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164)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164화(164/326)
“사실 시영원 아이들 중에는 아기씨…… 옹주 자가를 부모처럼 여기는 아이들도 많아요. 아영이처럼 평소에는 어른스럽게 굴다가 유독 옹주 자가 앞에서는 어린애처럼 구는 정도는 차라리 귀엽지만, 부모가 자식에게 해 주는 것처럼 옹주 자가께서 자기한테 물질적인 지원을 더 해 줄 수 있는데 해 주지 않으니 이기적이라고 생각하는 아이들도 있지요.”
“그럼 그런 사람들은 어찌합니까?”
“안됐지만 어리광을 받아 줄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니까요. 주로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심리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매우 맞고 정신을 차리곤 하죠. 아니면 가끔 시영원에서 탈주했다가 현실을 깨닫고 돌아오기도 하고…….”
“하아.”
한창 기운 넘치는 아이들이 많으니 관리가 쉽지는 않다고 한다.
“처음에야 소박했지만 워낙에 갈수록 사람이 많아지니 별일이 다 있지요. 물론 아기씨에게는 일일이 말씀드리지는 않는 법이라. 어린 아기씨께 말씀드리기 민망한 일들도 있고요.”
성희는 그리 말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것도 그렇군요.”
“아기씨께서 어린아이 같아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저보다 연치가 어리신 것도 사실이지요. 왕족이시라 그런가 옛날부터 무척 점잖은 분이셨지만요. 그런데 그런 분에게 민망한 이야기까지 전하는 건 너무…… 부끄럽지 않습니까.”
“하하하. 어렵네요.”
성희의 말에 적당히 맞장구쳐 주며 세화는 오래전 일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그 옛날 처음 만났을 때도 또래 아이답지 않게 어른스러운 분위기이긴 했지.’
마치 그날 밤 무슨 일이 일어날 거라는 걸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가지고 왔던 그 감란전병.
도성을 무사히 빠져나와 추적의 손길에서 멀어진 후에야 긴장이 풀리고 주저앉아 그제야 배고픔을 느끼고 그 감란전병을 먹으며 얼마나 울었던가.
‘집안이 풍비박산 나고 동생과 생이별을 했는데도 배는 고프다는 걸 깨달았지.’
옛 생각에 잠시 사이 어느새 제법 산속 깊은 곳까지 들어와 있다.
“그럼 여기서 갈라지도록 하죠.”
“예. 둘 다 찾으면 좋겠네요.”
“하하. 덕분에 다른 약초들만 찾고 있지만요.”
약초꾼들을 비롯해 두 사람은 비교적 여유 있게 대화를 나누며 올라왔지만 뒤에 따라온 존재감 없는 내의원 의관은 죽어 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런 험한 산행은 근래에 그다지 해 본 적이 없어 어려운 모양이었다.
아직 나이도 많지 않을 텐데 운동 부족 같지만.
‘저 의원은…… 이번에 좌천당한 이들과 친밀한 사이였지만 나를 대놓고 괴롭히지는 않았지.’
조금 소심한 성격이라 괴롭히는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렇다고 동참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지만.
눈에 띄지 않은 덕분에 그들과 함께 벌을 받지는 않아 여기도 함께 보내진 셈이었다.
산에서 직접 약초를 채취한 경험이 있고 말을 탈 줄 아는 이들을 찾았으나 그런 의원이 내의원에는 워낙 드문 탓이었다.
약초를 찾느라 바빠 애써 외면하고 있었지만 계속 저 상태여서야 도움은커녕 방해만 될 것이 뻔했다. 세화는 끙끙거리는 의관을 보다 못해 먼저 휴식을 청했다.
“조금 쉬었다 가시지요.”
세화와 의관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대부분 산에 익숙한 이들이었다. 세자가 붙여 준 호위도 마찬가지였고.
세화의 말에 다들 헥헥거리는 의관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며 적당히 자리를 잡고 앉아 쉬며 각자 물통을 꺼내 물을 마시고 가져온 음식을 씹었다.
“겨울이라 날이 금방 저물 테니 서둘러야 합니다.”
동선이 겹치지 않는다고는 해도 강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약초를 찾는 것이 최선이었다.
실수로라도 괜히 사냥터를 어슬렁거려서 좋을 것이 없지 않은가.
물론 양쪽에 세자가 붙여 준 호위가 있으니 어지간해선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호위라니 너무 과한 것이 아닌가 싶지만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옹주 자가를 위한 것이니…….’
세자를 떠올린 세화는 문득 지난번 서고에서 일어났던 불의의 사고를 떠올렸다.
