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16)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16)화(16/326)
우리 집, 아니 처소로 가는 길목에서 나와 생물학적 아비는 뜻밖의 인물과 마주쳤다.
‘영빈이 왜 여기서 서성거리고 있지?’
이런 시간에 갑자기 찾아올 정도로 친한 사이도 아닌데.
영빈도 이쪽을 발견했는지 바로 고개를 숙였다.
“저, 전하. 어인 행차시옵니까.”
“영빈이 여긴 어쩐 일이오? 숙원을 만나러 온 것이오?”
왕이 후궁에 오는데 왜 왔냐니. 농담?
영빈은 조금 당황한 듯 보였으나 왕의 팔에 얹힌 나를 보고 상황을 파악한 듯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분위기상 불만이 느껴졌으나 여기서 그런 걸 티 낼 정도로 하수는 아니었다.
‘그런데 진짜 무슨 일이지?’
의아해하는 것은 왕도 마찬가지였다.
해명을 피할 수 없는 영빈이 할 수 없이 입을 여는 순간, 또 뜻밖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선빈?”
영빈과 마찬가지로 뒤에 궁인들을 줄줄이 달고 있는 선빈이었다.
오랜만에 보는데 여전히 안색이 좋지 않았다.
‘이런 시간에 돌아다닐 사람이 아닌데.’
그리고 어쩐지, 영빈과 선빈 사이에서 드물게도 불온한 공기가 느껴졌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슬슬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경원군과 경언군한테 무슨 일이 있나.’
물론 내가 여기서 그리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 본 선빈은 좀처럼 앞에 나서는 일도 없고 누구에게도 크게 거스르지 않으며 몸을 사리는 사람이었다.
친자인 경원군이 얽힌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리고 그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형님이 하신 일이지 않사옵니까.”
“네가 감히 나를 음해하려는 게냐.”
“그럼 형님의 발밑에 떨어져 있던 그것은 대체 무엇이옵니까?”
“본래 그 자리에 있던 것을 내가 어찌 알겠느냐.”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아서 경원군과 경언군이 서로 노려보고 있는 모습이 곧 눈에 들어왔다.
‘아니 왜 남의 집(?) 앞에서……?’
그리고 내 눈에 들어왔다는 건 여기 있는 이씨 3남매의 생물학적 아비의 눈에도 들어왔다는 뜻이었다.
“대체 여기서 뭣들하고 있는 것이냐.”
“전하.”
이 많은 사람이 가까이 올 때까지도 모르고 있던 두 사람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고, 안달복달하던 내 친모와 궁인들 역시 서둘러 예를 표했다.
그리고 대강의 자초지종을 들을 수 있었다.
요약하자면 처소 근처에서 동물 사체가 종종 발견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경원군이 미리 양해를 구하고 처소 주변을 살펴보기로 했다고.
‘혹시 내가 조금 늦은 시간에 갑자기 산책을 나가게 된 거랑 관계가 있나.’
범인을 제외하면 누구도 어린아이가 그런 것을 발견하는 걸 원하지 않을 테니 내가 없는 사이 확인해 두려고 했겠지.
그러고 보니 소운이 좀 이상했던 것 같기도 했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주변을 둘러보던 경원군은 우리 처소 근처에서 경언군을 발견했으며, 경언군 발밑에 동물 사체가 떨어져 있었다는 얘기였다.
동물 사체에 대한 얘기를 처음으로 들은 왕의 미간에 자연히 깊은 주름이 생겼다.
“그것이 사실인가, 숙원.”
“송구하옵니다. 이 모든 것이 신첩의 부덕이옵니다.”
피해자의 자책에 왕이 고개를 저었다.
괜한 트집이라도 잡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럴 생각은 없어 보였다.
“경언군은 왜 이곳에 있었던 것이냐.”
“누이가 보고 싶어 찾아왔을 뿐이옵니다. 소자가 가까이 가면 싫어하니 몰래 보고 갈 생각이었사온데 경원군이 이상한 오해를 한 듯하옵니다.”
