게 나와 함께 남아 있는 가이가 이상한 얼굴을 했지만, 나는 그저 웃으며 방 안에 장식되어 있는 자물쇠가 달린 함을 열어 내용물을 꺼냈다.
‘혹시 여기에 유출되면…… 곤란할 내용이 있었던가?’
나는 함 안에 두었던 문서를 꺼내어 내용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게 무엇인지 알고 있는 가이는 썩 표정이 좋지 않았지만 뭐라 불만을 표하지는 않았다.
‘유언장이니까. 불길해서 싫다 이거지.’
나는 시영원을 만들고 재산이 늘어나면서부터 내 유산에 대해서 미리 유언장을 작성해 놓았다.
매년 갱신하지만.
당연히 가이를 비롯한 내 지밀 궁녀들은 다들 존재를 알고 있었다.
내용에 대해서도.
물론 내가 유언장을 쓴다 그러면 다들 질색하지만.
하지만 사람 일은 알 수 없는 법 이었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매년 새해가 되면 새로 작성해서 궁에 하나, 사저에 하나, 시영원에 하나 보관하고 있었다.
‘그치만 재산이 자꾸 느는걸…….’
이것이 병약 금수저 자산가의 삶인가……!
처음에는 숨길까 했는데 나한테 껌딱지처럼 찰싹 달라붙어 있는 지밀 궁녀들 모두에게 숨기는 것도 스트레스받는 일이라 그냥 오픈했다.
안 그래도 재산 내역에 관해서는 가이가 관리하고 있으니 가이의 조언도 필요했고.
내 제사를 지내 줄 봉사손(奉祀孫)에게 재산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겠지만 적어도 내 주변 사람들에게는 챙겨 주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 아니겠는가.
그리고 유언 중에는 내가 가진 노비들을 모두 면천시켜 풀어 주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내가 병이…… 낫고 나면 그때 슬슬 시작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긴 한데.’
지금까지 노비들을 면천시켜 주지 않은 건 일단 대부분 반역죄인의 가족들이라 조금 시간을 둘 필요가 있다든가, 제힘으로 먹고살 능력을 키울 유예 기간이 필요하다든가 등의 이유도 있었지만, 내가 아직 너무 어려서 다들 막을 것이 뻔해서라는 이유도 있었다.
옹주 봉작 받았으면 실질적으로 성인 취급 받는 게 맞지만 누가 진짜 성인 취급을 해.
물론 16세도 아직 어리기도 하고.
내가 어린아이 몸이라 더 어른 취급 받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
적어도 한창 혼기 찬 젊은 애들만이라도 풀어 주고 싶기도 한데 이상한 놈들이 붙을까 그게 걱정이지.
사실 대부분은 딱히 면천한다고 바로 떠날 거 같지도 않았다.
다들 내 보호하에서 편히 지내 와서 그렇지, 세상이 아직 각박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래도 젊은 애들한테는 슬슬 말을 해 둬야지.’
면천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할 테니까. 그동안 내가 조금씩 티를 내긴 했는데 모르는 사람은 직접적으로 말해 두지 않으면 또 전혀 모르더라.
나는 유언장이 그대로 있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함을 닫아 자물쇠를 채우고 제자리에 가져다 둔 후 사가를 떠났다.
다음에 간 곳은 시영원이었다.
내가 강원도로 간다는 말을 들었는지 우르르 모인 사람들이 몹시 부담스러웠다.
그중에서도 역시 민 상궁이 걱정이 많았다.
“날도 추워지는데 너무 먼 곳까지 가시는 것이 아닌가 싶어 걱정이옵니다.”
“그래서 초겨울에 하잖아.”
“강원도는 한양보다 춥다고 들었습니다.”
“음…… 춥겠지. 그래도 내가 뭐 산속까지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가이가 함께 간다고 하니 안심이 되옵니다.”
“…….”
무슨 신뢰인데.
“나만 가는 거 아니거든. 여기에 나보다 더 바쁘게 준비해야 되는 사람도 있지 않아?”
“으아앙.”
함께 갈 사람들은 다들 떠날 준비로 바쁘지만 사실 제일 바쁜 사람들은 의원들이었다.
특히 내의원 의관들보다도 종두법을 전파해야 하는 애들이 바빠졌기에 이제 좀 쉴 수 있지 않을까 했던 아이들의 얼굴이 흐려졌다.
‘좀 미안하군…….’
지나가는 길목에 있는 관청의 공노비들부터 소집해서 강제 접종을 할 예정이라 이쪽이 더 바쁠 수밖에 없었다.
물론 한 번에 전체를 접종하는 건 아니고, 날짜 따라 분류하고 돌아오는 길에 남은 사람들을 접종하는 식이었다.
게다가 먼 길을 가야 하니 나를 따라가는 이들 중 상당수는 말을 탈 줄 아는 사람들로 채워졌다.
문제는 의원들이 대부분 말을 못 탄다는 거고, 종두법 접종을 하는 아이들도 당연히 대부분 말을 탈 줄 몰랐으므로 걸어서 이동해야 했다.
