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176)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176화(176/326)
그 애들도 처음에는 순수한 목적으로 사람들에게 공부를 가르쳤을 텐데 뭔가 이용한 거 같은 기분도 들고.
아니, 하지만 적절한 인재가 있는데 썩히는 것도 아까운 일이 아니겠어?
그래도 일단 업무가 늘어나는 거니까 사과하기로 했다.
교사로 채용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새 전혀 관계없는 업종의 관리 업무까지 시키고 있는 셈이었다.
봉급은 올라가겠지만.
“그렇게 해서 이곳을 관리할 담당자가 필요하게 되었는데 괜찮을까? 혼자가 아니라 여럿을 두는 방법도 생각했지만 그럼 혼선이 생길 것 같아서 말이야.”
“담당자요……?”
“응. 별걸 다 시키는 것 같아 미안하네.”
밝은 얼굴로 안부 인사를 나누고 맛있는 것도 좀 먹이고 근황 토크도 좀 나눈 후, 나는 성희에게 새로운 업무에 대해 털어놓았다.
잠시 생각에 잠긴 것 같던 성희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이곳에도 시영원의 분원(分院)을 만드시는 겁니까.”
“비슷하지. 하지만 나는 이쪽 지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확히는 잘 모르니까.”
그렇게 기나긴 정보 교환 타임과 사업 설명의 시간이 찾아왔다.
나는 성희에게 강원도 사정에 대해 듣고, 성희는 나에게 새로 만들 예정인 시설에 대해 설명하고 추가로 필요한 담당 책임자들의 선별에 대해서도 논의했다. 다른 사람들도 같이 왔으면 좋겠지만 다들 바쁘단다.
“겨울이다 보니 오히려 지금 글을 가르치기 좋거든요.”
농한기이다 보니 일거리가 적어서 성인들도 글을 배울 짬이 나니까.
“쓸 만한 인재가 있으면 추천하고.”
“하하하, 똑똑한 애들은 서울로 유학이라도 보낼까요?”
“그것도 나쁘지 않지…… 뭐든 잘하는 게 있다면 보내렴.”
“예.”
시영원 아이들은 내가 원하는 인재상에 대해서도 잘 아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다방면에 걸친 공부는 여러모로 필요하고.
“저어. 그런데 어째서 저에게 이런 일을 맡기시는지 여쭈어도 될까요? 이 지역에 배치된 사람 수도 적지 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응? 아무래도 사람에게는 적성이 있잖아? 성희는 공부도 잘했지만 악기 연주도 잘하고, 이쪽에 관심이 많았지? 강원도에 있는 아이들 중에는 가장 음악에 관심이 있었던 것 같은데 맞나?”
“앗, 그런 것도 기억하세요?”
“기억하지, 그럼. 악기 연주하던 중에 다른 애들한테 뺏기고도 괜찮다고 웃고 있는 걸 아영이가 쫓아가서 찾아온 적도 있었지, 아마?”
“앗. 하하하.”
성희가 부끄러운 듯 웃었다.
사실 선생님으로 파견한 아이들에 대해선 대체로 숙지하고 있다. 내보내는 데에 고심이 많았으니까.
성희는 그리 활동적인 편은 아니어도 아이들을 잘 챙기고 꼼꼼하게 일을 잘했다. 욕심 없이 아이들에게 양보하는 편이지만 규칙은 고지식하게 지키는 편이었고.
‘조금 장녀 기질이랄까, 맏며느리 기질이 있어 어른들이 좋아할 타입이지. 좋아하는 걸 티 내는 것도 어려워하고.’
성희는 시영원 초기부터 있던 아이이기도 해서 비교적 기억에 남는 편이었다.
“아무래도 시영원 초반에 들어온 아이들은 수가 그렇게까지 많지…… 많았나?”
“…….”
이젠 오래전 일이라 가물가물한데, 말없이 웃고 있는 성희의 반응을 보아하니 많긴 했나 보다.
“하긴 사람이 많아서 이름 지어 주느라 힘들긴 했어…….”
“후후. 네.”
사실 지금도 힘들어.
명명(命名)해 줄 사람 숫자야 처음에 비할 바 못 되지만 태클이 많아져서.