경언군의 뻔뻔한 응수를 듣는 경원군의 얼굴에는 억울함이 가득했다.
사실 다들 범인이 누군지는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었지만, CCTV가 있는 시대도 아니고 제대로 된 증거를 찾기는 어려웠다.
‘목격자가 있다고 해도 쉽게 나서지 못할 테고.’
경원군이 굳이 경언군을 붙든 것을 보면 현장을 목격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경원군이 혼자 다녔을 리가 없으니 뒤따르는 궁인들도 보았을 터인데 경원군은 누구도 증인으로 내세우지 않았다.
왕자인 경원군조차도 경언군에게 억울하게 맞은 것에 대해 항의하지 못하는데 한낱 궁인들이 잘못 나섰다가는 어찌 되겠는가.
‘본인도 입을 다물고 있는 걸 보면 말해 봤자 소용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고.’
내가 혼자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어느덧 상황은 종료되고 있었다.
즉석에서 판결을 내릴 최고 권력자가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경원군. 동생을 생각하는 네 마음은 가상하나 확실한 증좌도 없이 남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경언군은 네 형님이 아니더냐.”
“송구하옵니다.”
대답은 그리했지만 경원군은 결코 납득했다는 얼굴은 아니었다.
반면에 경언군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그런 경원군을 보며 히죽거렸다.
울컥한 경원군이 뭔가를 더 말하려 입을 열었지만 선빈이 팔을 붙잡자 결국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뭔가 할 말이라도 있는 것이냐?”
“아니옵니다. 소자가 어찌 감히…….”
“우우!”
왕이 못마땅한 얼굴을 하는 것을 보고 나는 당황해 버둥거리며 팔을 뻗었다.
‘내 걱정해 줄 사람이 많지도 않은데 내가 챙겨야지.’
“어허, 어찌 이러는 것이냐. 네 오라비를 혼냈다고 이러는 것이냐?”
“응!”
내가 자꾸 입을 막으려 하자 왕은 굳은 얼굴을 풀고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고쳐 안았다.
“경원군이 그동안 누이를 아주 살뜰히 보살핀 모양이로구나. 이 아비보다 오라비를 더 따르다니.”
“……소자가 불민하여 아바마마께 심려를 끼쳤으니 송구할 따름이옵니다.”
“경원군. 누이를 걱정하는 마음은 알겠으나 정도가 지나쳐서는 아니 된다. 네 형님에게 사과하거라.”
“형님을 오해하여 소란을 일으켰으니 부디 넓은 마음으로 용서하여 주십시오. 경언군 형님.”
“내 경원군이 어리석음을 모르는 바가 아니나 앞으로는 조심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경원군을 향한 질책에 눈을 반짝이며 웃는 경언군을 보는 왕의 시선은 그리 따사롭지 못했다. 이를 눈치채지 못하고 그다음 화살이 자신을 향하자 경언군은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당황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경언군도 결코 동생을 나무랄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네 아직 관례도 올리지 않았다고는 하나 어찌 후궁의 처소를 몰래 엿본단 말이더냐. 과전불납리 이하부정관(瓜田不納履 李下不整冠:참외밭에서는 신발을 고쳐 신지 말고, 배나무 밑에서는 관을 고쳐 쓰지 말라.)이라 하였다. 경언군의 행동이 수상하니 경원군의 오해를 산 것이 아니더냐.”
“!”
자신을 질책하는 말에 경언군이 몸을 움찔 떨었다.
“경언군은 앞으로 일국의 왕자로서 행실을 주의하라.”
“송구하옵니다.”
아직 어린아이라 표정 관리에 실패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한 경언군이 고개를 숙였다.
“불만이 있더냐?”
“아니옵니다. 전하.”
영빈이 앞서 고개를 숙이자 경언군도 따라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 다 자숙의 의미로 한동안 처소에서 근신하도록 하여라.”
