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183)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183화(183/326)
하지만 세화의 지금 신분을 생각하면 개별실 앞에 있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지는 것도 이상한 일도 아니라 세화는 씁쓸하게 수긍했다.
그리고 송 내관이 있다는 것은 여기에 세자 저하가 있다는 뜻과 같았다.
“아시는 분이십니까?”
“아…… 내 자리는 안내할 필요 없으니 가 보게.”
세화는 안내를 하던 소녀를 보내고 송 내관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세자 저하께서 여기 계신 겁니까?”
“쉿쉿, 얼마 전에 세자 저하께서 그 꽃비인지 화우인지 하는 책을 읽어보시곤 연극까지 있다는 말에 기함해서 직접 오신 거요.”
“아…….”
꽃비는 처음부터 세자를 남자 주인공으로 삼아서 쓴 소설이었다.
세자가 읽었다면 확인해 보고 싶어 하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그 소설에 대해 이제야 아신 것입니까?”
“아니. 저하께서도 전부터 소문은 들으셨다네. 다만 바빠서 제대로 보지는 않고 미뤄 두고 계셨는데 근래에 부상 때문에 몸을 움직이는 종류의 학업이 전부 미뤄지지 않았나. 시간이 나니 생각이 나셨는지 책을 읽어 보셨지.”
“아…….”
세화는 침음을 삼키며 수긍했다.
***
세자는 바쁜 사람이었고, 시간이 나면 차라리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했다.
그 대상은 주로 하나뿐인 여동생이었지만.
변명 같지만 사실 동생 외에 세자 주변의 다른 사람들은 만나고 싶지 않아도 만나게 되는 인물들뿐이었다.
하지만 근래에 수영 옹주의 수면시간이 불규칙하게 길어지면서, 옹주를 찾아가기가 난처해졌다.
아쉬움이야 있었지만 세자는 어른이었으므로, 아픈 누이동생의 잠을 방해하는 대신 새로운 소설을 읽기로 했다.
새로운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강무를 떠나기도 전에 미리 사람을 시켜 구해 놓은 책이었다.
유명한 소설이라 구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만, 워낙에 바쁘기도 하고 이런저런 소문이 무성해 그간 섣불리 손을 대지 못한 책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소설을 읽고 난 세자는 여러 가지 의미로 충격을 받았다.
‘아니, 설마 그동안 규장각 각신들 몇몇이 나를 보며 헤실헤실 웃던 게…….’
규장각뿐만이 아니라 그동안 소설 좋아하는 젊은 관원들, 아니, 연령에 상관없는 이들이 세자와 세화를 묘한 눈으로 보던 이유를, 세자는 소설을 읽고 나서야 제대로 깨달았다.
그리고 얼굴이 붉어졌다.
자신의 감정을 자각하는 것 역시 깨닫고 나면 새삼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누군가 자신의 연애 사정을 그리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는 것 자체도 민망한 일이었다.
‘꽃비와 꽃그림자를 쓴 작가는 같은 사람이라고 했지.’
장안의 화제라는 두 소설의 내용을 섞으면 묘하게, 세화와 자신이 연상되곤 했다.
이게 자의식 과잉인 것인지, 아니면 그냥 자신의 망상인 것인지 세자는 객관적인 판단을 내릴 자신이 없었다.
송 내관이나 문 상궁에게 물어봤다면 명확한 답을 해 주었겠지만, 그들 역시 자신을 보고 웃고 있었을 걸 생각하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덕분에 소설을 읽은 후부터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세화를 부를 자신이 없었다.
강원도에서 돌아오는 동안부터 지금까지 계속, 자연스럽게 세화에게 진맥을 맡겼는데, 생각해 보니 주변에서는 이게 사심이 담긴 것으로 보였을 것 아닌가!
제왕은 무치(無恥)라 하지만 자신은 아직 세자라서인지 그렇게 뻔뻔해질 수가 없었다.
‘오히려 뻔뻔하기로는 나보다 시아 그 아이가 더할지도 모르지.’
그 아이는 어쩌면 이 모든 걸 다 알고 저지른 일이 아닐까.
그런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설마 세자 자신과 세화의 관계까지 예상했을 거라 생각하는 건 비약이겠지만.
그렇게 뻔뻔한 시아가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다는 시월각에서는 세자가 이미 소설로 본 내용이 충실하게 연극으로 상연되고 있었다.
‘하…….’
그리고 당연하게도 연극을 보며 세자는 여전히 세화를 떠올렸다.
어째서일까. 여배우의 대사에서까지 세화의 말투가 떠오르는 것은.
