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187)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187화(187/326)
“그냥. 그걸 보는데 저런 사람이 있구나, 했거든요. 키는 내 절반도 안 되는데.”
찰싹.
“아야야. 죄송합니다.”
쓸데없는 부연 설명에 내 손바닥이 천호의 허벅지를 강타했으나 천호는 말로는 아프다면서도 하하 웃기만 했다.
“저도 배가 고파서 아무거나 집어 먹고, 아파서 뒹굴던 어린 시절이 있으니까요.”
“흐음. 무쇠도 씹어 먹을 거 같이 생겼는데.”
“아하하. 뭐, 아무리 튼튼해 보여도 아이들은 아플 때가 있다고요. 물론 먹으면 안 된다는 말도 안 듣고 아무거나 주워 먹은 제 잘못도 있긴 하지만.”
“그렇게 먹었으니 이렇게 컸겠지.”
대체 뭘 먹고 이렇게 큰 건지 솔직히 좀 궁금하긴 함.
“부정할 수 없네요. 그래서 옹주 자가 같은 분이 있어서 좋다고 생각했었어요. 아, 물론 옹주 자가 납치된 현장에 있던 거는 우연이고요. 오해하지 마세요.”
“음. 그런 일도 있었지.”
그렇게 오래된 일도 아닌데 벌써 오래전 일 같다.
어라? 왜 천호를 만난 후에 유독 사건·사고가 많이 일어난 것 같지?
“그러고 보니 천호랑 만나고 별일이 다 있었구나. 납치도 당했었고, 기방에 들어갔다 천호한테 납치당할 뻔한 적도 있고…….”
“아니, 잠깐만요. 제가 언제요. 기억을 왜곡하지 말아 주세요.”
적당히 옛날 얘기를 하며 농담을 주고받는데 뜬금없이 천호가 말했다.
“전에 매향 누님이 세상에 옹주 자가 같은 분만 있으면 좋겠다고 했잖아요?”
“응. 그랬지.”
강원도에 있을 때 했던 얘기였지, 분명.
그런데 세화는 그렇다 치고 매향이랑은 또 언제부터 누님 동생 하는 사이가 된 건지.
“세상에 옹주 자가 같은 사람만 있으면 분명 참 평화로울 테지만…….”
“후후. 그래?”
“예. 하지만 옹주 자가 같은 사람은 분명 옹주 자가밖에 없을 거예요.”
“??”
영문을 모르겠지만, 천호는 그렇게 말하며 뭔가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자, 그럼 슬슬 가시죠. 다들 옹주 자가를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음. 가야지.”
습관적으로 천호에게 손을 내밀자 천호도 습관적으로 나를 안아 들었다.
아차 싶었지만 뭐 아무래도 상관없나 싶어서 그냥 편하게 몸을 맡겼다.
‘이거 습관 된 거 같은데 큰일이네.’
“아직 졸리지는 않으세요?”
“으음, 조금.”
이것저것 속을 털어놔서일까. 어쩐지 조금, 답답한 속이 편해진 것 같았다.
***
연말연시인데 궁 안 분위기는 아무래도 좀 어수선했다.
이런저런 난리 끝에 결국 영천군이 유배를 갔기 때문이었다.
아마 내가 세화의 치료로 차도를 보이고 있다는 소식이라도 없었다면 더 살얼음판 같았으리라.
‘설마 그렇게까지 나를 싫어할 줄은 몰랐는데. 싫어해도 내가 싫어하는 게 맞지 않나?’
영천군은 결국 이번 사건의 배후라는 혐의를 완전히 벗을 수 없었다.
평소 영천군과 가깝게 지내던 이들은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발뺌을 했고, 화가 난 영천군은 자폭해서 아무나 끌고 들어가려 했기에 조사 시간만 길어졌다.
결국 영천군이 토설한 건 자신이 한 일은 옹주의 약초를 찾는 걸 방해하라고 사주했다는 사실뿐이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큰 죄였지만 세자를 노린 대역죄는 부정했고, 증좌도 부족했다.
덕분에 참형(斬刑)은 면한 셈이었다.
하지만 영천군의 태도가 도리어 여러 사람의 분노를 샀다.
특히 이리저리 아는 사람을 다 엮어 버리려다 아름다운 폭로전이 이어졌기 때문인데…….
덕분에 종친들이나 종친과 교분이 있던 이들이 다들 떨고 있다고 들었다.
‘의외로 나와는 별로 상관없는 이야기지.’
눈치를 보며 나한테 서신을 보내기도 하는데 유감이지만 내가 아는 바가 없었다.
‘내가 정치에 너무 깊이 관여하는 것은 좋지 않아서 거리를 두고 있다 보니.’
다행히 몸이 안 좋다는 유명한 핑계가 있어서 그럭저럭 쳐내고 있었다.
사실 거짓말도 아니었다. 잠이 쏟아져서 자주 늘어져 있는 건 팩트고.