‘진짜 미안하네…….’
그런데 어쩌겠어. 위에서 하라면 해야지.
나도 이젠 내가 그냥 꼰대라는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영천군은 근래에 심기가 편치 못했다.
‘이게 다 주상의 총애를 등에 업고 설치고 다니는 수영 옹주 때문이렷다!’
자신이 주선한 조카 송안의 혼사를 망쳐 놓은 것까지는 그래도 참을 수 있었다.
집안으로 따지면 더없이 좋은 혼사였으나 하필 그 멍청한 놈이 혼사를 앞두고 그렇게 놀아날 줄이야 누가 알았을까! 멍청한 놈 같으니, 고작 혼사가 오가는 그 몇 개월을 못 참아서 자신만 형님에게 욕을 먹지 않았던가.
하지만 옹주가 시월각에서 자신을 대놓고 쫓아낸 일은 생각만 해도 화가 치밀었다.
그날 시월각에 있던 이들은 자신이 쫓겨나는 것을 목격하지 않았겠느냔 말이다!
‘어찌 감히 종친인 나를 그리 모욕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도 옹주가 만든 곳이라 하여 찾아가 주었거늘. 고작 어디서 굴러먹었을지 알 수 없는 여자 하나 때문에 친척 어른인 자신을 쫓아내다니! 그야말로 선을 넘은 처사였다.
“자자. 고정하시지요.”
“어찌 고정할 수 있겠습니까. 그 발칙한 옹주 때문에 요즘에는 밤에 잠도 오질 않습니다.”
“허허…….”
영천군은 연신 술을 들이켜며 이를 갈았다.
화가 나는 것은 옹주만이 아니었다. 푸념이라도 좀 할까 하고 불렀던 다른 종친이나 벗들도 하나같이 옹주의 편을 들며 자신을 조롱하고 있지 않던가.
‘우린 아무 일도 없이 잘 놀다 왔는데 왜 그랬을깡~’
으득.
조롱하는 목소리를 떠올릴 때마다 이가 갈렸다.
심지어는 형인 화천군조차 점잖은 목소리로 ‘네가 잘못하지 않았느냐. 거기가 어디라고 거기서 여인을 희롱해!’ 하며 화를 냈다.
덕분에 근래에는 이렇게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푸념을 들어주는 이조차 적어졌다.
다들 그 조그마한 옹주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들으셨습니까. 옹주 자가께서 강무에 동행하신다지요.”
“동행이라기보다는 떼를 써서 따라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종두인지 뭔지 때문에 기고만장해서는 하여간.”
이제 도성 안에서 종두법에 대해 모르는 이는 없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접종을 받은 이들 중에 신분이 높은 사람은 많지 않았다.
다들 체면이 있어 소의 고름 따위를 맞지 않겠다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아랫것들에게는 접종을 받으라고 은근히 종용하는 상전은 많다고 들었다.
“옹주가 주상 전하의 총애를 믿고 방자한 것이 어디 하루 이틀 일이겠습니까.”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아무리 어린 딸이 귀엽다고는 해도 이건 너무 지나치지 않습니까.”
“어릴 적에 죽을 뻔한 적도 있는 데다, 아직까지도 자라지 않는 걸 생각하면 아무리 주상전하께서 엄격하신 분이라 해도 물러지실 만도 하지요.”
그래, 얼마나 불쌍한가. 그래서 영천군도 많이 참아 주곤 했었다.
하지만 이리 방자해질 것을 알았다면 엄격하게 키우셔야 한다고 간언이라도 했을 것이다.
사실 당시에는 다들 수영 옹주 역시 일찍 죽을 거라고만 생각했지, 이리 건강하게 자랄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후우. 영빈, 아니, 폐서인 홍씨가 그런 발칙한 짓만 하지 않았어도…….”
“그러게나 말입니다. 성현 세자 저하만 계셨어도 이렇지는 않았을 것인데…… 조선의 앞날이 참으로 걱정입니다.”
예의 바르고 어른에 대한 공경심이 깊던 성현 세자에 비해 지금의 세자는 완고하고 말이 통하지 않았다. 게다가 겉보기랑 달리 동생인 수영 옹주에게는 또 어찌나 끔찍한지!
주상이 보위를 물려준 이후에도 수영 옹주의 방자함은 금방 끝날 것 같지 않았다.
게다가 아무래도 지금의 세자는 이래저래 마음에 들지가 않았다.
영천군은 또다시 술잔을 채워 한입에 털어 넣고 입을 열었다.
“세자 저하 말입니다. 아무래도 너무 과하지 않습니까.”
“무엇이 말씀이십니까.”
“노비들의 신원을 회복시키는 데 지나치게 적극적이지 않느냐 이 말입니다.”
“아아.”