살면서 그렇게 사내의 품에 안겨 본 적이 없어 괜히 얼굴이 붉어졌지만, 지금 자신의 위치를 떠올리며 잡념을 떨치기 위해 고개를 저었다.
다만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는 것만은 어찌할 수 없었다.
‘나 참, 쭉정이는 무슨…….’
옷 위로 볼 때는 알지 못했지만 직접 닿아 보니 알 수 있는 단련된 몸이었다.
옹주 자가가 놀렸다고 그걸 그렇게 신경 쓰고 있다니 은근히 귀여운 면이 있지 않은가.
‘물론 세자 저하에게 그리 가감 없이 평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 옹주 자가 정도일 테니……. 그런데 나에게도 굳이 물어서 확인을 했다는 건 나도 꽤 신용하고 있다는 게 아닐까……?’
거기까지 생각한 세화는 다시 잡념을 털어 내기 위해 주먹으로 제 머리를 박았다.
정말이지 무의미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었다.
그러다 문득, 시야에 닿은 저쪽 바위 뒤쪽에도 무언가 풀이 나 있는 것이 보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저는 잠시 저쪽 좀 보고 오겠습니다.”
“그럼 제가 함께…….”
“멀리 가는 것도 아닌걸요. 좀 더 쉬시지요.”
산짐승들 때문에 따라온 호위들은 약초 채집에는 묘하게 도움이 안 되었지만 일부러 붙여 준 세자의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으음. 여기선 잘 안 보이는데.”
무작정 뽑을 수도 없다. 괜히 약초가 상할지도 모를 일이니까.
‘저 안쪽은 발판이 좀 불안해 보이는데…….’
세화가 조심스레 걸음을 옮기는데 뜻밖에 가까운 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보게, 뭔가 좀 찾았는가?”
“아, 잠시만요. 조금만 더 가 봐야 알 것 같습니다만…….”
뒤에서 들려오는 서울에서부터 따라온 의관의 말에 세화는 고개를 저었다.
‘왜 저렇게 가까이 따라왔지?’
바위 틈새, 절벽 사이 등 약초가 있을 만한 곳을 샅샅이 뒤지던 세화는 애써 잡념을 끊었다.
딴생각을 하다가 방심하면 미끄러질지도 몰랐다.
조금 아슬아슬한 곳에 손을 뻗어 손으로 살살 훑어 캐냈다.
조심조심 옆으로 이동하며 확인하니 찾고 있던 그 약초가 분명했다.
“찾았다……!”
“정말입니까?!”
세화의 외침과 동시에 뒤쪽에서 쉬고 있던 이들 사이에서 기쁨의 탄성이 터졌다.
집에 간다!
“그런데 겨우 그걸로 되겠습니까?”
“초치지 말게.”
“더 찾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오늘은 이만 돌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하하하.”
세화는 조심해서 약초를 캐내어 가지고 온 종이에 감싸 바랑 안에 조심스레 갈무리했다.
안에는 도중에 눈에 들어와 저도 모르게 따거나 채취한 약재들이 함께 들어 있었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고 좋은 약재가 눈에 들어오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던 탓이었다.
“그렇게 많은 양이 필요한 것은 아니니까요. 워낙에 독한 약이라……. 지금 여러 뿌리를 얻었으니 상태만 나쁘지 않다면 괜찮을 겁니다.”
그 말에 다들 안도한 듯 하산 준비를 했다.
“산짐승들이 많으니 조심해야 하오.”
“이 근방은 원래 호환이 잦은 곳이니 조심해서 나쁜 거 없지. 몇 년 전에는 건너편 산에서는 산군(山君:호랑이)이 사람을 여럿 덮쳐서 나라에서 관군을 보내 소탕까지 했을 정도였다고.”
“그렇습니까.”
“근방에 그렇게 가족을 잃은 사람이 많으니 말조심하는 게 좋을 거요.”
“아들을 잃고 정신을 반쯤 놓은 사람도 있지 않나.”
“그 집도 딱하지.”
“지나가던 청년을 붙잡고 자기 아들이라고 불러 대서 마음 약한 사람들은 며칠 보살펴 주기도 하더구먼.”
“그래 봤자 다들 떠날 사람 아닌가. 나쁜 놈한테 돈이나 뜯기지 않으면 다행이지.”
“아, 그래도 그 청년이 겨울 되면 가끔 와서 이것저것 챙겨 주더구먼. 얼굴도 훤하게 잘생겨서.”
“잘생겼어?”
“하, 그럼, 얼굴이 희고 고운 걸 보면 어디 양반가 자제 같던데 이런 데서 그런 사람 보기가 어디 흔한가?”
“쉽지 않은 일인데 대단한 분이시네요.”
