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177)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177화(177/326)
사실 비슷한 의미로 세화도 눈에 띄지만 저쪽은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어서 크게 걱정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고작 3명이었으니 천호가 나와 소이를 동시에 챙기기는 어려웠다.
‘역시 궁녀들에게도 무예를 가르치자고 건의해 볼까. 근데 지금도 교육과정 빡세 보여서, 원.’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새 세자 일행이 시야에 들어왔다.
‘생각보다 빨리 따라잡았다 했더니.’
세자와 세화가 길에서 어떤 할머니를 부축하고 있었는데 옷을 보아하니 눈길에 넘어지신 듯했다.
‘흐음. 세자 본인이 부상자라는 사실을 잊은 듯.’
송 내관이 할머니를 업고 가까이에 있는 민가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아마 세화가 치료하겠지.
“그런데 왜 따라가시는 겁니까?”
“뭐 하나 궁금해서?”
“그렇습니까…….”
뭐 대단한 이유라도 있는 줄 알았나 보지?
잠시 후 민가에서 나온 세자와 세화는 더욱 다정한 눈빛으로 알콩달콩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우물거리는 걸 보아하니 뭐 간식이라도 대접받은 모양이었는데 송 내관의 손에 아까 할머니가 들고 계시던 보따리가 들려 있었다. 뭔가 부탁받았나 보다.
‘송 내관도 고생이네.’
세자의 최측근이 그렇죠, 뭐.
뭐 딱히 계획이라곤 없었는지 세자 일행은 그대로 장이 열린 곳으로 가서 누군가에게 보따리를 전해 주고 그대로 시장 구경을 시작했다.
“아, 나도 다른 지역 시장은 처음 같아.”
“오시는 동안은 너무 바쁘셨지요. 뭐라도 드시겠어요?”
“으음.”
겨울이지만 나름 장에는 이것저것 먹을 것과 볼거리가 있었다.
상인들도 우리를 발견한 듯 호객행위를 시작했다.
“아기씨! 간식 안 필요하십니까? 저희 집 곶감이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정도로 맛있습니다요!”
“……곶감 싫어.”
“…….”
나는 휙 고개를 돌려 천호에게 매달렸다.
어쩐지 아까 세자가 이 앞을 지나며 고개를 돌리더라니. 안타깝게도 그 상투적인 홍보 멘트가 몹시 부적절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아기씨.”
그저 열심히 장사를 했을 뿐인데 아까는 웬 선비님(세자) 일행에게 외면당하고, 이번에는 어린아이에게 외면당한 곶감 장수 아저씨는 자신이 뭔가 잘못한 거 같았는지 괜히 미안해했다.
천호도 어색하게 물었다.
“그, 여기 약과는 없습니까?”
“약과는 너무 고급 간식이라…… 아, 엿도 싫어하실까요? 저쪽에 엿장수도 있는데.”
곶감 장수가 가리킨 곳에 요란스럽게 철컹철컹 가위 소리를 내는 엿장수의 모습이 보였다.
천호는 곶감 장수에게 적당히 인사를 하며 멀어졌다.
“아기씨. 엿 하나 사드릴까요?”
“천호. 돈 있어?”
나는 돈 같은 거 안 들고 다니는 사람이야.
현대에선 카드랑 페이만 쓰느라 안 들고 다녔고, 여기선 늘 돈 들고 다니는 사람이 따로 있어서.
“당연하지요. 아기씨께서 봉록을 넉넉하게 주시니까요.”
나는 천호가 사 준 옥수수엿을 우물거리며 세자 쪽을 살폈다.
“맛있어요?”
“응.”
사람이 제법 있어서 세자 일행에게 가까이 가도 티가 나지 않았다.
주변에서도 나이 차 나는 동생이나 혹은 어린 아기씨를 모신 하인 정도로 생각했는지,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감기라도 걸릴까 봐 소이가 아주 솜뭉치로 만들어 놓은 탓이었다.
“아기씨, 폭신폭신해요.”
“춥지 않아서 좋긴 한데.”
우리는 작은 소리로 소곤거리며 세자와 세화가 뭐 하는지를 확인했다.