시영원에 새로 들어오는 아기들 이름 지어 주면 저쪽에서 ‘그건 제 이름인데요!’라든가, ‘그건 누구누구 이름인데요!’ 하면서 태클이 들어온다.
이름 레퍼토리도 다 떨어져서 한글 이름 지으려고 하면 다들 한자 이름인데 걔만 한글 이름이면 나중에 놀림받을 거라고 반발하고.
‘그렇게 한자가 좋으면 글공부나 열심히 할 것이지.’
애들 키우는 게 정말 쉽지 않았다.
앞으로는 그냥 연도별로 돌림자 넣어서 지을까.
“파견 내보낸 아이들 중에 일 못 하는 아이는 없지만 아무래도 일을 할 때는 그런 쪽 적성도 맞아야 하니까. 건설 쪽은 이쪽에서도 사람 파견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예. 아기씨.”
잘은 모르겠지만 만족스러운 얼굴이다. 뭐 그럼 됐지.
겨울이라 해가 일찍 떨어지니 어느 정도 중요한 용건을 마친 성희는 일찍 돌아가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성희를 배웅하며 물었다.
“이 동네 사는 건 좀 어때?”
“사람 사는 곳이 다 거기서 거기지요. 그래도 다들 그저 열심히 사는 거고요.”
“그건 그래.”
그 정도면 괜찮았다.
내가 졸린 눈을 비비며 고개를 끄덕이자 성희도 옅게 웃었다.
“그래도 나오면 다들 그래요. 시영원이 제일 좋았다고요.”
“에구. 아부 좀 할 줄 아네.”
“정말요. 아기씨.”
더 들를 곳이 있다는 성희는 그렇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떠났다.
잘 자라 제 몫을 다 하는 아이를 보니 뿌듯했다. 나도 이제 돌아가서 좀 더 지져야지.
매향이는 아쉬워하는 모양이었지만 슬슬 돌아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이제 돌아가자.”
“예.”
올 때와 마찬가지로 천호가 나를 안아 들었다. 아까보다 거리에 사람이 제법 많아져 있었다.
“애들이 잘 지내는 듯해서 다행이네. 하긴 적응 못 하는 애들은 시영원으로 일찍 돌아왔으니…… 어?”
“어찌 그러시옵니까?”
“쉿.”
의아해하는 소이와 천호에게 담장 뒤로 숨자고 손짓한 한 나는 방금 눈에 들어온 인물을 몰래 엿보았다.
‘세자랑…… 세화? 뭐 하는 거지?’
물론 세자와 세화가 단둘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세자의 뒤에 익숙한 세자의 측근들이 따라붙어 있었으니까.
“꼭 나가셔야겠사옵니까.”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또 와 보겠느냐.”
“하지만 아직 걷기도 불편하지 않으시옵니까.”
“이제 걸을 만하다. 게다가 만약을 대비해 이렇게 의원까지 대동하지 않았느냐.”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누가 세자를 막을 수 있을까.
송 내관이나 좌세마 역시 그저 세자가 잔소리에 지쳐 조금이라도 일찍 돌아가자고 말해 주길 바랄 뿐이었다.
‘옹주 자가라도 계시면 저하를 말려 주셨을 텐데.’
슬프지만 세상에서 세자 저하에게 그리 거침없이 말을 쏘아붙일 수 있는 인물은 옹주 자가뿐이었다. 하필이면 세자가 나갈 때에 옹주 자가 역시 부재중일 줄이야.
부상만 아니었다면 함께 외유를 즐겼을 오누이였지만 옹주 자가시라면 세자 저하의 부상을 염려해 말려 주셨을 텐데…….
신하들의 안타까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자는 즐거워 보였다.
그리고 동시에 세자를 막는 데 실패한 이들은 세화에게 은근한 눈빛으로 압박을 넣고 있었다.
물론 좀 말리라는 뜻이었다.
‘어쩌지…….’
덕분에 이 중에서 가장 말단직인 세화만 난감할 뿐이었다.
“저어, 하지만 역시 아직 걷는 것은 유의하시는 것이 좋사옵니다.”
“걱정 말게. 조심할 터이니.”