진실을 아는 누군가가 들었다면 그분이 원작자라 그렇다고 명쾌하게 답을 내려 주었을 텐데.
아쉽게도 세자의 곁에는 그 사실을 아는 이가 없었다.
애초에 함께 따라온 이들까지 물리고 혼자 멍하니 공연을 보고 있는데 세자의 생각을 누가, 어찌 알겠는가.
그럴 상황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자꾸 생각을 한 탓인지, 이제는 정말 세화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병이 깊구나……’
홀로 그렇게 한탄하던 세자는 문득, 그 목소리가 무대가 아닌 뒤쪽에서 들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한참 만에 무대에서 눈을 뗐다.
사실 연극의 내용이야 책과 거의 유사한 데다, 처음 도착했을 때 보았던 연극 종막 부분이 다시 반복되고 있는 듯하니 잠시 보지 않는다고 해도 큰 문제는 없었다.
“무슨 일인가?”
“아, 그것이…….”
개별실의 앞에 나와 있던 송 내관의 옆에는 정말로, 방금 전까지 생각하고 있던 인물이 서 있었다.
“세화?”
“방해할 생각은 없었는데 송구합니다.”
세화 역시 조금 당황한 얼굴이었다. 세자는 뜻밖의 조우에 당황하면서도 세화를 이대로 보낼 수 없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아니, 그런 걱정은 하지 말게. 괜찮으면…… 자네도 들어오겠나?”
“그…… 래도 괜찮겠사옵니까?”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세화는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갔다.
옹주 자가와 만나지 않았다면 이런 곳에서 무대를 내려다보는 일이 생길 거라 상상도 해 보지 못했을 텐데, 그것도 이제는 자연스럽게 무대를 보는 정도가 아니라 세자 저하와 함께 있다니.
‘인생이란 정말 알 수가 없구나.’
난간으로 다가가니, 마침 화우(花雨)의 남자 주인공인 세자가 자신이 끌렸던 여인이 첫사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세화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자신이 연극의 원본인 소설을 쓴 당사자인 동시에, 소설의 내용과 유사하게 세자빈이 될 뻔한 여인이었다 보니 저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렸다.
“세화? 어찌 그러는가.”
“아무것도 아닙니다. 밖에 있다 안에 들어오니 새삼 안이 덥게 느껴지는 듯하옵니다.”
“이런 데서까지 너무 예의 차릴 것 없네. 누가 들으면 그게 더 성가시지.”
“예에.”
“지금 공연 중인 연극이 꽃그림자의 후속작인 꽃비라는 소설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지. 나도 얼마 전 뒤늦게 읽었는데. 그 내용이…… 혹시 자네도 읽었는가?”
“……예.”
읽기만 했을까.
처음부터 끝까지, 그 소설은 세화의 손에서 탄생했다.
여러 가지 의미를 담은 민망함에 세화는 시선을 회피했지만, 세자는 세자대로 또 다른 민망함에 세화의 시선을 회피하고 있었기에 둘은 서로의 상태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렇게 한동안 말없이 무대만 바라보고 있던 두 사람 중에 먼저 입을 연 것은 세자였다.
“내가 그런, 그런 이유로 혼인을 안 한 것은 아니야.”
“예? 아.”
저도 모르게 세화의 얼굴이 붉어졌다.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세화는 세자가 꽃비의 내용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꽃비의 남자 주인공은 첫사랑의 소녀를 잊지 못하고 원치 않는 여인을 세자빈을 맞는 것을 거부했다.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으나, 확실한 건 소설 속의 세자가 자신의 세자빈이 될 뻔한 소녀를 사랑했다는 것이었다.
“그렇사옵니까?”
“그래. 나에게도 분명 그 소설과 마찬가지로…… 세자빈이 될 뻔한 이는 있었지만…….”
이건 이것대로 또 그다지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세화는 불경하다는 걸 알면서도 감히 세자의 말을 끊고 몸을 일으켰다.
“그걸 왜 저에게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사옵니다. 저는 이만 물러가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자, 잠시만…….”
“법도에 어두운 몸입니다만 그저 세자 저하께서 이리 나오시는 것이 좋지 않은 것은 알겠사옵니다.”
“진정 몰라서 그리 말하는 것이냐.”
몸을 일으켜 나서려던 세화는 세자의 맘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세화 역시 근래의 묘한 분위기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소설에서 그리 말하더구나. 누군가가 자꾸 생각나고, 웃는 얼굴이 보고 싶으면 그것이 연심이라고.”
