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171)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171화(171/326)
“힘이 좋으신 분이 끌어 올려 주셔야지요.”
묘하게 기품과 교양이 느껴지는 부드러운 목소리.
‘그때 그 선비님……이 아닌가?’
얼굴을 봐야 알겠는데 워낙 어두운 데다 방한구로 얼굴을 반 이상 가리고 있어서 원.
“그럼 부탁드립니다.”
“걱정 마십시오.”
그렇게 내려갔던 사내는 이번에는 아까보다 가뿐하게 세화를 받쳐 위로 올라왔다.
‘옷이 두꺼워서 이상한 소리는 안 듣겠네.’
하지만 세자보다 세화의 옷 상태가 더 심각했다.
옷으로서의 기능을 보온에 둔다면 옷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만, 외견에 둔다면 이미 옷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상태랄까.
“괜찮으신 겁니까?”
“이래 보여도 의외로 크게 다친 곳은 없으니 걱정할 거 없네. 세자 저하께서는?”
“저쪽에 모시고 있습니다.”
세자의 상태를 이리저리 살피고 있던 익위사 관원들은 세자가 열이 있다는 것과 발목이 부어 있어 눈을 넣은 주머니를 달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안색이 좋지 않았다.
“어서 가서 의원을 불러야겠습니다.”
“……제가 의원입니다.”
“아.”
올라오자마자 본인 상태보다 먼저 세자의 상태부터 다시 확인한 세화는 횃불을 대어 달라 부탁하고 응급처치를 시작했다.
“다치셨다는데 저 안에서는 아무래도 제대로 볼 수가 없어서…… 여기서는 일단 응급처치만 해 두고 빨리 내려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대체 무슨 일을 겪었는지 횃불 가까이에 있으니 엉망이 된 세화의 모습이 너무 선명해서 사내들은 다들 말을 아꼈다.
“그런데 세화 의원님도 다치신 거 아닙니까?”
“뭐…… 저는 심하지 않으니까. 저하를 모실 때 가능한 한 움직이지 않도록 조심해 주십시오.”
“예.”
“눈을 좀 모아 와 주시겠어요? 냉찜질을 해야 해서.”
“예!”
부목을 대고, 눈을 담은 천 주머니를 대는 등 세자에 대한 처치가 끝나고 사내들은 역할을 분담해 길을 트는 사람과 세자를 운반할 사람으로 나뉘어 앞장섰다.
천호는 비틀거리며 힘겹게 일어나는 세화를 보며 혀를 찼다.
“혼자 내려가시긴 힘드실 테니 업히시지요.”
“괜찮다는데도.”
“이리 다치셨는데 못 본 척했다고 하면 나중에 옹주 자가께서 저에게 화를 내실 겁니다. 옹주 자가께서 어떤 분이신지 모르지는 않으시지요? 저에게 실망했다고 성을 내실 텐데 제가 그걸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그냥 사람 하나 살린다 생각하세요.”
“푸훗.”
천호의 너스레에 세화도 웃음이 터진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동생에게 업힌다고 생각하고 부탁할게.”
“예, 그러십시오. 누님.”
얼른 세화를 업은 천호는 벌써 내려가고 있는 세자 일행을 보며 내심 입을 삐죽였다.
‘세자 저하만 사람인가. 걱정되는 건 알지만 너무하네.’
앞에서 길을 터놓아서 뒤따라가기만 하면 되니 편하기는 하지만 날도 어두운데.
“어서 이리로.”
“아. 감사합니다.”
그리고 뜻밖에 횃불을 들고 기다려 주고 있던 이는 아까 구덩이로 내려가 세자와 세화를 올려준 이였다.
“하하. 아까 오르내리느라 이제 기운이 없어서 이젠 횃불 드는 정도밖에 도울 수 있는 게 없으니 이해해 주십시오.”
“아닙니다.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묘하게 양반 같은데 양반 같지가 않은 사람이었다.
세화도 천호에게 업혀 감사 인사를 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그게…… 실은 거기가 제가 파 놓은 구덩이라…… 그…… 죄송합니다.”