“예, 전하.”
“……예, 전하.”
굳은 얼굴의 경원군과 내키지 않는 듯 불퉁한 표정을 애써 숨긴 경언군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숙원의 처소에 그런 흉흉한 일이 이어지고 있다니 우연일지라도 이대로 방치할 순 없다.”
소올직히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부족했다.
과연 왕이 이걸 모를까?
하지만 속내를 알 수 없는 왕은 우선 처소 주변 경계를 강화할 것을 명했다.
덕분에 한동안은 경언군도 쉬이 접근하지 못할 테니 좀 안전하겠지. 얼핏 본 경언군의 표정에 불만이 가득했다.
나는 경원군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고마워.’
어린 게 기특하기는.
부왕에게 주의를 듣고 친모인 선빈에게 이끌려 가는 경원군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으나 그래도 나를 보고는 슬쩍 웃음을 보냈다.
덕분에 한동안은 동물 사체를 보는 일은 없을 테지.
반면 영빈과 경언군은 무시무시한 눈으로 그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까 경원군에게만 실드 쳐 준 게 불만인가, 아니면 그 타이밍에 왕과 함께 나타난 게 불만인가.
어느 쪽이든 내 입장에서는 억울한 일이었지만 그런 걸 생각해 줄 거 같지는 않았다.
‘이러다 나 살해당하는 거 아냐?’
저 원한과 독기가 죄 없는 나에게 쏟아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드는걸?
하지만 그 추측은 조금 틀렸다.
그 원한과 독기는 왕에게 총애를 받고 있어 쉬이 건드릴 수 없는 왕녀 대신, 만만한 내 생모에게 쏟아졌으니까.
“근자에 전하께서 아기씨에게 총애가 깊으신 것을 이용해 전하의 시선을 끌려 한 것이 아닌가?”
“그저 아기씨께서 우연히 전하와 마주치시는 것뿐이옵니다.”
“지금 감히 웃전의 말에 토를 다는 것인가.”
“송구하옵니다.”
요새 영빈은 툭하면 찾아와서 이렇게 시비를 걸고 있었다. 그리고 아니라고 하면 감히 대거리한다고 성질을 내니 이쪽은 그저 네네, 하고 고개를 숙여야 했다.
“윤 숙원의 말대로라면 어찌 전하께서 지나가시는 길목에 그리 자주 아기씨가 계신단 말인가? 그리고 어찌 어린 아기씨를 그리 홀로 내보낼 수 있는가?”
“송구하옵니다.”
“숙원이 왕녀 아기씨를 잘 모셔야 할 것이네. 이리 공연한 분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말일세.”
그러더니 한숨과 함께 이렇게 강조했다.
“중궁전이 비어 있으니 이리 내궁에 법도와 기강이 무너지는 것을.”
아 어쩌라고.
설마 이렇게 꼬장 부리고선 전하께 중궁전 자리를 빨리 채워야 한다고 간청해 주길 바라는 건 아니지?
억울한 노릇이지만 힘없는 내 생모는 영빈이 돌아갈 때까지 그저 묵묵히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퇴사도 못 하고 이혼도 못 하고 증말 블랙이다.’
영빈이 사라지고 궁녀들에게 붙잡혀 있다가 풀려난 나는 바로 언니에게 달려갔다.
“히잉.”
“소인을 걱정해 주시는 겁니까. 저는 괜찮습니다.”
내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자 괜찮다고 웃었지만 사실 누가 봐도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영빈의 괴롭힘이 가속되는 것과 반대로, 자연히 선빈과의 교류가 잦아질 수밖에 없었다.
“경원군께선 어찌 근신하라는 전하의 분부를 가벼이 여길 수 있겠느냐며 이 사람도 만나 주질 않으시네.”
“경원군 대감께선 소인과 아기씨를 걱정하셔서 하신 일이온데 이리되어 송구할 따름이옵니다.”