두 사람은 어느새 작은 노리개 장수 앞에서 같은 노리개를 집고는 묘하게 부끄러워하며 얼굴을 마주 보고 있었다.
아까부터 둘이 노는 것이 아주 심상치가 않았다.
마치 사극이나 드라마에서 대사나 다른 음향효과 없이 BGM만 흘러나오며 짧게 지나가는, 주인공 커플이 즐겁게 데이트하는 장면을 실시간으로 보는 것 같았다.
좀 긴가민가 싶었는데 저러는 걸 보면 그냥 맞는 거 같다.
“어휴, 그래. 그냥 빨리 혼인이나 해라.”
“훕. 푸후후.”
“어허, 조용히, 조용히.”
나는 웃음이 터진 천호의 입에 엿 한 조각을 넣어 주고 조용히 하라며 혀를 찼다.
“푸훕.”
그런데 얘는 뭐가 그렇게 웃긴 거야.
“뭐가 그렇게 웃긴 거야?”
“아니…… 그냥요.”
“?”
하긴 아직 열다섯이니 한창 가랑잎이 굴러가는 것만 봐도 웃길 나이이긴 하지.
우리가 딴짓하는 사이 세자는 또 어디서 안 좋은 소릴 들었는지 그새 표정이 좋질 않았다.
나도 그냥 근처에 있는 상인에게 물어봤다.
“요새 뭐 흉흉한 일이라도 있어?”
“예? 아유. 그게 참.”
말린 생선(종류는 봐도 잘 모르겠다)을 팔고 있던 아주머니는 내 말에 난처해하며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눈치였다.
아마 보아하니 불건전한 일 쪽인가 보다.
“실은 얼마 전에…….”
요약하자면 어느 관아의 기녀가 수령의 수청 드는 걸 거부해서 곤장 맞았다는 얘기였다.
‘오…… 쓰레기.’
세자의 화난 목소리도 들려왔다.
“고작 그런 짓을 하려고 수령 자리에 올랐단 말인가. 어찌 목민관(牧民官)이란 자가!”
“아이고, 선비님 목소리를 낮추십시오. 누가 들으면…….”
“듣는다 하여 그런 자가 나를 어찌하겠느냐. 이미 백성들 입에 이리 오르내린다는 것 자체가 치욕스러운 일인 것을.”
세자는 몹시 화가 난 모양이었다. 하긴 우리가 지금 관아에 머무르고 있으니 이미 얼굴을 아는 사람이 저지른 짓이란 뜻이니까.
그리고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지금 여기 혹시 사이다 구간인가?’
지금 혹시 그 말을 들은 누군가가 바로 고자질해서 세자 끌려가고, 세자랑 얼굴 마주한 수령인 기절초풍하는 뭐 그런 거?
나는 사이다를 향한 욕망으로 점점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애써 들어 올렸다.
“아기씨, 아기씨?”
“응…….”
천호는 갑자기 고개가 푹 떨어지는 옹주를 보고 당황해 흐느적거리는 아이의 몸을 고쳐 안았다.
아무래도 오늘 내내 졸려, 졸려, 하더니 결국 버티지 못하고 잠이 든 모양이었다.
아까까지 신나서 세자와 세화 의원을 관찰하고 있더니 잠에 빠져드는 건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천호 자신이 먹고 있던 엿 조각도 아까 다 녹았으니 옹주가 먹고 있던 것도 다 녹았겠지?
‘괜찮은 건가.’
천호가 옹주를 엉거주춤하게 안고 있자 주변에 있던 아낙들이 웃으며 한마디씩 얹었다.
“에구. 총각, 잘 안아야지. 떨어지겠어.”
“하하하. 네.”
아무래도 사람이 많아서 시장에서는 계속 안고 있었더니 자세가 흐트러진 모양이었다.
천호는 몸을 낮춰 옹주를 고쳐 안았다.
그사이 뒤쪽은 한층 더 소란스러워졌다.
“지금 무어라고 했소?”
“아니, 지금 감히 어디에 손을 대는 것이냐?”
“되었다. 그만두거라.”
송 내관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이어 세자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사람들이 걱정하는 목소리까지 섞여 아까보다 한층 더 소란스러워졌지만 천호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세자 저하 혼자 있는 것도 아니고.’