“저하.”
세자가 자신이 쓴 소설의 대사를 그대로 읊는 것을 듣고 당황한 세화가 세자를 부르는 순간이었다.
두 사람이 내려다보고 있던 무대에서 쿠당탕 소리와 함께 작은 비명 소리가 흘러나왔다.
다른 관객들도 당황한 듯 술렁거림이 퍼지고 있었다.
“?”
“……누군가 다친 것 같습니다.”
아래를 내려다본 세화는 그리 말하고 바람처럼 달려 나갔다.
“……그렇다고 이렇게 가 버린다고?”
어이가 없어진 세자는 그런 세화의 뒤를 그대로 따라나섰다.
“아니, 저, 아니, 어딜 가십니까!”
뒤에서 송 내관의 애처로운 목소리가 들렸지만 세자는 못 들은 척했다.
계단을 뛰어 내려간 세화가 향한 곳은 무대 뒤쪽.
“어찌 된 일인가?”
“아. 의원님! 이쪽으로 와 주십시오.”
배우들과 일꾼들이 세화를 알아보곤 눈을 반짝였다. 자연스럽게 부상자들 앞으로 인도된 세화는 쓰러져 있는 주연 배우 두 사람을 보고 얼른 상태를 확인했다.
“둘 다 다친 것인가?”
“의원님.”
세화는 사람들에게 치료에 필요한 물건들을 가져오게 시키고 뒷수습을 부탁했다.
“어찌 된 건가.”
“예? 아, 가끔 위험한 열성 관객이 배우들에게 달려들 때가 있어서 임시로 무대를 옆으로 더 넓히고 앞쪽은 울타리까지 해 놓았는데 그게 어설퍼서 무너진 것 같습니다.”
아까도 무대 앞으로 누군가가 울타리를 넘어 뛰쳐나오던데 그 때문에 놀란 배우들이 발을 헛디딤과 동시에 가설치해 놓은 부분의 무대 일부가 무너지며, 퇴장하고 있던 주연 배우들이 부상을 입었다는 뜻이었다.
“윽……!”
“안 되겠는데. 이거 도저히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야.”
세화의 말에 두 주연 배우가 울상을 지었다.
“그럴 수가. 이제 종막인데요……!”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할 텐데 어찌 연기를 하려고. 특히 뼈나 관절을 다친 건 조심하지 않으면 만성이 될지도 모르네. 오늘 종막 올라가고 앞으로 다른 일은 안 할 건가?”
“그건 그렇습니다만…….”
세화는 엄격하게 말하면서도 내심 혀를 찼다.
말 안 듣는 다리 다친 환자라니. 세자 하나만으로도 벅찼다.
관객들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이번 연극은 여기서 막을 내려야 할 듯했다.
그런 세화에게, 뜻밖에도 배우들은 반박했다.
“그래도 연극을 이대로 끝낼 수는 없습니다.”
“맞아요. 높으신 분들은 얼마든지 다시 와서 보실 수 있겠지만, 1층에 있는 관객들 중에는 겨우겨우 돈을 모아서 큰맘 먹고 연극을 보러 오는 사람도 있다고요! 멀리서 보러 온 사람들은 다음 연극을 보기 어렵고요. 어떻게든 안 될까요?”
“…….”
그들의 말에 세화도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이야 어쨌든 세화도 서민들의 생활을 빤히 알았다. 부유한 이들이 예전보다 많아졌을지 몰라도, 이런 호화로운 곳에 들어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이들이 세상에는 더 많았다.
그들에게 오늘은 운이 없었으니 다음에 오라고, 어떻게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어쨌든 무대는 재정비해야 하니까. 그사이 대타로 뛰어 줄 사람을 찾을 수 없을까?”
“저희 인력이 그렇게 많지도 않고 지금 연말이라 들떠서 다들 다른 무대 준비하느라 여기 없습니다.”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고 어쩌라는 건가.
“맞다, 세화 의원님!”
“??”
“의, 의원님은 대사도 다 아시잖아요! 마지막 부분은 연기가 많이 필요한 부분은 아니니까 잠깐만! 무대에 서주시면 안 될까요??”
그리 말하며 주연인 남자 배우가 세화의 손을 애처롭게 붙잡았다.
“아니, 그건 좀…….”
“잠시만.”
갑자기 끼어든 손이 세화의 손을 붙잡고 있는 남자 배우의 손을 밀어냈다.
세화는 갑자기 나타난 손의 주인을 깨닫고 당황해 얼굴을 굳혔다.
그 손의 주인은 당연히, 세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