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180)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180화(180/326)
그런 생각을 하며 잠이 오는 것을 애써 쫓으며 버티고 있는데 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옹주 자가.”
“……역시.”
고개를 돌리니 세화가 이상한 냄새가 나는 탕약을 들고 와 나를 부르고 있었다.
듣기로 산에서 구출되어 내려온 그날.
긴장이 풀려서인지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다음날 깨어난 세화는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마자 바로 약재를 다듬고 내가 먹을 약을 만들었다고 한다.
놀라운 직업 정신. 무서운 집념이었다.
나야 그 덕을 좀 보는 것 같기는 하다만.
그리고 마찬가지로 도성으로 돌아오자마자 세화는 구해 온 약재와 내의원에 준비되어 있던 약재들로 변함없이 내게 약을 만들어 올렸다.
지금 세화가 들고 온 약이 바로 그거였다.
“……냄새가 여전히 범상치 않은데.”
“송구하옵니다.”
“먹어야 한다는 거지?”
솔직히 좀 무섭지만 거부해서 될 일도 아니고. 먹으면 죽는 거 아닐까 싶은데 일단 꿀꺽꿀꺽 삼켰다.
지금까지도 안 죽었는걸. 뭐, 맛없어서 죽을 수 있다면 가능할 거 같기도 하고.
“으으…….”
“옹주 자가, 못 미더우시겠지만 정말 약입니다…….”
세화는 내 측근들의 차가운 눈을 애써 외면하며 변명했다.
아니, 다들 갑자기 왜 괴롭히고 그래…… 이미 강원도에서부터 몇 번이나 먹은 건데.
“정말요?”
“약이라니까요.”
게다가 세화는…….
‘세자빈 될지도 모르는데.’
이미 세자 주변인들은 대부분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원작 오피셜 커플이라지만 본인들이 모르는 사이에 주변에서 이런 눈으로 보고 있는 거 알면 기분 나쁘지 않을까나.
중전마마도 오늘 내 병세를 묻는다는 핑계로 세화를 불러다 은근히 쳐다보셨다는 정보가 내 귀까지 들어왔던데 이러다 세화 탈주하면 어떡함…….
원래 원작에서 세화는 반쯤은 아버지의 원수를 찾으려고 단서를 얻기 위해 접근한 셈이었는데, 지금은 뭐가 너무 많이 바뀌어서 감도 안 왔다.
내가 바꾼 거 같지만.
‘원작이 어디가 어떻게 된 거야, 대체…….’
그래도 일단 쟤네 둘이 만나서 눈빛도 주고받고 했으면 내 할 몫은 다 한 거지.
내가 연애까지 어떻게 해 줄 수는 없는 노릇!
그런 생각을 하며 약을 다 먹자 간식을 가져온 소이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작은 그릇 하나와 숟가락 하나가 있는 쟁반을 내게 내밀었다.
그리고 그릇 안에 들어 있는 것의 정체를 확인한 나는 배시시 웃었다.
“마음에 드시옵니까?”
“응. 맘에 들어.”
나는 소이가 가지고 온 간식을 받아 수저로 한입 떠서 입 안에 넣었다.
부드럽고 달콤한 맛이 입 안에서 녹아내렸다.
‘아이스크림 너무 좋아.’
내가 잘 자라지 않는다는 사실을 왕과 중전이 인지한 이후로 나한테도 우유가 지급되고 있었다.
‘많은 양은 아니지만.’
그래도 덕분에 얼음이 어는 겨울에는 가끔 이렇게 아이스크림을 해 먹고 있었다.
아이스크림은 우유만 구할 수 있다면 만드는 방법은 제법 간단한 편이고, 나 대신 우유를 저어 줄 노동력도 많고.
물론 나는 옹주이니 여름에도 어떻게든 얼음을 구해서 만들어 먹으려면 먹을 수 있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너무 얼음 낭비 같아서 지양하고 있었다.
‘어차피 우유 소비는 그리 많이 하는 편이 아니니까 기왕이면 맛있게 먹고 싶었어…….’
겨울에는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꿀을 뿌려 먹고, 그 외에는 계절에 따라 과일청을 넣어 먹기도 하며 약을 먹은 후의 입가심으로 애용하고 있었다.
생크림 만들기도 도전해 본 적 있는데 다들 내가 죄지은 궁인 괴롭히는 줄 알더라.
억울하다.
‘카스테라 한 조각이랑 생크림 한 스푼 같이 줬더니 다들 자기가 하겠다고 나서게 됐지만.’
그래도 양심적으로 날이 선선할 때나 가끔 먹고 있다.