일이 끝났다는 안도감 때문인가 묘하게 다들 말이 많아졌다. 분위기가 좋아진 건 나쁜 일이 아니었으므로 세화도 적당히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아무튼 산에 호랑이를 잡기 위해 설치해 놓은 덫도 은근히 많지. 외지인들은 어디에 뭐가 있을지 모르니 혼자 다니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
어찌 되었든 소득이 있다 보니 다들 기분이 좋아서 동네 약초꾼들도, 호위들도 들떠서 평탄한 분위기로 내려왔다.
강무 때문에 사람이 많이 다녀서인지 위험이 될 만한 산짐승도 보이지 않았다. 기껏해야 토끼 같은 초식동물 정도나 가끔 눈에 띄었지만 사람을 보자마자 달아나기에 바빴다.
“이 근처에서 좀 쉬었다 가시지요.”
“후우. 그래도 날씨가 영 좋질 않으니 빨리 내려가는 게 좋을 거요.”
약초꾼들 중 하나가 그리 말하고는 헥헥거리며 따라온 내의원 의관에게 눈치를 주었다.
따가운 눈빛에 움찔한 의원은 물을 마시고 숨을 고르더니 결심한 듯 비실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저기, 세화 의원, 잠시 괜찮겠는가.”
“무슨 일이십니까?”
“내 잠시 자네한테 할 말이 있어 그러네.”
“?”
“여기서는 좀 그렇고 잠시만 저쪽으로…….”
의아해하면서도 세화는 할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날씨가 조금 좋지 않은걸. 무슨 얘긴진 몰라도 빨리 끝내고 어서 내려가자고 해야겠어.’
성희 쪽도 걱정이었지만 다들 약초꾼이니 알아서 서둘러 하산할 것이다.
주변을 둘러보니 아까 올라올 때도 한 번 들러서 쉬던 곳이라 어느 정도 눈에 익은 지리였기에 다들 그리 주변을 경계하지는 않는 듯했다.
‘사람이 다니는 길에는 산짐승이 잘 내려오지 않으니까.’
물론 예외는 있겠지만.
방향은 좀 다르지만 지금 이 근방은 강무를 위해 이미 한번 확인을 거친 곳이다. 강무 때는 산짐승보다는 사냥감을 풀 예정이라고 들었다.
‘그래도 이 근방은 그럭저럭 말도 다닐 수 있을 거 같은데.’
중간에 길이 좀 안 좋았던 것 같지만 여기까지 말을 끌고 왔으면 좀 편했겠다는 생각을 하며 세화는 다른 이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할 말이 있다고 하시니 잠시 다녀올게요.”
“저희도 같이 갈까요?”
세자가 붙여 준 호위들이 그렇게 물었으나 의원이 당황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의원의 일이니 다른 사람은 좀 그렇습니다.”
지금 이곳에 내의원 의관은 세화와 이 사내 둘뿐이었으니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세화는 말하는 대로 사내에게 이끌려 다른 사람들에게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한 거리로 떨어지긴 했는데, 여긴 찜찜한 것이 아니었다.
주변을 한참 두리번거리던 사내는 주변에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제야 안심한 듯 세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 자네에게 사과하고 싶어서.”
“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자네를 괴롭히지 않았나. 내가 미안했으이.”
뜻밖의 정상적인 용건에 긴장하고 있던 세화는 약간 맥이 풀렸다.
“아, 그 일이라면 이미 끝난 일이 아닙니까. 마음에 담아 두지 마세요.”
“정말이지? 나중에 다른 말 하지 않는 걸세.”
옹주 자가를 치료하고 나면 세화의 지위는 확고해진다. 그러니 이제야 이렇게 마음을 돌려 보려 애쓰는 걸까.
“그, 그래서 말인데.”
“?”
“그 약초 말일세. 내가 찾은 것으로 해 주면 아니 되겠는가?”
“네?”
“꺄아악!”
거짓말!
수풀이 우거져 있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이쪽은 절벽이었다.
떨어지는 순간, 어딘지 안도한 듯한 사내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어째서?’
약초가 들어 있는 바랑을 끌어안은 채, 세화는 몸을 움츠렸다.
무언가 붙잡으려고도 해 봤지만 순식간에 놓쳐 버렸고, 어딘가에 여기저기 부딪히고 굴러떨어지는 등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악!”
어딘가에 추락한 세화는 그렇게 의식을 잃었다.
그리고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세화가 어딘지도 알 수 없는 깊이 파인 구덩이 속에 빠져 있었다.
“아…….”
세화는 지금 상황이 이해가 되질 않아 눈을 깜빡였다.
‘나, 살아 있나?’
떨어지면서 잠시 기절했던 건지도 잘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온몸이 여기저기 아팠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