“푸훕.”
“풉.”
사내의 뜬금없는 양심선언에 천호와 세화는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그럼 아까 본인이 파 놓은 구멍에 미끄러져 떨어진 거야?
천호와 세화는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물론 사내 역시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한 듯, 묘하게 민망한 얼굴을 했다.
“죄송합니다. 제대로 메워 놓았어야 하는데 그 정도로 깊이 파 놓았더니 메워 놓기도 쉽지가 않고, 방치해 놓은 사이에 낙엽이니 나뭇가지니 쌓여서 어딘지 찾을 수도 없고.”
“아니요. 어찌 보면 덕분에 살았으니까요.”
“예?”
“아…… 잘못하면 벼랑까지 굴러떨어졌을지도 모르는데 다행이지요.”
“그, 그렇습니까.”
세화는 애매하게 말을 얼버무렸다.
‘나는 그렇다 쳐도 세자 저하는…… 그때 그 구덩이로 빠지지 않았다면 위험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 얘기는 섣불리 꺼낼 수 없었다.
세자를 노렸다는 것은 분명 역모(逆謀)였다. 안전한 곳에서, 세자와 함께 윗전에게 고해야 할 사항이었다.
‘나는 그냥 옹주 자가의 병을 고쳐 주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어쩌다 역모 같은 일이 휘말렸을까.
역모라니.
‘아버님이 휘말린 그 역모에 대해서도 조사하고 싶었는데.’
하지만 일개 의원에게 그런 능력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 언젠가 세자의 신임을 얻고 나면, 나중에 의금부에 끌려가는 한이 있어도 아버지의 죄에 대해 다시 조사해 달라고 청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 생각했었는데.
‘세자 저하와 함께 있으면 지금도 짐이 무거운 사람에게 내가 과한 청을 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드니.’
스스로가 한심해 한숨만 나왔다.
무사히 구출된 덕분에 긴장이 풀려서인지 노곤한 몸은 점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까까지는 분명 괜찮았는데.
‘아, 하지만 꼭 당부해야 할 게 있는데…….’
곧 시야에 횃불이 점점 많아지며 웅성거림과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라버니!!”
“세화!!”
세화는 흐릿해진 시야에 들어온 성지의 얼굴을 보고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어떻게든 기력을 짜내어 입을 열었다.
“저하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말고 직접…… 부탁…….”
“세화? 세화!”
당황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지만, 세화는 이제야 안심하고 의식을 놓을 수 있었다.
‘성지라면 안심할 수 있어.’
자신을 밀쳐 냈던 그 의관은 분명 웃고 있었지.
개인적인 원한 때문인지, 역심을 품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분명한 건 누군가를 해치는 자에게 사람의 몸을 맡길 수는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성지라면 분명 자신의 뜻을 알아들었으리라.
***
‘못 움직이겠어.’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세화는 어느 낯선 방 안에 있었다.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고 싶은데 온몸이 욱신거리고 몸이 천근만근이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어제는 멀쩡했는데…….’
힘겹게 눈만 깜빡이고 있는데 성지가 들어왔다.
“일어났어요?”
“어떻게 된 거예요?”
“어떻게고 뭐고, 전신 타박상 환자는 움직일 생각하지 말고 가만히 계시죠.”
“송구합니다.”
그렇지만 목도 마르고 배도 고프니 결국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아니, 솜이불이 무거워서 못 움직인 거였구나.’
자신의 신분을 생각하면 과한 대우이긴 한데 아무리 몸이 무겁다지만 솜이불을 못 들어 올렸다니.
자신의 현재 상태에 좌절한 세화는 일단 목부터 축이고 성지에게 물었다.
“세자 저하의 용태는요? 지금 누가 곁에 있지요?”
“세화 의원이 정신을 잃기 전에 말한 대로 마지막에 제가 직접 치료했고, 다리에 염좌 외에는 다행히 큰 부상은 없으십니다. 물론 한동안 운신은 어려우시겠지만요. 지금은 세자 저하의 사람들이 곁에 붙어 간호 중이니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후우.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세화는 안도하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세화야말로 온몸이 멍투성이에, 옷은 아주 넝마가 되었던데 괜찮은 겁니까?”