저분은 그야말로 신분이 깡패인 사람 아닌가.
지난번처럼 산속이라면 모를까, 이런 법과 권력이 통용되는 곳에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랍니까?”
“어떤 선비님이 사또 나리 욕을 하다가 글쎄…….”
여기저기서 뒤늦게 상황을 알게 된 사람들이 몰려들고 장사꾼들도 걱정 반 호기심 반으로 어찌 된 일인지 설명하기 시작해서, 천호도 어찌 된 일인지 파악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하필이면 흉보는 게 딱 걸려서는…… 쯧쯧.”
“그러게. 아는 사람 중에 사또 욕을 안 하는 사람도 있나? 들러붙어서 같이 뜯어먹는 누구 빼면? 그나저나 저 선비님도 참 재수가 없지.”
“…….”
천호는 조용히 사또의 명복(설마 죽지는 않겠지만)을 빌어 주며 옹주를 고쳐 안고 몸을 일으켰다.
“어이쿠.”
“앗, 죄송합니다.”
세자 일행과 마주치지 않고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리다 누군가와 부딪칠 뻔한 천호는 서둘러 사과했다. 상대도 아이를 안고 있는 천호에게 별말은 하지 않았다.
“아니 괜찮습…… 아?”
“어찌 그러십니까?”
천호는 사내가 옹주의 얼굴을 본 듯해 슬쩍 가리며 물었다. 어린아이였지만 괜히 찜찜했다.
그리고 동시에 상대의 목소리가 뜻밖에 귀에 익다고 생각을 했다.
그 뒤에 있는 사람도.
“혹시…… 얼마 전에 산에서 뵌 분들이십니까?”
“…….”
중요한 단어가 몇 가지 빠진 문장이었으나 뜻은 통했다.
얼굴에 흉터가 있는 사내가 고개를 끄덕인 후 굳은 얼굴로 물었다.
“……아기씨께서는 어찌하여 그런 상태이신 거요?”
“그냥 잠이 드신 겁니다. 근래에 복용하시는 약이 조금 독해서 그런가 부쩍 졸려 하시네요.”
“약…… 이요?”
뭔가 아는 바가 있는지 둘 다 뭔가 납득한 얼굴을 했다.
‘저 흉터 있는 사람이 성원 세자의 좌세마였다고 들은 것 같은데 옹주 자가께서 치료에 대해서도 말씀하신 건가?’
하긴 안면이 있는 상대라면 말해 주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천호에게 질문을 던진 것은 흉터가 있는 쪽이 아니라 다른 쪽이었다.
“……아기씨께서는 무탈하십니까?”
“예. 오늘도 친한 지인들을 만나 즐겁게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천호의 말에 두 사람의 얼굴에 의문이 떠오른 듯했지만 천호는 설명을 생략하고 우선 제 할 말부터 했다.
“저어, 그때 구덩이에서 사람 올려 주는 걸 도와주신 분이 맞으시지요? 그때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아, 예. 그……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성인 두 사람이 구덩이에서 올라오는 것을 도와 놓고 대단한 일이 아니라니, 대단한 겸양이었다.
‘이 사람도 어쩐지 보통 사람 같지는 않은데.’
천호는 마침 잘됐다는 생각에 두 사람을 붙잡았다.
“그때 왜 그렇게 조용히 사라지셨습니까? 사람을 구한 상을 내리겠다고 다들 찾았습니다.”
주상 전하께서, 라는 말이 빠져 있었지만 상대는 알아들은 듯했다.
“감히 뵐 자격이 없어서 그대로 몸을 감췄소. 옹주 자가, 께도 그리 말씀드리면 아실 거요.”
‘옹주 자가’라는 부분만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말한 사내를 보며 천호가 난처한 얼굴을 했다.
“역시 전(前) 좌세마…… 셨던 분이 맞으십니까? 아기씨께서 말없이 사라지셨다고 무척 서운해하셨습니다.”
“이제 오래전 일이오. 그런데 저쪽엔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요?”
“아아. 아마 재밌는 걸 볼 수 있을지도 모르니 따라가 보시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