간식으로 그만이지.
세화가 나타나기 전에도 몸을 보하는 약은 거의 매일 먹고 있었으니 약을 먹은 후의 입가심용 간식은 필수였다.
물론 지금까지 먹어온 약들 중에서도 세화가 근래에 나한테 먹이는 약이 독보적으로 맛이 없지만.
‘하아. 초콜릿 먹고 싶다.’
우유 아이스크림에, 딸기 우유 정도는 어떻게 구현해서 먹을 수 있는데 초콜릿만은……! 카카오가 없으면 만들 수 없어!
타앙!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가서 그릇을 내려놓는 소리가 제법 크게 울렸다.
덕분에 옆에 있던 소이가 조금 의아한 얼굴을 했다.
“맛이 없사옵니까?”
“아. 그런 거 아냐. 그냥 딴생각했어.”
“예.”
조금 당황한 기색의 세화와 달리 소이는 별다른 말 없이 조용히 그릇을 치웠다.
보통 왕족을 모시는 사람들은 상전의 눈치를 보기 마련인데 나에게 익숙해진 소이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오랜 세월 나를 보필하며 내가 이러는 거에 익숙해져 있는 탓이었다.
뭐, 내가 기분 안 좋다고 누구한테 패악 부리는 것도 아니고.
가끔 바닥이나 좀 때리지.
소이의 여상한 태도에 안심한 듯 세화도 약을 먹고 나면 꼭 하는 말을 다시 꺼냈다.
아무래도 약이 독해서 내가 계속 꾸벅꾸벅 조는 것이 걱정인 모양이었다.
“옹주 자가. 속은 괜찮으시옵니까. 어딘가 안 좋으시면 꼭 말씀하셔야 하옵니다.”
“응. 근데 피곤해서 그런가, 벌써 졸리긴 하네.”
“송구하오나 약을 드시고 바로 누우시면 좋지 않사옵니다.”
음. 아직 어리니 역류성 식도염은 괜찮지 않을까 싶지만 인증된 명의의 말은 따르고 볼 일이었다. 나는 눕고 싶은 몸을 간신히 일으켰다.
대화를 듣고 있던 소이가 내게 물을 건네주며 산책을 권했다.
“옹주 자가. 그럼 잠시 산책이라도 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응.”
나는 시원한 물을 품위 없이 벌컥벌컥 마시곤 고개를 끄덕였다.
참고로 내가 물을 마실 때 쓰고 있는 건 현대에서 쓰던 것과 비슷한 형태의 손잡이가 달린 물컵이었다.
나 물 마실 때 좀 편하자고 의뢰해서 만들었는데 내가 쓰는 거 보고 여기저기 퍼졌다더라.
의외로 다들 물 마실 때 편해서 좋은 거 같다고 소소하게 인기라나.
사실 이런 것도 법도에 어긋난다며 잔소리를 좀 듣지 않을까 했는데 내가 아직 몸이 자라지 않아 물 마실 때 사발이 무겁고 들기 힘들다고 조금 엄살을 부렸더니 다들 적당히 넘어갔다.
물론 내가 활을 쏘는 걸 본 적이 있는 세자는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지만.
“세화는 퇴궐 안 해?”
“옹주 자가 침수 드시는 것까지 보고 가야지요.”
“저런. 그런 너무 늦어질 텐데.”
“괜찮사옵니다.”
아직 날이 저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겨울이라 날이 짧으니 일찍 돌아가는 것이 좋았다.
‘세화도 많이 피곤할 텐데.’
게다가 한양을 생각보다 더 오래 떠나 있었으니, 지금은 시영원 쪽에 잠시 의탁했다는 병든 어머니를 빨리 만나러 가고 싶을 텐데.
‘분명 지화의 생모는 일찍 세상을 떠났을 텐데. 원작에서 세화의 어머니에 대해선 달리 언급은 없었던 것 같으니 아마 함께 도망쳤던 유모가 아닐까 싶긴 하지만.’
나는 궁녀들이 입혀 주는 대로 옷을 받아 입으며 밖으로 나갔다.
이젠 이렇게 수발 받는 것도 익숙해지긴 했지만 사람이 너무 아무것도 못 하는 몸이 되는 것 같아 이것도 좀 달갑지는 않았다. 지금은 몸이 나른해서 고맙지만.
“어라, 천호도 아직 퇴궐 안 했어?”
“아, 옹주 자가.”
밖으로 나선 나는 뜻밖에 멍하니 앉아 있는 천호를 발견했다.
아니, 이 사람들은 피곤하지도 않나.
나는 약을 안 먹고 있어도 여행 갔다 오면 늘어질 거 같은데.