“아…… 설명해야 할 일들이 있는데…….”
어젯밤 말했어야 했는데 그것도 잊고 의식을 잃다니.
내심 자책하던 세화는 성지가 가져온 죽을 먹으며 일단 함께 온 내의원 의관이 자신을 밀쳐 낸 것에 대해 설명했다.
“미끄러져 떨어졌다는 건 역시 거짓말이었군요. 겁 없이 그런 거짓을 고하다니.”
“적어도 싸우다 떨어졌다는 것 정도는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았을 텐데요.”
“마치 세화 의원이 다시 돌아오기 힘들 거라는 걸 알았던 것 같아서 좀…… 그렇군요.”
험한 산속이니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마음이 찜찜하기는 했다.
“어제 갑자기 그런 말을 해서 놀랐는데 이런 이유라니.”
“달리 믿고 맡길 사람이 없어서요.”
“후후.”
세화의 그 말에 성지도 빙긋 웃었다.
물론 전하를 따르는 어의가 따로 있겠지만 누가 같은 편인지 알 게 뭔가.
아쉽지만 세화를 밀쳐 낸 것에 대해 변명하려면 얼마든지 가능했다. 하지만 그 증거 없는 악의는 직접 겪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세자를 암살하는 데 함께 모의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의도한 걸까요.”
“아마도요…… 세자 저하의 일도 노린 것이 분명해 보이고요.”
“아, 세자 저하를 노리는 역당들에 대해서는 옹주 자가께서 밝혀내셨어요.”
“네?”
뚱딴지같은 소리에 세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난번 일로 불법 노비를 색출하며 큰 손해를 본 집안이 제법 있다는 건 알고 있죠? 이 지방 유지의 자제들이 그 일로 불만을 품고 있었다고 하던데요.”
“그……렇다고 이런 무모한 짓을 해요?”
“심지어는 지금 옹주 자가께서 기녀들을 비롯한 공노비들에게 종두법을 실시하고 계시니까요. 재주가 뛰어난 기녀들은 한양으로 데려가실 생각도 있으시고요. 옹주 자가는 기녀들을 예인으로만 대하시니 기녀들이 거부하는 일도 없다는 걸 다들 잘 알고 있을 테고요. 그 소식을 듣고 불만을 품은 자들이 모여 한탄하던 중 누군가가 그들을 충동질했다고 해요.”
“누군가요?”
“그것까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모양이지만요. 어제 낮에 옹주 자가께 그 얘기가 전해졌고 바로 관련자들을 추포해서 지금도 심문 중이라고 들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세자 저하를 상하게 하는 것은 너무 과하지 않나요?”
“저도 그게 의문이긴 하지만…… 그들이 역심을 품었다는 사실이 증언으로 나왔으니 아마 역모죄를 피해 가기는 어려울 듯하네요.”
“그렇군요.”
세화 본인도 역당의 가족으로 몰려 본 적이 있는 처지이다 보니 복잡한 심경이었지만, 이번 일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보니 그들을 변호하는 것도 내키질 않았다.
“후우. 역모라니 뭔가 너무 큰일에 얽힌 것 같아 현실감이 없네요.”
“하하. 그러게요. 이런 일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한숨 쉬는 세화를 다독이며 성지가 약을 내밀었다.
“자, 밥 먹었으면 약도 먹어야죠.”
“아…… 늘 남한테 먹이는 건데도 왜 제가 먹는 건 싫을까요. 아니, 저 약까지 필요한 건 아닌걸요.”
“의원이라고 약을 좋아하는 건 아니니까요. 하지만 옹주 자가께서 꼭 챙기라고 신신당부하셨으니까 잔말 말고 먹어요.”
“네에.”
위에서 먹으라면 먹어야지, 뭐.
그러고 보니 어제 세화를 업고 내려온 천호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