“조심해서 걸으셔야 합니다.”
슬프지만 세자는 꽤 말을 안 듣는 환자에 속했다.
“어찌하여 이리 다른 분들의 말씀을 듣지 않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말하지 않았는가. 일반 백성들의 삶을 보고자 한다고.”
“백성들의 삶을 말씀이십니까?”
세화의 말에 세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이번에 내가 처음으로 시골 민가(民家)에서 신세를 지지 않았었나. 당시에 처음 눈을 떴을 때 천장을 보고 당황했었지.”
“아…….”
세화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세화가 적응해야 하는 사람이었다면, 세자는 그들의 생활을 더 좋게 만들어야 하는 의무가 있는 사람이었다.
“일반 백성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알아야 나도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알 수 있지 않겠느냐.”
말은 청산유수였으나 반박하기는 또 어려운 말이었다.
“백성들의 삶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너무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구나 싶어 자괴감이 들기도 하고…….”
“저하…….”
“크흠. 호칭을 조심하거라. 자, 가자.”
세자는 그렇게 감동한 신하들을 이끌고 발걸음을 옮겼다.
멀리서 자신들을 바라보는 이들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채.
***
‘한 명은 눈치챈 거 같지만.’
뭐 눈치 못 챌 정도면 굳이 호위를 데리고 다닐 의미가 없긴 하지.
“세자 저하께서는 사람들이 많은 저자로 가시는 듯하옵니다.”
“흐음.”
아까 보니 뭔가 좋은 소릴 했는지 세화가 세자를 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아 보이던데.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세자의 측근들은 은근히 히죽거리고 있었고.
애초에 세자의 측근들이야말로 세자가 빨리 누구든 여자와 눈 맞아서 떡두꺼비 같은 아들 하만 낳아 주기를 바라고 있을 사람들이었다.
세자가 후계를 공고히 해야 그들의 자리도 안정되는 법이니까.
그런 그들의 눈에 세화가 어찌 보일지.
‘어쩌지 세화의 퇴로가 너무 좁아졌는데.’
누구보다 두 사람이 잘되기를 바라는 내가 할 말은 아닌 거 같긴 한데.
세화가 너무 휩쓸리는 것도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나중에 후회하고 되돌릴 수 없는 건 당연히 세화 쪽이었다.
‘그런데 둘 다 숨길 줄을 모르니…….’
차라리 빨리 연극이나 여러 지역으로 확장 공연해야 하나.
요즘에는 스카우트한 기녀들에게도 혹시 연기를 해 볼 생각 없냐고 권하기도 했다.
가면을 쓰고 있어도 남자 배우와 여자 배우가 애정물을 연기하면 불건전하다는 민원이 들어와서, 아예 그럼 캐스팅을 완전히 여성만, 아니면 완전히 남성으로만 바꿔볼까 고민 중이었다.
원래 조선도 그렇고 동양이든 서양이든 많은 나라에서 비슷한 경우도 많았고.
아무튼.
“따라가자.”
“예?”
“따라가자고.”
“아니, 하지만…….”
천호와 소이 둘 다 난감한 얼굴이었다.
아니, 왜 굳이 세자 저하를 따라가요?
게다가 저거 분위기가 좀 그런데요……?
괜히 세자 저하한테 걸리면 성가셔지지 않을까요?
둘 다 입 밖에 내진 않았지만 두 사람이 대강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얼굴에 빤히 드러났다.
“음…… 소이는 들어가서 쉬고 있어. 천호가 나를 안고 다니는 게 더 빠를 거야.”
“예? 하지만 아기씨.”
“게다가 천호 옷 좀 봐. 얼굴도 많이 가릴 수 있고. 나는 잠든 척하고 있으면 얼굴도 안 보인다고.”
“그건, 그렇습니다만.”
“빨리. 지금 안 따라가면 놓친다?”
“아, 예.”
천호는 내 명에 충실하게 따라 세자 일행이 떠난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고, 남겨진 소이는 못마땅한 얼굴로 나를 보더니 한숨만 푹푹 내쉬며 안으로 들어갔다.
‘으음. 좀 미안하네. 하지만 소이는 아무래도 좀 눈에 띄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