안 그래도 약 때문에 병든 병아리처럼 꾸벅꾸벅 조느라 일할 시간도 부족한데 남의 일까지 살펴 줄 여유가 없었다.
특히 요즘에는 나례희와, 내가 데려온 기녀들 때문에 바빴으니까.
게다가 이번 기회에 또 연극을 상연할 생각이거든.
‘같은 걸 너무 많이 반복하면 질릴 테니까 그동안 다른 연극도 많이 했지.’
그래도 넣을 건 넣을 거지만…….
장악원(掌樂院)에서 여악(女樂)들을 소집했고, 세자가 떠넘기기도 해서 그냥 내가 떠맡……을 예정이었으나 아무래도 몸 상태가 안정적이지 않아서 일단은 내 수족들을 통해 관리되고 있었다.
좀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싶었는데 나례희가 가깝다 보니 그럴 틈이 없었다.
덕분에 시영원 출신 아이들 중에 가무에 관심이 있던 애들도 은근슬쩍 뛰어들고 있다고.
오랜만에 시영원에 찾아왔다가 그 얘길 들은 나는 복잡한 심경이었다.
‘딱히 그런 쪽으로 진출시킬 생각은 없었는데.’
특히 남녀를 가리지 않고 관심 있던 애들이 뛰어들고 있다고 들었다.
“혹시 아영이도 있어?”
“아영이는 그냥 말만 그렇게 하지 보는 걸 더 좋아해요.”
“흐음.”
뭐 많은 걸 시키려는 게 아니라 관리만 하는 거니까 맡겨 놔도 괜찮겠지.
게다가 시영원 애들이 끼어 있다면 부당한 일이 일어났을 때 편안하게 나에게 신고할 테고.
나례희 준비에는 그다지 동원되지 않으니 이제 마음 편하게 개인 사업에나 집중할까.
‘아니, 사실 이게 개인 사업인지도 잘……?’
지방에 분원(分院)을 만드는데 시영원과 시월각의 기능을 함께할 수 있도록 설계를 하다 보니 아예 식당의 기능까지 넣으면 어떨까 하고 얘기가 커져서 일단 부지부터 확보해 놓고 공사 중이었다.
이러면 시영원 본원에 있는 애들이나 경험 있는 사람들이 상당수 파견 나가게 될 것 같아서 그것도 논의가 좀 필요했고.
다만 일이 많아질수록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냥 다 알아서 하면 좋겠다…….’
이제 다들 많이 컸는데 알아서 하면 안 될까.
어차피 애들에 대해서는 오히려 민 상궁이 더 잘 알 텐데.
내가 아무리 자주 들락거려도 직접 사람들을 키우고 부리는 쪽은 아니니까.
기본적으로 인사 관련은 시영원에서 오랫동안 일해 온 상궁 나인들이나 전직 체탐인들에게 맡기고 있었고, 다들 아는 사람이라 내부 천거도 빨랐다.
‘지나치게 폐쇄적인 기분도 들지만 어릴 적부터 허드렛일부터 해 온 아이들이라 일을 따로 가르치지 않아서 편하다 보니.’
그렇게 쉽게 쉽게 정하는데도 결국 최종 결정권자인 내가 확인해야 할 일들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젠 좀 체계가 잡히고 있는 것 같은데.
뒷배가 좋아서 비교적 순탄해 보이지만 8년이란 세월 동안 이런저런 부침도 많고 시행착오도 많았으니 시간이 걸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인재(人材) 문제도 있고.’
억울해하는 아이들도 있을지 모르지만 지금 지방에 파견 나가 있는 아이들이 대체로 분원을 맡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원하지 않는데 강요하는 건 취향이 아니지만 일을 빠르게 진행하자니 적임자가 없었다.
물론 거기서 인재를 키우는 데 성공하면 나중에는 그쪽 토박이들이 관리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될 때까지 시간은 또 얼마나 필요할지.
‘아무리 똑똑해도 너무 어리면 만만하게 본단 말이야.’
물론 시영원에 나이가 많은 사람이 아예 없는 건 아닌데, 그런 사람들은 밖에 나서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많았다.
과거를 밝히기 싫어하는 사람들이나 노비 출신들도 있고.
그런 사람들까지 안고 가는 건 다소 불안 요소가 있긴 하지만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한은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이들 정서 교육에 안 좋을 것 같은 사람들은 아예 모아서 따로 정신 교육을 시키기도 하고 이래저래 신경 쓸 일이 많아 조금 성가셨다.
그래도 똑똑한 애들이 일당백은 못 해도 일당십은 해 주고 있으니까 이제 좀 큰일을 맡겨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재수 없으면 뒤통수 맞을 수도 있고, 타 지역 놈이 와서 설친다는 말을 들을 수도 있겠지만 분원 관련해서는 슬슬 알아서 해 보도록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조언자 정도는 붙여야겠지만.