“숙부도 조금 있다가 퇴궐한다고 들어서 기다렸다가 그쪽으로 가 볼까 하고 있었습니다. 옹주 자가께서는 어인 일로 나오셨습니까? 바람이 찬데 고뿔 드십니다.”
“옷을 이렇게 입고 춥기도 힘들겠다. 천호야말로 피곤할 텐데 여기서 바람 맞지 말고 빨리 가서 쉬지 그래.”
“하하하. 예.”
아. 그러고 보니 천호가 아직 열다섯이었지.
천호의 저 팔팔함의 원천은 그냥 젊음 그 자체였던가. 저 나이 때는 한겨울에 반팔 반바지로 뛰어다니는 놈들도 있는데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역시 나이가 깡패야.’
나는 불운하게도 어리고 병약한 몸이니 예외로 친다.
“천호 숙부는 어디 담당이야?”
“예? 아, 음…… 원래 좀 한직이었는데 이번에 인사이동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아아.”
이번 역모 일로 물갈이도 좀 하고 대대로 인사 교체가 있었다고 하니 천호의 숙부도 그런 모양이었다.
“그런데 옹주 자가께서는 어찌 나오셨습니까? 무척 곤해 보이시는데 쉬시지 않고요.”
“약 먹고 바로 눕는 건 좋지 않다고 해서.”
“하하. 그럼 잠드실 때까지 업어 드릴까요?”
“으음.”
잠시 고민하던 나는 금방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제정신인데 곧 졸려서 곯아떨어질 것 같았다. 움직이기도 싫고.
어차피 반쯤 졸면서 걷다가 궁녀들에게 업혀서 잠들 텐데 차라리 젊고 튼튼한 놈에게 업히는 게 낫겠지.
이미 여행 도중 천호가 탈것으로 얼마나 유능한지 확인도 했으므로 나는 거리낌 없이 천호의 등에 업혔다.
“천호는 피곤하지도 않은가 봐.”
“이 정도는 그리 힘든 것도 아니죠. 어릴 때부터 내내 산길을 다니며 장작 줍고, 나물도 캐고, 사냥하고, 종일 쉬지 않고 일했는데요.”
“어린아이가 너무 일을 많이 했는데.”
“그렇죠? 그 어린아이에게 숙부가 어찌나 일을 많이 시키는지.”
천호는 나를 업은 채 익숙하게 후원을 향해 걸었다.
뒤에는 나를 따르는 궁녀들이 줄줄이 따라오고 있었는데 천호는 신경 쓰이는지 뒤를 한번 확인하고는 속도를 조절해 느긋하게 걸었다. 강원도에는 사람을 그리 많이 데리고 가지 않았으니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천호 숙부는 천호랑 닮았어?”
“아뇨. 하-나도 안 닮았습니다. 거의 남남이죠.”
“에이, 아깝네.”
하긴 천호랑 닮았으면 소문이라도 났겠지.
“보고 싶으세요?”
“응.”
“음. 그럼 같이 가시죠, 뭐. 궁 안에 옹주 자가께서 가지 못할 곳도 거의 없고, 옹주 자가 눈도장 찍어서 손해 보는 것도 없다면서요.”
궁 안에서 궁인들 사이에 통하는 말이었다.
익숙한 얼굴한테는 몇 번 과자를 주거나 부탁을 들어주거나 했더니 어느새 저런 말이 퍼졌다고 들었다.
가이나 소이는 뻔뻔한 자들이 옹주 자가께 기대려 든다고 질색하기 때문에 실제로 나한테 과하게 청을 넣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예전이라면 모를까, 이제는 내가 나중에 확인까지 하고 있다는 걸 다들 알고 있으니까.
‘음. 편하네.’
애가 덩치가 있으니 등도 널찍하고 안정적이라 확실히 편해서 잠이 솔솔 왔다.
이번에 내 수행원이라고 옷도 좋은 거 줬더니 적당히 푹신하고…….
“천……호? 너 뭐 하고 있는 게냐?”
“아. 숙부.”
잠시 졸다가 천호를 부르는 낯선 목소리에 깬 나는 천호의 어깨 너머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손을 흔들었다.
“안녕.”
“예……?”
천호의 말대로 천호와는 닮지 않은 천호의 숙부는 천호랑 비교하면 꽤 고생한 얼굴이었다.
‘그래도 조카는 나름 곱게 키운 건가 보다.’
숙부(叔父:아버지의 동생을 이르는 말)라기보다는 백부(伯父:아버지의 형을 이르는 말)가 아닐까.
“옹주 자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