“윤 숙원이 송구할 일이 무어가 있겠는가.”
선빈과 경원군의 처소에 찾아가니 경원군 없이 선빈만이 우리를 맞으며 그리 말했다.
어차피 내가 여기서 할 일도 없고, 담소를 나누는 두 사람을 뒤로하고 나는 다과상 위에 올라와 있던 하얀 백설기를 손에 한 조각씩 들고 뒤로 빠졌다.
어차피 궁인들이 내 뒤를 따를 터라 두 사람도 몇 번 나를 부르는 시늉만 하고는 선선히 나를 보냈다.
‘음. 경원군은 어디 있으려나.’
왕이 처소에서 근신하랬다고 정말 고지식하게 자진해서 벌을 받는 모양이었다. 왕자가 그러겠다는데 누가 막겠는가.
‘그러니 내가 가는 것도 막진 못하겠지.’
예상대로 몇 번 찾아온 적이 있어 그럭저럭 눈에 익은 경원군네 궁인들은 나를 저지하지 않았다.
‘선빈이 뭔가 언질을 해 둔 걸지도 모르지만.’
걷다 보니 어디선가 책 읽는 소리가 들려왔다.
궁 안에서 한가롭게 책을 읽고 있을 인물이 얼마나 되겠는가. 물어볼 것도 없이 경원군의 목소리였다.
나는 거침없이 소리가 들려오는 방으로 돌진했다.
드르륵-
그리고 망설임 없이 문을 열었다.
“누가 감히…… 시아?”
“오우.”
허락도 없이 문이 열리자 화를 내려던 경원군은 나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방문을 고해야 할 궁인들까지 물린 것은 본인이었다.
“숙원과 함께 온 것이냐.”
“웅.”
대답과 동시에 손에 들린 떡 하나를 입에 물려 주었다.
“우음? 너는 오라비를 보자마자 다짜고짜…….”
그리고 겸사겸사 어깨를 토닥토닥해 주었다.
‘이런 기특한 놈.’
경언군과 싸우는 게 경원군에게 해가 되면 해가 되었지 득이 될 것도 없는데. 그동안 못살게 구는 것도 참아 와 놓고 결국 나 때문에 경언군과 척을 지다니.
내 뜻을 알았는지 경원군은 민망한 듯 시선을 피했다.
“흥. 딱히 너를 위해 한 일이 아니다. 궁 안에 그런 흉흉한 일이 이어지고 있는데 모른 척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니더냐.”
“웅웅.”
그래그래 착하다.
짧은 팔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어처구니없는 듯 눈을 이리저리 굴리더니 곧 포기한 듯 선선히 머리를 내밀었다. 백설기를 우물거리며 아이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어머니는 화를 내셨지만…… 나는, 잘못하지 않았어.”
“웅.”
내 앞에선 내색하지 않지만 선빈은 쓸데없이 화를 샀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선빈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하지.’
어머니 입장을 아는지 눈치를 보며 참던 아이는, 어린 동생을 못 본 척하지는 않았다.
혼자 말하면서 울컥했는지 경원군은 갑자기 나를 꼭 끌어안고 훌쩍이기 시작했다.
“잘못하지 않았어…….”
잘못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부왕에게 미움받을지도 모른다는 건 아이에게 무서운 일이겠지.
‘화가 난 거 같지는 않았는데.’
하지만 아이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을지도.
나는 잠시 고민했다. 어깨를 토닥이는 것만으로는 전해지지 않는 것도 있다.
“……갠차나.”
“?!”
처음으로 꺼낸 말에 아이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너, 너 말할 수 있었어?”
“비미리야.”
내가 그렇게 속삭이며 검지 손가락을 입 위로 가져다 대자 경원군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아이는 웃어야지.
아직 어린 아기라 어지간한 것은 용납되는 나와는 달리 이 아이에게 궁 안은 생각보다 더 무서운 곳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아마 그건 곧 나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