사실 나이도 문제지만 시영원 아이들 중에는 여자애들이 많다는 것도 문제였다.
아무래도 여자들이 관리직으로 가면 반항하는 놈들이 많았으니까.
다행이라고 하면 이상하지만 여기는 엄격한 신분제 사회라 옹주가 보낸 사람이라고 하면 다들 꼼짝 못 하는 분위기라 그나마 편했다.
‘역시 뒷배가 있으니 괜찮네…….’
내가 그 뒷배지만.
그러고 만약 사기 치는 놈이 있으면 그건 그것대로 뭐…….
옹주 돈을 사기 치려고 하는 간 큰 놈을 한번 잡아 보는 것도 나름 보람찰 거 같지.
이러나저러나 점점 시영원 아이들의 자립률이 올라가는 건 나쁘지 않은데 시킬 일도 점점 늘어나네.
“지방에 있는 시영원 아이들한테 종두법 접종하는 것도 그럭저럭 진행 중이고…….”
“지역에 따라서는 아직 연락이 오지 않은 곳도 있지만 접종했다는 연락이 차례대로 오고 있습니다.”
강원도는 내가 동행했으니 노비들까지 대대적으로 할 수 있었지만 다른 지역은 아무래도 어려웠다.
그래서 일단 순차적으로 시영원 애들이랑, 접종받고 싶다는 지원자들 대상으로만 진행하고 있었다.
시영원 아이들…… 선생들의 영향력이 괜찮은지 의외로 순순히 접종받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들었다.
아무래도 원래 신뢰도가 높았던 이들인데 본인들이 먼저 솔선수범해서 접종받는 모습을 보여 주니 더 믿음이 가는 모양이었다.
‘약간…… 사이비 종교가 침투하기 좋아 보여서 좀 찜찜한데.’
지금으로서는 관계없는 일이지만.
내가 뭔가 걱정하는 듯 보였는지 민 상궁이 나를 안심시켰다.
“지아를 비롯해서 지방에서 돌아온 선생들이 종두법을 아는 아이들을 데리고 갔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음. 그래. 똑똑한 아이들이니 괜찮겠지. 그런데 지아도 그렇고 선생들한테 너무 여러 가지 일을 시키는 것 같은데.”
“똑똑한 애들은 어쩔 수가 없는걸요. 게다가 똑똑한 여자아이들을 어디 취직시키는 것보다 시영원 관련 사업에서 일하는 편이 훨씬 낫고요.”
“비율로 따지면 학력으로는 여자아이들이 더 뛰어난데 말이지.”
시영원에 여성 고급 인력이 많은 이유는 원래 여자들이 많이 들어와서도 있지만 남자애들보다 일거리가 적다는 문제도 있었다.
특히 무예에 소질이 있는 아이들은 소질을 발휘할 곳이 애매한 경우가 많았다.
그나마 여기저기서 호위로 쓰고 있긴 하지만. 조금 재능이 아까운 경우도 있었다.
“흐음. 나중에 내 호위로 발탁해 볼까.”
“옹주 자가의 호위로 말씀이십니까.”
“응. 보여 주기로도 나쁘지 않을 것 같고. 아무래도 남자들보다는 여자들이 편하지.”
게다가 어쩌면 내가 여성 호위들을 데리고 다니는 것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따라 하게 될 가능성도 있었다.
‘본의 아니게 늘 유행을 선도하고 있으니.’
원래 왕실은 유행을 선도하는 법이다.
격이 다른 위엄을 강조하면 화려해지고, 귀족들을 그런 왕실을 따라 하고 싶어 하고, 서민들은 그런 귀족들을 또 따라 하고 싶어 하니까.
‘사실 중궁전이나 후궁전에 궁녀들만 있을 게 아니라 여성 호위병을 배치하는 게 낫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해 봤지만.’
내가 말을 잘못 꺼내면 월권이 될 수도 있는 문제라 아직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체탐인에 지원하는 아이들도 있다며.”
“예. 아무래도 영향을 받는 모양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자질을 키워 온 데다 훈련해 줄 사람이 바로 곁에 있으니까요.”
“너무 위험한 일은 시키고 싶지 않지만…… 본인들이 원한다면 막기도 그렇네.”
“위험한 만큼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일이니까요.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선생들이 잘 가르칠 것입니다.”
“음.”
한숨과 함께 서류들을 최종 확인하고 방을 나서는데, 아까부터 밖에서 들려오던 음악 소리와 소음의 정체가 눈에 들어왔다.
“…….”
“조금 소란스럽지요?”
“아니, 뭐…… 됐어.”
시영원 마당에서는 한 무리의 여자아이들과 남자아이들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근데 그 음악이…… 매향이를 통해 전파된 현대 가요풍의 노래라…….
게다가 어쩌다 보니 애들이 군무를 추고 있어서 꼭…….
‘아이돌 그룹 같네…….’
딱히 내가 의도한 건 아니다.