겁 없이 홀로 저자를 돌아다니다 납치당한 수영 옹주로 인해 부녀자들을 팔아넘기던 인신매매 일당이 잡힌 일로 분노한 주상은 불법적으로 노비가 된 이들의 신원을 회복시킬 것을 명했다.
그 때문에 재산에 손해를 입은 자가 적지 않았다.
물론 영천군 역시 그 손해를 입은 자들 중에 포함되어 있었고.
“그야 옹주 자가가 납치되었던 일이니 큰일이긴 합니다. 하지만 어찌 사대부들의 재산까지 훼손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는 분명 선을 넘은 일이지요.”
가려운 곳을 긁어 주는 듯한 말에 영천군은 속이 시원해지는 것을 느꼈다.
노비를 잃은 것이 어디 자신뿐이랴.
다른 종친들도 모두 왕의 심기를 살피느라 말을 아끼지만 실은 다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종친이라고 정치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나마 낙이라고는 재산을 불리고 주색잡기를 하는 것밖에 없는데 그조차 할 수 없게 하니, 이 얼마나 부당한 처사인지!
“이리 마음이 맞는 대화가 얼마 만인지 모르겠습니다.”
“하하하.”
영천군은 상대의 술잔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 바로 술을 따라 주었다.
“자, 어서 드시지요.”
“하하하.”
“다들 옹주의 눈치를 보느라 할 말도 제대로 못 하는 겁쟁이들이지요.”
“어디 그 어린 옹주가 무섭겠습니까. 옹주를 싸고도는 주상전하 때문이겠지요.”
“지금도 이리 위세가 등등한데, 옹주가 자라 부마라도 맞으면 어찌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 말에 잠시 대화가 끊기고 침묵이 감돌았다.
영천군은 누가 엿듣기라도 할까 경계하듯 몸을 숙여 물었다.
“정말 그 세화라는 여의가 옹주를 고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감히 어전에서 고칠 수 있다고 선언하였으니, 고치지 못한다면 제 목숨이라도 내놓아야겠지요.”
그 말은 즉, 세화가 목숨을 걸 수 있을 만큼 자신이 있다는 뜻이었다.
이미 아무도 고치지 못한 병들을 몇 번이나 고친 적이 있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그리고 세화가 이름을 날리는 만큼 적대하는 이들 역시 적지 않았다.
“안 그래도 내의원 의관들 중에서도 그 여의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왜 아니 그렇겠습니까. 요사한 짓들을 하며 옹주의 마음을 얻고, 옹주를 통해 주상전하와 세자 저하까지 현혹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이번 강무에 옹주 자가께서 동행하는 이유도 그 여의 때문이라지요.”
“무슨 약초를 구해야 한다고 하는데 어디 그 때문이겠습니까.”
약초야 사람을 통해 구하면 되지. 왜 세자와 동행하려 할까.
영천군은 눈에 보이는 뻔한 수작에 모두 속아 넘어가고 있는 것이 어이가 없었다.
“우두에 걸리면 두창에 걸리지 않는다는 말도 그렇고 허무맹랑한 소리로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는 게지요.”
“혹시 세자를 노리고 있는 게 아닙니까?”
“글쎄요. 지금껏 여인에게는 관심도 안 보이던 세자입니다만. 그리 아끼는 누이동생의 병을 고친 여인이라 하면 또 모를 일이 아닙니까.”
“애초에 세자가 아직까지 세자빈을 맞지 않았다는 것부터가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예전이야 세자빈이 되는 것을 피하는 집안이 많았으니까요. 대비마마께서 승하하시고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 자연히 미뤄지기도 했고요, 뭐, 지금까지도 꺼림칙하다고 피하는 집들이 제법 있다고 들었습니다. 뭐, 가진 것 없는 가난한 집안에서야 딸을 세자빈으로 들이겠다는 집들이 얼마든지 있겠지만 말입니다. 크으.”
모처럼 마음이 맞는 벗과 대화를 하고 있으니 술이 달았다.
“허어. 솔직히 세자빈이 들어온다고 해도 옹주가 가만히 있을지는 모르겠군요. 지금 죽은 듯이 살고 있는 중전 대신 궁 안을 쥐락펴락하는 것은 옹주가 아니겠습니까.”
“어린 것이 어찌나 악독한지 성원 세자 저하를 모시던 궁녀들도 다 내쫓았다고 들었습니다.”
윗전이 죽고 궁 밖으로 나갔던 궁녀들도 시간이 지나면 궁에 불러들이는 일이 적지 않은데 옹주는 무엇이 그리 맘에 들지 않았는지 오히려 남아 있던 이들마저 내쫓았다.
“성현 세자 저하께서도 하나뿐인 누이동생이라 그리 아끼셨건만…….”
“은혜를 알면 어찌 그리했겠습니까.”
“허어. 승하하신 중전마마를 모시던 궁녀들일 텐데. 내궁의 일이라 다른 사람이 관여할 수 없으니 더 날뛰었을 것이 눈이 선합니다.”
“어쩌면 혼례를 올려도 하가하지 않고 궁 안에서 지내게 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